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 장 절명위기(絶命危機)
엽혼의 집, 아니, 지금은 엽평이 혼자 있는 집은 인가(人家)와 조금 떨어진,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엽평이 병이 있어 번잡(煩雜)한 것이 좋지 않음을 안 엽혼이 안배한 장소였던 것
이다. 인가와 떨어져 있어 오히려 남의 눈에 띄기 쉬움을 알기에 항상 먼 곳으로
돌아 집으로 돌아오는 수고로움을 엽혼은 감수했
무공을 익힌 사람의 이목(耳目)은 범인에 비해 훨씬 영민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엽평은 아마 지닌 바 무공을 거의 잃었음이 틀림없었다.
지금 밖에서 기척을 죽이며 움직이고 있는 네 그림자! 비록 조심스레 움직인다고
는 하나 무림인이라면 약간의 낌새는 챌 수 있어야 정상이었다.
엽평은 큰 솥을 불위에 걸었다. 형이 없는 지금, 하지만 저녁은 먹어야 하지 않는
가?
"후우`─`"
비록 크다고는 하나 솥에 불과했다. 무공을 지니고 있을 때는 그 무게조차 별로
느껴지지 않을 물건인데……
'겨우 이런 것을 들고서도 숨을 몰아쉬어야 하다니……'
엽평은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이윽고 솥 안의 물이 끓기 시작하자 엽평은 집 안에 남아 있던 잡다한 음식물들을
잘라 솥 안에 넣기 시작했다.
음식은 곧 끓어올라 누런 죽이 되어 갔다.
그는 어린 시절 형과 함께 집집을 떠돌며 구걸하다시피 하여 끼니를 때우던 때를
생각했다.
그때 먹었던 음식과 이것은 닮아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자 이상하게도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이런 음식을 먹는다
는 것이 엽혼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엽
평은 엽혼의 고생(苦生)을 나누어 가지는 느낌이 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
지의 사문(師門)에서 영문도 모르고 쫓겨난 후 그들 형제의 고생은 정말 극심했다.
자신도 가전(家傳)의 무공을 어느 정도 익혔고, 형 엽혼의 무공은 이미 높았지만,
형은 결코 무공을 돈을 버는 데는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형은 사부(師父)를 만났다.
항상 인자했던 노승(老僧)!
그분의 밑에 있을 때 형이 얼마나 행복해했었는지를 엽평은 기억해 냈다.
그랬던 형이 사부를 배신한 것은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
이 몸!
이젠 솥 하나 들어올리는 것조차 힘이 부칠 정도로 연약해진 자신의 몸! 이 몸을
지키기 위해 형은 너무도 많은 희생을 했다.
엽평은 불을 껐다.
기포를 일으키며 끓던 소리가 점점 조용해졌다.
이윽고 죽의 표면이 잔잔해지자 엽평은 국자를 들어 죽을 뜨려 했다. 먹어야 했다.
자신의 몸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형의 희생(犧牲) 위에 서 있는 것인 까닭이다.
막 죽을 뜨려던 엽평의 몸이 흠칫했다.
죽 위로 퍼져 나가는 작은 동그라미들!
어디에선가 움직임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이런 것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엽평의
몸이 솥 옆으로 넘어질 듯 비켜서는 것과 등뒤의 문이 열리며 복면인 하나가 달려
든 것은 동시였다.
손에 든 것은 검!
그러나 그 검은 엽평의 몸에 닿지 못했다.
대신 복면인이 뒤집어쓴 것은 뜨거운 죽이었다. 엽평이 비켜서며 죽그릇을 던져
버린 것이다.
"으악, 뜨거워!"
물에 데는 것보다 죽에 데는 것이 훨씬 뜨거우며 아프다. 복면인은 괴로워했다. 그
러나 엽평이 안도(安堵)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다시 양쪽의 창문이 부서지며 다른
복면인 둘이 더 날아왔다.
이번엔 모두 맨손!
그러나 이것이 더욱 무섭다. 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무공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이므로.
