소설리스트

제 18 장 흑회지비(黑會之秘) (19/32)

제 18 장 흑회지비(黑會之秘) 

천령(天領)은 평소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예외였다. 

 그의 눈앞에서 보료에 몸을 기대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사람! 존령(尊領)의  앞에

서는 흑회의 누구라도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

았던 회주를 제외하고는.

비록 몸은 호리호리하나 그 무서움을  경험한 자는 누구나 두려움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자! 존령이 낮게 웃었다.

"후후, 어쩔 수 없이 지령만을 남겨 두고 몸을 피했다고?"

천령이 머리를 더욱 숙였다.

"속하가 나섰더라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만일 제가 나선다면 

현천자 등이 나설 명분이 생기게 되니……"

존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생각에 잠긴  것인지 허실(虛實)을 알기가 어려웠다. "좋

다. 하지만 신주낭객의 일은 어찌 된 것이냐?"

"그건…… 죄송합니다. 진소백이란  놈의 능력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 설마 

현령(玄領)과 황령(荒領)이 지키는데도 

사람을 빼갈 자가 있으리라고는……"

존령의 웃음 소리가 커졌다.

천령의 등에서는 땀이 흘렀다. 그는 존령이 기분 나쁠수록 더욱 크게 웃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네 변명은 나날이 늘기만 하는구나! 그만 물러가라."

천령은 암중에 땀을 닦으며 물러났다.

그의 뒤로 존령의 웃음이 다시 울렸다.

존령은 정말 기분이 나빠 보였다.

 * * * 

화선은 땀을 흘렸다. 더불어 피도. 

 그녀의 모공에서는 땀이 솟았고, 입에서는 비밀(秘密)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이제야 반항을 포기했다. 

 엽혼은 결코 순탄한 인생을 살아 오지 않았다. 

 그는 필요하면 얼마든지 잔인(殘忍)해질 수 있는  인생을 살았 화선은 엽혼의 눈

에서 그의 인생 궤적을 읽었던 것이다.

두 시진의 헛된 반항(反抗)이 그녀에게 남긴 것은  찢어진 몸과 공포로 굳어진 정

신뿐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대항하지 말았어야 했다. 

 "회주 밑의 육령 중에서 존령이 모든 일을  대신 해요. 그의 권위는 회주와 맞먹

는 것이라, 아무도 대항을 못 해요."

존령 아래 천지현황(天地玄荒)의 사령이 있었고, 화선은  화령(花領)으로서, 특별한 

위치였다. 

 살인 중개업을 통해 돈을 모으고 강호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화선의 임무였다.

천령은 대외적 활동을 하며 현령과 황령을 통솔했다.

지령은 비응방에 숨어들어 금사진을 해치고 방주가 되려 했다.

고숭무! 

그가 바로 지령이었다.

존령의 정체는 화령도 몰랐다. 다만 매우 냉혹하고 치밀하다는 것 외에는.

존령의 정체조차 알지 못하는 화선이 회주의 정체를 알 리 없었다. 엽혼은 마지막 

질문을 했다.

"천령이 누군지는 아는가?"

화선의 대답은 충격이었다.

"그는 적일수! 바로 공동( )의 장문인이에요."

* * * 

천연의 석회 동굴! 

수만 년간 물과 돌이 서로 작용하여 만들어  낸 자연의 신비(神秘)가 곳곳에 숨쉬

며 살아 있었다.

거장(巨匠)의 조각인 양 우아하게 솟아오른 석순(石筍)과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鐘

乳石)은 마냥 아름다웠다. 

 그러나, 

 "우와`─`악!"

짐승의 울부짖음인가? 

 이따금씩 들려 오는 모골이 송연한 외침은! 

동굴 속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호리호리한 몸에 복면 위로 쓰여진 존(尊) 자가 뚜렷했다.

존령! 

 그가 나타난 것이다.

더불어 세 개의 그림자가 종유석 뒤에서 유령처럼 나타났다.

자세히 보더라도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신법들이었다.

나타난 침입자를 응징하려던 그들은 존령임을 알자 급히 무릎을 꿇었다.

또다시 들려 오는, 동굴을 울리는 괴음! 

존령이 차게 말했다.

"아무래도 음식을 너무 많이 주는 것 같구나.  오 년이 지난 지금도 저런 힘이 남

아 있다니."

그림자들이 급히 고개를 땅에 파묻었다.

