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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그대와 짐이 교합한다면 그대는 잉태(孕胎)하게 될 수도 있음이다.
서문경은 콱 이를 악물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안이하게 웃어넘긴 것은 아니었다. 모든 예측은 사실로 나타날 수 있다, 아니, 때로는 예측하지 못한 사실마저도. 자신이 범님의 세계에서 사고로 이 세계로 넘어오고, 또 인간에서 용인이 된 것처럼.
겁이 났다.
하지만 당장 이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가정 쪽이 그보다 더 무서웠다. 그래서였다.
“···읏.”
이를 악물었는데도 이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힘을 준 입가와 턱이 덜덜덜 떨렸다. 참으려고 애를 썼는데도 일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하더니,
“아파···.”
아파. 아파. 아파. 고통에 앓는 소리와 신음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서문경은 황제의 어깨에 세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튀어나온 뼈에 손가락을 걸고 살갗에 손톱을 세워서 버틸 셈이었다.
“아!”
하지만 흐른 땀으로 젖어있던 살에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균형을 잃어버린 서문경이 허둥거리며 바닥을 짚었다. 넘어지면 안 돼, 어서, 더 무서워지기 전에 어서 해버려야 하는데···! 그 때 황제의 팔이 비틀거리는 서문경의 허리를 감아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시켰다. 한숨 소리와 함께 나직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다. 무리하지, 않아도.”
중간에 잠시 소리가 끊긴 것은 벌어진 상처가 고통스러워서가 아니었다. 거칠어진 숨소리를 삼키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눈치 챈 서문경의 눈이 조금 더 가늘어졌다. 아직 무서워, 하지만.
저 사람이, 이성으로 자제하기도 힘들 정도로 나를 원해준다면. 미쳐 준다면. 내게, 돌아버리면-. 그럴 수 있다면.
“경아!”
서문경은 자신의 허리를 감은 황제의 팔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입을 맞추면서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서문경이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 챈 황제가 만류하려 했지만 그 때는 이미 서문경은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뒤였다. 열기가 느껴졌다. 사내의 양물(陽物)이 딱딱하게 발기해 있었다. 커다랗게 부푼 양물은 상아를 깎아 만든 것처럼 흠집 하나 없는 단아한 옥설(玉雪)빛이었지만 그런 감상 따위는 전연 생각이 나지 않을 만치 기세가 흉흉하였다. 그 안쪽에서부터 짙은 석죽색(石竹色)이 비치는 양물은 두터운 거미줄 같은 핏줄이 돋아 있었고 때때로 위협하듯 머리를 까닥거렸다. 서문경이 콱 눈을 감고 그것을 제 입 안에 집어넣었다. 지나치다 싶을 만치 매끄러운 귀두가 입술에 미끄러지는 기분에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경아, 하지, 흣···!”
무어라 말하려던 황제가, 서문경이 그의 양물을 혀로 감고 핥아 올리자 몸을 움찔하며 날카로운 신음을 터뜨렸다. 신음을 흘린 것은 서문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허리 근육이 수축한다 싶은 순간 자신의 입 안에서 황제의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던 탓이다. 입에 다 담기에는 애초부터 무리였던 커다란 물건이 그 때문에 서문경의 입 밖으로 조금 더 밀려났다.
“아···.”
당황한 서문경이 허겁지겁 달려들어 황제의 것에 혀를 댔다. 잠시 입 안에 담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입이 아프고 훅 밀려든 사내냄새에 눈앞이 아찔해졌지만 황제를 자극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초조감에 서문경이 거의 사내의 샅에 코를 묻다시피 하고 계속해서 양물을 핥았다. 귀두를 입술에 물고 그 끝을 혀로 핥다가 좀 더 안쪽까지 파고들어 그 뒤의 기둥을 할짝거렸다. 너무 깊숙이 얼굴을 파묻은 덕에 한 번 혀를 할짝거릴 때마다 호두알처럼 단단하게 올라붙은 고환에 계속해서 볼이 비벼졌다.
그 때마다 귓전에 닿는 황제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커졌다. 그것을 들으면서 서문경은 꼭 눈을 감았다. 입에 담은 사내의 성기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탈 듯이 뜨거워졌다. 서문경은 끝이 다가온다는 것을 예감했다. 곧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흐읏!”
“······!”
서문경의 얼굴에 뜨거운 정액이 쏟아졌다. 아. 서문경이 무심코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서문경의 하얗고 통통한 볼과 날씬한 손등에 타락죽(: 우유죽)처럼 희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흐르는 것을 본 황제의 얼굴이 일순간 멍해졌다. 반사적으로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적신 서문경이 폐하, 하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들었을 때였다.
“윽!”
시야가 빙글 돌아갔다. 반전되는 시야에 어, 하는 순간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더니 뒷머리와 등이 딱딱한 바닥에 밀어붙여졌다. 고통에 신음할 사이도 없이 황제의 입술이 서문경을 덮쳤다. 입술과 입술이 비벼지고 이가 입술과 그 아래의 살을 배고픈 짐승처럼 물어뜯더니 광포해진 혀가 마구 입 안을 휘저었다.
집요하게 달라붙는 입술에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있다가 겨우 입술이 떨어져 숨을 쉬는가 싶었더니, 곧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아!”
사내의 단단한 허리에 맨 살갗에 닿았다. 뜨거운 살덩이와 그 아래의 물컹거리는 고환, 그리고 땀에 젖어 촉촉해진 음모 따위가 잔뜩 달아오른 살갗에 비벼진다. 사내의 것에 맨살이 비벼지는 것만으로도 계속해서 몸이 튀어 오르고 눈앞이 때때로 새하얘졌건만, 곧 큰 손이 서문경의 다리 안쪽으로 들어왔다.
