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황태후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합니다.”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보고한 이가 그 뒤에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허나 방비가 어찌나 철저한지 도저히 그 안의 상황을 살필 수는···.’ 모란수를 놓은 팔 받침에 몸을 기대다시피 하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내가 불현듯 중얼거렸다.
“기가 막히누먼.”
멍청한 줄은 이미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지독스레 머리가 나쁠 줄이야. 비웃는 말의 내용과는 달리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높낮이 변화 하나 없었다. 그 말이 혹여 자신에게 향하는 것인지 괜스레 움츠러든 이에게 사내가 한 손을 대충 저었다, ‘자네를 탓하는 것이 아니야.’
지금껏 보고를 올리던 이보다 약간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또 다른 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여 태황태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사내가 무어 그리 당연한 것을 묻고 그러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걔 중 누군가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저 비웃고 말 일이 아니라 사료됩니다. 태황태후 사람 자체는 그리 경계할 만한 인물이 아니나, 태황태후라는 자리는 결코 우습게 볼만한 자리가 아니옵니다.”
“그것은 그렇지.” 뜻밖에도 사내가 선선히 수긍했다. “누가 뭐래도 현재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이 아닌가. 더구나 그 황고 엄충의 누이이니.”
엄충의 이름이 나오자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선제 가연제 때 황권이 그토록 약했던 것은 가연제가 용황제가 아닌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크게 작용한 원인은 황제의 사이가 틀어진 엄충이 노골적으로 황제를 견제했었던 것이었다.
“그 아둔한 야호(野狐)와 한 핏줄인 것을 믿을 수 없을 만치 교활한 작자란 말이지···.”
“필시 태황태후는 엄충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난감한 말투로 말했다.
“신도 그랬으리라 여기고 태본 엄유에게서 어떻게든 정보를 캐어보려 했었으나···.”
“제 말제(末弟)가 구제도 못하게 입이 가벼운 것은 누구보다도 황고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태본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사내가 푹신한 팔 받침을 검지로 천천히 두드렸다. 그러자 간헐적으로 들리던 둔탁한 소리가 딱 멎었을 즈음, 다시 그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일을 꾸미는 지는 뻔할 뻔자지. 문제는 엄충 그 놈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끌어 들였느냐 인데….”
사내가 눈길을 주자 방 한 구석에 콕 처박혀 있다시피 하던 남자가 움찔 등을 떨었다. 그 반응만 봐도 일이 어떻게 됐는지 대충은 짐작이 간 탓에, 여기저기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변명하듯 말했다.
“송구합니다. 허나 어르신, 제 휘하의 쓸 만한 아이들은 모두 엄가 본저로 들여보냈으나 아무리 뒤져도 수상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합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다 하던가.”
“예?” 그런 소소한 것을 물을 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지, 질문을 받은 남자가 잠시 당황하다가 곧 제 기억을 이 잡듯이 뒤져서 대답했다.
“태본 엄유가 하루가 멀다 하고 제 지인들을 불러들여 불손한 말을 지껄여대는 것과, 엄유의 독남이 휴일을 얻어 밖으로 나돌고 있다 합니다만 엄충 자체는 그다지···.”
“이상하군.”
사내가 불쑥 내뱉었다. 그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남자가, 아차 싶었던지 말까지 더듬으며 말했다.
“태본을 조금 더 눈여겨보도록 할까요, 어르신.”
“그 모자란 놈에게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허, 허나 어르신, 아까는,”
“이상하지 않은가, 자네는?” 팔 받침에 팔꿈치를 받치고 있던 사내가 손등 위에 비스듬히 턱을 괴면서 중얼거렸다.
“황고 그 놈이 선제 시절에 얼마나 선황제 폐하께 멸시적인 태도를 보였던가.”
잠시 사내의 말이 끊겼다. 손등 위에 가볍게 턱을 괴고 있는 그의 눈이 스르륵 접히는 소리라도 날듯이 천천히 가늘어진다. 눈치 빠른 이 몇몇이 몸을 움츠렸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일순 방 안의 온도가 몇 도는 족히 내려간 듯했다.
사내가 머리를 들었다. 방 안에 감돌던 냉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입을 연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옅은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헌데 당금 황제께서는 천하에 둘도 없는 효자이시지. 그러니 황고 놈이 지금쯤 얼마나 창자가 꼬이겠냔 말이야.”
지금의 황제가 효자였단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으나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가 사내의 비위를 맞춰 주려는 듯이 간사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주 똥줄이 타겠지요.”
“그러겠지.” 사내가 부드럽게 말을 받아 주고는, 방금 말한 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는 그에게 사내가 물었다. “그럼 알겠군, 내가 무엇을 이상타 여겼는지 알겠는가.”
“······.”
“어려워하지 말고 대답해 보게나.”
