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7/66)

아무리 본신이 용이라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저 작자는 빼도 박도 못할 짐승이었다. 황제와 살을 부대끼고 살면서 서문경이 깨달은 사실이었다. 헌데 더 미치고 펄쩍 뛸 일은. 서문경이 그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닫는 일련의 과정 동안 황제는 서문경의 몸을 자신의 몸처럼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서문경을 능히 울고 웃고 쾌감으로 혼이 나가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쾌감이 극에 달했을 때 자신이 하는 행동을 서문경은 몹시 부끄럽게 여겼고, 그것을 아는 황제는 웬만해선 서문경을 끝까지 밀어 붙이지 않았지만 그런 그가 종종 배려를 거두고 행동할 때가 있었다. 지금이 말하자면 그런 때였다.

"으, 응. 아, 으응, 아....."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신이 내는 신음소리가 귓전에 찐득찐득하게 달라붙었다. 응석을 부리는 듯한 소리에 확 귓볼이 붉어졌지만 스스로를 정돈할 정신이 지금 서문경에게는 없었다.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서문경은 황제의 목을 더 힘껏 껴안으면서 그의 목덜미에 귀를 묻었다. 그러나 숨기지 못한 한쪽 귀에 닿는 신음소리는 마치 튀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때문인지 피부가 더 달아올랐다.

슬쩍 스치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일 만치 예민해진 피부에 땀으로 젖은 상대의 피부가 계속해서 부딪쳤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황제의 위에 앉아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서문경은 허리를 비틀었다.

슥, 슥, 슥. 황제의 것을 뿌리까지 삼킨 둔부에 까슬까슬한 거웃과 단단히 올라붙은 살이 계속해서 비벼진 때문이다.

입구에 살덩이가 비벼질 때마다 뱃속이 요동을 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단단하지만 말랑말랑한 살덩이가 예민해진 입구에 비벼지는 감촉과 동시에 안에 깊숙이 삽입된 뜨거운 것이 꿈틀거리며 안을 자극해댄다.

죽을 거 같아. 서문경은 송골송골 땀이 맺힌 콧잔등을 황제의 목과 어깨 사이에 비비면서 꽉 눈을 감았다. 뇌가 푹 끓인 풀처럼 흐물흐물해져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 으응, 아, 아, 하읏....! 폐하. 아. 폐하. 아아....."

"아가. 우리 아가."

서문경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황제가 살덩이를 달아오른 밀부에 비비면서 속삭였다. 그런 그의 목소리에도 채 숨기지 못한 거침 숨이 엉켜 있었다.

"어떠하더냐. 기분이 좋으냐?"

"싫어. 싫어요. 폐하. ....아!"

"이런, 우리 아가가 아직까지 거짓말을 할 여유가 남아 있는 모양이구나."

참말을 하지 않는 아가에게는 벌을 주어야지. 황제가 낮게 웃으며 갑자기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퍽!

"아!"

집요하고 뭉근한 쾌감에 몽롱하게 잠겨 있던 서문경이 갑작스러운 충격에 비명 같은 교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가 지르는 교성이나 신음 따위를 들을 여유조차도 없었다.

퍽! 퍽퍽! 퍽퍽퍽! 황제가 서문경의 허리를 잡아 추어올렸다가 바로 아래로 꽂아 넣으며 허리를 흔들었다. 강하게 일으켜졌다가 바로 내려앉으며 삽입 당하는 충격에 서문경은 황제의 등을 손톱을 세워 긁었다.

일어날 때마다 내벽이 황제의 것에 집요하게 달라붙었다가, 서문경 자신의 체중 때문에 깊숙이 삽입 당할 때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수축하며 뜨거운 것을 삼키고 빨았다.

"으. 아. 흣. 아아아아....!" 정도를 지나친 쾌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내내 도리질을 치던 서문경이 결국은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아, 으응, 아아, 흣, 으으응, 아, 아, 아아......"

빨라요. 뜨거워. 너무 빨라요. 아이처럼 훌쩍거리며 달라붙어오는 서문경을 황제는 두 팔로 꽉 안아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순간조차 거칠게 움직이고 있는 허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다정하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다.

'그래. 착하지. 오냐. 그래. 착하다. 우리 아가. 괜찮아. 괜찮다, 우리 깜둥새. 그래. 그래. 짐이 여기 있지 않으냐, 무서울 것 하나 없느니, 조금만 참으면 된단다. 그래. 잘 하지. 그래....' 흐느끼는 서문경을 달래면서 황제가 자세를 바꿨다. 삽입된 채로 눕히자, 안에 든 것이 내벽을 긁으며 움직이는 느낌에 서문경이 진저리를 쳤다.

