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4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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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초조하게 흘렀다. 일 분, 한 시간, 혹은 하루. 그러나 그것은 관념 속의,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는 착각 속의 시간에 불과할 뿐 실제의 시간은 아니었다. 

인정한다. 그는, 서문경은 그 때로부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다가 그는 곧바로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그 때?’ 이제는 ‘그 때’가 도대체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조차도 알 수가 없다.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다, 그의 뇌리에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을 만큼의.

주위와 소통할 수 없을 정도로 밀폐된 공간에서의 시간은, 실제 시간의 흐름보다는 심경에 좌우되곤 한다. 지루함을 느낄 때면 시간은 시간 자체가 멈춰 버린 것이 아닌가 싶을 만치 느리게 흐르고, 발이 저절로 동동 굴러질 만치 애가 탈 때면 열 시간도 반각만큼 빠르게 흐르는 법이다. 

서문경의 경우에는, 놀랍게도 후자와 전자의 경우가 서로 꼬리에 꼬리를 감고 서로의 머리를 잡아 뜯으려 달려드는 격으로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는 황제의 얼굴을 말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때면 일초가 마치 하루처럼 길게 느껴졌고, 자신이 싸늘하게 식은 황제의 손을 제 손바닥 사이에 끼우고 비비며 체온을 나누어 주는 짧은 시간 동안 바깥세상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에 대해 생각하면 한 시간도 일초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알에서 깨어난 자신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이후에 몸이 노곤하다며 잠시 눈을 감는다던 황제는 지금까지도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황제가 혼절하듯 깊은 잠에 빠진 이유를 이미 알고 있던 서문경은 그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 똑같은 이유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서문경은 자신의 머릿속으로 ‘침입’하다시피 한 지식을 쓴 약을 들이키듯 떠올렸다. 황제가 이렇게 잠에 빠진 이유는 자신을 용인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힘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경우 가용인(假龍人)을 만들어 낸 황제들은 나흘에서 닷새 정도 죽음과도 같은 잠을 잔 후에 다시 눈을 뜨지만···. 그러나, 전대의 황제들의 경우를 지금의 황제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천제사를 치른 진짜 용이지만 지금의 황제는 아니었다. 더구나, 이렇게나 큰 부상을 입은 상태로 가변례를 치러냈으니. 그래서 서문경은 점점 불안해졌다. 도대체 언제 깨어나는 것일까, 아니,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불길한 생각이 점점 풍선처럼 커졌다. 

그러다 서문경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의 신체 중에 가장 단단하다는 이빨로 마구 짓씹어도 작은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자신의 손톱을 낯선 것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던 그는 무심코 생각했다.

이 사람, 깨어나기나 하는 것일까.

“······!”

애써 생각하려 하지 않던 것을, 마음이 약해진 그 일순간에 떠올린 그 순간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서문경은 무심코 손을 뻗어 황제의 두 볼을 감쌌다. 피부에 닿은 살이 몹시 차가웠다. 얼음 덩어리, 아니, 시체···, 같았다. 서문경은 무서워져서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그러나 생각하기를 그만둔다고 해서 감각까지 닫을 수는 없었다. 황제의 피부에 닿은 손바닥이 그의 차가운 체온을 전하고, 그의 입가에 늘어진 손가락이 실낱처럼 가느다란 그의 숨결을 고자질했다. 황제의 피부는 조금도 따스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숨? 그의 숨소리는. 

서문경은 황제의 입과 코를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느다란 그의 숨은 조금 전과 비교하여 약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뿐이었다. 그래서 그 지나치리만큼 규칙적인 숨결은 황제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느껴졌다. 이미 황제의 안에서 혼은 빠져나갔고, 숨을 쉬고 내뱉는 단순한 명령만이 입력된 빈 몸뚱이만 남은 것이 아닌가 하는. 

서문경은 멍하니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제멋대로 생각이 굴러갔다.

만일 이 사람이 이대로 죽게 된다면.

“!”

갑자기 닥쳐온 지독한 한기에 두 팔로 세운 무릎을 끌어안고 한껏 몸을 웅크렸다. 저절로 손발이 파르르 떨렸다. 몸은 한기라고 느꼈지만 서문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무섭다. 너무 무서워. 서문경의 두 눈이 두려움으로 크게 뜨인 채, 파르르 잔 경련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이 사람이-.

서문경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황제를 향했다. 

이 사람이 죽으면. 

“난.” 

이미 이 사람에 ‘속하게’ 된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나도, 죽는 건가? 

“말도 안 돼!” 

서문경의 분노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콱 무심코 주먹을 움켜쥐었다. 칼날처럼 자란 손톱이 상대적으로 여린 손바닥을 사정없이 꿰뚫고 갈랐지만 열이 머리끝까지 오른 서문경은 그것조차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두 눈을 부릅뜬 서문경이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나를 살릴 때도,”

당사자인 내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제멋대로 이런 방식으로, 이런 꼴로, ···조차 하지 못하는 꼴로 되살려 놓고는 그런데 이번에도 그러겠다고? 

서문경은 거칠게 입술을 깨물며 초조하게 생각했다. 죽는 건 싫어.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살고 싶어.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짓씹던 하얀 이가 그 순간 우뚝 멎었다. 세로로 긴 서문경의 동공이 한 번 작아졌다가 다시 커졌다, 마치 쿵, 하고 심장이 뛰듯이. 