다리 깊숙이 들어온 손이 서슴없이 서문경의 성기를 주무르고, 또 한 손이 서문경의 허벅다리 안쪽을 움켜잡더니 단숨에 그것을 벌렸다. 무릎이 바닥에 닿을 만큼 다리 사이가 열리자 저절로 허리가 붕 떴다. 그리고,
“아악!”
사내의 성기가 서문경의 안을 단번에 뚫고 들어왔다. 젖어 있던 엉덩이에 사내의 고환이 부딪쳐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서문경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단숨에 뿌리까지 들어온 사내의 것이 자극을 받았는지 뱀처럼 크게 꿈틀거렸다. 뜨거운 뱀이 살아서 굼틀거리는 섬뜩한 느낌에 서문경이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결코 서문경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 아아, 앗, 아아아아!”
성기를 서문경의 안에 삽입한 채로 다만 숨을 고르며 고환을 서문경의 엉덩이에 문지르고 있던 황제가 그 때부터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더 빠르게 울리고, 그 때마다 서문경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몸을 떨며 도리질을 쳤다.
귀두만 겨우 걸릴 정도로 뜨겁고 단단한 성기가 빠져 나갔다가 다음 순간 음모가 느껴질 정도로 끝까지 안으로 박혀 들어오는 것이 반복되자 점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아, 아아, 서문경이 입을 벌린 채 끊임없이 신음과 교성을 흘렸다. 갈 곳 모르고 휘저어지는 서문경의 팔을 황제가 붙잡아 자신의 목에 걸게 했다.
“아!”
“흣!”
그리고 삽입한 채로 황제가 서문경을 일으켜 자신의 위에 앉혔다. 자신의 몸무게 때문에 더 깊숙이 성기를 받아들이게 된 서문경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황제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손이 목과 등에 손톱자국을 남겼다. 황제가 한 팔로 서문경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고 아래에서부터 강하게 성기를 찔러 올렸다.
아래에서 올려붙이는 힘과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려는 중력 때문에 한계까지 사내의 성기를 받아들이며 서문경은 거의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 싫어! 아파! 아! 아아! 싫어, 이상해! 아, 아아, 폐하, 폐하, 폐하···!”
황제의 목을 끌어안고 목과 어깨 사이의 오목한 틈에 얼굴을 비비며 서문경이 애원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황제가 강하게 찔러 올릴 때마다 몸 안에서 간질이는 듯한 감각이 점점 커지고 등골에 오싹한 전기가 튀었다.
연달아 강하게 찍어 올리던 황제가 거의 물어뜯듯이 서문경의 귓불을 잘근거리며 손가락 사이에 서문경의 유두를 끼우고 비틀었다. 황제의 성기 위에 앉은 서문경이 펄쩍 뛰어 올랐다가 황제의 우악스런 손길에 다시 성기 위에 주저앉았다.
“아, 아파!”
“안 돼지.”
울먹이는 서문경의 머리를 자신의 목덜미에 처박은 황제가 서문경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속삭이는 소리가 지나치게 낮아진 목소리 때문에 거의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등골이 오싹해져서 서문경은 무심결에 몸을 움츠렸다. 그 몸을 황제의 팔이 결박하듯이 껴안았다. 황제가 속삭였다.
“안 돼. 안 돼지. 안 된다, 경아.”
그 의미 모를 말에 서문경이 폐하···?하고 부르며, 땀과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를 들었을 때였다. 퍽! 황제가 뿌리까지 쳐올리는 것도 모자라 서문경의 안으로 자신의 고환까지 밀어 넣고 싶다는 듯이 서문경의 엉덩이에 음모와 고환을 비볐다. 앗! 비명을 지르는 서문경을 안은 팔에 더 힘을 주며 황제가 속삭였다.
“안 된다, 경아, 짐 같은.”
병신에게,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 끝에 퍽! 하고 성기를 처박는 소리가 섞였다.
“으응? 아니 되느니, 짐 같은 사내에게 그대를 맡기면, 응? 그대가, 손(損)을 입을 뿐이거늘. 응? 이토록,”
황제의 손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서문경의 얼굴선을 쓸었다.
“이토록 착하고 똘똘한 것을.”
퍽! 퍽! 퍽! 퍽!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 때마다 서문경의 비명에도 점점 쾌감이 섞였다.
“응? 안다. 짐도 아느니. 알아. 그대 같은 이는 짐 같은 병신 새끼에게는 아깝다는 것 정도는. 알아, 안다. 그래서.”
그래서,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마치 기름이 바그르르 끓는 듯 했다.
“그리하여서 놓아 주려 했건만.”
서문경은 흐릿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마주친 시선에, 반드르르 묘한 빛이 돌았다. 우윳빛 막이라도 입힌 듯한 그 눈을 보는 순간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황제가 말했다.
“안 돼. 안 되겠구나. 안 돼.”
경아, 경아, 경아. 황제가 하염없이 서문경의 이름을 부르며 서문경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내 깜둥새.”
황제가 서문경의 볼에 이를 세웠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이제 기회는 없느니. 이제 그대는-.”
절대로 새장을 나갈 수 없다. 황제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것을 본 서문경이 황제의 목덜미에 눈을 묻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조롱(鳥籠)은···.”
서문경은 황홀감에 들떠서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이 고작인 몸뚱이와는 달리 그의 머리는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었다.
조롱. 아아, 그래, 조롱···. 황제는 자신을 가둔 조롱이지만, 그것은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자신에게 있어서 조롱, 즉, 세계(世界)는 황제뿐이었지만 황제는 다른 조롱에 들어 있었다는 것 뿐.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원래 조롱의 문이 열린 순간 자신은 휘파람을 불어 새를 유혹했고, 망설이던 새는 결국 자신이라는 조롱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서문경은 콧등을 황제의 목덜미에 비볐다. 그 순간, 자신의 안에서 황제의 것이 크게 꿈틀거리더니 뜨거운 액을 내뿜으며 사정(射精)했다. 일순간이지만 생각했다, 지금 자신을 품고 있는 이 커다란 새가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되어 준다면, 상상할 수는 없지만 그의 아이를 가져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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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
초성(初聲)이 울려 퍼졌다.
