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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대로 취영당 초입새는 버드나무들로 빽빽했다. 오랫동안 가꾸지 않아 늘어진 이파리가 모조리 말라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몇 리나 되는 샛길에 심어진 양류(楊柳) 가지는 천실만실 늘어지고 우거져 한 치 앞을 분간하기도 힘이 들었다.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아무리 헤쳐도 끝도 없이 들러붙는 버드나무 가지에 결국 칼까지 빼서 휘두르며 엄헌영은 계속해서 길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귓바퀴나 달팽이 집 같은 나선형 샛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허나 엄헌영은 초조해할 망정 당황하지는 않았다. 나선형으로 늘어진 버드나무 길을 지나면 긴 길을 따라서 느릅나무와 섞어 심은 유자나무 길. 그리고 그 길이 지나면 지금껏 지나온 산유자로(山柚子路)만큼 길고 양류로(楊柳路)만큼 어지러운 나사꼴 지형에 마치 산길로 들어온 것처럼 경사가 급한 길이 나오는데 그 길 양 옆에는 빽빽이 석류나무가 들어 차 있고 그 길을 지나면 바로-,
“······.”
말에서 내린 직후부터 내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던 엄헌영의 걸음이 주춤했다. 우거진 나무 그늘이 순식간에 걷히며 사방이 확 밝아졌다. 쏟아져 들어오는 밝은 빛에 엄헌영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두근.
엄헌영이 자기도 모르게 한 발자국, 발작하듯 발을 앞으로 뻗었다. 시선은 여전히 마냥 앞을 향한 채였다. 그러다 엄헌영이 멈칫하고 놀란 눈으로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자신은 빠르게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실상 자신의 발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고 있었다. 그러다 다음 순간 엄헌영은 비로소 깨달았다. 빠르게 걷고 있다고 착각한 것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는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 때문이었다.
훅 부풀며 온 몸으로 피를 내뿜은 심장이 다시 오므라들 때마다 썰물처럼 오묘한 감정이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온다. 그와 동시에, 지금껏 뱃속 깊디깊은 곳에 묻어두고 덮어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함께 되살아났다. 어린아이들이 서로 떠들며 웃는 소리와 때로는 우는 소리,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찮은 일로 이마에 핏대를 세워 가며 다투었던 기억. 또 때로는 서로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외종숙(外從叔). 영이 종숙.’
늘 젠체하며 외종숙인 자신을 격에 맞게 대우해주는 적이 드물던 소년이 가끔, 아주 가끔 자신을 그리 부를 때가 있었다. 자신을 찾으러 온 궁인을 피해 취영당 뒤편의 수풀 속에 깊숙이 몸을 피했을 때였을 것이다. 무슨 까닭으로 춘궁(春宮)의 궁인들을 피하느냐, 얼결에 그 이의 손에 이끌려온 자신이 묻자 소년은 대답은 않고 애매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제 마음이라며 얄밉게 톡 쏘아 붙였을 그 이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신기하여 자신도 모르게 말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거만하게 턱 끝을 치켜들고 있지 않은 그 이의 얼굴이, 다른 이들이 뭐라 해도 자신 스스로는 단 한 번도 그리 생각해 본 적이 없건만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종여형(從女兄: 사촌 누나)과 너무나 닮아 있어서 당혹스럽던 마음이 슬그머니 누그러들었다. 말없이 수풀 속에 숨어 있기를 한창, 불현듯 소년이 중얼거렸다.
-금일이 기망(旣望: 육보름날)이지···.
-으응?
뜻밖의 중얼거림에 그리 물으며 돌아보았건만 아이는 생백(生魄)의 달빛에도 누그러지지 않고 불타고 있는 등광(燈光)만 말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안에 참말로 산 나비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이리로 휙 저리로 휙 넘나들며 소년을 찾던 등광이 소년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머얼리로 발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소년이, 불현듯 덧붙였다.
-당숙, 나는 기망이 싫어.
-왜?
반사적으로 대꾸해 놓고서야 깨달았다.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귀가 잘못되었나? 지금 저 치가 내게 당숙이라 하였지?
-지금 뭐라고···.
-보름은 길일이래지. 헌데 보름과 다만 일일(一日) 차이가 날 뿐인데 기망은 흉일(凶日)이라 하였어, 찬 달이 기울 일만 남았다 하여서.
-모르겠어.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이 운수에 무슨 영향을 미치어서 길일이니 흉일이니 하는 것인지. 미신이 아니야?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이 한 대꾸에, 비로소 소년이 자신 편을 돌아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외종숙. 영이 종숙, 나는 그리 말할 수 있는 종숙이 참으로 좋아.
-으응?
-또한, 혜 누이도 희 형님도 들이좋아. 참으로 좋아···.
너어, 하고 늘 얄미운 제안답지 않은 말에 당황하여 잠시 물러섰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다음 순간 저절로 귓가가 벌게졌다. 쑥스러운 마음과 동시에 뜨겁고 몽실몽실한 무언가가 가슴팍에 가득 차는 것 같은 기분이 밀려들었다. 그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어색해서 툭하고 쏘아붙이듯이 대꾸했다.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야.
그 말에, 소년은 늘 그렇듯 성을 내는 대신 입꼬리만 조금 끌어올렸다. 그 웃음이 자신의 눈에는 몹시도 이상하게 보였다. 평소 그가 짓곤 하던 웃음과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아니,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때의 그 웃음은 마치···.
-기망은 흉일이 맞아, 종숙.
웃음이라기보다는 울음. 눈물만 없었다 뿐이지 마른 얼굴로 온통 짓는 것과 다름이 없는 우는 얼굴.
-아니, 망일(亡日)이야. 점점 죽어가.
-······.
그 때는 그리 말하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것은 지금도 매한가지.
