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9 장 신주낭객(神州狼客) (10/32)

제 9 장 신주낭객(神州狼客) 

적염의 거처는 비응방의 좌측에 따로 마련돼 있었다.

원래 비응방에는 삼당 외에도 따로이 이전(二展)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인  집형전(執刑展)은 화골장(化骨掌)이라 불리는  노굉(魯宏)이 맡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인 천화전(天花展)이 바로 적염(狄艶)의 거처였던 것이다.

진소백과 섭수진이 천화전에 도착하였을  때, 적염은 자신의  거처에서 몸을 누인 

채였다.

"충격이 크셨겠어요."

진소백이 또 뭐라 말을 할까 봐 지레 겁이 난 섭수진은 얼른  인사말을 먼저 꺼냈

다.

적염은 대청에서 심화절이 문파 내에 반도(叛徒)가 있다고 말한 것을 듣고서는, 여

러 가지 충격이 

겹쳐 자리에 눕고 만 것이었다.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희 비응방을 위해 애를 써주신다고요."

인사치레가 서로 오가고 있을 때 진소백이 또 느닷없이 끼여들었다.

"선(先) 방주를 사랑하셨습니까?"

선 방주란 말이 적염에게 충격을 준 듯,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는…… 당연히……"

섭수진이 진소백을 가로막았다.

"진 공자께서는 또……"

섭수진은 눈을 흘기며 진소백이 또 뭐라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급히 자리를 물러

나오려 했다.

그러나 코를 킁킁거리며 한사코 물러나지 않으려는 진소백! "어어,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니깐요."

그런 진소백을 억지로 방에서 데리고 나가는 섭수진이었다.

진소백은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다.

"에이, 천화전은 꽃도 많고, 향기(香氣)도 좋았는데……"

섭수진이 눈을 곱게 흘겼다.

그녀는 이 남자가 말은 많았지만, 꽤 재미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적 부인에게 그렇게 무례한 말을 하니 물러나오지 않을 도리(道理)가 있나요?"

"좋소, 좋아. 난 무례하고 당신은 예의를 갖추었으니,  우리는 죽이 잘 맞는 한 쌍

(雙)이구려."

진소백의 말에 섭수진은 내심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런 일에는 무례하게 사건을 파고드는 일면(一面)도 필요했다.

진소백이 다시 코를 킁킁거리더니 말했다.

"섭 소저가 보기에도 적염, 적 부인이 충격을 받은 것 같소?"

"글쎄요. 어딘가 이상한 점도 있지만……"

갑자기 진소백이 딴소리를 했다.

"우리 집의 황아(黃兒)는 말이오, 냄새를 아주 잘 맡소."

"황아라면……?"

"아! 내가 기르는 개요. 어쨌든 나는 그놈에게서 중요한 것을 많이 배웠소."

갑자기 개 이야기라니…… 섭수진은 어리둥절했다.

"그놈이 내게 가르쳐 주기를, 냄새만 잘 맡아도 평생 남에게 속을 일이 없다는 거

였소."

"무슨…… 뜻인가요?"

진소백이 길가의 꽃을 꺾어 냄새를 맡더니 섭수진에게 내밀었 "이 꽃은 향기가 매

우 좋군요. 섭 낭자에게 매우 잘 어울리겠소."

섭수진은 무심결에 그 꽃을 받아 향기를 맡아 보았다.

"정말 좋군요."

진소백은 사방에 만발한 꽃을 둘러보았다.

"이런 곳에 산다면 집 안 곳곳에 꽃 향기가 배게 될 거요. 그렇지 않소?"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진소백은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 

"아까 말이오. 적 부인의 방에서 무슨 냄새 맡지 못하였소?"

그러고 보니 무슨 냄새가 났던  것 같기도 한데…… "꽃 향기에  섞인 그것은…… 

우육탕(牛肉湯) 냄새였소. 이건 황아에게서 배운 절기이니 믿어도 좋소."

음식의 냄새였나? 환자의 방에서 음식 냄새가 났었나? 섭수진은  어리석은 여인이 

아니다.

아파서 누워 있는 환자에게 영양가 높은 음식을 가져다 주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 "왜 음식은 없고 냄새만 그렇게 진하게 남아 있었겠소?"

