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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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떻게 하려는 걸까. 점차로 커져가는 숨소리를 들으며 서문경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무작정 뛰쳐나온 걸까. 

뱃속에서 콩알만 한 벌레가 수 만 마리 우글거리는 듯한 감각이 치밀어 올라오며 머릿속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막막함과 함께 흐릿한 후회가 올라왔다, 그러나 곧 신물처럼 치밀어 오른 다른 감정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다른 감정들을 잡아 삼켜 버렸다. 

이를 악문 서문경은 고집스럽게 생각했다. 머리로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절대로 몸이 그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때가, 지금이 그런 때였다. 어쩔 수 없었어. 서문경은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변명을 반복해서 주절거렸다.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단 말이다.

하지만.

“······.”

흡사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들려오던 자신의 발소리가 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나아가려던 다리 근육이 주춤한다. 정말로, 이제는, 어떻게.

-천제사가.

그 때, 격분한 엄헌영이 거의 화를 내는 것처럼 외쳐대던 소리가 서문경의 머리를 때렸다. 그 순간 점점 차올라 머리끝까지 열기를 채우던 숨이 일순간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마치 숨통이란 숨통은 모조리 막힌 듯한 아득함 속에서 서문경은 생각했다. 

천제사가 재개된다고 했다.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는 통보가 가 있다고도. 그러면서 엄헌영은 길지가 바뀌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길지가 바뀌지는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럼. 제장으로, 가야할까. 궐을 나왔는지 아니면 아직 궐 안인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저절로 발걸음이 돌아갔다. 서문경은 생각했다. 그래, 제장으로 가자. 일단 제장으로 가서···.

다음 순간 서문경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왜 조복이지?”

불현듯이 그 생각이 머리에 걸려 움직일 수가 없어졌다. 정작 자신에게 그 말을 전해 준 엄헌영은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그 명령이 마음에 걸렸다. 분명 이전에는 법도에 따라 제복을 입게 했다, 하지만 어째서 지금은 조복을 입으라는 명령을 내린 거지? 

물론 아무 의미도 없는 명령일 수도 있겠지만 이상하게 그렇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봐 왔던 서엽의 행동들, 그 행동은 분명 비열하리만큼 치밀했지만 그 행동을 이끄는 동기는 마치 물안개 속에 싸여 있는 것처럼 희미했다. 이 또한 그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서문경은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두 개의 상반된 생각이 치열하게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한 시가 급한 상황이니 어서 제장으로 가야 한다. 아니, 서엽이 무슨 꿍꿍이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래서는 안 된다. 하지만 곧 생각은 한 방향으로 기울었다. 서엽이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고민하고만 있어 봐야 일은 그 자의 생각대로 착착 진행되기만 할 뿐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까지.

그래, 역시 제장으로 가자. 

서문경은 생각을 굳혔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가 사는 굴로 들어가야 하는 법, 그 작자가 노리는 폐하는 엄헌영에게 맡겨 놓았으니 최악의 상황까지는 각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서문경의 머릿속을 스쳤다. 서엽에게는 ‘반드시’ 서현이 필요하다. 하지만 황제와 엄헌영의 말로 미루어 보면 길지가 있는 계하는 서현을 포함한 네 사람에게는 낯선 장소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은 확신하는 거지? 길지로 서현이 올 것이라고. 이성을 잃은 서현이 제 발로 올 만한 장소는 유년기의 거의 유일한 벗이나 다름이 없던 황제나 엄헌영, 그리고 정인인 경혜 현주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나, 그것이 아니면······.

그 때였다.

-귀신.

토기(土器).

-이제 와서 다시 즉위식을 올릴 것도 아니고 천제사날에 네 놈과 가례를 치를 것도 아닌데···.

조복(朝服).

서문경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그렇게 내뱉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동시에 눈앞이 하얗게 번뜩였다. ······! 곧 서문경은 자신의 생각과 모든 감각이 그야말로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

“이전에 봤을 때에도 생각한 것이긴 하지만 참 무모한 아이로군.”

역시 젊다고 해야 하나. 쓰러진 서문경의 무릎 뒤쪽에 손을 밀어 넣고 등에 나머지 팔을 두른 남자가, 그대로 서문경의 몸을 번쩍 안아 들면서 말했다. ‘어르신, 제가.’하고 그 곁에 있던 사내가 나섰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할 일이 있지 않나.” 아니면 혹시, 하고 말끝을 미묘하게 늘이면서 남자가 머리를 모로 조금 기울여 보였다. 가늘어진 눈매 안에 든 눈이 몹시 짓궂게 빛나고 있다. “혹,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두려워서 그러는가?”

