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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부터 내내 황제는 서문경과 한 몸인 것처럼 굴고 싶어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고 하니, 한 시라도 서문경과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는 말이었다. 천제사를 마치고 궐로 돌아온 이후 서문경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처소인 청의관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내내 천추전, 그 중에서도 황제의 침방인 태화방(太華房)에서 뿌리를 내린 것처럼 지내야 했다. 황제의 침전에서 며칠 밤을 지낸다는 것은 총애 받는 후궁은 물론이요, 정실인 황후라 해도 어불성설. 허나 그 전대미문의 일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증거란 것이 그래서 중요한 건지도 모르지.’ 황제는 그렇게 말했다. 눈치가 빠른 서문경은 곧바로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챘다. 서문경은 자신의 팔과 목 따위에서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비늘을 새삼스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잘 닦인 유리나 물 따위를 볼 때면 자신조차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 용안(龍眼)을 생각했다.
용인의 증거를 자유자재로 숨길 수 있는 황제나 서현과는 달리 용인으로서 미숙한 서문경은 ‘증후’를 숨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허나 그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종종 얼굴을 마주해야 할 때마다 궁인들이 보이는 예전과는 판이한 반응을 보면.
마치 그 태도와 눈빛은······.
“수상을···,”
하고 무심코 중얼거려 놓고 바로 다음 순간 아차해서 입을 다문 서문경의 목덜미에 이를 세우며 황제가 그 뒷말을 이었다.
“마치 희 형님을 대하듯 한단 말이냐.”
정답이었다.
비루한 불청객을 대하던 그 무례한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천추전 안의 모든 궁인들이 자신을 예전의 수상 대하듯이 대했다. 정식 궁관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나인들은 물론이고, 위로는 승직 효문조차도 자신의 앞에서 차마 머리를 들지 못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싶다는 심정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 전체에 절절히 새겨져 있었다.
그러한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던 서문경은 문득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 부인은.’하고 서문경이 말을 꺼내자마자 황제가 가벼운 투로 대꾸했다. 천추전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더구나. 그 말에 서문경이 그렇구나, 하고 머리를 조금 주억거렸다.
“조금 빛깔이 짙어진 것 같습니다.”
서문경이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며 말하자 황제가 어디, 하며 서문경의 팔을 살펴보았다.
“과연 그렇구나.”
“왜 색이 계속 짙어지는 겁니까?”
“그대가 계속 자라고 있기 때문이지.”
자란다, 는 표현에 서문경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 갓 난 새가 한시라도 바삐 자라야 할 터인데, 그래야 할 터인데. 지난 밤 계속해서 그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자신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던 황제가 생각난 탓이었다.
그 말을 할 때부터 불안하다 했더니, 역시나 지금도 꼬리뼈가 있는 즈음에 단단하고 뜨거운 것이 문질러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서문경은 덩달아 달아오르려는 숨을 가까스로 삼키면서 생각했다.
이미 성인인 자신을 두고 갓난이니, 갓 난 새니 하는 말도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다 자라기 전까지는 탐하지 않는다 제 입으로 말해 놓고 정작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게···. 불현듯이 떠오른 어젯밤의 일에 서문경은 귀가 탈 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긴, 아니, 도대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운 밤이었다. 아직도 온 몸,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자리까지 아직 타인의 손이 기어 다니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서문경의 눈이 샐쭉해졌다. 삽입을 하지 않는다고 그 농밀한 행위들이 그···, 것이 아닌 것은 아닌데, 저 빌어먹을 놈.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서문경의 몸이 달아올랐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황제가, 자신이 물었던 자리를 아예 핥고 빨고 깨물면서 말을 이었다.
“용인으로서 말이다. 갓 알에서 태어난 용은 어떤 종류의 용인지를 막론하고 비늘이 푸른빛을 띤다. 그런 것이 점점 자라면서 제 빛깔을 찾아가는 것이지. 그대는 짐에게서 태어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용인이니 비늘 빛깔도 짐과 같거나 비슷할 것이다. 그러니 점점 색이 짙어지는 것이야.”
“완전히 검게 되면 다 자란 것이 되나요.” 무슨 고양이도 아니고. 머리를 갸웃하면서 그렇게 말한 서문경이 아무 생각 없이 덧붙였다. “하지만 다행입니다, 전 검은 것이 좋으니까.”
“좋다고?”
“예, 원래부터요.”
그 말에 황제로부터 들리는 대꾸는 한 마디도 없었다.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그가 뒤에서부터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서문경은 말했다.
“잘못했다, 옳다가 아니라 좋다, 싫다.”
사실 금색과 청색도 싫은 건 아니지만, 서문경은 짧게 덧붙인 후에 손을 뒤로 해 황제의 머리가 있다고 생각한 곳을 쓰다듬었다.
“그 정도의 무게인 겁니다, 색 따위야. 손톱이 넓게 태어난 사람과 작게 태어난 사람, 손가락이 긴 사람과 짧고 통통한 사람, 귓불이 큰 사람과 좁은 사람, 그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요, 금룡이냐 흑룡이냐 하는 것도.”
그러니 자신을 혐오하는 것도, 다른 용들을 부러워하는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문경은 그만 두기로 했다. 너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도 어쩌면 좋지 않을 것이다, 당장 다음 순간 무너져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인 지금의 황제에게는.
그러나 그 다음 순간, 황제가 무심코 흘린 듯한 말을 듣고 서문경은 자신이 잘못 짚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원래부터···.”
“···!” 서문경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어, 떻습니까?”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스스로 생각해도 몹시 어색하게 들려서 서문경은 잔뜩 움츠려들었다. 이래서야 자신이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는 사실을 황제가 깨닫지 못했다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황제는 별다른 말없이 서문경의 말에 어울려 주었다, 서문경의 태도가 어색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왜 그러는 것이냐 굳이 추궁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형님의 행방을 추측하는 것 말이더냐?”
“예.”
어찌 되었든 다행이다-, 라고 생각한 순간 황제의 얼굴이 자신의 목과 어깨 사이의 오목한 부분에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선에 콧등을 묻은 황제가 중얼거렸다.