살과 살이 부딪치며 나는 젖은 소리가 점점 더 빨라지며 커졌고, 그 때마다 앓는 듯한 흐느낌도 점점 더 커졌다. 아이처럼 펑펑 울고 있는 서문경은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린 듯, 황제가 묻는 말에 반사적으로 대꾸를 하고 있었다.

"좋으냐, 아가. 응?"

"응. 응... 아. 응. 좋아요.  ...앗!"

"짐이 어찌해 주었으면 좋겠더나. 말해 보거라."

"빨리. 더 빨리."

"그리고?"

서문경이 황제의 목을 꼭 껴안고 입술로 목덜미를 비비면서 속삭였다. 안에. 헐떡이는 숨이 말끝을 끊어놓았지만 그것만으로도 황제는 서문경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 챈 듯 했다.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것을 거세게 집어넣으면서, 황제가 절정에 다다랐다. 자신의 안에 뜨거운 것이 확 퍼지는 감각을 느끼며 서문경도 몇 번째인지도 모를 절정을 맞았다.

서문경이 무너졌다. 이번에는 황제도 그것을 막지 않았다. 벌렁 임석 위에 드러누운 황제가 엎드린 채 가느다란 숨을 나누어 쉬고 있는 서문경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서문경은 어깨를 꿈틀하며 거부하려 했지만 격렬한 정사 탓에 손을 쳐낼 힘도 남아 있지 않아서 결국은 황제가 끄는 대로 끌려갔다.

모로 누워 서문경을 품에 안은 황제가 한 손으로는 느릿하게 서문경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볼에 닿는 미지근한 체온과 뒷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무척 기분이 좋았지만 부글거리는 속이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문경이 기력을 회복해 따지기 전에, 황제가 선수를 쳤다.

"짐이라고 네가 엉엉 우는 꼴을 보는 것이 좋겠느냐? 그리 보지 말거라."

"솔직히 좋아하시잖습니까."

"그것은 그래."

그대가 이성을 잃고 엉엉 울 때면 정신이 쏙 빠질 만치 어여쁘거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냉큼 대꾸했다가 황제가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미친 듯이 마른기침을 했다.

때리고 싶다. 서문경이 멍하니 생각하다가 바로 옆에서 얼쩡거리는 황제의 팔을 콱 깨물었다. 그러나 턱에도 전연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서문경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성을 내는 건지 애교를 부리는 건지 경계가 모호할 정도였다.

때리는 것도 무는 것도 포기하고 아예 눈을 감아버린 서문경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문득 황제가 입을 열었다.

"허나 그대가 좋아하지 않으니만큼 짐도 그다지 하고 싶지는 않아. 그대가 엉엉 우는 모습은 참으로 어리로우나 내 이기심 하나 채우자고 경이 네게 힘든 일을 시키는 것은 뒤가 껄끄럽거든. 허나 이번만큼은 강수를 두어야 할 것 같아 이리하였다."

분명 가식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저 이가 이리 한 것일까.... 가물가물해 가는 의식 속에서 서문경이 생각했다.

혼몽 중에 황제가 들려주는 답이 들려왔다.

"지금 그대는 머리를 비울 필요가 있느니."

푹 자거라. 황제가 서문경의 등을 도닥도닥 두드리며 말했다. 그 말이 마치 어떤 힘을 가진 주문인 것 마냥 서문경은 곧장 잠이 들었다.

서문경이 완전히 잠이 들 때까지 황제는 계속해서 서문경의 벗은 등을 토닥거리고 있었다. 서문경의 숨소리가 꽃창 아래 낮잠을 자는 새끼용처럼 변했을 때 황제가 등을 토닥이던 것을 멈추고 대신 땀에 젖은 살갗을 가만가만 쓸어내리면서 한탄했다.

"희한한 일이지. 쉬운 길을 돌아서 가려는 이들이 무에 이리 많은고."

눈꺼풀에 덮인 서문경의 눈이 꿈틀했다.

눈을 떴을 때는 한낮이었다. 사람의 육체에 껴 안겨 있는 것처럼 내내 포근했지만, 깨닫고 보니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은 체온이 아니라 햇빛이었다.

