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12 장 음부탕여(淫夫蕩女) (13/32)

제 12 장 음부탕여(淫夫蕩女) 

하늘은 아직 밝지 않았다.

금청청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살수가 아버지를  살해한 것은 아니라 하나,  그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배후의 흉수를 알고 있다면, 당장의 증오를 누르고 기다리는 것

이 당연하리라.

그녀는 지금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장소가 

마음을 달래기에 

좋은 곳임을, 그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돌리던 금청청의 눈에 검은 그림자가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이 들어왔다.

경공이 뛰어나 보이는 인영(人影)은 남의 눈을 피하려는 듯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

지만,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금청청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누구지?' 

호기심으로 지켜보던 금청청의 눈이, 인영이 향하는 방향을 알고서는 커졌다.

천화전(天花殿)! 

그 인영은 금사진의 미망인(未亡人)인 적염의 거처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뒷모습만 보기는 

했지만 체격으로 보아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웬 남자가 저렇게 은밀히  미망인의 거처로 가는  것이지?' 금청청은 조심스럽게 

인영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파악하고 따르던 인영의 종적(縱的)이 천화전에 들어서자마자 감쪽같이 사

라져 버렸던 것이다.

'눈치를 챈 것인가?' 

금청청은 어둠 속에 숨어 주위를 조심스레 둘러봤지만 인영의 흔적은  찾을 수 없

었다.

귀신이 아닌 이상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한  가지의 설명밖에 없었

다. 인영은 전각(殿閣)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금청청은 신형을 솟구쳤다.

살며시 지붕 위로 내려서는 금청청의 발끝에서는 먼지 한 올 올라오지 않았다. 그

녀는 최선을 다해 조심하고 있었다.

지붕 끝에 매달린 금청청은 한 마리 박쥐와도 같았다.

원래 이런 류의 무공은  여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금청청같이 아름다운 

여인에게는.

그러나 지금 금청청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무공을 시전한 덕분에  창을 통해 

전각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발끝이 처마에 걸려 몸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거꾸로 매달린 금청청은 창을 

통해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내에 반도가 있다는 말을 듣고 놀라 혼절한  미망인의 방! 금청청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바닥으로 떨어질 뻔하였다.

미망인, 적염이란 이름을 가진 여인은 지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던 것

이다.

금청청은 자신이 천화전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바람에 금청청은 적염의 풍만한  가슴을 주물럭거리

던 사내의 두 눈에 기광(奇光)이 번뜩였음을 보지 못하였다.

 * * * 

이제 날이 밝았다. 

 진소백은 해가 어느 정도 힘을 얻고서야 처소로 돌아왔다.

처소에선 뜻밖에도 섭수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후, 이런저런 생각도 들고 궁금한 것이 많아 잠이 와야 말이죠. 아침부터 어딜 다

녀오신 건가요?"

진소백은 섭수진을 보자 피곤한 와중에도 온몸에 새로운 기력이  솟아남을 느끼며 

대답했다.

"저도 잠이 오지 않아 잠시 산책을……"

"피곤해 보여요. 뭔가 근심이라도 생긴 것인가요?"

진소백은 부인했다.

"아니, 아니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조금……"

"오늘…… 이지요?"

빗장수와 함께 신주낭객을 구하러 가기로 한 날을 뜻함을 안  진소백이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렇소.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구려."

"그들에겐 천랑파를 그처럼 손쉽게 손에 넣을 능력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우

리 둘이서만……"

섭수진은 '우리'란 말을 무의식중에 사용하고서는 얼굴이 붉어졌다.

진소백이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만일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지체없이 몸을 피해야 할 것이오. 그들은……"

말을 끊은 진소백이 문으로 급히 다가서며 외쳤다.

"누구냐?"

말과 함께 진소백이 문을 열어제쳤다.  문밖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녀가 서 

있었다.

몹시 놀란 듯하였다.

"저, 저는 앵아(鶯兒)라고……"

시녀임을 알고 난 진소백이 어조를 바꾸어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

"금 소방주께서…… 오늘밤에 진 공자님을 뵙고자……"

"금 소방주? 금 낭자 말이냐?"

