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11 장 여명칠일(餘命七 日) (12/32)

 제 11 장 여명칠일(餘命七

日) 

 "제가 강호에 풀었던 열 명의 탐문객 중에서 삼호(三號)가 알아 내어 보내 온 정

보입니다."

수하(手下) 하나가 큰 천을 말아 들고 심화절의 옆에 서 있었다.  심화절이 눈짓을 

하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천 

뭉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엽혼의 신상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성명:엽혼(葉魂).

나이:이십사 세 가량.

가족:동생 하나. 이름은 엽평.

무공: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간의 살수행 중 실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매우 높은 

듯. 비고:동생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 살수행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이어지

는 것은 엽혼과 엽평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었고, 진소백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

이었다. 

 놀랍게도 심화절은 마침내 엽혼에 대해서 알아 냈던 것이다.

거기엔 화선에 대한 것도 있었다.

"지금으로서 중요한 단서의 끈은, 사라진 화선(花仙)이란 여인이 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심화절의 말은 어김이 없었다. 

 때문에 진소백도 이미 화선을 찾을 것을 개방에  말해 놓고 있는 상태였다. 만일 

일이 꼬이지 않아 비응방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자신이라도 직접 나서서 열심히 찾

아 다니고 있을 터였지만…… 

"모든 청부는 그녀를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그녀만 찾는다면 청부가 들어온 경로

(經路)와 청부자의 신분을 밝혀 내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심화절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역시 행방이 묘연한, 엽평이란 아이를  찾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습

니다."

진소백이 사종쾌를 통해  유유곡(幽幽谷)으로 보낸 엽평의  행방을 심화절이 알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종쾌는 이미 엽평을 생사의괴 종도에게 넘겼고, 돌아와서 보고를 마친 상태였다.

엽평은 지금 유유곡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것이다.

치료를 위해 몸을 보호하느라 직접적인  치료는 며칠 있다가 시작될  것이란 전갈

(傳喝)이었다.

"모든 힘을 기울여 찾고 있으니, 곧 무슨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심화절이 말을 잠시 쉬자, 사공두가 입을 열었다.

"하면, 이제까지 반대해 오셨던 살수의 처형 문제를 찬성하기로 마음을 바꾸신 까

닭은……?"

심화절이 힘있게 말했다.

"내가 방주를 암산한 살수를 처형함에 반대했던 것은, 배후를 알아 내고자 함이었

소. 그러나 살수가 배후를 알고 있을 리는 없는 것! 다만 청부가 

들어온 경로와 중개인을 살수를 통해 알아  내고자 함이었는데, 그에 관한 정보를 

얻었으니……"

강호에서 어느 청부자가 살수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겠는가? 살수는 살행 중에 

언제라도 죽거나, 잡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데 말이다. 심화절의 판단은 이치에 

맞았다.

"살수를 통해 알아 낼 수 있는 정보는 이미 알았으니,  더 이상 살수에게 약(藥)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일!"

진소백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뒷말은 보나마나 심장을 제물(祭物)로 바친다

는 이야기! 

'어떻게 할까? 무슨 이유를 들어 살수를 살려  두자고 하지?' 그는 열심히 그럴듯

한 이유를 찾아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 그때, 진소백의 귀로 누군가의 전음(傳

音)이 들려 왔다.

"공자! 사종쾌입니다. 화선(花仙)의 종적(縱的)을 찾았습니다."

사종쾌! 

 그는 유유곡을 다녀온 이후로 화선과 천랑파의 흔적을 찾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

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 화선을 찾아 냈던 것이다.

진소백은 급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거 죄송합니다. 조금 급해서……"

 * * * 

"어`─ 시원하다."

오줌발을 힘차게 갈겨대며 뒷간에 서  있는 진소백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볼일을 

보고 있는 듯하였으나, 사종쾌만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진소백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놀랍게도, 그녀는 공자께서 미행(尾行)을 명했던 복면인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또

한 신주낭객(神州狼客)이 억류되어 있다는 곳에서도 멀지 않습니다."

주루에서의 일을 기억하는가? 

염소 수염이 옆 탁자에서 도약하자 진소백이 입을  달싹거렸던 것을! 동시에 구석

의 거지가 일어서서 나갔던 것을! 

