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9/66)

신우전으로 돌아오자 벌써부터 처마 밑에 연꽃등이 밝혀진 전각 내는 무척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 까닭은 굳이 살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안절부절 못하고 댓돌 주변을 빙빙 맴돌고 있는 백상궁이 눈에 들어왔다. 마마! 서문경이 부르기 전에 먼저 서문경을 발견한 백상궁이 입술로만 뻐끔뻐끔했다.

지밀을 제한 다른 이들에게는 아직 자신이 외궁으로 나갔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재주도 좋지. 웬만한 사람은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삼켜버리는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숨어 서 있던 서문경이 단숨에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백상궁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긴 치맛자락을 재주 좋게 걷어 올리고,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서 달려오는 모습을 보니 저 여인이 직업을 잘못 찾은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적어도 그 남문 천인장인가 하는 놈보다 열 배는 나은 것 같은데.

제 웃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가 없는 백상궁이, 서문경의 코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마마. 마마. 이를 어찌합니까. 황상 폐하께오서 마마가 귀띔도 없이 외유를 나간 일을 아시었어요."

"할 일이 봉화산보다 높게 쌓여 있다 탄식하던 인간이 왜 저녁녘부터 여기 와 있답니까?"

아직도 붉은 석양기가 남아있는 하늘을 힐끗 본 서문경이 가차 없이 비난하자 백상궁이 몰라서 물으시느냔 시선을 보냈다.

굳이 그 이가 눈치를 주지 않아도 물론 서문경은 황제가 부랴부랴 신우전으로 온 이유를 알고 잇었다. 앉아서도 천리를 능히 내다보는 양반이니 자신이 신우전을 빠져나갔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서행관까지 쳐들어오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걱정하는 백상궁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 휘휘 손만 몇 번 저어보이고 서문경은 신우전 안으로 들어갔다. 백상궁이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는지 대부분의 궁인들이 밖에서 들어오는 서문경을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뜬다.

"남들 보면 흉봅니다."

긴 보랑을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간 서문경이 제 손으로 확 석류방 문을 밀어 젖히며 황제를 타박했다. 사실은 일절 뿐만이 아니라 이절, 삼절까지 더 타박할 거리가 있었지만 그것까지는 할 수 없었다.

석류방 중간에 쳐진 발 안쪽으로 채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그 안에서 뻗어온 팔이 확 서문경을 발 안으로 끌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상황이었지만 서문경은 당황하지 않았다. 끄는 대로 순순히 끌려간 서문경이 자신의 본래 눈높이보다 조금 더 높은 곳을 올려다보았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얼굴이 보였다. 본디부터 사람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예민함이 살얼음처럼 서려 있던 황제의 섬세한 얼굴이. 거기에 더해 초조감과 노여움으로 얼룩덜룩했다.

마치 황제를 처음 대면했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 서문경이 잠시 감상에 젖어 있는데 황제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짐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훌쩍 나가버리면 어쩌란 말이냐? 간 떨어질 뻔 했지 않느냐?! 경이 네 놈 짐에게 혼쭐이 한 번 나 봐야....!"

"폐하."

황제가 코앞에서 버럭버럭 고함을 질러대는데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서문경은 손가락을 까닥까닥했다. 응?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시키는 대로 목을 주욱 뺀 황제의 입에 서문경이 가볍게 접문했다.

어.

황제의 하얀 얼굴에서 삽시간에 분노와 초조감 따위의 어두운 감정이 안개처럼 사라지면서 대신 빈자리에 멍한 표정이 자리 잡았다. 

다음 순간 겨우 정신을 붙잡고 '깜둥새 네놈이 이런다고 짐이 성노를 풀것 같으...!'따위의 말을 주절거리기는 했지만 연애할 적 부르던 말이 튀어나온 것부터가 지금 그가 아직까지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서문경이 한 손으로는 황제의 목을, 다른 한 손으로는 황제의 등을 끌어안고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따뜻한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혀가 헤치고 들어갔다.

황제의 팔이 서문경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젖은 소리가 겨우 멈추었을 때, 서문경은 황제의 몸과 벽 사이에 끼어 있었다. 흐릿해진 눈으로 올려다보자 황제가 마찬가지로 흐릿한 시선으로 서문경을 보고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황제의 몸이 서문경에게 더 바싹 들이밀어졌다. 그의 다리 사이에서 단단하게 발기한 물건이 느껴졌다.

