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1/66)

이황자는 건제 11년 7월에 태어났다. 정실인 황후의 배를 빌어 난 이황자에게는 부친인 황제의 이름 한 자를 따 문위 제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가 태어나기 반 년 전 이미 황태자로 봉해진 문위 효영과는 달리 이황자 문위 제영은 알이 아닌 사람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세상에 난지 정확히 일년 이 개월, 이황자의 목에서 역린이 돋아났다.

용의 증후. 황자의 목에서 발견된 비늘은 푸른색. 즉 이황자는 소현태자 이후 처음으로 태어난 청룡이었다.

시강원 기록에 의하면 대부분의 황족들이 용인으로서 자각하는 나이는 평균이 십 이 세 전후. 평균을 크게 웃도는 것을 지나쳐 경악할만한 속도로 '증후'를 자각한 이황자 문위 제영은 그 외의 영역에서도 누구나 인정하는 신동이었다.

채 성장이 시작되기도 전에 용인으로 자각한 때문인지 황자의 성장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태어난 지 겨우 다섯 해가 지났을 뿐인데 황자의 키와 몸집은 일고여덟 살짜리 아이들보다도 컸고, 심지어 머리 회전은 그 이상이었다.

글자를 익히기가 무섭게 어린아이들이 배우는 효서, 명과, 표재, 황신사. 동규를 차례로 해치운 이황자는 보통 십오 세는 되어야 배우기 시작한다는 금응석의와 십주 팔편을 겨우 반 년만에 독파한 후 최근에는 학궁의 예비학사들이나 보는 백서와 대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황자는 문뿐만이 아니라 무에도 뛰어났다. 아직 연소하여 정식으로 그를 가르치는 스승은 없었으나 권술로 유명한 경외 동장군 금수웅과 명실 공히 창술의 일만재 서태겸이 이황자의 근골과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이야기는 궐 안에서 유명했다. 

청룡임이 밝졌을 때 소현태자처럼 허약체질일 것을 염려한 궁 안 사람들의 걱정도 단번에 날아갔다.

더군다나 외모는 부친인 황제와 한 판에 찍은 듯 섬려하기 그지없으나 성격은 황제와는 딴판으로 쾌활하면서 애교스러우니 궐 안의 누구도 이황자를 어여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단 한사람을 제하고는.

그 한 사람이란 다름 아닌 이 나라의 황후이자 이황자의 생모인 황후였다.

"말해두지만 제가 처음 시비를 건 게 아니란 말입니다." 서문경은 대체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변명을 다시금 힘주어 반복했다. "제영이 놈이 먼저 도전을 했어요!"

문위 제영이 처음 한 말은 '아바마마'도 '어마마마'도 아닌 '까치'였다. 

처음에 서문경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아기라 발음이 분명치 않으니 그런 거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문경의 옷자락을 그 고사리 손으로 아플만큼 콱 움켜잡고 둘째 놈은 말햇다. '까치처럼 생겼어.'

"그래도 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애니까!"

하지만 그 앙큼한 둘째 놈은 계속해서 서문경을 자극했다. '어마마마는 왜 볼이 그렇게 뚱뚱하신가요?' '어마마마는 왜 아바마마처럼 예쁘지 않으세요?' '어마마마는 왜 노래를 그렇게 못 부르세요?' '배우고 익히는 것이 사람으로 나서 마땅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라 했는데 왜 어마마마는 매일 노세요?' '어마마마는 왜.....'

주마등처럼 자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과거의 기억들에 새삼 서문경이 치를 떨며 바닥을 쳤다.

"게다가 글을 배우기 시작하고선 사사건건 시비를 걸러 오는데 그걸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대하면 그게 미친놈이지!"

"애잖느냐."

"아. 폐하가 제 입장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그놈의 책을 몽땅 구덩이에 처넣고 다시는 안 하겠다며 울 때까지 녀석의 입에 먹과 연적을 물려 놔야지."

"...."

분서갱유도 아니고 갱서에 아동학대냐.

