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歸鄕)
한 때는 다음 대 황제로까지 거론되며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에까지 올랐었던 치백 서현이 몰락의 길을 걸은 것은 그의 부친인 진화 서엽이 역모죄를 꾸민 것이 만천하에 알려지고 나서부터였다.
서현이 직접 역모에 참여했었는지, 또 자신의 아비가 역모를 꾸미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었으나 이미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만조백관이 태정제의 앞에 엎드려 서현과 서엽 부자를 극형으로 다스리고 그 목을 잘라 성 앞에 걸어 국법의 지엄함을 세울 것을 간언하였으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엽과 서현 부자는 옥에 갇혔고, 태정제는 두 사람에게 내릴 벌을 고심했다.
허나 정작 역모죄를 주도한 서엽은 벌이 정해지기도 전에 탈옥하여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고, 서현만이 벌을 받았다. 군석도로의 유배. 어느 누구도 그가 살아서 섬을 나올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허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건제(태정제 때의 연호) 18년 3월. 서현은 해배(귀양을 풀어줌) 되었다. 군석도로 유배된 지 10년이 되던 해였다. 일각에서 그의 해배를 반대하는 여론이 일었으나 그 또한 곧 잠잠해졌다.
신룡인 현 황제와 일찍일찍이 용의 증후가 뚜렷하게 나타난 두 명의 황자까지, 예 황실이 유례없이 든든한 반석에 올라 있었던 덕이었다.
삼 월 열사흘 날. 서현은 군석도를 나왔다. 늙은 청노새 한 필과, 그 좁은 등에도 무리 없이 지울 수 있을 만큼 작은 보따리 하나가 그에게 딸린 것의 전부였다. 군석도를 지키는 감시관이 파도와 절벽이 부딪치는 자리에 노송처럼 서서 군석도를 떠나는 서현의 두시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바위를 문 파도가 포말이 되어 사라지기 전에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 버렸다.
고삐를 잡은 손이 일월 나뭇가지처럼 말라 있었다. 거칠어진 손등에 다 닳은 가죽 고삐가 쓸려 사박사박사박 모래사장을 차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펄럭거리는 낡은 옷은 서현의 몸에 한참이나 컸다.
그가 예전에 입던 옷인 것을 생각하면, 군석도에서 지낸 십 년의 세월이 얼마나 고되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단정히 정돈했지만 초라함을 다 감출 수는 없는 머리카락과 윤기를 다 잃어버린 피부. 거스러미가 인 입술과 얄팍해진 몸피, 바짝 마른 목덜미, 손등과 손 발목...., 예전의 그를 알고 있었던 이라면 그 누구도 지금의 그의 모습을 보고 서현이라는 이름을 떠올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전의 서현이 멀리 있는 설산처럼 고고하고 위엄스러운 풍모가 있었다면 지금의 그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림 속의 검정 학에 가까웠다.
온통 새하얀 눈세계에 홀로 서 있는 마른 학. 며칠을 굶은 것인지 몸은 바싹 말라 있고 털은 거칠었지만 눈빛만은 깊은 물처럼 잔잔하다.
서현의 걸음이 느려졌다.
문득 의문이 던져졌다. 자신이 벌써 군석도에서 나올 자격이 되는 자인가. 애초에 서현이 각오한것은 평생을 뭍에 나가지 않고 군석도에서 사죄하며 지내는 것이었다. 허나 미망에 사로잡혀 그 각오마저 잊고 목숨을 버리려 했었던 때. 그에게 던져진 동아줄이 그를 심해에서 끌어올렸다.
그렇지만 고작 십 년은 너무 빨랐다. 그 생각에 서현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저지른 죄와, 그에 주어지는 벌의 무게는 그리 단순하게 책정되지 않는다. 죄를 저지른 자와 피해를 입은 자. 그리고 '하늘'은 그 모습을 지켜본다. 죄를 저지른 이가 진심으로 뉘우치거나 혹은 피해를 입은 자가 죄를 저지른 이를 용서하고 그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해도 '하늘'은 인과의 무게를 완전히 거두어주지는 않는다.
또한 지상에서 죄의 무게를 완전히 씻지 못하고 온 자는 죽은 후 지상에서 겪었어야 했던 고통보다 갑절은 혹독한 고통을 겪거나, 혹은 그 다음 생에 풀어내지 못한 인과 이상의 업을 짊어지고 생을 시작해야 한다.
그 법칙을 하늘을 엿볼 수 있는 힘을 가진 황제도 또 한 때 힘을 가졌었던 서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자신을 크게 벌 하여주십사 청한 서현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범부로 돌아간 서현은 자신이 진 인과가 어느 정도 남아있는지 알 수 없었다. 허나 황제는 알 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황상의 명을 반가이 받잡는 것이 백 번 만 번 옳은 일이었으나.....
"......."
서현은 사실 납득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진 죄에 비하여 자신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그리 무겁지도, 길지도 못했다.
