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4/66)

문위 효영은 그로부터 꼬박 사흘을 앓았다. 모든 이들이 안절부절 못하는 가운데 황제만이 홀로 느긋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얄미웠는지. 우여곡절 끝에 백서 유흥편을 다 떼고 백서 팔권 필사를 시작한 서문경이 짜증을 참지 못하고 선지 대신 황제의 낯짝에 붓질을 할 정도였다.

허나 황제가 죄가 없다는 것은 호영이 앓은 지 사흘째로 접어들던 날 새벽부터 만천하에 드러났다. 사흘 내내 만지면 델 것 마냥 달아올라 있던 효영의 가죽에서 거짓말처럼 싹 열이 내리더니 말랑말랑하던 가죽이 돌처럼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둥글게 만 몸이 딱딱해지자 마치 효영이 처음에 들어 있던 알처럼 보였다.

그 날도 석류방에 붙들려 있던 황제가 요사이 자신의 원수가 된 붓을 열 두 자루 째 부러뜨리면서 내뱉었다.

"물을 팔팔 끓여 잘 닦은 은그릇에 담아 오고, 깨끗한 천을 두어 장 내어 와라. 또 몸에 바를 기름과 태자에게 입힐 옷도 가져오도록 하고."

그 명에 사람들의 눈이 번쩍 뜨엿다. 아랫사람들의 입을 대신...., 한다기보다는 단순히 누구보다도 성질이 급한 탓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 좋은 일을 해주고 있는 서문경이 바로 입을 열었다.

"폐하."

그렇게 내뱉은 서문경은 손깍지를 끼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황제가 핀잔을 던졌다. '짐이 조금 과한 성장통 같은 거라 말하지 않았더냐?'

"헌제 네 놈은 얌전히 말 들어 처먹지 않고 용안에 붓 따위를 휘둘러대..., 어디를 가는 게냐!"

황제가 서문경의 뒷덜미를 낚아채며 빽 고함을 내질렀다.

"효영이 상태가 호전되면 말해주기로 하고 달래 보냈습니다. 말해주지 않으면 난동을 부릴 겁니다!"

"네 성질머리를 빼 닮은 놈이니 오죽할까? 누가 데려오지 말라 했더냐? 굳이 네가 갈 필요가 있느냐는 거지!"

버둥거리는 서문경의 등을 갈겨 얌전하게 만든 황제가 궁인들을 도회전으로 보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인과 환관들이 부리나케 도회전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과 방 안을 정신없이 번갈아보고 있던 서문경이 황제의 타박이 떨어진 뒤에야 겨우 제정신을 차리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완전히...."

보료방석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서문경이 상반신을 바싹 수그렸다. 문위 효영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였다. 완전히 알처럼 변했는데요. 서문경이 반은 신기하다는 듯, 또 반은 걱정스럽다는 듯 말하자 황제가 다가와 서문경의 옆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새삼스럽기는. 경이 너도 이러하였어."

"그런가요?" 사실 세세하게 따지자면 많이 달랐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서문경은 속아서 머리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변태하는 경우도 있다니 다행입니다. 제영이 때와는 달라서 걱정했거든요."

나란히 앉아서 그렇게 두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니 황제가 말한 물과 천, 기름과 옷 등이 차례로 석류방으로 들어왔다. 수발을 들려는 궁인들과 참관을 청하는 술사들을 모조리 물리친 황제는 손수 어수로 물의 온도를 재고는 조금 더 물을 식혀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물이 식기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소식을 들은 문위 제영이 신우전에 도착했다. 잠을 자고 있었는지 아직까지도 눈꺼풀에 잠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더 자련? 황제가 묻자 연신 눈을 비비면서도 문위 제영은 도리질을 쳤다.

"볼래요."

반쯤 마른 석고를 대충 뭉쳐 알로 만든 것 같은 상태로 유지되던 문위 효영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한각(약 15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웅크린 몸이 펴지고 펴진 팔다리와 꼬리가 양옆, 위아래에서 잡고 당기는 것처럼 쭉 늘어났다. 우윳빛 반투명한 광채가 그의 온 몸을 감싸고 화로 속의 잿불마냥 흰 이를 드러냈다.

