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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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묘한 풍경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정작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놀란 것을 보면.

“하늘···.”

서문경이 위와 아래와 옆, 자신을 둘러싼 사방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마치 허를 찔린 사람처럼, 반쯤은 허탈한 듯 또 나머지 반쯤은 착악(錯愕)한 듯한 서문경의 표정을 흘끗 보고 황제가 말했다.

“하늘은 모든 공간이 서로 통하는 통로다.”

그러니 방금 전까지 자신들이 있던 황제의 ‘둥지’와 인계도 잇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황제가 말하려는 바를 서문경은 곧바로 알아들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머리와는 달리, 그의 눈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향하려 했다. 이곳이 ‘모든’ 공간과 공간을 잇는 통로라면, 그렇다면 범님의, 내 세계도-. 

“······.”

서문경은 황제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死角)으로 머리를 모로 돌리고 콱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황제의, 또한 자신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하여 일부러 입을 열었다.

“그런데, 뭐가 달라진 겁니까?”

“달라져?”

“사람에서 용인이 되었으면, 달라진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서문경이 마치 혼잣말처럼 불퉁하게 중얼거리고서 괜스레 자신의 팔뚝을 주물럭거렸다, ‘칼로 찔러도 칼이 안 들어갈 만큼 튼튼해졌다던가?’

“그러하다면 얼마나 달갑겠느냐마는.”

“아닙니까?”

“보통 사람보다야 강건하기는 하지. 허나 용이나 진용인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느니.”

“···뭐 특별한 힘 같은 것 없습니까.”

황제가 문득 서문경의 옆얼굴을 곁눈질로 슥 훑은 다음 대답했다.

“근본적으로, 가용인이 된 자의 ‘힘’은 가용인이 되기 전의 ‘힘’에 기초하느니.”

“잠깐.” 

서문경이 휙 황제에게로 몸을 돌리며 손을 들어 잠시 기다리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서문경이 눈을 네모나게 뜨고 입을 열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며 어조 모두에 ‘설마, 설마.’하는 심정이 묻어날 듯 진하게 묻어났다. 

“그 말, 설마, 잠깐, 제가 이전에 환상을 만드는 힘이 있었으니까,”

“더 정교하게 환상을 만들 수 있겠구나.”

“······.”

확인사살 당한 서문경이 눈을 홉뜬 그대로 싹 굳었다. 정말로 대단한 뭔가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정말로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다니. 무어라고 성을 낼 기운조차 내지 못하고 허탈하게 굳어버린 서문경의 귓가에 불현듯이 황제가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헌데, 그렇게 되었으니 이제는 어느 누군가에게도 지는 일은 없겠구나.”

“예?” 서문경이 눈살을 구긴 채로 반복해서 물었다. “누구에게나 이길 수 있다고요? 어떻게요?”

그렇게 물으면서 서문경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기시감은 황제가,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는다 했느니.’하고 대답하고 나자 확신으로 변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서문경이 비로소 발칵 성을 냈다. 

“예전에도 그러시더니, 왜 또 말장난을 하십니까. 그럴 땝니까?”

그러자 황제가 힐끗 눈만 돌려 서문경을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리면서 심상하게 대꾸했다. 

“누가 말장난을 쳤다는 게냐. 짐은 결코 말장난을 치지도, 거짓을 말하지도 않았다. 이제 경이 너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고 또 어느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목소리는 다분히 태연했지만, 그 어조는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그 어조에 서문경이 의구심과 섭한 감정을 재그시 억누르고, 보다 색이 짙어진 눈으로 황제 편을 응시하였다. 서문경 대신 ‘하늘’ 한 쪽 어딘가로 굳은 시선을 던지고 있던 황제가 곧 서문경의 시선을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제 그대의 그릇은 하늘을 담고 해원(海原)을 품을 정도가 되었다. 허니 혼과, 범님과 용님과 기(麒)님과 린(麟)님, 대붕(大鵬) 이 다섯 신(神)을 제한 그 누구도, 그대를 무릎 꿇게 할 수 없다.”

“······.”

도통 뜻을 파악할 수 없는 말에 서문경은 한 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다만 이미 자신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지가 오래인 황제의 옆얼굴을 황망한 눈으로 응시하며 괜한 입술만 몇 번 달싹이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금 말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황제의 태도며 목소리가 너무 무겁고 삼연(森然)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골똘히 고민해 보아도 황제의 말이 무슨 뜻인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홀로 시문(試問)같은 황제의 물음을 곰곰이 곱씹어 보면 서문경이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게 대체 무슨···.”

그러나 서문경은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

“!”

입을 연 그 순간, 눈앞이 크게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금방, 뭐였지? 깜짝 놀라서 주변을 돌아보던 서문경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가서 박혔다. 끝도 시작도 없이 마냥 시푸르고 공막(空漠)하던 하늘 어딘가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질적인 금벽(金碧)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잠시간 ‘하늘’ 여기저기를 아롱거리던 그 양염(陽炎)이, 다음 순간 서문경과 황제가 있는 곳, 정확히는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하여 머리를 틀었다. 놀란 서문경이 소리를 질렀다.

