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용봉초현(龍鳳初現)
1
바닥으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피!
엽혼의 어깨에서 흐르는 것이다. 지혈할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 엽혼은 지금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엽혼은 점차 온몸의 힘이 빠져 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엽혼이 중위와의 대결에서 서둘러 승부를 내고자 무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일성 노호(怒號)와 함께 가장 먼저 고숭무가 달려들었다. 그는 엽혼에게 빚이 있지
않은가? 조금 전 그는 엽혼이 달아나도록 도운 셈이 되었던 것이다.
콰콰`─ 펑!
"우욱!"
엽혼의 몸이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파황권의 삼권(三拳) 중 하나를 막지 못하고 가슴에 격중당하고 만 것이다.
어깨의 상처는, 중위 정도라면 모르되 고숭무 같은 고수를 상대함에 있어서는 치
명적이었다.
입가에 흘러나오는 핏줄기는, 이번엔 진짜였다. 하지만…… "교활한!"
보라!
물러서던 엽혼이 구절검을 휘둘러 주위의 비응방도를 베어 가는 것을! 비록 내상
을 입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와중에서도 엽혼은 일말의 생로를 트고자 하는 것
이다.
엽혼의 일초에 비응방도 둘이 그대로 죽어 갔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를 밟고 뛰어오르며 포위망을 뚫으려 하는 엽혼! "물러나라!"
그러나 엽혼의 기도(企圖)는 바로 옆에서 터져 나온 이 외침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정수리를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강한 경기!
"조공(爪功)! 귀조(鬼爪) 독소명(獨蘇冥)?"
이대로 뛰어오르다간 독소명의 조공에 머리가 성치 못할 것을 안 엽혼이 검으로
기세를 막으며 할 수 없이 땅에 내려섰다.
펑!
순간, 고숭무의 일권이 엽혼의 등을 두드렸다. 엽혼의 입에서는 그야말로 폭포수처
럼 선혈이 뿜어 나왔다.
"이놈, 검을 놓아라!"
독소명의 혈령귀조(血靈鬼爪)가 엽혼의 손목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엽혼은 정신이 아득한 상황에서도 무의식중에 손을 휘둘러 막으려 하였다.
"욱`─`"
그러나 엽혼의 검은 허공을 가르고 독소명의 조공은 정확히 엽혼의 손목을 베어
내어 엽혼이 더 이상 검을 잡지 못하도록 하였.
떨어진 검!
그리고 그와 함께 엽혼의 생명도 떨어지는 것 같았다.
심화절이 멀리서 나타난 것도 이 순간이었다.
그가 절정의 경공을 발휘하여 날아왔음에도 이렇듯 시간이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설명이 장황했던 까닭이고, 또한 그만큼 장내의 변화가 빨랐던 때문이
다.
"멈추시오!"
심화절이 외친 소리는, 비록 멀리서 들려 온 것이었으나 중인의 귀에 똑똑히 들렸
다. 공력이 깃들인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화절의 외침도 사공두의 행동을 막진 못했다.
순찰당주 사공두!
무공 방면으로 다른 당주들에 비해 조금 떨어지나 금사진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인정받아 순찰당주가 된 인물!
그런 그가 금사진을 살해한 엽혼을 보고 눈이 뒤집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지도 몰랐다.
엽혼이 쓰러지자 사공두는 자신의 박룡도를 휘둘러 엽혼의 심장을 쪼개 갔다.
"멈추라니까!"
심화절이 다급히 외치며 수중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져 내었다.
슉`─`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는 이것이 바로 심화절의 필생 절기인 천심비도(穿心飛
刀)! 항상 비도는 상대의 심장을 노리며 날아갔다.
하나 이번의 천심비도가 노린 것은 심장이 아닌 손,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그 손
이 잡고 있는 도였다.
그러나 천심비도가 제 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을? 쨍!
비도는 정확히 사공두의 도를 쳤지만 그 방향만 조금 틀었을 뿐 도를 제지시키지
는 못했다.
심화절이 비도를 던진 것에 대해 모두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오를 때, 사공두의
도는 엽혼의 가슴에 박혔다.
푹!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하늘이 미친 듯이 돌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떠오른 것은 이름 둘!
'평아(枰兒), 그리고 소백! 이제는 너희들만……'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바닥에는 자신이 흘린 흥건한 핏물!
자신이 살아 온 인생을 나타내는 것인가?
