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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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아니, 어쩌면 ‘세계’를 에워쌌던 찬란한 주홍빛이 천천히 사그라졌다. 

눈이 멀까 무서워 얼굴을 무릎에, 혹은 바닥에 박고 있던 사람들의 등이 그것을 느끼고 꿈틀 움직였다. 무심코 상반신을 들어 올린 사람들이 그제야 부들부들 몸을 떨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휙휙 돌변하는 상황에 잃고 있던 이성이 조금이나마 돌아오자 자신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지, 이제야 실감이 난 탓이었다. 

황제의 혈통이 정당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태황태후의 선동에 이끌려 온 자리에서 황제의 몸에 깃들어 있는 선제의 망령을 보았다, 또한 제 아들의 몸을 빼앗은 선제는 어미인 태황태후의 목을 조르며 이 세상을 망하게 하려 했다. 그것을 가용인인 수객이 저지했고.

또.

“신룡···.”

불쑥, 중얼거림이 사람들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비와 바람을 모두 부리는 신룡은 그야말로 용 중의 용, 사룡의 아버이격인 용님과 가장 가까운 용이다. 지금껏 예 제국에 내려진 용황제는 지룡인 소현 태자를 제하면 모두가 천룡이었다. 그런 중에 용 중의 용인 신룡이 제국의 지도자로 내려졌다하면 그야말로 제국의 홍복(洪福)이 아닌가 싶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신룡은 신과 연관되어 있다, 즉, 그 말은 세상을 멸하고 흥하게 하는 권능을 지닌 신의 권능을 신룡 또한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말. 그러므로 신룡은 세상의 멸망과 존속의 기로에 나타나는 용이었다. 

종말이냐, 존속이냐.

사람들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더 이상 말을 할 힘도, 움직일 힘도 없었다. 지난 시간이 쏜살같이 그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황제가 지난 세월 감수해야만 했던 고통과 모욕, 그리고 알량한 인세의 권세를 믿고 황제를 능멸하였던 이들의 얼굴, 마지막으로 제좌를 거부하였던 그를 억지로 찍어 눌렀던 제장에서의 일까지. 

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말을 예견했다. 그 어떤 이도 황제가 제국의 존속을 원하리라 생각지 못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일제히 엎드려 종말을 기다리고 있던 그 때-.

“수상을, 체제공을 거두어라.”

어떤 목소리가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더 이상 선제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들에게 익숙한 황제의 목소리였다. 뜻밖의 말에 사람들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자, 끌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수상을 거두래도. 움직이지 않고 무엇들 하느냐.”

그 말에, 쓰러진 서현의 지척에 있던 이들이 튕기듯 일어나 황급히 서현을 일으켜 세웠다. 감히 자신의 자리를 탐하려 들었던 역적을 이 자리에서 벌하려는 것인가 예상하였지만 황제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의외의 말이었다.

“형님을 궐로 뫼시어라.”

“······!”

사람들의 얼굴이 일시에 굳으며, 태황태후가 의기양양한 웃음과 함께 질러대던 소리를 떠올렸다. 황제는 선제의 핏줄이 아니다-, 라는. 마치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황제가 말했다.

“짐의 혈통에 관하여 의혹을 품는 자가 있다지.”

신들은 고개를 들라, 하는 재촉에 사람들이 주춤주춤 머리를 들자, 황제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으나 이 자리에 있던 이들은 그 사실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완전히 용인으로 변한 황제의 등에 한 쌍의 시익이 솟아, 자신의 뒤로 거대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던 탓이다. 사람들은 기함할 듯 놀랐다. 그림자가 아니라, 그늘이었다. 용인의 등에 솟은 피막 너머로는 햇빛도, 석양도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가 말했다, ‘짐도 알 수 없느니라, 짐의 진짜 아비가 누구인지.’

“허나, 짐의 혈통이 의심스럽다 한들, 짐을 제좌에서 끌어 내릴 수 있는 이 누가 있는가.”

“···마, 마땅한 말씀이시옵니다.”

“또한, 비록 짐보다 혈통이 올바르다 하여도 감히 짐보다 앞설 수 있는 이 누가 있는가.”

황제가 픽 웃었다, ‘없다.’

“판결을, 내릴 것이다.”

“······!”

