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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자신의 침방으로 돌아왔을 때, 텅 빈 방에는 서문경이 홀로 앉아 있었다. 드리워진 구슬주렴을 걷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서문경의 등이었다. 흰 달빛이 내리는 창가에 오도카니 돌아앉아 있는 모습이 유난히도 왜소했다. 두 무릎을 끌어안고 한껏 둥글게 만 등이 사람이 아니라 검은 물 밖으로 쓸쓸히 도드라진 뼈나 알처럼도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선 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말을 걸어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싶었지만, 저 모습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그대로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굳이 자신이 말을 걸지 않아도, 서문경은 자신이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몸은 창가를 향한 채로 그가 입을 열었다. 한참 동안 말하지 않았었는지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두 사람은 조금 전에 돌아갔습니다.”
“···옆으로 가도, 괜찮겠느냐.”
짜내듯 묻자, 서문경이 그제야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 두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궁금하지는 않으신가요. 허나 황제는 조심스럽게, 방금 전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짐이 그대 곁으로 가는 것을 허락해 줄 수 있겠느냐. 달빛에 비친 서문경의 옆얼굴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 웃는 모습이 이상하게 외로워 보였다.
“오십시오.”
왜 새삼스럽게 굴고 그러십니까···. 서문경이 제 옆자리를 내어 주면서 말했다. 황제는 소리 없이 걸어가 서문경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가 앉았다.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황제가 자신의 곁에 앉은 것을 확인한 서문경은 다시 창밖을 내다보기 시작했고 황제는 그 옆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기묘한 정적.
새하얀 달빛이 소리도 없이 방 안으로 들이치고 있었다. 창에 바른 문종이의 고운 결이 박속같은 달빛에 비쳐 반투명하게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희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달빛과 함께 정교한 반월창 그림자가 서문경의 얼굴에 내려앉아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그려진 그림자가 마치 이리저리 쪼개진 상처처럼 보여서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피부와 피부가 닿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서문경의 볼에 제 손을 올렸다는 것을.
놀라는 황제를 머리를 조금 돌려 쳐다보며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그림자가···.”
서문경의 입에서 나온 것은 참으로 뜻밖의 말이었다.
“그림자가, 없군요.”
서문경의 말대로 빈 방 안에 비치고 것은 반월창과 바람에 흔들리는 구슬주렴의 그림자뿐이었다.
“그림자란 속계(俗界)에 매여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니.”
“매여 있다···.” 서문경이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두 무릎을 더 깊숙이 끌어안았다. “그림자가 있을 때에는, 오히려 매여 있지 않았었는데.”
황제가 불쑥 물었다.
“끌어안아도, 되겠느냐.”
그 말에, 대답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서문경에게 황제가 변명처럼 덧붙였다.
“불안하구나.”
“어째서요?”
“왜 하필 경이 네가 새 따위의 별명을 붙였을까. 새란 날개가 있는 것을.”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은 차라리 탄식 같았다.
“이런 하찮은 생각에도 이토록 불안해 지는 것을.”
“그러네요···.”
서문경이 무심코 중얼거리고는 황제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입술이 달싹거렸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했었지만 이렇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불안하다.
그래, 나도···.
불안했다.
서문경은 두 팔을 벌려 황제의 목을 끌어안았다. 일순간 황제의 몸이 굳는 것 같았지만 곧 그의 팔도 서문경을 마주 안아왔다. 서문경은 황제의 목에 입과 코를 묻은 다음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감정이란, 몸 속 어디에 든 것일까. 불현듯이 그런 의문이 들었다. 갈비뼈 밑···, 등보다는 위. 그 사이에 든 내장보다는 조금 위일까. 심장 근처인지 뱃속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여전히 불안과 의심은 몸을 둥글게 말고 도사리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렇게 황제와 피부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그조차도 잠잠하게 가라앉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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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해가 채 밝아오기도 전에 엄헌영이 경혜 현주의 서신을 가지고 천추전을 찾아왔다. 물론, 뭇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하늘’을 통해서였다. 서문경에게 현주의 서신을 전하면서 그가 말했다.
