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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혼란스러운 심경이나 의지의 문제를 비유한 말이 아니라 그것은 말 그대로의 뜻이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은 이미 정해져 있건만, 그는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제안을···, 그 아이 곁에 붙어 있는 ‘생귀(生鬼)’를 없애려면 그럴 수 있을 만한 힘을 얻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내 ‘힘’부터. ‘힘’? 아아, ‘힘’···. 그는 가까스로 기억해냈다. 그리고 생귀가 자신의 ‘힘’을 빼앗아 그 ‘항아리’ 속에 집어 넣어버렸던 기억까지도 생각해냈다.
항아리.
그는 머리가 모자란 아이처럼, 여러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하지 못하고 예전의 기억을 한 가지씩 느릿느릿하게 떠올렸다. 그, 항아리. 생귀는 백자(白磁)라고 말했지만 자신은 그것을 한 번도 눈으로 확인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힘’이 담긴 항아리 주변에 빽빽한 선 같은 것이 가득 둘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선은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 선(線)이 결계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 안에서 자신을 거부하는 강한 힘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저 항아리를 깨고 내 힘을 되찾고 싶다고 생각한 것만으로도 항아리 주변의 선은 강하게 자신을 거부했다. 그 때 느꼈었던 절망감을 그는 아직까지도 기억했다. 그 순간 직감했다.
‘저것’은 나보다 강하다, 나는 저 결계를 깰 수 없다···.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래서, 그 ‘항아리’부터 찾아야 했다.
항아리, 그 안에 숨겨진, 내 힘. 한 가닥, 흔적조차 잘 찾을 수 없을 만치 희미해진 이성이 지적했다. 못해. 내가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그 결계를 깰 수 있지? 지금껏 이루지 못했던 일인데. 하지만 자신의 ‘안에서’ 바로 그 의문을 비웃었다. 충분히 가능해. 가능해. 가능해. 왜냐하면···. 그 뒷말은, ‘자신’이 하는 말인데도 잘 들리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이전에 그는 생각했다.
“가능해···.”
할 수, 있어. 마치 세뇌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아나왔다. 그는 발밑이 붕 뜨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할 수 있어. 그 항아리를 열 수 있어. 어떻게? 방법은 모른다. 하지만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했잖아.
하지만···.
그 ‘항아리’는 어디에 있지. 그는 생귀가 항아리를 숨긴 자리를 알고 있지 못했다.
그 때 또 ‘안에서’ 답이 들려왔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만을 해주는 그 목소리가 또다시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계하(季廈).’
“계하···, 길지(吉地)?”
계하라는 말을 듣고 그가 중얼거린 말에, 안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잠시 침묵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길지? 그렇지 길지다.’
그 목소리가 흔쾌히 긍정하며 웃었다.
‘그곳은 약속의 땅이면서, 약속이 이루어지는 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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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석공, 굴방, 균열, 보수, 석공···.”
천추전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엄헌영은 내내 자신의 방을 맴돌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너무도 자주 되뇌어서 실체가 있었다면 지금쯤 온 모서리가 닳아 반들반들해지지 않았을까 싶을 만치 익숙한 단어들이 그의 입에서 이 순간조차도 쏟아져 나왔다. 항아리, 석공, 굴방, 균열···, 하고 다시금 중얼거린 그가 어느 순간 아악!, 하는 괴성을 내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빌어먹을! 모르겠어! 모르겠단 말이다!”
엄헌영이 바닥을 걷어차며 버럭 성을 냈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이야기 아냐? 대체 무슨 수로 알아내란 말이야!’ 마구잡이로 바닥을 차대며 소리를 지르던 엄헌영은, 그러나 다음 순간 선 자리에서 튀어오를 만큼 놀라고 말았다. 갑자기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도련님, 도련님.”
“벼, 별일 아니다! 그러니 돌아가 할 일이나 하도록 해!”
집안 분위기도 엉망인데 내가 너무 난동을 피웠나? 제 풀에 찔려 엄헌영은 그렇게 대꾸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오라, 저어, 손님께서.”
“사람?”
엄헌영은 의아하게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천제사가 있은 이후호 이 집에는 일가식솔 외에는 드나드는 사람이라곤 없었던 것이다. 아마, 언제고 엄씨 일가에 떨어질 날벼락을 함께 맞고 싶지는 않은 것이리라.
“이리 이른 시각에 누가···.”
문을 연 직후에야 생각이 났다. 현재 엄충의 사저는 그 주변이 무장한 병사들에게 몇 겹이나 둘러싸인 채 엄중히 감시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손님이라니?
