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6/66)

"형님이 생각나는 모양이야."

황제의 말에 엄헌영의 눈살이 꿈틀했다. '형님이요?' 황제가 그런 엄헌영의 반응을 보고 타박을 놓았다. 말귀도 어두운 놈이 무어 그리 잘났다고 눈을 부라려.

"경이 녀석 형님 말이다. 범 세계에 애틋하게 여기는 형님이 계셨었거든. 그래서 희야 형님을 보면 제 형님이 떠오르는 모양이더구나. 정작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허......"

희 형님이 아흔 살 먹은 노인네도 아니고, 반은 허탈한 듯, 또 반은 기가 막힌다는 듯 엄헌영은 중얼거렸다. 네 놈이 네 부친 닮은 이 뒷모습만 봐도 마음이 짠한 것과 비슷한 이치 아니겠느냐.

황제가 그렇게 내뱉고 나서야 엄헌영이 구시렁거리던 것을 멈췄다. 복잡한 표정이 된 엄헌영에게 무심한 시선을 한번 던졌다가 황제가 바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불쑥 내뱉었다.

"어찌 하겠느냐?"

영문을 알 수 없어 엄헌영이 한쪽 눈을 찡그리자, 황제가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밤 수확 철은 지나도 한참이 지났지. 네 놈 올해 햇밤은커녕 황밤이라도 먹어보기는 했느냐? 빈털터리 놈이 그럴 여유가 있을 리가 없지."

"......"

황제를 확 칠 수도 없고. 엄헌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황제가 엄헌영에게 손끝만 까닥까닥하고는 터벅터벅 앞서가기 시작했다.

"짐과 함께 들 영광을 주마. 따라와라."

그냥 거절하고 돌아갈까 하다가 엄헌영은 불현듯이 깨달았다. 황제와 이렇게 말을 섞고 함께 걷는 것이 얼마나 오래간만인지. 묘한 감상에 사로잡힌 그는, 황제가 한참이나 멀어진 후에야 그도 용기를 내어 자신에게 제안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돌이켜보면 서현과 서문경만큼이나 자신과 그도 얄궂은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들의 감정과는 상관도 없이 계속해서 어그러지고 멀어져야 했던 관계. 먼 과거에는 어떤 벗보다도 살갑던 종질. 사이가 단단히 틀어졌을 때에도 계속해서 미련이 남아 결국은 외면할 수 없었던 내 가시.

결국 엄헌영은 천천히 황제의 뒤를 따랐다. 어느덧 낯설어진 황제의 등이 그를 인도하는 듯 했다.

"늦었구나."

거처로 돌아오자 당연한 듯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황제가 서문경을 맞이했다. 제 방처럼 느긋한 태도로 앉아 있는 황제를 발견한 서문경은 어이가 없어서 비꼬았다. 

'폐하, 저는 폐하께서 황제이신 줄 알았는데 사실은 황후셨습니까?' 황제가 잔기침을 쉴 새 없이 하면서도 거기에 섞어 킬킬 웃었다. 무어, 하라면 못 할 것도 없지.

"천추전이 울겠군요."

뭐라 더 쏘아 붙이려다가 그만둔 서문경이 한숨을 삼키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황제가 바로 물었다.

"백운동에는 잘 다녀왔더냐."

황제의 물음에 무심코 '예. 그럭저럭....'하고 대답하다가 뒤늦게 헉한 서문경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덯게 아셨습니까?!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짐은 그 아무나에 안 들어가느니." 깜짝 놀란 서문경이 무색하도록 태평한 태도로 대꾸한 황제가 서문경에게 손짓을 하면서 재차 물었다.

"가서 무엇을 하였어?"

서문경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할 만한 말이 없어서였다.

"별 일 없었습니다. 늘 비슷하지요. 앉아서 차 마시고 이야기 좀 하다가.... 아."

"왜 그러누?"

"효영이와 제영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가 감탄했다. '형님도 제법 발전하셨구나.' 서문경도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또?"

"또? 뭐가 있더라....." 황제의 재촉에 머리르 쥐어짜던 서문경이 서현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저는 아직까지 불편해 하는 것 같았지만 처음보다는 제법 나아졌어요. 불편한 이야기도 꺼내시는 것을 보면."

"불편한 이야기?"

어떻게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느냐고 묻더군요. 서문경은 대수롭잖게 대꾸했지만 그 말을 들은 황제는 조금 불편해하는 기색이었다. 정확히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문경은 크게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새삼 생각해보니 여러 가지 이유가 있더군요. 그 사람이 진심으로 후회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제가 여러모로 여유가 생겨서기도 하고, 또 그 사람이 당신 형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리고...."