“운현궁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더군.”
그 말에 서문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서문경의 뒤편에 몸을 모로 돌리고 떨어져서 앉아 있던 황제가 이기죽거렸다.
“기운도 좋군, 또 꾸밀 짓이 남았다던가.”
“아니, 조용해.” 엄헌영이 불쾌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지나치게.”
“···그 쪽은?”
서문경이 물었다. 그 쪽? 하고 되물었다가 엄헌영은 반문한 즉시 서문경이 무엇을 물은 것인지 깨달은 듯 했다. 표정이 싹 굳는 것을 보니. 하지만 떨떠름한 투로나마 엄헌영을 대답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백부님께서는 근래 눈에 띄게 불안해하고 계시는 듯 했다. 천제사 때 벌어진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그, 뭐랄까. 갑자기···, 절박해졌다고 해야 할까. 운현궁 편으로 계속해서 서신을 보내시는 것 같았지만 답신은 오지 않는 것 같았다. 운현궁으로 직접 찾아뵐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운현궁도, 엄씨 세가도 감시당하고 있으니까요.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뭐?”
몰랐습니까?하고 서문경이 태연하게 물었다. 엄헌영이 황망한 시선으로 황제와 서문경을 번갈아보았다.
“어째서? 그럴 명분이라도 있나? 백부님이나 운현궁 마마야 저지른 짓이 있지만, 아니, 아니, 그것보다는 어떤 간 큰 놈이 용인이 둘이나 있는 천추전을.”
“제 입맛대로 용인을 조종하려는 인간도 있는 판국에.”
그 중얼거림에 퍼뜩 떠오른 것이 있는 듯한 표정인 엄헌영을 무시하고 서문경이 바로 화제를 돌렸다.
“태황태후가 또 제멋대로 행동하려는 모양이지요, 당신 백부님의 말씀도 듣지 않고. 그것보다···,”
“큰일인데.”
서문경이 하던 말을 멈추고 엄헌영을 돌아보았다. 답지 않게 엄헌영이 초조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눈을 내리깐 엄헌영이 콱 이를 악문 채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서문경은 새삼 깨달았다. 황제를 제좌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에 서현을 세우고자 일을 꾸민 장본인인 태황태후와 엄충은 엄헌영과 같은 일가사람이었다. 그 말인즉슨···.
“잘도 도울 생각을 했군···.”
엄헌영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서문경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서문경의 눈이 흘깃 황제를 곁눈질했다. 엄헌영에게서 모로 돌아 앉아 있는 황제는 여전히 반쯤 등을 돌리고 있는 채였다.
그 순간에도 엄헌영은 초조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쥐 죽은 듯 얌전하게 있어 준다면 차라리 목숨은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상황에서까지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건지.
“욕심이지요.”
서문경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엄헌영이 머리를 들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욕심?”
“당신 같은 사람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태황태후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하기는. 희 형님도 계시지 않으니 더 이상은 방도가 없겠지.”
서문경의 말에 바로 동의하며 얼굴에 화색을 띄웠다가 또 다음 순간 엄헌영이 의기소침해졌다. 좋아라 할 일이 아니잖아···. 그 혼잣말에는 특별한 대꾸를 하지 않고 서문경은 경혜 현주의 서신을 펴들었다.
조원이 주고 간 두루마리를 보여 준 것이 어젯밤이었는데 바로 오늘 새벽 결과를 가지고 오다니, 예상도 못한 추진력이 저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그 정도로 절박하다는 것일까.
“그 때문에라도 수상을 저희가 먼저 찾아야겠군요. 태황태후가 또 삿된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또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예전에 저희가 말했던 두 개의 항아리···.”
서문경이 문득 말을 멈췄다.
