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장 급전직하(急轉直下)
1
검은 야행복을 입은 그림자는 칠팔 장은 족히 떨어진 나무 사이를 사뿐히 건너뛰
었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의 경공은 최상(最上)의 경지에 달해 있
음을 알 수 있었다.
나무 위에서 방향을 가늠한 그림자는 다시 몸을 띄워 더욱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천화전, 그 중에서도 심처(深處)였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잡아 두고 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면
어느 곳을 택하겠는가?
가장 은밀하고, 자신의 손에서 가까운 곳!
사람들이 흔히 하는, 광 속에 누군가를 가둔다는 것은 얼마나 치졸한 생각인가?
그건 '내가 아무개를 잡아 놓았소' 하고 광고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아닌가! 물
론,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 대비하여 그림자는 모든 건물을 샅샅이 훑었다.
예상대로 금청청은 없었고, 마침내 이곳, 적염의 침실에까지 이르렀던 것인데……
'이 일은 어차피 적염이 심계가 뛰어난 흉수임을 가정하고 출발한 것이다. 만일
적염이 흉수라면
그녀의 심계로 보아 당연히 침실에 가까운 곳에 금청청을 숨겼으리라.' 지붕의 기
와를 뚫고 내려가는 일은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공을 모른다고 알
려진
적염이 무공을 알 가능성도 생각해야만 했다.
적의 허실(虛實)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적이 가장 강하다고 가정하고 모든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조심스레 기와를 걷어 낸 인영의 몸이 연기처럼 안으로 들어갔.
적염은 침대 위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침실을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조금 후면 그녀는 반드시 침실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 * *
매일도는 금청청을 달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단순히 화가 난 것이라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으리라. 그녀는 마음의 충격을 받았
다.
자신의 아버지, 금사진의 불행에 자신이 일조(一助)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괴로
웠던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었다. 금사진은 이미 죽은 사람이니,
그녀는 자신의 죄를 씻을 수도 없었다. 잘못된 과거는 항상 이렇게 인간의 마음에
족쇄(足鎖)를 채우는 것이다.
여러 가지 말로 금청청을 위로하려던 매일도는 그 노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입을 다물었다. 마음의 상처는 자신의 의지로만 극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
던 것이다.
한참을 지나자 금청청이 얼굴을 들었다.
굳은 얼굴로 그녀는 말했다.
"아무도 용서할 수 없어요. 고숭무도 심화절도, 적염은 더욱더! 나 자신마저도."
매일도는 금청청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러나 정말 모든 일이 고숭무가 말했던 대로일까? 다른 사람이야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으나 심화절의 경우는? 그가 범인이라는 말을, 그들은
단지 고숭무의 입을 통해 들었을 뿐이다. "사매(師妹)! 심화절에 대해서라면 너무
확신을 가지지 말거라. 단지 고숭무의 말만을 듣고서 그를 범인이라 단정하는 것
은……"
금청청의 고개를 흔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사형께서는 그가, 우리가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짓을 말했다고 생각
하시는 건가요?"
그랬다.
죽음에 이르른 사람에게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정해진 것이니, 죽은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일전에 엽평
(葉枰)은 구천에게 잡혀갈 위기에 이르러 금청청이 나타남으로써 기적을 맛보았었
다.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도 기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는가? 누군가 그들
을 구하러 오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을? "아무라도 지금 나를 구해 주어
서, 고숭무와 심화절의 음모를 밝히게 해준다면, 난 설혹 그가 악마(惡魔)라
하더라도 용납하겠어요."
기적은 일어났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머리 위의 문이 열리며 빛이 들
어왔던 것이다.
"난 악마가 아니니, 용납하지 않아도 좋소. 다만, 내가 당신에게 진 빚을 갚을 기
회를 찾게 되어 다행이오."
머리 위의 비밀 통로를 열고 들어 온 사람을 보자, 금청청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 너는……?"
그림자는 엽혼(葉魂)이었다.
'적염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엽혼을 따라 밀실(密室)을 나온 매일도는 생각했다.
그들이 갇혀 있던 밀실은 적염의 침대 바로 아래에 출구가 있었다.
"아마 진소백의 거처에 있을 것이오."
