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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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대립한 두 사람이 대화(對話)라기보다는 선언(宣言)이라는 말에 가까운 말을 번갈아 주고받았다. 황제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심은 확고하다.”

“신의 결심도 반석(磐石)처럼 굳건하나이다.”

“어심이 그러하다 하는데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참견하는가.”

“신은 선제 때의 공신으로서, 제국을 위하여 좀 더 단단하고 넓은 길로 나라를 인도할 따름이옵니다.” 

“그대 자신을 위하여가 아니라?”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옵니까.” 

하고 말하며 서엽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는 말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용안(龍眼)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한 후에 못을 박듯 말했다. 

“이 늙은이의 모든 언사와 행동은 모두 지고하신 천자를 위한 것. 하늘에서 이 자리를 굽어보고 계실 용님과, 땅 밑에서 이 모습을 올려다보고 계실 혼께 맹세컨대 신의 이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이옵니다.”

“······.”

당치도 않은 말을 입술에 침 한 번 바르지 않고 지껄여대는 서엽의 머릿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려는 듯, 황제가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서엽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는 사이 서엽은 무어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싱긋이 웃는 얼굴을 하고는 황제의 주변을 느린 걸음으로 맴돌았다. 황제가 반사적으로 그 움직임을 좇자, 서엽이 문득 입을 열었다.

“신도 무엇이 정말로 천자를 위한 일인지 끊임없이, 참으로 치열하게 고뇌하였사옵니다만 폐하께옵서 이리 강건한 모습으로 돌아와 주시었으니 신의 일체고액(一切苦厄)도 이제 종말을 고함이옵니다.”

황제의 눈썹이 꿈틀했다.

“강건한···?”

“그러하옵니다. 용인의 육체로 가변례를 치러내고도 무사히 생존하고 계심을 증명하는 모습이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다만, 하고 서엽이 말끝을 늘렸다.

“매끈하던 가죽에 이토록 흠집이 난 것은 안타까운 일이옵니다.”

그렇게 말한 순간, 내내 싱글벙글하고만 있던 서엽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으나 그것은 그야말로 찰나의 일이었다. 서엽이 약간 숙였던 머리를 다시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은 다시 정답고 환하게 웃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가 곧바로 말을 이으며 황제를 향하여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충심으로 귀환을 경하 드리옵니다.”

그 모습을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살피면서, 한 동안이나 대답이 없던 황제가 이윽고 생각을 굳혔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생(幼生)도 아니고 나도 먹을 만큼 먹은 자가 어찌 그리 탈바꿈을 해대는지 저의(底意)가 의심스러우나,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니 더는 언급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짐은 결코 천제사를 치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벌어진 판이옵니다, 무를 수는 없사옵니다.”

“해서 그대의 계자에게 선위하겠다 뜻을 밝히지 않았던가!”

“결코 안 될 일이옵니다.”

“그것이 어심이다! 아니, 황명(皇命)이다!”

고장이 나기라도 한 것처럼 한결 같은 얼굴로, 똑같은 말만을 반복하는 서엽에게 성이 났는지 황제의 언성이 높아졌다. 황제가 노성을 내지르는 순간, 쿵, 하는 충격음이 울리더니 그의 발 주위에서 둥그렇게 칼바람이 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의 취설(吹雪)이 휘몰아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칼바람이 제장 전체에 사정없이 몰아쳤다. 한 순간에 공기 중의 모든 수분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갑작스런 칼바람에 사람들이 비명을, 혹은 당혹에 찬 고함을 지르며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그랬다가 개중 몇몇이 깜짝 놀란 얼굴로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드러난 볼과 목덜미 따위를 쓸었던 손바닥에 피가 묻어 있던 탓이었다. 

“···피!”

“피가!”

“피해! 피해라!”

고작 바람 몇 번 날린 것만으로도 살가죽이 두부 썰리듯이 썩둑 베어져 나갔다.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최대한 바람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러나, 제장 안이 온통 난장판이 된 가운데에서도 서엽만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평온한 얼굴을 하고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또 같은 말을 반복했다, ‘송구한 일이나, 받아들일 수 없음이옵니다.’

“황명이라 하였느니!”

“황명?” 

서엽의 한 쪽 입꼬리 끝이 거의 귓불에 닿을 정도로 크게 휘어져 올라갔다. 

“불가(不可)하옵나이다.”

결국 황제가 폭발했다. 황제가 파르르 진저리를 치며 노성을 질렀다.

“닥쳐라! 짐에게는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느니!”

“여유?” 

아아, 하고 서엽이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그의 의미심장한 행동을 못 본 척하고 지나치려던 황제의 발이, 이어진 서엽의 말에 다가 멈췄다. 서엽이 중얼거렸다. 