"우리가 들어가자 급히 음식을 치웠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진소백이 이번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멀거니 섭수진을 쳐다보았다.

섭수진은 조금 당황했다.

"왜 그러시죠?"

"음, 더 이상 말을 하는 것은 아미제일지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생각해서요."

섭수진은 웃었다. 그것도 매우 유쾌하게.

"당신은 매우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진소백도 따라 웃었다.

"좋소. 매우 좋소."

"뭐가 좋다는 것이지요?"

"나는 처음 이곳에 올 때 시커먼 남자들만 상대하게 될 줄 알았었소. 그런데……"

"그런데요?"

"이런 아름다운 동료를 만났으니 내 운(運)이 어찌 아니 좋다 할 수 있겠소."

섭수진은 더욱 크게 웃었다.

만일 당신이 그다지 웃기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여자가 크게  웃는다면 그 이유는 

둘 중의 하나이다.

여자가 당신을 무서워하거나, 당신을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의 말은  특히 재

미있게 들리는 것이므로.

섭수진은 진소백을 무서워하는 것인가? 

아마 이것도 더 이상 말하면 누군가의 머리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이  아닐까? 둘

은 유쾌하게 웃으며 걸어갔다.

진소백은 아까 적염의 거처에서 음식물의 냄새를 맡았다.

적염의 병은 마음의 병! 음식이 입에 들어갈까? 

만일 시비들이 적염을 걱정하여 음식물을  준비한 것이라면 왜 급히  음식을 치운 

것일까?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노이(老二)가 하는 일은 천화전에서 화원(花園)을 돌보는 것이었다. 오늘도 화원을 

손질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던 그가, 화사하게 웃으며 걸어오는 두 젊은 

남녀를 본 것은 

오후 느지막한 시간이었다.

비록 차림새는 둘 다 수수했으나, 저렇게  당당하게 걸어다닌다는 것은 둘의 신분

이 자신과는 다르다는 의미(意味)임을 노이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중의 남자가 자신을 향해 손짓을 하자, 노이는 재빠르게 달려갔다.

"수고가 많구려. 이 넓은 화원을 노인장이 혼자서 가꾸시는 게요?"

"수고라닙쇼. 저는 다만 열심히 일할 뿐입죠."

고개를 숙이는 노이에게 청년은 품에서 두 냥 가량의 은자를 꺼내어 건네 주었다.

"적 부인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니 당신이 화원을 잘 가꾸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

도록 해주구려."

노이는 그저 기분이 좋아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 와중에 청년의 말은 이어졌다.

"그리고 나도 뭔가를 해드리고  싶은데, 혹시 적  부인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아시오?"

"알구말굽쇼. 적 부인은 우육탕(牛肉湯)을 가장 좋아하십지요. 고기 국물이 없으면 

한끼 식사도 안 하신답니다."

지금과는 달리 쇠고기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항상 쇠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상당히 고급스러운 입맛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충 짐작이 가지요?"

계속해서 인사를 해대는 노이를 두고  떠나온 진소백과 섭수진이 지금  서로 말을 

나누고 있었다.

"예."

고개를 끄덕이던 섭수진이 분위기를 바꾸어 진소백을 바라보았.

"그런데…… 공자에게 한 가지 물어 볼 게 있어요."

섭수진의 말에 진소백도 섭수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든지 좋소. 난 아직 총각이고, 사귀는  여자도 없고, 또…… 내가 좋아하는 

여인상은…… 음…… 뭐, 무엇이나 물어 보시오."

섭수진이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요, 공자가 아까  주신 그 은자……  공자는 개방의 인물이 아니신가

요?"

개방은 무소유(無所有)를 실천하고자 하는 문파! 

 품에 돈을 가지고 다닐 리가 없는 것이니, 이런 섭수진의 의문은 당연했다.

진소백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눈으로 섭수진을 보았다.

"내가 개방도로 보인다는 말이시오?"

그러고 보니 진소백이 입고 있는 옷은 낡기는 하였으나 개방 문하(門下)들의 특징

(特徵)인 오의(汚衣)가 아니었다.

개방은 특성상 누더기와 조각 천을  기워 짠 오의를 입었는데,  이것은 방주 이하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이었다.

