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장 반도철권(叛徒鐵拳)
1
어두운 곳이다.
때로 어둠은 인간에게 안도감을 준다.
특히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는 자들이라면 어둠 속에서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러
나 음모의 희생자에게 있어 그 어둠은 다만 공포(恐怖)일 뿐이다.
지금 어두운 실내의 바닥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눈만 깜박이고 있는 모습…… 아마도 마혈(痲穴)을 제압당한 것 같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문틈 새로 들어오는 빛에,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이 적응하지 못하고 아려 오는 것
을 느낀 금청청은 눈을 찡그리며 외쳤다.
"고숭무! 어찌 네가 이럴 수 있느냐?"
사내는 조용히 말했다.
"믿기 힘든 일은 항상 일어날 수 있는 법이지."
말과 함께 그가 등잔에 불을 붙이자 실내가 밝아졌다. 밝아졌다고는 하나 간신히
눈앞만이 보일 정도의 작은 등잔이었을 뿐! "이제 하루만 지나면 비응방에는 새
방주가 탄생한다. 너는 결과가 어찌 될지 궁금하지 않느냐?"
금청청이 이를 갈았다.
"이, 이 잡놈…… 네가 아버지를 죽인 흉수였더냐?"
고숭무는 금청청의 욕설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너는 내가 금사진을 죽였다고 생각하느냐?"
이 말은 뜻이 모호하여 그가 한 일인지 아닌지, 판단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누가
고숭무를 심계가 깊지 못한 인물이라 했던가?
세간에 알려진 고숭무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대단한 참을성에다 심기(心
機)요. 세간에 알려진 당신에 대한 소문은 잘못된 것이 많았구려."
이 말은 이때까지 바닥에서 정신을 잃고 있던 매일도의 입에서 나왔다.
고숭무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네 무공을 고려하여 약을 많이 썼거늘…… 화산옥기린의 내공이 예상보다 훨씬
정순(精純)하구나."
"과찬이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렸으니."
고숭무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지 않느냐, 금청청? 이런 훌륭한 청년을 동반자로 삼을 수 있게 되었으니."
금청청이 외쳤다.
"무슨 뜻이냐? 이 잡놈아!"
금청청의 입에서 계속하여 욕설이 나오자 고숭무의 눈도 음침해졌다.
"네년은 살아남지 못한다. 매일도 역시! 기대되지 않느냐? 너희 둘이 어떤 죽음을
맞게 될지? 하하하!"
고숭무의 통쾌한 웃음에 금청청은 피가 식어 감을 느꼈다.
이렇게 죽어야 하다니. 흉수를 알았는데 세상에 알리지도 못하고 죽어야 하다니! "
내가 비록 죽더라도 너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 심 당주가 남아 있다. 그는
지혜가 깊으니 기필코 너의 음모를 알아 낼 것이다."
금청청의 말에 고숭무가 묘하게 웃었다.
"너는 심화절은 믿느냐?"
금청청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이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네가 천화
전에 와서 적 부인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느냐?"
매일도가 말을 받았다.
"그 일에 누군가의 의도(意圖)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오?"
고숭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는 말이 통하는구나. 심화절(深化絶), 그 죽일놈이 방주를 해치고 나서 너
희를 이용해
나와 적염마저 없애려고 했지. 흥!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음모를 우리가 이미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금청청의 몸이 격동으로 흔들렸다.
"그, 그럼 아버지를 해친 것이……"
"크하하, 그렇다. 금사진은 그야말로 주위에 동지(同志)가 하나도 없었지. 온통 적
이었던 것이다. 흥!
그의 무공이 그렇게 높지만 않았더라면 이미 예전에 내가 죽였을 것이다. 결국에
는 심화절의 잔꾀에 당하고 말았지만."
금청청은 고개를 흔들었다.
"믿을 수가…… 믿을 수가 없어!"
매일도가 그녀를 감싸며 물었다.