그때, 진소백은 염소 수염을 쫓는 복면인들을 미행할 것을  명령했었고, 구석에 앉

아 있던 개방의 

고수는 복면인의 뒤를 추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굴을 알아 냈던 것인데…… 

거기에 화선이 같이 있었다니! 

"화선은 억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수하들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오히려 윗사람

인 양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화선은 단순한 중개인이 아니라, 청부자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일까? 진

소백은 사건이 재미있게 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사종쾌의 전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자들의 행색이 엽 소형제를 암습한 미창  등이 했던 복면과 같다 하니, 관계가 

있는 자들임이 분명합니다."

무언가 일이 풀리는 것 같았다.

화선이 복면인과 함께 있고, 그들이 천랑파의 신주낭객(神州狼客)을 억류하고 있는 

자들이라면 이 일은 이치에 맞았다.

무언가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것 같다는 구천(仇賤)의 태도도 이해가 되었다.

생각을 마친 진소백의 전음이 사종쾌의 귓전에 울렸다.

"좋아! 그들의 허실(虛實)을 더 알아 보되, 들키지 않도록 부디 조심하시오!"

"예, 공자!"

사종쾌가 사라지는 기색이 숲속에서 느껴졌다.

 * * * 

볼일을 마치고 진소백이 돌아왔을 때는  회의가 끝나 가고 있었  진소백은 어쨌든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수가 깨어난다면 더욱 많은 것을 알 수 있지 않소? 기다려 보는 것이……"

하나 이미 마음을 바꾼 심화절의 의지(意志)는 단호했다.

"아니오. 내가 만일 흉수라도 살수에게 정체를 알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가 배

후자를 알고 있을 가능성은 전무하오! 

그는 이제 쓸모가 없소."

─`그는 쓸모가 없소! 

처음부터 살수를 살려 두지 않고자 했던  금청청과 고숭무, 사공두는 군말없이 동

의했다.

진소백으로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지금은 밤! 

 이 밤이 밝으면, 금사진의 장례는 불과 이틀이 남을 뿐이었다.

엽혼의 생명도 역시 이틀이 남게 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진소백은 다만  마음

속으로 외칠 뿐이었다.

'어서 깨어나거라, 엽혼!' 

남은 방법은 엽혼이 한시라도 빨리 깨어나는 것! 

깨어나서 심화절 등이 자신을 죽이지 못할 조건(條件)의 증언을 하는 것이었다. 흉

수의 정체(正體), 청부의 배후(背後) 증언은  충분히 면사(免死)의 조건이 될  것이

다.

흉수가 누구인지를 밝혀 내는 것은 진소백이 할 일이었다. * * * 

때때로 기적은 일어난다.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일에 기적은 일어나기도 하는 것

이니……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기적은 진소백의  간절한 마음에 대한 반향(反響)

인 것일까? 떨어지는 물소리. 

 물이라고 했으나, 향긋한 약향(藥香)을 풍기는 이것은 단순한 물이 아니었다.

각종 약재가 배합되어 만들어진 약수(藥水)는, 정확히 두 곳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약수가 떨어지는 아래에는 시신(屍身)이 하나 놓여 있었다. 약수는 바로 그 시신의 

왼쪽 어깨와 심장 아래를 겨냥하며, 정기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보라! 

지금 약수(藥水)를 맞고 있던 시체의 눈이 천천히 열리고 있지 않은가? 기적(奇蹟)

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곳은……?' 

엽혼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귓가에 들리는, 물 떨어지는 소리와 그  물이 닿는 부위에서 전해져 오는 지

극한 고통만이 선명(鮮明)할 뿐이었다.

오랜 기간 사용되지 않아 약해진 눈에는 뿌연 안개만이 서려 있었다. 이윽고 안력

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하자, 그는 이곳이 어두운 석실의 내부(內部)임을  알 수 있

었다.

자신이 석대 위에 누워 있다는 것도!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은 아마도 상처를 치료(治療)하는 작용을 하고 있는 듯, 떨어

져 내릴 때마다 아릿한 고통 속에서도 시원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엽혼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확연히 깨달았다.

가슴을 찔러 오던 사공두의 도첨(刀尖)이 떠올랐다.

뿜어 낸 피 속으로 천천히 침몰(沈沒)하던 자신의 모습도! 허공을 갈라 와서  사공

두의 도신을 쳐내던 심화절의 비도(飛刀)를 떠올리는 데는 좀더 시간이 걸렸다. 

