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1/66)

**

수상 서현은 사저(私邸)가 아닌 관저(官邸)에 거주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궁부 고관들이 그들이 가진 권력을 뽐내기라도 하듯 앞다투어 탑처럼 옥척이 높고 호화로운 사저를 짓고 사는 것에 비하면 드문 일이었다. 물안개가 자욱한 소(沼: 늪) 샛길에서 빠져나온 엄헌영은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수상 관저로 향했다. 그러기 전 잠시 소 왼편을 돌아보기는 했으나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방금 전까지 엄헌영이 있었던 소를 중심으로 수상 관저는 소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거리는 소와 크게 멀지 않았다. 그것을 생각하면 서현이 관저에 머무르는 것은 조금 의아한 일이었다. 그의 부친인 서엽이 기거하는 영노당이 소 근방에 위치하고 있는 탓이다.

관저보다는 영노당 쪽이 입궁을 하기에도 유리한 위치인지라 서현이 거처를 관저로 정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지만 서현은 그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서엽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그 건에 대한 관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졌지만 엄헌영은 지금도 그 일에 대해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서현이 거처를 굳이, 여러모로 환경이 영노당보다 좋지 못한 관저로 정한 이유를 제 입으로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엄헌영은 그 속내를 대충이나마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다. 갑자기 입 안이 씁쓸해졌다. 엄헌영은 그 쓴맛을 떨쳐 내기라도 하듯이 혀를 몇 번 세게 차며 생각했다, 

‘당연한 일.’ 

혜의 친한 벗인 자신으로는 씁쓸하지만 자신이 서현의 입장이었더라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세상천지에 누가 자신과 가약(佳約)을 맺었던 여인을 강제로 취한 아비와, 이제는 후모(後母)가 된 옛 정인과 한 집에서 살고 싶을까. 그것과는 별개로 혜에 대한 서현 그 놈의 냉대에는 부아가 나지만.

그리 생각하다가 엄헌영이 고개를 한 번 강하게 내저었다. 또 헛생각을 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거늘. 엄헌영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잡념이 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느릿해졌던 걸음을 다시 재게 놀렸다. 

가마 대신 마장에서 말을 한 필 빌려 탄 엄헌영이 사람들의 시선이 적은 길을 골라 수상 관저에 도착 했을 때는 시각이 거의 묘시(卯時)에 다다라 있었다. 엄헌영의 낯에 초조한 기색이 어렸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은 것은 아니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벽 그림자에 몸을 숨긴 엄헌영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서엽이나 태황태후가 보낸 듯한 사람들은 아직 관저에 보이지 않았다. 

엄헌영은 훌쩍 수상 관저의 뒷벽을 넘었다.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고 바닥으로 내려선 엄헌영은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리기는커녕 사위를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데.”

이상할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다. 

아직 시간이 일러 태황태후와 헌의공이 보낸 이들이 도착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명색이 문무백관들의 수상이 거처하는 관저인 만큼 어느 정도의 경비는 늘 관저에 상주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더더군다나 서현의 상태가 평소와는 다른 만큼. 

거기까지 생각한 엄헌영의 미간에 잡힌 홈이 더 깊이 파였다. 설마, 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깨어난 건가?

쿵, 하고 스스로도 정확히 의미를 모를 소리를 내며 심장이 떨어지는 순간 엄헌영은 주저하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서현과의 사이가 소원해지면서 몇 번 드나들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서현의 침방정도는 어디 위치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인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관저 깊숙이 들어간 엄헌영은 침실이 있는 딴채 당하(堂下)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후에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변을 뜯어보며 생각했다. 역시 이상해. 다른 곳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찌, 엄헌영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어찌 수상이 기거하는 침방 주변에 단 한 사람의 경비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엄헌영은 생각을 수정했다. 

처음에는 서현이 깨어나 주위 사람들을 정비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지만 상황을 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늦은 건가.”

엄헌영의 표정이 굳었다. 늦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건만, 다른 치들이 더 빨랐던가. 

서현이 관저에 없는 것이 분명하다는 판단을 내린 엄헌영이 허탈한 신음을 뱉으며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있던 근육을 이완시켰다. 오기 때문에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 이상한 상황이 모두 납득이 된다. 호위는커녕 마치 태풍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것 마냥 관저 전체에 이상하리만큼 인적이 없는 것도. 

“빌어먹을.”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동안 숨을 죽이고 사위의 기척을 살피던 엄헌영이 곧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으며 대청 밑을 기어 나왔다.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으려고 해도 침방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당하 밖으로 나온 그가 대청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대청에 몸이 부딪치며 털썩, 하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큰 소리가 났지만 엄헌영은 더 이상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된 판국에 소리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엄헌영의 입에서 하, 하는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서현이 다른 곳도 아닌 관저에 있는 이상 태황태후도 헌의공도 섣불리 손을 대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더구나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자신들을 향한 이 시점에. 그 때문에 적어도 그 치들이 손을 쓴다면 그것은 세간의 관심이 자신들에게서 천제사로 옮겨가는 시점, 즉 제사가 시작된 직후일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윤재 같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니었는데.”

