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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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저물고 있었다. 불타는 듯 붉어졌다가 물에 녹아드는 재처럼 하늘에 스르륵 거스름을 남기며 사라지는 낙일(落日)을, 그 사내는 말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옆얼굴이 갓 죽은 자의 것처럼 단정하고 싸늘했다. 그런 그 사내의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무엇을 그리 유심히 보고 있는가.”

염락, 하고 자신을 부르는 말에도 사내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여전히 시선은 서서히 어두워져 가는 석천(夕天)을 향한 채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런 날이었습니다.”

“···무엇이 말이야.”

“제가, 이 세계에 온 날.” 

하고 말하면서 겨우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서 화려하게 불타는 석양(夕陽)이 그것을 등진 사내의 얼굴에 그만큼이나 짙은 석음(夕陰)을 드리웠다. 괜히 섬뜩한 기분이 들어 남자는 한 발을 천천히 뒤로 물렸다. 그것을 본 사내가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그저 옅은 미소를 입가에 뗬다. 

“천견께서 이 세계에 온 날은 어떠했습니까?”

“진시에 맞추어 길지에 모이라는 명을 듣지 않았었다지.”

사내, 염락 조원의 웃음이 한결 더 짙어졌다. 어째서 화제를 돌리느냐고 묻는 대신에 그는 흔쾌히 대꾸했다. 그랬지.

“한참 길을 가다 보니 유난히 볕이 좋더군요. 덕분에 육중한 거사(巨事)에 비장한 척 손을 보태는 것도 귀찮아지지 뭡니까.”

“자네가 원체 성정이 진중치 못하다는 것은 내 익히 알고 있었던 바이지만 이런 때에까지 그런 대답을 듣지 싶지는 않군.” 

남자가 굳은 얼굴로 조원을 질책한 다음 곧바로 말을 이었다. 

“자네 또한 어르신의 과업에 힘을 더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겠나.”

“저는 지금까지도 죽 그래왔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일을 보아하니 그리 생각하는 것은 저뿐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익살스럽게 덧붙이는 조원의 시선이 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를 응시하는 눈매는 웃는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시선은 아니었다. 질책하는 것도, 호의적인 것도 아닌 그저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그런 시선.

“하기는, 스스로 생각하여도 어르신께서 현명하신 선택을 하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저조차도 천견 그대께서 간자였다는 사실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었으니.”

“······.”

불쾌한 말을 들었음에도 남자는 아무런 불만도 말하지 않았다. 별 수 없으리라. 사실이었으니. 대신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배신 따위를 한 것은 아니었네.”

“그렇겠지요.” 

조원이 선뜻 수긍했다. 저 남자의 변명이 무엇인지는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접근한 것이었을 터이니.”

남자의 태도도 공격적으로 변했다.

“자네가 그랬듯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폐하께 그러했듯이. 뜻을 이룰 수만 있다면 어떤 비열한 행동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애정에 굶주린 어린아이에게 다정한 척 접근했다가 단 줄 알았더니 쓰다 퉤 뱉어 버리는 짓거리도,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십 수 년을 달려간 이를 속여 그 길을 애초부터 어그러뜨려버리는 짓도. 내내 그 이의 곁에 머물며 그 이의 올곧은 진심에 일순 마음이 흔들린다 해도 그 뿐, 결국 악한 일을 멈추지는 않지요. 애초에 우리들은 성정이 글러 처먹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고.”

“······.”

“이런 날에 그 날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하면 혹여 돌아갈 수 있을까요.”

다시 뒤돌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원이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미 하늘은 완전히 석양이 저물어 붉은 기운이 거의 다 사라진 뒤였다. 동상(凍傷)입은 피부와 같은 빛깔로 물들어 있는 하늘을 보고 조원이 불쑥 내뱉었다, ‘병든 것 같군.’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입술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럴 리가 없지.”

“나는, 돌아가겠네.”

불편한 얼굴로 조원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가 몸을 돌린 그 때였다. 

“돌아가고 싶다.”

혼잣말인지 아닌지도 모를 나직한 중얼거림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돌아보자 여전히 조원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채였다. 하지만 내내 씁쓸하던 그의 눈에서는 어느새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는 눈빛에서는 한 가지 감정만이 구름처럼 떠돌았다.

