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외전) (56/66)

 농중조 외전

싸락눈이 내리는 겨울에 태어난 황자 아기씨에게는 아직까지 이름이 없었다.

본디 예제국에서는 황적에 이름이 오를 황자나 황녀가 탄생하면 당대의 대문장가와 길흉화복에 밝은 술사를 소집하여 귀인의 존함을 작명토록 하였는데, 이번에는 그 예가 지켜지지 아니하였다.

새로 태어난 용황자의 아비인 신룡제가 자신이 직접 황자의 이름을 지어주겠노라 말씀하신 탓이었다.

황제가 자신이 총애하는 여인의 몸에서 난 핏줄에게 친히 이름이나 호를 내린 경우는 종종 있어왔던 일인지라 그런 신룡제의 행동은 크게 법도에서 벗어난 일도 아니었다. 

물론, 황제의 행동이 고금을 막론하고 전례가 없던 일도 아니었다 하였더라도 감히 그것은 아니된다 간 크게 나섰을 놈은 전무하였을 것이지만.

그 일이 벌어졌을 때, 궁인들은 내심 흐뭇해 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 연치가 오래되시지는 않았으나, 당금 황제께오서는 일 년이 십 년이요. 십 년이 백 년처럼 느껴질 만치 외로이 살아오신 분이다.

그런 분께서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핏줄을 보시고, 자신의 불행하였던 유년기를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듯이 그 아이를 어여삐 여기시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찡해질 만치 흡만한 광경이었다.

허나 그 가슴 따뜻한 광경을 먼발치서 지켜보며 상궁과 나인들끼리 이름없는 황자를 백룡 아기씨, 백룡 아기씨하고 부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황후의 몸에서 난 황장자에게 이름이 없는 지가 온달(꽉 찬 한 달)하고도 보름을 채우자 사람들은 슬슬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어쩌누. 혹여 저 변덕스러우신 분께서 아기씨에 대한 총애가 식으신 것은 아닐까. 어떤 궁인들은 깊이 염려하였으나, 그보다 내밀한 곳에서 웃전을 뵐 수 있는 자들은 그와는 다른 의문을 품고 있었다.

소문이 어찌 돌건, 아직 난전에 머물고 있는 황자 아기씨를 보기 위하여 다사다망한 중에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석류방에 들르곤 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을 보나 아기씨를 안고 어르시는 모습을 보나 지존께옵서 황자 아기씨를 어여뻐하시는 것은 선월(지난 달)이나 본월(이번 달)이나 매한가지인 듯 한데, 어찌 아기씨에게 이름을 지어주시지 않는고.

구름 위에 계시는 분들의 생각이란 그 아랫것들로서는 짐작도 하지 못할 일이라지만, 그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참말로 모를 일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못 읽을 리 만무한 상궁 여관들 사이에는 몇 번이고 말이 돌았고, 결국 신우전 백상궁이 웃전에 한 말씀을 올리기로 결정이 되었다.

수 없이 많은 상궁들에게 쑤셔져 곧 구멍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제 옆구리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말 한 마디 붙이기도 힘들만치 괴팍하신 대전 마마가 아닌 비교적 상식적이신 난전 마마에게.

"이름?"

그러나, 백상궁이 어렵게 올린 간언을 들으신 난전 마마께서는 참으로 뜻밖의 반응을 보이셨다.

"흰돌아, 라고 부르시던데."

"...."

"왜요. 흰돌이로는 안 됩니까."

저자의 백성들이야 모르겠지만, 궁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치고 자신들이 현 황후에게 크나큰 빛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당금 황제가 신룡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진 그 날. 황제가 이 세계가 죽고 살 수 있는 모든 권한을 황후에게 맡겼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황후의 자애로 세상은 목숨줄을 유지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 해야 할까 아니면 그 때문에 더- 라고 해야 할까.

어떤 의미로는 이 황후가 신룡인 홍제보다도 더 이 세계 사람들에게 까다로운 존재였다.

백상군은 월창 근방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황후의 뒷모습을 힐끔 훔쳐보았다. 은실과 청실로 안개 같은 수를 놓아 장식한 품 넓은 옷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뒷모습은 훌쩍 큰 키에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흩어져 모습을 감출 것처럼 아련한 구석이 있었다.