“판결을 내리기 위하여 짐이 태어난 것. ···제국은 용님께서 내려주신 올바른 정신을 망각하고 당대 황제에 조금 더 가까운 핏줄을 차대 황제로 세우고자, 혹은 사사로이 아끼는 핏줄에게 제좌를 물려주고자 금기를 범하였다. 수많은 용인들이 용황제가 내린 삿된 지식에 피를 흘렸고, 그 죄가 쌓이고 쌓여 제국은 멸망과 존속의 기로에 섰다.”

황제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짐이 무엇을 바라건, 그 누구도 항변할 수 없다. 짐이 무슨 결정을 하건, 그 누구도 막아설 수 없다. 이 순간, 짐은 그대들의 신이다.”

석양이 점점 타는 듯이 변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석양의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온 계곡 안이 마치 거대한 얼음덩어리 안에 잠긴 듯 했다. 뚝, 뚝뚝, 식은땀이 비처럼 흘러 내렸다. 뱃속에서 쿵쿵쿵쿵 대고(大鼓)를 치는 듯한 심장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타는 해가 드디어 부서진 산 너머로 걸린 그 때, 황제의 입이 열렸다.

“경아.”

황제가 불현듯이 서문경을 불렀다.

“짐은 그대에게 결정을 맡겼다. 그대는 어떤 결정을 내렸느냐.”

서문경이 놀란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이 세계는 편협합니다. 용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임금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인격마저도 무시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용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미와 아비가 자식을 저주하고 아이가 그 저주를 대를 물려 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용에 미쳐 어떤 이가 선량한 사람들을 몇이나 이용하고 해하면서도 그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용에 미친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끝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까닭을 물어도 좋겠느냐.”

서문경이 조용히 대답했다.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살아가야 한다······.”

“이 곳에서.” 

서문경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황제를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 간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뒤돌아 있던 황제가 마치 그 발걸음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석양을 등에 진 그의 얼굴은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서문경은 그가 웃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살아가, 주겠느냐. 이곳에서.”

“···예.”

“짐의, 곁에서?”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웃고 있다고 생각하려 했는데, 틀렸던 모양이다. 황제의 볼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천천히 흘러내리는 것을 본 서문경이 생각했다···.

태양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황제는 나직이 선언했다.

“세계의 생존을 허락한다.”

모든 이들이 거의 울부짖듯이 하며 황제와 서문경의 뒤로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지만, 그 파도가 이는 것과 같은 모습조차도 ‘그 사실’ 앞에서는 빛이 바랬다. 

지금 이 순간, ‘세계’는 생명을 얻었다.

**

그대로 천제사가 치러졌다. 남은 것은 단 하나, 황제가 하늘에 활을 쏘아 자신이 이 대 용황제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 무려 육척이나 되는 대궁(大弓)을 한 팔로 들어 올린 황제가 그대로 하늘에 세 발의 화살을 쏘아 올렸다. 

‘하늘’에서부터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순식간에 하늘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주변이 먹구름이 휩싸인 듯 어두워졌다. 희고 검은 세상에 맑은 햇볕이 그대로 내리쬐는 가운데 가랑비가 내렸다. 단비, 말 그대로 빗방울의 맛이 달았다. 단 빗방울이 햇빛을 받으며 보석처럼 찬란하게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간계에 들어 있던 황제의 몸이 훅 부풀어 오르며 용인으로 변했다가, 그 육신이 산산이 찢기며 그 안에서 검고 거대한 그림자 같은 것이 하늘로 올라갔다.

하얗게 번뜩이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사람들은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 하늘을 통째로 꿰뚫는 듯한 긴 몸통에는 하나하나 흑철(黑鐵)같은 비늘이 붙어 있었고, 아홉 개의 검은 발톱은 바다조차도 갈라놓을 듯이 강인했다. 

또한, 무엇보다도 장엄한 것은 희게 바랜 하늘조차 완전히 가린, 한 쌍의 검은 피막. 거대한 용이 입을 열어 울부짖자, 그것에 화답하듯이 하늘이 우르릉 울고, 땅이 아르르 흔들렸다. 수 십 개의 벼락이 땅으로 내리꽂히고, 비바람이 일었다.

그렇게 이 대의 용황제가 탄생했다. 사람들은 곧, 이미 가변례를 치른 수객이 가례(嘉禮)를 치를 것이라 예상하였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 숙청이 이루어졌다. 