"예, 은밀히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진소백은 의아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고 가서 전하거라."

시녀 앵아가 떠나가자, 섭수진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진 공자

를 은밀히 부른 것일까요?"

진소백이 웃었다.

"섭 낭자도 있었으니 은밀히 부른 것은 아니지 않소?"

"그건, 시녀가 제가 있음을 몰랐을 뿐이니……"

진소백은 계속 웃었다.

"금 낭자도 이제야 비로소 나의 매력을 안 것 같소이다. 해서 은밀히…… 하하! 역

시 내가 매력이 있는 남자인가 보오."

섭수진의 아미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뭐라고요?"

씨웅`─` 

경공고수의 신형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였다.

진소백도 못지않은 고수였으나, 감히 앞에 가는 고수를 따라잡거나 추월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앞에 가는 사람이 다름 아닌 섭수진이었기에.

'이런!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아미 출신이 아니라, 북해(北海) 빙궁(氷宮) 출신이라

고 하겠는걸.' 

아침의 일 이후 섭수진의 태도는 그야말로 얼음과 같았다.

행동 하나하나에 냉기가 풀풀 날려, 진소백은 말 한마디 붙일 수도 없었다.

뒤따라오던 빗장수가 물었다.

"진 공자,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한 것입니까?"

진소백은 빙긋이 웃었다.

"잘못이라…… 많이 했지. 내가 너무  멋이 있다 보니까, 하하……  여자들이 많이 

따르는 것이 나의 잘못이라오."

일부러 크게 한 말인지라, 앞서가는 섭수진에게도 이 말은 들렸다. 입술을 꼭 깨무

는 섭수진! 

씨웅`─` 

섭수진의 신형이 더욱 빨라졌다.

빗장수는 놀라 소리쳤다.

"엇! 진 공자, 섭 소저의 걸음이 더 빨라졌습니다. 어서 쫓아가야……"

진소백은 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좋소. 자, 어서 갑시다."

진소백의 신형이 빨라졌고, 빗장수도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아침에 비응방에서 나온 진소백과 섭수진은  빗장수를 만나 신주낭객(神州狼客)을 

구하러 나섰다.

화선이 있다는 곳도 근처였으므로, 이 일은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가 있었다.

진소백은 구천(仇賤)도 함께 갈 것을 원했으나, 빗장수의 말에 의하면 구천은 항상 

복면인들의 감시(監視) 안에 있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만에 하나라도 감시자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게  되면, 그 즉시 신주낭객에게 

피해가 미치게 되므로 함부로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

무사히 신주낭객을 구출하게 된다면, 신호를 보내어 합류(合流)하기로 이미 약속을 

한 터였다. 

 화선도 복면인과 같이 있었으나, 두 가지의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억류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 강제로 갇혀  있는 신주낭객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라

고 진소백은 생각했다.

"저…… 왜 다른 사람들의 힘을 빌리지 않습니까?"

빗장수가 진소백에게 개방 고수들의 조력(助力)을 받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이 일은 당신 개인의 일이고, 나 또한 개인적으로 당신을 돕는 것이니…… 또 이

런 일은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좋지 않소."

진소백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저기 앞서가는 한빙공(寒氷功)의 고수가 계시니…… 하하!"

진소백의 말에 섭수진이 뿜어 내는 한빙공(?)의 공력이 배가(倍加) 되었다. 냉기가 

더욱 강해지자 진소백은 입을 다물었지만, 두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들은 지금 무슨 싸움을 하는가? 

 * * * 

이곳은 침실(寢室)이었다.

여인과 사내 하나가 침실에 앉아 있었다. 여인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장삼(長衫)을 

입고 있었고, 사내는 하의(下衣)만을 걸치고 있었다.

여인의 손! 

희디흰 여인의 손이 입을 가렸다. 웃고 있는 것이다.

상아(象牙) 같은 치아를 살며시 가린 흰 손 사이로 보이는 입술이 붉디붉었다.

