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2/66)

**

모든 것이 기억이 났다, 아니, 모든 것을 ‘보았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자신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 그것을 보았다. 

범세계에서 자신에게 붙여진 이름은 서문경이었다. 나이는 갓 스물을 조금 넘겼을 뿐이었고 부모님은, ···없었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낳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자신에게만 어머니의 사인(死因)을 유난스레 숨기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서문경은 오히려 어머니의 사인을 추측할 수 있었다. 

임신중독증. 

그 때문인지 아버지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가장 옛날부터 자신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혹자는 어른답지 못한 태도라고 그를 비난했지만 혹자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다. 

자신의 부모님은 참으로 힘들게 맺어졌다고 했다. 어머니가 고아였던 탓이었다. 거의 수년을 걸쳐 겨우 맺어진 사이가 자신 때문에 모래성처럼 흩어져 버렸다. 그 생각 때문에 서문경은 늘 아버지 앞에서는 움츠려들었다. 

모친이 타계하고 부친이 자신을 방치한 가운데 자신을 키우다시피 한 것은 형이었다. 자신과 형은 나란히 서 있으면 형제라기보다는 삼촌과 조카, 혹은 젊은 아버지와 아들로 보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났다. 고생 끝에 결혼에 성공한 후에 낳은 자식인 자식과 달리 형은 부모님이 혼인 신고를 하기 전부터 낳아 키운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에 대한 미안한 때문인지 아니면 고된 행보 중간에 겨우 얻은 두 사람 사이의 결실이란 생각 때문인지 형은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사람이 퍼붓는 애정에 푹 감싸여 자라다시피 했고, 그 덕인지 형은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매사에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재혼을 했다. 누군가의 소개나 강요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진 때문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이 느꼈었던 것 같다. 

내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듯이 굴던 사람이었다. 슬프고 서러웠지만 그 사람이 그만큼 어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새로이 아끼고 사랑할 사람을 찾았다고 한다.

양가적인 감정이 자신의 뱃속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어머니를 대신할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면 왜 나를 그렇게 미워했던 거지? 슬프고 억울해졌다. 지금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아버지가 자신의 어머니를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을 찾은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이성적으로 사고할 만큼 냉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동시에 부질없는 기대가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이제 나도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가.

그런 와중에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졌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재혼인 새어머니에게도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 있었다. 자신과 동갑인, 새어머니의 아들은 자신과 같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 소년의 얼굴과 이름을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 소년이 새어머니와 함께 나타났을 때 자신은 소스라치듯 놀라고 말았다. 

유난히 흰 피부에 단정한 용모를 한 그 소년은 성격도 한 점 그늘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쾌활하고 명랑해서 그리 성적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물론 학교 선생님들에게까지 인기가 있는 아이였다. 내심 그 소년을 완벽하게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으며 자랐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은 그 때문에 몹시 놀랐다. 

유복자에, 홀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아이, 더군다나 소년은 자신처럼 다정하고 듬직한 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소년 또한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소년과 자신은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도 없었고 그래서 말을 섞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자신을 보자마자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반가운 듯이 웃으며 정확히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자신과 소년을 보는 새어머니는 다행이라는 듯이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자신의 아버지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자신과 새로 맞아들인 가족들이 별 무리 없이 어우러지려 하는 상황 자체가 싫은 듯했다.

그러나 그가 굳이 싫어하는 티를 내고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아도 이미 자신은 새어머니와 소년이 불편했다. 새어머니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듯한 태도가 싫었고, 또 어떤 상황에서든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새어머니가 자신에게 잘해 줄수록 어쩐지 더 소외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자신을 더 불안정하게 만든 것은 새어머니보다는 소년 쪽이었다.

-혹시 내가 싫어?

어느 날,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소년이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당혹스러웠다. 그가 뜻밖의 질문을 해서 당황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는 것 같이 느껴져서 놀랍고 부끄러웠다. 당황한 나머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자 소년이 다시금 물어왔다. 그래서 나를 피하는 거야?

-나는 너와 친해지고 싶어.

소년이 똑바로 시선을 맞부딪치고 요구해왔다. 실상은 요구 따위가 아니었지만 당시의 자신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가 뭔가 네게 거슬릴만한 일을 했다면 말해주면 좋겠어. 고칠 테니까.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싫어.

-그러니까, 내가 싫은 이유를 말해 주면 내가 고치겠다고,

-그냥, 너 자체가 싫어.

내뱉어 놓고서 후회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역시나 눈앞의 소년이 상처 받은 얼굴을 해 보였다. 아, 하고 저절로 입이 열렸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소년이 말했다.

-그래도 생각해 줘. 생각해보면 있을 것 아냐, 내게서 마음에 안 드는 점이. 그 점을 없애면 나를 조금이라도 덜 싫어하게 될 것 아냐.

-···왜 그렇게까지 해?

-뭐?

-널 싫어하는 사람은 있으면 안 된다는 거야?

소년을 보면 항상 느끼곤 하던 열등감이 불쑥 눈앞을 가려 더 이상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뱃속에서 이글거리는 불덩어리를 완전히 토해내고 편해지고 싶다는 충동에 마구잡이로 소리쳤다. 

한 사람이라도 너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렇게 불편하냐? 하지만 왜 널 싫어하면 안 되지? 

그게 아니라, 하고 소년이 변명하려 했지만 일부러 듣지 않았다. 

-모두가 널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게 자신이 있어?

-아니야, 그런 게!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네가, 너는······!

-왜 넌 나하고 다른 거지?!

-···뭐?

그래, 늘 그것이 이상했었다. 소년이 자신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는 처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너 나랑 다를 바도 없는 처지잖아?