“항아리? 아, 그. 허나 그 이야기는 끝난 것이···.”
서문경이 갑자기 손을 내젓는 바람에 엄헌영은 하던 말을 그만 둬야 했다. 경혜 현주의 서신에 거의 코를 박듯이 하고 있는 서문경에게 황제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서문경이 대답 대신 서신에 적힌 글을 읽어나갔다.
“경왕부(競王府) 친왕(親王) 문위 자황(自晃)과 경왕비(競王妃) 만화영(晩花英)의 장자(長子) 문위 진국(珍菊), 송회(頌回) 12년 경(競)에서 출생. 송회 19년 3월 경왕부 왕세자로 책봉. 같은 해 7월 증후(證候)가 발견되다.”
“송회라 함은, 정한제 때의?”
“같은 해 8월 천자의 삼남(三男)이며 황귀비 왕씨 소생인 문위 도(導), 증후가 발견되어 경왕부 왕세자 문위 진국과 자웅을 겨루다. 송회 20년 1월, 황태자시강원 원사(元仕) 모하 기연 경합의 승자를 문위 진국으로 선포······.”
거기까지 읽은 후에, 서문경은 말을 멈췄다. 송회 20년 1월 황태자시강원에서는 경왕부 왕세자 문위 진국을 다음 대 용황제로 더 적합하다 밝혔다, 그러나 경왕부 실록에는 그와 함께 경합을 치른 정한제의 삼남 문위 도의 모친을 황귀비라 적고 있었다. 지금의 황제가 그러하듯, 황귀비란 자신 소생의 황자나 황녀가 제좌에 오른 후궁만이 받을 수 있는 품계였다.
즉, 정한제의 뒤를 이은 것은 문위 진국이 아닌 문위 도. 그렇다면 문위 진국은.
“같은 해 3월, 경왕부 왕세자 문위 진국, 대퇴부에 단도가 꽂힌 채로 절명한 것이 발견, 황제(皇弟)이자 경왕(競王)인 문위 자황 진노하여 흉수를 수색하였으나 진상을 밝혀내지 못한 채로 송회 25년 훙(薨). ···대퇴부에 단도가 꽂힌 채로 절명한 것이 발견······.”
대충 짐작하고 있기는 했지만 눈으로 확인하자 왜인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서문경은 흥평군왕부 군왕세자 문위 효에 대하여 적힌 실록까지 마저 읽었다.
“진위(眞威) 9년 6월 황태자시강원, 원사 모재가 다음 대 용황제로 흥평군왕부 군왕세자 문위 효가 적합함을 천자에게 간언, 그 해 11월 문위 효 낮것상에 올라온 타락죽을 취한 후 토혈(吐血)한 후에 절명. 중독사(中毒死).”
서문경은 서신을 덮었다. 그리고 놀라고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한 엄헌영과, 이맛살을 찌푸린 채 이 쪽을 보고 있는 황제를 한 번씩 번갈아보고 말했다.
“알겠군요. 사고사, 급서 등으로 대충 얼버무려 놓기는 했지만 다른 이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황주에 위패가 있는 황족들은 모두 살해당한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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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라는 말의 무게는 무거웠다. 순식간에 어깨를 꾹 내리 누르는 듯한 무게감이 방 안 가득 내려앉았다. 그 무게를 털어내려 진저리라도 치듯이 엄헌영이 어느 순간 내뱉었다.
“살해라니! 어째서 그래야 하지?”
“그럴 ‘필요’가 있었겠지요.”
“필요?” 그 말에 퍼뜩 생각난 것이 있는 듯, 엄헌영이 신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럼 문위 진국이나 문위 효와 같은 대에 있었던 용인이 제좌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런 이유는 아닐 겁니다.”
서문경의 그 말에 생각의 허리가 뚝 끊긴 엄헌영이 다소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이유는 아니라고? 서문경이 대답했다. 제 짐작이 맞다면, 아마도.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이상하리만큼 담담해서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특정인을 제좌에 앉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특정인을 제좌에 앉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라는 표현 쪽이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황주에 위패가 있는 황족들을 말이냐.”