서문경은 긴 숨을 몇 번으로 나누어 내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두터워봐야 결국은 한 장 종이에 불과한 문종이를 뚫고 정오의 햇빛이 방안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 어떤 칼바람도 질긴 문종이를 뚫지는 못했는데, 서문경은 자신의 발치에까지 와서 아롱거리는 금빛 그물을 말끄러미 내려다보다 무심코 지난겨울을 떠올렸다. 모든 것이 시작된 가을과, 모든 것이 끝난 겨울을.

과연 끝이 났던가. 서문경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젯밤 있었던 작은 다툼과, 까무룩 쓰러지던 와중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머리를 비워야 한다, 라. 무슨 말일까.

머리를 비우기는커녕 더더욱 머리가 복잡해져서 그는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서문경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문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상궁이 보름달처럼 넓은 은쟁반에 담긴 물과 양털처럼 하얗고 보드라운 천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분명 얼굴에 눈물자국이 난 것을 보았을 텐데 그것을 능숙하게 못 본 척한 백상궁이 공손하게 여쭈었다.

"시장하시지요. 마마? 낮것상을 올릴까요? 진시에 한 번, 오시에 또 한 번 황자 아기씨가 문안 인사를 드셨습니다만 마마께서 기침하시지 않아 되돌려 보냈사옵니다."

"흰, 아니, 황자가?"

"예에."

빈말로라도 깨우지 그랬느냐고 말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통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서문경은 한 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행관에 가보려고 합니다."

다분히 충동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뱉고 나자 그것도 썩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서 가려는 이가 무에 이리 많은가. 하던 황제의 탄식도 불쑥 떠올랐다. 자신 외에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대충 짐작은 갔다. 확인해봐야겠다.

허나 서문경이 말을 뱉기가 무섭게 눈이 동그래지는 것을 보니 듣는 백상궁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백상궁이 허둥거리며 서문경을 말렸다.

"서행관 말씀이시옵니까? 엄장군. 아니, 엄백사를 보시려면 차라리 엄백사를 신우전으로 부르시는 편이...."

"한창 일하는 사람을 이 먼 곳으로 불러서 뭘 하자는 말입니까."

"그럼 마마. 소인이 급히 대산과 호위를 준비할 터이니."

백상궁의 말이 끊겼다. 말을 하는 도중에, 서문경이 '아니' 하면서 손을 저은 탓이었다.

"별다른 연락도 없이 궁인 수십과 창칼 든 호위 몇 십 짜리 행렬이 행차하면 엄백사 뿐만이 아니라 서행관 사람들 전체가 혼이 빠질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 곳인데 그럴 수야 없지요."

"외람되오나 소인은 머리가 영특하지 못하여 마마의 깊으신 심사를 도무지 가늠하지 못하겠사옵니다....."

즉, '그럼 대체 뭘 어쩔 생각인데?' 그 질문이 나오기가 무섭게 서문경은 대꾸했다.

"혼자 다녀오지요."

"마마!"

"가뿐하고 좋잖습니까." 서문경은 자신이 내민 팔에 반사적으로 두터운 주의를 입혀주려 하다가 뒤늦게 아차하고 있는 백상궁을 돌아보고 경고했다. "따라오지 마십시오."

"마마. 어찌 그러십니까. 귀하신 몸께서 홀로 외궁으로 행차하신다니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그러지 마시고, 소인과...."

"싫습니다."

"그럼 호위라도. 제발."

서문경이 푹 한숨을 쉬었다. '좋습니다. 꼭 그래야 마음이 편해지신다면.' 그 말에 내내 칙칙하던 백상궁의 얼굴이 겨우 사람 같은 빛깔이 되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어진 서문경의 말에 백상궁은 대답할 말을 잃은 채로 굳어졌다.

"그래. 폐하께선 언제 오신답니까? 저를 호위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라면 그 정도밖엔 없을 텐데요."

차라리 더 고집을 피우는 편이 낫지.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되묻는 것이 필시 얄미웠을 터이다. 그러나 백상궁은 난감한 표정이 어린 얼굴을 굳힌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애원하듯 마마, 마마, 하고 서문경을 부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 애원을 서문경이 들어줄 리가 없다. 지금 서문경은 기이한 오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기필코 엄헌영을 봐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서문경은 백상궁이 내어준 길고 두꺼운 주의를 꿰어 입고 바로 석류방을 나왔다. 그것을 보고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 백상궁과, 영문도 알지 못하고 어미 오리를 따라가는 새끼오리처럼 백상궁 뒤를 따라 나온 궁인들이 댓돌이 있는 곳까지 나왔지만 누구도 끝까지 서문경을 따라오지는 못했다.