본디는 금직과 금박을 하고 옷깃과 소매입구, 옷 가장자리는 수로 장식한 외의를 입고 허리에는 옷과 같은 색의 허리띠를 두르는 것이 예제국 황후의 평상복이지만, 당금 황후는 그러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적이 드물었다.

황장자를 생산한 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아직 대외적인 활동을 삼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가 이미 만들어진 황실의 예법이 미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전대 용황제들이 남긴 가장 장엄한 유물조차 힘을 쓰지 못하는 그 압도적인 위엄이 사람들에게 당금 황후에게 감사하는 마음 대신, 극진한 경외감과 더불어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언제든지 마음이 바뀌면 세상을 종말로 몰고 갈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신룡이 전적으로 그 권한을 맡긴 정실. 이전의 용황후와는 달리 용인임이 확연히 드러나 있는 외모.

더구나 그는 용세계의 백성이 아니라 원래는 범의 나라 사람이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황후를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라 여겨 두려워하고, 혹은 어려워했다. 가까이에서 모셔 온 백상궁의 생각은 물론 달랐지만, 그런 백상궁조차도 종종 황후의 말씀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머뭇거려지는 때가 있었다.

백상궁은 지금이 바로 그런 때라고 생각했다.

어찌해야 하누. 백상궁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참으로 고아한 멋이 있는 이름이다 일단 장단을 맞추어야 할까, 아니면 정직하게 그것만은 아니된다 하여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빙 돌려서 '아명이지요?'하고 여쭈어야 할까?

허나 백상궁이 치열하게 고뇌하는 사이에 황후께서 픽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리셨다.

"아무리 그래도 흰돌이는 좀 아니지."

"그렇지요?"

조아린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반색하며 대답했다가 백상궁은 바싹 굳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을 말끄러미 내려다보는 황후와 딱 시선이 마주친 탓이다.

검은 유리 같은 윤기가 흐르는 황후의 눈에서, '그럼 그렇지.'하는 뜻이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백상궁은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낚였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걸.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으면 될 것을." 

끌끌 혀를 차며 백상궁을 타박한 황후가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생각을 달리한 것처럼 '하기는'하고 중얼거렸다. "누군들 안 그럴까. 흰돌이는 역시 이상해...."

"마, 마마."

황후의 중얼거림에 다시 없는 용기를 끌어올린 백상궁이 감히 황후의 허락도 없이 황후 앞으로 두어 걸음 무릎을 꿇은 채 기어가면서 말을 붙였다. 너무 간절한 탓에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무례였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 황제가 제 몸보다도 총애하는 황후를 곁에서 모시는 백상궁은 황제의 지밀보다도 황제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괴팍한 분이시라면 정말로 황자 아기씨의 이름을 문위 흰돌로 선포해 버리실 지도 모른다. 그 추측에 뒷덜미의 솜털이 바싹 기립하는 듯하였다.

"마마. 마마. 참말로 그리하실 것은 아니시지요?"

"왜 저한테 그럽니까."

"아이고. 그러지 마시어요. 마마의 배에서 난 아기씨가 아니십니까."

그러니. 하고 더 애원하려던 백상궁이 말을 중간에서 멈춘 것은 황후의 표정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쿠. 황후의 표정을 본 백상궁은 속으로 생각했다. 황후의 표정은 화가 났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쑥스러워 한다고 생각하기는 더 힘들며, 어색해 한다고 여기기에도 어딘가 부족한, 참으로 오묘한 표정이었다.

"일단 그렇긴 한데 뭐 실감이 나야...."

제 턱 끝을 쓸면서 중얼거리는 황후에게 백상궁이 되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아뢰었다. '아기씨께서 오수를 즐기신 지도 오래 되었사옵니다.' 낮잠을 자고 있는 황자가 깨어날 시간이 가까워져 왔으니 모진 말씀은 부디 삼가시라는 간언이었다.

그 말에 황후가 힐끗, 창가로 시선을 던졌다. 따뜻한 정오의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꽃창 아래에는, 푹신한 깃방석을 세 장이나 깔고 누운 황자가 골골골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 태평한 모습을 본 황후의 표정이 몹시 못마땅한 듯 변했다.