그러나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사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방 안의 사람들을 죽 훑어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치기도 전에 황급히 머리를 숙이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은 다음, 후자의 사람들 중 하나에게 턱 끝을 조금 끄덕여 보였다.
“상황이 이런데도 행동이 평소와 다름이 없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렇지. 황고 그 작자가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고 납작 엎드려 있을 종자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 자네가 황고 같은 상황이라면 어찌하겠나?”
“사람을 모으겠습니다.”
“어떤 사람을?”
이번에는 조금 사이를 둔 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먼저···, 병권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병권!”
곳곳에서 경악의 외침이 터졌다. 그러자 비로소 기다렸던 말이 나왔다는 태도로 사내가 시원스레 명령을 내렸다.
“응양군 상장군 교혁경과 용호군 상장군 진공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하라.”
“호, 혹시.” 허둥지둥 누군가가 말했다. “혹시 황고의 질자가 고가하여 부산스레 움직이는 것이, 그 때문인 것이 아닙니까? 그 자는 용호군 중장랑 소속의 장수이니,”
“그 반대겠지. 그 아이는 지독스레 고지식한 성격이니, 그 놈이 없는 틈을 타 손을 쓰는 것이 유리하여 그리 되었겠지.”
엄헌영에 대한 의혹을 일축한 사내가 손을 휘 저었다. 이만 모임을 파하겠다는 뜻이었다. 사내의 손이 움직이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우르르 썰물처럼 밀려 나갔다. 방 앞에 걸려 있던 등불에 얼핏 비친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고관대작의 옷차림이 아니라 범부들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힐끗 보고 사내가 끌끌 혀를 찼다.
“저 꼴들 하고는.”
“그래도 노력이 가상치 않습니까.”
방 안에는 이제 사내외에는 아무도 없는데도, 사내의 중얼거림에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사내는 놀란 기색 하나도 보이지 않고 매끄럽게 대꾸했다, ‘머리도 저 모양인 것들이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그냥 죽어야지.’ 그 말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열려 있던 장지문이 닫혔다.
“듣자 하니 꽤나 고생하시는 듯 하였습니다만.”
문을 닫은 이가 비로소 몸을 돌려 사내의 앞에 예를 표했다, ‘염락 조원 들었습니다, 어르신.’ 그 말에 서엽이 새삼스런 짓거리도 다 한다는 듯이 이맛살을 약간 구겼다. 방 안에 들지만 않았을 뿐이지 오가는 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놓고는 사람 참. 서엽의 핀잔에 조원이 가벼운 웃음으로 답하고는, 아까 하던 말을 이었다.
“헌데 그리 건성으로 임하시어도 괜찮으십니까?”
“건성?” 서엽이 의아하다는 듯 반문했다. “내가 언제 건성으로 임하였던가? 쳐낼 자와 안고 갈만큼의 가치가 있는 자를 모두 가려내었네만.”
“······.”
서엽의 말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조원이 미간을 가만히 찌푸리고 있는데 서엽이 ‘주강.’하고 자신의 제일가는 심복을 불러 그에게 일렀다.
“지금 내가 부르는 이름을 잘 듣고 기억하도록 하라.”
그리고 서엽의 입에서 줄줄 열도 넘는 사람들의 이름이 줄줄 흘러나왔다. 조원의 눈이 커졌다. 서엽이 말하는 이름이, 방금 전 이 방에서 앉아 있던 사람들 중 일부의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사람의 이름을 부른 후 잠시 입을 닫았던 서엽이 조금 뒤 물었다, ‘모두 기억 하였더냐?’ 주강이 머리를 조아리며 그 특유의 건조한 목소리로 서엽이 말했던 이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읊었다. 서엽이 만족스러운 듯 머리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자택으로 돌아가기 전에 숨통을 끊어 놓도록 해라.”
“!”
그 말에 조원은 깜짝 놀라 일순 숨을 멈추었건만, 정작 그 명령을 들은 주강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서엽에게 예를 올린 다음 뒷걸음질 쳐 모습을 감추었다. 놀란 조원의 얼굴을 보고 서엽이 별스러운 일도 다 본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도 들었을 텐데. 입은 가볍고 머리는 빈 자들이니 끌어안고 있어봐야 해밖에 되지 않을 사람들이야. 차라리 처음부터 발을 들이지 않았다면 모를까, 중요한 사안도 제법 알게 되었으니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편이 낫겠지.”
“의심을 사지 않겠습니까?”
“의심? 그럴 리가 있는가. 다들 태황태후측 사람들이 손을 썼다고 생각할 것이네.”
위험요소는 뿌리를 뽑고 결속력은 다질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로군. 장난스럽게 덧붙이면서 서엽이 웃었다. 그 웃음에 조원 또한 웃음으로 답했으나,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가슴 속은 싸늘하게 식었다.