황제를 제좌에서 끌어 내리고자 안간힘을 쓴 장본인인 황고 엄충은 역모죄로 유배, 사사되었다. 태황태후 또한 폐서인(廢庶人)된 후 제 오라비와 같은 길을 걸었어야 마땅했으나, 친아들에게 목을 졸린 충격 때문인지 지남력(指南力) 상실이 와 자신이 누구고 어디에 사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때문에 태황태후는 겨우 사사는 면하였으나 대신 강동에 유배되어 제국이 사라질 때까지 복권(復權)되지 못하도록 못이 박혔다. 엄충과 태황태후의 제남(弟男)인 태본 엄유는 직접 역모에는 가담치 아니하였으나 모든 봉록과 식읍을 압수당하고 신분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이 외에도 태황태후의 편에 서 역모에 가담한 자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이 잘린 후에, 잘린 목을 장대 위에 매달아 성문 앞에 나흘간 매다는 형을 받았다. 그 식솔들 또한 제 부모나 자식이 역모에 가담한 죄로 큰 벌을 받았으나, 태본 엄유의 아들인 용호군 중장랑 1령 장군 효강 엄헌영과 진화 서엽의 후처인 경혜현주는 가용인을 적극 도운 공을 감안하여 유배형이나 폐서인 등의 중벌 대신 관직이 몇 단계 강등되고 식읍이 압수당하는 것으로 그 벌이 그쳤다. 

이제 남은 것은 서엽과 서현 부자에 대한 처벌뿐이었다. 

“···납시셨사옵니까.”

사람의 그림자도 드리워지지 않았는데 서현이 문득 말하며 찬 돌바닥에 절을 올렸다. 붉은 불빛이 도깨비불처럼 일렁거리는 돌바닥에는 짙은 그림자가 하나 깔려 있었다. 서현의 그림자였다. 천제사를 치렀으므로 용인으로서의 ‘힘’을 모두 잃은 것이다.

“···몸은 어떠한가.”

“황공하옵게도 태사의감을 보내어 돌보아주신 덕분에 순조로이 기력을 회복하고 있사옵니다.”

그 말에 잠시 황제가 대꾸가 없다가,

“어찌 또 거짓부렁을 하는가?!”

하는 고함이 터졌다. 텅 빈 돌방에 황제의 목소리만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제 분을 주체하지 못해 씩씩거리던 황제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께서는 어찌 또 허설을 하십니까? 천룡의 몸을 해치기 위하여 만든 것들입니다, 그런 것에 당하셨는데 이 정도 시간을 들여 차도가 보일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 서현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그 창백한 얼굴에서는 계속해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목과 팔 따위에 둘둘 둘러놓은 무명천에는 핏기와 함께 누런 진물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서현은 고집스럽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소인은 괜찮사옵니다.”

“희 형님···!” 

황제가 서현의 앞에 털썩 두 무릎을 꿇었다. 놀란 서현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황제는 놓아주지 않았다. 서현의 어깨를 잡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콱 누른 뒤에 황제가 말했다. 

“어찌 계속 사언(詐言: 거짓말)을 하십니까? 모든 일이 끝이 났습니다. 이제 형님께서 사언을 하셔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형님이 아닙니다. 소인은 감히 제좌를 탐낸 극악무도한 죄인이니 그에 맞게 대우하여 주시옵소서.”

“희 형님!”

황제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이러지 마십시오. 그리 말씀하시지 말란 말입니다.”

“폐하.”

“이제 저에게는 핏줄이라고는 형님뿐입니다.”

황제의 비통한 중얼거림에,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서현이 입을 다물었다. 서현의 어깨를 붙잡고 머리를 떨군 채, 황제가 말했다. 부황께서···, 제 몸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 고백에 서현의 얼굴이 단번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귀신이, 아직도.”

“괜찮습니다.” 황제가 서현을 진정시켰다. “소제(小弟)는 이제 천제사까지 치른 용황제입니다. 귀신 따위를 걱정할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

“다만, 내내 느끼고 있습니다. 부황께서 온 몸으로, 저를 증오하고 거부하고 계시다는 것을요. 형님께서는 아시지요, 소제가···, 부황에게 얼마나 애정을 갈구하였었는지. 허나, 애초부터 그것은 불가능한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생각에 때때로 비참해지곤 합니다. 나는, 같은 피를 나눈 이들에게 단 한 번도 애정을 받지 못하였다. 도구가 되고, 수단이 되었을 뿐···.”