또한 해배장을 받잡은 이후 서현의 가슴과 머리는 불안감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또 한 번 자신이 미망에 빠진 것은 아닐까. 해친 이가 뉘우치고 피해자가 용서한다고 해도 이미 지은 죄는 사라지지 않으나, 그렇지 않은 것보다 갚아야 할 죄의 무게가 어느 정도 가벼워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서현이 한번 죽였었던 수객은 서현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허나 서현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 때의 일 이후...., 서현은 자신의 뱃속에서 단단히 응어리져 있던 것이 풀어지는 것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희생시켜 온 이들에게 죄스러웠으나 그는 그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스스로를 옭아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 자해를 하거나 자살을 하는 것보다는. 그렇지만,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해배장을 받고 보니 의심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엄격해봐야 또 미망에 사로잡힐 뿐이다. 그것을 핑계 삼아 나는 나를 조금씩 용서해 온 것이 아닐까.
그 때 고삐가 단단하게 당겨졌다. 서현이 걸음을 늦춘 이후 줄곧 반걸음 정도 서현보다 앞서 가고 있던 노새가 멈춘 것이다. 서현은 머리를 들고 늙은 노새의 머리를 보았다.
나이가 들어 푸른 털에 납빛이 도는 노새의 표정은 짙은 피로감에 잠겨 있었다. 그 눈빛이 익숙했다. 서현 자신의 표정이 그러하니.
".....누구보다도 네가 고생이었구나."
이 늙은 노새는 서현이 기르던 말에게서 난 천덕꾸러기였다. 벼슬길에 올라 있었던 시절 서현이 타던 말은 하루에 능히 천 리를 가는 것으로 유명한 말이었다. 허나 유배지로 오면서 서현은 원래 타던 말 대신 어린 노새를 끌고 군석도로 들어왔다.
죄인의 몸으로 예전에 누리던 것들을 그대로 누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얼마나 짧은 생각이었는지.
"네게 딱히 해준 것도 없었으면서 고생만 시켰다.
서현은 노새의 코를 가만히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다. 군석도로 들어올 때는 제 흥을 이기지 못해 깡충깡충 토끼마냥 뛰어다니곤 하던 어린 노새가 이제는 걷는 것마저 힘겨워하는 늙은 노새가 되어버렸다.
새끼 오리처럼 자신을 신뢰하며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연기처럼 흩어지고, 이제 자신의 곁에 남아있는 것은 이 늙은 노새 한 마리뿐이거늘 자신은 이 충성스러운 노새에게 해준 것도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 초라한 범부일 뿐이었다.
"나 말고 다른 좋은 주인을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조용히 덧붙인 서현은 문득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느끼고 노새를 재촉했다. "바람이 차지겠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힘을 내 주려무나."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사흘에 한 번 뭍으로 가는 배가 들어오는 곳이었다. 뭍으로 나가 그는 그대로 북쪽으로 갈 셈이었다.
서현은 늙은 노새를 한 번 보고 고삐를 쥔 자신의 손에 시선을 옮겼다. 의주까지 견딜 수 있을까. 더 고생을 시키느니 차라리 여기서 놓아주고 혼자서 외주까지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허나 다른사람에게 맡겨도 과연 일을 시킬 수도 없는 이 늙은 노새를 맡아 잘 보듬어 줄 이가 있기는 할지.
하지만 자신이 이 녀석을 의주까지 데려간다손 쳐도 문제는 있었다. 서현의 목적지는 의주, 정확히는 의주와 남경의 사이에 있는 산인 낙준산이었다. 즉, 서현은 여생을 탈옥한 자신의 아버지 서엽을 찾아 헤맬 셈이었다.
그래서 노새를 데려가는 것이 서현은 꺼려졌다. 서엽의 흔적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낙준산에서 서엽을 찾을 수 없다면 자신은 하염없이 나라를 헤매어야 할 테고, 만에 하나 거기서 살아 있는 서엽과 맞닥뜨린다면.
"....사실 자신이 없다." 서현은 조용히 털어놓았다. "그 이가 대다난 술사라는 문제는 차치한다 하더라도, 그의 궤휼(간사스럽고 교묘함)함을 내 어찌 당해 낼지, 온전한 상태에서도 당해내지 못했으니 지금의 내 상태론 가능성이 너무나 낮다."
서현은 한숨을 삼키며 마음을 정했다.
"끝의 끝까지 나 같은 작자의 명운에 휘말려 험한 꼴을 당하는 것보다는 혹여 있을지도 모르는 요행을 바라는 것이 낫겠다."
그렇게 말하고서 서현은 기운 없이 웃었다. '나와는 달리 너는 죄지은 것 하나 없이 살았으니 용님이 계시다면 네게 좋은 주인을 점지하여 주시겠지.' 결론을 내린 서현은 뭍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노새를 맡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돈을 받지 않고 넘기는 대신 여생을 편안히 보내게 해달라 간곡히 청하면 들어줄 마음 좋은 사람이 있을 지도 몰랐다.
고민하는 사이 벌써 나룻배가 들어와 있었다. 노새를 보고 싫은 낯을 하는 사공에게 돈 될 만한 것을 모조리 털어주고 배를 탔다. 그리고 곧 뭍에 도착했다. 서현이 노새를 데리고 배에서 내리자마자 뱃사공은 창루로 사라졌다.
사공이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들으면서 서현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때 나루에 사람을 가득 채운 나룻배 두 척이 당도했고, 그러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나루터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중 몇몇이 뭍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서현을 깡마른 어깨로 밀치고 지나갔다. 다른 배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던 서현이 피하지도 못하고 몸을 비틀거렸다.
눈앞이 핑 돌아 머리를 숙이고 있으려니, 바쁘게 주위를 지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쑥 손 하나가 뻗어왔다.