"걱정되시나요?"

여인은 웃었지만 앞에 앉아 있는 사내는 웃지 못했다.

"웃을 때가 아니오. 금청청, 그 계집이 눈치를 채었으니…… 아마 매일도에게도 말

했을 것이고, 또한…… 헉!"

사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가쁜 숨을 토해 냈다.

여인의 손이 다리 사이의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었  "걱정할 필요 없어

요. 매일도(梅逸度)가 그년의 사형이라고는 하나, 방의 외인(外人)이니 함부로 간섭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여인이 말을 하며 손을 은밀히 놀리자 사내의 이마에 핏줄이 솟아 올랐다.

손끝에 쥐어진 사내의 물건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여인이 다시  한 번 달콤하게 

웃었다.

"호호, 벌써 세 번째인데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요?"

여인의 손이 옷 사이로 들어와 직접  살갗에 닿아 오자 마침내 사내는  참지 못했

다. "차, 참을 수가 없소."

사내가 달려들자 잠시 밀쳐 내는 시늉을 하던 여인은 이내 사내의 손길에 몸을 맡

겼다.

사내의 손이 거칠게 장삼을 벗겨 내자 여인의 눈부신 동체(胴體)가 그대로 드러났

다.

그녀는 장삼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호호, 좀 살살, 어맛!"

사내의 손이 어디에 닿은 것일까? 여인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사내가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하의를 벗어 던지자 방안에는 후끈한 정염(情

炎)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 당신은 너무……"

침실을 가득 채운 땀 냄새 속을 여인의  교성(嬌聲)과 사내의 거친 숨소리만이 헤

엄치고 있었다.

앵아(鶯兒)는 잔을 씻고 있었다. 금청청이 차(茶) 심부름을 시켰던  것이다. 찬물이 

손에 떨어지며 손끝을 아리게 했다. 

 겨울에 찬물을 손에 대는 것은 피부에 정말 좋지 않았다.

앵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부터의 물일과 허드렛일로 인해 거칠어

진 피부와 굵어진 손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난 언제나 백설(白雪)과 같은 흰 손을 갖게 될까?"

언젠가는 되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의 노력에 따라 빨리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찻물이 끓었다. 뜨거운 물을  찻잎에 부어 넣자 은은한 다향(茶香)이  가득 

피어올랐다.

손끝으로 찻물의 온기(溫氣)가 전해졌다.

온기의 영향이었을까? 어쩌면 자신의 손이  하얗게 될 날이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앵아는 생각했다.

 * * * 

매일도는 지금 금청청의 방에 있었다.

그의 사매(師妹)는 지금 그에게 무언가를 말해 주었고, 그는 매우 놀란 상태였다.

"그것이 정말이냐?"

매일도가 물었다. 금청청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에요, 사형(師兄). 틀림없이 그녀예요."

금청청이 확신하며 말하자 매일도는 신음을 흘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로구나. 그녀의 심성(心性)은 강호에 여리기로 소문이 났는데…

… 몇 번씩 혼절까지 하지 않았느냐?"

금청청은 냉소했다.

"흥!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한 연극에 불과했던 거예요. 그녀는……"

말하기 곤란한 듯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탕녀(蕩女)예요."

"믿을 수 없구나. 적염(狄艶), 그녀가……"

금청청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녀가 다른 사내놈과 놀아나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요. 아버지를 살해

한 것도 그녀일 거예요."

매일도는 신중했다.

"단정적으로 말할 것이 아니다. 그녀가 비록 음탕(淫蕩)하다고 해도  네 부친을 살

해한 흉수라고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우선은  확실한 동기를 찾을 수 없지 않느

냐?"

금청청이 고개를 저었다.

"만일 아버지가 눈치를 채셨다면…… 그녀가 아버지를  살해할 이유로 충분하겠지

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매일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한데, 그 남자가 누군지는 보지 못했느냐?"

"못 보았어요. 몰래 숨어서 본 터라 남자는 다리만…… 보였어요."