황제는 서현의 어깨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하지만 마치 홀린 듯이 서현은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부디, 소제의 말을 염두에 두시고 대답해 주십시오. 진심으로 형님께서는 제좌를 바라셨나이까? 실심 소제를 방해거리로만 여기고 그러한 일들을 하셨나이까?”

“소인, 은.”

“조금이라도 좋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소제를···, 이 제안을 생각해 주시었습니까?”

“······.”

서현은 느릿하게 손을 들어 상처투성이인 손바닥으로, 마찬가지로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쓸어 내렸다. 채 손을 다 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소인은······.”

“······.”

“제안, 나는.”

마치 흐느끼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네 존재를 아주 예전부터, 알았느니라. 네가 내 존재를 알기도 훨씬 전, 어쩌면···,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서현은 천천히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버지께서, 무서운 일을 꾸민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용의 증후가 나타나지 않는 선제께 용의 ‘몸’을 선사하기 위하여 수많은 용인을 생산한 바 있는 엄씨 일가의 여인을 후궁으로 들인다는 사실과···, 당시 유일한 용인이었던 나의 친부인 아버지가, 교합하여, 완벽한 몸을 만든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네가, 태어났고, ···허나, 그 이후에도 아버지는 삿된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선제의 안에서 잠자고 있을지도 모르는 용기를 자극하기 위하여 용인을 배출한 적이 있는 여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인들을 데려다 길일마다 그와 교합 시키고···, 너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부르르 떨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내게는 아버지를 저지할 힘이 없었다. ···나 또한 어렸으니. 허나 계속해서 내 귀에, 풍문이 들려왔다. 선제가···, 너를 몹시 달갑지 않게 여겨 홀대한다는 풍문이었다. 견딜 수가 없어졌다···. 인정해야 겠구나, 그래···, 처음부터 우연이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너를 속였던 셈이구나.”

“형님······.”

“···그 일이 있었던 이후, 현주와의 일이 들통이 났던 때 이후로 나는 내 ‘힘’조차 자유로이 쓸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무력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속셈을 알게 되었다···, 나와 너 중, 더 쓸 만한 그릇에 선제의 혼을 담겠다는.”

그 때 처음, 황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너와는 달리 아버지의 속셈에 대하여 알고 있으니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또, 만일의 상황이 닥친다 해도.”

황제의 나직한 목소리가 서현의 말을 가로챘다. 서현이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황제는 눈을 찡그렸다, 마치 울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그 연약한 눈빛과는 상반되는 잇소리가 황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형님께서 몸을 빼앗기면 되는 일이고?”

“···제안.”

“어째서.”

고개를 숙인 채로 황제가 내뱉었다.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어째서 혼자서 모든 짐을 다 짊어지려 하셨습니까? 이 아우가 그토록 못 미더우셨습니까? 제가, 제가······!”

성을 내던 황제가 문득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콱 다물고 손으로 이마와 눈가를 가린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형님을 그토록 힘들게 했던 놈입니다. 형님의 정인을 빼앗고, 형님의 앞날을 빼앗고, 형님의 자리까지 빼앗은 놈입니다. 그런 놈을, 어째서······!”

“나는.”

서현은 담담한 목소리가 황제의 말을 잘랐다. 

“단 한 번도 너를 원망해본 적이 없다.”

“······.”

“네가 내 목을 벤다 하여도, 그 순간조차도 그러할 것이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하고 황제가 멍청히 묻자, 서현이 두 번 생각해 보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보호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망의 달 아래서 본 네 우는 모습이 너무도 서러워 보여서, 다시는 그런 얼굴을 하지 않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 오래 사시지 못하고 먼 곳으로 가신 내 모친은 늘 그런 얼굴로 울고 계시었고···.”

내 아우만큼은 아버지 때문에 그런 얼굴로 울다 숨을 거두지 않도록···, 그리 해주어야겠다고 모친의 뫼 앞에서, 그리 결심하였다···.

“내가 부친께 얻지 못한 것만큼, 아우에게 주리라 생각하였다.”

거기까지 말하고는 서현은 웃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아련하고 쓸쓸한 웃음이었다.

