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8 장 의운중중(疑雲重重) (9/32)

제 8 장 의운중중(疑雲重重) 

비응방의 대청 안은 시끄러웠다. 

 심화절이 문상객을 맞을 준비를 서두르긴 했으나 다른 일로도 바빴던지라 완벽한 

준비를 못 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일을 광문당(廣文堂) 부당주인 오명(烏明)에게 맡긴 채, 자신은 나름대로 

금사진의 암살에 대한 

단서(端緖)를 찾느라고 분주했던 탓이다.

 지금 심화절은 오명에게 문상객들의 도착 상황을 물어 보고 있었다.

"오신다고 통보한 분들은 모두 오셨는가?"

도착한 문상객들의 명단이 적힌 서책(書冊)을 심화절에게 건네며 오명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예, 그게……"

오명은 대답을 명확히 하지 못했다.

심화절은 그 이유를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문상객의 명단을 읽어 보고서 바

로 깨달았던 것이다. 

 문상객들 중, 한 문파의 장문(掌門)이나 지역의 패주(覇主)라 칭(稱)할 수 있는 사

람들은 거의 없었다.

특히, 거대문파에서는 공동의 풍운(風雲) 진인(眞人) 적일수(狄逸秀)만이 유일한 장

문인일 뿐, 

나머지는 거의 이대제자들을 문상(問喪)의 대표로 보내 왔던 것이다.

적일수는 적염의 부친이니 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문상객 중에는 거대방파에서 온 장문인이 하나도  없다는 뜻! 다만 소림

(小林)과 화산, 그리고 개방에서 장로급의 인물을 파견하여 그들의  체면을 그나마 

세워 주었을 뿐이다.

"후! 강호의 인심(人心)이 이와 같다니……"

이것 역시 신생문파의 약점 중의 하나였다. 

 문파를 이끌어 가던 우두머리가 없어지면 그 뒤를 받쳐 줄 또  다른 인재가 없기 

때문에 주위의 문파들이 이렇듯 비응방에 소홀해질 수가 있는 것이었다.

금사진이 살아 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재상  집 개의 문상은 

가도, 재상이 죽으면 문상을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작년 금사진의 생일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지 않

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이와 같으니, 강호의 인심(人心)이 각박(刻薄)하다 어찌  말

하지 않겠는가! 

 명단을 오명에게 다시 건네 주는 심화절의 얼굴은 침통(沈痛)했다.

"어쨌든 오신 손님들의 대접에는 추호의 소홀함도 없도록 하라."

"존명(尊命)!"

명단을 받아 들고 물러나는 오명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방주가 죽자마자 비응방의 위세(威勢)가 급격히 떨어짐을 느끼는 까닭이었다.

그런 오명을 심화절이 다시 불러 세웠다.

"오명, 힘을 내라. 비응방이 이대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소방주가 계

시질 않느냐! 그리고 무상(武相)이신 철권 

대협도 계시니, 앞으로도 비응방을 쉽게 보진 못할 것이다."

심화절의 말을 듣고 나자 오명은 조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그렇다. 

 아직도 비응방에는 많은 인재(人才)가 있었다. 

 그들이 있는 한 결코 비응방은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오명은 생각했다. 오연히 서 있는 심화절의 모습을 보며…… '그리고 당주(堂

主), 당신도 있으니까요.' 

심화절을 떠나온 오명(烏明)은 마지막으로 도착한 군웅들에게 숙소(宿所)를 배정해 

주고, 그 중 몇 명을 은밀히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주루에서 금청청의 안내를 받아 비응방으로 들어온 지공 대사 일행이  가장 나중

에 도착한 문상객이었던 것이다.

오명이 안내해 간 군웅들 중에는 지공 대사와 섭수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명

의 안내에 따라 영문도 모르고 따라간 군협(群俠)들은 다른 문상객들이 모인 대청

과는 반대편에 위치한 은밀한 밀실(密室)로 안내되었다.

그곳에는 이미 몇 명의 인물들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을 주지(主旨)한 심화절은 정면에 서서 군웅들을 맞이하였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일일이 포권을 취하며 군웅을 맞이한 심화절이  앉을 자리를 권하였다. 이번에 온 

사람들이 앉자 자리가 모두 차는 것으로 보아, 심화절이 초대한 사람들은 모두 온 

듯했다.

이윽고 심화절이 입을 열었다.

"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이 심 모, 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드립니

다."