엽혼은 서서히 핏물 위로 쓰러져 갔다.
엽혼은 청부를 완수했지만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금사진은 죽었지만 엽혼이 죽인 것은 아니었다.
비록 침입은 성공했으나 탈출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심장에 도가 박힌
채 쓰러진 엽혼은 서서히 정신을 잃어 갔다. 하늘이 밝아 오고 있었다.
오늘은 정월 십오일, 중원인이라면 누구나 즐거워하는 상원(上元)인 것이다. 그러
나 여기 즐거워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 *
대청 안.
비응방의 대소사를 처리하며 금사진이 업무를 보던 이곳에 지금 금사진은 없다.
다만 비응방의 주요 인물들이 침중한 표정으로 모여 있을 뿐이었다.
끝없이 흐르는 침묵. 그 끝에 고숭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문상의 말은 정녕 확실한 것이오?"
문상, 심화절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그리고 좌중에 다시 감도는 침묵.
심화절은 오늘 방 내의 중요 인물들을 모두 모이라 한 뒤 폭탄 같은 한마디를 한
것이다. ─`방 내에 배신자가 있소!
그리고 중인들은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침묵에 잠겨 있게 되었다.
다시 고숭무가 입을 열었다.
"증거라도 있으시오?"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있을 때 고숭무가 입을 열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지위가 높
음을 말해 준다.
기실 비응방 내에서 무상 고숭무와 문상 심화절의 위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바
가 있었다. 비록 사공두가 서열 사 위라 하나 이, 삼 위의 두 인물과는 많은 차이
가 나는 것이다. 무공이든 다른 능력이든.
그리고 방 내에서의 대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고숭무의 물음에 심화절은 말없이 고개를 들어 뒤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광문당 소속의 무사가 목함 하나를 들고 의원 차림의 노인을 대동한 채 들
어왔다.
심화절이 좌중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방주의 무공으로 보아 일초의 반격도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겝니다. 게다가 만일 자객의 검이 치명적인 사인
(死因)이라면 어찌 피가 사방으로 튀지 않고 좌대 아래로만 떨어졌겠습니까?"
말을 마친 심화절의 눈짓에 따라 무사가 목함을 열어 속에 든 물건을 꺼내었다.
침(針)!
길고 뾰족한 침이 아닌가?
"방주가 앉았던 좌대를 부수어 찾아 낸 것입니다."
이어 의원 차림의 노인이 심화절의 눈짓에 따라 나서며 말했 "에, 방주님의 사인
(死因)은 무엇보다 회음혈에 난 상처와 그곳을 통해 침투한 독이라고 해야 할 것
입니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침의 끝 부분으로 모아졌다.
침의 끝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독!
독(毒)이 아니라면 저런 빛이 나겠는가?
"방주께서는 운기하시는 도중 이 침(針)에 의해 이미 숨이 끊기신 것입니다."
심화절의 말에 좌중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럼, 심 당주의 말은 여기의 누군가가…… 아……!"
청아하고 기품이 깃들인 목소리. 여인의 몸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하나뿐
이었다.
비응방 내에 서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여인!
바로 금사진의 부인. 이제는 미망인(未亡人)이 된 적염(狄艶)이었다.
금사진의 암살 소식을 듣고 기절하였다가 깨어나 겨우 이 자리에 참석한 적염이,
방 내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혼절하고 있는 것이다.
* * *
사방으로 말이 치달았다.
숭산으로, 금정으로, 또는 공동으로……
말이 향하는 곳은 달랐지만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천하무림을 좌우하는
거대문파들이 있는 곳!
그리고 알게 모르게 비응방과 이해(利害)가 연결되는 문파들이 위치한 곳! 그리고
그 말들이 싣고 가는 소식도 한결같았다.
바로 방주인 금사진의 사망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한 곳. 개방으로 달리는 말이 갖고 가는 소식만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 * *
"이로써 방 내에 배신자가 있음은 확실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번 살수의 배후를 캐
는 일도 중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화절의 말은 항상 조리가 있어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였
다.
반도(叛徒)의 색출을 외부의 인사에게 맡긴다는 것은 비응방으로서는 매우 자존심
이 상하는 일이었다.