“허나 결국은 그리하지 못하였구나. 내 아비가 한 짓 그대로, 결국은 나 또한 내 목적을 위하여 애꿎은 사람들을 해하고 아프게 하였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 나도 결국은 모자란 인간이었구나. 서현이 머리를 저으며 한 말에 황제가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닌 것이 아니란다, 안아.”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에, 황제가 놀라며 쳐다보자 서현은 달처럼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반투명한 막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서현이 지금이 마치 예전의 그 날들 중 하나인 것처럼 익숙한 미소를 띤 얼굴로, 귀에 익은 다정한 목소리로 황제를 얼렀다.

“목적이 그 얼마나 숭고한 것이었든 간에, 그 과정이 잘못되었다면 그 목적도 결국은 빛을 바래는 법. 나는,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 목적에만 눈이 멀어 몇 번이고 잘못된 일을 하면서도 너를 위해서다, 너를 위해서다 스스로를 설득하고, 속이고 삐뚤어진 길을 갔다···. 아무리 아버지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라지만 순수한 선의로 너를 돕고자 나온 그 이를 죽음으로까지 몰아갔을 때에는, 그래···, 비로소 내가 천겁지옥에 떨어지리라 생각하였다. 결국에는 모든 일이 잘 마무리 되었다 하나 내가 저질렀던 일까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너는 나를 벌하여야 한다.”

“그러나······.”

“내가 죽어 천겁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저어된다면, 부디 자비를 베풀어 다오. 죽어서 지옥불에 몸이 타지 않아도 되도록 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죄의 무게를 네 손으로 실어 주려무나.”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서현이 웃으려다 대신 튀어나온 잔기침을 몇 번 하고는 문득 황홀한 듯 눈가를 천천히 좁혔다.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그 긴 세월 동안 원망을 감수하며 힘쓰셨던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어서. 황제가 던진 물음에 서현이 찬 벽이 푹신한 금침이라도 되는 듯이 등을 기대고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억울할 일이 무어 있을까?”

그 담담하고도 나직한 목소리는 마치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독백 같았다.

“나는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그러니 이제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를 받으려는 것뿐이란다. 그것이 벌이든 상이든.”

이만 돌아가거라, 하고 웃는 얼굴 그대로 서현이 황제에게 말했다.

“언젠가, 내 죗값을 모두 씻는 날이 온다면···, 그 때에는 내 누구보다도 먼저 너를 찾아 갈 터이니.”

그 말을 마친 서현이, 황제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바싹 붙여 큰절을 올렸다. 희 형님의 얼굴에서 서현의 얼굴로 돌아간 그가, 조용히 읊조리는 소리가 좁고 어두운 돌방 안에 은은하게 울렸다.

“죄인 서현, 당금 천자의 앞에 감히 아뢰옵나이다. 옥체 만수무강하사옵고, 치세 내내 백성들이 미주(美酒)에 취하여 부르는 태평성가(太平聖歌)가 천리만리에 퍼지는 성군(聖君)이 되시옵소서.”

그렇게 황제의 앞에 아뢰오며 서현은 그제야 겨우, 자신 속에서 어린 시절의 ‘희’와 ‘서현’이 완벽히 한 사람이 되는 것을 느꼈다. 

**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다. 

“바로 이런 날이었다네.”

난간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던 조원이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바로 이런 날에 뛰어 내렸지. 아파트···, 32층이었던가.”

“아파트라. 참 오랜만에 듣는 단어로군요.”

비로소 조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빙긋이 웃었다.

“놀라지도 않는군.”

“천객들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사람들일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 단순히 뜻하지 않은 사고에 휘말려 딴 세계로 밀려들어온 그대들 수객들과는 다르지···. ···헌데 왜일까.”

“자살을 택했다가 살아났으면 차라리 다시 한 번 죽거나, 그것도 아니면 새 세계에서 새 삶을 살아보거나 할 것이지 왜 자꾸만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으냐 그 말이시지요.”

“···그래.”

제 목숨을 스스로 내다버린 놈 주제에 참 염치도 없다며 조원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나 그 우스갯소리에 답하는 서문경의 목소리에는 조금도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물기 하나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서문경이 말했다.