매일도의 의문을 눈치챈 엽혼이 말했다.
금청청은 자신을 구해 준 것이 엽혼임을 알고는 줄곧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윽고
물었다.
"어떻게 네가 여기에 올 수 있었느냐? 또 다른 음모가 있는 거냐?"
엽혼이 금청청을 주시했다.
"당신이 내 동생 엽평을 구해 줬다는 말을 들었소!"
잠시 말을 쉰 엽혼이 다시 말했다.
"진소백이 나를 보냈소. 내게 빚을 갚을 기회를 준 것이오. 이제 하나의 빚을 갚았
으니…… 금 방주의 일은 나의
죽음으로 사죄(赦罪)하겠소."
엽혼의 굳은 말을 들은 매일도는 내심 감탄했다.
그는 엽혼에게서 진정한 사내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다시 뭐라 질문하려는 매일도를 막으며 엽혼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들어올 때는 경계가 허술했으나, 적염이 없는 지금의 경계는 엄밀(嚴密)해졌
을 것이니…… 조심해서 따르시오."
매일도와 금청청의 공력이 오보산의 약 기운에 의해 약해졌음을 알고서 하는 말이
었다.
그런데 매일도가 머리를 흔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니, 우리는 가지 않겠소!"
'무슨 소리?'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 금청청의 얼굴에 떠올랐 "만일 우리가 지금
탈출한다면 적염은 내일까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신의 마각(馬脚)을 숨기려 할
것이오. 차라리 여기 남아서 그녀의 음모를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증거를 잡아 내
겠소."
그는 금청청을 돌아보더니 말을 이어 갔다.
"우리는 이미 마혈(痲穴)이 풀렸으니 호신(護身)에는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을 것
이다. 괜찮겠느냐?"
금청청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도 남겠어요. 그리고 엽혼, 당신의 문제는……"
그녀가 뭔가 갈등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차후에…… 차후에 말하도록 해요."
* * *
신안추종 인소(引蔬)는 약속했던 사경을 조금 지나서 진소백의 거처로 왔다.
그는 매우 지쳐 보였다.
"고 당주(堂主)님의 거처를 샅샅이 훑었지만, 어디에도 금 소방주의 흔적은 없었습
니다. 그런데……"
"그런데 무엇이오?"
"비응방의 방도(幇徒)가 아닌 자들의 출입이 눈에 띄었습니다."
진소백은 무릎을 쳤다.
"누구인지 혹시 알아 보았소?"
인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지 않아도 그 중 한 명의 뒤를 밟느라 늦었습니다."
진소백이 웃었다.
"아주 좋구려. 그래, 누굽디까?"
"제가 뒤를 밟아 보니, 그가 문상 온 자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가지 않겠습니까?"
인소가 긴 설명 끝에 결국 이름을 말했다.
"그자는 다름 아닌 귀왕곡(鬼王谷)의 곡주, 갈현(葛鉉)이었습니다."
진소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제야 정말 앞뒤가 맞는구려."
인소는 나갔다.
진소백은 자리에 계속 앉아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정말 잘 맞는군. 정말 잘 맞아."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무엇이 그리 잘 맞는다는 말인가?"
진소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이번 사건이 의외로 빨리 해결되니 허탈해서 그런다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그가 물었다.
"참, 금청청은 구했는가?"
엽혼은 한숨을 쉬며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
진소백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매일도가 그처럼 영리하니, 금사진은 저승에서도 자식의 혼례(婚禮) 문제만은 걱
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엽혼이 빙그레 웃었다.
"나로서는 자네 덕에 어느 정도 마음이 편안해졌네."
엽혼의 말을 듣자, 진소백의 미간이 어두워졌다.
그의 말이 자신의 생명이 이제 겨우 육 일 남았음을 염두에 둔 것임을 아는 까닭
이었다.
엽혼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참, 자네 도대체 적염을 어떻게 불러 낸 것인가?"
진소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불러 낸 것이 아니네. 심화절이 그녀를 불러 갔지."
"그럼, 심화절에게 적염에 대해 말했단 말인가?"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 사람은 우리 편이 있어야 하네. 내 생각으로는 그가 가장 적당해 보였
어. 아마도 음모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적은 사람이 그일 테니."
