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16 장 백회지비(白會之秘) (17/32)

제 16 장 백회지비(白會之秘) 

 1 

장내의 분위기는 폭발 지경이었지만 진소백은 별로 실감(實感)이 나지 않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지금의 상황을 분석하고 있는 그의  정신은 내부 세계로 침잠(沈

潛)해 가고 있었다.

그가 구해 주었던 신주낭객의 일! 

 그의 말과 지금의 상황을 연관시켜 보고 있었다.

이야기는 잠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소백과 섭수진, 그리고 빗장수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던 시점으로.

뒤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 비 속에서 낙화(落花)되었던 진소백 일행은, 이윽고 푹

신한 짚으로 덮인 배 위에 떨어져 내렸다.

배는 주위의 바위에 끈으로 단단히 고정된 채  공중에 떠 있었다. 끈은 배의 위치

가 변하지 않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진소백 등이 떨어져 내리는 충격을 완화시키

는 완충 작용까지 해주어, 그야말로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내었다.

배에 내리자마자 진소백은 비수를 날려 끈을 끊으며 외쳤다.

"빨리 짚 속으로 들어가시오!"

끈이 끊어지자 배는 급류를 타고 빠른 속도로 흘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화살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안전했다. 머리 위에 있는 짚의 벽이 화살을 모두 

막아 내고 있었으므로.

"이것이야말로 공명(孔明) 선생께서 짚 인형을 이용하여 하룻밤에 십만 개의 화살

을 얻었던 고사(古事)를 실전에 활용하는 것이 아니겠소?"

섭수진이 진소백의 말에 소리내어 웃을 때, 절벽 위에서 두 영주의 얼굴은 일그러

지고 있었다. 

 * * * 

하류에는 신주낭객과 염소 수염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소백 일행이 도착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청년도 달려왔다. 굵은 턱선이 강한 성

격을 암시하는 청년, 구천(仇賤)이었다.

"사부님!"

무릎을 꿇고 오열하는 그를  보며, 진소백은 신주낭객과의  대화를 잠시 미루어야 

했다.

"내가 흑회(黑會)의 인물들에게 잡혔던 것은 내상(內傷)으로 몸을  가누기 힘들 때

였소."

신주낭객은 자신이 어떻게 흑회의 인물들에게 잡히게 된 것인지를  설명하기 시작

했다.

그는 오 년 전 어느 날 밤 무산(巫山)을 지나다가, 일단의 사람들이 복면을 하고서 

은밀히 무엇인가를 운반하는 

광경을 우연히 목도했다. 

 급한 일로 공동의 풍운 진인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지만, 그는 궁금함을 참지 못

하는 성격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조심스레 복면인들을 따라갔고,  그들이 운반하던 짐이 철

광석이라는 것을 알아 

내었다. 그것도 아주 양질의! 

철은 병기를 만드는 기본이 되니, 모든 광산은 조정에서 관리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이 정도의 양이라면 근처 어딘가에 광산이  있음이 틀림없는 일! 신주낭객

은 좀더 자세히 알아 보고자 복면인  중의 한 명과 바꿔치기 하여  그들의 세력에 

침투했다. 

 마침내 복면인들의 거처 깊숙이 들어간 그는, 광산이 무산(巫山)에 있음과 그들의 

세력이 아주 은밀하고도 

거대함을 알아 내었다. 

 그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도 알아 냈다.

백회(白會)!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들이 두 명 있었는데, 하나는 복면을 하여 알 수 없었지만…

… "한 명은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자였소. 그는  비응방의 금사진(金査震)이었

소!"

우두머리를 보고 나서 신주낭객이 그들에게 들키기까지는 채 한 시진도 걸리지 않

았다. 복면인들은 서로 치밀한 조직력의 과시와  유지를 위해 저마다의 서열에 따

라 서는 위치가 달랐다.

신주낭객이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알 수는 없는  일! 그의 복면이 뜻하는 신

분과 그가 선 위치가 다름을 발견한 복면인들은 곧바로 그가 침입자임을 알아차렸

다. 