“······.”
그리고, 그 기묘한 대화가 오고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일이 터졌더랬다. 엄헌영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전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숨을 몰아쉬었다. 억지로 막혀 있다가 한 번에 터져 나온 숨소리가 배고픈 짐승의 목울림 소리처럼 들려서 엄헌영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곧 그는 콱 아랫입술을 깨물며 몇 번 도리질을 쳤다. 왜 이런 생각을, 그것도 이런 때 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다 변명. 다 변명일 뿐이다.”
하고 중얼거리며 엄헌영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래, 무슨 이유를 대도 모든 것이 변명일 뿐이다. 아니, 오히려 그 때 그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자신은 더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귀중하다 했었다, 누구에도 비할 수 없는 귀한 인연이라 했었다. 그런데 어찌 혜와 소희의 일을 미친 제 아비에게 그대로 일러바치고, 또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혜의 눈길을 그리 매정하게 뿌리칠 수 있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입으로 그리 말해 놓고는.
“필요 없어.”
필요 없다. 그러니 그에 관하여서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 엄헌영은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다. 귀에 들리도록 말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벌써 몇 년도 전에 틀어져버린 그와 함께 했었던 공간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머리가 욱신거리고 가슴 속이 무거운 안개로 술렁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이 취영당의 풍경이 보이지 않도록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위기감이 들었다. 엄헌영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가 이를 악물고, 뛰기 시작했다.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여기를 빠져 나가야 해, 어서.
그렇지 않으면 위험했다.
지독하게 아파오기 시작한 머리를 감싸 쥘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엄헌영은 취영당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취영당은 그의 마지막 기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제멋대로 우거진 나무들을 제하고는 머릿속의 기억보다 조금 더 빛바랜 색을 띄고 있었다.
“어디 있지?”
엄헌영은 미친 듯이 취영당 안을 헤집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언가 무거운 것이 떨어지고 가벼운 것들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어디 있어?!”
엄헌영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높아졌다. 그런 그의 발치에 덜컹, 하고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렸다. 엄헌영이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표정을 굳혔다. 단단하게 짜 맞춘 마루 한편에, 육안으로는 구분하기 힘든 턱이 튀어나와 있었다. 언젠가 자신과 제안이 서로를 쫓고 쫓다가 만든 상처, 혹여 희에게 들키기라도 했다가는 된소리(: 큰소리)를 들을 터이니 평생 입을 닫고 있자고 약조했었던 그것. 엄헌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엄헌영은 이를 악물고 보랑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눈에 익숙한 방, 이전에 취영당의 원 주인이었던 취영당 재여씨가 썼었고 그녀와 소현태자의 사후에는 경혜가 이어서 썼었던 침방이었다. 문제의 그 날, 절망한 경혜가 울며 자신도 모르게 쓰러뜨렸던 은촛대가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아직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미친 듯이 취영당 안을 헤집고 다니던 엄헌영도 그 풍경을 보고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입술 사이를 비집고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멍하니 방 안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엄헌영은 이윽고 거칠게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 내렸다.
결계. 천객으로서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결계로 싸여 있는 취영당. 최유의 말이 옳았다. 어떤 의미로건, 취영당은 결계에 휩싸여 있었다. 그 결계가, 이곳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과거에 머무르게 하고 있었다.
“악취미···.”
엄헌영은 중얼거렸다.
몰랐다. 취영당이 아직까지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그 때로부터 조금도 변함없는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서현과 제안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던 것처럼, 그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취영당을 찾지 않았었던 탓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날 이후로, 취영당은 완벽하게 방치되었다. 가연제가 붕어하고, 그 뒤를 제안이 이은 뒤로도 주욱.
엄헌영은 내심 헌의공 서엽이 어떻게든 손을 썼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짐작은 틀렸다. 취영당은 그대로였다. 서엽의 머릿속이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듯이 뻔히 보였다.
“차라리 비웃는 것이 나았을 것을···.”
엄헌영은 천천히 경혜의 침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엽이 일부러 이 침방을 이대로 보존해 둔 것이라면 그가 자신이 찾아야 하는 항아리를 어디에 두었을지도 짐작이 갔다.
그런 그의 발밑에서 바삭, 하는 소리가 났다. 내려다보자 그것은 빳빳이 풀을 먹인 천이었다. 그 빛깔이 사내인 엄헌영의 눈으로 보아도 너무도 고왔다. 어린 궁인의 입술연지를 떼어다 붙여 놓은 듯한 도백색(桃白色), 그것은 새 신부의 앞날이 복되기를 바라며 신부가 처녀적 지내던 침방과 곤외(?外) 사이에 깔아 놓는 복포(福布)였다. 고인인 취영당 재여씨 대신 운현궁 마마가 내려 준 복포는, 십 수 년도 전에 제 주인인 경혜 현주가 밟고 문지방을 넘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아직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지방을 넘어 들어가는 엄헌영의 발밑에서 말라 있던 복포가 파스슥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이제 고운 복포 대신 그 자리에 뽀얀 도백색 분만이 남았다. 마치 지금껏 다하지 못한 역할을 이제야 이루고 사라진 것처럼.
엄헌영은 낡은 침상 앞에 멈추어 섰다. 그 옆에 난 자그마한 반달창을 통하여 막 감노란 빛이 돌기 시작한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십 년도 지난 그 때의 그 날, 꽃가마를 타고 간 정인의 빈 침실에서 멍하니 뒤돌아 서 있던 누군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의 그 모습이 아마도 지금 자신의 뒷모습 같을 것이다.
