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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갑작스러운 폭음에 엄헌영은 급히 말을 멈췄다. 흥분한 말이 필사적으로 잡아당기고 있는 고삐를 단단히 움켜쥔 채로 그는 주위를 돌아보며 외쳤다.
“뭐지? 어디에서 들리는 소리지?”
마찬가지로 말을 멈춘 조원이 허를 찔린 듯한 신음을 흘렸다.
“이 방향은······!”
“염락?!”
염락! 엄헌영이 고함을 질렀다. 눈을 홉뜨고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조원이 불시에 어딘가로 달려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염락! 고함을 지르며 그 뒤를 따라가려던 엄헌영이 주춤했다.
조원이 달려간 곳과 정 반대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수를 세기도 힘든 발소리와 달그락거리는 말발굽 소리, 간간히 들리는 바퀴 소리까지. 잠시 후에는 누구의 것이라 딱 꼬집어 말하기도 힘든 웅성거림까지 몰려왔다.
“뭐야, 저건···.”
너무나 뜻밖의 광경에 놀라고 성을 낼 힘마저 없어졌다. 누구의 행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센바람에 펄럭거리는 용기(龍旗),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봉기(鳳旗). 즉, 태황태후의 행렬이었다.
제장으로 향해야 할 태황태후의 행렬이 무슨 까닭으로 이곳에 와 있는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다시금 굉음이 터졌다. 쾅! 이번에는 산맥 전체가 가라앉을 듯이 땅이 우르르 떨렸다. 그와 동시에 하얀 연기가 보란 듯이 피어올랐다. 태황태후의 행렬에서 흥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기다!”
빌어먹을! 콱 이를 악문 엄헌영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향해, 화살이 쏘아져나가듯이 튀어나갔다. 뒤통수에서 역도!, 부정한 씨! 등등의 알 수 없는 고함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
암실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뒤에야 자신이 있던 곳이 계곡 깊은 곳에 있는 동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서문경이 머리를 든 순간에도 먼지구름이 매캐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주변에는 동굴이 무너진 돌덩이들로 가득했고, 또한 아직까지도 비처럼 돌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서문경은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의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답은 기적 따위가 아니었다. 용. 자신이 단순히 용인이기 때문이었다. 날아온 돌이 서문경의 어깨로 쿵 떨어졌다. 하지만 부서진 것은 서문경의 뼈와 살이 아니라 오히려 돌덩이 쪽이었다.
바닥에 엎드린 채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고 있던 서문경은 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른 다리가 휘청 흔들렸다.
“폐하.”
그러나 서문경은 넘어지지 않고 먼지와 돌조각이 물을 뿌린 기름처럼 튀고 있는 그 장소를 헤맸다.
“폐하, 폐하.”
다행스럽게도 그리 오래 헤매지 않아도 되었다. 운이 좋았던 탓이 아니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던 탓이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서문경은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폐하?하고 입이 멋대로 중얼거렸지만 바로 다음 순간 머리가 그 말을 부정했다.
아니다. 저건 황제가 아니다.
순간 서현이 했었던 말에 머리를 스쳤다. 그것을 서문경이 그대로 읊었다.
“귀신···.”
서현이 옳았다. 생전(生前)에는 어땠을지 알 수 없으나 ‘지금’ 저것은 귀신, 혹은 배고픈 아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드높은 하늘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치 거대한 시익(翅翼)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날개라기보다는 그림자, 그림자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순수한 악의(惡意)만을 모아 만든 듯한 기괴한 공작품 같았다. 그 존재감 때문에 사방에 짙은 어둠이 내리 깔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 피막(皮膜) 날개 안 편에는 더더욱 짙은 악의가 존재했다. 몸의 반은 눈으로 빚어 만든 것처럼 티 없이 희고 고운 모양이었으나, 듬성듬성 피와 약이 묻은 목면이 묻어 있는 몸의 나머지 반은 날카로운 것으로 난도질하고 그 위를 불로 지진 것처럼 추악하기 짝이 없었다. 완전히 다른 생물을 반으로 쪼개 억지로 붙여 놓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그 얼굴에 어린 빛깔, 그 얼굴에 박힌 눈에 일렁거리는 눈빛에는 당할 수 없었다.
긴 속눈썹과 완벽한 눈매에 감싸인 눈을 본 순간 서문경은 온 몸에 전기가 오른 듯한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굳이 자신이 그 상대가 되지 않아도 찌르는 듯한 원망과 분노가 곧바로 느껴졌다.
원망?
서문경은 그 순간 퍼뜩 기억해냈다. 황제의 몸 안에서 저 기괴한 생물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무어라고 했었는지를.
-원망스럽다.
그 말을, ‘그것’이 똑같이 재생했다.
“원망스럽구나···.”
“폐하······!”
거칠게 웅얼거리는 소리에 답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서문경은 서엽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것’의 존재감이 너무나 압도적이었던 탓이었다. 서문경은 숨을 삼키고, ‘그것’의 앞에 있는 서엽의 등을 응시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것’은 위험하다. 서엽을, 구해내야 하나?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미 ‘그것’이 서엽을 인식하고 만 탓이다. 아니, 아니다. 서문경은 자신의 생각을 고쳤다. ‘그것’은 처음부터 서엽만을 보고 있었다···!
‘그것’이 물었다.