갈망.

“돌아가고 싶다···.”

“······.”

“정말, 사람의 근본이란 변하지 않는 건가 봅니다.” 

본디 난 세계에서도 옳지 못한 짓만 골라 하던 자들이 새 세계에 와서까지 이러한 것을 보니 말이지요. 조원이 그렇게 말한 뒤에 우습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남자, 최유는 무심코 멈췄었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리 빨리 걸어도 조원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귀에 들러붙는 것처럼 집요하게 귀에 들려왔다.

“자신이 버린 세계에 돌아가기 위하여 악행도 서슴지 않는다. 그 세계에서 좋았던 기억도 그리운 사람도 없으면서. 실지로 그 세계서 행복한 삶을 살았을 이는 제아무리 제 세계가 그리워도 그리하지 않는데.”

허나 이래서야 돌아간다 해도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을지. 킬킬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에는 짙은 비웃음과 함께 희미한 비탄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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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열어 준 ‘하늘’로 서문경이 걸어 들어갔다. ‘하늘’ 밖으로 보이는 황제의 얼굴은 영 탐탁치가 않은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술력이 없는 엄헌영은 서문경의 인도가 아니면 ‘하늘’을 오갈 수 없으니. 서문경이 내민 손을 찌푸린 눈으로 노려보던 엄헌영이 서문경이 내민 손 대신 그의 옷자락 끝을 붙잡았다.

황제의 얼굴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엄헌영이 물었다.

“너, 저 놈하고 정말로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 거냐?”

“···그건 왜요.”

“날 죽일 듯이 노려보잖아!”

그건 당신의 태도가 나빠서겠지요, 서문경이 시치미를 떼려 했지만 엄헌영은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네가 손을 내밀었을 때 말이다. 그렇게까지 딱 찍어 말하자 서문경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졌다.

“뭐···.”

서문경이 대충 얼버무리자 엄헌영이 허, 하고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가 곧 벅벅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하기는, 가변례까지 치렀는데 새삼.”

“그건 일종의 사고 같은 것이었으니 예욉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후일은 정해진 것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엄헌영을 서문경은 찡그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언짢아하는 건지, 아니면 갑자기 의구심이 든 건지 모를 애매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서문경이 곧, 여전히 태도는 묘했지만 일단은 엄헌영의 말에 수긍을 표했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괜찮으냐?”

서문경의 눈이 커졌다.

“괜찮냐고요? 뭐가 말입니까.” 

언뜻 들으면 황제와 이대로 부부의 연을 맺어도 괜찮은 것이냐 묻는 듯한 말이었지만 서문경은 속지 않았다. 

“제 원래의 세계를 두고 이대로 괜찮으냐는, 그런 말이지요.”

그 때 서문경이 엄헌영의 손을 당겨 자신의 옷자락을 더 강하게 잡도록 했다. 휙 가벼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서문경이 말했다, ‘새입니다.’ 

“까치나 까마귀 같은데, 자세히는 보지 않아서 모르겠군요.” 

“새? ‘하늘’에?” 

엄헌영이 의아해하며 묻자 서문경이 대답했다, ‘하늘’이니 새가 있는 것이 당연하지요.

“이곳은 사계가 통하는 ‘하늘’이기도 하지만 당신이 늘 보는 그 하늘이기도 합니다. 방금의 그 새도 당신이 늘 보던 그 새고요. 하지만 하늘이 그런 것처럼, 새는 새인 동시에 ‘기억’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롭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은 새면 새, 구름이면 구름인 동시에 사계의 모든 ‘기억’을 싣고 떠돌아다닙니다. 저도 새로 태어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기억이 떠돌아다닌다고···.”

엄헌영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엄헌영의 눈에는 끝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앞과 뒤, 양 옆, 머리 위와 발아래까지 짙푸른 빛이 가득하여 무심결에 돌아보자 일순 눈앞이 아찔하다 못해 등골이 섬뜩해지기까지 했다. 

나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움츠려든 것을 감추기 위해 엄헌영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서문경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예, 그럴 겁니다. 그 대답을 들은 엄헌영이 별 생각 없이 물었다.

“네 기억이나 내 기억도 있을까.”