무심코 서문경은 내뱉었다. 

“죽지 않으면···.”

만약에, 저 사람이 죽었는데도 내가 죽지 않는다면. 저 사람 없이 나 혼자 살아남게 된다면.

“싫어. 그것도 싫어.”

서문경이 무심결에 내뱉고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폐하.” 서문경이 황제를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가서, 황제의 어깨를 흔들었다. “폐하, 폐하.”

일어나요. 

“무서워.”

나 무서워요.

“일어나십시오, 폐하.”

서문경의 입술이 점점 파랗게 질렸다. 

“제발.”

일어나요.

“혼자 둘 거예요?” 

서문경의 눈빛에서 이지가 급속도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떨리는 목소리가 내뱉어졌다. 그 떨리는 말이, 어둡고 습한 굴 안을 어미를 찾는 아이의 울음소리처럼 가련하게 맴돌았다. 

“절 여기에 혼자 둘 거예요? 약속했잖아요. 이제 그러지 않겠다고, 했었잖아요. 제가 한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이 저를 배반하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이 바라는 대로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 있어 주리라고, 제가.”

말했었는데···. 서문경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겨우 생각이 난 탓이다. 

자신의 그 말에, 황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었다···. 

서문경의 눈이 공포와 불안으로 흐려졌다. 설마.

서문경은 황제에게 물었다.

“아니지요?” 서문경이 황제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면서, 자신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는 상태인 그에게 계속해서 대답을 재촉했다. “그런 거, 아니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서문경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 죽어요!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이렇게···,”

서문경이 자신의 가슴팍을 미친 듯이 치며 외쳤다.

“이런 몸으로! 당신 때문에 나는 이제 온전히 내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이게 무슨 기분인지! 얼마나 내 기분이 엿 같은지! ···봐요.” 

서문경이 힘없이 늘어져 있는 황제의 손을 억지로 끌어다 제 왼쪽 가슴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스스로의 심장박동 소리를 읽었다. 쿵, 쿵, 쿵. 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서문경의 맥동(脈動)은···. 그의 심장이 뛰는 속도는 일정하면서 느렸고, 심장이 뛰는 소리는 속삭이듯 나직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모르시려나요. 지금 당신과 내가. 당신과 내 심장소리가···.”

-마치 황제의 숨소리와 같은.

“완벽하게 일치해요.”

그리고. 서문경이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황제의 손을 자신의 살갗 위로 미끄러뜨렸다. 황제의 손이 스쳤던 자리에 새빨간 핏자국이 남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 핏자국은 씻은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서문경은, 황제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과 완벽하게 일치하던 자신의 심장 박동이 그 순간만큼은 그의 지배 하를 벗어나 크게 날뛰는 것을 민감하게 느꼈다. 황제의 피를 흡수하고 그만큼 ‘힘’의 수위가 높아진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황제에게 속한 붙어살이벌레처럼 느껴진다. 

한 조각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타인에게 속한 그 기분이, 거부감을 느끼는 정신과는 달리 탐욕스럽게 당신을 탐하려 드는 이 피와 살이, 그것이 너무나 역겹고 싫다. 그래서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당신을 원망한다. 하지만 죽는 것은 싫다. 그리고, 당신이, 당신이 죽는 것도 싫다. 

만일 내가 당신을 따라 죽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이상하지.

서문경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당신이 죽어야 내가 당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래야 이 역겨운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어쩌면 당신은 그것을 예상하고 이런 일을 벌였을지도 모르지만···.

“이상하지. 그렇다 해도 역시 당신이 죽는 건 싫습니다.”

그러니까.

“일어나세요.” 제발. 서문경이 호소했다. “일어나서···,”

일그러진 얼굴이 계속해서 틀어지고 구겨지고 무너져 내릴 듯이 변했다. 부들부들 떨리던 입가가 결국 웃음을 잃고 창백한 입술이 애원하는 말을 내뱉었다. 

“일어나서 당신도, 저처럼, 제가, 괴물이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내가 필요하다고 해주세요. 계속, 계속 옆에 있어 달라고 해주세요. 나를, 나를, 날.” 

나를 제발. 서문경의 떨리는 손이 황제의 손가락을 잡아 당겼다. 아니, 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떨리는 손가락이 자꾸만 황제의 손을 놓쳤다. 그래서 서문경은 아예 몸을 숙여 황제의 볼에 자신의 볼을 붙였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살에 자신도 모르게 살을 비볐다. 필사적으로 살을 비벼 자신의 체온이 황제의 볼에 옮겨 가기라도 하면 황제가 다시 눈을 뜨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러다 서문경이 숙였던 얼굴을 조금 들고, 황제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겹치더니 그 안으로 직접 숨을 불어 넣기 시작했다. 불어 넣는 숨 사이로 서문경의 애타는 애원이 섞였다. 

“일어나요. 일어나서 말해 주세요.” 

이상하게 점점 목이 말랐다. 

“아직도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 주세요.”

점점, 숨이 가빠왔다.

“내게 무게를 실어 주세요.”