“싫다 했다···. 두렵다 했다···. 숨이 막힌다 했다···. ‘이곳’에서 꺼내 달라 했다···. 헌데 왜 그러지 않았느냐······.”
“폐, 하.”
저는, 하고 서엽이 겨우 말을 이었을 때, ‘그것’이 아랑곳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서엽과 대화를 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 홀로 있는 방에서 혼잣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 같았다.
“짐을 위하여······.”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항시···, 짐을 위하여 하는 일이라고······.”
했었지···, 그랬었다······. 서문경은 ‘그것’의 등에 달린 시익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저리도 크고 강건한 날개인데, 금방이라도 가루가 되어 부서질 것처럼 연약하게 보였다. 그 순간에도 ‘그것’은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짐이 달갑지 않다···, 꺼려진다···, 싫다···, 그토록 말해도······, 그대는 항시 듣지 않았다. 다른 말을 하여도···, 돌아오는 답은 항상 하나······. 짐을 위하여 그랬노라······.”
긴 옷자락이 끌리는 소리에도 묻힐 정도로 나직한 말. 그러나 이상하게 그 말 하나하나가 귀에 와서 꽂혔다. 그 말에 어리어 있는 무서우리만치 강한 감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그것’의 뒤를 서엽이 쫓으려 몸을 일으키다가 곧바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 모습을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던 서문경이 곧 눈을 크게 떴다. 탈력한 듯한 서엽의 모습은 지금껏 자신이 보아온 그의 모습 중 가장 초라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서엽의 살과 옷가지는 이상할 정도로 깨끗했다···.
“그리하여···, 짐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말하려도 듣지 않으니···, 말해 보아야 그대와 충돌할 뿐이니···, 말해 보아야 감정이 상하고···, 마음이 썩어 들어가고···, 그대의 미움을 살 뿐이니···, 입을 다물기로 했다······. 또한 그대의 말대로···, 그대는 짐을 위하여, 그런, 일을, 했었던 것이니···, 참기로···, 했다.”
참았다. 그러나-.
“모르겠다···.”
‘그것’은 누구에게 던지는 것인지도 모를 물음을 던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느냐···?
“모르겠다, 모르겠어···.”
‘그것’은 탄식했다.
‘그것’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보고 서문경은 아, 하고 짧은 신음을 흘렀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염락 조원과···, 곧바로 그 뒤를 따라오는 엄헌영. 그리고···.
“맙소사.”
커다란 깃발을 내세운 태황태후와 만조백관과 군사들의 무리. ‘그것’은 마치 그 불청객들을 맞이하듯 그들이 달려오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말발굽과 바퀴에 채여 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드륵 드르륵 드르륵, 하는 바퀴소리와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가 귀가 아프도록 커졌다···!
무리의 선두에, 마치 여장군(女將軍)처럼 선 태황태후 엄씨가 먼 곳에서 황제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기에 있다! 감히 천자 후궁을 홀려 정을 통한 역적과 황실의 피도 잇지 않은 주제에 뻔뻔하게 제좌를 차지하고 앉은 부정한 씨앗!”
태황태후가 큰 소리로 사람들을 선동했다.
“포박하여라! 내 친히 황실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이다!”
군사들이 우레와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 지옥과 같은 광경을 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보고 있던 ‘그것’이 불현듯 내뱉었다.
“기다렸건만.”
“······!”
“고작 내게 주어진 것이 이 괴물의 몸인가.”
표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그것’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것’이 불현듯이 소리를 질렀다. 원망스럽다, 원망스러워, 원망스럽다······! 그 외침을 들은 서엽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먼 곳에 있어 그 외침을 제대로 듣지 못한 태황태후는 그 소리가 자신에 대한 항의라고 여겼는지 더 소리를 높여 군사들을 재촉했다.
“저 역도들을 잡아 들여라! 저 놈들을 지엄한 황실의 법도대로 다스려야 지하에 계신 내 아드님, 선제 폐하께서도 편히 눈을 감을 것이니라!”
아.
그 순간 서문경은 보았다, 한 사람이 단 한 순간에 망가지는 모습을.
‘그것’이 비명을 질렀다.
“거짓말!”
헉! 사람들이 숨을 삼키며 두 귀를 틀어막았다.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소리가 말 그대로 온 계곡을 뒤흔들었다. 발밑이 무너질 듯이 우르르르 떨리면서, 사람 두엇 정도는 쉽사리 날려 갈만치 거센 바람이 불었다. 잠시간 잠들어 있던 그 악몽 같은 시위가 크게 홰를 친 탓이었다.
‘그것’은 완전히 미친 것처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하지 마시옵소서! 지하에 계신 내 아드님? 모후께옵서 소자를 언제 그렇게 칭하시었사옵니까? 팔푼이! 멍텅구리! 병신! 가증스럽게 좋은 어미를 가장하지 마시옵고 본디 하시던 대로 부르시옵소서! 용이 되지도 못하는 이 병신을 발로 차며 침을 뱉으시옵소서! 제 형들을 잡아먹은 아귀 같은 놈, 너 같은 놈은 당장 뒈져버려야 한다 욕을 하시옵소서! 아드님? 아드님? 아드님이라! 모후께옵서 언제 소자를 그리 안타까이 여기셨나이까?!”