애도하듯 아주 잠깐 그 자리에 서 있던 엄헌영이 이윽고 허리를 숙였다. 그의 손이 강하게 낡은 침상을 끌어 당겼다. 끼익,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침상이 끌려오고 침상이 가리고 있던 한 쪽 벽면이 엄헌영의 눈앞에 드러났다. 엄헌영은 등홍(橙紅)빛 석류화(石榴花)가 가득 핀 판판한 벽지 위를 손바닥으로 더듬다 어느 한 곳을 힘껏 짓눌렀다. 끽-.
한 쪽 벽면이 통째로 돌아가며 지금껏 없었던 층대(層臺)가 엄헌영의 눈앞에 나타났다. 소현태자가 재여씨를 위하여 만든 비밀스러운 통문(通門)으로, 자신과 서현, 제안이 경혜를 만나기 위하여 드나들던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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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적으로 혀가 감기어들던 것도 잠시, 황제가 강한 힘으로 서문경을 밀어냈다. 밀려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참에 서문경의 이에 긁혀 황제의 입술이 터져나갔다. 자신의 것이 아닌 피맛을 느끼고 나서야 아차했는지 서문경이 조금 몸을 물렸다. 짧게 혀를 차며 자신의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는 서문경을 황제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것이 무슨 짓이더냐.”
“무슨 짓이라니요.”
서문경이 자신의 입가를 훔친 손등을 내려다보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손등에 묻은 피가 일부는 거짓말처럼 싹 흡수되어 사라지고 또 일부는 그대로 손등에 남았다. 예상대로다. 자신의 몸이 탐하는 것은 황제의 체액 뿐, 그렇다면 황제는 그 반대일 것이다.
생각을 끝낸 서문경이 머리를 조금 들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황제에게 비소(誹笑)와 흡사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그만 두어라.”
“싫습니다.”
“짐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 셈이냐?”
“누가 자살이라도 한답니까?”
“그것이 아니면?”
“하!”
서문경이 이번에는 소리까지 내어 비웃었다. 황제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도 서문경은 약간도 움츠려 들지 않았다. 제가 하고픈 대로 마음껏 비웃은 서문경이, 바로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굳히고 대답했다.
“제가 미쳤습니까, 자살 따위를 하게. 만약 그렇게 보셨다면 잘못 보셨습니다. 제가 폐하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몰라도 저는 제법 구질구질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아무리 살 이유가 없어져도-,”
거기에서 잠시 서문경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찰나, 황제는 미처 그 표정을 보지 못하였다. 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이 서문경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부득, 이를 가는 소리가 말소리에 섞여 나왔다.
“끝끝내 살 겁니다. 애초에 폐하께서 착각하고 계시는 것이, 제가 언제 폐하께서 하신 그대로 행한다 했었습니까?”
“···무슨 말이냐.”
“저는 폐하와는 달리 적당히, 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서로 자력으로 버틸 수 있을 만큼만 상처를 나눠 가지자는 거지요.’, 서문경이 씹어 내뱉듯 말하며 황제의 멱살을 잡고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자신의 피가 아직 남아 있는 손등을 황제의 한 쪽 볼에 문질렀다. 황제의 볼에 묻은 피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을 신중하게 확인한 서문경이 자신의 이에 긁힌 황제의 입술에 피가 맺혀 있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한 방울의 피도 아까운 시점이니 입으로는 안 되겠군요. 가장 접근성이 좋은 점막인데.”
설마, 하고 말하듯이 황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서문경은 그런 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몸에 걸쳐져 있던 알량한 옷 한 장까지 벗어던졌다. 황제의 몸이 움찔하며 조금 뒤로 물러났지만 서문경이 그의 허리 위에 올라타는 것이 먼저였다. 서문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폐하께서 하셨던 방식으로 하지요.”
“···그만 두어라.”
서문경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어째서요?”
“지금은,”
“왜 ‘지금은’ 안 된다는 겁니까? 그 때에는 되고요?”
황제가 무거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 태도가 어딘가 신경에 거슬려서 서문경의 미간이 더 깊이 팼다. 황제가 어린아이를 설득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그대는 ‘알’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상관이 있다.”
황제가 답지 않게 완강한 태도로 일관했다.
“또한 그대는, 예전과,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인지하여야 할 것이다.”
“상황? 상황이라면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계시는 쪽은 폐하십니다! 이대로 버티다가는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그대는 용인이다!”
황제가 날카롭게 일갈했다. 서문경이 일순 그 사나운 기세에 압도되어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다음에는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이라는 생각에 눈을 찌푸렸다. 그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고 중얼거리는 서문경의 시선이 자신의 팔에 돋아 있는 얇은 비단막 같은 비늘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 대답에도 황제는 머리를 저었다. 황제가 말했다.
“짐이 그대를 살리기 위하여 그대와 교합하였을 때는, 그 때 그대는 아직 인간이었다. 허나 지금 그대는 용인이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
“짐과 같은 종(種)이란 말이다.”
“······.”
“아직 모르겠단 얼굴이구나.” 황제가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 짐이 말하였던 적이 있을 터인데. 황제는 인간이 아닌 신수(神獸)이므로, 그 배필이 될 자의 성별에 개의치 않는다고.”
서문경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분명 그리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만···.’ 그 말허리를, 황제가 썩둑 끊고 말을 이었다.
“그대는 이제 짐과 같은 종, 즉 지금의 그대와 짐이 교합한다면 그대는 잉태(孕胎)하게 될 수도 있음이다.”
“······!”
“이제야 알았다는 표정이로구나.”
눈이 커다래진 서문경을 보고 황제가 중얼거렸다. 그 말끝에 가느다란 한숨이 묻어 나왔다. 놀란 서문경을 향해, 못을 박듯 ‘알겠느냐.’하고 말한 황제가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는 서문경의 쇄골 즈음을 살짝 힘을 주어 밀었다.
“경이 네 마음은 참으로 고맙다만, 충동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문제다.”
“하지만.” 서문경이 발작적으로 내뱉었다. “하지만.”