"요망한 것 같으니. 어디서 이런 것을 배웠느냐?"

베갯머리송사를 시도한 것도 아니고, 왜 자신이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인지 지나치게 격렬한 입맞춤 때문에 아직까지 숨이 찬 와중에도 서문경은 의아해했다.

그러나 황제는 이미 자신이 한 말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음 단게로 넘어갈 생각이 충만해져 있었다. 황제의 손이 서문경의 목깃을 잡고 확 끌어내렸다.

정확히는 끌어 내리려고 '했다.' 성공하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물고기처럼 황제와 벽 사이에서 빠져나간 서문경이 창가로 다가갔다. 그림처럼 꽃창 아래에 둔 깃털방석 위에 흰 새끼용이 당연한 듯이 올라앉아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철색 눈과 마주치자 서문경은 황제의 얼굴을 보자마자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서문경은 두 손을 뻗어 새끼용을 자신의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올라앉기엔 조금 좁은 손바닥 위에서 불안할 텐데도 새끼용은 얌전했다.

새끼용의 등과 꼬리, 눈동자 색깔과 아직 작디작은 앞발과 거기에 돋은 발톱 따위를 찬찬히 살펴보던 서문경이 불현듯이 내뱉었다.

"귀엽네요."

귀여워요. 마치 감탄처럼 나온 그 말에 어느새 서문경의 곁에 와있던 황제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그것을 이제 알았더냐."

"예."

참말이었다. 대답하면서 서문경도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저 작은 새끼용의 몸뚱이보다는 그 뒤에 저녁녘 그림자처럼 부풀어 달라붙어 있는 부담감과 책임감에 시선이 빼앗겨서 미처 모르고 있었다.

"잘 생겼네요. 비늘도, 깨끗한 우유색이고 눈도 예뻐요."

서문경이 늘어놓는 두서없는 감상을 황제는 잠자코 들어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중얼거리던 서문경이 어느 순간 조심스럽게 새끼용을 자신의 머리위로 올려주었다. 알에서 갓 나왔을 때, 새끼용이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오는 것을 좋아했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이 이후로는 자신이 언짢아하는 기색이 느껴졌는지 다시는 그러지 않았지만.

정수리 위에 올려진 새끼용은 앙증맞은 발톱으로 서문경의 머리카락을 잡고 매달렸다. 조금 아팠지만 서문경은 짜증내지 않았다.

차를 한 잔 우려낼 정도의 시간 동안 고군분투하던 새끼용이 겨우 서무경의 머리 위에 안전하게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리 뒤척였다 저리 뒤척였다 했지만 곧 그것도 해결이 된 듯 했다.

그새 많이 자란 덕에 예전과는 달리 볼까지 내려온 하얀 꼬리를 서문경은 조심스럽게 쥐어보았다. 안에 든 뼈가 느껴지는 매끄러운 꼬리는 적당히 서늘해서 만지자 기분이 좋았다.

놓아주자 그 꼬리 끝이 살랑살랑 춤추듯 움직였다.  새끼용의 기분이 좋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일은, 이러고 산책을 나가 볼까."

너만 괜찮다면. 서문경이 덧붙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새끼용이 꼬리 끝으로 서문경의 볼을 살짝 쓸었다. 그것이 마치 볼을 쓰다듬는 것처럼 느껴졌다.

꼬리 위를 살살 쓰다듬으며 서문경은 생각했다. 서행관으로 가 엄헌영에게 보여주는 것도 괜찮겠다. 갓 태어났을 때 한 번 보고 그 이후로는 보지 못했으니까 얼굴을 보면 내심 좋아할 것이다. 아니다. 그것보다는 그 이를 신우전으로 불러서.....

계속해서 생각하던 서문경이 불현듯이 중얼거렸다.

"보고 싶어요."

대꾸 대신 눈살을 가만히 찌푸리는 황제에게 서문경이 설명을 덧붙였다.

"범 세계를. 제가 살았던 세계를."