"당신이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무슨 의미요?"
고숭무가 냉랭히 말했다.
"너희가 곧 죽는다는 의미이지."
고숭무는 격앙이 된 듯 말의 속도를 높여 갔다.
"금사진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불행했던 인간이었지. 그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 그의 아내였던 방응향은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그를 성불구자로 만들었
다."
"……!"
금청청은 눈앞이 하얗게 되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의 수하들은 모두 그를 죽이고자 하였고, 새로 얻은 아내마저 배신하였지! 크하
하, 하나뿐인 딸마저 그를 미워했으니 살아 있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으랴?"
고숭무가 말을 이어 감에도 금청청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
그토록 강해 보였고, 그래서 더욱 미웠던 아버지가…… '그렇게 불행했었다니…
…!'
금청청은 다만 이 순간 자신의 생명을 누군가 끊어 주기만을 바랐다. 저승에서라
도 금사진을 만나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고 싶었다.
금청청을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던 매일도가 고숭무에게 말했 "아직은 사공 당주
가 남아 있소. 당신들은 결국 웃지 못할 것이오."
고숭무의 눈이 흔들렸다.
"사공두라! 그는…… 흥! 어쨌든 심화절이 제거되고 나면 그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
다."
"심화절을 제거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오?"
고숭무가 웃었다.
"너희들은 천심비도에 당해 죽은 시체로 발견될 것이니 굳이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를
제거할 방법을 찾겠지. 아마 사공두가 찾지 않겠느냐?"
고숭무은 웃으며 방에서 나갔다.
"크하하! 내일이면 너희는 죽은 목숨이니, 오늘밤에 꿈이나 잘 꿔 두거라."
그의 웃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매일도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고숭무는 자신들이 심화절에게 죽은 것으로 꾸민 뒤 심화절과 사공두를 싸움 붙
이려는 것이었다.
사공두는 충심(忠心)이 강하다 하나 지닌 바 무공은 심화절보다 못하니 살아남기
가 어려울 것이다.
그때를 이용하여 고숭무가 심화절마저 제거하면 비응방의 차기 방주는 자연 그의
손에 들어갈 것이 아닌가?
매일도는 치를 떨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아직 체내에 약 기운이 남아 있었고, 게다가 마혈(痲穴)마저 제압된 상태였다.
금청청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떡하나……'
탈출할 방법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는 더 더욱 없었다.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때때로 깊은 생각은 기적을 만들기도 하므로.
* * *
도움의 손길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왔다.
진소백은 아직 이백여 장 밖에 있었으니, 그의 도움은 아니었다. 날카로운 빗!
쇠로 만든 빗 두 개가 공기를 가르며 황령주(荒領主)와 현령주(玄領主)의 손목을
노리고 날아 들어왔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비록 섭수진에게 치명타를 날릴 수는 있지만 자신들의 손목도
무사하지 못함을 안
두 영주가 권(拳)을 거두었다.
동시에 다른 손을 들어올려 빗을 쳐내며 빗장수를 노렸다.
그러나 섭수진 또한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찢겨졌던 검막이 다시 이어지며, 기세가 크게 일었다.
그 바람에 현령주는 빗장수를 노리던 손을 다시 거두어 섭수진을 상대해야 했으니
…… 빗장수는 단지 황령주의 공세만을 감당하면 되었다.
이것이 바로 공격으로써 수비를 대신한다는 말의 의미! "왜 돌아온 거죠?"
섭수진이 다시 현령주를 압박해 가며 물었다.
비록 부상을 입었다고는 하나 현령주 하나라면 그녀가 상대하기 수월하였다.
그러나 빗장수가 황령주를 감당하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 이를 악물고 빗을 마구
휘두르며 그가 외쳤다.
"당신들에게 또 다른 은혜를 입었으니, 내 어찌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오…… 욱!"
말을 하는 바람에 정신이 산만해져 일권을 가슴에 맞은 빗장수는 신음했다.