그런데 왜.

-너는 왜 사람들에게 사랑 받지? 왜 움츠려들지 않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자신이 있을 수가 있어? 

그래, 왜! 나하고 네가 무엇이 달라서?! 저 소년은 마치 자신을 한 종이 중앙에 찍어 누른 후에, 그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펴서 나온 자국과 같은 이였다. 물론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달랐다. 한껏 움츠려 들어서 그 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온통 가시를 세우고 있는 자신과는, 그러면서도 한 시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는 자신과는, 무슨 짓을 해도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패배 의식에 빠져 있는 자신과는! 

저 소년은 태양처럼 밝았고 모든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그 자신감이 자신의 눈에는 눈이 부셨고, 사실을 안 지금에는 눈이 부신 것이 지나쳐 눈이 아프기까지 했다. 자신과 저 소년은 다른 것도 하나 없는 것 같은데, 왜 저 소년은 저렇게 자신감이 넘치고, 왜 저렇게 행복해 보이고, 왜 누구에게도 사랑 받는 것인가. ···이제는 아버지조차도 저 소년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니까.

콱, 주먹을 움켜쥐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나만이라도.

-난 네가 싫어. 네가 좋아질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그 선언에 크게 상처받은 소년을 보자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자신은 그것을 쾌감이라고 생각했다. 

이겼다. 

···그 이후로도 소년은 늘 자신의 곁을 맴돌았다. 자신은 그런 소년을 외면했다. 그러면서 그가 눈에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상처 주었다는, 이겼다는 승리감도 잠시 자신의 열등감을 똘똘 뭉쳐 놓은 듯한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그래서 자신은 어느 순간부터 소년을 필사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새로 만들어진 가족의 구심점이 될 아이의 탄생인 동시에 이미 해져 너덜거리고 있던 옛 가족이 완전히 붕괴되는 소리가 들렸다. 

늦둥이가 태어나자 온 집안은 행복하고 안온한 공기에 휩싸인 듯 했다. 그러나 그 따뜻한 공기는 자신만을 비켜나고 있었다. 자신은 어느 날,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원영이는 듬직해서 항상 의지가 되고, 윤이도 착하고 밝으니까 동생에게 큰 도움이 되어 주겠지. 내가 이렇게 나이 들어서 갓난애를 봤어도 그 두 녀석이 있으니까 크게 걱정은 안 돼.

서원영은 자신의 형의 이름이었고 윤은 그 소년의 이름이었다. 서문경의 이름이 빠진 것을 안 새어머니가 나무라듯, ‘경이는 또 어떻고요.’하고 말을 보탰지만 곧바로 아버지가 부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혀까지 끌끌 차면서 그가 말했다.

-그 녀석은 워낙 이기적인데다 못돼 처먹어서, 도저히 의지할만한 구석을 못 찾겠어. 

언제나 듣던 말이었다. 그러나 왜 그 때에만 그렇게 속이 찢어지는 듯이 아파왔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칭얼거리는 갓난아이를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어르고 달래며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들을 뒤로 하고 서문경은 바로 집을 나왔다. 집 안의 따뜻한 공기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자신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마침 회사에서 귀가하던 형과 마주친 탓이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반갑게 형을 맞이하는 대신 자신은 멍청한 신음만 흘리며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형의 곁에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자신을 발견한 형이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형의 그 친근한 행동을 본 여자가 자신의 얼굴을 조심스러운 눈길로 훔쳐보더니 곧 활짝 웃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챈 것 같았다. 

썩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도 함박웃음을 짓는 여자가 일순 너무나 곱고 어여뻐 보여서 자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웃음은 자신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새어머니가, 때때로 짓곤 하는 웃음. 그것을 깨닫자 발밑이 단단한 돌바닥이 아니라 물렁거리는 진흙탕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형은 결혼을 한다고 했다. 보통 형 또래의 사람들보다 훨씬 늦은 결혼이었다. 뛰어난 미남은 아니지만 사내다운 용모에 성격도 직업도 나무랄 곳 하나 없는 형이 지금껏 결혼하지 않고 있었던 이유를 서문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자신 때문이었다. 형은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복잡한 심경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몇 년 간이나 독립하지 않고 집에서 머무르며 자신과 아버지, 자신과 새 가족들 사이의 방파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 자신도 성인이 되었다, 충분히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형은 대학을 다닐 동안이라도 자신의 집에서 살자고 제의해 왔지만 자신은 거절했다. 형수가 될 여자는 착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자신은 그래서 더 그 형수와 불편해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대로 자신은 모난 성격이었다, 그러니 낯선 사람과 함께 살면서 그 사람과 틀어지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만일 자신이 형수님과 틀어지게 되면 중간에서 형이 곤란해질 것이다, 그런 것은 싫었다. 그리고···. 

-형의 첫 번째가 이제 네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무서운 거지?

형이 결혼하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형수가 될 사람과 함께 온 가족이 바다에 온 날이었다. 좋은 분위기를 망치는 것이 껄끄러워 몰래 별장을 빠져 나왔다. 바닷물이 빠진 백사장을 따라 무작정 걷다 보니 낯선 방파제까지 가게 되었다. 그제야 자신이 처음 보는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문득 뒤에서 그렇게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이었다.

-넌 무서운 거야.

너 여기는 어떻게. 그렇게 묻는 자신의 말허리를 자르고 ‘소년’이 다짜고짜로 쏘아붙였다. 평소와는 달리 어딘가 화가 난 듯한 모습에 당황스러워졌다. 

-형을 좋아해?