“그래, 애가 탈만도 하시겠지요. 잠매(潛寐: 죽음)까지 무릅쓰고 살려낸 애조가 어느 곳에 떨어져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

무시무시한 얼굴로 멈춰선 황제가, 순식간에 서엽의 멱살을 낚아챘다. 

“이놈···!”

“신은 나에 어울리지도 않게 눈이 밝은 고로 범 세계에서 온 참새가 어느 곳을 날아다니고 있는지 모두 알고 있사옵니다.”

“헛소리 하지 마라!”

“황작(黃爵).”

황작(黃雀: 참새)이 황작에 있다니, 이것 참 재미있는 우연이 아닙니까. 서엽이 웃으며 말했지만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작은, 수도 원경 서북부에 있는 마을의 이름으로 이 길지와는 말로 달려 겨우 몇 분 거리에 있었다. 물론 서엽 저 자가 자신을 동요시키기 위해서 아무런 말이나 지껄여대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허나, 허나, 만일 저 자가 헛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로 경이가 황작에 있다고 하면? 

싹트기 시작한 의혹에 서엽이 못을 박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사옵니까? 술사들을 불러 모아 소환술을 행하게 한 이도 이 서엽이니.”

“······!”

“아.” 그러더니 서엽이 지금 생각났다는 듯이 갑자기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귀띔해 드렸어야 할 말을 잊고 있었사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이런 것이랍니다. 상황에 맞지도 않는 너스레를 한껏 떤 서엽이 아직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황제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주 약간, 다른 술이 섞여 있습니다만 크게 개의치는 마시옵소서.”

“···무슨 말이지?”

“소환술에, 말입니다.”

하고 대답하며 서엽이 갑자기 자신의 혀끝을 힘껏 깨물었다. ‘무슨 짓을?!’, 서엽의 입에서 철철 흘러 내오는 선혈(鮮血)에 놀란 황제가 무심코 손에서 힘을 빼자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황제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온 서엽이, 그대로 단도를 꺼내 자신의 중지(中指)와 검지(檢知)를 한꺼번에 잘랐다. 쑹덩 두 손가락이 잘려 나가며 잘린 자리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그 피로 서엽이 돌바닥에 알아보기도 힘든 문자를 커다랗게 써나갔다. 마지막 획을 그은 서엽이, 황제를 향하여 활짝 웃었다.

“계박(繫縛: 결박)술이옵니다.”

황제의 발아래에서, 다시금 그 청금색 아지랑이가 솟아올랐다.

“아무리 용인이신 일황자라 한들, 이토록 약해진 상태에서는 쉽사리 뿌리치실 수 없을 것이옵니다. 황태자시강원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술사들과, 이 서엽이 제물을 받쳐 강화시킨 술이니 말이옵니다.”

**

잘려서 바닥을 나뒹구는 자신의 손가락을 죽은 애벌레 따위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서엽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황제의 몸을 빙글빙글 감싸 돌던 아지랑이는 이미 철쇄보다도 단단한 족쇄가 되어 황제의 두 팔다리를 움켜잡고 있는지가 오래였다. 

몸부림을 치던 황제가 콱 이를 악물고 손끝에 힘을 줬다. 그나마 멀쩡하던 왼뺨이 가뭄이 인 논밭처럼 쩌적 갈라지면서 왼손가락 끝에 칼날 같은 다섯 개의 손톱이 튀어나왔다. 황제의 몸을 묶고 있던 금빛 족쇄에서도 쩍 큰 금이 갔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도 서엽은 당황하는 대신, 단도로 자신의 약지(藥指)를 잘랐다. 금이 갔던 족쇄가 다시 붙었다.

서엽이 황제를 향해 다가가며 심상한 투로 말했다.

“신의 수지(手指: 손가락)는 열, 족지(足指: 발가락)는 열. 또한 신의 팔다리는 넷. 합이 스물하고도 넷이 되옵니다. 소신의 몸뚱이가 잘려 나가는 것이 먼저일지, 아니면 일황자의 옥체가 망가지는 것이 먼지일지.”

하고 말하다 그가 안 되지, 하고 말하듯이 머리를 모로 기울이며 싱긋 웃었다.

“농이었나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천자의 옥체가 상하는 것은 안 될 일이지요. 그러니-.”

서엽이 뒤를 돌아보고 외쳤다.

“익익위(翼翊位), 찬선(贊成), 위종사(衛從師), 필선(弼善), 진선(進善). 이리로 오라.”