댕-.
이성(二聲).
무거운 대종(大鐘)이 그 거대한 몸뚱이를 앞뒤로 흔들 때마다 그 앞에 사열해 있던 사람들의 희게 질렸다. 금방이라도 대종이 끊어져 제장을 덮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댕-. 삼성(三聲). 만들어진 지 벌써 누 백 년이나 제장을 지키고 있건만 오늘따라 대종을 매달고 있는 사슬은 저 커다란 종을 지탱하기에는 모자란 것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사성(四聲).
작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대열의 머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황친들이나 일등공신들이나 입을 수 있는, 검은색과 붉은색 비단을 덧댄 푸른 예복을 입고 허리에는 옥패를 찬 요대(腰帶)를, 머리에는 푸른 구슬 술을 늘어뜨린 관을 쓴 남자가 대열 좌측의 선두에 서 있었다.
존귀한 신분임을 나타내는 그러한 표식들이 없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사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헌의공 서엽, 선제 때의 수상을 지냈고 황실의 일원인 현주를 처로 맞이한 그 사내는 계자인 수상 서현도, 처인 현주도 없이 오롯이 혼자 그 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보다 한 단 높은 곳에 마련된 자리에는 위엄이 느껴질 만치 화려하게 성장한 태황태후 엄씨가 있었고, 그 뒤에는 그녀의 사가 오라비인 황고 엄충이 있었다. 현 황제의 외조부이며 수상에 버금가는 벼슬인 태공(太公)을 지낸 바 있는 엄충 또한 헌의공과 같은 복식이었다.
불안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 세 사람은 마치 돌을 깎아 사람 형상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제 일파의 수장격인 그 치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다른 이들 모두 평정을 찾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공기가 제장 안을 휘감고 있었다. 그 공기에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가슴이 술렁거렸다. 장엄하기까지 한 종소리를 듣자 불쑥 그런 자각이 들었다.
용황제가 탄생하였음을 하늘에 고하는 천제사장에서 우리들은, 반역(叛逆)을 꾀하고 있다-.
그 때, 진시를 알리는 마지막 종소리가 울렸다.
댕-.
종성(終聲), 진시(辰時), 천제사(天祭祀) 개(開).
웅성임으로 가득하던 제장이 그 순간 무서운 침묵에 휩싸였다. 제장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세 사람에게로 가 꽂혔다. 현 황제를 지지하는 헌의공 서엽과, 수상 체제공 서현을 지지하는 태황태후 엄씨와 엄씨 일가의 주인인 엄충. 그러나, 진시를 알리는 마지막 종소리가 울린 후에도 황제나 수상 중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그 무거운 침묵을 깨고 나선 것은 태황태후 엄씨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뒤돌아서 있던 그녀가 뒤돌아서며 말했다. 수십 폭 치마로 이루어진 예복이 태황태후의 움직임을 반 박자 늦게 쫓아 허공에서 펄럭였다. 무거운 태후의 치맛자락이 잠시 허공에 떠올랐다 모란의 홍색, 길조인 녹빛, 장엄한 흑색, 화사한 은박을 물린 백색,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실의, 정확히는 용황제의 위엄을 상징하는 금빛 비단 자락을 엿보여 주며 천천히 가라앉았다. 뒤돌아선 태황태후는 웃고 있었다. 입가에 숨길 수 없는 웃음기를 머금은 그녀가, 정확히 헌의공 서엽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황상께서는 시각에 맞추어 귀궁(歸宮)하지 못하시었소.”
“용둥지에서 홍진세상으로 돌아오는 길이 생각보다 길고 험한 모양입니다.”
신이 생각이 짧고 우둔한 인간인지라, 미처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덧붙이는 헌의공 서엽의 목소리는 예상외로 심상하기 그지없었다.
뜻밖의 반응에 태황태후 엄씨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 대신 미심쩍다는 표정이 떠올랐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 뒤에 서 있던 엄충이 무어라 몇 마디 말을 속삭이자, 당장 태황태후 엄씨가 낯빛을 바꾸고 턱 끝을 치켜들었다. 그녀가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하시겠소.” 하고 물으면서도, 이미 태황태후는 서엽의 대답을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황제가 결국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아무리 네 놈인들 무얼 어쩌겠느냐는 그런 표정이었다.
“미흡하나마 이 늙은이의 견해를 밝혀 보자면 자리를 파(破)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다, 그리 생각이 되오. 천제사를 치를 당사자가 제장에 없는데 더 이상 무엇을 어쩌겠소이까?”
그 때, 엄충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하고 발언권을 구하는 제 오라비의 목소리에 태황태후가 반색을 하고 대꾸했다.
“묘안이 있으면 말하여 보세요.”
“신 황고 엄충, 운현궁 마마께오서 베푸신 은혜를 받잡고자 모자란 몸이지만 감히 한 말씀 올리옵니다. 천제사는 나라의 수 없이 많은 거사(巨事) 중에서도 제일가는 자리에 두어도 지나침이 없는 가례(嘉禮)가 아니옵니까.”
“그렇지. 황공하옵게도 제국에 정통한 용황제가 등극하였음을 혼과 용님께 고하는 일이니 어찌 그렇지 않을 손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즉위식(卽位式)이라 하여도 결코 모자람이 없을 것이옵니다.”
“그대의 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음이라.”
“헌데.”