검은 시익이 한 번 홰를 칠 때마다 대강풍이 몰아치고 돌풍에 사람 머리통만한 돌덩이가 휘날렸다. 소나기처럼 내리는 돌덩이들에 맞은 이들이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기세 좋게 달려들던 군사들은 놀란 말 위에서 낙마(落馬)하여 다리를 잡고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이 발을 내디뎠다. 그의 발이 닿은 자리가 쇳덩어리라도 내려앉은 듯이 쿵! 소리를 내며 깊숙하게 패였다.
“이, 이, 이, 이, 이, 이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에 태황태후는 그 좋던 기세는 어디로 날려 버리고 부들부들 볼품없이 떨고 있었다. ‘저 역적 놈의 자식이···.’하고 욕을 하면서도 그녀가 황급히 말에서 내려 가마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가 가마에 타기 직전, 그녀의 발이 있는 자리가 거짓말처럼 쿵 패였다.
“꺄아아아악!”
공포에 질린 태황태후가 그리 깊지도 않은 구덩이 속에서 네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개처럼 네발로 기면서 태황태후가 중얼거렸다. 무어야, 대체 무어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야?
“헉!”
그러다 문득 머리를 든 그녀가 헉, 큰 숨을 삼키며 얼어붙었다. 황제가, ‘그것’이 어느새 태황태후의 앞에 와 있었다. 태황태후가 찢어지는 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무, 무, 무엇하느냐?! 어서들 이 몸을 지키지 못하고?!’ 그러나 그 소리에 달려들던 몇 안 남은 군사들조차도 ‘그것’이 한 번 팔을 휘두르자 단숨에 날아가 바윗덩이에 등을 부딪치고는 목 꺾인 닭처럼 축 몸을 늘어뜨렸다.
초라한 몸을 덜덜덜덜 떨면서 태황태후가 말했다.
“무, 무, 무, 무어냐, 이 역도의 아들놈이 어디서 황실의 큰 어른인 이 운현궁을···,”
“어마마마.”
필사적으로 허세를 떨던 태황태후가 그 한 마디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어마마마, 소자를 못 알아보시겠사옵니까. 소자 강희이옵니다.”
“강희?” 뜻밖의 이름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뜬 태황태후가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그 병식 자식의 이름이 어찌 지금 나오누?”
아아, 하고 ‘그것’이 신음했다.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선 자리에서 튕기듯 뛰쳐나왔다.
지금 이 순간,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걸쳐져 있던 발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무심코 중얼거린 한 마디 때문에···!
‘그것’은 웃었다. 뚝뚝, 흐려진 두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것’이 더더욱 크게 웃었다. 나중에 나서는 그 웃음이 우는 것과 진배없는 모양이 되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태황태후에게 ‘그것’이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자신을 구덩이에서 끄집어 내주는 것이라고 여겼는지 태황태후가 거만하게 손을 마주 내밀었다. 그러나 ‘그것’의 손은 태황태후의 손을 지나쳐, 그녀의 목을 졸랐다. 흡, 태황태후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다래졌다.
점점 새파래져 가는 그녀의 얼굴에 다정한 눈길을 보내며 ‘그것’이 말했다.
“죽어요.”
“!”
“어마마마께서 늘 말씀하시었던 그대로 소자는 이제 목숨을 끊겠습니다, 그러니 어마마마께서도 함께, 가십시다.”
그 자랑스런 형님께서도, 그렇게 어마마마를 괴시던 부황께서도 아니 계신 지금 이 세상에 더 살아 계실 가치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한 다음에 천진하게 덧붙였다.
“어마마마께서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시니, 소자, 이 세계를 마마의 꽃가마에 실어 드리겠사옵니다.”
폐하! 서엽이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기어 나왔다. 사, 살려줘! 자신의 목을 힘껏 조르는 사내의 힘에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고 태황태후의 주름진 손이 허공을 배회했다. 놀란 재관들과 남아 있던 군사들, 더불어 엄헌영까지도 태황태후를 향해 달음박질쳤다.
그러나.
그 몸이 태황태후와 ‘그것’이 있는 곳에 채 닿기도 전에 모든 사람들이 비명과 함께 내동댕이쳐졌다. 크게 신세가 다르지 않은 서문경 또한 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몸을 일으키며 ‘그것’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서엽이 자신보다 앞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서엽은 그 보이지 않는 힘에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하염없이 주먹을 치며 목에서 피를 토할 듯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폐하! 폐하! 폐하! 폐하!!”
그 비통한 고함이 계곡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그것’의 발치에서 윙, 커다란 원을 그리며 흙바람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서문경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이윽고 그 흙바람이 무시무시한 폭풍으로 변했다. 계곡 안의 모든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가 허공을 맴돌다 보이지 않는 힘에 짓눌린 것처럼 우지끈 산산조각이 났다. 웽, 웽, 웽, 웽, 수 만 마리의 벌들이 맴도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칼바람이 집채만 한 바위조차 들어올렸다.
결국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바닥이 미친 듯이 흔들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에 겨웠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나는 바위와 나무 따위를 피해 도망쳤다. 그러나 거의 파헤쳐지다시피 한 흙바닥이 늪처럼 사람들의 발을 끌어당겼다. 바닥에 발이 묶인 사람들이 그야말로 칼날 같은 비바람에 피투성이가 되어 갔다. 그러다 이윽고는.