밝다기보다는 위협하는 듯한 날카로운 빛.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서문경은 문위 제영 쪽을 보았다가 제영이 비 오는 날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야 방금 그 소리가 자신이 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황제가 혀를 차며 그를 얼렀다. '호기'를 내는 것은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있다는 말이니 좋은 징조다.'

과연 그 말이 옳았다. 황제의 말이 떨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위 효영의 몸에서 빛이 걷혔다.

"네 처방이 효험을 보았구나."

황제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이미 서문경은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긴장해서 반쯤 선 채로 효영을 살피고 있던 서문경이, 스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요란하게 엉덩방아를 찧는 소리에 졸고 있던 문위 제영이 깜짝 놀라서 머리를 들었다. 아이가 넋이 빠진 꼴을 하고 있는 서문경을 의아한 얼굴로 한 번 보았다가, 그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눈을 옮기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아바마마. 형님이!"

"오냐." 제 옷자락을 당기며 외치는 문위 제영에게 대충 대꾸해주며 황제가 천에 물을 흠뻑 적셨다. "마침 물이 딱 좋게 식었구먼. 우리 큰아드님께서는 항상 시기를 잘 맞추시는 것 같구나."

황제가 물에 적신 천으로 효영의 몸을 슥슥 닦고 건조하지 않도록 기름을 꼼꼼히 바른 다음 옷까지 입혀주고 나서야 서문경은 정신을 차린 듯했다. '폐하?' 자신의 소밋자락을 잡고 흔드는 서문경에게 황제가 대꾸했다.

"네 아들놈 맞다. 누가 부모 자식 간 아니랄까봐 제영이 놈과 하는 행동이 어찌 이리 똑같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황제의 양쪽 소맷부리를 자신과 제영이 하나씩 붙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서문경이 얼굴을 붉히며 손을 놓자, 황제가 '자.'하며 옷자락에 싸인 어린아이를 서문경에게 안겨주었다.

"......"

서문경은 아이를 어색하게 안은 자세를 고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팔 안을 정신없이 들여다보았다. 낯선 아이가 품에 안겨 색색 고른 숨을 내쉬고 자고 있었다. 

자그마한 얼굴과 오목조목 야무지면서도 귀티가 서린 얼굴. 분명히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생김새 하나하나가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서문경의 무릎에 매달린 제영이 말끄러미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어마마마를 닮았사옵니다."

황제도 효영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동의했다. '볼떼기가 빵빵한 것도 비슷하고.'

"헌데 작아요." 재용이 손을 뻗어 효영의 발가락을 조물조물했다. "형님인데도 소자보다 작아요."

그 말대로 효영은 몸집도 팔다리도 머리도 마치 아기처럼 작았다. 아우인 제영보다 몇 살이나 연상인데도 오히려 그보다 연하인 것 같았다. 문위 제영이 배시시 웃었다.

"귀여워요."

"...그렇네."

그 때. 주위에서 떠드는 소리 때문에 깬 것인지 아이의 눈꺼풀이 스르륵 들렸다. 아이와 처음 눈이 마주친 것은 그를 안아들고 있던 서무경이었는데 눈을 마주친 순간 서문경은 이 낯선 얼굴의 아이가 늘 자신이 머리에, 또 목에 얹고 다니던 그 새끼용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아이가 처음 알에서 깨어났을 때를 생각나게 하는 강철색 눈 때문이었다.

다정한 빛이 감도는 강철색 눈이 서문경을 가만히 응시하고, 다물려 있던 입이 열리더니 오물오물 움직였다. 목소리를 내기가 힘든 건지 말은 못하고 목에서 자꾸 메마른 소리만 내는 아이에게 서문경은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아이가 몸을 조금 일으켰다. 귀에 직접 대고 속삭이려는 건가 생각했을 그 때였다.

따뜻하고 포동포동한 팔이 서문경의 목을 꼬옥 안아왔다. 그 감촉이 마치 구름에 감긴 것처럼 보드라워서 일순 넋이 빠질 지경이었다. 제 어미의 목을 꼭 끌어안은 효영이 서문경의 품을 아장아장 걸어 나와 서문경에게 했던 것처럼 황제의 목도 두 팔로 끌어안아 주었다. 목이 끌어안긴 채로 황제가 아이의 작은 등을 토닥여주었다.