섭수진은 공세를 배가하여 현령주를 공격했다.
빨리 현령주를 해치우고 빗장수를 도와 주려는 뜻이었지만, 현령주도 만만한 상
대는 아니었다.
섭수진의 마음만 초조해지고 있을 때,
퍼퍼`─ 펑!
일격을 얻어맞고 몸이 느려졌던 빗장수가 다시 연환삼권을 맞고 뒤로 물러나고 있
었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그의 부상(負傷)이 심각한 것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때 이제 이십여 장을 남겨 두고 달려오고 있던 진소백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외
침이 울렸다.
"멈춰라!"
말과 동시에 진소백의 신형이 단숨에 이십여 장을 단축(短縮)하며 황령주를 덮쳐
갔다.
전신을 활과 같이 굽혀 그 탄력을 이용하는 이 무공의 이름은 궁신폭(弓身爆)! 벽
력세가(霹靂勢家)의 독문신법 중 하나였다.
지금은 세인들에게 잊혀진 이 무공을 어찌 진소백이 안단 말인? 황령주가 급히 권
세를 되돌려 진소백의 공격을 막아 가자, 빗장수는 죽음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났
다.
내상이 큰 탓에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며 그는 믿기 힘든 광경을 보았다. 보라!
황령주의 권세가 마치 물레방아처럼 이어지며 진소백의 전신을 압박해 가는 것을!
연환권(連環拳)의 묘미는 바로 쾌에 있으니, 눈 깜짝할 사이에 오 권이 작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믿기 힘들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진소백의 손!
허공을 내리긋는 그의 손길이, 마치 용이 유영(遊泳)하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며 현
령주의 다섯
주먹을 하나로 꿰어 가고 있지 않은가?
"오 성에 불과한 파황권으로는 막을 수 없다."
진소백의 외침과 더불어, 일수(一手)에 오 권이 그대로 붕괴되었다.
퍼펑!
굉음이 일어나며 현령주가 격퇴될 때 중인들의 입에서는 놀람에 가득 찬 음성이
튀어나왔다.
"용음십이수(龍音十二手)!"
개선( 仙)의 용음십이수!
허공을 노니는 손길을 따라 용의 울음이 들리면 그 앞에 남아나는 것이 없다는
절학이었다.
실전(失傳)되었다는 개방의 절학이 지금 진소백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2
상황은 바뀌었다.
진소백이 가세하자, 불과 셋이지만 복면인들을 밀어붙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섭수진은 지쳐 있었지만, 다시 힘을 내어 복면인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빗장수도 용기 백배하여 철빗을 휘둘러 가니, 복면인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기
에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순간,
"어서 몸을 전권(戰圈)에서 빼내시오."
섭수진과 빗장수의 귓가에 진소백의 전음이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비록
두 명의 영주밖에 고수가 없지만 다른 두 명이 온다면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오.
게다가 이 흑회(黑會)라는 세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은 것 같으니 일단 몸을 피하
시오."
진소백의 말에 섭수진 등은 수긍하며 허초를 휘둘러 주위의 공간을 넓힌 뒤, 경신
술을 전개했다.
"도망간다. 쫓아라!"
황령주가 수하에게 외치며 섭수진을 막으려 했다.
그의 주먹이 검어지며 일권이 섭수진을 향해 뻗어 나갔지만, "하하…… 어딜!"
낭랑한 웃음 소리와 더불어 진소백의 손 그림자가 그의 주먹을 막아 버렸다.
"이놈의 자식!"
다시 황령주가 노호하며 권을 찔러 왔으나 그 역시 진소백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퍼엉!
황령주가 모래먼지를 뒤집어쓰며 물러나는 모습 뒤로, 어느 정도 멀리 간 섭수진
의 모습이 보이자, 진소백도 낭랑히 웃으며 몸을 날렸다.