말도 안 돼. 누군가가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을 잃었거나, 혹은 그 말을 들을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만일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면 그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정말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불씨는커녕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계곡 곳곳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그 재난은 비단 계곡에만 국한되지 않고 점점 그 범위를 늘려갔다. 어느 순간 그 사실을 깨닫고 서문경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무엇이 있는지 용안으로도 제대로 가늠하기 힘든 저 먼 땅에, 눈보라가 치고 벼락이 내리 꽂혔다. 때 아닌 장대비가 내리고 순식간에 그 물이 지붕까지 차올랐다. 그런 와중에 홍수에 하염없이 울며 떠내려가는 가엾은 짐승의 몸에 확 불이 일더니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활활 타 재만이 풀풀 날렸다.
세상의 종말(終末). 그 말 이외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풍경이었다.
그 때, 온 세상을 에워싼 주홍빛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서문경은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부황이 하려는 일을 저지하고 이 몸을 짐에게 돌려다오.
커다랗게 뜬 눈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지하라고? 내가? ‘이걸’?
못해, 하고 못을 박는 순간 머릿속에서 황제가 다시금 말했다.
-방법은 이미 네가 알고 있느니.
아니다. 서문경은 부정했다. 자신은 그런 방법 따위, 알고 있지 못했다. 서문경은 떨리는 발로 계속해서 뒷걸음질만 치며 중얼거렸다. 못해. 난 못해. 난 못해···.
“도망, 쳐야.”
-네 힘이 필요하단다.
“못, 해요.”
서문경은 자신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황제를 향하여 머리를 저었다.
“난, 당신을 알아. 당신이 무엇인지 안단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내가, 당신을 막으라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나 어조 따위가 스스로 들어도 변명처럼 들려서 서문경은 기가 막혔다. 변명이 아니다! 보라! 이 세상의 종말 같은 광경을. 이런 상황에서 나 따위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서문경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두 귀를 콱 막았다.
“난 못해. 난 못한다고. 난 아무 것도 아니야, 난 아무 것도 못해, 난, 난, 아, 아무것도 못해. 입뿐이야, 고작 말로만 몇 마디 나불거리는 것이 고작이란 말이야. 난 힘이 없어, 없어, 없어, 그러니까 아무 것도···.”
못···해, 하고 말하려다가 서문경이 입을 멈칫했다. 어딘가 익숙한 말···. 기시감?하고 생각했으나 곧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서문경의 눈이 멍해졌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줄곧 했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륵 몸을 일으켜졌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양 겨드랑이를 잡고 일으켜 준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넌, 아무 것도 아니야.
머릿속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넌 아무 것도 못해.
한 발, 발을 뗄 때마다 아버지가 자신의 귀에 속삭이는 듯 했다.
-멍청한 녀석.
-이기적인 행동은 혼자서 다 하면서, 나중에 보면 제대로 한 건 하나도 없단 말이야.
-저런 놈을 대체···.
-저런 놈은···.
쿵, 하고 자신의 발 바로 앞에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그것에 놀란 것처럼 아버지의 목소리가 끊겼다.
“난······.”
아무 것도, 아닌가?
아무 것도, 못하나?
난, 난.
그 사이를 틈타 아버지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목소리에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섞였다. 머릿속에서 두 사람이 자신의 귀에 차례로 교차하며 속삭였다.
-넌.
-짐은.
-아무것도.
-그대를.
-못해.
못해, 하는 아버지의 말 직후에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와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서문경은 멍하니 눈을 껌뻑거렸다. 왜, 들리지 않지? 그러나 그가 그렇게 생각한 다음 순간, 황제의 목소리가 비로소 말을 맺었다.
-믿느니라.
그 소리가 조금 더 늦게 들려온 탓에 서문경은 겨우 깨달았다. 자신이 그 말을 듣고 싶어 했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자신에게 너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 말했다.
황제는 자신에게 그대라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리라 말했다.
서로 상반된 말. 누군가는 나에게서 무(無)를 보았다 했고, 또 누군가는 나에게서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을 보았다 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나, 는.”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믿어야 할 말은······.
서문경은 눈을 감았다. 황제는 이미 자신이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자신이 몇 번이고 이루어 온 일이라 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힘’은, 이미 자신의 안에 있다.
‘힘’이란.
-객의 ‘힘’은 이전 세계에서의 삶과 연관이 있다.
-근본적으로, 가용인이 된 자의 ‘힘’은 가용인이 되기 전의 ‘힘’에 기초하느니.
-더 정교하게 환상을 만들 수 있겠구나.
-그렇게 되었으니 이제는 어느 누군가에게도 지는 일은 없겠구나.
-이제 경이 너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고 또 어느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는다.
-이제 그대의 그릇은 하늘을 담고 해원을 품을 정도가 되었다.
-혼과 범님과 용님과 기린, 대붕 이 다섯 신을 제한 그 누구도, 그대를 무릎 꿇게 할 수 없다.
지금껏 헛소리로만 치부하고 대충 흘려 들어온 황제의 말이 다시금 서문경의 머리를 울렸다. 동시에, 자신이 자신의 ‘힘’을 펼쳤던 순간 중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던 두 가지 일이 떠올랐다. 염락 조원의 ‘힘’에 대적하고, 천견 최유의 ‘술’을 보고자 했을 때, 조원의 술이 불바다에 맞부딪쳐 흔적도 없이 사그라지고 알 수 없는 문자로 쓰여 있던 술법이 자신이 아는 문자로 탈바꿈된 뒤 깨어졌다.