묵묵히 남자의 말을 듣고 있던 사내가 순순히 수긍했다.

“진노하신 그 분을 상대로 한낱 인간이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다만 소인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몸이 찢어지는 고통도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장한 말이로고.”

“이 목숨만, 붙어 있다면.”

남자가 씩 웃으며 자신이 안아 들고 있는 청년을 조금 더 높이 들어 보였다. 사내의 시선이 자연히 그 편을 향하며, 감정이 억눌려 있던 검은 눈에 질투와 함께 경외감이 서렸다. ‘이 아이가 부러운가?’, 한 순간에 불과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물어오는 남자의 말에 사내가 대답했다.

“부럽습니다.”

“그래, 부럽단 말이지.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어디에 비할 바 없는 ‘힘’을 각성하여 질시와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천객들은 모조리 비참한 꼴이 되었는데 광대나부랭이처럼 환각 따위나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던 수객은 용인과 다름없는 몸이 되었다···.”

사내의 미간이 천천히 좁혀졌다. 이상했다. 증오가, 질시가, 느껴졌다.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내의 시선이 의구심을 품은 채로 남자를 응시했다. 그 순간에도 남자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 채기도 힘들 정도로 느릿하게 수객의 턱 밑을 쓸고 있었다. 

저절로 젖혀진 목덜미에 눈이 갔다. 잔뜩 젖혀져 적나라하게 드러난 목덜미가 하얗다기보다는 해쓱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지나치게 희어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 창백한 목덜미에 잠자리나 매미 따위의 날개 같은 푸른 비늘이 돋아나 있는 것이 보였다. 숨을 쉴 때마다 그 검푸른 비늘이 천천히 오르내린다.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뭐라 정의내릴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멍하니 수객의 목에 돋은 비늘을 보고 있던 사내는 곧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냈다. 느끼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싸늘한 기운을 느낀 탓이다. 바라보자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웃고 있는 눈초리는 무섭도록 냉담했고, 그 안에는 자신 또한 느꼈던 강한 질시와 적의가 숨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수객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길은, 흡사 지금 자신의 팔 안에 있는 이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상이나 보상을 도중에 채어 간 사람을 보는 듯했다······.

불현듯, 남자의 입꼬리가 위로 비틀려 올라갔다.

“세상일이란. 원하는 자는 좀처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늘, 그것이 원치도 않는 자의 손에는 너무도 쉽게 들어가곤 한다. 마치, 공과 같구나. 신이란 것이 참말로 존재한다면 이리 불공평할 수는 없는 것을.” 

“신은, 있습니다.”

그렇게 반박하는 사내에게 남자가 무심한 눈길을 던졌다. 사내가 다시금 힘주어 말했다, ‘용님은 계십니다.’ 완고한 말투와는 달리 그 말은 숫제 호소나 다름이 없었다.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사내를 보던 남자가 갑자기 몸을 돌리며 대꾸했다, ‘자네들을 위해서라면 그 편이 좋겠지.’ 그리고 그 뒤에 사내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남자가 덧붙였다.

“어쩌면, 내게도.”

“······? 송구합니다만, 무어라 하셨습니까?”

그 조심스러운 물음을 무시하고 남자가 명령했다.

“나는 ‘그곳’으로 가보도록 하지, 그 사이 선객(先客)이 와 계실지도 모르는 일이니. 자네는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도록 하게. 혹여 황자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실 상황을 대비하여서도 이미 사람을 보내 놓았으니 염려치 말고 기다리게.”

“그리하겠습니다.”

“이번만큼은 결코 실수가 용납되지 않네, ···내 자네의 ‘힘’을 믿으니 걱정은 하지 않겠네만, 천견.”

허리를 깊숙이 조아리는 사내로부터 돌아서며 남자가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곳으로 모두가 모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이 난다.’ 제 감정에 겨워 무심코 흘러나온 듯한 중얼거림 끝 무렵에, 서문경을 안은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자를 그곳으로 보내도록 해라.”

“목숨 이외의 모든 것을 걸고서 명을 행하겠습니다.”

그 말에 남자가 비릿하게 웃었지만, 그 등 뒤에 서 있던 탓에 사내는 미처 그 웃음을 보지 못하였다. 

**

엄헌영은 참말로 당혹스러웠다. 마치 낯선 사거리에서 어미의 손을 놓친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리로 가야 할지, 저리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엄헌영이 결국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롭게 신음했다, 

‘빌어먹을 놈들···.’ 

부군(夫君)될 놈이나 그 배필 될 놈이나 앞뒤 가리지 않는 점은 판에 박은 듯이 똑같구나. 서로 판이하게 다른 놈들끼리 잘도 들러붙어 있다 싶었더니 이런 점에서 닮았을 줄이야. 