비켜섰던 엽평의 몸이 다시 뒤로 넘어지며 탁자의 아래 부분을 걷어 찼다. 주르르`
─
뒤로 밀려나는 몸!
달려든 두 복면인이 헛손질을 하고, 밀려난 엽평의 몸이 처음 나타난 복면인이 떨
어뜨린 검을 잡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츠팟!
엽평의 손에 들린 검이 검화를 피워올리며 맨손의 두 복면인 중 한 명의 천돌혈
(天突穴)에 꽂혔다.
죽어 가는 복면인의 눈에 경악의 빛이 드러났다. 그는 자신이 잡으러 온 이 소년
이 무공을 지니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공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엽평의 임기응변(臨機應變)과 빠른 반응만은 여
전했다. 순간적으로 한 명의 적을 처치한 엽평, 그러나 방심할 수가 없었다. 죽을
뒤집어쓰고 화상(火傷)을 입었던 복면인이 정신을 차려 다시 엽평에게 달려들며
머리를 향해 발길질을 가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죽을 뒤집어쓰고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거의 동시(同時)였지만, 장내의 변화
는 그보다 훨씬 빨랐다.
그리고 엽평은 지금 누워 있었다.
머리를 향해 달려드는 적의 일퇴(一腿)!
급히 옆으로 몸을 굴려 그 일퇴를 피하는 엽평!
적의 발은 허공을 갈랐고, 그 바람에 몸의 중심을 잃었다. 엽평이 지금 비록 내공
을 상실했다고는 하나, 한때 기재라 칭송받던 소년이었다. 이자의 무공이 그리 높
지 않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나중에 나타난 복
면인들 중 아직 살아 있는 자였다. 엽평이 옆으로 구르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엽평의 명문(命門)을 향해 찔러 오는 복면인의 손!
이런 자 중의 하나를 먼저 처치한 것은 천행(天幸)이라 할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다!'
엽평의 뇌리를 스쳐 간 생각!
이건 정말 피할 수 없어 보였다.
피할 수 없다면 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어남과 동시에 엽평의 다리가
가슴께로 오무려졌다.
펑!
적의 장세(掌勢)가 다리를 두드리자 엽평은 전해져 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아마도 오른쪽 다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왼쪽의 다리뼈가 부러진 듯했다.
그러나 장세에 의해 밀려가면서, 엽평은 죽을 뒤집어쓴 복면인을 공격할 수가 있
었다. 스걱!
장세(掌勢)에 의해 밀려나는 힘과 엽평이 사력(死力)을 다한 힘이 합쳐져 휘둘러지
는 검이 복면인의 허리를 이등분(二等分)하는 소리였다.
남아 있는 한 명은 눈이 뒤집혔다.
분명 자신들을 보낸 사람은 엽평이 무공을 못 한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이 상
황은…… 양분된 허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막(幕)을 형성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엽평이 자신의 일장을 받고 미끄러져 나가며 검을 휘두르고 벽에 부딪혔
으므로, 혈막(血幕)이 생긴 곳과
복면인이 서 있는 곳, 그리고 엽평이 밀려난 곳은 일직선(一直線)을 이루고 있었
다.
혈막(血幕)이 서로의 시선을 가릴 것은 당연한 이치! 그러나 이미 놀람과 분노로
눈이 뒤집힌 복면인은 시야(視野)가 가려진 것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 새끼`─ 죽엇!"
노갈하며 혈막 속으로 뛰어드는 복면인.
양장(兩掌)에는 공력이 실린 경풍(勁風)이 피어오르는데…… 꽈꽝`─
복면인의 손이 벽을 부수며 나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복면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무언가 잘못됐다.'
그렇다. 분명히 잘못되었다.
복면인이 쌍장을 날린 곳에는 이미 엽평이 없었다. 엽평은 벽에 닿기 무섭게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다시 옆으로 굴러 나갔던 것이다. 허리에서 뿌려지는 혈막
에 서로를 보지 못하는 것을 무시한 복면인의 치명적인 실수(失手)! 그리고 목숨을
건 싸움에 있어서 실수의 끝은 죽음이었다. 실수했다고 느끼며 얼굴을 돌리는 복
면인의 동공(瞳孔) 가득히 확대되어 오는 것이 있었다. 검날의 각이 진 앞 부분!
