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장 옥산풍운(玉山風雲)
1
빗장수는 이미 다섯 개의 나무무덤을 만들었다.
모두 죽은 나뭇가지만을 이용해야 하므로 힘이 들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앞으로
두 개의 무덤만
더 만들면 자신의 임무는 끝나는 것이다.
만들어지는 무덤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완성된 일
곱 번째의 나무무덤!
빗장수는 다른 무덤들처럼 가장 윗부분을 바싹 마른 나뭇잎들로 덮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뭇잎 사이에 진소백이 주었던 것을 하나씩 섞어 두는 것도.
지금은 겨울!
날씨가 건조하여, 마른 나뭇잎을 찾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마무리를 다 하고 적당한 곳에 숨은 빗장수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나무무덤을 내
려다보았다.
고지대(高地帶)로 올라오며 무덤을 만든 탓에 처음에 만들어 놓은 무덤은 한참 아
래에 보였다.
'만약 여기서 구르면, 단숨에 저 아래에 닿겠군!' 빗장수의 생각이었다.
* * *
현 오호의 눈은 이미 총기를 잃고 있었다.
진소백이 그의 아혈을 풀어 주자 그는 진소백을 신(神)이라도 보는 듯한, 경외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극도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 현 오호는 일시지간 자아를 상실한 채 자신에게 고통
을 줄 수도, 주지
않을 수도 있는 진소백을 신과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고문의 가장 나쁜 점이었다.
고문이 극에 이르면 피고문자는 고문자를 증오하기보다는 오히려 존경하게 된다
…… 피해자(被害者)의 모든
정신 세계가 공포 앞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너희 방파의 이름이 무어냐?
─`지금 목옥 안에는 누가 있느냐?
─`두 영주(領主)의 무공은 어느 정도냐……
계속되는 진소백의 물음에 현 오호는 실혼인(失魂人)처럼 천천히 대답하고 있었다.
복면인들은 자신들의 집단을 스스로 '흑회(黑會)'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회주가
누구인지는 모른다는 말에 진소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비밀 유지(維持)를 중요시하는 방파에서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몇 가
지의 추가 질문을 끝으로 현 오호에게서 얻어 낼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었다고 판
단한 진소백은 그의 수혈(垂穴)을 짚었다.
천천히 잠에 빠져 드는 현 오호!
다시 깨어난다면, 지금의 일을 꿈속에서 있었던 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느꼈던 공포는 항상 무의식(無意識) 속에 남아, 그의 꿈속으로 시시때때로 찾
아갈 것이다.
진소백은 양심의 가책(呵責)을 느꼈으나, 한숨을 쉬며 그 자리를 떠났다.
'강호에서 살아 가는 우리들이니, 이해를 하시오.' * * *
섭수진은 무기들을 튕겨 보았다.
금속 무기들이 부딪쳤으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섭수진이 끈으로 병기(兵器)들을
묶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절벽 위에는 겨울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다.
나무에 매달려 흔들리는 병기들을 버려 둔 채, 그녀는 십 장 정도 떨어진 곳으로
내려갔다.
아래로는 현 오호로 분한 진소백이 왼쪽의 나무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서는 진 공자의 신호가 오면 바로 내려갈 수 있을 거야.' 섭수진의 생각이
었다.
진소백은 마침내 나무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사방에서 퀴퀴한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밀폐된 곳 특유의 냄새! 진소백은 사방
을 둘러보았다.
많은 복면인들이 있었지만, 그를 주의 깊게 보는 이는 없었다.
오랜 시간 서로 같이 지낸 탓에 현 오호가 지금 비번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
다.
특히 정면의 아래쪽으로 난 통로에서 곰팡이 냄새가 심하게 풍겨 나옴을 느낀 진
소백은 지체없이 그곳으로 내려갔다.
관가(官家)의 옥(獄)을 본떠 만든 그곳을 세 명의 복면인이 지키고 있었다. 둘은
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하나는 옥실(獄室) 앞의 복도를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훈련이 잘된 자들인 듯, 입구를 지키던 두 복면인은 진소백이 들어오는
것을 보곤 벌떡 일어났다.