‘소년’이 묻는 말을 자신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좋아하느냐고? 형은 자신의 가족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가족’은 줄곧 형 하나뿐이었다. 형만이 자신을 아끼고 생각해 주었고, 그런 형을 자신은 늘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니 자신이 형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대로 대답하자 ‘소년’이 성내듯이 날카롭게 일갈했다.

-아니야! 내가 묻는 건,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라? 깜짝 놀란 것처럼 갑자기 입을 다문 ‘소년’에게 자신은 물었지만, 소년은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듯이 꾹 입을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때 자신은 바람이 거칠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출발하기 전 지나치듯 보았던 일기 예보가 머릿속을 스쳤다. 아차하는 순간에는 이미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 방파제에 와서 부딪친 파도의 하얀 포말이, 방파제를 기어올라 그 끝에 선 자신의 발까지 할퀴는 것을 보고 어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발을 돌린 자신을 보고 ‘소년’은 자신이 그를 피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기다려! 

그가 자신을 거칠게 붙잡아 세웠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너도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줬지만 그 말이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전혀 다른 뜻으로 들렸던가. 갑자기 그가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질렀다.

-왜 계속 피하는 거야?!

-뭐?

그런 게 아냐,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를 피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가 믿어줄 리는 없었다. 

자신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자 ‘소년’이 웃었다. 늘 쾌활하고 구김살 없는 그가 지은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어두운 웃음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에서야 깨달았다, 그도 사람이다. 그도 상처를 받는다. 자신이 그를···, 내내 할퀴고 있었던 것이다.

서문경. 자신을 부른 ‘소년’이 그 때와 똑같은 물음을 던졌다. 

-내가 싫어?

바로 ‘소년’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은 겉으로는 같게 들리는 그 물음이 사실은 이전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소년’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싫다···, 는 대답을 듣는 것을.

-내가, 그렇게 싫어?

재차 묻는 소년을 자신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년’이 달라졌다는 것을,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던 ‘소년’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야 알았다. 

싫어해? 미워하느냐고? 아아, 그랬지. 그랬다···.

-그래···.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을 멍청하게 바라만 보면서 자신은 생각하고 있었다. 싫어한다. 저 ‘소년’은 늘 자신의 열등감을 자극시키니까. 저 ‘소년’을 보면 너무 비참해지니까. 하지만 나는 동시에······.

-난······.

그의 손에 억지로 불러 세워진 탓에 바다와 마주보고 있었던 자신은 그 때 파도가 치는 것을 보았다. 마치 영화나 사진 따위에서 본 해일처럼 거대한, 너울파도가.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도망치지 마! 고통스럽게 소리치며 자신을 붙드는 그의 손을 확 밀쳐버렸다. 폭풍우가 치는 것을 안 가족들이 멀리서 자신과 ‘소년’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하려고 했지만 파도가 자신을 덮치는 것이 먼저였다. ‘소년’이 비명을 질렀다.

-서문경!

-경아!

파도에 삼켜지기 직전에, 형의 목소리를 들었다. 머리가 거의 반백(半白)처럼 보이지만 체구가 청년처럼 당당한 것도 당연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장면, 그 속에 들어 있던 남자는 아버지가 아니라···, 형이었으니까. 

“······.”

‘현실’로 돌아온 서문경은 두 손바닥으로 고통스럽게 얼굴을 쓸어 내렸다. 자신은 그 ‘소년’을 싫어했지만, 동시에 그를 ‘부러워했다’. 너무 부러워서, 그래서.

“가짜가···, 아닙니다.”

그래서 ‘연기했다’, 그를. 이번 세계에서만큼은 미움 받고 싶지 않아서, 사랑받고 싶어서, 자신이 아는 이 중에 가장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던 사람을.

그것이 서문경의 진실이었다.

**

만일 그대가 ‘물’에 실려 내려오지 않고 대붕을 타고 내려왔을지라도 똑같네. 서엽은 말했다. 

“물론 눈속임을 하기에는 더 쉬웠겠지. 허나 결국은 자네의 ‘생각’, 즉 세상에 원래 없는 것을 눈에 보이거나 만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점은 변치 않아. 그러니 언젠가는 들통이 났을 걸세.”

다만···, 하고 거침없이 말하던 서엽이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의 머리가 모로 기울었다. 지난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내 직접 자네를 만났을 때 본 환각에서는 분명 향이 났었는데, 염락의 말에 의하면 그 이가 있을 때 자네가 만들어 낸 환각에서는 향이 나지 않았다 했던 것이···. 그 말에 초점이 사라진 서문경의 눈이 불현듯 깜빡, 깜빡. 눈꺼풀이 열렸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곧 서엽은 머리를 저었다. 허나 지금 와서 그 딴 것이 무슨 상관이더란 말이냐.

벽이 등을 바싹 기댄 채로 무너져 앉아 있는 서문경을 향해 서엽이 천천히 허리를 접었다. 그리고 두려움에 찬 서문경의 눈을 관찰하듯이 보며 짓궂은 투로 말했다.

“헌데 이 흥미로운 사실을 아는 자가 아직까지는 이 늙은이 밖에 없는 듯 하더란 말이다.”

그래서, 하고 말하는 서엽의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내 이곳에 손님을 불렀단다. 재미있는 유흥은 다 함께 즐겨야 하는 법 아니더냐?”

“손, 님?”

설마, 하고 서문경이 생각한 순간, 그가 생각한 최악의 답을 서엽이 그대로 내뱉었다.

“곧 일황자가 이곳으로 올 것이다.”

“······!”

