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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을 앞세워 정확한 목적지도 모르고 말을 달리던 엄헌영과 경혜가 놀라서 말을 세웠다. 길지 주변에서 두 무리가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탓이었다. 그 무리는 모두 커다란 가마를 앞세우고 있었는데, 그 가마의 모양을 본 엄헌영과 경혜의 눈이 순식간에 커다래졌다.
“용련(龍蓮)과 봉헌(鳳軒)이 어찌 이곳에···.”
커다란 지붕에, 금빛 술과 구슬이 장대비가 내리듯 매달려 있는 가마는 용련(龍蓮). 천제사를 올린 용황제만이 탈 수 있는 가마였고, 또 그와 대치하고 있는 붉은 가마 봉헌(鳳軒)은 대례(大禮) 때 황태후나 태황태후가 타는 가마였다.
봉헌을 수 십 필의 군마와 군마를 탄 군사가 둘러싸고 있고, 그 사이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노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용황제가 탄생한 것도 아니건만, 어찌 용련이 세상 밖에 나와 있는가?”
‘곧 따라 가마.’, 잠시 엄헌영과 눈빛을 주고받던 경혜가 목소리를 낮추어 그리 말했다. 그 말에 엄헌영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었지만 곧 경혜의 말을 따라 조원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엄헌영이 사라진 곳을 분명히 눈에 새겨둔 뒤에 경혜 현주가 큰 소리가 터져 나오는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멀리 보일 때에는 단순히 용련과 봉헌을 내세운 두 무리가 대치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가까이서 보자 아니었다. 경혜는 자신이 얼굴을 알 만한 모든 고관(高官)들과 황족보에 이름이 오른 모든 황친들이 모두 그 무리에 섞여 있는 것을 보고 낯빛이 새하얘졌다.
단순히 제장으로 향하던 중에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 태황태후가 작정을 하고 문무백관과 황친들을 이곳에 붙잡아 매어 두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주변 지형을 돌아본 경혜 현주의 얼굴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제장으로 접어드는 유일한 길 길목을 태황태후의 가마가 막아서고 있었다.
경혜는 얼굴을 가리고 인파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로써 그 자가 역심을 드러냈다 보아도 좋은가?!”
마침 태황태후가 기세 좋게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번 일로 위세가 바닥에 처박힌 뒷방 늙은이의 억지를 더 이상 사람들은 두고 보지 않았다.
“역심이라니요? 말씀이 과하시옵니다.”
“무어라?!”
“오히려 역심을 품은 쪽은 마마 쪽이 아니시옵니까?”
누군가가 소리친 말을 또 다른 자가 거들었다.
“엄연히 혈통도 자격도 모두 갖춘 황상이 계시온데 그 분을 몰아내고자 온갖 술수를 부리신 분이 바로 마마가 아니시옵니까?”
“제 욕심을 채우고자 정통한 천자를 폐하려 든 죄는 아무리 지존의 친조모이신 운현궁 마마라 하셔도 용서받기 힘든 죄이옵니다!”
용련을 앞세운 무리에서는 점점 더 강도가 센 발언이 튀어나왔다. 그러던 중에 누군가가 따지듯이 물었다. 제가 아는 이에게 하는 말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그 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죄인이 어찌 신성한 제장으로 입장하려 하는가?”
그 말에, 말을 삼가라 누군가가 조언을 한 모양이었다. 비웃는 소리가 커다랗게 튀어나왔다.
“정통한 천자를 폐하려 든 대역 죄인에게도 아직 황실 큰 어른의 대우를 해야 옳은 것인가?”
태황태후의 성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경혜 현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에서 싹 피가 빠져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지금은 그 권세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처지이나, 명색이 수 십 년간을 권력의 정점에 군림해 온 자다. 그 자존심에 태황태후가 당장 칼을 빼들고 칼부림을 부린다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허나, 태황태후가 이상하도록 조용했다. 그것을 보고 그녀가 꼬리를 내렸다고 생각했는지 용련을 내세운 무리의 발언은 점점 더 목소리가 커지고, 도가 더해졌다. 하지만 경혜현주는 불안감이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함. 결코 그럴 위인이 아니거늘 어째서···?
‘그 소리’가 터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마마! 마마! 마마!”
급하게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더니, 뒤에서 갑자기 커다란 웃음이 터졌다. 태황태후의 웃음소리였다.
순식간에 모습이 뚜렷해진 황고 엄충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안 됩니다! 그것은, 그것만은 결코 안 됩니다!”
그러나 한 번 터진 태황태후의 웃음소리는 결코 사그라지려 하지 않았다. 깔깔깔깔깔깔깔! 세상에 둘도 없이 우스운 소리를 들은 처녀애처럼 낭랑한 소리로 웃어대던 태황태후가 그 웃음소리에 섞어 소리쳤다.
“정통한 황제! 정통한! 정통하다라! 재미있구나! 세상에 이보다 더 우스운 말이 또 어디 있단 말이냐!”
“마마!”
엄충이 피를 토하듯 소리치며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태황태후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태황태후가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 그보다 더 빨랐다.
“수경궁 그 년이, 서엽 놈과 놀아나다가 낳은 놈이 정통한 핏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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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간 ‘그릇’을 열고 새 ‘그릇’안에 든 것을 옮기면 그로서 비법(秘法)은 완성된다.”