"난 단지 개방주이신 인의신개님의  부탁으로 여기 왔을  뿐, 개방에 속한 사람은 

아니라오."

섭수진의 눈에 의혹이 서렸다.

당연히 개방의 인물이라 여겼었는데,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 출신이란 말인가? 섭

수진의 의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소백은 설쳐대고 있었.

"자, 이럴 게 아니라 오늘은 이만 수사를  끝내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합시다. 

물론 술은 마실 줄 아시겠죠?"

섭수진의 아미가 살포시 찡그려졌다.

'이 사람은 내가 아미 출신인 것을 잊었단 말인가?'  아미는 불문(佛門)의 성지(聖

地)! 

 아미의 제자인 섭수진이 술을 마시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진소백은 막무가내였다 

평소의 섭수진이라면 화를 내도 몇 번은 냈을 상황이지만  이상하게 진소백에게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당신이 아미의 제자라곤 하지만 머리를 기른 것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단 뜻이니

……"

진소백의 억지에 섭수진은 마침내 화를 내고 말았다.

"공자의 억지는 정말 심하군요!"

진소백의 억지는 심했다.

그래서 섭수진은 마침내 주루까지 따라오고 말았다.

비응방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이 주루에 둘은 마주앉아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이 화를 내자, 풀이 팍 죽어 있던 진소백이 너무 안돼 보인 것이 화근(禍根)이

었다.

따라는 가되, 자신만 마시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주루에 같이 온 것

은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음이 곧 밝혀졌다.

단순히 주루라면 이미 몇 번  가본 적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자, 한 잔 더 

마시자구요."

벌써 세 잔째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한번 양보(讓步)하면 계속 양보를 하게 되는 것일까? 처음엔 따

라만 와서 진소백이 술 마시는 것을 구경만 하고자 했던 섭수진이, 진소백이 계속 

술을 마셔 

볼 것을 권하자 딱 한 잔만 하고 마신 것이 이미 세 잔째였다.

그런데도 한 잔 더 하자니…… 

'이 사람이 나를 어찌 보고!' 

그런데 화가 치미는 마음 한구석에 슬금슬금 올라오는 이 쾌감(快感)은 무엇일까? 

그 정체(正體)를 알아 보고자, 섭수진은 한 잔만 더 마셔 보기로 결심했다.

"좋소, 좋아. 잘 마시는구려."

다시 진소백이 한 잔을 따르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그래서 섭수진은 또 한 잔을 더 마셔 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한 잔이 다시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다시  세 잔이 되는 술의 경지

(境地)를 그녀는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우당탕`─ 

술집에서 싸움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밖에서 일어난 

싸움이 술집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그다지 흔하지 않다.

지금 들려 온 소리는 밖에서 한 인물이 술집 안으로  뛰어들다 탁자를 넘어뜨려서 

난 소리였다. 

 이런 일은 확실히 드문 경우였지만 진소백과 섭수진의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지금은 술의 경지에 들어 있어 정신이 혼몽(混夢)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조금 술이 센 진소백의 눈도 게슴츠레해서 난입(亂入)한 자가 사십대 정도에 보통

의 체구를 지니고 턱밑에 염소 수염을 기른 자라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을 뿐이

다.

섭수진은 난생 처음 마셔 보는 술에 취해, 그것조차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염소 수염이 입구에서부터 단숨에 삼 장을 뛰어올라 진소백  등이 앉아 있

는 바로 옆의 탁자를  차고 다시 도약(跳躍)해 나가자  진소백의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쿵! 

염소 수염이 탁자를 차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는 그 바람에 넘어진 자루에

서 빗들이 즐비하게 쏟아졌다. 

 아마도 옆 자리의 자그마한 체구에  검은 모자를 쓴 중년인이 빗을  파는 사람인 

듯했다.

그러나 진소백이 주목(注目)한 것은 바닥의 빗이 아니라, 염소 수염이 구사한 신법

이었다.

그가 전개한 신법은 마치 한 마리의  이리가 뛰어오르듯 날렵했는데, 놀랍게도 다

름 아닌 천랑파(天狼派)의 경랑충천(驚狼沖天)이 아닌가! 

천랑파! 

 그가 개방의 인물들에게 말하여 열심히 찾고 있는 자들이다.