“짐의 힘으로 견뎌내 보겠다, 그러니.”
“자력으로 견딜 만한 일이 아니니 이러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 하여도 그대를 희생할 필요는 없음이야.”
“폐하!”
“이 이상은 듣지 않겠다.”
그 때, 서문경이 거의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하지만 이전에는!”
그 소리에, 아예 서문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있던 황제가 놀라 서문경 쪽을 돌아보았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듯이 서문경이 재차 외쳤다.
“이전에는, 예전에는 분명히 곁에 있어 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폐하의 방비가 되어 달라고, 억지를 부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꿈을 꾸었다.”
“······!”
놀란 얼굴이던 황제가 일순간에 모든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어조는 음의 고저도 없이 마냥 나직할 뿐이었고, 또 그 목소리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고 그저 심상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닫아버렸다.
악을 쓰며 지르는 비명보다, 노여움을 못 이겨 토해내는 노성보다 그 가만한 말 한마디가 훨씬 더 무거웠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무거운 얼음 덩어리라도 떨어진 듯이 가슴 속이 섬뜩해졌다.
“꿈···?”
“그래. 아니···, 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 과연 모르겠구나. 그것은 꿈이라기보다는···, 그래, 기억이었다. 추억이라는 갸륵한 말로 발효되지 못하고 시큼하게 썩어 들어간, 과거의 일들이었다.”
황제가 다음 순간, 그렇게 말을 이었을 때에야 서문경은 비로소 깨달았다. 아아, 그래. 저, 표정 때문이었다. 분명 자신의 눈앞에 있는데, 자신의 지척에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환각이고 환청인 것처럼 황제가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상실감을 느끼게 하는 저 표정.
비어 있다, 서문경은 번뜩 깨달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황제는 껍데기만을 남긴 채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누군가였다.
어느새 멍해진 서문경의 시선도 깨닫지 못한 채, 황제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하여서 깨달았다. 아니···, 깨달은 것은 짐의 불찰로 그대를 그 삿된 자리에 올려 보내고, 하마터면 그대를 영원히 잃을 뻔 한 그 때였었다. 허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도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것을, 하고 조용히 뇌까리면서 황제가 손을 들어 서문경의 볼을 쓰다듬었다. 수객들은 혼님께오서 괴는 이들이라 하더니 그 말이 참인 모양이다. 짐이 또 가당찮은 마음을 품기 전에 주제를 깨우치게 하여 주시다니.
“무슨···, 말을···, 하려는···.”
“짐이 과한 욕심을 부렸었어. 그대를 얻을 자격도 없는 자인 것을, 외로움에 사무쳐 당치도 않은 짓을 벌였어. 허나 지금은 아니다. 그러니 그대도 동정심에 그대의 삶을 그르치지 말라. 짐은 그대의 삶을 의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가 아니야.”
“무슨 말을 하시는···!”
“경아.”
황제가 조용히 서문경의 이름을 불렀다. 또 그 기묘한 목소리.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고, 무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벌어진 입술만 희미하게 떨고 있는 서문경을 그 가만한 눈으로 응시하며 황제가 말을 이었다.
“짐은 죄를 지었다.”
서문경의 눈이 커졌다. 죄? 황제의 입술이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자조의 미소였다.
“효강이 어찌 그리 짐을 저어하느냐 궁금하였었지? 그것은 짐이 내 누이의 인생을 흙발로 밟아 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내 의형(義兄)이었던 서현의 생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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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이 희경(熙鏡) 서현을 처음 만난 것은 팔월 기망이었다. 무릇 유년기의 기억이란 정확한 월일은커녕 그 앞뒤 일을 가늠하기도 힘들 만치 희미한 것이 보통이고, 그것은 제안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서현을 만났을 때의 기억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때는 반야(半夜: 한밤중)였다.”
높은 곳에 걸어 놓은 꽃등이 어둔 사위 여기저기를 부나비처럼 떠도는, 그런 밤이었다. 개중 아홉 개의 붉은 꽃등이 연꽃 꽃받침 모양으로 만든 화반(花盤) 위에 얹혀 있었다. 붉은 색 등, 아홉이라는 수, 연꽃받침을 본떠 만든 청자(靑瓷) 화반. 그 모든 것이 양(陽)과 음(陰), 그리고 음양의 어우러짐에서 나오는 극상의 복을 상징하는 물건들이었다.
“즉, 회임(懷妊)을 비는 물건들.”
그 때는, 매월 열엿샛날마다 있던 황제와 여인들의 교합일이었다.
“그런 날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짐도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짐이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그러한 날이 있었다는 것과, 그 일을 시작한 이가 헌의공이라는 것 뿐. 매달 보름날 밤이면 헌의공이 낯선 여인을 대동하고 극비밀리에 입궐하였다. 때로 그 여인은 궁인일 때도 있었고, 또 때로는 궁 밖의 여인일 때도 있었다. 그 여인들 사이에 두루 통하는 점은, 없었다. 헌의공이 독단으로 선발하여 오는 여인들이었으니 그 나름의 기준이 있었겠지만 짐의 눈에는 그러하였다. 보름날 밤 입궐한 여인들은 하루 내내 몸을 정갈히 한 후에 명일인 육보름날, 밤이 깊어지면 천추전 침방으로 들여보내졌다. 그 꽃잠은 참으로 기묘한 절차로 이루어졌다. 화등잔을 밝히지 않은 침방 안에는 대신 불빛을 내는 벌레가 든 푸른 비단등과 금빛 비단등이 띄워져 있었고, 또 침방 네 모서리에는 향을 피워 놓고 있었다. 어쩌나 많은 향을 피웠던지 방 안이 연기로 한 치 앞을 구분하기도 힘들 정도였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그 향 자체에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던지 늘 그 방에 들어가면 눈앞이 흐려지고 생각을 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 연기와 향 속에서 교합은 이루어졌다. 이성을 잃고 서로의 몸에 얽힌 사내와 계집은, 머리가 둘이고 아래가 붙은 상잠(桑蠶: 누에) 따위가 꾸무럭거리는 것처럼 역겹게 보였다.”