"사흘에 한 번씩 물 한 모금과 두부 반 쪽, 사과 반 개를 주고 있습니다."

그 정도의 양이라면 일반인은 살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런 양을 먹고도 오 년을 견뎠다는 괴인은 도대체……  존령이 고개를 끄

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종유 동굴 안, 천연적으로 형성된 곳을 긴 쇠창살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창살 안에는 쇠사슬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끝에는 도저히 사람이라고 믿기 힘

든 몰골의 괴인이 묶여 있었다.

괴인의 입에서 다시 짐승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괴음이 나올 때마다 온몸을 덮은 털이 펄럭였는데, 그 털 위로 벌레들이 기어갔다. 

존령은 쇠창살 앞에 도착하여 괴인을 보았다.

종유석 동굴 바닥엔 항상 있는 지하수가 흥건했는데, 그 물은 괴인의 무릎까지 차 

올라 있었다.

거기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 

분명 괴인의 몸이 썩고 있는 것이리라.

눈짓으로 그림자들을 물러가게 한 존령(尊領)이 괴인을 보며 말했다.

"당신의 두 다리는 이미 쓸 수 없게 되었군요! 후, 어쩌면 좋아요?"

가는 음성에다 한숨! 

 설마 존령이 여자였는가? 

존령의 음성에는 염려(念慮)의 빛이 가득해, 괴인의 처지를 진심(眞心)으로 안타까

워하는 듯했다.

괴인이 존령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 바람에 그를 덮고 있는 털이 흔들렸다. 아니, 얼굴 주위에  있는 털들이므로 수

염이 흔들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고낭(孤娘)! 당신은 또 나를 걱정해 주는군!"

존령이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

"저는 항상 당신을 걱정해요. 그리고 당신이  어서 그곳에서 나와 저와 함께 즐겁

게 살 날만을 기다려요."

괴인의 봉두난발(蓬頭亂髮)한 수염이  조금 흔들렸다. 분노(忿怒)인가?  아니면 웃

음? 

"내가 나가려면 옥패(玉牌)를 내놓아야겠지."

존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당신이 옥패만 내놓는다면, 우리는 다시 전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

예요."

괴인이 툴툴 웃었다.

"언제처럼 말인가? 어쨌거나 이곳은 지낼 만하니 난 좀더 머무르겠네."

존령의 눈이 표독해졌지만 말투만은 여전히 달콤했다.

"후, 당신의 뜻이 정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천첩으로서는 당신이 조금이라

도 더 편안해질 수 있게 해드려야죠."

존령은 품에서 하나의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열자 어른 가운데 손가락만한 길이의 빨간 뱀이 머리를 내밀지 않는가? 

"당신 혼자서 심심하실 것이니, 같이 놀 친구를 제가 하나 구했어요."

온몸이 빨간 홍사(紅蛇)는 작지만 지독한 독사였다.

"홍사의 재롱이라면 그다지 심심하지 않을 거예요."

말과 함께 존령은 홍사를 바닥의 물에 풀었다.

바닥의 지하수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뱀은 냉혈 동물이니 주위가 차면 동작이 느려진다. 따뜻한 곳을 찾아가려 할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 차가운 지하수에 접한 홍사가 찾을 따뜻한 곳이라면, 지금 여

기서는 괴인의 몸밖에 없었다.

괴인의 전신이 푸들거렸다. 홍사가 그의 다리에  난 상처를 헤집으며 들어왔던 것

이다.

그러나 입에서는 한마디의 신음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

는 최대의 저항이었다.

그가 비명(悲鳴)을 지르면 눈앞의  이 악녀(惡女)는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존령이 

명랑하게 말했다.

"당신은 아무리 좋아도 소리를 내지 않는군요. 어쨌든 좋아요. 전 당신이 좋아하는 

모습만 봐도 기쁘답니다. 다시 올 때까지 부디 편안하세요."

그녀의 행동은 마치 현숙한 아내가 남편을 대하는 태도 같았.

그러나 그 마음이 사갈(蛇 )보다 무서움을 누가 알까? 이윽고 그녀가 눈앞에서 사

라지자 참고 참았던 비명이 온 동굴을 가득 채웠다.

"우아`─`악!"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고통에 찬 비명! 

괴인은 벌써 오 년이나 지옥(地獄)에서 살고 있었다.