어쨌든 염소 수염의 두 번째 도약과  동시에 주루의 문과 창이 각각  터져 나가며 

두 복면인이 날아들었다.

각기 도끼[斧]와 도(刀)를 든 그들의 무공은 매서웠다.  염소 수염이 두 번째 도약

에서 착지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발과 가슴을 노리며 짓쳐 들고 있었다.

그러나 염소 수염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왼발과 오른발을  섞어 찍으며 

횡(橫)으로 날았다.

야랑횡비(野狼橫飛)의 일식! 

천랑파(天狼派)는 제자의 수가 적었지만, 대신에 각 제자들의 무공은  약하지 않았

다.

하나 공격해 오는 두 복면인 역시 고수인  듯, 일초가 실패하자 이초의 변식이 바

로 뒤를 따라 쏟아져 나왔다.

와창`─`! 

반대쪽에 있는 문이 터져 나가며 염소 수염이  밖으로 다시 빠져 나가고, 뒤를 이

어 복면인들이 

쫓아가기까지 그들은 총 일곱 번을 변초(變招)하였고, 다섯 번 몸을 뒤집었다.

너무 감탄한 것일까? 

진소백의 입술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리고 구석에 앉아 졸고 있던 거지 한 명이 서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는 싸움 소리에 놀란 것일까? 

바닥에 쏟아진 빗을 다시 보따리 속에 쓸어 담으며 중얼거리던 검은 모자를 쓴 빗

장수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진소백 또한 일어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이봐요, 섭 소저. 이제 그만 일어납시다."

그러나 섭수진은 마지막 한 방울의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으며 한사코 일어나지 않

으려 했다.

"우웅…… 이건 저, 정말…… 맛이 있군요. 나는 기분이 너무……"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져 버리는 섭수진! 

진소백은 황당하였다.

이 여자는 무림의 고수인데 설마 진기(眞氣)를 일으켜 주기(酒氣)에 대항하는 간단

한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망설이던 진소백은 빗장수인, 검은 모자가 나가는 것을 보고는 섭수진을 업었다.

등에 닿아 오는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감촉! 

'이거 정말 좋구먼!' 

 * * * 

때는 겨울 밤이다. 

 하지만 진소백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추위를 느낀다면 이미 남자가 아니지 않을까? 등뒤에는 술 취한 미

인(美人)의 가슴이 살포시 닿아 오는데…… 하늘엔 별이 많았다.

밤이 깊어 가며 사위가 어두워질수록 별은 오히려 더욱 빛을 발했다.

근심이 깊어질수록 희망(希望)이 더욱  밝아지는 인간사(人間事)와 비슷하지  않은

가? 분위기에 취한 것일까? 아니면 술에 취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등뒤에서 풍겨 오는 여인의 향기에 취한 것일까? 진소백은 혼자서 뭔

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었다.

진소백은 술에 취한 듯 비틀대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고, 앞서가는 검은 모자의 

빗장수는 갈 길을 서두르며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간격(間隔)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 아

닌가? 한참을 걸어가던 진소백이 혼잣말인 듯, 섭수진에게 하는 말인 듯 중얼거렸

다.

"오늘은 섭 소저가 처음으로  술을 마신 날이니,  무언가 기념할 것을 사주어야겠

다."

진소백의 시선(視線)이 앞서가고 있는 빗장수에게 닿았다.

"그렇지! 이보시오, 앞에 가는 빗장수!"

걸음을 더욱 빨리 하여 빗장수를 쫓아간 진소백은 마침내 그를 불러 세웠다.

빗장수는 이런 밤에, 그것도 길 위에서 손님이  있는 것이 의외인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장사꾼의 기질을 드러내기까지는 단  일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

다.

"헤헤, 어느것으로 드릴까요?"

빗은 많았다. 

 둥근 것, 길쭉한 것에서부터 손잡이가 있는 것과 손잡이가 없는  것, 날이 엉성하

여 긴 머리를 

빗기에 좋은 것과 날이 촘촘하여 짧고 가는 머리를 빗기에 좋은 것까지.

"하하! 이것은 무기로 쓰기에도 좋겠구려."

진소백이 들고 있는 빗은 길쭉하고 긴 날을  달고 있어, 어떻게 보면 쇠스랑을 줄

여 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등뒤에는 섭수진을 엎은 채, 중얼거리며 빗을  고르던 진소백은 마침내 하나를 선

택했다.