“네. 당신의 기억도 어딘가에는 있을 겁니다. 제 기억은 ‘물’에 씻겨 내려갔으니 여기에도 없겠지만. 대신 저에 대해 제 친인들이 가진 기억은 있지요.”

“아.” 

엄헌영이 신음을 내뱉었다.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듯해서 서문경은 살며시 웃었다, ‘괜찮습니다.’

“잊어버렸던 것을 겨우 찾게 되었는데, 그것은 만화경(만화경) 안에만 있어요. 눈을 대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아예 다른 공간에 있는 거지요.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려 만화경을 부수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또 내가 작아져 그 안에 들어가는 일도 영원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노력할 수밖에요.”

“노력···.”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서문경이 말하는 ‘노력’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엄헌영은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은 물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저 이는 깊은 물처럼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직감이 들었다. 묻지 말자. 더 이상 말하지 말자.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든다.

그 사이에 서문경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폐하는···.”

그렇게 말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서문경은 엄헌영의 손을 조금 당겼다. 엄헌영의 침실에 당도한 것이다. 너무 아득해서 두려움마저 느껴지는 ‘하늘’에서 엄헌영은 얼른 빠져나왔다. 그보다 몇 박자 늦게 서문경이 엄헌영의 방으로 들어왔다. ‘하늘’에서 나오는 것을 꺼려하는 듯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오히려 ‘하늘’안에 있는 것을 꺼려하는 듯도 한 오묘한 태도였다.

“폐하는?”

곧바로 천추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보니 무슨 할 말이 있나보다 싶어 엄헌영이 물었다. 그러자 서문경이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이대로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엄헌영의 표정도 애매하게 변했다. 서문경의 말에 동조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가 서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애초부터 엄헌영에게 특별한 대답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던 서문경은 엄헌영의 대꾸를 기다리는 대신에 바로 말을 이었다.

“저 같은 사람으로 괜찮을까 싶어서요.”

예상외의 말이었는지, 이번에는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뭐?”

“폐하에게는, 저보다는 다른 사람 쪽이 좋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이라니?”

“그냥 다른 사람이요. 누구 특별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서문경이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머뭇거리는 서문경의 모습을 처음 본 엄헌영의 표정이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오묘하게 변해 있었지만 생각에 잠긴 서문경은 그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서문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좀 더 착하고 좀 더 배려심도 있고, 좀 더 여유로운 사람···.”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내가 먼저 보고 싶군.”

엄헌영이 서문경의 말허리를 끊었다. 참 딱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그는 혀까지 끌끌 차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너도 네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누군지 떠오르지 않잖나. 그런 그린 듯한 사람이 어디 흔할까. 만일 있다면 벌써 성자 따위로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겠지.”

“그런가요.”

“그리고 제안 그 놈에게는 너 정도면 족하지.”

그 말에 서문경이 조금 놀란 듯 입을 다물고 눈을 약간 크게 떴다. ‘내가 왜 이런 말 따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하는 말이 이마에 보란 듯이 쓰인 엄헌영이 짜증스러워 하는 것이 역력한 태도로 내뱉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만 녀석은 친족에게서 내내 관심이나 애정 따위의 것들은 받지 못하고 자랐어. 모후인 수경궁 마마께서는 녀석을 생산하신 직후에 급서하셨고 조모나 외조부란 인간들은 네가 본 그대로의 사람들이었으니. 그리고 부친이신 선제께서는···.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높으신 어른들께서 그러셨으니 아랫것들이야 오죽할까.” 

위에서 챙겨주고 돌보아 주어야 아랫것들도 비로소 얕보지 않고 제 일을 하는 법이다, 말하는 엄헌영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벗인 경혜 현주가 좋지 못한 시절 감내해야만 했던 일들을 되뇌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서문경은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엄헌영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녀석이 유난히 혜를 따랐던 것은 서로 입장이 비슷했던 탓도 있겠지만, 자신에게 처음으로 호감을 보여 준 친인이란 이유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조차 좋지 않은 결과로 끝이 났지만.”

거기까지 말하고 엄헌영이 꾹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발치를 노려보는 눈초리가,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엄헌영은 결국 입 안에서 떠돌던 말을 털어 놓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가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그러니 자네 정도로 족해. 녀석에게는 자네처럼 부족함 없이 자란 듯한 사람이.”