"저건 하루에 스무 시간은 자는 게 일이니."

"갓난이는 본디 그렇사옵니다."

반사적으로 대답한 백상궁이 바로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불편하던 황후의 심사가 방금 자신의 대답으로 완전히 뒤틀렸다는 것을 느낀 탓이다.

저벅저벅 씩씩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내며 황자가 있는 편으로 다가간 황후가 한쪽 눈가를 간헐적으로 꿈틀하면서 곤한 잠에 든 황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황후가 내뱉었다.

"보다 보니까 흰돌이도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

아이고. 백상궁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 타는 속도 모르고, 제 어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을 귀신처럼 눈치 챈 황자가 동그마니 만 몸을 꿈틀하더니 날렵한 머리를 조금 들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얀 눈꺼풀이 스르륵 열리고 나타난 강철색 눈동자에 담긴 눈빛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정하고 상냥했다. 

야무진 주둥이가 약간 열리며 빼액. 희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눈도 못 뜬 강아지나 어린 새가 낼 법한 가녀린 소리였다.

절로 몸이 바르르 떨릴 만큼 깜찍한 소리에 심통스럽기 짝이 없던 황후의 표정도 변했다. 하지만 눈앞의 조그만 생물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 아니라, 뭐라 단정 지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것도 모자가 말았던 몸을 쭈욱 펴며 기지개를 켠 황자가 한쪽 앞발을 자신에게로 내밀자 반사적으로 주춤 뒷걸음질을 치기까지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백상궁은 해가 저물기를 간절히 바랐다. 차라리 날이 어두워지고, 처마 밑에 붉은 등을 단 석류방에 황상께서 행차하시면 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공기가 어떻게든 무마가 되리라.

지금 가장 큰 문제는 황자 아기씨의 이름이 아니라, 황자 아기씨를 대하시는 난전 마마의 태도일지도. 비로소 다른 궁인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민을 머릿속에 떠올린 백상궁이 몰래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근래에는 편전이나 천추전보다 신우전으로 행차하는 일이 잦은 태감이 금일도 황제의 행차에 앞서 신우전으로 찾아왔다. 

이러한 상황에 익숙해진 신우전 나인들은 태감의 명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처마 아래 등을 밝히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차르르르 맑게 우는 소리가 나는 풍경 옆에 색색 비단으로 만든 연꽃등이 발갛게 밝혀졌다.

 황상. 듭시오 -.

황제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가 머얼리서부터 들리기 시작하자 백상궁과 그 아래 나인 아이들의 시중을 받고 황후 서씨가 신우전 앞으로 나왔다. 

여타의 부인네들 같았으면 황제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에 기쁜과 기대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만도 한데, 백상궁이 내어 준 푸른 가죽신을 신고 처마 바깥쪽에 서 있는 황후의 하얀 얼굴은 심드렁하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그렇기만 하면 다행인데. 자세히 보면 약간 귀찮아하는 기색까지 보였다.

물론 신우전 궁인들과 태감이 새삼 놀라거나 노여워할 리는 없었다. 황후의 저런 태도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일도 언제나와 똑같구나.'하며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는 궁인들 사이에서 백상궁 혼자만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황제의 행렬을 훔쳐보았다가 다시 황후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를 반복하고 있는 백상궁이 안쓰러웠는지 태감 송이학이 말했다. 송이학으로 말하자면 본래 태감이었던 봉승이 좌천당한 이후 새로이 태감이 된 자였다.

"백상궁 자네 새삼스레 왜 그러시는가. 이럴 때 난전 마마께서 언제 반가운 낯빛 하신 적이나 있었던가? 그리하여도 황상께오선 전연 성노치 않으시니 염려 마시게."

"아니 소인이 염려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자신이 좌불안석하고 있는 이유를 한참은 잘못 짚은 태감의 위로에 백상궁이 반사적으로 대꾸하다가 뒤늦게 태감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인지하고 발칵 성을 냈다.

"무슨 말을 그리 하십니까. 태감 어른? 마치 우리 마마께오서 황상을 허투루 모시는 것처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우리 마마께오서 저리 보여도 얼마나 속정이 깊으신 분인데...."