엽혼은 수긍했다.
어차피 이 일은 비응방 내부의 일이니 최종적인 수습은 비응방의 인물이 해야만
했다.
"참!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더 있는데……"
"뭐든 말해 보게."
"화선(花仙)이 있는 곳에 자네가 좀 가주게."
화선을 찾아 살인 청부의 배후를 직접 추궁해 보라는 말이었다. 엽혼은 진소백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윽고 말했다.
"고맙네."
진소백이 굳이 이 일을 자신에게 시키는 의도가 그의 마음의 빚을 갚을 기회를 주
려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엽혼은 떠났다.
고숭무가 청부자라면 그는 아마 증거를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이제 날이 밝으
면 차기(次期) 방주가 선출되는가?"
진소백은 창 밖을 보았다.
흐르는 별빛!
이미 오경이 가까워진 시간이었으나 조금은 자두어야 했다.
내일, 아니, 오늘의 일을 위해.
그 시각!
졸린 눈을 비비며 엽혼의 약을 갈아 주러 들어갔던 의원이 뒤로 쓰러지고 있었다.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귀, 귀신(鬼神)!"
사라졌던 시체가 유령처럼 자신의 앞에 스르르 나타나자 그는 그만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엽혼이 자신이 누워 있었던 석대 아래 놓인 구절검(九節劍)을 찾으러 다시 나타났
던 것이다. 석실 밖에는 많은 경비무사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를 발견하
지는 못했다.
비밀 통로는 아직 엽혼의 뇌리에만 남아 있었으므로.
* * *
적염은 심화절의 광문당(廣文堂)에서 다시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물론 침대 아래 부분에 위치한 비밀 문을 점검해 보는 것이
었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녀는 심화절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 ─`금 소방주가 납
치된 것 같습니다. 적 부인께서는 어머니 되시니 알고 계심이 좋을 듯하여……
자신 혼자만을 불러 놓고 그런 말을 하다니……
"무슨 눈치라도 챈 것인가?"
그러나 눈치를 채었다면 무어 어떠랴?
어차피 내일이면 모든 일이 끝날 터인데……
"심화절아, 심화절! 드디어 내일이면 끝이로구나."
적염의 눈빛이 섬뜩하게 변했다.
2
드디어 날이 밝았다.
이날은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지니고 천응각(天鷹閣)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 수효는 정확히 여덟이었다.
숭무당주 고숭무(暠崇武).
광문당주 심화절(深化絶).
미망인(未亡人)인 적염(狄艶)과 순찰당주 사공두(司空斗).
집형전주 화골장 노굉(魯宏).
이상의 다섯이 주(主)였고, 나머지 셋은 각각 세력의 부당주들이었다.
숭무당의 부당주 귀조(鬼爪) 독소명(獨蘇冥).
광문당의 부당주 기서생 오명(烏明).
순찰당의 부당주 신안추종 인소(引蔬).
원래 이 자리에는 금청청까지 끼어 아홉이 있어야 했으나, 그녀는 지금 없었다.
광문당주인 심화절이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의 공증을 위해 다섯 분을 모시겠소."
그의 말과 함께 다섯 인물이 들어왔다.
공동의 장문인 풍운(風雲) 진인(眞人) 적일수(狄逸秀)! 화산의 장로인 현천자(玄天
子)!
이 두 명이 백도를 대표하여 참가했고, 흑수동(黑水洞)의 동주인 도곡(陶曲)이 흑
도를 대표하여 참가했다.
그리고 남은 두 명!
"두 분의 신분은 모두가 아실 터이니 말을 줄이겠소."
심화절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진소백과 섭수진!
전대 방주의 사인을 조사하고 있는 두 사람이니 말이다.
공증인들은 당연히 방주의 선출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다만 공정하게
진행(進行)되는지를 공증(公證)할 뿐이었다.
공증인들이 자리를 정하자 심화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노사(老師)께서 진행을 맡아 주시겠습니까?"
노사란 다름 아닌 집형전주 노굉이었다.
비응방에서 노굉의 위치는 독특한 데가 있었다.
