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려온 것이 무색하게 휘적휘적 한참을 앞서가던 엄헌영이 어느 순간 딱 걸음을 멈췄다. 아차하는 표정이라서, 그 뒤를 따라가던 서문경이 물었다 왜요. 그 말에 이맛살을 찌푸린 엄헌영이 대답했다.
시간이. 그 짧은 말 한마디로 엄헌영이 뭘 걱정하는 것인지 알아챘는지 잠시 멈춰 서있던 서문경이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다들 오늘 안에는 돌아오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데요. 아마 찾지도 않을 겁니다."
"오늘 안엔 돌아오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의심스레 물은 엄헌영이 다음순간 뭘 떠올렸는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혹시 서행관에 들르셨사옵니까?"
"들렀지요. 안 그랬으면 제가 어떻게 당신 간 방향을 짚어 왔겠습니까."
그 심상한 대꾸에 엄헌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미간만 찌푸렸다.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겁니까?', 찌푸린 얼굴로 석상처럼 한자리에 서 있기만 하는 그를 서문경이 재촉한 후에야 그는 다시 발을 움직였다.
자박자박, 두 사람이 걷고 있는데 엄헌영의 발바닥 밑에서만 자그맣게 풀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고가는 대화는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앞서 걷고 있던 서문경을 엄헌영이 팔을 뻗어 붙잡은 그 때에서야 겨우 꿀 먹은 벙어리 노릇을 하고 있던 입이 떨어졌다.
"그 쪽이 아닙니다. 이 주변 지리도 모르시면서 어찌 그리 자신만만하게 가시는 것이옵니까?"
"이런 경우 흔합니까?"
"그럴 리가. 마마처럼 대책도 없이 일단 달려들기만 하는 사람이 흔할 리가 없잖습니까."
"뭐든 사람 흉으로 승화를 시키는데,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군요." 그런 자신은 뭐든 빈정거림으로 둔갑시킨다는 사실은 싹 빼놓고 그렇게 말한 서문경이 곧바로 원래의 화제로 돌아왔다. "아까 봤던 그런 사람, 자주 찾아오느냐 그 말입니다."
돌려 묻는 기색조차 없이 곧바로 던져진 질문에 엄헌영은 입을 다물었다. 아니, 하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막았다. 그렇게 대답한다고 해서 눈앞의 사람이 납득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다.
그런 엄헌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서문경이 질문을 바꿨다.
"왜 당하고 있었습니까? 듣자하니 별 같잖은 이유로 사람을 매도하던데. 그런 쓸데없는 말 다 들어주고 있을 정도로 유한 성격 아니셨잖습니까?"
"처음에야 그랬지요. 허나 하나둘이어야 상대하든 말든 할 것 아닙니까. 제 기력도 한계가 있습니다. 겪다보니까 요령이 생기더군요. 마주 악다구니를 부리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쪽이 일찍 끝나더이다. 뒤탈도 적고."
"그렇군요."
서문경이 납득한 듯한 모습을 보이자 엄헌영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런 식으로 속여 넘기려는 거군요. 하긴. 그럴 듯한 변명입니다. 제가 당신 성격을 정말 잘 몰랐더라면 분명 그렇구나 했겠지요.... 보자. 강은 어느 쪽인가요? 저야 원래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고, 오늘은 당신도 시간이 많으니까 말할 때까지 물고기나 낚으면서 길게 기다려 보지요."
"....마마 쪽에서 소신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하시지 않았사옵니까?"
"시간은 많으니까요."
즉 '네가 먼저 말하면 나도 말할게'다.
내가 실토하지 않으면 끄떡도 안하겟군. 엄헌영이 푹 한숨을 쉬었다.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고 들으란 듯 크게 한숨을 쉬는 꼴을 보고도 서문경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엄헌영 저 치나 자신이나 뻔뻔하기는 거기서 거기. 그렇다면 찜찜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는 쪽이 지는거다.
'말을 타야 합니다.' 서문경의 집요한 시선을 받으면서 한참이나 말없이 걷던 엄헌영이 하마비가 나오자 말했다. 그렇게 먼 곳까지 멋대로 빠져나가도 되느냐고 묻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서문경은 코웃음을 쳤다.