마지막으로, 지금은 무너진 암실에서 서엽과 나누었던 대화 중 유난히 가시처럼 걸리던 말이 생각났다.
-내 직접 자네를 만났을 때 본 환각에서는 분명 향이 났었는데, 염락이 있을 때 자네가 만들어 낸 환각에서는 향이 나지 않았다 했던 것이···.
애초에 뿌리부터 이 세계 사람인 서엽과, 몸은 이 세계에 있으나 언제든 이곳을 떠나고자 하는 조원.
그리고, 엄헌영과 단 둘이 있던 방에서 ‘환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모든 조각이 한 데로 맞춰졌다.
생각하는 모든 것을 ‘환상’으로 만들 수 있는 자신의 ‘힘’은, ‘사람’과 그 사람에 깃든 ‘힘’까지도 만들어 낼 수 있다. 실재를 정확히 ‘복사’해 낸 환상은, 그리하여 실재와 똑같은 ‘힘’을 가지고 그 ‘힘’의 주인이 숨기고 있던 진실마저도 자신의 눈앞에 펼쳐보이게 만든다. 서엽이 있었을 때와, 조원이 있었을 때 같은 것을 만들어 냈으나 서로 다른 현상이 나타난 것은 자신의 힘이라는 것은 무의식중 다른 술사의 ‘힘’을 끌어당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을 ‘상실’한 조원의 힘을 끌어 만든 꽃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은 것이다. 실재와 자신이 만든 ‘환상’이 가진 ‘힘’이 완벽하게 같은 까닭으로, 두 개의 ‘힘’이 부딪치면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간다. 자신이 조원의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그와 같은 ‘손님’이었기 때문에. 허나, 지금 자신의 ‘영역’은 더욱 더 넓어져 있었다.
누구에게도 이길 수 없으나,
누구에게도 패배해지 않는 ‘힘’.
서문경은 두 손을 천천히 맞잡았다. 황제에게 깃든 ‘힘’이 이 순간에도 세계를 통째로 집어 삼킬 듯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한 세계를 살고 없애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
‘괴물!’
아니다, 이 힘은. 이런 ‘힘’을 가진 황제는-.
서문경은 맞잡았던 손을 떼어내며 속삭였다.
“사라져라.”
그런 힘을 가진 황제가 이 ‘세계’의 생사를 자신에게 맡긴다 했었다. 저 몸에 깃든 귀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자신은 이 세계를 살리기로 결정했다. 자신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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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이 ‘세계’에서 일어났었던 모든 일들이 한 판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이 반복되었다. 지진처럼 땅을 통째로 잡고 뒤흔드는 진동.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독우(毒雨). 사람들의 뼈를 벨 정도로 날카롭고, 거대한 나무와 바윗덩어리마저 종잇장처럼 휘날리게 할 만치 거센 대강풍, 화살처럼 수없이 내리 꽂히는 시퍼런 벼락, 늪처럼 변한 땅과 갑작스럽게 솟구쳐 세상을 거대한 채찍처럼 휘갈기는 불기둥까지!
그러나 다시금 이 세계에 ‘반복’된 이변(異變)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람들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때문에 누군가 환각?, 하고 중얼거렸으나 곧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참 산맥을 깎고 있던 불기둥과 새로운 불기둥이 쿵! 하는 굉음을 내면서 부딪쳤다. 두 개의 불기둥이 동시에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다른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폭군처럼 한 손에 거목을, 다른 한 손에 거석(巨石)을 잡고 흔들던 대강풍이 또 다른 대강풍과 맞부딪쳐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내리는 장대비, 사람의 발을 잡고 끌어당기던 땅, 창처럼 날카롭던 벼락, 그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세상이 돌변했다.
폭풍이 가라앉고, 가뭄이 인 땅 위에는 단비가 적셔지고, 지붕 끝까지 차 있던 물이 아지랑이가 되어 사라졌다. 천지를 하나로 갈아버릴 듯이 몰아치던 불기둥도 그 사나운 기세가 한낱 꿈에 불과했다는 듯 나비 날개에서 떨어지는 가루 같은 것으로 변했다. 붉고, 푸르고, 흰 빛가루들이 반짝반짝 허공을 날았다.
사람들의 눈이 멍하니 그 빛의 움직임을 좇았다. 위로하듯 빙글빙글 원을 그리면서 하늘로 솟구쳐 올라간 빛의 궤도가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완전히 사라졌다.
마치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겨울밤의 꿈인 듯 했다···.
그러나 그리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조금 전까지 세상을 완전히 끝내 버릴 것처럼 몰아치던 그 각종 재앙들이 남긴 수많은 상흔 때문이었다. 단단하던 바위땅을 해면처럼 보이게 하는 수많은 구덩이, 뿌리까지 모조리 뽑혀져 나간 수많은 거목, 그 거목을 들이받은 터줏대감 바위, 반쯤 불탄 짐승의 사체,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아직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그것’. 황제의 껍데기를 쓴 ‘그것’의 등에 비구름 그림자처럼 솟은 시익.
갑작스럽게 나타난 재앙이 나타난 것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에 모든 사람이 일단 안도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마음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펄떡펄떡 뛰는 가슴을 내리누른 채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그것’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것’의 손에는 태황태후의 목이 잡혀 있었다. 집요하게 제 어미의 목을 잡은 채로, ‘그것’이 처음으로 제 어미와 서엽 외의 사람을 돌아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숨을 삼키며 얼어붙는 가운데, 서문경만이 담담하게 ‘그것’의 눈길을 받아냈다. ‘그것’의 입술이 씰룩하더니 ‘그것’이 물었다.