그녀가 적염의 방을 엿보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한데 믿을 수 없게도 금사진의  사망 소식에 기절했다던 적염,  그녀가 웬 사내와 

낯뜨거운 정사(情事)를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적염의 포동포동한 다리와 엉켜 있던, 털이  수북한 사내의 검붉은 다리가 떠오르

자 금청청은 말을 멈추었다.

말이 어색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낀 매일도가 급히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내가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나는 네 사형으로서 

여기 있는 것뿐이니…… 누구, 믿을 만한 사람이 없겠느냐?"

"그래서 진소백…… 그를 불렀어요. 방 내의 사람과 상의하고 싶지만 누구도 믿을 

수 없어서……"

"잘했다. 진 형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너를 도와 줄 것이다."

이미 매일도는 진소백이  금청청을 위해 악담(惡談)을  했었음을 그녀에게 일깨워 

주었었다.

"나도 암중(暗中)에서 도울 것이니, 어쩌면 이 일은 생각보다 빨리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금청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면 차기(次期) 방주가 정해지고, 그 다음날이  아버지의 장례(葬禮)이니, 부

디 그 전에 흉수(凶手)를 

잡아 아버지의 원혼(怨魂)을 달래 드리고 싶어요. 저는……"

말을 끊고 고개를 숙인 금청청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음을 안  매일도는 그녀에게 

다가가 등을 다독였다.

"너무 자신을 책망(責望)하지 말아라. 너로서도  어쩔 수 없었으니, 금 방주께서도 

너를 책하지 않으실 것이다."

매일도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문을 향해 급히  돌려졌다. 몸이 

돌았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왼손은 문을 열고 있었다. 신법(身法)이 대단함을 말

해 주는 것이다.

"누가 엿듣는 것이냐?"

크게 외치며 매일도가 문을 열어제쳤다.

놀라서 크게 뜬 두 눈이 귀여웠다.

그러나 그녀를 보는 매일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네가 엿들었느냐?"

매일도의 말에 금청청이 나서 해명을 했다.

"그애는 앵아예요. 제가 차를 내오라고 시켰어요."

그제서야 앵아의 두 손에 쟁반이 들려 있음을 본 매일도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놀라지는 않았느냐?"

앵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많이 놀랐음을 숨기지 못했다.

상기된 얼굴로 앵아가 두 손을 내밀었고, 쟁반 위에 놓인 찻잔에서는 김이 모락모

락 피어올랐다.

담백한 다향(茶香)이 풍겨 나오는 것이, 상품(上品)의 차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찻잔을 금청청이 하얀 옥수(玉手)로 받아 들었다. "어쨌든 나는 이만 갔다가 나

중에 다시 오마."

앵아가 들어와서 말을 계속할 수 없음을 안 매일도가 차도 다 마시지 않고 일어서

려 했다.

"차나 마저 드시고 가세요, 사형."

금청청의 이 말은 분명히 그를 위한  말이었다. 그러나…… 금청청의 말에 매일도

는 검미(劍眉)를 찡그렸다. 

 "후`─ 근심이 있으니, 차 맛도 느끼질 못하겠구나."

금청청도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앵아에게 물었다.

"진 공자가 오시겠다고 하였느냐?"

앵아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아가씨."

금청청이 한숨을 쉬며 매일도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를 만나 이 사실을 말하고, 매(梅) 사형께서 힘을 합한다면…… 어쩌면 쉽게 해

결할 수도 있을 거예요."

금청청은 말을 하다가 문득 앵아를 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두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무얼 그리 보는 게냐?"

앵아는 무엇을 훔치다 들킨 아이처럼 놀라 말했다.

"아니…… 아가씨의 손은 정말 희고 곱군요. 제 손은……"

앵아의 손은 나이답지 않게 거칠었다. 

 한 사람이 얼마나 힘든 인생을 살아 왔는지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은 손. 앵

아의 손은 그녀가 얼마나 어렵게 인생을 꾸려 왔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저는 언제쯤 아가씨처럼 흰 손을 갖게 될까요?"

금청청은 남자에게는 화를 잘 내었으나, 같은 여자에게는 다감했다.