“자살은 나약한 겁쟁이들이나 내는 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죽을 용기가 있으면 살 용기는 없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원의 눈이 느릿하게 자신을 훑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 아닐까요. 죽을 용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살 수 없을 만큼 무섭고 힘들었던 겁니다. ···내 눈에 어떻게 보이든, 내 가치관이 어떠하든 그 사람의 마지막 순간까지 제 입맛에 맞게 재단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

조원은 침묵했다. 서문경이 한 말이 그저 단순히 자살을 택한 사람들에 대한 말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챈 탓이었다. 한참을 무표정한 채로 있던 조원이 어느 순간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리면서 웃었다.

“다정하군. 역시 혼께서 직접 보살필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비꼬지 마십시오.”

“또한, 용님의 선택을 받아 새로운 신이 될 만한 사람이로고.”

서문경이 콱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나가면서 그 끝이 파르르 떨렸지만, 그러나 서문경은 힘을 주어 그 손을 다시 거두어 들였다. 그 모습을 보며 조원이 머리를 모로 기울였다.

“어째서 참는 건가?”

“제가 성을 내고 당신을 때린다고 해서 무엇이 변합니까?”

“최소한 마음이라도 편해지겠지.”

“아니요.” 

서문경이 딱 잘라 부정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단호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씁쓸하고 쓸쓸해서 일부러 서문경을 자극하려던 조원조차도 멈칫할 정도였다. 조원이 주춤한 사이 서문경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침묵하며 서문경의 얼굴을 살피던 조원이 어느 순간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서문경이 잠자코 머리를 젓고는 화제를 돌렸다.

“폐하께 돌아가는 방법에 대한 말을 들었습니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눈에 띄게 굳은 조원을 무덤덤한 눈으로 응시하면서 서문경이 물었다, ‘궁금하십니까?’

“알려, 알려 주시던가?”

서문경은 머리를 끄덕였다. 조원이 하, 하, 하고 웃는 것인지 어이없어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다가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알려 주시더란 말이지. ······내가 그토록 매달리고 애원했을 때에는 돌덩이라도 된 것 마냥 묵묵부답이시던, 그 분이.”

“······.”

“아니야, 아닐세. 그 분을 탓하는 것이 아니야. 누군들 그러지 않겠나? 이해해, 이해하네, 그래,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고말고. 평생을 함께 해야 하는 배필과 이전 세계에서 무슨 짓을 하고 먹고 살았는지도 모를 천객 나부랭이를 같은 저울에 놓고 볼 수는 없지. 그래, 그렇고말고.”

“내심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서운해 하시는 것 아닙니까?”

입 속으로 누구를 위한 변명인지도 모를 말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던 조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 날카롭지도 않은 말 한 마디에 마치 허를 찔린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던 주제에, 그러나 그가 곧 활짝 웃으면서 허세를 부렸다. 

“그럴 리가 있나. 폐하께 마저 듣지 못하셨나? 어떻게든 콩고물이나 얻어 먹어볼까 싶어서 폐하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다, 수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돌변한 작자가 바로 나라네.”

“어떤 하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의 감정이 아닙니다.”

조원이 무심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밝은 척 쾌활한 척 떠벌리는 자신의 목소리와 비교되는 서문경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머릿속의 그늘이 진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참함인가? 처음 저 이를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반전된 상황에? 

“누군가의 태도에 화가 나서 그 사람을 때렸다는 상황이 있다손 치지요, 결과는 누군가를 때렸다는 것이지만 그 행동을 이루는 감정의 전체는 분노 뿐만은 아닐 겁니다. 분노, 슬픔, 끔찍함, 혹은 망설임이나 후회 따위도 어지럽게 얽혀 있겠지요. 대부분의 일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 또한 마찬가지라고?”

“아닙니까.”

“나를 좋게 봐주는 것은 고맙지만, 굳이 좋게 볼 가치가 없는 작자를 애써 그리 여겨줄 필요는 없네.”

“그럼, 왜 영로당에 간 겁니까?”

그 말이 나올 줄을 몰랐던지 조원이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고 눈썹을 찌푸렸다. 

“또, 왜 천제사 전에 굳이 효강을 찾아가 그를 자극한 겁니까?”

“이제 보니 효강 그 사람이 문제로군.” 

조원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도 참. 아닌 척은 다 하는 주제에 입이 제법 가볍단 말이야, 누가 태본 어른의 아드님 아니랄까봐. 천제사 직전에 그 사람과 황주에서 마주친 것은 사실이나, 그 점에 대해서라면 내 그 분께 이유를 설명 드렸네. 설혹 자네가 그 이유가 납득하기 힘들다 해도 참말로 그 이유가 달세.”