"그 노새 파시는 겁니까?"
유난히 큰 손이 굳은살이나 자잘한 상처 하나도 없이 고와 고생 없이 자란 자인가 보다 생각하고 있으려니 그렇게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현은 머리를 들었다. 늙어서 비실거리는 노새에 눈독을 들일 이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물음 자체도 뜻밖이었지만 그것보다도.
".....!"
서현이 눈을 크게 떴다. 눈동자가 멍하게 풀어지고 파르스름한 흰자위가 파르르 떨렸다. 생각지도 못한 것을 봤을 때 나타나는 그런 반응이었다. 서현의 입술이 열렸지만 거스러미가 잔뜩 인 초라한 입술은 계속해서 달짝거리기만 할 뿐 어떤 말도 뱉어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손에서 힘이 풀린 모양이다. 서현이 고삐를 놓자, 노새가 타박타박 앞으로 걸어갔다. 누군가가 손을 뻗었고 노새가 그 손에 이마를 비볐다. 누군가가 별 희한한 일도 다 봤다는 듯이 말했다.
"노새는 커녕 개나 고양이도 지저분하다 손도 대지 않으시는 분께서 웬일이십니까."
"노새라니?" 노새를 쓰다듬고 있던 손의 주변이 반문했다. "이것은 한낱 짐승이 아니라 세상에 둘도 없는 충복이니, 또 형님을 충성스레 보필해온 이를 아우된 자가 어여삐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앞서 말한 이가 이기죽거린 후에야 서현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그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하.'
"어찌하여, 이런 곳에."
"그것은 형님이 아니라 제가 할 말이 아닙니까." 손의 주인, 제안이 서현의 손을 끌어다 그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어디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죄 값을 다 갚는 날 돌아와 주시겠다 말씀하신 것은 형님 아니셨습니까?"
"......."
"낙준산으로 가셔도 소용없습니다."
제안의 말에 서현이 화들짝 놀랐다. 그 곁에 서 있던 호릿한 청년이 혀를 찼다.
"왜 굳이 고생을 사서 하시는지. 설사 낙준산까지 무사히 도착한다손 치더라도 서엽 그 자가 아직까지 낙준산에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평생 그 자 뒤를 쫓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마치 자신의 속을 읽은 듯한 말에 서현은 내심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눈앞에 있는 청년에게 그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고, 눈이 있어도 감히 바라볼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태도에 청년은 더 부아가 치민 듯 했다. 청년이 말했다. '고개 드세요. 이제 못 볼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서현은 대답했다.
"소인은 아직 죄값을 충분히 치르지 못했습니다."
"해배장을 받았으니 군석도가 아니라 여기 계신 것 아닙니까."
"설사 옛 죄의 무게는 사라졌을지도 모르나 새 죄의 무게는 아직 소인의 어깨에 남아 있음입니다."
그 말에 청년이 멈칫했다. 도대체 서현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서현은 고백했다.
"인과를 읽어낼 줄 아시는 분께서 유배를 풀어주신 것은 소인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끝이 났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소인은 새 죄를 얻었습니다. 염치도 모르고 스스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인 죄. 이제 소인은 그 죄 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해서 소인은 두 분 폐하께서 잉편하실 수 있도록 큰 근심거리를 쫓으며 여생을 보내려 합니다."
서현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청년이, 서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허, 하는 소리를 냈다. '무슨 말을 하시나했더니.' 청년이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근심거리를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해주려 하시고 계셨군요. ...보십시오. 서엽 그 작자가 저 인간에게 위협거리씩이나 될 것 같습니까? 외려 당신 쪽이 더 큰 위협거리입니다. 걱정이 되어 내도록 좌불안석이거든요.
지금도 그런데 당신이 서엽을 쫓는답시고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뾰족하다 못해 공격적이기까지 하던 청년의 말투가, 한바탕 쏘아댄 뒤에 돌변했다.
"사실 당신 짐작이 맞습니다. 당신이 스스로에게 유해졌기 때문에 짐이 덜어진 것이 맞아요. 하지만 그것이 왜 죄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야 겨우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다시 세상을 살아줄 마음이 생긴 것 같다고 기뻐했었는데 아닌 겁니까?"
그러지 마세요. 흐린 낯을 하고 말한 청년이 노새의 고삐를 잡았다.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당신이 혼자서 죄 값을 갚는 것이 아니라 저희들과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안이 조용히 서현의 의향을 물었다. "저는 형님을 모시고 돌아가기 위해서 왔습니다. 허나 끝까지 형님께서 아우와 함께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면 그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 청년도 제안도 그런 서현을 재촉하지 않았다. 서현이 되도록 깊이 생각하고, 후회가 남지 않는 선택을 하도록 하고 싶은 것이리라.
하지만 서현은 사실 아무런 생각을 하고 있지 못했다. 감정이 불쑥 밀물처럼 치밀어 올라 넘치려 하고 있었다. 감정이 생각을 압도하여 어떤 이성적인 판단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이 결론을 내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허나. 허나.
그때 청년이 입을 열었다.
"제게도 형이 있습니다. 제가 없어지고 몇 년 간을 폐인처럼 살았지만 이제야 형은 저를 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는 쓸쓸했지만, 그 이상으로 기뻤습니다. 형이 언제까지고 저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아팠었노라고, 청년은 털어놓았다.