멍한 표정으로 황제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서문경이 그 부분에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술이 중얼거렸다, ‘마치···.’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자신이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차마 서문경이 묻지 못한 말을, 그의 머릿속에서 직접 읽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황제가 대답했다.
“짐은 기망이면 늘 천추전 침방에 입실하여,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
“그것을 명한 것은 부황이었으나, 짐은 그 당시에도 알고 있었다. 부황에게 그렇게 하도록 부추긴 자는 헌의공 서엽이었다. 그 까닭에 기망이면 헌의공은 늘 짐을 앞세우고 천추전 침방에 입실하여 부황과 낯선 여인의 교합을 참관하곤 하였다. 황제는 무치(無恥)라는 말처럼 황제가 여인과 합일하는 자리에 내관이나 상궁이 참관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지만, 짐의 경우처럼 핏줄이 아비의 잠자리를 지켜보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허나 헌의공은 반드시 짐이 그 자리에 있기를 요구했다.”
서문경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이상해. 그러나 이상한 일이 하나 둘이 아닌지라, 무엇부터 이상하다 말해야 할지 갈피가 서지 않았다. 황제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그가 단정 지었다.
“모든 것이 정상이 아니었다.”
꿀꺽, 마른침이 메마른 목구멍을 자극하며 내려가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도, 짐은 그러한 일이 일어난 까닭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황제는 눈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악몽 같던 육보름날 밤. 달이 점점 차오를 때마다 자신의 숨까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그런 감각을 느꼈다. 싫었지만 누구도 그 날의 의식에 불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을 지독하게 증오하는 부황께서도, 애모해 마지않는 부황이 다른 여인과 몸을 섞는 밤마다 울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시던 모후께서도. 아니, 없었다. 그들은 허울만 지존과 곤극이었을 뿐이지 그 일에 대한 결정권 따위는 조금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결정권을 가진 것은, 당시의 수상이었던 헌의공 서엽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무슨 까닭에서인지 서엽이 침방 의식에 자신이 불참하는 것을 허락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은 난전에서 모후와 함께 밤을 지새웠었지만···,
“단 한 번, 그러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 날도 헌의공은 어김없이 짐을 앞세워 천추전으로 나아갔었다. 헌데···.”
-진화(珍華), 진화, 진화···!
자신과 서엽이 도착하기도 전에 향에 취한 부황이, 맨몸이나 다름없는 몰골로 침방에서 뛰쳐나왔다. 그런 그의 다리 사이는 벌써부터 뿌연 씨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조금 열린 장지문 사이로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의 여인이 나신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서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침방 안의 여인은 그가 고른 여인이 아니었고, 또 놀라울 정도로 황제의 모후인 황태후를 닮아 있었다. 후에 알았지만, 육보름날 밤마다 이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일을 어디에선가 주워들은 궁인이 황제의 마음에 들어 백희궁에 들어가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독단으로 벌인 일이라 했다.
허나 그 때 자신이 가장 놀란 것은 늘 기운 없이 늘어져 있거나 혹은 미친 사람처럼 지나친 흥분 상태였던 부황이 아이처럼 발발발 떨며 서엽의 소맷자락에 매달렸다는 사실이었다. 매달리는 부황을 놀란 얼굴로 다독이던 서엽이, 이윽고 부황을 제 품 속에 보듬어 안으며 자신을 천추전 밖으로 내보냈다.
“그 때, 나는 처음 서현을 보았다. 짐만 몰랐을 뿐, 육보름날 밤이면 제 아비와 함께 입궁하여 날이 밝도록 내내 천추전 근방을 맴돌았었다 하더구나.”
“어째서···.”
서문경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황제가 혼잣말처럼 대꾸했다, ‘염려가 되어 그렇다 했다.’ 서문경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염려···?’ 손가락에 가시랭이가 박힌 것처럼 뭔가가, 사소한 뭔가가 걸렸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 후로, 짐과 서현은 몰래 교회(交會)를 가졌다. 처음에는 봉우(逢遇)였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와 맞닥뜨리는 때가 잦아 그 편에서 내 쪽을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하였으나 그럴 까닭이 없으니 그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처음이 어떠했건 간에 동년배였던 그와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밀회(密會)여야만 했다. 그는 언제 내 아비를 밀어내고 제좌에 오를지 알 수 없는 이였고, 나는 증후가 나타나지 않은 황제의 아들이었으니. 세간의 눈을 의식하고 부황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리해야만 했다. 희 형님으로서는 충분히 심기가 불유쾌할 만한 상황이었으나, 그 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은 궐내에 있기는 했으되 건너 건너 말로만 듣는 것이 고작이던 사촌누이와, 또 궐 밖의 외당숙을 만난 것도 서현을 통해서였다.
“혜 누이는 소현태자가 등하(登遐)한 이후 내내 운현궁 측에서 후견자를 맡아 왔으나 실상은 취영당에 방치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 것을, 부황이 직접 거두어 처소는 새 단장을 하고 모자람 없이 지낼 수 있을 만큼의 궁인과 금은비단을 내려 준 후 본궁에도 자주 드나들도록 배의(配意)해 주시었다. 허나 짐은 풍문만 들었을 뿐이지, 그 이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다. 부황께서 크게 꺼려하셨기 때문이었다. 부황과 나를 사무치게 미워하는 생모의 친정 일가를 만날 생각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허나 희 형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혜 누이와 효강을 내게 만나게 해주었다. 친인(親姻)들 따위야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허세를 부려 보아야 희 형님의 눈에는 짐이 건공잡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보였었는지도 모르겠다.”