그러나 그 말에 서문경의 표정이 더 묘해졌다. 글쎄요. 애매한 말로 대꾸한 서문경이 의아한 기색이 역력한 엄헌영의 앞에 두 팔을 불쑥 내밀었다. 뭐야. 엄헌영이 묻자, 서문경은 두 손바닥을 겹친 다음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겹친 손바닥을 펴 보였다. 드러난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역시, 그런가.”

“무슨 말이지?”

“예전에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조원 그 사람에게서 저를 구해주셨을 때, 그 사람의 ‘힘’을 보고서.”

엄헌영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아, 하고 웅얼거리는 그는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불쾌해지는 듯 했다. 

“그 때 객들의 ‘힘’은 이전 세계에서의 삶과도 연관이 있다는 듯이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염락 그 자와는···.”

하고 말하던 엄헌영은, 갑자기 서문경이 고개를 저은 탓에 말을 멈췄다. 서문경이 조용히 이유를 말했다, ‘그가 이전에 무슨 삶을 살았든 정확한 사정도 모르는 저희가 추측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저는 확답을 듣고 싶고 싶은 겁니다. 정말로 객들의 ‘힘’이 이전 세계에서의 삶과 연관이 있는 겁니까?”

“어느 정도는 상관이 있다 들었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여전히 생각하는 바를 파악하기 힘든 얼굴인 서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뒤를 힐끗 돌아보는 서문경에서 엄헌영이 물었다, ‘갈 건가?’ 서문경이 허공에 살짝만 비치고 있는 ‘하늘’을 미닫이문을 열듯 밀어 열면서 대답했다.

“예. 그러니 제가 부탁 드렸던 바를 곰곰이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그러겠지만.” 

막 돌아가려던 서문경이 엄헌영을 돌아보았다. 엄헌영의 대답이 어딘지 시원치 않았던 탓이다. 뭐 더 말씀하실 것이라도?, 하고 묻는 서문경에게 엄헌영이 목덜미를 긁적이는 것이 보였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는 듯했다.

“나는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아니라고요?”

“그래. 물론 희 형님과는 나도 한 때 친밀하게 지냈었지만···, 그 당시가 즐거웠고 또 특별했던 때라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형님을 찾아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 당시도 지금도 희 형님에게 가장 특별한 이는 내가 아니었으니 그런 것일까, 알아온 시간이나 친분과는 별개로 나는 희 형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그다지 없었던 것 같아···.”

“그럼, 수상의 정인이었던?”

“아니.” 

엄헌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일까. 그것이 이상해. 혜는 희 형님과 서로 마음이 통하였던 사이이고, 또 아직까지 미련이 남아 있으니 생각해보면 혜 밖에는 없을 것 같은데. 머리로는 그런데, 이상하게 그 또한 아니라는 그런 생각이 들어.”

그렇게 말하는 그는, 그런 자신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혜에게는 내가 말을 해두지. 그렇게 말하는 엄헌영에게 알았다 대답한 다음 서문경은 ‘하늘’을 열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사흘.”

서엽이 심복인 주강이 조금 전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사흘이라. 그러다 그가 순간 비죽이 웃었다.

“간계를 연 채로 고작 사흘 밖에 못 견딘다는 건가, 거기 머리가 몇인데. 근성이 없군.”

“혹 따로 명하실 바라도, 주인어른.” 

하고 문득 묻는 자신의 심복을 서엽이 의외라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자네가 그런 말을 다 하다니, 별 일을 다 보겠군.’ 그 말대로, 저 주강이라는 사내는 바다거북 같은 생김새 그대로 성품 또한 우직하고 완고한 자였다. 때문에 그는 지금껏 제 주인이 하는 일에 의문이나 우려 따위를 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하는 일이 그토록 불안해 보인다 그건가.”

“그런 불측한 염려는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 해도 하는 수 없지.” 

서엽이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충분히 그럴만하지 않은가 말이야. 어디에 있는지 행방도 알 수 없는 놈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풀어 두고 있는데, 주어진 시간은 촉박하고.”

“도련님께서는···.”