"누가 반도(叛徒)일지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색출을 맡을 사람을 지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심화절조차도 중인들이 믿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면이 전통적인 거대문파와 신진(新進)의 대문파의 차이였다. 구대문파 등에서는 이
런 일이 일어난다면 전대(前代)의 장로들이 나서서 일을 맡게 되나, 신진문파의 경
우에는 그런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
전통이 있고 없음의 차이가 이처럼 큰 것이었다.
일을 부탁할 문파가 결정된 것은 기나긴 회의가 끝난 후였다.
하지만 사실상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개방( 幇)과 소림(小林), 그리고 아미(峨嵋)!
그 중에서 소림과 아미가 모종의 이유로 제외되니 남는 것은 개방뿐이었다.
개방!
일신의 명예와 재물을 헌신짝 알듯 하며, 제대로 된 화의(華衣)를 걸침조차 방규
에 어긋나는 천하제일방(天下第一幇)!
당금 개방의 용두방주인 인의신개(仁義神 )의 명성을 뉘라서 모르겠는가? 각파의
이득이 서로 엇갈리는 복잡한 무림에서 개방만큼 이 일에 적당한 방파는 없었다.
그리하여 개방으로 가는 말만은 특별히 심화절의 친서(親書)를 싣게 되었다. 살인
을 청부한 배후와 방 내의 반도(叛徒)를 색출하는 일을 도와 줄 것을 부탁하는 친
서가!
2
금청청(金靑靑)은 아직 비극(悲劇)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답답한 심정을 추스르며 화산(華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솟아
나는 것은 표현하기 힘든 회한(悔恨)! 인적이 없는 산에서 경공도 펼치지 않고 걸
어가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산속에서 며칠이나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인가(人家)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화산으로 가는 비응방의 파발마가 그녀를 앞질러 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인생에서는 이런 일들이 허다했다.
우리가 과거의 회한에 힘겨워하고 방황하고 있는 순간, 정작 중요한 일들이 우리
의 곁을 스치며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신에게
중요한 순간들은 이미 지나갔고,
그런 순간들을 흘려 보낸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곤 하는 것이다.
만일 금청청이 산 아래에서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말에 조금만 주의(注意)를 기울
였어도, 그녀는 금사진의 죽음을 일찍
알게 되었으리라.
이러한 자신의 감정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 정도면 자신의 의도대로 금사진은 톡톡히 망신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마땅
히 통쾌해야 할 일이었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가라앉지 않고 있는 이 답답함은 무
엇일까? 모를 일이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금청청은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산속에서 여러 날을 헤매었다. 그리고 마음을 어
느 정도 다진 뒤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녀는 공교롭게도 자신의 사형(師兄)을 만
났다.
"야하!"
누가 이렇듯 말을 서둘러 달리나 했더니……
말은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설백총!
그리고 그 위에 타고 있는 것은 훤한 기상의 남의청년! 청년을 발견하자마자 금
청청은 반가이 그를 불렀다.
"매 사형!"
청년은 바로 화산옥기린(華山玉麒麟) 매일도(梅逸度)였다.
당금 화산장문인인 화산검성(華山劍聖)의 대제자이며, 금청청에게는 사형뻘이 되는
인물이다.
언제나 금청청에게 웃음을 아끼지 않았던 그였지만, 지금 금청청을 보는 그의 안
색은 어두웠다.
"네가 여기에 있다니……"
금청청은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사형!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왜……"
그리고 금청청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매일도는 비응방의 전갈을 받고 문상(問喪)차 보내지던 화산파의 대표 중 하나였
던 것이다.
"현천(玄天) 사숙께서도 일을 마치시는 대로 곧장 오시기로 하였으니, 너도 어서
가자꾸나."
금사진이 금청청의 아버지임을 아는 매일도가 조심스럽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금청청은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그렇게 강한 분을 누가……?
너무나 강해서 자신이 그렇게 매몰차게 대할 수 있었는데…… 금청청은 미친 듯이
말을 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비응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녀의 심중에 몰아치
는 폭풍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금사진은 금청청에게 한 번도 따뜻하게
대해 준 적이 없었다.
그것은 금청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런 다툼과 미움은 언젠가는 서로에 대해 이해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전
제(前提)에서 출발했던 것이었다.
적어도 금청청에게는 그러했다.
그러나 만일 아버지가 죽는다면……
모든 것은 과거가 되고, 그녀와 아버지의 미움은 다시는 돌릴 길이 없게 되는 것
이다.
과거(過去)!