문상을 와준 것에 대한 인사의 말! 

심화절의 말에 좌중에서도 가장 상석(上席)에 해당하는  위치에 앉아 있던 장년인

이 입을 열었다.

"심 방주는 예를 거두고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시는 게 어떻겠소?"

누가 이리도 예의가 없나 하고 고개를 들어 보던 군웅들은  모두 속으로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머릿결에 붉은 혈색이 이제 겨우 사십대로 보이지만 실제의  나이는 이미 육

십을 넘긴 사람.

긴 수염이 유난히 아름다운 이 사람이 바로 풍운 진인 적일수(狄逸秀)였던 것이다. 

따로이 미염(美髥) 진인(眞人)이라고도 불리는 당대의  공동장문인. 그라면 자격이 

있었다.

이제는 미망인이 된, 금사진의 부인 적염이 바로 그의 딸이었으므로. "적 장문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선, 이 자리에는  음으로 양으로 

본 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신 분들만을 모신 것임을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심화절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소림의 지공 대사였다.

"심 시주의 말에는 빈승도 포함되는 것이오?"

지공 대사의 의문은 당연했다.

좌중을 둘러보라.

공동의 적일수는 당연히 금사진의 장인에 해당하므로 관계가 있는 것이고, 화산만 

하여도 금청청의 사문이므로 관계가 깊다 할 수 있었다. 또한 여타 문파의 대표들

도 모두 비응방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인물만이 모여 있었으니…… 

하지만 소림이 비응방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또한 섭수진의 아미파 역시 비응방과는, 단지  안면 이상의 연관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지공 대사의 의문은 당연했다.

무림의 배분이 그에게 조금도 못지않은  개방의 장로 무골개가 여기에  없는 것만 

보아도, 지공이 초대받은 것은 확실히 의외(意外)였던 것이다. 

 심화절은 지공의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 미루었다.

"대사님! 죄송하오나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심화절의 태도는 지공의 신분을 감안할 때  매우 무례한 것이었으나, 지공은 수양

이 깊은지라 아무 말 않고 넘어갔다.

"먼저 저희가 이번 폐방 방주님의 암살을  시도한 살수(殺手)에 관해 조사한 내용

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심화절은 좌중을 둘러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살수는 저희가 연공실의 경계에 소홀한 틈을 노려서, 그러니까…… 제 짐작이

지만, 방주가 연공실에 들어가기 훨씬 이전에 이미 침투하여  잠복(潛伏)하고 있었

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심화절의 추리는 매우 적절하여 엽혼이 침투한  상황을 대충 짐작해 내고 있었다. 

다만 비밀 통로를 통하여 침투한 것을 알지 못하여, 침투 경로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의문이 남는 것은 그가 연공실 내의 어디에 숨어서 기다렸나 하는 것

이었습니다."

말을 잠시 쉰 심화절이  눈짓을 하자 독두(禿頭)에 위맹해  보이는 장년인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순찰당의 사공두가 여러분께 인사올립니다."

사공두 역시 형식적인 인사로 말을 꺼내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비록 그날의 연공은 선(先)…… 방주께서 갑작스럽게 결정을 하신 것이었지만, 연

공에 들어가시기 전에 저희 순찰당 고수는  내부를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살수를 발견하

지 못했습니다."

다시 심화절이 나섰다.

"그래서 저희는 이 일이 일어난 직후, 다시  한 번 석실 내부를 수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됐던 거요?"

한 인물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마른 몸에 두 눈 가득 핏발이 선 인물! 

 "귀왕곡(鬼王谷)의 갈 곡주시군요. 말씀드리지요. 살수가  숨어 있던 곳을 마침내 

찾았습니다."

심화절이 잠시 마른침을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 살수가 숨어 있었음이 확실시되는 작은 틈을 바닥에서 찾았습니다."

"그럼, 왜 처음엔 찾지 못했던 거요?"

또 귀왕곡주인 갈현(葛鉉)이었다. 참을성이 매우 없는 인물인 "그 위치가 절묘하기

도 하였거니와…… 중요한 것은 틈이 너무나 좁아 도저히 인간이 몸을 숨겼으리라 

짐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실, 연공관의 그 틈은 이미 무사들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인위적으로 뚫어 두어 

탁한 공기가 잘 빠지도록 해 숨쉬기 편하도록 한, 사방 한 치 반 정도의 틈! 