제 누이와 허울 좋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던 황고 엄충이 불현듯 표정을 굳히고 말을 멈추자, 제장 안도 덩달아 무거운 정적에 사로잡혔다. 헌의공 서엽이 선 자리에 사열하고 있던 이들의 표정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불안감에 가슴이 들끓었다. 제장 안을 싸늘한 눈빛으로 한 번 돌아본 후에 엄충이 말을 이었다.
“마땅히 져야 할 의무를 내팽개치고 모습을 감춘 후, 용님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천제사에마저 불참하신 황상을 어찌 생각하여야 옳은 것이옵니까?”
“······!”
보이지 않는 바윗덩어리가 굴러 떨어진 듯, 사람들이 일시에 표정을 굳혔다. 제장 안의 온도가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개중 성격이 괄괄한 몇몇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 고함을 내질렀다.
“무엄하다! 어찌 그리 불경한 말을 지껄일 수 있단 말이오!”
“그러고도 그대가 제국의 신하인가!”
“어찌 생각하여야 옳으냐니! 황고, 자네는 자네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대는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신자(臣子)에 불과하네! 어찌 한낱 신자가 천자(天子)의 허물을 논한단 말인가! 어불성설, 어불성설이로다!”
이마에 핏대까지 세우며 엄충을 비난하는 이들의 얼굴에는, 네 놈이 무엇을 노리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두 안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그러나, 성난 이들이 고함까지 지르며 엄충을 비난할 때도 정작 헌의공 서엽은 알 수 없는 웃음을 입술과 눈가에 띤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거의 아우성에 가까운 사람들의 노성을 엄충의 차가운 목소리가 단번에 끊어놓았다.
“천제사는 신자와 천자 간의 일이 아니라, 용님과 천자 간의 일이오. 황상께서는 우리들 신자와의 약조를 어기신 것이 아니라, 용님과의 약조를 어기신 것이 된단 그 말이오.”
장내의 소란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허나 이 천제사는 황상의 뜻이···.’ 누군가가 중얼거렸지만 그 목소리 또한 이어진 엄충의 한마디에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황상의 뜻이 아니라 해도 변하는 것은 없소. 누구의 뜻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지상(地上)의 사정일 뿐, 용님께오서 고려하실 하등의 이유가 없는 일이오. 하늘과의 약조나 다름이 없는 천제사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을 시.” 엄충이 방금 전 자신의 말에 반박하였던 현(現) 태공 위성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용님의 분노를 사지 않는다 그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
“!!”
충격을 받고 얼어붙은 사람들 사이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정적이 돌았다. 용님의 분노(忿怒). 그 말이, 아직도 사람들의 가슴 속 깊숙이에 똬리를 틀고 있는 본능적인 공포심을 자극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눈에 띄게 불안해진 서엽 측 사람들이 헌의공을 곁눈질했다. 이를 어찌하여야, 좋단 말인가. 엄충이 이렇게 나온 이상, 웬만한 명분으로는 태황태후 측의 행동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동시에 그들의 눈에 의구심이 어리었다, 헌의공이라면 엄충이 이리 나올 것을 짐작하지 못했을 리가 없을 터인데 어찌 믿는 구석도 없이 천제사를 강행하였단 말인가!
그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도 전에, 엄충이 다시 태황태후 엄씨에게 아뢰었다.
“그러한 까닭에, 마마. 소신 황고 엄충이 충심으로 아뢰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태황태후가 눈가를 휘었다, ‘발언을 허한다.’
“현 수상인 체제공 서현 또한 제좌에 오를 자격을 갖추었고, 또한 황상과 달리 그 이는 지금 당장 지상에 있사오니 수상을 급히 불러들여 천제사를 치러야 하노라 간언 드리옵나이다.”
“체제공이라···.”
엄충의 말에 태황태후가 답지 않게 망설이는 척을 하자, 엄충의 뒤에 사열하여 있던 자들이 하나둘씩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한 시가 급한 상황이옵니다.”
“황실의 큰 어르신께오서 결단을 내려주셔야 하는 상황이옵니다.”
“제좌에 앉으신 황상을 두고, 이 같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 마마께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 소신들 또한 잘 알고 있사옵니다. 허나 소신들은 역심(逆心)을 품고 이 같은 일을 벌이려는 것이 결코 아니옵니다.”
태황태후 엄씨가 재빨리 가식적인 말로 답했다.
“그대들의 충심을 내 익히 알고 있거늘, 어찌 그대들이 역심을 품고 이 같은 일을 벌인다 의심할 수 있겠는가?”
엄충이 대꾸했다.
“그러하시다면 모쪼록 소신들의 간언을 새겨들어 주시옵소서.”
엄충의 뜻에 동조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한층 더 힘을 얻었다. 개중 하나가, 용님의 노여움 운운하던 엄충의 말에서 안고(案考)를 해냈던지 소현태자의 이름을 언급하였다. 다름 아닌 근장상장군 교혁경이었다.
“조금이라도 지체 하였다가는 황고의 말대로 하늘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사옵니다. 마마께서는 소현태자의 예를 잊으셨사옵니까?”
“당시의 변고로 백성들이 받아야만 했던 고통을 상기하여 주시옵소서.”
“결단을 내려주시옵소서.”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엄충을 시작으로, 그 뒤의 엄유, 그리고 엄씨 일가들과 그들과 뜻을 같이 하는 교해근 및 교혁경 등의 재관(宰官)들이 일제히 태황태후 엄씨의 앞에 절을 하며 외쳤다. 마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절을 하며 태황태후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소리가 계속하여 높아졌다.
헌의공···, 서엽의 뒤에 사열하여 있던 재관들 중 몇몇이 목소리를 낮추어 서엽을 불렀다. 서엽이 눈길을 주자 그들이 안절부절 못하며 엄충을 곁눈질했다, ‘헌의공,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헌의공, 무언가 묘수가 있으신 게지요?’, ‘헌의공.’, ‘헌의공.’, ‘헌의공.’