부름을 받은 이들은, 다름 아닌 황제에게 소환술을 행했던 황태자시강원의 관원들이었다. 서엽의 부름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그러나 완벽한 서엽의 수족은 아닌 듯, 뜻밖에도 두려움과 망설임으로 가득 찬 표정과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도움을 준 술법에 손발을 묶인 황제를 보고 경악하여 표정이 굳은 그들에게, 그들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서엽이 명령했다. 

“모시어라.”

“···허나.”

“황상을 위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말해도 시강원 관원들이 움직이지 않고 망설이자, 서엽이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누구의 덕으로 여태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인지 잊은 것인가?”

“며, 명 받잡겠습니다!”

서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색이 된 관원들이 콱 이를 악물고 황제를 향하여 달려들었다. 

축대 위에서, 황제는 차대(次代) 용황제로 고해질 이가 아닌 그를 위한 제물처럼 수십 수 백 개의 족쇄를 찬 채로 눕혀졌다. 날카로운 이와 손톱을 드러낸 황제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땅과 공기가 동시에 요동치며 술법으로 만든 족쇄가 부서졌지만 시강원 술사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족쇄를 만들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축대 위는 점점 폐허에 가까워졌다. 황제의 노여움에 반응한 땅이 흙으로 분하여 산산이 부서지고 미친 듯이 칼바람이 날았다. 땅 아래에서는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하늘은 급속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황제는 사람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한 마리 짐승의 모습에 가까웠다. 

뱀 같은 눈을 부릅뜨고 손톱을 세운 채 으르렁거리는 황제의 앞으로, 무심한 표정을 한 서엽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 때 툭, 하고 손가락이 또 하나 떨어져 황제의 귓가로 굴러갔다. 서엽이 말했다.

“부디 성노를 가라앉히시옵소서. 마마의 옥체는 마마 한 사람의 것이 아니오니.”

“미친 놈···!” 황제의 목구멍 아래에서 섬뜩한 노후(怒吼)가 흘러나왔다. 눈에도 소름 끼치는 빛이 번들거렸다. “네 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애초에 제 일신의 평안함을 생각하였다면 벌이지도 않았을 일.”

허나, 하고 서엽이 한 손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구석에 숨어,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상황을 훔쳐보고 있던 집사관과 배제관들이 정면으로 서엽의 눈길을 받고 숨을 멈췄다. 서엽의 손가락 끝이 조금 움직였다, 이편으로 올라오라는 뜻이었다. 그들이 거의 기어서 축대 위로 올라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서엽이 말을 이었다.

“곧입니다.”

위로차 하는 말이 아니라, 참으로. 참으로, 끝. 그렇게 중얼거리는 서엽의 얼굴에 일순 그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벅찬 환열(歡悅)이 넘치는 듯 했다.

서엽이 제관(祭官)들에게 명령했다.

“천제사를 행하라.”

“하, 하오나 폐하께옵서 이토록 거부하시는 판국에 어찌···,”

“행하라하지 않았던가!” 

제관의 변명을 끊고, 서엽이 고함을 질렀다.

“내 입이 닳고 혀가 망가지도록 말하지 않았던가? 이 모든 것이 황상을 위한 일이다! 그러니 그대들이 당장 내 말대로 행하지 않을 시,” 비난하는 빛을 띤 서엽의 눈이 제관들을 훑었다. 당장 움찔하며 몸을 움츠리는 제관들로부터 시선을 돌리면서 서엽이 말했다. “그대들이 역심을 품고 있다 여겨도 좋은가?”

“역심이라니요!”

기겁을 한 제관들이 비명을 지르자, 서엽이 차게 웃었다.

“역도의 무리가 아니라면, 이리로 올라오라. 그대들이 천제사에서 맡은 역할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을 상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말을 따르지 않으면 바로 역도(逆徒)로 몰 것이 눈에 선한 서엽의 태도에, 제관들이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황제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다시금 주춤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결국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다음 제향(祭香)에 불을 붙이기 위하여 은으로 만든 관세위(?洗位)에 담긴 정화수에 손을 담갔다. 

찬 물에 손을 담구어도 노여움에 차 부들부들 떨리는 황제의 눈이 머릿속에서 떨어지지가 않았지만 하늘에 자신이 정통한 황제임을 고하고 용황제로 공고히 서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황제로서도 좋은 일이면 좋은 일이었지, 결코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집사관 문희학은 제향(祭香)에 불을 붙이고, 집작(執爵)을 맡은 배제관과 삼주(三酒)를 올리는 배제관들에게 눈짓을 한 다음 외쳤다.

“초헌(初獻)!”

초헌관이 제향 앞에 사주를 올렸다. 푸른 기가 도는 은잔으로 만든 첫 잔은 국토와 백성을 상징하는 잔이었다.