그 빌어 잡수실 놈이 무슨 자격으로 잔소리를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어젯밤' 하면서 으드득 이를 가는 꼴을 보자 엄헌영은 더 이상 캐묻기가 두려워졌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헌영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말을 빌려 타고 영탄강으로 향했다.
요즈음 매일같이 잉어를 낚느라 안면을 익힌 배지기에게 맡겨두었던 낚싯대를 가져온 엄헌영은 미끼를 꿴 낚싯대 하나를 서문경에게 주고 자신의 바늘에도 미끼를 끼웠다.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서문경의 옆으로 가서 앉으며 엄헌영이 말을 걸었다.
"제법 익숙하신가 봅니다."
"형이 좋아했거든요."
주로 바다낚시였지만, 그렇게 대답한 서문경이 바로 꾹 입을 다물었다.
무심코 그 얼굴을 힐긋 봤다가 엄헌영은 의아해졌다. 눈빛과 턱을 단단히 굳히고 있는 서문경이 마치 후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낚시를 하러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무슨 까닭으로 저리 낯빛을 흐리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엄헌영은 그 건에 관하여 서문경에게 할 말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 때에는 , 참으로 송구한 말을 하였사옵니다."
대꾸 대신 서문경이 한 쪽 눈만 찡그려 보였다. 언제? 하고 묻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때....."
엄헌영의 말이 느릿해졌다. 설명하기 곤란하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 무례를 저질렀을 때가 떠올라서였다.
"행방이 모연해진 희 형님을 한창 찾고 있던 와중에, 소신이 그러하였지요. 염락이 마마께 황주에 위패가 모셔진 황족들에 대하여 조사한 문서를 준 저의를 의심하며."
"저 또한 '손님'이니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을 텐데 저를 어찌 신뢰하느냐고 하였던, 그 말 말입니까."
엄헌영이 던진 낚시바늘이 이미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던 서문경의 낚시바늘 옆에 가 꽂혔다. 엄헌영은 입을 다물었다. 일단 말을 꺼내기는 했는 데 더 이상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의심하는 자신에게 서문경이 했었던 그 알 수 없던 말으리 뜻을, 후에 알게 되었을 때의 황망함이 다시 그를 덮쳤다.
"...돌아가실 수 없다고, 들었사옵니다."
"그 때 일이라면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몰랐으니까요."
그리고, 하며 서문경이 손을 옆으로 조금 움직였다. 서문경의 닊시바늘과 엄헌영의 낚시바늘이 조금 멀어졌다.
"그리고 이젠 저와 상관도 없고요."
"상관이 없다?"
엄헌영이 서문경이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하자, 그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서문경이 무심히 대꾸했다. 그래요.
"저는 이제 여기 사람이니까. 범 세계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어찌 그리 될 수 있사옵니까?"
서문경이 엄헌영 쪽을 보았다. 엄헌영이 내뱉은 말에 당혹감이 서려있던 탓이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 자신이 해는 서편에서 뜨고 콩을 심으면 감자가 난다고 주장한 듯한 기분까지 들어서 서문경도 덩달아 당혹스러워졌다.
"제가 뭘 잘못 말했습니까?"
"마마께오서 이 세계에서, 안이, 아니 황상의 곁을 지켜주겠다 말씀해주시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옵니다. 장차 이 세계에서 살아가주겠다 말씀해주시는 것 또한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허나 그 결단이 어찌 원래의 세계에 대한 부정과 이어지는 것인지 소신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서문경은 당황스러웠다. 지금도 자신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자꾸 누군가 똑바로 서 있는 자신의 발밑을 잡고 흔드는 듯한 어지럼증이 일었다. 그 때문인지 저절로 변명조로 말이 나왔다.
"저는 여기서, 살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이전 세계에는 돌아갈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 생각도 하지 않으려는 겁니다."
"어찌하여 생각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
"방해가 됩니다."
서문경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 애가. 제 배로 낳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 애? 황자 아기씨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그래서 초조합니다. 그래선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제 아이니까 응당 그렇게 느끼고, 사랑해주고 편이 되어 주고...."