하지만 너무 좁아서 인간이 숨을 수는 없기에 보통의 조사에서는 소홀이 넘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그 틈에 살수가 숨어 있었으리라고 추리해 낸 사람은, 다름 아닌 심화절이었다.

심화절의 말이 이어졌다.

"비록 그 틈이 매우 좁기는 하지만, 저는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낼 수 있었습

니다."

잠시 여유를 둔 심화절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무림에는 많은 기이한 공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매우 작은 틈이라도 

들어갈 수 있도록, 인간의 관절을 빼내어  몸의 크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공(奇

功)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인들에게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런 무공은 확실히 있었다. 

 보통 축골공(縮骨功)이란 이름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기공들은 그 뿌리를 중원이 

아닌 천축의 유가공에 두고 있기는 했으나, 분명히 중원에 전해지고 있었다.

천축의 유가신공(瑜伽神功)! 

이 무공에는 특이한 묘용이 있어 절정까지 익히게 되면 자유롭게  몸의 관절을 빼

고 근육을 늘이거나 수축(收縮)시킬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몸에서 관절(關節)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어진다 하였던가? 그

러한 유가신공을 이용하여 천축인들은 나름대로  심신(心身)을 닦는다고 전해지고 

있었는데…… 

중인(衆人)들의 생각은 지공 대사의 창노한 불호 소리에 깨어졌다.

"아미타불! 그럼, 심 시주가 빈승을 이곳에 부른 까닭은?"

"그렇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기 죄송스러우나 여쭈어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서

……"

심화절은 도대체 지공에게 무엇을 물어 보고자 한다는 말인가? 좌중의 인물들 중, 

강호의 지식이 해박한 몇몇만이 이런 대화 속의 숨은 뜻을 이해했다.

대소림사! 

지금 중원의 영수 격이라 할 수 있는 이  문파의 무공 중 일부(一部)는 그 뿌리를 

천축(天竺)에 두고 있었다.

그 와중(渦中)에 천축의 유가신공 역시 소림에 전해져서  보완(補完), 수정(修正)되

어 전해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몸의 관절을 빼내어 좁은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축골공에 대한 공부

(功夫)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공부의 흔적이 살수에게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오늘 심화절

이 묻고자 하는 것은 그에 따른 몇 가지의 의문이었다.

"심 시주의 말은 그 살수가 소림 출신이라도 된다는…… 것이오?"

수양이 깊은 지공의 말에, 이때만은 은은한 노기(怒氣)가 배어 있었다.

"그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소림 무공의  흔적이 발견되어서…… 죄송합니다. 

일단은 알려 드림이 도리라 생각되어서……"

말은 지극히 공손하지만, 뜻은 살수가 소림 출신임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다만 심화절의 표현이 지극히 공손하고 우회(迂廻)적일 뿐! 지공이 어찌 우둔한 인

물일 수 있겠는가? 이미 심화절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것은 소림에 대한 크나큰 모독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의 인물이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노화에 못 이겨 당장 증거를 내놓으라

고 난리를 칠 일이었다.

그러나 지공은 일대의 고승, 나지막이 경을  외워 일단은 마음을 가다듬고자 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소림의 저력이었다.

무공을 닦기 전에 마음을 닦는 것이 소림이었기에, 그토록 오랜 세월을 구파(九派)

의 영수(領首)로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 

"심 당주님께서는 그 살수가 사용한 무공이 소림과 관계가  있음을 확신하고 계신

가요?"

지공이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사이, 심화절의 말을 받으며 나선 것은 포의를 걸친 

젊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비록 여인이라 할지라도, 심화절은 이 여인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바로 아미옥녀 섭수진이었으므로! 

"유감스럽게도, 살수의 무공 근원(根源)은 소림임이 거의 확실합니다."

심화절의 말에 섭수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심화절이 비록 군웅을 맞아 예의를 다해 말을  하고 있으나, 그는 결코 만만한 인

물이 아니다.

특히 그가 확실한 자신이 없는 일이라면 결코 함부로 발설하지  않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분명 살수가 사용한 무공이 소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중인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만큼 무림에서 소림이 차지하는 비중은 큰 것이었다.

마음을 어느 정도 가다듬은 지공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심 시주께서는 살수의 배후에 혹여라도……  소림(小林)이 있음을 의심하는 것이

오?"

심화절이 펄쩍 뛰었다.