 "곧 엄청난 추격이 있었소. 하지만 내 경공은 감히 자랑할 만한 것이었지. 추격이 

거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음날 날이 밝을 무렵 무산을 벗어날 수 있었소. 복면인들을 모두 따돌리고 

말이오. 그런데……"

자랑스럽게 말하던 신주낭객의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은은한 공포가 떠올랐다. 그

의 뇌리에 삼 년 전 그날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적들의 추격을 따돌렸다고 안심하고 있던  그의 귓가에 강한 내공을  담은 일성이 

울렸다.

"여기까지다."

소리는 하늘에서 들려 왔고 위를 올려다본 신주낭객은 한 인영이  손을 매의 발톱

과 같이 세워 자신을 압박해 옴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금사진! 그리고 그의 파천혈조(破天血爪)! 

"그의 공격은 무서웠소. 나는 십 초를 넘기지 못하고 팔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지. 

원래 천랑도법은 두 손을 함께 사용하는 큰 기세가 특기이니 난 

대항할 방법을 잃어버렸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소."

금사진의 혈조에 그의 생명이 끊어지기 직전,  멀리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렸

다.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금사진의 혈조가  방향을 바꿔 땅을 후려치는 것이 아

닌가? 

다시 한 번 호각이 울리자 금사진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뒤집어 호각 소리가 울린 

방향(方向)으로 날아갔다.

신주낭객 구곡인(九曲刃)은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내상이 심해 움직

이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흑회(黑會)의 놈들이 나타난 것은  내가 한창 내공으로  요상술을 시행하고 있을 

때였네. 그들이 내 옆에 떨어진 천랑패(天狼牌)를 보자 이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

는지 

나를 데려다가 가두어 둔 것이네."

잠자코 말을 듣고 있던 섭수진이 물었다.

"그 흑회의 인물들과 금사진과 함께 있던 복면인들은 한패가 아닐까요?"

구곡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아닐 거요. 일단 복면이라고는 하지만 그 색과 모양이 전혀 달랐고, 또 금사

진의 세력이 크다고는 하나 이 흑회(黑會)의 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소. 이들 흑회의 세력(勢力)은……!"

구곡인이 몸을 떨었다.

"자네들이 나를 구출해 준 오늘의 일은 무척이나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네. 현령

과 황령이 제법 고수이긴 하나 그 위의 지령이나 천령과의 차이는 엄청나네. 게다

가 

회주란 자와 몇몇 정체 불명인들의 무공은……"

그는 아마도 우연한 기회에 그들을 본 듯했다.

신주낭객은 강호에서 결코 약한 인물이 아닐진대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그만

큼 흑회가 무섭다는 뜻이었다.

진소백이 물었다.

"혹시 두 세력에 무슨 관계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습니까?"

구곡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 아니오. 나는 비록 갇혀 있었지만, 간수들의 대화나  간간이 밖에 보이는 풍

경에서…… 확신할 수 있소이다."

 * * *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요?"

옆 자리에 앉은 섭수진의 말에 진소백은 정신을 차렸다.

장내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약이  폭발하는 상황이라, 경력(勁力)과 호통  소리가 

난무하며 검광과 도광이 

섞여 돌아가고 있었 

하지만 장내의 소란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 진소백은 차분한 어조로 섭수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만일 고숭무가 흑회의 회주라면, 아니, 적어도 그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자라면 

장내에는 반드시 백회(白會)란 세력에 속한 자들도 있을 것이오!"

진소백의 말에 장내를 다시 한 번 둘러보는 그녀에게 또다시 그의 전음이 들려 왔

다.

"만일 고숭무가 오늘의 위기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를 해치운 사람이 바로 백회

(白會)의 인물임을 내 보장할 수 있소!"

 * * * 

섭수진은 전날 구천(仇賤)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제가 흑회의 적도들에게 받았던 명령 중에는  그 백회(白會)란 자들에 대한 공격

도 있었습니다."