서엽이 희열과 기대로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서 깊숙이, 더더욱 깊숙이 용살검을 서현의 목에 들어댔다. 치지직! 불이 튀고 물이 타는 소리가 튀어 오르면서 살이 타는 냄새가 진해졌다.
역겹기 짝이 없는 생살 타는 냄새가 강해질수록 서엽의 얼굴에 서린 환희도 진해졌다. 서엽의 코에는 그 역겨운 냄새가 세상의 어떤 향기로운 꽃향기보다도 향기롭게 느껴졌고, 점점 열리고 있는 서현의 목에서 채 밑으로 흘러내리지도 못하고 타버리는 핏줄기조차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는 붉은 폭죽처럼 보였다. 자신이 항아리에서 토기로 서현의 ‘힘’을 옮겨 넣었듯이, 지금 헌 그릇에서 새 그릇으로 자신의 ‘주인’이 옮겨 가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원망(願望)이 비로소 이루어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폐하!”
감격에 겨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폐하께옵서 그토록 바라시던 것이, 이제야 폐하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사옵니다! 이제 그 누구도 폐하를 얕잡아 보고 조롱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서현의 목에서 검은 점액(粘液) 같은 것이 꾸물거리며 새어나오기, 아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서엽이 용살검을 휘둘렀다. 황제의 팔에서 팍 튀가 튀었다. 피가 튄 자리를 향해 서엽이 소리쳤다.
“바로 저 곳이 폐하께옵서 새로이 자리 잡으실 곳! 폐하의 새 옥좌(玉座)이옵니다! 신 진화 서엽의 충정을 부디 받아 주시옵소서!”
지극한 충심으로 천자를 뵙사옵니다! 원컨대 부디 천수(天壽)를 누리소서, 당금 황제 만세 만세 만만세! 벅차오르는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파들파들 떨리는 사지로 몇 번이나 절을 하면서 서엽이 소리쳤다. 불불불 떨리는 입술에서 기쁨에 겨워 오히려 흐느낌처럼 들리는 신음이 계속해서 새어나왔다.
그 사이에도 검은 점액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황제의 팔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황제의 발등에 올라탄 점액이 꾸물꾸물, 꾸물꾸물 수많은 다리가 있는 것처럼 수축을 반복하면서 황제의 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황제의 다리를 기둥처럼 타고 오른 점액이 단단한 허리를, 넓은 가슴팍을, 긴 목을 기어오르더니 머리를 좌로 틀었다. 용살검에 당한 상처가 있는 바로 그 팔이 있는 자리였다.
“그곳이 폐하의 제좌이옵니다!”
서엽이 같은 말을 커다랗게 반복했다.
“신민(臣民)들 위에 군림하는 재관(宰官), 그 위의 군주(君主), 또 그 위의 용(龍)! 폐하께서 바로 그 용을 옥좌 삼아 흙발아래에 깔고 천하 모든 것들을 지배하시는 절대군주가 되실 것이옵니다!”
그 때, 그 흥분한 외침 위로 대답이 떨어졌다.
“거절하지.”
“······!”
그 대답은 마치 소스라치게 찬 물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무섭도록 담담한 어조와, 이상할 만치 냉정한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머리가 돌아갔다. 서엽의 눈이 경악으로 커다래졌다. 막 상처를 비집고 들어가려던 검은 점액을, 황제의 손이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바싹 말라 있던 목에 마른침이 쑥 내려가는 것과 믿을 수 없다는 중얼거림이 터져 나갔다.
“혼을, 손에 쥐다니?”
비법 덕분에 혼을 항아리에 담아 놓기는 하였으나 혼은 기본적으로 실체가 아니라 관념, 결코 만질 수는 없다! 그런데 황제는 그 ‘혼’을 손에 틀어쥐었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황제는 자신의 손아귀 안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검은 진액을 말끄러미 내려다보다 내뱉었다, ‘추하군.’
“이것이 내 부황이란 말인가.”
“놓아라!”
무엄한 것! 진노한 서엽이 벼락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용살검을 휘둘렀다. 황제가 한 발 뒤로 느릿하게 물러난 것만으로도 용살검을 가볍게 피해냈다. 마치 춤을 추듯이 한 발, 한 발 가뿐히 뒷걸음질 치면서 황제가 읊조렸다.
“그대가 말하는 비법이란, 용 시해자, 즉 황태자시강원에서 얻은 용 살해법을 이름인가 아니면 제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천법(天法)을 거스르려한 강윤제가 만든 도기를 이름인가.”
생각해 보았지, 하고 황제가 말을 이으면서 한 발 더 뒤로 물러났다. 그의 시선이 천장 벽화에 그려진 황룡을 스쳤다.
“내 후가 그리 추측하더구나, 황주에 위패가 모셔진 자들은 미처 황위에 오르지 못하고 살해된 용인들이라고.”
“그 손을 풀지 못하겠느냐!”
“그 말을 들은 효강은 어찌 용인들이 한낱 인간에게 살해될 수 있느냐 의아해하였지만 짐은 짚이는 것이 있었느니. 실은 내내 의문이었다.”
황제의 입술이 뜻밖의 이름을 뱉어냈다, ‘소현태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엽이 일갈했다.
“그 놈은 제대로 된 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마치 부황처럼 말하는구나.”