“실은, 형님의 기운을 쫓아보았다. 허나 어찌 된 일인지 형님의 ‘용기’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수상의 기운을 쫓았다고···!”
화들짝 놀란 서문경이 황제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힘을 사용했다는 말입니까?”
서문경이 목소리를 높이며 황제의 얼굴 반쪽을 가린 천을 우악스럽게 떼어냈다. 서문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서운 속도로 아물고 있는 자신의 상처와는 달리, 황제의 상처는 처음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신의 상처와 황제의 상처는 원래 자신이 입은 상처이니 완벽하게 같은 것,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다른 상처처럼 보였다.
서문경이 화를 냈다.
“힘을 쓰면 회복이 더뎌진다는 사실은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초조해서.”
황제의 쓸쓸한 목소리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서문경도 일순 할 말을 잃었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대는 짐이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해 주었으나 짐은, 자신이 없다. 냉정하게 생각할 힘을 상실하고 본능만이 남은 형님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짐작해 보라···, 누군가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짐은, ‘나’는. 모르겠구나. 자신이 없어. 내가 형님의 무엇을 알고 있겠느냐. 기껏해야 고작 몇 해, 그 또한 십 수 년 전의 일, 하루하루가 다른 유년기의 일이다. 강산이 몇 번을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 흘렀으니 사람은 어떻겠느냐. 그런 중에도 만일, 짐이 형님의 생각 중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원망···, 정도 밖에 없을 것이다.”
황제가 손을 뻗어 서문경의 손목을 잡았다, ‘이리 와 주련, 경아. 이상하게 몸이 으슬으슬하구나.’
“네 말대로 곰곰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런 것도 짐작할 수가 없더구나. 그나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면···.” 황제가 픽 웃었다. “짐을 원망하여, 목숨을 거두러 온다거나.”
얼굴을 구긴 서문경이 황제의 손을 뿌리치며 이를 북 갈았다. 그러나 그가 화를 내며 무어라 외치려던 그 때, 머얼리 있는 장지문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었다. 그것을 본 황제와 서문경 모두 말을 멈추자 그 안의 동태를 잔뜩 움츠려들어 살피고 있던 나인이 그제야 고하였다.
“태의감이 들었나이다.”
태사의감이 천추전에 들어 황제와 서문경의 용태를 살피는 것은 일일에 세 번. 낮것상을 받았을 때 두 번째로 태의감이 다녀갔으니 벌써 하루 해가 저물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어찌 하올까요?, 하고 물어오는 목소리에 황제 대신 서문경이 대답했다.
“들라 하십시오.”
그리고 동시에, 서문경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황제가 미간을 구기면서 물었다.
“어디를 가누.”
“태사의감이 들었으니, 여기 계속 있다가는 그 상처를 또 봐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랬다간 정말로 화가 날 것 같으니 저는 잠시 나갔다 오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안 된다.”
“왜 안 됩니까?” 서문경이 날카롭게 물으며 덧붙였다. “예전의 수객도 아니고, 보란 듯이 증후가 나타나 있는 용인을 누가 해할까요? 더군다나, 지금의 저라면 누구도 이길 수 없다 말씀하신 것은 폐하셨습니다.”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서문경이 한 말의 내용보다는 어조 때문이었다.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것이 분명한 태도를 보니 지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이 뻔했다.
결국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반 시진. 그 후까지 들어오지 않는다면 내 친히 찾아 나설 것이다. 그 말에 서문경이 머리를 끄덕이고 침방을 나갔다.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스르륵 문이 열리고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나인들과 내관, 태사의감까지 서문경의 앞에 허리를 조아렸다. 그들을 지나쳐 긴 보랑으로 나가는 길에 서문경이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닫혀 있는 장지문에 익숙한 그림이 보였다. 발톱을 세운 검은 구조룡. 언젠가 서현의 머리에 발톱을 세운 것처럼 보였던 그 구조룡이 지금은 침방 안에 들어 있는 사람에게 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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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보기 한 번 힘들군.”
막 천추전을 빠져나와 그 아래 인적이 드문 구석으로 몸을 돌렸을 때 들려온 말이었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리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담을 거의 가리듯 자란 목련나무였다. 해가 지기 시작해 나무보다도 더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서문경은 말없이 눈살만 찌푸렸다. 생각했던 그대로의 사람이었다.
“웬일입니까.”
“오랜 만에 보는 동향 사람에게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면 쓰겠나.”
“동향이라는 이유로 자기를 죽이려고 들었던 사람을 반갑게 맞으면 그게 어디 미친놈이지 정신 제대로 붙어 있는 사람입니까.”
“죽을 고비를 넘기면 사람이 변한다던데 자네는 여전하군.”
하고 웃으며 다가오는 조원에게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가 다가온 만큼만 물러나면서 서문경이 대꾸했다.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기고 나니 변하려다가도 말더군요. 그 말에 빙그레 웃는 조원에게, 서문경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무슨 용건입니까?”
“용건이라니? 섭섭한 말을 하는군.”
“용건도 없이 찾아올 만한 사이였습니까? 아니면, 이전에 못 다한 일이라도 해보자는 겁니까?”
날을 세우는 서문경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선 조원이, 안심하다는 듯이 두 손을 슬쩍 들어 보였다.
“그럴 리가. 당시의 일은 내 본의는 아니었던 데다 또.”
서문경은 조원의 차고 깊은 시선이 자신의 온 몸을 샅샅이 뜯어보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조원이 입가와 눈매에 드리운 웃음을 더 짙게 하면서 말을 이었다.
“지고하신 용님을 내 어찌 해하려 들겠나?”
“······.”
“실은 그래도 절명할 줄만 알았는데. 용케···, 살아났군.”
서문경은 이마를 구겼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혼잣말처럼 들리는 마지막 중얼거림이, 어딘가 묘했기 때문이었다. 악의나 조롱 따위가 서려 있나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그 중얼거림에서 묻어나는 것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그래서 서문경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자네도, 폐하께서도.”