"앞으로 형에게 있는 모든 즐거운 일과 슬픈 일과 행복한 일들에, 저는 함께 할 수 없으니까요. 형이 괴로워해도 위로해줄 수 없고, 형이 힘들어해도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습니다. 또 형의 행복에 저라는 항목은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지만 결코 함께 걸을 수는 없다.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며 손잡을 수 없다.
청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 이기심에 불과하지만, 저는 제게 소중한 사람이 저와 같은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뒤에서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걸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무엇을 정말 하고 싶으신 것인지 말씀해주십시오.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은지."
서현은 침묵했다. 청년의 물음이 잔잔한 바다에 던져진 낚싯바늘처럼 서현의 가슴을 뚫었다. 따끔. 하는 통증이 일었다. 거기에서 꾹꾹 짓눌러두고 버려두었던 생각이 조금씩. 조금씩 새어나왔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나는.
"....."
나는.
서현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청년의, 서문경의 손에서 노새의 고삐를 받아들었다. 제안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면서 서현은 말했다.
"참으로 몰염치한 생각이나...., 유배지에서 남 몰래 품었던 희망이 있었습니다.
끝없이 밀려들었다 사라지고, 다시 밀려드는 잔파도를 보며 했었던 생각이었다. 더 이상 미망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하여 시작한 생각은 곧 터질 듯 부푼 희망이 되었다.
그 얼마나 가슴 떨리던 상상이었던가.
"다복다복 돋은 풀밭이 푸르른 후원을 맨발로 걷고, 물꽃이 피는 개울 기슭에 다리를 걷고 앉아 가재와 피라미를 잡고, 때때로 한 상에 마주앉아 책을 읽고, 먹을 갈며."
예전에 그리하였던 것처럼.
"안이 너와, 헌영이와. 또 혜야 그 사람과 다시 벗으로 돌아가서. 또 내가 죄를 지은 저 이와 새로이 사귄 벗이 된 것 마냥. 또 안이 너와 저 이 사이에서 난 어리로운 아기씨들과. ...그리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더랬다. 그런 희망을 품었었더랬다.
서문경이 조용히 대꾸했다.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웃고 있었다. "분명히요."
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멈춰 있던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문경이 앞서 걷고 그의 한 손을 잡은 제안과 노새의 고삐를 잡은 서현. 마지막으로 늙은 노새가 걸었다.
희번하게 날이 밝아왔다. 저 멀리서, 양손에 어린 사내아이 둘의 손을 잡은 엄헌영이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우전 안으로 막 들어가고 있던 엄헌영이 주춤 걸음을 멈췄다. 맞은편에서 긴 행렬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 탓이다.
사람 열댓 명은 거뜬히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대산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흰 비단에, 검푸른 실과 황금빛 실로 연잎과 구름을 감은 구조룡(발톱이 아홉 개인 용)을 수놓은 저 대산은 얼마전 주하(여름) 용으로 새로 만든 대산이었다.
법도는 대충 무시하고 순전히 누군가의 취향대로 만든 저 대산의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도안만이라면 엄헌영도 질릴 만큼 봤었다.
보기만 했다 뿐이랴, 도안이 점령한 책상 위에 팔을 괴고 앉은 '누군가'가 '자기 양산을 왜 나보고 제작하래, 분명 자기는 일하는데 나는 노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게지'하고 투덜거리는 것을 들은 적도 있었다.
엄헌영은 길가로 물러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오체투지를 취했다. 행렬이 이윽고 엄헌영의 바로 앞까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껏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줄곧 보고도 못 본 척 해왔으니 이번에도 그대로 지나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엄헌영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는 좀처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리를 들어 보아라."
한 술 더 떠 그리 명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엄헌영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허나 머리를 안 들 수도 없었다. 엄헌영이 머리를 들고 올려다보자, 대산 아래에 선 황제가 씩 웃었다. 누군가 했더니, 그대였나.
"나는 또 내 비의 처소에 웬 사내놈이 들어오나 했지. 잘됐구나, 본디 내전에는 여인과 고자 외에는 들어올 수 없는 것이 법도인데 멀쩡한 사내가 그것을 깜빡하고 들어왔다면 내 정친히 잘라서 보내 줄 셈이었는데."
"....법도를 무시한 결정체를 여봐란 듯이 들고 산보 나오신 분께서 그 입으로 법도를 논하시니 소신 무어라 상답을 올려야 할지."
"아, 이것 말이냐?" 히죽대며 위협하던 황제가 바로 돌변하여 대산을 엄헌영이 잘 볼 수 있도록 각도를 달리하여 들게 했다.
"괜찮지 않으냐? 우리 큰아드님 가죽 같은 바탕색에 영이 비늘색 닮은 실로 수를 놓았단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는데. 그렇게 생각했다가 엄헌영은 곧바로 생각을 바꿨다. 하기는 이미 나라 안에 소문이 파다한 애처가인데 거기에 자식 자랑 팔불출 소리를 더 들은들 뭐가 달라질까.
머릿속으로 그 따위 생각이나 하고 앉아있는 엄헌영에게 황제의 물음이 떨어졌다.
"헌데 외당숙께선 여까지 무슨 일이신가?"
"난전 마마를 배알코자 하옵나이다."
"안 됐구나. 황후는 지금 신우전에 없다."