“그렇다면 효강에게 왜 그 말을 흘린 겁니까.”

“그 말?”

“천객들이 진시에 맞춰 제장에 모이도록 수상에게 명을 받았다는 그 말.”

내내 무표정하던 서문경의 입술에 희미한 웃음기가 서리지 시작했다. 평소와는 달리 자신이 흔드는 대로 흔들리던 조원이 이제는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동요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분명 천객들은 그런 명을 받았으나, 당신은 그 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수상의 의심을 사 애초부터 배제된 탓이지요.”

“그럼, 그런 생각은 안 하는가? 나는 헌의공 어른 쪽 사람이었으니 그 이를 위하여 수상을 방해하려는 심산으로,”

“안 합니다. 당신은 서엽에게도 배제 당한 위치 아니었습니까? 당신이 그토록 서엽에게 헌신했다면 그가 그렇게 일찍 당신을 버렸을 리가 없습니다.”

결국 조원이 한숨과 함께 인정했다. 서문경과 대화를 하면서도 반쯤 창 쪽을 향하고 있던 조원의 몸이 완전히 서문경을 향해 돌아갔다.

“그래, 박쥐나 다름이 없는 일을 저질렀지. 이리 붙었다가, 저리 붙었다가. 이곳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저곳에도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부표(浮漂)처럼 구는 것이 아마도 헌의공의 눈에는 보였었겠지, 아니, 굳이 그가 아니더라도 나 같은 자가 어디에선들 신뢰 받겠나. 그러고 보면 내가 이런 신세가 된 것도 당연한 일이야···.”

“천견과는 정반대되는 말을 하는군요.”

천견을 만났나? 조원의 물음에 서문경이 아예 딴 말로 대꾸했다.

“그는 돌아가기로 하였습니다.”

“돌아가기로 했다고? 어떻게? 아니, 그는 중죄인일 터인데 어찌···.”

“죄인이니까요.”

서문경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어진 서문경의 말에 그 의문은 말끔히 풀렸다. 

“세계와 세계 사이의 통로를 열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아는 대로 용 뿐입니다. 허나 용은 그 통로를 열 수 있을 뿐 그 통로를 건널 수도, 그 안 쪽 세계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 세계에는 그 세계를 만든 ‘신’이 있고, 그 신의 대리인이 있는 탓입니다.”

“그 말은······.”

“만일 당신이 돌아가고자 한다면 당신은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곳을 하염없이 헤매게 될 것입니다. 만에 하나 운이 좋다면 당신이 본디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겁니다. 통로 안으로 들어가는 즉시 당신은 낯선 곳에 던져질 겁니다. 그곳은 깊은 물속일 수도 있고, 늪 속일 수도 있고, 또 사막 한 가운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천견, 은.”

“그래도 그는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천 리 만 리, 내리쬐는 햇빛 밖에는 찾아볼 수 없는 사막 한 가운데에 떨어져 고향을 찾아 헤매고 헤매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가겠노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

“자신이 용임을 숨기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폐하께서는 그 점을 염려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허망하게 죽는 것을 말인가···.”

기록을 찾아보았습니다, 하고 서문경이 말했다. 조원은 서문경의 손을 보았다. 그의 손에 두어 권의 책자가 들려 있었다. 그리 공들여 관리한 책은 아닌 듯, 들여다보는 이가 적어 아직도 빳빳한 표지와 책장은 한 겹 노란 물을 먹은 것처럼 누렇게 변색이 되어 있었다. 조원은 그 책자의 제목을 읽었다, ‘객원록(客員錄)’.

“지금껏 이 세계를 찾았던 대부분의 천객들은 귀환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서 고향에 돌아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전멸.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저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아마도 돌아가기로 결정한 천객들에게 사람들이 이 책의 기록을 들어 돌아가는 것을 만류했었겠지요, 그렇지만 대부분의 천객들은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기 않았습니다. 낯선 곳을 헤매다 생을 달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도,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자네는···.”

하고 말하다가 조원이 말을 멈췄다. 서문경이 내내 ‘손님’이 아니라, ‘천객’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탓이었다.

서문경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용은 세계와 세계를 잇는 통로를 열 수 있다고 말씀 드렸었지요. 그리고 저는, 비록 용인이지만 신룡인 폐하의 ‘힘’을 직접 이었으니 한 번 정도라면 ‘통로’를 열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돌아가고 싶습니까?”