문을 열자 댓돌 너머로 자신의 부친 엄유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는 낯선 얼굴이 있었다. 그 낯선 이는 적초상과 적초의를 입고 폐슬과 금대와 관까지 갖춘 옷차림, 즉 문무백관들의 대례복을 차려 입고 있었다.
엄헌영이 나온 것을 눈으로 확인한 그가 엄유에게 물었다, ‘황고 어른께서는?’ 엄유가 황망해하는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고 급히 대꾸했다, ‘연락을 받고 이리 오시고 계신 것으로 아오.’ 낯선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시가 급하니 성장(盛裝)하시는 것이 어떻겠소?”
“그것이 일단은···,”
엄헌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성장이라니?”
그 물음에 낯선 남자가 되레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복(朝服)을 갖추시라는 말이지, 또 무슨 뜻이 있겠소?”
“조복?”
대례복 차림의 남자가 엄유를 돌아보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캐물었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이오? 엄장군이 보이는 반응이 마치 처음 듣는다는 식이 아니오?’ 엄유가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훔치면서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사실이 그렇소이다. 실은 이번 일은 우리로서는 처음 듣는 일이라···.”
“처음 듣는다고!”
대례복을 입은 사내가 탄식하듯 말했다. 허어, 하고 그의 입에서 허탈해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뾰족하게 다듬은 턱수염을 쓸면서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이런 대사(大事)가 이쯤 되는 세족(勢族)에 전해지지조차 않았다니.”
대사? 영문을 몰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엄헌영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대사라니, 나라 돌아가는 꼴이 이런 상황에, 그것도 대례복(大禮服)을 갖추어 입을 만큼의 큰일이라니? 혹시 싶은 마음에 엄헌영이 물었다.
“혹 천제사가 재개되기라도 한 겁니까?”
“그렇다네.”
대답을 들은 엄헌영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런 말은 당사자인 황제에게조차 듣지 못했을 뿐더러, 또 무엇보다도······.
“그런데 왜 제복(祭服)이 아니라 조복(朝服)을?”
“그것이 나 또한 의문이네.”
나라에 큰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들이 입는 예장(禮裝)인 대례복에는 크게 두 가지 형식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큰 제사를 지낼 때 입는 제복(祭服)이고 또 하나가 황제의 즉위식, 가례, 길례 등의 의식을 지낼 때 입는 조복(朝服)이다.
천제사는 그 중 전자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재관들은 제복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제복이 아닌 조복을 예장으로 차려 입고 있었다. 엄헌영의 지적에 남자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채 지우지 못하고서 설명했다.
“허나 조정의 모든 문무백관들에게 제복이 아닌 조복을 입고 길지로 모이라는 명이 떨어졌으니···,”
“그런 황명이?”
놀란 엄헌영이 무심코 던진 말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뜻밖의 상황에 머리가 복잡해져 무심결이 시선을 돌린 엄헌영이 그런 남자의 표정을 보고 팍 눈살을 찌푸렸다. 괜한 헛기침만 몇 번 하는 남자를 보고 엄헌영은 생각했다,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거로군.
“황명이 아니로군. ···서엽 그 작잔가?”
엄헌영의 난폭한 표현에 엄유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 마냥 몸을 푸드득 떨었다, ‘허, 헌영아!’ 듣는 귀가 있거늘 어찌 그리 함부로 말하는 것이냐는 뜻일 것이다. 그 우려대로, 조복을 갖추어 입은 남자가 보란 듯이 얼굴을 구기고 엄헌영을 꾸짖었다.
“자네, 내 그렇게 보지 않았거늘 어찌 그리 태도가 무도할 수 있단 말인가?”
“천자도 아닌 놈이 제멋대로 나라의 대제사를 주재하고 법으로 정하여 진 문무백관들의 예장을 바꾸는 판국에 뭘 그렇게 따지고 앉아 있소이까?”
“뭐, 뭐, 뭐···!”
“황상께서 승인하신 일이 맞기나 합니까?”
“무, 무엇을 말인가!”
“천제사를 재개하고 법으로 정해진 예장을 바꾸어 입는 일 말이오이다.”
“당연한 일 아닌가? 헌의공은 폐하의 오른팔이나 진배없으니 헌의공의 명이 곧 황상의 뜻과···,”
“미친놈.” 대뜸 욕설이 튀어나오자 이번에 남자는 호통을 칠 어이조차 상실한 듯 했다.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차며 엄헌영이 일갈했다. “어디 미친놈이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오느냐!”