서엽이 말했다.
“더구나 내게는 밝은 눈이 있으니 굳이 어두운 눈을 빌려야 할 필요는 없지.”
그 말에 조원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퍼뜩 알아차렸다.
“용호군 상장군 진공이 광록훈(光祿勳) 기문 소훈에게 접촉하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광록훈이라···.”
광록훈이란 나라의 제사, 조회, 연향 따위를 맡아보는 벼슬로 궁중의 모든 제관(祭官)을 감독하고 통솔하는 관리였다. 이번 천제사에는 서엽이 직접 관여하여 제명첩(祭名帖)을 작성하였으므로 광록훈 쪽 사람이 아닌 서엽 쪽의 사람으로 집사관(執事官)부터 배제관(陪祭官)까지 채워져 있었으나, 그래도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인 이상 아예 광록훈의 손길이 닿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관이 제사 전날 재소(齋所)에서 밤을 지내는 절차인 재숙(齋宿)이나 제관이 사흘 동안 몸을 깨끗이 하고 삼기는 행위인 치재(致齋) 따위의 자질구레한 행위는 모두 광록훈의 손아래서 이루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찌 할까요, 어르신.”
다시 주강을 데려올까요, 하는 뜻으로 조원이 묻자, 뜻밖에도 서엽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되었네.”
“허나, 어르신. 광록훈이 태황태후측으로 넘어가면 일이 귀찮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건성으로 답한 서엽이 한 술 더 떠 태황태후를 칭찬하는 말까지 했다. “모처럼 그 할멈이 쓸 만한 생각을 해냈군. 물론 다른 사람이 조언을 해 주었겠지만. 그래···, 용호군과 응양군, 두 황궁 친위군과 천제사에 힘을 쓸 수 있는 광록훈이라.”
그렇게 중얼거리고 홀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서엽이 잠시 후, 조원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수고했네.”
그러고서 바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보니, 용건은 모두 끝났다는 식이었다. 문득 가슴이 답답해져서 조원은 눈썹을 찌푸렸다.
친위군과 광록훈 모두가 태황태후측으로 넘어갔다. 더구나 태황태후측에 가담한 이들은 절대로 이들만이 아닐 것이다. 서엽이 이미 금위군과 술학궁 술사들을 장악하고 개인적으로 길러낸 수많은 사병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금위군은 막강한 힘을 가진 집단이지만 상대인 응양군과 용호군, 이 이군(二軍) 또한 금위군에 충분히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무력 집단이면서 오히려 그 수는 금위군보다 훨씬 앞서고 있었다. 술학궁 술사들이 서엽 측에 가담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지만 창혜각 천객들이 있는 이상 그것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더구나 조원이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르신, 혹여 태황태후가 벌이는 짓을 모두 파악하고 계시면서도 일부러 그들을 풀어주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그 말에 서엽은 입술로만 웃었다.
“무어, 그 치들에게 한 순간이라도 기대를 품게 해주는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
그리고 서엽이 바람도 없는데 아른아른 흔들리고 있는 등잔불에 시선을 던졌다. 붉은 등잔불 끄트머리에서 거무스름한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오른다. 가물가물하는 불빛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 치들이 무슨 수를 써도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
사람 참 답답하기는, 하고 가볍게 말한 서엽이 자신의 눈가를 툭툭 몇 번 두드렸다.
“나는 눈이 밝다고.”
“······.”
“현이는 천제사가 끝날 때까지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운현궁에서 무슨 짓을 하건, 아무 소용이 없지.”
마치 서현의 목숨줄을 신이 아닌 자신이 쥐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말투였다. 그 신처럼 오만한 말투에 일순 말문이 막혔던 조원은, 잠시 후에 조용히 반박하였다.
“허나 천제사 당일까지 상국이 깨어나지 못하신다 해도, 제사만 막으면 얼마든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그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선택지가 두 개인 것이 문제라면, 나머지 하나를 없애 버리면 그만이지.”
꿀꺽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뒷머리가 선뜩했다. 그러자 조원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서엽이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무슨 무서운 생각을 하기에 표정이 그렇게 되는 것인가, 자네.’
“아무리 그래도 내 핏줄을 내 손으로 없애려고 할까.”
“그럼···.”
“글쎄.”
애매모호한 말로 대꾸한 서엽이, 그 웃음만큼이나 애매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가 조원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저럴 때의 서엽에게는 무엇을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은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여러 번 겪어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대신 조원이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그러하나, ···다른 문제도 있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라?”
“제사를 올릴 장본인이 제사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서엽이 멈칫했다가, 조원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그가 칭찬인지 비난인지 경계가 모호한 말을 건넸다, ‘자네는 참 용하군.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어디선가 들어서 와 주니 나로서는 편한 일이야.’ 일부러 황제에 얽힌 자세한 상황을 말해 주지 않았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말에 언짢은 기분이 들만도 하건만 조원은 티내지 않고 대답했다.