“진짜 거지나 돼라.”

명색이 황제란 놈이니 죽어도 그런 꼴이 되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엄헌영은 기원했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계하 길지로 간 수객 놈을 따라 갈 것인지, 아니면 서엽의 목을 따버리겠다며 영로당으로 간 제안 놈을 말리러 갈 것인지. 치열한 고민을 거듭하면서 엄헌영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이 일하는 서행관을 향해서였다. 

날이 날인 탓에 서행관 근방은 평소보다 훨씬 인적이 드물었다. 당직인 듯한 놈 하나가 본당 앞을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엄헌영을 발견하곤 허억, 큰 숨을 삼켰다. 

“아니, 장군께서 어찌 여기 계십니까?”

“말!”

놀라는 동료에게 엄헌영이 대뜸 소리쳤다. 이름이 홍주던가 녹주던가 하던 동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 말이요?’ 꾸물거리지 말라며 엄헌영이 벼락처럼 성을 냈다.

“내 말은 약탈당했단 말이다! 꼭 돌려줄 테니 일단 내놔!”

“약, 약탈이요?” 

어느 간 큰 놈이 네 놈 말을? 하고 쓰인 동료의 엉덩이를 엄헌영이 힘껏 찼다. 빠릿빠릿하게 못 움직이나! 그 시퍼런 서슬에, 자택에 처박혀 있어야 할 놈이 왜 궐 안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느냐는 당연한 항의조차 못하고 동료가 부리나케 마사(馬舍)로 뛰어갔다. 

그가 말을 한 필 끌고 오기가 무섭게 고삐를 낚아챈 엄헌영은 말 위에 올라타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홍주 놈이 뭐라고 뭐라고 소리치는 것이 들려온 것도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디로 가지?, 전력으로 궐 안을 빠져 나가면서 엄헌영은 생각했다. 다음 순간, 엄헌영이 말머리를 좌로 확 틀었다. 영로당이 있는 쪽이었다.

“제기랄, 설마 벌써 사달이 난 건 아니겠지···!”

수객 쪽도 문제지만, 당장 급한 문제는 역시 제안 놈이었다. 서엽의 멱을 따 버리겠다니, 그냥 해 본 말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눈빛은 진심이었다! 물론,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자신이 제안이었더라도 서엽 놈의 이름만 들어도 이가 북북 갈릴 테니.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안 된다. 지금 서엽을 죽이면 대소신료들의 반발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호시탐탐 제안을 폐할 틈만 살피고 있는 태황태후에게 큰 약점을 잡히게 된다!

“제안 녀석보다 일찍 가야 하는데, 무슨 수가 있어도.”

엄헌영은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말을 달려도 제안이 출발한 시간과는 제법 차이가 난다. 따라잡을 수 있을까? 영로당으로 가는 지름길이 달리 없을까?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뒤지던 엄헌영이 이윽고 답을 찾아냈다. 정문이 아니라 서문으로 나가면 애련정에 직선으로 통하는 지름길이 나온다. 애련당과 영로당은 그 입구가 정 반대편에 있지만 담을 돌아가지 않고 경혜에게 부탁하여 집 중간을 가로지르면 순식간에 영로당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정한 엄헌영은 죽을 힘을 다해 말을 달렸다. 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제안 놈보다 영로당으로 도착해야 해. 아니, 제안 놈보다 서엽 놈을 먼저 만나야 해. 각오를 다진 입가에서 계속해서 욕지거리가 흘러 나왔다. 

제기랄, 제안, 이 빌어먹을 놈, 이 멍청한 놈. 십 년도 넘는 그 긴 시간을 네 녀석이 어떻게 버텨 냈는데! 그 수모를,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디고. 그런데 지금 와서, 또 하필이면,

“이런 식으로······!” 

안 된다. 절대로, 이런 식으로 제안 놈을 제좌에서 물러나게 할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애련정 앞에 당도한 엄헌영이 굳게 닫힌 애련정 뒷문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쾅쾅쾅쾅쾅! 손발을 모두 동원해서 문을 부술 듯 때리는 소리에, 놀란 계집종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서 물었다.

“뉘, 뉘십니까, 뉘시기에 아녀자가 사는 곳 뒷문을 이런 이른 아침부터 두드리시는 겝니까?”

“경혜는!”

“저, 저희 마님께서는 아니 계십니다요!”

그 대답에 잠시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엄헌영은 곧 이를 악물고 명령했다.