가만히 덧붙이는 말에서는 그 뜻밖의 감정이 더 진하게 드러나 있었다. 정작 말하는 자신은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건지, 조원이 서문경에게로 시선을 맞추며 빙긋 웃었다. 어찌 그리 보시나? 하고 의뭉스럽게 묻는 그에게 서문경은 당장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착각이겠지.
서문경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조원이 넓은 소맷자락 사이로 반대편 손을 집어넣으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와 내 사이가 어떤지는 서로 간에 이견이 있는 모양이지만, 일단 이번은 자네 말이 옳네. 자, 받게.”
“······.”
서문경은 찌푸린 눈으로 조원이 내민 물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두꺼운 비단에 싸여 있어 무슨 물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략의 윤곽을 보니 두꺼운 책이나 죽간, 두루마리 따위로 보였다. 무슨 생각이지. 서문경은 경계하는 빛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생각했다.
설마 폭약 따위라도 들어 있을까봐, 조원이 그런 서문경을 보고 웃으며 말한 다음 자신의 손으로 매듭을 풀었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서문경의 짐작대로 종이를 둘둘 만 두루마리 몇 개였다.
“···뭡니까, 그건.”
“행방이 묘연해진 상국을 찾는다지.”
“그렇, 습니다만.”
“나도 들었네, 제장에서 있었던 일은.”
들었다···? 서문경의 표정이 묘해지며, 머리가 조금 모로 기울여졌다. 그 행동은 크게 눈여겨보지 않고 조원이 계속해서 말했다.
“상국은 근래 무언가를 계속 수색 중이었었어. 부친 되시는 헌의공과 함께 수상부 뒤편의 버려진 신단에 다녀간 뒤로부터 죽.”
“신단이요?”
서문경의 물음에 조원이 신단에 대한 짤막한 설명을 곁들여 주었다, 마지막으로 다른 신단과 달리 버려져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황주(惶主)라는 향명으로 불리는 수상부 후원의 신단에 대한 설명까지.
“일각에서 황주는 폐군의 위패를 모시는 신단이라 알려져 있으나 제국의 역사상 폐주는 없네. 허나 황주에는 분명히 몇 개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하네. 그리고 천견은 상국의 명을 받아 그 위패에 관한 조사를 했었지.”
천견이라는 이름에 자신도 모르게 혐오감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말을 잇다 말고 조원이 난감한 듯 웃는 것을 보면.
대략의 말을 마친 조원이 서문경에게 다시 비단에 싼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그 조사 내용이라더군.”
“이걸 왜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상국을 찾는다지 않았나?”
“그것은 그렇지만,”
“사람을 찾으려면 그 사람이 근간(近間)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하고 조원이 두루마리를 싼 비단을 조금 흔들며 익살맞게 웃었다. “결국 조사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말하자면 폐지나 다름이 없지. 조원이 더 이상 서문경에게 받으라 권하지 않고 두루마리를 바닥에 던졌다. 탁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진 두루마리를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쳐다보았다.
쓰레기라, 서문경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절 조롱하려고 온 겁니까.”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였나. 이거 큰일이군. 요즈음 그다지 할 일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
“그렇게 노려보지 말게나. 그저 나는 궁금해서 말일세.”
궁금하다고? 뭐가? 서문경이 생각하는 순간, 조원이 서문경을 향하여 상체를 조금 숙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물린 서문경의 얼굴을, 정확히는 서문경의 바늘처럼 가는 동공을 똑바로 보며 조원이 말을 이었다.
“신(神)의 모습이 말이야.”
“용은 신이 아닙니다.”
“내게는 신 이상이라네.”
“···저는 용이 아닙니다, 용인이지요.”
이상할 정도로 집요한 눈길에 서문경이 조원의 눈길을 피하며 중얼거리듯 대꾸하자, 조원이 숙였던 허리를 펴면서 대답했다. 그래, 그렇지.
“허나 신기하군. 자네가 용인이 되다니.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인가?”
“모릅니다.” 날카롭게 내뱉은 다음 서문경이 경고하듯 덧붙였다. “더더군다나 신이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신은···.”
서문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생각 또한 인간 이상의 것. 그래서 신의 호의와 인간의 호의, 신의 기쁨과 인간의 기쁨, 신의 징벌과 인간의 징벌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만일 신은 호의를 베푼 것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버겁고 잔인하게 느껴질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그것은 자네 이야긴가.”
그 말에 서문경이 빤히 조원을 바라보다 대꾸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과연 어떨까요.’ 서문경은 말을 끝맺었다.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은혜라면 차라리 입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조원이 완고하게 주장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것은 신뿐이야.”
“용님, 말입니까.”
조원이 조금 전, 자신에게 있어서 용이란 신 이상이라 했었던 말을 떠올리고 서문경이 물었다. 과연 어떨까, 그러자 조원이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서문경이 했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서문경은 침묵했다. 그 침묵이 무슨 의미인지는 깊이 생이 생각하려 하지 않고 조원이 심술궂게 내뱉었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로는 자네 말이 옳을 지도 모르지, 신의 생각이란 인간의 감각 그 위에 있어 인간으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 것이라는 그 말.”
“무슨 뜻으로 하는 말입니까?”
조원이,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과시하듯 두어 발 물러나 보였다.
“폐하를 믿지 말게. 그는 신이야.”
“용은 신이 아닙니다. 그는 신이 아닙니다.”
“내가 왜 그를 배반했는지 알고 있나?”
생각지도 못한 화제에, 서문경은 입을 다물었다. 꾹 입을 다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서문경을 조원은 여유로운 눈으로 응시했다. 마치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서문경을 보면서 조원이 천천히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
서문경은 조원과 처음 마주쳤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의 ‘힘’을 끄집어내기 위하여 태학궁으로 갔던 그 때, 발침 의식을 치르기 전 그와 나누었던 말들. 분명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 그가 대답했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
-방법은 없다, 인간에게는.
-이 세계에 진짜 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설마.
“알고···.” 서문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눈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시선이 곧 조원을 향했다. “알고, 있었습니까?”
“폐하께서 ‘용’이란 사실을?”