 비도(飛刀)가 도신(刀身)의 방향을 미미하게나마 바꾸었고,  방향이 바뀐 도는 심

장의 바로 아래를 뚫었으니…… 

'내가 살아난 것인가?'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두 눈만을 깜박이며 누워 있을 뿐이었다.

정신의 맑아짐과 흐려짐이 반복되고 있었다.

약봉지를 갈려고 들어왔던 의원이 엽혼이 깨어났음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두어 

시진이 지난 후였다. 

 그는 부랴부랴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소식은 가장 먼저 심화절의 귀에 들어갔고,  심화절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소식

을 알렸다.

다만, 진소백과 섭수진에게는 날이 밝으면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정확한 의도(意

圖)가 무엇이든 간에 심화절의 이런 

생각은 엽혼의 입장에서 본다면 치명적인 것이었다.

엽혼을 암중에 보호할 진소백이 없다면, 누구인지는 모르나 흉수의 살수에서 엽혼

은 매우 위험하게 되는 것이므로.

처소로 돌아가 잠을 청하던 비응방의 사(四) 인(人)이 이 소식을 듣고 엽혼이 있는 

석실 앞에 다시 모였을 때의 시각은 이미 사경 무렵! 

입구(入口)를 바라보는 사 인의 심정은 저마다 달랐다.

어떤 이는 초조했고 어떤 이는 담담했다.

차기 비응방주가 될지도 모르는 삼 인과 사공두는 긴장하여 아무도  먼저 말을 하

지 않았다.

누가 흉수이고, 누가 반도(叛徒)인지  모르는 상황! 깨어난  엽혼은 사건을 어디로 

몰고 갈 것인가? 

기기잉`─` 

돌과 돌이 마찰하는 소리가 커지며, 서서히 석문이 열렸다.  석실로 들어가는 석문

이었다. 이윽고 열려진 문을 통해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한 감정을  가득 지낸 채 

들어갔다.

"살수는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이냐?"

고숭무의 질문에 의원은 깊이 머리를 숙였다.

"예. 하나 신지를 완전히 찾자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고숭무의 옆에 서 있던 심화절이 물었다.

"말을…… 대답을 할 수는 있겠소?"

심화절의 말은 반경칭(半敬稱)이라,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고숭무와 다름을 보

여 주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말귀는 알아듣는 듯하나, 아직 말을 하는 것은 무리일 듯싶습니다."

막 깨어난 탓에 아직은 몸의 근육(筋肉)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이리라.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가 심화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격잠지술(激潛之術)에 대해 알고 계시오?"

의원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격잠지술이란 말 그대로 체내(體內)의 잠력(潛力)을 격발시키는 방법을 총칭(總稱)

하는 말이었다.

인간의 신체에는, 평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생명의 위기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 

처하면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곤 하는 

숨은 힘이 있다.

그 힘은 잠력이라 불렸는데, 각 의가(醫家)에서는 저마다 이 힘을 이용하는 방법을 

개발(開發)하여 전하고 있었다.

흔히 보약(補藥)이라고 부르는 각종 영약들 중에는, 이 잠력을 격발시켜 몸에 활기

를 주는 형태의 약들이 많았다.

그러나 잠력(潛力)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신(神)이 안배한 ! 약이나 다른 힘으

로 잠력을 격발하여 사용한 사람들은, 잠력이  쇠하면 급격히 힘을 잃고 노쇠하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마치 기름이 다한 등잔이  사그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기력(氣力)과는 달리, 잠력은 쓰고 나면 다시 회복시킨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

다. 

 많은 보약과 영약을 먹은 사람이 임종(臨終)에 이르러,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

는 것은 이런 이유였다. 

 어쨌든…… 

의원은 고개를 숙였다.

"알고는 있습니다만……"

심화절은 이미 답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바로 말을 이었다.

"살수를 깨어나게 하시오."

의원이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만일 격잠술을 시술한다면……"

그 뒤의 말은 들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살수의 생명을 되살릴 수 없게 된다는 것. 

 이미 상처가 큰 탓으로 엽혼의 원기는 많이  상해 있었다. 여기에다 격잠술을 베

푼다면, 회생(回生)할 가망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진소백이 있었다면 무슨 이유를 들어서라도 만류했을 것이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의원은 품에서 침통을 꺼내어 엽혼의 머리맡에 가지런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 * * 

진소백은 사경이 조금 지나 깨어났다.