“폐,”

하, 하는 말을 끝맺지도 못했는데 삽시에 닥쳐온 금푸른빛 아지랑이가 황제의 온 몸을 감싸고돌았다. 그리고 동시에 서문경은, ‘하늘’에서 무서운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

“!?”

근방에 매어 놓은 말을 찾기 위해 주위를 헤매던 엄헌영이, 갑자기 자신의 위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 눈을 부릅떴다. 잘 단련된 몸이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반사적으로 움직였지만 그것이 떨어지는 속도가 그의 움직임보다 더 빨랐다. 난데없는 날벼락에 경악한 엄헌영은 위를 부릅뜬 눈으로 올려다 본 채로 비명을 삼켰다. 

부딪친다!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각오했던 무게도, 격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용케 자신 쪽을 비켜 떨어진 것인가 했으나 그렇다기에는 무언가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엄헌영이 반은 의구심, 또 반은 경악으로 범벅이 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랬다가, 다시금 그의 눈이 커졌다. 엄헌영이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를 질렀다.

“너!”

가리킨 손가락 끝이 경악으로 바르르 떨렸다. 엄헌영이 가리키고 있는 자리에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흙먼지 하나 뒤집어쓰지 않은 말끔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숙인 옆모습이며 조금 마른 듯하면서도 날씬하게 긴 몸집 등이 확실히 눈에 익었다. 

그러나, 사람? 그것을 정녕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너는, 분명히 죽었,” 

하고 연속으로 말하던 엄헌영의 목소리에 이끌린 것처럼 그가 엄헌영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정면으로 그의 얼굴을 본 엄헌영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로 두 눈만 커다랗게 홉떴다. 

“희한하군. 하나도 안 다쳤어···.” 

자신의 무릎을 몇 번 털어내고 중얼거린 그가, 엄헌영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말했다. 

“이런 곳에서 또 보는군요. 곤란한 때마다 마주치게 되는 팔잔가 봅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며, 툭 내뱉는 듯한 특유의 말투도 분명히 기억에 있었다. 그러나······.

“하지만 잘 됐습니다. 혹시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물어볼 것이 있는데, ···잠깐, 사람을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 겁니까?”

못 볼 것 본 것처럼. 그렇게 쏘아 붙이는 그에게로 엄헌영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입은 다문 채 두 눈만 부릅뜨고 다가오는 엄헌영이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그’가 더더욱 얼굴을 구기며 엄헌영이 다가온 만큼 뒷걸음질을 쳤다. 그것을 잡기라도 할 것처럼 한 손을 뻗으며 엄헌영이 중얼거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엄헌영의 손가락이 ‘그’의 눈과, 목 아래를 똑바로 가리켰다. 뱀처럼 세로로 긴 동공과, 하얀 목에 반투명한 비단을 붙여 놓은 것처럼 하늘거리는 역린(逆鱗). 그리고 다음 순간, 엄헌영이 달려들어 ‘그’의 팔을 가린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드러난 손목까지 목에 붙은 것과 똑같은 빛깔의 검푸른 비늘이 돋아 있었다. 

엄헌영이 신음하듯 말했다. “용인?”

“무슨 짓입니까?”

서문경이 엄헌영의 손을 매섭게 떨쳐내고 싸늘한 투로 그를 질타했다. 평소와 달리 별다른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밀려난 엄헌영이 멍하니 그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 서문경이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왜 표정이 그렇습니까?’ 그러나 엄헌영은 서문경의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말을 중얼거렸다. 

“용인. 용인이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겁니까?”

“제안이 자네를 데리고 모습을 감추었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다, 허나 제안은 아직 천제사를 올리지 않았으니 아직 용인에 불과해. 그런데 네가, 용인이 되어서 나타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된 것을 어쩌겠습니까.” 서문경이 건성으로 대꾸한 후에 물었다. “폐하와 ‘하늘’에서 이곳으로 돌아오던 중에 이상한 금빛 아지랑이가 나타나서 폐하의 전신을 둘러싸더니 저 혼자 여기로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혹시 조금이라도 짐작이 가는 곳이 있으실까요?”

“믿을 수 없군. 어떻게 이런 일이,”

자신이 한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 발치를 쏘아보며 중얼거리고만 있는 엄헌영을 향해 서문경이 버럭 노성을 내질렀다.

“사람 말 안 들립니까!”

“!”

그 말에 놀라 반사적으로 머리를 든 엄헌영에게 서문경이 연속해서 쏘아붙였다.

“죽은 줄 알았던 인간이 살아서 돌아다니는 꼴을 보고 놀란 것은 이해합니다만, 적당히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제 말 못 들었습니까? 저 혼자 여기에 떨어졌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갑니까? 폐하 혼자 다른 곳에 떨어지셨다는 말 아닙니까!” 