“아헌(亞獻)!”

아헌례(亞獻禮)에 사용되는 잔은 금잔, 황제를 상징하는 잔이었다.

“종헌(終獻)!”

종헌례가 끝이 나면 모혈반(毛血盤)에 용님에게 바칠 아홉 필의 모혈(毛血)을 바친 후에, 집사관이 이미 술사들이 만들어 놓은 간계(間界)로 나아가 큰 소리로 적격자가 나타났음을 하늘에 고하고 대사례(大射禮)를 맡은 대전관(代奠官)이 하늘과 땅을 향하여 각각 세 번씩 활을 쏘고 나면, 천제사 중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끝을 고한다. 그 이후에 남은 것은 용님으로부터의 응답뿐이다.

차라리 어서 이 끔찍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끝이 났으면 하는 마음에, 문희학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창극(蒼極)에 거하시는 용님께 삼가 아뢰옵나이다! 옛 망식(亡息)의 시대가 끝을 고하고, 은혜롭게도 새 용아(龍兒)가 현화(現化)하사 그를 앞세워 새 하늘이 열리기를 용님 앞에 엎드려 바라옵나이다! 부디 이 고규(高叫)를 들으시어 메마른 땅에 구한감우(久旱甘雨)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 외침 뒤에, 다른 배제관들이 이어서 외쳤다.

“감패(甘?)를 내려 주시옵소서!”

“성총(聖寵)을 내려 주시옵소서!”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바닥에 엎드려 떨고 있는 제관들 사이를, 대궁(大弓)을 든 대전관이 헤치고 나아갔다. 간계로 나아가 있던 집사관이 인계로 물러나고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대전관이 차지했다. 간계는 말 그대로 용님이 계신 ‘하늘’과 제장이 있는 인계 사이의 세계, 간계로 들어간 대전관이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인계와는 확연히 다른 중력이 어깨를 짓눌렀다. 

원래대로라면 대사례는 천제사의 당사자인 황제가 치러야 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서엽의 명으로 대전관이 그 차례를 대신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에는 황제가 모습을 감춘 상황이었던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그 안에 수긍했었지만···, 

대전관은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망상일 수도 있으나, 처음부터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이제는 늦은 일-.

대전관이 활을 들어 활촉을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사계의 ‘하늘’을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 그가 힘껏 시위를 당기는 순간,

“···재앙을 자초하는구나.”

하늘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

깜짝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사계의 하늘은 방금 보았던 그 모습에서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럼? 대전관이 당혹스럽게 생각하는 순간 아까의 그 소리가 간계가 아닌 인계에서 또다시 들려왔다.

“제 손으로 관을 받아든 것이 아니라, 그 관에 억지로 짓눌린 자가 과연 성황(聖皇)이 될 것이라 기대하느냐.”

대전관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폐하. 

그러나, 돌아볼 수가 없었다. 돌아봤다가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직감이 들었다. 자신의 뒤에 짓눌려 있는 자는 인간을 넘어선 그 무엇, 보다 신에 가까운 그 무엇. 그러니 그 눈과 마주하고 그 목소리를 들었다가는 결코 저 분의 뜻을 물리칠 수 없게 될 것이다.

황제가 말했다.

“그대들은 폭군룡(暴君龍)을 만들고 있다.” 그 섬뜩한 말은, 저주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지처럼 들렸다. “한낱 인간으로서의 폭군도 능히 수만의 백성들을 해치고 나라의 기틀을 무너뜨린다. 허나 그대들이 만들려는 것은 그것을 넘어 액신(厄神)이다. 그대들이, 그대들의 식솔들이, 이 나라가, 이 세계가.”

과연 무사할 것 같은가?

대전관은 몸을 움츠렸다. 듣지 않아도 그 물음이 귓가에 울리는 듯해서 등골을 타고 찌르르 싸늘한 오한이 돋았다. 시위를 당긴 팔과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저절로 활을 든 팔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

그 때, 서엽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용황제란 신과 인간 사이의 반신(半神). 허나 신은 그리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어느새 대전관과 황제 사이로 걸어 들어온 서엽이 그 두 사람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엽의 불측무도한 말에 대전관이 할 말을 잃은 사이, 서엽이 느릿하다 못해 느긋하게까지 들릴 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긴 몸. 온 몸에 돋은 비늘. 빙주석(氷柱石)같은 이와 대도(大刀)나 다름이 없는 손톱···.”

픽, 하고 작게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것인가 했으나 착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히 웃음이었다.

“그 생김새대로라면 용이란 그저 긴짐승에 불과할 뿐.”

“어, 어찌 그런 말을···!”