연배가 비슷한 네 사람은 금세 친동기간처럼 가까워졌다. 내내 정에 굶주려 있던 자신과 경혜는 말할 것도 없고, 제 부친과 백부에게 내도록 엄중한 주의를 들어온 탓에 엄헌영은 처음에는 자신을 꺼려하는 듯 했으나 천성이 천진하고 정이 많은 그에게는 그것도 잠시였다. 당시의 일들을 떠올리던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날들, 실로 꽃다운 날들이었다.
“그대는, 어린아이다운 치기 어린 말이라 비웃을지도 모르나 당시 짐은 진심으로 그리 여겼었다.”
생김새조차 생각나지 않은 생모보다 그 이들이 소중하였고, 늘 불안에 떠시는 모후보다 그 이들이 더 편안하였다. 때로는, 항상 자신을 향해 증오에 찬 시선을 던지며 폭언을 일삼는 부황보다도 그들이,
“···그렇다, 생각하였건만.”
그 관계를 깬 것은 자신이었다.
이변을 처음 눈치 챈 것은 자신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마냥 보드랍고 담박하기만 하던 공기가 종종 팽팽하게 긴장되는 때가 있었다. 그 변화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슷한 연배의 남녀가 오랜 시간을 어울리며 지내는데 그 사이에 연정(戀情)이 싹을 틔우는 것은. 어느덧 사녀(士女)로 자라난 누이와 의형 사이에 잔잔하게 흐르는 연심은 다보록이 돋아난 신아(新芽)마냥 풋풋하고 바위틈에 숨어 핀 꽃을 보는 것처럼 수줍었다.
“기뻤었다.”
그 마음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자신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두 사람이 서로 어울리는 것이. 막 싹트기 시작한 저 마음이 결코 변치 않고 가약(佳約)으로 맺어지기를 바랐었다. 그 바람이 보람이 있었던 것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점점 더 깊고 농밀해졌다.
“때문에···, 들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즈음이었다. 이른 아침 문안을 올리기 위하여 형식적으로 천추전에 들렀을 때였다. 늘 구슬주렴 너머에서, 절을 올리는 자신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차가운 시선만을 던지곤 하시던 부황이, 자신에게 불현듯 말을 건넨 것이.
-안아.
벼락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황제가 픽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당시의 자신을 비웃었다.
“미련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이란 참으로 신묘불측(神妙不測)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 자신조차도 깨끗하게 사라졌다 생각하고 있던 미련이 보이지 않는 머리 뒤편에 도사리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목덜미를 물었으니. 부황이 자신을 다정히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신은 귀 옆에 벼락이 떨어진 것 마냥 놀랐으나, 그만큼이나 기쁘고, 우쭐하였다.
“미련하게도 이제야, 보답을 받는다 생각했다.”
그 날 이후로 자신과 부황의 사이에는 봄바람이 부는 듯 했다.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릴 때마다 부황께서는 웃음으로 자신을 맞이하셨고 입을 열 때마다 터져 나오는 기침 때문에 고작 몇 마디에 불과했지만 살가운 말을 건네기도 하셨다. 때로는 미령하신 몸을 힘겹게 일으키시어 자신과 함께 후원을 거닐기도 하시었고 모후가 계시는 난전으로 행차하시어 함께 낮것상을 받기도 하시었다. 어찌나 그 나날이 꿈같고 달가웠던지 순간적으로 서현과 경혜 등을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였다.
“어느 날이었다.”
안아, 하고 친근하게 자신을 부른 부황께서 넌지시 물으셨다.
-이부(耳部)가 솔깃한 기문(奇問)을 들었다.
-기문이라 하심은···.
-내, 사사로이는 경혜의 숙부가 되는 이가 아니냐. 요사이 경혜가 부쩍 숙녀 티가 나기에 슬슬 그 아이에게 좋은 짝을 지어 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자신의 표정을 말끄러미 뜯어보며 부황이 말을 이었다.
-헌데···, 현주의 배필을 은밀히 물색하던 중에 궁내에 묘한 풍문이 들리더구나. 경혜 그 아이가 따로 심중에 둔 가인(佳人)이 있노라고.
-······.
-내 결코 그 아이의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혹시라도 경혜가 마음을 준 이가 있다면 최대한 그대로 짝을 지어주고 싶을 뿐이니라.
그 말에도 자신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부황께서 경혜 누이를 친딸처럼 아끼고 괴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러하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딸처럼 아끼는 질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제좌를 위협하는 서엽의 계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 하면, 혹여 부황의 노여움이 희 형님을 향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런 대답도 하고 있지 않는 것도 부황의 심기를 거스를까 무서웠다.
어찌할 줄 모르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자신을 향하는 부황의 시선은 이전처럼 싸늘했지만, 그 때 자신은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 부황이 불쑥 말씀하셨다.
-남장군(南將軍) 각화의 장남이 혼기가 찼다 하더구나.
-······!
그 말에 깜짝 놀라 머리를 들었다.
“당시 남장군 각화의 장남은 난봉꾼으로 이름이 난 자였다. 어릴 적부터 학문도 무예도 손을 놓은 지가 오래라 가문은 장남이 아닌 차남이 잇기로 결론이 난 지가 오래였고, 술을 즐겨 하는데 술만 들어가면 사람이 난폭해져서 약한 사람들에게 손찌검을 한다는 소문까지 자자했었다.”
엄헌영이 때때로 빈정거리며 입에 담곤 했었던 자의 이름이 고운 제 누이의 배필감으로 들먹여지니 염통에 바윗덩어리가 쿵 떨어지는 듯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을 노리고 부황이 부러 꺼낸 말이 분명하였으나, 당시 어렸던 자신으로서는 알 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 따져보면 참으로 교활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신이 앞뒤 가리지 못하고 허둥지둥 입을 열었으니.