서문경은 숨이 가빠 차마 밖으로 내뱉지 못한 소망을 필사적으로 되뇌었다. 제발, 폐하. 일어나 어서 내 손을 잡고, 내 어깨를 눌러 주세요. 내 발목을 붙잡고 두 발에 족쇄를 채워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또. 서문경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타인과 근본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이물감조차 잊어버릴 만큼 속이 울렁거렸다. 또 이 기분.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휘청하며, 손을 뻗었다. 찬 타인의 피부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서문경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왜인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황제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새 사람으로 받아들인다는 소문을 듣고 상심하여 느꼈던 그 때의 기분, 그러나 그 때와 지금의 이 감정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 때의 기분이 그저 갈 곳을 모를 막막함이라면 지금은.

서문경은 완전히 눈을 감았다. 황제에게 자신이 했었던 말이, 바로 지금 자신을 향해 화살처럼 꽂혀 들어왔다.

-알고 있다고 했잖습니까, 전 거짓말 하지 않았어요.

그래, 알고 있지. 황제는 그 말을 듣고도 미처 깨닫지 못한 눈치였지만···, 그래, 자신은 거짓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 모든 것을. 그래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절망감.

그래, 이것은 절망감이다. 그러니까.

“일어나요···.”

당신이 원망스러워. 하지만 당신이 필요해. 그러니까 당신도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 줘. 그렇게만 해주면 나는,

“해줄게요.”

당신이 무엇을 요구하든.

“약속할게요.”

서문경이 흐느낌이 섞인 소리로 내뱉었다. 

“그러니까 제발 일어나요···.”

그리고 잠시 후, 서문경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

**

날이 바뀐 것을 엄헌영은 한참 동안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날이 바뀌었어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여전히 차고 사위는 한결같이 어두웠으며, 지난밤 내내 그를 둘러싸고 있던 고뇌 또한 여전히 끝을 알 수 없이 깊고 검었던 탓이다. 

그러나 마냥 검디검었던 야천(夜天)의 검은빛이 점점 빛을 더하는 햇빛에 바래어 조금씩 흐릿해지고 그 사이에 타오르는 듯한 섬광이 섞이자, 엄헌영도 결국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 어느 순간 불어오는 바람이 가볍고 맑아졌다는 것을 깨달은 엄헌영이 설마 하는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엄헌영의 얼굴에 낭패라는 기색이 어렸다.

“이런···.”

“···늦었구나.”

한숨과 함께 뜻밖에도 대답이 돌아왔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엄헌영은 머리를 돌렸다. 미처 깨닫지 못했건만, 어느새 자신의 머리 뒤편에 젊은 여인이 서서 말끄러미 엄헌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찬 새벽바람이 불어오자, 몇 폭이나 되는 여인의 넓은 치마폭이 갈대밭이 춤추듯 너울너울 춤을 췄다. ‘오늘도 운현궁에서 돌아오는 길이냐.’, 엄헌영이 묻자 여인이 보일 듯 말 듯한 고갯짓을 한 번 하고는, 자신을 향해 무언가 바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엄헌영을 향해 씁쓸하게 말했다.

“쓸모없는 소모전을 치른 기분이다.” 그리고서 그녀가 바로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운현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강이 너는 언제 돌아왔느냐.”

실망한 투로 엄헌영이 내뱉었다.

“방금.”

그 대답에 여인이 무어라고 대답하려고 입술을 벌렸다가, 결국은 그만두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엄헌영의 표정과 낯빛을 보니 사정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인이 한숨과 함께 하고픈 말을 삼키면서 화제를 돌렸다.

“벌써 날이 밝았는데 이만 황국동으로 돌아가 봐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애련당으로 돌아갈 셈이냐?”

“그러지 않으면?” 

여인이 반문하며 걸음을 옮겼다. 여인과 엄헌영 간의 거리가 고작 어린아이의 한보만큼이 되었다. 여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허탈한 목소리였다. 

“날이 밝았어.”

“안다. 헌데?”

“고집 부리지 말거라. 천제사일이다. 나도, 강이 너도 이리 큰 나랏일에 참석치 않을 수는 없어.”

여인은 점점 부옇게 밝아오는 하늘을 한 번 보고 덧붙였다, ‘채비를 하기에는 지금도 시간이 많이 늦었다.’ 그러나 여인의 간접적인 재촉에도, 엄헌영은 몸을 일으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강아. 마치 뿔이 나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에게서 완전히 몸을 돌려버린 엄헌영의 등을 한참 동안 응시하던 여인이 엄헌영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엄헌영이 말했다. 

“윤재라. 왜 석공은 제 동첩에게 석실이 윤재에 있다는 말을 했을까.”

그 말에 여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것은 끝난 이야기가 아니냐. 왜 다시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야?”

맞다. 경혜의 말대로 이미 끝난 이야기였다, 더더군다나 석공의 동첩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골똘히 생각해보던 혜에게 핀잔을 준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더구나···. 

그 때 ‘게다가.’ 하며 여인, 경혜 현주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윤재에는, 강이 네가 이미 가보지 않았더냐.”

그랬다. 엄헌영은 미처 다 내뱉지 못한 한숨을 무심코 삼켰다. 

···행방불명된 석공들의 행방을 좇아 원경 외곽까지 나갔다 마지막으로 들른 석공의 집에서 들은 정보를 확인해 보기 위하여 그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석공의 동첩이 말한 윤재로 걸음하였었다. 

윤재는 수도 원경과 화언 사이에 자리 잡은 곳으로 병풍처럼 주위를 첩첩이 둘러싸고 있는 옥산(玉山)과 연못, 종유굴, 기암괴석 등으로 독특한 경관을 이루고 있는 종유굴 등으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었다. 