"엄백사!"

하고 부르는 천둥 같은 소리에 엄헌영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부르는 것이 귀찮아서도. 자신을 부른 사람이 싫어서도 아니고 단순히 막 일을 시작한 참이라 그랬던 것이지만 엄헌영의 표정을 본 사람은 그렇게 해석해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어느새 엄헌영의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중년 사내가 그 험상궂은 얼굴을 더더욱 험상궂게 찌푸리고 엄헌영을 꾸짖었다.

"상관이 부르는데 대뜸 싫은 얼굴부터 하면 어떻게 하나? 빠져가지고는. 그 따위로 굴면 당장 진창에 머리를 처박혀도 군말 못하지. 아니면 자네. 아직도 좋았던 시절 생각만 하고 있나?"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일단은 상관인가싶어서 급히 예를 갖춘 엄헌영은 머릿속으로 눈앞에 있는 사내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사내가 말하는 소위 '좋았던 시절'에 자주 보던 얼굴이 아니었던지라 기억해내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대외성 남문 경비를 맡은 천인대장 모용석. 그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엄헌영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남문 천인대장께서 서행관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그다지 눈살을 찌푸릴만한 물음은 아니었다. 따지자면, 오히려 나오는 것이 당연한 질문일 것이다.

사문 경비대도 물론 무관인 만큼 서행관 소속은 맞지만 그것은 서류상의 기록에 불과했다. 수도의 외곽을 두르는 긴 성벽의 대외성을 수비하는 병사들의 실근무지인 사문초소와 황궐 외성에 위치해 있는 서행관과의 거리는 말로 달려도 한 시진을 꼬박 넘길 정도다.

그런 형국이니 사문 경비대 소속의 무관들이 친귀군이나 시위군 소속의 무관들처럼 하루에 두 번. 꼬박꼬박 서행관에 들르는 것은 시간 낭비 그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연유로 사문 경비대 소속의 무관들은 황궐과 사문 사이에 둔 제행관을 통해 본부격인 서행관과 연락을 취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서행관에 있는 남문 천인대장을 보고 엄헌형이 한 질문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 당연한 물음에, 남문 천인대장 모용석은 불같이 화를 냈다.

"네 이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본관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내가 어디 못 올 곳이라도 왔단 말이더냐?"

"아니, 그것이 아니라 남문의..."

"남문이 무어! 우리 경외군이 하는 일이 경내군이 하는 일보다는 다소 격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나, 고작 백인장에 불과한 백사 놈 따위가 어찌 천인대장을 모욕할 수 있단 말이냐? 일어서라! 내 비록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몸이나 기필코 네 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고야 말겠다!"

새삼 일어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엄헌영의 멱살을 모용석이 거칠게 잡아챘다. 그리고 엄헌영이 뭐라 변명할 새도 없이 그를 질질 서행관 밖으로 끌고 나갔다.

멱살이 잡혀 끌려나가면서 엄헌영은 지그시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콱 깨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애써 모욕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엄헌영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미친 놈. 황실을 지키는 경내군과 백성을 지키는 경외군이 하는 일은 그 경중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모두 중하거늘 어찌 그리 쉽사리 경외군을 격하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스스로가 몸담고 있는 곳을.

이런 놈이 남문군 천인대장이라니 말세도 이런 말세가 또 없다. 대체 지금 남장군이 누구이기에 이런 벼락 맞을 인사를....

그러다가 엄헌영이 푹 한숨을 쉬었다. 누구인 줄 알면 뭘 어쩌려고. 다 부질없는 생각.

그런 생각에 엄헌영의 머리가 더 아래로 떨어지자. 그 모습을 오해하고 더더욱 기세등등해진 모용석이 소리쳤다.

"오냐, 이제야 네가 네 신세를 자각했나 보구나."

멀쩡히 일 잘하던 백사가 별다른 용건도 없이 얼굴을 들이민 남문군 천인대장에게 끌려 나가는 진풍경을 보면서도, 서행관에 남아 있던 몇몇 장수들과 잡일을 맡은 궁인들은 설레설레 머리만 내저을 뿐이었다.

멱살을 끌고 나가는 사람만 바뀔 뿐이지, 끌려 나가는 놈이나 저 상황 자체는 지겨울 만큼 식상해진 터였기 때문이었다.

"참 딱해."