“소희는 저 혼자서도 이곳을 찾아올 수 있겠지만 일황자로서는 이곳이 영 생소한 곳일 테니 내 그에게 안내인을 붙여 두었지. 그러니 곧 일황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안 돼. 서문경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오면 안 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다 바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마는 서문경을 향해 서엽이 칭찬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 덕이 크군. 제 아무리 내가 여기 있대도 자네가 아니었으면 일황자가 이곳에 올 결단을 했을 리가 있겠는가?” 

이 늙은이만 이곳에 있다면 굴을 통째로 폭파시켜 버릴 성정이시니. 서엽이 웃는 소리가 서문경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앞이 아찔했다. 나···,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나, 때문인가? 서엽이 마귀처럼 속삭이는 소리로 대꾸해 주었다. 

“그렇네, 모두가 자네 덕분이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 목적을 이룰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야. 오히려 천객들보다도 자네 쪽이 더 내게 도움이···,”

“닥쳐!” 

서문경은 두 귀를 틀어막고 소리쳤다. 서엽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칼날이 되어서 귀를 후벼 파는 듯 했다. 내 잘못! 내 잘못이다! 모두가 내 잘못이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그 비통한 외침을 고함 소리로 묻어버리고 싶다는 듯이 서문경이 계속해서 외쳤다. 

“더 말하지 마! 닥치라고 했잖아!”

“또 이러는군.”

서엽이 허허 웃으며 혼잣말을 하고는 제 품에서 단도를 빼들고 그것으로 그대로 서문경의 손등을 베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단도가 튕겨 나갔지만 서문경의 손등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여린 비늘이 두어 조각 찢어져 떨어져 나갔다.

“어른이 하는 말 아닌가.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는 때가 있는 법이네. 그것이 싫다면, 아예 귀를 막을 수 없도록 손목을 잘라 주는 것이 낫겠는가?”

“어떻게, 비늘을?”

“분명히 내 말했었네. ‘용을 죽이는 법’을 아느냐고. 그 말뜻을 모르겠나?”

“용을 죽이는 법.”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가슴 속이 바늘로 찔린 듯이 섬뜩했다. 서엽은 자신에게 용을 죽이는 법을 아느냐고 물었었다, 그 말은 말 그대로 그 방법을 자신에게 묻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용을 죽이는 법을, 안다······?”

“그렇네.” 서엽의 눈이 가늘어졌다. “들어서 알고 있었을 뿐 실지(實地)로 해본 적은 없어 내심 불안하였네만 희행(喜幸)하게도 정보(正報)였던 모양이야, 명색이 용인인 자네가 맥없이 당하는 것을 보아하니.”

말을 멈추고 서엽이 아아, 하며 어딘가를 돌아보았다. 그의 웃음이 짙어졌다.

“자네는 여러모로 복덩어리로군. 이리 때가 딱딱 맞아 떨어지기도 힘든 일인데.” 

“안 돼.”

“도착한 모양임세.”

과연 누가 먼저일지 모르겠군, 서엽이 즐거이 내뱉은 순간 서문경이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 대신에 손으로 기면서 고함을 질렀다.

“오지 마! 여기로 오면 안 돼!”

**

비명이 들렸다. 아니, 비명이 아니라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했다. 

누구냐. 

지금 누가 울고 있는 것이냐. 

귀에 익지는 않으나, 기억에 있는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비틀비틀 몸을 흔들면서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걸어갔다. 울지 마라. 너무 비통하게 울고 있어서 어서 다가가 우는 이를 달래주고 싶었다. 네 누군지 알 수는 없으나 그리 울지 마라. 네 너무도 서럽게 울고 있어서 내 가슴이 다 아프구나. 

아아, 그래. 마치, 그 아이 같은 울음소리였다. 그래서···, 더 마음이 끌렸다. 

어디냐.

‘그’는 울음소리를 찾아 헤매었다.

어디서 울고 있는 것이냐.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

“서현···?”

서문경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굴 입구에 나타난 사람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익숙한 얼굴···, 틀림없이 수상 서현이었다. 그러나 서문경은 말끝을 흐렸다. 

수일을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숲 속을 헤맨 듯 행색이 말이 아닌 것을 제하면 분명 서현이 맞았지만 이상하게 자신이 없었다. 서문경은 두려운 눈으로 서현 쪽을 바라보았다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서현이 비틀거리면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 무슨···.”

“어찌···.” 

휘청, 휘청, 사람의 몸이 흔들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기묘한 각도로 서현의 몸이 흔들렸다. 그 기괴한 모습에 서문경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러나 뒤는 서엽이 막고 있었다. 도망칠 수 없다···! 서문경이 허둥거리는 사이에 서현이 서문경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흙과 피로 엉망이 된 손이 쑥 뻗어왔다. 무서워!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고 콱 두 눈을 감고 움츠린 머리 앞에 두 팔을 교차시켰다. 

“······!”

그러나 다음 순간, 서문경은 놀라 반사적으로 눈을 떠버렸다. 서문경의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서현이, 서현의 손이···.

“어찌 그리 우느냐······.”

자신의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놀란 나머지 멍하니 올려다보자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한결 더 다정해졌다. 상처투성이 얼굴을 서현이 일그러뜨렸다, 웃으려는 것 같았다. 그것이 잘 되지 않아 몹시도 기괴한 얼굴이 되어 버렸지만 서현은 그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초점 없는 눈을 서문경의 눈과 맞추려 이리 저리 돌리면서 그가 말했다.

“뉘댁 아이이기에, 이리 서럽게 우느냐······?”

“······.”

서문경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설마 위로하고 있는 것인가···? 날? 볼을 쓰다듬고 있던 손이 좀 더 위로 올라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어린애를 칭찬하는 듯한 행동. 그러고 보니 분명 자신에게 뉘댁 ‘아이’냐고 물었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의식 자체가···, 없는 건가?