경악한 엄유가 달려들어 제 아들을 붙잡고 늘어졌다.
“아이고, 헌영아! 네 어찌 이러느냐!”
“놓으십시오!”
엄헌영이 이를 북북 갈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남자의 등을 발로 더 힘껏 밀었다. 어이쿠, 비명인지 뭔지도 모를 소리를 지르는 남자에 지지 않고 엄헌영이 더 목소리를 높였다.
“이 놈은 미친놈이 틀림없으니 매가 약입니다!”
“영아! 이 분은,”
“얼마나 직위가 높든 간에 알게 뭡니까!”
제 부친인 엄유의 말허리까지 댕강 자른 엄헌영은 남자가 허리에 두른 폐슬을 확 잡아떼 그것으로 남자의 얼굴을 거칠게 덮어씌웠다. 얼굴만 보고 있어도 속에서 천불이 인다는 태도였다. 이 뒷담당을 어찌 하려 그러느냐며 거의 울다시피 하는 부친을 팔에 매단 채로 엄헌영이 퉤 침을 뱉었다.
“뭐가 어쩌고 저째? 미친놈이 입만 달리면 단가, 누가 누구의 오른팔이고, 또 누가 누구의 뜻이나 진배가 없어? 그럴 바에야 아예 한 다리 거칠 필요도 없이 서엽 놈을 제좌에 앉혀 놓지 그러느냐?”
“영아, 제발 그만 좀!”
“괜한 헛소리 하려면 당장 꺼져! 말로는 제사가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이제 보니 사람 복장 뒤집으려고 찾아왔구나!”
“아이고, 헌영아!”
그 때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놀라서 앓는 소리만 내고 있던 남자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성이 나서 악을 썼다.
“제좌에 누구를 앉혀? 지금 누가 할 소리를 하고 있느냐, 이 망나니 자식이! 역적짓을 하려던 놈은 네 백부가 아니더냐!”
결코 틀린 말은 아닌 소리에, 무슨 말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엄헌영이 흠칫했다. 그러자 때를 놓치지 않고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천제사에 대한 말도 전해 듣지 못했다고? 오냐, 어찌된 일인지 알만 하구나! 그래, 곧 역모죄로 멸문 당할지도 모르는 집안이니 굳이 천제사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필요가 무어가 있겠느냐!”
“이 놈이 뚫린 입이라고!”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더냐? 천자로부터 별다른 말이 없어 안도한 모양이다만 턱도 없다! 대사가 끝나는 대로 곧 태황태후를 폐하고 엄충에게 죄를 묻는 교령(敎令)이 내려올 것이니! 그럼 태황태후와 엄충은 물론이요 네 아비나 네 놈까지도···!”
남자가 흥분해서 되는대로 내뱉어대는 말을, 누군가가 막고 말했다.
“기다리고 있지.”
“······!”
말을 폭포처럼 쏟아내던 남자가 순식간에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그것은 엄헌영이나 엄유도 매한가지였다. 어이쿠야, 담이 약한 엄유가 기겁을 해서 중얼거리며 뒷걸음질 쳤고 엄헌영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리고 신음하듯 말했다.
“백부님.”
“교령을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자네는 돌아가시게, 송백.”
송백이라 불린 남자가 불안한 시선을 이리저리로 흩뿌리며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천제사에는,”
“당장 네 팔다리가 찢겨도 이상하지 않을 대역 죄인이 길지에 발을 들여서 무얼 하겠나.”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했던 말을 비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송백이 확 얼굴을 붉히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체통도 잊고 거의 뛰다시피 하면서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는 엄헌영의 뒤통수에서 엄충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아.’
“채비를 하여라.”
“채비요?”
놀라 묻는 엄헌영을 엄충을 되레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예장을 갖추어야 할 것 아니더냐. 제복을 갖추고 다시 나오도록 하여라.”
“기다리십시오, 백부님.” 그 말만 남기고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엄충을 엄헌영을 황급히 불러 세웠다. “설마 천제사장으로 가는 것입니까?”
“나라의 가장 큰 제사이니 마땅히 참석하여야지.”
그 말에 엄유가 크게 반발했다.
“그리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 운현궁 마마께서 이리 된 마당에 저희가 무슨 까닭으로 도리를 다하여야 하는지요?”
“가당찮은 소리 하지 마라!”