존령은 동굴을 완전히 나가기 직전에 그의 비명을 들었다.

복면 속에 숨겨진 그녀의 입가로 황홀한 미소가 흘렀다.

"비명이 저리 큰 것을 보니 너희들이  준 음식이 너무 과했던 것이로구나. 앞으로

는 오 일에 한 번으로 줄이도록 해라."

세 명의 그림자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존명!"

존령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녀는 기분이 나쁠 때도 웃었지만 기분이 좋을 때도 웃었다.

지금 그녀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밤이 깊었다. 

 하지만 비응방의 그 누구도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후의 취임식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냉설이 했던 말의 여파

는 컸다.

냉설은 비응방 내부에 분면음마(扮面淫魔)의 셋째 제자가  숨어들었음만을 말하고, 

그의 정체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하지 못했다.

분면음마의 역용술은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었고,  냉설도 셋째 제자의 정체는 아

직 몰랐다.

의문만을 남긴 채 그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쨌든 장례식과 취임식이 이어졌던 하루는 끝났다.

길고 힘든 하루가. 

 군웅들은 대부분 돌아갔지만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섭수진과 진소백도 그 중에 속했다.

나머지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 모두  심화절의 거처에, 다른 비응방의 인물

들과 같이 모여 있었다.

섭수진이 진소백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들은 지금 무얼 토론하는 거죠? 또, 진 공자를 뺀 이유는 무엇이에요?"

진소백이 쓰게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아미옥녀가 그 정도를 몰라서 물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소."

섭수진도 쓰게 웃었다.

"후, 아무리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고자 함이라곤 하나, 일을  부탁할 때와 일이 해

결된 지금의 태도가 이렇게 다르다니……"

비응방의 반도가 고숭무로 밝혀진 지금에  와서 진소백과 섭수진이 할  일은 없었

다.

이미 수사를 위해 비응방의 많은 비밀을 알아 버린 그들이기에  심화절 등이 껄끄

러워함은 이해가 되었다.

"지금 나누는 대화는 광산의 이권과 비응방의 앞으로의 행동에 관한 것일 테니 우

리가 끼여들 자리는 없겠지요."

진소백의 말이 옳았다.

금청청과 매일도마저 회의에 끼지 않고 화산으로 돌아간 마당에, 그들이 비응방의 

일에 더 이상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떠나는 금청청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그녀의 입장은 특이했다. 비응방의 소방주라는 신분에서, 심화절의  취임과 더불어 

비응방과는 아무 관계 없는 외인(外人)이 되어 버렸다.

심화절이 선(先) 방주의 혈육에 대한 예우를 약속했지만 그녀는 모두 거절하고 매

일도와 같이 화산으로 돌아갔다.

금청청을 생각하며 감회에 젖은 섭수진을 진소백이 불렀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오?"

"아, 잠시 금청청에 대해……"

진소백이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다른 생각은 접어 두고 별이나 봅시다. 하늘에 별이 참 많소."

섭수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말대로 별이 많았다.

모두 조금씩 다른 위치에서 다른 빛으로 빛나는 별의 모습은 인간사와 닮았다.

불어오는 밤바람이 이제 조금씩 냉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아직 봄은 멀었지만, 그녀는 따뜻하다고 느꼈다.

 * * * 

진소백 등이 서 있는 곳의 앞. 

 심화절의 거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전혀 온기를 느끼지 못했다. 분위기는 차디

찼다.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오?"

귀왕곡(鬼王谷)의 갈현(葛鉉)이 대로하여 외쳤다.

장내에 있는 비(非) 비응방 세력은 모두 일곱. 

 그는 은연중에 그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갈현의 분노는 당연했다. 지금 그들은 완전무장한 비응방의 무사들로 완전히 둘러

싸였기 때문.

심화절이 정중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대접하여 대단히 송구하오. 그러나  본 비응방의 고숭무가 반도로서 흑회

(黑會)란 세력과 연관이 있음이 

드러난 이상, 광산의 권리 문제를 다시 여러분과 상의해야 함은 당연지사요."

갈현이 냉소했다.

"비응방의 배당을 높이기 위해 칼로써 위협하는 것이오?"

심화절이 갈현을 노려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결코! 다만 흑회의 일당이 끼여  있지 않은지를 확인하고자 함이니,  협조해 주시

오."

심화절이 눈짓을 하자 무사 둘이 죄수복을 입은 자를 하나 끌고 왔다.