신기한 것도 다 들었다는 듯이 그렇게 대꾸한 황제가, 그러나 바로 직후에 머리를 저었다.
“부황께서 하도 그리 고집하시기에 짐도 더 이상은 생각지 않으려 했었다. 허나 암만 생각하여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 청룡의 육체가 황룡에 비하여 섬약하다고는 하나 청룡 또한 용, 용이 그리 쉽사리 숨이 끊어질 리가 없다. 무언가 특별한 것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한은.”
“헛소리!”
“그리하여 짐이 생각해 낸 것이 황태자시강원. 과연, 황태자시강원은 ‘증후’가 발견된 용인들의 ‘힘’을 이끌어내고 보조해주기만 하는 집단이었을까. 짐은 짐작은 이러하다, ‘그것은 아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제국의 주인을 정하는 자리, 그것에 각종 이권이 개입되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다. 그 때문에 제국의 주인들은 자신의 핏줄에게, 조금 더 자신의 마음에 든 후비의 소생에게 제 자리를 물려주기 위하여 차대 용황제를 교육하는 데에 밀접하게 관련된 황태자시강원에게 비법의 일부를 물려주었다. 그런 식으로 황태자시강원은 빛과 그늘 양쪽에서 동시에 암약해왔다···. 바로, 황태자를 교육하는 스승으로서의 역할과 적통의 용인을 능가하는 ‘힘’을 품고 태어난 방계 혈족을 시해하는 역할을.”
아마도, 소현 태자는 그 용 살해법에 의하여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치 판결을 내리는 듯한 황제의 말을, 서엽이 곧바로 비웃었다, ‘참으로 상상력이 풍부도 하구나.’ 황제가 머리를 모로 기웃하고는 칼날 같은 물음을 던졌다. 상상력?
“이것이 내 망상에 불과하다면 어째서 강윤제는 혼을 가두는 ‘그릇’을 만든 것인가?”
그 물음에,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던 서엽의 얼굴에 쩍 금이 갔다.
“그 토기는 강윤제가 만든 것이 아니다.”
“용인의 ‘힘’을 가두는 도구를 만들고, 용인이 깰 수 없는 봉인을 입힐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뿐. 천제사를 올린 용황제 뿐이다.”
부정하는 서엽의 말을 다시금 부정하고 황제가 물었다, ‘이견이 있는가?’ 이견이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나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대답 대신 부득 이를 가는 서엽의 모습에서 자신이 원하던 대답을 읽은 황제가 말을 이었다.
“소현 태자가 무엇 때문에 절명했는지까지는 나는 알 수 없다. 허나 괴던 아들의 급사(急死)로 큰 충격에 빠진 강윤제는 이성을 잃고 하늘의 이치마저 거스를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을 부추긴 것은 아마도, 그대였었겠지.”
“그래, 나였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었으니.”
더 이상 부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여기까지 이루었으니 지난 일을 밝혀도 자신이 거둔 승리가 조금도 퇴색되지 않으리라 확신한 것 때문인지 서엽이 비로소 인정했다.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분명 웃음이건만 웃는 것이 아니라 성을 내는 것처럼 들리는 소리였다.
“강윤제를 내가 꾀었다! 멍청한 놈, 듣기 좋은 말로 아주 조금 꼬드긴 것만으로도 바로 넘어 오더구나. 일단 태자의 혼을 도기에 담아 두고 마땅한 육체가 생기면 그곳에 혼을 넣어 태자를 부활시키자는 감언이설을, 어찌 의심 한 번 해보지 않고 믿었을꼬. 심지어는 뒤질 때까지 말이다.”
“또, 다른 한 편으로 그대는 소현 태자 사건에 연루된 황태자시강원 관원들을 몇이나 빼돌렸다.”
소현 태자의 사후 수 십 년 동안이나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으리라. 용을 해한 흉수(凶手)가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서엽의 보호 아래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으니 하늘의 노여움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을 위해서였다.”
서엽이 당당하게 응수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그는 황제의 추측을 비웃으며 되묻기까지 했다.
“또한, 하늘의 노여움이라 했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용님 따위는 이미 이 땅에 그 권능을 미칠 힘을 잃었다.”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네 말대로 황주에 위패가 있는 황족들은 모조리 권자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용인들, 헌데 그에 대한 벌이 어디 있었더냐? 오히려 황족인 문위씨족은, 이 예제국은 그 더러운 먹물을 사방팔방으로 퍼뜨리며 세를 더해가고만 있다! 그것이 증거가 아니냐, 용님은 더 이상 이 땅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그러니 소현 태자의 사후 이어진 전란과 재해들은 모두가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서엽이 미친 듯이 웃으며 선언했다.
“용의 시대는 끝을 고했다!”
그가 용살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다른 한 손으로는 이미 다른 자의 혼이 빠져나간 서현의 목을 움켜잡고 있는 채였다. 서엽의 손이 서현의 목을 뒤로 젖혔다. 서현의 목이 목각 인형의 목처럼 덜렁거렸다.
“움직이면, 이 목을 꺾어 버릴 것이다.”
손을 풀어라, 서엽이 위협했다. 두려움도 무엇도 없는 시선으로 그런 그를 응시하면서 황제가 손을 풀었다. 마치 목이 졸린 듯이 헐떡거리고 있던 검은 점액이 다시 황제의 벌어진 상처 사이로 기어들어 가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 몸을 내 주인께 내어 주어라, 너는 그러기 위해서 만든 것이니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신중한 눈으로 황제의 행동을 주시하면서 서엽이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착하지···.’