서문경이 아이처럼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무엇보다 당신이 좋으니까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죄책감에 가만히 미간만 찌푸리고 있던 황제의 표정이 순간 멍하게 변했다. 무어라 했누? 잘 듣지 못했다는 듯이 황제가 묻자, 그새 골똘히 생각에 잠긴 서문경이 입 속으로 중얼중얼했다. 사실 그런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서문경이 납득한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음 황제 쪽을 보았다.

"맞아요. 역시 사랑하는 것 같아요."

당신이 좋아요. 서문경의 말을 들은 황제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인형처럼 천천히. 천천히 눈만 깜빡였다. 그런 그의 곁에 서문경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앉았다.

"저도 폐하가 좋은 것 같습니다."

"......."

"늦게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서문경이 황제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황제의 손가락이 서문겸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단단히 깍지를 꼈다. 두 손이 본디 하나였던 것처럼 단단히 겹쳐졌다.

그렇게 손을 마주한 채로 황제의 몸이 서문경을 향해 기울어져 결국 두 사람의 입술과 입술이 마주쳤다.

등이 밝혀진 창 밖에서는 어느새 가랑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히든트랙.

유난히 날이 좋았다.

사람의 얇은 피부에는 조금 따갑게 느껴질지도 모르겟지만 문위 효영의 말랑말랑하지만 두꺼운 가죽에는 딱 좋은 햇볕이었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자리에 널찍한 방석을 두 장이나 깔고 앉아 햇빛을 받고 있다가 효영은 문득 몸을 뒤척였다. 아쉬운 기분이 들어서 몸을 뒤집어 보았지만 그래도 뭔가 부족했다. 여기 말고.....

곧 문위 효영은 지금 있는 곳보다 더 볕이 잘 드는 자리를 기억해냈다. 볕과 바람이 모두 잘 드는 곳이라면 신우전 석류방 같은 곳이 또 없다. 효영은 멍하니 강철색 눈을 깜빡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석류방 꽃창가에 몸을 동그마니 말고 낮잠을 자고 있노라면, 창에서 드는 볕은 따스하고 부는 바람은 시원하면서도 달콤하니 낙원이 부럽지 않다. 

어찌 할까, 효영의 긴 꼬리 끝이 느릿하게 좌우로 흔들 흔들거렸다.

결국 흰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던 새끼용은 몸을 일으켰다. 대보부인과 현상궁 등이 각각 주렴 밖과 장지문 밖을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으나 사실 그들의 눈을 피해 바깥나들이를 나가는 것은 새끼용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현상궁과 대보부인을 대동하고 신우전에 가도 되는 일이기는 했지만 그리 하면 나중에 들을 말이 있으니 그러기는 꺼려졌다. 

'의젓해지셔야지요.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국저가 아니십니까?' 새끼용이 신우전으로 걸음하는 날이면 현상궁이나 대보부인이 늘 그렇게 새끼용을 타일렀다.

부모자식 간에 사이가 좋은 것은 무척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응석을 부리는 것은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네들 말에 의하면 사사로이는 부모자식간이기는 하나 현 황제와 그 처자처럼 황실 식구들이 여염집 사람들 마냥 자주 얼굴을 마주하며 친밀히 지내는 것은 드문 경우라 했다. 

그 말을 듣고 새끼용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참 황자도 못해먹을 짓이다.

아바마마께옵서 황제를 그만두시면 늘 함께 밥을 먹고 늘 함께 낮잠을 자고 늘 함께 팽이치기를 할 수 있는 걸까? 솔깃하기는 했지만 새끼용은 곧 안 될 일이다 생각했다. 딸린 식구가 벌써 셋이나 되니까. 어서 내가 자라서 일을 해야지. 새끼용은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새끼용이 무럭무럭 자라서 편식이 심하신 어마마마와 유난히 많이 먹는 아우를 벌어 먹일 수만 있게 되면 아바마마께서도 황제를 그만두시고 다들 한 방에 누워서 잘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단 사람으로 변해야 일을 할 수 있을 터인데..... 그 생각을 하니 조금 우울해져서 새끼용은 일단 방석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대보부인과 상궁, 나인들의 눈을 피해서 태백궁을 빠져나왔다.