“상관없으니 이 문 열어라!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 그그그,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점잖으신 어른께서 당치도 않은 말씀 마시고 돌아가시어요! 저희 마님께서는 안 계시다 말씀 올렸지 않습니까!”

“안 열면 문을 부술 것이다!”

그 말이 참말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엄헌영이 문을 힘껏 걷어찼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이 두꺼운 나무문이 부르르르르 온 몸으로 떨었다. 아이고! 겁먹은 계집종이 비명을 질렀다. 그 뒤에 희미하게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나서 엄헌영은 생각했다, ‘안 되겠군, 정말로 문을 부숴야······.’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다음 순간 안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이 무슨 소란이냐?, 하고 계집종에게 묻는 목소리에 엄헌영이 반색을 하고 소리쳤다.

“혜야!”

“강아? 강아, 너더냐?”

당장 엄헌영의 목소리를 알아 본 경혜 현주가 문을 열어주었다. ‘왔으면 네 이름부터 밝히지 않고.’, 왜 대뜸 고함을 질러서 어린 계집아이를 겁먹게 하고 그러느냐는 경혜 현주의 비난을 엄헌영은 무시하고 말했다.

“안을 가로지르게 해다오. 영로당으로 가야 해. 서엽 놈은 지금 영로당에 있느냐?”

“영로당? 뜬금없이 영로당에는 왜,”

“있느냐고!”

갑작스런 고함에 깜짝 놀란 경혜현주가 동그랗게 뜬 눈을 껌뻑껌뻑하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잘은 모른다만 아니 계신 것 같던데···.’ 엄헌영이 대뜸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어, 어찌 이러느냐? 무슨 일이 있었어?”

“제안이 영로당으로 갔다. 어쩌면 이미 도착했을 지도 모르지.”

“제안이? 아니, 황상께서 어찌 손수 영로당까지 납신단 말이냐?”

“서엽 놈의 멱을 따버리겠다 하더군.”

경혜 현주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입가를 가린 손이 바르르 떨렸다.

“무슨 까닭으로 그리 진노하신 것이야?”

“이 시각까지 채비도 않고 애련정에 있는 것을 보니 너도 듣지 못한 모양이로구나. 제안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엽 놈이 천제사를 재개하겠다 문무백관들에게 알렸다. 해서 몇몇을 제한 모든 조정신료들은 지금 길지로 향하고 있다. 그것을 듣고 놀란 수객이 뛰쳐나갔고, 그것을 안 제안이 몹시 노하여 영로당으로 가 버렸다. 모후와 혜 너를 내내 괴롭게 하고 희 형님까지 버린 데다 제 후비까지 해할 지도 모르는 놈이니 살려둘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다 하더라.”

“제안이···.”

언제나처럼 황상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제안이라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경혜도 이 상황에 황망하여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삽시간에 창백해진 이마에 손을 짚고 비틀거리던 경혜가, 그런 자신을 놀라서 부축하는 계집종의 손을 떨쳐내고 엄헌영의 팔에 매달렸다. 그녀가 급박하게 외쳤다.

“그럼 이럴 것이 아니라 어서 영로당으로 가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 나도 갈 터이니 어서···,” 하고 말하던 그녀가 곧바로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아니다. 어르신께서 이미 출타하셨으니, 그 뒤를 쫓는 것이 나을까?”

“진정해라.”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경혜를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 엄헌영이 말했다, ‘일단은 영로당으로 가 보도록 하자. 곧 제안이 도착할 수도 있으니.’ 그 말을 들은 경혜가 아이처럼 머리를 주억거리고는 치맛자락까지 걷어 올리고 영로당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 뒤를 곧 엄헌영이 따랐다.

“······!”

“저건···!”

그러나 정작 영로당에 다다랐을 때 엄헌영과 경혜 두 사람은 서엽도 제안도 아닌, 전혀 의외의 얼굴과 맞닥뜨려야 했다. 그 얼굴을 본 두 사람이 무심코 발을 멈췄다. 하지만 이미 그 자는 두 사람의 발소리를 들은 듯, 정확히 두 사람이 있는 쪽을 돌아보고 웃었다. 이제 오십니까. 그가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지만, 엄헌영은 그 인사를 본 척 만 척 하고 일갈했다. 

“염락 조원! 네가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이냐?!”

“명을 받잡고 왔습지요.”

“명이라니? 누구의?”

“누구겠습니까?” 

그렇게 반문하며, 염락 조원은 경혜 현주를 곁눈질했다. 그 눈길에 무심결에 엄헌영의 뒤로 몸을 숨기는 현주를 한 번 더 보고 조원이 엄헌영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마저 대답했다. 

“이 댁 주인어른이시지요.”

“·······!”