"이것이 좋겠구려."

만일 등뒤의 섭수진이 깨어나서 이 빗을 본다면 질겁을  하였으리라. 뭉툭한 끝에, 

빗날마저 몇 개가 빠져 나가, 최악의 형상을 하고 있는 나무로 만든 빗! 게다가 손

잡이는 너무 두꺼워 빗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나무토막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리라.

이런 진소백의 선택에 빗장수도 기가 막히는지, 눈에 기광(奇光)을 번뜩였다.

"헤헤, 나으리. 그건 잘못 만들어서 다시 만들려고 하는 것인데……"

"아니, 나는 이 빗이 마음에 드오. 빗이  아닌 듯하면서도 빗인 것이, 자신을 드러

내지 않는 선비의 풍도이니…… 하하, 꼭 나 같지 않소이까?"

진소백의 말에 빗장수는 미미하게  얼굴을 찡그리더니, 곧  웃음을 회복하며 다른 

빗을 건넸다.

"헤헤, 그것말고 이런 것이 어떻습니까요?"

빗장수가 건네 주는 빗은 조금 전 진소백이 들고 무기로 쓰기에 좋다고 말했던 바

로 그것이었다.

"뒤에 계신 아리따운 소저에게는 이런 튼튼한 빗이……"

말과 함께 빗을 건네 주던 빗장수의 몸이 조금 왼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진소백은 

놓치지 않았다.

"뭐, 그것도 괜찮겠구려. 하지만 나는 역시 이것이……"

여전히 처음의 허름한 빗을 고집하던 진소백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빗을 건네 주던 빗장수의 손길이 빨라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빗장수의 발이 빗 뭉치를 걷어차자 여섯 개의 빗이  동시에 허공에 떠올라 

진소백을 노리며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상, 중, 하의 세 부위를 노리며  각각 두 개씩 날아드는 여섯 개의  빗은 그야말로 

완벽한 무기! 

 게다가 그것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 배(倍)는 더 무서운, 빗장수의  오른손에 들린 

빗이 진소백의 가슴을 노리며 짓쳐 

드는 것이었다. 

 과연 진소백의 눈은 예리했다.

빗들은 정말 무기로도 쓸모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 진소백은 등에 섭수진을 업고 있지 않은가? 한 손으로 섭수진을 감당

(堪當)한다면, 오직 한 손만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빗장수가 공세(攻勢)를 발하

기 전에 왼쪽으로 돌아간 것은 바로 그 때문! 지금 위치에서, 진소백은 오직  왼손

으로 날카로운 빗을 상대하는 수 밖에 없었다. 오른손보다 왼손의 힘이 약할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한 번의 공세를 가하기 위해, 이렇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였다는 

것은 빗장수가 고수(高手)란 뜻이었다.

고수만이 이렇게 많이 생각하고, 또 직접 실행에 옮길 수가 있는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공세(攻勢)! 

빗장수는 진소백이 피할 수 없을 것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더욱 예상하기 어려웠던 결과(結果)가 일어났다.

진소백이 왼손을 쳐들며 머리로 날아오는 두 개의 빗을 쳐내고, 다시 가슴을 노리

는 빗 한 개를 쳐내자마자 기이하게도 빗장수의 빗을 든  오른손이 진소백의 왼손

에 잡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 나머지의 세 개의 빗은 어떻게 된 것일까? 

당연히 남아 있는 또 다른 손이 쳐내었다.

섭수진은 어떻게 되었냐고? 

당연히 두 발로 바닥에 서 있었다.

진소백은 빗장수의 완맥( 脈)을 잡고, 한편으로는 섭수진을 돌아 보았다.

"다행히 시간에 맞추어 깨어났구려."

좀 전에 섭수진을 업고 걸을 때 했던  진소백의 중얼거림은 바로 주기(酒氣)를 해

소시키는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었다.

혼몽한 상태였던지라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주독(酒毒)을  몰아 낸 섭수진이 깨어

난 것이다. 한데 시간이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어쨌든 진소백은 다시 빗장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강권(强勸)하니 어쩔 수가 없군. 좋소! 내 두 개 다 사도록 하지."