소피가 마려운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이  심란하여 잠이 깊게 들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뒷간을 갔다가 돌아오던 그는 이  깊은 밤에도 비응방의 후원이  밝음을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야 불이 밝혀진 곳이, 바로 엽혼이 누워 있는 선약실

(仙藥室) 쪽임을 깨달았다.

 * * * 

침은 엽혼의 백회혈(百會穴)을 삼 푼의 깊이로 파고 들어갔다.

지금 그는 가부좌(跏趺坐)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가부좌가 가장 안정된 자세의 하나임에도 어딘가  어색하게 보이는 것은, 다른 사

람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이 

이미 신정혈(神庭穴)에도 침이 박혀 대롱거리고 있었다.

의원의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이렇게 침을 이용하여 잠력을 격발시키는 시술은 효력이 금방 나타난다는 장점(長

點)이 있었지만, 또한 그만큼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백회혈에 이어 양쪽의 관자놀이에도 두 개의  침을 꽂은 의원은, 마지막으로 금빛

으로 빛나는 긴 침을 하나 들어올렸다.

의원의 두 눈이 주시하는 곳은 엽혼의 목 뒷부분! 

이것이 이 시술의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마지막 고비였다.

뇌호혈(腦戶穴)! 

만일 반 푼의 오차(誤差)만 생겨도  피시술자는 신지(神志)를 상실한 식물  인간이 

된다. 사고(思考)의 기능을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의원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의원으로선 일류(一流)였다. 그러나 격잠지술에 사용되는 혈도는 거의가 치명

적인 사혈(死穴)인지라, 그가 아무리 의술에 능할지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금침이 엽혼의 뇌호혈에 세 푼 반의 깊이로 박혔다.

긴장의 순간이 지나고, 의원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안도의 숨을 길게 쉬었다.

"후, 다행히 성공했습니다."

그 말에 호응(呼應)이라도 하는 듯, 가부좌한  엽혼의 전신(全身)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 * * 

진소백의 이어지는 질문에도 석실 앞을 지키고 선 무사 둘은 입을 열지 않았다.

"석실 안으로 누가 들어갔는지 모른단 말이냐?"

다시 한 번 물어도 역시 묵묵부답! 

만약 진소백을 모르는 자들이라면, 이러한 태도도 가능했다. 그러나  이미 방주 살

해 사건을 조사하는 인물로서 대다수의 비응방 방도들이 그를 알고 있는 상황! 

누군가의 지시가 없다면, 이처럼 간덩이 부은 태도를 보일 수는 없으리라.

'누구의 지시를 받은 것이지?' 

물론 진소백은 이런 질문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당연히 심화절일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비응방 내의 서열상 심화절을 앞서는  고숭무(暠崇武)는 뒷전

으로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어쨌든, 경비무사들의 태도에 진소백은 몹시 화가 났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툴툴거리며 돌아가겠는가? 팔까지  마구 흔들어대면

서 말이다.

진소백은 돌아갔으며, 남은 두  경비무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 심화절의 명이라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긴장했었던 것이다.

크게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마시는  바람에 진소백이 손을 흔들며  뿌려 낸,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하얀 가루가 코로 들어갔지만 경비무사들은 느끼지 못했다.

잠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 * * 

엽혼의 몸이 떨리는 것은 잠력이 서서히 일어나 온몸으로 퍼져  나가고 있기 때문

이었다.

전신을 달리며 곳곳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은 잠력은 마침내 엽혼의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하였다.

"이…… 곳은……?"

엽혼이 처음 뱉은 말이었다.

"악적(惡敵)! 이제 깨어났느냐?"

평소 심화절에 대한 충성이 각별했던  사공두가 악을 쓰자 심화절이  조용히 그를 

말렸다. 그리고…… 

"당연히 비응방(飛鷹幇)이지. 기억하는가?"

심화절의 조용한 말에, 그렇지 않아도  창백했던 엽혼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왜 나를 살린 것이오?"

또 악을 쓰려는 사공두를 제지하며, 다시 심화절이 물었다.

"자네는 우리 비응방에 진 빚이 있네. 인정하는가?"

엽혼의 눈에 이채(異彩)가 떠올랐다. 

 자신은 살수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정중한 말투에 조용한 어조라니! 엽혼은  심화

절이란 인물이 무척 특이(特異)함을 느꼈다.