염락 조원이 뭔가를 찾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헌데, 아니 보이는군요. 천견이 있는 쪽으로 가신 것인지.”

“천견까지?” 엄헌영이 사납게 조원의 멱살을 잡아채고 으르렁거렸다. “네 놈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냐?!”

“일은요.”

조금쯤은 움츠려들 만도 한데 염락 조원이 여유롭게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것이 무슨 뜻으로 하는 몸짓인지 알 수가 없어 엄헌영은 이맛살을 구겼다. 조원이 태연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소인은 다만 귀인을 뫼시러 왔을 뿐입니다.”

“귀인···?”

“황제 폐하 말씀입니다.”

그 말끝에 조원이 가볍게 덧붙였다, ‘헌의공 어른께서 폐하를 아주 좋은 곳으로 초청하셨답니다.’

**

순간적으로 말이 멈췄다. 갑자기 달리는 말 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끼어 든 탓이었다. 그대로 밟고 지나갈 작정이었으나 흑마 쪽에서 저절로 발을 멈췄다, 과연 잘 훈련된 군마(軍馬)다웠다. 

“용님을 뵙사옵니다.”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얼굴을 흙바닥에 처박은 채였으나 황제는 그리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챘다. 황제의 비틀린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이가 드러났다. 알아듣기도 힘들 만치 으르르르, 짐승의 울음 같은 위협을 목구멍에서 흘리면서 황제가 말했다. 개만도 못한 배신자가 제발 죽여 달라 대가리를 내밀고 있구나. 흑마의 한 발이 엎드린 사내의 위로 치켜 올라갔다. 단단한 말발굽이 정확히 사내의 등에 꽂히기 직전이었다, 사내가 거의 외치듯이 아뢰었다.

“황공하옵게도 소인, 귀인을 모시고 있사옵니다!”

그 외침에 말의 움직임이 약간이지만 주춤했다. 사내의 등 바로 위에서 말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사내, 최유가 말을 이었다.

“용께서 찾고 계시는 그 귀인이시옵니다.”

“내가, 찾고 있는 귀인?”

그 말을 황제는 곧바로 알아챈 듯 했다. 

발을 완전히 내린 말이 두어 발 뒷걸음질을 치더니 황제가 말에서 내리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림자는 없지만 분명하다. 최유는 그렇게 판단하고 내심 안도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러나.

“컥!”

바로 다음 순간 최유는 입에서 피를 토했다. 바닥을 향한 그의 눈이 제가 토한 핏덩어리를 보고 휘둥그레졌다.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일어건만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그러나 곧, 그것을 고민할 여유조차 없어졌다. 황제의 발이 자신의 뒤통수를 콱 짓눌러 밟은 탓이었다. 얼굴이 완전히 흙바닥에 처박혔다.

머리 위에서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고 싶은 게로구나.”

“폐, 폐하, 폐하, 소인이, 소인이 귀인께서 가신 곳을 알고 있사옵니다, 소인 외에는 귀인이 계신 곳을 아는 이가 없사옵니다, 그러하니, ···컥.”

목이 밟히는 바람에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어졌다. 목 중간을 짓밟은 발에 더더욱 힘을 주면서 황제가 비웃었다. 그리 말하면 살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서엽 그 자가 그리 일러 주더냐? 잘못 짚었다. 애초에, 네 놈이 할 일은 내 후가 서엽 그 놈에게 붙잡혀 갔다는 사실을 짐의 이부에 들어가게 하는 것 뿐.”

최유의 등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헌의공에 대해 입에 담은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헌데 저 분께서는 어찌 그것을 알고 계신단 말인가···?! 

“굳이 서엽 놈이 있는 곳은 네 놈에게 듣지 않아도 된다.”

이어진 황제의 말에 최유가 다시금 놀랐다. 어떻게? 목이 밟혀 있는 까닭에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도 못했는데 황제는 최유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이 대답했다. 

“아니, 그 말은 조금 틀린지도 모르겠구나. 결국은 네 놈 입에서 나오게 될 말이니.”

“······?”

갑자기, 목을 밟은 발이 치워지고 쑥 몸이 위로 끌어 올려졌다. 황제가 최유의 뒷머리를 잡고는 그를 자신의 눈높이까지 끄집어 올린 것이다. 입가에서 줄줄 흐르는 피를 닦지도 못하고 있는 최유를 비웃듯 쳐다보고 황제가 말했다.

“싫어도 그대는 토해내게 될 것이다.”

아···, 하고 최유는 신음했다. 귀인께서 계시는 곳을 아시려면 소인을 살려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메마른 목이 계속해서 잠기다 못해 찢어지는 소리만을 냈다. 쉿쉿, 바람 새는 소리까지 났다. 그 꼴사나운 모습을 내려다보며 황제가 명령했다, ‘말해라.’