"너는 얼굴도 예쁘고 착하니, 꼭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앵아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분도 아가씨처럼 손이 희어요."

금청청이 물었다.

"누구 말이냐?"

"오늘밤에 아가씨를 만나기로 한 사람 말이어요."

"진 공자 말이냐? 그의 손이 희더냐?"

앵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는 진 공자를 만나지 않아요. 아니, 만나지 못해요."

금청청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앵아가 살포시 웃었다.

"아가씨는 밤에 이곳에 없을 테니까요."

이상한 기미는 매일도가 먼저 느꼈다. 몸에서 힘이 급격히 빠지고 있었다.

"그…… 차, 차 속에 무엇을 넣었느냐?"

앵아가 생글거렸다.

"아무것도요! 다만 오보산(五步散)을 조금 넣었지요."

"이, 이런 괘씸한 것!"

금청청이 외치며 일장을 치려 했지만, 전신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았음을 확인했

을 뿐이었다.

"내 너에게 잘 대해 주었거늘……"

쓰러지는 금청청을 보며 앵아가 여전히 웃으며 종알거렸다.

"그러나 제 손을 희게 해주지는 못하시죠. 전 흰 손이 갖고 싶답니다."

금청청과 매일도는 동시에 쓰러졌다. 

 * * * 

금청청이 정신을 차리며 본 것은 앵아의  말대로 희디흰 손이었다. 허공을 나부끼

며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듯, 휘둘러지고 있는 ! 흰 것은 손만이 아니었다.

흰 손이 달려 있는 곳은 여인의 나신(裸身)! 

등을 보인 채, 뒤돌아 앉아 있는 여인의 나신에 그 손은 달려 있었다.

그 손에서 이어지는 날씬한 팔뚝과, 다시 팔뚝이 달려 있는 동그란  어깨와, 그 어

깨에서 휘어지며 뻗어 내린 등의 선마저 모두 희었고, 또한 아름다웠다.

금청청은 여인의 등을 따라 내려가던 눈을 질끈 감았다.

보라! 

 여인의 허리 아래 붙은 탐스런 둔부(臀部) 아래로, 털로 뒤덮인 굵은 다리  두 개

가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검붉은 근육질의 다리는 여인의 흰 피부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 다리의 

움직임에 따라 여인의 둔부 또한 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니…… 눈앞에 보이

는 모습과 귓가에 들리는  소리는, 처녀의 몸인  금청청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水準)이었다.

이윽고 열락(悅樂)의 순간이 지나갔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나체를 긴 장삼(長衫)으로 감싸며, 적염이 일어섰다. 아직도 눈

을 감고 얼굴이 상기되어 있는 금청청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호호, 너는 왜 그리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게냐? 너는 운우지락(雲雨之樂)의 참뜻을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적염이 자신과 매일도를 번갈아 보며 웃자 금청청이 악을 썼.

"탕녀! 내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적염은 달콤하게 웃었다.

"이거 겁나는구나. 호호, 너에게 먹인  오보산(五步散)을 내가 직접 만들지 않았다

면 나는 겁에 질려 죽었을 것이다."

적염의 말은 금청청의 성질을 더욱 돋우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에는 악을 쓰지 못하였다.

사내! 

적염과 방금 몸을 섞은 사내가 장삼을 걸치고 나서 몸을 돌리는 것을 보았던 것이

다.

더불어 사내의 얼굴도 똑똑히 보였다.

건장한 체격에 건장한 얼굴! 

그가 어찌 적염과 정을 통한단 말인가? 

금청청은 사내를 보고 놀라 말을 더듬었다.

"당신이…… 당신이 어찌……"

사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많은 법이다."

옥산(玉山)! 

 혹은 옥루산(玉壘山)이라고도 한다.

그 산의 한곳에 위치한 사성곡(四聲谷)! 

사방이 막혀 있는 탓에, 외침  소리가 곡에 반사되어 사방에서  들려 온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곡의 위치가 묘하여, 소리가 매우 잘 울렸다.

