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60/66)

"좋은 이름입니다." 황자에게 붙여진 이름을 들은 경혜는 손뼉까지 치면서 진심으로 기뻐했다. "복룡 아기씨께 걸맞은, 상서로운 이름이옵니다."

그 반응에 서문경은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자신이 지은 이름을 저리 좋아해주니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경혜의 해석은 그야말로 꿈보다 해몽이랄까, 아니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랄까. 덕분에 그녀가 치는 장단에 마냥 좋아하며 춤추기에는 어쩐지 부끄러운 감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경혜가 화제를 돌렸다.

"헌데 마마. 황상 폐하께옵서 지어두신 이름이 있었다 하시지 않았사옵니까?"

"아." 빌어 처먹을 인간..... 저절로 욕이 나왔다. "복돌이, 백식이, 흰욱이요."

경혜가 침묵했다. 설마 방금 그게 황제가 아들 이름으로 생각해놨다던 그건 아니겠지. 하는 표정을 읽은 서문경이 바로 그녀의 기대를 깨어 놓았다. '사실입니다.' 확인사살을 당한 경혜가 잠시의 혼란 끝에, 겨우 이렇게 말했다.

"마마께서 계셔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 한숨 같은 중얼거림에 담뿍 진심이 묻어났다. 서문경은 침묵했다. 솔직히 동감이었다. 정말, 이 일 때문에라도 효영이 놈은 커서 자신에게 효도해야 한다.

갈림길이 나오는 바람에 잠시 대화가 끊겼다. 곧 마음을 정한 서문경이 왼쪽 길로 접어들자 경혜도 나인들도 그 뒤를 따랐다. 말없이 앞을 보던 경혜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중얼거렸다.

'효강이' 막 접어든 길을 죽 따라가면 서행관이 나온다는 것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무심코 중얼거린 말이 근래 들었던 풍문을 불러왔다.

"요즈음 효강이 마마의 말벗을 하여 주고 있다지요. 그 이가 결코 경우가 없는 자는 아니나 말투나 태도에 투박스런 면이 없지 않아 있어 마마 같은 귀인의 말벗으로 적합할지 의문이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경혜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덕분에 서문경은 언뜻 들으면 엄헌영을 헐뜯는 것 같은 경혜의 말에 숨겨진 진심을 읽었다.

서문경이 언짢아하는 기색 없대 대꾸했다. '저도 다른 사람의 예법을 재단할 정도는 아니니까요.'

"혹여 마마의 이름에 누가 될까....."

"대나무가 숙이려 하나 우박이 계속해서 두드리면 차라리 우비를 두르는 것이 낫지요. 피하지 않고 맞고만 있어 봐야 결국은 대나무만 죽어 나갈 뿐입니다. 몸에 두른 우비가 금직, 금박한 숙고사인 것을 보고 처음에는 다들 비웃고 이상타 할지 모르나 그것은 잠시지요. 

결국은 떨어지는 우박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두른 것인데 그것이 비단이든 밀짚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아부인이 무엇을 염려하시는지는 저도 압니다. 허나 냉해로 죽어버리면 그 대나무가 누런 대나무가 아니라 사실은 청죽이란 것을 알아줄 사람도 없습니다."

경혜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조용히, 서문경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서문경이 하는 말이 비단 엄헌영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서문경은 눈앞의 여인을 응시했다. 한 때는 황태자가 지극히 사랑하여 보배 중의 보배라 불렸었던 여인. 그러나 지금은 역적의 후처였다는 죄를 물어 대명부인의 품계도 현주로서의 지위도 빼앗기고 종4, 5품 벼슬아치의 부인들에게나 주어지는 아부인으로 강등되어버렸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인의 아비라는 놈이 강제로 진행한 것이나 다름없는 혼인. 혼인 후에도 방치 당하다시피 하면서 긴 세월을 보냈다.

서엽과의 혼인을 통해 그녀가 얻은 것은 하나도 없는데, 심지어는 그와 부부지연을 맺었다는 이유만으로 원래 가졌던 것들까지 빼앗겨야 하다니.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뒤에 경혜는 닫았던 입을 겨우 열었다.

"소첩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맞아요. 효강은 그런 사람이지요. 홀로 해결하게 두면 비도 바람도 서리도, 고스란히 제 몸 하나로 받아내고 결국은 꺾여버릴 그런 사람이지요."

서문경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경혜의 말에 숨은 속뜻을 알아챈 탓이다. 효강에 관해서는 그대의 말씀이 옳습니다.