하하하. 엄헌영이 헛걸음을 한 것에 잔뜩 신이 난 황제가 소리까지 내어 비웃었다. 그런 황제를 엄헌영이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보다가 물었다. '황상께서도 신우전에서 나오시던 참이 아니옵니까?' 그 물음이 던져지기가 무섭게 황제의 웃음소리가 딱 멎었다.
그러더니 그가 투덜거렸다. 대산이 완성되었기에 보여주려고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왔더니 이놈이.
"어디로 가셨는지 황상께선 아십니까?"
엄헌영은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고 관성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일어나라는 손짓이 돌아왔다. '일어나서 신우전 후원이나 함께 돌아 보세나. 신우전 후원은 그야말로 천하일품이니.' 그 말을 듣고 저 작자가 약을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엄헌영을 무시하고 황제가 궁인들을 뒤로 물렸다.
"내, 외종숙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조금 떨어져서 걷도록 하라."
그 명에 따라 상궁, 나인들과 환관들이 물러나자 황제가 엄헌영에게 다시금 손짓을 했다. 떨떠름한 기분을 다 지우지 못한 채로 엄헌영은 엎드린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뒤를 따랐다.
"백운동에 갔느니."
엄헌영이 주춤했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 황제는 미간을 지긋이 구기고 있었다.
"두 황자까지 데리고 갔다 한다. 다른 이들은 그저 산보를 나갔다 알고 있지만 짐까지 속일 수 있을 리가 있나."
"백운동이라면...." 엄헌영이 황제처럼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말을 꺼냈다. "희 형님을 만나러 가셨다는 말씀이십니까?"
해배된 후 원경으로 돌아온 서현이 거처로 정한 곳은 원경을 둘러싼 성벽 북문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백운동이었다. 황궐이 원경 한 중앙보다 다소 동쪽에 있으니 아예 극과 극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아주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너무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아도, 또 아주 먼 곳에 자리를 잡아도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니 어쩌면 현명한 처사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서현의 그런 결정을 황제는 몹시 탐탁지 않게 여겼다. 차라리 이전에 살던 곳에 다시금 들어간다면 모를까. 낯선 장소에 허름한 초옥을 마련해 놓고 시중들 사람도 없이 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희 형님이야 본디부터 검소한 사람이었으니...' 그 위세와 부귀영화가 황제의 것을 능가하던 시절조차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것을 떠올리며 엄헌영이 대꾸했지만 황제는 그래도 불만이 가시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것은 청렴이 아니라 초라한 것이지."
말하는 투를 보니 남의 입을 통하여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걸음하여 돌아보기까지 한 모양이다. 뜻밖이었다. 서로를 살뜰하게 아끼는 형제간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서현과 제안은 지금껏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어려운 사이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몰래 살필 수는 있어도 벌써부터 자신의 발로 드나들 거라곤 생각도 해보지 못했었는데.
제안의 다음 말이 그 의문을 풀어주었다. '경이 그 놈이.'
"자주 백운동에 드나드는구나. 고 놈을 잡으러 몇 번 들렀었지."
"난전 마마께서?"
허나 엄헌영은 아까보다 더한 의문에 사로잡혀야 했다. 희 형님과 서문경이라니. 황제와 희 형님은 비할 수도 없을 만치 어렵고도 어색한 조합이 아니냔 말이다.
"....모르겠군." 놀란 나머지 황제의 존재마저도 한순간 까맣게 잊어버린 엄헌영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마마의 심중을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야."
사실 그가 서현을 용서했다는 것부터 엄헌영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그것이 그렇게 깨끗하게 용서가 된단 말인가? 우여곡절 끝에 살아났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현이 서문경을 반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니던가.
서현이 자발적으로 나서 서문경을 해한 것은 아니었고, 그도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것은 또 별개의 문제였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수도로 불러들여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도록 두고 종종 찾아가보기까지 한다니.
"무리하시면 오히려 좋지 않을 텐데."
"짐의 생각 또한 그렇다만."
어이쿠. 엄헌영은 튀어나오려는 딸꾹질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그의 낯빛이 조금 허애졌다. 그러고보니 안이 저 놈이 있었지.
"허나 새삼 보복을 하고자 드나드는 것은 아닐 게다."
"그것은 그렇겠지만." 서문경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한 엄헌영은 황제의 말에 일단 동의했다가 바로 다음 순간 의심스런 시선을 황제에게 보냈다.
"난전 마마께서 백운동을 찾는 속내를 이미 짐작하고 계신 것 같은 말투십니다."
끌끌 황제가 혀를 찼다. '듣는 귀가 적어졌다고 바로 돌변하는 꼬락서니 좀 보라지.' 엄헌영이 무뚝뚝한 투로 반격했다. '이하 동문.'
"무어, 대충은 알지. 고 놈이 뛰어봐야 짐 손바닥 안 아니겠느냐."
황제가 엄헌영에게 손가락을 까닥까닥했다. 엄헌영의 눈이 의혹과 불신으로 가늘어졌다. '그냥 안 듣도록 하겠나이다.' 저 음험한 종질 놈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께름칙해 엄헌영이 거부하자 황제의 낯이 대번에 싸늘해졌다. '어허.
성질 더러운 가물치 새끼. 입 속으로 욕을 중얼중얼하며 엄헌영이 할 수 없이 귀를 내밀자 황제가 입을 열었다.