감히 황실의 큰어르신인 자신을 가리키지는 못하고 대신 엄충의 뒷모습, 옆모습이나 눈짓하며 안달을 내는 그 이들의 꼴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는 태황태후 엄씨가, 불시에 서엽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만조백관(滿朝百官)들이 그리 말하는데, 진화(珍話: 서엽의 호號)의 지려는 어떠하신가?”
그 뻐기는 듯한 말투에 서엽이 싱긋이 한 번 웃고는 대꾸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만조백관은 아니지요.”
그 어희(語戱)에 태황태후 엄씨가 이맛살을 구기며 무어라 박을 놓으려 했으나, 말을 꺼낸 것은 서엽 쪽이 먼저였다.
“신은 아직 황상께오서 필위(必爲) 오실 것이라 돈신(惇信)하옵나이다만, 만일 그리 되지 않는다면.”
“그리 되지 않는다면?”
“황고의 간언대로, 마마께옵서 수상을 불러 제사(祭司: 제사장)를 맡기시어도 문제가 되는 점은 없다 여겨지옵니다.”
서엽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놀라 사례가 들린 몇몇은 체면조차 잊고 심한 기침을 하기도 했다. 놀란 것은 그러나 서엽을 따르던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절체(絶體)의 위기에 다다라서도 침착하다 못해 태연하기까지 한 서엽의 태도에 태황태후의 입장을 지지하던 이들에게마저 파문(波文)같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서엽이 연달아 말했다.
“상국은 어디에 있사옵니까? 천제사를 혼선 없이 진행하기 위하여서는 상국이 제장에 대기하고 있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사료되옵니다.”
서엽의 물음에 태황태후 엄씨가 당황한 눈빛을 제 오라비에게로 던졌다. 그 눈빛을 읽은 엄충이 엄유 쪽을 돌아보았지만, 엄유는 당황하여 머리를 저을 뿐이었다. 엄충이 처음으로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서엽이 웃음을 터뜨렸다.
“황고께서도 참으로 짓궂으십니다. 황상께서 간곳을 알 수 없으니 용님께 황상을 용황제로 아뢸 수 없다 하시었지요, 몸뚱이의 행방이 묘연한 이도 그러한데 대체 무슨 방법으로 넋이 이승에 있는지 저승에 있는지 알 수도 없는 작자를 가지고 용님께 제사를 지낸단 말입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당황하여 제 오라비와 서엽을 번갈아 쳐다보고만 있던 태황태후가 왈칵 성을 냈다. “이 무슨 폭설(暴說)이란 말이오! 넋이 이승에 있는지 저승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니!”
그렇게 성을 낸 태황태후가, 마구잡이로 소리를 치며 일렀다.
“들어라! 병이 중한 와중에 이 같은 명을 수행하는 것은 참으로 난할 일일지도 모르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상국 서현에게 일러 당장 제장에 들라하여라!”
서현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를 수행하여 오라는 명이 아니라 정신을 잃고 있는 사람을 억지로라도 제장에 데려 오라는 명령이었다. 그 짐작을 확신으로 굳혀 주기라도 하듯이 태황태후가 냉소하며 덧붙였다.
“혼절한 상태의 사람이라도 모르는 일이지, 제를 지내는 동안 정신이 돌아올지.”
“송구하옵니다만, 마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사옵니다.”
여전히 여유가 만만한 서엽의 말에, 태황태후가 잔뜩 독이 올라 내뱉었다.
“그래, 한 번 봅시다. 제장에 있지도 않은 황상과, 그래도 몸뚱이는 제장에 있는 상국 중 용님께서 어느 쪽을 이 대 용황제로 인정하실지!”
“역시 마마시옵니다. 이것 참으로 재미있는 내기가 아니옵니까!”
서엽이 껄껄 웃으며 맞대꾸했다.
“제장에 누운 반 사자(死者)와 생자(生者)가 용황제 자리를 두고 다투다니!”
“듣자 듣자하니 아까부터 무슨 망언을 지껄이시는 게요!”
태황태후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날카로워졌다.
“사자라니! 무슨 그런 말을 하신단 말이오! 사람이 된 이상 어떠한 상황이래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는 거요! 그대가 상국의 아비라고는 하나, 상국 본인이라도 되는 게요? 어찌 상국의 생사를 그리 자신의 것처럼 쉽게 입에 담는 것이요? 저주요, 망상이요, 그것도 아니면 소망이요? 내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구려!”
“저주도, 망상도, 소망도 아니옵니다.”
하고 답하는 서엽의 목소리는 태황태후의 격앙된 목소리와 대비되도록 차분하였다. 아니라?, 태황태후가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리자 서엽이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그저 사실이라 그리 아뢰었을 따름이옵니다.”
“사실···.”
“예. 사실이옵니다. 신이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이나 망상 따위를 고하겠나이까?”
서엽이 웃었다. 그의 눈과 입가에, 잦은 미소로 팬 주름이 다시금 깊숙이 파이며 예의 그 사람 좋은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이 짙어질수록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기만 했다.
지금까지의 경악이나 두려움, 황망함과는 미묘하게 종류가 다른 스산함이었다. 마치 반투명한 지주사(蜘蛛絲: 거미줄)에 칭칭 감겨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는 애벌레에게 화려한 노란 줄 색동거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가는 것을 목격한 듯한 으스스함.
“상국은 제가 끝날 때까지, 결코 정신을 복상(復常: 회복)할 수 없사옵니다.”
스산한 침묵이 가라앉은 제장에 서엽의 목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결코.”
“······.”
그리고, 그 때였다.
“마마께 아뢰옵나이다.”
배제관(陪祭官) 중 하나가 황급히 달려와 속삭인 말에, 집사관(執事官) 문희학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리었다. 배제관이 소곤거리는 말을 들은 광록훈 기문 소훈이 정안(正顔)을 하고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 때는 이미 집사관 문희학이 말을 꺼낸 뒤였다.