담담히 말하는 진소백을 보고 빗장수는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그의 빗을 찔러 가는 재간(才幹)을 이리도 쉽게 파해한 자는 처음  보았던 것이다. 

게다가 다른 여섯 개의 빗까지 장난하듯이 쳐내다니.

너무 놀란 빗장수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으슥한 숲속. 

 진소백은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빗장수는 혈도가 짚힌 채 그 옆의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그 나무 위 가

지에 앉아 망을 보고 있는 것은 섭수진이었다.

섭수진은 진소백이 불러 준 방법으로 체내(體內)의 주독은 말끔히  몰아 내었지만, 

가슴의 콩닥거림만은 가시지 않았다.

처음으로 업혀 본 사내의 등이었다.

좀 전에는 이미 정신이 깨어난 후에도 어쩔  줄을 몰라 업혀 있다가, 하마터면 위

험에 빠질 뻔하지 않았는가? 

진소백은 자신이 처음 골랐던 허름한  빗을 손에 들었다. 빗의  손잡이를 잡고 몇 

번 돌리자, 손잡이가 빠져 나가며 자그마하게 접은 종이 쪽지 하나가 바닥에 떨어

졌다. 

 "난 말이오. 눈만은 무척 좋은 편이라서 당신의  동료 염소 수염이 이 빗을 떨어

뜨리는 걸 똑똑히 볼 수가 있었소."

진소백은 태연히 말하고 있었지만, 빗장수의 얼굴은 노화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진소백은 아랑곳하지 않고, 종이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한참 종이를 들여다보던 진소백이 정색(正色)을 하며 빗장수에게 물었다.

"이 편지는 혹시 구천(仇賤)에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오?"

빗장수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가, 이내 분노(忿怒)로 바뀌어 갔다.

"역시 네놈도……"

"네놈도…… 라니? 무슨……? 아하! 이 편지를 보니 신주낭객(神州狼客)이 정체 불

명의 적들에게 잡혀 

있다고 했는데…… 나를 그들과 한패로 생각하시는 게요?"

그러나 진소백의 질문에도 빗장수는 대답이 없었다.

이미 대답을 하지 않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이것 보시오. 나로 말하자면 진소백인데, 또한 진소백이란  사람은 나인데…… 또

한 나로 말하자면…… 에이, 이거 

안 되겠네. 섭 낭자, 좀 도와 주시오."

횡설수설하던 진소백이 도움을 요청하자마자, 섭수진은 냉큼 나무에서 내려왔다.

술이 취해 등에 업혔던 일 때문에 말을 먼저 걸기가 쑥스러워 망설이고 있었던 그

녀였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도와 주며 은근 슬쩍 넘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좋

은 기회인가? 

"전 아미의 섭수진이라고 해요. 어떤 자들에게 쫓기고 계신지 모르나 저희는 결코 

그들과 한패가 아니에요."

역시 사람은 이름이 나고 볼 일인가? 

아미옥녀(峨嵋玉女)의 이름은 그 위력이  대단하여, 빗장수는 대번에 의심을  풀었

다.

그리고 빗장수는 자신들, 천랑파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장문인이었던 신주낭객 구곡인(九曲刃)이 정체 불명의 자들에게 납치(拉致)를 당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 

정체 불명의 인물들은 구곡인의 생명을 미끼로 천랑파의 전제자(全弟子)들에게 무

리한 요구를 해오기 시작했다.

살인과 약탈, 그리고 납치 등…… 

"처음엔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천랑파의 문도들은 과연 사악하지 않았다. 

 그들은 장문인의 목숨을 미끼로 악행(惡行)을 사주(使嗾)하는 자들의 요구를 일언

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다.

그러나…… 

거절한 바로 다음날 구곡인의 왼쪽 팔이 상자에 담긴 채 전해졌다.

긴말이 필요없다는 뜻! 

한 번 혼이 난 이후로, 더 이상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구천이 주축(主軸)이 되어 

구곡인이 억류(抑留)되어 

있는 곳을 찾은 지 삼 년! 

드디어 염소 수염이 그 장소를 알아 내어 전해 온 것이다. 아까 종이에 적힌 것이 

바로 그 장소(場所)였고, 빗장수의 임무는 그것을 구곡인의 유일한 제자이며, 

현재 천랑파를 이끌어 가는 마랑(魔狼) 구천에게 전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낌새를 채고 뒤따라온 진소백에게 그만 종이를 뺏기고 말았던 것이

다.