그래도 한 때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의 권세와 명예가 있었거늘. 모용석과 엄헌영이 서행관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태사의감 승박사가 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그 말에 출장을 나온 승박사의 손에 다친 발목을 치료받고 있던 무관이 대꾸했다. '슬슬 익숙해지지 않았겠나, 하루에도 열두 번 저런 불청객이 찾아오는걸.'

그 말에 주춤한 승박사가 아연한 얼굴을 했다. 개인적으로도 알고 지내는 저 무관이 결코 과장이나 허풍을 떨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던 탓이다. 대체 왜? 누가? 의원의 물음에 무관이 답했다.

"낸들 아나. 나도 저런 추저분한 근성을 가진 작자가 이렇게 많다는 걸 근래 들어 처음 알았네.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잘 나가던 작자가 하루아침에 역도의 실자로 전락했으니 괜히 한 번씩 거꾸러뜨려 보고 싶은 것이겠지. 그래도 한 때는 겨우 약관을 넘긴 나이에 용호군 중랑장 1령 장군에까지 임관되었던 정예 중의 정예이니 이런 상황이 아니고서야 어찌 저런 작자들이 효강같은 사람을 깔아뭉개볼 수 있을까."

못났다. 못났어. 고개까지 설레설레 저으며 말하는 무관을. 의원은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왜 그리 봐? 무관이 그리 묻자 의원이 반문했다.

"그리 여긴다면 어찌 말리지 않는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늙은 무관이 펄쩍 뛰어올랐다.

"어찌 그래? 엄백사를 고깝게 여기는 이들이 비단 아까 그 치 같은 이만이 아니거늘! 내 나이가 나이니만큼 새삼 출셋길에 나아가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나 그래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아야지!"

즉. 엄헌영을 고깝게 여기는 추접스러운 작자들이 까마득히 높은 분들 중에서도 별처럼 많다 그 말이다.

아이고. 승박사가 다시금 혀를 찼다. 비록 역적 집안의 자식이기는 하나 그래도 저 자 혼자만 놓고 보면 황상과 난전 마마를 서엽과 태황태후란 악수로부터 지킨 공이 있는 자이거늘, 참말로 딱하기 그지없다.

그런 승박사에게 고약을 바른 발목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던 무관이 목소리를 낮추어 충고했다.

"자네고 말조심하는 것이 좋을 게야. 엄백사를 찾아오는 치들은 대부분이 저런 놈들이기는 하나, 개중엔 더 위험한 짐승도 있으니."

"위험한 짐승이라니?"

"차마 체면 때문에 대놓고 찾아오지는 못해도, 부하 놈 등을 떠밀어다 으슥한 곳에 데려오도록 해놓고 남 몰래 원한을 풀려는 놈은 썩어나자빠질 정도로 많지."

기가 막힌 지 허허, 하고 허탈한 웃음만 흘리고 있는 승박사에게 무관이 은근한 투로 물었다.

"예를 들자면, 방금 저 모용석이란 놈은 남문 경비대 천인장일세. 그러니 저 놈 상관이 누구겠나?"

"남장군이겠지. 한데 분명히 얼마 전에 남장군이 바뀌었었는데. 그게 분명히...." 하고 반사적으로 대꾸한 의원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탁 무릎을 쳤다. "화성광!"

"그렇네. 대사농 화연백 어른의 장남이지."

이것 참. 의원이 새삼 걱정스런 눈으로 엄헌영이 있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그는 물론이고 이야기를 꺼낸 무관도. 몰래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궁인들도 방금 전과 달리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죽재 화연백은 그 호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결벽하고 대쪽 같은 성품으로 유명한 관리로, 실력과 가문을 두루 갖추었으나 지금은 폐서인된 태황태후 엄씨에게 밉보여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자였다.

또한 그거도 모자라 방약무인한 성품의 태본 엄유에게 종종 지독한 모욕을 당하곤 하였다.

이번에 새로 남장군에 임명되었다는 화성광은 그런 화연백의 장남으로, 성질이 불같은 면이 있어 제 부친이 당한 모욕에 분개하여 엄유와 드잡이판을 벌인 전적이 몇 번이나 있는 자였다. 