“그렇게 착하게 굴어야 이놈들 꼴이 나지 않지···. 주제도 모르고 날뛰다가 제 명을 재촉한 소희와···, 그 수객 놈처럼.”
황제의 상처 사이로 점액이 뭉툭한 머리를 들이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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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 하고 점액이 완전히 상처 안으로 들어갔다. 서엽의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로 물들었다.
짙은 주홍(朱紅)빛이 일순 황제의 온 몸을 감쌌다, 아니, 그의 몸 속 깊은 곳에서 주홍빛이 뿜어져 나왔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타오르는 듯한 주홍빛이 암실 안을 가득 채웠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이, 어깨를 힘껏 누르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생명’이 불타는 빛이었다.
서엽은 숨을 삼켰다. 마찬가지로 붉은빛이 어른거리는 그의 눈이 격정과 설렘으로 일렁일렁거렸다. 자신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나왔다. 이제야······.
“이제야······!”
곧 빛이 사그라졌다. 불타는 것 같던 주홍빛을 모조리 빨아들인 황제의 몸은 마치 굳은 것처럼 선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서엽의 몸이 튀어나갔다. 무심코 놓친 서현의 몸이 툭, 하고 바닥을 굴렀지만 이제 서엽의 시야에는 그런 것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서엽이 비틀비틀 황제를 향해 다가갔다.
“폐하···?”
하고 조심스럽게 부르자, 황제가 눈을 뜨고 머리를 조금 들었다. 황제의 눈에 서로 다른 오묘한 빛들이 혼란스럽게 얽혀서 일렁거렸다. 검은빛과 노란빛, 세로로 찢어지는 동공이 심장이 뛰듯이 커졌다 작아졌다 다시 커지기를 터질 것처럼 격렬하게 반복했다. 흡사 불붙인 창검이 챙챙 사나운 소리를 지르며 밤하늘을 가르는 것 같았다.
그 눈을 본 즉시 서엽은 직감했다. 그 분이시다.
그 분.
나의, 나의 주인···!
서엽은 황제의 앞에 쓰러지듯 두 무릎을 꿇고,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참으로, 참으로 오래 기다리셨나이다. 신, 불초 진화 서엽이···,” 물기 어린 고함이 터졌다. “당금 황제를 뵙사옵니다······!”
황제의 입이 벌어졌다. 서엽이 기대 어린 눈으로 그것을 올려다보며 그에게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황제의 아랫입술이 꿈틀 경련하듯이 떨렸다.
“진, 화.”
“알아보시겠사옵니까? 소인, 진화이옵니다! 폐하의 충신이며, 폐하의 종인 진화이옵니다!”
“진화···.”
황제가 서엽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그 손을 떨리는 시선으로 우러러보며 서엽이 자신의 두 손을 들었다. 그러나 서엽의 손이 황제의 손가락 끝을 받쳐 들기 직전, 황제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살려······.”
“···폐하?”
“살려, 다오, 진화.”
“폐하!”
황제가 자신의 목을 박박박박 긁기 시작했다. 그가 거의 울부짖듯이 소리쳤다.
“아프다, 아파, 아파, 너무 아파, 몸이 너무 아프다···! 여기는 어디냐, 어디기에 이토록 어둡고 답답한 것이냐? 숨이 막혀,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다, 진화야, 짐을 꺼내다오! 제발 여기서 꺼내 다오!”
괴로워하는 황제의 모습에 서엽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완벽한 ‘그릇’이라고 여겼건만 대체, 대체 어째서?
그 때 황제가 말했다.
“고작 이것이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물처럼 담담한 목소리는, 자신의 주인의 것이 아니라 증오스런 일황자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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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놈.”
하고 내뱉는 황제를 멍청한 눈으로 응시하던 서엽이 어느 순간 악을 썼다. 그가 달려들어 황제의 멱살을 쥐었다.
“폐하는! 폐하는 어디에 계시느냐, 제안, 네 이놈···!”
“그새 노망이라도 들었느냐.” 냉소적으로 대꾸한 황제가 점액이 기어 들어간 상처 쪽을 눈짓했다. “내 속에 부황의 혼을 집어넣은 것은 네놈이 아니었더냐?”
“헌데 어찌 폐하가 아닌 네 놈이 나와 있는 것이냐? 왜 사라지지 않은 것이냐?”
“사라져?”
참으로 이상한 말도 다 들었다는 듯이 황제가 반문했다. 무슨 까닭으로?
“짐이 이 몸의 주인이건만, 왜 짐이 사라진단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비법, 분명히 강윤제와 시강원의 비법에는···.”
“강윤제? 시강원?”
황제가 비웃었다.
“그대는, 부황의 말을 조금 더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부황께서 나를 무어라 하셨는지는 누구보다도 그대가 더 잘 알 터인데.”
-너는, 괴물이다.
“괴···물.”
머리에 떠오른 익숙한 말을 무심코 중얼거린 서엽이 당혹하여 곧바로 스스로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야! 아니다! 황룡과는 다르나 분명히 일황자 또한 용이라는 것을, 그것도 현존하는 어떤 용인보다도, 아니, 지금껏 있었던 어떤 용황제보다도 강인한 ‘힘’을 지녔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확인했다! 이 눈으로, 이 귀로, 이 손으로!!”