이어진 말에 대전관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서엽은 불신(不神)을 넘어서 용황제와, 나아가 용님까지 곤욕(困辱)하였다. 용님의 나라에서 두 다리를 뻗고 살아가는 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발언이었다. 분개한 대전관이 뒤돌아서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천벌을 받을 것이요!”

“천벌?” 

돌아서서 바라본 서엽은 만면에 짙은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억!”

척척 소리를 내며 다가온 서엽이 대전관에게서 활을 빼앗고 그를 간계에서 인계로 내동댕이쳤다. 대전관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구는 동안 서엽은 간계로 들어가 단숨에 활시위를 당겼다. 비단을 찢는 듯한 소리가 소름 끼치게 제장 안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서엽이 내뱉었다.

“짐승은 자고로 우리에 가두어 사육해야 하는 법이지.”

결국 그리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하는 뒷말은 혀를 차는 소리 끝에 묻혔다. 

시위를 당긴 서엽의 손이, 시위를 놓았다.

하지만 그 직후에 들린 것은 핑, 하고 화살이 쏘아져 나가는 소리가 아니었다. 막 시위를 떠난 화살이 사계의 ‘하늘’로 나아가지 못하고 도중에 두 조각으로 쪼개졌다. 툭, 하고 바닥을 떨어져 발치를 구르는 화살을 서엽이 다소 멍한 눈길로 쫓았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의 일, 서엽이 이 정도쯤은 이미 예상했었다는 듯이 당혹한 기색 하나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제장 벽 한쪽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놀란 사람들과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던 대전관조차도 무너진 벽 쪽을 돌아보았다. 신성한 제장을 보호하는 벽이 무너진 것은 사상초유의 일이었다.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사이로 몇 사람의 인영과 함께 저벅, 저벅, 저벅, 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결국 제장 안으로까지 뛰어들었다.

누군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반역···, 인가?”

무리의 선두에 있던 이가, 훌쩍 발에서 내려 앞으로 나섰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사람들이 모두들 말을 잃었다. 그 끝없는 침묵 속에서 처음 말을 꺼낸 것은 제장 한 구석에서 제 늙은 오라비의 보호를 받으며 볼품없이 떨고 있던 태황태후 엄씨였다. 그녀가 두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한 때 호화롭기 짝이 없던 그녀의 예복은, 화려하게 입혀 놓았던 금박이 듬성듬성 떨어져 나가 오히려 더 비루하게 보였다.

“상국! 어서 오시오, 상국!”

그 꼴을 지켜보며 서엽이 비릿하게 웃었다. 

**

잃어버렸던 자식이라도 찾은 듯이 자신을 반기는 태황태후 엄씨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서현은 바로 축대 위로 올라갔다. 아직 간계에 들어 있던 서엽이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자신의 계자를 맞이하였다.

“역도의 무리들이 왔구나.”

그 말에 서현은 잠시 침묵하였으나 곧 입을 열어 담담히 응대하였다.

“어찌 말씀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 하고 비꼬듯 말한 서엽이 알겠다는 듯 말했다. “그래, 역사도 어차어피 승리한 자의 시각에서 쓰는 것. 내 역도라 표현하였다만 만분지일(萬分之一)이라도 네가 제좌에 오른다 하면 후에 사서는 네 행동을 일러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 쓰겠지.”

“후세 사람들이 무어라 하든 그 또한 개의치 않습니다.”

길어지려는 서엽의 말을 가로막으며 서현이 한 손을 내밀었다. 촥! 물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서현이 뻗은 다섯 손톱에서 금빛 갈고리 같은 손톱이 튀어 나왔다. 그 손톱 끝에서 금빛 바람 같은 것이 일렁거렸다. 

그것을 본 서엽이 물었다.

“···실심(實心) 해보자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이것 참.” 내가 아이를 잘못 훈육하였어, 하고 혀를 차며 서엽이 제장에 가득한 사람들을 한 번 돌아보았다. “내 이리 판단력이 뒤떨어지는 아이로 키운 기억이 없거늘.”

“금위군은 이군(二軍: 응양군과 용호군)으로 맞서게 하고, 아버님과 그 뜻에 찬동하는 이들의 사병은 그에 반대하는 이들의 사병으로 다스리면 그만입니다.”

“내 뜻을 따르고자 하는 술사들은?”

“이에는 이, 독에는 독으로.”

서현이 조용히 대꾸하자, 말없이 서현의 뒤를 따르던 창혜각 천객들이 일제히 뒤돌아서 축대 아래를 보았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축대 아래에 포진하고 있던 태학궁 술사들과는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서엽과 서현이 조용히 주고받는 문답 소리가 제장 안에 울렸다.