세 황제의 치세에 걸쳐 제일가는 권력자였던 태황태후의 애제와 대놓고 드잡이 싸움을 했으니, 제 아무리 무위가 뛰어나다 한들 그 또한 출세를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허나 세상일은 결국은 사필귀정이라 태황태후와, 그 이를 등에 업고 권세를 휘두르던 엄충, 엄유 형제도 결국은 몰락을 맞고 그간 기를 펴지 못하던 이들이 대신 허리를 펴게 되었으니 자연히 화연백과 화성광 부자도 제 능력에 맞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참으로 바람직한 결말이 아닐 수 없으나, 엄헌영의 입장에서 보면 전연 그렇지가 않았다. 점잖은 화연백의 속이야 알 수 없는 일이나 화성광은 엄유가 실각하고 엄헌영이 좌천된 이후부터 엄씨 부자 놈들에게 공공연히 묵은 빚을 갚겠노라 말하고 다니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남장군 화성광 아래에 있는 모용석이 나타나 엄헌영을 끌고 나갔으니, 남아 있는 자들이 염려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엄헌영과 모용석의 뒤를 따라 나가는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사농 화성광이라면 전 수상 서현이 실각하고 엄충 엄유 형제와 헌의공 서엽이 역률로 다스려진 이후 나라의 제일가는 권세가로 손꼽히는 자였기 때문이었다.

"그저 저 치가 제 치기를 이기지 못해 서행관을 찾은 것이면 좋겠는데....."

승박사가 중얼거렸다. 허나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나, 심지어는 그렇게 말하는 승박사조차도 그것이 참으로 실현 가능성이 낮은 희망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모용석이란 놈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가면서 엄헌영은 생각하고 있었다. 키가 6척도 넘는 사내놈을 이리 쉽게 끌고 가는 것을 보니 힘은 참 좋은데.

허나 힘 하나만으로 무용이 높다 말할 수는 없다. 제법 괜찮다 소리를 듣는 무장이라면 응당 힘과 경험, 기술과 머리를 동시에 지녀야 하는 법이니. 넷 중 둘만 갖추어도 어찌어찌 쓸 만은 할 터인데 이 자는 그것도 글렀다.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품새와, 멱살을잡았다고 바로 의기양양해져선 잡힌 사람도 잘 살피지 않는 태도에서 저 놈에게 그럴 듯한 기술과 경험 따위는 없다는 것이 바로 티가 나니까.

헌데 남장군은 왜 이런 놈을 천인장 자리에까지 올린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엄헌영은 지금 당장이라도 모용석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태황태후와 백부의 권세가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명색이 제국군 정예인 경내군 중에서도 수위를 다툰다는 용호군에서 중랑장 1령 장군에까지 올랐던 몸이다.

그런 그 앞에서 웬만한 무장은 이름표를 내밀기도 힘들었다. 그와 단 한 번이라도 함께 전투를 치른 적이 있는 이라면 그의 무위를 일러 말하기를, 효강 엄헌영이 외전에서 베어 넘긴 수급은 칼바람에 넘어가는 갈대의 수와 같고 그의 칼로 흘린 피는 작은 강을 이룰 정도라 하였으니.

그러나 엄헌영은 당장 한 손만으로 제압할 수 있는 모용석의 솜방망이 같은 손아귀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이 비단 이번 한 번만이 아니었던 탓이다.

원래 성격같았으면 내가 잘못한 일도 없거늘 어찌 좆같은 새끼들이 개지랄을 떠느냐 패악을 부려고 예전에 부렸겠지만 이젠 그럴 힘도 없었다.

그냥 조용히 있으면 다 지나가려니. 또, 여전히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황제와 황후에게 아득바득 이를 갈고 있는 제 부친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함도 있었다.

그 양반도 참 제정신 못 차린단 말이야.... 지금 당장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다는 것도 모르고. 나이가 쉰이 훌쩍 넘겨서도 아직 일고여덟 살 어린애 같은 생각을 가진 자신의 아버지 엄유를 떠올리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 순간, 모용석이 엄헌영을 바닥에 내던지듯 내팽개치면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디서 한숨이냐, 개 같은 역종 놈이!"

모용석의 욕설이 갑작스레 내던져져 당황한 엄헌영이 자신도 모르게 낙법을 쓰는 것을 보고 한층 더 격렬해졌다.

"어디서 몸을 사리느냐? 네 놈은 당장 분뇨에 얼굴을 처박아 마땅한 개잡놈이거늘! 오살(죄인의 머리를 찍어 죽인 다음 팔다리를 베는 사형 방법)을 당해도 모자란 놈의 모가지가 아직도 몸뚱이에 붙어 제 몸의 안위를 살피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로다!"

역시 그냥 땅바닥에 얼굴쯤은 갈아줬어야 했는데. 침과 함께 쏟아지는 욕설을 엄헌영이 내심 한숨을 쉬며 듣고 있는 사이에 모용석이 휙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에게 동의를 구하는 소리였다. 응? 모용석이 지껄이는 말을 옆집 개 짖는 소리처럼 흘려듣고 있던 엄헌영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에게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꼴 좋구나."