당황한 채로 두서없이 말을 잇는 서문경의 목소리를 엄헌영이 가로막았다.
"소신은 태어난 직후에 모친을 여의였습니다."
".....?"
돌아보자 엄헌영은 잔잔한 수면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낚싯줄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은 의아하겠지만 잠시만 들어달라는 청을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읽고 서문경은 눈을 내리깔았다.
모르는 사이 자신이 흥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구나. 하고 서문경은 생각했다. 지난 밤 황제와 나누었던 것과 비슷한 대화였지만 말하는 상대가 바뀌자 알 것 같았다.
초조했다. 자신이 과거를 답습할까 봐. 자신과 황제가 겪었던 과거를.
엄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의 부친은 그 후에도 새로 처를 맞이하지 않고 홀로 신을 키웠습니다. 장본인은 그리 볼 것이 없으나 워낙 든든한 배경을 가진지라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왔습니다마 결국 재혼은 하지 않았지요. 신의 모친을 지극히 사모해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애초에 대충 집안을 맞추어 한 혼인이었고 또 같이 산 세월도 그리 길지 않았으니 애틋한 정 따위가 생길 리가 없었지요. 헌데도 신의 부친은 모든 혼담을 물리치고 홀몸으로 남으셨다 합니다. 신이 장성한 후에 백부에게 그 말을 전해 듣고서 무슨 까닭으로 그러셨느냐고 여쭌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가 대답하기를-"
- 계모가 들어와 네가 서러울 일이 생길까 봐 그랬지.
엄헌영은 픽 웃었다. '기가 막히지요.'
"어린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행동이며 가치관, 생각까지 어디 하나 유치하지 않은 구석이 없지요. 새 여인이 들어와 옛 부인의 소생을 구박이라도 하면 어쩌나. 혹여 그 부인을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면 어쩌나, 그 부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면 또 어쩌나.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겼을 때에 자신이 제 편을 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고작 그런 이유로 스무 해를 홀아비로 살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여색을 밝히는 사람이. ...마마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마마와 황상 폐하의 이부를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 이는, 소신의 부친은 아직까지도 황상과 마마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찬란하던 광영을 그리워하며, 손가락 하나로 뭇사람들을 부릴 수 있는 그 커다란 권력이 자신의 누님께 있어야 맞다 그리 여기고 있지요."
예전에 살던 집의 변소보다도 좁고 축사보다도 더러운 골방에 틀어박혀서 그는 하루 종일 저주와 원망의 말만을 쏟아냈다. 문을 열면 피 냄새와 비슷한 고린내가 훅 풍겼다.
단순히 고인 공기가 내는 냄새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짙고 무거운 냄새. 그것을 엄헌영은 원망에서 나는 냄새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서 있는 땅처럼 여기고 의지하던 형님이 사약을 받고 죽던 그날. 그는 혼절해서 며칠을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겨우 정신을 차린 그를 기다리고 있던 소식은 하늘같은 누님이 폐서인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충격을 받은 태황태후가 광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믿지 않았다. 그는 총명한 누님이 황제의 눈을 속이기 위해 미친 척 가장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그가 충격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태황태후는 허세 덩어리였다. 일각을 굽히는 것으로 백 년을 벌 수 있다 해도 그녀는 결코 그리할 인물이 아니었다. 당장 추한 꼴을 보여 적을 속이고 앞날을 도모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인물이 그녀는 아니었다. 허나 진심으로 엄헌영의 부친은 그리 믿었다.
그래서 그는 몇 번이고 태황태후를 찾아가려 노력했다. 나중에는 짐승의 분뇨를 뿌리며 쫓아낸 아들, 엄헌영에게까지 도움을 청할 정도였다. 그러나 엄헌영은 그 애원을 들어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엄헌영은 반복해서 말했다. 백부는 죽었고, 태황태후는 폐서인이 되었다. 당신과 나만이 겨우 황은으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그 말을 듣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칼을 휘둘렀다.