“짐이 무엇인지는 짐조차 아직 모른다.”
허나, 하고 황제가 못을 박았다.
“괴물과 신 중 무엇이든 부황은 이 몸을 감당할 재목이 되지 못한다.”
“닥쳐라!”
“또한 만에 하나 부황께서 그런 재목이 된다 하더라도, 그대의 노력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아.”
“닥쳐! 닥쳐라! 네 놈이 무엇을 안다고 함부로···,”
“부황의 하나 뿐인 충신인 듯 굴더니 부황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지 않으냐.”
황제가 심상하게 말하면서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으로 서문경의 얼굴을 가만히 더듬었다. 황제의 손가락이 서문경의 섬세한 얼굴 생김새를 느릿하고 집요하게 덧그렸다. 이제는 황제의 시선조차도 서엽을 떠나, 서문경의 얼굴로 떨어졌다.
“부황이 가장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부황을 미치게 한 진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고.”
그러다 픽, 황제가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짐에게 그리 말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황제가 서문경의 가슴팍에 손을 미끄러뜨렸다. 계속되는 돌발 상황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서엽도 반사적으로 그 손의 움직임을 쫓았다. 황제의 손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손아래에 가려져 있던 상처가 물밖에 드러났다. ···드러나야, 했다.
“없어.”
서엽이 중얼거렸다.
“상처가, 없어···!”
아니, 상처는 있었다. 그러나 서문경의 가슴팍에 불그스름하게 부풀어 있는 상처는 화상(火傷)이 아니라 단순한 창상(創傷)에 불과했다. 놀란 서엽이 황급히 서현을 돌아보았지만 분명히 서현의 목에 난 것은 화상이었다. 당연했다! 수기(水氣)의 극치에 다다른 용살검은 용인의 살을 태우니까!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왜?!”
왜 저 수객의 상처는 화상이 아닌 것인가?!
더더군다나, 처음에는 물꼬가 터진 저수지처럼 계속해서 피가 솟구치던 상처는 어느덧 피가 멎은 데다 희미하게 부은 흔적만을 남기고 있었다. 마치 몇 주는 족히 지난 상처 같았다. 왜지? 왜? 혼란스럽게 중얼거리던 서엽은 어느 순간 깨달았다. 황제의 손이 한 번 서문경의 살을 스칠 때마다 서문경의 상처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하, 하하하하하하!”
그것을 안 순간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멍청한! 멍청한 놈! 연모의 정에 눈이 멀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의 상처를 제가 받아들이다니!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 놈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바보였다!
서엽은 다시 용살검을 든 손에 콱 힘을 주고 황제를 향하여 한 발자국 다가갔다. 수객의 상처를 빨아 들였으니 놈의 가슴팍은 큰 화상을 입어 살도 뼈도 제 구실을 못할 터였다. 그러니까···!
그러나.
“······!”
자신의 기척을 느낀 황제가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을 때, 서엽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가슴팍에 입은 상처가 완전히 아문 서문경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히고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사박.
가죽신이 돌바닥을 스치는 소리 때문인지, 야명주가 일렁거리는 그림자 때문인지 바닥에 누운 서문경이 몸을 꿈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서엽에게는 그것을 면밀히 살필 여유 따위가 없었다.
“왜···.” 그가 아연히 중얼거렸다. “왜?!”
왜지?! 분명히 수객의 상처는 황제에게로 옮겨갔다. 그러나 그가 입은 상처도 화상이 아니었다!
“어째서!”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서엽이 마구잡이로 용살검을 휘둘렀다. 황제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팔만 들어 그것을 막아냈다. 용살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황제의 팔을 감싼 옷자락이 찢겨 나가고 곧 맨살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살이 찢기고 피가 튀었지만 서엽이 아는, 당연히 일어나야 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코에 익숙한 살타는 냄새도, 물이 증발하는 듯한 소리도, 흰 연기도 피어오르지 않았다. 서엽은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틀어졌다! 무언가가 단단히 틀어졌다.
그러나 틀어진 것이 어떤 부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아아아악! 서엽이 짐승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가 입에서는 쉬익, 쉬익 기괴한 숨소리를 내뿜으면서도 손바닥으로 눈가와 이마를 박박 문질렀다. 그가 중얼거렸다.
“당황할, 당황할 필요 없어.”
“······.”
“그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그 분께서 ‘그릇’으로 옮겨가셨고, 굳이 화상이 아니라도 일황자는 분명히 치명상을 입었어.”
틀어진 것은 사소한 것 몇 개 뿐, 그 외의, 대부분의 일은 자신의 계산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도 당혹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미친 사람처럼 스스로를 향해 중얼중얼 말하던 서엽의 손이, 얼굴 전체를 쓱 문질러 내리다가 고작 눈가만 내놓은 채로 멈췄다. 사고하기도 전에 먼저 말이 튀어나갔다.
“헌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바란 적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대는 참으로 눈치가 빠른 자야.”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저절로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황제의 가슴팍을 비스듬하게 갈라놓던 크고 붉은 상처가, 점차로 옅어지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니 주제도 모르고 날뛰지만 않았더라면 제 명을 재촉할 일도 없었을 것을.”