“제아무리 창혜각 천객들이라 하나 술사로서 제대로 된 교육은 받지 못한 이들이 부지기수. 단순히 ‘힘’만을 겨루는 경연이라면 모를까 실제로 전투를 치르기에는 경험이나 역량이 현저히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이냐.”

“때로, 지나치게 날카로운 교도(交刀: 가위)는 바윗덩어리마저도 부수는 법.” 

하고 대답한 서현이 축대 아래의 술사들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내, 적으나마 내 수족들에게 용인으로서의 ‘힘’을 나누어 주었으니 강철 교도가 이길지 그대들의 석암(石巖)이 이길지 궁금한 자는 시험해 보아도 좋소.”

“용인의···?!”

그 말에, 술사들의 얼굴이 단번에 희게 질리며 그들 사이에 큰 파문이 일었다. 개중에는 주춤주춤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는 이도 두엇 있었다. 눈에 뜨이게 동요하는 그들을 보고 서엽이 픽 웃더니 말했다.

“희야, 소희야. 내 우매하신 아드님.”

“······.”

“희, 네 ‘힘’은 일황자의 결계와 부딪친 이후로 채 회복되지 못한 상태가 아니더냐. 그런 것을 또 쪼개어 네 수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니, 이 무슨 대우(大愚)한 발상이란 말이냐.” 

“그리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아버님께서는 용인이 아닌지라 잘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서엽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뜻이냐?’

“소자의 ‘힘’이 시재(時在) 닳고 닳은 것은 사실이나, 용의 힘을 어찌 인간에 비하오리까.” 

그리 대꾸하는 서현의 손톱 끝에서 윙,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칼바람이 굽이쳤다. 그 칼바람이 단단한 돌바닥마저도 간단히 깎고 부쉈다. 그 바람을 가라앉힐 생각조차 하지 않고 서현이 오히려 서엽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제아무리 비바람에 닳았다 하여도 태산(泰山)은 태산이요, 제아무리 지쳤다 하여도 맹수는 맹수. 이 같은 사태를 예상하시고 소자의 ‘힘’을 소진시키기 위하여 일부러 황상과 부딪치게 하신 것은 알겠으나, 용인의 힘이 인간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는 미처 모르셨던 모양입니다. 아버님답지 않은 불찰이십니다.”

“나답지 않은 불찰이라···.” 

서엽이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턱 끝을 쓸면서 중얼거렸다. 그 사이, 서현은 축대 위에 멍하니 서 있는 집사관 문희학과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대전관을 지나쳐 술사들의 결계에 결박되어 있는 황제 바로 앞까지 다가가 거기서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지친 듯한 서현의 시선이 황제를 향했다. 황제의 외눈을 응시하며 서현이 황제에게 건네는 말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 모를 어조로 중얼거렸다.

“손톱도, 비늘도 돋지 않고 용안(龍眼)도 겨우 한 쪽만 뜨는 것이 고작···.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용한 상태가 아닙니까.”

“희, ···형님.”

“참으로 멍청한 짓을 저지르셨습니다.”

“형님, 저는 약조를 어길 생각이,”

“되었습니다.” 황제의 말허리를 끊은 서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물손님에게 황상께옵서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까?”

그 말뜻을 깊이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황제가 대답했다.

“적어도, 내게만큼은.”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하고 조용히 대답한 서현이 곧바로 등을 돌렸다. 희 형님?하고 자신을 부르는 황제를 두 번 돌아보지 않고 서현은 서엽에게로 다가갔다. 서현이 요구했다.

“활을 주십시오.”

“줄 수 없다 하면?”

“소자가 아버님을 구명(救命)하여 드릴 터이니 대신 그 활을 주십사 말씀 올리는 것입니다.”

그 말에 서엽이 비로소 서현을 돌아보았다.

“활을 주지 않으면 나를 죽이겠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아비가 제 욕심을 위하여 자식을 죽이려 드니 자식도 제 목숨을 구할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이까.”

“아비가 자식을 죽이려 든다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할 말을 하는구나.”

“다릅니까.”

소자에게는 같게만 보입니다, 하고 덧붙이며 서현이 백각예궁(白角禮弓) 머리의 양 뿔장식을 틀어쥐었다. 그 자리에서 날카로운 바람이 칼날처럼 서엽의 손등을 할퀴었다. 주름진 손등이 쩍 뻘겋게 벌어지며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다음은 손, 그 다음은 팔이 될 수도 있음입니다.”

“끝까지 싫다 하면 제 아비의 모가지도 잡아 비틀 놈이로고.”