"당신은 지금 나를 구천(仇賤)과 만나게 해줄 수 있소?"

진소백의 뜻밖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빗장수는 머리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소. 당신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구 도령마저 적들의 손

에 넘어간다면…… 죄송하오."

특이하게도 그들은 소문주를 도령이라 불렀다.

"이해하오. 무리도 아니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소백이 눈을 빛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가 신주낭객을 구해 주면…… 당신은 나를 구천에게 안내

해 주는 거요!"

빗장수는 어리둥절했으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심중(心中)에 담아 두기 힘든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졌을 뿐이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 * * 

비응방에도 밤이 깊어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고숭무와 심화절, 금청청과 적염! 

그 외에 사공두와 삼당의 부당주와 삼당주급 이상의 인물들! 모두 선 채로 누군가

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지공 대사님이 오셨습니다."

이윽고, 수하의 외침과 함께 지공 대사와 그를 수행한 집형전주 노굉이 안으로 들

어왔다.

"아미타불!"

불호로 인사를 대신하는 지공에게 중인들이 분분히 답하고 나자 심화절이 말했다.

"이제 모두 왔으니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들의 앞에는 석실로 통하는 문이 있었던 것이다.

석실 안은 어두웠다.

온통 약향(藥香)만이 가득한 곳! 

 빛 한 줄기 들어올 창문이 없어, 주위에서  은은히 반사되어 들어오는 횃불의 빛

만이 사물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공 등은 안력이 어둠에 적응되자  자신들의 앞에 하나의 석대가  놓여 있고, 그 

석대 위에 흰 천으로 씌워진 무엇인가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의원 차림의 노인 하나가 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달려온 의원(醫員)은 심화절이 눈짓을 하자 석대 위의 흰 천을 걷었다.  뒤이어 횃

불을 켜자, 석대 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전신이 푸르게 변색된 채, 간신히 중요한 곳만을 가리고 누워 있는  시신 하나. 특

히 왼쪽 팔의 변색이 심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시신(屍身)의 가슴이 미미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가 있으

리라.

"아미타불. 아직 살아 있소?"

불심 깊은 지공 대사가 장중히 불호를 외며 물었다.

의원이 눈길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직까지는 살아 있습니다만, 거의 죽은 시체나 다름이 없습니다."

심화절이 보충 설명을 하였다.

"사공 당주의 도가 바늘만한 차이로 심장을  비껴 갔습니다. 비록 목숨이 붙어 있

기는 하나…… 

언제 변화(變化)가 일어날지 모르는 일인지라……"

"살아 있을 때 근골을 살펴 달란 말씀이시구려."

지공 대사의 온화하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리  살수라 하나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비응방의 입장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 

지공은 석대 위에 누운 반시신의 근골을 살피기 시작했다.

각파의 초식들이 비슷해 보이는 것이 많지만 그 위력이나 쓰임새가  모두 다른 것

은 지닌 바 독문(獨門)의 내력(內力)이 

다르기 때문이다.

외공(外功)을 주(主)로 하여 익힌 경우라면  다르겠으나 내가(內家)의 무예를 익힌 

자라면 내공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외적 징후(徵候)가 나타난다.

소림의 무예들도 마찬가지이다.

수련 방법이 각파마다 다르고 익힌 바를 발전시키는 방법은 더욱 다르므로 내가공

이 상승의 경지에 이른 고수일수록 더욱 쉽게 무공의 류(類)를 파악(把握)할 수 있

는 것이다.

반시신의 몸을 때로는 만져 보고 때로는 주물러 보곤 하던 지공이 드디어 뒤로 물

러났다.

그의 미간에 어린 것은 은근한 곤혹(困惑)의 빛! 

참다못해 고숭무가 물었다.

"대사! 소림의 제자가 맞습니까?"

"그것이……"

지공이 대답을 망설이자 고숭무는 초조해졌다. 만일 살수가 소림 출신이 아니라면 

그들은 지공에게 큰 실례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럼, 소림 출신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이번엔 심화절이 물었다.