"누구냐?"
진소백은 아주 기분이 나쁜 어조로 대답했다.
두 복면인 중 우측의 인물이 자신과 같은 현 자를 단 육호임을 보면서.
"육호! 영주님이 부르시네. 이거 원, 쉬지도 못하다니."
황 칠호로 변장했던 좀 전과는 달리 진소백의 어조는 또렷했다. 현 오호의 음성과
어조를 이미 들었으므로 흉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현 육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영주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어찌 알겠나? 어서 가보게. 이거 참, 비번인데 쉬지도
못하다니……"
현 육호가 진소백을 다독거렸다.
"미안하네. 잠시 대신 근무를 서주게. 내 곧 오겠네."
이제 진소백과 두 명의 복면인이 남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앞에 서 있던 황 사호가 진소백에게 물었다.
"사실은 말야, 그게……"
진소백이 대답하며 목소리를 점점 낮추자 황 사호는 그의 말을 듣고자 점점 몸을
붙여 왔다.
"사실은…… 황 사호, 넌 죽었다."
황사호가 놀랄 사이도 없이 진소백의 손이 그의 혈도를 짚어 버렸다.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시신과 다름없이 되어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황 사호를,
진소백은
일부러 소리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소리는 옥실(獄室)의 복도(複道)에까지 들려, 내부에서 근무를 서던 황 일호를
밖으로 나오게 했다.
"무슨 일이냐?"
일호는 다른 자들과 신분이 다르다는 것을 현 오호에게 들은 진소백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 사호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놀란 황 일호가 급히 감옥 안으로 통하는 철문을 열었다.
철컹`─`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리고, 황 일호가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된 일이냐?"
진소백이 황 사호만을 본 채 대답조차 않고 있자, 황 일호는 바짝 다가서며 물었
다.
그러나 진소백은 그의 질문에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으로 대답을 했던 것이다.
황 일호가 놀랐을 때는 이미 그의 왼손 완맥은 진소백의 왼손에 제압되어 있었다.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를 깨닫고 고함을 치려 했을 땐 진소백의 오른손이 어느
틈엔가 자신의 목젖을 누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끅!"
숨막혀 하는 소리와 함께 황 일호도 정신을 잃었다.
옥실의 복도는 매우 어둡고 습기가 심했다.
진소백은 열심히 신주낭객을 불렀다.
"구곡인(九曲刃), 구곡 선배, 어디 계시오?"
몇 번을 부르자, 오른편 옥실(獄室)에서 미약한 소리가 들려 왔다. 진소백은 급히
옥문을 열었다.
옥실 안 바닥에는 물이 흥건한데, 그 물에 몸을 담근 채 묶여 있는 인물이 있었다.
습기에 침식당한 것일까? 온몸에서 썩어 가는 냄새를 풍기고 있는 외팔이 괴인!
얼마나 이런 상태로 있었던 것일까?
"누, 누구시오?"
"신주낭객 구곡인이시오?"
외팔이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그렇소만. 당신은……?"
진소백은 그를 묶고 있는 줄을 끊으며 급히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걸을 수 있습니까?"
삼 년간이나 이런 상태로 보낸 구곡인이 걸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진소백은 그를
업었다.
현(玄) 육호는 영주(領主)에게 가지 못했다.
그가 영주가 있는 왼쪽 건물로 막 들어가려는 순간, 오른쪽의 산 위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던 것이다.
"적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 동시에 건물 안에서 쉬고 있
던 복면인들도 모두 뛰쳐 나와 적을 찾기 시작했다.
현 육호도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적의 출현 시에는 모든 것에 우선하여 적을
섬멸한다는 흑회(黑會)의
대원칙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처음에는 한 곳에서만 솟아오르던 불길이 급속도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적들의 수효가 많다."
가슴에 황령(荒領)이라고 수놓여 있는 옷을 입은 인물이 외치는 소리였다. 황령주
의 말대로 불길은 이제 곳곳에서 솟아오르고 있어, 도저히 한 사람이 일으킨 것이
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사실 이 불들은 모두 빗장수 한 사람이 일으킨 것이었 경사를 타고 내려가
면서 불씨를 나무무덤에 던져 넣자, 진소백이 준 폭약이 폭발하면서 마른 나뭇잎
에 불을 붙이고
있는 것이었다.