이것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아무도 과거는 고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금청청과 매일도가 말을 달려 길을 재촉하고 있는 이 시간, 중원의 곳곳에
서는 비응방으로 급히 달려가는 말들의 흐름이 끊이지 않았다.
* * *
개방으로 간 서신은 매우 빠르게 용두방주 인의신개의 손에 들어갔다. 개방은 특
성상 총타가 한 곳에 정해져 있지 않았다.
방주가 머무르는 곳이 그때그때 개방의 총타가 되었던 것이다.
비응방의 서찰은 가까운 사천지부로 전해졌고, 개방 특유의 빠른 연락선(連絡線)을
타고 인의신개에게로 날아온 것이다.
인의신개는 마침 낙양에 머물러 있었고, 비응방의 서찰은 몇 사람의 손을 거쳐
그에게 전달되었다.
인의신개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이 바로 심화절의 서찰이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그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장로는 어찌 생각하시오?"
방주의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 낯이 익었다.
송인! 무골개 송인이 아닌가!
질문을 받은 무골개는 망설이지 않았다.
"적합한 사람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마침 그 근처에 있기도 하니……"
평소의 송인(宋仁)만을 알고 있는 사람이 지금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자신의
눈을 의심할 것이다.
그만큼 뿜어 내는 기도(氣度)가 달랐다.
"역시 장로의 의견도 그러시지요? 하지만 그는 엄밀히 말하여 본 방의 인물이 아
니니……"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에게 의뢰를 하면 되지요. 의뢰비를 지불하고서."
인의신개는 껄껄 웃었다.
"좋군요.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대답에 매우 만족한 듯 인의신개가 말했다.
그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이런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개방이 무슨 돈이 있어 의뢰비를 지불한다는 것일까? 어쨌든 인의신개는
망설이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개방에서 동시에 두 곳으로 연락이 취해졌다.
개방 전통의 연락망을 타고 전해진 두 가지의 전갈! 그 중 하나는 비응방으로 갔
다.
심화절의 요청이 수락(受諾)되었음을 알리는 연락! 다른 하나 역시 비응방의 근처
로 가기는 했지만 다른 곳이었다. 바로 송인이 말한 적합한 인물에게 가는 의뢰서
인 것이었다.
그런데 적합한 인물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의뢰를 받는다고 했는데, 혹시……?
* * *
심화절은 개방의 답장을 받고 지극히 만족했다.
개방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인의신개의 명망은 모두가 알아주는 바이니, 결코 비응방의 치부(恥部)를 남에게
알리지 않으리라.
다만 그가 궁금한 것은, 도대체 개방이 보낸다는 인물이 누구일까 하는 것이었다.
인의신개의 의제(儀弟)라는 이 인물에 관해, 그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그가 누구인지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지닌 바 능력이 뛰어나 꼭 반
도를 색출해 주기만을 심화절은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하나의 연락은 당연히 진소백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진소백은 그 연락이 인의신개에게서 온 것임을 알자 뭐 씹은 표정을 지었
다. 자신이 의뢰를 받는 대가는 항상 의뢰인 재산의 절반이었는데, 거지에게 무슨
재산이 있겠는가?
"이런, 또 공짜 청부라니……"
툴툴거리던 진소백의 표정은 내용을 읽어 가며 점차 진지하게 변했다.
비응방의 일이라면 엽혼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일을 청부한 배후자를 찾는 일은 어쩌면 비응방 내부에서 더 쉬울 수 있을 것이
다.
어쨌든 일이 묘하게 꼬이고 있었다.
진소백은 개방의 협사들을 시켜 천랑파(天狼派)와 화선(花仙)의 종적을 찾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을 명령했다.
개방의 방도가 아니면서도 이렇게 개방의 인물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또한 인의
신개와 의형제를 맺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개방의 의뢰를 무료로 많이 들어준
덕분이었던 것이다.
분분히 흩어져 가는 개방의 인물들을 보며, 진소백은 비응방으로 갈 채비를 서둘
렀다.
3
지금 비응방 주위로 천하 곳곳의 고수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강호인들은 성격이
급한 만큼, 비록 문상을 온 자들이라고 하나 고수들이 모여든다면 다툼이 있기 쉬
웠다.
따라서 웬만큼 눈치가 있는 자라면 행동을 조심해야 함을 당연히 알 것이다.
하지만 두천화(杜天華)는 불행히도 눈치가 빠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밑의 똘마니
들 역시 눈치가 없었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아직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이 눈치없는 자들은 객점의 뒤뜰에 모여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
이었다.