사성곡에 가까워지자 진소백 등의 신형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최대한 조심하려는 

뜻! 복면인들의 근거지가 이곳 사성곡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진소백은  일전에 

사종쾌에게 복면인들의 본거지를 염탐하도록 부탁했었고, 사종쾌는 사성곡의 주변 

상황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 와 진소백에게 알려 주었다.

지형(地形)에서 매복 상황과 교대 시각에  이르기까지. 바로 그런 정보가 오늘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진소백의 손짓에 따라 몸을 숙였다가 일으킴을 반복하며 나아가고 있는 세 사람! 

진소백의 손짓은 의미가 있었다.

사종쾌의 조사를 바탕으로 적의 보초나 매복이 있을 곳을 판단해  내어 하나씩 헤

쳐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적은 세 시진마다 교대를 한다고 하였으니, 세  시진이 지나면 어쩔 수 없이 발각

이 된다.

복면인들이 교대를 하자마자 바로 침투를 해가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 발각이 

될 때까지의 시간을 최대로 하기 위함이었다.

복면인들을 해치우는 방법은 간단했다.

두 사람은 우회해서 좌우로 돌아가고 나머지 한 사람은 적당한  시간이 되면 풀을 

건드려 적의 주의를 끌었다.

주의가 다른 곳에 쏠린 틈을 타서 우회해 간 두 사람이 좌우에서 보초를 공격하여 

해치우는 것이니……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 처리한 초소(哨所)가 이미 둘! 첫 번째 초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그들의 무공이 고강해서가 아니라, 곡 내의 상황을 물어 보기 纛潔駭裏 진소백은 

지금 곡 내에는 

천(天), 지(地), 현(玄), 황(荒)의 네 영주 중에서 현과 황의 두 영주만이 있다는 것

을 알아 내었다.

그러나 가장 외곽의 경계는 하루 단위로 교대하는 탓에 자세한 곡 내의 상황에 대

해서는 몰랐다. 

 "좀더 자세한 것은 다른 매복자들을 통해 알아 내기로 합시다."

진소백의 말에 따라 다시 조심스레 침투를 시작한 그들은 마침내 복면인의 본거지

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절벽 아래에 도착했다.

진소백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아니, 정확히는 하늘  아래의 절벽을 가리켰

다.

진소백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서 풀들이 미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부는 바람과 

방향(方向)이 맞지 않아 다른 이유가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매복(埋伏)! "이번에는 

섭 소저가 나설 차례구려."

섭수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명문의 제자! 어찌  이런 편법을 좋아하겠는가? 게다가  진소백에게 화가 

나 있는 상황이 아닌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두고, 진소백과 빗장수는 절벽을 우회하여 올라

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절벽을 거진 다 오를 때까지 매복자들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매복자들의 전방 아래에서 섭수진이 계속 나무를 흔들며 매복자들의  이목을 집중

시키고 있는 덕분이었다.

매복자들은 이상하다 생각을 했는지 흔들리는  나무에 집중하며, 무엇인가를 찾으

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제 일 장 정도만 더 올라가면 된다.' 

빗장수의 생각이었다. 

 맞은편을 보니, 자신보다 조금 빠른 진소백이 정상을 반 장 정도 남겨 두고 있었

다.

'지금입니다, 섭 소저!' 

빗장수의 마음을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섭수진은  미리 약속한 때가 되자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산골 처녀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산속에

서 길을 잃은 것처럼! 

산속의 미녀(美女)는 언제나 모든 남성들의 시선을 끌기 마련이었다.  매복자들 역

시 사내였고 예외는 아니어서, 섭수진에게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진소백과 빗장수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매복자들의 목을 눌

러 갔다. 매복자는 모두 셋. 

 빗장수가 하나를 잡았고, 진소백이 둘을 제압했다. 이렇게 또 하나의 매복이 제거

되고 있었다. 

 "거 참, 이렇게 찾기 어려운 곳에다가 잘도 본거지를 만들어 놓는단 말이야."

방금까지 보초를 서고 있던 복면인 둘을 소리나지 않게 바닥으로 내려놓으며 진소

백이 말했다.