"인정하오!"

"좋아! 하면 묻겠네. 자네는 뒤에 있는 청부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엽혼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보고만 있자, 심화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방주를 살해한 것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네."

심화절은 낮지만 더욱 힘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청부자에 대해 알고 있다면, 아니, 짐작이 가는 자라도 있다면 말해 주게. 자네는 

빚이 있지. 따라서 의무도 있지 않은가?"

조용한 말이었다. 

 여기에는 아무런 위협도 강제도 없었다. 그러나  어떤 고문이나 위협보다도 더욱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음을 엽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내는 비록 고문에는 꿋꿋할 수  있으나, 이렇게 마음의 빚을  공략(攻掠)해 오는 

것에는 약한 법이었다.

엽혼의 눈에 복잡한 빛이 어렸다.

미미하게 흔들리던 엽혼의 눈빛이 하나로  모아지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 금 방주에게 일검을 꽂기 전…… 이미 호각 소리를 들었소."

이번에는 금청청과 사공두, 심화절과 고숭무의 눈빛이 모두 흔들렸다.

금청청과 사공두는 '일검을 꽂았다'는 말에, 심화절과 고숭무는 호각  소리가 먼저 

났었다는 말에 흔들린 것이었다.

살인이 있기 전에 호각 소리가 났다는 것은……? 

호각은 금사진의 연공실에 있는 줄에 연결되어 있었다. 금사진이  위기(危機)를 깨

닫고 줄을 끊으면, 줄에 연결되어 있던 백근 무게의 돌이 떨어지며 기관을 자극하

여, 호각이 비응방 내에 울려 퍼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금사진이 그 줄을 끊은 것이 아니었다니……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호

각을 울렸다는 것인가? 엽혼이 조용히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당신들에게 잡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을 것이오."

그렇다. 바로 살인을 청부한 자! 그는 당연히  엽혼이 죽어 증거(證據)가 사라지기

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호각 소리를 울려 비응방의 힘으로  엽혼을 죽이려 하였으나, 심화절의 신

속한 대응(對應)으로 계획이 무산되어 

버린 것이리라.

"……내가 침투한 경로는 지하에 있는 비밀 통로였소."

비밀 통로라는 말에 중인들이 모두 놀라고 있었지만, 엽혼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한 정보들이 그렇게 쉽게 구해졌다는  것은, 비응방 내부에 조력자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했소."

말을 계속하던 엽혼의 눈빛이 다시 한 번 흔들렸다.

마음속의 갈등(葛藤) 때문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귓가에 전음(傳音)이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매우 잘 알고 있는 

친우(親友)의 전음이! 

 "잘했네, 이제 한마디만 더하고 서서히 정신을 잃는 척하게!"

다름 아닌 진소백의 전음! 

 그는 엽혼이 막 깨어나는  순간에 석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숨어서 전음을 

날렸던 것이다. 

 엽혼은 진소백이 시키는 대로, 자신이 살인의 배후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음

을 비응방의 인물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던 것이 

그리고…… 

"어쨌든 내가 나름대로 조사하여 본 결과, 살인을 청부한 자는 다름 아닌……"

그러나 중인들은 결정적인 말을 듣지 못하였다.

말소리가 점점 미약해지더니, 그가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던  것이다. "이

런!"

의원이 급히 달려와 엽혼의 맥을 짚어 보더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생각보다 원기의 손상이 컸던 것 같습니다. 당분간은……"

심화절이 아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다시 한 번 격잠술을 시전할 수는 없소?"

의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불가능합니다. 이미 잠력이 많이 소진(消盡)되어 버린지라……"

"깨어난다는 보장은 있는 것이냐?"

고숭무의 우렁우렁한 말이었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운에 맡길 뿐입니다."

중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3 

중인들은 말없이 서 있었다. 

 이제, 두 가지 사실은 확실(確實)해졌다.

하나는, 일반적인 상식에는 어긋나지만,  이 살수가 모종의 이유로  청부자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을 하려다가 정신을 잃었으니, 다시 깨어난다면 청부자를 알려 줄 것이다.

두 번째, 이제 청부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살수를 해치려 할 것이라는 점! 결

코 좌시(坐視)할 수 없었다.

"나는 숭무당(崇武堂)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살수를 보호하겠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수를 죽이자고 주장했던  고숭무가 선수(先手)를 치고 나왔

다.