“울지 마라···. 울지 마···.” 

서현이 느릿하게 말했다. 

“무슨 까닭으로 이리 우는 것인지 말해 주면···, 내 해결해 줄 터이니 말해 보려무나···. 무엇 때문에 이리 우느냐···? 누가 이리 울게 하느냐···?”

내 네 또래의 아이를 하나 안다. 네가 우니 그 아이가 우는 것 같아 내 마음이 좋지 못하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서현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서문경은 불현듯이 깨달았다. 자신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자신의 뒤에 딱 붙어 서 있던 서엽이 서현 쪽을 보고 있었다. 

불안한 기분에 뒤를 돌아보고 서문경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 쪽 입꼬리 끝을 비틀어 올린 서엽이 서현을 향해 냉담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 눈빛이 서문경에게는 익숙했다.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마치 아버지가 자신을 볼 때와 같은 시선. 얕잡아 보고, 한심하게 여기고, 비난하는 그 시선···! 네 주제에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비웃는 그런 시선!

“왜 비웃는 겁니까! 왜! 뭐가 우습습니까?!”

“자네는 그럼, 저 꼴이 우습지 않은가?” 

서엽이 턱짓으로 서현을 가리켰다. 이제 자신의 발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지 서현이 좌우로 몸을 비틀거리다가 우당탕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서엽이 큰 소리로 웃었다.

“봐라, 저 모습이 꼴사납지 않으냔 말이다?”

“꼴사납지 않습니다! 뭐가! 대체 뭐가 꼴사납단 말입니까! 저한테는 조금도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자네는 위선자로군.”

“위선? 무엇이 위선입니까? 또 제가 만일 진짜 위선자라 하더라도 당신이 절 비난할 자격이 있습니까?”

“흉측한 것을 흉측하다 말하는 것에도 자격이 필요한가?”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든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이 저 사람을 함정에 빠뜨렸지 않습니까!”

서엽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여유롭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틀렸네. 저 아이를 망가뜨린 것이 내가 아니라 저 아이 자신이라네.”

“무슨 궤변을···,”

“궤변이 아니라 사실일세.”

가볍게 서문경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서엽이 손짓했다, ‘이리와 보려무나, 소희야.’ 망가진 것처럼 바닥에 처박혀 손발을 바르작거리고 있던 서현의 고개를 느릿하게 서엽 쪽을 향했다. 그리고 서문경조차 다정히 어르고 달래던 서현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성난 짐승처럼 목구멍에서 쉿!하는 소리를 내면서 서현이 소리쳤다.

“귀신!”

죽어! 죽어! 죽어! 서현이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서엽에게 달려들었다. 사람의 것이던 손에 두꺼운 금피(金皮)가 입혀지면서 창살 같은 손톱이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서문경은 소스라칠 듯 놀라 숨을 삼켰지만 정작 서엽은 침착하게 품속에서 칼을 빼들고 정확히 자신의 얼굴로 내리꽂히는 서현의 손톱을 막았다. 

챙! 손톱과 금속이 부딪치며 터져 나온 금속성이 굴 안을 뒤흔들었다. 그 뒤를 치이익, 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서문경의 눈이 커다래졌다. 서현의 손톱과 칼이 맞닿은 자리에서 수증기 같은 것이 올라오고 있었던 탓이다. 그런데, 서엽이 품속에서 꺼낸 것이 당연히 칼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칼보다 훨씬 더 넓적한···, 거의 판 같은 모양의···.

“나무?”

고작 나무로 용인의 손톱을 막았다고? 믿을 수 없다는 서문경의 목소리에 서엽이 픽 웃었다.

“도수(桃樹: 복숭아나무)일세. 자고로 복숭아나무는 귀신을 쫓는다는 미신이 있지. 정말로 복사목이 귀신을 쫓는 효험이 있는지는 알 수 없네, 다만 복사목은 비록 나무이나 그 성질은 물과 가장 가깝다지. 용, 특히 금룡(金龍)은 쇠의 성질을 품은 용. 그러므로 물에는 약하다 하네. 이 패는 거의 천 년을 묵은 복사목으로 만든 패일세. 천 년이라는 시간은 미물조차 반신의 반열에 오르게 하는 시간, 그렇다면 천 년을 산 복숭아 나무는 어떻겠는가? 이 나무의 본신은 하찮은 하계의 나무이나 그 본질은 거의 벽도(碧桃: 선경에 있다는 전설상의 복숭아)에 가깝다 할 것이네.”

즉, 물(水)의 기운을 품은 물건 중에는 이만한 것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야. 서엽이 도수패(桃樹牌) 끝을 썩둑 칼로 베어내자, 납작하던 패가 순식간에 날카로운 날이 선 무기로 화했다. 그 위에 서엽이 끈적끈적한 즙 같은 것을 뿌리고 또 그 위에 하얀 재를 발랐다. 

삼 천 삼 백 삼 십 세 개의 금도(金桃)와 도월(桃月: 음력 3월)에 태어나 꽉 찬 세 살이 될 때까지 승도(僧桃)만 먹인 어린 계집아이의 새끼손가락을 잘라 나온 피를 섞어 끓여 만든 액과, 삼 천 삼 백 삼 십 세 그루의 복숭아나무를 동시에 태워 마지막까지 남은 하나의 재라 했다. 서문경의 얼굴이 질렸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서엽의 입에서 줄줄이 읊어지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한 집착이 느껴졌다.

“제 아무리 용인이라도 이 정도까지 하면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지.”