복면인은 전신(全身)이 검날에 빨려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푹!
검이 마지막 복면인의 얼굴에 박히는 소리는 섬뜩했다. 그러나 엽평에게 있어 그
소리는 자신이 위기를 넘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엽평은 비로소 왼쪽 다리의 골절
(骨折)이 생각보다 심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가슴속에서는 비릿한 기운이 올
라오고 있었다.
"쿨룩, 쿨룩!"
무리를 했다.
이미 절맥이 발병하기 시작하여 조금도 무리를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인데 조금 전
의 일전은, 설혹
건강한 사람이었다 해도 타개하기 힘든 것이 아니었던가? 가슴이 끊어져 나가는
통증!
그러나 묘하게도 지금 엽평의 가슴속에 스멀스멀 스며드는 것은 일종의 쾌감(快
感)이었다. 이런 긴장감!
그리고 생사를 건 격투!
엽평은 자신이 무공을, 또한 비무를 얼마나 좋아했던지를 기억해 냈던 것이다. 의
식이 흐려져 왔다.
그러나 이 방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
도 적은 자신이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처음 보낸 자들이 실패한 것을 알게 되면
다시 사람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이자들이 자신을 노리는 이유를 엽평은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을 노리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면 이유는 오직 하나.
엽혼과의 일일 것이다. 엽혼을 노리는 자가 있다면 엽평은 그야말로 효과적인 인
질(人質)이 될 것이므로…… '형에게 짐이 될 수는 없다. 어서 여기를 피해야 한
다.' 그러나 부러진 다리와 가슴의 통증(痛症)은 움직임을 방해했고, 엽평은 거의
기다시피 하여 집을 빠져 나왔다.
2
엽평이 밖으로 나와서 본 것은 불행히도 또 다른 복면인이었다. 침입한 네 명 중
에서 남은 하나.
'대단한 고수!'
엽평이 그를 보고 처음 느낀 것은, 상대방이 대단한 고수라는 것이었다. 방에 뛰어
들어온 세 명처럼 임기응변으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水準)이 아니었다.
'결국 잡히고 마는가?'
엽평의 눈빛이 흐려졌다. 자신이 잡히는 것보다도 이자들이 자신을 미끼로 형을
위협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럼에도 엽평이 복면인을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상대방이 지금 자신
의 몸으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임을 느낀 탓이었다.
능력이 없으면서도 억지로 시도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함을 알기 때문이었
다.
복면인은 말없이 엽평의 앞에 서 있었다.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기도(氣度)에 주위의 공기마저 눌린 듯, 질식할 듯한 침묵
(沈默)의 무게에 눌린 분위기(雰圍氣)를
엽평은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고수가 왜 아까의 습격에는 가담하지 않았을까? 또 왜 말없이 자신을 보고
만 있는 것인가?
한참 엽평을 바라보던 복면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네가 엽평이냐?"
질문을 던진 복면인은, 그러나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엽평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난 구천(仇賤)이라 한다. 너는 나와 함께 가야겠다."
"가지 않겠다면 어쩔 생각이오?"
복면인 구천의 눈빛이 강해졌다.
"넌 힘이 없으니 선택할 권리도 없다. 가야만 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힘이 없지는 않을 것이오."
"그렇다. 네 눈빛은 아직 죽지 않았으니 언젠가는 힘을 얻게 되겠지."
"그때는 내가 당신을 가만두지 않겠소."
구천의 눈빛은 더욱 강해졌다.
"기다리고 있으마."
엽평은 구천의 행동에서 어딘가 기이(奇異)함을 느꼈다. 아무리 보아도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일까?
어쨌든 하나는 확실해 보였다.
오늘 자신이 구천의 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하리란 사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찌 짐작대로만 될 것인가?