아담한 초옥 주위는 온통 가을이었다. 초옥 주변을 메운 하얀 갈대밭이 바람이 불 때마다 쏴아아 물에 쓸려 내려가는 소리를 내면서 누웠다가 바람이 지나가면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멀리서 볼 때면 초옥은 파도가 쉴 새 없이 이는 작은 바다에 박힌 바윗덩이처럼도 보였다.
마루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서문경이 시선을 돌리자 붉고 샛노랗고 때때로 푸르른 가지각색 단풍들이 그의 시선 끝을 물들였다. 온통 붉고 노랗던 시야에 노란 점 같은 것이 흔들리며 떨어졌다.
노란 은행잎. 그것이 팔랑팔랑 춤을 추며 갈대가 만든 포말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서문경은 입을 열었다.
"밟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네요."
'열매요.' 서문경이 덧붙였다. 밟아서 터지면 아주 고약한냄새가 나거든요.
"제가 살던 도시 가로수가 은행나무였는데 가을이 되면 거리에 은행 터진 냄새가 진동을 했었지요. 제대로 관리도 못할 걸 왜 은행나무를 잔뜩 심어놓은 거냐고 사람들 불평불만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뭐, 사실 익숙해지면 그것도 웃어 넘길만하긴 했지만요."
"은행이 무엇이옵니까?"
하고 물은 것은 서문경의 옆에 딱 붙어 앉아 있던 문위 제영이었다. 서문경이 음, 하고 신음하며 아이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을많나 설명을 고르다가 이거다 싶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지난 가을에 폐하께서 네 향낭에 몰래 집어넣어 놓았던 그거."
으. 문위 제영의 얼굴이 온통 일그러졌다. 혀까지 쏙 빼어 물고 급히 손으로 코끝을 막는 것을 보아하니 생각만 해도 그 고약한 냄새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모양이다.
그런 문위 제영을 픽 웃으며 보고 있던 서문경이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가 멈칫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보십니까?"
서문경에게 대벚할 차를 우려내다 말고 문위 제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서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문위 제영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서현의 표정이 이윽고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던지 그가 한 손으로는 다관 뚜껑을 지그시 누르고 찻종지에 차를 따랐다. 향기로운 인삼 내음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뜨거운 차가 먹기 좋게 식을 동안 초옥 옆에 매어둔 늙은 노새에게도 먹이를 주고 온 서현이, 서문경이 찻종지를 드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 옆의 작은 찻잔 두 개에는 다른 차를 따랐다.
투박한 찻잔 속에 붉은 액체가 쪼르륵 소리를 내며 담겼다. 김이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우려내어 차갑게 식힌 차인 모양이었다. 하얀 잔 안에 담긴 빨간 액체가 빨려 들어갈 듯 황홀하게 짙었다.
"오미자를 달인 물에 벌꿀을 넣은 다음 차갑게 식힌 차입니다. 황자 아기씨들께서 드시기에 좋을 것 같아 준비하였습니다."
달달한 향에 꼬인 문위 제영이 신이 나서 찻잔에 달려들고, 서문경의 반대편 옆구리에 붙어 앉아 있던 문위 효영도 고사리 손을 오므라뜨려 자기 찻잔을 감싸 들었다.
혀만 조금 빼어서 먼저 맛을 보고는 그제야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하는 효영과는 반대로 벌써부터 한 잔을 다 마신 제영이 제 백부 옆으로 쫄래쫄래 걸어가 오미자차를 더 달라고 졸랐다.
그런 문위 제영을 내려다보는 서현의 표정이 묘했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그 표정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서문경은 시험 삼아 말을 건네 보았다.
"닮았습니까?" 그 말에 서현이 자기 쪽을 보자 서문경이 설명했다. "폐하 어릴 적과요."
서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닮았습니다."
"성격은 별로 안 닮았지만 말입니다."
성격이 별로 안 좋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방향성이 달라서. 서문경이 문위 제영에게 손짓을 했다. '백부님 귀찮게 하지 말고 이리 와라.' 그 말에 제영이 바로 서문경 쪽으로 몸을 트는데, 서현이 '아' 하며 그를 향해 손을 조금 뻗었다.
차마 더 있어도 된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뻗은 손가락 끝만 움찔움찔하고 있는 그를 발견한 서문경이 푹 한숨을 쉬었다.
"쓰다듬고 싶으면 쓰다듬으셔도 됩니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언제까지 그럴 겁니까?"
그 말에 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현실 같지가 않아 그렇습니다.....'
"이것이 다 행복한 꿈속이고, 잠에서 깨면 다시 홀로 군석도에 있을 것만 같습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갈대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누웠다. 거품이 일듯 바닥에 누운 갈대 위로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가댓잎 파편들이 민들레 솜털처럼 허공으로 날았다.
"아니, 차라리 그러면 다행일까.... 모든 것이 긑이 난 것도 꿈은 아닐까. 종종 그런 불안감이 엄습하여 때로는 잠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드물게 긴 말을 끝낸 서현이, 서문경 앞에 공손히 고개를 수그렸다.
은인 앞에 못난 말을 지껄이게 되어 참으로 면구스럽습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서문경이 불현듯이 입을 열었다.
"많이 달라졌지요?"
".......?"
"폐하께서는 당신이 기억하고 있던 작고 가엾은 어린아이가 더 이상 아닌데다, 그 사람 옛날 모습을 꼭 닮은 아이가 당신 앞에서 이리 시끄럽게 활개를 치고 있으니 혼란스러울 만도 합니다."
