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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경이 도착했을 때에는 모든 일이 끝나 있었다. 한 쪽 벽이 무너진 제장 안에 들어선 서문경이 말에서 내렸다. 아홉 겹 축대가 형편없이 무너져 있었지만 황제가 있는 곳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제장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대부분 그곳을 향하고 있었던 탓이다. 눈을 찡그린 서문경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엄헌영은 반대로 사각으로 몸을 피했다.
“어딜 감히,”
하고, 축대로 나아가려는 서문경을 제지하려던 자가 무심코 서문경의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바짝 얼어붙어 버렸다. 어, 하고 얼빠진 신음을 내뱉는 그의 팔을 서문경이 밀어내며 축대 위로 올라갔다. 그 뒤를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좇았고, 그 시선은 서문경이 높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늘어만 갔다.
“용비늘···.”
“가변례를 치렀다는 말이 참말이었···,”
“그럼, 저 수객이 제국의 정후(正后)가 되는···,”
“헌데 저 비늘과 용안은 지금껏 국부에게서는 보지 못하던···,”
수많은 수군거림이 자신의 등 뒤에서 오고 갔지만 서문경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윽고 서문경은 축대 안쪽에서 황제를 발견하고 그 앞에 멈춰 섰다. 황제가 지친 눈동자만 움직여 서문경을 바라보았다. 서문경이 한숨을 삼키며 찬 바닥에 두 무릎을 대고 앉자, 황제가 서문경의 손목을 잡아 자신에게 끌어 당겼다. 서문경의 귓전에서, 황제가 물었다.
“괜찮으냐.”
“그 질문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폐하인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대가 떨어진 곳이 황작이었더냐.”
엄헌영에게 들었던 말을 되뇐 서문경이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걸···.”
황제는 대답 대신 서문경을 자신의 두 팔로 힘껏 끌어안았다. 자신이 떨어진 곳은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려던 서문경이 몹시 지친 황제의 얼굴을 보고 일단 입을 닫았다가, 말을 바꿨다.
“돌아가시지요···.”
일단은 궐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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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견 최유가 서현을 배반했다.
천견 최유는 ‘하늘’을 타고 이 세계에 흘러 들어온 직후부터 내내 가장 가까이에서 서현을 모신 서현의 바른팔이었다. 서현이 몸담고 있는 수상부의 어떤 사람도, 서현을 따르는 창혜각의 어떤 천객도 그보다는 서현과 가깝지 못했다. 그는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내내 서현의 그림자나 다름이 없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서현을 배반했다는 말을 들은 서문경은 그러나, 그다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시선을 발치가 있는 곳으로 내리깔고 미간과 한 쪽 눈매를 찡그린 특유의 표정을 본 황제는 곧 서문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표정이구나.”
지적을 들은 서문경은 순간적으로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지만 이윽고, 예, 하며 목구멍에서 물 끓는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
“미처 폐하께 올리지 못한 말씀이 있습니다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무심코 떠올린 서문경이 인상을 썼지만 일순간의 일이었다. 지금은 다 지나간 일이 아닌가.
“내춘대연회 때, 폐하의 예인이 사라진 것을 알고 엄헌영의 도움을 받아 그 예인을 수색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장 눈썹을 찌푸리며 무어라 나무라려 드는 황제를, 서문경은 손을 조금 저어 말렸다. 서문경이 말을 이었다.
“그 때 그 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가 ‘힘’을 펼치는 중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서문경은 기억을 더듬었다. 염락 조원의 ‘힘’이 독을 품은 불이라면 천견 최유의 ‘힘’은 빛을 품은 ‘문자’였다. ‘힘’의 입구를 막고 있던 마개를 떼어내자 최유의 머리 주위로 빛으로 만든 원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 원은, 손톱만큼이나 작은 글자들로 만들어진 원이었다. 문자들은 나비 날개에서 떨어지는 듯한 가루가 되어서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다.
그 문자는 서문경 자신이 읽을 수 없는 문자였다. 아마 최유가 있었던 세계에서 쓰던 문자일 것이다. 그 때 자신은 너무도 초조했다. 한 시라도, 일 초라도 빨리 예인의 행방을 알고 싶어 몸이 달아 있었다. 그래서 두 손을 맞잡은 채 애원했다. 저 글자를, 내가 읽을 수 있다면, 제발.
“술법이, 깨어졌습니다.”
“술이 깨어졌다고?”
“예. 그리고 그 직전에···, 읽었습니다.”
최유의 술이 깨어지기 직전, 자신이 읽을 수 없던 ‘문자’가 자신이 읽을 수 있는 ‘문자’로 재배치되었다가 곧바로 깨어졌다. 서문경은 손가락으로 바닥에 몇 개의 단어를 써 내려갔다. 황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서문경은 황제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에게 익숙한 ‘말’로 자신이 쓴 글자를 해석해 주었다.
“옥우당 담이숙, 사몰(死沒). ···폐하의 예인은 이미 죽었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최유라는 자는 예인이 있는 곳을 찾았다고만 말했습니다. 예인 수색은 엄헌영 그에게 맡기고 저는 바로 전정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정말 예인이 최유가 말한 장소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릅니다. 어쩌면 그의 시체가 최유가 말한 장소에 있었는지도···.”