태황태후와 서엽의 시선을 비롯하여 모든 제장 사람들의 눈이 자신들이 있는 곳을 향하자, 기문 소훈이 난색을 표하며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서엽이 ‘마마.’하며 태황태후를 부르자, 태황태후가 벌컥 건짜증을 내듯이 내뱉었다.
“고하여라. 허나 듣고서 대무(大務)가 아니라 판단될 시에는 네 놈을 엄중히 벌할 것이다.”
거의 협박이나 다름이 없는 말에도 집사관 문희학의 표정에는 두려움이나 낭패감 같은 감정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문희학이 고하였다.
“용기(龍氣)가 나타났사옵니다.”
“!”
용인의 기운이 잡히었다. 용인의 기운을 가진 이는 황제와 서현 단 둘 뿐, 그러나 나타난 기운만으로는 그것이 어떤 이의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모든 이가 저마다의 생각에 굳게 입을 다문 가운데, 서엽이 입을 열었다···.
“뫼시어라.”
그리고 제관(祭冠)들의 구환술(句喚術)에 답하여 이 제사장 안으로 소환되는 이가,
“이 제국의 진짜 주인이 될 것이다.”
**
“돌아가지요.”
모든 것이 끝난 후, 끝을 모르고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서문경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채 잦아들지 않은 격정이 억눌린 채로 드러나 있었다. 돌아가? 황제가 대꾸했다. 서문경이 한 말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그저 들리는 말을 반복하는 듯,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서문경이 덧붙였다.
“궐로요.”
“그대는 돌아가고 싶은가?”
“폐하께서 돌아가고 싶으신 것 같아서 그러는 겁니다.”
“짐이, 돌아가고 싶어한다고?”
인피(人皮)를 쓴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그 곳으로 말이냐? 조소가 섞인 목소리에 서문경이 발끈해서 말했다.
“이곳에 한시라도 더 있기 싫어서 몸부림을 치는 주제에 뭐라시는 겁니까?”
그 말에 황제가 무심코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뭔가 자신이 또 말실수를 했나 싶어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서문경에게, 황제가 불쑥 물었다.
“다른가?”
“예?”
“그대는 다른가 말이다.”
저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서문경이 얼굴을 찌푸린 채로 머리만 모로 기울였다.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서문경이 겨우 황제의 일그러진 얼굴과 해쓱한 낯빛을 보고 입을 열었다.
“여기가 싫지 않으냐, 그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대답은 없었지만 딱히 부정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자신의 짐작이 맞은 모양이었다. 서문경은 황제의 얼굴을 힐끗 한 번 더 보고 시선을 돌려 주위를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사위는 여전히 어두웠고, 공기 또한 여전히 달라붙는 듯이 습하였지만 더 이상 숨 쉬는 데에도, 보는 것에도 무리가 없었다. 자신이 이곳에 익숙해 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 인간이 아닌 용인이기 때문일 것이리라.
자신과 황제가 있는 이곳은 굴(窟)이었다. 허나 사방이 바윗돌과 같은 단단한 무언가로 둘러싸여 있어 일단 굴이라 이름 붙이기는 했으되 자신에게 익숙한 석굴이나 종유동굴 따위는 아니었다.
서문경이 시선을 주자 그 시선 끝에서부터 검고 몽글거리는 것들이 바글바글 어둠 속에서 끓어올라 서문경의 손끝을 향해 기어왔다. 서문경은 피하지 않고 손을 더 가까이로 뻗었다. 손등을 뭔가가 타고 올라오는 감촉과 함께, 벽이라고 추정되는 무언가가 만져졌다. 무섭도록 차고 단단했지만, 섬뜩하지는 않았다. 서문경은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중간 중간 얕은 홈이 만져지고, 그 아래에서 단단하다기보다는 탄력 있는 감촉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가끔씩···,” 서문경이 홀린 듯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빛이 비치는 것처럼 몇몇 부분이 반짝일 때가 있는데···, 그것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아름답다고?”
“예. 그리고 이렇게 손을 대고 있으면, 뭔가가 꿈틀거려요.”
살아 있는 것처럼, 하는 말을 서문경은 목구멍 안쪽으로 밀어 삼켰다. 황제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내뱉었다, 숨길 수 없는 혐오감으로 가득한 목소리였다.
“끔찍하지 않은가?”
“아니요.”
“징그럽지 않은가?”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서문경이 차분하게 덧붙였다, ‘말씀 드렸다시피 저는 이곳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또, 편합니다.”
하고 말하고 난 뒤에야 서문경은 자신이 이 장소에서 느끼는 느낌을 어디에서 느껴본 적이 있는지를 생각해냈다. 알 속에서 잠자면서 받았었던, 그 느낌이었다.
황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짙은 혐오감이 깔려 있던 얼굴에 혐오감 대신 의구심이 자리했다. 그가 혼잣말인지, 아니면 서문경에게 하는 질문인지 애매한 말을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가용인이기 때문인가. 허나 그대 또한 짐에게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거늘 어찌하여 이런.”
“어찌되었건.”
서문경이 황제의 말을 썩둑 잘랐다. 아무리 생각해봐야 답이 나올 리가 없는 것을 가지고 고민해봐야 시간 낭비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서문경이 서슴없이 원래로 화제로 돌아갔다.
“폐하께서는 이곳을 꺼려하시는 것 같으니 궐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치가 떨리도록 싫은 곳보다는 차라리 조금 짜증이 나는 곳이 몸을 회복하는데 낫지 않겠습니까. 저나 폐하나 아직까지는 요양이 필요한 몸입니다. 어차피 이곳에서 이룰 일은 모두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게 아니면.”