또 누군가가 있단 소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빈정거림이 들려왔다. 정확히 엄헌영을 향한 말이었다. 그 목소리가 들려온 것과 동시에 모용석이 '장군님' 하고 말하며 어설프기 짝이 없는 예를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이르신 대로 데려왔습니다."

"좋다." 아까의 그 목소리가 답하자, 모용석의 얼굴에 한결 더 뻔뻔한 빛이 흘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어린 의기양양함이 사라지는 것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예의 그 목소리가 좋다, 하는 말 직후에 이리 말한 탓이었다. "내가 시킨 짓이라 가감 없이 까발려주니 참 좋기도 하구나."

헉,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모용석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 때 엄헌영이 뒤돌아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며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익성."

엄헌영의 등 뒤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던 대나무 같은 사내가 그 부름에 입술을 비틀었다.

"웬일이냐. 내 낯짝 따위는 꿈에도 보기 싫으실 양반이."

"내 언제 네 놈을 보려고 여기로 왔다고 했느,"

사내. 익성 화성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모용석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닥쳐라! 겨우 목숨을 건지고도 여전히 오만무례하기 그지없는 네놈 부자의 짓거리를 도저히 보아 넘길 수 없어 남장군께서 직접 행차하셨으니 미천한 네 놈은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싸늘한 공기가 화성광과 엄헌영 사이에 내려앉았다.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리려고 했다가 그마저도 돌대가리 부하 때문에 탄로가 난 화성광이 숫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로 목을 울렸다.

야. 모용석. 그 음산한 부름에 예. 장군! 눈치 없는 모용석이 씩씩하게 대꾸했고 인내심이 바닥난 화성관의 발이 모용석의 궁둥짝으로 날아갔다.

그 거친 발길질에 쫓겨 모용석이 모습을 감춘 후, 뒷머리를 긁적이며 화성광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엄헌영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화성광이 버럭 소리쳤다.

"조금도 기가 안 죽었구나! 하기는, 하늘 아래 감히 얼굴을 들고 살아가기가 부끄러운 역적 놈의 질자가 아직 서행관 끄트머리에나마 붙어 있는 꼬락서니를 보면 네가 얼마나 뻔뻔한 놈인지 알만 하지."

"무슨 까닭으로 성을 내는지 모르겠다만." 그냥 쳐다봤을 뿐인데 입에서 불을 뿜을 기세로 날뛰는 화성광의 말허리를 엄헌영이 끊었다. 

"무슨 일이냐?"

억지로 말이 끊긴 화성광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잠시 후 한 쪽 입꼬리를 귀 쪽으로 슥 말아 올리며 웃었다. 엄헌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웃었어?

"내가 네 놈을 찾을 이유가 무어 있겠느냐?"

"뻔하지. 이 기회에 케케묵은 원한을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 반문하며 엄헌영이 허리를 당겼다. 일어나기 위해서였다. 화성광이 한 발자국씩. 마치 과시하듯이 일부러 느릿한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분위기가 변했다. 아니, 정확히는 위험해졌다.

재빨리 몸을 일으킨 엄헌영이 능숙하게 자신과 거리를 벌리며 허리춤에 손을 대는 것을 본 화성광이 이기죽거렸다.

"그래. 사람이 변하지 않는 법이지. 봄날도 다 갔건만 어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따박따박 말대꾸더냐?"

"사람은 안 변한다? 그래. 네 놈이 개 같은 소리를 참 진지하게도 하는 꼴을 보니까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엄헌영이 곧바로 비웃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네가 하는 말이 이상하다 싶지 않으냐? 내가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만 그렇다고 왜 네 칼을 얌전히 맞아줘야 하는 거냐? 묵은 원한이 불현듯 치밀어 올라 못 견딜 정도이면 몇 대 정도는 그냥 맞아줄 터이니 적당히 하고 썩 꺼지거라."

"네 놈 아비가 골방에 틀어박혀 황상을 저주한다는 소문이 저자에 파다하더구나."

그 말에 엄헌영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꾹 다문 입술 대신 꿈틀하는 눈썹이 그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고' 화성광이 빈정거렸다.

"실상, 아직도 제정신 못 차리고 은인이신 황상 폐하를 원망하는 네놈 아비나 네 놈이나 다를 것이 뭐 있느냐? 네가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놈이라면 계속 서행관에 적을 두고 있을 수는 없다. 하루아침에 미관말직으로 전락하고도 계속 여기 붙어 있는 이유가 대체 뭥냐? 세상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 하는지 아느냐?