조원은 곧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서문경의 눈이 커졌다.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렇지 않을까 짐작만 했을 뿐이지만. 허나 나는 그 분께 무작정 매달렸다, 와룡이시라면 부디 나를 원래의 세계로 되돌려 달라고. 그렇지만 그 분은 들어주지 않으셨다.”
바라보자, 멍한 서문경의 눈이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총기를 잃은 눈동자가 어쩐지 안쓰러웠다. 하지만 조원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 까닭에 나는 그 분에게서 돌아섰다. 새 ‘용’을 찾아서.”
“···그럼 절,”
“그대를 이용하여 그 분을 자극한 것은, 그래.”
조원이 씁쓸하게 인정했다.
“헌의공의 지시도 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미련이 있었지. 어찌될지도 알 수 없는 새 ‘용’보다는 더 용일 가능성이 큰 폐하에게. 그래서 자네를 이용했었다, 어쩌면 자네에게 정이 들면 자네를 위하여 그 분께서 문을 열어주시지 않을까···.”
허나, 그렇지는 않더군. 그렇게 말하는 조원의 목소리가 귀 안으로 쑤시듯 파고들었다. 서문경은 고개를 저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돌아갈 수 있었다고.’
“돌아갈 수···, 있었다고?”
“······.”
조원이 자신을 관찰하듯 보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서문경은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말을 좀처럼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아팠다. 머릿속에 떠오른 말들이 떠오른 즉시 수위를 넘쳐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날 되돌려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고? 나를, 돌려보내 주실 수 있었다고? 폐하께선, 다 알고 계셨다고?”
그러면서도.
“모른 척···.”
서문경은 콱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네.”
“돌아가십시오.”
말을 건네는 조원을 서문경이 매정하게 쳐냈다. 이를 악문 채 바닥을 노려보고 있는 서문경을 조원이 위로하려 했다.
“신은 인간과 다르다고 말한 것은 자네가 아닌가.”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아직 늦은 것이 아니야. 아직 방법이···,”
“제발!”
서문경의 언성이 높아졌다. 마치 비명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것에 놀란 조원이 눈을 부릅뜨고 굳어 있는데 서문경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잠겨 있었다.
“그만하고 제발 돌아가십시오, 지금은, 지금은···,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조원이 입을 달싹거리는 것을 본 서문경이 두 귀를 틀어막고 콱 눈을 감아버렸다. 유아적인 표현이었지만 그 때문에 서문경의 심정이 더 강하게 조원의 마음에 와 닿았다.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다, 아무 것도 듣지 않겠다. 결국 조원은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서문경에게서 물러났다. 지금의 그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말만큼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 방법이 있네.”
“······.”
“헌의공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 하셨어. 나는 돌아갈 것이네, 그러니 그 때. 자네도 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말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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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흠칫 놀랐다. 인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무심코 돌아본 자리에 어느새 서문경이 서 있었던 탓이었다. 왔느냐, 하고 새로 약을 바른 자리를 쓸며 물으려다가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서문경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자 원래 하려던 말 대신에 저절로 다른 말이 튀어나갔다.
“안색이 나쁘다. 몸이 안 좋으냐?”
대꾸도 않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는 서문경에게 황제가 다가갔다. 바람이 차더냐, 그렇게 물으며 서문경의 이마에 손을 짚으려 했다. 그러나 손바닥이 이마에 닿으려는 순간, 서문경이 발작하듯 몸을 움츠리며 황제의 손을 피했다. 황제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더 놀란 것은 서문경 쪽이었다.
“아.”
화들짝 놀란 서문경이 입을 벌린 채로 우물거리다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시선이 이리로 저리로 튀었다. 그러다 그런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그가 억지로 눈을 황제가 있는 곳으로 돌리고는 말했다.
“저, 아직 날이 추워서.”
역시 아직 이런 차림새로 밖을 돌아다니는 것은 무리였나 봅니다. 서문경이 말하면서 넓은 옷깃을 억지로 목덜미까지 끌어올렸다. 단정했던 차림새가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올라가지 않는 옷깃을 계속해서 끌어당기고 있는 서문경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황제는 놓치지 않았다. 황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열이 있는 것 같으냐.”
하고 묻는 말에, 서문경이 서둘러 대답했다. 예, 그래서 조금 쉬고 싶습니다. 황제가 머리를 주억거리며 서문경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갈 심산이었던지 서문경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는 곧 별다른 말없이 두터운 이불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곧 서문경의 머리꼭대기까지 이불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서문경이 누운 근처에 황제가 천천히 다가가 앉았다. 그것을 느낀 것인지 둔덕이 약간 흔들렸다. 황제는 서문경의 몸 위로 한 손을 얹었다, 그 아래로 약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버릇대로 찬바람을 맞아 고뿔이라도 걸린 것이냐 물었었지만 본디 용인은 고뿔 따위의 병해는 입지 않는다, 반신(半神)이나 다름이 없는 용과 가장 가까운 생물인 탓이다. 허나 서문경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말에 그런 것 같다 변명하고는 자신으로부터 숨어 버렸다. 한 장 천과 불과 한 뺨도 되지 못하는 두께의 솜으로 만들어진 초라한 벽에 불과한 이불 속으로.
“누군가를 만났더냐?”
“아닙니다.”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지만 지나치도록 빠른 대답에서 황제는 서문경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려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헌데 어찌 이러는 것이냐?”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찬바람을 맞아서 몸이 상한 모양이라고요.”
“······.”
그 변명에 황제가 입을 닫자, 잠시 후 서문경이 아주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조금만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서문경의 등 위에 손을 올린 채로 황제가 조용히 대꾸했다.
“그랬으면 좋겠구나···.”
허나 그 말 대로는 되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
그 날 밤, 서문경은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이상할 만치 어둡고 답답함마저 느껴지는 공간 때문에 서문경은 겨우 자신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채 깜빡 잠에 들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사실은 잠에 들었다기보다는 혼절했었다는 말이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고뇌 끝에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도록 정신을 잃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었으니. 하지만 소원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나도 상황은 그대로였다.
“······.”