허나 자신은, 경혜 자신은 아니다.

경혜는 완곡하게 서문경이 내민 손을 거절하고 있었다.

얼굴을 굳힌 서문경이 '부인께서는'하고 말을 꺼내자, 경혜는 서문경의 얼굴을 보고 부드러이 웃어보였다. 그 얼굴을 본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지금 경혜의 얼굴은 아집을 부리는 얼굴도, 만용을 부리는 얼굴도 아니었다.

"마마. 소인은 대나무가 아니라 갈대이옵니다. 효강처럼 꼿꼿이 버티다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이리 바람이 불면 이리 누웠다가 저리 바람이 불면 저리 누웠다가 하며 생을 연명하지요. 지금까지도 소인은 늘 그래 왔사옵니다......."

경혜의 표정에 알 수 없는 색이 어리었다. 흰 듯도 하고 푸른 듯도 하고, 흡사 갓 내린 눈 위에 어른거리는 듯한 그런 오묘한 색. 그 위로 회환과도 닮은 낡고 애잔한 그림자가 물처럼 스쳐갔다.

"때때로 바람이 불어왔사옵니다. 혹은 동에서, 혹은 북에서, 또는 남에서. 감미로운 남풍은 늘 꿈처럼 짧았고 남풍이 진 뒤에는 그만큼 매서운 북풍이 불어왔지요. 소인의 부친께서 절명하시었을 때... 소인의 정인이 누구인지를 아신 상황께서 진노하시어 달려오셨을 때... 정인의 아비라는 자가 소인을 제 후처로 달라 청하였을 때..."

경혜는 짧게 웃었다.  

"소인은 그 때마다 어김없이 굴복하여 누웠사옵니다. 생은 연명하기 위해서요."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었습니까."

"소인도 어렸으니까요. 허나 그 일로 다른 사람들이 질 마음의 짐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리 오래...., 그것을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

"감히 그리 칭할 신분은 되지 못하나, 사사로이는 소인은 그 사람의 손위누이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서문경은 경혜가 엄헌영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부친을 잃은 그 날을 기점으로 소인을 참으로 귀여워 해주셨던 조부님께서도 조모님께도 돌변하시어 소인을 골칫덩어리로 여기셨지요. 동궁비(황태자비) 마마나 두 분 군주께는 새삼 동정을 바랄 염치도 없었사옵니다. 소인의 생모는, 딸인 소인의 입으로 말하기에는 면피스러우나 동궁마마의 광총을 믿고 내내 방자한 태도를 보였으니까요. 그런 때에 그 분은 소인에게 새 가족이 되어주셨습니다. 소인을 친누이처럼 여기며 잘 따르시던 모습이 어찌나 고맙고, 귀엽고, 어리로웠는지요."

서현 그 사람에게 연모의 정을 품기 이전까지 경혜에게 있어 세상에 첫째가는 기쁨은 제안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로 인하여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내가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쓰디쓴 고뇌도, 이 넓은 세상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묵직한 절망도 그 덕분에 잊었다. 그랬었다.

"....허나 정인이 생기고, 그 정인을 잃게 되자 소인은 그 모든 것들을 까맣게 잊고 그 분을 원망하였습니다. 그 자의 후처가 되어 애련당에 방치 되었을 때에도 몇 년간이나 소인은 그 분을 원망하는 마음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허나 점점 시간이 지나자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고였고, 덫이었습니다. 저도, 그 분도, 그 사람도. 효강도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큰 덫을 피해가기는 어려웠을 뿐입니다. 그러니 깨달았다면.... 바로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 때 일은 우리 중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노라고."

경혜가 부서질 듯 웃었다.

"소인이, 제가 누나였으니까요. 괜찮다고. 달래줬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스스로를 탓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줬어야 했던 것입니다. 허나 그러지 못했어요. 무서웠습니다. 늘 그랬듯. 부딪혀 깨질 것이. 그래서 북풍에 누운 채로 일어나지 않았어요. 허나 그 사람...., 희 오라버니는 결국 해내었지요.

참으로 무모한 시도였고 그래서 결국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지만, 그래도 지키기 위해서. 그러니, 효강이라면 모를까 저에게는 황상의 은혜를 입을 자격이 없사옵니다."

서문경은 꾹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꾸며 말했는데도 눈치 챈 모양이다. 그녀를 보호하고자 하는 이가 누구인지.

".....폐하께서 서운해 하실 겁니다."