몰래 궁을 빠져나와 편전이나 침전을 찾아가면, 그 때마다 새끼용의 몸길이보다도 높이 종이 두루마리를 쌓아두고 손에는 커다란 용 모양 도장이나 붓 따위를 들고 계신 아바마마는 피식 피식 바람 새는 소리를 입으로 내면서 웃곤 하셨다.

'용인의 힘을 그딴 데에 쓰는 것은 우리 아드님과 우리 서부인 외에는 없으실 게다.' 그 말을 들으면 새끼용은 무척 기뻤다. 뜻은 잘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어마마마와 닮았다는 이야기는 듣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헌데 오늘은 아바마마께서 편전에 계시지 않았다. 정전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가, 새끼용은 비로소 깨달았다. 요새 여름이 한창인지라 해가 빨리 뜨기는 하지만 아직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아마도 아바마마께서는 신우전에 어마마마와 함께 계실 것이다. 행선지를 정한 새끼용은 부지런히 기었다. 그는 길에 두 분 폐하를 드리려고 제비꽃도 두 송이 꺾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었다. 창을 통해 들어가려고 창 바깥쪽 좁은 턱에 톡 튀어 오른 새끼용은 바로 그 안의 사람들이 한창 바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마마마께서 태백궁에 새끼용이 풀어 놓고 키우는 괭이처럼 목을 카르릉거리고 계시었다.

또 아바마마께옵서 힘든 일을 하고 계시는 걸까? '짐이 무엇을 하느냐고?' 언젠가 새끼용이 아바마마께서는 무엇을 하시는 분이냐 여쭈었을 때 아바마마께선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어미 비위를 맞추면서 우리 아드님 아우들을 잔뜩 만드는 일을 하지.' 새끼용이 그럼 매일매일 산처럼 쌓아두고 보시는 종이와 대나무는 무어고 또 왜 까마득히 이른 시각부터 사방이 시커매지는 늦은 시각까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왕설래하시는 거냐 물으니 아바마마께서는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네 어미가 성을 내니 어쩔 수 없다 대꾸하시면서 한숨을 푹 쉬셨다.

그러면서 아바마마께서는 언젠가 어여쁜 누이동생을 안겨 주리라 새끼손가락을 새끼용의 앞발에 걸며 약속을 해주시었다.

금일에도 열심히 일하시는구나. 새끼용은 생각하며 다소 숙연한 마음이 되어 창가에 제비꽃을 놓아두고 걸음을 돌렸다.

석류방 창가에서 자려는 목적이 불발에 그쳐 그대로 태백궁으로 돌아갈까 했지만 날도 바람도 유난히 좋아서 새끼용은 잠시 산보를 해보기로 했다. 그러다 도중에 참매미를 선물로 잡아서 아우의 거처인 도회전에도 들렀다.

아우는 아직 곤히 잠에 빠져 있었다. 어마마마에게 칭찬을 받을 목적으로 항상 열심히 학문을 익히고 있는 아우가 대견하여서 새끼용은 본래 선물하려고 했던 참매미에, 새로 잡은 거미까지 더해서 그것을 아우의 머리맡에 두고 도회전을 나왔다.

거미는 익충이니 여름철 사람을 귀찮게 하는 모기나 초파리 따위를 잘 잡아 줄것이다.

새끼용이 나오기 직전에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몸을 뒤척뒤척하고 있던 아우가, 꽥 고함을 지르는 것 같은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지만 새끼용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여기고 계속해서 가던 길을 갔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아직 해가 다 떠오르지 않았다. 아침상을 받을 때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았다. 새끼용은 해화원에 걸음하기로 결정했다. 

이전에 -아우님이 태어나기 전에- 새끼용이 종종 어마마마와 함께 산보를 다닌 적이 있는 해화원에는 희귀하고 어여쁜 꽃들이 많았다.

새끼용은 오늘 거기 꽃을 몇 송이 꺾어다 화관을 만드는 것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발가락이 짧고 발가락 사이에 얇은 막이 달려서 생각대로 발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지만 얼마 전에 꽃으로 반지를 만드는 것에 성공했으니 어쩌면 관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꽃관을 두 개 엮어다 두 분 마마께 선물해 드려야지. 이토록 이른 시각부터 열심히 일하시던 제 아비와 어미를 애틋한 마음으로 떠올린 새끼용이 가던 방향을 해화원 쪽으로 틀었다.