"기분이 무척 좋아서."  효영이 서투르지만 성실하게 설명했다. "이리해주셨을 때 가장 기뻤기 때문에, 저도 사람 몸이 되면 두 분께 이리 해드리고 싶었어요."

그 말에 서문경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고 황제는 킬킬 웃었지만 제영은 튀어오를 듯 놀라면서 슬금슬금 방 안을 몰래 기어 나가려는 시도를 했다. 지금껏 자신이 효영에게 해 온 것이 생각난 탓이다.

그러나 제영이 탈출하기 직전 커다란 손이 제영의 양 겨드랑이 사이로 쑥 들어오더니 그대로 그를 들어올렸다. 당황해서 올려다보니 심술궂은 표정을 한 황제였다.

"어디를 가는 게냐. 네 형님 얼굴이 보고 싶어 내내 기다려놓고는."

"아, 저 아바마마."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제영이 곰살맞게 웃으며 변명했다. "소자가 채 완성하지 못한 필사가 있사온데...."

"짐이 노식에게는 언질을 넣어 둘 터이니 괘념치 말라. 그보다는 네 형이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구나."

어느새 효영이 자신 바로 앞에 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제영이 으, 하는 신음을 삼켰다.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눈만 데굴 굴려 훔쳐보자 효영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불쑥 효영이 한 손을 올렸다. 찔끔한 제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허나 효영의 손은 제 동생의 머리나 등짝을 후려갈기는 대신 동생의 정수리를 슥슥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어? 뜻밖의 상황에 놀라 제영이 눈을 뜨자, 효영이 푹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다시는 그러지 마. 아파."

"으...."

"한 번 더 그러면 다음엔 네 얼굴에 난을 쳐줄 테니까."

그 말에 파랗게 질린 제영이 정신없이 머리를 끄덕거렸고, 황제는 서문경에게 핀잔을 먹였다.

"네 녀석이 틈만 나면 짐의 용안에 붓질을 해대니 애가 보고 배우잖느냐? 다 네 탓이다."

"아닙니다."

하고 바로 효영이 대꾸를 해와서 황제가 음?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효영은 황제의 맞은편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자세가 어린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바르고 꼿꼿했다.

"어마마마처럼 너그러이 붓을 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사내장부답게 주먹을 들겠습니다."

"....."

황제와 제영이 순간 말을 잃었다. 서문경만 옳은 말을 한다는 듯 머리를 크게 끄덕였을 뿐이었다.

잠시 후, 황제가 서문경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중얼거렸다.

"마냥 순한 줄만 알았더니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는 법이로고....."

서문경이 들었다면 이 방에 있는 사람 중 제일 성질머리 더러운 인간은 당신이라고 당장 성을 낼 말이었다.

우중방매 (雨中訪梅)

서문경은 잠에서 깼다. 타닥타닥 물이 튀는 소리 때문이었다. 비가 오나? 허리를 당기고 머리만 들어 창가를 내다보았지만 빗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밤이 깊어 밖은 방 안 만큼이나 어두웠고 상황을 가늠케 해줄 수 있는 빛이라곤 작은 등불 하나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을 부르면 되겠지만.....

서문경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그만두기로 했다. 다시 잠을 청하기로 마음먹어서가 아니라 꽃창틀 바깥에서 들려오던 희미하고도 가련하던 소리의 성질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폭풍우로군."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쳐다보자, 모로 누운 황제가 바닥에 팔꿈치를 괴고 그 손바닥 위에 옆얼굴을 얹고서 서문경을 보고 있었다. 네, 서문경은 대답했다. 황제의 표현대로 폭풍우였다.

덜컹덜컹 거센 바람이 창틀을 뒤흔들었다. 닫힌 문을 강제로 열어젖힐 것처럼 굴던 바람이 뒤이어 몰려온 빗줄기에 맞아 뒷걸음질 쳤다. 