“경이, 내 후는 어디에 있느냐. 서엽 그 자는 어디에 있느냐.”

말할 수 없습니다, 최유는 대답을 쥐어짰다.

“헌···, 의····, 공은.”

그러나, 정작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

최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자신이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자신이 한 말이 아니었다! 뭐지? 어떻게 된 일이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여기려 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입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감각을 느끼고 최유는 기함할 듯 놀랐다. 힘주어 입을 다물려고 했지만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맙소사! 자신과 정신과 몸이 완전히 두 개로 분리된 듯한 감각이었다!

최유는 경악한 채로 자신의 입이 지껄여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 분은···, 저···, 계, 하···의······.”

결국 헌의공이 향한 ‘그곳’의 이름을 뱉어낸 이후에야 입이 닫혔다. 그러나 자신의 몸이 자신의 정신의 통제 아래 들어오는 것을 느끼는 것도 잠시, 이번에는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팠다.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골이 통째로 흔들리면서 이마가 찢어져 피가 줄줄 흐르고 코와 입 등 온 몸의 구멍에서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최유는 머리를 감싸 안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사, 살려줘. 살려줘. 온 몸이 찢어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어느새 황제가 멱살을 놓았는지, 최유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흙바닥에서 거의 나뒹굴다시피 하면서 최유는 몸통이 끊긴 지네처럼 몸을 이리저리로 뒤흔들었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눈알이 튀어 나올 것 같았다, 뇌가 쪼개지는 것 같았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온 몸이 펑! 하고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자, 잘못, 잘못···.”

최유는 본능적으로 알아 차렸다. 이 고통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와 관련이 있었다. 최유는 배와 다리를 완전히 바닥에 깐 채로 굼실굼실 벌레처럼 기어갔다. 최유는 안간힘을 써서 한 손을 뻗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온 몸을 긁고 주무른 탓에 손끝이 핏자국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 손을 너무나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황제의 검은 신으로 뻗었다. 점점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지만 최유는 손을 뻗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서엽에게 속았다는 생각보다도, 그에 대한 분노보다도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잘못 선택했다. 내가 어리석었다. 저 분은 용님, 곧 신이 되실 분이었다. 그런 분을 속여 위협하려 하다니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서, 어서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 저 분께 빌어야, 애원해야 한다. 

“살려······.”

꿈틀꿈틀 기어오는 최유의 몸을 황제가 감정 없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 자신은 기어 오고 있다고 믿는 모양이지만 한참 전부터 최유는 누운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때때로 발작하듯 꿈틀거리는 것이 고작인 최유를 보고도 황제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고작 해봐야, 희 형님을 그토록 오래 속이고 배반한 자에 대한 모멸감 뿐. 

그리고, 그런 황제의 눈을 올려다보고 최유는 절망과 함께 환희를 느끼고 있었다. 동공이 세로로 긴 눈, 인간이 아닌 증거, ‘나의’ 신이 되실 분의 증거···!

최유는 ‘신에게’ 구걸했다.

“살려···, 주···, 잘못······.”

아니다, 아니야. 목은 점점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몇 마디 정도 밖에 없었다. 잘못했다 빌어야 하는가? 아니다. 살려 달라 애원해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내가, 내가 해야 하는 말은, 나의 신에게 해야 하는 말은 단 하나 뿐. 그래서 저 이는 자신에게, 아니, 우리 ‘천객’들에게 신인 것이다.

“돌려······.”

최유는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돌려, 보내,”

아니다······, 정신이 흐려지고 있는 것이다.

최유는 마지막 힘을 짜내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가락은 황제의 신 끝에도 닿지 못하고 툭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피와 진흙으로 엉망이 된 손은 모든 생명력을 잃고 허연 비계 덩어리처럼 변해 있었다. 그것이 최유에게는 자신 자체인 것처럼 느껴졌다. 쓸모없고. 추하고. 원래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낯선 곳을 나뒹구는. 

“돌려, 보내, 주······.”

십시오, 하는 말끝은 흐느낌 끝에 완전히 묻혔다. 최유는 흰 눈을 까뒤집은 채로 숨을 헐떡거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입은 계속해서 나오지도 않는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돌려보내 주십시오. 저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저를,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제 세계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결국은 그의 눈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한번 터진 눈물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 때, 문득 황제가 물었다.

“···돌아가고 싶은가.”

그 의외의 물음에, 최유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제는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읽고 황제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이런 꼴을 당하고도 돌아가고 싶은가?”

최유의 대답은 이번에도 같았다.