빗장수의 경공에 경사(傾斜)의 이점(利點)이 보태지자, 마치 동시에 여러 곳에서
불길이 일어난 듯이 보이는 것이다.
황령주뿐만이 아니라, 현령주(玄領主)도 급히 불길이 일어나는 곳으로 몸을 날렸
다. 적의 수효가 많다고 생각한 것이다.
슈슉`─`
진소백의 오른손이 허공(虛空)을 가르며 복면인의 목젖을 눌렀다. 그가 복면인들의
목젖만을 노리는 이유는, 그들이
소리쳐 동료(同僚)를 부를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지금 진소백에게는 짐이 있었다.
신주낭객(神州狼客)을 업고 있는 상황에서 일신의 재간을 다 발휘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건물 안에 남아 있던 복면인 여섯 중, 마지막 한 명을 미처 제압하기 전에 그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적이다!"
그러나,
꽝!
화약이 터지는 소리는 복면인의 생명을 건 외침을 묻어 버리고 말았다.
밖에 있는 복면인들은 빗장수가 터뜨리는 화약 소리와 불길에 정신이 없어 이 소
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끄윽`─`!"
마지막 복면인마저 제압한 진소백은 밖의 동정(動靜)을 살폈다.
섭수진은 두 명의 영주(領主)가 지나가자마자 왼쪽 건물의 문이 열리며 진소백이
누군가를 업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제 자신이 일을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녀는 품에서 단도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십여 장 밖을 겨냥하여
던지자, 그녀가
나무에 매달아 놓았던 병기들을 묶고 있던 끈이 끊어져 버렸다.
병기를 매단 끈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병기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묶어 두었
던 끈이 끊어졌던 것이다.
겨울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금속의 병기들은 바람을 타고 서로 부딪치며, 흡사 여러 명의 무인(武人)이 병장
기를 들고 싸우는 듯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불길에서 더 이상 폭음 소리가 들리지 않자, 어느 정도 정신을 가다듬은 두 영주
의 이목(耳目)은, 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로 집중(集中)되었다.
2
지금 진소백과 섭수진, 빗장수 중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
까? 두말할 나위 없이 섭수진이었다.
빗장수는 원래부터 경공이 떨어졌고, 진소백은 신주낭객을 등에 업은 상태였던 것
이다. 그래서 섭수진은 자신이 미끼가 되어 복면인들을 유인하고, 그사이에 진소백
이 달아날 수 있게 해주었다.
진소백이 반대편의 산 위로 올라가고 있음을 본 섭수진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통
나무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에서 복면인들이 모여 있는 곳까지는 급경사였으니, 이제 손을
놓기만 하면 통나무는 미끄러져 갈 것이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를 들은 복면인들이 올라오자, 그것을 본 섭수진은 손을 놓
았다.
통나무는 굉음(轟音)을 내며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고, 그 위에 몸을 싣고 있는
섭수진도 따라서 내려갔다.
빗장수는 자신에게로 몰려오던 복면인들의 일부가 몸을 돌려, 섭수진이 있는 곳으
로 가는 것을 보았다.
원래부터 정했던 대로이니, 이제 자신은 몸을 피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때 멀리
서 진소백이 누군가를 업고 가는 것이 보였다.
빗장수의 눈에는 기쁨이 떠올랐다.
자신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진소백의 등에 업혀 가고 있는 신주낭객의 모습만이 두 눈을 가득 채워 왔
다.
'나는 은혜를 갚았소! 약속을 지켰소!'
이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급히 몸을 돌려 위험한 자리를 피하려던 빗장수의 두 눈에 섭수진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굉음을 내뱉으며 아래로 미끄러지는 통나무 위에서 몸을 세운 섭수진은, 검을 든
오른손으론 난파풍(亂波風) 검법을 펼쳐 냈고, 왼손으론 금정산수(金頂散手)의 기
세를 내뿜고 있었다.
통나무가 내려가는 길 주위의 복면인들은 일장, 일검을 감당하지 못해 날려갔다.