"이봐, 알겠느냐?"
두천화가 자신의 똘마니 셋을 모아 놓고 신신당부를 하고 있었 비응방으로부터 멀
지 않은 이 객점은, 언젠가 금청청이 파산이흉을 죽였던 그곳이 아닌가? 두천화가
있는 두가장(杜家莊)은 그다지 크거나 유명하진 않았다. 다만 소장주인 두천화가
여자 탐하기를 밥 먹기보다 좋아하는, 다시없는 한량으로 유명할 뿐이었다.
한량인 두천화가 여태껏 아무 탈 없이 살아 온 것은 우습게도 이곳이 비응방의 영
역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비응방과 어떤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아는 사람 중의 하나가 비응방 소속이어서, 비응방과 관계있는 사람은 건드
리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가 건드렸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일반(一般)의 힘없는 백성들이었으니…
… 하늘이 한 번쯤은 화가 나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어쨌든 그런 두천화가 지금
주루 안에 앉아 있는 아리따운 여인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그 여인이 비응방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확인까지 하고 난 상태이
니 말이다. 해서 수하들을 모아 미녀 하나를 말아 먹으려는 작전을 시행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이윽고 지시를 마친 두천화가 수하들의 어깨를 툭툭 쳤다. "
자, 알아들었으면 어서들 가보거라."
두천화의 말에 따라 수하 세 명이 주루로 먼저 들어갔다.
여인의 나이는 이제 스물을 갓 넘긴 듯했다.
곱게 빗어 올린 머리 아래에 맑은 이마가 여인의 심성을 말해 주고 있었다.
몇 가지 담백한 야채만을 시킨 채 조용히 앉아 있는 여인! 돈이 없는 것일까? 몸
에 걸친 옷도 수수한 포의였다.
한 번씩 고개를 들어 밖을 보곤 하는 모습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오늘 두천화가 노리는 목표는 바로 이 여인인 것이다.
두천화가 들여 보낸 수하들은 여인을 향해 곧바로 다가갔다. "흐흐! 이렇게 예쁜
소저가 홀로 앉아 있다니…… 흐흐!"
한 놈이 농을 걸기 시작하자 이에 질세라 다른 놈이 말을 받아 이어 간다.
"흐흐, 예쁜 소저가 이런 음식이나 먹고 있다니…… 어때, 어르신들이 좋은 것으로
사줄 테니……"
여인이 아미(蛾眉)를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주루의 구석에 앉아 있던 진소백의 검미(劍眉) 역시 미미하게 올라갔다.
'저놈들은 뭐야?'
진소백뿐만이 아니다.
주루 내의 많은 사람들의 인상이 미미하게 지푸려지고 있었지만, 세 명의 무뢰한
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후!'
진소백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여인을 걱정하는 한숨이 아니라, 농을 거는 불량배들을 걱정하는 한숨이었다. 그
리고 지금 밖에서 막 들어오고 있는 눈치없는 놈이 한심하게 여겨져서 나오는 한
숨이었다.
진소백은 구석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삐적 마른 노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놈들이군!'
어쨌든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놈들이 여인을 괴롭히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
아, 밖에서 드디어 최고로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놈이 나타나며 우렁차게 외쳤다.
"이놈들! 무엇 하는 짓이냐? 감히 백주에 여인을 희롱하다니."
'우렁찬 음성에 늠름한 기상이다!'`라고 두천화(杜天華)는 스스로 생각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이런 등장에 만족했다.
위기에 빠진 여인을 구하는 멋진 사내로서의 등장, 그리고 더욱 멋진 활약상이 이
어지는 것이다.
여인을 희롱하던 무뢰한 셋이 갑자기(?) 나타난 이 방해꾼을 없애기 위해 달려드
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手順)이었다.
"흐흐! 네놈은 뭐냐?"
괴소를 흘리며 달려드는 무뢰한과 그런 놈들 셋을 한 수에 멋지게 무찌르는 자신
의 멋진 모습!
"어이쿠, 못 당하겠다. 도망가자."
엉금엉금 기듯이 도망치는 자신의 수하를 보면서 두천화의 얼굴에는 은은한 만족
의 표정이 어렸다.
뒤를 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여인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라 있을 것임
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면 자신은 더욱 멋지게 어깨를 펴고서는 여인의 앞 자리에 앉으며 말을 건네
는 것이다.