내내 침착한 모습만을 보이던 엄충이, 갑자기 불같이 화를 냈다. 혀, 형님! 놀란 엄유가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찌 갑자기 성을 내십니까요? 관례를 치른 지 오래인 아들을 두고도 아직 매사에 경망스럽기 그지없는 동생이 벌벌 떨며 묻는 것을 지긋지긋하다는 시선으로 보던 엄충이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채비하여라, 마마께서도 제장에 납시실 것이다.”
엄충이 말하는 ‘마마’가 누구인지 엄헌영은 퍼뜩 알아차렸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는 지난 며칠간 엄충이 태황태후와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부단히 애를 썼던 사실을 떠올렸다. 엄충이 굳이 천제사에 참석하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백부의 목적인 황제가 아니라, 태황태후가 분명했다.
백부님! 엄헌영이 엄충을 따라 뛰어가면서 거의 외치듯이 물었다.
“운현궁 마마께서, 마마께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신 것입니까!”
“무슨 말이더냐. 어서 돌아가 예장을 입으라 했을 터인데.”
“근래 백부님께서 눈에 띄게 불안해하신 것은 운현궁에서 서신을 받은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필히 운현궁 마마께서 백부님께 무리한 일을 명하신 것이지요, 아닙니까!”
달려간 엄헌영이 엄충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아닙니까?”
“···비키거라.”
“못 비킵니다. 어서 대답을,”
엄헌영이 말을 멈춘 것은 때마침 묘시를 알리는 대종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대종소리가 울리자 엄충의 낯빛이 싹 달라졌다. 엄충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엄헌영을 옆으로 밀면서 노성을 질렀다.
“비키거라!”
“백부님!”
“시간이,” 엄충이 불안한 눈으로 담 밖을 돌아보며 신음을 흘렸다. “시간이 없어. 무아를 먼저 제장에 들어가게 내버려 두었다가는 우리 수경궁 마마의 신후명이 진흙탕을 구를 것이다.”
“수경궁 마마?”
뜻밖의 이름을 들은 탓에 엄헌영은 당혹해했다. 왜 돌아가신 황귀비 마마가 지금 와서 언급된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신음에 섞어 이유를 말하던 엄충은 이제 숫제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가 연속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단 한 번도 껌뻑거리지 않은 부릅뜬 눈이 건조해지기는커녕 도리어 기이한 물기를 발하기 시작했다. 엄헌영은 귀를 기울여 가까스로 엄충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가 말했다, ‘안 된다, 절대로 안 돼···.’
“아무런 잘못 없이 이용만 당하다 이승을 뜬 내 딸, 불쌍하고 가련한 내 딸이 어찌하여 사후에도 그런 모욕을 받아야 한단 말이더냐······!”
“이용···?”
“비켜라!”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듯, 엄충이 커다랗게 일갈하며 엄헌영을 밀어버리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뒷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며 엄헌영이 중얼거렸다.
“도대체가, 이용이라니, 이게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게야?”
겁을 먹고 엄충으로부터 먼 곳에 떨어져 있었던 탓에 엄충이 중얼거린 말을 듣지 못한 엄유가, 그제야 슬그머니 다가오면서 물었다. 아버지, 하고 자신의 부친에게 백부가 했던 말을 물어보려 입을 열었다가 엄헌영이 곧바로 생각을 고쳤다. 백부님이 궁지에 몰린 탓에 무심코 흘리고 만 말이다. 그런 것을, 평소 신뢰하지도 않는 자신의 부친에게 말해 주었을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엄헌영은 이렇게 말했다.
“소자는 잠시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어? 어디를 나간다고? 너 이 녀석, 백부님께서 하시는 말씀 못 들었느냐? 길지에 가야 한다니까!”
“들를 곳에 들른 다음 길지로 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어허, 이 녀석이 어른 하는 말씀을 안 듣, 어어어어? 헌영아!”
송백과 엄충을 상대하느라 깎일 대로 깎인 제 위신을 어떻게든 바로 세우고자 짐짓 엄격한 척 설교하려던 엄유가 도중에 꽥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말을 듣는 척 마는 척 하고 엄헌영이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잠시 후 제복(祭服)으로 추정되는 옷가지들을 아무렇게나 손에 들고 집 밖으로 달려 나가버렸던 탓이었다. 그 뒤에다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이 엄헌영의 모습은 무서운 속도로 작아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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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됩니다!”
“미리 문후(問候) 허약(許約)을 받으신 것도 아니시면서 어찌···.”
“더더군다나 겨우 묘초(卯初) 밖에 되지 않은 시각에···.”
“황상과 용인께서는 시방 숙장(?裝)으로 분주하시니 후일···.”