거기까지 말한 후에 서문경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본 그 문자는 무엇이었을까요? 최유가 ‘본’ 것과 제가 ‘본’ 것은 다른 것이었을까요? 만일 같은 것이라면, 왜 그는 예인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 주었던 것일까요. 그는 이미 죽었다고, 적혀 있었는데.”
그랬던 것이, 이제야 겨우 대답이 나왔다.
“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본 것과 그 자가 본 것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자는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짐작컨대 그 사람은 예인이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굳이 ‘힘’을 써서 알아낼 필요조차도 없었겠지만, 왜냐하면···.”
“애초부터, 헌의공 그 자의 편이었으니?”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이미 짜인 각본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엄헌영이 이미 죽은 예인의 행방을 좇아 함원교로 사라지고, 자신만이 정전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자신은 황제와 모종의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는 여인, 경혜 현주로 추정되는 황실 여인의 공연을 목격하고 여러 가지 일들로 머리가 복잡한 상태가 된다. 그러는 사이 운현궁 예인의 공연이 끝이 나고 황제의 예인이 나설 차례가 된다-.
“제가 폐하의 예인을 자처하고 나서고, 또 갑작스런 대강풍이 일어 태황태후의 노여움을 사고, 그것을 빌미로 저를 대역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마지막으로 수상이 나서 저를···, 해하고.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어쩌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예, 하고 서문경이 황제가 덧붙인 말에 이견 없이 동의했다. 그리고 말없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서엽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니 결론은 황제가 내려줘야 마땅했다. 그 기대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황제가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중얼거렸다, ‘서엽.’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몹시도 섬뜩하였다.
황제가 중얼거렸다.
“···형님을 찾아야 한다. 서엽 그 놈이 형님을 찾기 전에.”
“힘드시겠지만, 진정하십시오. 지금은 일단,”
“놈은 희 형님이 도망친 것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당혹한 기색 하나 얼굴에 비치지 않았다. 그것이 무슨 말이겠느냐? 놈은 희 형님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그러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수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시는 주제에 어떻게요?”
서문경의 냉정한 말이 황제의 말을 잘랐다. 서문경이 날카로웠던 어조를 조금 누그러뜨리고 황제를 설득했다.
“서엽이 수상의 행방을 알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자랑하던 밝은 ‘눈’도 수상이 속고 있었으니 쓸 수 있는 패였을 뿐입니다. 더구나, 만에 하나 폐하께서 수상을 서엽보다 먼저 발견한다손 쳐도 대체 뭘 어쩌려는 심산이십니까? 폐하께서 찾아내시든, 서엽이 찾아내든 간에 수상이 처하게 될 결과는 똑같습니다. 그는 지금 반역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그를 발견해 봐야 그가 맞을 결과는 한 가지 밖에 없지요, 처형.”
서문경이 황제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바닥을 겹쳤다. 서문경은 최대한 침착한 투로 말했다.
“생각하세요. 침착하게,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면 답이 나올 겁니다.”
“서엽 그 자는···.”
황제는 아주 약간 차가워진 머리로, 제장에서 벌어졌었던 그 끔찍한 일들을 떠올렸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짐은, 희 형님께서 제장을 박차고 나갔을 때 그가 금방이라도 ‘하늘’에 나머지 활을 쏘고 천제사를 끝내리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는 천제사를 중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왤까요.”
황제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소리에 짙은 피로와 탄식, 후회, 죄책감 따위가 묻어나 있었다.
“내 목숨줄을 담보로 그를 위협했다. 이대로 천제사를 치르겠다면, 내 손으로 내 목을 뚫어버리겠다고.”
“······.”
“허나 그 위협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음을, 그 치는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황제는 서문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제가 서문경을 응시하며 불현듯이 내뱉었다, ‘미안하구나.’
“진심이셨습니까?”
“모르겠구나.” 서문경의 물음에 황제가 쓰게 답했다. “아니, 실은 안다. 당시에는 진심이었으나···, 동시에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위협을 한다는 사실도 자각하고 있었다.”
황제는 눈을 감았다. 그 때 자신의 손은 족쇄에서 풀려나 있었다. 원한다면, 자신이 했던 위협 그대로 자신의 목을 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자신의 두 팔과 두 다리, 만질 수 없는 머릿속과 뱃속, 감정이나 마음 따위의 만져지지 않는 것까지 자신의 모든 것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족쇄에 묶여 있었다.
황제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혼잣말이었다.
“아끼고, 집착하는 것이 생기면 그만큼 허점이 늘 뿐이다. 겪어보지 않은 일도 아니거늘.”
그러나, 황제는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어 서문경의 손에 단단히 깍지를 꼈다. 그 손은 족쇄였다, 자신의, 또한 그를 옭아매는. 황제는 쓸쓸하게 웃었다.
“늘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그렇게 입 속으로 중얼거린 황제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헌의공은 짐을 유년 시절부터 죽 보아온 자이니, 짐의 각오가 파부침선(破釜沈船)의 것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쉽사리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천제사를 중지하겠다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 말을 처음 꺼낸 것은 짐이 아니라 오히려 헌의공 쪽이었다.”
“그럼······.”
서문경이 뒷말을 잇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문경의 손가락이 바닥을 두드렸다. 손가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다시 뛰듯이 빨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서문경이 불쑥 내뱉었다.
“당분간은 서엽이란 자가 수상의 목숨을 해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요.”
“그게···, 무슨 소리더냐?”
서문경이 그 물음에 대꾸하는 대신, 대담하게 요구했다.
“엄헌영을 만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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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있으신 건 맞습니까?”