엄헌영은 뼈아프게 후회했다. 윤재에서 괜한 시간을 허비하지만 않았어도, 어젯밤 내내 관저에서 매복하고 있다 서현을 빼돌릴 수 있었을 것을. 빌어먹을, 제기랄. 엄헌영의 입에서 계속해서 탄식 섞인 욕설이 새어나온다. 엄헌영이 천회(千悔)로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어째서 윤재 따위가, 신뢰할 건더기 하나 없는 석공의 동첩의 말 따위가 그렇게 마음에 걸렸던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천제사는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쓸 만한 정보라고는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 초조해진 탓이었을까. 어리석긴, 그런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고 지푸라기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매달려 본 것 때문에 돌아온 것이라곤 이런 결과뿐인데! 

세상에 이런 멍텅구리는 다시없을 거다, 엄헌영이 이를 갈며 스스로에게 폭언을 퍼붓고 있던 그 때였다. 

덜컹.

“?!”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엄헌영이 놀라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마치 느슨한 문돌쩌귀에 매달린 장지문이 덜컹거리는 듯한 소리.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몇 걸음 뒷걸음질 친 엄헌영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 소리는 분명 자신의 머리 뒤에서 난 소리였다. 그 말인즉슨, 

“희?”

서현의 침방. 

“거기 있는 건가?” 

잠시 침묵하고 주변의 소리에 정신을 집중했지만, 더 이상은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잘못 들은 것인가? 아니면 함정? 그런 생각에 엄헌영은 편시간 머뭇거렸지만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대로 멍하니 서서 다른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바보짓 아닌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엄헌영이 훌쩍 당상(堂上) 위로 올라가 찬바람에 덜거덕거리고 있는 문환(門環)을 단번에 당겼다. 

“!”

적어도 빗장 정도는 걸려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문짝을 완전히 뜯어버릴 기세로 문을 당겼던 엄헌영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문환을 당기기 무섭게 빼각 소리와 함께 침방 문이 완전히 열린 탓이다. 열려 있다? 실신하여 아직도 정신을 차리고 있지 못한 수상이 있는 방이 삼엄한 호위는커녕 문고리 하나조차 걸려 있지 않을 리가 만무하다. 그렇다면,

“누구냐!”

엄헌영의 일갈(一喝)과 동시에, 납작한 비도(飛刀)가 방 안으로 날아갔다. 팍! 비도가 열린 방문 맞은편 벽 중앙에 정확히 박혔다. 벽에 박힌 칼날 끝에 매달린 붉은 술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 붉은 술 바로 옆에, 사람의 머리가 있었다. 

막 대검(大劍)을 빼어들고 있던 엄헌영의 손이 그 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일순 멈칫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엄헌영의 움직임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칼날 끝을 정확히 사람의 목덜미에 겨눈 엄헌영이 입을 열었다.

“설명해라.”

꿀꺽 삼킨 마른침에 툭 튀어나온 목젖과 새파란 핏줄이 튀어나올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것을 싸늘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엄헌영은 그 자의 이름을 불렀다.

“천객(天客) 최유.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엄장군.” 

하고 내뱉은 최유는 자신의 귀 바로 옆에 박힌 비도와 목덜미에 겨누어진 대검 중 어느 쪽에 시선을 두어야 하는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찌푸린 시선으로 응시하던 엄헌영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주었다. 목을 찌르고 있던 시퍼런 칼날이 약간이나마 물러나 준 것만으로도 불안하던 최유의 표정이 확연하게 안정을 찾았다. 큰 숨을 한 번 삼킨 최유가 엄헌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납셔 주시었습니까.”

그 말에 엄헌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 말은 마치···.

“흡사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말투로군.”

최유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긍했다.

“바로 보시었습니다.”

“···무슨 뜻이지?”

그 물음에 최유는 바로 대꾸하는 대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반사적으로 대검을 든 엄헌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최유는 이번에는 물러나지도 움츠려들지도 않았다. 기묘하리만큼 침착한 태도에 엄헌영의 표정이 변했다. 최유가 말했다.

“장군께 드릴 청이 있어 이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엄헌영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찾아올 줄은 무슨 방법으로 알고?”

“장군이라면 꼭 찾아오실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장군께서는 상국의 친우가 아니십니까. 상국께서 막다른 곳에 처한 이러한 상황에서, 장군께서 손 놓고 계실 리는 없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누가 누구의 친우라는 거냐.”

“허나 결국 오시지 않았습니까.”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야.”

“이유 따위는 아무러하여도 상관없습니다.”

최유의 단호한 말에 엄헌영이 처음으로 주춤했다. 그 사이에 최유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 ‘장군께서 지금 이 자리에 계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 말에 엄헌영이 잠시간 아무런 대꾸가 없다가, 곧 혀를 한 번 차고 물었다.

“그래, 이유 따위야 무어가 중요하다고. ···어물거릴 시간이 없다는 것은 그대도 알겠지. 그럼 대답해 봐. 내게 할 청이라는 것이 뭔가.”

“장군께 상국을 맡기고 싶습니다.”

“···희를?”

내게? 하고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말하는 엄헌영의 시선이 무심결에 침방 안을 빙 둘러보았다. 그러나 별스러우리만큼 더운 기운이 가득한 침방 안에는 자신과 최유 외의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다. 혹시, 하고 엄헌영이 미간 사이를 좁혔다.

“자네가 희를 숨긴 건가?”