그러나 무릇 아이의 집중력과 기억력이란 박지마냥 얄팍하기 짝이 없고, 그와는 정반대로 호기심은 터질 듯 부푼 봉숭아 열매 같은 법이라서 새끼용의 결의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참 해화원으로 가던 도중. 새끼용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던 탓이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자갈이 길가에 놓여있는 줄만 알았다. 허나 시야끝에서 다색을 띤 자갈이 꼼틀꼼틀하더니 갑자기 지면 밑으로 쑥 사라지는 것을 보고 새끼용은 어어, 하고 그 쪽을 향하여 살그머니 다가갔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오보록한 가시덤불안에 구멍이 나 있었다. 아까 그것이 이 안으로 들어갔나 싶어서 새끼용은 구멍 안으로 앞발 한 쪽을 들이밀었다. 구멍은 작았지만 그럭저럭 새끼용이 들어갈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새끼용이 앞발을 집어넣자마자 딱딱한 것이 새끼용의 앞발을 앙칼지게 할퀴었다. 아야. 새끼용이 깜짝 놀라 앞발을 빼내자 조금 전 새끼용의 앞발을 할퀸 것이 분명한 것까지 구멍 바깥으로 따라 나왔다.

삽 모양으로 생긴 넓은 발톱이 다섯 개의 발가락에 붙어 있었다. 짐승의 앞발. 새끼용은 앞발을 뻗어 구멍 안에서 뻗어 나온 앞발을 턱 덮쳤다. 새끼용의 것과 달리 짙은 금갈색 털에 뒤덮여 있는 앞발이 꿈틀했다.

그 앞발을단단히 누르고 새끼용은 주둥이를 거기에 가져다댔다. 몹시 안 좋은 냄새가 났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체 뭘까. 궁금해진 새끼용은 구멍 안으로 들어가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먼저, 도망치려고 버둥버둥 거리는 앞발을 일부러 놓아주었다. 그러자 앞발이 후다닥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그 밑에서 흙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치는 것이 분명한 그것을 쫓아서 새끼용은 구멍 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흙 속은 대단히 깜깜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새끼용은 눈이 좋았다. 바로, 달아나는 짐승을 뒤따라가 등을 콱 짓눌렀다.

끽 소리를 내며 작은 짐승이 바닥에 짓눌렸다. 새끼용은 작은 짐승을 살폈다. 몸이 둥글고 오동통한 작은 짐승은 거기에 달린 네 다리와 꼬리도 짧았다. 뽀족한 머리를 살폇다. 

눈이 무척 작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바로 앞에 있는 새끼용조차 보이지 않는 모양이엇다. 작은 짐승이 짧디짧은 네 다리를 허우적거리면서 깩깩깩 울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새끼용은 작은 짐승의 등을 누르고 있던 앞발에서 조금 힘을 뺐다. 새끼용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뜻을 알아들었다고 여긴 건지 작은 짐승의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살려주세요! 제게는 일곱 마리나 되는 새끼가 있어요! 그 말에 새끼용은 와, 하고 주둥이를 벌렸다.

일곱이나. 대단하다. 아바마마가 이루신 일의 두 배도 넘게 이뤘어. 황제가 들으면 꼬리를 잡고 빙빙빙 돌리고도 남을만한 생각을 하면서 새끼용은 감탄했다. 새끼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가 없는 작은 짐승은 그 사이에도 계속해서 애원을 하고 있었다.

살려주시면 좋은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딴생각에 빠져있던 새끼용의 눈이 번뜩 뜨였다. 좋은 것이라면, 안에 무지개구름이 떠 있는 커다란 조개껍질일까?

새끼용은 주둥이를 뻐끔거렸다. 하지만 작은 짐승은 새끼용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새끼용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대부분의 생물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정작 새끼용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이는 거의-정확히는 새끼용의 부친 외에는-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새끼용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는 것에 작은 짐승은 더더욱 겁을 먹고, 자신이 말한 '좋은 것'이 얼마나 길고 얼마나 매끈하며 또 얼마나 감칠맛이 있는지 격정적으로 설명했다.

이겁니다! 하고 작은 짐승이 파바박 구덩이를 파서 내놓은 것을 새끼용은 우울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새끼용의 몸통만한 기다란 선홍빛 지렁이가 덩어리로 엉켜 있었다.

새끼용은 매미는 좋아했지만 지렁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미끌미끌하기 때문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새끼용이 실망한 기색은 전해졌는지 작은 짐승이 필사적으로 땅을 팠다. 큰 지렁이. 중간 지렁이. 짧은 지렁이. 매미의 유충등이 땅 속에서 나왔다.

잠깐만. 그러다 문득 새끼용이 작은 짐승을 말렸다. 저 작지만 세고 포악한 짐승이 만족할만한 지렁이가 나올 때까지 굴을 파고 있던 작은 짐승이 주춤했다.