더군다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십 년도 넘는 세월을 보냈으니. 서문경이 무뚝뚝하게 덧붙인 말에 서현의 얼굴에 난감해하는 기색이 어렸다.
그 모습을 본 서문경은 서현의 말을 막았다. '아니, 사과를 듣자고 한 말은 아니니까 더 사과하지 마십시오.'
"과업이 끝이 나면, 당연히 공허감이 따라오는 법입니다. 정말로 다 끝이 난 것인가. 의심이 들 수도 있고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래도 다 끝났습니다. 당신이 힘들게 지고 왔던 바위도 사라지고, 또 당신 속에 계속 응어리로 남아 있었던 그 사람... 당신의 아우를 더 이상 힘들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제 당신이 악을 쓰고 버텨야 할 필요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젠 좀 더 편하게 지내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서문경을 서현은 말없이 응시했다.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 마냥 내내 잔잔하고 깊기만 한 그 시선에 서문경은 속지 않았다.
그 시선 밑바닥에는 풍랑이 일고 있었다. 그 증거로, 치밀어 오르는 감정들을 참지 못한 서현이 무심결에 내뱉었다.
"제가 밉고-." 자신이 내뱉은 말에 서현 스스로도 놀란 표정이었지만 이미 밖으로 나온 말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서현이 표정을 단단히 굳히면서 오랜 시간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있었던 의문을 끄집어 냈다.
"제가 밉고 혐오스럽지 않으십니까. 무섭지 않으십니까. 어찌 이 사람을 이렇게 찾아주실 수 있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무섭고, 밉고, 혐오스러우십니까."
"....그러합니다."
"제가 당신을 용서했다 해도요?"
서현이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마마마' , 그런 백부가 몸이 아픈 것일까 봐 걱정이 되었는지 서문경이 양 쪽에 붙어 앉아 있던 효영과 제영이 말간 눈으로 제 백부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등이 떠밀린 것처럼 이윽고 서현이 고백했다.
"죄인이 외람된 말씀을 지껄이는 것을 부디 용서하시옵소서. 소인은 마마께오서 자의가 아니라 처하신 상황에 등을 떠밀려 소인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 아닌가, 그런 망령된 생각을 하였나이다."
"상황에 등을 떠밀려서, 라."
서문경은 엄지로 턱 끝을 쓸었다. 서현이 무슨 걱정을 하는 것인지, 굳이 그가 풀어 설명하지 않아도 알 만 했다.
"폐하와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제가 그 사람과 마찰 없이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당신을 받아들였다..... 그거군요." 그런 다음 서문경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 성격을 모르는 사람이니까 이런 반응도 다 나오는군."
그 말을 들은 서현이 의아한 기색을 보이자 서문경이 적당히 식은 차로 입술을 축인 다음 대답해주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엮여야 할 위치에 있는 인간이 제게 원한 살 일을 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아예 더 싹을 뽑아놔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서문경과 서현이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지도 잘 모르면서 괜히 제 어미의 주의를 끌고 싶어진 문위 제영이 서문경의 한 손을 잡아 흔들면서 물었다. 왜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옵니까. 어마마마? 그 물음에 서문경이 심드렁한 투로 대꾸했다.
'다시는 못 기어오르게.' 그 말에 문위 제영이 괜히 찔끔해서 목을 움츠렷다. 그것을 본 효영이 서문경의 손가락 끝을 꼬옥 쥐었다. 말끄러미 올려다보는 강철색 눈을 본 서문경이 쳇, 하며 혀를 찼다.
"뒤에 말은 농담이었습니다. 이 녀석 좀 골려주려고 한 말이에요."
'미안' 서문경이 기가 죽은 제영의 정수리를 슥슥 흐트러뜨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것에 앞서 했던 말은 진심입니다. 불가피하게 얽혀야 할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전 잊기보다는 오히려 더 혹독한 기준을 적용할 겁니다. 아예 용서하지 않고 평생 보지 않고 살 수도 있고요.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무조건 참고, 용서하고, 웅크렸는데 결국 그런 제게 돌아온 결과는 제일 중요한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이었어요. 전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겁니다."
"......."
"하지만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니까."
아버지를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몹시 싸늘한 표정을 지었었던 모양이다. 감정 표현이 적은 서현이 답지 않게 놀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보니.
그 놀란 얼굴을 보자 서문경은 도리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표정을 보자, 지금까지 자신이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던 사람과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도장을 찍듯 확실하게 다가왔다. 아버지라면 절대로 자신에게 저런 모습 보여 주지 않았겠지.
"당신이 하는 후회와 반성이 진심인지 가식인지 정도는 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여도 사실이 사라집니까."
"사라지지 않지요."
서문경이 찻종지를 내려놓았다.
"당신이 저를 죽일 뻔 했던 것도 분명한 사실. 당신이 그것을 후회한 것도 분명한 사실. 그런 당신을 제가 용서하기로 한 것도 분명한 사실."
흡사 노래를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서문경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지만, 참을 수가 없어져서 조금 웃어 버렸다.
"그게 다 사실입니다. 모두가 다 사실인데, 왜 당신은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 했었다는 사실만 되뇌고 되뇌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해가 안 되십니까? 서문경이 묻자 서현은 솔직히 머리를 끄덕였다. 서문경도 순순히 인정했다.