구곡인의 말에 보충하여 구천이 끼여들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었지만  흰 복면을 쓴 자들을 공격하여  기이하게 생긴 

침(針)과 관(管)으로 이루어진 침통을 빼앗아 온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공격

했던 자들이 백회에 속한 인물들이라면 백회와 흑회는 서로  적대시하는 세력임이 

틀림없습니다."

'침(針)'이라는 말이 섭수진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혹시 그 침과 침통의 형태가…… 아닌가요?"

그녀는 금사진을 죽게 한 침의  모양을 구천에게 설명해 주었 "어떻게  아신 겁니

까? 정확히 그런 모양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에 기뻐하고 있을  때, 진소백이 다시 구천에게 물었

다.

"당신은 엽평이란 소년을 공격한 일이 있지요?"

구천에 눈에 의혹이 서렸다.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진소백은 답하지 않고 계속 묻기만 했다.

"그 일 역시 흑회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소?"

구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어린 소년을 공격하다니, 그건 실로……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있소. 그

들은 엽평을 

잡아오기는 하되 만일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적당히 싸우다가  물러나라고 지시했

소!"

진소백이 눈을 빛냈다.

"당연한 일이지. 당연히 그래야지!"

무슨 말일까? 

 2 

감춰 두었던 적염의 무공은 의외로 대단했다.

그녀는 금청청의 일검을 맨손으로 받아 내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앵아의 비수

(匕首)로 가슴이 찔린 상태임을 감안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러서는 그녀의 귀에 어떤 사내의 전음이 들려 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자리를 피하시오. 내가 돕겠소."

항상 자신과 정염(情炎)을 불태웠던 사내! 

 그와의 뜨거웠던 기억에, 위기의  상황에서도 달콤함에 젖어들었던  적염(狄艶)은 

등뒤가 화끈해짐을 느꼈다.

"염아!"

아버지인 풍운(風雲) 진인(眞人) 적일수(狄逸秀)가 크게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날

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등뒤에는 도(刀) 한 자루가, 도신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박혀 

있었다.

누굴까? 누가 적염에게 도를? 

적염의 몸이 발작적으로 뒤로 돌았다.

그 바람에 도가 뽑혀 나오고 상처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아났지만 적염은 자신을 

찌른 자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사공두(司空斗)였다.

"어, 어떻게 당신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공두의 일도가 다시 그녀의 목을 쳐버렸던 것이다.

악녀(惡女)의 머리는 허공을 날아 바닥을 굴렀다.

그 눈은 깊은 불신의 빛을 담고 있었다. 

 "흥, 감히 나 같은 약자(弱者)가 너를 죽일  수 있을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방주

의 은혜를 생각하면 

나는 비록 없는 힘이라도 내서 너를 죽일 수 있다."

사공두의 눈은 깊은 증오로 떨렸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강한  복수의 염(念)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맺기가 무섭게 생명의 위기를 맞아야 했다.

"사공`─ 두! 목을 내놓아라!"

적일수가 분노하여 외치며 그의 가슴을 노려 왔던 것이다.

퍼퍼펑! 

적일수의 복마장법(伏魔掌法)에 삼 장을 연속으로 얻어맞은 사공두가 비틀대며 입

으로 피를 토하고 물러섰다.

그래도 마음이 풀리지 않는 듯,  다시 적일수의 손끝에 모아진 개천풍운조(開天風

雲爪)의 위세는 

금방이라도 사공두의 가슴을 헤집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무슨 짓이에요?"

"손을 멈추시오! 무량수불!"

금청청의 뾰족한 외침과 화산파 현천자의 도호가 연달아 울리며  적일수의 개천풍

운조를 막아 섰다.

퍼펑! 

파열음(破裂音) 속에서 금청청과 현천자의 신형이 적일수와 사공두 사이에 내려섰

다.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진 사공두는 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없이 피를 토했다.

"현천자! 당신이 감히 방해를 하다니!"

적일수의 눈에 노화가 차 오르며 그의 수염이 바람도 없는데 휘날렸다.

끓어오르는 노화에 저절로 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현천자는 진중히 말했다.