어둠 속에서 한껏 몸을 웅크리며 서문경은 이불을 양 쪽에서 제 가슴께로 끌어 모았다. 이불 안에 있는데도 이상하게 온 몸에 오한이 들었다. 동시에 양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잠들기 직전 겪었던 상황이 그대로 이어졌다.
-어쩌면 자네에게 정이 들면 자네를 위하여 그 분께서 문을 열어주시지 않을까···.
조원이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헌의공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 하셨어. 나는 돌아갈 것이네.
서문경은 이를 콱 악물었다. 믿을 수, 없었다. 조원 그 자의 말은 믿을 수도, 믿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 이를 악물던 힘이 조금 약해졌다. 그래, 서문경이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 자의 말을 믿을 필요는 없다. 나를 죽이려고 했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말을, 어째서 믿는단 말인가? 바보짓이다.
하지만.
서문경의 턱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조원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을지언정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서문경은 자신의 신경이 지척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으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보잘 것 없는 한 장 천 밖의 세상에 바로 황제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불을 열어젖히고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로,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겁니까?’
‘저를 돌려보낼 수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 하신 겁니까?’
서문경은 긴장된 입가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황제에게 그렇게 물을 것만 같아서였다.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의 황제는 화기(火氣)와 지척에 있는 폭약 같은 상태였다.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그는 폭발할 수 있었다, 무너질 수 있었다. 그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아니, 아니다. 사실은, 그것보다는···!
서문경은 헐떡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흐느낌처럼도 들리는 소리에 저절로 몸이 떨렸다. 자신이 낸 소리였다. 그렇게 이를 악물었건만, 꽉 문 이사이를 비집고 자꾸만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를 듣자 자괴감이 밀려들어오면서 정말로 울고 싶어졌다.
그를 위해서라고? 아니. 그렇게 속이려고 해봐야 소용없었다. 자신의 생각이다. 세뇌라도 하지 않고서야, 나 자신을 무슨 수로 속인단 말인가? 그를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나는 무서운 거다.
내가 따지고 들었을 때, 그 사람이 이렇게 반문하면 어떻게 하지.
‘그러는 그대는, 짐이 생각했던 그대로의 사람이 맞는가?’
‘그 때에는 그대가 짐이 원하던 이라고 여겼었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짐은 속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대가 필요치 않구나.’
···라는 말을 듣는다면.
서문경은 마치 황제에게 실제로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두 귀를 틀어막았다.
그 사람이 미워. 그 사람이 원망스러워. 이전에는 돌아갈 수 있었는데. 돌아가서 실언이었다고, 미안했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이제는 안 돼, 못 해. 어떻게 하지. 따져 물어볼까. 안 돼. 못하겠어. 하지만 이 의혹을, 이 의심을, 이 원망을 안고 어떻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에서 자신이 비명을 내질러댔다. 그 비명이 자신의 멱살을 뒤흔들고 짓밟으며 자신을 무시무시한 폭풍 속으로 밀어 넣는 듯 했다.
“못해···.”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불현듯이 이럴 때가 아니라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한 시가 촉박한 위급한 상황. 안다, 그러니까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데.
···하지만 아직까지는 황제를 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그 때였다.
“수객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퍼뜩 서문경의 정신을 깨웠다. 아, 하고 무심결에 서문경이 신음을 내뱉는 순간, 황제가 그 목소리에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심한 밤중에 무슨 실례냐.”
“사람들 눈이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 나라면 모를까 아녀자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서 좋을 일이 무어가 있어.”
그 대꾸에 황제가 잠시 침묵했다. 조금 뒤, 황제가 미심쩍은 투로 물었다.
“···아녀자라니?”
“경혜가 너와 수객을 보고자 한다.”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황제에게 어쩌겠느냐?, 하고 엄헌영이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
서문경은 눈앞의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상황을 의식한 듯 그리 화려하지 않은 차림새였지만 몸에 두르고 있는 아래위 옷자락과 단정히 틀어 올린 머리에 단 수수한 장신구와 움직일 때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버선코까지, 어디 하나 고급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손끝을 살짝 겹쳐 그것을 이마에 대는 움직임에 자연스러운 품위가 흘러 나왔다.
마치 느릿한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하게 움직이면서 여인이 절을 했다. 두 무릎을 바닥에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며 올리는 극상(極上)의 예. 허나 이 자리에 그 예를 올릴만한 지위의 사람은 없었다, 엄헌영의 전언을 듣고 망설이던 황제가 결국 자리를 뜬 탓이었다.
곱게 절을 올린 여인이 말했다.
“소인, 태자 소현의 삼녀 경혜가 귀인 용부인(龍婦人)을 뵙사옵니다. 만시에 찾아뵙고자 하는 무례를 탓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배알을 허해 주신 이 은혜, 소녀 깊이깊이 간직할 것이옵니다.”
그제야 서문경은 경혜 현주가 황제가 아닌, 자신을 향해 절을 올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하게 자신을 공대하며 용부인이라 칭하는 현주의 행동에 서문경은 당혹감을 느꼈다. 서문경이 어찌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일그러뜨리고 있자, 현주보다 한 발 정도 뒤편에 앉아 있던 엄헌영이 툭 내뱉었다.
“시커먼 사내놈에게 용부인은 무슨 용부인이야.”
“강아, 불측한 언사를 삼가거라.”
경혜 현주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엄헌영을 꾸짖었다.
“비록 정식으로 가례를 올리지는 않으셨으나 가변례까지 치르신 용인이시다. 시국이 좋지 못하여 용인께서 신우전(神佑殿: 황후의 처소)으로 드시지 못하시고 천추전에 머무르고 계신 것만 해도 천지가 통탄할 일이거늘 한낱 권귀에 불과한 자네가 허투루 귀인을 대하려 들다니.”
서문경이 현주의 말을 가로막았다, ‘됐습니다.’ 언뜻 들으면 건방을 떠는 엄헌영을 나무라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서문경이 엄헌영의 행동에 화를 내기 힘들도록 자신이 선수를 친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잖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대단한 대우를 받을 만큼의 처지도 아니고, 또 편하게 대해 주시는 쪽이 저도 편합니다.”
“허나, 마마···.”