그러나 통나무가 평지(平地)에 이르러 정지하자 섭수진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
을 빗장수는 똑똑히 보았다.
두 가지의 절학을 동시(同時)에 전력으로 펼쳐 내었으니 섭수진이 지친 것도 무리
는 아니리라.
두 명이 노호(怒號)를 터뜨리며 벼락같이 달려든 것은 바로 그! 현령주와 황령주가
수하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노호하여 섭수진을 덮쳐 간 것이다.
다른 복면인들에 비할 위세가 아니었다.
섭수진은 급히 수중의 검을 팔방풍우(八方風雨)의 식으로 휘두르며, 전방의 좌우
에서 덮쳐 오는 두 영주를 맞아 갔다.
펑! 파바박`─`!
경기(勁氣)와 경기가 부딪치며 발생한 회오리가 흙먼지를 말아 올리며 주위를 감
싸 갔다.
통나무에서 뛰어내린 섭수진이 다섯 걸음을 물러나며 구식(九式)째의 변화를 펼쳐
냈고, 좌우(左右)에서 따라오는 두 영주의 손끝에서는 각각 다섯 번씩의 권(拳), 장
(掌)이 뿜어 나왔다.
섭수진의 무학은 이미 강호가 인정하는 일절(一絶)이었으나, 두 영주의 무공 또한
만만치 않았다.
두 고수가 연합하여 덤비자, 천하의 아미옥녀(峨嵋玉女)도 정신없이 몰리고 있었
던 것이다. 주위의 다른 졸개들까지 합세한다면, 섭수진은 큰 위험에 빠질지도 몰
랐다.
섭수진이 예상치 못했던 영주(領主)들의 절학에 수세(守勢)에 몰리고 있을 때, 진
소백은 이미 뒤쪽의
산을 거의 다 오른 후였다.
이제 복면인들이 눈치를 채더라도 쫓아오기에는 먼 거리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복면인들이 알게 해주는 편이 좋았다.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복면인들은 신주낭객(神州狼客)을 되찾기 위해 쫓아올 것이
므로.
자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섭수진에게 덤벼드는 복면인의 수가 줄어든
다는 의미가 아닌가?
진소백은 목청을 돋우어 크게 외쳤다.
"신주낭객이 달아난다`─`"
복면인들의 이목이 뒷산 정상(頂上) 부근에 보이는 진소백의 신형에 집중되었다.
물론, 영주들의 이목 역시 뒷산으로 잠시 쏠렸다.
고수들의 싸움에 있어서 미세한 틈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비록 이 대 일의
합공(合攻)으로 우세(優勢)를 점하고 있던 두 영주였지만, 잠시 한눈을 판 것은 크
나큰 실수였다.
아주 짧은 순간, 섭수진은 검세(劍勢)를 아미의 절학인 소청검법(小淸劍法)으로 변
화시키며 현, 황의 두 영주를 압박해 가기 시작했다.
파르스름한 검기(劍氣)가 검끝에 어리며 좌우를 감아 가니, 이것이 바로 소청검법
상의 연환영풍(烟幻迎風)이었다.
삽시간에 수세에 몰린 두 영주가 권법의 위력을 더욱 배가(倍加)시키니, 전세는 더
욱 흉험(凶險)해졌다.
끊임없이 들려 오는 병기와 권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호통 소리는 싸움이 얼마
나 치열한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지금은 섭 소저가 유리하다.'
빗장수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들 셋 모두는 자신보다 고수이니 정확히 평가할 수
는 없었지만, 섭수진이 사나운 기세로 몰아가고 있고 영주(領主)들은 스스로를 보
호하기에 급급해 보이니 일단은 섭수진이 유리해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섭 소저가 불리해진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섭수진은 비록 공세를 취하고는 있지만, 검세(劍勢)를 변화시키며 기회를 보아 몸
을 빼내려고 했다.
어차피 이들과의 싸움이 목적은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적을 몰아붙이고 신형
을 빼내려고 시도할 때마다 번번히 두 영주의 손에서 기묘한 권세가 뿜어져 나와
섭수진의 의도를 무산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차륜전으로 내 힘을 빼려 하고 있다.'