“그렇습니다.”

엄헌영의 얼굴빛이 변했다.

“희는! 상국은 어디에 계신가?”

그 말에 최유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엄헌영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

최유의 안내를 받아 사각(死角)에 숨겨져 있던 통로를 통해 수상 관저를 빠져 나간 이후 엄헌영은 내내 말이 없었다. 그러나 도통 열리는 일이 없는 입 대신 그의 눈은 수 십 마디 말보다도 강한 감정을 품고 최유의 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약간의 혼란과 한 줄기의 안도, 그리고,

엄헌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대 말은···.”

그 감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의혹.

엄헌영의 말에 천견 최유는 걸음을 멈추는 대신 엄헌영에게 자신의 표정이 보일 만큼 약간만 머리를 돌린 다음 눈을 내리까는 시늉을 해보였다. 제대로 된 예법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예니 법도 따위를 따지고 있을 겨를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엄헌영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희가 작금의 상황을 모두 예상하고 있었노라고 생각해도 좋은가?”

“장군님을 기다린 것은 소인의 독단입니다만, 그 외에는 모두 상국께서 예지하고 계셨던 바가 맞습니다.”

그 대답에 엄헌영이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 끝으로 힘주어 문질렀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태도였다. 그것을 의식하기라도 한 것인지 최유가 바로 덧붙였다.

“한참 모자라는 능력이지만 소인이 상국께 몇 마디 귀띔을 넣어 드렸습니다.”

“그대가?” 

엄헌영이 반사적으로 말하며 최유 쪽을 보았다가, 뭔가를 생각해 내고 아, 하며 입을 조금 벌렸다. 곧 납득한 듯한 표정의 엄헌영이 느릿하게 턱 끝을 주억거렸다. 

“그래, 그대가 있었지.”

엄헌영은 새삼스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천객에게 붙여진 별호를 떠올렸다. 천견(天見). 길라잡이가 되어 줄 만한 최소한의 지식만 있으며 삼계(三界)의 모든 이야기가 떠돌아다닌다는 ‘하늘’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무엇이든 잡아낼 수 있다는 능력을 가진 천객. 

천견 저 이가 있다면 서현이 타인의 눈을 피해 경계가 삼엄한 운현궁이나 나아가 영로당의 움직임을 알아내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대연회 때 자신 또한 저 이의 그 힘에 우조를 받은 적이 있었더랬다. 그 끝은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그 일만 제대로 해결을 보았더라도 애초에 이 같은 일이 불거질 일은 없었을 것을. 그렇게 생각하자 불현듯 입 안이 견딜 수 없이 씁쓸해져서 엄헌영은 일부러 소리를 내어 말했다. 최유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지금 와서 해 보아야 아무런 쓸모도 없는 후회 따위나 하고 있는 자신이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어찌 된 까닭인지 후에 있을 일을 모두 아는 것처럼 군다 했었더니.”

하고 말하고 나자 뒤늦게야 그렇군, 하는 생각이 든다. 엄헌영은 서현이 실신하기 전, 그가 경혜를 불러냈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 자신에게 곧 일어날 일을 그가 미리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평상시와는 판이하게 다른 그 태도도 납득이 간다. 그래···.

“······.”

그러다 우뚝, 엄헌영의 발걸음이 멎었다.

“장군?”

그것을 느낀 최유가 뒤돌아보며 엄헌영을 불렀지만, 엄헌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불쑥 떠오른 생각에 잠긴 그는 마치 마른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날벼락이 자신의 코앞에 떨어진 것을 보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장군, 몇 번이나 최유가 부른 뒤에야 엄헌영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작 입을 연 엄헌영의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최유로서는 전혀 맥락을 알 수가 없는 말이었다.

엄헌영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최유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금방이라도 맺혀서 떨어질 듯 순식간에 의혹이 훅 부푼 엄헌영의 시선이 똑바로 자신을 향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런 최유에게 계속해서 갈 길로 가라는 손짓을 하면서 엄헌영 또한 멈췄었던 발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계속 가. 서서 대화할 시간 따위가 어디 있나.” 

그리고 엄헌영은, 자신의 재촉에 못 이겨 다시 걷기 시작한 최유의 뒤통수에 대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 상국에게 청을 하나 받았었네.”

정확히는 자신이 아닌 경혜가 받은 청이지만,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엄헌영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최유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기(瓦器: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그릇) 말씀이십니까?”

“그래, 헌데 상국께서는 그 항아리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려 주시지 않았어. 자네가 있으니 그 항아리가 있는 곳을 모르고 계셨을 리가 만무한데, 어찌 그러셨는가?”

그 물음에 최유가 작게 한숨을 쉰 후에 대답했다.

“장군의 하문에 이 같은 상답(上答)을 하기가 몹시 송구하나, 와기의 행방에 관하여서는 소인도 알고 있는 바가 없습니다.”

“모른다고? 자네 힘으로도?”

“그렇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꾸에 엄헌영의 얼굴이 저절로 구겨졌다. 

“어찌 모르나?” 