"생각 같아서는 너희 중 한 놈을 잡아 배후를 캐보고 싶으나, 하하, 지금은 상황
(狀況)이 여의치 않으니,
다음에 만나면 꼭 알아 내 주마!"
무인지경을 가듯이 몸을 피하는 진소백을 보며, 현령주가 미친 듯이 외쳤다.
"어서 막아라! 어서 매복을 발동하라!"
어른은 물론 아이를 이긴다.
하나 수십 명의 아이가 떼를 지어 달려든다면 어떨까? 비록 개개인의 능력은 진
소백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달려드는 복면인들의 수효는 너무 많았다.
아무리 빠른 쾌검을 피할 수 있는 고수라도 쏟아지는 빗방울을 피하기는 힘든 것
이었다.
어쩌면 기습 공격에서 바로 후퇴하지 못하였을 때, 이런 위기는 예감되고 있었다
고 할 수 있다.
다시 하나의 화살이 빗장수의 장딴지에 박혔다.
진소백이 빗장수에게 날아드는 화살들을 쳐내며, 그를 독려했 "힘을 내시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숲이니, 화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오."
빗장수는 이를 물었고, 힘을 짜내어 숲으로 뛰었다.
산 아래의 평지가 끝나고 이어지는 숲으로 들어서며 그는 다시 하나의 화살을 발
뒤꿈치에 맞고 말았다.
"우욱!"
빗장수의 신음에 진소백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런 것이 다수의 적을 상대하며 후퇴할 때에 나타나는 좋지 않은 점이었다.
혼전을 벌인다면 적은 화살이나 암기를 함부로 쓰지 못하리라. 그러나 언제까지
싸우고만 있겠는가?
수백 명의 복면인들을 모두 다 죽이지 못하는 이상은 언젠가는 후퇴를 해야만 하
고, 이런 위기를 각오해야만 했던 것이다.
빗장수를 부축하느라 발걸음이 느려진 진소백을 복면인들이 쫓아 왔다.
어깨를 찔러 오는 복면인의 검을 왼 손바닥으로 밀어 내며 진소백이 말했다.
"약속 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힘을 내시오."
섭수진은 이미 저 앞에 가고 있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양쪽 풀숲이 갈라지며 진소백의 다리를 노리고 한 명의 검수가 일검을 찔
러 오는 것이 아닌가?
빠른 공격이었지만 진소백은 그보다 더 빨랐다.
이미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올라가 그의 일검(一劍)을 무위(無爲)로 만들고 있었으
므로. 그러나 어찌 짐작이나 했을까?
진소백이 피하는 방향을 예상이나 했다는 듯이 좌우(左右)에서 각각 두 명의 복면
인들이 도와 창, 검과 월(鉞)을 찔러 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들의 공세는 진소백이 몸을 띄우기 전부터 발동하고 있어서, 흡사 진소백
이 그들의 공세
속으로 일부러 들어간 형세가 되고 말았다.
허공이라 힘을 받을 곳도 없으니 진소백으로서는 그야말로 절명의 순간! "찻!"
맑은 호통과 더불어 진소백이 부축하고 있던 빗장수를 앞으로 힘껏 던져 내었다.
빗장수의 몸이 앞으로 뻗어 감과 아울러 진소백의 몸도 반작용(反作用)에 의해 뒤
로 밀려났다.
그로 인해 원래 진소백이 있던 허공은 그야말로 허공(虛空)으로 변했으니.
"이럴 수가!"
놀람에 찬 외침이 복면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며 그들의 병기는 서로를 노리게
되었다.
칭! 치잉!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복면인들이 서둘러 공세를 회수할 때! 뒤로 밀려
나던 진소백의 몸이 나뭇등걸에 닿으며 활처럼 휘어졌다.
휘익!
휘어졌던 진소백의 몸이 펴지자, 시위를 벗어난 살과도 같이 그의 신형이 뻗어 가
고 있지 않은가?
궁신폭(弓身爆)!