"....뭐, 됐습니다." 황제의 대답에 더 이상 성을 낼 힘도 잃은 서문경이 짜증스레 내뱉었다. "폐하 말마따나 제가 애 상대로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요."

약간의 허세를 부린 서문경은 황제가 자신의 말에 딴죽을 걸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것보다는 재영이 녀석이 효영이를, 제 형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그게 마음에 걸리는데요."

황제가 대답대신 '음.' 하는 침음을 흘렸다. '사람으로 변하지 못하니 자기 형이라는 인식을 못하는 건지...' 거의 구박덩어리 애완동물을 다루듯이 제 형을 들고 다니던 문위 제영의 행동을 떠올린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벌써 일곱 살인데 왜 사람으로 변하지 못하는 걸까요? 태의감도, 박사들도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그것을 짐이라고 어찌 알까. 짐은 신룡이라서 복장룡의 생태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구나."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실 수 없습니까? 황태자가 일곱 살이 넘도록 사람으로 변하지도 못하는데 그렇게 느긋하기만 하시면 어쩝니까?"

"느긋하지 않으면 어찌 해. 안달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닌 것을."

"제발 좀...."

흥분한 나머지 굳게 닫힌 방 바깥까지 들릴 정도로 커진 서문경의 목소리를. '쉿' 하는 황제의 나직한 숨소리가 끊었다.

"몸뚱이가 아가라고 계속 아가처럼 굴 테냐. 그리 티 나게 굴면 어찌하누? 가장 안달이 나는 것은 짐도 그대도 아닌 효영이 본인 일 터인데."

뜻밖의 대답에 서문경이 하려던 말도 잊고 멈칫했다. 열었던 입술을 벌린 채로 자신을 보는 서문경의 머리에 한 손을 얹으면서 황제가 말을 이었다.

"나이는 어리나 속이 깊기로는 어른 못지 않은 아이다. 그러하니 짐이나 그대가 걱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는 것이지. 참말로 아무렇지가 않아서 티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닐 것이야. 허니 그 정성을 봐서라도 그대도 모른 척 넘어가 주어라."

"하지만....."  황제의 말에 손으로 붓을 쥘 수 없으면 입으로 물면 된다 했던 말이 생각나 서문경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심정이 되어버렸다.

"계속 손 놓고 있을 수도 없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태자다. 완전한 용인 제안이 아니고서는 말도 통하지 않는 이가 황태자로서, 나아가서는 황제로서 사람들을 통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을 생각하자 서문경은 욱신욱신 머리가 아파왔다. 사람이 용이 되지 못해서 안달을 했던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그 반대의 걱정도 해야 하다니.

"기다려 보아라. 그리 염려할 필요 없느니. 그 자리는 녀석의 것이야. 짐이 주었으니 누가 뭐라 한들 당연히 그 녀석 것이지. 허나 만에 하나 주객이 전도되어 그 짐의 무게가 주인의 어깨를 짓누른다 손 치면 무어, 그 또한 염려할 것 없어. 그 아이가 풀려날 수 있도록 그 자리르 대신해 줄 이는 얼마든지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제영이 놈도 있고. 또-"

창틀에 반쯤 눕듯이 기대 앉아 있던 황제가 힐끗 서문경에게 시선을 던졌다. 뭐요.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서문경이 괜히 으르렁거리며 말하자 황제는 중얼거렸다.

'짐의 눈을 피해서 효강이 놈과 산이며 들이며 벗하며 놀더니 나날이 야성이 더해가는구나.'

뜨끔한 서문경이 바로 꼬리를 말고 입을 다물자 황제가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대로 있고. 생각해 보니, 형제끼리 의 상하는 꼴을 보느니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

'쟤가 뭐래.' 하는 말을 얼굴에 써놓다 시피 한 서문경의 이마를 황제 가 손가락으로 탁 튕겼다.

"멍텅구리냐. 그대도 어엿한 용인이다. 허니 엄밀히 따지면 그대 또한 자격이 있다는 뜻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진용인과 가용인이 어떻게 같습니까."