뭐지. 문득 밖에 소란스러워졌다는 생각에 서문경은 머리를 들었다. 내내 깊은 물속에 잠겨 있다가, 이제야 물 밖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정말로 물속에 있다 나온 사람처럼 머리를 몇 번 뒤흔든 서문경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렴을 걷고 나가자 저절로 장지문이 열렸다. ‘마, 마마 납시셨사옵니까?’,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장지문 밖에서 티격태격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그의 앞에 허리를 수그렸다, 단 한 사람을 제하고. 서문경은 그 사람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하는 겁니까. 할 말이 있으면,”
“알고 있었냐!”
헉, 하고 주변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경악한 나머지 입만 벌렸다 닫았다 하고 있던 사람 중에 겨우 하나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어, 어어어어어, 어찌, 어찌, 어찌 감히······.”
또 시작이군. 한숨을 삼키며 생각한 서문경이 엄헌영에게 눈짓하면서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폐하는 안 계시지만.”
“없다고?”
“마마!”
서문경의 행동에 당황한 여관이 황급히 그를 불렀다. 서문경이 대꾸 없이 시선만 돌리자 내관이며 나인들이 모조리 앓는 소리를 냈다.
“채비를, 채비를 하셔야 하옵니다.”
“무슨 채비 말입니까. 저는 그런 소리 들은 적 없습니다.”
“하오나, 마마···.”
“들어가지요.”
서문경이 엄헌영을 재촉했다. 엄헌영은 하나같이 난색을 띄고 있는 궁인들이 신경이 쓰이는지 몇 번이고 그들을 돌아보았지만 결국은 서문경이 가리키는 대로 침방 안으로 들어갔다. 주렴 안으로 들어간 서문경을 따라 무심코 주렴을 걷고 들어가려다가 뒤늦게 아차하고 물러난 엄헌영이 서문경의 등에 대고 물었다.
“제안은?”
“글쎄요, 새벽부터 웬일인지 우경(佑璟: 황제의 목욕을 돕는 관리)이 들이닥쳐서.”
그렇게 말하는 서문경의 태도가 평소와 조금 달랐지만 엄헌영은 미처 그 차이를 깨닫지 못했다. 역시···, 하고 턱 끝을 잡고 중얼거리는 엄헌영에게 이번에는 서문경이 물었다.
“별 일이군요, 직접 찾아오다니. 근신 중 아니었습니까?”
그런 뒤에 서문경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오늘은 유난스럽게 구는 사람이 많군.’ 그 말을 놓치지 않고 엄헌영이 캐물었다.
“유난스럽게 구는 사람이 많다니?”
“아니, 당신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주렴 밖에서 정신없이 서성거리고 있던 엄헌영이 주렴을 확 걷고 몸을 들이밀었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서문경에게 엄헌영이 달려들 듯한 기세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뭐 들은 것 없나?”
“들은 것이라니요?”
하고 되물은 서문경이 다음 순간 안색을 달리했다.
“당신이야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천제사가 재개된다고 했어!”
“천제사가요?” 서문경이 어이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들은 적 없습니다! 도대체 언제요?”
“지금!”
지금? 서문경이 딱딱하게 굳었다. 엄헌영이 이를 갈면서 덧붙였다, ‘오늘, 진시.’
“보나마나 그 놈 짓이다! 서엽, 이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은 놈! 황명도 없이 제 멋대로 천제사를 재개해? 이제 대놓고 황제처럼 굴고 있지 않느냔 말이야!”
성이 나서 펄펄 날뛰고 있는 엄헌영을 서문경이 가까스로 진정시킨 다음 물었다, ‘일단 진정하시고, 천천히 말씀해 보십시오, 무슨 말을 들으신 겁니까?’ 그 물음에 엄헌영이 분을 참지 못해 이를 갈고, 바닥을 차고 구르고 때때로 앓는 짐승 같은 소리까지 내면서 오늘 아침 있었던 일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재차 엄헌영에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보내던 서문경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긴 신음을 흘렸다.
“이상한데···, 뭐가 틀렸단 말이지?”
“그런 말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어서 무슨 방도를,”
서문경이 머리를 저었다, 생각할 것이 있으니 잠시 조용히 해 달라는 표시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는 결론이 나지 않는지 조금 뒤 서문경이 숙였던 머리를 들어 엄헌영 쪽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뻔하지! 이대로 제안을 제좌에 올려 운현궁 마마와 백부님을 찍어 내리고 제안을 내키는 대로 조종하면서 권세를 누릴 생각 아닌가!”
“완벽한 용이 된 황제를 입맛대로 조종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입니까?”