온몸이 피투성이라 그가 얼마나 큰 고문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얼굴의 윤곽조

차 알아보기 힘든 자! 

"여러분 중에는 이 사람을 잘 아는 분도 있을 거요."

심화절의 눈이 군웅들의 얼굴을 세세히 살피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희 방의 순찰당의 부당주로 있었던 신안추종 인소(引

蔬)요!"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쳐 갔다. 얼마나 심한 고문을 당했기에 불과 하루 만에 

저렇게 변한단 말인가? 

"그는 당신들 중 누가 흑회의 인물인가를  알고 있으니, 곧 여러분 주위의 포위는 

풀릴 것이오."

심화절의 말에 갑자기 갈현(葛鉉)이 외쳤다. 

 "우리를 흑회의 인물로 몰아붙이고 당신들이 모든 이권을 가지려는 것인가?"

그의 말에 일곱 방파의 인물들이 동요했다. 

 그들 중 머리가 가장 좋다는 흑수동주 도곡(陶曲)이 나서며 말했다.

"만일 우리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우리  일곱은 합력(合力)하여 비응방에 대항할 

수밖에 없소."

그의 조리있는 말에 심화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자!"

그가 손짓하자 인소 뒤에 섰던 무사가 인소의 등을 칼집으로 찔렀다.

그러자 인소가 마치 무언가에 놀란  아이처럼 몸을 세우더니 막힘없이  입을 여는 

것이 아닌가? "신안추종 인소.  흑회의 지령(地領) 산하의  지령(地令) 일호(一號)! 

임무는……"

마치 책을 읽듯 기계적으로 말하는 인소를 보며 모두는 심화절에게 두려움을 느꼈

다. 사람을 저렇게 만든다는 것은 보통 능력이 아니었다.

심화절이 나직이 말했다.

"여기에서 흑회의 인물이 누군지 말하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소는 몸을 떨더니 정신없이 내뱉기 시작했다.

"지령 이호는…… 지령 사호는……"

지적받은 자는 모두 네 명. 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흑회란 놈들과 관련이 있다니!"

외치는 인물들의 면면은, 믿기 힘들게도 도곡의 인물들이었다.

심화절이 그를 쳐다보았다.

"가장 의심이 갔던 사람은  당신과 귀왕곡(鬼王谷)의 갈 곡주였소.  결정적인 실수

는, 고숭무를 감시하고 왔던 인소가 고숭무의  처소에 갈 곡주가 나타났다고 말했

던 

것이오. 그는 오래 전부터 의심받던 인물이니  당신이 흑회의 인물임을 내가 확신

했던 것은 그때부터였소."

심화절의 어조가 강해지며 선언하듯 말했다.

그랬다. 인소가 갈현이 고숭무와 관계가 있다고  말한 것은 오히려 갈현의 혐의를 

벗겨 주었다.

만일 정말 갈현이 흑회에 속한다면 인소가 말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흑회! 너희

들의 세력을 나는 진작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도곡이 마침내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정말 대단하군! 그러나 우리가 쉽게 잡힐 것 같으냐?"

그의 손짓에 따라 흑회의 인물로 지명받은  세 명이 모여들어 네 명이  서로 등을 

맞대고 섰다. 

 도곡이 자신의 옷을 들어 품에서 둥그런 물건 몇 개를 꺼내 들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아무도 움직이지 마라."

사람들은 모두 신음했다. 그가 손에 든 물건을 알아본 사람들 굉천뢰(轟天雷)! 

화문(火門)의 무가지보(無價之寶)라는 굉천뢰였다. 하나로 능히 방원 십 장 이상을 

폐허(廢墟)로 만들 수 있다는 가공할 화기(火器)! 하지만 심화절은 태연했다.  그의 

의연함을 깰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을 듯했다.

"자네는 이 심(深) 모(某)를 너무 무시하는군."

그의 담담한 말에 도곡은 은근히 두려웠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당당하게 말했다. "

흥! 아무리 격장해 봤자 넘어가지 않는다.  나 역시 마음 씀씀이에서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음을 알아 두어라."

도곡은 손의 굉천뢰을 휘둘렀다.

"어서 길을 비켜라. 막는다면 모두 죽을 것이다."

무사들이 슬금슬금 비켜나며 도곡이 나갈 길을 만들었다.