화가 나 목청껏 고함을 쳐 놓고 서문경이 초조한 듯 콱 이를 악물었다. 그가 이사이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어떻게 된 일인지.”

엄헌영이 숨을 삼켰다. 서문경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깨달았다. 처음에는 동공과 턱 아래의 비늘 때문에 몰랐지만, 서문경의 얼굴과 목은 온갖 상처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한쪽 눈은 세로로 크게 그은 듯한 상처 때문에 뜨이지도 않은 상태였고, 또 한 쪽 볼과 귀에도 큰 상처가 나 있었다. 아마 옷으로 가려진 몸도 다를 바는 없을 것이다. 

엄헌영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 깨달은 서문경이 아직도 진물이 흐르는 볼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중얼거렸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많이 나아졌으니까.’

“그보다 문제는 폐하입니다. 저야 몸만 조금 이럴 뿐이지만 폐하께서는···.” 

울적하게 중얼거린 서문경이 엄헌영을 바라보며 어조를 달리해서 말했다. 

“용인은 폐하께서 가용인을 만들어낸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셨으니 아실 것 아닙니까? 폐하께서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신 건지. 지금 폐하께서는 모든 기력을 쇠하신 상태입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가로로 내젓던 엄헌영의 손이 다음 순간 딱 멈췄다. 엄헌영의 얼굴에서 싹 핏기가 빠져 나갔다.

“기력을 쇠했다?”

“그리고, 제가 입은 상처도 똑같이 입고 계신 상태입니다.”

서문경의 대답에 엄헌영의 낯빛이 숫제 새파랗게 변했다. 서문경이 왜 그러는 거냐고 묻기도 전에 엄헌영이 신음소리와 함께 내뱉었다.

“안 돼.”

“예? 무슨, ···윽!”

무심코 대꾸하던 서문경이 갑자기 자신의 팔을 낚아채는 힘에 신음을 삼켰다. 서문경의 팔을 붙잡은 엄헌영이 다짜고짜로 그를 어딘가로 끌어당겼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저는 분명히 폐하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을,”

“황작. 이곳은 황작이다, 길지와는 말로 달리면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곳이다. 그러니 아직은 시간이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듣기만 해라, 자네, 아지랑이라 했지.” 

엄헌영이 서문경이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그 묘한 기세에 눌린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자, 엄헌영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금푸른 아지랑이라니, 내 술사가 아닌 무인이라 술법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미흡하지만 짐작이 가는 것이 있다. 금벽(金碧)은 황룡과 청룡, 즉 지금껏 이 나라에 나타난 용인과 관련된 색이라 용과 관련된 술법 따위가 이런 색을 띤다고 들은 바가 있다. 그러니 아마 네가 봤다는 금푸른 아지랑이는···, 시강원 술사들이 제안의 기운을 느끼고 소환술을 쓴 것일 가능성이 높다.”

“소환술이라고요? 폐하의 기운을 느꼈는데 어째서 소환술을 썼다는 겁니까? 굳이 그러지 않아도 폐하께서는 황궐로 돌아가실 텐데···.”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엄헌영이 딱 잘라 대답하자, 서문경의 얼굴에 어린 의구심이 더더욱 커졌다. 말을 발견한 엄헌영이 서문경에게 타라는 눈짓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천제사. 헌의공이 천제사를 치를 만반의 준비를 해 두고 용인을 기다리고 있다.” 

“천제사를 지낸다고요?!”

“그래.” 

엄헌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다음, 놀란 서문경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돌리면서 빠르게 덧붙였다. 혀 위에 모래알이 굴러가는 듯 입 안이 깔깔했지만 이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서현이 천객들을 이끌고 제장으로 향하고 있다 들었다. 그러니 네 말대로 제안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라면···, 제사가 치러지기 전에 두 사람이 제장에서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엄헌영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입으로는 차마 그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바로 차분한 서문경의 목소리가 자신이 할 수 없었던 그 말을 그대로 읊는 소리가 들려서, 엄헌영은 비참한 기분에 두 눈을 감아버렸다.

서문경이 말했다. 

“황제시해(弑害)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

말을 타고 가는 도중, 엄헌영에게서 자신이 혼절해 있던 사이에 벌어진 대부분의 사정을 들었다. 자신이 반시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 직후, 황제가 가변례를 치른다 선언한 후 자신을 데리고 천추전에 칩거했다. 많은 술사들이 동원되어 황제를 천추전에서 끄집어내려 했으나 그 누구도 황제의 ‘힘’을 깰 수는 없었다. 