자신이 소희와 수객을 조롱하기 위하여 했던 바로 그 말을 똑같이 내뱉으면서 그가 다가왔다.
벽에 등이 닿고 나서야 자신이 그를 피해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다.
“더 이상 다가오지,”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려는 그 순간, 황제가 무표정하던 얼굴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왜? 무엇이 무서우냐?”
황제가 보란 듯이 한 팔을 내밀었다. 용살검에 베여 크고 작은 상처가 거미줄처럼 새겨진 팔뚝. 그 팔에 난 상처가 하나같이 타닥 타닥 타닥 화로에 소금이 튀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아물고 있다.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하나, 아물지 않고 있는 상처가 서엽의 눈을 사로잡은 순간 황제가 자신의 쇄골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혼’이라던 검은 점액이 들어간 바로 그 자리였다. 꾀는 듯한 목소리가 암실 안에 울린다. 보아라.
“보아라. 네 눈앞에 있는 이가 누군지. 네 주인이다.”
보란 듯이 황제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어느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그 안에서 흘러나왔다.
“진화······.”
“······!”
“살려······,”
목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누군가의 손이 우악스레 목소리를 당겨 허리를 끊어버린 듯한 이질감과 함께.
넋을 잃고 그 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입술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그 입술에서 그 분의 목소리 대신 킬킬, 거친 기침 소리가 섞인 웃음이 흘러 나왔다. 용살검을 든 손을 황제가 확 잡아 당겼다. 용살검에 살이 닿는데도 그것을 피하기는커녕 도리어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 황제가 허연 이를 드러내고 물었다.
“들었느냐? 네 주인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더냐? 들은 대로 네 주인은 아직 이 몸 안에 있다. 네가 그리하였지, 어쩌면 네 호언장담대로 네 장한 주인께서 나를 밀어내고 이 몸을 차지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헌데 너는 어찌하여 내가 다가가는 것을 꺼려하느냐?”
“으······.”
그 말이 옳았다. 저 ‘그릇’ 안에는 그 분께서 들어 계셨다. 자신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뜻을 이루었건만. 그랬건만.
“왜 두려워하느냐? 네 말 그대로 이 몸은 네가 만든 ‘그릇’일 뿐이다. 이 몸에 담겨 있는 것도 네가 그토록 깔보던 반푼이일 뿐이다. 헌데 왜 그러느냐? 늘 그렇듯 자신만만하게 선언해 보거라. 드디어 네가, 승리를 쟁취했노라, 네가 네 주인의 손에 용의 몸이라는 전리품을 바쳤노라!”
응? 하고 코앞에 들이밀어진 놈의 허연 이가 써억 소리를 내며 길어진 것을 본 순간,
“오지···,” 멋대로 입이 지껄여댔다. “오지 마라!”
섬뜩한 위기감이 온 몸에 들러붙어 이성을 마비시켰다.
“꺼져라, 이 괴물!”
서엽은 마구잡이로 외쳤다. 머릿속에서 붉은 불이 번뜩번뜩했다. 이제 확신이 들었다. 잘못 됐다! 무언가 잘못 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다! 그 분의 말씀을 좀 더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그 분께서 왜 그리 저 놈을 꺼려하고 두려워하셨는지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 했다! 허나 그 분께 조금이라도 우월한 용신(龍身)을 드리고 싶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 그러지 못했다! 명백한 실수였다.
서엽은 허둥지둥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서현이 들어왔다. 그가 손을 뻗었다.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그 분을 저 몸으로 옮기면···!
“안 될 일.”
괴물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분의 ‘혼’이 들어간 입구가, 용살검이 낸 상처가 수없이 많은 수포로 부글거리며 삽시간에 아물고 있었다.
“이 몸 밖으로 나가려면 그 또한 짐의 윤허를 받아야 한다. 아직까지 짐은 이 몸 안에 들어오는 것은 허하였으나 나가는 것은 허하지 않았노라.”
“폐하를 내놓아라, 이 괴물아!”
“어찌 그리 노여워하느냐?”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괴물이 머리를 모로 갸웃했다. “내 이제 네 놈이 바라던 것을 내어주려 하거늘.”
뜻밖의 말에 멍청한 소리가 튀어나갔다, ‘뭐라고?’ 바라보자 괴물은 웃고 있었다. 밤보다 차고, 뱀보다 고운 웃음.
“내 몸.”
화사(花蛇)같은 혀로 괴물이 말했다.
“이 몸을 내어 주마.”
“무······,”
“원하는 대로 해보아라. 그리하면 세상이 끝나는 것보다 더 큰 절망을 보게 될 터이니.”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서, 괴물이 제 배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괴물의 눈이 비로소 인간다운 온기를 띠고, 괴물의 손이 제 배필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고 매만졌다. 몇 번이고 그 동작을 반복한 괴물이 머리를 숙여 제 배필의 하얀 귓불을 한 번 깨물고는 그 귀에 속삭였다.
“곤히 잤더냐, 경아. 허나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란다.”
그 말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실로 끌어 올리는 것처럼 서문경이 눈꺼풀이 스르륵 열렸다.
**
눈을 뜬 서문경은, 한참 동안이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서문경의 얼굴을 황제의 손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한없이 어르고 쓰다듬었다. 기어코 기본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이성이 돌아왔다. 서문경이 ‘폐하?’하고 부르자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래, 나다.