“참으로 긴 시간이 흘렀다. 그대가 알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없을 지도 모른다. 더 이상 그대가 알던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돌아가고 싶은가?”

최유의 머리가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돌아가면 후회할 지도 모른다. 돌아가면 모든 것이 어그러지고, 추해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차라리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은가?”

최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입에서 헐떡거리는 숨을 연신 내뱉으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의 입술을 읽으려 머리를 조금 숙였던 황제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돌아가고 싶다.” 

황제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그러다 그가 어느 순간 콱 아랫입술을 깨물며 이사이로 중얼거렸다. 

“만에 하나 후회하더라도, 돌아가서 하고 싶다는 것인가.”

“······.”

최유가 점차 흐릿해져 이제는 황제의 모습조차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눈으로 황제가 있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신’이 마치 ‘인간’처럼 불안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께서 하문하셨다.

“어찌하여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하는가? 그토록 즐거웠었나?”

즐거웠었느냐고? 그럴 리가. 그 세계에서 있었던 일은 하나같이 끔찍한 일 뿐이었다. 그래서 최유는 머리를 저었다.

“그토록 그 세계가 소중한가?”

이번에도 최유는 머리를 저었다. 진저리쳐지는 일들만 가득했던 세계다. 나를 혐오하고,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난했었던 자들만이 가득한 세계다. 그런 세계가 소중하였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미련이 남은 것인가? 이루지 못한 일이 있었던 것인가?”

미련? 최유는 둔해지는 머리로 ‘신’의 말뜻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미련? 이루지 못한 일? 이루지 못한 일이라면···, 있었다. 이제 그 사람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조차도, 그 사람의 생김새조차도 희미해졌지만. 하지만, 미련? 미련······.

최유는 머리를 양 옆으로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미련 또한, 없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고 생각했다. 분명 이루지 못한 일은 있었다. 하지만 이루지 못했던 일을 다시 이루고 싶은, 그런 미련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 세계에서의 경험은 너무도 끔찍했다. 너무 괴로워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런 결과를 선택해 버릴 정도로. 

“그렇다면 어째서 돌아가려 하는 것인가? 그대에게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유는, 어느 순간 나오지 않았던 목소리가 어느새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목소리가 참으로 힘겹게, 띄엄띄엄 흘러나오는 것이 들린다. 최유는 자신의 대답을 들었다.

“이유는···, 필요···없습니다. 그곳이···, 제···, 원래의······. 만일, 이유가, 필요···, 하···다면. 오히려, 이곳에···, 머무르는, 이유가···, 필요······.”

더 이상은 말할 힘이 없어져서 최유는 입을 다물었다. 말이라기보다는 웅얼거림에 가까운 대답에 ‘신’이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머무르는 이유가···, 필요하다.”

이유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돌아가는 이유가 아니라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황제는, 최유를 짓누르고 있던 무형의 ‘힘’을 거두었다. 그와 동시에 혼절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최유가 정신을 잃었다. 그런 그를, 황제가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중얼거렸다.

“이유······.”

울부짖던 서문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짐은, 그대가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되어 주지 못하는가······.”

서글픈 중얼거림이 텅 빈 사방에 공허하게 울렸다. 

그 자리에 잠시 후 무언가를 끄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섞여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니, 바람 소리가 아니라 사람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소리였다······.

“그렇다하여도······.”

그렇다하여도······.

**

소리가 들렸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무심코 물소리를 세고 있던 서문경은 어느 순간 자신이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을 안 후에야 뒤이어 기억해냈다. 

서문경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신은 기억을 잃었었다, 누군가에 의해서!

“말도 안 돼.”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황을 생각해 낸 서문경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황제는 말했었다, 용인은 인간과는 다르다, 보통의 약이나 독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자네는 용을 죽이는 방법을 아는가?”

“!”

깜짝 놀란 서문경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사방이 어두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용안에는 보였다. 사방과 머리 위와 발아래까지 기묘한 벽화들로 가득한 이곳 가장 깊숙한 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서문경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 자의 이름을 불렀다.

“서엽!”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너스레를 떨었다, ‘예의가 바른 청년이라 여겼는데, 이 늙은이가 사람 보는 눈이 떨어졌나보구먼.’ 서엽의 너스레에 굳어진 분위기가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무겁고 차가워졌다. 서엽 또한 개의치 않고 천천히 서문경을 향해 걸어오면서 말을 이었다.

“하기는, ‘용’을 보는 눈만 제대로면 되는 일이니 크게 염려할 바는 못 되는군.”

“용이라.”

서문경이 비웃듯 대꾸했다.