섭수진은 이내 두 영주(領主)의 의도를 깨달았다. 이 대 일의 상황이니 섭수진이
공세를 취하도록 하여 그녀의 힘을 빼려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점점 숨이 가빠 왔다. 내공의 소모가 극심하다는 뜻이다.
'어떡하나?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 하는데……'
섭수진의 생각이야 어떻든 간에 두 영주가 권세를 일변시켰다.
권풍이 몰아치며 섭수진이 다시 수세(守勢)에 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전열을 가
다듬은 졸개들까지 서서히 주위를 감싸 오고 있지 않은가?
섭수진은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빗장수의 눈에도 다급함이 어렸다. 자신을 쫓아온 복
면인 둘을 예의 살인적인 빗으로 쓰러뜨리며 빗장수는 생각했다.
'나는 신주낭객에게 입은 은혜를 갚았지만, 저들에게 받은 은혜는 또 어찌 되는
가?' 다시 한 명의 복면인을 해치우며 빗장수는 지체없이 몸을 띄웠 진소백은 마
침내 산을 넘었다.
어딘가에 신주낭객을 숨겨 두고 섭수진을 도우러 가야 했다.
그러나 어디다 숨긴단 말인가? 저 멀리 뒤에서는 복면인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우측(右側) 숲에서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그림자의 등장은
갑작스러웠지만,
진소백의 대응(對應)은 더욱 빨랐다.
"누구냐?"
외치는 순간 이미 그의 우수(右手)가 그림자의 왼쪽 어깨를 겨냥하며 뻗어 나갔다.
"적이 아니오. 손을 거두시오."
다급히 외치며 물러나는 그림자를 보고 진소백은 오른손의 경기(勁氣)를 거두었지
만 몇 푼의 경력만은
그대로 그림자의 어깨를 치고 말았다.
"우욱!"
그림자가 신음을 냈고, 그의 어깨에서 선혈(鮮血)이 흘러내렸다. 단지 힘을 거두고
남은 여력(餘力)으로 이런 결과가 일어남은 진소백의 내공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림자는 이미 왼쪽 어깨에 상처를 입고 있었고, 그 상처가 터져서 피가 흘러나왔
던 것이다.
"당신은……?"
그의 얼굴을 본 진소백이 깜짝 놀라 외쳤다.
코 밑의 염소 수염!
"그렇습니다. 공자께서 저희를 도와 주시니 은혜가 하해(河海)와 같습니다. 존령(尊
領)은 제가 모실 터이니……"
그가 말하는 존령이 신주낭객임을 깨달은 진소백은 얼른 신주낭객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괜찮겠소? 당신은 이미 부상이 심한 듯한데……"
그랬다. 염소 수염은 지난날 복면인에게 쫓기며 왼쪽 어깨와 얼굴 등 온몸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염소 수염은 웃었다.
"아직 이 두 다리만은 멀쩡합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어서……!"
염소 수염이 품에서 기이하게 생긴 화살 하나를 꺼내 하늘로 던지자 화살이 이십
여 장 상공으로 날아오르며 터졌다.
"저것은 무엇이오?"
"구(仇) 도령(導領)에게 존령을 구했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구 도령이 신호를 보
면 곧 이리로
올 것이니, 어서 동료를 구하십시오."
진소백은 지체하지 않고 다시 산을 넘어갔다.
섭수진은 구하러 돌아가는 것이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안심해도 좋을 터인데도……
'이상하게 걱정이 된다.'
진소백은 전력으로 경공을 전개하고 있었다.
섭수진은 등뒤에서 누군가 다가옴을 느꼈다.
간발의 순간을 찾아 등뒤로 일검을 긋자, 복면의 졸개 하나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
다.
그 짧은 순간, 황령주와 현령주의 권세가 판이하게 변했다. 검은 경기를 은은히 싣
고서 노도(怒濤)와 같이 쏘아 오는 권! 섭수진이 급히 왼손의 금정산수(金頂散手)
로써 황령주의 일권을 흩뜨렸지만 현령주의 일권은 미처 막지 못했다.