일전에 유유곡(幽幽谷)에 갔던 경험을 되새기며 한 말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알아

들을 리 없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빗장수의 반문(反問)에 진소백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오. 그냥…… 여기서 보니 경관이 참 좋구려."

섭수진은 진소백의 손짓을 받고서 조금 후에 올라왔다.

진소백의 말은 조금도 거짓이 아니었다. 

 경관은 정말 아름다웠다. 다만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뜨리는 인간의 건축물이 

눈에 들어와 거슬렸다. 

 절벽 아래에는 자그마한 분지가 조성되어 있었고, 그  분지 위에는 두 개의 목조

(木造) 건물이 있었다.

주위의 나무를 이용하여 지은 듯하였는데, 좌우에 두 개가 서로 대칭(對稱)을 이루

고 있었다.

절벽의 위치는 특이했다.

진소백도 사종쾌의 말을 듣고 미리 알아 두지 않았다면 찾기  힘들었을 정도로 잘 

숨겨진 곳이었다.

반면에 아래로 내려다보면 분지(盆地)가 한눈에 들어와서, 누구든지 들어오는 자들

은 이 절벽에 숨은 자들의 이목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진소백들이 이 절벽으로  먼저 오지 않고,  직접 건물로 잠입(潛入)했더라면, 

열이면 열, 들키고 말았으리라.

"어느 곳에 신주낭객이 있을 것 같소?"

진소백이 누구라고 지정(指定)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섭수진에게  던진 질문이었

다.

그러나 섭수진은 대답을 하지 않았고, 대신 빗장수가 대답하였 "글쎄요. 전해진 밀

서(密書)에는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당신에게 물은 것이 아니고…… 섭 소저, 어디에 신주낭객이 있을 것 같소?"

섭수진은 진소백이 자신을 직접 지정하자,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어떤  면에서는 

진소백이 먼저 

말을 함으로써 자존심의 대결에서 자신이 이긴 셈이었으므로.

"……제 생각으로는 오른편의 건물 안이에요."

"내 생각도 그렇소."

진소백의 동의(同意)에 섭수진은 마음이 더욱 풀렸다.

그러나 빗장수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똑같이 생겼는데 왜 하필 오른편의 건물이란 말인가? "공자, 어떻

게 오른쪽 건물이란 확신을 가지십니까?"

진소백이 웃으며 말했다.

"저 뒤의 길을 보시오. 오른쪽으로 돌아서 나 있지 않소?"

진소백이 가리키는 길은, 분지에서 절벽으로 이어지며 나 있었다. 왼쪽의 건물에서 

시작하여 오른쪽 

건물을 돌아 이어지고 있는 길이었다.

"저런 길은 사람이 많이 다녀서 생기는 것이오. 많이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당

연히 복면인들일 테니, 자연 왼쪽은 복면인들의 처소로 볼 수가 있을 것이오."

과연 그렇구나, 하고 빗장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이 복면인들의 거처(居處)라면, 자연히 오른쪽을 신주낭객을  가두기 위해 사

용하고 있을 것이오."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풀어진 섭수진이 보조(補助) 설명을 하였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가두어 둔다면, 그곳을 숙소로 사용하기는 어렵겠죠."

고개를 끄덕이며 진소백이 말을 받았다.

"문제는 저들 복면인 중에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있느냐 하는 것이오. 만일 신주

낭객을 억압시켰던 방법이 약(藥)이나 기타의 암수(暗手)가 아닌  진정한 실력이었

다면…… 지금의 우리 힘으로 신주낭객을 구하기는 매우 어렵소."

또다시 말을 받는 섭수진.

"하지만, 이때까지의 매복을 봐서는 그다지 무서운 고수가 많을 것 같지는 않아요. 

한번 모험을 해볼 만하겠죠."

진소백은 섭수진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녀의 화가 모두 풀어진 것을 알았기 때문

이었다. 섭수진은 화가 풀렸다. 진소백과 말을 주고받으며, 그의 생각이 자신의 생

각과 일치함을 알자 이상하게도 화가 

누그러졌던 것이다. 