그러나 백상궁은 거기서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신우전 초입에 머물러 있던 황제의 행렬이 어느 틈에 벌써 전각 바로 앞까지 다다른 탓이었다.

성을 내던 백상궁도, 위로랍시고 한 말에 백상궁이 성을 내는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던 태감 송이학도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곧 황제와 황후가 난전 깊숙한 곳에 있는 석류방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러기가 무섭게 송이학이 백상궁에게 쏘아붙였다.

"어찌 사람이 그렇소? 내가 언제 난전 마마의 험담을 했다고."

그러나 백상궁은 더 이상 송이학을 상대할 여유가 없어 보였다. 바로 옆에서 송이학이 하는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백상궁이 발돋움을 했다가 낮추고 문종이에 모습이 비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옆걸음을 쳤다가 다시 빼꼼 머리를 내밀어 석류방 안 사정을 살피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에 성을 낼 기력조차 없어진 송이학이 허, 하는 소리를 냈다.

"무얼 하는 거요?"

"마마께서...."

백상궁이 발을 동동 구르며 중얼거렸다. 다음 말을 채근하려고 백상궁의 얼굴을 본 송이학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백상궁의 낯빛이 보통 심상치가 않았던 탓이다.

허나. '어찌 그러우?' 아무리 재촉해도 백상궁은 도통 사정을 털어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털어 놓을 수가 없었다.

어찌 말할 수가 있겠는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황상께서 난전 마마와 함께 석류방에 드시는 날이면 그 다음 날 난전 마마께서 몹시도 불쾌해하고 우울해 하신다는 것을.

더군다나 백상궁은 난전 마마께서 그토록 침울해하시는 까닭을 손톱만큼도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아이고.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깐 백상궁은 제 발치만 하염없이 노려보면서 생각했다. 한 때는 황상께서 신우전에 납시시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때도 있었건만. 어찌 이리 되었누.

백상궁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대충 알겠다. 아마도 자신이 주제넘게 황자 아기씨의 귀명에 대해 언급한 그 날부터였을 것이다. 그래. 그래. 그리고 그 날도 분명 황상께서 신우전에 드셨더랬지. 그리고.

백상궁의 추리는 거기에서 끊겼다. 그 날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그 일이 어떤 일이었는지까지는 백상궁이 짐작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백상궁. 백상궁' 옆에서 송이학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백상궁은 그 소리를 귓등으로 대충 받아 넘겨버리고 염려 가득한 시선을 석류방 장지문에 고정시켰다. 

백상궁은 간절하게 기원했다. 제발 오늘은 아무일이 없어야 할 터인데.

허나. 그런 보람도 없이 주렴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황제는 문제의 효시가 된 발언을 다시금 지껄여대고 있었다.

"생각은 해 보았더냐?"

그 말에 황후. 서문경이 돌아보지도 않고 쏘아붙였다. '폐하는 어쩌십니까?'

"어찌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우리 흰돌이는 흰돌이지."

태연자약한 대꾸에 서문경이 결국 폭발했다.

"아, 좀! 머리는 장식입니까! 애 이름이 그 모양 그 꼴이면 어쩌잔 겁니까? 이름 때문에 애가 따돌림이라도 당하면 폐하께서 책임지실 겁니까?"

"따돌려?" 황제가 코웃음을 치다가 울컥 밀려 올라오는 기침을 몰아서 하면서 마저 비웃었다. "누가? 누구를?"

"애가 삐뚤어질 겁니다! 만약 폐하의 이름이 문위 제안이 아니라 검돌이라면 폐하께선 안 삐뚤어지고 배기셨을 것 같습니까?"

"이미 삐뚤어질 만큼 삐뚤어졌는데 새삼 이름 따위가 무슨 상관일까."

"전 폐하의 이름이 검돌이나 흑돌이였으면 절대로 신우선 안에 안 들어왔습니다."

해석하자면 네 이름이 흑돌이였으면 난 죽어도 너랑 이런 사이가 안 됐을 거야, 다. 서문경이 이를 갈며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황제가 고 기름 칠 잔뜩 한 혀를 놀리기를 멈추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제정신을 차린 것은 아닌지. 그는 서문경의 목에 감겨 있는 새하얀 끈 같은 것에 제 손을 올리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흰돌이가 어디가 어때서 그러누. 우리 아드님처럼 어리롭기만 하건마는.