비와 바람이 거대한 쥐와 고양이가 된 것처럼 이빨과 손톱을 세우고 뒤엉켜 날뛰었다가, 다음 순간 한 몸이 되어 창틀을 후려갈겼다. 우르르 창틀이 흔들리며 지르는 비명이 이상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우르릉. 시커멓게 타래를 지은 구름 안에서 사나운 것이 울었다. 짐승 소리 같기도 했고 땅이 울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다음 순간 섬뜩한 빛이 채찍처럼 하늘을 후려갈기고 덕더글거리는 뇌성이 그 뒤를 이었다.

서문경은 어깨에서 막 흘러내리려던 차렵이불을 바짝 끌어 올렸다.

황제의 팔이 서문경의 허리를 끌어안고 자신에게 당겼다. 반쯤 일어나 앉아 있던 서문경은 크게 반항하지 않고 그대로 황제의 품 안으로 무너졌다. 평소에는 서늘한 황제의 피부가 날씨 때문인지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서문경은 황제의 품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 그의 가슴팍에 몸을 딱 붙이고 턱을 조금 들었다. 서문경의 턱이 황제의 어깨 위에 얹혀졌다.

바로 옆에 장대비가 내리꽂히는 것처럼 빗소리가 가깝게 느껴졌다. 온 피부에 축축하게 들러붙은 습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상하게 순순하군."

"비가 싫어서요." 황제가 한 말이 혼잣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문경은 대답했다. 황제의 어깨 근육이 위로 조금 당겨지는 것이 피부에 느껴졌다. 

"비 오는 날에 혼자 있는 거 싫어합니다."

"왜?"

"그냥, 그래요.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서문경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혼자 방을 썼었다. 지금 그가 기억하고 있는 최초의 기억에서부터.

물론 그렇게 하도록 시킨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다. 형은 너무 어릴때부터 혼자 방을 쓰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완강했다.

아마도 서문경이 본능적인 공포와 고독에서 벗어나는 꼴을 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래서 서문경의 기억 속에서 집에 있을 때면 그는 늘 혼자였다.

"어린애들은 겁이 많아요. 상상력이 풍부하니까. 그래서 실제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위협을 만들어내서 느끼고, 그 위협의 덩치를 제멋대로 부풀려 무서워하곤 하지요...."

"그대도 그러하였어?"

"그렇죠. 뭐."

서문경은 픽 웃었다. 우스워서가 아니라 조금 서글퍼서였다.

"그 때는 집에 돌아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혼자 있어야 했으니까요. 형과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제가 어렸을 때 형은 이미 고등학생이었어요. 새벽에 나가서, 야간자율학습을 마쳐야 귀가할 수 있었으니까 한밤중에나 볼 수 있었지요. 아버지는 얼굴은 커녕 그림자조차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때는 제가 보기 싫어서 집에 잘 들어오시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가 새어머니와 사귀고 계시던 시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아무련들 어떻겠냐마는.

빈말로도 넉살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성격이었지만 아이들이 노는 곳마다 서문경은 끼어 놀았다. 이 무리가 돌아가면 저 무리에, 저 무리가 돌아가면 또 다른 무리에 하는 식으로.

하지만 결국 땅거미가 질 때 즈음이면 모든 아이들이 집이나 학원으로 돌아가 버렸고 그때에는 서문경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은색 열쇠 두 개로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집 안에는 항상 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아래로 떨어져 무겁게 발치를 맴돌았고 그 위를 차가운 적막이 채우고 있었다. 

방마다 물을 밝히면 그래도 기분이 나아졌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아버지가 크게 화를 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문경은 집으로 돌아가면 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불을 켠 다음에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하루 중 제일 싫은 시간이, 밤보다는 오히려 해가 질 때 즈음이었어요."

아무런 무늬도 없이 마냥 하얗기만 한 벽에, 일렁거리던 황홀한 석양과 그 석양이 거느리고 온 그림자. 엄지와 검지 ㄴ 자로 벌린 두 손가락은 큰 입을 벌린 늑대가 되고, 창밖의 앙상한 나뭇가지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두 팔을 크게 벌린 귀신이 되어서 하얀 벽 위에서 어릉거렸다.

익숙했던 것들이 익숙하지 않은 것들로 변해 자신을 위협하는 그 시간이 서문경은 가장 무섭고 싫었다.