"광문당(廣文堂)도 총력(總力)을 다할 것이오."

심화절도 굳은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사공두만은 독두(禿頭)에 주름을 지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이윽고 심화절과 고숭무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그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순찰당도 고수를 동원하여 주변을 감시하겠소."

고개를 끄덕인 심화절이 다시 의원을 보았다.

"빠른 시간 내에 살수가 깨어나도록 최선을 다해 주시오."

고숭무를 비롯한 삼당의 당주들은 떠났다.

금청청만이 마지막까지 남아 복잡한 눈으로 기절해 있는 엽혼을  바라보다가 나갔

다.

그 눈에서 가장 강력한 감정은 살의(殺意)였다.

이제 석실에는 엽혼과 의원만이 남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한 사람 더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 * * 

지풍은 느닷없이 날아왔다. 무공을 모르는 의원은 영문도 모른 채 쓰러졌다.

지풍이 누른 경혈은 수혈(垂穴)이었으므로! 

의원이 쓰러져 잠이 들자마자, 하나의 그림자가 유령(幽靈)과도 같이  엽혼이 누워 

있는 석대 옆에 내려섰다.

키가 매우 작아 어린아이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면 난쟁이인가? 그러

나 이런 추측들은 모두 틀린 것이었으니…… 

우득, 우드득!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아니, 빠져  나왔던 뼈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였

다. 기음(奇音)과 함께 인영의 키가 점점 커져 갔다.

이윽고 제 모양을 찾은 인영은 키가 훤칠하여,  좀 전의 그 자그마했던 모습은 상

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키를 가진 자가 그렇게  몸을 작게 만들 수 있는  무공은 하나, 바로 축골공

(縮骨功)이었다.

인영은 서서히 엽혼의 옆으로  다가서더니 이윽고 손을  번쩍 들었다. 금방이라도 

내리칠 듯한 기세! 

 설마 그는 엽혼을 죽이기라도 하려는 것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기력이 다해 혼절하였던 엽혼이 다시 눈을 떴던 것이다.

엽혼은 나지막이 탄식했다.

"축골공(縮骨功)을 시전한 상태에서도 좀 전과 같은 지력(指力)을  구사할 수 있다

니, 자네의 무공 성취(成就)는 믿을 수 없을 지경이로군!"

나타난 인영의 입에서도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잔말하지 말고, 어서 남은 잠력을 내가 인도하는 대로 흐르도록 하게."

인영, 진소백은 들었던 손을 내려 엽혼의 혈맥을 따라 치기 시작하였다.

본래 엽혼에게는 여력이 있었으나, 진소백의 지시에 따라 의도적으로 혼절(昏絶)을 

가장했던 것이다.

지금 진소백은 그 남은 잠력을 이용하여  엽혼을 치료하려 하는 것이었다. 엽혼은 

눈을 감고 진소백의 인도에 따라  주천(週天)을 시작하였다. 격발된 잠력 중에  몸 

속에 

남아 있던 부분들이 마치 진기(眞氣)처럼 경락을 따라 돌기 시작했다.

한 시진이나 지났을까? 

진소백의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엽혼의 얼굴은 잃었던 화색(和色)을 되찾아 불그레해졌다.

엽혼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선비 삼일별에 괄목상대(刮目相對)라더니,  자네는 의술에서도 믿기  힘든 진보를 

보았군!"

그러나 진소백의 얼굴은 침통하였다.

"격잠지술 덕분에…… 자네는 힘을 되찾기는 하였으나, 단지 칠 일의 시간이 있을 

뿐이네. 그 후가 되면……"

잠력을 격발시켜 깨어난 것이니, 칠 일 후에 잠력(潛力)이 다하게  되면 어떤 방법

으로도 엽혼의 생명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남아 있는 잠력을 이용하여 칠 일간의 시간이나마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

게 만든 진소백의 의술이 놀라울 뿐이었다.

친구를 바라보는 엽혼의 눈빛이 뜨거웠다.

"고맙네. 나를 위해……"

진소백의 표정은 여전히 침울했다.

"만일 내가 좀더 일찍 왔더라면, 격잠지술(激潛之術)을 막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

만일 그랬다면, 회복(回復)에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지금과 같은 회생 불능의 상

태는 아니었으리라.