"천만의 말씀을! 제가 어찌 감히……"

당황이 역력한 빛으로, 결코 소림에  대해 의심을 갖고 있지는  않음을 명확히 한 

심화절이 공손히 말했다.

"다만 그 살수의 무공 연원(淵源)을 찾아 나감에 있어 대사의 도움을 구하고자 하

는 것입니다. 어쩌면 소림에서 파문당한 자…… 에게서 유출되었을 가능성도 크니 

말입니다."

심화절이 이렇게 나오자 지공으로서는 할말이 없었다.

살수의 무공이 소림과 관계 있다면, 소림으로서도  일말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심화절의 협조 요청에 대해 따라야 할 어느 정도의  의무감마저 느끼고 있

었다.

그러나 지공은 난처했다. 

 자신은 장경각의 일을 맡은 몸. 오랜 기간  문파를 비울 수는 없지 않은가? 지공

의 마음속의 갈등을 짐작한 것인지, 섭수진이 소리를 죽여 지공을 불렀다.

"사숙님!"

다만 불렀을 뿐이었으나, 지공은 단번에 섭수진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미타불, 심 시주의 부탁을 빈승이 직접 이행하지는 못하오나……"

말에 이어서 지공이 가리키는 사람은 바로 섭수진이었다.

"섭 사질녀라면 오히려 빈승보다 더욱 훌륭히 해낼 수 있을 것이오."

지공의 말에 심화절의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어렸다.

이것은 바로 심화절이 노린 것! 

그가 지공 외에 섭수진까지 초대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  강호에 널리 알려

진 아미옥녀의 지혜를 이용해 보고자 한 것이 바로 애초 심화절의 의도(意圖)였다.

하지만 직접적인 부탁이 아니라 소림과 아미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우회적인 방법

을 택해, 섭수진이 자발적(自發的)으로 나서게 한 것에 대해서는 심화절의 

능력이 뛰어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심화절의 몸이 섭수진을 향했다.

이어지는 공손한 포권! 

"아미옥녀께서 도와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지요."

심화절이 양해를 구하고 섭수진과 함께 나가 버린 직후, 지공 대사도 침중한 얼굴

로 밖으로 나갔다.

남은 군웅들 역시 저마다 친한 사람들끼리  삼삼오오(三三五五) 짝을 지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귀왕곡주인 갈현(葛鉉)만은 무언가 못마땅한 듯  자리에 앉아 계속 툴툴거

리고 있었다.

그러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 하던 흑수동(黑水洞)의 동주인 도곡(陶曲)을 붙

잡고서는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도곡은 언제나처럼 음침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엇 말인가?"

"아니, 사람을 불러다 놓고, 자기들끼리만 몇 마디 하고 나서 그 섭 뭐시긴가 하는 

계집애랑 나가 버리다니……"

계집애라는 말에 도곡의 눈속에 당황이 어렸다.

"이봐, 자네는 아미옥녀에 대한 소문도  못 들었나? 금정(金頂) 신니(神尼)의 고제

자로서……"

"혹시 아무도 풀지 못했던 아미의 불가지비(不可知秘)를 풀어 내었다는……?"

"그렇지. 좀 전에 나간 섭 소저가 바로 그녀라네."

아미의 불가지비! 

아미파의 복호사(伏虎寺) 옆에 위치한 계곡에  존재하는, 아니, 존재했었던 의문이

었다. 이 계곡에서는 신기하게도 여름만 되면 얼음이 얼었다.

아무리 깊은 산중이라 하나 폭염(暴炎)의 더위에 얼음이 얼다니…… 이에 얽힌 수

수께끼를 풀고자 많은 석학(碩學)들이 노력하였으나, 끝내 풀지 못하여 말 많은 세

인들이 붙인 이름이 바로 아미(峨嵋)의 비밀이란 것이었다.

비록 이름만큼 거창한 것은 아니었으나 정말  신기한 일인지라, 강호에서 매우 유

명한 수수께끼였었다.

그런데 이제 약관에 불과한 섭수진이 이 비밀을 풀어 내어  아미옥녀란 칭호와 함

께 금정제일지(金頂第一知)란 칭호도 함께 얻었던 것이다.

갈현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심 당주가 그 섭 소저를 데려간 것은 이해가 되는군. 살수의 정체를 밝

히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좋아, 자네 이해했군."

"하지만 우리는 왜 불러모은 것이지? 그냥 처음부터 섭 소저만  찾아 도움을 청하

면 되었을 텐데."