복면인들이 다시 병기를 회수한 틈을 번개같이 뚫고서 진소백이 날아갔다.
말은 길었으나, 그 변화는 눈부시게 빨라 진소백이 던져 내었던 빗장수의 몸이 땅
에 떨어지기도 전에 다시 진소백이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저, 저!"
그제서야 장내에 나타난 현령주가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진소백이 향하는 방향을
보고서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흥, 저 방향에는 천장단애(千丈斷涯)가 있을 뿐이니 도망칠 수 없다. 어서 쫓아
라!"
아까 자신이 진소백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을 잊었을까? 현령주가 수하들을 독
려하기 시작했다.
절벽은 정말 있었다. 숲이 끝나자 절벽이 이어졌던 것이다.
진소백이 도착했을 때 섭수진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오는군요."
진소백이 절벽 가에 내려서자 섭수진이 말했다.
"조금 늦었소."
섭수진이 재촉했다.
"이럴 게 아니라 어서……"
그러나 절벽을 내려다본 진소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복면인들을 기다려 봅시다."
진소백의 말을 바로 이어서 숲속에서 괴소를 흘리며 두 영주(領主)가 나타났다.
그들의 뒤로 수효를 셀 수 없는 궁수(弓手)들의 모습이 보였다.
진소백은 암중에 전음으로 섭수진에게 말했다.
"만일 화살을 쏜다면 지체없이 빗장수를 데리고 뛰어내리시오."
"크흐흐,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느냐?"
현령주의 말에 진소백이 일부러 섭수진에게 소리를 키워 말했 "저 까만 까마귀 놈
은 자신이 나에게 일초에 패퇴했던 것을 벌써 잊어버린 것 같구려."
현령주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놈의 자식. 아까는 창졸간이라 당했지만…… 우웃!"
현령주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이미 진소백이 덮쳐 오고 있었던 것이다.
신선이 하늘을 건너듯이 오 장 거리를 단숨에 밟으며 진소백이 다가오자, 현령주
는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뒤로 물러났다.
"하하! 때리지 않을 테니 안심하거라."
진소백은 낭랑히 웃으며 몸을 틀어 현령주 옆에 서 있던 수하의 검을 잡아 갔다.
타탁!
손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에 이어 현 십사호는 창졸간에 자신의 검을 빼앗기고 말
았다. 이어……
"과거를 기억 못 하는 까마귀를 길들이는 데는 역시 칼이 최고지!"
진소백이 다시 현령주를 덮쳐 가는 것이 아닌가?
한데 그 방향이 묘했다.
진소백이 비틀대듯이 밟아 가는 방향은 묘하게도 현령주와 궁수들의 사이를 갈라
놓고 있어, 활을 쏜다면 현령주가 맞게 되었던 것이다.
"버릇없는 까마귀는 무릎을 꿇어라."
진소백이 외치며 검을 현령주의 머리로 휘둘러 가자 현령주는 부득이 무릎을 굽혀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과연 검을 드니 까마귀의 버릇이 고쳐지는구나! 어디, 이번엔 네가 검을 가
지고 재롱을 부려 보겠느냐?"
말과 함께 진소백이 검을 거꾸로 들어 던졌다. 손잡이가 현령주를 향하도록 던져
내었던 것이다.
'무슨 짓을!'
지켜 보고 있던 섭수진은 심장이 튀어나오도록 놀랐다.
아니나다를까, 현령주가 손을 내밀어 검을 잡아 버렸다.
검날이 아닌 다음에야 현령주 또한 고수이니 충분히 잡을 수 있었던 것인데…… "
까마귀가 칼까지 잡을 수 있다니, 참으로 영특한 놈이로구나. 어디 이것도 받아 보
아라."
순간, 진소백의 두 손이 가슴으로 모아졌다가 앞으로 뻗어 나왔다. 은은한 용음!
용음십이수 중의 잠룡출운(潛龍出雲)이었다.