"속죄할 시간을 주시옵소서. 희 오라버니께서 군석도에서 자신의 죄값을 받고 있는 것처럼 소인도 그리할 것입니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칭하는 경혜에게서는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편해 보였다. 비로소 모든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오라버니가 자신의 죄를 비추어 보는 곳은 하늘이겠지마. 소인이 죄를 비추어 보는 것은 소인의 마음속일 것이옵니다."

경혜가 지은 것은 죄가 아니었다. 그러니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참회할 시간을 가지겠다는 것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스스로를 귀양 보내 달라 간청했던 서현보다도 그녀는 더 무거운 굴레를 졌다.

이 핏줄들은 고집 센 것이 특징인가, 하고 생각하며 서문경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허나 그리하여도 가끔씩은, 마마와 황자 아기씨를 뵈올 수 있는 은혜를 내려 주시어요. 그것이 소인의 유일한 즐거움이니'

경혜가 해사하게 웃으며 덧붙인 말에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일단락지은 경혜가 다시 엄헌영의 이야기를 꺼냈다.

"헌데, 효강은 어찌 지내고 있사옵니까? 죄인의 몸인지라 바깥출입을 최대한 삼가려다 보니 얼굴을 보지 못한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서행관에 아직 적을 두고 있다는 말은 건너건너 전해 들었습니다만. 해서 더 염려가 되옵니다. 

알고 보면 참으로 올바르고 선량한 이인데 태도나 말하는 어조가 워낙 시퉁스러운 탓에 다른 이들의 오해를 사기 일쑤이니...."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할 수야 없겠지만."

서문경은 멀리서 또 다른 행렬이 자신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꾸했다.

백옥이 주렴처럼 달린 미색 대산. 그리고 그 대산 아래에는 연잎 위의 푸른 수련과 붉은 수국을 수놓은 아홉 폭 생고사 치마를 입은 여인이 있었다.

푸른 수련과 붉은 수국은 각각 황제의 적자와 적녀를 뜻하는 상징물이었고, 연잎은 그들을 갓난아기 시절부터 돌보는 임무를 맡은 대보부인을 뜻하는 상징물이었다. 

즉, 황자와 대보부인의 행렬.

서문경이 발견한 것을 똑같이 발견한 경헤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어렸다. '황자 아기씨를 뵙게 되다니 소인이 금일은 운이 분에 넘치게 좋습니다.'

"굳이 색안경을 끼고 보려는 사람의 눈에야 그 사람 행동 하나하나가 다 의심쩍어 보일터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아닐 테니 크게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푸른 잎은 눈 속에 뒤덮여도 티가 나는 법이니."

"좋은 사람이 있는지요?"

"글쎄...." 갑자기 눈살을 구긴 서문경이 귀 뒤를 벅벅 긁었다. "속내는 효강 그 사람의 조력자가 되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이 분명하긴 한데."

서문경의 말에 반색을 했던 경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리를 갸웃했다. 서문경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발부터 걸고 보는 빌어먹을 초등학생 심리가 여기에도...' 따위의 알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탓이었다. 송구하오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고 묻는 경혜에게 서문경이 됐다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어보였다.

"아니요. 별 말 아니었으니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아무튼 효강을 제대로 봐주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하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황자를 안은 대보부인이 서문경과 경혜의 앞으로 와 예를 올렸다. 푸른 수련을 수놓은 흰 비단 방석 위에 앉아 있던 황자, 문위 효영이 인사라도 하듯 경혜를 말간 눈으로 지긋이 한 번 보고는 제 어미의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갔다.

서문경이 대보부인을 물리고 경혜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서문각 근처의 회옥호에 다다랐을 때 경혜가 불현듯이 물었다.

"헌데, 황자 아기씨의 귀명은 새벽 효 자를 쓰시는지요? 만일 그러하다면 효강과 같은 글자를...."

경혜가 말을 멈춘 것은 자신의 말을 듣던 서문경의 미간이 팍 구겨졌기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심기가 상한 듯한 서문경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분명 자기도 괜찮다고 해놓고서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다니.'

그 말을 들은 경혜가 어설프게 웃었다. 더 듣지 않아도 알만 했다. 황제가 왜 친아비인 자기도 아니고 효강 놈의 호에다 글자를 가져다붙이느냐며 강짜를 부린 것이리라.

"해서 어찌 하셨나이까?"