제가 볼 때마다 노닥거리고 계신 것 같은데요, 한 쪽 눈을 하얀 무명천으로 가리고 나타난 서문경이 얼굴이 보이기가 무섭게 그렇게 이기죽거렸다.
입구란 입구는 모조리 경비들이 서 있는 판국에 어떻게 소리 소문도 없이 나타난 거냐고 놀라 물으려던 엄헌영이 하려던 말 대신 성을 내며 내뱉었다, ‘내 직업을 말이 아니라 네 몸을 통하여 보여줘야 믿겠나.’ 즉, 맞고 싶냐는 소리였다. 그 위협에 서문경이 움츠려드는 척도 하지 않고 털썩 엄헌영의 앞에 주저앉았다.
“그러면 뭐합니까. 이렇게 밖으로만 나돌아서야 정말 흰 손 신세가 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흰 손이 뭐지. 머리를 모로 기울이며 생각하던 엄헌영이, 이윽고 서문경과 더 말을 섞는 것을 그만두고 딱 잘라 자신의 처지를 밝혔다.
“근신 중이다.”
“근신이요? 왜 근신 처분을 받으신 겁니까?”
“자택에서 근신하고 있을 것을 권하더군.” 엄헌영이 쓴 입 안을 괜히 혀로 슥 훑어내면서 말을 이었다. “당장 역적 도장이 찍혀도 이상하지 않을 집안사람이니.”
그 말에 왜냐고 묻지 않는 것을 보니 황제에게 대략의 상황을 얻어 들은 듯 했다. 엄헌영은 답지 않게 긴 한숨을 내쉬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책상 다리를 하고 앉은 그가 두 무릎에 두 손을 차례로 짚고 무거운 투로 말했다.
“해서, 더 이상의 도움을 주는 것은 힘들 듯하다. 힘들게 찾아왔을 터인데 유감이군.”
그렇게 털어 놓은 말끝에 엄헌영이 서문경을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했던 것을 덧붙였다, ‘헌데 참말로 어찌 들어왔나?’ 그러나 서문경이 그 물음에는 답을 주지 않고 영 딴 말을 지껄였다.
“역적 집안이 된다고요? 이 집안은 태황태후의 친정이자 폐하의 외가가 아닙니까?”
“내 백부님과 운현궁 마마가 제장에서 저지른 짓거리는 자네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을 터인데? 당장 서엽 놈이 운현궁 마마를 서인으로 폐하고 역적 엄씨 일가를 모조리 잡아들이라 명을 내리지 않는 것이 용할 정도야, 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지.”
“태황태후가 저지른 짓은 그야말로 노망이 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친 짓거리이긴 했지만, 그래도 용인을 그리 쉽게 폐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텐데요?”
서문경이 되묻는 소리를 들은 엄헌영이 그건 무슨 개소리냔 듯이 눈과 이마와 미간을 동시에 구겼다. ‘아, 역시 아무리 그래도 나이 드신 분께 표현이 너무 험했었나요.’하고 서문경이 말하려는 순간, 엄헌영이 선수를 쳐서 내뱉었다.
“용인이라니? 누가 용인이란 말이냐?”
“태황태후···.” 서문경이 반사적으로 대꾸했다가 한 박자 늦게 설명을 붙였다. “태황태후는 이전 황제의 정후였으니 가변례를 치렀을 것 아닙니까.”
“그래. 그랬었겠지. 허나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지, 부군되시는 용황제께서 붕어하신지 한참인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냐?”
얼굴을 구기고 엄헌영의 대답은 곰곰이 곱씹어 보던 서문경이, 잠시 후에 불쑥 물었다.
“용황제가 붕하면, 그 배필이 되는 가용인은 더 이상 용인이 아니게 됩니까?”
“바다가 말랐는데 어찌 개울이 흐를 수가 있다던?”
하고 퉁명스레 반문한 엄헌영이 불현듯이 ‘헌데 보자.’하고 서문경에게로 바싹 다가가 앉았다. 엄헌영의 갑작스런 행동에 서문경이 차마 물러나지는 못하고 목만 길게 빼어 뒤로 물렸다. 뭡니까, 하고 불퉁하게 묻는 서문경의 목덜미를 엄헌영의 시선이 관찰하듯이 샅샅이 훑었다. 툭, 엄헌영이 중얼거렸다.
“가변례를 치른 거지.”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엄헌영 혼자서 웅얼거리는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서문경의 귓가가 바로 확 붉어졌다. 젠장할, 괜히 욕설을 중얼거리며 서문경이 두 손바닥으로 제 귀를 가렸다. 그러나 귀를 가린 그의 손도 붉어져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는 사이 엄헌영이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가용인에게서 용비늘을 본 것은 처음인데. 용안 또한 마찬가지지만.”
“뭐 그렇게 많은 용인을 보셨다고.”
서문경의 가시 돋친 핀잔에 엄헌영이 처음에는 눈살을 구겼지만 곧 ‘그건···, 사실이지만.’하고 서문경의 말을 인정하면서 한 수 물러났다.
본디의 제 자리로 돌아온 엄헌영이, 시선을 모로 돌리며 서문경을 향해 휘휘 손을 내저었다.
“어찌되었건, 용건이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라. 어찌 했는지는 몰라도 재주 좋게 숨어 들어왔으니 나갈 일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지.”
“아니요, 용건이 아직 남았습니다만.”