제 아무리 작은 곳이라 해도 한나절 만에 그 많은 산과 동굴들을 샅샅이 돌아보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나 엄헌영은 꼬박 밤을 새면서 그 일을 해냈다. 그러나 결과는 허무했다. 사라진 석공들의 흔적은커녕, 윤재에는 석공의 동첩이 착각한 장충단과 비슷한 지형조차 보이지 않았다.

작일의 기억을 되뇌며 엄헌영이 중얼거렸다. 

“당연한 결과다. 절신과 닮은 지형이 흔했다면 절신에 신단이 만들어졌을 리도 없을 터이니.”

“그러니 생각은 그만 하려무나.”

고민해 보아야 답도 나오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경혜현주가 엄헌영의 말을 끊어 놓았다. 엄헌영이 대꾸 없이 머리만 돌려 경혜현주 쪽을 보았다. 슬쩍 찌푸린 눈에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의혹이 서려 있다.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어 의아하였으나, 곧 그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경혜현주는 말했다.

“더 생각해 보아야 알 수 없는 일이니 생각해 봐야 네 머리만 아프지 않겠니. 더구나 운현궁 마마를 배알하러 갔을 때 넌지시 들은 것인데, 네 백부님께서도 수향에 맞추어 입궐하실 것 같다더구나.”

그러니 너도 네 백부가 눈치 채기 전에 귀서하여 제장으로 갈 채비를 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일부러인지 아니면 생각이 한 방향으로 쏠려 있어서인지 경혜의 말을 들은 엄헌영은 서둘러 몸을 일으키는 대신에 코웃음만 쳤다, ‘속셈이 뻔히 보이는구먼.’

“강아!”

“내버려두어라.” 재촉하는 경혜에게 엄헌영이 건성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백부님께서 내가 방에 없는 것을 알아채시면 뭐가 어떻단 말이냐? 이렇게 백방으로 뛰어 다녀도 손 쓸 방법이 하나도 없는 것을. 백부님은 그것을 모르실 분이 아니야.”

어쩌면 내 동향 따위는 한참 전부터 꿰고 있으셨을 지도 모르지, 하고 엄헌영이 중얼거렸다. 그 불퉁한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끊기고 한참 동안이나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인적이 드문 곳이래도 엄연히 사방이 뻥 뚫린 곳에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경혜현주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엄헌영을 다시금 재촉해서 엄씨 세가 본집이 있는 황국동으로 돌려보낼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불쑥 엄헌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너는 애련당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강이 너는?” 

불쑥 든 불길한 예감에 경혜현주가 그렇게 묻자, 엄험영이 눈썹 사이를 좁힌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확신을 얻은 경혜현주가 표정을 굳히고 따졌다. 

“너, 황국동으로 가려는 것이 아니지?”

발칵 소리를 지른 직후에, 섬광 같은 직감이 현주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현주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강아 너 설마!’

“수상저로 갈 셈이냐!”

엄헌영이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가, 곧 씹어 내뱉듯 대꾸했다.

“그 수 외에 별 수가 있느냐?”

“큰일 날 소리! 한 나라의 수상을 납치하여 가둘 생각을 하다니!”

“알 게 뭐야. 그러지 않으면 더 큰 일이 날 판국에.”

엄헌영의 독설에 경혜가 일순 할 말을 잃은 듯 입술을 멍하니 벌린 채로 눈만 크게 뜨고 섰다. 그런 경혜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엄헌영이 자신의 어깨 끝을 툭 치며 지나친 그 순간이었다. ‘어서 애련당으로 돌아가.’하는 엄헌영의 조언은 들은 체도 않고 경혜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거기 서라, 강아! 못 간다! 내가 천제사에 참여치 못하는 한이 있어도 너는 보내지 않을 것이야!”

“놔. 그것이 싫으면 네가 다른 수를 내놓아 보거라. 이대로 손 놓고 두고 보자는 말은 제하고 말이다.”

엄헌영의 칼 같은 말은 어떻게 보면 비난처럼도 들렸다. 경혜현주는 반사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엄헌영의 소맷자락을 잡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 어쩌면 엄헌영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네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파직 당할 수도 있어. 나는 그것이 싫다.”

“그 정도로 모든 사달을 막을 수 있다면 싸게 먹힌 셈이지.”

강아···. 경혜현주의 목소리가 나지막해졌다. 경혜현주는 엄헌영의 옷자락을 붙잡았던 손을 풀고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제야 엄헌영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해왔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경혜가 엄헌영을 설득했다. 

“네 생각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른 사람이 하느니 차라리 네가, 라는 심정인 게지. 허나, 아무리 그 황고 어르신이라도 질자인 너에게 중벌을 내리지는 못하리라는 심산에서 나온 행동이라면 여기서 그만 두어라. 황고 어르신이나 운현궁 마마께서 강이 너를 어여쁘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나, 그 사감이 공적인 일에까지 이어질 것이라 기대하지는 말아라.” 

몰아치듯이 내뱉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잠시 말을 멈췄던 경혜현주가, 잠시 후 여전히 찌푸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특히나, 운현궁 마마의 경우에는.”