“그대냐.”
서문경이 ‘그것’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요구했다.
“그 손, 푸십시오.”
“처음 보는 자로구나···.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짐이 하는 일을 방해하는가?”
“제 말 안 들립니까? 폐하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지 말란 말입니다!”
‘그것’이 아이처럼 머리를 갸웃했다.
“이것은 짐의 몸이다.”
“그것은 당신의 몸이 아닙니다!”
‘그것’이 머리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이것은 짐의 몸이다.”
“당신 입으로 그 몸이 싫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얼른 그 몸에서 나오십시오!”
“그래, 싫다.”
‘그것’이 너무나 순순히 수긍하자, 서문경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 몸에 마음에 드니 나오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저 대답도 퍽 마음에 차지는 않았다. 멋대로 남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주제에 뭐라고? 서문경은 아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나 곧 이어진 ‘그것’의 말에, 서문경은 성을 낼 기운마저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것’이 말했다.
“그래서 이 몸과 함께, 다들 없애버리려 하는 것이다. 헌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것을 방해하느냐?”
기가, 막혔다.
“그 몸도, 다른 사람들도, 이 세계도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당신이 대체 뭔데 그 몸의 생사와 이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겠다는 겁니까?”
“이 몸에는 그럴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선뜻 대답한 ‘그것’이 자신의 가슴팍에 손끝을 얹었다. 천진한 웃음이 그의 입술에 어리었다.
“짐은 천자다. 그러니 이 제국과, 내 신민들을 짐이 내키는 대로 할 권리가 있다. 내 이전에는 그만큼의 ‘힘’을 갖추지 못하여 번번이 방해를 받았으나 이제는 아니다. ‘힘’이 있으니.”
그러니 이번에는 방해하지 말라.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는 듯한 ‘그것’의 태도에 서문경이 아연한 나머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허, 하는 신음만 내뱉었다. 그것을 보고 서문경이 충분히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지 ‘그것’이 다시 뒤돌아섰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에 서문경의 물음이 그에게 던져졌다.
“왜 세계를 없애려 합니까?”
“짐은 이 제국이 싫다.”
“그래도, 소중한 것 하나둘쯤은 있을 것 아닙니까? 어머니, 라거나 혹은···.”
“어마마마.”
‘그것’이 어머니라는 말에 반응했다. 그러나 그 뒤에 바로 이어진 대답은 절망스러웠다.
“어마마마 덕분에 짐이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이다. 그대도 줄곧 이곳에 있었다면 보지 않았느냐, 짐은 늘 모후의 애정을 갈구하였으나 내 어마마마께서는 끝까지 짐에게는 애정을 주지 않으시려는 모양이다. 해서 짐은 이 생을 끝내기로 하였다. 짐의 생, 어마마마의 생. 다음 생에는 분명히···, 모후께서도 짐을 어여뻐 해주실 것이니라.”
‘그것’이 천진난만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혹 아느냐? 짐의 모후께서는 참으로 곱고 화미한 것을 기꺼워하신다. 그러니 이생을 떠나는 꽃가마도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게 꾸며 드려야 그 분께서 노여워하지 않으실 것이다. 어떠냐? 짐이 마련한 꽃가마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을 본 적이 있느냐?
‘그것’의 말에서는 자신을 미워하고 무시하던 태황태후에 대한 분노나 증오 따위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어서 도리어 소름이 끼쳤다. 순진무구한 소년 같은 ‘그것’의 자랑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사람들의 얼굴이 파리하게 굳어가는 가운데, 서문경의 날카로운 물음이 ‘그것’의 목소리를 끊어놓았다.
“그럼, 서엽은? 서엽은 죽어도 좋습니까?”
‘그것’이 멈칫했다.
“진화······.”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자신으로부터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서엽의 눈을, ‘그것’이 멍하니 쳐다보았다. 분명 시선이 마주치고 있을 터인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그것’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대, 는. 짐이 하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었지.”
“······.”
“그래도, 기다렸다. 짐을 위하여 그리한다 하여서, 기다렸다. 허나 이제 알겠다. 진화, 그대는···, 짐의 말은 한 마디도 듣고 있지 않았어.”
내 말은 들어 주지 않았어, 하는 중얼거림이 쓸쓸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것’이 지금껏 길게 이어진 말에 못을 박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짐이 원하는 대로 하고자 한다. 아무리 ‘힘’이 있다 해도 짐은 더 이상 이 몸에 있고 싶지 않다···, 이것은 괴물의 몸이다. 그러하니, 함께 가겠다. 이 ‘괴물’을 데리고, 모두를 데리고.”
‘그것이 활짝 웃었다.
“그것이 짐의 희망인 동시에 천자로서 이 세계를 위하여 해줄 수 있는 일이다.”
“괴물.”
서문경이 툭 내뱉었다. 그 말을 ‘그것’이 받았다, ‘그래, 괴물···.’ 하지만 곧바로 서문경이 날카롭게 그 말을 가로막았다.
“괴물은 당신입니다.”
“무어?”
“괴물은 당신 쪽이라고요.”
당신 같은 자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내가 바보였지! 서문경이 진저리가 난다는 듯한 태도로 내뱉었다.