도곡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 당주가 말하길, 여기는 비응방과 이해 관계가 있는  사람만 모였다 하였네. 자

네는 비응방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야 당연히 자네와 같지. 그 광산(鑛山)……"

갈현의 목소리가 커지자 도곡이 급히 제지하며 말했다.

"그 이권은 거대해. 그리고  비응방주의 암살에는 아마도 이런  이권(利權)에 대한 

문제가 숨어 있겠지."

갈현이 소리를 죽여 물었다.

"그럼, 이번 일은 단순히 원한에 의한 살인이 아니란 말인가?"

도곡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

도곡은 갈현에 비한다면 무공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머리의 회전(回轉)에

서는 갈현(葛鉉)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이미 사태의 추이(推移)를 어느  정도 짐작

하고 있는 것이었.

도곡의 말은 이어졌다.

"때문에 심화절은 모든 사람을 모이게 하여 아미파의 섭수진과  소림의 지공 대사

가 이 일을 중히 여기게 되었음을 알게 하려 한 거야."

갈현이 머리를 쳤다.

"이를테면 소림과 아미가 이 일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으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암

살의 배후자는 함부로 설치지 

말라는 경고를 한 것이군."

"그렇지. 정말 잘 맞추었네."

도곡은 갈현의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갈현이 이렇게 정확하게 머리를 쓴 것이 실로 얼마 만의  일인? "그렇지만 심화절

은 이번 살수(殺手)가 소림과 연관이 있다고 말했지, 아미파와 연관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왜 아미파의 섭수진이 나선 것이지?"

도곡은 자신이 아까 갈현이 기특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모두 도로 무르고 싶었다.

'이놈의 돌대가리! 어쩔 수가 없군.' 

그리고 이어지는 고함! 

"젠장할! 자네는 그런 것마저 모른단 말인가?"

 * * * 

긴 회랑(回廊)! 

심화절은 섭수진을 안내하고 있었다.

조용히 뒤따라가던 섭수진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심 당주님의 마음 씀씀이는 강호의 소문보다도 훨씬 대단하시군요."

심화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무슨 뜻이신지……"

"처음부터 저를 지공 사숙과 같이 부른 것이 의도된  것이었음을 부인하시는 건가

요?"

심화절이 잠시 여유를 두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폐방으로서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어서……"

처음부터 섭수진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음을 시인한  것이 "하지만 능력이라

면 심 당주께서 저보다도 월등(越等)하신데……"

"과찬의 말씀을…… 어쨌든, 이번 일은 특성상 제가 나서서 일을 처리하기가 어렵

습니다."

섭수진의 눈이 약간 커졌다.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상대편에게 어서 다음 말을 할 것을 재촉하는 뜻이었다.

"만일, 이번 일이 단순한 원한 관계가 아니라면, 저희  비응방과 이해 관계를 가지

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공정한 수사가 어렵게 됩니다."

"심 당주께서도 방 내의 분이시니…… 심 당주께서 조사한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사람이 많을 것이란 뜻인가요?"

심화절의 눈에 '과연'이라는 빛이 어렸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사건은 강호의 권위있는 명문대파의 도움을 빌리고 싶었습

니다."

섭수진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제가 선택된 것이구요?"

섭수진은 해맑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하얀 피부와 눈빛이 인상적일 뿐,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짓자,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얼굴 전체의 인상

을 바꾸어 심화절조차도 가슴이 뛰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심화절은 당황의 기색을 숨기며 말했다.

"선택이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도와 주신다니 영광일 뿐이지요."

그는 소리를 조금 낮추어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 살수의 무공에서 소림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 

 엽혼의 무공에서, 심화절이 소림의 흔적을 찾은 것은 정말로 사실이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지공 대사의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요."

그러다가 심화절은 소림과 아미가 이십 년 전의  한 가지 사건 이후, 원래 친밀하

던 관계가 더욱 

급속히 친밀해져서 지금은 마치 한 문파처럼  지내고 있음에 착안했다. 물론 지공

이 도와 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겠으나, 현실적으로  장경각(臧經閣)을 책임지

고 있는 지공이 

직접 나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하여 의도적으로 지공과 섭수진을 같이 부른 것이었다.

심화절이 지공 대사에게 소림 무공의 흔적이  보임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섭

수진도 덩달아 반응을 

보일 것은 이미 심화절의 예상에 있던 일이었다.