“유감스럽지만 나는 그리 심기가 편치가 않네.”
“그렇겠죠.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꼭 들으셔야 할 말이 많아서요.”
“그러니···,”
하고 다시금 축객령을 번복하려던 엄헌영이 뒤늦게 서문경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깨닫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내가 들어야 할 말이 있다고?’, 엄헌영이 묻자 서문경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크게 끄덕이는 것이 분명한 그 행동을 보면서 몹시 찜찜한 기분이 된 엄헌영이 일단 말했다. 말해봐.
“도자기, 말입니다.”
서문경이 입을 열었다. 그 열린 입 안에서 엄헌영의 귀에는 들어왔을 리가 없는 이야기, 구단으로 쌓은 높은 축대 위에서 서엽과 서현 사이에서 오고간 일련의 대화가 적나라하게 쏟아져 나왔다.
엄헌영의 얼굴이 싸늘하게, 딱딱하게 굳어갔다. 서문경의 말이 끝난 직후에, 그가 툭하고 내뱉었다.
“그 말은 내가, 항아리를 잘못 들고 왔었다고?”
“최유에게 속은 겁니다.”
“항아리는 입구가 봉해져 있었다. 그 봉인을 뜯고 입구를 열자마자···.”
하고 엄헌영은 자신이 토기를 찾아 서현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혼절한 상태의 서현이 어디에 숨겨져 있었는지, 이제는 정확한 위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토기를 찾아온 자신을 안내한 최유가 유난히도 좁고 구불구불하고 험한 길을 몇 번이나 꺾으면서 돌아갔었으니.
서현은 사람 하나를 머리끝까지 덮고도 남을 만큼 긴 갈대들이 무성한 갈대밭 속에 누워 있었다. 아직 풀빛이 돌지 않는 키 큰 갈대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재색으로 시작했다가 늙은 짐승의 털가죽 같은 갈색으로 끝나는 건조한 파도를 만들었다. 갈대가 눕고 일어나는 소리마저도 바삭바삭, 튀겨지는 소리를 내며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 봉인은 나라에서 첫째둘째를 다투는 술사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보다 강한 술사가 아니면 아예 술력이 없는 자가 열어야만 한다고 했었지. 그 또한 그 배신자 놈의 말이었지만···.”
어이가 없을 정도로 봉인은 쉽사리 열렸다. 그리 길지도 않은 손톱을 세워 얇게 발라진 밀랍을 긁어내고 얼기설기 둘러놓은 금줄을 벗겨내고는 뚜껑을 열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술력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자신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 분명히 뭔가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었다.
“희 형님이···, 무슨 수를 써도 깨어나지 않던 형님이 봉인을 뜯자마자 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였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서현은,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바로 최유가 준비해 둔 말을 타고 제장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자신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조원을 만나 제장으로 향했고 그 와중에 ‘하늘’에서 떨어진 서문경을 만났다.
천견 최유가 서현이 아닌 서엽의 심복이었고, 제장에서 제 본색을 드러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꼈던 기분이 다시금 엄헌영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단단하고 무거운 것으로 난데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에 골 안이 띵했다.
“천견 그 놈이 희 형님을 배반하다니,” 아니, 하고 엄헌영이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어쩌면 예전부터 죽,” 아니, 아니, 하고 또 엄헌영이 중얼거리더니 푹 고개를 떨어뜨렸다. 괴로운 중얼거림이 그의 힘에서 흘러나왔다.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한 건지, 내가 토기가 있는 곳을 발견한 것도 서엽 놈의 함정임이 분명해. 그 뻔한 속임수에 속아서 나는. ···내가, 결국은 내가 형님을···.”
짝!
“?!”
갑작스런 소리에 화들짝 놀란 엄헌영이 소리가 들려온 쪽을 퍼뜩 돌아보았다. 그러자 서문경이 손바닥과 손바닥을 마주친 채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까의 그 소리는 서문경이 손뼉을 치는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어째서인지 자신을 몹시 한심하다는 눈길로 꼬나보고 있던 서문경이 빈정거렸다.
“얼굴만 닮은 줄 알았더니 생각하는 것도 똑 닮았군요. 별로 좋지도 않은 걸 왜 닮고 그럽니까?”
덕분에 두 배로 피곤하게 생겼잖아, 하고 서문경이 투덜거리며 과시하듯 목을 이리저리로 돌리고 자신의 어깨를 주물렀다. 한참 뒤에야 서문경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챈 엄헌영이 확 얼굴을 구기고 성을 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서문경이 더 빨랐다, 오늘의 서문경은 어쩐지 전보다 배는 서두르는 듯한 인상이었다.
“당신은 그냥 속은 겁니다. 그러니 어서 일을 해결하고 최유 놈을 족칠 생각이나 하십시오.”
“물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서문경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하려는 거냐는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엄헌영에게 서문경이 다짜고짜 요구했다.
“궁으로 가십시다.”
“뭐? 궁?”
“폐하를 만나십시오.”
폐하, 하고 서문경이 말하는 순간 당연한 듯이 엄헌영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것을 본 서문경이 엄헌영이 무어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다다다 쏘아 붙였다.
“설마 이런 상황에, 무조건 싫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믿겠습니다.”
“······.” 그 설마가 정말이었던 듯, 불만스레 꾹 입을 다문 엄헌영이 잠시 후 변명처럼 내뱉었다. “내 침소를 나가는 것조차 힘이 드는 판국에 궐은 무슨 궐이냐.”