도곡은 급히 동료들과 도망치려 했다.

그때, 심화절이 갑자기 말했다.

"잠깐! 그곳으로 간다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

도곡의 눈에 의아함이 번졌다.

"무슨 소리냐.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한다면 굉천뢰를 폭파시켜 버릴 것이다."

심화절이 깊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굉천뢰는 무척 위험한 것이라, 진기를 가하고 십 초(秒)가  지나야 터진다는 사실

을 아느냐?"

도곡이 냉소(冷笑)했다.

"흥, 너희 모두가 덤벼도 능히 십 초 정도는 버틸 수 있다. 이래봬도 내 일신은 충

분히……"

도곡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의 얼굴은 경악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빳빳한 손! 

 귀왕곡주 갈현의 귀왕수(鬼王手)가 그의 인후혈에  박혔던 것이 "어떻게 이런 일

이……!"

도곡이 말을 잇지 못할 때, 갈현이 차갑게 말했다.

"너에 대해서는 이미 어제 심 방주를  통해 들었다. 나는 흑도의 인물이지만 신의

(信義)를 배신하는 자는 용서하지 못한다."

갈현의 말과 더불어 도곡 주위에 있던 세 명의 흑회의 인물들의 목도 땅에 떨어졌

다.

그들은 굉천뢰를 써보지도 못했다. 

 강호에서 힘과 계략(計略)의 차이는 이렇게 무서웠다.

짜짝! 

박수는 심화절이 쳤다. 

 "당신들이 보여 준 의리와 신의는 항상  기억될 것이오. 약속대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지분은 모두 당신들 몫이오."

갈현 등의 눈에 기쁨이 스쳤다. 

 그 거대한 광산(鑛山)의 지분이 두 배로 늘어난다면 엄청난 재산이었으므로.

 * * * 

나무 위에서 별을 보던 섭수진은  심화절의 거처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들어갈 때보다 사람들이 줄었어요."

진소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심화절이 흑회(黑會)의 인물들을 가만두지 않았겠지."

섭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비응방과 흑회가 본격적인 싸움에 들어가겠군요."

"그렇겠지. 하지만 그들의 일이니까……"

"우리도 이제 그만 비응방을 떠나야 하겠군요."

섭수진이 소리를 약간 줄여 말했다.

그녀는 비응방을 떠나다면 진소백과 헤어지게 됨을 떠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진소백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멀었지. 아직!"

섭수진은 의아했다.

"처음 받았던 의뢰는 비응방의 반도(叛徒)를 색출해  달라는 것이었으니, 고숭무가 

죽은 지금은 떠나야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요?"

진소백이 외려 반문(反問)했다.

"하지만 반도가 꼭 하나뿐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섭수진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 공자의 말뜻은……?"

순간 섭수진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진소백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지금 저

한테 반말을 하시는 거예요?"

진소백이 깜짝 놀라 그녀를 보았다.

"이런 내가 결례(缺禮)를! 다음부터 주의하도록 하지."

주의(注意)를 한다면서 다시 반말이자, 섭수진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녀는 화를 낼 여유가 없었다.

진소백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아 왔기 때문이었다.

파르르 떨며 입술을 맡긴 그녀의 눈으로 별빛이 쏟아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하늘이 돌아간다고 느꼈다.

순간 그녀의 뇌리에 사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 뒤를 이어 대아미파를 다스려야  할 네가 감히 남자와……!'  금정(金頂) 신니

(神尼)의 쩌렁쩌렁한 노갈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안 돼!"

섭수진은 힘껏 두 손을 앞으로 밀었다.

심화절의 거처! 

광문당은 그가 광문당주(廣文堂主)로 있을 때의 숙소라  방주로 격상된 지금은 마

땅히 천응각(天鷹閣)으로 옮겨야 할 터이지만 심화절은 그러지 않았다.

─`선 방주께서 비응방을 일으킨 공훈(功勳)이 심히 크시니,  내가 어찌 감히 그분

의 거처를 사용하겠소? 난 이곳으로 족하오.

그의 말은 겸손하면서도 금사진을 추도(追悼)하는 뜻이 절절했는지라, 많은 방도들

의 환호(歡呼)를 얻었다.

하지만 정말 심화절의 뜻이 그런 것일까? 

다른 사람이 모두 나간 지금, 어두운 방에 등(燈)조차 켜지 않은 채 앉아  있는 심

화절은 단순히 금사진을 추도하여 천응각으로 옮기지 않았을까? 