전대의 방주였던 방곤 때부터 비응방을 지켜 왔던 인물! 그 뒤 비응방의 방세(幇
勢)가 급속도로 커지며 영입(迎入)된 인물 위주로 방의 주요 직책(職責)이
개편되자 집형전주라는 형식적인 자리를 맡고 있었다.
비응방은 기형적(畸形的) 급성장으로 인해 직제에 특이한 면이 있었다.
방의 요직(要職)에 있는 인물들이 길게는 십 년, 짧게는 오 년 정도에 걸쳐 영입된
사람들이었다.
가장 먼저 영입된 사람이 심화절!
그의 지혜와 금사진의 무공을 바탕으로 했던 비응방의 성장은, 칠 년 전 고숭무가
들어오면서 가속(加速)이 붙었던 것이다.
노굉은 이미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한때, 화골장(化骨掌)이란 무공으로 무명(武名)을 얻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나날이
늘어 가는
주름을 걱정하는 노인에 불과했.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로 방주 선출(選出)의 진행자로 뽑혔소. 아무쪼록 훌륭한
인물이 선출되어
방의 장래를 밝게 이끌기 바라오."
노굉이 나이답지 않은 우렁찬 목소리로 말을 하며 장내의 빈자리를 쳐다보았다.
원래 금청청이 앉았어야 할 자리였으나, 지금은 비어 있었다.
"소방주가 불행히도 참석을 하지 못했으니, 지금은 두 명에게만 방주의 후계권이
있소."
중인들의 눈이 모두 비응방의 문상, 무상으로 불리는 심화절과 고숭무에게로 쏠렸
다.
"하지만, 언제라도 소방주가 돌아올 수 있으니, 그녀에게 표를 던지는 것도 무관하
오."
노굉이 한마디 덧붙였다.
"단, 불행히도 그녀에게 나쁜 일이 생긴 것이라면, 차점자(次點者)가 자동적으로
차기 방주가 될 것이오."
노굉의 선언이 있은 후, 바로 표결이 이어졌다.
"지금까지의 방 내 서열에 따라, 먼저 고 당주부터 자신의 의견을 밝혀 주기 바라
오."
고숭무가 중인(衆人)의 눈길 속에서 일어났다.
"전 배운 것이 얕고 재주가 졸렬합니다만, 여러분이 믿어 주신다면 선(先) 방주님
의 뜻을 이어받아 비응방이
사천의, 나아가서는 천하의 대방(大幇)으로 자라나도록 이 한 몸을 아끼지 않을 것
을 감히 선언합니다."
후보(候補)로서 출마의 변(辯)에 더불어 자신이 스스로를 지지함을 밝힌 말이었다.
지켜보던 진소백의 눈이 반짝거렸다.
'호오. 이것 봐라? 몇 마디의 말로써 의견을 밝혔을 뿐 아니라, 은근히 지지를 호
소하기까지! 고숭무가 힘만 있고 머리가
없다는 말은 완전히 헛소문이었군!'
두 번째로 일어선 사람은 당연히 심화절이었다.
"아직 선(先) 방주의 살해범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큰일을 치르게 되어
심란(心亂)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 동도의 후원에 힘입어 방주위에
오르는 광영을 안는다면 모든 힘을 기울여 흉수의 정체를 밝혀
내고 말 것임을 맹서(盟誓)합니다."
그 역시 출마의 변에 덧붙여 지지 연설까지 한 것이다.
이때, 네 번째의 자리에 앉아 있던 사공두가 갑자기 일어섰다.
"이것은 안 되오. 나는 찬성할 수 없소."
노굉이 사공두를 돌아보았다.
"순찰당주는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사공두가 목청을 높여 말했다.
"우리 비응방은 금 방주의 피와 땀을 먹고 이렇게 성장했소이다. 그분의 피를 이
어받은 소방주가
차기 방주가 됨이 당연하거늘 소방주가 실종된 시기에 이런 선거를 치르다니요.
불가(不可)합니다."
사공두의 말에 노굉이 난색을 표했다.