곤경에 처한 백관들은 헌의공 서엽을 불러내어 이 일을 해결하려 했고, 서엽은 서현을 불러내어 어느 쪽이 더 강한 용인이지 자웅을 겨루어 보라며 그를 자극했다. 서현은 이화시강원 술사들의 모든 결계를 뚫고 황제가 있는 침방 앞까지 들어가는 것에 성공했으나 마지막 결계는 깨지 못했다. 그대로 황제는 자신의 ‘둥지’로 사라졌고, 그 과정에서 알아낸 것은 황제가 서현과 같은 황룡은 아니라는 사실 뿐이었다.

그 사실이 소현태자와 관련된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했고, 다른 한 편 서현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서엽의 처인 경혜현주와 엄헌영을 만났다.

“정확히는, 혜를 찾아 온 것이었지만.” 

엄헌영이 씁쓸한 목소리로 정정했다. 그러나 그 때 서문경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항아리···?”

“그래, 한참을 헤매던 끝에 겨우 취영당에 숨겨 놓은 토기를 발견했지만···.”

“잠깐.” 하는 말로 서문경은 엄헌영이 말을 멈추게 했다. “항아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토기를···.”

“아니요, 수상은 항아리라고만 말했습니다.”

그 말을 단순한 트집이라고 생각한 건지, 엄헌영이 잠시 불편한 침묵을 고수하다가 잠시 후에 대답했다.

“취영당에는 그것 밖에는 없었어.”

“왜 석공들이 필요했을까요?”

재차 이해할 수 없는 물음이 던져졌다.

“석공들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뭐?” 엄헌영이 노골적으로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투로 되묻고는, 생각을 더듬어 대답을 덧붙였다. “돌에 관련한 조각이나···, 돌 건물을 짓고 보수하는 일을 하겠지.”

“취영당은 당신의 이전 기억과 전혀 달라진 바가 없었다고 하셨지요? 그럼 토기가 있던 방은요?”

비로소 서문경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를 깨달은 엄헌영이 허를 찔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곳 또한···.” 하지만 곧바로 엄헌영은 표정을 굳히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하나 토기의 봉인을 열자 내내 혼절해 있던 희 형님이 정신을 찾았었다. 그러니 잘못되었을 리가 없어.”

“정신을 찾았다?”

“그래.”

“그렇다면···, 좋겠지만.”

그 말끝은 거의 혼잣말이나 다름이 없어서, 정확한 말을 듣지 못한 엄헌영이 큰 소리로 물어왔다, ‘뭐라고 했지?’ 그 물음에 서문경은 다만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면 엄헌영의 말대로 단순한 트집일 수도 있지만, 서현이 토기가 아닌 항아리라고 말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토기 또한 항아리다. 그러나 보통은 토기보다는 유약을 발라 구운 자기 쪽을 항아리라고 표현하는데···.

“설마, 여러 개였었나?”

유리와 토기, 유리와 자기, 혹은 토기와 자기.

그리고.

서문경은 물었다.

“토기라고 말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희의 최측근인.” 

엄헌영이 대답했다. 

“자네도 한 번 본 적이 있었지.”

“······!”

서문경의 얼굴빛이 싹 변했다. 서문경의 앞에서 말을 달리고 있어 미처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엄헌영이 계속해서 말했다.

“천견 최유.”

그 순간, 서문경이 소리쳤다.

“속도를 높이십시오! 그는, 그 사람은!”

**

비안개를 뿌려 놓은 듯이 제장 안은 온통 짙은 안개 속에 싸였다. 귀에 장대비가 좍좍 내리꽂히는 환각이 들릴 만치 그 진한 안개는, 놀랍게도 금분(金粉)같은 금벽광(金碧光)이 섞여 기묘한 무늬를 그리며 어룽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조차 그 안개에 먹혔다. 그 기묘한 사실을 눈치 챈 이들이 하나둘씩 입을 다물고 안개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초월적인 힘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과 이 안개 속에서 나타날 용인이 대체 누구일 것인가에 대한 세속적인 호기심이 계속해서 마른침을 삼키게 했다. 비로소 제장 안은 무겁디무거운 정적 속에 가라앉았다. 

그 사이로 긴 징소리가 한 번 울렸다. 가라앉아 있던 공기가 몸을 일으켜 휙 제장 안을 한 번 맴돌았다. 햇빛조차 가리고 있던 짙은 안개가 점차로 가라앉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사람들의 눈높이보다 낮은 높이로 사그라졌다. 아직까지 가슴 아래를 가리고 있는 땅안개 너머로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한 장소를 향하여 시선을 집중했다. 

아롱아롱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고 있는 금벽(金碧)색 운무(雲霧) 사이로 아홉 겹으로 쌓은 축대가 드러나 있었다. 아홉은 인세의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수중에서 가장 큰 수, 그리고 그 수에 맞추어 쌓은 축대 위에 하늘에 제를 지낼 용인이 나타남으로 해서 비로소 아홉은 천상(天上)의 수인 열이 된다.

아홉 겹 축대 위에서 흔들리는 운무와 함께 희미한 인영(人影)이 흔들렸다···.