대답은 뻔했다.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정작 조원의 입에서 나온 것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그 대답이 아니라 전혀 뜻밖의 물음이었다.

“자네는?”

“······.”

“자네는 어찌할 셈인가?”

가슴 속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작은 벌레 수 십 마리가 한꺼번에 다리를 꼬물거리는 듯한, 그런 야릇하면서도 불쾌한 기분. 서문경이 입을 열었다.

“저 또한 돌아가고 싶습니다. 당신의 예상처럼 그리 행복한 삶을 누린 것은 아니었지만.”

“자네, 기억이.”

서문경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웃는 모양을 만들어냈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자신에게 만화경(萬華鏡) 속의 세계.

“저는 용이 되었으니까요.”

용은 세계와 세계를 여는 자.

“다른 세계로는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습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조원에게, 서문경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이 방금 전 했던 것과 같은 물음을 던졌다.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이번에는 물음이 떨어지지가 무섭게 조원이 머리를 끄덕였다. 느릿하지만,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확실하게.

“돌아가고···, 싶네. 나는 돌아가고 싶어.”

서문경이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뒤돌아 선 서문경이 누군가를 불렀다.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천견 최유였다. 다시금 그에게도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확인한 서문경이 조금 전까지 조원이 앉아 있었던 창가로 다가갔다. 

모란 무늬가 들어간 창 종이에 비쳐 석양이 서문경의 몸 위로 내리쬐었다. 조금 전까지 타는 듯한 붉은 빛이던 석양은 이제 막 손을 뻗기 시작한 잿빛 땅거미와 섞여 온통 씁쓸한 주홍빛을 두르고 있었다. 그 쓴 석양빛이 마치 서문경 자체인 것처럼 보였다. 석양 속에서 서문경이 손을 조금 움직였다. 공기 자체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서문경이 연 ‘문’ 안쪽은 그가 예장처럼 두른 우울한 석양빛처럼 달곰씁쓸한 빛을 띠고 있었다. 먼저 천견이 그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바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른 차원이나 마찬가지인 ‘통로’로 들어가서인지, 아니면 벌써 다른 ‘세계’로 떨어진 것인지는 조원도, 심지어는 서문경조차도 알 수 없었다.

잠시 물러나 있던 조원이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막 ‘문’ 안으로 들어가려던 조원이 마치 문간을 붙잡듯 ‘문’ 옆에 한 손을 대고 서문경에게 물어왔다.

“내가 이런 날에 뛰어내렸었다 했었지. 왜인지 아나?”

조원이 불현듯이 웃었다.

“생을 끝내기에 적합한 풍경이라 여겼기 때문이야. 내내 추하디 추한 삶이었지. 그러니 가는 길만은 마치 축복을 받는 듯이 가고 싶었네. 이 석양이 흡사 폭죽처럼 느껴졌었어···.”

서문경은 창밖을 잠깐 돌아보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정말로, 이 석양이 축제날 밤 어둔 하늘에 터지는 불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서문경은 곧 머리를 저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살기 위해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끝은 생각하지 말고 가세요. 당신은 시작하기 위해서 가는 겁니다.”

그 말에 조원은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문’ 안쪽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석양이 지고 대신 그 자리에 석음이 내리깔릴 즈음 서문경은 창혜각에서 나왔다.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무심코 돌아보자 바람에 대나무 숲이 울며 내는 소리였다. 예전이었으면 쫓기듯 그 자리를 떴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서문경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서 언제까지고 파도가 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문득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가고 싶으냐.”

서문경은 숨기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미안하구나···, 하는 소리가 대답으로 들려왔다. 하지만 서문경은 그를 탓하지도, 그렇다고 그를 감싸주지도 않고 멍하니 대나무 숲이 누었다 일어나는 풍경을 보고만 있었다.

조원과 최유가 ‘돌아갔다’. 자신은, 갈 수 없는 길을 그들은 가 버렸다. 그들이 부럽지 않았다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유가···, 있으니까요.”

자신은 돌아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갈 수 없는 신세이지만, 그렇다 해도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이유를 찾았다. 이 ‘세계’에 머무를, 이 ‘세계’에 어울릴.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서문경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재촉도 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남자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타인의 피부가 느껴졌다.

곧 맞닿은 자리가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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