하고 말했지만 그 말과는 달리 서엽은 웃고 있었다. 대궁을 사이에 두고 서현과 마주한 서엽이, 그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서현의 얼굴만 말끄러미 쳐다보다 어느 순간 의아하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

“정녕 아무 탈도 없느냐?”

“아버님께서 빼앗아 자신의 것처럼 유용(流用)하셨던 제 ‘힘’이라면 봉인호(封印壺)에서 이제 완전히 소자의 지배하에 들어왔습니다.”

“그렇겠지. 그러니 이토록 자신에 넘치는 것이겠지. 헌데 이 아비가 물어본 것은 그것이 아니라···.”

“······?!”

서엽이 활을 놓았다. 6척 대궁의 무게가 완전히 자신의 팔에만 실리자 서현은 잠시 당혹해하는 듯 했지만 그는 곧 침착하게 화살을 활시위에 메기고 시위를 당겼다. 목숨을 위협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서엽이 갑자기 활을 놓은 것이 의아하기는 했으나 이 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집사관이 구단 축대 위에서 ‘하늘’에 적격자가 나타났음을 고했고, 남은 것은 화살을 쏘아 적격자가 누구인지를 알리는 것 뿐. 이 때 자신이 ‘하늘’에 활을 쏘게 되면 하늘은 이 대의 용황제를 제안이 아닌 자신으로 인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 길었던 험로(險路)가 이제야-.

헌데 혼이 계신 물이 흐르는 땅으로 세 번 활을 쏘고 비로소 ‘하늘’을 향하여 서현이 활을 당기는 그 순간, 계속해서 침묵하던 서엽이 입을 열었다.

“그 항아리를, 확인은 했더냐?”

“······?”

“네 힘이 봉해진 그 항아리가 맞는지 확인은 했었냐는 말이다.”

서엽은 웃고 있었다. 서현이 대답하지 않자, 서엽이 재차 물었다.

“우리 소희는 미처 하지 못한 모양인데, 너는 어떠하냐?”

그 말은, 더 이상 서현을 향한 물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서엽의 뒤에서 들려왔다.

“하였습니다.”

“!”

대답이 들려 온 쪽으로 서현은 놀라 시선을 돌렸다. 대답이 들려온 곳은 다름 아닌 창혜각 천객들이 모여 있는 곳, 그 중에서도.

“사기(沙器)가 아닌 토기(土器)였나이다.”

천견, 최유였다.

서현과 동료 천객들의 경악한 시선을 담담히 받아 내며 그가 덧붙였다.

“헌의공께서 명하신 그대로.”

**

“놀란 것 같구나.”

별 희한한 것도 다 보았다는 듯이 서엽이 말했다. 기본적인 문제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애에게 한심한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며 말하는 어른 같은 투였다, ‘몇 번이나 말했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는 서엽은 자신의 관자놀이, 정확히는 눈 부근을 쿡쿡 손가락으로 찌르고 있었다.

“이 아비는 ‘눈’이 좋다고.”

빚어 만든 것처럼 표정이 없던 서현의 얼굴이 망연자실한 표정에서 점점 더 붉은 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서린 명백한 노기가 점점 짙어져 거의 살기로까지 변했다. 그가 범처럼 일갈했다.

“어찌! 어찌 네가!” 

목에서 마치 피가 토해져 나올 것 같은 일갈에, 최유가 시선을 피했다. 최유와 서현 사이에 서엽이 끼어들었다. 마치 서현의 시야에서 최유를 가리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현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서현의 몸이 반사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재롱을 피우는 손자를 보는 것 같은 흐뭇한 표정으로 응시하다 서엽이 말했다.

“당장은 그것보다 다른 것이 궁금해야 할 터인데, 소희야.”

“무슨,”

“토기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가.”

“······!”

“네 몸뚱이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서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형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황제가 서현을 불렀지만, 이미 어떤 목소리도 서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희 형님!, 황제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 서현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러자 불현듯 그에게로 훽 몸을 돌린 서현이 커다랗게 열린 눈으로 멍하니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동공이 열려 검은자위 전체가 동공인 것처럼 보이는 상태의 그가,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불쑥 내뱉었다.

“설마, 설마.”

“형님, 대체 무슨···,”

“그것이, 그 아귀가.”

“형님!”

“그, 귀신이 내.”

쿵. 심장이 뛰듯 서현의 눈이 인간의 것에서 용인의 것으로, 용인의 것에서 다시 인간의 것으로 변했다. 서현의 입술이 내뱉었다, ‘그럼 난, 무엇을 위해서. 난. 내···.’ 서현의 시선이 황제의 얼굴을 잡아먹을 듯이 응시했다. ‘난.’ 나는. ‘내···.’ 서현이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

“어쩌면, 내, 손으로.”