이번 천제사의 당자(當者)인 용인이 입장하였음을 알리는 집사관 문희학의 굵은 목소리가 제장에 울려 퍼졌다.

“신격자(神格者) 용인(龍人) 제장(祭場) 입역(入域)-.” 

거기까지 말한 후에 잠시 집사관 문희학이 말을 멈췄다. 아직 안개가 말끔히 걷히지 않아 축대 위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난히 무겁고 살을 훑어 내리는 듯 끈끈한 된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안개가 점점 옅어졌다. 공기의 움직임에 따라 광설(狂雪)처럼 금빛 빛자락이 흔들렸다···. 

이윽고, 축대에 선 이의 몸집이 어떤지, 몸높이가 어떤지, 어떤 복색을 취하고 있는지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안개가 옅디옅어졌다. 이제 고작해야 단 한 번, 한 번만 더 공기가 움직이면 축대 위에 서 있는 이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터였다. 침묵 속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리고, 자신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콱 움켜쥔 태황태후의 눈매와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순간, 바람이 불었다. 집사관 문희학이 고했다.

“황황(煌煌) 상제(上帝) 입역-!”

완전히 걷힌 안개 속에서 나타난 것은 현 황제 문위 제안. 그것을 각기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순간에 서로 의미가 다른 탄성이 곳곳에서 새어나왔다. 

**

황고 엄충은 두 눈을 부릅떴고 태황태후 엄씨는 짧고 나직한 신음을 내지르며 앉은 자리에서 무너졌다. 충격과 허탈함으로 머리가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 틈을 타 태황태후의 떨리는 입술이 제멋대로 말을 내뱉었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음이야···!” 

마마!, 하고 누군가가 태황태후의 경솔한 행동을 저지했지만 그 말조차도 지금 태황태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태황태후가 계속해서 망언을 주절거렸다. 

“정녕 사직(社稷)이 종말을 고하려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 팔푼이의 아들놈이···!” 

“마마! 말씀을 삼가시옵소서!”

제장 안에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음을 미처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듯한 태황태후의 행동에 성급한 마음이 들어 누군가가 손을 뻗자 태황태후가 거의 반사적으로 그 손을 뿌리치면서 날카로운 노성을 질렀다.

“무엄한!” 

소, 송구하옵나이다! 제 무례한 행동보다도 태황태후의 시퍼런 서슬에 놀란 이가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 앞에 넙죽 엎드렸다. 허나 그렇게까지 해도 태황태후의 성노(盛怒)는 쉬 사그라지지 않았다. 되레 태황태후는 더 길길이 날뛰며 제 앞에 엎드린 자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그 뺨을 갈겼다. 짝! 매서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태황태후가 덩달아 붉어진 자신의 손바닥을 바들바들 떨며 소리쳤다.

“어디에 그 미천한 손모가지를 뻗는단 말이야? 더구나 무어라, 말을 삼가? 네 이놈, 어찌 그리 무례하단 말이냐? 이 운현궁이 우습게 보이는 것이냐!” 

파르르 치를 떨며 생고함을 내지른 태황태후가 몇 번이고 자신의 앞에 있는 자의 뺨을 올려붙이며 핏대를 세웠다. 

“상시(常時)에는 내 앞에서 감히 머리도 들지 못하는 것이 이 따위 포만무례한 짓거리를 저지르다니! 일이 이렇게 되니 이 운현궁에게 더 이상 알랑거릴 필요도 없다 그리 여겨지더냐? 모르는 소리!”

태황태후가 뺨을 올려붙이던 자의 가슴팍을 팍 발로 걷어차 버리고 축대 위의 그림자에 삿대질을 했다. 그 무엄한 짓거리에 수많은 이들이 헉, 하고 숨을 삼켰지만 태황태후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저주에 가까운 폭언을 퍼부었다.

“소현! 내 아드님이신 소현태자께서 훙서(薨逝)하시었을 때 이미 정통한 용황제의 핏줄은 끝을 고했느니!” 태황태후는 깔깔깔, 찢어지는 듯한 비웃음을 터뜨리며 삿대질을 했다. “저기 저곳에 있는 놈은 주제도 모르고 감히 소현의 자리를 차지했었던 그 팔푼이 놈의 아들놈에 불과하다! 그 팔푼이 놈의 핏줄이 용황제라니! 태제(太帝: 강윤제의 시호) 폐하나 소현태자와 선 자리를 나란히 한다니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더란 말이냐!”

일이 이리 되었으니 내 사직을 위하여서라도 말하여야겠다, 태황태후가 이제 와서는 버겁게만 느껴지는 수십 폭 비단 치맛자락을 신경질적으로 떨쳐 내면서 선언했다. 

이성을 잃은 듯한 태황태후 엄씨의 행동에, 태황태후와 뜻을 같이하던 백관들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엄충 쪽으로 힐끗힐끗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지금 태황태후 엄씨를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황고 엄충은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얼굴로 축대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었다. 불쑥 그가 중얼거렸다.