일은 그의 예상대로 흘러갔고, 그 결과 지금 섭수진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미옥녀의 지혜야말로 강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다른 문파의 힘을 빌리는 것은 비응방의  문상(文相)이라 불리는 심화절로서는 자

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만일 심화절이 수사(搜査)를 하여 아무개가 범인이라고 말을 하게  되면, 범인이라 

지목받은 자가 순순히 승복을 할까? 

충분히 반발이 예상되는 바였다.

아니, 애초에 심화절 또한 의심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심화

절이 수사를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반발을 살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저라고 해서 의심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에…… 소저의  도움을 요청한 것

이외다."

심화절의 말에 섭수진이 고개를 미미하게 저었다.

"후`─ 어찌 심 당주님을 의심할 수 있겠어요."

"저는 다만 섭 소저께서 하루  빨리 이 일을 매듭지어  주셔서, 방 내에서 서로에 

대한 의심이 풀리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제 회랑은 끝이 보이고 있었다.

심화절은 애초에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고  섭수진을 이곳으로 안내한 것이었다. "

다 왔습니다. 이리로 드시지요."

심화절의 안내로 들어간 작은 방! 

 사방이 모두 벽으로만 되어 있어 공기가 통하지 않는지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

다.

그리고 어두운 방안에는 어둠에 동화되기라도 한  것처럼, 한 남자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인사하시지요, 섭 소저."

심화절이 그 남자에게 섭수진을 소개하려는 듯 말을 꺼냈다.

"이 공자는 개방에서 저희를 도와 주러 오신……"

그러나 심화절의 말은 그 남자가 촐싹대며 나서는 바람에 잘리고 말았다.

"어이구, 이런. 또 만났구려."

말을 안 하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는 방의 어둠에 동화된 듯 침울해 보이더니, 입

을 열자 환한 미소(微笑)가 어둠마저 몰아 낼 듯 환하다.

조금은 경솔한 분위기마저 풍기는 남자.

"구면(舊面)이셨습니까?"

심화절은 둘이 서로 아는 사이인 것을 몰랐는지라,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이 청년을 오늘 처음 보았고,  이름조차 처음 들었던 

것이다.

개방의 이름으로 소개받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쳐다보지도 않았을 무명인(無

名人)인 터인데…… 

심화절의 말에 섭수진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나절에 객점(客店)에서……"

이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개방의 분이셨군요? 몰라뵈어 죄송해요."

청년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아니. 이 진소백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오."

자신을 몰라본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단 것인지,  개방의 인물인 것을 신경 쓰지 않

는다는 것인지, 손을 내젓고 있는 폐포청년! 

그는 진소백이었다. 

 3 

지금 대청에 모인 것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진소백과 섭수진, 심화절과 고숭무 그리고 금청청! 진소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적 부인께서는……"

적 부인이란 두말할 나위 없이 적염(狄艶)을 말하는 것이었다.

진소백이 부른 것은 적염까지 모두 네  명이었는데, 그녀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심화절이 대신 대답했다.

"부인께서는 몸이 편찮으셔서……"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습니다. 이 정도로 시작하기로 하죠."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진소백.

"에, 그러니까…… 모든 살인에는 세 가지의 구성 요소(要素)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하나하나 접으며 말을 이어 갔다.

"첫째는 시간입니다. 언제 살인이 일어났느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둘째는 방법입니

다. 어떻게 

죽었냐는 것이죠. 그리고 셋째는……"

말과 함께 손을 번쩍 들어 손가락 셋을 세워 보이는 진소백!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에…… 그러니까, 참 셋째가 뭐죠, 섭 소저?"

느닷없는 질문에 잠시 당황했던 섭수진이 대답했다.

"동기(動機)예요."

"아, 그렇습니다. 동기!"

고숭무의 인상이 점점 찌그러졌다.

'이놈의 자식이, 웬 헛소리가 이렇게 길어!' 

그는 진소백을 오늘 처음 보았다. 물론 이전에 이름을 들은 적도 없었다.

강호는 사람의 이름을 먹고 사는 곳! 

무명소배가 자신들을 소집(召集)한 것도 열불이 나는데, 앞에 나와  헛소리나 지껄

이고 있다니…… 

만일 심화절에게서 이 까불어대는 청년이 개방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란 언질만 받

지 않았다면, 그의 

성격에 벌써 난리가 났을 것이었다.