다급히 몸을 일으킨 서문경이 황제의 볼 위에 손을 얹고 빠르게 내뱉었다. 마음이 다급한 나머지 자신과 황제를 둘러싼 주위 사정은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눈치였다.
“괜찮으십니까? 수상이···, 아니, 서엽이 폐하를 ‘그릇’이라고···.”
“내 안에 부황의 ‘혼’이 들어갔다.”
황제의 대답에 서문경의 눈이 더 커질 수는 없겠다 싶을 만치 커졌다가 곧 절망과 고통으로 빠르게 물들었다. 폐하···, 하고 망연하게 부르는 서문경에게 황제가 부드럽게 애원했다.
“짐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
“도와준다고요?”
제가, 폐하를 말입니까? 다급하게 물은 뒤에 서문경이 곧바로 표정을 흐렸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하겠지만, 제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요? 하지만, 어떻게, 무슨···.”
“해주겠느냐?”
“제가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하는 서문경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시선에서는 단 꿀이라도 뚝뚝 흘러내릴 것 같았다. 황제가 서문경의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헤치고 드러난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른 다음 머리를 들었다. 한 손이 스르륵 끌려가 황제의 쇄골 위에 얹히게 된 서문경이 무슨 일을 하려는 거냐고 묻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황제가 설명해 주었다.
“보고 있거라, 곧 짐 안에서 다른 인격이 보일 것이니. 그것은 내 부황의 혼이 들어가 생긴 것이다. 다만 절명할 즈음의 사정이 좋지 않았고, 또한 오랜 시간 좁고 어두운 도기 안에 갇혀 있었던 탓에 그는 더 이상 사고할 수 있는 이성이나 제대로 된 사람의 감성 따위를 가지고 있다고는 보기 힘들 것이니라. 그러니, 그대는 쉽게 귀신이라 생각하고 대처하여라. 악귀라 생각하여도 좋다.”
잔뜩 긴장된 표정을 한 서문경이 힘주어 머리를 끄덕였다. 굳이 황제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도기 속의 ‘혼’은 악귀, 망량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악귀가 곧 짐의 몸을 점령하고, 제 욕망을 이루려 할 것이다.”
이어진 말에 서문경이 두 손을 콱 쥐었다.
“막을 방법은···.”
“이 방도가 가장 바른길이다.”
더 생각할 여지도 없이 딱 잘라 말하는 황제의 대답에 서문경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 때문에 서문경은 깨닫지 못했다,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어조나 표정 따위가 어딘가 묘하다는 사실을.
그러나 ‘괴물’이 뜬금없이 벌이는 일을 파랗게 질린 채로 지켜보고 있던 서엽은 그 미묘한 어감 차이를 대번에 눈치 챈 듯 했다. 황제는 방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부터 말할 방법이 ‘가장’ 바른길이라고 말했다, 실상 택할 수 있는 길은 수 없이 많다는 오만한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엽은 불같이 노하였다. 저 놈이 무엄하게도 지금 자신과 그 분을 가지고 놀고 있지 않은가!
“네 이놈! 대체 무슨 심산이더냐!”
벼락같은 고함이 떨어지자 서문경의 머리가 저절로 그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황제가 곧바로 서문경을 당겨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황제가 힘주어 말했다.
“그 때 네 ‘힘’이 필요하단다.”
서문경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믿을 수 없다는 말투였다.
“제 힘이요···?”
“그래, 네 힘이.”
“제 힘은 고작해야 환상을 만드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서문경의 눈이 자신을 잃고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남을 흉내 내는 것이 고작이란 말입니다. 그런 것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틀리다.”
황제가 곧바로 부정했다. 부챗살처럼 곧게 뻗은 서문경의 속눈썹이 아래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멍하니 껌뻑이는 속눈썹 안에 담긴 초점 없는 눈이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희미하나마 확실한 빛이 돌아오고 그 눈매 바깥을 감싼 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전, 하고 서문경이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고백했다.
“전 폐하조차도, 저조차도 속여 왔습니다. 폐하께서 보신 저는 제가 줄곧 부러워했었던 사람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폐하께서 지금까지의 제 행동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짐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황제가 서문경의 말을 가로막고 말했다. “그대가 스스로를 속인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지금껏, 모든 이에게 사랑받고 자랐노라 생각한 것.
“그러니 짐에게 보인 그대의 모습은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받지 않은 그대 본디 모습에 가까울 것이니라. ···허나, 만에 하나 그렇지 않다 해도 좋다.”
서문경의 이마에 황제의 이마가 닿았다. 지척에서 눈이 마주쳤다. 둥글었던 동공이 점점 가늘어지며 세로로 뾰족해졌다. 가장 진실한 모습을 하고서 황제가 말했다.
“그대가 어떤 모습이건, 짐은 그대가 그대인 것만으로 더 없어 흡족해. 그대는 짐을 긍정하여 주었고 짐을 하나의 인격체로 독립시켜 주었고 그로써 짐을 알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때문에 짐은 내 발로 그대라는 농(籠) 안에 걸어 들어가 문을 굳게 걸어 잠갔으니, 영원히 그대를 벗어나지 못할 지어다.”
대답, 하마. 서문경은 그 말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면 돌려보내 주겠느냐는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 차렸다.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어느덧 눈가가 타는 듯이 뜨거워져 있었다. 가슴 속이 바싹바싹 타 들어갔다.