"그리 따지면 이전까지의 가용인과 그대가 어찌 같으냐? 자그마치 신룡인 짐이 혼신의 힘을 쏟아 부어 짐의 반신(半身)이자 반신(半神)으로 만든 그대가, 지금까지 그대 외의 가용인에게 '증후'가, 용비늘이며 용안 따위가 보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아니면, 용인으로서의 힘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가용인이 있다는 말은?"

당연히.  ...없다. 문득 신룡의 '둥지'에서 나온 자신을 처음 보고 엄헌영이 기겁했던 것을 떠올린 서문경이 멍해져 있으려니 황제가 끌끌 혀를 찼다. '생각 없기는.'

"심지어 그대는 짐의 권속이라기보다는 반신에 가까운 독립체이니. 짐이 더 이상 용이 아니게 되거나 혹은 명이 다한다 하더라도 그대까지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그런 까닭에 다소 편법이기는 하나 따지자면 그대도 제영이 녀석 정도의 자격은 있느니."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셔도 전." 멍하니 있던 서문경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 그대로 머리를 저었다. "그럴 생각이 없는데요. 더구나 아들놈 자리를 빼앗아다 앉을 생각은."

"왜? 약간이라도 혹하지는 않고?"

"아뇨. 애가 먹던 사탕 뺏는 것 같아서요."

그 대꾸에 황제가 픽 웃었다. 그 웃음에 서문경이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혀 뜨고 힘주어 말했다.

"효영이는 곧 사람으로 변할 수 있을 겁니다."

"짐도 그리 생각한단다."

이번에도 이상하리만큼 건성으로 대꾸한 황제가 그 직후에 '헌데'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거의 창틀에 기대 누워 있다시피 하던 사람이 자세까지 바꾸며 자신을 보자 서문경이 무심결에 움찔했다. 

도망칠까. 말을 돌릴까.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서문경이 다음 행동을 결정하기도 전에 황제가 말을 꺼냈다.

"그대 하는 말을 듣자니 짐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생각났다만."

"....뭡니까?"

서문경은 자신이 떠올린 그것을 황제가 언급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대답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서문경에게 요행은 찾아오지 않았다.

"얼마 전에 제영이가 그러더구나. 어마마마께서는 자신이 미우신가 보더라고. 그러하니 형님의 처소에는 자주 걸음 하시는데 자신의 처소에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갑자기 무슨 까닭으로 그런 말을 하는가 싶어 알아보니 작일도 재작일도 도회전으로는 걸음하지 않았다더구나. 어찌 된 것이냐, 경아?"

서문경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 서문경과 문위 효영의 관계는 참으로 오묘하여서 사실상 그들의 관계는 모자나 혹은 부자 관계라기보다는 터울이 큰 형제 관계에 가까웠다. 육체가 사내인 탓인지 아니면 뜻밖으로 완고한 면이 있는 성격 탓인지 서문경이 자신의 배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아도 피부로는 좀처럼 느낄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 일로 초조해하던 서문경은 결국 자신이 효영의 생물학적 어머니라는 사실을 머리와 몸 모두로 인지하는 것은 무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대신 시간을 두고 차차 친분을 쌓아 가기로 했다.

일일 두 번, 혹은 세 번. 공기가 맑은 날이면 서문경은 얌전한 새끼용을 머리에 얹고 단풍이 익은 후원과 하얀 연꽃이 핀 호수를 돌아보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꽃창에 나란히 앉아 함께 비 내리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가끔은 소리 내어 짧은 이야기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아침마다 하얀 새끼용은 이슬이 앉은 들꽃을 한 송이씩 꺾어 제 어미에게 물어다 주었다.