"헌데 이놈은 아비가 왔건만 어찌 절도 아니 올리고 쿨쿨 잠만 자누."

황제가 중얼거리며 서문경의 목에 감긴 가죽끈을 슥슥 쓸었다. 몇번이고 쓰다듬자 축 늘어져 있던 가죽끈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 경련했다.

거기다 어디선가 끼잉, 하고 앓는 듯한 소리까지 난다. '무서운 꿈이라도 꾸는 게냐. 우리 아드님?' 황제가 묻는 말에 서문경이 이맛살을 구기며 대신 대꾸했다.

"폐하께서 자기를 가지고 저글링을 한 일을 꿈으로 꾸고 있는 모양이지요."

"저글..., 그것이 무언고?"

"아뇨."

저글링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하기가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며 서문경이 머리를 저었다. 이틀 전에 폐하께서 당신 아들하고 귤을 함께 들고 하신 그거 말입니다. 하고 설명을 덧붙여주자 황제도 더 이상 그 기묘한 단어가 무어냐고 묻지 않았다.

그 대신 그가 중얼거렸다. '그게 왜?' 자기 애와 귤을 가지고 저글링을 하고 놀았던 주제에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서 뭐라고 더 타박하려다 '우리 흰돌이도 좋아했는데'하고 날조된 기억을 지껄여대고 있는 황제를 보고 포기한 서문경이 화제를 돌려서 말했다.

"원래 애들은 많이 잔답니다."

"그런 거냐?"

"...그렇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서문경은 자신이 생판 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그런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었는지, 황제의 손이 쑥 뻗어와 서문경의 목에 착 감겨 있던 것을 떼어 가버렸다.

목이 허전해지는 느낌에 서문경이 쳐다보자 단잠에서 깬 황자가 느릿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곧 자신을 목에 감고 있는 이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비라는 것을 알았는지 고 작은 주둥이로 한숨을 폭 내쉬더니 얌전히 꼬리 끝을 황제의 목에 말았다.

시건방진 녀석. 아비인 줄 알았으면 투지례라도 올리지 않곤. 황제가 투덜거리면서도 황자의 등을 슥슥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쓸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이가 퍽 좋은 부자간이었다.

"무얼 그리 보고 있누."

그 때 황제가 툭 던지듯 물었다. 예? 서문경이 일순 당황해서 반문하자, 황제가 대꾸했다.

"벗의 벗들이 노는 것을 구경하는 것처럼."

그 비유에 서문경은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보였나. 그러나 따져보면 크게 다르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지는 않은 사람들을 보는 것 같은. 그런 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황제가 서문경에게 말했다.

"짐과 황자는 그대가 겨우 이름만 아는 이가 아니라 그대의 배필이요, 핏줄이니."

"압니다."

허나 그것이 피부에 직접적으로 와 닿는 것이 아닌데 어쩌란 말인가."

서문경이 속으로 반박하면서 황제의 목에 돌돌 몸을 감고 있는 황자를 보았다. 고작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이제는 서문경이나 황제의 머리에 똬리를 틀고 눕기가 힘들 정도로 자랐다.

마침 아직 잠이 들지 않았었는지 황자와 눈이 마주쳤다. 은구슬 같은 눈, 그 빛깔 때문인지 현실감이 없었다. 그 눈에 담겨 있는 무한한 신뢰와 친근감 때문에 더 그랬다.

"왜 그런 걸까요?"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 서문경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차했지만 이미 말은 튀어나간 뒤였다. 이럴 때에만 눈치가 귀신처럼 빠른 황제가 불쑥 되묻는 것으로 대답했다.

"왜 흰돌이가 그대의 아이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걸까, 그 말이냐?"

".....서문경은 침묵했다. 아이의 앞에서 이런 말을 주고받는 것 자체가 꺼림칙했다. 죄를 짓는 듯한 기분에, 아이와 더 이상 눈을 마주보고 있을 수가 없어져서 그는 눈을 발치로 내리깔았다.