몸을 일으킨 서문경이 비난하는 듯한 시선을 황제에게로 돌렸다.
“수상을 무슨 낯으로 봐야 할지 두려워서 그러십니까?”
“······.”
“답답하기는.”
서문경이 들으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황제의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줄 알지요. 하지만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썩어 들어갈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움직이지 않는 것은 폐하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지런히 기고, 걷고, 넘어지고 그러면서도 다시 일어나서 달리고 있어요. 수상도 수상의 아버지라는 그 사람도, 태황태후도. 그러니 침묵하고 있어봐야 일어나는 것은 폐하께 불리한 일 뿐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이러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하고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면서 서문경이 황제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바닥을 겹쳤다.
“서엽이나 태황태후 따위의 사람들에게 이유도 모르고 휘둘리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충분히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는 폐하와 수상, 두 사람이서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세요.”
그러셔야 합니다. 서문경이 아직도 열리지 않는 황제의 눈에, 그의 눈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자리에 똑바로 자신의 눈을 맞추고 말했다. 서문경의 그 말을 듣고도 황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서문경은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황제의 눈꺼풀 위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이 했었던 말을···, 취소해야겠구나.”
의외의 말에 서문경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예?’ 보이지 않는 눈 대신 손가락으로 보려는 듯이 서문경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던 황제가 대답했다.
“그대는 결코 헛똑똑이가 아니야.”
“아니, 그 이야기가 또 왜,”
반사적으로 투덜거리려는 서문경의 입을 황제가 손으로 막았다, ‘분위기 파악을 잘 못 하는 것은 맞지만 말이다.’ 여기서 더 말해 봐야 안 좋은 소리만 들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서문경이 볼이 부은 채로 일단 입을 다물었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서문경의 볼때기를 문지르며 황제가 말했다.
“참으로 영민해. 이리 착한데도, 머리 또한 참으로 영민하다. 사람을 보는 눈은 그리 좋지 않은 듯 하지만···.”
“그 말은 안 하기로 하셨지 않습니,”
“계속 듣거라.”
황제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서문경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기세에 압도된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자, 황제가 말을 이었다.
“어찌된 까닭인지 일단 그대가 짐의 곁에 있기로 마음을 굳혔다 하니, 이제 짐도 두려울 것이 없음이로다···.”
서문경이 내리깔고 있던 눈을 반짝 뜨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럼!”
황제가 가느다란 한숨을 섞어 말했다.
“돌아가자.”
엉킨 실을 풀어내야 할 때였다.
**
“신묘하군.”
엄헌영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기대하지도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합니까.”
“······!”
하는 대답이 들려온 쪽으로 엄헌영은 놀라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대답한 자의 얼굴을 확인한 직후, 엄헌영이 재빨리 경계태세를 갖추고 성큼 뒤로 물러났다. 엄헌영이 그 쪽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염락 조원!”
조원이 빙그레 웃으며 엄헌영을 향하여 허리를 굽혀 보였다.
“퍽 오래간만에 뵙는 듯합니다, 장군.”
“그렇던가?” 엄헌영이 이를 갈며 대꾸한 다음 허리춤에서 칼을 빼 들고 조원을 향해 겨누었다. “나는 잘 모르겠군.”
“마지막으로 뵌 날 이후로 소인에게 죽 이를 갈고 계셨었나 봅니다.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하시니.”
칼을 보고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조원을 향해 엄헌영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런가보지.’ 그리고서 그가 바로 얼굴을 굳히면서 경고했다.
“당장 이곳에서 꺼져라. 그것이 아니면 내 죽 별러 왔던 빚을 갚아 줄 터이니.”
“이곳이 장군의 사저도 아닐진대 어찌 소인에게 오라 가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자네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가!”
엄헌영이 노성을 내질렀다. 조원의 말마따나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사유지도 뭇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되는 공관(公館)도 아닌 수상부 근방에 딸린 구부(丘阜)에 불과했지만, 불과 반각 전까지만 해도 혼절한 상태의 서현과 그를 모시고 있던 천견 최유가 있던 자리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견’ 최유이니 조원 저 작자에게 제 주인이 있는 곳을 들켰을 리가 만무하지만, 그 사실과는 별개로 이 자리에서 조원과 맞닥뜨린 사실 자체에 가슴 속이 서늘하고 마음이 불쾌해진다.
엄헌영의 추궁에 조원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금일이 천제사 날이 아닙니까. 허나 소인은 제장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존귀한 신분이 아니다 보니 괜히 마음만 궁금해지고 발이 근질근질하지 뭡니까. 그런 까닭에 용님과 연관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말았습니다. 헌데 효강께서도 아시겠지만, 원경에 용기(龍氣)가 서린 길지, 그리고 소인 같은 야인(野人)으로서도 자유롭게 주변을 거닐 수 있는 곳이라고는 이 곳 밖에 없지를 않습니까.”
“······.”
자신의 해명에도 이렇다 저렇다 하는 대꾸 없이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고만 있는 엄헌영을 향해, 이번에는 조원이 물었다.
“헌데 장군께서는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장군 정도의 집안에, 장군 정도의 지위라면 천제사장에 쉽사리 들어가실 수 있었을 터인데요. 상국과는 예전에 척을 지신 장군께서 별다른 일도 없이 이 주변을 서성대실 리도 만무하고 말입니다.”
“···아직, 가례가 시작된 것도 아니지 않아.”
“진시를 알리는 종이 벌써 반각도 전에 울렸습니다.”
콧잔등을 찡그린 채, 말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조원의 눈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있던 엄헌영이 휙 몸을 돌렸다.
“옛정으로 있으니 불현듯 마음이 내치락들이치락하여 이리로 자리하였을 뿐이지 별다른 까닭은 없어. 곧 제장으로 향할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목격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입니까?”