"당주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나, 내일 방주의 장례식을 신임(新任) 방주가 진행해야
함은 피할 수 없으니……"
난처한 노굉을 거들어 준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사공 당주의 말씀은 백 번 옳아요. 저도 청아가 돌아가신 분의 뒤를 이었으면 한
답니다. 하나……"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지극히 맑고 깨끗하여 중인들의 가슴이 시원해지도록 하는
목소리였다.
적염! 선 방주 금사진의 정숙한 미망인 적염에게로 중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나 언제까지 방주의 자리를 비워 둘 수는 없는 일! 만일 투표권을 가진 분들이
청아가 방주위에 오름을
원한다면 투표로써 자신의 의견을 말해 주세요."
그녀가 슬픔 가득한 얼굴로 말하자 사공두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투표는 바로 이어졌다.
방주 후보로 나선 세 명은 권리가 없었으니, 여섯 명만이 차기 방주를 지명할 권
리가 있었다. 금사진의 갑작스런 죽음이 아니었다면 그가 지명한 사람이 차기 방
주가 되었을 것이었지만.
"결과를 발표하겠소."
중인들의 모든 정신이 노굉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고 당주를 지지한 사람이 하나! 금 소방주를 지지한 사람이 하나! 끝으로 심 당주
를 지지한 사람이 넷이니, 차기 방주에는 심 당주가 가장 많은 지지를 얻으셨소."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특히 사공두를 보는 적염의 눈에는 이채(異彩)가 반짝였다. 노굉이 중인을 진정시
키며 말했다.
"심 당주께서는 앞으로 나오셔서 방주의 위에 오르실 준비를 하시오."
향로에서 향연(香煙)이 하늘로 피어올랐다.
앞에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선 것은 심화절이었다.
노굉이 옆에서 말했다.
"이제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고할 것이니, 천기수사가 방주에 오름에 이의(異意)
가 있는 사람은 지금 말하시오."
세 번에 걸쳐서 이의가 있는 사람을 물어 보는 것은 하나의 관례였다.
첫 번째로 물어 보는 노굉의 말에 적염이 눈을 빛냈다.
'조관(曹串)과 앵아(鶯兒)에게서 연락이 올 때가 되었는데……' 그녀는 조관을 금
청청에게로 보냈다.
그녀와 매일도를 죽이고 사인(死因)을 조작하는 일을 맡겼던 것이다.
앵아는 기다리고 있다가 시간에 맞추어 심화절이 금청청을 죽였다고 위증(僞證)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제 심화절이 새로운 방주로 임명되기 직전(直前)이었으므로 그녀가 기다리던 때
가 되었다.
'나타나라, 앵아!'
적염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마지막으로 묻겠소. 이의 있으신 분은 지금 나서시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비응방에 새로운 방주가 탄생하였음을 하늘에 고하겠습니다."
노굉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대청(大廳)의 문이 왈칵 열리며 피투성이의 인영 하나가 뛰어드는 것이 아
닌가? "크, 큰일났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인영에게로 쏠렸다.
온몸이 피로 범벅이 되어 겁에 잔뜩 질려 떨고 있는 소녀! 바로 앵아였다.
인영의 모습을 본 적염의 눈에 득의(得意)의 빛이 떠오르고 고숭무 또한 입가에
남모르는 미소(微笑)가 맺혔다.
앵아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소방주 아가씨가 살해되셨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작은 소녀가 겨우 한 말이었으나, 여파(餘波)는 거대했다.
좌중(座中)이 충격으로 침묵했다.
3
긴장으로 팽팽해진 분위기를 먼저 깨뜨리고 나선 것은 심화절이었다.
"너는 소방주의 시녀 앵아(鶯兒)가 아니냐? 어떻게 된 거냐? 흉수는 누구냐?"
그는 답답한 듯 평소의 침착함을 잃고 여러 가지를 한 번에 물어 보고 있었다.
적염의 입가에 남들이 알아보기 힘든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지금 심화절을
비웃고 있었다.
'그래, 물어라, 심화절아. 네 질문이 너를 나락(那落)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앵아는
마침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휴, 흉수는 여기 있어요."
심화절이 재촉했다.
"누구냐? 어서 말해 보거라."