한참이나 뒤에, 서문경은 변명처럼 덧붙였다.

"싫은 건 아닙니다. 굳이 따진다면 오히려, ...좋게 생각하면 편일 겁니다. 착하고, 얌전하고, 귀엽고, 아예 정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고요."

"허나 황자가 그대의 아이로 느껴지는 것은 또 별개의 이야기라, 그 말이지."

황제의 대꾸는 늘 그렇듯 전혀 비난조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언짢아하는 기색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침착한 어조에 서문경은 도리어 몹시 초조해졌다. 황제가 재촉한 것도 아닌데 서문경은 스스로 머리를 쥐어짜서 말을 끄집어냈다.

"그건 아무래도, 제가 아직 이 세계 사람이라는 자각이 덜 되어 있어서가 아닐까요. 그래서 이 아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서문경이 허둥지둥 잇는 말을, 그 동안 잠자코 듣고만 있던 황제가 끊었다.

"조금이라도 범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 말이냐."

그 물음에 서문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한껏 내리깐 우울한 시선이 사실상 긍정이라는 것을 모를 황제가 아니었다.

황제가 한숨을 푹 쉬는 것과 동시에 서문경을 부르며 그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경아, 경아. 어느덧 버릇이 되었는지 끄는 대로 얌전히 끌려 온 서문경이 자신의 목과 어깨 사이의 오목한 공간에 푹 코를 묻은 황제가 한탄하듯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불퉁하게 내뱉었다.

"그러니까, 범 세계를 한번 들여다보지 않겠느냐는 말은 이제 하지 마십시오."

얼마 전, 백상궁의 간언을 귀담아 들은 서문경은 그 날 밤 자신의 처소를 찾은 황제에게 말을 꺼냈다.

- 이 녀석.

허나 막상 말을 꺼내자 머뭇거려졌다. 별다른 이유가 아니라 깃방석 위에서 콜콜 낮잠인지 밤잠인지 모를 것을 즐기고 있는 하얀 용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난처해서였다.

'흰돌이가 왜?' 곤란해 하는 서문경을 도와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황제가 물어왔지만 그 도움의 손길에 서문경은 오히려 분노했다.

- 언제까지 애를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흰돌이로 불러댈 생각이십니까? 벌써 한 달 쨉니다. 다들 걱정하고 있단 말입니다.

- 음.

서문경의 비난을 받은 황제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손가락으로 제 아들놈이 누운 깃방석 위를 톡톡 두드리다가 응수했다.

- 생각해 둔 이름이라면 몇인가 있다.

- ...참말입니까?

- 참이고말고. 예전부터 생각했다만, 대체 경이 넌 짐을 무어라고 생각하는 게야?

그렇게 따지기 전에 당신의 평소 행각을 떠올려보면 바로 답이 나올 텐데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서문경은 아이를 위해 참았다. 

'그럼 그 중에 정해서 이름을 붙여 주면 될 일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며 서문경은 황제가 이미 생각해 두었다는 이름 몇몇을 들을 채비를 했다.

그러나 열린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참으로 뜻밖의 것이었다.

- 너, 범 세계를 한번 들여다보지 않으련?

- 예?

- 네 본래의 세계 말이다. 이제 기억을 찾지 않았더나. 허니 네가 궁금해 할 것 같아서 그런다.

- ......

- 가족이, 형님이 하나 있다 하였지?

황제의 물음에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콱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는 소리가 울컥 솟구쳐 바깥으로 넘쳐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형.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었던 단어를 무심코 되뇌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형. 머릿속으로 바로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궁금하지 않으냐고?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다. 형. 어떻게 됐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내가 그렇게 되고서 많이 슬퍼했겠지. 지금쯤은 괜찮아졌을까. 결혼은 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봤었던 그 여자와 가정을 꾸민 것일까. 혹시 아이가 생기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서문경은 눈을 꾹 감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 아니요.

- 싫다고?

- 보지 않을 겁니다.

서문경의 말에 황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싫다, 가 아니라 하지 않는다. 그 묘한 차이를 알아챈 것인지도 몰랐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분명 그럴 것이다.