“허나, 혜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쏘아 붙이듯 경혜가 내뱉은 말에 무어라 대꾸하려고 입을 열었던 엄헌영이 멈칫했다. 경혜현주가 언제를 말하고 있는지 알아챈 탓이었다. 경혜현주가 반사적으로 시선을 모로 흘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벌써 십 수 년이나 지난 일이었지만, 당시의 일만 떠올리면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된 듯한 비참함에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시선을 피하게 된다.

“···그 분께 인간적인 처사를 바라지 말거라. 세상에 오롯이 자신만이 존귀하며 존중 받아야 생각하시는 분이시니, 네가 그 분께 먹물을 튀길 수 있는 존재로 변한 그 순간부터 너는 그 분의 자랑스러운 질자도 무엇도 아니게 될 것이야.”

취영당(翠影堂). 소현태자가 자신이 가장 총애하던 후궁인 재여씨에게 내린 취영당은 재여씨 생전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석류나무와 버드나무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그녀의 사후에는 아니었다. 괴기스럽게 보일 정도로 풀과 나무들과 그 그림자가 우거진 어두운 당집 주위에서 점처럼 박힌 붉은 유화(榴花: 석류나무 꽃)가 핏발이 선 여인의 눈처럼 보였었던 것을 엄헌영은 아직까지도 기억했다. 

그곳에서 경혜현주는 최소한의 나인들만을 거느린 채 외로이 자랐다. 아니, 어쩌면 외롭다기보다는 처절하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당시 경혜현주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던 태황태후가 경혜현주가 취영당 밖으로 나오는 것을 몹시 꺼려했었던 탓에 경혜는 보이지 않는 창살 안에 감금되어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아비어미를 잃고 기댈 곳 하나 없게 된 어린 손녀조차도 혹덩어리라 여기고 귀찮게만 여기셨던 분이야. 그런 분께서, 자신의 계획에 흙탕물을 끼얹은 이를 질자라고 용서해 주실 리가 없어.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인다는 명목으로 더 잔혹하게 너를 치워 버리실 수도 있다. 네 백부님도, 믿지 말거라.” 

경혜현주가 엄헌영을 똑바로 쳐다보고 머리를 저었다. 

“일전에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지, 최악의 경우 저울대 양 쪽에 각기 다른 사람이 놓이면 누구나 그 진심이 나오는 법이라고. 네가 일을 저질러서 계획을 그르치게 된다면 계획에 참가한 이들은 필히 네게 어울리는 처단을 요구할 것이고, 그리되면 운현궁 마마께서는 네 백부님께 너를 내어주기를 하명하실 것이다. 그 때 너는 확신할 수 있느냐?”

“나와 운현궁 마마라.”

“아니다.”

경혜현주가 엄헌영의 말허리를 끊었다. 엄헌영이 무심코 당황한 얼굴을 하자, 경혜현주가 사실을 짚어 주었다.

“네 반대편 접시에 올라갈 것은 운현궁 마마가 아니라, 네 백부님께서 운현궁 마마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욕망이다.”

“···!”

그 말에 엄헌영의 표정이 변했다. 엄헌영의 심중에 처음으로 파문이 번진 것을 눈치 챈 경혜현주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설득했다.

“상국을 어찌해 볼 생각은 이만 접고 황국동으로 돌아가거라.”

경혜현주는 이번에야말로 엄헌영이 자신의 말에 머리를 끄덕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생각 끝에 엄헌영은 또다시 머리를 저었다.

“···그리할 수는 없어.”

“그리 염려하지 말거라. 아직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상국께서 깨어나셨다는 말도, 황상께서 귀궁하셨다는 소식도 아직까지는 없다. 어쩌면 금번 천제사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것이 아니다.”

뭐? 뜻밖의 말에 경혜현주가 말을 하다 말고 주춤했다. 엄헌영이 긴 숨을 내쉬었다. 무겁고, 어딘가 지친 듯한 한숨이었다. 엄헌영이 불현듯 맥락 없는 물음을 던졌다.

“혜야 너는 어디로 갈 셈이냐? 기어코 나를 황국동으로 보내고 나면.”

“···그것이 무슨 말이더냐? 나야 당연히,”

“수상 관저로?”

경혜현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뒤늦게 경혜현주가 애써 웃으며, ‘무슨 말을.’하고 대답하려 했지만 엄헌영 쪽이 먼저였다. 엄헌영이 표정을 굳히고 거의 명령하듯이 말했다.

“돌아가.”

“···그리는 못한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경혜현주도 표정을 굳히고 엄헌영의 앞을 단단히 막아섰다. 

“다 강이 너의 지나친 생각이다. 나는 조금도 그리할 생각이 없느니. 그러니 너 먼저 돌아가라. 네가 황국동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면 나 또한,”

그러나 경혜현주는 하던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자신의 머리 바로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느낀 경혜현주가 무심코 머리를 들었다가 눈을 함지박만 하게 떴다. 하지만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엄헌영의 손이 경혜현주의 뒷목을 때렸다. 경혜현주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가 스르륵 감기며 그녀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기절한 경혜현주를 덤불을 헤쳐 그 안에 눕힌 다음 엄헌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에 현주가 보이지 않도록 자신이 헤친 덤불을 다시 다독여 현주의 모습을 가린 다음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자신이 있던 장소를 빠져 나갔다. 

막 떠오르는 해에 비쳐 수당(水塘)이 은반처럼 찬란한 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못가에 쓸쓸히 서 있던 낡은 정자가 더더욱 초라하게 움츠려 든 것처럼 보였다. 멀리서 늙은 짐승이 구슬픈 소리로 울었다. 그 끝을 물고 희미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때는 인시(寅時)였다. 