"그리고 일 년 중에 제일 싫었던 시기가 장마." 잠시 말을 멈췄다가 서문경이 덧붙였다. "계속해서 비가 왔으니까."

"비가 싫은 게냐, 습기가 싫은 게냐, 아니면 천둥번개가 싫었던 게냐?"

"다요. 온 몸이 습기 때문에 끈적끈적한 것도 싫고, 비에 바짓단이 젖어서 더러워지는 것도 싫고, 비바람에 머리가 엉망이 되는 것도 싫어요."

황제는 서문경이 비오는 날 바깥에 나갔을 때 생기는 성가신 일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황제의 짐작대로 서문경은 비가 오는 날이면 대부분 밖으로 돌았다.

성가시고 짜증나는 일투성이였지만 집에 있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았다.

하지만 새어머니와 그녀의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오게 된 후엔 그 좁던 문조차 닫혔다.

"장대비가 내리는 날에 제가 외출을 하면 새어머니가 걱정하실 테니까요."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방 안에 스스로 갇혔다. 창 밖에서는 빗소리와 뇌성이, 문 밖에서는 새어머니와 아버지가 어울려 나누는 이야기소리가 들렸다. 어두운 방에서 혼자 빗소리를 듣는 것보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를 듣는 쪽에 서문경은 더 큰 고독을 느꼈다.

"아버지가 과시하는 것 같이 느껴졌었지요."

너는 혼자지만 나는 이렇게 새 가족을 만들었다는 것을. 서문경은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마치 어렸던 때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이.

"그래서 비가 오는 게 싫습니다. 천둥번개가 치는 것은 더 싫어요. 천둥소리를 듣고도 안길 데 하나 없이 이불만 끌어안고 있어야 했던 기억이 있거든요. ...다 옛날이야기고, 이제는 천둥치는 소리는 무섭기는커녕 웃기지도 않지만."

나직한 목소리로 털어 놓던 서문경이 하던 말을 마치고 픽 웃었다. 황제에게서 몸을 약간 떼고 그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가 잠이 덜 깬 것 같네요. 웬 헛소리를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맞춰볼까."

지금껏 서문경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주고만 있던 황제가 불쑥 말을 꺼냈다. '예?' 머리를 젓던 서문경이 주춤하고 그의 얼굴을 보자 황제는 창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갑자기 말했다.

"거기 누구 있느냐."

"폐하? 뭘 하시려는...."

"동궁과 남궁에 사람을 보내거라."

서문경이 입을 닫았다. 빗줄기는 그새 한층 더 거세어졌고, 뇌성은 온 세상을 할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황제의 명을 받은 이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지고 나자, 황제는 다시 서문경을 푹 감싸 안고 그가 머리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리도록 했다.

때마침 뇌성이 울었다. 서문경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황제는 마치 서문경이 겁먹고 어깨를 움츠린 것 마냥 그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달래주는 거지."

"다 옛날 이야기...."

"어린 경이를."

참으로 무섭고, 또 참으로 쓸쓸하였을 터인데 잘 견뎌 주었느니. 황제가 중얼거리며 등을 토닥이자 서문경은 입술을 약간 벌린 채로 움직임을 멈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조금 우습기도 했다. 다 지난 이야기로 무슨. 그런데도 평소처럼 핀잔을 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남궁과 동궁에 사람은 왜 보내셨습니까?" 그렇다고 입을 닫고 있기에는 또 괜스레 쑥스러워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말을 고르던 서문경이 결국 화제를 돌렸다.

"한밤중에, 더구나 이렇게 폭우가 오는데."

"폭우가 내리는 한밤중이니 그러하지."

저토록 요란스레 천고도 울려대고 말이지. 황제가 또 한번 벼락이 번뜩이는 창밖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검은 것이 어릉어릉하던 문종이에 순간 손톱으로 할퀴는 듯한 빛이 뻗쳤다가 사라졌다.

잠시 후에 콰르릉 뇌성이 울었다. 다 큰 어른들조차 순간적으로 몸을 떨 만큼 커다란 소리였다.

"네가 어렸을 때 그러하였던 것처럼. 우리 아드님들도 그러할 것 아니냐." 턱을 괴고 앉아 번개가 번뜩거리는 것을 보고 중얼거리던 황제가, 슬쩍 머리를 돌려 서문경 쪽을 보았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 아니더냐?"