“떼쟁이가 머리까지 나쁘군.”
“무어?!”
서문경이 짜증스레 내뱉는 말에 경악 반, 분노 반으로 엄헌영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서문경이 콧방귀를 한 번 뀌고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애초에, 제가 어떻게 여기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하고 말한 서문경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미닫이문을 여는 시늉을 했다. 서문경을 노려보느라 가늘어져 있던 엄헌영의 눈이 순식간에 튀어나올 듯이 커다래졌다. 분명히 꽃가루와 먼지만 날아다니는 것이 고작이었던 서문경의 앞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었다.
사람 하나가 오가는 것이 고작일 그 작은 공간에는 희고 검은 날짐승이 홰를 치고, 죽 길게 빼어 올린 햇솜 같은 구름 따위가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엄헌영의 눈에도 익숙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아주 낯선 것이기도 했다.
이 세계의 하늘이자 사계를 잇는 ‘하늘’.
“들어가세요.”
우리 용님의 심기가 불편해지시면 가다가 중간에서 뚝 떨어질 수도 있으니 저를 꼭 잡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하고 서문경이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좋을 말을 얄밉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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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 있었던 말은 이미 탈진하여 쓰러진 지가 오래였다. 탈진한 말을 그 자리에서 버리고 그는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휘청거리면서. 아니면 이미 쓰러져서 짐승처럼 네 발로 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슨 모양새로 움직이고 있는지 따위가 아니었다. 움직여. 움직여라. 계속해서, 멈추지 말고.
이미 숨결에서는 단내가 났다. 숨이 점점 차오르는 탓인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몸은 흡사 불덩어리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무엇부터, 대체 무엇부터 잘못됐던 것일까, 무엇부터 어긋난 걸까.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그러나 머릿속이 산산조각 난 거울이 된 것처럼, 원하는 기억을 찾기가 힘들었다. 엉망진창이 된 기억이 멋대로 다른 기억을 비추고 반사하고 어지럽혔다.
도대체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이지? 이 기억은 대체 언제의 것이고, 그리고 이 얼굴은···, 내 유년기인가 아니면 지금의 것인가? 이것은? 또 이것은? 이 사람은? 그 일은? 또 나는, 나는. 나는···.
나중에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어졌다. 무엇부터 잘못된 것인가, 누구의 탓인가, 나는 무엇을 하려 했던가, 무엇을 이루고자 그토록 발버둥 쳤었는가, 그 모든 것을. 나중에는 결국 하나의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에 남았다.
도망치자.
멀리, 계속해서 멀리, 조금이라도 더 빨리, 조금이라도 더 그 아이에게서 멀어지자. 혹여 자신이 상상하는 그 무서운 일이 실제로 일어나더라도, 그 ‘귀신’이 그 아이를 해할 수 없도록, 멀리, 저 멀리로 사라져 버리자.
하지만.
도망치는 것 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걷고 달리던 그가 어느 순간 우뚝 멈추어 섰다. 주루룩 핏줄기가 피부를 타고 떨어져 그의 발등을 적셨다. 그러나 그는 그조차도 눈치 채지 못하고 멍하니 뒤만 돌아보고 있었다. 뒤돌아보는 눈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이 ‘귀신’을 품고 사라져도 또 다른 생귀(生鬼)가 그 아이의 곁에 붙어 있었다. 그것을 내버려 두어도 되는 것일까. 그 생귀는 어떤 의미에서는 ‘귀신’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였다. 자신이 이대로 도망치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 생귀가 분에 미쳐 날뛰며 그 아이에게 어떤 해를 끼칠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
“아······.”
입술이 의미 없는 신음을 내뱉었다. 잔뜩 마른 입술이 투툭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입 안에서 쇠맛이 났다. 절벽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절벽 끝에서 맛본 절망감에서도 마찬가지로 비린 맛이 났다.
**
눈이 마주친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 차가워진 공기 사이사이로 여러 가지 감정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세기도 힘든 시간 내내 서로를 멀리한 탓에 느끼는 어색함과 다소의 머쓱함, 그리고 거의 의무적으로 느끼는 부자연스러운 거부감과 그 표면 아래에 들어 있는 죄책감 따위의 것들이.
불편하게 이어지는 정적 사이로 다만 숨을 내뱉고 삼키는 소리만이 울렸다. 그 숨소리는 숨을 쉬는 사람의 심정을 대변하듯 지나칠 정도로 느렸고 무거웠다.
“왜···.”
한참 후에야 엄헌영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와 어조 모두에서 거부감 이외의 감정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왜 나를 보자 했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제가 마찬가지로 적대감에 찬 대답으로 되받아쳤다.
“말이 짧군, 장(杖)맛을 보고 싶어 살이 근지러운 모양이로구나.”
“이···!”
“용호군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는 풍신(風信)을 들었는데, 용호군에서는 몸뚱이가 어찌 움직이는지만 긴요하게 생각하고 그 대가리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영 생각지 않는 모양이로고.”
이어지는 황제의 독설에 엄헌영과 황제 사이의 분위기가 불꽃이라도 튈 것처럼 험악해지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서문경이 나섰다. 평소보다 두 배는 두꺼운 침금(寢衿) 위에 누워 있는 황제와 구슬주렴 밖에 장승마냥 버티고 서 있는 엄헌영 사이에 앉아 있던 서문경이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매미만도 못한 인간들.”