**

인시(寅時)를 알리는 낭락 대종(大鐘)이 세 번, 그 울림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소종이 한 번 울렸다. 웅장한 동종(銅鐘) 소리를 필사적으로 좇는 듯한 소종 소리가 참으로 가냘프고도 가련하였다. 

인시가 오기도 전에 겉과 속을 깨끗이 하고 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제관들이 종소리에 맞추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상서로운 벽조목(霹棗木) 목소반(木小盤)에 제화와 제관, 백삼과 흑삼 따위가 실려 재소로 들어왔다. 예복을 갖춘 제관들이 인시를 알리는 마지막 종소리에 맞추어 재소를 나섰다. 

제장(祭場)인 계하로 들어가기에 앞서 제관들이 황제에게서 수향(受香)을 받는 것이 모든 제사의 필수 관례였으나, 황제가 부재중인 까닭에 제관들에게 향과 제문을 베푸는 역할은 태황태후 엄씨가 대신하기로 결정되었다. 

본래대로라면 황제의 정식 배필인 황후가, 곤위까지 비어 있을 시에는 백관의 수장인 수상이 대신하여야 할 일이었으나 수상 서현 측에서는 제의를 받은 즉시로 정중히 광록훈 기문 소훈에게 거절의 뜻을 알려 왔다. 덕분에 문제의 그 날 밤 이후 수상 서현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풍문은 다시금 한 바탕 저자를 뒤흔들었었다. 

태황태후궁인 서편 천태운현궁 앞에서는 성장한 태황태후 엄씨가 뒤로 일어나는 파도 같은 인파를 거느리고서 제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태황태후의 안색을 살폈으나, 태황태후 엄씨의 얼굴은 조금 해쓱한 점만 제하면 평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옥그릇에 든 정화수에 손을 씻은 태황태후가 제관들에게 불을 붙인 향을 나누어 준 후에 제문(祭文)을 읽었다. 

제문이 끝나자, 모든 제관들을 대표하여 집사관(執事官) 천주 성융이 태황태후에게 합당한 예를 올린 후, 배재관들을 거느리고 계하의 길지로 행차를 시작하였다. 다른 제관들보다도 몇 발자국이나 앞서 있었던 탓에 집사관이 예를 올리기 직전 태황태후와 의미심장한 눈짓을 주고받는 것을 본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제관들이 길지로 행차를 시작한 시각이 인시에서 막 묘시(卯時)로 넘어가던 시각이었다. 

행차가 끝나는 시각은 예정대로라면 묘시 말, 그리고 진시(辰時)를 알리는 종이 울림과 동시에 천제사가 시작될 것이다. 벌써부터 제장 좌편에는 용호군과 응양군 이 두 이군(二軍)이, 제장 우편에는 금위군이 몇 겹이나 제장을 단단히 에워싸고 그 사이로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권신과 황친들이 차례로 제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지금 막 태황태후 엄씨가 그녀의 사가 오라비인 엄충 등을 거느리고 제장에 입실하였다는 소식과, 그에 질세라 헌의공 서엽이 입궁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정작 이 천제사의 주공(主公)인 황제는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고, 수상 서현에 대한 소식 또한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허나 그러한 인세의 사정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벌써부터, 검푸르던 하늘 끝자락이 하얗게 불타기 시작했다···.

**

길 잃은 모시 백접(白蝶: 흰 나비)처럼 갈 곳 모르고 잠시 허공을 헤매던 하얀 손이, 이윽고 제 갈 곳을 더듬어 찾았다. 뜨거운 볼에 한 조각 한기가 부드럽게 부딪친다. 그러나 서문경은 크게 뜬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황제의 눈꺼풀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서문경은 머리를 조금 들었다. 

그의 볼 위에 가만히 올라앉아 있던 한기가 그 움직임을 따라 올라왔다. 맨 피부에 닿는 감촉이, 익숙했다. 조금 머뭇거리던 서문경이 자신의 볼 위에 가만히 자신의 손을 올렸다. 차가운 기운이 손가락 끝을 간질거리듯 번져왔다. 서문경의 손가락 끝이 경련했다. 이 손과 겹쳐진 것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지만 분명히 타인의 살. 한겨울의 호수처럼 냉하지만 분명히 타인의 체온. 더구나.

서문경의 한 쪽 볼을 살살 쓰다듬던 하얀 손이, 아래로 내려오더니 서문경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것이 시키는 대로 끌려가자 이윽고 자신의 손바닥이 황제의 입가를 덮었다. 조금 뒤 서문경의 눈이 다시 커졌다. 서늘하게 식은 손바닥 아래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진 탓이었다. 

“······!”

서문경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폐하···?”

하고픈 말이 너무도 많아, 도리어 목이 콱 막혔다. 말과 말과 말과 말이 제가 먼저 밖으로 나오겠다 서로 다투며 아우성을 쳐 대는 탓에 서문경은 고작 그 한마디를 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잠시 후, 손바닥에 얇고 부드럽고 찬 천 같은 것이 스치는 듯한 감촉이 몇 번이고 느껴졌다. 서문경은 필사적으로 그 움직임을 읽었다. 

어찌 그러고 있누.

“제가···, 뭘요.”

무슨 까닭으로 그리 울상이야.