“저 또한 용인인 것을, 용인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이 용이라고 제대로 볼지 의문이군요.”

“용인? 자네가?”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이 서엽이 머리를 조금 옆으로 기울였다. “희한하군. 자네가 어찌 용인이 되는가?”

“코앞에 있는 용안도 용비늘도 보이지 않는다면 눈이 먼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습니까?”

“눈이 멀다니, 사람 참 서운하게 말하는구먼. 내 나이가 들기는 했으나 눈이 멀 정도는 아니라네.”

“이상한 일도 다 있군요, 정신머리보다는 눈이 더 수명이 긴 모양입니다.”

역시나 생각대로 재미지게 말하는구먼, 모욕이나 다름없는 서문경의 비난이 서엽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웃음소리에 미간을 구긴 서문경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신기한 것은 자넬세. 어찌하면 그런 착각을 다 할 수 있나.”

“착각?”

“그렇네, 착각. 자네는 가짤세.”

서문경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짜? 서엽이 보란 듯 고개를 커다랗게 끄덕였다.

“내 자네의 ‘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 ‘환상’을 만드는 ‘힘’···.” 

서엽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어째서인지 서문경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것을 재미있다는 듯이 뜯어보면서 서엽이 말을 계속했다. 

“자네도 알는지 모르겠지만 천객들의 ‘힘’은 그 이가 살았던 생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네. 예컨대···, 그래, 자네도 알 만한 사람을 대자면 염락.”

“······!”

“그 이의 ‘힘’은 자네도 본 적이 있으니 알 것이네. ‘독’을 품은 ‘불’. 그 사람의 ‘불’은 모든 것을 태우는 동시에 녹이고 중독시키네, 독이니까 말일세. 자네 혹여 ‘불’이 무엇에 비유되곤 하는지 아시는가? 연정(戀情)이라네.”

꿀꺽, 하고 마른침이 저절로 목구멍을 넘어갔다. 그만, 하고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실제로 입 밖에 내어 말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서엽은 그 말을 듣지 못한 척 계속해서 지껄여대고 있었다.

“그렇다 하면, ‘독’을 품은 연정은? 염락 그 작자는 제 누이를 연모하였다 하더구먼. 피가 이어진 친누이를 말이지.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친누이 또한 염락을 감모(感慕: 마음 속 깊이 연모함)하였다지. 아니지, 아니지. 다행이 아니라 불행인 지도 모르겠네.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았다면 염락의 누이가 제 동복아우의 씨를 밸 일도 없었을 터이니.”

“······.”

“그런가 하면, 천견 그 이는 또 어떤지 아는가? 천견 그 사람의 맏형은 천하의 난봉꾼이었다지. 때문에 몇 번이나 새 처를 맞아들이고 버리고, 또 어린 새 처를 맞아들이기를 반복했다 하네. 그러던 중에 겨우 열둘이었던 여아(女兒)를 받아야 할 돈 대신에 일곱째 후처로 사 왔는데,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지 천견의 형이란 작자는 겨우 초야만 치르고서 그 여아를 별당 깊숙한 곳에 방치해 두었다네. 천견은 그런 어린 형수를 가엾게 여기고 제 형과 세간 사람들 몰래 형수의 사정을 돌보아 왔었는데.”

뒤는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가지 않는가? 서엽이 짓궂게 물은 다음에,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서문경을 뜯어보듯이 살폈다. 서엽이 다가올 때조차 물러나지 않던 서문경이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게 되자 두 팔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 고운 낯을 어찌 가리고 그러시는고?, 서엽이 은근한 투로 말하면서 서문경의 얼굴을 가린 팔을 억지로 떼어냈다.

“헌데 그 사람의 ‘힘’이 그렇다면, 같은 ‘객’인 자네의 ‘힘’은 어떠한가?”

“내, 내 ‘힘’은.” 남은 한 팔을 움직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서문경이 변명했다. “발침식 때에 듣기로는, ‘물’에 씻겨 내려갔을 뿐이라고···,”

“그것은 경모 박사의 짐작에 불과하지 않은가. ‘만약’을 말하지 말고 현재에 대해 말해 봄세. 자네 ‘힘’은 무엇이던가? ‘환각’을 만드는 ‘힘’이 아닌가?”

결국 남은 한 팔까지 서엽의 힘에 끌려 내려갔다. 공포에 질린 서문경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고 서엽이 물었다. 아니, 그 물음은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선언 쪽에 가까웠다.

“무엇이 그렇게 부러웠는가?”

“······.”

“무엇이 그리도 부러워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고’ 자네 자신의 모습조차도 가짜로 ‘꾸민’ 것인가?”

그 추궁에, 서문경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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