“설마 정말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서문경의 말을 서엽이 가로챘다, ‘설마 정말로 친아들을 죽일 셈이냐고 묻고 싶은 겐가?’ 그리고서 그가 계속해서 하얀 연기 같은 것이 나오고 있는 손톱을 붙잡고 비틀거리고 있는 서현에게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만일 끝의 끝까지 저항한다 하면 나도 각오를 해야 하겠지.

“허나 제아무리 용인이라 한들 저렇게 망가진 상태에서 이놈을 상대하기는 무리가 있을 터.” 

그렇게 말하는 서엽의 손이 복숭아나무로 만든 칼날을 어여쁘단 듯이 쓰다듬고 있었다. 그와는 상반되게, 서현은 두려운 시선을 힐끔힐끔 도수검(桃樹劍)에 던지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런 서현을 조금도 서두르지도 않고 느긋한 걸음으로 쫓으면서 서엽이 말을 이었다.

“대충 치명상을 입혀 두면 알아서 생명의 불이 사그라질 것이니 굳이 내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겠지.”

“어떻게 당신 아들을···!”

“아들?”

서문경의 비난에 서엽이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아아, 하며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마치 내내 잊고 있다가 지금 생각났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가 대답했다, ‘그랬지.’

“그래, 그렇지. 우리 소희. 내, 자랑스러운 아드님.”

뚜벅, 뚜벅. 서현에게 다가가는 서엽의 발소리가 짙은 습기가 감도는 굴 안에 무겁게 울렸다.

“내 몇이나 아들놈이 있지만 우리 소희만큼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는 아이도 또 없었다. 스무 해가 넘도록 곁에서 봐왔지만 단 한 번도 잘못을 저지르거나 괜한 일로 생떼를 부린 적도 없었지. 항상 품행이 단정하고, 늘 학문에 정진하며 노력한 만큼 큰 뜻을 이루었으며, 긴 세월 내내 아비에게도 아들로서의 도를 다하니 이만큼 자랑스러운 아들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다만, 하나.

조금 전의 서문경처럼,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결국 막다른 길에 몰리고 만 서현의 앞으로 다가간 서엽이 서현의 정수리에 툭 손을 얹었다. 아아아악! 서현이 소금물을 먹은 솜 덩어리 같은 네 팔다리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진저리를 쳤다. 

“죽어! 죽어라! 죽어, 이 귀신아! 어찌하여 귀신이 산 사람의 몸을 하고 이승을 나다니는 것이냐!”

그 때 네 팔다리를 휘적거리는 서현의 머리를, 서엽이 콱 짓눌렀다. 고함을 질러대던 서현이 고통으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짜부라지고 그 뒤를 이어 으드득 서엽의 이사이에서 섬뜩한 잇소리가 울렸다.

그가 내뱉었다.

“이 놈에게서, 그 저주받을 용의 증후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

“용 따위가, 신도 인간도 되지 못하는 반병신에 불과한 용 따위가 도대체 무엇이라고···!”

숨이 막혀서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목덜미를 두 손으로 감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의 목을 콱 잡고 조르는 듯한 답답함이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더듬은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돌오돌 소름이 돋은 자신의 차디찬 피부 감촉뿐이었다. 

“내 아들, 내 자랑스러운 아드님, 이 내 잘난 아드님만 아니셨더라도···!”

물이 끓는 듯한 목소리로 이를 갈며 말하던 서엽이, 거기까지 말한 후에 갑자기 서문경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가장 높고 빛나는 자리에 앉아,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람’당하면서 비웃음 당하는 기분을 자네는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제좌 따위가 아니라, 번쩍번쩍하는 금박을 입힌 장대에 불과했다. 당장 부러지고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아슬아슬한 장대 위에서 그 분은 내내 곡예를 하셔야 했다. 어떤 이도 그 분의 고충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그 어떤 이도 그 분께 힘이 되어 주려 하지 않았다. 말이나 되는가? 고작 용이, 용이 아니기 때문에! 고작 용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어떤 사람도 그 분의 이상, 그 분의 고뇌, 그 분의 포부를 봐주려 하지 않았다! 친아비, 친어미라는 작자조차도!”

그 분께서 더 이상 허물어지지 않도록 받쳐 들고 있는 것도 내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서엽이 문득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서엽의 목소리가 본래대로 사납게 돌변했다. 내내 감정을 숨기고 있던 그의 눈이 증오로 희번덕거렸다, 정확히 서현에게 꽂힌 채로···!

“그 때, 어떠한 황족에게도 나타나지 않고 있던 ‘증후’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내 아들의 몸에서! 그 분에 대한 세간의 비난과 원망과 비웃음을 겨우 그 정도까지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은 그 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황족에게서도 용의 증후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하지만 황족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고작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것이 고작인 어린애에게서 증후가 나타났다. 당장 가룡(假龍)을 제좌에서 밀어내야 한다는 여론이 조정에 들끓었다. 그 정론을 뒤에서 조종한 것은 다름 아닌 그 여우 년이었다. 그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판국에 헌데 그 년은, 참으로 너그러운 어미인 척 가장하여 그리 말하더구나.”

-용인이 제좌에 올라 제국을 통치해야 하는 것이 용님께서 내려 주신 제국의 법도이지만, 이미 지금의 황상께서 즉위식을 올리신 처지이니 헌의공의 계자가 관례(冠禮)가 올릴 때까지 두고 보도록 합시다. 

-또한, 그 즈음에는 황상께서 와룡의 피를 벗으실지 누가 안답니까?