“무어?”
“죽고 싶으냐?!”
서문경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와 엄헌영이 반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황제가 서문경에게 으르렁거리는 엄헌영을 험악하게 위협했다, ‘국부가 될 이에게 죽고 싶으냐니, 네 놈이야말로 죽고 싶으냐?’ 다시 으르렁아르렁거리기 시작한 황제와 엄헌영을 보고 서문경이 말을 고쳤다.
“매미는커녕 매미 허물만도 못한 인간들 같으니, 매미는 제대로 울기라도 하지, 당신들은 대체 뭘 하는 겁니까? 그 머리하고 그 입은 장식입니까?”
“젠장, 내가 입 있는 벙어리 노릇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 따위로 쪼고 난리야?”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못하고 헛소리만 지껄여대는 입은 차라리 안 열리는 게 나은 것 아닙니까? 정말 폐하 탓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주제에.”
“뭐···,”
“그저 당신은 그겁니다. 단지 누구도 선택할 수 없었던 것뿐입니다.”
“제안, 네 놈 설마 그 때 일을···!”
당장 서문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아채고 엄헌영이 성을 냈다. 그러나 그 말을 서문경이 냉큼 가로채는 바람에 엄헌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네, 들었습니다. 하지만 따지는 것은 나중에 하시고 일단은 제 말부터 들으십시오, 안 그러면 서로 마음에도 없는 말로 다투다가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으니까.”
“대체 무슨 자격으로?”
“자격? 없지요. 당사자도 아닌 제가 무슨 자격이 있겠습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도 별로 끼어들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과 폐하가 코끼리 코 잡고 기둥이니 관이니 하든지 말든지 저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요.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오지랖 넓게 끼어드는 겁니다.”
비난에 더한 비난으로 답하는 서문경의 험악한 태도에 엄헌영이 순간적으로 기가 질려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문경이 곧바로 방금 전 하던 말을 이었다. 서문경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당신은 사실 아무 것도 선택한 것이 없습니다.”
그 말에, 조원이 비웃듯 했었던 말이 생각나 엄헌영이 욱해서 반박했다.
“아니. 나는 분명히 선택했다.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보호해야 하는지.”
“아니요. 당신이 확실히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그저 모든 판단을 보류한 채 그 상황에서 가장 약해 보이는 사람을 감싸고돌았을 뿐입니다, 바로 경혜 현주 말입니다.”
“함부로 마마를 입에 올리지 마라!”
“왜요? 제가 현주를 모욕하기라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화를 내십니까,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아닙니까? 경혜 현주가 아닌, 당신이요.”
서문경이 앉은 채로 엄헌영을 올려다보며 쏘아붙였다. 분명 올려다보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깔아보고 있는 것처럼 그 모습이 위협적으로 느껴져서 엄헌영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절대로 저 놈이 하는 헛소리 따위에 뱃속이 우릿우릿해져서는 아니었다.
서문경이 계속해서 말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당신도 더 이상 아이가 아닙니다. 당시의 일을 냉정하게 생각해 볼만큼 충분한 시간이 흘렀고, 또 그만큼 머리도 커졌습니다. 시야도 넓어졌을 테고요. 하지만 당신은 계속해서 같은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요, 왜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이야 알 수 없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
“당시 수상의 입장을 이해하고, 폐하의 입장을 동정해도 그것은 현주에게 미안한 일이 아닙니다.”
“···조용히 해.”
“자신의 정인을 아버지에게 약탈당하고도, 수상은 아버지에게서 정인을 되찾아 오지 못했습니다. 폐하는 현주의 부친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결코 알리지 말았어야 할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말해 버렸고, 제 사촌 누이를 괴롭게 하는 아버지에게 대항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현주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멋대로 말하지 마라! 마마께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뿐이다.”
“맞습니다.”
서문경이 뜻밖에도 선뜻 수긍했다. 그것이 의외였는지, 불같이 성을 내던 엄헌영이 멈칫했다. 그러는 사이 서문경은 담담하게 덧붙였다,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라고? 엄헌영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서문경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주와 마찬가지로, 수상도 폐하도 그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뿐입니다. 수상도, 폐하도, 그 때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현주처럼 수상도 폐하도 그 때는 아이였습니다. 불합리한 태도를 취하는 어른들을 상대로 항거하기에는 너무 어렸습니다. 그 뿐입니다. 아마도 이제는 당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피해자는 현주 한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어느새 나직해지고 어느새 가시가 사라진 서문경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현주가 더 불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
엄헌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은 서문경도 그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서문경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주제넘은 참견을 해서 죄송합니다.’
그 때, 잠자코 서문경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던 황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엇 때문에 그 때 일을 들먹이는 것이냐. 네 성격에 아무런 까닭도 없이 그런 짓을 한 것은 아닐 터인데. 또한, 저 이는 어찌하여 부르자 한 것이더냐.”
그 말에 꾹 입을 다문 채로 시선을 굳히고 있던 엄헌영이 퍼뜩 서문경 쪽을 쳐다보았다.
“제안이 나를 보자 한 것이라 했잖나?”
“정확히는 폐하를 만나라고 했었지요.”
엄헌영의 말을 정정한 서문경은 답을 요구하는 황제의 시선을 느끼고 눈살을 구기면서 다시 말했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에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
“수상을 찾아야지요.”
“희 형님을···.”