"세계를 넘겨받지 못했다면 그럴 여유가 없었을 지도 모르지요."
서현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서문경도 설명해 줄 마음이 없었다.
ㅡ 종말인가, 존속인가.
머릿속에서 황제가 물었다. 석양이 지던 그곳에서.
ㅡ 그대는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대로 종말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고 있었지만 서문경은 그때 그들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과는 달리 황제는 이 세계에서 나고 자랐다.
힘들고 괴롭던 기억이 대부분이었겠지만 그렇다고 좋았던 기억이 아주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그 기억을 공유한 소중한 사람들 또한 그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정권을 자신에게 넘겼다. 자신이 결정한 것은 존속이었다.
"만에 하나 제가 종말을 선택했다고 해도. 그 사람은 그것을 이루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직감했을 때의 기분을, 대체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참 우습지. 황제의 앞에 몸을 던지고 두려움으로 벌벌 떨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불같이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때 자신은 당혹스러운 동시에, ....기뻤다.
자신에게 선택권을 쥐어주었던 황제 자신도 아마 깨닫지 못한 사실이었겠지만 그것은 서문경에게 있어 절절한 고백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무엇보다도 네가 먼저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신의 자리가 부동임을 확인하자, 저절로 관용이 생겼다. 모순이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택할 황제가 마음속으로는 끝까지 제 형님을 놓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서문경은 중얼거렸다.
"전 배은망덕한 사람은 싫어서요."
아까부터 서문경을 응시하고 있던 서현은 긴장한 가운데서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물음에 답을 하다 말고 혼자서 생각에 잠기더니, 때때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툭툭 던져대고 있으니.
하지만 서문경은 자세하게 설명해 줄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서문경은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서현을 마주 바라보고는 웃었다.
"길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허세가 아니니까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상황에 밀려서 당신을 용서하기로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오롯이 제 의지로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니까. 서문경이 짧게 덧붙이며 두 아이의 등을 서현에게로 조금 밀어주었다. 그리고 서현의 손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차마 제영의 옷자락 끝도 만지지 못하고 끝을 움찔거리기만 하던 마른 손가락 끝을.
"당신도 행복하셔도 됩니다."
그리 말하는 제 어미를 힐끗 돌아본 아이들이 타박타박 걸어 백부의 앞에 가 섰다. 황제의 어릴 적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한 문위 제영과 미망에 사로잡혔던 자신을 구해주었던 문위 효영을 번갈아 바라보던 서현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 느리다 못해 답답함마저 느낄만한 움직임을, 아이들은 짜증내는 기색조차 없이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서현의 손이 두 아이의 머리 위에 얹혀졌다. 그 마른 손에 제영은 자신의 볼을 비벼주었고 효영은 그 손등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겹쳐 주었다.
따뜻했다.
서문경이 솨 소리와 함께 하얀 갈대꽃들이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솟구쳐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눈으로 따라가는 것과 동시에 서문경의 머릿속에는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저 사람과 같은 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당당한 위엄과 체구를 한 사내. 그러나 단정한 얼굴에 박힌 바위 같은 눈만은 지금보다 훨씬 더 지쳐 있었던.
지금 갈대가 눕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휘몰아치던 대강풍. 한 치 앞도 볼 수 없던 축대 위에서 자신을 길을 잃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칼바람을 헤치고 들어온 것은 구원이 아니라 재앙을 내리는 귀신이었다.
본디는 사람이었으나 오랜 시간 그 몸에 모든 원독을 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귀신이 된 그는, 두꺼운 덮개를 이루다시피 한 피로와 기갈에 흠뻑 젖은 채로 말했다.
ㅡ 그대는 나를 영원히 미워하고 원망하며 결코 용서하지 말라.
ㅡ 나는 수많은 죄를 지었으므로 죽어 천겁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지금 무고한 그대를 죽이고 그 독한 죄를 또 이 어깨에 더하여, 이 생에서는 결단코 행복해지지 못하고.
ㅡ 영겁을 원귀로 떠돌며 고통 받게 될 것이다.
ㅡ 이 죄의 무게로 나는 영원히, 영원히 행복해지지 못한다. 영원히.
뜻밖의 말에 놀란 자신을 해친 귀신이, 왔던 길을 돌아가면서 한탄하는 소리가 정신이 가물가물해져가던 중에도 귀에 꽂혀서 맴돌았다.
ㅡ 그렇다 하여도 그 뜻을 이룰 수만 있다면 나는.....
그 말끝은 듣지 못했다.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듣지 않아도 못들은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뜻을 이룰 수만 있다면 자신은 불행해져도 좋다는 말이었겠지.
"......"
서문경은 머리를 들었다. 계속해서 높은 곳으로 솟구쳐 올라가는 갈대꽃 하나가 결국은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먹혀 자취를 감추었다. 새파란 하늘을 오랜 시간 올려다보고 있자니 눈이 아파져서 서문경은 꾹 눈을 감았다.
ㅡ 나는 영원히 행복해지지 못한다.
"그럴 필요는 없지...."
문득 중얼거리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서문경은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이 돌아보면 서현이 바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추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다.
천천히 가자. 처음에는 다른 이들과 사심없이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익히도록 하고, 다음에는 하고 싶은 것을 제 의지로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그 다음에는....
ㅡ 나는 영원히....
결국은. 이 사람도 행복해질 수 있도록.
이제 시간이 많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