“사흘이면 충분하지.”

서엽이 선뜻 대답했다. 주강은 대답 없이 뒷걸음질 치며 서엽을 향하여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런 그에게 나가보라는 뜻으로 한 손을 휘휘 저으며, 서엽이 턱을 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비스듬히 턱을 괸 서엽이 중얼거렸다, ‘그래, 사흘이면 충분하지···.’

“사람이 미치는 데에는.”

**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이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깨달은 순간 일단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당혹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분명히 계속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길을 잃은 것인가? 당황한 그는 손이 닿는 위치에 있는 나뭇가지를 반쯤 꺾었다. 

아직 새순이 돋지 나무들 사이에서 푸른 잎으로 무성한 상록수는 눈에 띄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눈에 뜨이는 나무나 바위 따위에 표시를 남기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피가 통하지 않는 짐처럼 두 다리가 무거웠지만 한 시도 쉴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더.

“더···.”

우뚝,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부모를 잃은 아이 같은 얼굴로 변했다. 놀란 눈이 계속해서 껌뻑거렸다. 

“더?”

더, 뭐였지?

조금이라도 더 ‘멀어져야 한다’, 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야 한다’ 중 어느 쪽이었지? 난 ···. 

“어디로···.”

어디로, 가는 중이었더라?

도망치는 중이었던가, 돌아가던 중이었던가?

혼란에 빠진 그의 발이 동으로 향했다가 황급히 서로 틀어졌다가 다시 동으로 향하기를 반복했다. 다시 좌로 발걸음을 틀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멀어지던 중이었다. 그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 나는 도망치던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 아이가 있는 곳에서 멀어지려던 차였다. 그러니까 이대로 계속 가면 된다. 그가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그는 불쑥 중얼거렸다.

“도망? 아니지.”

아니야···, 하고 그가 발을 우로 돌렸다. 지익, 지익, 지익. 그가 무거운 발을 끄는 소리가 적막한 숲 속에 울려 퍼졌다. 지익, 지익, 지이익. 그 소리를 들으면서 그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도망치면 안 되지. 나뿐인데···.”

나 밖에 없는데. 그 아이를 구해줄 수 있는 건.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어째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늘, 해오던 일이었는데 새삼 어째서. 

그는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운 발을 힘겹게 움직이며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저물고, 하늘이 온통 검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발치에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방에도 짙은 땅거미가 지고 있다. 

어느새 이렇게 시간이 지났지, 그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완전히 날이 저물기 전에는 돌아가야 하는데. 밤이 저물기 전에···.

그런데, 왜였더라.

“달···.”

먹물을 먹은 것처럼 빠른 속도로 가매지는 하늘을 멍청히 보고 있던 그가 불현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에 있는 것은 달이 아니라 아직 검은 물이 들지 않은 한 조각의 구름이었다. 달로 착각할 만큼 밝은 것도, 둥근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그렇게 말했다, ‘보름달.’ 그랬다가 그가 머리를 모로 갸웃했다, ‘아니, 어딘가 조금 기울어 있어.’

그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내뱉었다. 아아.

“육보름날.”

-이었어. 지익, 다시 그가 발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래서 궐에 갔어야 했는데.”

지익, 지익.

“어서, 가야지.”

지익, 지익, 지익.

“어서 가서···, 같이 있어줘야 해.”

지익-. 얼마나. 지익-. 괴로울까. 지익-. 혼자서. 지익-. 그런, 일을. 지익-. 가엾게도. 지익-. 그런 끔찍한 것을. 지이익-. 봐야, 한다니. 지이익-. 

“이해할 수 없어.”

왜, 그렇게 그 아이를 괴롭게 하는 걸까.

“어른, 인데.”

이해할 수 없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추한 질투에 미친 황제도, 그런 황제를 저지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추부기는 그 사람도. 어른이면서, 왜 그런 짓을 하는 걸까. 잘못하고 있는 건데.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 만일 내가 어른이라면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해줄 텐데. 그 광인(狂人)들을 상대로 그 아이를-.

“지켜···.”

줄···.

“수.”

소리가, 멈췄다.