-차, 참이옵니다.
-참이라. 무슨 말이더냐.
-누이에게는 마음을 준 이가 있사옵니다, 그러니,
-그렇다 하여도 남장군의 자제만큼 조건이 좋은 이이겠느냐. 짐은 그것이 염려된다. 혜 그 아이는 어엿한 황실의 일원이니, 그 배필 되는 자 또한 그에 어울리는 위엄을 갖추고 있어야 할진데 만에 하나 필부(匹夫)라 하면 내 열조(列朝)를 돌아볼 염치가 없음이로다. 그러하니 여혹(如或) 혜의 염정(艶情)이 아직 그리 깊지 않다 한다면···.
눈앞이 깜깜해졌다.
-남장군의 맏아들 되는 자는 그리 소문이 좋지 못하다 들었사옵니다.
-그대 같은 유자(幼子)가 무엇을 알겠는고. 태재(太在) 송화와 승재(承在) 노선이 현주의 첨위(僉尉)로 남장군의 장남을 추거(推擧)하였다. 남장군과 승재는 모두 신뢰할 만한 이들이니 남장군의 장남 또한 그 인품을 믿을만하다 하여도 좋을 것이야. 그러니 내 곧 법도에 따라 남장군과 그 아들을 궐 안에 불러들일 것이다.
-허나, 허나 누이에게는 정인이···.
-이 또한 혜를 위한 일이니 그대는 더 이상 간섭치 말라.
-누이가 크게 상심할 것이옵니다, 그러하니 부디 폐하,
-듣지 않는데도 그러는구나.
하고 애원하는 중에 부황이 휙 돌아앉았다. 동시에 차르륵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주렴을 보자 가슴이 내려앉았다. 손발이 싸늘해지고 귓불에 확 열이 올랐다. 무서워졌다. 부황의 저 익숙한 등이, 저 등을 돌린 모습에 다시금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폐하, 폐하, 하고 애타게 불렀으나 부황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무심코 입을 열어버렸다.
-폐하, 누이의, 누이의 정인은···!
“···서현, 이었다고요.”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황제가 턱 끝을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것을 말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서문경이 변명하듯 말했다.
“경혜 현주를 위해서 한 말 아니었습니까. 그대로 있으면 천하의 난봉꾼과 누이가 혼약을 맺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느냐.” 황제가 반문했다. “짐은, 모르겠구나.”
“······.”
“그래서 짐은 변명할 수 없다. 누이를 위하여 한 말이라 스스로를 감쌀 수가 없다. 과연 그 말에 일말의 사감도 없었는가. 그렇지 않다. 분명히 있었다. 혜 누이나 희 형님이 아닌,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한 마음이. 지독한 이기심이.”
그리고 그렇게 내뱉은 순간, 지독한 벌이 내려졌다.
부황이 뒤돌아보았다. 뒤돌아 본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얼어붙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한 조각의 사탕가루처럼 입혀져 있던 거짓된 웃음과 호감이 와르르 떨어져 나가고 그 아래에는 진실된 증오와 분노와, 그리고 경멸만이 남았다. 그 얼굴을 본 순간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부황께서 나를 이용하셨다는 것을.”
귀신으로 돌변한 부황이 그대로 자리를 뛰쳐나가셨다.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경혜 현주의 처소인 취영당이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부황께서는 언제 그토록 누이를 괴셨냐는 듯 돌변하시어 누이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흙바닥에 내팽개쳐 이루 말할 수 없는 굴욕을 주셨고, 누이는 영문도 모른 채 진흙탕에 얼굴을 박은 채로 살려 달라 애원하였다. 마침 취영당에 와 있던 엄헌영이 달려들어 말렸지만 그 또한 어렸으니 별다른 힘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나 또한 그 즈음 취영당에 득도(得到)하여 부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이성을 잃으신 부황의 이부에 내 말 따위가 들릴 리가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 부황을 말린 것은 헌의공이였다.”
황제가 메마른 웃음을 짤막하게 터뜨렸다.
“틀림없이 그가 사주한 계획이었겠지.”
“······.”
서문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자신이 끼어들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문경은 대신 물었다.
“그 때 수상은···.”
“그가 부재한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희 형님이 돌아온 것은 모든 일이 끝난 후의 일이었다.”
“모든 일이···, 끝난 후라고요?”
“그래.”
황제가 공허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로 훈정(訓正)을 나갔었던 희 형님이 원경으로 돌아온 것은 헌의공과 혜 누님의 길례(吉禮: 혼인식)날이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황제는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
천제사가 시작하는 것은 진시(辰時: 오전 일곱 시부터 아홉 시까지)를 알리는 종이 울리는 것과 등시(等時)의 일, 그리고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라지 않고 뛰쳐나간 엄헌영이 다시 돌아온 것은 묘시(卯時: 오전 다섯 시에서 일곱 시까지)가 거의 끝나갈 때 즈음해서였다.
“장군!”
하고 최유가 놀라 말한 것은, 자신의 뒤에서 엄헌영이 기척도 없이 불현듯 나타나서였다기보다 엄헌영이 하고 있는 몰골 때문이었다.
“희는.”
엄헌영이 내뱉으며 손등으로 턱 주변을 훔쳤다. 심상하다 못해 무뚝뚝하기까지 한 말투와는 달리 열이 올라 터질 듯이 새빨개진 그의 얼굴에서 뚝뚝 비 오듯 땀이 흘렀다. 약간 열린 입술 사이에서도 쉴 새 없이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엄헌영은 개의치 않고 주변을 돌아보며 재차 물었다.
“희는 어디에 있지?”