"우리는 단지 참관인일 뿐! 이 일은 모두 비응방 내부의 일이외다."

적일수가 진기를 돋우어 외쳤다.

"무슨 소리냐? 방금 내 딸이 내 앞에서 죽어 가는 것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그의 외침에 주위의 탁자가 흔들리고, 공력이 약한 자들의  귀가 진동했다. 내공이 

얼마나 강한지를 대변하는 현상들! 

"자중하시오, 적 장문! 이미 적염이 스스로 악행을 저지른 것을  시인하는 것을 보

았지 않소?"

현천자의 일성에도 내공은 담겨 있어, 은연중에 적일수의 정신을 압박해 갔다.

공격의 의미가 아니라 맑은 정신을 찾아 주는 효능이 있는 도가(道家)의 공력!  적

일수의 눈이 갈등으로 흔들렸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가 말했다.

"좋소. 이 일은 비응방의 일! 그러나 내 딸을 죽인 자만은 용서할 수 없소!"

적일수가 사공두를 노려보았다.

"지금은 그냥 간다만 언젠가 너는 이 일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만 할 것이다."

사공두가 핏자욱이 선연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언제든지. 난 이미 복수를 했으니 더 이상 여한(餘恨)이 없소."

사람들의 눈에 감탄이 어렸다. 

 금사진이 왜 이처럼 무공이 약한 인물을 순찰당주로 임명했는지 이제야  진정 알 

수 있었다.

이미 약세가 증명된 자가 이처럼 당당히 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깊은 눈으로 사공두를 바라보던 적일수가 몸을 날렸다.

"공동의 모든 제자는 이제 산으로 돌아간다."

멀리서 그가 전하는 말이 진기(眞氣)를 타고 퍼져 왔다.

"저 사공 당주의 기개(氣槪)는 대단하군요.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라면 기가 죽을 

터인데!"

섭수진의 말에 진소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대단하오. 정말 대단하오."

진소백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는 저 두 사람에 조금도 못지않소. 정말 대단하지."

진소백이 쳐다보는 곳! 

두 명이 대치하고 있었다. 심화절과 고숭무! 

비록 마주보며 불꽃을 튀기고 있었으나, 그들의 처지는 사뭇 달랐다.

한 사람은 차기의 방주로 내정이 되었고, 한 사람은 배반자로 낙인 찍혔다.

고숭무! 

 장내에는 오직 그만이 고립(孤立)되어 남았다.

그는 몸을 잃고 뒹구는 적염의 머리를 보며 가늘게 떨었다.

핏줄이 불거져 나온 팔뚝은 점점 굵어졌고, 비례하여 주먹은 더욱 검어졌다.

파황권(破荒拳)의 공력이 주먹에 모아지고 있다는 증거! 떨리는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적염처럼 네놈들도…… 네놈들도 모조리 죽여 준다. 모조리."

심화절이 냉소했다.

"흥! 고 당주, 아니, 고숭무! 음모가 모조리 드러난  이상 넌 피할 곳이 없다. 순순

히 죄과의 응보를 받아라."

고숭무는 충혈된 눈으로 심화절과 앵아를 번갈아 보았다.

앵아의 눈은 계속해서 심화절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비록 나이가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선비의 고아함과 다른 한편으로는 무사의 강인함이 느껴지는 심화절의 

얼굴! 

그제서야 고숭무는 어떻게 된 일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앵아와 같은 여자는 보석에도 약했지만 사랑 앞에서는 더욱 약했을 것이다.

깨달은 뒤에 남은 것은 분노와 허탈! 

"크하하! 과연, 과연 심화절이로구나."

고숭무의 웃음에 진기가 실리기 시작함을 느낀 심화절이 급히 외쳤다.

"차기 방주의 자격으로 명령하니, 비응방(飛鷹幇)의 모든  무사들은 반도를 공격하

라!"

쩌렁쩌렁한 외침은 권위(權威)를 담고 있었다.

대청 안에 있던 무사들의 수효는 약 삼십이었다.