성난 아이가 땅고집을 부리는 것 같은 말투로 엄헌영이 내뱉어 놓고 곧바로 꾹 입을 다물었다. 점잖지 못한 스스로의 태도에 낯이 붉어졌지만 그 이상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당장이라도 최유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항아리가 있는 곳을 실토하라 추궁하고 싶었으나 실낱같은 이상이 그것을 막았다. 계속해서 치미는 부아를 가까스로 누르며 엄헌영이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의 ‘힘’으로도 알아낼 수 없었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천객인 그대가?”

“송구하오나···,”

하고 말하다가 최유가 도중에 말을 멈췄다. 방금 전 엄헌영이 내뱉은 물음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혼잣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그 증거로 꾹 입매를 일그러뜨린 엄헌영이 표정을 굳힌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때때로 천객, 천견, 하늘, 따위의 단편적인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그가 어느 순간 번쩍 머리를 들고 내뱉었다.

“결계!”

엄헌영이 빙글 머리를 돌리더니 다짜고짜로 물었다.

“그 말은 결계가 쳐져 있었다는 말인가!”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다만 짐작만 할 뿐이지만, 아무러하여도 그렇지 않겠는가 침량하고 있습니다.”

“결계라, 결계. 결계···.” 엄헌영이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며 최유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가 불현듯 물어왔다. “내 무인된 처지라 술(術)에 관하여서는 아는 것이 비루하지만 결계도 일종의 술이라고 알고 있어. 맞는가?”

“옳게 아시고 계십니다.”

“칼과 칼이 맞부딪쳐 물러섬 없이 서로 버티기만 하면 깨지는 것은 조금이라도 경도가 약한 칼 쪽이지. 술 또한 그와 같다 생각하여도 되는가?”

그 물음에 최유는 이번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담아 상답했다. 

“소인이 어느 정도까지의 역능을 감당할 수 있느냐 하문하시는 것이라면, 스스로의 입으로 이리 칭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창혜각의 천객들 중에서도 수위(首位)를 다툴 수 있노라 답하겠습니다.”

“그 말은 일인(一人)으로서는 그대를 상대할 이가 드물다는 말이로군.”

그렇게 말하면서 엄헌영은 제국의 수많은 술사들 중에서도 결계술에 특화된 술사들의 얼굴을 차례로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곧 엄헌영은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결계술이란 무릇 귀중하고 요긴한 장소나 사람 따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펼치는 술법이므로 약식(略式)으로 행하지도, 행할 수도 없다. 

“결계술이란 만인간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제사나 마찬가지지. 그러하니 술법을 펼칠 때 뭇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즉, 근래에 새로 만들어진 결계는 아니라는 말이다.

“결계가 쳐져 있는,”

윤재, 윤재, 윤재···. 엄헌영의 가슴 속에 일순 얼음장처럼 서늘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엄헌영이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내질렀다.

“설마!”

“장군?”

놀란 최유가 황급히 엄헌영을 붙잡았다.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엄헌영이 금방이라도 어딘가로 튀어 나가버릴 것 같은 기세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를 가십니까!’, 최유가 외친 말에 엄헌영이 훽 몸을 돌리며 최유를 밀어냈다. 최유가 다급히 엄헌영에게 말했다.

“한 시가 급합니다. 어서 상국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 나서,” 

“자네는 상국을 모시고 주변을 삼엄히 경비토록 해.” 엄헌영의 말이 최유의 말허리를 댕강 잘랐다. 그리고 엄헌영은, 자신의 험악한 말투에 완전히 질린 듯한 최유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덧붙였다. “내 곧 항아리를 가지고 상국께로 올 터이니.”

그 말에 최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말씀은 장군···, 토기가 있는 곳을 아셨단 말씀입니까?!”

“그래.” 하고 대답하며 엄헌영이 부드득 이를 갈았다. 

“내 짐작이 맞다면 말이지만.”

**

장충단. 윤재. 절신. 취영. 기가 막힌 일이다,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말장난에 불과했다. 

절신의 신실 장충단은 글로는 장충(裝忠)이라 쓰지만 일각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장충(長蟲)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것은 신실이 위치한 절신의 지형이 마치 똬리를 튼 뱀처럼 빙글빙글 말려들어가는 기묘한 나선형 모양을 취하고 있는 탓이었다. 사실 절신이 신지(神地)로 선정된 이유도 그 지형 덕이 컸다, 절신의 똬리형 지형이 천연의 결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천연의 결계에, 나라에서 첫째둘째를 다투는 우수한 술사들이 총 동원되어 십 년도 넘게 힘을 쏟아 부은 인공 결계가 합쳐져 절신의 장충단은 네 개의 다른 신실들보다도 한층 더 강력한 결계를 자랑했다. 

-장충단이요, 저어기 윤재에 있는 동굴에 있는 신실이요! 

석공의 동첩은 사라진 석공이 윤재의 장충단으로 향했다 했다. 때문에 윤재라는 지형이 실제로 있는 고로 잠시 착각하였으나 자신의 눈으로도 확인했듯 석공이 말한 윤재란 특정 지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쓰는 법은 다르지만 돌려짓기를 윤재라 하기도 했었지.

석공의 집에서 돌아 나오던 길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었던 경혜가 중얼거렸던 말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석공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느라 윤재라는 말에서 돌려짓기(輪栽)를 생각해 낸 것이겠지만 그리 생각해서는 아니 되었다. 