서문경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황제가 다시금 자신에게 같은 제안을 할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두려워하는 듯한 그런 태도였다.

- 봐서 어쩌려고요?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합니까. 아니면 손을 잡을 수 있기를 합니까? 쓸데없는 짓.

- 쓸데없다고?

- 예. 쓸데없어요. 다 헛짓입니다.

'헛짓이라?' 서문경의 이상하리만큼 야박한 대답에 황제는 제 입 속으로만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모로 약간 기울였다. 그런 황제의 얼굴은 온통 회칠을 한 것처럼 새하얘셔 그 안에서 무슨 생각이 흘러가고 있는지 서문경은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서문경은 못을 박았다.

- 지금 제게 필요한 것은 다 잊고, 적응하는 겁니다. 여기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제야 겨우 그럴 수 있게 되었는데요. 그 노력을 다 헛것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 그대는 말이다.

지금껏 서문경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기만 하고,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던 황제가 불현듯이 입을 열었다. 그저 나직한 중얼거림에 불과한 두 마디.

그러나 서문경은 발 앞에 갑자기 쾅 바윗덩어리가 떨어지기라도 한 것 마냥 주춤하더니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런 서문경을 미끄러지는듯한 걸음으로 따라잡은 황제가 서문경의 뒷머리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받치듯 감싸 안았다.

서문경이 더 물러나지 못하도록 붙잡은 황제가 말을 이었다.

- 가끔. 아주 쉬운 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

- 예?

- 모르겠는가?

하고 묻는 말에 서문경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한참 동안이나 황제를 쳐다보다가 결국 머리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서문경은 자신의 생각이 조금의 틀림도 없이 옳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단호한 대답에, 황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 그가 불쑥 맥락을 알 수 없는 물음을 던졌다.

- 경아. 너는 대양이 무엇으로 형성된다고 생각하느냐?

- 바다?

바다라면, 하고 서문경이 중얼거리는데 또다시 황제의 물음이 던져졌다.

- 또 거목이 무엇으로부터 생명력을 덛는다 생각하느냐?

- .......

- 또한, 사람이 거목이나 대양과 다른 것이 무어라 생각하느냐?

꾹 입을 다문 서문경이 황제를 노려보다 내뱉었다. 누굴 바보 취급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그 항의에 황제는 반성하는 빛을 보이기는커녕 도리어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를 꼈다. '답을 안다면서, 어찌 그대에 관한 것은 모를까' 황제가 조느라 자신의 어깨를 타고 주르륵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려고 하는 새끼용을 추슬러 안으면서 말했다.

- 그대가 짐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면 그 때 황자에게 이름을 지어 주겠다.

- !

청천벽력 같은 말에 서문경의 눈이 커졌다.

- 왜 그런 결론이!

당황한 서문경이 주춤한 사이 황제가 말했다. 천자의 말은 천금보다도 귀하고 또 그만큼 무거운 것이니 결코 이 선언은 돌릴 수 없을 것이야.

"....."

서문경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처음 범 세계에 대한 말을 입에 올렸을 때처럼 황제는 새하얀 새끼용을 목에 두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지금이 그 때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때, 마치 서문경의 시선을 눈치 채기라도 한 것 마냥 새끼용이 머리만 돌려 서문경 쪽을 보았다. 잠에 취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있는 작은 머리가 서문경을 향해 까닥까닥한다.

다물려 있던 주둥이가 약간 열리며 서문경으로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가느다란 울음이 새어나오고, 발톱조차 채 여물지 않은 작은 발이 서문경이 있는 쪽으로 내밀어진다.

그것을 보자 서문경은 얼굴에 확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자신이 황제의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서 저 아이를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제게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대양이 무엇으로 형성되는지, 거목이 무엇으로부터 생명력을 얻는지에 대한 답처럼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큰 바다도 만들어지고 큰 나무도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제게 부족한 것은 그겁니다. 제가 이 아이와 연결되어 있다는 그런 자각요. 그러니까 방해받고 싶지 않습니다. 원래의 세계에 대해서는 보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을 겁니다."

"방해"

- 라.