가끔은 비 갠 새벽하늘빛 제비꽃을, 또 가끔은 병아리빛 민드레를. 그렇게 부담감을 버리고 조용히 시간을 쌓은 보람이 있었던지 서문경과 문위 효영은 서로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당시의 상황은 이황자인 문위 제영이 태어난 후에도 거의 비슷한 형식으로 반복되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서문경이 이번에는 별다른 고뇌나 의심 없이 '차차 익숙해지고 친해지는' 방식으로 문위 제영에게 다가가려고 했다는 것과 그 결과가 앞과는 판이하게 달랐다는 것이었다.

결과만 축약하여 이야기하자면 서문경과 문위 제영은 오래된 책에 쌓이는 먼지처럼 시간과 호감을 쌓아나가기는커녕 얼굴만 부딪치면 으르렁거리기 바쁜 관계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도발하는 쪽은 아들놈이었고, 또 거기에 넘어가서 아르릉카르릉거리는 쪽은 짜증으로 순간순간 나이 차도 잊고 마는 서문경이었다.

때문에 이제는 서문경의 일과 중 하나로 굳어진,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어 황태자의 처소인 태백궁과 이황자의 처소인 남궁 도회전을 찾는 일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서문경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서문경의 지밀인 백상궁이나 이황자를 모시는 현강희나 모두 인정하는 바이지만 황후는 확실히 여러 모로 노력을 했다. 

사실 저 성격에 사사건건 비꼬고 살살 약을 올리는 어린애에게 진심으로 성을 내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그만큼 제 어미에게 이황자는 적대적이었다.

"젠장할." 땡볕에 끌려 나가는 개 같은 걸음으로 도회전으로 향하던 서문경은 불현듯 짜증을 냈다. "그 놈은 대체 왜 날 안 좋아하는 거야?"

어찌 들으면 거만하기 짝이 없는 발언을 웅얼거리며 서문경은 문위 제영이 자신을 탐탁찮게 여기는 이유를 열심히 추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까치처럼 생겨서? 혹시 새 싫어하나? 그렇지만 새란 새는 모조리 잡아다가 방에 두고 기르는 놈이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러면 혹시 내가 놈의 심미안을 충족시켜 줄 만큼 잘나지가 않아서? 제기랄. 그렇게 치면 지 놈도 나 닮았거든. 어차피 내 2세인 주제에 누굴 지적질이야.

그럼 내가 자기보다 잘난 게 없어 보여서 얕보나? 그래. 이건 좀 가능성이 있어. 애들이란 게 한번 얕보이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기어오르거든....

고민하는 사이 도회전에 다다랐다. 생각에 잠겨 있던 서문경이 화들짝 놀랐다. 남궁에 위치한 도회전은 말이나 가마를 타고 가야 할 만큼 멀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그리 가깝지도 않건만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도착했다니. 자신이 생각 외로 오래 고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안내를 받아 문 안으로 들어가자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새 우는 소리와 퍼덕퍼덕 날갯짓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참새며 까치, 까마귀에 천둥오리에서부터 목을 길게 뽑은 왜가리에 청학, 쉴 새 없이 울어대는 금의동자와 열색조, 심지어는 이름도 알수 없는 온갖 기기묘묘한 빛깔의 새들까지. 황자의 처소가 아니라 차라리 조류 박물관이라면 믿을 법 했다.

설마 제영이 이 놈. 이 새들을 훈련시켜서 나를 타도하는 것을 노리는 건가.... 서문경이 찝찝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백상궁이 마침 새모이 그릇을 들고 나오던 도회전 궁인을 붙잡고 난전 마마가 납시셨음을 알리라 명령했다.

갑작스레 정해진 일이라 미리 사람을 보내 행차를 알릴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그 탓인지 몹시 놀란 궁인이 황자에게 아뢰기 위하여 치맛자락을 걷어붙이고 달려가려는데, 그것을 서문경이 막았다. '잠시만. 알릴 필요없다.'

"마마?"

"백상궁 그대는 사람들 입단속 시키고 여기 있어. 혼자 들어가 볼 테니까."