"이미 이름은 붙여 놨으니 이제와선 어쩔 수 없고, 다른 놈이 있으면 그 때엔 자기 이름을 붙여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놈이 벌써 자기 이름을 알아듣거든요. 귓볼 아래에서 살랑거리는 황자의 꼬리 끝을 툭툭 치며 서문경이 대답했다. 말하는 장본인은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말투나 목소리 모두에서 뿌듯해하는 기색이 묻어나서 경혜는 속으로 배시시 웃었다.

"허나 다음이라니...."

"아" 서문경이 휘휘 손을 저었다. "그냥 둘러댄 겁니다. 고집부리는 애를 달래는 데엔 다음에 해준다는 말이 제일이거든요. 일단 달래 놓으면 금방 잊어버리니까."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서 서문경은 앞서나갔다. 어제까지는 못 보던 싹을 발견한 탓이었다. 묘하다. 이 계절에 웬. 그렇게 중얼거린 서문경과 그의 머리 위에 탄 용황자가 진지한 시선으로 새싹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면서 경혜는 난감하게 웃었다.

황상께서 고집 센 어린애 같은 성미를 가지신 것은 사실이지만 저리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대처하시면 곤란해지실 터인데.....

그러나 결국 경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부부간의 일에는 다른 이가 끼어드는 법이 아니니. 허나 조만간 용황자님께서 아우를 보게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두연 (斗然)

살갗이 겹쳐졌다. 가을밤 아래의 흙처럼 서늘하던 살갗이 다른사람의 것이 된 것 마냥 뜨거웠다. 불같은 입술이 도장을 찍듯 턱에, 길게 뻗은 목에, 말랐지만 탄탄한 가슴팍에 차례로 입 맞추며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왔다.

입술이 살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짧디 짧은 순간마다 가쁜 숨이 새어나왔다. 긴 길을 쉼 없이 달린 사람처럼 가쁘고 거친 숨결은 잔뜩 젖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젖은 살은 땀에 젖은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말랑말랑하게 느껴졌다. 손을 뻗어 자신의 허리에 올라탄 둔부 한 쪽을 움켜쥐었다. 바짝 위로 올라붙은 탄탄한 살이 커다란 손바닥 안에 완전히 들어왔다. 

둥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그 안에서 날씬한 몸이 통째로 꿈틀했다. 그 위에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엔 제게 맡겨두겠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물고기처럼 자신의 손을 빠져나간 몸이 허리를 접어 자신의 가슴에 그의 가슴을 맞댔다. 입술이 부딪치고 뜨거운 혀가 얽혔다. 집요하게 따라가는 혀를 피해 입술을 뗀 그 사람의 입술이 한층 더 물기를 먹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허니 폐하께서는 소인에게 맡겨두고 편안히 계십시오."

충분히 즐기게 해 드릴 터이니. 단단히 선 남성 위로 허리를 내리면서 그 이가 설핏 웃었다. 여우처럼 접히는 눈꼬리가 요염하다 못해 색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것을 보자 허리 아래에 힘이 들어가면서 전신에 열기가 돌았다.

그러나 동시에 불쑥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뜨겁고 좁은 점막이 동굴처럼 황제의 남성을 삼켰기 때문이었다. 짧은 탄성을 삼키며 자신의 위에 올라탄 이의 허리를 팔로 휘감았다. 그리고 거친 숨소리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픽 웃었다.

살다보니 석상이 요부 짓을 하는 진구한 일도 다 겪는구나. 그 말에 허리를 흔들면서 황후가 배시시 웃었다. 체온이 올라 붉어진 입술이 사르륵 열리며.

"이게 망상이 아니면 뭐가 망상일까."

"......"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자신이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번쩍 기억이 났다.

현실감.

동시에 '그러면 그렇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놈이 누군가. 살을 비비고 산 지가 천 일도 훌쩍 넘는데 아직도 뻣뻣하고 사납기가 풀 먹여 날 세운 옷깃보다 더한 녀석이 그런 저런 요런 일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허나 참 좋은 꿈이었는데, 제안은 생각하며 꿈에서 깨어났다.

"왜요. 망상 속에서 더 뛰놀고 계시지 않고."

싸늘한 핀잔이 들렸지만 제안은 무시하고 아직 눈을 감은 채로 머리부터 한번 부스스 털었다. 그러고 나서 눈을 뜨자 근래에 깜둥새에서 애기용으로 진화한 서문경은 이미 침의를 벗고 단정히 평복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같은 이불 안에서 뒹굴거리던 사이에 어찌 저리 매정도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과 함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싶기도 하다.