그렇게 묻는 엄헌영의 단단한 팔 안에는 무언가가 안겨 있었다. 넓은 백포(白布)에 싸여 있는 그것은 겉으로만 힐끗 보아도 엄헌영의 머리통보다도 크고 질감이 단단한 물건인 것 같았다. 그것을 발견한 최유가 ‘저건.’하고 무심코 내뱉자, 그 순간 엄헌영이 들고 있던 물건을 휙 그에게 던졌다. 기겁을 한 최유가 황급히 그것을 받아들고 노성을 질렀다.
“장군! 깨어지면 어찌 하라고 이런!”
“왜, 찾아오라는 대로 코를 킁킁대고 찾아왔지 않나. 그러한데 뼈다귀는 못 던져 줄 망정 왜 고함을 지르고 그러나.”
엄헌영이 퉁명스레 대꾸하고 나서야 겨우 최유는 엄헌영의 심기가 단단히 틀어진 상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최유가 엄헌영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짢은 일이 있으셨습니까?’ 그 말에 엄헌영이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손으로 한 번 자신의 눈가와 입가를 쓸고 내리고는 짧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네. 그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운 것뿐이다. 엄헌영은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최유를 재촉했다.
“한 시가 급하다지 않았나. 어서···.”
말을 하다 말고 엄헌영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댕-.
무거운 종소리가 구천(九天)에 울려 퍼졌다. 정확히 다섯 번. 진시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
불편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허나 입을 열어 그 거북스러운 무게를 깨뜨리기도 힘들었다. 어떤 말도 이 침묵의 중량 앞에서는 하잘 것 없이 느껴졌고, 섣불리 꺼낸 말이 혹여나 이미 천창만공(千瘡萬孔)인 이의 몸뚱이에 또 하나 구멍을 낼까 두려웠다. 그러나 계속 침묵을 이어갈 수도 없었다. 점점 무게를 더한 정적이 결국에는 어깨를 짓눌러 모든 자존(自尊)과 자시(自恃)를 짜부라뜨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어찌할 줄 모르고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던 서문경이, 벌렸던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시 여는 것을 반복하다가 결국 움직였다. 정적이 가라앉아 있던 굴 내에 처음으로 소리가 울렸다. 말소리 대신, 살과 살이 스치는 소리였다.
“······!”
황제의 눈이 커졌다.
조용히 황제에게 입을 맞추었던 서문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타인의 것과 맞닿았었던 입술에 온기 대신 냉기가 얹혀 있었다. 그것이 황제의 머릿속에서 그대로 옮겨 온 것처럼 느껴져서 입 안이 씁쓸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런 서문경을 올려다보고 있던 황제가 내뱉었다.
“무슨 짓이냐. 듣지 못했더냐. 짐은 죄를,”
“잘못을.”
서문경이 조용히 황제의 말을 고쳤다. 뜻밖이었는지 황제가 주춤하자, 서문경이 그대로 말을 이었다.
“잘못을 저질렀다, 겠지요.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대가 단정 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폐하께서 단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서문경이 부드럽지만 완강하게 대답했다. 황제가 이맛살을 구기며 반박했다.
“그 이들의 태도를 보라.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될 일 아니냐.”
“말로도 거짓말을 하지만 사람이란 행동으로도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는 황제에게 서문경은 더 이상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확실하다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속사정을 듣고 나니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리고서 서문경은, 황제가 무어라 더 말을 하기 전에 선수를 쳐서 화제를 돌려버렸다.
“일단, 이해했습니다, 폐하께서 수상의 앞에서 왜 그런 언행을 하시는지요.”
그 말에 황제의 낯빛이 다시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서문경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럽게 일그러져 있던 황제의 표정은 안정을 찾았다. 아니, 마지막 희망고문의 끈도 놓아버리고 텅 비어버린 표정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절망으로 가득 차 오히려 파도가 잠잠히 잦아든 것처럼 보이는, 그런 얼굴. 황제가 대답했다.
“그래.”
그런 뒤에, 그가 덧붙였다.
“짐은, 그대가 몸을 의탁할 만한 그런 자가 아닌 것을 이제야 알았더냐.”
그렇게 덧붙인 말은 언뜻 들으면 자학에 가까웠지만, 듣는 순간 서문경은 깨달았다. 그가 쏘아붙였다.
“그렇게 말해서 동정이라도 사려 하시는 겁니까.”
“······.”
“불쌍하다, 가엾다, 안쓰럽다, 그런 말이라도 바라는 겁니까.” 서문경이 사납게 말한 다음 가차 없이 내뱉었다. “거집니까.”
모욕적인 말에 황제의 얼굴이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투로 그가 말했다, ‘입을 함부로 놀리는구나.’ 그러자 서문경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뻔뻔하게 대꾸했다, ‘새삼스럽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원래부터 이렇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 그러셨듯이요.”
당혹감에, 일렁거리는 듯 격렬하던 황제의 노기(怒氣)가 순간적으로 누그러들었다.
“무어?”
“참 학습능력도 없으십니다. 일전에 똑똑히 말씀 드렸을 텐데요, 제가 이 세계에 떨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말입니다. 어차피 폐하께서는 제가 의지할 만한 믿음직한 분도 아니셨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새삼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하고 서문경이 빠르게 중얼거렸다.
“저희는 하나로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기대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서문경은 천천히 몸을 숙여, 황제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쳤다. 황제가 반사적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이번에는 서문경도 물러나지 않았다. 단단히 버티면서, 서문경이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복잡해서. 제가 직접 그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이상, 폐하의 말만 믿고서 판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러니 저는 제가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할 겁니다.” 하고 단숨에 내뱉은 후에 서문경이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로 흐릿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서로 등을 기대고 버틸 수 있도록 당신을 일으키는 것부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