은혜도 모르고 제 핏줄을 밀고해 바친 놈의 머리를 자신의 손으로 따서 형님의 영전에 바치겠다. 그리 소리쳤다.
첫 날에는 뺨을 맞았고, 그 다음에는 다리가 부러졌고, 또 그 다음에는 배를 찔렸다. 하지만 엄헌영은 부친을 찾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굳게 닫힌 문을 열 때마다 훅 풍겨오는 원독의 냄새가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자신을 원귀처럼 쳐다보는 아버지의 핏발 선 눈이 점점 더 사나워져도.
"...그겁니까?"
엄헌영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서문경이 불현듯 물음을 던졌다.
"당신 아버지가 짓고 있는 죄를. 당신이 대신 갚으려고 그러는 겁니까? 그래서 온갖 모욕을 감내하고 있는 겁니까?"
"마마께서는 멍청한 생각이라 혀를 차시겠지만, 그런 이유도 얼마간은 있사옵니다."
"그럴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신도 아비의 죄는 자식에게 이어지고. 자식이 지은 죗값도 얼마간 부모에게 물어야한다 여기는 것은 아니옵니다. 허나."
결국 부정할 수 없었다. 그가 결국은 그랬듯. 자신 또한, 그저 그가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대가로 지불한 것은 자신이 누릴 향락이고 자신이 그를 부정하지 않는 대가로 지불한 것은 자신의 안위라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본질은 같았다.
"제 아무리 못난 자라도 그 이는 소신의 아비이옵니다. 신은 그로부터 나고 그로부터 자랐사옵니다. 비유하자면 그는 신의 뿌리이고 젖줄중 하나인 셈입니다. 물론 한 나무에서 내리는 뿌리는 수 없이 많고, 한 바다로 흘러드는 강과 내도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 중 하나를 잘라낸다고 해도 나무와 바다가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뿌리나 젖줄 중 하나가 썩거나 독이 들었다면 차라리 잘라내는 것이 나무나 바다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지요.....
허나 신에게 신의 아비는 잘라낼 수 없는 뿌리이옵니다. 저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서는 잘라 내는 것이 나은 썩은 뿌리이나. 신의 넋을 위해서는 잘라내서는 아니 되는 뿌리이옵니다."
문득 수면에 연풍이 불었다. 잔잔하던 수면에 약하디 약한 파동이 일었다. 수면 위에 휴식을 취하는 잠자리처럼 고용히 떠 있던 낚싯바늘이 파르르 날개를 떨었다.
"마마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상 마마의 말씀은 모두 옳습니다. 아무리 그리워해도 다시는 발 들일 수 없는 곳이라면 이미 생명력을 잃은 것이니. 그것은 박제된 것이나 다름이 없지요. 다만 신이 하고픈 간언은,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끊어내고자 하는 그 뿌리는-.
"마마의 넋 또한 끊어내야 한다 말하는 뿌리이옵니까?"
"......"
서문경은 천천히 낚싯대를 든 손을 거두어들였다. 엄헌영의 눈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서문경을 따라 위로 움직였다. 서문경이 긴 낚싯대를 엄헌영에게 툭 던져주고 풀이 묻은 엉덩이를 탁탁 털었다.
"먼저 가지요. 말 한 필만 빌리겠습니다. 마두에게는 백상궁을 시켜 전갈을 넣을 터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엄헌영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잠깐만, 그리하시면....'하고 말하려는 것을 서문경이 막았다.
"실은 조금 궁금했습니다. 큰 공을 세워 놓고도 왜 당신이 그것을 내세우지 않는지요. 그 답을 당신 말을 들으니 알겠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목숨을 당신이 세운 공과 바꾼 거지요. 당신은, 그래서 당신이 받을 상은 없다 생각하는 것이지요. 물론 저는 당신의 생각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생각이라 하심은?"
서문경이 픽 웃었다.
"당신이 달게 벌을 받는 것을 사람들이 멋대로 오해해서 말을 지어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그 반대도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그래요. 예컨데... 효강 엄헌영은 타계에서 와 친밀한 이 하나 없는 용황후가 황제를 제하고 유일하게 의지하는 벗이다. 같은 풍문 말이지요."