거기까지 말하고 서문경은 잠시 말을 멈췄다. 아니다. 사실은 내가 살았던 세상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생각하자 저절로 생각이 진심이 말로 흘러 넘쳤다.

"형."

엄헌영의 말을 듣고 나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황제가 자신에게 했었던 말의 뜻을. 대양이 무엇으로 형성되고 거목이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대양이나 거목과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

범 세계와 비교하면 서문경은 대양이나 거목이 아닌 대양으로 흘러드는 강과 거목으로부터 뻗은 뿌리 중의 하나였다. 자신이라는 강. 뿌리를 잘라내도 대양과 거목은 죽지 않는다.

서글퍼하지도 않는다. 허나 서문경의 맞은편에 있는 것이 세계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형이라면.

서문경과 형은, 서로에게 거목이면서 동시에 뿌리였다. '세계'와 한 저울에 올라 있을 때처럼 서로라는 뿌리를 잘라내도 죽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사람에게는 세계와 다른 것이 있었다.

감정이었다.

"형이 보고 싶습니다."

자신에게 있어서만은 세계보다 더한 무게가 있던 사람이었다. 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의지하고, 신뢰하고, 사랑하던 가족이었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런 '뿌리'를 잘라 내버리고 자신이 멀쩡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밖으로 토해냈더라면. 통곡하고, 절망하고, 고함을 내지르고, 되는대로 손발을 휘둘렀으면.

하지만 자신은 형이란 뿌리를 잘라냄으로서 거기서 파생된 감정까지 잘라내 버리려 했다. 형이라는 뿌리를 잘라냈다면, 그래. 당장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또 현명한 판단이었다. 내심 자신의 결단을 뿌듯해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라낸 뿌리 끝은 조용히 썩어 문드러지고 상처엔 노란 피고름이 맺혀서 결국 자신은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불괴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산 시간이 스무 해. 그 무겁던 스무 해 한 쪽을 지탱하여 주고 있던 사람이다. 그런 이를 없던 것으로 치부하고 어찌 살겠느냐.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모를까, 그와 함께 했었던 모든 기억을 되찾아놓고 어찌 그를 없는 셈치고 살겠다 할 수 있을까. 짐 또한 내 몸처럼 아꼈었던 형님이 계시기에 그대의 마음을 안다.

헌데 어찌 짐이 그대에게 떠올려 봤자 괴롭기만 할 터이니 다 잊고 짐과 함께 새 생을 살자 권할 수 있을손가. 그대가 했던 말처럼. 그대는 이제 이곳에서 새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곳에서 그는 그곳에서 뿌리박고 살 수 밖에 없으니 결국은 그에 대한 감상도, 기억도 흐릿해지게 될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은 아니야. 그리고 사람이 사는 것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서문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황제의 말에 수긍했다. 장래에는 형을 떠올려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웠다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아직은 아니었다.

"그런 그를 지금 외면한다는 것은, 그대의 지난 스무 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 그대가 충분히 생각하고 납득하였다면 짐은 그것으로 좋아. 허나 그대는 그리하였는가."

서문경은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자신이 했던 일은 단순한 아집. 황제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즐거웠던 일이건 괴로웠던 일이건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끌어 모아 발밑에 주춧돌로 다질 수 있어야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황제의 손이 서문경의 머리로 올라왔다. 방금 전 서문경이 새끼용의 꼬리를 쓰다듬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의 차가운 손도 서문경의 머리카락을 깨지는 것이라도 되는 양 살살 쓰다듬었다.

서문경은 그가 어르듯 말하는것을 들었다.

"함께 보자꾸나."

그대를 이렇게 키워낸 분께서 어찌 살고 계시는지.

서문경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의 머리 위에 앉은 새끼용의 꼬리가 서문경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훔쳤다.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물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황제의 명령을 받고 다섯이나 되는 사내들이 커다란 물그릇을 신우전으로 가져왔다.

다섯. 심지어 그들은 내관도 아니고, 궐 안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보다도 강인하게 단련되었을 무관들이었다. 분명 크기는 하지만 성인사내 두어 명 정도면 수이 들지 못할 것도 없는 청동그릇을 다섯이나 되는 무관들이 끙끙대며 들고 오는 모습은 어찌 보면 우스웠다.