석공에게 있어 그의 동첩은 참으로 어리로운 존재였겠지만 굳이 진실을 말할 필요는 없는 상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감씨에서 수박이 난다 거짓부렁을 해도 좋아라 손뼉을 칠 사람이 그의 동첩이었으니. 오히려 석공은 자신의 동첩이 입이 가볍고 생각이 짧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동첩에게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 그에게 뿌리 깊은 불신을 품고 있던 본처에게 석공은 신뢰를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윤재란 실재하는 지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석공이 동첩에게 대충 둘러댄 말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그 핑계거리를 그에게 말해 준 이는 누구인가. 

석공이 아니라면 답은 단 한 사람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석공에게 비밀리에 일을 맡긴 이, 즉 헌의공 서엽이다. 서엽은 과거에 백관의 수장까지 지낸 권귀 중의 권귀, 만일 그와 같은 계급의 사람이라면 윤재라는 단어에서 먼저 윤재(允栽)라는 말을 떠올릴 것이다. 윤재란 윤허(允許)와 뜻이 같은 말이며-.  

“빌어먹을.”

엄헌영이 부득 이를 갈았다. 또, 경혜현주의 생모인 취영당 재여씨의 이름은 재여 윤유(玧瑜), 즉 윤재나 윤허와 동일한 뜻인 윤유(允兪)와 음이 같다. 모르는 이가 이 말을 들으면 억지로 가져다 붙인 유치한 결론이라고 비웃을 지도 모르나-실제로 생각을 한 당사자인 엄헌영 또한 어이가 없어서 비소를 흘렸지만-, 재여씨와 소현태자에 얽힌 사연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이라면 마냥 웃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재여씨 생전에 그녀의 거처였던 동시에 그녀 자신을 가리키기도 하는 말이었던 취영당. 

여기서 취영(翠影)은 푸르고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의 집이란 뜻으로 여기서 나무는 취영당 재여씨의 부군인 소현태자를, 나무 그늘이란 재여씨를 향한 소현태자의 지극한 총애와 배려를 비유하는 말이었다. 

그런 동시에 취영은 유난히도 나무가 많은 취영당의 풍경을 나타내기도 했는데, 그 나무들은 모두 소현태자의 명으로 심어진 나무였다. 취영당을 꾸미는 나무와 꽃들 중 가장 수가 많은 것은 재여씨의 이름에 들어 있는 석류나무(瑜木), 그리고 그만큼이나 수가 많은 것이 재여씨의 이름과 뜻은 다르나 음이 같은 버드나무(柳木)와 유자나무(柚木), 느릅나무(楡木) 따위였다. 

그러나 취영당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재여씨를 향한 소현태자의 진정한 배려는 한 때 황궁 내에서 제일의 아름다움을 뽐냈던 전각이나 재여씨의 이름에서 따와 주변을 꾸민 나무와 꽃들 정도가 아니었다. 

소현태자는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후궁을 위하여 취영당을 짓기 직전 손수 궁 안을 돌아보고 직접 부지를 선정하였는데, 현재 취영당이 있는 장소가 최종적으로 선택된 이유는 풍수지리적인 이유가 강했다. 

취영당이 위치한 장소는 똬리를 튼 뱀처럼 빙글빙글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곳 중앙, 이는 단순히 지형만 두고 본다면 신단들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결계를 자랑한다는 장충단의 지리와 흡사했다. 

여기에서 소현태자는 술사들이 큰 제사를 치를 때 제기(祭器)로 쓰는 버드나무, 술학궁의 무사(舞師)들이 출정(出征)하는 병사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춤을 출 때 무사의 몸과 제장을 장식하는 석류나무, 열매를 먹거나 곁에 두면 술력을 강하게 해준다는 미신이 있는 유자나무 따위를 술식(術式)의 모양을 따라 심음으로서 그 지형의 모자란 부분을 보완했다. 그렇게 하여 완성된 취영당은 장충단의 모양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황궁 안의 가장 미려(美麗)한 요새(要塞).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취영당을 취영단(翠影檀) 혹은 소장충(小裝忠)이라고 불렀으며, 취영당 재여씨를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당장 얻을 수 있는 권세가 있다 하여 재여(渽呂) 윤유(玧瑜)의 뜻(意)은 즉(卽) 태자의 윤재(允栽: 윤허)가 떨어진 것과 같다는 뜻으로 소장충의 소윤재(小允栽) 혹은 여윤유(女允兪)라 불렀다. 

천견 최유는 자신의 힘으로도 안을 꿰뚫어 볼 수 없는 곳에 항아리가 있다고 했다. 그 정도의 결계가 있는 곳이라면 각 신단과 용님을 모시는 신궁(神宮), 황궐의 주요한 건물 정도뿐이다. 그리고 그 중 서엽이 말했을 윤재와 관련이 있는 곳이라면 단 한곳-,

“취영당.”

취영당 뿐이다. 

“서엽.” 

엄헌영의 구겨진 얼굴에서 저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욕설은, 날이 다 뭉개진 칼날처럼 고통과 탄식에 잠겨 있었다. 엄헌영이 손으로 눈가와 이마를 감싸 안고 중얼거렸다.

“이 빌어먹을 늙은이, 당신 같은 악취미는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취영당이란 말인가. 

그 끔찍했던 날이 저절로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

-항상 그런 식이었다. 