* * *
사람에게 다가오는 일들.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우리는 운명(運命)이라 부른
다. 지금 이 순간, 금청청이 여기에 나타난다면 그것은 운명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정한 필연일까?
어쨌든 금청청은 여기에 나타났고, 엽평이 당하고 있는 곤란(困難)을 보았다.
금청청은 그녀의 아버지 금사진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계모와의
일 때문인 듯했지만, 사실 그 이유는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 방응향(芳凝香)이 세상을 뜨던 날!
그날도 자신의 처(妻)의 죽음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아버지, 금사진의 무정(無情)이
금청청에게 한(恨)을 갖게 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금청청은 아버지를, 아니, 강하다 자부하는 세상의 모든 남자를 증오하
기 시작했다.
무공에 미친 듯이 탐닉해든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이러한 금청청이 여기에 나타난 것은 엽평으로서는 행운이었다.
엽평을 핍박하고 있는 구천!
강한 남자에 대해 무의식(無意識)적인 거부감을 지닌 금청청이 그냥 넘길 광경이
아니었다.
"소년과 너는 무슨 관계냐?"
다짜고짜 나오는 것은 하대(下待)!
그러나 구천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는 소저(少姐)가 관여할 바가 아니오."
"흥!"
코웃음을 친 금청청이 이번엔 엽평에게 물었다.
"너는 이자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엽평으로선 물에 빠져 있다 큼직한 통나무 하나를 주운 격이었다.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다만……"
"다만 무엇이냐?"
"다만 낭랑(娘郞)께서 화를 당하실까 두려우니 어서 피하십시오."
엽평의 걱정하는 듯한 이 말은 오히려 금청청의 자존심(自尊心)에 불을 붙였다.
"흥, 누가 감히 내게 화를 끼친다는 말이냐. 나는 꼭 참견을 해야겠다."
엽평은 과연 금청청이 고수자(高手者)임을 몰라보고서 이런 말을 한 것일까? 아니
면……? 금청청은 실행(實行)이 결코 말에 뒤쳐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참견을 해야겠다'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품에서도 비도가 쏘아
져 나왔다.
이전에는 젓가락을 이용해 선보인 바 있는 절기!
그러나 지금은 젓가락이 아닌 진짜 소도(小刀)를 이용한 것인지라 그 속도가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쌔액!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비도가 날아가는 것을 본 사람의 상상 속에서만 들리는 소
리였다. 날아가는 속도가 워낙 빨라, 비도(飛刀)가 구천의 눈앞에 도착할 때까지
아직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있었다.
금청청은 비도(飛刀)를 좋아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적의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있
으므로!
그리고 지금까지 비도를 날려 별로 실패해 본 경험이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목
에 비도를 꽂은 채 쓰러지는 구천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하나……
결과는 달랐다.
캉!
어느새 뽑아 든 구천의 검날이 비도를 하늘로 쳐내면서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호선(弧線)을 그리며 하늘로 날려가는 비도(飛刀)! 그리고 비도를 막아 낸 구천의
휘어진, 마치 이리의 이빨 모양과도 같은 낭아도(狼牙刀)! 비도가 날아오른 것과
다시 두 개의 비도가 금청청의 품에서 벗어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금청청으로서
는 구천이 비도를 막아 냄을 보고 던져 낸 것이었지만, 옆에서 관전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금청청이 거의 동시에 세 개의 비도를 이어서 던진 것으로 보였을 것이
다.
두 개의 비도(飛刀)!
하나는 다시 구천의 가슴께로 향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떠오른 처음의
비도를 노리며 날아갔다.
이 중에서 무서운 것은 하늘로 향하는 비도였다.
구천은 물론 자신의 가슴을 향하는 비도를 쳐낼 수 있을 것이다. 처음의 비도 역
시 쳐냈으므로.
그러나 구천이 비도를 쳐내기 직전, 하늘에서는 두 개의 비도가 충돌하게 될 것
이다. 하여 방향을 바꾼 비도는 자신에게로 떨어져 내리리라! 짐작하기가 거의 불
가능할 방향으로. 그리 되면…… '그렇다면 피하기 어렵다.'