허나 그 모습을 보는 이 중 비웃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미어경. 수수께끼라는 이름 뜻 그대로 , 예제국 1대 황제가 섰을 때부터 황실에 전해져 내려왔으나 그 용도를 알 수 없어 보고에서 수 백 년 잠자고 있던 물건이었다.

그런 미어경의 용도를 알게 된 것은 소현태자. 즉 청룡이 예조에 났던 그 때였다. 황룡들이 자신들의 둥지인 '하늘'에 속한 공기로 각종 권능을 행할 수 있는 것처럼 청룡도 그랬다.

청룡은 땅에 둥지를 틀고 있는 용인 동시에 수로를 다스리는 용이기 때문에 그가 권능을 행사하는 도구는 물론 물이었다. 미어경은 물을 통해 청룡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고대의 도구였다.

허나 소현태자가 단명한 탓에 미어경을 통해 권능이 펼쳐지는 광경을 본 이는 없었다. 그 때 채 풀지 못한 매듭이, 지금 완전히 풀리려하고 있었다.

황룡이 하늘에 살며 대강풍을 휘두르고, 청룡이 땅에 살며 물을 제 몸처럼 움직인다면 용 중의 황제인 신룡은 하늘과 땅 모두를 자유로이 오가며 모든 용들의 권한을 다룰 권한을 가진다.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차가운 정화수가 거대한 미어경 안을 채웠다. 그러나 커다란 물동이 열두 개를 모두 동원해도 미어경은 절반 정도 밖에 차지 않았다.

당혹해하는 사람들을 황제가 손만 저어 방 안에서 물렸다. 궁인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황제가 손수 발을 한 겹 더 친 다음 미어경 앞으로 돌아왔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경계하는 모습에 서문경이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내자 황제가 설명했다.

"유비무환이니."

".......?"

일단 설명이기는 한데 들으면 궁금증이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의구심만 더해지니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허나 투덜거릴 여유는 없었다. 미어경 앞에 털썩 주저앉은 황제가 낡은 청동 수반 위에 휘 한 손을 저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한 손을 젓는 순간 운두(그릇이나 신 따위의 둘레나 둘레의 높이)가 낮은 수반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있던 물이 홍수라도 난 것처럼 훅 불어났다. 그 위로 하얀 나뭇잎 같은 것이 형태를 가늠하기도 힘들 만치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그것이 날아온 쪽을 무심코 돌아보았다가 서문경은 겨우 깨달았다. 어느새 등 뒤에 '하늘'이 열려 있었다.

서문경은 무릎 위에 앉아 있던 새끼용의 앞발을 자신도 모르게 콱 힘을 주어 잡았다. 그리고 다시 미어경이 있는 곳을 돌아보자, 그곳에서는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차오르는 물은 마치 밀물 같았다. 강하게. 그러나 은근히 미는 감각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무서운 속도로 수위가 높아졌다. 이윽고 방안이 완전히 물속에 잠겼다. 숨을 쉬는 것에는 아무런 무리도 없었다.

물속에 완전히 잠기고 나서야 알았다. 방금 전 청동 수반을 향하여 날아든 그 하얀 것들은 '새'였다. '하늘'과 '물'이 이곳에 겹쳐지고 '시간' 과 '공간'이 새와 물고기들로 화하여 한데 뛰놀았다.

그것으로 다른 '세계'를 엿볼 준비는 끝이 났다.

자아, 하고 황제가 서문경의 주의를 끌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미 서문경은 그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형....."

예상은 했었지만, 용 세계와 범 세계 사이에는 약간의 시간차가 있는 모양이었다. 서문경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은 것처럼 보이는 남자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마음고생이 심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몇 마리의 '새'가, '기억'이 날아들었다. 남자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현재'가 태엽이 감기듯 천천히 과거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태엽은 서문경이 기억하고 있는 범 세계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 멈췄다. 뒤로 감기던 태엽은 그때부터 다시 원래 가야 할 방향으로 돌아갔다.