불현듯 취영당에 들이닥친 숙부를 어린 현주는 반갑게 맞이하였으나 항상 다정하시던 숙부는 평소의 모습과 달랐다.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초점 없는 눈에 불쑥 밀려든 위기감을 느낀 현주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자, 그녀의 여린 어깨를 사내의 손이 거칠게 잡아 비틀었다. 악!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러나 소녀가 쓰러지는 것보다, 거친 나뭇가지 같은 숙부의 손이 소녀의 긴 머리채를 붙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이 먼저였다. 

-혜야?!

엄헌영이 놀라서 달려갔지만, 사내가 이끌고 온 이들이 단숨에 그를 제압에 얼굴과 가슴을 흙바닥에 짓눌렀다. 

-폐, 폐하.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소녀가, 그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떨리는 눈을 들어 자신의 숙부를 올려다보았다. 믿을 수가 없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항상 상냥하시던 숙부님이었다. 그 악몽 같던 시간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여 주신 분이, 악귀 같은 운현궁 마마의 손아귀로부터 자신을 빼내 주신 분이 다름 아닌 저 분이 아니시던가. 헌데, 어찌하여서?

-소, 소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사오나 폐하, 부디 은혜를,

덜덜 떨며 애원하는 소녀의 말허리를 사내가 뎅겅 잘랐다.

-근간에 상국의 계자와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 것 같더구나.

소녀의 눈이 커졌다. 뜻밖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나오지 않았다. 어찌하여 이 상황에 그 이야기가 나온 건지, 도무지 맥락을 알 수가 없었다. 허나 사내가 입에 올린 그 이의 얼굴을 뇌리에 떠올린 것만으로도 저절로 볼이 붉어졌다. 황망함과 고통에 발개진 눈가만큼이나 붉어진 소녀의 두 볼을 보고 사내가 냉소했다.

-그 꼴을 보아하니 풍문이 사실인 모양이로구나.

사내가 바닥에 엎드린 소녀의 앞에 두 무릎을 굽히고 앉더니 말했다. 말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에 무심코 눈을 들어 올렸다가 소녀가 얼어붙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숙부의 얼굴이 무섭도록 일그러져 있었다. 공포에 질린 소녀를 보고 숙부가 말했다.

-···려는 게지?

-예에?

숙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소녀가 화들짝 놀라며 머리를 들었다. 그러자 숙부께서는 노여워하는 대신 빙그레 웃으셨다. 그가 다시금 속삭였다.

-내 자리를 빼앗아 가려는 게지?

-···!  

소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경악스럽다. 이 무슨 무서운 말씀이란 말인가! 

경악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있던 소녀가, 뒤늦게 숙부의 말을 부정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아이처럼 쪼그리고 앉아 소녀를 내려다고 있던 숙부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소녀의 등을 힘껏 걷어찼다. 소녀의 비명 끝에, 소녀의 숙부, 아니, 소녀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을 한 괴물이 뜻을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질렀다. 소녀의 마른 몸을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비명과 닮은 괴성이 어지럽게 얽이여 소용돌이 쳤다.

-항상! 항상! 항상! 항상 그런 식이었다!

-항상 너는 내 것을 빼앗아갔어! 

-아니, 처음부터 모두가 네 것이었었지! 나 같은 병신에게 내 것이 무어가 있었을까?

-하지만 이제는, 이제는···!

-너는 죽었고, 이제는 모두 내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너는 왜 죽어서도 내 것을 빼앗아 가느냐? 왜! 무엇 때문에!

-너는 혜가 아니지? 혜가 아니야! 너는 망령이다! 망령이야!

-네 딸년의 몸에 깃들어서···!

-꺼져라! 너는 애초에 죽은 몸이다! 네가 네 딸년의 몸에 깃들어서 이 세상에 되살아났다면, 내가 몇 번이고 네 놈을 다시 죽여주겠다! 다시는 빼앗길 수 없어! 다시는, 다시는, 이제는 내 것이다, 네 것이 아니란 말이다···!

-우스우냐? 이런 내가 우스우냐? 그렇겠지! 자격도 없는 놈이 어울리지도 않는 높은 자리에 올라앉아서 노심초사 하는 꼴이, 네게는 우습겠지! 별별 삿된 짓거리까지 벌여 놓고도 아직까지 이 모양 이 꼴인 내가! 그래서 빼앗아 가려 하느냐? 허나 안 될 일이다, 아니 될 일이야, 내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자리도, 어마마마의 시선도, 네게는 그 어떤 것도! 

-내 것이다! 내 것이야! 내 것! 내 것이다! 

사내의 발아래에서 소녀는 비명을 질렀다. 지극한 아픔에 옳고 그림을 따져 볼 이성도 사라졌다. 그래서 소녀는 마냥 숙부를 부르며 사내의 발에 매달렸다. 아파요, 제발 살려 주세요, 잘못 했어요, 무엇이든 이 못난 질녀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리 하지 않을 게요, 그러니 폐하, 폐하, 폐하···! 

자신의 무엇이 숙부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소녀는 애원하고 울었다. 그러나 사내의 귀에 더 이상 소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울부짖는 소녀를 쾌감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숙부는 웃었다. 그것은 숫제 광소(狂笑)였다. 희열로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사내가 소녀를 내려다보며 내뱉었다.