'끝났구나!'라고 섭수진은 생각했다.
이전까지의 현령주의 능력을 보아서는 도저히 진소백의 이번 일격을 막을 수가 없
었다.
게다가 손에 들린 검(劍)은 파황권(破荒拳)과 같은 권법을 익힌 권법자에게는 오히
려 방해가 되고 있었으니……
섭수진은 진소백이 검을 건네 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현령주의 오른손에 들렸던 검이 비스듬히 뉘어지더니 진소
백의 용음수를
당당히 막아 가고 있지 않은
파팍!
자신이 뿜어 낸 경기(勁氣)가 상대의 검기에 막히자 진소백은 다시 낭랑히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동시에 몸을 돌려 섭수진 등이 서 있는 절벽으로 향했다.
"하하! 좋군, 아주 좋아! 섭 소저, 이제 갑시다."
뜻 모를 소리를 외치며 진소백이 절벽을 향해 몸을 띄웠다.
이때까지 멍하니 서 있던 황령주의 눈에 다급함이 어렸다. 그리고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쏴라, 어서 쏴!"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사이로 진소백을 비롯한 삼 인의 신형은 절벽을 향해
떨어져 갔다.
쏟아지는 화살 비!
그리고 낭랑히 웃으며 그 빗속을 떨어져 내리고 있는 진소백의 모습! 멀리서 본다
면 빗속에 떨어지는 낙화(落花)를 보는 것 같으리라. "하하, 우중낙화(雨中落花)라!
이렇게 운치(韻致)가 있으니, 까마귀, 네 건망증은 일단 용서하마! 하하하!"
웃으며 진소백은 떨어져 갔다.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3
다시 밤이 되었다.
이 밤의 의미는 특별했다. 특히 적염에게는.
그녀 앞에는 지금 앵아가 있었다. 또한 앵아의 앞에 놓인 것은 비단과 패물(貝物),
그리고 금화(金貨)들이 아닌가?
"너는 이번의 일을 잘 처리해 주었다. 내일 일도 믿을 수 있겠지?"
앵아는 막 진주로 만들어진 목걸이 하나를 목에 걸어 보며 대답했다.
"예, 마님! 문제없어요."
앵아는 서역에서 들어온 진주 가루가 든 분(粉)을 보며, 생글거리고 있었다. 이 가
루를 바른다면 자신의 손도 희게 될까?
"좋아, 앵아. 이제 그만 물러가거라."
앵아는 물러갔다. 손에는 보화들을 가득 들고서.
앵아가 나가자, 적염의 등뒤로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그녀와 정염을 태웠던 사내!
"내일이면 이제 내가 방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인가?"
적염이 달콤하게 웃었다.
"우리 둘이 비응방을, 나아가서는 사천(四川) 무림을 마음대로 다스리게 된다는 뜻
이죠. 그러나!"
그녀가 얼굴을 굳혔다.
"추호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돼요. 심화절은 결코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니!"
사내가 음침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당신에 대해 모르고 있어. 당신이 천기수사를 능가하는 모사(謀
士)임을 모르는 이상, 승리는 우리 것이 되겠지."
사내도 웃고 여인도 웃었다.
밤이 깊어 갔다.
* * *
밤이 깊어서야 진소백 들은 비응방으로 돌아왔다.
약속대로 금청청을 찾아갔으나, 진소백이 만난 것은 광문당의 부당주인 오명(烏
明)과 순찰당의 부당주 인소(引蔬)였다.
진소백은 신음했다.
"도대체 누구의 짓인지도 모른단 말이오?"
오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흔적이…… 다만 같이 실종된 앵아란 시녀를 찾는다면 단서(端緖)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들으나마나 한 소리였다.
금청청은 내일 비응방의 방주 선출에서 유력한 후보 중의 하나였다. 그녀의 실종
으로 이득을 얻는 자들을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심화절이나 고숭무 중의 하나가
범인이리라.