“황제는, 죽었잖아?”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발이 보였다. 내, 발.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고, 그 손으로 자신의 머리통과 귀와 목, 팔다리 따위를 더듬거렸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기억보다 훨씬 크고 훨씬 굵고 훨씬 길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보드라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자신의 몸에 그는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황제는, 죽었어. 그럼 난. 나는. 지금은. 여기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또···.”

반쯤 꺾어져 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뭇가지. 다시 그는 아까의 그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결계?”

그는 중얼거렸다. 결계, 인가? 그의 손이 꺾어진 나뭇가지 끝을 받쳤다. 아까의 그 상록수 가지, 그러나 끊어져 덜렁거리고 있는 그 상록수 가지는 꺾어진 상처가 바싹 말라 있었다. 꺾어진 지 적어도 한나절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탓에 그것을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힘들었다. 더더군다나 정신이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한나절을 꼬박 몸을 혹사시킨 그가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계, 라니.”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그의 몸이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더는 서 있지 못하고 무너졌다. 허나 그는 그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네 발로 천천히 기었다. 

상록수 근처에 있던 바위 위를 그가 바라보았다. 그 바위에는 그가 낸 흔적 따위는 없었지만, 그는 환각을 보았다. 그가 아무 흔적도 없는 돌 위를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있어.’ 순간, 그는 확신했다. 

같은 곳이다. 나는 결계 안에 있는 거다.

“결계···, 라니.”

어째서? 그가 중얼거렸다. 누가? 왜? 왜 나를? 머리가 욱신거리고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그는 열이 오른 이마를 손으로 짚는 대신 짐승처럼 차가운 돌에 이마를 댔다. 하지만 이마에 오른 열은 조금도 내리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다···. 이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어졌다. 지금이 언제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무엇을 하던 중이었는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갇힌 것은, 이렇게, 결계에. 내가, 갇힌 건. 내가, 그럴 필요가. 필요가.”

그럴, 필요가, 있다면.

가두어야 하는 것은?

“나쁜 것. 부정한, 것.”

부정한 것은?

“귀···, 신.”

귀신?

머릿속에 곧바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귀신···? 나는.”

결계에 가둬야 하는 것은 부정한 것. 부정한 것은, 사람을 해하는 악귀. 나는 지금 결계에 갇혔다. 그럼 나는, 내가.

“귀신, 인가?”

그래서 ‘그 얼굴’이 그렇게 눈에 익은 것인가.

“난···.”        

그 때, 그의 머릿속에 ‘직접’ 누군가가 말해왔다.

-그렇다.

“그래.”

그는 그것을 ‘자신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귀신이구나.”

자신의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

‘하늘’ 밖에서 뻗어온 손이 팔을 잡아당겨 서문경은 거의 내동댕이쳐지듯 끌려 나갔다. 바닥에 부딪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몸에 닿은 것은 딱딱한 바닥이 아니라 단단하지만 탄력 있는 사람의 살이었다. 

뒷머리를 받치는 익숙한 감각에 서문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도 못하고 머리만 돌려 뒤를 보았다. 자신의 팔을 당겼던 바로 그 손이 서문경의 허리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폐하.” 

상처가 남아 온통 천을 덧댄 황제의 얼굴이 서문경의 목덜미에 와 묻혔다. 마찬가지로 익숙한 숨결이 서문경의 귓가에 내뿜어졌다. 그 숨결에 약향(藥香)이 묻어났다. 그 약향을 따라 서문경은 황제의 정수리에 손을 대면서 물었다. 

“그새 무서운 꿈이라도 꾸신 겁니까?”

“헛소리는. 네 놈이 나가 있었던 시간이 고작 얼마 된다고 그 사이에 낮잠을 자.”

하는 말과는 달리 황제는 서문경의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줘 서문경을 더 바짝 자신에게로 끌어 당겼다. 덕분에 거의 황제의 품에 파묻히다시피 한 서문경이 팔을 내리고 목에서 힘을 뺐다. 

“그렇지도 않은데 왜 이러세요.”

“···그저.” 

싱겁기는, 하고 타박을 놓으려는 그 때, 끝난 줄만 알았던 말이 이어져서 서문경은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음이 불안하여 그런다.”

“불안하다니요?”

“그대가 잠시 시야에서 사라진 것만으로도 안달이 나.”