서문경이 손을 저어 경혜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 손짓에 경혜가 입을 다물자 서문경이 못을 박듯 말했다.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것을 듣고 싶습니다.”
그 말에, 경혜 현주가 입을 다물고 잠시 방 안을 돌아보았다. 현주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서문경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다른 곳에 가 계십니다.”
“···그렇사옵니까.”
씁쓸하게 대꾸한 경혜 현주가, 시선을 거두어들이면서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역시 아직까지는 소인의 면면을 보는 것이 꺼려 지시겠지요···. 그 말을 서문경은 들었지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무어라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던 엄헌영도, 서문경의 시선을 받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경혜 현주가 말했다.
“소인이 어서 말을 끝내고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외람된 참견일지도 모르나, 소인 여기에 있는 효강에게 대략의 사정을 들었사옵니다.”
“불편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말씀을 전해 주십사 한 것이 저니까요.”
“이미 알고 계실 것이라 사료되옵니다만, 소인은 예전에···.”
다음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현주의 뒷말을 서문경이 담담하게 이었다.
“수상과는 서로 마음이 통했었던 사이시라고요.”
“망측한 일이라 생각하실 지도 모르나, 그랬사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경혜 현주가 말을 멈췄다. 방금 전처럼 도대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가 서지 않고, 또 불쑥 서글픈 마음이 치솟아 올라 목이 메어서는 아니었다. 경혜 현주가 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서문경이 앉은 상석(上席)과 자신이 앉은 자리 중간쯤에 검은 보에 싼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조금 전 서문경이 꺼내 놓은 것이었다. 엄헌영이 중얼거렸다.
“이건?”
“최근 수상은 신단 황주에 모셔져 있던 위패의 주인에 대해 조사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경혜 현주의 눈이 커졌다, ‘황주, 라고요?’ 엄헌영 또한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곳에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는 말이시옵니까?”
“하지만 예에는 폐주가 없고, 역대 모든 황제들의 위패는 다른 신단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셔져 있는데 왜?”
의구심을 드러내는 그들에게 서문경은 눈짓을 했다, ‘풀어 보십시오.’ 경혜 현주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비단 매듭을 풀어냈다. 그 안에서 나온 두루마리를 현주와 엄헌영이 나누어 읽었다. 경혜 현주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의아함이 서리고 엄헌영의 눈썹이 때때로 꿈틀거렸다.
잠시 후, 모든 두루마리를 읽은 엄헌영이 마지막으로 읽은 두루마리를 서문경에게 던지면서 소리쳤다.
“이게 뭐야?!”
“강아, 이 무슨 무례한!”
“아니, 그렇잖나?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이란 말이냐? 방치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명색이 신단이란 곳에, 왜 한낱 황족 나부랭이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아니, 애초에 이것이 정말 황주에 모셔져 있는 위패 주인들인지도 의심스럽지만, 무엇보다도 왜 지금 같은 상황에 이 따위···!”
참을성이 한계에 달한 듯한 엄헌영의 머리에 서문경이 두루마리를 집어 던졌다. 날아오는 두루마리를 반사적으로 피한 엄헌영이 깜짝 놀란 얼굴로 서문경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를 담담한 눈길로 마주보며 서문경이 물었다, ‘이제 머리가 좀 식었습니까?’
“그렇게 쳐다볼 필요 없습니다. 애초에 먼저 물건을 던진 건 당신 쪽이니까 절 원망할 자격도 없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지금 같은 상황에 이 따위 것을 들이 밀었을 것 같습니까?”
어느 순간부터 서문경이 자신이 흥분해서 했던 말을 그대로 끌어다 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엄헌영이 속이 뜨끔했는지 시선을 모로 피했다. 서문경이 그 반응을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달려 있는 머리가 장식이 아니라 진짜 머리라면 생각부터 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말씀은, 이 일이···, 이번 일과 어떻게든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경혜 현주 쪽으로 서문경은 시선을 옮겼다. 역시나 저 종마 같은 인간보다는 현주 쪽이 말하기가 쉬울 듯 했다.
“수상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제좌를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속내까지는 알 수가 없지만 표면적인 목적은, 그렇지요. 생각해보면 그런 사람이 목적을 코앞에 두고 다른 일에 정신을 팔고 있었을 리가 없지요. 그러니 이 일은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현주가 다시 두루마리를 펴들면서 말했다.
“강이의 말대로 희한한 일입니다. 신단에 모시는 위패는 어디까지나 역대 황제들에 국한됩니다. 태황태후나 황태후, 정후나 미처 황위에 오르지 못하고 절명한 태자들, 황제를 생산한 후궁들의 위패라도 신단에는 오르지 못합니다. 허나 이 두루마리에 올라 있는 이름은 그마저도 되지 못한 친왕(親王)과 군왕(郡王), 대장공주(大長公主)와 장공주(長公主), 심지어는 황족보(皇族譜)에는 이름이 오르지 않는 왕부(王府) 왕세자(王世子)와 군왕부(郡王府) 군왕세자(郡王世子)까지···.”
“······.”
“왜 그러시옵니까?”
잠시만요, 하고 서문경이 두루마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경혜 현주가 말을 멈추고 기다리는 사이 서문경은 자신이 찾던 것을 찾았는지 두루마리 더미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다른 두루마리들과 달리 겉면 테두리에 붉은 박이 들어간 두루마리였다.
“왕부 왕세자나 군왕부 군왕세자는 황족보에 이름이 오르지 않습니까?”
“예, 마마. 그러하옵니다. 왕부 왕세자나 군왕부 군왕세자의 경우 이전에는 해당 왕부 족보에만 이름이 올라 있다 왕과 군왕에 등극하고 나서야 비로소 황족보에 이름이 오르게 되옵니다.”
“그럼 그 전에 죽을 경우에는?”
“황족보에 이름이 오르지 못하옵니다.”
헌데 그것은 어찌 하문하시는지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현주에게 서문경은 자신이 찾은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현주가 그것을 받아 들자, 서문경이 또 다른 두루마리를 찾아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두루마리도 조금 전 현주에게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겉면에 붉은 박이 들어가 있었다.