새끼용이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작은 앞발이 어딘가를 탁 짚었다. 땅 속에 묻혀있던 작은 항아리가 작은 짐승의 손톱에 걸려 반쯤 굴 위로 드러나 있었다. 새끼용은 항아리 속에 앞발을 넣어 그 안에 담긴 것을 하나 꺼냈다.

옆으로 동그랗고 위아래로 납작한 금속은 온통 예쁜 개나리빛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콱 개물어보니 조금 무르기는 했지만 이만하면 실과 진주로 꿰어서 목에 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새끼용은 뒤늦게 자신이 화관을 만들러 가던 길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화관을 만드는 대신 항아리 속의 물건을 두 개 꺼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왜인지 조금 머뭇거리다가 결국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물고는 몸을 돌렸다.

작은 짐승은 얼떨떨해하는 듯 보였다. 그런 것으로 괜찮으신가요? 새끼용은 머리를 끄덕끄덕하고는 작은 짐승이 파 놓은 굴을 반대로 기어 나가기 시작했다.

작지만 포악한 짐승의 손아귀에서 겨우 벗어난 작은 짐승. 두더쥐가 황급히 새 굴을 파서 도망치면서 생각했다. 지렁이보다 저런 게 좋다니 눈만 컸지 머리는 별 쓸모가 업나보다.

굴을 빠져나온 새끼용은 바로 신우전으로 향했다. 석류방에는 아바마마는 안 계시고 어쩐지 잔뜩 뿔이 난 듯한 어마마마뿐이었다. 

또 아바마마께서 이상한 소리를 하신 모양이다. 새끼용은 생각하면서 창틀로 올라가 장지문 위를 주둥이로 콕콕 찍었다. 그 소리를 들은 어마마마께서 창문을 열어 주셨다.

"오늘은 좀 늦으....."

말을 하다 말고 어마마마께서 멈칫하셨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상대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끼용은 물었다. 그 때문에 주둥이에 물려 있던 것이 떨어져 또그르르 바닥을 굴렀다.

그것 중 하나를 집어 드신 어마마마께서 중얼거리셨다.

"금이다."

그런 다음 새끼용이 했던 것처럼 이로 그것을 깨물어 보기도 하셨다. "말도 안 돼. 진짜잖아."

새끼용은 열심히 설명했다. 어마마마와 아바마마와 또 제영이 것까지 주워왔어요. 목에 걸거나 두루마기에 달면 예쁠지도 몰라요. 그러면서 새끼용은 납작하고 둥글고 적당히 딱딱한 것 하나를 주둥이 끝으로 물어서 제 어머니의 앞에 툭 떨어뜨렸다.

나 주는거냐? 어마마마께서 물으시기에 새끼용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어마마마는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물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하셨다. 마음에 안 드시는 것일까. 새끼용이 조금 불안해질 무렵. 어마마마께서 불현듯이 그 물건을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 사이에 끼워 눈높이까지 들어올린 다음 비어 있던 다른 한 손을 불끈 움켜쥐었다.

"이제야 가마 삯을 갚을 수 있겠다. 이게 웬 횡재냐....!"

어, 그게 아닌데 싶었지만 기분이 좋아진 그의 어미가 자신을 무릎에 올려놓고 삭삭 쓰다듬어 주자 새끼용의 생각은 '이게 아닌데'에서 '아무려면 어떠냐'로 변했다.

사실 땅 속 항아리에는 아직 저것과 똑같은 물건이 새끼용의 네 발 발가락을 다 합친 것보다도 많이 남아 있고.

햇빛을 받으며 따뜻한 무릎 위에 누워있자니 슬슬 잠이 와서 눈꺼풀을 천천히 닫다가 새끼용은 꽃창에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발견했다.

상아를 깎아 만든 납작한 그릇에 반쯤 물이 담겨 있고 거기에 천자(엷은 보라색)색 제비꽃이 두 송이 꽃혀 있었다. 새끼용이 아까 창가에 두고 갔던 그 꽃이다.

기분이 더 좋아졌다. 내일은 오늘 만들려다 못한 화관을 만들어야겠다..... 새끼용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쩍 주둥이를 벌려 하품을 했다. 길고 하얀 꼬리가 춤이라도 추듯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리고 그 날, 남장군 화성광은 외궁 외진 곳에 부친 화연백 몰래 묻어 두었던 비자금을 도둑맞는 비극을 겪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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