“사람을 아예 말려 죽여 버리려는 심산이 아니고서야,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그 분께서는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하신 분이었으니, 차라리 명예롭게 양위(讓位)하는 것보다 고집스럽게 제좌를 지키고 있는 쪽이 그 분께 더 치욕이 되리라는 것을 그 년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그 증거로, 오욕(汚辱)을 감수하고서 제 어미의 뜻을 따라 황제의 자리를 지킨 후로 그 분은 점점 미쳐가셨다.”

그래서, 자신도 결심을 굳혀야 했다.

“용이 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면, 내 손으로 그 분을 용으로 만들어 드리면 되는 일.”

“!”

펄떡 심장이 한 번 튀어 올랐다. 용을 ‘만든다’고? 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불안감이 점점 더 짙어졌다. 달을 가리고 있던 달무리가 점점 더 옅어진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이 보였다. 짙은 달무리 안에서 드러난 것은-.

“그릇이 될 ‘용’을 찾아-.”

달이, 아니라.

“그 안에.”

달의 사체(死體).

서엽이 서현의 머리를 콱 움켜쥐고, 녹아내릴 만치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 좁고 천한 몸뚱이가 퍽 만족스럽지 못하시지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서엽의 손이 서현의 머리카락을 단숨에 움켜쥐고 축 늘어진 서현의 목에 천 년 묵은 복숭아나무로 만든 칼을 댔다. 치칙, 서현의 살에 단숨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타는 냄새가 났다.

“지금 좋은 ‘그릇’이 이곳으로 당도하고 있사옵니다. 그리 되면, 당장 이 좁은 그릇은 ‘깨뜨리고’ 옥체를 그 그릇 안으로 모시도록 하겠사옵니다.”

깨뜨린다고? 서문경은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항아리 뚜껑을 열듯이 서현의 머리를···.

그 때였다.

“아아.”

서엽이 작은 신음을 흘리면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쿵, 심장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서엽이 서현을 끌고 가면서 중얼거렸다.

“마침 때를 맞추어 도착했나이다.”

“안···!”

안 돼, 하고 서문경이 소리치려 하던 그 순간이었다. 

어?

서문경은 시야가 한 번 요동치더니 눈앞이 온통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또한, 기분 탓인지 그 하얗던 시야가 점점 벌겋게 물들어 가는 것 같았다···. 손발을 꿈틀하고서야 깨달았다. 자신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고, 자신의 시야에 벌겋게 번져 간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의 가슴에서 나온 ···피 때문이었다.

서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끼는 이제 필요 없지.”

복숭아, 나무. 용을, 죽이는 방법. 

서문경은 생각하면서 손가락 끝을 꿈틀거렸다. 소리가 점점 멀어져간다. 자신을 둘러싼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에,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

굴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긴 그림자를 서엽은 황홀한 듯 바라보았다. 아아, 내-.

“내 최고의 예술품.”

그렇다. 어디 하나 모자란 곳 하나 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 하나하나까지 섬려(纖麗)한 나의 예술품. 반생(半生)을 모조리 쏟아 부어 만든 내 가장 아름답고, 가장 단단한-.

“항아리.”

그래, 저 아이야말로 자신이 직접 빚어 만든 최고의 ‘그릇’이었다. 

“잘 왔다.”

서엽은 몸과 마음을 다하여 자신의 ‘그릇’을 환영했다. 점점 커지는 발소리를 향하여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림자에 묻혀 있던 ‘그릇’의 모습이 비로소 야명주 아래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굴 입구를 가로막다시피 선 ‘그릇’이 말없이 굴 안을 빙 돌아보았다. 빈 항아리가 올려져 있는 제단(祭壇)과 암실 전체를 감싸고 있는 듯한 형태의 벽화들. 발아래의 청룡 벽화와 천정에 자리 잡고 있는 금룡 벽화, 우편의 백룡 벽화와 마지막으로 빈 좌벽(左壁)까지 돌아본 ‘그릇’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장충단을 모방했나.”

“신단 중에서도 제일가는 신실(神室)쯤은 되어야지. 허나 그 오랜 시간 공을 들였으나 무엇이 잘못 되었던지 자꾸만 금이 가는 곳이 생기더구나.”

“······.” 

‘그릇’은 대꾸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그릇’의 시선은 가슴팍이 베인 채로 쓰러져 있는 수객에게 머물러 있었다. 아주 잠깐 멈춰 있던 그의 발걸음이 곧 수객을 향하여 움직였다. 정신을 잃은 수객을 안아드는 ‘그릇’에게 서엽은 관용을 베풀었다.

“아직까지는 숨이 붙어 있으나 곧 숨이 끊어질 것이다. 진룡(眞龍)조차 숨을 멎게 하는 천 년 도수(桃樹)로 베었으니 한낱 가용인(假龍人)으로서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야.”

더 마음을 졸일 필요 없이 희망을 끊어 주었으나, ‘그릇’은 마치 그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수객의 등과 무릎 뒤를 소중히 받쳐 안고 그를 안아 올렸다. 

수객을 안아 든 ‘그릇’이 그제야 자신 쪽을 돌아보았다. 내내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꿈틀했다.

“희 형님을 놓아.”

“희? 희가 어디에 있느냐?” 서엽이 태연히 반박했다. “이것은 ‘그릇’이다. 이가 나간 ‘그릇’이지.”

“형님의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뭐지?”

한 번 맞추어 보거라. 서엽이 무성의하게 내뱉었다. ‘그릇’이 천천히 눈썹과 미간을 찌푸렸다. 찌푸려진 눈썹 밑이 모조리 흰 천으로 덧대어져 있는 것을 보고 서엽은 새삼 혀를 찼다. 티 하나 없이 완벽하던 ‘그릇’에 저리도 큰 흠집이 나다니. 자신이 꾀한 일이기는 하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할 수 있다면 작은 생채기 하나 없는 본래의 모습으로 제 역할을 하게 해주고 싶었거늘. 