생각과 동시에 구천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처음의 비도를 쳐내고, 날아오르는 두 동작의 연결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처음부터 비도를 쳐내는 힘을 빌어 뛰어오르기로 정한 듯이 보였다.
금청청의 비도가 아슬아슬하게 구천의 발 아래를 스치며 지나갔고, 그와 동시에
구천의 낭아도는 처음 하늘로 올랐던 비도(飛刀)를 다시 한 번 쳐내고 있었다.
이미 속도를 잃어 천천히 떨어지는 칼을 쳐내는 것은 구천 정도의 고수에게는 그
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캉!
쌔액!
처음의 소리는 구천이 비도를 쳐내며 나는 소리였고 두 번째의 소리는 구천이 쳐
낸 비도가 금청청을 향해 날아가면서 내는 소리였다.
칼로 비도를 쳐내어 방향을 조절한다는 것은 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 그러나 힘을 잃고 공중에 떠 있는 것을 쳐내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
랐다.
금청청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어렸다.
그녀는 여태까지 이 정도의 고수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비도!
그리고 쾌속(快速)의 비도를 보며 느끼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 비도가 바람을 가
르는 소리는 지금 구천의 귓가에서도 들려 오고 있었다. 구천이 쳐낸 비도를 노리
며 날아오던 비도가 있지 않았는가? 구천이 자신의 목표물을 쳐내며 공중에
떠오르자, 그 비도는 마치 처음부터 구천을 노리고 쏘아진 것처럼 보여졌다. "흡!"
한 소리 급박한 호흡과 함께 구천의 몸이 허공에 뜬 채로 옆으로 뉘어졌다. 허공
에서는 힘을 받을 곳이 없기 때문에 구천의 이러한 신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
다. 쉭!
비도(飛刀)는 아슬아슬하게 구천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며 그의 뺨에 한 줄기의
피 띠[血線]를 길게 만들었다.
그리고 구천의 몸은 다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금청청의 허리가 휘어지며 등에 매어 두었던 검이 환상(幻像)처럼 뻗어 나와 구천
이 쳐낸 비도를 다시 감아 나간 것은 이와 동시였다. 환상인 양 금청청의 검끝에
서 피어오른 매화 형태의 검화(劍花)는 비도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소리조차 내
지 않은 채 비도의 기세를 무력화시켰다.
"매화검(梅花劍)! 화산(華山)의 제자더냐?"
땅을 박찬 구천이 폭풍처럼 금청청을 향해 덮쳐 갔다. 매화검! 이십사수(二十四手)
의 매화검법(梅花劍法)! 화산파(華山派)가 자랑하고 있는 검법의 하나였다. 금청청
은 화산에서 무공을 익혔다고 하지 않았는가? 구천이 금청청에게 달려드는 기세는
흡사 굶주린 이리가 먹이를 노리고 질주하는 것 같아, 손에 쥐고 있는 낭아도(狼
牙刀)와 잘 어울렸다.
"낭아도와 천랑도법(天狼刀法)! 네놈은 천랑파와 무슨 관계냐?"
외치고 있는 금청청의 검끝에서는 다시 매화 문양(文樣)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엔 아까와는 판이(判異)한 기세!
부드럽게 감싸 가던 좀 전의 기세와는 다르게 매화꽃이 폭풍 같은 기세로 쏘아
가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매화검의 절기인 매화노방(梅花怒放)이었다.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구천이 도를 뒤집어 옆으로 쓸어 가자, 매화검의 기세를 슬쩍 비켜서며 구천
의 몸이 횡(橫)으로 날아갔다.
야랑횡비(野狼橫飛)!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정해진 것인 양 금청청의 측면(側面)을 노리며 짓쳐 드는
구천의 도(刀)가 싣고
있는 기세는 다름 아닌 신랑토설(神狼吐舌)이었다. 오직 한 점을 향해 짓쳐 드는
쾌도!
힘과 빠름을 겸비한 이 일초를 금청청은 변(變)을 이용하여 맞아 나갔다. 검끝에
서만 피어나던 매화 형태의 검화(劍花)가
이번엔 허공 가득 날리기 시작했다.