폭풍우가 치는 둑. 거대한 너울파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쌓아올린 돌 벽을 내리친 파도가 새하얀 포말로 변해 부셔졌다. 거품이 부서지는 끝에. 망연자실한 얼굴을 한 '소년'이, 서문경이 구했던 의붓형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서문경의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들보다 몇 발자국 떨어진 자리에 형이 있었다. 파도가 일고 그 파도가 거품으로 변하고 그 거품마저도 바글거리며 사라지는 자리에 시선을 꽂은 채로 서 있는 그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미동조차도 없는 몸이나 표정 때문이 아니라 낯빛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숫제 사람을 본 따 만든 싸구려 동상 같은 것으로 보였다. 곁모습은 그럴듯하게 다듬어 놓았지만 그 안에 깃든 생명력 따위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그런.

'원, 영아.' 한참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하던 그가 움직인 것은 새어머니가 그의 손을 잡고 끌었을 때였다. 그때, 단 한 번도 새어머니에게 무례하게 대한 적이 없던 그가 새어머니의 손을 사납게 뿌리쳤다. 새 어머니가 비틀거리며 방파제 위에 쓰러졌다. 비명이 들리고 돌바닥이 할퀸 자리에 피가 흘렀다.

노한 아버지가 그를 꾸짖으려 했을 때, 그는 이미 '소년'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의 손이,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소년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바다로 향했다.

그가 무엇을 할 작정인지 본능으로 알아챈 새어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비명에 등이 떠밀린 아버지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안된다고 날뛰는 아버지를 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돌아보고 물었다.

'왜 안 됩니까, 아버지?'

왜 사람을 바다에 던지면 안 되느냐고 묻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런 아버지를 향해 그는, 형은 이빨을 드러낸다. 형이 소년을 내팽개치고 그대로 아버지의 멱살을 잡았다.

'안돼? 안된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지금 당신 아들이 파도에 쓸려갔어요, 당신 아들이!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요? 어떻게 제정신일 수가 있지요? 어떻게?!'

형이 울부짖었다. 아버지를 내팽개치고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는 후회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신의 동생이 어떤 취급을 받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식으로 자랐는지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기적이고 즉물적인 사람이었다. 순간순간의 충동과 찰나의 감정을 그는 조금도 삭히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슬픔을 분노로 바꾸어 어린 자식에게로 돌렸다.

상대가 보호받아 마땅한 어린아이라는 것은 그에게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어른과 아이, 아버지와 아들, 쉽사리 뒤바꿀 수 없는 수직적인 관계를 이용하여 아버지는 자신이 살면서 받는 모든 짜증과 분노를 손쉬운 상대에게 풀었다. 그것을 그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어린 동생을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다음에야 그는 깨달았다.

아버지니까. 가족이니까. 핏줄이니까. 그래서, 자신이 중간에서 잘 조율하면 언젠가는 두 사람이 화해를 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틀렸어! 당신 같은 인간은 죽어도 진짜 아버지가 될 수 없어! 자식에게 가져야 할 책임감! 배려! 애정! 당신에게 그 중 뭐가 있지? 내가, 내가 잘못 생각했어! 그냥 그 애를 데리고 나가버렸어야 했는데! 당신 같은 인종과는 그냥 연을 끊어버렸어야 했는데! 결국 당신과 내가 그 애를 죽인거야!'

그리고 그는 폭언에 시퍼렇게 질린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내버려두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거친 파도에 휘말려 정신을 잃은 그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병실에 있었다. 병실을 지키고 있던 약혼녀가 그의 무모한 행동을 원망하며 흐느꼈다.

흐느껴 우는 약혼녀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그토록 비난했던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이 무엇이 다른가 멍하니 생각했다. 그러나 우습게도 입을 열자 거친 목소리로 나온 첫말은 사과나 반성 따위가 아니라 동생의 생사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와는 달리 동생은 구조되지 않았다. 그는 그 후로 몇 달을 미친듯이 헤매며 동생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동생을, 심지어는 동생의 시체조차도 그는 발견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났다. 영원히 꺼질 것 같지 않던 분노도 점차 사그라졌다. 아니, 아득한 절망으로 변했다. 그리고 절망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자조와 후회로 분열하여, 그 두 개의 바퀴로 말미암아 현실이라는 땅에 그를 도착하게 했다. 포기, 라는 이름이 붙여진.