그렇게 물은 것은 황제였다. 서문경이 그 쪽을 보고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덧붙였다, ‘최유가 고의적으로 문위 진국과 문위 효에 대한 정보를 은폐했으니 수상은 이 사실을 미처 알고 있지 못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황제가 그 뒷말을 이었다.
“최유가 배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때, 모든 것을 짐작했을 수도 있겠구나.”
“저희처럼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왜’ 최유가 특정 정보만을 은폐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어렵잖게 사실을 짐작할 수는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수상은 저희들이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고.”
하고 말하면서 서문경은 생각했다. 만약 지금 내가 짐작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또 그 사람이 나와 같은 결론을 도출해 냈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질투? 불안? 아니면 공포?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지금의 그는 오롯이 자신으로서 생각할만한 힘도 잃어버렸을 테니까.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서문경은 엄헌영이 천추전으로 오게 된다면 황제와 엄헌영 두 사람에게 본디부터 하려고 마음먹었었던 말을 꺼냈다.
“당신이 연 ‘토기’.”
엄헌영의 몸이 움츠려들었다.
“그 토기가 열렸다면, 나머지 하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나머지···, 하나?”
“서현이 원래 열고자 했었던 그 ‘항아리’ 말입니다.”
왜 그 이야기가 또. 그렇게 중얼거리는 엄헌영은 서문경이 품은 의문을 자신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그가 말했다.
“그 ‘항아리’에 있던 것이 ‘토기’로 옮겨진 것 아니었었나? 어찌되었건 내내 혼절해 계시던 형님께서 정신을 차리셨으니까. 그래서, 형님께서 찾으시던 것과 본디 토기에 있었던 것이 부정하게 얽혀서···.”
“그럴지도 모르지요.”
서문경의 무성의한 대답에 엄헌영의 미간이 깊숙하게 패였다. 하지만 그가 무어라 부아를 터뜨리기 전에 서문경이 먼저 말을 이었다.
“그 ‘항아리’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거긴 비었다는 말에 너도 동의했지 않나?!”
“비었어도.”
비었어도 그 ‘항아리’가 있는 곳을 찾아야 합니다. 엄헌영은 얼굴을 더욱 더 구겼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주춤하며 상반신을 뒤로 물렸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고집 같은 것은 서문경의 얼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주 당연한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한 얼굴, 그 얼굴에서는 한 점의 의구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묘한 표정에 신경이 쏠린 엄헌영 대신 서문경이 한 말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아낸 것은 황제였다.
“항아리가 아니라, 항아리가 ‘있는’ 곳?”
“네.”
정확히는 ‘있었던’ 곳이라고 해야 할까. 서문경이 하얗게 식은 검지 끝으로 자신의 턱을 쓸면서 말을 정정했다. 엄헌영이 놀라며 물었다, ‘그럼 항아리가 처음부터 취영당에 있었던 것이 아니란 말인가?’
“처음부터 항아리들이 취영당에 있었다면 필요한 사람은 석공이 아니라 목공이었겠지요.”
“그···.”
“또한, 취영당은 예전 그대로였었다고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즉 보수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서엽은 위험을 감수 하면서까지 석공들을 속여 ‘어딘가로’ 데려 갔습니다. 이상한 일 아닙니까. 용인의 ‘힘’마저 봉인할 수 있을만한 ‘봉인구’, 그것을 남 몰래 보관할 수 있을 정도의 은밀한 장소가 모두 갖춰져 있는데, 왜 서엽은 그런 짓을 했을까요.”
황제가 대답했다.
“필요해서였겠지.”
필요? 서문경은 머리를 모로 기웃했다.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나 틀렸다고 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래서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황제의 말에 수긍했다.