“이 두루마리에 이름이 있는 사람 중 왕부 왕세자와 군왕부 왕세자는 단 두 사람뿐입니다.”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고 말한 현주가 그 이름을 다시금 확인했다. “경왕부 왕세자 문위 진국과 흥평군왕부 군왕세자 문위 효. 그 두 사람을 제하고는···.”
거기까지 말한 현주가 흠칫했다. 현주의 손에서 엄헌영이 두루마리를 빼앗아갔다. 뭐야, 엄헌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내뱉었다.
“급서, 사고사, 급서, 사고사, 급서, 사고사···. 제 명대로 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잖아?”
“문위 진국과 문위 효를 제하면 말입니다.”
“두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는데.”
“일부러 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의 확신에 가까운 어조에 엄헌영이 이유를 물었다. 서문경이 두루마리를 대충 말아 바닥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수상의 명을 받아 천견 최유가 했던 조사니까요.”
“그 놈이···!”
부득, 엄헌영이 이를 갈았다. 단번에 노색을 띤 그의 얼굴을 힐끗 곁눈질로 보고 서문경이 충고했다, ‘중요한 자료일지도 모르니 절대 구기시면 안 됩니다.’ 서문경의 그 말이 의외였던지 엄헌영이 화를 내는 것도 일단 다음으로 접어놓고 의문을 표했다.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예. 그렇지 않다면 최유가 속일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게 대답한 서문경이 파리한 낯빛의 현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왕부와 군왕부의 기록은 황족보의 기록과 어떻게 다른지 아십니까?”
“아무러하여도···.”
하고 운을 떼던 현주가 갑자기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탁, 제 무릎을 치며 어조를 바꿨다.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사옵니다. 왕부와 군왕부는 황실 가족에 비하자면 규모가 작은 편이기 때문에 그 구성원에 대한 기록도 비교적 자세한 편이옵니다. 또한 왕부의 주인인 친왕과 군왕이 승계를 함과 동시에 황족보에 올라가는 까닭에 왕부 실록의 가장 윗사람은 왕의 정실 되는 이와 그 후계가 되니, 그에 대한 기록도 일대기(一代記)에 버금가도록 상세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어떤 방식으로 숨을 거두었는지에 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겠군요.”
그렇사옵니다, 하고 말한 경혜 현주가 눈치 빠르게 물었다, ‘경왕부와 흥평군왕부 실록을 조사해 보도록 하올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 찾아뵙도록 하겠나이다.”
서문경은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대화가 끝났다. 그러나 곧 자리를 뜰 것처럼 굴던 경혜 현주는 꿇어앉은 다리를 꼼지락거리기만 할 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무릎을 바싹 끌어 당겨 붙였다 조금 떼었다를 반복하며 자신을 힐끗힐끗 훔쳐보는 현주의 눈초리를 느낀 서문경이 눈을 조금 치켜떠 엄헌영 쪽을 보았다. 하지만 의아한 것은 엄헌영 또한 마찬가지인 듯 했다. 애초에 벌써 자리를 털고 일어 난지 오래인 엄헌영이 경혜 현주의 뒤를 지키듯이 서 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혜야?”
그 부름을 닦달로 받아들인 듯, 경혜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경혜 현주는 곧바로 엄헌영이 아닌 서문경에게로 다가왔다. 마른 배 위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잔뜩 긴장된 입매를 그녀가 강제로 벌려서 말했다.
“마마.”
“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십사 말씀 드렸을 텐데요.”
“허나···.” 서문경의 단호한 태도에 경혜 현주가 잠시 당혹해하다가 결국 호칭은 대충 얼버무리고 말을 이었다. “···께 여쭙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상국께서.”
서문경은 경혜 현주의 손에 파란 힘줄이 도드라지는 것을 보았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뱃속에 바위덩어리가 내려앉은 듯 속이 묵직해졌다.
경혜 현주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황제가 자리를 비웠을 때는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생각했었지만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기분이 가라앉았다. 미세하지만 꾸준히, 분침(分針)이 움직이듯 기분이 어긋나고 있었다. 목구멍에 반투명한 막이 걸린 듯 숨을 쉬는 것도 힘겨워졌다. 이유가 뭘까. 서문경의 냉담한 시선이 눈앞의 낯선 여인을 향했다.
마침 여인이 입을 열고 있었다.
“그 분께서···, 무사하실 수 있을 지요.”
“모릅니다.”
자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엄헌영이 당장 눈총을 주었다. 안 그래도 마음이 불안한 사람에게 굳이 그렇게 대답했어야 했느냐는 시선이었다. 그 태도에 더 심기가 비틀어졌다.
“애초에.”
서문경이 짜증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내뱉었다. 꽃수가 들어간 팔 받침에 대충 얹혀 있던 손이 갑자기 날을 세우며 손등이 파르르 떨렸다.
“애초에 제가 왜 이러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상국, 상국, 상국! 그 상국께서 제게 어떻게 하셨는데요?”
기분 탓인지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도 열지 못하고 있는 두 사람을 서문경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상처에 감아 놓은 면포 때문에 한 눈으로 밖에 볼 수가 없어 도리어 답답한 기분이 강해졌다.
“저는 그 상국의 손에 목숨이 날아갈 뻔 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도와주겠답시고 두 팔 걷어붙이고 앉아 있으니 사람이 호구로 보입니까? 그래서 계속 적반하장 식으로 나오는 겁니까? 제가 돌아버리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하고 그만 두십시오. 당장이라도 다 때려 치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그 대강풍 속에서 그 자가 마지막으로 했었던 ‘그 말’과-.
“폐하···, 때문이니까.”
서문경이 씹어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폐하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 사람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정작 말을 듣는 경혜와 엄헌영은 모르겠지만, 서문경은 말하면서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경혜와 엄헌영에게 한 말이라기보다는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서문경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랬다. 그랬던 거다.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지금조차도.
더불어.
“···돌아가십시오.”