서문경의 지적에 엄헌영이 움찔했다. 그가 다른 답을 내어놓았다.
“그럼, 제안의 정신을 조종할 수단이 있는 것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문제의 ‘토기’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생각했을 때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마약 따위도 고려해 보았던 서문경이 다시금 그 생각을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서문경은 머리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만에 하나 그런 수단이 있었다면 왜 자신의 아들이 아닌 폐하를 굳이 선택했어야 했을까요···.”
제좌에 앉는 것이, 천제사를 지내는 것이 서현이 아닌 ‘제안’이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가정한다면······.
“왜 천제사를 지금?”
“아.”
그 때 엄헌영이 막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이 짧은 탄성을 흘렸다. 뭐지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문경이 건성으로 답했다. 엄헌영이 어깨에 대충 둘러매고 있던 옷가지를 바닥에 내렸다. 서문경의 시선이 그 쪽을 향했다.
“이건···, 제장에 모여 있던 재관들이 입고 있던 옷이군요.”
“제복. 큰 제사 따위가 있을 때 갖추어 입는 대례복이다, 대례복에는 조복과 제복이 있는데 천제사는 제례(祭禮)니 당연히 제복을 입어야 하지. 그런데 서엽은 이상한 명령을 했더군. 길지에 제복이 아니라 조복을 갖추고 오라 연통을 넣었다는 거야.”
“조복을···.”
“영감이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 노망이라도 오는 건지, 제안이 이제 와서 다시 즉위식을 올릴 것도 아니고 천제사날에 네 놈과 가례를 치를 것도 아닌데 무슨 조복을.”
“즉위식?”
서문경의 중얼거림을 들은 엄헌영이 일러 주었다, ‘아니, 제안은 벌써 수 년 전에 즉위식을 치렀다. 제좌에 오른 지가 몇 년 전일인데.’ 그러나, 서문경은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즉위식, 즉위식이라.
그 태도에 답답해진 엄헌영이 언성을 높였다.
“제안이 아예 딴 사람이 되지 않는 이상은 즉위식은 다시 치를 일이 없다니까!”
“···다른, 사람?”
불쑥, 서문경이 내뱉었다. 서문경이 평소처럼 비꼬거나 지지하고 마주 고함을 지를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엄헌영이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당황해서 우물거렸다.
“어? 뭐.”
“다른 사람이라니.”
“아니, 그건,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뒷머리까지 벅벅 긁으면서 변명하던 엄헌영이 다음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엄헌영이 급히 서문경을 붙잡고 확 끌면서 말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서 제장으로 가야···!”
“잠, 시만요!”
거의 멱살이 잡아끌리다시피 하고 끌려가던 서문경이 큰 소리로 엄헌영을 만류했다. 시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정색을 하고 소리치는 엄헌영 때문에 서문경의 언성도 저절로 높아졌다.
“폐하께서 안 계신데 저희끼리 뭘 어쩌잔 말입니까?!”
아. 아차한 엄헌영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 사이에 그의 손아귀 아래에서 빠져나온 서문경이 구겨진 옷깃을 털어내면서 장지문을 힐끗 곁눈질했다. 엄헌영의 말대로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한 시라도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하지만. 서문경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언제쯤 돌아오는, ···어?”
초조하게 바닥을 두드리고 있던 엄헌영이 불쑥 제 옆을 지나치는 그림자를 보고 당황했다.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손이 나가 서문경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꼴이 된 엄헌영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 어딜 가는 거냐?”
“먼저 가볼까 합니다.”
“먼저? 제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한 것은 네 놈이잖나!”
“그렇지만.” 하고 대답하면서 서문경은 스스로 들어도 자신의 말이 변명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한 시가 급하니 한 사람이라도···.”
“그럼 차라리 내가,”
하고 나서는 엄헌영을 서문경의 날카로운 고함이 막아섰다.
“아니요!”
자신의 갑작스러운 고함 소리에 놀란 엄헌영에게서 시선을 피하면서 서문경이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머릿속도 가슴 속도 엉망으로 헝클어진 실타래가 된 것 같았다. 서문경이 못을 박듯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당신은 여기에서, 폐하가 제장으로 가시지 못하도록 막아 주십시오. 아예, 아예 폐하와 함께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곳에 숨겨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 잠깐, 너···!”
“믿겠습니다.”
다짜고짜로 말하는 서문경에게 엄헌영이 소리쳤다, 기다려, 대체 뭘 하려고?! 그러나 이미 늦었다. 말을 마친 서문경은 엄헌영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갑자기 장지문을 열더니 그 밖으로 나가버렸다.