지공은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윽고 말을 꺼냈다.

"아니, 소림 출신임이 거의 틀림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무엇입니까?"

살수가 소림 출신이라는 데에서 힘을 얻은 고숭무가 지공의 말을 재촉했다.

"소림이 많은 분파로 갈라졌음은 아실 것입니다.  빈승은 이 아이의 몸에서 그 중 

한 분파(分派)의 흔적을 분명히 발견했습니다만……"

"어느 분파입니까? 대사, 이 일은 저희에게는 무척 중요한 것입니다."

심화절의 말에 망설이던 지공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마도 이 공력은 천승공(天 功)인 것 같습니다."

중인들의 입에서 일제히 놀람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천승공! 

 다르게는 보리천승공이라고 한다. 

 한 줄의 끈으로 불타(佛陀)가 사마(邪魔)를 제압하는 형상을 본떠서 창조된 무공! 

이 무공으로 초의(草衣) 선사는 무림을 독보했었다.

"그렇다면 초의 선사의……"

심화절의 놀람에 찬 말에 지공이 침중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초의 사숙의 제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말을 잠시 끊어 긴장감을 고조시킨  지공이 힘있게 말을 이었 "만일  초의 사숙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소림도 방관할 수는 없으니…… 빈승이  장문방장의 지시를 

다시 받아 오겠습니다."

초의 선사는 지공의 사숙이니 당금 소림의  장문인인 현공(玄空) 대사의 사숙이기

도 하다. 만일 살수가 그의 제자라면 일은 커지는 것이다.

"속에 숨은 인과(因果)를 알 길이 없어 답답하나, 이 살수가 깨어난다면 모두 알게 

될 일! 아무쪼록 살수…… 의 몸이 회복되어 신지(神智)가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

을 다해 주십시오."

지공 대사가 말을 마친 뒤 한시가  급한 듯 총총히 떠나가 버리자  일행은 한동안 

조용히 있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금청청이었다.

"흥! 아버님을 죽인 자를 우리보고 살려 내라는 것인가? 저 중은 아무래도 양심이 

없군."

금청청은 화산의 제자이기도 하니 이런 말을 할 신분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금

사진이 죽은 후로 자신을 잘 제어(制御)하지 못했다.

심화절이 그런 그녀를 보았다.

"소방주께서는 이제야 방주를 아버님이라 부르시는군요."

금청청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실언을 느낀 심화절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자, 감정에 치우칠 일이 아니오. 따지고 들자면 이자는 방주의 사후(死後)에 단지 

한 번의 칼질을 하였을 뿐이니, 

엄밀히 말해 불구지수(不俱之讐)는 아닌 셈이오."

말을 이어 가는 심화절의 목소리는 엄숙하여 어느 틈에 좌중을  주도해 나가고 있

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를 사주(使嗾)하여 방주를 암산하게 하고,  뒤에 숨어 방주에

게 직접 암수(暗手)를 가한 인물이오.  때문에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이자를  살려 

내어 배후를 알아 내도록 해야 할 것이오."

사공두가 이의를 제기했다.

"심 당주는 이자를 살려 내자는 말씀이시오? 난 반대요. 그가 방주를 죽였건 아니

건, 난 용서할 수가 없소."

"저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아버님을 암산한 자를 살려 둘 수가 있나요?"

금청청도 거들고 나섰다.

"소방주! 만일 이자를 죽이신다면 당장의  분함은 풀겠으나, 그 배후는  어찌 밝혀 

내시려오?"

심화절은 생각을 굳힌 듯 좌중을 둘러보며 힘있게 말했다.

"이 심화절이 명예(名譽)를 걸고 확실히 말하겠소. 살수의 배후자는 당장이라도 이

자를 죽여 그 입을 막고자 할 것이오."

그리고 이어지는 폭탄 같은 선언.

"만일 여러분 중에서 계속해서 살수를 죽일  것을 주장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 심 

모는 그 사람이 살수의 배후임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소."

고숭무와 금청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반발을 하지 않는 것은 심화절의 말이 옳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심화절은 의원 차림의 노인을 돌아보더니 우렁차게 말했다.

"최선을 다해 이자가 정신을 차리도록 하라."

노인이 무슨 토를 달겠는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할 뿐이었다.

"존명(尊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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