허공에 무수히 낙화하는 매화는 구천의 도를 효과적으로 막아 내고 있었다. 매화
분분(梅花粉奮)!
매화 가루가 허공에 휘날리며 상대의 공세를 휘감아 가는 변(變)의 초식! 구천은
분분히 날리는 매화꽃 곳곳에 강한 경기(勁氣)가 숨어 있어 검을 진행시키기가 어
려움을 느꼈다.
속으로 감탄의 마음이 든 것도 이와 동시였다.
'여자의 몸으로 이와 같은 무공을 구사하다니!' 그러나 마음속의 감탄은 지금의
싸움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구천의 낭아도가 잇달아 세 번 회전하여 회전력(回轉力)을 일으키며, 금청청의 매
화분분 일초를 와해(渦解)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세 번 회전으로 상대의 경기를 흩뜨리는 이 초식이야말로 천랑도법(天狼刀法)의
낭검삼선(狼劍三旋)이 아닌가!
자신의 매화분분이 소리없이 흩뜨려지는 것을 보자, 금청청도 초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매화토염(梅花吐艶)!
구천의 신랑토설(神狼吐舌)과 일견 비슷해 보이는 이것은 역시 공격만을 위한 초
식이었다. 내공을 동반하고서 짓쳐 나가는 검날이 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소리! 구
천도 급히 도를 천랑추뢰(天狼追雷)의 식으로 변경하여 마주쳐 나갔다. 꽈릉!
검과 도가 부딪치는 소리이다.
고수끼리의 싸움에서는 서로의 병기가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경우가 드물었다. 상
대방의 공격을 흘려 보내는 것을 무가(武家)에서는 권(圈)이라 하는데, 고수라면
이에 통달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다만 사삭, 하는 미약한 소리가 있을 뿐, 이런 종류의 굉음(轟音)이 일어나
지는 않는데, 직접적인 충돌에는 양패구상(兩敗俱傷)의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
이다.
"웃!"
"음!"
서로가 비슷한 실력의 고수들이 직접적인 대결을 벌인 결과는 항상 비슷하다. 구
천과 금청청은 가슴을 비집고 올라오려는 핏줄기를 억지로 삼켰다. 이런 대결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금청청의 눈빛이 놀람으로 은은히 떨렸다.
대단한 자!
'어린 소년을 핍박하던 자의 무공이 이리도 높다니!' 그러나 어찌 구천의 뇌리에
흐르는 놀람에 비하겠는가.
자신과 당당히 맞대결할 수 있는 인물이 일개 여인이라니! 둘의 싸움은 놀랍기 그
지없어 엽평은 가슴의 통증마저 잊을 지경(地境)이었다. 가슴을 부여잡고 앉아 있
는 한 소년과 서로를 마주보며 선 남녀 두 고수! 그리고 둘 사이를 스쳐 가는 겨
울 바람 한 줄기!
바람도 차가웠지만 검도 차가웠다.
검을 쥐고 있는 자들의 마음은 더욱더 차가웠다.
그리고 이들의 대치(對峙)는 어이없게도 갑자기 나타난 일단의 거지들로 인해 깨
졌다.
"엽평 소형제, 괜찮으신가?"
먼 거리에서 외치는 소리인데도 귓가에 뚜렷이 들려 왔다. 무공을 지니고 있는 거
지! 바로 개방의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지닌 바 무공 또한 약하지 않은 듯 달려오는 속도들이 매우 빠른데…… 구천의
두 눈에 당혹함이 스쳤다.
이런 상황에서 개방의 인물들이 가세한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 되리라. 상황을 판
단한 구천은 지체없이 금청청에게 일도를 쏟아 내었다. 교랑과월(巧狼過月)!
금청청이 마주 일검을 쏘아 내자, 정말로 교활한 이리가 달을 지나치듯 구천은
금청청의 옆을 비스듬히 스쳐 물러났다.