찾는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황제의 어조는 어쩐지, 어디인지도 가늠하기 힘든 이를 되뇌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와 대비되는 어조로 엄헌영이 말했다, ‘물론 찾아야지. 서엽 놈보다 먼저.’
“서엽의 뒤를 밟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그가 수상의 행방을 알고 있다면 그의 뒤를 밟는 것보다 쉬운 길은 없을 테니까요.”
“놈이 형님의 행방을 알고 있다고?”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
서문경이 놀라서 목소리를 높이는 엄헌영에게 주의를 주는 시선을 보낸 다음 황제에게 물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황제가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냐?”
“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아무리 천견을 수하로 두고 있다고 해도, 천견이란 사람은 자신의 ‘힘’ 이상 가는 ‘힘’을 가진 사람의 행방은 추적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수상은 일단 용인입니다, 그러니까 천견은 수상이 자신이 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서엽의 그 여유로움을 어찌 설명할 수 있단 말이냐?”
황제의 물음에 서문경은 손으로 제 입가를 가린 채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다가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수상의 행방이 아니라···, 수상의 행동을 예상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행동이라?”
“더 정확하게는, 수상의 생각을 파악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사람이란 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는 기이하도록 단순하게 행동하곤 하는 법이니까요. 이리 재고 한 번 더 꼬아 보는 것 없이 평소의 버릇이나 생각대로···.”
잠시 후, 서문경이 지금 막 생각났다는 듯이 내뱉었다.
“아마, 서엽이란 사람은 아직 수상에게 원하는 것이 남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천제사를 미룬 겁니다, 폐하가 있어도 수상이 없으면 안 되고, 또 수상이 있어도 폐하가 없으면 안 되는 그런 것이요···. 그게 아니고서는 그 사람의 행동은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수상을 놓치고도 그 사람은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지요. 그리고 그건 아마···.”
“확신···.”
불쑥 황제가 중얼거렸다. 서문경은 하던 말을 멈추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엄헌영의 눈도, 여전히 찌푸린 그대로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황제 쪽을 향했다. 뱀처럼 세로로 가는 황제의 눈이 느릿하게 한 번 깜빡였다.
“희 형님이 돌아올 거라고, 그렇게 확신하는 건가.”
“네.”
서문경이 산뜻하게 느껴질 정도로 바로 긍수(肯首)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이 결론을 내 놓고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허나, 무엇 때문에?”
“글쎄요···.”
서문경이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황제가 찌푸린 눈으로 그런 서문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서문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 생각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엄헌영이 물었다.
“그럼, 뭘 해야 하지?”
“생각이요.”
서문경이 곧바로 대답했다.
“생각?”
“예, 생각이요. 도움을 드리고 싶어도 유감스럽지만 저는 수상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신과 폐하,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곰곰이 생각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교류가 없던 동안 그 사람이 예전과는 딴판으로 변해 버렸다면 그 사람의 행방을 찾는 일은 요원한 일이 되겠지요. 하지만 만일 수상이 당신들이 알고 있는 그 사람에서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면.”
문득 서문경이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고 격려하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뗬다.
그러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분명히, 서엽이 수상을 찾는 것보다도 먼저.”
**
태황태후가 잘근잘근 손톱을 짓씹었다. 얇은 유리알처럼 곱게 다듬었던 열 손톱이 금방 너덜너덜 넝마 같은 거치상(鋸齒狀)이 다 되었다. 딱, 하고 단단한 손톱을 씹을 때마다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섞여서 나왔다. 딱 까드득 딱 아드득 딱딱딱딱, 듣기 껄끄러운 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지자 주변 궁인들의 표정도 점점 더 딱딱해지고 짜증스러워하는 기색이 서렸다.
평상시 같으면 사풍(邪風)스러운 상전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느라 생각도 못할 태도였다. 하지만 그럴 여유조차도 없을 정도로 지금 운현궁 내의 공기는 날카롭게 날이 서있었다. 그것은 태황태후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슴을 내리 누르는 초조감과 공포에 휩싸인 태황태후는 자신의 바로 옆에 바윗덩어리가 떨어져도 모를 만치 정신이 딴 곳에 가 있었다.
바로 어제, 상곡(象谷) 길지에서 천제사가 열렸다. 이 대 용황제를 하늘에 아뢰는 이번 천제사는 애초에 시작부터 불안요소를 안고 시작한 제사였다. 이 대 용인은 둘, 허나 개중 하나는 ‘둥지’로 모습을 감춘 상태였고 또 나머지 하나는 혼절한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한 술 더 떠 천제사 당일 신단까지 용님께 아뢰올 용인이 누구인지, 조정을 공론을 하나로 모으지도 못한 채였다. 제사장에 나아간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뱃속에 꿍꿍이속을 감춘 채로 천제사가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불길하였던 천제사는 결국 무시무시한 파국을 맞이하였다. 모습을 감췄던 황제는 인계로 돌아왔으나 용황제에 오르기를 거부하였고, 그를 이 대 용황제로 지지하는 이들의 수장격인 헌의공 서엽이 황제에게 그리하실 수는 없다 강제로 천제사를 강행하는 가운데 수상 체제공 서현이 감히 신성한 제장 벽을 부수고 난입하여 황위를 찬탈하려 들었다. 서엽의 저지로 그 역적은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금군은 도망치는 역적을 붙잡는데 실패했다.