뱃속 깊은 곳에 역심을 품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한다! 어떤 이는 폐서인이 정신을 놓은 척 하고 때를 노리며 네놈을 간자로 쓰고 있다 하고, 또 어떤 자는 네가 서엽 놈과 내통하며 황실의 기밀을 누설하고 있다 한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된다고? 그렇다면 대체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냐? 그 고고한 자존심에 당장이라도 제 목을 치고 싶을 터인데!"

그 추궁에 대한 답은 뜻밖의 곳에서 들려왔다.

"잉어."

"그래. 잉어! ... ....뭐?"

들려온 말을 무심코 따라하던 화성광이 바로 다음 순간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자신의 말에 대꾸한 사람이 엄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탓이기도 했고, 또 그 답이 참으로 황당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스럭. 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일부러 내는 듯이 풀과 가지를 헤치는 소리가 크게 난데 비해 응당 작게라도 들려야 할 발소리는 전연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당황한 나머지 화성광은 깨닫지 못했다.

"넌 뭐냐?"

화성광의 말에 불현듯이 나타난 청년이 말했다.

"영단강에 낚시나 가죠."

"....뭐?"

화성광이 당황해서 반문했지만 청년은 슥 그런 화성광을 지나쳤다. 청년이 어깨에 거의 걸치다시피 한 겉옷이 펄럭거리는 것을 본 다음에야 화성광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청년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화성광의 손이 청년에게 닿기 직전, 퍼뜩 정신을 차린 엄헌영이 화성광의 손을 칼집 째로 갈겨 청년에게 떨어지게 했다. 방심하고 있다가 손등을 맞은 화성광이 벌겋게 달아오른 손등을 쥐고 엄헌영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냐?!"

"무엄한 놈! 너야말로 죽고 싶으냐?"

엄헌영이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이자, 뜻밖의 반응이었는지 화성광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두 눈만 부릅떴다.

그 사이, 엄헌영이 청년을 자신의 뒤로 밀어 넣으며 으르렁거렸다.

"외성까지 웬일이십니까? 그것도 혼자서! 벌써부터 더위라도 드셨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시비를 걸 거면 차라리 반말을 하시죠."

건성으로 대꾸한 청년이 화성광을 향해 힐긋 시선을 던지더니 물었다.

"친합니까?"

"예?"

"저 사람하고 친하냐고요."

그럴 리가 있나. 엄헌영이 머리를 휘휘 흔들자 화성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귀신처럼 청년이 선수를 쳐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럼 가죠. 낚시하러 . 그 작자가 틈만 나면 팔뚝만한 잉어를 잡았다고 으스대서 짜증나던 참이었거든요."

팔뚝만하다 해봐야 뼈 굵은 것 외에는 별로 볼 것도 없는 인간이. 누구를 욕하는지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고 투덜대는 청년에게 엄헌영이 나직한 목소리로 무어라 속삭였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 말에 청년이 미간을 좁히고 투덜거림을 멈추었다.

쭉 허리를 편 엄헌영이 청년에게 말했다.

"돌아가십시오. 소인이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픽 청년이 웃었다. 누구하고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네가? 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렇게 이기죽거리는 말투에 화성광이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네 이놈! 어디서 멋대로 입을 놀리는 것이냐! 무장의 긍지는 천금과 같은 것이거늘 어디 너처럼 비리비리 처 마른 놈이...."

"안 친하다면서요."

그런데 왜 저래. 청년이 짜증스레 화성광의 말허리를 끊었다. 뎅강 말허리를 자르는 솜씨가 그야말로 수준급이다.

거의 추궁조인 말에 엄헌영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전혀 안 친합니다. 그러자 엄헌영을 보고 마주 고개를 끄덕인 청년이 손부채질이라도 하듯이 한 손을 한 번 가볍게 휘저었다.

연풍이 화성광의 몸을 감싸고 솟구치듯 피어올랐다가 바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성광은 자신의 앞에 청년과 엄헌영이 아닌 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처럼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삿대질을 하면서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햇느냐는 시선을 자신에게 보내고 있는 엄헌영에게 청년이 말했다.

"저 치는 계속 있지도 않은 사람들하고 싸우게 두고, 영탄강으로 가지요. 낚시도 낚시지만 할 말이 있거든요."

그 말에는 엄헌영도, 못마땅한 낯빛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결국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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