“봉인구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라면 술사나 도공을 데려 갔겠지요. 하지만 서엽이 데려간 것은 석공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생긴 것은 석재나···.”
엄헌영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사라진 석공들은 대부분 굴방(窟房)을 보수하는데 정평이 난 자들이었다 들었어.”
“굴방?”
“동굴이나, 석산(石山) 따위를 파내 방처럼 만든 곳 말이야.”
“아아.”
하고 짧은 신음을 흘린 서문경이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요. 수색해야 할 범위가 줄어들어서.’ 그 말을 성급하게 끊으며 엄헌영이 캐어물었다.
“헌데 도대체 왜 원래 항아리가 있었던 장소를 찾으려는 거지? 이미 항아리는 비었는데 장소 따위가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군.”
“멍청한.”
엄헌영이 도끼눈을 뜨고 황제 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엄헌영을 보고 있는 황제의 눈길 또한 그보다 고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황제가 말했다. 그 태도는 말을 한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퉤 뱉어낸다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지금 희 형님께서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그러니 수상이 천제사 직전에 가장 골똘히 생각했었을, 자신의 ‘힘’이 담긴 ‘항아리’가 있었던 장소를 찾아보자는 겁니다. 저로서는 폐하나 당신, 현주께서 수상이 돌아올 만한 장소를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지만 모두들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 때, 잠깐만, 하고 엄헌영이 경혜 현주의 서신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이건?”
“그건 일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노골적으로 얼굴을 구기는 엄헌영에게서 시선을 돌리면서 서문경이 덧붙였다.
“모든 일의 발단일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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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라···.”
예? 하고 서문경이 돌아보았다. 그렇게 물으며 돌아보자, 자신도 무심코 중얼거린 말이었던지 황제가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그에게 서문경이 재차 물었다. 귀신이라니요? 황제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별 것 아니다.”
“별 것 아닌 표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서문경이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황제의 볼을 쓰다듬었다. “정말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하고는.”
그렇게 말하는 서문경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표정이 그야말로 오묘해졌다. 희한하구나, 그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말입니까, 하고 묻듯 서문경이 머리만 모로 기웃했다. 황제가 설명했다. 마치 속으로는 얼음을 품고 밖으로는 불을 두른 것 같아. 속은 얼어붙어 있는데 몸은 그 마음을 배반하고 종종 온화한 손짓을 하곤 한다, 바로 봤군. 제 속을 들킨 것 같은 기분에 서문경은 조금 움츠려들었다.
어찌 그러냐 황제가 물을까봐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바로 전의 화제로 돌아갔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서문경이 부아라도 날까 마음에 걸려했었던 모양이었다.
“효강이 연 항아리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안 직후에 희 형님께서 하셨던 말이다.”
“귀신···, 이요?”
“아귀. 귀신. 그렇게 말씀하셨지.”
“아귀. 귀신.”
서문경이 황제가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하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무심결에 그가 제 생각을 흘렸다.
“도대체 무슨 비유인지.”
황제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효강이 열었다는 토기를 찾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허나 뒤늦게 그 자리를 찾아 갔을 때 그 자리에서는 토기는커녕 도기 파편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참을 혼자 생각하던 서문경이 불현듯이 말을 꺼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만.”
황제가 말해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힘이란 건 무형(無形) 아닙니까. 그런 것을 항아리 같은 것에 가두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 겁니까?”
“정확히는 항아리 따위를 매개로 하여 거기에 술법을 걸어 놓는 것이지.”
“그럼 ‘힘’ 외의, 형태가 없는 것···, 예를 들면 감정이나 목소리 따위도 가두는 것이 가능합니까?”
“해 본 적은 없으나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허나 어떤 자가 그런 무모한 짓을 할까. 위협이 되는 ‘힘’을 묶어두는데 이용한다면 모를까 목소리나 감정 같은 것을 담아 두기 위해 그 어려운 술법을 사용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 아니냐.”
“어려운 술법인가요?”