때문에 수상을 용황제로 지지하였던 재관들과, 특히 수상을 열렬히 옹호하여 황제과 선제(先帝)를 모욕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던 태황태후는 현재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궁지에 몰려 있었다.
호위라기보다는 독시(督視: 감시)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태도의 금군들에게 둘러싸여 처소로 돌아온 내내, 태황태후는 운현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지금 운현궁은 도편으로 무장한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운현궁에 속한 이는 나 어린 궁녀 하나조차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사실상 황제의 칙서가 내려와 태황태후에 대한 처분이 분명해질 때까지, 운현궁의 모든 입구를 폐하고 태황태후를 그 안에 근신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를 두고 대부분의 사람이 수군거렸다. 제 아무리 기세충천(氣勢衝天)한 태황태후라 해도 이번에는 무사히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평생 빙궁에 유폐되거나 혹은 폐서인되어 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될 수도 있겠다.
“일이 어찌, 일이 어찌 이리 될 수 있단 말인가!”
벌써 몇 십 번이고 반복한 말을 태황태후가 또다시 중얼거렸다.
분을 못 이긴 태황태후가 힘주어 제 무릎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이미 손톱 아래의 붉은 살이 보일 정도로 짧아진 손톱은 맥을 못 추고 치맛자락에서 미끄러졌다. 그것이 더 성을 돋웠는지 태황태후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내던졌다. 하지만 그 또한 몇 번이고 반복한 일인지라, 곁에 있던 청자연적을 던지고 나자 태황태후의 침방에는 더 이상 던질만한 물건이 남아 있지를 않았다.
아악! 태황태후가 발작하듯 파드드드 몸까지 떨며 신경질적인 고함을 내질렀다. 문가에 앉아 있던 궁인들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그리도 자랑하던 제 비단결 같은 머리를 마구 쥐어뜯던 태황태후가, 어느 순간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침방 안을 뱅글뱅글 맴돌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미친 게야, 세상이 미쳐서 돌아가는 게야. 미치지 않고서야 일이 이리 될 리가 없느니. 어찌 그 놈이, 그 덜떨어진 놈의 자식새끼가 용일 수가 있어. 우리 소현을 잡아먹고 남은 그 멍텅구리 놈의 아들놈이. 그 놈 때문에 이 제국이 얼마나 위룽튀룽 했었는데, 내가 그것을 숙청(肅淸)하려 얼마나 애를 썼었는데,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느니. 내가 이 예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자기희생을 했었는데 이제와 이 무아가 뒷방퇴물 신세가 될 판이라니···!”
아니, 아니다, 하고 바로 태황태후가 아예 손가락을 씹으며 초조히 내뱉었다.
“어쩌면, 폐서인이 될 지도 모르는 일···!”
태황태후가 콱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허나, 이 무아가 그리 쉽게 갈 것 같으냐?”
그 때였다. 문간으로 다가온 궁인이 무어라 소곤거리자, 그 말을 전해들은 내관이 태황태후가 성노할까 저어하며 아뢰었다.
“마마, 우상궁이 들었나이다.”
“우상궁이!”
당장 성을 내며 발길질을 하실 지도 모르겠다 생각하였던 내관의 얼굴이, 태황태후가 보인 뜻밖의 반응에 몹시 어리둥절해졌다. 태황태후가 버선발로 문지방까지 나와 문설주를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부여잡고 화급히 말했다.
“들라, 어서 들라하란 말이다.”
우상궁이 침방으로 들자마자 장지문을 굳게 닫게 한 태황태후가 문 앞의 나인과 내관들까지 모조리 물린 후에, 주렴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우상궁을 닦달하였다.
“어찌 되었느냐? 오라버니께 답신은 받아 왔겠지?”
“예, 마마.”
하고 우상궁이 품 안에서 꺼낸 서신을, 태황태후는 물고기를 낚는 매라도 된 양 매섭게 낚아채갔다. 허겁지겁 서신을 연 태황태후의 얼굴이 다음 순간 정반대로 돌변했다. 희망에 가슴이 부풀어 있다 불시에 등이 채여 더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진 사람 같은 표정이었던 태황태후가 이윽고 불같이 성을 냈다.
“오라버니께서는 어찌 이리 모진 말씀을 하시는고?!”
입에서 불을 뿜는 태황태후의 손아귀에서 서신이 구겨졌다. 구겨진 서신을 태황태후가 갈가리 찢어발기며 소리쳤다.
“무어라? 그 일을 밝히면 황귀비의 예문(譽聞)이 낙명(落名)할 것이 명약관화하므로 아비된 자로서 결코 그리할 수는 없다? 지금 제 소매의 신세가 언제 끈이 떨어질지 알 수 없는 형국인데 제 죽은 딸년의 신후명(身後名)이 중하더냐? 이리 되고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지, 이 무아가 잘못되면 자기라고 어디 몸이 성할 수 있을까! 더구나 제 딸년의 영명이란 것도 어차어피 거짓된 것 아니더냐? 살기 위하여 그 사실을 밝히는 것이 무어가 나빠? 허설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인 것을!”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태황태후가 털썩 보료방석 위에 주저앉았다. 한 쪽 무릎을 괴고 안은 그녀가 세운 무릎을 콱 끌어안고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어디, 두고 보아라.
“내 그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즉시 땅과 하늘이 뒤집힐 것이야. 결코 제안 그 놈은 제좌에 오르지 못할 것이니라. 오냐, 그렇고말고. 또한 진화 그 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