서현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안 돼! 안 돼! 안 돼! 서현이 자신의 가슴과 팔을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날카로운 손톱이 한 장 천에 불과한 옷자락을 쉽사리 찢어발기고 아직 여린 살갗에 파고들어 난도질했지만 서현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 혼란에 휩싸여 육체의 고통 따위는 느낄 여유가 없는 듯했다. 

여기저기로 피가 튀었다. 거의 허연 뼈가 드러난 제 몸을 헤집는 서현의 손이 벌벌벌 떨렸다. 그가 알몸으로 눈보라가 치는 설산에 버려진 것처럼 떨리는 몸을 필사적으로 웅크렸다. 초점이 사라진 눈이 심장이 박동하듯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나는···.”

비명이 잦아들며, 서현의 멍한 눈이 정확히 황제를 응시했다가 바로 서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서엽이 웃었다.

“!”

“상국!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서현이 축대 아래로 뛰쳐나갔다. 허겁지겁 도망치는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채 황망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그를 불렀지만 서현은 돌아보지도 않고 달려 자신이 타고 왔던 말 위에 올라탔다.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던 서엽이, 무성의한 태도로 명령했다.

“역도들을 붙잡아라.”

역도(逆徒)라는 단어가 이번에는 바위처럼 무겁게 사람들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서엽의 말 그대로 역사는 승리자의 시점에서 기록되는 실록. 이 순간, 도망치는 모습을 보인 것과 동시에 수상 서현은 이 순간 진소위(眞所謂), 역적(逆賊)이 되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 아마도 서엽의 입장을 지지하는 자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역적을 붙잡아라!”

사람들이 연달아 소리쳤다.

“역적 서현과 그 일당들을 붙잡아라!”

“역당들을 포박하라!”

금군들이 그야말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당혹스런 상황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창혜각 천객들이 천견 최유와, 서현을 번갈아보다 그때서야 아차하고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그러나 그 중 누구도 서현을 붙잡지는 못했다. 서현이 파풍(破風)을 채찍처럼 휘두르며 자신의 앞길을 막는 금군들의 몸을 반 토막으로 찢으면서 제장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서엽의 표정은 놀라울 정도로 여유로웠다. 지금 말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작아져 가는 서현이, 아직도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그 뒤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 희 형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서엽이 황제를 향하여 돌아섰다. 돌아선 서엽이,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참으로 송구하오나, 천제사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사옵니다.”

서엽의 말이 들리는 위치에 있던 제관들이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집사관 문희학이 황급히 만류했다.

“허, 허나 이미 ‘하늘’에 사실을 고하였고···.”

여기서 멈춘다면, 용님의 노여움을 사게 될 수도 있다. 만일 그리 된다면. 사람들의 얼굴이 단번에 해쓱해졌다. 

하지만 어렵게 말을 꺼낸 것이 무색하도록 서엽이 쉽사리 대꾸했다.

“속이면 되는 일 아니오.”

“예에?”

“모든 제관과 술사들은 들으시오.” 서엽이 축대 아래를 내려다보고 명령했다. “간계를 열어 놓은 채로 그대들은 제장을 지키도록 하시오. 그리하면 용님께서는 천제사가 계속되고 있다 ‘착각’하고 노여워하지 않을 것이오.”

술사들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하늘’ 자체를 인계로 불러내는 일은 보통 술력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서엽의 말대로 계속 간계를 열어 놓고 있다가는 선 자리에서 바싹 말라 죽는 것도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태학궁의 박사가 파래진 얼굴로 더듬더듬 호소했다.

“허, 허나 헌의공, 굳이 그럴 필요가···.”

“역당의 싹을 잘라 놓아야 하오.”

“상국, 아니, 역적 서현의 ‘힘’은 천제사를 올리면 자연히 사라지게 되는 것인데···.”

“내 말을 애매하게 한 모양이로군.”

서엽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황제 쪽을 보았다. 무심코 그 편으로 함께 시선을 돌렸던 태학궁 박사가 화들짝 놀라 숨을 삼켰다.

“폐, 폐하께서.”

어느새 황제의 한 팔이 피투성이가 된 채, 포박에서 풀려나 있었다. 그리고 온통 피에 젖은 그의 손톱은 정확히 그 자신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서엽과 황제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천제사를 치르기 힘들 것 같다는 소리였소.”

“희 형님을, ···서현을 찾기 전에는 결코 천제사를 치를 수 없다.”

황제의 입술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할 수 있다면 해보아라. 그대들이 쥔 패가 산산이 깨지고, 그대들이 역적으로 몬 패가 제국을 지배할 유일한 용인이 되는 꼴을 목격하게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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