문득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서문경은 무심결에 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황제는 미간을 조금 구긴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이 황제가 새끼용을 제 목에서 풀어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흰 비단처럼 매끄럽지만 조금 오돌토돌한 등을 톡톡 치며 흰돌아, 흰돌아, 부르니 새끼용이 무거운 눈꺼품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빼액 울었다.

"금일 밤은 흰돌이 너 혼자 자야겠다."

"......"

"너도 이제 어엿하게 장성한 용이 아니냐. 그 정도는 홀로 해낼 수 있어야지. 아니다. 뭇사람들이 이럴 것이면 대체 무엇 때문에 들였는지 모르겠다 입방아를 떤다만 어찌 되었건 유모도 있고, 또 네 처소의 상궁이며 나인 아이들도 여럿이 있는데 이 정도는 혼자도 아니지. 헌데도 뭐가 그리 못마땅하냐? 아아, 혹시 귀신이 무서운 게냐?"

세상에 난지 겨우 한 달 남짓한 새끼용을 가지고 무슨 개소리를 하나 해서 서문경이 뱁새눈을 뜨고 있으려니 놀랍게도 황제의 손바닥 위에 앉아서 제 아비를 말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던 새끼용이 어느 순간 한숨을 폭 쉬었다. 

마치 황제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그러더니 폴짝, 제 발로 황제의 손바닥 위에서 바닥으로 내려온 새끼용이 엉금엉금 서문경이 있는 쪽으로 기어와 한 두 발자국 정도 남긴 자리에 뒷발을 구부리고 앉았다.

짧은 뒷발을 도톰한 꼬리 뒤로 숨기고 앉은 모습이나 제 몸보다도 긴 꼬리를 용케도 끝까지 바짝 펴고 앉은 모습이 대단히 의젓하고 단정했다.

그렇게 앉은 새끼용이 마찬가지로 짧은 앞발로 바닥을 짚고 서문경을 빤히 올려다보며 한 번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악몽을 꿀 때 내는 소리나 제 아비가 발바닥을 간질일 때 내는 소리에 비하면 무척이나 나지막하고 의젓했다. 뒤에서 황제가 비웃었다. '지 어미 앞이라고 목소리 깔기는'

"자자. 우리 아드님께서 이만 처소로 돌아가신다는구나."

양 앞발옆에 손을 넣어 새끼용을 덜렁 들어 올린 황제가 해석했다. 인사를 방해받은 새끼용이 항의했지만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도리어 벌컥 주렴을 걷어 올리더니 소리쳤다. '거기 현상궁 있는가?'

뜻밖의 부름에 문 밖에서 얼마간 나인들이 허둥거리는 기척이 들리더니, 곧 황자를 모시는 현강희의 대답이 들여왔다.

"찾아 계시옵니까?"

"황자가 돌아간다 하는구나."

황자를 덜렁 한 손에 들고 장지문 앞으로 나아가는 황제를, 서문경이 급히 따라잡았다. 한 달 넘게 애를 물고 빨고, 제 손에서 놓아주지 않으려 굴더니만 갑자기 이게 웬 변덕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문경이 황제를 저지하는 것보다는 황제가 벌컥 장지문을 열어젖히는 것이 빨랐다. 송구하게도, 지존의 귀한 손으로 장지문을 열게 만든 죄를 저지른 궁인들이 문틀에 손을 댄 채로 돌처럼 굳었다.

그런 그네들을 본 척 만 척하고 황제가 새끼용의 꼬리 끝에 제 볼을 슥슥 비비며 아들을 달랬다.

"너도 사내대장부이니 이제 어미나 아비 없이 홀로 잠자리에 들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장차 생길 아우에게도 체면을 세울 수 있지."

아우? 무슨 아우? 서문경의 머리가 한 번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고 비로소 머리가 제 자리로 돌아오고 뒤늦게 놀란 눈앞에서 딱 불이 나는 순간.

"기다려 보거라. 이 아비가 우리 아드님에게 기필코 어여쁜 아우를 안겨 줄 터이니."

그 소리와 함께 새끼용이 현상궁이 받쳐 든 꽃방석 위로 넘겨지고 열렸던 문이 스르륵 닫혔다. 그리고 서문경은 소리도 없이 다가온 손에게 뒷덜미가 잡혀 질질 방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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