-더 애원해라. 더 애원해. 

-폐, 폐하, 폐하···.

-그래, 내가 황제다. 

사내의 눈이 짐승처럼 번뜩였다.

-네가 아니라, 이 내가!

그 눈빛에, 현주도 자신도 그대로 얼어붙었다. 눈앞의 사내가 금방이라도 현주의 머리통을 짓밟아 깨부술 것 같아서 두려운데, 이상하게도 온 몸이 얼어붙어 제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아픈 짐승이 내는 목 울림 같은 웃음을 몇 번 터뜨린 후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현주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일순 그 눈에 빛이 스쳐갔다. 너무나 노골적이고 너무나 강렬한 그 눈빛을, 엄헌영은 아직까지도 기억했다.

살의, 였다.

살의···. 

-안 됩니다!

그 때, 저 멀리서 익숙한 인형(人形)이 달려오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 인형이 누구인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소녀의, 경혜와 엄헌영의 낯빛이 확 밝아졌다. 제안이었다. 황제가 뜻밖에 그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곤 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 해도 그는 황제의 단 하나 뿐인 혈육, 그러니 그라면, 어떻게든 저 짐승을 말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후에, 차분히 오해를 풀면···.

그러나 제안의 표정을 본 순간, 그 희망은 수포(水泡)처럼 사라졌다. 

제안을 향해 황제가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훌륭하구나.

그 때 엄헌영은 제안의 표정을 보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제안의 얼굴은 두 눈과 입술이 크게 벌어진 채로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 제안에게서는 처음 보는 감정이 그 작은 얼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당혹과, 두려움과,

죄책감.

어째서? 하고 생각한 순간, 황제의 손이 다가와 억지로 제안의 머리를 경혜에게로 돌렸다. 그제야 엄헌영은 제안이 내내 경혜를 바로 보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또 무슨 까닭으로?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의문을 상쇄하기라도 하듯 황제가 다시금 말한다.

-네 밀고가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

현실로 돌아온 엄헌영이 꾹 눈을 감고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복잡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휘몰아쳤다. 밀고라. 그런 섬뜩한 말을 붙여 마땅한 행동은 아니었었다. 그런 것 정도는 엄헌영도 알고 있었다. 허나 아직까지 엄헌영은 황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일 자체보다는 그 일 뒤에 벌어졌던 상황이, 그 때 제안이 취한 행동이 아직까지도 엄헌영의 가슴속에서 풀리지 않는 멍울을 만들고 있었다.

눈꺼풀 안쪽으로 섬광 같은 빛이 번뜩였다···.

장면이 변했다. 장소는 여전히 취영당이었으나, 방금 전까지는 없던 이가 자리에 있었다. 말소리가 들렸다.

-폐하, 소인의 계자와 취영당 마마께서 부부의 연을 맺을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옵니다. 

하고 말하는 이는 바로 헌의공 서엽, 지금보다 훨씬 젊은 얼굴의 서엽이 누군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뒤로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 어린 제안과, 머리와 옷가지가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입가가 터진 경혜가 파들파들 떨고 있다. 그리고 그런 서엽의 앞으로는,

“···!”

이를 갈면서도 취영당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던 엄헌영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츠려들었다. 엄헌영이 콱 이를 악물며 제 왼 팔뚝을 오른손으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분의 그 때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직까지 몸이 차가워졌다. 허나 그럴 만도 했다. 그 때의 그 분은 그야말로-.

“귀신.”

원령(怨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날 그 때, 헌의공 서엽의 앞에 서 있었던 이는 지금은 붕어(崩御)한 선제(先帝) 가연제. 광소를 터뜨리며 제 질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을 때도 그의 눈빛에는 일그러진 광기가 어려 있었지만, 그 때 그의 온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광기를 넘어선 귀기(鬼氣)였다. 

불어오는 칼바람에 묶지도 틀어 올리지도 않고 그대로 풀어 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음산하게 흔들리고, 금방이라도 마른 어깨를 타고 흘러내릴 것만 같은 헐렁한 옷자락이 삭아버린 종이처럼 바스락거렸다. 

가연제의 깡마른 손가락 끝에 맺혔다가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리던 새빨간 핏방울을 엄헌영은 아직도 기억했다. 그의 뭉툭한 손톱 사이에 끼어 있던 찢긴 소녀의 살점 또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린 질녀(姪女)의 볼과 입 안을 할퀴고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친 후 마구 짓밟던 황제는 언 그랬었냐는 듯 멍하니, 무기질적인 시선을 자신의 앞에 있는 사내에게 내리꽂고 있었다. 크게 뜨인 채 아래를 향한 그 검은 눈과 핏발 선 흰자위가 저절로 몸이 얼어붙을 만치 소름끼쳤다.

헌의공으로부터 한 시도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도 가연제는 좀처럼 먼저 입을 떼지 못했다. 마치 서엽의 앞에서는 먼저 말하지 못하도록 훈련받은 개 같았다. 

서엽이 말했다···.

-폐하, 폐하께서는 결코 염려하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어찌···, 그리 단언하는가.

황제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대꾸하는 황제는, 눈동자뿐만이 아니라 온 몸 전체가 텅 빈 사람처럼 허망해 보였다. 황제가 시선을 경혜에게로 돌렸다.