“이럴···수는,”

“황고? 황고, 어찌 이러시오? 어서 운현궁 마마를 설득해 보셔야,”

엄충의 입술을 비집고 생각지도 못한 탄식이 흘러나와, 그를 재촉하고 있던 재관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늘께서는, 정녕 수경궁 마마를 버리시었는가···! 마마께서는 그리도, 원통하게, 가시었거늘, 어찌, 어찌 저 핏줄에게 다시금 성총(聖寵)을 내려 주시는 것인가···! 그러고도, 신이라 할 수 있는가!”

“화, 황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엄충이 다리가 풀린 것처럼 주루룩 선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여전히 시선은 한곳으로 고정된 채로. 이성을 잃은 태황태후의 행동과, 엄충이 보인 뜻밖의 반응으로 당혹해하고 있던 재관이 그러다 문득 엄충의 시선이 태황태후의 것과는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엄충의 시선을 좇았다. 

황상이 나타난 축대 위와, 그리고.

“···헌의공?”

재관이 불쑥 중얼거린 순간, 태황태후가 외쳤다.

“저 자를 성단(聖壇)에서 끌어 내려라!”

그 말에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태황태후가 신경질적으로 제장 안을 돌아보았다.

“내 말이 아무도 안 들리느냐! 거기, 남제! 손유!” 마구잡이로 태황태후가 얼굴이 익은 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명령했다. “천구, 혜사! 무엇을 하느냐! 어서 금군들을 들여 저 놈을 끌어 내리래도!”

“허, 허나 마마, 황상이시옵니다! 어찌,”

“황상? 무슨 헛소리더냐! 내 종종 말해 왔고, 그대들도 동조하지 않았었더냐!”

태황태후에게 이름을 불린 자들이 대경(大驚)하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설마, 마마!’ 그러나 그 때는 이미 태황태후가 입을 연 뒤였다.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지금의 황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 애초에 제좌에 앉을 수 있는 재목이 아니었다! 때가 될 때까지 잠시 자리를 채우게 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때가 되면 자연히 밀어내야 할 것이다!”

태황태후가 그렇게 말한 순간, 지금껏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서엽이 조용히 물어왔다.

“그 때가 지금이라는, 그런 말씀이시옵니까.”

“그렇네!” 태황태후가 거의 악을 썼다. “암만 수치스러운 손아(孫兒)래도 핏줄은 핏줄이니 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었네! 허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쩌겠는가? 모두가 헌의공 그대 탓이야!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군, 어찌 이리 어리석은 변심을 했는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미쳤다? 마마께옵서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시었는지 소인은 도통 까닭을 모르겠사옵니다.”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체제공은 그대의 핏줄일세! 자네 핏줄을 제좌에 올려 자네가 손해를 볼 것이 무어가 있는가!”

“그리 말씀하신다면, 마마께서는 마마의 핏줄을 제좌에 올리시는 것이 마마께 좋은 일이 아니옵니까?”

“저 놈은 아니 돼!”

아니, 하고 태황태후가 곧바로 말을 고쳤다.

“놈의, 강희의 자식만은!” 

쾅! 하고 태황태후의 발이 단단히 다져 놓은 제장 돌바닥을 때렸다. 태황태후가 재차 소리쳤다. 

“강희, 그 주제도 모르는 놈 때문에 제국이 얼마나 큰 불안에 휩싸였던가? 결국 놈은 암만 기를 쓰고 날뛰어도 용이 되지 못했어! 애초에 반쪽짜리로 태어난 놈이 제 형제들을 모두 잡아먹고 가당치도 않은 관을 썼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 주제에 꼴에 어찌나 강샘이 심하였던지, 제 형제들과 어미아비가 함께 시간을 보낼 때면 연통도 보내지 않았거늘 꼭 어떻게든 알고 찾아와서 간화(干和)를 놓곤 했었어! 그런 놈을 내 뱃속으로 낳았다니 그것이 내 천추의 한이요, 일생의 제일가는 수치일세!”

“한? 또, 수치라···.”

“그리고 저 아이는 그런 강희 녀석의 핏줄이야! 그 핏줄이 어디 가겠나! 용기? 용인? 중요하지, 허나 용님께옵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다행스럽게도 용인은 하나가 아닐세! 힘?! 아니, 중한 것은 황제로서의 자질이로다! 금번에 저지른 일을 보아서는 물론이요, 그 한심한 강희 놈의 핏줄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저 아이는 결코 제좌를 차지해서는 안 될 것이야! 제좌에 저 아이가 앉게 되면 강희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달이 나기 전에 어서 끌어내도록 하게, 헌의공,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생각을 달리 한다면 내 너그러이,”

생각에도 없던 말을 일단 서엽을 혹하게 하기 위하여 지껄여대던 태황태후가 거기까지 말하고 자신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 그리고, 서엽과 시선이 마주친 태황태후가 무심결에 뒷걸음질을 쳤다. 백분을 칠한 그녀의 얼굴이 하얀 백분보다도 더 희게 질렸다. 