펑`─`!
왼쪽 어깨가 떨어지는 듯한 충격에 섭수진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하였다. 심중
의 놀라움도 컸다. 좀 전까지 펼쳐지던 영주(領主)들의 공세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어야 했다.
영주들이 변화시켜서 뿜어 내고 있는 권법은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르
고 강했다.
다섯 걸음을 물러난 섭수진을 향해 다시 짓쳐 들어가는 두 영주는 흡사 철(鐵)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검게 변한 주먹을 휘둘러 왔다.
산이라도 무너뜨릴 듯한 그 주먹을 본 섭수진은 조금 전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오른손의 검을 들어 소청검법으로 적의 권세를 막아 가며 섭수진은 외
쳤다.
"파황권(破荒拳)! 파황권이란 말이냐?"
3
사위(四圍)는 조용했다.
심화절은 조용한 모습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내심은 격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심화절 앞에 조용히 서 있는 사람은 기서생(奇書生) 오명(烏明)! 그는 심화절의 다
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 소방주가 실종(失踪)되다니……! 누구의 짓인가?"
오명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알 수 없습니다만, 시녀 앵아 역시 같은 때에 실종된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계획
적(計劃的)인 납치로
보입니다. 방안에 남아 있던 찻잔에서 오보산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심화절은 침중하게 말했다.
"당장 모든 힘을 동원하여 앵아와 소방주의 행방을 찾아라. 오보산의 약재를 판매
한 곳이 근처의
약방(藥房)에 있는지도 수소문하고!"
"존명!"
오명이 고개를 숙였다가 물러났다.
기서생은 항상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니, 조만간에 어느 정도 단
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명이 나간 후에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심화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노존(老尊)! 오셨소?"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의문은 금세 풀렸다.
허공이 괴소(怪笑)를 흘리며 말했던 것이다.
"크크, 이미 왔지."
말과 함께 심화절의 앞으로 유령과 같이 한 인물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심화
절은 이미 그가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는지 미동도 없었 "어떻게 생각하시오. 누
가 금청청을 납치했겠소?"
노존이라 불린 인물은 바로 대답했다.
"그 계집이 마각(馬脚)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겠지."
심화절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청청이 자신의 음탕함을 눈치챘으니 당연히 손을 썼겠지요. 앵아는 욕심이 많
은 아이였으니, 매수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게요."
노존이 다시 괴소를 흘렸다.
"그렇게 되기까지, 자네의 수고가 컸네!"
"무슨 말이시오?"
"크크, 자네가 수하를 풀어 금청청을 천화전(天花殿)으로 유인했음을 부인한단 말
인가?"
심화절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우리의 운이 좋았지요."
심화절의 말은 교묘하여 노존이 심화절의 짓으로 몰고 갔던 음모를 공동(共同)의
음모로 만들어 버렸다.
노존은 속으로 '교활한 놈!'을 수없이 외쳤지만 겉으로는 태연히 말했다.
"어찌할 셈인가? 내일이면 차기 방주를 결정하는 날인데…… 자신이 있는가?"
심화절이 웃었다.
"방의 위원회 구성원인 구(九) 인(人) 중에서 이미 우리 편에 붙은 이가 다섯이니
문제가 없지 않겠소?"
노존이 말했다.
"그러나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적염이 저쪽에 속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
심화절은 다시 웃었다.
"물론 잊지 않고 있소!"
"무슨 복안(腹案)을 세워 두었나?"
"다만 노존을 믿을 뿐이지요. 하하!"
'도무지 이놈의 속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노존은 속으로 생각했다.
* * *
지금 적염의 앞에 선 사내는 옷을 입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적염도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화병의 꽃을 들어 향기를 맡았다.
"향기가 좋군요!"
사내는 초조하게 말했다.
"이제 방주 결정까지 하루가 남았을 뿐이야. 천기수사 쪽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고."
적염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가만있지는 않겠죠. 이미 다섯이나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으니……"
사내의 눈에 당혹이 어렸다.
"아홉 명 중에 이미 다섯이나 넘어갔다면 대세(大勢)는 기운 것이나 다름이 없잖
아?"