"소저, 이제 안심하시오."
'대사 좋고!'
이 정도 되면 다음은 뻔하지 않은가?
뭐 구해 주셔서 감사하다느니, 은인이라느니, 하는 말이 오고 가며 분위기가 무르
익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분명히 그것이 정상인 것인데……
'엥, 이거 뭐 이래?'
자신이 목숨을 걸고 구해 준(?) 여인은 가끔씩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볼 뿐 두천
화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
하는 수 없이 다시 한 번 말을 꺼내 보는 두천화!
"헴, 헴! 그 뭐 이런 일은 남자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니……"
공연히 계면쩍어 헛기침을 하는 두천화에게 여인은 조용히 손을 들어 한 곳을 가
리켰다.
그리고 여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두천화의 안색이 변했다.
세 명의 무뢰한, 아니, 자신의 수하 세 명에게 일이 생긴 것이 자신들의 임무(?)를
다한 채 밖으로 나가던 그들을 한 노인이 막아선 것이었다.
삐적 마른 몸에다가, 붉게 물들인 삼베 옷을 걸친 노인! 손에 든 것은 기이하게도
붉은빛이 감도는 대나무였는데, 아마도 너무나 마른 탓에 설 힘도 없어 몸을 받치
기 위한
것인 듯했다.
자신들의 앞을 막아 선 사람이 이런 약한 노인임을 보고 그대로 밀치고 나가려고
했던 세 대한은, 노인의 한마디에 그대로 뻣뻣이 굳어버렸다.
공포(恐怖) 때문에 말이다.
"노부(老夫)는 냉설(冷雪)이라고 한다. 들어 보았느냐?"
목소리조차 차가운 눈이 펄펄 날리는 것 같았다.
혈고죽(血枯竹) 냉설의 이름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남자를 특히 많이 죽였다.
그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딸 냉상아(冷祥娥)가 유명한 음적이었던 채화랑(採花郞)의
손에 걸려 순결을 잃고 자결한 후, 여자를 희롱하는 자는 그의 손에 걸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강호의 절정고수로 알려졌던 채화랑도 열흘간의 추격 끝에 냉설의 손에 잡혀 오분
시(五分屍)되어 죽었다던가?
대한들이 이렇게 떨고 있는 것은 이런 일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포를 이기
며 가장 먼저 냉설을 알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인 것은 좌측의 대한이었다.
"좋다. 네놈은 노부를 알아보았으니 시신만은 남겨 주겠다. 어쨌든 네놈들의 개 같
은 목숨은 내가 끊어 주마."
여인을 희롱하는 것을 보았으니 냉설이 목숨을 살려 둘 리는 없었다. 시신을 남겨
준다는 것만도 그로서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제안이었던 것이다.
'주마'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냉설이 쥐고 있던 대나무로 만든 창(槍)이 발동하
여 세 명의 목젖을 따 나갔다.
기세가 일어나자마자 어느새 죽창이 목젖을 찌르고 있는 가공할 쾌(快)! "헉!"
누군가의 헛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손속에 사정을 두십시오."
"아미타불!"
타`─ 탕!
각기 다른 두 곳에서 날아온 젓가락과 돌멩이가 냉설의 죽창을 밀어 내며 두 대한
의 목숨을 살렸다.
냉설의 기세가 워낙 빠른 탓에 이미 한 대한의 목에서는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
돌중! 감히 방해할 생각이냐!"
냉설의 냉랭한 외침에 이어 손에 들린 혈죽창이 핏빛을 뿌리며 주루를 막 들어서
고 있는 승려를 덮쳐 들었다.
"아미타불!"
웅장한 불호와 더불어 승려의 승포가 펄럭이더니 소맷자락이 혈죽창의 기세를 맞
아 나갔다. 그러자 부드러운 소맷자락이 냉설의 창을 감싸면서 공세를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
"반선수(盤禪袖)! 소림의 사람인가?"
놀람에 찬 외침을 터뜨리며 냉설이 물러났다.
소림이라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역시 사람은 이름이 나고 볼 일이 아닌가?
냉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 대답이 되는 말은 각기 다른 두 곳에서 들려 왔
다.
"지공(知空) 대사를 뵙습니다."
"지공 사숙을 뵙습니다."
남의(藍衣)를 걸친 청년 하나가 일어나 승려에게 포권의 예를 취하고, 여태껏 앉아
있었던 포의여인
역시 일어서서 공손히 예를 취하고 있었다.