화를 억지로 참고 앉아 있는 고숭무의 속을 짐작도 하지 못하는 진소백은 점점 신

이 나서 말이 빨라지고 있었다.

"이 동기란 것은 정말 중요하지요. 저로 말하자면, 아침에도 동기가 있어야 일어난

답니다."

'이놈의 자식이 정말!' 

고숭무(暠崇武)였다.

"제 기상(起床)의 동기는 두말할 나위 없이 밥이지요. 만일  밥이 없는 날이라면…

… 저는 저녁까지도 자보았습니다. 그럴 때의 기분은 뭐랄까…… 아!  물론 여러분

은 이런 걱정을 안 하실 테니까…… 사실 저처럼 강호상에  이름이 없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워낙 어려워서……"

고숭무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화가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심화절은 수양이 깊어 참고  있는 상황이었고, 금청청은  아버지의 죽음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 별다르게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섭수진은 화가 나기보다는 진소백의 태도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고숭무가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는지도 몰랐다.

"소협은 언제까지 떠들 셈인가?"

고숭무의 냉담(冷淡)한 어조에 진소백이 정색(正色)을 하였다.

"철권(鐵拳) 고 대협이시군요. 대협께서는 이번 살인의  동기가 무엇이라고 보십니

까?"

의외의 질문에 움찔한 고숭무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살수는 당연히 돈이 동기일 것이나…… 만일 배후 인물이 있다면……"

진소백의 어조가 조금씩 날카로워져 갔다.

"만일이 아니라 확실히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배후 인물의 동기는 무엇일까요?"

고숭무는 머리를 쓰는 일에는 약한 듯이 보였다.

진소백의 질문에 조금씩 더듬거리는 것이다.

"아마도 지난날의 원한(怨恨)이라든가…… 또……"

"또요?"

"그 광산에 관한 이권(利權) 문제라든가……"

"그리고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

고숭무가 입을 다물고 말을 못  하자, 심화절이 약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대신 답

(答)을 했다.

"비응방의 방주위에 관해 말씀하시는 게요?"

진소백은 여전히 고숭무를 바라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는 방주의 유고(有故) 시에 비응방을 물려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지신 세 분이 모두 모여 계십니다."

섭수진을 제외한 세 명의 얼굴에 은근한 긴장이 감돌았다.

그렇다.

살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동기를 이 세 사람은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건(事件)을 누가 일으켰는지를 알고 싶다면 그 사건으로 가장 많은 이익을 

본 사람부터 의심하라는 것은 만고(萬古)의 진리(眞理)였다.

진소백은 여전히 고숭무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고 대협. 만일 사건의 흉수와 아닌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면 누가 더 초조하

겠습니까?"

고숭무는 진소백이 자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을 하자 화가 났지만 이상하

게 발작을 하지는 못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자신이 진소백의 기세(氣勢)에 눌려 가는  느낌을 받고 있

었던 것이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섭수진의 눈에도 이채(異彩)가 떠올랐다.

"내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흉수(凶手)가 더 초조할 것으로……"

고숭무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소백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만일 좀 전의 저처럼 엉뚱한 말만을 계속 늘어놓는다면 참지 

못하겠지요?"

그제서야 고숭무는 자신이 진소백의 말에 빠져 들었음을 깨달았다.

"하, 하지만……"

이때 보다 못한 심화절이 끼여들었다.

"아니, 그 정도 가지고 그렇게 단정적(斷定的)으로 말한다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

소?"

진소백이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 심화절(深化絶)의 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하였다.

"물론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고 당주가 범인이라는 생각은 추호(秋毫)도 가지고 있

지 않습니다."

고숭무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어렸다.

"제 생각에는 고 당주보다는……"

잠시 말을 쉰 진소백이 다시 심화절을 쳐다보며 말을 계속했.

"여러 가지로 미루어 보아, 흉수는 비응방 내의 기밀 사항을 매우 쉽게 손에 넣었

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머리 씀씀이도 매우 치밀(緻密)하구요."

심화절을 쳐다보는 진소백의 눈빛이 강해져 갔다.

"여러 가지를 고려(考慮)해 보자면, 가장 가능성이 큰 사람은 바로 심 당주십니다."

날벼락 같은 소리였지만 심화절은 과연 심화절! 

미동(微動)도 없었던 것이다.

"과연 공정하군요. 내게도 확실히 혐의가 있습니다."