적염이 손은 들어 사내의 뺨을 어르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이쁜 양반. 심화절은 자신이 가장 자신하는 순간에 파멸의 고통을
맛보게 될 테니까!"
사내의 눈에 기쁨이 떠올랐다.
"그럼, 무슨 수를 써놓았단 말인가?"
"물론이죠. 심화절은 최후의 순간에 가장 믿고 있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고통을
맛보게 될 거예요."
적염의 미소가 달콤해졌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방주가 되고,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사천성의 패권(覇權)을
독차지하겠죠."
적염의 아버지는 공동의 장문인이니 두 문파가 힘을 합한다면 당연히 사천의 패자
(覇者)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말을 이어 가는 적염의 얼굴에서 점점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 되면 아버지가 나를 그 남자 구실도 못 하는 고자 놈에게 시집보낸 목적도
달성되겠지."
미소 대신 적염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표독함이었다. 적염의 말
은 독백을 하듯이 이어졌다.
"심화절아, 심화절아! 너는 암중에 금청청을 유인하여 나를 곤경(困境)에 빠뜨렸다
고 생각하겠지만, 흥!
너는 모를 것이다. 네 행동 하나하나가 이미 내 수중에 있음을!"
적염의 표독한 얼굴을 바라보던 사내도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갑자기 이 여인이 무섭다고 느낀 것이다.
적염은 정말 무서웠다.
이런 여인이 세간(世間)에 마음이 약한 숙녀(淑女)로 알려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무서웠다.
먹이를 앞에 두고 앞다리의 날을 갈고 있는 사마귀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정사(情事)가 끝나면 숫사마귀를 잡아먹는다는 암사마귀! 어쩌면 자신이 숫사마귀
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 * *
파황권의 위력은 대단했다.
삼십 초가 지나자 이미 섭수진은 절대의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두 명의 영주만이
상대였다면 그녀가 이처럼 빨리 약세로 돌아설 리가 없었다.
문제는 주위를 포위하고 틈만 보이면 달려드는 졸개들에게 있었다. 비록 무공이
높지는 않다고 하나 그들의 병기에 닿아도 상처가 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수의 대결에서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다.
휙!
다시 일권이 그녀의 뺨을 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공기의 압력만으로도 뺨이
얼얼해졌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섭수진은 다시 몸을 풍차같이 돌리며 좌측에서 달려드는 복면인의 검을 피하며
목을 베어 갔다.
"큭!"
복면인을 하나 더 해치우긴 했지만 섭수진도 이익만 본 것은 아니었다.
현령주의 일권이 다시 그녀의 등을 노렸기 때문!
원앙각(鴛鴦脚)의 식으로 그녀의 왼발이 들려지며 현령주의 일권을 맞아 갔다. 퍼
펑!
일권과 일퇴가 격돌하며 폭음이 일어났다.
섭수진은 왼쪽에서 다가오는 황령주의 일권을 검으로 차단하려 했지만, 현령주의
일권에 의해 몸의
균형이 조금 이동하는 바람에 완벽하게 경기를 막지는 못하였다.
펑!
다시 가해진 일격이 좀 전에 다쳤던 어깨에 명중되자 섭수진은 정신이 아득해졌
다. 이를 악물로 다시 검을 휘두르는 섭수진의 눈에 저 멀리 산을 내려오고 있는
진소백이 들어왔다.
그는 복면인들을 추풍낙엽처럼 해치우며 달려오고 있었지만…… '너무 멀다. 그가
올 때까지 나는 버틸 수가 없어……' 또다시 밀려오는 두 영주의 파황권을 막아
가며 섭수진은 내심 외치고 있었다. 졸개들의 무공만 보고서 영주의 무공까지 경
시했던 것이 실수였다.
파황권이라니!
섭수진은 강호에 나온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고, 진소백은 이제 겨우 산
중턱을 내려왔을 뿐이었다.
현령주의 권세가 자신이 펼쳐 낸 검막(劍幕)을 찢고 있음을 본 섭수진의 두 눈이
아득해졌다.
'끝인가?'
검막을 찢은 파황권은 섭수진의 얼굴로 직격(直擊)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