“눈도 보이지 않는 주제에 무슨···.”

하고 야멸치게 대꾸하는 목소리 끝에, 어울리지도 않게 울음기가 묻어 나와서 당황한 서문경이 황급히 말을 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황제의 목젖이 작게 오르내리며 목구멍 안쪽에서 나지막한 효후(哮吼)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뒤늦게 그것이 웃음소리라는 것을 알아챈 서문경의 눈매가 사나워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흐릿하게 누그러지는 듯싶다가 나중에는 아예 서럽게 일그러져 버렸다. 

그리고서는 잠시 침묵. 

당장 입을 열면 듣기 싫은 칭얼거림이나 신음이 흘러나올 것 같아서 서문경은 꾹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 문득 손을 움직여 황제의 목 위를 살그머니 덮은 서문경이 그 때서야 입을 열었다, ‘폐하.’ 황제가 턱 끝만 겨우 움직여 말해 보라는 신호를 보내자 서문경이 물었다.  

“낫는 건가요.”

이 상처들요. 그 말에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하고 황제는 대답했지만 서문경은 황제가 입을 열기 직전에 흘렀던 짧은 침묵을 놓치지 않았다. 물기마저 어려 있던 서문경의 어조가 돌변한 것은 그 때였다. 그가 황제를 비난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황제가 변명했다, ‘짐은.’ 그 말을, 서문경이 중간에서 낚아챘다.

“용이시지요.”

그 말에, 황제가 비틀어진 미소를 지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나온 것이나 다름없는 미소. 자괴감과 의혹이 어지럽게 섞여 있는 그 웃음은, 몹시도 어두웠다. 그 미소가 지금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혀를 대신해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용이라. 확실히 그 비슷한 것이기는 하나, 과연 진실로 그럴까. 

···황제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물론 서문경도 알고 있었다. 지금껏 제국의 용들 중, 황제와 같은 모습과 힘을 가진 황제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의심하는 것이다, 자신이 정말로 ‘제대로 된’ 용인가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그러나 서문경이 생각하기에는···,

하지만 서문경은 생각은 거기에서 멈췄다. 황제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한 탓이다. 

어찌되었건 그러하니 그대는 짐을 염려치 말거라.

“걱정하지 말라고요, 용이니까?”

그래.

그 말을 듣는 순간,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것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라와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것은 분노였다. 그 분노에 굴복한 서문경이 벌컥 고함을 내질렀다. 

“그럼 당장 용인으로 변해 보시든가요!”

그 말에 황제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역시나, 하는 빛이 서문경의 눈을 스쳤다. 바늘처럼 세로로 가늘던 서문경의 동공이 확 가로로 팽창되었다. 서문경이 더더욱 사납게 황제를 몰아붙였다.

“그럴 힘도 없으니까 지금 이러고 있는 것 아닙니까?”

“······.”

“용인으로 변하지도 못하면서 무슨 용입니까?” 

서문경이 황제의 가슴팍을 지그시 누르면서 황제를 향해 상반신을 숙였다. 그러나 어두운 굴 바닥에 드리워진 것은 황제의 희미한 그림자 뿐, 그 위로 몸을 숙이고 있는 서문경의 그림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것을 본 서문경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다시 팽창하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그 움직임에 맞추어 심장이 쿵쿵 뛰었다. 쿵. 다시금 심장이 피를 내뿜은 그 순간 서문경이 내뱉었다. 

“지금 폐하는 그냥 사람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아십니까? 보통 사람은 이런 상태로 하루만 내버려둬도 목숨이 끊어집니다.”

황제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것을, 서문경이 뚫어질듯 노려보았다. 황제가 말했다.

내, 그런 줄은 미처 몰랐구나.

서문경의 이사이로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몰랐다고요? 그런데 왜 이런 짓까지 하면서 저를 살리셨습니까? 몰랐다고요, 아니요, 당신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휘몰아치는 감정이 결국 말보다도 앞서고 말았는지, 서문경이 큰 숨을 한 번 삼키고 잠시 말을 멈췄다. 큰 숨을 삼킨 채로 말을 멈춘 서문경의 모습은 놀라서 잔뜩 몸을 부풀린 고슴도치 같았다. 잠시 후, 서문경이 긴 숨을 천천히 내쉬며 감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더니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런 무리한 일을 벌이셨겠지요. 그러니까 숨기려고 하지 마시고 제대로 대답하십시오. 저는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나를 배제하고 당신 홀로 생각하여 판단하지 말아 달라고. 그 말을 다시금 되뇐 다음 대답하세요, 이 상처들,” 

서문경이 황제의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낫는 겁니까.”

“······.”

“안 죽고 버티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황제가 말했다.

설사 짐이 절명한다 하더라도 그대의 생명에는 어떠한 위해도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서문경 쪽이 말을 잃을 차례였다. 서문경의 침묵을 무엇으로 해석했는지, 황제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대는 짐에 속한 자가 아니니.

“···제 맥이 당신의 것과 일치하는데도요?”

그렇다 하더라도.

“제 온 신경이 당신의 피를, 당신의 힘을 한 방울이라도 놓치지 않고 빨아 먹으려고 도사리고 있는데도요?”

말을 거듭할수록 날카로워지던 말투가, 그 쯤 이르러서는 거의 비난하는 것처럼 변했다. 그 말에 황제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서문경이 홧김에 내뱉었다.