마침내 앵아는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앵아의 손끝을 본 중인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 * *
금청청의 가슴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刀) 한 자루가 닿아 있는 곳은 그녀의 목이었지만, 목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
다. 가슴에서 흘렀다.
피는 신선(新鮮)하고도 붉었지만, 금청청은 조금의 고통(苦痛)도 느끼지 않았다. 자
신의 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통은 도를 쥐고 서 있는 조관이 느꼈다.
삼수도(三手刀) 조관!
그는 일찍이 금청청에게서 모욕을 받은 적이 있었다.
때문에 적염이 금청청을 살해하려는 것을 알자, 자청(自請)했던 것인데…… "어떻
게 혈도를 풀었느냐?"
믿을 수 없다는 듯 조관이 말했다.
매일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악인은 항상 하늘의 뜻을 위배하게 되므로 그 말로(末路)가 비참(悲慘)한 법이
다."
조관의 가슴에 박힌 나무 꼬챙이를 빼내며 매일도가 말했다.
그가 금청청을 베어 가던 조관의 도를 제지(制止)하고 그의 가슴에 검을 대신한
나무 꼬챙이를 꽂았던 것이다.
바닥으로 둔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조관을 보며 금청청이 말했다.
"믿을 수 없어요. 그는 내 적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랬다. 사실 금청청은 자신이 조관보다 약자(弱者)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 번도 없
었다.
자신들을 죽이러 온 것이 조관임을 알고 나서, 매일도에게 간섭하지 말라고 말하
며 나섰던 것도 그런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그녀의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
단 오 초 만에 그녀는 조관에게 목을 베일 뻔했다.
매일도가 적시(適時)에 나서서 그의 가슴을 찌르지 않았다면, 지금 바닥에 쓰러진
것은 조관이 아니라 자신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실력을 평소에 반절도 보이지 않았다. 무서운 일이군. 이 자는 언제 비응
방에 들어왔느냐?"
매일도의 질문에 금청청이 조금 생각하다 대답했다.
"고숭무와 같이 들어왔어요."
금청청이 신음했다.
"만일 고숭무도 이처럼 자신의 실력을 감추고 있는 것이라면, 정말 무서운 일이에
요."
"그가 평소에 심계를 드러내지 않았던 예로 보아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고숭무
와 함께 들어온 자들이 모두 몇 명이나 되는지 아느냐?"
"어릴 때의 일이라서…… 부당주인 귀조 독소명(獨蘇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숭무당 인물들은 고숭무가 개인적으로 데리고 왔던 자들로 기억해요."
매일도의 눈에 다급함이 어렸다.
적염과 고숭무는 무서운 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심화절마저 그들의 음모에 제거된다면 아무도 그들을 상대할
사람이 없게 된다.
"사매! 빨리 가자."
매일도와 금청청의 신형이 천응각(天鷹閣)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중인들은 자신의 눈을 믿기 힘들었다.
앵아가 흉수라 지적한 당사자는 그 사실이 더 더욱 믿기 힘들었다.
보라!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사람을!
바로 고숭무였다!
"무, 무슨 소리냐?"
고숭무가 당황하여 외쳤다.
당황하기는 적염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이 아이는 이 시간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
었다.
그러나 당연히 심화절을 가리켜야 할 손가락이 고숭무를 가리키다니…… 어떻게
된 것인가?
"무슨 소리냐? 도대체 네가 나와 무슨 감정이 있어 이런 누명을 씌우는 것이냐?"
그가 소리를 높이자 앵아는 떨며 심화절의 품에 안겼다.
"무서워요. 당주님!"
심화절이 그녀를 다독였다.
"안심하거라. 지금은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애를 잠시만 보호해 주시
겠습니까?"
심화절이 앵아를 실내에서 같은 여자인 적염에게 넘기고서는 고숭무의 앞을 막아
섰다.
"고 당주! 화를 낼 때가 아니오. 어떻게 된 일인지 해명을 하셔야 하오!"
평소 때와 다르게 심화절의 목소리엔 은은한 노기마저 배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숭무를 보는 중인들의 눈에는 모두 의혹이 묻어 있었다.
당황한 것일까?
고숭무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 너!"
지금 그의 손은 적염의 품에 안긴 앵아를 가리키고 있었다.