“그 또한 일종의 결계이니 그렇지.”
황제의 설명에 납득한 듯 서문경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서문경의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다고 판단한 황제가 다시 ‘토기’ 속에 든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귀. 아귀라.
“설마 ‘힘’을 좀먹는 술법이나 벌레 따위인가.”
“아니면 ‘수명’ 자체를 줄어들게 하는 어떤 것···. 혹은 미약, 마약 같은 것처럼 정신을 해치는 것이라든가.”
황제가 구룡침에 등을 깊숙이 묻으면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탄식이 흘러나왔다. 모르겠다. 참말로 모르겠구나.
“참으로···, 막막해.”
그렇게 중얼거리던 황제가, 자신을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서문경의 눈길을 느끼고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어찌 그리 보느냐.”
“···제가 그랬습니까?”
“그대.” 몸을 일으켜 무릎걸음으로 다가간 황제가 서문경의 이마를 짚었다. 손아래에서 서문경이 주춤하는 것이 느껴져서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 요 며칠 사이에 이상해진 듯 해.”
“이상하다뇨.”
“그래, 이렇게 억지로 웃는 표정 같은 것이.”
황제의 손이 서문경의 입꼬리 끝을 짚었다. 황제의 손가락이 닿은 자리가 잔 경련을 일으켰다.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를 모로 굴렸다. 달도 진 한밤중처럼 짙어진 황제의 눈이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서문경이 자신을 눈길을 피하자 황제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 그가 비구름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그리 우울해 하느냐. 어찌 그리 홀로 힘들어 해. 무슨 까닭으로 네 본디 모습으로 웃지도, 울지도, 찡그리지도 못하고 있느냐. 무엇이 너를 그리 만드는 것이냐.”
“······.”
“짐 때문이더냐?”
“아닙, 니다.”
“아니라 하더라도 짐의 탓이야.”
서문경이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내 탓이다. 아직 이 세계서 네가 의지할 만한 사람은 나 뿐 아니냐. 헌데 네가 사정을 털어 놓지도 못하고 홀로 고뇌하고 홀로 썩어 들어가는 것은 짐이 네게 그만큼의 의지가 되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안하구나. 황제가 말하면서 서문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다정한 손길을 받으면서 서문경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두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쿵, 쿵, 쿵. 귓전에 울리는 심장소리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때 서문경은 발작하듯 생각했다.
아니다.
“짐이 네게 모자란 사람이라는 것은 짐이 가장 잘 안다. 그러니 그대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 줄 터이니 부디 가감 없이 말해 다오.”
틀려, 그게 아니야.
황제가 구걸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지나치도록 상냥한 말을 건넬 때마다 답답한 가슴 속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돌덩이가 쌓였다. 더불어 분노인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 속이 부풀어 올랐다. 이러다가는 그리 머지않은 어느 순간에 가슴이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숨이 가빴다.
“아닙니다.”
결국 서문경이 성을 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경아,”
“그렇게, 말하지 말란 말입니다!”
소리를 지르면서도 서문경은 생각했다. 내가 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거지, 왜 화를 내고 있는 거지. 이상해. 그럴 일 따위 아무 것도 없었잖아. 저 사람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하지만, 생각이 자신의 몸과 다른 공간에 괴리되어 있는 것처럼 그 생각이 몸에까지 미치지를 않았다. 여전히 자신의 얼굴 근육은 보기 싫게 일그러지고 자신의 혀와 입은 가당치도 않는 억지를 지껄여대고 있었다. 눈에 황제의 놀란 듯한 얼굴이 비쳤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제발 그만 좀 해! 자신의 목소리, 그러나 자신의 입은 더더욱 성을 내고 있었다. 자신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제 몸을, 제 살을 만지지 마십시오! 싫어, 싫단 말입니다!”
그랬다가, 놀란 황제가 무심코 한 발 물러서는 것을 보고는 또 덜컥 놀라 그의 손을 붙잡고 그를 비난했다.