"흥!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노해 외치는 금청청이 다시 내뿜은 일초, 그러나 정교하지 못하여 오히려 구천의
도주를 도와 준 꼴이 되고 말았다.
퍼펑!
검과 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이리도 둔탁한 것은 구천의 일초가 힘을 빌어 달아나
기 위한 허초(虛招)임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승부는 다음으로 미룹시다, 소저!"
구천은 사라졌다.
겉으로 보기에 동수(同手)로 보였던 좀 전의 승부는 사실 구천의 우세였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금청청이 내상(內傷)을 입은 데 반해 구천은 피육(皮肉)의
상처일 뿐, 내상은 없었으므로.
진실로 동수를 이루었다면 어찌 구천이 그리 쉽게 떠나갈 수 있었겠는가?
구천이 떠난 것과 사종쾌가 도착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개방의 사천분타주 광풍
개(狂風 ) 사종쾌(司綜快)! 그리고 사천분타 소속의 개방 고수 너댓 명.
그들이 도착하며 본 것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그러나 또한 얼음같이 차가운
여인이 입가에 한 줄기 피를 흘리며 서 있는 모습과, 비로소 안심하며 정신을 잃
어 가는 엽평의 모습이었다.
"엽 소형제!"
외치며 달려오는 사종쾌를 보며 엽평은 비로소 안심하고 의식의 끈을 놓을 수 있
었다.
3
엽평은 아직 의식을 잃고 있었다.
흉험했던 싸움!
절맥으로 이미 지닌 바 무공을 거의 잃어 가는 한 소년이 감당하기엔 힘에 부친
일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진소백의 음성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이제 돌아왔고, 와서 처음 들은 것은 엽평이 습격을 당했다는 것이다. 진소
백의 질책을 받은 사종쾌의 고개가 더욱 수그러들었다. "제 잘못이 큽니다. 적도
(敵徒)들의 유인에 넘어갔습니다."
사종쾌의 말은 간단했지만 진소백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원래 그는 유유곡으
로 떠나기 전, 개방의 사천분타를 총괄하는 사종쾌에게 부탁하여 엽평의 거처를
지키도록 했었다.
그런데 엽평을 습격했던 자들은 사종쾌와 개방 고수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고,
그사이에 엽평을 습격했던 것이다.
사종쾌의 나이는 젊다.
그러나 이런 나이에 개방의 분타주에 올랐다는 것은 그에게 능력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인데……
그런 사종쾌가 그렇게 쉽게 유인을 당하다니.
"아무리 그래도 엽평 주위에 한 명도 남겨 두지 않았단 말이냐?"
사종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용(阿勇)과 아칠(阿七)을 남겨 두었습니다만, 그만 적도들에게……"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진소백의 얼굴 또한 어두워져 갔다.
아용과 아칠은 결코 무능하지 않았다.
그들은 복면인이 침입함을 알았고 대항하려 하였으나, 뒤이어 덮쳐 오는 항거 불
능의 도기(刀氣)를 느꼈었다.
구천의 낭아도(狼牙刀)!
하지만 그들의 대항으로 생긴 미미한 진동이 엽평의 죽그릇을 흔들리게 했고 결
과적으로는 엽평을 구하게 된 셈이었다.
사람들의 인생에 이와 비슷한 일은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다만 눈앞에 다가온 행
운을 즐기지만 그런 행운이 나에게 오기까지 다른 사람의 희생이 있었음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들의 장례는…… 최대한 정중히 하도록!"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진소백이 비로소 말을 다시 이었다. "복면인들이 어떤 자들
인지는 알아 보았나?"
"집 안에 죽어 있는 자들에게서 알아 낸 것은, 죄송하게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허
리가 양단된 자는 오흉(烏凶)이란 자이고
각각 얼굴과 목젖이 뚫려 죽은 자들은 미창, 미충이란 자들인데, 이들은 몰려 다니
며 돈을 받고 나쁜 일을 하던 자들이라 합니다."
잠시 말을 쉰 사종쾌가 말을 이었다.
"아마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일을 한 듯한데, 누가 그런 일을 시킨 것인지는 수
소문해 보고 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용과 아칠의 몸에 난 상처입니
다."