“뭐가 어쩌고 저째요? 당신이 하는 말이 모순 덩어리라는 것을 말하면서도 모르겠습니까? 왜 당신 어머니가 저승으로 가는 길에 애꿎은 다른 사람들을 순장시키려고 하는 겁니까? 그 몸을 혐오하고 증오한다면서 왜 그 몸에 깃든 힘을 사용하려고 하는 겁니까?”
서문경이 성큼성큼 걸어가 ‘그것’의 얼굴을 힘껏 주먹으로 갈겼다. 퍽! 하는 타격음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서문경이 소리쳤다.
“당장 그 몸에서 나와! 괴물? 괴물이라고? 지금 누구에게 그런 말 하는 거야? 괴물은 당신 쪽이다, 고집과 아집으로만 똘똘 뭉친, 이기심덩어리! 피해자인 척 하지 마! 분명히 당신 부모들은 나쁜 인간들이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다른 사람을 해칠 정당성이 생기는 건 아냐!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망가졌는지, 알기나 해?! 그런 주제에, 뭐? 괴물? 괴물이라고?!”
휘청거리며 쓰러지려는 ‘그것’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기면서 서문경이 으르렁거렸다.
“난 네 놈을 아프게 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을 때릴 수밖에 없는 지금 상황이 너무너무 싫어. 너에게는 괴물일지도 모르지, 증오하고, 혐오하고, 모욕을 줘 마땅한 상대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한테는 아니야!”
‘그것’의 코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 서문경이 속삭였다.
“사라져.”
“짐은···, 황제다.”
“황제는 이 몸의 주인이야, 당신이 아니야!”
“짐은, 용이다. 이 세상의, 신이다.”
‘그것’의 주장을 서문경은 비웃었다.
“당신이 용이라면 나부터 어떻게 해봐.”
서문경이 보란 듯이 ‘그것’의 눈앞에 자신의 손목을 들이밀었다. 숨을 쉬는 듯한 섬세한 비늘이 ‘그것’의 시야 가득 들어왔다.
“나 또한 용인이다. 하지만 당신이 괴물이라고 부르는 그 몸의 주인에게서 받은 힘으로 가용인이 된 자다. 당신이 그렇게 훌륭하신 몸이라면, 나 정도는 쉽게 상대할 수 있겠지?”
해봐. 서문경이 밀듯이 ‘그것’의 멱살을 놓아주며 요구했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친 ‘그것’이 흐트러진 목깃을 붙잡으며 서문경을 힐끗 훔쳐보자, 서문경이 노성을 질렀다.
“해보라니까!”
히익, 하고 숨을 삼키며 ‘그것’이 손을 움직였다. 바닥에서 굉음을 내며 불기둥이 솟구쳐 놀랐다. 그러나 서문경이 똑같이 손을 한 번 휘두르자, 그와 똑같은 불기둥이 그 자리에서 솟구치며 ‘그것’이 만든 불기둥을 없애버렸다.
‘그것’이 다시 손을 저었다. 이번에는 산맥이 통째로 흔들리며 허공으로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수도 없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문경이 그와 똑같은 ‘힘’을 불러내자 ‘그것’의 힘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바람도, 벼락도, 해일도, 그 어떤 힘을 써도 결과는 마찬가지. ‘그것’의 얼굴이 점차로 파리해지며 그 움직임도 점점 더 초조해졌다.
“더.”
그러나 서문경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요구했다.
“더. 더.”
계속해서, 피로에 지친 ‘그것’의 몸이 휘청휘청 흔들리는 것을 보아도 서문경의 표정에는 한 줌의 동정도 비치지 않았다.
“더. 더. 더.”
“······.”
“더 해보라니까?”
‘그것’이 결국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런 ‘그것’에게 서문경이 물었다.
“못해? 왜?”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는 조롱의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오롯이 의아해하는 기색뿐이었다.
서문경이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그것’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의 앞에 다가온 자에게서는 뻗어 나온 그림자가 없었다. 그러나,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발밑에는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용기가 옅어지고 있는 탓이다. ‘그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바들바들 떨렸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볼품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안 돼, 안 돼, 안 돼, 사람으로,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고 있어······!”
“제 말 안 들립니까?”
‘그것’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서문경이 재차 물었다.
“왜 더 하지 않습니까?”
“힘이, 힘이······.”
“그것 참 이상하군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던 이가 쑥 몸을 일으키는 느낌에 ‘그것’은 무심코 머리를 들었다. 서문경이 자신의 뒤를, 정확히는 등에 솟은 한 쌍의 시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문경이 손을 뻗는 것이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손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서문경의 손이 피막이 뻗어 나온 뿌리 부분을 콱 움켜쥐었다.
“이렇게, 아직 날개가 나와 있는데?”
“허, 허, 허나 안, 돼. 힘이···.”
“그럴 리가요.”
서문경이 웃었다.
“명색이 신룡(神龍)인데, 이 정도로 힘이 다할 리가 있겠습니까?”
“······!”
서문경의 말이 떨어지지가 무섭게 사방이 경악에 휩싸였다. 신, 룡?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이 ‘그것’이 내뱉자, 서문경이 확인사살이라도 하듯이 자신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렇습니다, 신룡. 용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이 땅에 내려주기로 약조하셨던 사룡(四龍) 중 날개가 있는 것은 가장 신과 가까운 용인 신룡 뿐인 것을, 모르셨습니까?”