그러는 사이, 천천히 한 쪽 눈을 깜빡거리며 생각에 잠겼었던 ‘그릇’이 시선을 서현에게 맞춘 채로 내뱉었다.

“아귀, 라 했었지. 귀신이라 했었지.” 

아귀, 귀신이라는 표현에 서엽이 곧바로 이맛살을 구겼다. 그래,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희가 그리 말했었다. 아귀라, 귀신이라 했었다. 참으로 무엄한 발언. 당장 팔다리가 뽑혀도 할 말이 없는 불측한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서엽을 둘러싼 공기가 당장 싸늘해졌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리도 없는데 ‘그릇’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손짓, 눈짓 하나에도 낯빛이 파르라니 질리던 어린 시절과도,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얼마 전과도 판이하게 다른 모습에 서엽은 다소의 의구심을 느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모습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제 누이를 처로 달라 하였을 때, 무어라 건방지게 끼어들려던 놈에게 자신이 이리 말했던 그 순간에-.

“한 번 스스로 생각해 말해 보아라, 반푼아.”

-나서지 마라, 반푼아.

“어서, 해 보래도.”

-네 누이가 네 어미 꼴이 나는 것을 보고 싶더냐?

그 말에서 ‘그릇’도 당시의 일을 떠올렸던지 느릿하게 대꾸했다.

“모후께서 절명하시기 전, 내 그 육보름날에 그대에게 매달려 애원했었지. 모후께오서 부황을 그리워한 나머지 나날이 병이 깊어 가시니 이번 길일(吉日)에는 부디 모후를 찾아 주시라 부황을 설득해 달라고.”

“그랬었지. 참으로 아득한 기억이구나.”

“그렇더냐, 짐에게는 그 기억이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거늘. 그대는 사람 하나를 죽여 놓고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모양이구나.”

“나는 그 청을 그대로 들어 주었을 뿐이다.”

“병든 본처의 앞에서 은애하던 부군이 미약에 취하여 낯모를 여자와 벌레처럼 난교하는 꼴을 보여 놓고?”

“내 무엇이 틀렸더냐? 그대는 ‘길일’에 ‘황상’께서 ‘난전’을 찾으시도록 청하였고, 나는 그대로 행하였을 뿐이다.”

‘그릇’이 불쑥 중얼거렸다. 가엾으신 어마마마.

“짐승인 줄 모르고 누군가를 연모한 죗값이 그리 큰 것이었던가.”

“그대만은 그리 말하면 아니되네. 수경궁의 생자(生子)인 그대가.” 그렇게 말한 서엽이 마치 화제 자체가 바뀐 것 같은 말을 그 뒤에 이었다. 뜬금없어 보이는 물음이 던져졌다. “자네 외조부가 왜 그리 자네를 증오하는지 아시는가?”

“그 또한 부황이 짐승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겠지.”

그런 이유도 있겠지, 자신이 순순히 수긍하자 ‘그릇’이 오히려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마 자신의 말 속에 숨겨져 있는 말을 읽어낸 탓일 것이다. 이전 같으면 더 껍질을 여미고 그를 애태웠겠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 서엽은 유쾌하리만큼 명쾌하게 내뱉었다.

“네 생모는 다른 남자와 통정(通情)했다. 아니, 통정하도록 강요당했다고 해야 옳겠구나. 그리고 그것을 꾀한 자는 나였고, 그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은 자가 네 모후였다.”

제 주인의 후궁을 다른 사내와 정을 통하도록 강요했었다고 고백하는 어투가 너무나 가벼워서 도리어 느끼는 경악의 무게가 덜해졌다. 기가 막히군. ‘그릇’이 중얼거린 대꾸에 서엽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 수경궁의 아들인 네가 그 년을 옹호하는 것이 어이가 없다는 것이다.”

“모후를 거기까지 몰아붙였을 네 놈이 그 따위 소리를 지껄이니 확실히 생모께서도 비통하여 눈을 감지 못하시겠군.”

“그럼,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죽은 년들의 영전에 내 목이라도 던져야 한단 말이냐?” 

서엽은 킬킬 웃으며 비꼬았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릇’이 말을 던졌다, ‘네 하는 꼴을 보아하니 그럴 리는 없겠군.’ 그 말에 서엽이 무릎을 쳤다.

“후회? 죄책감? 그런 것 따위를 느껴야 할 필요가 없지. 그것은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서엽의 시선이 앞을 향했다.

“완벽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

“바로, 너라는 ‘그릇’.”

참으로, 참으로 잘 자라 주었다. 서엽이 가슴 속을 터뜨릴 듯이 가득 채운 격정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찬사를 보냈다. 

“한 때에는 잘못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되어 수년을 두고 보았으나 내 노력이 결국은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되었구나.”

이제 때가 되었다. 서엽이 나지막한 선언을 내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서현의 목이 더더욱 뒤로 젖혀지며, 그의 목에 겨누어져 있던 용살검(龍殺劍)이 더더욱 깊숙이 살을 파고들었다. 지직, 지지직, 지지지직. 살이 타며 흰 연기가 눈에 뚜렷하게 보일 만큼 피어올랐다···. 서엽이 수 년 동안이나 묵혀온 당연한 요구를 비로소 내뱉었다.

“그 ‘그릇’을 돌려다오. 애초에 그 ‘그릇’은 내 주인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 그러니 ‘그릇’ 안에 든 너는 필요 없는 존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