지공(知空)!
소림의 장경각(臧經閣)을 책임지고 있는 고승!
그리고 당금 소림방장인 현공(玄空) 대사의 사제이기도 한 그가 이곳에 온 것이
었다. 과연 금사진의 이름은 강호에서 컸다.
"오랜만일세. 장문인께서는 건녕(健寧)하신가?"
지공은 자신에게 인사한 두 남녀 중 먼저 남의청년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견하기
에 포의여인을 무시하는 듯한 이 행동은 오히려 지공 대사가 포의여인과의 친분
(親分)이 더 두터움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가 누구이기에?
자신을 무시한 채 지공 등이 서로 인사를 나누자, 냉설이 폭갈을 터뜨렸다.
"애송이! 아까의 젓가락은 네가 던진 것이냐?"
"죄송스럽게도 냉 노선배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예의바르되 비굴하지 않은 청년의 태도에 냉설도 잠시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다만 과거의 일로 난폭한 성질이 가끔 나타날 뿐, 원래 그의 성격이 나쁜 것은 아
닌 까닭이었다.
"너는 누구냐?"
한동안 강호에 나오지 않은 탓에 현재(現在)의 강호 인물에 대한 견문이 무뎌진
냉설이 물었다.
공교롭게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 또한 다른 곳에서 들려 왔다.
지공 대사를 뒤이어 막 객점으로 들어오던 홍의여인의 입에서.
"제 사형의 이름은 매일도예요."
화산옥기린 매일도(梅逸度)!
당금 화산장문인인 화산검성의 대제자이며, 화산의 차기(次期)를 이끌어 나갈 청년
고수! 따로이 화산제일수(華山第一秀)로도 불리는 그도 여기에 온 것이었다.
매일도를 소개한 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주루를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는 홍의여인!
진소백도 본 적이 있는 여인이었다.
두천화 역시 물론 여인을 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사색(死色)이 되어 갔다.
바로 금청청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은 비응방의 각 당에 속한 무사들. 그 중에서도 가
장 앞에 나와 있는 조관(曹串)의
얼굴이 낯익었다.
사형인 매일도에 앞서 먼저 비응방에 들어간 그녀는, 비응방의 소방주의 자격으로
비응방도들을 이끌고 나온 것이었다.
문상(問喪)을 위해 오는 군웅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얼굴에는 수심(愁心)이 가득했다.
냉설의 말이 이어졌다.
"흥! 검성(劍聖)의 제자로군. 그러나……"
다시 지공을 돌아보며 말을 이어 가는 냉설의 태도는 매일도를 무시한 것이라기보
다는 배분의 문제였다.
매일도(梅逸度)보다 지공이 한 배분 위의 사람이며, 자신과 동배임을 아는 까닭이
었다.
냉랭히 이어진 냉설의 한마디는 아직 살아남은 두 대한의 아랫도리를 적시게 하고
도 남음이 있었다.
공포로 인해!
"……어떤 일이 있어도 난 이놈들을 찢어 죽여야겠소!"
냉설의 살기(殺氣)에 지공(知空) 대사는 다시 한 번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물론 냉 시주의 마음을 이해는 하오나……"
지공이 다시 한 번 더 만류하고, 이어 냉설이 코웃음을 치며 다시 뭐라고 하려는
순간이었다.
이때까지 구석 자리에서 조용히 앉아 술을 마시던 누더기 옷의 청년이 갑자기 일
어나 끼여드는 것이 아닌가!
"예(禮)가 아님을 알지만 소생이 한마디하겠습니다."
'이건 또 뭐야?'
대한들의 생각이다.
"이 대한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니 큰 잘못이 없습니다."
'살았다. 생명의 은인이로구나.'
역시 대한들의 생각.
"이들에게 이런 일을 시킨 자는 따로 있으니, 그자에게 죄를 묻는 것이 옳을 듯합
니다."
냉설이 냉소했다.
"네 말은 무슨 뜻이냐?"
거의 목숨이 떨어질 위기에 놓였던 대한들이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어찌 천추의
한이 아니겠는가?
대한들이 이 기회를 놓칠세라 앞다투어 말을 했다.
"소인들은 그저 공자가 시키는 대로……"
"살려만 주십시오."
"두천화 공자가 시킨 일인지라…… 소인들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요."