엄헌영의 발이 주춤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조원이 은근한 공난(攻難)으로 그의 속을 들쑤셨다.
“황상이 되었든 상국이 되었든 제좌에 앉는 용인은 하나 뿐, 허니 필히 나머지 한 사람은 패전자(敗戰者)가 될 수밖에 없지요. 장군은 그것을 볼 자신이 없으신 겁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택하지 못한 겁쟁이시니 말입니다.”
그 말에 엄헌영이 눈을 시퍼렇게 뜨며 일갈했다.
“뚫린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정녕 목이 잘리고 싶으냐?!”
챙! 엄헌영의 칼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조원의 목젖 바로 앞을 겨누었다. 엄헌영이 조금이라도 손을 움직이면 바로 살이 베일만한 처지가 되자 내내 느긋하기만 하던 조원의 표정도 어느 정도 굳는 듯 했다. 하지만 희게 바랜 낯빛을 하고도 조원은 좀처럼 입을 닫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빈정거렸다, ‘속이 뜨끔하셨나 봅니다?’
“이놈이 이래도···!”
“정녕 아니라면 아니라고 잘라 대답해 보십시오.” 조원이 입을 다물기는커녕 도리어 목소리를 높였다. “네 놈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나는 이미 둘 중 하나를 택하여 그 뒤를 지지하고 있노라 말하여 보시란 말입니다.”
“둘 중 누구를 택할 필요가 굳이 있더란 말이냐! 나는 희와 제안 중 누구도 택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것이 아니라 선택을 피한 것이겠지요!”
조원이 더욱 강하게 못을 박았다.
“장군의 말이 어딘가 모순되었다 생각지 않으십니까? 장군께서는 황상께서 잘못을 저질러 세 분의 사이가 비틀어졌다 공공연히 말씀하고 다니셨습니다. 허나 그 말씀 그대로라면 상국은 피해자가 되지요, 헌데 장군께서는 황상은 물론이요 상국과도 전혀 교류치 않고 계십니다. 이상한 일 아닙니까?”
“···입 닥치거라, 염락. 그저 나는 현주께서 상국과 불편한 사이가 된 까닭에 현주를 배려하여 그와 간격을 두게 된 것 뿐이다.”
“그것도 이상합니다.”
조원이 딱 잘라 말했다.
“어찌하여 취영당 마마셨습니까? 그보다 더 절친한 관계였던 황상과 상국을 두고서 말입니다.”
“입 닥쳐.”
“그 두 사람 중에서는 누구도 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리하여 취영당 마마께 도피하신 것이지요.”
“닥치라고 했느니!”
격노한 엄헌영이 고함을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휙! 공기를 매섭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조원의 목덜미에서 횡(橫)으로 핏줄기가 흘렀다. 엄헌영이 나직하게 위협했다.
“다음에는 목을 벨 것이다.”
조원의 입꼬리가 조용히 위로 비틀려 올라갔다. 엄헌영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엇이 우습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처럼 미천한 자가 감히 장군 같은 분을 어찌 비꼴 수가 있겠습니까. 장군께오서 그리 회답하여 주시었으니 소인으로서는 그런가보다 하고 믿을 수밖에요.” 다만, 하고 조원이 은근한 투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장군의 신관을 뵙고 있자니 시방(時方)이면 제좌의 주인이 정해졌겠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제좌의 주인이 정해졌다?”
예에, 하고 조원이 말끝을 늘였다. 엄헌영이 무심결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일각(一刻) 정도 전에 서현과 최유 등이 천제사장으로 떠났다. 허나 수상부에서부터 길지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으니 아직까지는 그가 천제사장에 당도하지는 못하였을 터인데···.
그 때 조원이 말했다.
“소인, 이리로 향하면서 놀라운 말을 듣고 왔습니다.”
“무슨···.”
“용기(龍氣)가 궐내에 나타났다는 말이었지요.”
“···!”
엄헌영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용인의 기운이, 궐내에 나타났다고?”
“그렇습니다. 황상께서 둥지에서 나오신 것인지, 그것이 아니면 상국께서 입궐하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고 슬며시 웃으며 말한 다음, 불현듯이 표정을 바꾼 조원이 혀를 차며 난감하다는 투로 말했다.
“언제 해가 이리 높아졌는지!”
그리고서 그가 조원을 향해, 처음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허리를 굽혀 공손히 예를 차렸다. 그리고 말했다.
“소인 염락 조원, 이제 물러나도록 하겠나이다. 장군께서도 곧 천제사장으로 향하신다 하니, 어쩌면 다시 마주트릴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분명 자네는 길지에 입장할 자격이 되지 않는다 자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었나?”
“물론입니다. 허나 설마하니 제장(祭場) 밖도 그러하겠습니까? 또한 운이 따르면 제장 안을 관락(觀樂)할 수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지요.”
표정이 굳어 있는 엄헌영에게 조원이 매끄러운 혀를 놀려 말했다.
“상국으로부터, 창혜각 천객들에게 밀령(密令)이 있었나이다. 진시 종이 치고도 일각 이상이 지날 때까지 별다른 명이 내려오지 않는다면, 바로 길지로 모이라 하셨습니다.”
“무어라고!”
엄헌영이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외쳤다. 그리 외치는 엄헌영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이 저 치의 말을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가, 확신할 수 없었다. 만일 자신이 들은 것이 틀림이 없다면-.
엄헌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력행사(武力行使), 그 이상으로도 그 이하로도 해석할 수 없다. 더구나 황제로 추정되는 용기가 발견된 가운데, 서현이 천객들을 이끌고 제장으로 향한다 함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엄헌영은 이미 제장을 향하여 달려 나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원이 무어라 말을 던졌다.
“다시금-.”
갑작스럽게 멀어진 탓에 그 뒷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듣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엄헌영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금 선택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엄헌영은 콱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