하고 잘라 말한 서문경은 아연해하는 백상궁을 버려두고 혼자 성큼성큼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마주치는 궁인들마다 서문경의 얼굴을 보고 튀어오를 만큼 놀랐지만 서문경이 머리를 젓자 비명도 신음도 흡 소리와 함께 삼키고 몸을 웅크렸다.

서문경의 얼굴이 점점 더 구겨졌다. 처음에는 너무 조용해서 이상한데, 싶은 정도였는데 가면 갈수록 수상하다. 왜 하나같이 저렇게 놀라고, 또 왜 하나같이 불안한 시선으로 안을 눈짓하는 건지.

문위 제영의 방 앞에는 얼굴이 익숙한 나인들이 여럿 모여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가 서문경을 발견하고 헉, 숨을 멈췄다. 서문경이 눈짓했다. '열어'

서문경의 눈총을 견디지 못하고 미적미적 열리는 문 안 쪽으로 서문경이 거칠게 헤집고 들어갔다. 쾅! 자신이 팍 밀어젖힌 문이 끝의 끝으로 가 부딪치는 굉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서문경이 미간을 구겼다. 소리 때문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광경 때문이었다.

"너."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뭐 하는 거야?"

등을 보이고 앉았던 아이가 그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목련처럼 하얀 얼굴에 확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못 박힌 듯 선 서문경의 표정을 본 아이의 얼굴도 덩달아 차가워졌다. 성이 난 것이 아니라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아이가 일어섰다. '어마마마'. 일어선 아이의 손에서 뭔가가 달랑거렸다.

"낯빛이 어찌 그러시옵니까?"

"지금 뭘 하고 있냐고 물었다. 네 형을 가지고!"

"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겠다는 듯이 아이가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그리고 불쑥 서문경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더위라도 먹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있는 제 형의 꼬리를 아무렇게나 붙잡고 흔들고 있던 그 손을 말이다.

"가져가시옵소서. 그렇지 않아도 재미가 없어서 그만 두려던 참이었사옵니다."

"재미?"

서문경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콱 쥐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위태로운 분위기를 느끼지도 못했는지 아이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예에. 재미가 없었어요.'

"두 분 마마 앞에서 그리 자랑을 하기에 제법 경지에 올라 있나 싶어 시켜 보았는데 엉망이었사옵니다."

아이가 말하며 바닥 어딘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여기저기 엉망으로 널려 있는 선지 위에는 마치 핏자국처럼 보이는 검은 얼룩이 떨어져 있었다.

언뜻 보면 난 이나 용 따위를 치려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것은 글자였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 삐끗, 저리 삐끗하다가 결국 글자는커녕 선 하나도 제대로 긋지 못한. 

그 증거로 털이 몇 갈래로 갈라진 붓이 패배한 장수의 칼처럼 그 근처를 나뒹굴고 있었다.

서문경은 아이가 내민 손에서 문위 효영을 받아들었다. 소금물 먹은 솜이불 같은 행색의 문위 효영은 그렇지 않아도 하얀 몸이 더더욱 창백하게 질려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 다만 입가만이 탄 것처럼 새카맸다.

서문경이 손가락으로 그곳을 슥 훔치자 거의 마른 먹이 길게 꼬리를 끌면서 서문경의 피부에 묻어나왔다.

그 모습을 본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럽잖아요."

또래 아이들에 비하면 크다고는 하지만 어른에 비하면 아직 짧은 다리로 급히 어딘가로 다녀온 아이가 서문경에게 불쑥 깨끗한 천을 내밀었다.

"닦으세요. 짐승 침이랑 섞여서 더러...."

탁!

내민 손을 맞은 아이도, 그 손을 쳐낸 서문경도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두 눈과 입술을 멍하니 벌리고 자신을 보는 아이를, 유리 같은 눈으로 응시하던 서문경이 이윽고 머리를 잘게 흔들면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기름칠을 한 번도 하지 않은 톱니바퀴처럼 마모된 듯 거친 움직임이었다. 서문경이 한 손을 콱 말아 쥐었다. 방금 전 아이의 손을 쳐낸 바로 그 손이었다. 