이런 의문을 대신 물어 주는 질문이 심화절이 앉아 있는 뒤에서 나왔다.

"자네는 왜 천응각으로 옮기지 않는가?"

심화절은 전혀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인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금사진의 세력이 곳곳에 남아 있소."

뒤에 나타난 인영은 놀란 듯했다.

"무슨 말인가? 이제 자네가 방주인데, 누가 거역을 한다는 겐가?"

심화절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아직이오. 사공두가 있고, 노굉이 있소. 게다가 흑회(黑會)뿐 아니라 하나의 

세력이 비응방(飛鷹幇) 

내에 있음을 난 알 수 있소."

인영은 놀란 듯했다.

"하나가 더 있다니, 무슨 소린가?"

"분명히 있소. 아마도 금사진의 작품이겠지."

"금사진? 그는 이미 죽었는데도……"

심화절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자지. 정말로 대단해. 만일 그가 대단하지 않았다면  왜 우리가 이렇게 어

려운 방법을 

택해 비응방을 장악(掌握)하려 했겠소?"

"금사진, 설마 그가 우리의 존재(存在)마저 알고서 대비(對備)했다는 뜻인가?"

심화절이 이번에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대비했던 것은 우리가 아니라  흑회(黑會)였을 거요. 다행한 일이었지. 금사

진이 흑회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우리의 존재도 당연히 눈치채였을 거요."

심화절이 몸을 일으켜 뒤에 선 인영을 돌아보았다.

"노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당신은 알고 싶지 않소?"

인영, 노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싶네. 자네가 설명을 해주겠나?"

심화절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 쪽을 보았다.

"너도 들어오너라. 듣고 싶다면."

방문 밖에 서 있던 여인이 몸을 떨었다.

 * * * 

"험험! 지금 내 거처에 따라간다면 의외(意外)의 사람을 만나게 될 거요."

진소백이 무안한 듯 다시 경칭(敬稱)을 사용하자  섭수진은 이상한 아쉬움을 느꼈

다. 그러나 비록 그녀가 아직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 불제자! 이성과 사랑에  빠질 

수는 없었다.

마침 진소백의 말은 그녀에게 좋은 탈출구가 되었다.

"누구 말인가요?"

그녀는 일부러 명랑하게 말을 받았다.

"알아맞혀 보시오. 맞힌다면 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상으로 주겠소."

그녀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미 떠나갔던 금청청과 매일도가 돌아와 있을 줄 그녀가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

가? "기다렸소, 진 형!"

매일도가 친근하게 말하며 그를 맞았다.

옆에 앉은 금청청도 진소백과의 오해가 모두 풀려, 미소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진소백이 짓궂게 말했다.

"매 형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오. 때가 되면 내게 꼭 술 석 잔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을!"

혼인을 중매한 대가로 술을 받아 먹는  것이니, 속뜻을 알아들은 금청청의 얼굴이 

붉어졌다.

매일도 또한 어색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소?"

진소백이 끄덕였다.

"매 형이 곧 깨달을 것임을 의심치 않았소!"

 * * * 

문이 열렸다. 

 심화절이 연 것이 아니라 밖에 있던 자가 연 것이다.

심화절은 웃으며 말했다.

"너였구나."

앵아도 웃으며 말했다.

"예, 저예요, 방주님."

심화절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너는 이제 엿듣는 것이 습관이 돼버렸구나."

앵아는 허리를 숙였다.

"제가 어찌 감히……"

심화절이 다시 얼굴을 폈다.

"좋다. 어쨌든 들어오너라. 네게 할말이 있다."

그녀는 심화절의 방에서 노존(老尊)을 봤다.

복면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심화절이 앵아(鶯兒)를 방안으로  데려온 

것에 화가 난 듯했다.

"노존, 얘기를 계속합시다."

노존의 기분이야 어떻든 심화절은 말을 이었다. 

 * * * 

매일도는 의아했다.

진소백이 짐작하고 있었다니…… 

비응방을 떠날 당시에는 그조차 자신이 돌아오게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었는데.

진소백이 웃었다.

"고숭무의 일에 얽힌 의문(疑問)은  매우 확연(確然)해서, 매  형이 비응방을 떠나 

조금만 여유를 찾으면 곧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

매일도는 비응방을 떠나 화산(華山)으로 향하다가 곧 잘못된 곳이 있음을 알았다.