진소백의 눈이 빛났다.
"상처? 적의 무공 연원이라도 추측해 내었단 말인가?"
"예. 아마도…… 그 상처는 마치 짐승의 이빨에 물어뜯긴 듯한데…… 무림의 무기
중에서 그런 상처를 낼 무기는
많지 않습니다. 또한 그런 무기를 사용하는 문파도 많지 않습니다."
진소백이 신음하며 말했다.
"낭아도(狼牙刀)…… 천랑파(天狼派)?"
천랑파!
정사(正邪) 중간에 속하는 문파!
그러나 결코 그 문도들이 사악하지는 않았다. 다만 성정(性情)들이 모두 괴팍하여
남과 어울리기를 싫어할 뿐.
단 한 명의 제자만을 두어 일맥단전(一脈單傳)한다는 문파! "맞아요. 그 누나도 천
랑파라 얘기했더랬어요."
이 말소리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들려 와 진소백과 사종쾌를 놀라게 했다.
"엽평, 깨어났느냐?"
"소형제!"
엽평은 조금 전에 이미 깨어났으며, 진소백과 사종쾌의 말을 듣고 있다가 참견을
했던 것이다.
"예. 조금 전에요."
"어떤 누나 말이냐? 사 분타주가 달려왔을 때 한 여인이 네 곁에 서 있다 사라졌
다 했는데, 그 여인을 말하는 것이냐?"
진소백의 물음에 엽평은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엽평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진소백의 콧등이 찡그려졌다. 항상 무언가 이상한 것을
대할 때면 나타나는 그의 버릇! 무엇이 그리 이상한 것일까? '금청청. 그녀인가?'
진소백은 엽평의 설명에서, 엽평을 도와 복면인과 싸운 여인이 금청청임을 짐작해
낼 수 있었다.
검끝에 피어났다는 영롱한 매화는 화산파의 매화이십사검이 틀림없었고, 이는 그
녀가 바로 금청청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소백이 콧등을 찡그린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날 수 있었단 말인가?' 누구인지 모르나 엽평을 노린
자들의 능력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종쾌를 그리도 쉽게 유인해 갈 수 있
었던 자들이었
그런데……
'금청청이 접근하는 것을 방비하지 못했단 말인가?' 의문은 더 있었다. 하지만 진
소백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으음……"
신음과 함께 엽평이 다시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평아(枰兒)!"
"소형제!"
진소백과 사종쾌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 * *
사종쾌가 광풍개라 불리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일진광풍(一陣狂風)!
그가 엽평을 업고 떠나는 모습은 그야말로 미친 바람 같았다.
사종쾌의 특기는 경공이었던 것이다.
사종쾌는 유유곡으로 떠났다. 종도를 만나게 되면 엽평은 다시 옛날의 활달한 소
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떠나가던 사종쾌의 모습을 생각하자, 진소백은 피식, 웃음이 나옴을 참을 수 없었
다.
그토록 허둥대던 모습! 그리고 평소의 그의 신법보다 가히 배(培)는 빨라 보이던
발걸음.
진소백이 미소를 지음은 사종쾌의 인간됨의 일면(一面)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량을 넘어가는 신법의 전개는 종종 원기(元氣)를 상하게 하기도 했다. 이런 것을
잘
아는 사종쾌가 왜 그리 서두른 것일까?
엽평의 부상과 혼절에 책임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책임질 잘못이 있는 이
상, 자신을 일부 희생하더라도 그 잘못을 만회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은 진정 장부
의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었고, 진소백은 이러한 대장부를 정말 좋아했다.
불행히도 지금 시대에는 이러한 사람이 너무나 드물지 않은가!
사종쾌가 자신의 일을 찾아 떠난 지금 진소백도 자신의 일을 하기로 했다.
천랑파(天狼派)!
복면인들이 남기고 간 유일한 흔적이었다.
비록 하나의 단서에 불과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하나로도 충분하다. 적들은
……
"단서를 너무 쉽게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