결국 그는 인정했다. 아버지와 동생의 관계에 자신이 내린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듯이. 이번에도, 그의 동생은 사라졌다. '사라졌다'라고 표현한 것은 그의 마지막 고집이었다.

정체되어 있던 그의 삶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내팽개쳤던 것들을 천천히 주워 모았다. 그만두었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어 본 지가 언제인지도 까마득한 친구들과 다시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끝으로 원래 부부의 연을 맺으려 햇던 여인과 뒤늦은 결혼식을 올렸다.

물론 아버지와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자식의 폭언에 화가 날대로 난 아버지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에 낀 새어머니가 몇 번 그에게 연락하려 시도했었지만 그는 무시했다.

새어머니의 아들도 몇 번인가 그를 찾아왔다. 의붓동생의 얼굴을 보자 이미 가라앉았다고 생각한 분노가 다시 치솟아 올랐지만, 그는 '소년'에게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았다.

동생이 살린 목숨, 어떻게 생각하면 소년은 동생의 유산이었다. 그런 것을 자신이 해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와 가족의 연은 완전히 끊어졌다. 아니, 사실은 애초부터 가족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그와 아내의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사내아이였다. 선이 굵은 자신과는 달리 얼굴선이나 이목구비가 무척이나 섬세한 아이였다.

사람들은 아이가 아내를 닮은 것 같다고 입을 모아 말했지만 정작 아내는 애매한 표정을 지은 채로 사람들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남편을 닮지 않은 아이가 누구를 닮았는지 눈치 챈 탓이다.

아이를 받아 든 그는 묘한 표정이었다.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안도한 것인지. 아니면.

'그리운 것인지.....'

누가?

답은 곧바로 이어졌다.

태어난 아이에게는 바로 이름이 붙여졌다. 이름을 지은 사람은 형이였다. 문영. 서문영. 형의 아내도 반대하지 않았다.

서문경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 때 알았다. 자신이 지금껏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아아, 서문경은 손으로 눈가를 쓸어내렸다. 눈가가 불타는 듯 뜨거웠다.

"제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 형이었습니다....."

자식을 방치한 아버지 대신 자신을 보듬은 형은 터울이 큰 동생에게 고심 끝에 이름을 지어주었다. 짧은 지식으로 끙끙거리며 겨우 지은 이름들 중 마지막으로 남은 이름이 문경과 문영이었다.

여차하면 네 이름이 문영이가 될 뻔도 했었다고, 형이 웃으며 말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 말을 들으며 형과 비슷한 이름이니 조금 계집애 같은 이름이라도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기억도.

"......"

서문경은, 결국 선택받지 못한 이름을 자신의 아들에게 붙여주는 형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부디-'

이 아이는 부디 충분히 긴 삶을 누리기를.

자신보다 먼저 죽지 않기를.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이름...."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황제의 시선이 느껴졌다. 서문경은 새끼용을 품에 안았다. 온기, 풍랑이 이는 것 같던 마음이 약간이나마 편해졌다. 그 온기가 진심을 이끌어냈다.

"이 아이의 이름을. 제가 지어도 괜찮을까요."

그 물음에 황제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대가 생각한 이름이 무엇이냐. 황제가 묻는 말에 서문경은 대답했다.

"호영. 문위 효영."

새벽을 비춘다.

형이 그랬듯 서문경도 이름에 자신의 염원을 담았다. 서원영. 형의 이름을 딴 이름을 붙이면서, 아이가 부디 절망을, 공포를, 슬픔을, 그 모든 어두운 것들을 모르고 새벽 같은 삶을 살기를.

서문경으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던 황제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서문경은 약간 고개를 숙인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서문경의 곁에 와 선 황제가 서문경의 머리를 끌어안고 자신의 목덜미에 코를 묻게 했다. 빳빳하던 옷깃이 물기를 먹어 누그러지는 기색이 느껴졌다. 황제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짐이 그러지 않았더냐. 유비무환이라고.'

"그대가 우는 얼굴을 다른 이들에게 보일 필요는 없지......"

서문경은 눈을 감았다. 고집스럽게 뜨고 있던 눈에서 넘쳐흐르던 눈물이 황제의 목덜미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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