“저는 제가···!”

당신에게 붙어사는 기생충처럼 느껴집니다, 하고 내뱉으려다 서문경이 도중에 말을 멈췄다. 아무리 성이 나도 이 말만큼은 해서는 안 된다는 예감이 든 탓이다. ‘제가.’하고 서문경이 자신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금 전과는 어조가 완전히 달랐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난감해하는 듯한 투였다. 

“저는···.”

심장이 가슴이 아니라 머릿속에 든 것처럼 귓가가 쿵쿵 울렸다. 저는, 하고 또 같은 말을 반복하는 서문경의 머릿속에 새빨간 불빛이 번뜩거렸다. 하지 마. 그 말만은 하지 말자. 그 말만큼은, 나를 부정하는 말만큼은. 

그것은 서문경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공포감이 어린 서문경의 시선이 흘깃 황제를 훔쳐보았다. 지금의 황제에게는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 그것은 예감 따위의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전.” 서문경이 머뭇거리다 원래의 화제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 답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폐하께서···, 당신이···.”

더듬거리며 말하던 서문경이 어느 순간, 완전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멍한 눈으로 가만히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아직까지는 눈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황제가 마치 앞이 보이는 사람처럼 머리를 조금 들어 서문경과 시선을 마주는 시늉을 해왔다. 

그런 황제를 아무런 말도 없이 한참 동안 쳐다보고만 있던 서문경이, 문득 충동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이···.’

하고 중얼거리면서 깨달았다.

“···죽지 마세요.”

“······.”

“다치지도···,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상하게 말하면서 눈 안쪽이 뜨거워졌다. 서문경은 발개진 눈시울을 꾹 손으로 짓눌렀다. 눈가가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을 꿰뚫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황제의 손이 서문경의 얼굴로 올라와 눈가를 쓰다듬었다. 서늘한 손의 감촉에 따갑도록 타오르던 눈가가 편안해졌다. 서문경은 천천히 몸을 숙여 황제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서문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제 말에 확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야 말로 속이려고 하시지도 마시고, 또 애초에 포기하지도, 마시고, ···제가 원하는 답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물음이 또다시 황제에게 던져졌다.

“그 상처, 나을 수 있는 겁니까? 사실 수 있는 겁니까?”

잠시의 침묵 후에 황제가 대답했다.

용인으로 변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회복된다면.

서문경이 다시 물었다.

“이렇게 쉬고 계신 것만으로도 힘을 회복하실 수 있나요?”

그 물음에 나지막한 웃음이 터졌다. 황제였다. 

네가 이미 말하지 않았더냐. 

서문경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황제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불가능하겠지. 

서문경은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 폐하는 그냥 사람입니다.’ 황제를 비난하기 위해 자신이 했었던 말이 칼날이 되어 돌아와, 가슴 한 중앙에 콱하고 박혔다. 그 순간, 황제가 선고를 내리듯 말했다.

그러니 하늘에 모든 것을 맡겨야겠지. 

그리고, 황제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미소인지 비아냥거림인지 모를 애매한 표정이었다.

허나, 지금껏 하늘이 짐의 편이 되어 준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

황제가 말을 이었다, ‘아마도, 이번에도-,’

그러나 황제는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황제 쪽을 응시하고 있던 서문경이 어느 순간 북, 이를 갈더니 황제의 말을 가로막은 탓이었다. 서문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돌아오는 것은 침묵. 부정의 뜻. 허나 서문경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하는 말이 서문경의 입 속으로 묻혔다. 그와 동시에 훅 피 냄새가 퍼졌다. 그 냄새를 맡고 당혹감에 무심코 벌어진 황제의 입 속으로 서문경의 손가락이 침범해 들어갔다. 서문경의 손이 움직인 자리에 몇 방울의 피가 떨어져 있었다.

혀끝에 닿은 익숙한 피 맛에 황제가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서문경이 억지로 버티며 황제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쳤지만 그 때는 이마 황제가 입 안에 든 서문경의 손을 떨쳐낸 뒤였다. 황제의 입술이 움직였다.

“무슨 짓이더냐, 피가···!”

하던 황제의 말이 중간에 멈췄다. 

목소리.

성대가 베여 나오지 않던 목소리가 굴 안을 쩌렁쩌렁하게 흔들었다. 황제의 몸 위에서 서문경이 한 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가 말했다.

“역시.”

“······.”

“되돌려 주면 되는 거였군요, 폐하께서 제게 하신 방식 그대로.”

“경아.”

“아니요,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서문경의 목소리가 황제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렇게 말하는 서문경의 어조는 벨 듯이 단호했고, 그 목소리는 기름이 끓는 듯 노여움으로 들끓고 있었다. 서문경이 말을 이었다. 

“하늘에 맡긴다고요? 틀렸습니다.”

피가 흐리는 서문경의 손가락이 황제의 이마를 쓸었다. 해쓱한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은 사나운 목소리와는 달리 다정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당신은 인간이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폐하께서는 용이십니다. 그러니 당신은 하늘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배해야 하는 겁니다.”

서문경의 날카로운 이가 자신의 입술을 찢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 다음 말은 맞닿은 입술 사이에 묻혔다. 서문경의 말이 피와 함께 얽히는 혀 사이로 감겨들었다.

당신은 무조건 살아남을 겁니다. 

서문경의 눈이 웃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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