허리를 안은 팔에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아파. 무심코 황제의 팔위에 손을 올린 서문경이 깜짝 놀랐다. 황제의 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폐하···.”

“짐은 두려워. 이러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대가 시야에 있을 때면 시신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내 팔 안에 늘어져 있던 모습이 어른거리는데, 그대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얼음덩어리가 되어 와상에 누워 있던 모습이 생각이 나. 점점, 숨이 가늘어지던.”

“······.”

“이렇게 한 곳에 있어도 불안한데, 그대가 보이지 않으면 두려워 미칠 것만 같아.”

그러니 확인하게 해다오. 황제가 말했다. 거만한 말과는 달리 그렇게 말하는 어조는 숫제 애원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문경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허리에 둘러져 있던 팔을 떼어 내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얌전히 그의 품 안에 있어 주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서 말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그러는 사이 힘껏 서문경을 껴안은 황제가 나머지 팔을 들어 천천히 서문경의 전신을 더듬기 시작했다.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머리···. 머리카락. 이마.” 

그 중얼거림을 따라 천천히 그의 손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마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헤집고 그의 손가락이 동그란 이마 위를 덧그렸다. 

“눈, 콧대, 인중, 입술, 턱, 목.”

그리고 불현듯이 손가락이 멈추고,

“하나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느껴졌다. 무심결에 올려다보자 멍한 눈길로 서문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황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대는 모르겠지. 그대를 살리기 위하여 처음 그대의 몸 안으로 들어갔을 때, 짐은 그대를 먹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먹는다고요?”

“말 그대로의 뜻이다. 그대의 피와 살, 뼈와 내장을···, 모두 끄집어내 씹어 삼켜 버리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겨우 참았지만. 그렇게 말하며 황제는 쓴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하는 내내 황제의 손은 서문경의 얼굴을 유리처럼 쓰다듬고 있었다.

“허나, 그대가 살아나리라는 약간의 희망이라도 없었다면 짐은 필시 그리했을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니 그렇게라도,”

“그렇게 해 봐야.” 

서문경이 황제의 말을 냉정하게 끊었다. 말을 멈춘 황제를 서문경이 고개를 뒤로 기울여 올려다보았다. 

“안 하기를 잘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봐야 다 헛수고입니다. 하나가 되긴 무슨, 먹어봐야 소화돼서 결국은···.”

하고 말하다가 서문경이 도중에 말을 멈췄다. 음, 하고 신음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모양새가 더 말을 하기는 곤란한 모양이었다. 결국 그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그렇단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가 킬킬 웃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허나 그랬단 말이다, 짐은.”

즐거운 웃음 끝이 씁쓸함으로 물들었다. 황제의 손이 서문경의 턱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황제의 손이 서문경의 턱을 콱 쥐고 억지로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서문경이 어, 하는 그 순간 황제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읍···.”

숨이 막혔다. 그 입맞춤은 마치 폭풍우 같았다. 불쑥 입 안을 파고든 뜨거운 혀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입 안을 휘젓고 뒤흔들었다. 타는 듯이 뜨거운 장대비가 입 안에 몰아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잠, 깐만. 서문경이 각도를 바꾸기 위하여 황제가 잠시 입술을 뗀 틈에 말했지만 황제는 듣지 않았다. 입술이 뜨겁게 비벼지고 단단하고 차가운 이가 잔뜩 열이 오른 아랫입술을 물어뜯듯이 씹었다. 겁을 먹고 도망치려는 서문경의 혀를 황제의 긴 혀가 단숨에 잡아채 휘감았다. 혀가 빨리고 그 아래의 살까지 희롱 당했다. 

숨이 점점 차오르고 정신이 멍해졌다. 뇌가 녹아내린 듯 눈앞이 아찔해지고 나중에는 뱃속까지 간질간질해졌다. 다시금 입술을 떨어졌을 때, 서문경의 입에서 만류 대신 신음이 흘러 나왔다. 턱으로 흘러내린 타액을 황제가 혀로 핥아 올리고 서문경의 입술에 쪼듯이 입술을 맞춘 후에 완전히 얼굴을 떼어냈다. 

턱을 틀어쥐고 있던 황제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비틀거리는 서문경을 황제가 가볍게 끌어안았다. 황제가 말했다.