앵아는 그의 손길에 더욱 겁이 났던지 적염의 가슴을 놀란 새처럼 파고들었다.
"고 당주!"
심화절이 외친 이번 일갈(一喝)에는 진기가 가득 서려 있어 고숭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정신이 없었다. 원래 앵아는 심화절이 금청청을 죽였다고 증언을 해야만 했
던 것이다.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그러나 길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겨야 했다.
"심 당주, 이건 음모(陰謀)요. 내가 어찌!"
고숭무의 변명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다시 문이 부서져라 흔들리며 하나의 그림자가 실내로 들이닥쳤으므로.
아니, 정확히는 시체(屍體) 하나가 들어왔다.
"당신은 아직도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오?"
냉랭한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매일도였다.
그리고 시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조관의 것이었다.
"당신이 삼수도 조관을 보내 나와 금 사매를 살해하려 했음을 부인하는 것이오?"
이번에는 적염마저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매일도가 살아서 걸어오다니.
'그렇다면 금청청도……'
그녀가 미처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痛
症)이 가슴에서 전해져 왔다.
"네가 감히!"
앙칼진 음성이 터져 나오며 폭음과 함께 적염의 품에 있던 앵아가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비수(匕首) 하나가 피를 뿌리며 들려 있었다.
중인들은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앵아가 적염을 칼로 찔렀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일반에 연약하다고 알려진 적염
이 칼에 찔리고도
그처럼 강한 장력(掌力)을 쏘아 낼 수 있는 고수였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입으로 피를 뿜어 내면서 외치는 앵아의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
"당신이 고숭무와 음모하여 금청청 아가씨를 해치려 했던 사실이 언제까지나 비밀
로 남을 줄 알았나요?"
중인들은 놀람으로 인해 머릿속이 비어 가는 것을 느꼈다.
당사자인 적염과 고숭무는 이미 아무 생각도 뇌리에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이건 무슨 소리냐? 앵아, 도대체……"
적염의 말에 앵아가 냉소했다.
"흥! 당신은 처음에 오보산을 찻잔에 타서 아가씨를 납치하였고, 다음엔 아가씨를
죽인 후, 심 당주님에게 모든 누명을 씌워 권력을 잡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요?"
그토록 절세적이던 적염의 머리도 이 순간만은 주인을 배반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더듬거렸다.
"무, 무슨 말을!"
"흥, 당신이 만일 약속대로 내게 금화를 주기만 했더라도 나는 어쩔 수 없이 당신
의 말을 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욕심 많은 탕녀(蕩女) 같으니. 그깟 돈 몇 푼
이 그렇게 아까웠나요?"
적염이 몸을 떨며 발악적으로 외쳤다.
"무슨 말이냐. 너는 분명히 어제 금화를……"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의 실언(失言)을 깨달은 적염은 입을 다물었다.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갔다.
이 정도의 유도(誘導) 심문(審問)에 넘어가다니!
그녀는 계속되는,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당황하여 평소의 냉정함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이어지는 앵아의 말이 쐐기를 박았다.
"당신이 고숭무와 야합(野合)하여 방주님을 살해하고, 이어서 심 당주님과 소방주
아가씨마저 제거하려 한 사실을 부인하나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미친 듯이 외치는 절규와 함께 입구에서부터 하나의 인영이 날아왔다. 모든 방어
를 배제한 채 오직 적염을 죽이고자 하는 일념만으로 가득 차 내리긋는 검!
검의 주인은 금청청이었고, 담고 있는 기세(氣勢)는 일도단천(一刀斷天)! 아버지를
죽인 것이 적염(狄艶)이라는 말에 이성을 잃은 그녀가 매일도의 뒤에서부터 날아
올랐던 것이다.
적염을 노리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금사진의 유일한 충신(忠臣)인 사공두도 날아올랐다.
그의 박룡도(搏龍刀)가 도집에서 빠져 나와 빛을 뿌리며 적염의 목을 노렸다.
앞뒤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된 적염이 호통을 지르며 양손을 휘두르니…… 팽팽
한 긴장으로 과열(過熱)되었던 장내는 급기야 폭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