당연히 좀더 일찍 알았어야 했지만, 비응방에서는 번잡한 일이 많았는지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금청청도 이미 알고 있는 듯해 보였고, 섭수진만 몰랐다.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거죠?"

궁금하여 그녀가 물었다.

사실 섭수진이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의문을 일으킬 만한 사건을 그녀만 몰랐으므로.

"아하, 이런! 섭 소저는 모르시죠? 사실은…… 그게, 음……"

진소백이 망설이자 금청청이 대신 전음으로 섭수진에게 설명했 그녀가  적염의 거

처에 들어가서 보았던 일들을! 

특히 적염(狄艶)의 다리와 뒤엉킨 사내의 다리에 무성했던 검은 털에 관한 얘기를 

강조해서! 섭수진은 얼굴을 붉혔지만, 무엇이 이상한지는 이내 깨달았다.

금청청이 부연(附椽)하여 말했다.

"저는 암흑동신공(暗黑銅身功)에 그런 면이 있음을 몰랐어요. 매 사형이 지적해 주

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죠."

암흑동신(暗黑銅身)을 이루면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

면 전신의 피부가 흡사 금속으로 이루어진 듯 단단하게 되어, 도검(刀劍)으로도 상

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강한 내공이 실린 도검이라면 얘기는 다르겠지만.

한데 특이한 것은 피부가 굳어지는 관계로 전신에 털이 하나도  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머리만은 예외였다. 

 머리카락 또한 철사처럼 뻣뻣해져서 유사시에 무기로도 사용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수련(修練) 방법의 영향이 컸다.

불과 얼음으로 피부를 얼리고 녹임을 반복하는 가운데 익혀지는 것이 암흑동신(暗

黑銅身)! 전신의 털이 남아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적염의 방에서 본 그…… 사람은 고숭무가 아니란 말이로군요?"

섭수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숭무가 될 수 없소. 난 이미 그의 시신에서 다리의 털을 확인했지. 당연히 털…

… 은 없었소."

진소백이 확신을 가지고 말하자 섭수진은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진 공자가 아직 사건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요."

중인이 모두 고개를 끄덕일 때 금청청은 진소백을 보았다.

"진 공자, 꼭 도와 주세요. 아직 진범이 잡히지 않은 거라면…… 지하에 계신 아버

님을 어찌 뵙겠습니까?"

진소백은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의뢰(依賴)라면 항상 받지만 대가가 좀 비싸서. 난 항상 의뢰인 재산의 절반

을 받는다오."

금청청은 매일도를 돌아보며 눈으로 구원(救援)을 청했지만 매일도의 안색도 난처

했다.

"진 형! 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

 그가 고지식하게 나오자 진소백도 급히 손을 내저었다.

"좋소. 내 이 의뢰(依賴)를 맡을 터이니,  앞으로 내 부탁을 한 가지만 들어주시겠

소?"

매일도가 말했다.

"말하시오. 무엇이든지 괜찮소."

매일도와 앞을 다투어 금청청도 말했다.

"저도 무엇이나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요."

진소백이 크게 웃었다.

"하하! 지금 당장이 아니오. 아마도 일 년은 족히 지난 후. 그때 오늘의 약속을 꼭 

기억하시기 바라오."

일 년 후……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매일도와 금청청은 모종의 곳으로 떠났다.

진소백은 그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했지만 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았다.

 * * * 

"너는 과거 비응방에서 누가 가장 무서웠는지 아느냐?"

심화절이 앵아에게 묻자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앵아는 뺨에 보조개가 패여 있

어 미소 짓는 게 무척 귀여웠다.

"아마도 고 당주, 아니, 고숭무가 가장……"

앵아가 하루 전의 무서웠던 격전을 떠올리며 말했지만 심화절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니야. 그는 내게도 미치지 못했지."

앵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역시 심 방주님이……"

심화절은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지. 다시 맞혀 보거라."

앵아는 비로소 말했다.

"그렇다면 역시 금 방주께서 가장……"

심화절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는 가장 무서울 뿐 아니라 아주 무서웠다."

심화절은 방안을 거닐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고숭무가 흑회(黑會)의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또한 내  뒤의 세력을 알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내가 딴마음을 

먹고 있음은 짐작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 둘을 견제하고자 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