'개꿈을 꿀 거면 얌전히 꿈이나 꾸실 것이지 중계는 뭐 하러 하십니까? 왜요, 세상에서 제일 태평하신 분이시니 몇 시가 되었든 상관하지 마시고 계속 주무시-' 아니나 다를까 자신을 보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서문경이 잔소리를 퍼부으려고 입을 떼기가 무섭게 문 밖에서 아뢰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문위 효영과 이황자 문위 제영이 두 분 마마께 아침문안 들었사옵니다."

"들라 하시게."

냉큼 대꾸하는 제안을 서문경이 질책하듯 흘겨보았다. 또 그런 꼴을 하고 애들을 보려고? 그래서야 교육이 잘도 되겠다.

흘겨보는 시선 안에 담긴 잔소리를 제안은 눈치 못 챈 척 무시했다. 적당히 둔한 척 새침을 떠는 것이 까다롭기가 사포보다 더한 비와 살면서 터득한 그만의 삶의 지혜였다.

황상께서는 의복을 갖추어 입기는커녕 소세조차도 하시지 않은 처지였으나 이미 이와 같은 상황에 익숙해진 궁인들은 별 말 없이 문을 열었다. 작은발이 두개 타박타박 방 안으로 들어와 주렴 바깥에 멈추어 섰다. 황제가 눈짓을 하자 구슬주렴이 걷혔다.

단풍잎처럼 작은 발의 주인이 주렴 안의 귀인들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국수 가닥처럼 하얗고 포동포동한 팔다리가 어설프나마 의젓하게 절을 하는 모습이 사람이 아니라 봉제인형이 절을 하는 것처럼 앙증맞았다.

"소자 문위 제영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 문안인사 드리옵니다. 지난 밤 무탈하시고 평안하시었사옵니까."

납죽 절을 하고 빼꼼 얼굴을 든 이가 말했다.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참으로 맑고도 또랑또랑하였는데 조금 든 얼굴도 그와 느낌이 흡사했다.

마치 구슬이 변해 만들어진 것 같은 아이였다. 아직 포동포동 살이 오른 얼굴은 유난히 희고 맑아서 마치 진주 구슬 같았고, 그 얼굴에 박혀 있는 두 눈은 옥구슬처럼 동그랗고 커다랬다.

작은 입이 오물오물 움직여 기특하기 짝이 없는 인사를 내뱉자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흐뭇하게 변했다. 허나 정작 눈앞의 아이가 어여뻐 어쩔 줄을 몰라햐 할 누군가의 얼굴은 신 자두를 씹은 것처럼 떨떠름해졌다.

제안이 그 작자, 서문경을 슬쩍 보았다. 벅벅 손톱으로 팔위를 긁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어마마마 운운하는 말에 또 소름이 돋은 모양이다. 물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호칭 따위가 아니라 눈앞의 어린아이였지만.

아이가 아직도 얼굴을 구기고 있는 서문경을 보고 자랑하듯 말을 꺼냈다.

"소자. 내편을 끝냈사옵니다."

보통 내편이라 함은 예에서 팔 세 전후의 어린아이들이 배우는 수진서 중 동규 내편 8권을 이르는 말이었지만 지금 아이가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닌 대학 내편 15권이었다.

서문경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래서?' 글자는 처음부터 알았지만 이세계의 학문체계에 대해서는 무지한 그는 요즘 새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마마마께서는...."

"말해두지만 난 한자 2급도 땄었거든?"

대학은커녕 그 이전 단계인 백서도 다 떼지 못한 서문경이 아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했다. 그 말에 아이는 빙긋 웃었고 제안은 끌끌 혀를 찼다. 그 반응을 본 서문경이 아차했다. 저거 도발이었었나.

더더욱 기분이 언짢아진 서문경이 쏘아보고 아이가 찌푸리는 기색도 없이 방글방글 웃으며 그 시선을 되받아치고 있은 지가 몇 여 분. 결국 제안이 손짓을 했다. 그 손짓에 궁인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주렴을 치고 문을 닫고는 장지문에 그림자도 비치지 않을 만치 멀찍이 물러갔다. 그와 동시에 제안이 타박을 놓았다.

"새파란 어린애 상대로 무어 그리 진지하게 반응하는 게냐. 것도 네 아들놈을 상대로."

"그래서 제가 지금 유치하다 이겁니까?"