 여자가 화가 났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모른 체하고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려 버리면 된다.

만일 여자가 화를 내고 있을 때, 하나하나  따지고 든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를 의

미할 뿐이다.

여자에 대한 당신의 무지(無知)! 

 어쨌든…… 

"이제 시간이 얼마 없소. 모두 정해진 대로 행동해 주시오."

말과 함께 진소백이 가장 먼저 몸을 날려 분지로 들어갔다.

이어서 빗장수가 들어갔고, 혼자 남은 섭수진은  주위에 널려 있는 복면인들의 무

기를 주워 모았다.

검과 도 등의 금속 무기들이 모두 모이자, 그녀는 그것들 하나하나를 나무에 매달

기 시작했다.

진소백이 분지의 건물로 접근해 갈 때, 막 왼쪽의 건물에서 나오던 복면인이 그를 

보았다.

진소백은 흠칫했으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복면인도 진소백을 보고 당황하지 않았다.

한마디를 물었을 뿐이었다.

"황(荒) 칠호. 지금은 근무 시간이 아닌가?"

복면인이 이렇게 조용히 말한 이유는 간단했다.  진소백이 좀 전에 제압한 복면인

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소백은 자신의 옷 위에 황  자와 칠 자가 적혀 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앞에 있는 복면인의 옷 위에는 현 자와 오 자가 적혀 있는 것도 보았다.

"현 오호, 한 번만 눈감아주게. 내가 속이 너무 좋지 않아서……"

일부러 쉰 목소리로 소리 죽여 말하는 진소백을 잠시 쳐다본 현 오호는 고개를 끄

덕였다.

"좋아, 자네가 어제 마작판에서 돈을  빌려 준 정리도 있으니…… 어쨌든  영주(領

主)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게."

진소백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운이 좋게도 자신이 옷을 빼앗아 입은 현 칠호란 자는 인간성이 괜찮았던 놈인 듯

했다.

"고맙네! 한데, 자네는 지금 비번(非番)인가?"

현 오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진소백의 일격이 명치에 박힌 현 오호는 기절해 버렸다.

현 오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숲속에서였다. 자신의 옷은 모두 벗겨져 있었고, 앞에

는 또 다른 현 오호가 서 있었다.

"이, 이게 어찌 된……"

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손가락 하나가 인후를 찔러 왔다.

숨이 막히며 참기 힘든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침입자…… 다.' 

동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괴한의 손이  그의 온몸을 

휘저었다.

뼈가 갈가리 찢어지는 느낌이 전신을 지배하며, 교육받았던 모든 지식들이 머릿속

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이미 아혈이 제압된 상태! 침입자를 발견하면 어떻게 한

다든지, 고문에는 어떻게 대처한다든지 하는 생각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다만 눈

앞에 서 있는 괴한만이 자신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이 뇌리를 지배하였다.

원래 이러한 심리(心理) 변화는 장기간의 고문과 세뇌(洗腦)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

이었다. 하지만 지금 진소백은 상황을 잘 이용하여 가장 빠르게 현 오호의 정신을 

공황(恐慌) 상태로 몰아가고 있었다.

다른 사고(思考)를 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빠른 변화 앞에서 현 오호의 정

신은 고통(苦痛)과 공포(恐怖)에 굴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은 지속적(持續的)이지 않았다. 

 그 부위조차 일정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고통은 피고문자가  정신적인 방어를 전

혀 할 수 없도록 가해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현 오호의 눈빛이 공허(空虛)해지기 시작하였다.

극도의 공포로 자아를 상실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바라보는 진소백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어렸다.

자신이 방금 사용한 수법은 피해자의 정신을 피폐(疲弊)하게 하여,  어떤 육체적인 

가해(加害)보다도 더욱 심한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다.

시간이 많다면 이런 방법은 자제하고 싶었으나…… '미안하오. 내겐 시간이 없소.' 

현 오호의 눈빛은 점점 백치(白痴)의 그것을 닮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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