**
침방으로 돌아가는 보랑 중간에 황제는 걸음을 늦췄다. 멀리서 들어도 알 수 있을 만치 침방 주변이 소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뒤를 따르던 수많은 나인들과 내관, 또 우경과 권식 따위가 황제를 따라 걸음을 멈추고는 의아한 눈으로 그 앞을 힐끔거렸다.
발소리와 함께 당황한 목소리가 오가고, 때때로 누군가를 꾸짖는 소리 같은 것도 들려왔다. 어찌 홀로 행차하시도록 내버려 두었단 말이더냐? 뒤를 쫓았으나 어찌된 까닭인지 삽시에 마마의 모습이···, 한 발자국 앞으로 옮길 때마다 선명해지는 말소리에 황제의 미간에 패인 골이 점점 더 깊어졌다.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는 주위 사람들의 얼굴도 점점 초조함이 서리기 시작한, 그 때였다.
“아, 아니 됩니다!”
“천자의 침전에서 뜀박질이라니 무슨 이런 몰상식한···!”
우당탕탕 하는 소음과 함께 경악스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찌푸려져 있던 황제의 눈매가 꿈틀했다. 설마. 그 사이에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음이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졌다. 황제의 뒤를 바로 뒤에서 따르던 태감 봉승이 노성을 질렸다.
“엄장군! 자택에 근신하며 처분을 기다려야 할 자가 어찌 지존의 침전까지 들어와 이런 난동을 부르는 것인가!”
그러나 황제의 지척으로 달려온 엄헌영은, 그런 봉승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눈을 번쩍 뜨더니 황제의 팔을 확 낚아챘다. 그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제안! 큰 일이 났다!”
“놓으시오, 이 무례한 자···!”
“금군은 무엇을 하느냐, 이 작자를 당장 끌고 나가지 않고!”
엄헌영의 행동에 사람들이 입에 거품까지 물고 펄펄 날뛰었지만 황제는 그들을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하면서 조용히 대꾸했을 뿐이었다, ‘큰일이라니? 그것보다는 그대가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인가?’ 그것이 천제사가,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엄헌영이 곧바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면서 괴성을 내질렀다.
“그 자!”
아악! 꽥 소리를 지른 다음 허둥지둥 말하던 엄헌영이 바로 다음 순간에 주춤했다. 자신이 수객의 이름조차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수객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데,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제의 팔을 잡은 엄헌영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수객이!”
“수객? 경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황제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엄헌영의 팔을 자신에게로 확 잡아 당겼다. 거의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엄헌영을 끌어당긴 황제가 흰 이를 드러냈다. 가까이에서 무표정한 황제의 얼굴을 본 엄헌영의 얼굴에서도 표정이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말해. 경이가 어찌 되었다는 거냐?”
“수객이, 혼자 길지로.”
“길지?” 황제의 얼굴이 의구심에 휩싸였다. “무슨 까닭으로 경이가 길지로 갔다는 말이더냐?”
그 물음에 엄헌영은 대답 대신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엄헌영의 질책하는 듯한 눈초리를 모든 궁관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피했다. ‘더러운 개새끼들.’, 씹어 내뱉듯 비난을 토해낸 엄헌영이 사실을 밝혔다.
“오늘 진시 천제사를 재개한다 하더군. 몇몇을 제한 대부분의 문무백관들에게 이미 이 사실이 통보되었다 한다. 그 사실을 제안 너는, 들은 바 있나?”
황제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순식간에 보랑을 둘러싼 공기가 몇 도는 내려간 듯 했다. 어깨를 움츠린 사람들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황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뒷걸음질 치던 나인들이 걸음을 빨리하다 제 발에 걸려 몇이나 마룻바닥에 몸을 찧었다. 황제가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미처 듣지 못했군. 미처 몰랐건만 내 이부까지 다친 모양이야.”
그것이 아니면 조정과 황궐의 모든 백관과 궁관들이 짐의 신자(臣子)가 아니라 다른 작자의 신자였던가. 그 빈정거림에 사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폐하, 그것이, 그것이 아니오라···.’, 얼굴에서 아예 핏기가 사라진 봉승이 얼어붙은 사람들 사이에서 겨우 입을 열어 변명 비슷한 것을 주절거리려 했지만 황제의 시선 한 번에 겨우 연 입을 다시 다물고 말았다. 황제의 시선에는 분노 따위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담담한 눈초리가 되레 섬뜩했다.
황제가 말했다.
“침전에 개 비린내가 진동하는군.”