모두 검을 들고 있었는데, 그 중 다섯 가량의 무공이 가장 높았다. 그리고 다섯 중

의 셋이 마침 고숭무 가까이에 서 있었다.

심화절의 명령이 떨어지자 몸을 날린 무사들 중에 이 셋이 가장 먼저 고숭무를 덮

친 것은 당연했다.

"네놈들이 나에게 덤비다니!"

고숭무가 노갈하며 연달아 삼 권을 뿌리자, 그들은 일 권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뒤

로 밀려났다.

공교롭게도 그 중 한 명의 신형은 마침 달려오던 다른 무사의 앞으로 밀려나 오히

려 고숭무를 

공격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었 

다른 두 명이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을 때는 이미 이 장이

나 물러난 곳이었다.

"괜찮으냐?"

마침 그곳에 있던 심화절이 수하들이 몸을 세우는 것을 도와 주며 물었다. 그러나 

밀려나던 두 명이 그  기세를 그대로 빌려 검을  휘둘러 올 줄 어찌  알았으랴? "

헉!"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공격에 당황한  심화절이 급히 물러났지만 왼쪽  어깨와 오른 

가슴에 각각 일검이 스쳐 피가 흘렀다.

당황의 외침은 무사들 속에서도 일어났다.

갑자기 열 명 정도의 인물이 주위에 있는  자신의 동료(同僚)들을 베어 버렸던 것

이다.

창졸간에 당한 공격임에도 어느새 품에서 두 개의 비도(飛刀)를 꺼내 던지며 심화

절은 신음했다.

"최후의 한 수는 가지고 있었는가?"

그의 말에 답이라도 하는 듯 가슴에 비도가 박힌 두 무사가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

졌다.

고숭무의 권에 서렸던 검은 기운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런 것은 권법의 변화라고 볼 수 없었다.

무언가 다른 공력으로 인한 것일 게다.

심화절의 눈에 이채(異彩)가 어렸다.

"암흑동신(暗黑銅身)……?"

지금 전신에 검은 기운이 퍼진  고숭무의 모습은 정말 구리로  만든 듯, 흑색으로 

칠한 동상(銅像)을 닮아 있었다. 하나 이 말의 의미는 그것보다 컸다.

암흑동신! 아니, 암흑동신공(暗黑銅身功)! 

외문(外門)의 무공으로서는 금종조나 철포삼을 훨씬 능가한다는 기공(奇功)이었다.

특히 일반의 외공과는 달리 동황기(銅皇氣)라 불리는 내공이 같이  길러져, 대성하

면 적수를 찾기가 어렵다는 무공! 

"크하하, 과연 천기수사답구나! 제대로 알아보았다.  원래 파황권이란 무공은 없었

지! 다만 동황기(銅皇氣)를 권에 담아 썼을 뿐이다."

자신감에 찬 웃음을 웃는 고숭무의 앞뒤로 그의 적과 아군이  서서히 갈라지고 있

었다.

고숭무의 뒤에 선 자들은 부당주였던 귀조 독소명을 비롯한 숭무당의 인물들이 대

부분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순찰당의 부당주였던 신안추종 인소가 끼어 있지 않은가? 사공두

가 신음했다.

"인소(引蔬)!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어쨌든 현재로서는 다른 군웅들이 다 모인 심화절 쪽의 세력이 훨씬 강했다.

 진소백과 섭수진, 매일도와  현천자, 흑수동주 도곡(陶曲)  등은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 일은 비응방 내부의 일인지라 끼여들기가 애매했다.

만일 강호 공도에 관한 것이라면 그들이 간섭(干涉)할 명분이 생기지만 방 내부의 

문호 정리에 관한 것이라면 끼여들 

수 없었 

그들은 모두 심화절의 입만 바라보았다.

지금은 심화절이 비응방이니 그의 결정을 듣고자 했던 것이다.

이윽고 심화절이 입을 열었다.

"강호 동도들의 관심에 감사드리나 지금 이  일은 비응방 내부의 일. 저희끼리 처

리하게 해주십시오."

그의 판단은 일면 옳았다.