왜 자신의 심기가 점점 뒤틀어지고 있는지, 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폐하께서···, 어디에 계신지, 찾아봐야 합니다.”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경혜 현주를 피하는 그 사람이, 그리고 그 사람과는 상반되는 태도로 스스럼없이 그 사람을 언급하는 경혜 현주가 거슬렸다. 황제에 대해 뒤틀린 것이 있는 지금조차도, 그런 것들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서문경이 물처럼 깊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조용히 종용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
경혜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고 엄헌영은 당혹과 초조감이 반쯤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서문경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문경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상태로 있던 ‘하늘’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가 경혜를 그녀의 처소로 돌려보내 주었다.
그런데, 경혜를 돌려보내고 다시 천추전으로 돌아와 엄헌영에게 손을 내민 그 순간이었다. 뭔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엄헌영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두루마리 더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효강. 서문경이 부르자 엄헌영이 머리만 돌려 쳐다보고 물었다.
“이 권자(卷子: 두루마리)는 어디서 얻은 거지? 너는 분명 천견 최유가 조사한 내용이 담긴 권자라 했다. 그럼 그 말은 천견의···. 설마하니 자네 천견 그 놈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냐, 그 말이지요?”
서문경이 냉소적으로 엄헌영의 말허리를 끊었다.
“같은, ‘손님’이니까요?”
“······.”
엄헌영은 대꾸 없이 서문경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어렵지 않게 마주하며 서문경이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비웃었다.
“염락 조원에게서 받았습니다.”
“염락에게서?”
“천견보다야 낫겠지만, 그 사람 또한 믿을 수 없기는 매한가지지요. 저를 한 번, 죽이려고도 했던 사람이고요.”
“안다면 어째서 그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거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가 불시에 저를 찾아와 이것을 주고 돌아갔을 뿐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별다른 가치가 없다는 것이 확인된 폐지 같은 것이라고 했지만, 살펴보니 이상한 점이 있더군요. 그래서 현주와 당신에게 보여드린 겁니다. 그 뿐입니다.”
엄헌영은 눈을 찌푸렸다. 그것을 보고 서문경이 ‘믿지 못하시겠다면···.’하고 말하려고 했지만 엄헌영이 머리를 저어 말을 멈추게 했다. 그 고갯짓을 보고 서문경이 멈칫한 사이 엄헌영이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숙였던 머리를 들고 엄헌영이 대꾸했다, ‘염락.’ 서문경의 눈이 조금 커졌다.
“무슨 일이 또 있었습니까?”
“언급할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엄헌영이 탐탁찮다는 듯이 털어놓았다.
“길지로 가던 중에, 그러니까 자네와 만나기 전에 그 자와 마주쳤었다. 황주가 있던 근처였는데, 천제사 날이다 보니 괜히 마음이 동해 걸음을 하였다 헛소리를 해대더군.”
“왜 제장으로는 가지 않고?”
“마땅한 관직이 없는 야인 신세다 보니 제장에는 들어갈 수 없고, 그래서 용기가 서린 곳 중 자신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황주로 왔었다 하던데.”
“당치도 않은 소리.”
천제사가 시작되는 진시에 모든 천객들이 제장 밖에 모이도록 서현이 지시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서문경이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직후,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서문경은 서둘러 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엄헌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네가 했던 말과···.”
“예?”
“자네가 했었던 말과 흡사한 말을 했어.”
쇠뿔도 단김에 빼자고 결심한 건지 엄헌영이 빠른 어조로 털어놓았다.
“겁쟁이라더군. 제안이 되었든 희 형님이 되었든 제좌에 앉는 용인은 하나뿐이니, 나는 둘 중 하나가 패전자가 되는 것을 지켜볼 용기(勇氣)도 없는 자라 하였다. 이전에도 그러하였듯이, 금번에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그저 혜에게로 도피한 것뿐이라고. 허나 조만간 다시 선택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도.”
엄헌영의 말을 들은 서문경이 곧바로 응답하는 대신 잠깐 침묵했다. 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으며 세로로 긴 동공이 더더욱 또릿해졌다.
“그 말은···, 이상하군.”
“뭐?”
서문경의 중얼거림을 제대로 듣지 못한 엄헌영이 묻는 말에 서문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서문경을 보며 머리를 모로 갸웃거리던 엄헌영이 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어쩌면 불편한 화제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네는 대답을 하지 않았어.”
“대답?”
“자네가 권자를 받은 것은 천견이 아니라 염락이라고 해도 혐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염락 또한 헌의공 편의 사람이 아닌가.”
“혐의?” 서문경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저도 서엽의 간자라고 주장하고 싶은 겁니까? 그것 참 충실한 간자로군요. 죽을 위기도 몇 번이나 무릅쓰고, 아예 종(種)마저 바꾸면서 봉사하다니.”
“손님이란 족속들에게는 이 세계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었어.”
“알 것 같군요, 그건. 이상한 부분에서 맹목적인 그런 부분 말입니까.”
엄헌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침묵이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같은 대답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문경이 말을 이었다.
“모든 ‘손님’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개중 몇몇이 그렇다는 점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들에게는 꼭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있어, 그것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목적···?”
“돌아가고 싶은 겁니다.”
원래의 세계로, 원래의 제 집으로.
“그 소망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자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지? 자네 또한 그렇기 때문인가? 아니면,”
“저 또한 그렇기도 하고, 또 들었기 때문입니다.”
“들었다···?”
“조원이 그러더군요.”
자신은 분명히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너 또한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서문경이 털어놓은 말을 들은 엄헌영의 눈매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그 눈매 안에서 한층 더 노골적이 된 의심을 읽었지만 서문경은 개의치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엄헌영의 반응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서문경은 너무 지쳐 있었다. 또한 그로서는 지금 이 주제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그래서 서문경은 다만 이렇게만 말했다.
“저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자네가 숨김없이 털어 놓은 것 같으니 나도 솔직히 말하겠다. 그 말을 나는 믿을 수 없어. 이유는 네가 더 잘 알겠지, 금방 네 입으로 말했으니까. ‘돌아가고’ 싶은 것은 모든 손님들의 근본적인 욕망이고 너 또한 그렇다고.”
그 말에 서문경은 그저 웃었을 뿐이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