그리고서 황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보랑을 걸어 나갔다. 그 뒤를 엄헌영이 황급히 따라 나갔다. 하나같이 놀란 얼굴로 자신들을 보는 나인이나 내관은 신경도 쓰지 않고 엄헌영이 황제를 부르며 버선발로 침전을 뛰쳐나갔다.
“제안! 대체 어디를 가는 거냐! 제안!”
“말.”
겨우 황제를 따라잡은 엄헌영에게 황제가 차갑게 내뱉었다. 말? 눈이 휘둥그레진 엄헌영이 황제가 했던 말을 반복하자 황제가 그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뜀박질로 궐까지 온 것을 아닐 테지. 타고 온 말은 어디에 두었느냐?”
“그건 그렇지만, 대체 어디로···, 길지로 갈 건가?”
“가야지.”
“대책도 없이 가서 무엇을 하려고! 그래봐야 서엽 놈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는 것 아니냐?”
“그럼? 경이가 길지로 갔는데 여기서 손 놓고 있으라?”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답지 않게 엄헌영이 난감해하고 있는 사이, 황제가 엄헌영이 타고 온 흑마(黑馬)를 찾아냈다. 낯선 이가 고삐를 당기자 놀란 말이 뒷걸음질을 쳤지만 고삐를 잡은 황제의 마른 팔은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쉽사리 거마(巨馬)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고삐를 당기며 동시에 훌쩍 말 위로 올라탄 황제가 엄헌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헌의공이 길지로 간 것이 확실한가. 이미 제장에 당도했다 하던가?”
“그것을 내가 알 리가···.”
“그렇다면.” 엄헌영의 말허리를 황제가 썩둑 끊었다. “영로당으로 가겠다.”
“영로당?”
하고 반사적으로 묻고 나서야 엄헌영은 번뜩 깨달았다. 제 말의 늘어진 고삐 끝을 거의 달려들듯이 해서 붙잡고 엄헌영이 소리쳤다.
“너, 혹시 서엽 놈을···!”
“제장에 당도하기 전에 기어코 붙잡아 놓아야지.”
애초에 이 방도를 왜 생각지 못했을꼬?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황제의 눈은 인간이 아니라 용인의 것을 하고 있었다. 정신이 나갔어···! 황제의 상태를 본능적으로 알아챈 엄헌영이 고삐 대신 황제의 팔을 확 당겼다.
“안 돼. 그 수객이 너를 결코 제장에 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으라 했다. 그것은 서엽 놈을 만나지 못하게 하라는 말과 진배없어!”
“경이가 그리 하라 했다고.”
“그렇다.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으나, 그 모든 것이 너를 걱정하여서,”
“그래서.”
담담한 황제의 어조에 엄헌영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말았다.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어조가 격분하여 마구 성노하는 것보다 더 소름이 끼쳤다.
그러는 사이에 황제가 엄헌영의 팔을 떼어내고 말을 이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고 버티려 했지만, 이상했다. 자신의 손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황제의 의지대로 툭 풀려버렸다. 이해 불가능한 현상과 맞닥뜨린 엄헌영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이대로 알 속에 숨어 있으란 말인가? 두 손을 전부 놓고,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휩쓸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황제가 조용히 묻는 말들에 엄헌영은 한 마디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황제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짐이 해결해야 할 일이니, 짐이 해결토록 하겠다.”
엄헌영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겨우 쥐어짰다.
“허나 어떻게? 어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않는가? 서엽 그 너구리같은 놈이 사방에 거미줄을 쳐 놓고 네가 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 그렇구나, 서엽···.”
엄헌영은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나올 말이 아닌 것이 나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정작 말을 한 당사자인 황제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 지금 막 생각났다는 듯이 중얼거리고 있는 그의 얼굴과 목소리에는 미묘한 열기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부황이 총애하던 충신, 희 형님의 생부.”
그랬지, 그랬었다. 황제가 입 속으로 말했다. 마치 지금까지는 잊고 있었다는 듯한 투였다. 그랬다가 다음 순간, 그의 어조가 돌변했다.
“그것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
“돌이켜 보면 짐의 사람들을 해한 것은 전부 그 자였다. 모후를 늘 흐느끼게 만들고, 혜 누이와 희 형님 사이를 갈라놓고, 결국에는 희 형님까지 잔혹하게 내쳤다. 그런 놈이 이제 내 후(后)까지 해하려 든다면.”
황제가 부득 이를 갈았다.
“그 미친 개장수 놈을 굳이 살려 둘 필요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