황제의 입이 열렸다.
“짐을 원망하거라.”
“······!”
“짐은 다시 태어나도 그대를 놓아줄 수 없을 것 같구나. 짐에게도, 이 세계에도 그대가 필요해. 그대가 없다면 짐은 세상을 살 의미가 없음이다, 이 세계는 그대가 있지 않으면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음이다.”
그러니 있어다오.
“짐을 위하여서도, 세계를 위하여서도.”
서문경이 눈이 또 한 번 깜빡여졌다. 눈물이 맨살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눈물을 흘리는 서문경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서문경의 시선이 황제에게 꽂혔다. 저 사람과, 이 세계를 위해서. 그것이 자신이 머물러야 하는 이유.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그러니 황제의 말은 비유도 허세도 아니었다.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말 그대로의 뜻. 자신의 중얼거림에 황제는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냐. 영특하구나, 짐은 아직도 잘 모르겠구나.’ 허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이미 직감하고 있는 듯 했다. 어떤 존재이든 간에 자신이 이 세계를 좌지우지할 힘이 있다는 사실을.
이 나라가 아닌, 이 ‘세계’를.
서문경이 물었다, ‘그런데도 힘드나요?’ 애매하기 짝이 없는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은 황제가 머리를 끄덕였다. 너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짐은 곧 사라질 것이다.”
동시에, 무척이나 기쁘다는 사실을.
“그 때 부황이 하려는 일을 저지하고 이 몸의 주인을 짐으로 되돌려 다오.”
“어떻게···.” 서문경은 두 손을 등 뒤로 숨기고 콱 깍지를 꼈다. 들뜬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방법은 이미 네가 알고 있느니.”
그대가 이미 몇 번이고 이루어왔던 일이다. 서문경의 이마에서 자신의 이마를 떼어낸 황제가 서문경의 동그란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대가 이미 몇 번이고 이루와 왔던 기적을, 다시금 일으켜 주면 된다.’
“짐은 그대를 믿느니라.”
“폐하···.”
“부탁한다.”
“폐하!!”
황제의 눈이 누군가가 잡아끄는 것처럼 스르륵 내려가는 것을 본 서문경이 비명을 질렀다. 황제의 팔과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문경은 자신이 틀어쥔 황제의 몸이 급속도로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의 피부가 싸늘하다 못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과 피부는 마치 죽은 지 다소간의 시간이 흐른 시체 같아졌다.
“괴물이 잠들었어.”
서문경이 몇 번째인지도 모를 만치 수 없이 황제를 불렀을 때, 불쑥 누군가가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서엽! 놀란 서문경이 두 눈을 부릅뜨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미 서엽이 자신의 바로 뒤에 와 있었다.
그런데 서엽의 얼굴이 어딘가 이상했다. 커다랗게 뜨인 두 눈은 초점이 사라진 채 동공이 확장되어 있었고 입에서 간헐적으로 훅, 훅, 하는 숨소리가 흘러 나왔다. 거의 푸른빛을 띤 얼굴에서는 핏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흡사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에 서문경이 할 말을 잃은 그 한 순간, 서엽이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지금이다!”
“가까이 오지 마!”
서문경이 급히 황제의 몸을 끌어안으며 서엽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서엽의 무시무시한 힘을 당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비켜라! 서엽이 서문경을 황제에게서 어렵잖게 떼어내 바닥에 내팽개쳤다. 등이 돌바닥에 부딪친 서문경이 고통에 찬 신음을 삼키면서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용살검을 든 서엽의 눈이 온통 광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지금이다, 기회는 지금뿐이야! 기름이 튀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소리쳤다.
“이 괴물을 없앨 기회는 지금 뿐이야, 지금 뿐이라고! 방해하지 마라!”
“미친 놈!”
“미쳤다고? 미친 건 네 녀석 쪽이다!”
서엽이 바닥에 시체처럼 미동 없이 누운 황제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이 놈은 용이 아니라, 괴물이다! 그런 괴물의 편을 드는 네 놈이야말로 미친 것이 아니면 무어냐!”
“폐하는 괴물이 아니야!”
“괴물이 아니면? 용살검으로도 죽지 않는 이놈은, 시강원에서 천 년 넘게 쌓아온 비법도, 나아가 정통한 용황제의 비법조차 통하지 않는 이놈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폐하는······!”
서문경이 사납게 소리치려는 찰나였다. 서엽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 누워 있던 황제의 몸이 꿈틀했다. 서문경이 무엇을 보는지 알아챈 서엽이 망설이지도 않고 용살검을 황제의 심장에 정확히 꽂아 넣었다. 그러나, 칼날이 황제의 피부를 뚫고 막 들어가려는 그 순간.
“······!”
세상의 종말과도 같은 붉은 빛이 암실을 물들였다. 그 석양 같은 적색 홍수 속에서 황제가 눈을 떴다. 용안, 그러나 그 익숙한 용안 위에 번들거리는 빛이 서문경은 무섭도록 낯설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황제가 자신이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서엽은 자신과는 정 반대의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서엽의 입이 꿈틀하더니, 그가 내뱉었다.
“설마······?”
눈을 뜬 황제가 내뱉은 첫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원망스럽다.”
“?!”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도 전에 황제의 등에서 시커먼 그림자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