저도 저만할 때는  S대는 식은죽 먹기일 줄 알았거든요? 당장 발끈해서는 들어먹지도 못할 말로 왈왈거리고 있는 서문경에게서 시선을 떼고 제안이 아이에게 살살 손짓을 했다.

이리로 오라는 뜻을 단박에 알아들은 아이가 냉큼 제안의 품 안에 들어가서 안겼다.

반사적으로 아이의 머리에 한 손을 올린 제안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곧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그 시선이 지금껏 아이에게 가려져 있던 자리에 꽂혀 있었다.

"녀석이. 미련하기는."

새하얀 새끼용이 아직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제안과 서문경 중 아무도 머리를 들라는 말을 하지 않은 탓이다. 제안이 혀를 차며 한 말에 그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괜히 우쭐한 눈으로 제 형을 내려다보았다.

'효영아' 그 꼴을 보고 괜히 부아가 난 서문경이 새끼용을 불렀다. 그제야 겨우 머리를 든 새끼용이 자신을 보자 서문경이 무릎을 탁탁쳤다. 새끼용이 조심조심 네 발로 기어와 서문경의 무릎도 아니고 발옆에 살짝 꼬리를 붙이고 앉았다.

그런 효영을 번쩍 한 손으로 들어 자신의 무릎에 강제로 앉히는 서문경을 힐끗힐끗 훔쳐보던 아이가 툭하고 내뱉었다.

"형님께선 아직 금응석의도 다 못 떼셨어요."

"금응석의는 필사를 해야 하니까 그렇지."

'붓만 들 수 있었어도 애초에 다음 단계로 넘어갔을 거거든?' 서문경이 새끼용으 앞발을 하나 번쩍 들어 보이면서 대신 항변했다. 아이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머리를 갸웃했다.

"그럼 형님께서는 십 년 백 년이 지나도 다음 단계로는 못 넘어가시는 거예요?"

그 말에 서문경의 얼굴이 싹 굳자 새끼용이 조심스럽게 서문경의 손에 제 앞발을 한 짝 올리고는 서문경을 올려다보았다. 제안이 통역했다.

"요즘 입으로 붓을 무는 연습을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구나."

"......"

서문경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는 제안이 바로 아이를 품에서 내려놓고 말했다.

"영아. 초조반이 올라올 시각이니 너는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구나."

"소자는 두분 마마와 함께 수라를 들고 싶사옵니다."

"허면 낮것을 같이 들도록 하자꾸나. 때맞추어 편전으로 오거라."

완곡한 대답이었지만 결국 일단은 돌아가라는 말이었다. 영특한 만큼 바로 그 말뜻을 알아차린 듯 아이의 두 볼이 밤을 문 것처럼 잔뜩 부었다. 

허나 아이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무릎걸음으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제 아비가 자신을 몹시 어여뻐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서문경 다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탓이다.

'형님도 가시나요?' 아이가 묻자 새끼용을 안은 서문경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서문경의 표정을 빤히 읽었으면서도 아이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일부러 말했다. '이 아우와 함께 가세요.'

"그럼."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서문경을 꼬리로 살살 쓰다듬어 위로하고 어기적어기적 제 자리로 돌아가는 새끼용을 아이가 냉큼 안아들고 말했다. 팔을 앞으로 하고 손을 겹친 아이의 손목에 매달린 새끼용의 꼬리가 무슨 생각에라도 잠긴 듯 느릿하게 좌로 갔다 우로 갔다를 반복했다.

그런 새끼용의 머리 위로 아이의 짜증스러워 하는 눈빛이 화살을 꽂듯이 계속 내리꽂혔다.

"소자는 이만 도회전으로 돌아가 보겠사옵니다."

거의 강제로 제 형을 집어 들고 말한 아이가, 석류방을 빠져나가기 직전에 불현듯이 생각났다는 듯 머리를 돌리고 말했다. 그 시선이 정확히 서문경을 향해 있었다.

"어마마마. 소자 필주(황후의 스승)가 몰래 한숨을 쉬며 하는 말을 들었사온데 어마마마께서 그제 제출하신 백서 칠권 유흥편 제자문답 필사에서 오자가 너무 많으셨대요."

"......."

마지막까지 얄미운 말을 지껄이고 도망치는 차남의 등 뒤에서 서문경이 부득부득 이를 갈다가 황제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동의를 요구했다. 

"솔직히 제영이 저 자식 악필 아닙니까? 오자가 좀 많아도 제가 낫지 않아요?"

물론 황제는 대답 대신 동정하는 시선만 보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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