반도(叛徒)를 찾았으니 섭수진과 진소백의 도움도 필요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심화절 측의 세력이 훨씬 좋으니, 외부의 인사를 끌어들여 방의 권

위(權威)를 떨어뜨리고 

싶어하지 않음은 방주로서 당연한 일! 

그러나 이 말은 들은 고숭무의 입가로 비웃음이 스쳐 갔음은 누구도 몰랐다.

 이곳은 매우 밝았다. 

 사방이 하얀색으로 칠해져 더욱 밝음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원래 음모(陰謀)는 

어두운 곳에나 어울렸다. 어둠이 온갖 추악함을 덮어 주기에.  그러나 이곳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밝음 역시 음모와 아주 잘 어울림을 알게 될 것이다.

너무 흰 색깔도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색깔을 상상하기 어렵게 하는 법이다.

그러기에 음모란 항상 예기치 않았던 곳에  있지 않은가? 순백(純白)의 사람이 어

느 날 붉은빛을 띠고 있음을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음모였다.

"일은 어찌 되어 가는가?"

질문은 하얀 벽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답은 아래쪽의 하얀 대리석 위에 부복한 백의복면인에게서 나왔다.

"셋째는 잘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곧  비응방의 모든 권한을 갖게 될 것입니

다."

벽 속의 목소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말했다.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다시 한 번 계획을 살피도록!"

"명을 받듭니다, 대형(大兄)!"

고개를 숙인 백의복면인을 비추며 방안은 더욱 밝아졌다.

 * * * 

중인들, 특히 비응방의 소속이 아닌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현천자에게로  쏠렸다. 

그의 배분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현천자가 말했다.

"심 당주, 아니, 방주의 말이 옳소. 우리는 뒤로 물러나도록  합시다. 이 일은 비응

방의 문호 

정리에 관한 것이니…… 간섭할 수 없소!"

군웅들, 특히 진소백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대청에서 물러나왔다. 대청 내에 남은 

것은, 이제 심화절과 고숭무,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뿐이었다.

서로간에 흐르는, 폭발할 듯 팽팽한 긴장! 

긴장(緊張)은 고숭무가 먼저 깼다.

"흐흐, 심화절! 너는 방주의 자리를 두고 나와 한번 붙어 봄이 어떠냐?"

심화절이 침중히 말했다.

"어제였다면, 나는 물론 너와 싸울  의향이 있었겠지. 그러나 너는  방주를 시해한 

자! 대역 죄인과 어찌 다투겠느냐!"

심화절의 말에 심화절 뒤에 선 인물들이 싸움에  임할 태세(態勢)를 갖춤을 본 고

숭무가 광소했다.

"크하하! 좋다. 어쨌든 성공하는 자가  영웅(英雄)이 되는 법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그러나……"

'그러나'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숭무의 몸이 앞으로 미끄러졌다.

고숭무와 가장 가깝게 서 있던 사람은 기서생 오명(烏明)이었다.  비록 절정고수는 

아니었지만 한 자루의 풍운선(風雲扇)으로 펼치는 회선선(回旋扇)은 강호에서 제법 

이름을 얻은 절기였다.

그런 오명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고숭무가 가만히 있겠는가?  그는 즉시 

손에 들었던 풍운선을 펼쳐 대항(對抗)했다.

파팍`─`! 

풍운선은 모든 살이 철로 이루어진 것이라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마치 천을 찢듯 

날카로웠다.

마룡탐주(魔龍探珠)의 기세로 뻗어 오는 고숭무의  주먹을, 오명의 풍운선(風雲扇)

이 천선회회(天扇回回)의 일식을 전개하며 감아 가는 순간! 

쩌저`─ 적! 

풍운선이 그대로 찢어지며 오명이 뒤로 날려가는 것이 아닌가? "오명이 일초도 감

당하지 못하다니……!"

심화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신음하였고, 그의 뒤에 선 군웅들의 가슴에도 찬바람

이 스쳤다.

강호의 싸움은 숫자에서 아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몇몇 고수에 의해 승패

가 결정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심화절은 현천자(玄天子) 등을 나가도록 한 것이 실수였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

는 늦었다.