그러나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은밀히 만나자고 했던 것은 무언가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된 탓이었
을 가능성이 컸다.
누구의 비밀을 알아 냈던 것일까?
앵아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이 실수였을 것이다.
진소백이 문득 오명에게 물었다.
"찻잔에서 오보산(五步散)이 검출되었다고 했지요? 주변의 약포를 알아 보았소?"
오명이 고개를 흔들었다.
"누구도 오보산의 재료가 되는 약재를 사 갔던 일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방 내의
약실(藥室)`─`엽혼이 누워 있는 곳을 말함이었다`─`에서도 사라진 약재가 없습니
다. 다만……"
"다만 무엇이오?"
오명이 나직이 말했다.
"혼절했던 적(狄) 부인의 천화전에서 다량의 약재를 사 갔습니다만, 몸이 허약하신
적 부인의 치료를 위한 것이라 사료되니……"
내심 고개를 끄덕이는 진소백이었다.
누가 금청청을 납치했건 그만한 곳에서 흔적을 남긴다면, 매우 어리석은 자이리라.
이때까지 조용히 있던 인소가 끼여들었다.
"치밀한 자들입니다. 아무리 조사해도 미세한 흔적조차 없습니다."
진소백이 비로소 인소를 보았다.
"당신이 신안추종(神眼追從)이라 불리는 인소(引蔬)요?"
인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허명(虛名)만 얻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다니!"
진소백이 문득 오명에게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심 당주에게 내가 한 시진 이내로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시겠소? 급한 일이오."
오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는 심화절에게 말을 전하러 물러갔다.
인소와 둘만이 남게 된 진소백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금사진에 대한 충성이 지극했던 인물로 들었소. 가장 먼저 방주의 시신을
발견했던 것도 당신이지 않소?"
인소는 그때를 떠올리기라도 한 듯 몸을 떨었다.
"제가 조금만 더 일 처리를 잘했더라면 금 방주는, 그분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오. 설혹 당신이 잘못했다 생각한다면 그분이 남기신 유일한
혈육인 금청청 낭자를 잘 보살피는 것으로 만회할 수 있지 않겠소."
"진 공자께서는 제게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의 혐의는 모두 세 명에게 둘 수 있소."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우선 내일 비응방의 방주 자리를 두고 금청청과 겨루게 될 고숭무와 심화절의 혐
의가 짙소."
"믿고 싶지는 않지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진소백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역시 나도 믿고 싶지는 않지만 마지막 혐의는 약재를 사 갔다는 적 부인에게 둘
수밖에 없소!"
인소가 즉시 이의(異意)를 제기했다.
"하지만 그분은……"
"나도 알고 있소. 그렇지만 아주 희박한 가능성 하나라도 놓칠 수 없는 것 아니겠
소?"
적염은 비응방의 대부분 인물에게서 신망을 얻고 있었다.
항상 현숙하게 방주 부인의 역할을 수행해 왔던 그녀가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은 당
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일 그런 인물이 악인(惡人)이라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심 당주에 관
해서는 내가 탐문을 할 터이니, 고 당주의 거처인 숭무당(崇武堂)은 당신이 수고를
해주시오."
인소는 비로소 진소백이 오명을 먼저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일 심화절이
범인(犯人)이라면 오명 또한 같은 편일 확률이 컸으므로.
하나 인소에겐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럼, 적 부인에 대해서는……?"
"내가 따로 생각한 바가 있으니, 염려 마시오."
인소 또한 밖으로 나갔다.
진소백은 적염(狄艶)을 누구에게 탐문시키려는 것일까?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만일 적염이 범인이라면 가장 무서운 일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다만 몇 개의 별만이 반짝일 뿐, 어둠에 덮여 있었다.
"만일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을 속여 온 것이라면, 누가 그처럼 무서운
여인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 * *
심화절은 진소백을 환대했다.
진소백 또한 원래 그에게 호감을 가졌던지라 환대에 반갑게 응수하였다.