“고작 이 정도 말에 물러날 거면서···!”
아냐, 이게 아니야.
“왜, 왜 날!”
나,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눈앞이 아찔해졌다. 다시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자신은 몸의 균형을 잃고 맨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멍하니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벽지의 구름무늬가 튀어 나올 듯이 꿈틀거렸다.
“경아······.”
하고 부르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황제에게,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제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당신이 바라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건가요?”
“무어?”
“실망할 겁니까?”
황제의 발이 멈췄다. 서문경이 계속해서 입을 움직였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게 실망한다면, 제게 질린다면, 제가 싫어진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절, 돌려보내 주실 겁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나는 당신을 위해서 내 목숨을 걸었었어요.”
서문경이 황제의 말을 끊고 말했다. 멍하던 귀가 점점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들렸다. 아차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묻지 않으려 했었는데, 저질러 버렸다. 잘못 생각했다. 한계에 몰려 있는 것은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자신도였다. 서문경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사이로 혼잣말이나 다름이 없는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그 대가로 당신은 무엇을 줄 건가요.”
보답 따위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묻고 말았다.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
모든 감정이 사라진 검은 눈으로 황제가 서문경을 바라보다 천천히 대답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아뇨,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맞추셔야 합니다.”
황제가 내어 놓은 답을 서문경은 일단 부정했다. 그리고 말이 없는 황제를 향하여 서문경은 말했다.
“제가 돌아가고 싶다고 하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것은 요청도 애원도 아닌 자신이 황제에게 내어 놓은 ‘질문’ 그 자체였지만, 그것을 황제가 알아들었을지는 서문경도 알 수 없었다.
한참 후에, 황제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것이 네 진심이냐.”
“묻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대답뿐입니다.”
서문경은 완고하게 대답했지만 잠시 후, 그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만일, 아주 만일 그것이 진심이라면.”
황제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콱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직한 중얼거림이 그의 마른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의 것처럼 들리지 않는 무섭도록 낮고 괴로운 목소리였다.
“시간을.”
시간을 다오, 하고 황제가 간절히 청했다.
“잠시면, 된다.”
“······.”
“명후일. 그 때 꼭 대답을 해주겠다.”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
그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분명 하나인데, 마치 속에 두 사람이 든 듯 했다.
“가야해.”
하고 홀린 듯 중얼거렸다가 바로 다음 순간,
“아니지, 떠나야 해.”
하며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가, 또.
“아니지, 그것이 아니지.”
우뚝 멈춘 발이 부르르 떨렸다. 종일 내린 비로 맺힌 물웅덩이에 비친 얼굴은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지만 그 가운데에서 눈만큼은 형형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그는 그 눈에 맺힌 감정을 읽었다. ‘희열’.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읽는다고 표현한 데부터 뭔가가 어긋나 있었지만 그는 그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불쑥 내뱉었다.
“기쁜가?”
그 물음에 대답할 사람이 없는데도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하는. 분명 자신의, 목소리. 그는 또 ‘물었다’. 마치 자신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인 것처럼 자연스레.
“어째서?”
답이 들려왔다, 그는 그 대답을 입 밖으로 내어 반복했다.
“비로소 뜻이 이루어 질 수 있게 되어서.”
뜻. 뜻이 무엇이었더라. 그래, ‘목적한 것’. 목적. 목적···.
“내, 목적.”
그는 바로 떠오르는 이름을 내뱉었다.
“제안.”
자신의 ‘안에서’ 또 자신이 말했다. 제안.
그는 멈춰 있던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말했다. 그 뒤를 자신 안의 자신이 따라했다.
“제안.”
‘제안.’
“조금만, 기다려다오.”
‘기다려다오.’
“내 꼭 너를···.”
‘내 꼭 네 놈을.’
마치 홀리다시피 걷고 있던 탓에 그는 자신과 ‘자신’의 말이 어느 순간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는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구해, 주마.”