“어서 자라라, 갓난아.”

“갓,”

갓, 뭐? 꿈에도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서문경이 멍해져 있는 사이 황제가 서문경의 이마와 콧등과 입술과 턱에 가랑비처럼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가 애타게 속삭였다.

“그대가 갓 알에서 태어난 것만 아니었더라면, 하루 밤낮을 꼬박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을 터인데. 한 겹 옷자락도 걸칠 여유도 주지 않고 그대의 몸 곳곳을 범하였을 터인데. 신음과 교성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도록 계속하여 그대를 달게 탐하였을 터인데. 그리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 그 때처럼 그대와 연결되어 있고 싶다. 그대의 몸이 짐의 냄새로 푹 절여질 때까지 그대의 비부에 짐의 씨물(: 정액)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응? 응? 황제가 아이처럼 조르며 서문경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었다. 연한 비늘이 숨 쉬는 턱 밑에서부터 불쑥 튀어나온 마른 쇄골까지 벌레에 물린 듯한 붉은 잇자국이 계속해서 돋아났다. 

황제의 손이 옷깃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순간에서야 서문경은 어느새 자신이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하고 당황하여 내뱉은 순간 황제가 허리를 밀어 붙였다. 단단하게 발기한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져 서문경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겁먹지 마라.”

자랄 때까지는 내 하지 않을 터이니, 아가. 그러나 그렇게 달래면서도 황제는 계속해서 서문경의 허벅지에 자신의 것을 문지르고 있었다. 뜨거운 기둥 같은 것이 점점, 점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황제의 것이 정확히 자신의 성기 위를 찌르는 순간 서문경은 꽉 눈을 감아버렸다. 그와 동시에 황제가 서문경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짐승처럼 달아오른 숨소리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순정적인 말을 그가 지껄여댔다.

“내 기다릴 터이니 어서 자라다오. 그리고 결코 짐의 곁을 비우지 말아다오. 내 너를 위해서만 살고, 움직이고, 숨 쉴 터이니, 으응?”

“전···.”

황제가 그렇게 말한 순간에서야 서문경은 겨우 알아챘다. 하마터면 자신을 잃을 뻔 하고 서현이 실종된 이 연속된 악재에 황제가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서문경의 숨이 저절로 잦아들었다. 

서현. 

그를 생각하자 아직 낫지 못한 상처가 욱신거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더 아픈 것은 상처가 아니라 가슴 속이었다. 서문경은 황제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뇌리에 떠올렸다. 지금껏 황제의 인생에서 그는 빛과 그림자, 추억과 절망, 목적이자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그가 서엽의 함정에 빠져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뱃속에 품고 미쳐 떠나버렸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마저 저 이를 불안하게 하면···. 그렇게 생각한 서문경은 용기를 내어 황제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있겠습니다. 늘. 언제나요.”

마치 꺼질 듯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황제는 용케도 그 말을 알아들은 듯 했다. 황제가 기쁜 듯 웃으며 서문경의 목덜미를 커다랗게 베어 물었다. 그러나, 서문경은 그 기쁜 얼굴에 조금 더 서글퍼졌다. 

말, 해야 하는데.

황제의 머리를 끌어안은 서문경이 그 두 손 끝을 마주했다. 눈인 듯도 하고 빛인 듯도 하고 꽃잎인 듯도 한 무언가가 천천히 황제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다가 채 황제의 살에 닿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객들의 ‘힘’은 이전 세계에서는 삶과···.

내 ‘힘’은, 환상(幻想). 말 그대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저로도, 괜찮다면 저는 기꺼이.”

하지만, 당신은 괜찮을까. 내가···.

내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슴 속에서 파도가 쳤다, 자신을 잡아먹은 그 너울파도처럼. 그래서 불안해졌다. 그리고 서문경은 결국 그 불안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 서문경의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하지 못한 말이 출렁거렸다.

말해야 해. 이번에는 말해야 하는데.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텐데. 이전처럼, 말하고 싶어도 영원히 말할 수 없게 되기 전에, 그래야 하는데.

하지만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잠시만. 잠시만 더 이렇게. 그렇게 서문경은 스스로를 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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