서문경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황제가 덧붙였다. '어떠냐, 짐이 맞췄지?'

"네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말이다."

서문경이 대답하기도 전에 마치 때를 맞춘 것처럼 밖에서 고해왔다.  

두 분 아기씨를 모셔 왔사옵니다.

문이 열리고 가벼운 발소리가 도도도 주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두 볼이 발그레 상기된 문위 제영이 달려와 제 아비 품 안에 감싸여 있는 서문경의 무릎 위로 냉큼 기어 올라와서 말했다.

"비가 많이 와요. 뇌성이 너무너무 커서, 잠에서 깼사옵니다."

그 뒤를 따라 온 문위 효영을 번쩍 들어서 제 옆구리에 낀 황제가 물었다. 

"무서워서 잠이 오지 않더냐?"

"아뇨. 안 무서워요. 하나도 안 무서워요."

몸으로는 제 어미의 팔을 두 팔로 꽉 껴안고 있는 주제에 문위 제영이 허세를 부렸다. 천둥 따위가 무어가 무섭사옵니까? 소자 머리로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 말에 황제가 웃으며 대꾸했다.

'떨어질 수도 있지.' 순간 문위 제영의 몸이 펄쩍 튕겨 올랐다. 깜짝 놀란 것이 분명했다.

"떠, 떨어질 수도?"

"있단다." 황제가 자신을 쏙 빼닮은 차자의 얼굴에 낯선 표정이 어리는 것을 흥미롭게 구경하며 엄포를 놓았다. "벼락은 특히 우리 영이 같은 어린 아이들을 좋아하지."

그 말에 놀라서 할 말조차 잃은 문위 제영에게서 시선을 돌린 황제가 이번에는 문위 효영에게 물었다.

"우리 큰아드님은 어떠하신가? 큰아드님께서도 전연 두렵지 않으신가?"

문위 효영이 말끄러미 제 아비를 올려다보고 대답했다. '소자는 몹시 두렵사옵니다.'

"그러냐? 그러하다면 효영이는 여기 남도록 하고, 우리 용맹하신 작은 아드님께서만 처소로 돌아가시면 - "

황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위 제영이 두 팔로 서문경의 허리에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마침 들려오는 천둥번개 소리에 바들바들 몸을 떨면서 아이가 고집을 부렸다. '싫사옵니다.'

"싫어? 무섭지 않다면서."

"그, 러하지만." 자신이 한 말을 이제와 물릴 수도 없어서 어찌할 줄 몰라하던 문위 제영이 서문경 핑계를 댔다. "소자는 그러해도 어, 어마마마께서 두려워하실 것이 분명해요. 그러니까 소자가."

"안 무서운데."

서문경의 담담한 말에 문위 제영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문위 제영이 서문경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서문경을 필사적인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사옵니다. 어마마마께서는 스스로를 속이고 계세요.'

"....말자."

요즘 골치를 썩고 있는 백서 팔권 후명 필사를 도와주는 대가로 문위 제영을 낚아볼까 싶기도 했지만 다 그만두기로 하고 서문경은 그냥 문위 제영의 등을 안아주었다.

황제가 제 형만 여기 남기고 자신은 처소로 쫓아 보내 버릴까봐 달달 떨고 있던 문위 제영의 얼굴이 그제야 펴졌다.

"마마. 마마. 벼락 무서우시지요?"

"그래."

"그러하면 소자가 오늘은 두 분 마마와 형님을 지켜 드리겠사옵니다."

호기로운 말과는 달리 서문경의 배에 얼굴을 박은 채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문위 제영의 등을 한번 보고, 서문경은 문위 효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내내 멍하니 있는 것인지 표정이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던 효영이 배시시 웃었다.

"허면 이만 자자꾸나."

황제가 옆에 끼고 있던 효영을 놓아주며 잠시 밝혀두었던 불을 불어 껐다. 서문경과 황제 사이로 두 아이가 들어와 누웠다. 제 아버지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아이들이 금방 잠에 빠졌다.

계속해서 비바람이 불고 점점 큰 뇌성이 울었지만 그 날 밤에는 아무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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