‘죽여주마.’
이제야, 이제야, 이제야! 그 안의 ‘자신’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의 귀에는 자신 안에서 들리는 기괴한 웃음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음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나는’ 웃고 있지 않다. 그러니 ‘이것은’ 내게서 들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착각한 것은 때마침 그와, 그 안의 ‘자신’이 동시에 한곳을 향하여 걷기 시작한 탓이었다.
부지런히 걸으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그 곳에.”
‘거기에.’
그곳에만 도착하면-.
그래,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관들이 간계를 연지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한 점 빛도 없이 가맣기만 하던 하늘 끝자락이 파란 빛을 띠기 시작할 무렵, 서엽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묵은 옷이 한 장씩 바닥에 떨어져 나가고, 지난 밤 한 점의 오물도 없이 깨끗하게 닦은 몸에 새 옷이 입혀졌다.
마치 대제(大祭)를 앞둔 이가 제사를 앞두고 예장(禮裝)하는 듯한 엄숙한 태도였다. 그러나 서엽이 몸에 걸친 것은 제관의 예장이 아니라, 나라에 대례(大禮)가 있을 때에나 착용하는 조복(朝服)이었다.
붉은 생초(生?)로 만든 초상과 초의 위에는 검은 폐슬(蔽膝)을 늘어뜨린 후 눈처럼 흰 중단(中單)을 덧입었다. 또한 그 뒤로는 검은 바탕에 구름과 사슴과 거북 따위를 수놓고 금은 고리를 단 후수(後綬)를 드리웠다. 허리에 찬 금대(金帶)에서 패옥이 달각거렸다. 종친들이나 그에 준하는 공신들이나 찰 수 있는 백패옥 대신 삼품 이상의 관원이면 조복에 찰 자격이 주어지는 번청옥(燔靑玉)이었다. 마지막으로 머리에 목잠(木簪)을 꽂은 검은 관을 쓴 서엽이 백포말(白布襪)을 신은 발 위에 흑피혜(黑皮鞋)를 신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얇은 장지문 바로 앞에서 우글거리고 있던 찬 공기와 덜 밝은 새벽빛 따위가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들이 성이 찰 때까지 방 안으로 들어찰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고서 서엽은 섬돌을 밟고 그 아래로 내려왔다. 사박. 검은 가죽신 아래에서 마른 모래가 밟혀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기침(起枕)하시었습니까.”
미리 그 아래에 대기하고 있던 주강이, 다가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서엽이 한 손을 내밀며 대꾸했다, ‘한 잠도 자지 못하였구나.’ 허나 그렇게 말하는 서엽의 얼굴은 피로는커녕 백 년의 근심을 모두 날려 보낸 사람처럼 말끔하기 그지없었다. 주강이 자신의 손에 상아홀(象牙笏)을 건네어 주자, 서엽이 문득 위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날이 좋구나. 그리 생각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서엽이 웃었다.
“폐하의 즉위식(卽位式)이 있기에 참으로 적합한 날이다.”
그 웃음은 평소의 사람 좋지만 어딘가 가식적인 구석이 있는 웃음과는 달리 더없이 흐뭇하고 순수했다.
미리 대기시켜 놓은 말을 손수 몰고 홀로 영로당을 빠져 나가는 서엽에게 주강이 조용히 물었다.
“그곳으로 가십니까.”
“오냐.”
“운현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들었습니다.”
“이제와 그 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굳이 엿듣지 않아도 뻔하구나.”
서엽이 가벼운 투로 주강을 안심시켰다.
“황자의 혈통을 걸고넘어질 심산이겠지. 허나 정작 천제사가 재개되면 그런 주장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터.”
“그 분께서는···.”
주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엽이 한 점 의혹도 없는 어조로 말했다.
“염려치 말거라. 그 분께서는 필히, 그곳으로 행차하실 것이다.”
그리고서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 약조하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