그러면서 서문경이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고, 다시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한참 후에야 서문경이 말을 꺼냈다.

"....잘못했어."

"누가요?"

"나도, 너도. 나는 어른답지 못했고, 넌."

까지 말하고 갑자기 말을 멈춘 서문경은 한 팔에 추슬러 안은 문위 효영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손에 닿은 새끼용의 몸이 뜨거웠다. 너무 무리를 한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도 시선을 느낀 건지 새끼용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서문경과 눈을 맞추었다. 그 눈빛이 지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정했다.

남아 있던 힘을 모조리 끌어올려 한 행동이었는지 다음 순간 문위 효영이 다시 눈을 감았다. 숨소리를 들어보니 다행스럽게도 기절은 아니고 그냥 잠이 든 것뿐이었다.

새끼용이 완전히 잠들 수 있도록 잠시 기다린 후에 서문경은 말을 이었다.

"너도 형에게 잘못했어."

"형?"

서문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소자가 무엇을 잘못하였는지요?'

"먼저 자랑한 것은 형님이셨어요! 그래서 시켜본 것뿐이에요. 하지만 형님께서는 못하셨어요. 두분 마마께 거짓말을 한 거라고요! 그럼 소자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형님이 잘못한 것아니어요?"

"효영이는 신우전을 나가서 바로 자기 처소로 돌아간다고 했었어. 하지만 그걸 억지로 여기로 데려온 사람은 너 아니냐? 그리고 무엇보다 효영이 입에 억지로 붓을 물린 자국이 있었다!"

"그게 잘못인가요?"

"당연히 잘못이지! 네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할 일이 많은 사람을 억지로 네 처소로 끌고 오는 것도 모자라서, 억지로 사람 입에 붓을 물리고 글을 쓰게 시킨 것이 어떻게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지!"

"사람이요?"

문위 제영의 악에 받친 목소리에, 기가 막힌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점점 언성을 높이고 있던 서문경이 멈칫했다. 그 틈을 타 문위 제영이 소리쳤다.

"누가 사람인데요? '그거'요?"

문위 제영이 서문경에게 다가가자, 서문경은 무심코 물러섰다. 허나, 문위 제영은 악착같이 파고들면서 서문경의 팔에 안긴 제 형을 손가락질했다. 

서문경의 허리께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진 꼬리, 긴 주둥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복(물갈퀴)이 달린 네 발과 오돌토돌한 등. 그리고 온 몸을 감싼 섬세한 하얀 비늘과 비단처럼 부드럽지만 그보다 훨씬 더 질기고 단단할 가죽.

"거기의, 그거의 어떤 부분이 사람인데요?"

그 사납다 못해 적대감마저 느껴지는 물음에 서문경은 말문이 탁 막히는 것을 느꼈지만 깔끄러운 혀를 재촉해 겨우 이렇게 내뱉었다.

"사람이야. 네 형이라고."

"모르겠어요. 두 분 마마께서 저걸 제 형님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저도 그렇게 말씀 드리고는 있어요. 그렇잖아요? 전 용인으로 변할 수 있지만 저건 사람으로 변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저와 저게 어떻게 같나요?"

서문경은 입을 닫아버렸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삭풍처럼 싸늘했다. 고집스레 제 발치만 노려보고 있던 문위 제영이 호기심에 힐끗 위를 올려보았다가 그대로 파랗게 질렸다.

그 모습을 본 서문경이 나직한 숨을 몇 번으로 나누어 쉬었다. 감정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더이상 서문경의 얼굴은 차갑지는 않았지만, 차가운 기운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그만큼 지독한 피로감이 채우고 있었다. 문위 제영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 서문경은 문위 제영을 보고 있지 않았다.

문위 효영을 안아들고 뒤돌아 선 서문경이 감정을 극도로 억누른 말 몇 마디를 빠르게 내뱉어버리고 방을 나가버렸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로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구나. 참으로 유감이고, 또 실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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