풍문은 어디까지나 풍문일 뿐이니 굳이 반박할 생각은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서문경이 가볍게 덧붙이며, 얌전히 대기하고 있던 말의 등 위로 훌쩍 올라탔다.
말의 등에 오르기는커녕 말 주변을 경계하는 시선으로 한참이나 서성거리기만 했던 예전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 모습을 본 엄헌영은 새삼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서문경이 조금 전 했었던 말을 되뇌었다.
용황후. 방금 전 자연스레 황제의 배필로 자처한 서문경은, 이제 자신에게 말을 놓으라는 둥의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자신의 위치에 익숙해져 가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엄헌영은 서문경이 처한 상황에 겨우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과도기.
"마마께서는...."
엄헌영이 불쑥 꺼낸 말에 서문경은 말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경계하는 듯한 시선. 그의 머릿속을. 엄헌영은 왜인지 빤히 읽을 수가 있었다.
그는, 아닌 척 가장하여 내민 손을 자신이 거절할까봐 긴장하고 있었다. 그가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서문경과 낚싯대를 드리우고 대화를 나누기 전의 자신이었다면 분명히 그의 제안을 거절했을 터이니.
하지만 서문경이 이 세계에 적응하는 과도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자연스레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용황후는 영민한 청년이니 아마 자신이 깨달은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엄헌영 또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처해 있다는 것까지. 그래서 분명 방금 전과 같은 제안을 한 것일 것이다.
서문경처럼 엄헌영 또한 과도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과거 그가 가졌던 것들이 송두리째 증발하면서 갑작스레 낯선 상황에 처해지고 그에 차차 차차 적응해나가는 과도기. 서문경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것일 터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허나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학대하는데 익숙해지지는 말기를.
그 호의를 엄헌영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
올려다보자 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엄헌영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예전에는 수 없이 느껴본 적이 있는 기분이지만, 모든 것을 잃고 난 이후에는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그런 기분.
누군가가 자신을 걱정해주고 또 순수한 감사와 호의를 보낸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끼곤 하는 그 더운 아지랑이 같은 기묘한 흔들림.....
엄헌영은 가느다란 숨을 몇 번으로 나누어 내쉬었다.
"신의 부친이 말하기를." 엄헌영은 겨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신을 머리로는 자신의 핏줄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가슴으로 느끼지는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의 탄생을 기뻐한 것도 저라는 인간이 태어난 것 자체를 기뻐했다기보다는 가문의 대를 이을 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기뻐한데 불과했다지요. 허나 의식적으로나마 의무감을 느끼고 함께 보낸 시간이 쌓이면서, 결국은 머리보다는 먼저 가슴으로 신을 아들이라 느끼게 되었노라고, 그리 말하더이다."
그리고 신 또한 그러하옵니다. 엄헌영이 고백했다.
"못난 아비라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결국 저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런 까닭일지도 모릅니다. 그 이와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함께하였고 많은 시간을 공유하였기 때문에. 그러하니 마마께서도 염려하실 필요가 없다 사료되옵니다.
이 세계에서 마마께서 과도기를 맞으신 것처럼, 황자아기씨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너무 초조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천천히, 시간이 쌓이고 쌓이면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니까요."
긴 말을 마친 엄헌영이 씩 웃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서문경이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자 엄헌영이 서문경의 손에 늘어져 있던 말고삐를 쥐어주었다.
시간을 많이 지체하신 듯 합니다. 이만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그 말에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의 서문경이 입을 벌렸다가 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을 본 엄헌영이 마치 지금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마마의 호의는 감읍한 마음으로 받잡겠사옵니다."
그 말에 서문경이 픽 웃었다.
"소문이 효강 엄헌영이 용황후의 정부라고 나지 않기를 바라시지요."
".....그렇게 되면 군석도에 있는 희 형님과 이웃이 되겠군."
그 쪼잔한 새끼는 사실이야 어쨌건 그런 소문이 났다는 것 자체만으로 분명히 날 귀양보내버릴 거야....
서문경의 한 마디에 여운 따위는 단번에 날려버린 엄헌영이 부르르 치를 떨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