태황태후가 더듬거리며 말을 쥐어짰다.

“그, 무슨, 불경한, 눈빛을, 무엄하기 짝이 없는···,”

“마마.” 

뚜벅. 태황태후를 향하여 걸어오는 서엽의 가죽신 아래에서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들렸다. 태황태후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암만 황실의 큰 어른이신 운현궁 마마라 하나, 방금의 그 말씀은 의심할 나위 없이 역심(逆心)의 표현이었나이다. 또한, 붕어하신 선제를 정욕(庭辱)하신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重罪)이옵니다.”

“가, 가까이 오지 말거라!”

“천추의 한이며 수치, 제 주제도 모르는 팔푼이에 형제들을 잡아먹었다···.” 

태황태후가 했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한 서엽이, 불현듯이 걸음을 멈추고 빙긋이 웃었다. 그 선량한 웃음에 태황태후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그 때 서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선제 폐하께옵서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셨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운현궁 마마께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옵니다.”

“······! 무, 무슨 말이냐! 감히 누구를 위협하느냐!”

“위협이라니요, 천자를 모독한 이가 지금껏 목이 붙어 있는 것이 단순히 신기하여서 그렇사옵니다.”

“진화, 네놈!”

태황태후가 당장 달려들 듯이 고함을 질렀으나, 그녀는 이 직전에 다른 재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서엽에게도 달려들어 그 뺨을 올려붙이지는 못했다. 노여움을 감추지 못해 두 손과 발에 끝까지 힘을 준 채로 파들파들 떠는 태황태후를 언뜻 태연하게만 보이는 눈길로 한 번 보고, 서엽이 몸을 휙 돌렸다.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이냐!’, 태황태후가 외쳤지만 서엽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집사관 및 그 휘하의 배제관들에게 큰 소리로 명했다.

“무엇을 하는가! 도대체 언제까지 황상을 기다리게 할 셈이냐? 제를 진행하여라!”

“안 된다! 어서 축대에서 강희의 자식 놈을 끌어 내려라!”

“용인이시다! 그런 무엄한 짓거리를 벌이는 놈은 하늘로부터 삼대가 멸하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난군(亂君)이 될 자가 아직 인세의 영역에 있을 때 끌어 내리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느냐? 모든 책임은 이 운현궁이 지겠다! 여기서 내 명을 듣지 않는 자는 평안히 숨을 거둘 기대는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서엽과 태황태후가 조금도 지려 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댔다. 그런 가운데 두 사람의 휘하에 있던 금군 및 사병들이 사열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태황태후와 서엽을 필두로, 그 많던 제장 안의 사람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 대립하는 형국이 만들어졌다.  

그 사이에, 먼저 황제의 육체만을 소환했던 술사들의 소환술이 거의 완성되고 있었다. 금빛 아지랑이가 아직도 흐릿하게 보이는 황제의 몸을 감싸고 빙글빙글 돌았다. 빛무리가 한 번 황제의 몸을 훑을 때마다 황제의 윤곽이 뚜렷해졌다. 보통 남자들보다도 머리 하나는 큰 키에 마른 듯하지만 골격이 굵어 섬약하다는 느낌은 없는 몸, 마른 어깨에서 흘러내리듯이 하는 옷자락은 황제가 사라지기 직전에 입고 있었던 것과 똑같았다. 

허나, 백옥을 깎아 만든듯하던 얼굴 한 쪽에는 끔찍한 창상(創傷)이 나 있었고, 한 쪽 귓불은 거의 떨어져 나간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다가 팔 하나는 짐 덩어리처럼 힘없이 덜렁거리며 간헐적으로 핏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윽고, 황제를 감싸고돌던 금빛 아지랑이와 흔적만이 남아 있던 안개가 완전히 사라졌다. 황제는 눈을 떴다. 그러나 뜨인 것은 단 하나의 눈뿐이었다. 그것을 본 태황태후가 배를 잡고 비웃었다. 

“저 꼴을 보라지! 색에 정신이 팔려 귀한 용체(龍體)도 간수하지 못하는 놈에게 어찌 제좌를 내어줄 수 있을까! 용의 기질을 타고난 것만 다를 뿐, 이래서야 제 아비와 똑같은 놈이 아니냐!”

그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태황태후가 턱 끝을 치켜들고 보란 듯이 서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엽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태황태후가 한 말에 대한 대답은, 기대도 하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월권(越權)이로소이다.”

“······! 무어라?” 

태황태후가 황제 쪽을 급히 노려보며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황제가 그런 그녀를 감정 없는 눈으로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돌이켜보면, 마마께서는 항상 이런 식이셨습니다. 태상황 때에는 그 분의 총애를 믿고, 또 부황 때에는 그 분의 효심을 믿고.”