“아니야, 아니다, 아니야! 이 몸은 괴물이다, 그냥, 괴물이다!” ‘그것’이 고집스럽게 외치면서 자신의 팔에 돋은 비늘을 손톱으로 박박 긁었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봐! 검다! 이런 비늘을 가진 용은 없어! 이렇게 검은데,”
“지룡은 청룡, 천룡은 황룡, 복장룡은 백룡, 하지만 신룡은 어떤 용인지 알려진 바가 없지요. 그런데 왜 황제의 침전, 그것도 황제의 침방 장지문에 흑룡이 그려져 있는 겁니까? 당신의 말대로 흑룡이 불길한 존재라면 그럴 리가 없지요. 그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잊혔을 뿐, 흑룡은 있었습니다. 신룡이, 바로 흑룡입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안 되는 거겠지요. 당신이 그토록 괴물이라고 매도한 이가 신룡이라면, 당신이 더 비참해지니까.”
서문경이 씹어 내뱉듯 말했다, ‘끝까지 비열한 인간.’ 서문경의 입에서 북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파랗게 질린 ‘그것’이 서문경을 피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폐하!, ‘그것’을 부르며 서엽이 달려왔지만 그가 ‘그것’은커녕 서문경의 근처에 닿기도 전에 엄헌영이 그를 덮쳤다. 이, 이, 빌어먹을 놈! 서엽이 격렬한 몸부림을 쳤지만 젊고 강인한 엄헌영의 육체를 이기기는 힘들었다. 서문경이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소용없습니다. 당신이 아는 비법이란 대부분의 황족들이 타고나는 천룡의 자질에 대적하는 법. 허나 폐하도, 폐하로부터 힘을 받은 저도 천룡이 아닙니다. ···당신은 저 사람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을 상처 입힌 대가로 끝까지 지켜봐야 합니다. 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을, 결과적으로 당신이 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쳐 놓았다는 사실을.”
절대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해주십시오, 하는 서문경의 부탁에 엄헌영이 대답 대신 이를 콱 물고 서엽의 목과 배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서문경이 다가가자 서엽이 고함을 질렀지만 그 쪽을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문경이 황제의 몸 안에 든 귀신에게 말했다.
“당신은 절대로 폐하의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아, 아니야, 나는, 나는 용이다.”
“인간인 것이 그렇게 싫습니까?” 하지만 어쩌지요, 서문경이 비웃었다. “당신은 당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인간조차도 되지 못합니다.”
서문경은, 선언했다.
“당신은 ‘괴물’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비난하고, 모욕을 주던 그 ‘괴물’. 그 괴물이 당신입니다.”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까? 서문경이 물었다. ‘무, 엇이?’, 겁먹은 것처럼 묻는 ‘그것’에게 서문경이 곧바로 대답했다.
“당신의 온 몸이 검은 것이요.”
“검······!”
“당신의 온 몸이, 온갖 오물들로 뒤덮여 검게 썩어가는 것이요. ···당연한 건가요? 당신은 죽었으니까요.”
“짐은, 짐은, 나, 나는···!”
“죽었어.”
당신은, 죽었어. 당신은 추한 미련만 남아서 세상을 떠도는 귀신일 뿐이다. 그렇게 내뱉은 서문경이 ‘그것’을 내려다보며 말을 끝맺었다.
“계속 세상에 남아 있고 싶다면, 그렇게 해. 폐하는커녕 폐하의 ‘힘’ 일부를 받은 것이 고작인 내게도 당신은 결코 이길 수 없을 테니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혹은 만 번이라도 시도하고 싶으면 해 봐. 그만큼의 패배감을 나를 당신에게 안겨 줄 터니까. ···그것이 싫다면, 사라져.”
나는, 이미.
“이 ‘세계’를 살리겠다고 결정했어.”
“아, 아아, 아아아···.”
‘그것’이 괴롭게 신음했다. 그리고 그 신음은 곧 점점 높아지고 급해져 결국은 찢어지는 비명이 되었다. 아아, 아아아, 아아아아! 제 머리를 틀어쥐고 ‘그것’이 몸을 기괴하게 비틀었다. 무시무시한 괴성에 사람들이 뒤를 틀어막는 그 순간, ‘그것’의 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석양과도 같은 짙은 주홍빛이었다.
곧 계곡 안이 그 주홍빛에 휩싸이고 그 속에서 괴성이 끊이지 않고 터졌다. 싫어! 싫어! 살려줘! 살려줘! 살려다오! 말해다오, 짐이 황제라! 짐이 바로 용이라 말해 다오! 제발! 제발! 제발! 그 괴성은 나중에 가서는 거의 흐느낌이나 다름없이 변했다.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강렬한 빛 속에서 사내가 계속해서 울었다. 누가, 누가, 누가 짐을······!
그러나, 그 압도적인 빛 속에서 말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당신은 황제도, 용도 아니야.”
신룡의 ‘힘’을 나누어 받은 용인.
“당신은 망자다.”
휘몰아치는 빛 속에 서서 조용히 내뱉는 서문경의 모습은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인간이 아닌 신처럼 보였다. 더불어 묵직하게 내리 깔리는 목소리 또한.
“그러니, 당신은 이만 돌아가야 해.”
사라져라, ‘괴물’.
불타오르듯이 부풀어 올랐던 붉은 빛이, 그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정말로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