그리고 대한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중인들의 시선이 서서히 두천화에게로 옮
겨 갔다.
이때까지 그야말로 뭐 씹은 표정으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두천화의 안색이 더욱
검어졌다. 일러, 사색(死色)!
'난 죽었다.'
두천화의 생각이었다.
"좋소, 지공 대사. 당신도 내가 이놈을 죽이는 것만은 간섭하지 않으시겠지?"
냉설의 말에 마음씨 순후한 지공(知空)이 다시 한 번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한 번만 인정을 베푸실 수는 없으신지요."
냉설이 네 명을 모두 죽이지 않고 한 명만 죽이는 것은 지공의 체면을 보아 최대
한의 인내(忍耐)로 인정을 베푼
것이었는데, 또다시 지공이 반대를 하자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냉설이 막 뭐라
외치려는 순간 또다시 폐의청년이 끼여들었다.
"그럴실 것이 아니오라, 그녀에게 이자의 처리 방법을 물어 보심이 공평하지 않겠
습니까?"
그녀란 두천화가 수작을 걸던 포의여인을 말함이다.
중인들은 모두 동의했다.
이것이 가장 적당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두천화의 수작으로 봉변(?)을 당할 뻔한 장본인이니 말이다.
이제 중인들의 눈이 모두 포의여인에게 쏠렸다.
"그래,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냉설이 얼굴에 기대의 빛(?)을 가득 담은 채 물어 보고…… "아미타불, 섭(攝) 사
질녀의 뜻을 말해 보게."
지공이 나지막이 물어 보았다.
곤란한 질문에 포의여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그 정도의 일로 목숨을 앗아 간다는 것은 너무 심하군요."
냉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두천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사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은 있으니 눈알 한 개와 팔 하나 뽑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군요."
냉설의 두 눈에 기쁨의 빛이 떠오르고, 두천화는 흡사 천당(天堂)에서 지옥(地獄)
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냉설은 지공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냉큼 두천화를 끼고 주루 밖으로 나가
버렸다. 지공의 방해를 받지 않으려는 듯.
밖에서 들려 오는 찢어지는 비명 소리.
"으아악!"
지공(知空)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던지 다만 눈을 감고 불호만을 외울 뿐이었다.
"후, 사질녀의 일 처리는 갈수록 매서워지는구먼!"
포의여인은 조용히 머리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사숙님."
한편, 그녀의 이러한 일 처리에 약간 놀란 매일도가 조심스레 물었다.
"소저가 뉘신지 물어도 실례가 되지 않을는지요."
여인의 이름을 묻는 것은 사실 매우 무례한 것이었으나, 너무나 궁금한지라 참지
못했던 것이다.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자신의 결례를 감추려 하는 매일도! 그러나 이러한 질문의
대답도 또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닌 아까 끼여들었던 청년이 또 나서서 말했
다.
"형장께서는 아미(峨嵋)에 옥녀(玉女)가 계시다는 말씀을 들어 보셨소이까?"
이 말에 매일도는 금방 깨달았다.
더불어 조금 전의 일도 이해했다.
아미옥녀(峨嵋玉女)!
모든 일에 있어 그 선후(先後)를 정확히 따지며, 행동 하나하나에 있어 상벌(賞
罰) 또한 명확하기로 소문이
난 아미의 젊은 여걸(女傑)!
아마도 그녀는 두천화의 행동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리라.
"아미옥녀! 그럼, 소저가 아미옥녀 섭수진(攝守眞)이시오?"
섭수진이 매일도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아미의 섭수진이 인사가 늦었습니다. 매 사형께서는 부디 탓하지 마시길……"
이어 그녀는 금청청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구 파 중 오 파는 가까웠는데, 소림과 아미는 특히 가까웠다. 때문에 아미의 섭수
진은 소림의 지공에게 사숙이란
칭호를 사용하였고, 화산의 매일도는 지공에게 대사란 명칭을 사용한 것이었 따라
서 지금 섭수진이 매일도에게 사형이라 칭(稱)함은 매우 예의를 차린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이 해결되고 나자, 장내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한 사람에게로 옮겨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가장 늦게 나섰으나, 장내의 분란(紛亂)을 가장 빨리 해결한 사람! 참을성이
없는 비응방의 조관(曹串)이 마침내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그리고 이번에야 비로소 물음을 받은 당사자에게서 대답이 나왔다.
"진소백, 내 이름은 진소백이라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