-나는, 뇌비치 못한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폐하?

-나는, 짐은, 은혜를···, 베풀었다고 여겼었다.

-실로 그러하옵니다.

-아니야.

황제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나는, 짐은, 짐은, 범 새끼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하고 앓는 신음을 흘린 황제가 갑자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며 경혜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리고 서엽의 옷자락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대는, 보이지 않는가?

-송구하오나,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보인다, 내 눈에는 보여, 망령이 보인다, 망령이, 그 계집아이의 뒤에 씌어 있어.

-지금 망령···, 이라 하시었습니까?

-그래!

망령이다! 황제가 비명을 질렀다. 

-망령이, 소현이, 웃고 있다, 비웃고 있다, 짐을 비웃고 있어···! 금관의 무게를 감당하지도 못할 놈이, 억지로 금관을 쓰고 목이 비틀어진 채 버티고 있다고, 비웃고 있어···!

-취영당 마마께서 폐하의 제좌를 위협하실 것이라 염려하시옵니까?

-비록 발현(發現)치는 않았다 하나 저 아이도 용의 핏줄이다! 소현의 아이다! 짐이 아니라 저 아이가 와룡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이미 증후가 나타난 용인과 가까이 하며 지속적으로 교합한다 하면 깊숙이 엎드리고 있던 힘이 자극을 받아 언제든 용의 증후를 보일 수 있음이야! 아니, 설사 그렇지 않다 하여도 용인인 그대의 계자와 청룡의 직손인 저 아이가 아이를 생산하면 그 아이는···!

억측이었다. 더더군다나 지나치게 두서가 없는 말이라, 듣는 이로서는 황제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조차 파악하기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당사자는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떨리는 말을 내뱉는 입술이 삽시간에 새파랗게 바래고 온 몸이 백짓장처럼 새하얘졌다. 말끝에 가서는, 인간이 아니라 백지로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너무나 위태로워, 바람이 불면 그대로 휙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허나 그런 황제를 코앞에서 마주보는 서엽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 외의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달달달 이를 부딪치며 털어놓은 황제의 말을 끝까지 들은 서엽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옵서는 전혀 염려하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하고 말하는 그 치의 머리가 뒤를 향했다.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경혜 현주가 그대로 얼어붙은 채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 모습에 웃음기 어린 시선을 던지며 서엽이 말을 이었다.

-청룡의 핏줄이라···. 그에 관하여서는, 신이 폐하께 몇 번이고 간언한 바가 있지 않사옵니까.

그 말에 황제가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허나···.

-신의 충언은, 결코 틀림이 없사옵니다. 소인이 드린 간언을 부디 깊숙이 새기어 주시오소서.

-······.

-그러하나, 그리하여도 폐하의 성심이 평온을 찾지 못한다 하시오면.

잠시 황제에게로 돌아갔던 서엽의 시선이 다시 경혜에게로 꽂혔다. 서엽이 말했다, ‘취영당 마마와 신의 계자를 결코 연모의 정으로도, 또한 벗으로서의 정으로도 얽힐 수 없도록 신이 손을 쓰도록 하겠사옵니다.’ 

그 말에 불쑥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것은 아마 경혜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니, 현주에게 그것은 단순한 예감이 아니라 확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나기를 황실의 여인으로 나서 황실의 여인으로 자라면서, 자신과 같은 황실 여인들의 삶을 지켜봐 온 현주는 황실의 여인과 그녀와 정치적으로 맺어지기에 곤란한 관계에 있는 사내가 어중간하게 얽혀 있는 이러한 상황을 치자(治者)들이 어떤 식으로 해결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시, 싫어요.

싫어요, 숙부님. 경혜가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쥐어짰지만 그 말은 황제에게도 서엽에게도 닿지 않았다. 서현이 있다면 울며 그에게 매달려 보았겠지만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아아, 아아, 의미 없는 신음과 함께 갈 곳을 모르고 헤매던 경혜의 시선이 결국 제안에게로 가 꽂혔다. 살려줘. 그녀의 눈이 염원과 눈물로 커다랗게 부풀었다. 그녀의 눈이 제안을 향해 애원했다. 도와줘, 제안. 도와줘. 너라면 할 수 있잖아. 너라면. 

그리고-,

네가 해야 하잖아. 네가 저지른 짓이잖아. 네가, 네가, 네가, 네가!!!!!  

-······.

꿀꺽, 마른침이 소년의 목울대를 밀어 올리며 마른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경혜의 눈빛에 등을 떠밀린 것처럼 제안이 한 발자국 앞으로 움직였다. 그는 분명히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질투에 미친 자신의 아버지를 소중한 누이에게 데려 온 책임감을.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서엽의 시선이 경혜에게서 제안에게로 옮겨갔다. 그의 입술이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을 보았지만 당시 엄헌영이 있던 위치에서는 그 입술의 모양을 완벽히 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은, 그 순간 제안이 움직임을 멈추었다는 사실이었다.

서엽을 제외하면 미친 황제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제안이!

서엽이 입을 열었다, ‘신, 서엽, 폐하께 감히 바라옵건데-,’

-폐하의 질녀인 취영당 마마를 소인의 처로 주시옵소서.

경혜가 비명을 지르며 무너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