그들은 비록 숫자에서 조금 우위에 섰지만 고숭무를 당해 낼 절대고수가 없었다.

성질을 참지 못한 금청청이 외쳤다.

"흥, 나는 네가 우리 모두를 당해 낼 수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원수는 갚고야 말겠다."

금청청의 외침에 군웅들이 동요하자 심화절이 소리를 질러 제지했다.

"여러분이 방주로 뽑아 주셨으니, 난  방주로서 최선을 다하겠소! 내가  나서서 저 

반도(叛徒)와 가장 먼저 

싸울 것인즉, 이 싸움에는 누구도 끼여들지 말 것을 명하오."

심화절이 당당히 앞으로 나서자, 고숭무는 통쾌하게 웃었다.

"크하하, 옳다. 너는 당당한 방주(幇主)의 신분이니 죽음도 당당해야지!"

심화절을 보는 중인들의 눈빛이 변했다.

그들은 심화절이 정말로 방주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 않고 나서는 자만이 영웅이  되고, 영웅만이 비응방의 방주로서 부

끄럽지 않았다.

심화절은 부끄럽지 않은 영웅이었다.

 * * * 

"어찌 되어 가고 있나요?"

섭수진이 진소백에게 물었다.

그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있으니, 진소백이라고 안의 사정을 알 리가 없지만 답답

한 마음에 물었던 것인데…… 

"지금 심화절과 고숭무가 막 싸우려 하고 있소!"

옆에 있던 현천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지청술(地聽術)을 전개하여 내부의 사정을 알아 보고 있었지만, 이  젊은 청

년이 자신과 같은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누가 이길 것 같은가요?"

섭수진의 물음에 진소백은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아마도 실력으로 싸운다면 고숭무겠지!"

 * * * 

싸움은 치열했다. 

 고숭무의 절학은 이미 보았지만 심화절의 숨은 실력 또한 이토록 뛰어날 줄은 짐

작도 못 했다.

알려졌던 심화절의 절학은 천심비도(穿心飛刀)! 

그러나 지금 그가 사용하는 무기는 긴 쇠가죽에 사방으로 비도를 꽂아 둔 띠였다.

비도가 띠를 이루었으니 비도대(飛刀帶)란 이름은 어떨까? 그는 이 무기를, 때로는 

검으로 때로는 채찍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꼿꼿이 세워 찔러 갈 때는 검(劍)이었고, 힘을 풀어 휘감아 가면 채찍이었다.

때때로 기회를 보아 쇠가죽에 꽂힌  비도를 뽑아 던져 내기도  하니, 마치 동시에 

서너 가지의 무기를 사용하는 듯 보였다.

이미 싸움은 백여 초를 넘었다.

위이`─`잉! 

쇠가죽이 둥글게 말리며 회전을 시작했다.

사방에 꽂혀 있는 도가 날이 되어 돌아가니, 이것은 바로 륜(輪)의 기세(氣勢)! 가

공할 힘과 속도였지만…… 

"흥!"

고숭무가 냉소와 함께 일 권 삼 장을 륜의 중심부를 향해 내질렀다.

펑! 퍼펑! 

회전축에 경력(勁力)을 맞은 비도(飛刀)의 륜(輪)이 회전을 멈추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흥, 이것도 있다."

심화절이 냉소하며 왼손을 뿌려 냈다.

"웃!"

고숭무는 황급히 몸을 비켜설 수밖에 없었다.

유성과 같은 세 개의 빛살이 그를 스쳐 갔던 까닭이다. 하나는 헛되이 흘러갔지만 

두 개는 그의 몸을 호신하는 동황기(銅皇氣)를 뚫고 길게 혈선(血線)을 그렸다.

"천심비도(穿心飛刀)! 과연 대단한 위력이구나!"

두 개의 혈흔(血痕)을 입었음에도 고숭무의 위세는 조금도 위축(萎縮)되지 않았고, 

다시 쳐내는 권의 위력은 오히려 전보다 강해 보였다.