진소백은 이런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엽혼은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만족하네. 어차피 죄가 많아 하늘을 보고 살 면목(面目)이 없으니…… 

다만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평아를 보았으면……"

엽혼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참, 자네는 어떻게 여기에 들어올 수 있었는가?"

진소백은 엽혼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개방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비응방에 들어오게 된 일이며, 천랑파(天狼派)의 구천이 

엽평을 습격했다가 금청청 때문에  실패했던 일, 생사의괴  종도가 엽평의 치료를 

맡기로 한 

일에다, 빗장수의 일과 화선의 종적을 찾은 일까지.

"생사의괴가 장담했다면 평아의 목숨은 구한 것이나 다름이 없겠군!"

엽혼이 웃음을 머금었다.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다만 자네가……"

엽혼이 진소백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평아(枰兒)를 금청청이 구해 줬다니…… 나로서는……"

자신이 금사진을 암격(暗擊)했던 것을 말함이었다. 금사진이 비록 죽어  있기는 하

였으나, 자신이 그의 가슴에 일검을 꽂은 것만은 사실이 아닌가? 

"나로서는 그녀를 볼 면목이 없군!"

다시 진소백을 보면서 엽혼이 말을 이었다.

"평아에게 이 말을 꼭 전해 주게. 금청청,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도와 주

라고."

"알았네."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친구가 어린 시절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알고는 기뻐하였다.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으려는 엽혼! 

그런 그가 자신에게 부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다. 깊은  우정(友情)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오늘 화선(花仙)과 그 복면인들이  있다는 곳에 가기로 하였네.  그리고 천랑파의 

신주낭객이 있는 곳도 그 근처이니, 그를 구하게 된다면 구천(仇賤)이란 자를 만날 

수 있을 걸세."

잠시 쉰 진소백이 엽혼의 손을 잡고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게. 내일은 비응방의 새 방주를 추대하는 날이니, 번잡한 틈을 타서 

자네를 탈주시킬 기회를 찾을 수도 있을 걸세."

엽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지 말게. 난 죄를 지었으니 여기에  있겠네. 다만, 비응방과 금청청에게 

지은 죄를 

씻을 길은 청부자를 찾는 것이니…… 자네가 힘을 써주게!"

전문적인 살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살수로서의  교육을 받는다. 그 와중에 정신까

지도 세뇌(洗腦)되어, 청부자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을 스스로 금기시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엽혼은 일반 살수와는 달랐다.

그는 무인에서 살수로 전업(轉業)한 인물! 

어떤 의미에서, 청부자에게 의문을 가질 이런  인물을 선택했던 것은 청부자의 실

수인지도 몰랐다.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답답해져 왔으나, 엽혼이 이미 결심한 이상 그의 마음을 바꾸고 싶지는 않

았다.

어차피 아직은 며칠을 더 요양해야 체력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것이므로, 당장 탈

출을 결행하는 것은 무리인지도 몰랐다.

한번 더 엽혼을 바라보고 나서 진소백은 떠나갔다.

엽혼은 다시 석대 위에서 가사 상태를 가장(假裝)했다.

진소백은 떠나기 전에 엽혼의 가슴 주위의 혈맥을 두드려,  혈행이 불규칙(不規則)

해지도록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 이런 조치를 당하는 사람은 혈행(血行)이  방해를 받게 되어 탈이 나

겠지만, 지금의 엽혼은 달랐다.

그는 일반의 힘이 아닌 잠력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니, 혈행을 통해 전달되는 

기(氣)를 받지 못하더라도 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두 가지의 이득(利得)이 있었다. 

 하나는, 기가 천천히 도니 정해진  양(量)의 잠력을 오랜 기간에 걸쳐  나누어 쓸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의원이  진맥(診脈)을 하더라도 엽혼의 혼절이 가장

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의원은 진소백이 나가고 일 각이 채 안 되어 정신을 차렸다.

"으음…… 어떻게 된 것이지?"

고민하던 의원은 자신이 졸았던 것으로 결론(結論)을 지었다.

사실, 근래 잠이 너무나 부족했었다. 

 의원은 엽혼에게로 다가가서 다시 한 번 맥을 짚어 보았다.

힘이 없었고, 맥동(脈動)마저 일정하지 않았다. 

 "이런, 혈행(血行)이 더욱 불규칙해지다니…… 과연 깨어날 수 있을까?"

과연 깨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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