심화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인의 앙칼진 소리가 들려 왔다.

"흥, 그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비응방의 모든 인물에게 혐의가 씌워지겠군!"

금청청이었다.

비록 금사진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조용히 있었으나, 그 지닌  바 성격(性格)이야 

어디로 가겠는가? 

진소백이 좌충우돌하며 되는 대로 말을 하자, 화를 내며 나선 것이었다.

진소백의 시선이 드디어 금청청에게로 돌아갔다.

"옳소! 그리고 낭자야말로 가장 혐의(嫌疑)가 짙지!"

금청청이 막 뭐라 외치려는 순간에, 진소백이 오히려 말을 더 빨리했다.

"낭자는 항상 금 방주를 미워하여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지 않았소?  게다가 그 

사건(事件)이 있던 

날 낮에는 한바탕 싸우기까지 했지."

금청청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도 진소백의 말은 이어졌다.

"그리고 금 방주가 연공실에 들어간 것은 그 일로 일어난 노화(怒火)를 삭이기 위

함이었고……"

진소백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금청청이 찢어질 듯 외치며 일장을 날려왔기 때문! "이 자식, 죽엇!"

창졸간에 쏘아 낸 공력이라서 초식(招式)의 전개가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누

구도 이 일장의 위력을 무시(無視)할 수는 없으리라.

바로 화산의 절학인 난화수(亂花手)였으므로! 

번개처럼 진소백의 사혈을 노리며 짓쳐 드는 손길! 진소백은 다만 마주쳐야 할 뿐, 

피할 수 있는 여지(餘地)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펑! 

그러나 이 소리는 진소백과 금청청 사이에서 난 것이 아니었 보라! 

금청청이 이마를 찡그리며 물러나고, 그 앞에는 섭수진이 조용히 서 있는 것이 아

닌가? 진소백은 어느 틈인지 섭수진의 뒤로 돌아가 있었다.

하나같이 훌륭한 무공! 

섭수진의 일장도 훌륭했지만, 진소백의 경공은 더욱 훌륭했다.

누구도 물러날 틈이 없다고 생각한 방위에서 섭수진의 뒤로 돌아가 금청청의 공격

을 피했던 것이다.

진소백이 뒤로 돌아서자, 졸지에 금청청의 공세에 노출된 섭수진은 부랴부랴 금정

산수(金頂散手)의 절학을 펼칠 수밖에 없었고, 섭수진의 손에 의해 

난화수의 공력이 해소되며, 금청청은 뒤로 물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휘유, 십년감수했네. 고맙소, 섭 소저."

그러한 진소백을 쳐다보는 섭수진(攝守眞)의 고운 아미도 찡그려져 있었다.

"조금 전의 말씀은 진 공자께서 심하셨던 것 같군요."

진소백도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지요?"

다시 세 명의 비응방 인물들을 둘러보는 진소백! 

정중히 올려 모은 두 손과 진지한 눈빛이 전과 달라,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하

였다.

"제 장난이 지나쳐 죄송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어지는 힘있는 한마디.

"흉수(凶手)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꼭 잡아 내겠습니다."

세 명의 눈에 감탄인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움인 것 같기도 한 빛이 어렸다.

섭수진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기실 진소백의 행동들은 하나하나가 장난인 듯  보였으나, 모두 뜻이 있었던 것이

다.

고숭무 등은 내심 진소백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에 진소백은 누구라도 흉수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여, 감히 무시하지 못

하게 한 것이었다.

또한 진소백의 권한(權限)이 큼을 모두에게  인식(認識)시킴으로써, 앞으로의 수사

에 편리를 도모한다는 의미(意味)도 있었다.

만일 협조를 잘 하지 않는다면 흉수로 몰릴 가능성이 있기에! 이러한 일련의 머리 

씀씀이는 섭수진조차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말은 쉬우나, 이러한 일들을 순간적으로 해낸다는 것은 아미옥녀라 불리는 자신도 

쉽지 않은 일이기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섭수진은 상념(想念)에서 깨어났다.

"어이, 뭘 하시오? 어서 적염, 적 부인을 뵈러 갑시다."

진소백의 말이었다.

말과 함께 진소백은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섭수진은 급히 진소백의 뒤를 따라가려다가, 문득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는 실소

(失笑)했다.

허둥대며 남자의 뒤를 따라가는 모습! 

아미옥녀에게는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질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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