"타핫!"

심화절은 다시 륜을 풀어 검으로 만들어 고숭무의 권세(拳勢)를 막아 갔다. 동시에 

두 개의 비도를 다시 던져 냄도 잊지 않았다.

칭! 칭! 

경기와 경기! 

 비도와 동황기(銅皇氣)가 충돌하며 싸움은 다시 백중지세(伯仲之勢)로 어울려  갔

다.

싸움은 막상막하(莫上莫下)! 

이미 이백여 초를 넘기는데도 누구도 열세를 보이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심화절이 병기의 득(得)을 보며  종종 득수(得手)하고 있었지만, 어

느 공격도 치명적(致命的)이지는 못했다.

오히려 고숭무의 권세는 조금도 약해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  지켜보는 비응방의 

중인들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 * * 

"어때요? 누가 유리해요?"

귀를 기울이고 있는 진소백에게 섭수진이 물었다.

"고숭무의 공격에는 모두 강한 힘이 실려  있어 매우 위협적이기는 하나 쾌(快)가 

결여(缺如)되어 있고, 

심화절의 공격은 모두 표홀(飄忽)하여 쾌(快)가 있으니 당장은 심화절이 유리한 것 

같소!"

"심화절이 이길까요?"

진소백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그가 질 것을 알면서도 굳이 일 대 일로 싸웠단 말인가요?"

진소백이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무공은 쾌(快)이고 고숭무의 무공은 강(强)임을 아는 까닭이오. 만일 단둘만

의 비무가 아니라면 

고숭무의 강한 힘에 많은 사람이 다칠 것임을 심화절은 알고 있는 것이오."

섭수진의 눈에 염려의 빛이 어렸다.

"전 한때 그가 범인이 아닌가 의심도 했었어요. 한데 지금 방의 명예와 다른 사람

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내던지고 싸우는 모습을 보니, 사람이란 정말 겉만 보

고는 알 수 없군요?"

진소백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정말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는 거요."

 * * * 

장내에서 심화절과 고숭무의 싸움을 보는 자들  중에서는 노굉(魯宏)의 나이가 가

장 많았다.

나이가 많은 만큼 강호 경험도 깊었고, 또한 대세를 보는 눈도 있었다.

겉으로는 심화절에게 유리해 보이는 이 싸움이 사실은 조금도 그렇지 못하다는 점

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간간이 던지는 심화절의 천심비도가 위력적이기는  했으나, 비도의 개수에는 한계

(限界)가 있었다.

게다가 심화절은 공력의 약함을 쾌로써 극복하고  있으니, 고숭무가 한 번 움직일 

때 두 번, 세 번 움직여야 했다. 

 피로가 빨리 올 것은 자명(自明)했다.

노굉의 예상은 정확하여 사백여 초가 가까워지자  심화절의 동작(動作)이 눈에 띄

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크하하…… 지쳤느냐?"

다섯 군데 비도가 스쳤고, 왼쪽  어깨에는 깊숙이 한 개의  비도가 박힌 고숭무의 

외침이 더욱 힘이 있는 것은 노굉의 짐작이 정확했다는 의미였다.

일단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심화절은 고숭무의 공세를  완전히는 피해 내지 

못했다.

겨우 피하고는 있으나, 상대는 산을 무너뜨린다는 철권(鐵拳) 고숭무였다. 스친 공

격의 여파(餘波)만으로도 살갗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우욱!"

마침내 이십여 초가 더 지나자 심화절은 더 이상 피해 내지 못하고 일권을 가슴에 

맞고 말았다.

"심 방주!"

마음속으로 감복(感服)한 사람들이  심화절에게 달려왔고,  고숭무는 광소(狂笑)를 

터뜨렸다.

"크하하, 네가 이 정도의 무공을  지닌 것은 뜻밖이었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현천자 등을 간섭하지 못하게 한 것이 천추(千秋)의 한이 될 것이다."

미친 듯이 웃는 고숭무를 보며 노굉은 앞이 캄캄했다.

'정녕 하늘이 비응방을 버린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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