헌데, 하고 황제가 머리를 조금 모로 기울였다.

“소손이 제좌에 올라 있을 때에는 어찌 그러셨습니까?”

“무어라?”

“소손의, 무엇을 믿고?”

“도대체 무슨 말을···,”

“말씀 올렸었지요.”

‘월권은 그만 두시라.’, 황제가 태황태후의 말허리를 끊으며 천천히 축대 아래에서 내려왔다. 

“소손이 마마의 포만무례한 언행을 못 본 척 참아 넘긴 것은 부황의 효심이 소손의 마음에까지 미친 탓이오이다. 허나, 그 때문에 소손의 애조(愛鳥)가 큰 변을 당할 뻔하였으니 그것도 이제 끝이옵니다.”

“그, 그 무슨 불측한···!”

“불측.” 

황제가 몹시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한 투로 태황태후가 했던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불측, 불측, 불측, 불측이라.’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황제의 어투가 바뀌었다. 참으로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어조였다. 황제가 말했다. 

“그것은 짐이 하여야 할 말이지요. 마마께서는 큰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사옵니다.”

“착각이라니?”

“소손은 마마의 남손(男孫)이옵고, 마마께서는 소손의 친조모님이시지요. 허나 그것은 사사로이 그러할 뿐. 마마께서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고, 짐은 천자이면서 용인입니다. 헌데 어찌하여 용인된 자가 제 몸을 다루는 것까지 기껏해야 인간에 불과한 그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

마지막에 이르러 완벽한 하대(下待)로 바뀐 황제의 말에 태황태후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부릅떴고, 장내 또한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 정적 속에서 오롯이 황제만이 계속해서 말했다.

“색에 정신이 팔려 이성을 상실한 것은 짐이 아니라 태상황제들이었던 모양이군. 그대가 이토록 방자하게 구는 것을 보아하니.”

그리고 어느덧 태황태후의 바로 앞까지 걸어 내려온 황제는, 허리를 조금 굽혀 태황태후의 귓가에 머리를 가까이 댄 다음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속삭였다.

“그대야말로 주제에 맞게 행동토록 하라. 그렇게만 한다면 내 어느 정도는 인세의 법도에 눈을 가리고 박자를 맞추어 줄 터이니. ···아시겠습니까, 할마마마.”

“······.”

움직이려 했다. 여느 때처럼 고함을 지르고 성을 내고, 저 무례하고 건방진 놈의 뺨을 후려갈기며 당장 저 놈을 포박하여 제좌에서 끌어 내리라 명령하려 했다. 자신의 등 뒤에는 몇 백의 금군이, 또 문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자신의 명령 한 마디에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수천수만의 군사들이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손짓 한 번만 하면 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자신의 뜻을 이루어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까닭인지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입을 열고 손을 움직이는 대신에 눈앞이 계속 새하얗게 번뜩거렸다. 어지러웠다. 손발이 차가웠다. 두통이 일고, 자꾸만 시야가 흔들렸다. 

“두려우십니까.”

하고 황제가 지껄이는 말에 태황태후의 눈이 저절로 부릅떠졌다. 두렵다고? 누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이 운현궁이 저 비실비실한 손자 놈을? 그러나, 어느새 흐른 식은땀에, 불불불 떨리는 태황태후의 눈가는 이미 분이 모두 지워져 거미줄 같은 주름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당혹할 틈도 없었다. 황제가 뒤이어 이렇게 말했던 탓이다.

“수치스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포식자 앞에서 피식자가 공포를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지금까지는 그저 배부른 짐승만 맞닥뜨리시어 그 점을 모르고 계셨을 뿐이지요.” 

그 말을 끝으로 황제가 몸을 돌렸다. 자신으로부터 몸을 돌리는 것인데도 흠칫한 태황태후가 뒷걸음질을 치다 제 발에 걸려 풀썩 바닥에 무너지고 말았다. 평소 같으면 태황태후의 옥체가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달려와 그녀를 붙들고 필사적으로 꼬리를 흔들었을 사람들은 여전히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황제가  피로에 젖은 발걸음을 서엽에게로 향했다. 그와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싶은 순간, 황제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 나왔다.

“허나, 소손은 배부르지는 않으나 그렇다 해여도 질긴 가죽을 씹는 악취미는 없음입니다.” 

그 말까지는 태황태후를 향한 것이었으나, 그 다음에 이어진 말은 서엽을 향한 말이었다. 

“헌의공, 짐은 그대의 계자에게 선위(禪位)하겠다.”

“······!”

이어지는 폭탄발언에 더 이상 웅성거리는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서엽이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송구하오나, 폐하.”

활처럼 둥근 선을 그리며 웃는 서엽의 눈매 깊은 곳에서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

“아무리 어심(御心)이 그러하셔도 그리할 수는 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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