형식적인 인사가 오간 후, 진소백이 말했다.
"주위를 물리쳐 주시겠습니까? 상의(相議)드릴 일이 있습니다."
심화절이 눈짓으로 주위의 무사들을 물러가게 했다.
"그것이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믿기는 힘들지만 고 당주의 파황권이 분명했습니다."
진소백은 옥산(玉山)의 사성곡(四聲谷)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심화절에게 말했던
것이다.
물론 신주낭객과 천랑파에 얽힌 일은 빼고, 수상한 복면인들을 쫓다 일어난 일로
꾸며 말하였다.
심화절로서는 충격이었음이 틀림없었다.
"아미옥녀도 같이 있었으니 믿으셔도 됩니다. 그녀가 증인이 될 수도 있고요."
심화절은 신음(呻吟)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고 당주가 외부와 결탁해 다른 세력을 만들었다니. 그 세력은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어떻게 그런 세력을 만들었을지 짐작 가시는 곳은 없습니까?"
진소백의 질문에 심화절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고 당주는 광산(鑛山) 개발에 관한 일로 한동안 방을 떠나 있었으니, 혐의를 둔다
면 그때가 가장 짙다고 생각되오."
진소백의 눈에 수긍하는 빛이 어렸다. 이 천기수사의 지혜는 그조차도 놀라울 때
가 있는 것이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축이 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심화절이 고개를 흔들었다.
"알 수 없소! 도대체 누가 있어……"
진소백이 힘있게 말했다.
"어쨌든 하나는 확실합니다. 내일 방주 선출에서 그들은 마각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한 자들이라면 틀림없이 내일의 일에도 깊은 음모를 깔고 있
을 테니……"
진소백이 잠시 쉬었다가 심화절을 바라보았다.
"내일의 일은 자신이 있습니까?"
심화절이 당황해 물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게요?"
"하하, 저는 천하의 천기수사께서 방주 선출에 대비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었다는
말씀은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
심화절은 한참 동안 진소백을 바라보다가 뜻밖에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하지 않겠소. 이거 근래 들어서는 속마음을 너무 자주 들키는 것 같구려."
진소백이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비응방의 방주가 누가 되든 저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심화절은 진소백의 입을 주시했다.
"고숭무와 같이 남몰래 일을 꾸민 자가 방주위로 올라서는 것만은 막고 싶습니다."
심화절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나 또한 그다지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소. 나 자신도 암중에 사람들을 포섭
하여 내일의 방주 선출에서 이길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진소백은 이 인물이 의외로 솔직하다고 느꼈다.
심화절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고숭무처럼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일 생각은 전혀 없소. 나는 단지 금 방
주가 이룬 비응방의 위용(偉容)을
더욱 높이고 싶은 생각뿐이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진소백은 생각했다.
아마 비응방을 위해서는 이런 인물이 방주가 되는 것이 좋을는지도 몰랐다.
"심 당주께서 준비한 계책을 다시 한 번 검토해 보시겠습니까? 어쩌면 저쪽에서
이미 손을 썼을지도 모릅니다."
심화절은 망설이다가 자신이 준비한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는 머리가 좋은 사람.
진소백이 자신을 밀어 주기로 결심한 지금은 솔직히 모든 것을 말하는 편이 좋음
을 알고 있었다.
"모두 다섯 명이 당주를 지지하기로 했군요."
"그렇소. 하지만 공자의 말대로 고 당주가 그렇게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면, 솔직히
……"
"심 당주를 지지(支持)하기로 한 사람 중에서도 이미 고숭무의 음모에 가담한 자
들이 있을 터이니……"
심화절과 진소백의 대화 소리가 갈수록 작아지더니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진소백은 삼경 무렵에 광문당을 벗어났다.
하늘에 구름이 걷히며 점점 별이 많아지고 있었다.
별을 보던 진소백이 천화전 방향을 돌아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잘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