“어쩌면 황상께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실 수 있다 들었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 용인으로서는 처음 지내는 가변례이니.”
“그럼, 저희는 어찌합니까.”
“글쎄···.”
서엽이 그 답지 않게 명확하지 못한 투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하네만···, 어찌 될지는 내 알 수가 없지.” 마치 혼잣말처럼 입 속으로 중얼거리던 서엽이, 다음 순간 어조를 달리하여 쾌활하게 내뱉었다. “허나 그 또한 염려할 것 없어.”
“그 때는 체제공을 제단에 올리면 되는 일이니 말입니까?”
그 말에 서엽은 씩 시원스런 웃음을 지었다, ‘나는 자네가 눈치가 빠른 점이 마음에 든다네.’ 그러나 조원의 표정은 칭찬을 들어도 썩 밝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서현을 제단을 올려 천제사를 지내면 새로운 용황제가 탄생하고 제국은 반석(盤石)에 오르겠지만, 정작 서엽 자신은? 제 아무리 그가 서현의 친부라 하나, 그가 서현에게 저지른 짓이 있는데 서현이 제좌에 오르면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광영을 계속 누릴 수 있을 것이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서엽은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조원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늘 서엽과 한 공간에 있을 때면 생각하는 것이었지만, 그 주변에 있으면 불빛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칠흑 속에 갇혀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막바지.
천제사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이틀이었다.
*
경혜현주의 추측은 옳았다. 초윤이 준 자료에 이름이 나와 있던 석공들은 모두가 자신의 집이나 작업장에서 솜씨는 좋으나 성격이 몹시 변덕스럽고 불뚝성을 자주 내기로 소문이 난 자들이었다. 경혜현주와 엄헌영이 석공들의 식솔들을 찾아가 석공의 이름을 꺼내자, 사람은 달라도 식솔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약간의 걱정과 대부분의 탈력감이 섞인 표정으로 경혜나 엄헌영의 얼굴을 힐끗 한 번 보고는, 이리 말하는 것이었다.
“찾았나요? 그래, 이번에는 어디서 계집질을 하고 있답니까?”
여기서 계집질을 사람에 따라 노름질로 바꾸어도 무방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집에서 나온 늙수그레한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의 경우처럼 눈앞의 경혜나 엄헌영이 제 서방이라도 되는 것 마냥 그리 퉁명스레 내뱉고는, 여인이 묻지도 않은 하소연을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그 빌어먹을 작자가 지금까지 기루(妓樓)에 처박은 돈이 얼마가 넘는다는 둥, 그 돈을 창기 년 치마폭에 납죽 가져다 바치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초가집에 살고 있지는 않았을 거라는 둥, 또 언제는 그 인간이 아랫도리 간수를 제대로 못해서 어린 계집애가 부른 배를 안고 이 집을 찾아온 적도 있었다는 둥. 그 하소연이 아무리 기다려도 도통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엄헌영이 끼어들어 말을 끊으려 했는데, 그런 엄헌영을 경혜가 막았다. 조금 더 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어이구, 내 신세야. 그 계집애가 집을 찾아온 것이 얼마 전의 일인데, 그 미친놈이 어떻게든 일을 해결해 볼 생각은 하지도 않고 휑하니 사라져 버렸지 뭐요. 이러니 내가 살 수가 있나.”
“사라지셨다고요?”
“그렇다니까!” 경혜의 대꾸에 왜인지 더 힘이 솟은 듯한 여인이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곧 큰돈이 들어올 데가 있다고 큰소리 떵떵 치더니, 어디론가 꽁무니를 감춰 버렸지 뭐요!”
엄헌영은 귀가 번뜩 트이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들렀던 집에서는 석공들이 가족들에게조차도 일언반사(一言半辭) 없이 모습을 감추어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다른 것 같았다.
그 순간조차도 여인은 계속해서 제 남편의 악행을 떠벌리고 있었다.
“큰돈은 무슨···. 고작 돌쟁이 일에 그런 큰돈을 줄 만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다 잔소리 듣기 싫어서 둘러댄 게지. 내가 미쳤었지. 어떻게 그딴 말에 속아 넘어갔나 몰라. 그 가당찮지도 않은 말에. 내가 요즘 아주 죽겠어요. 일 저지른 서방 새끼는 집 나가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남편 놈하고 붙어먹은 계집년은 제 집이랍시고 떡하니 안방에 눌러앉아 있으니.”
그 때였다. 반쯤 열린 창문에서 여인보다 스무 해는 어려 보이는 젊은 처녀가 빼꼼히 눈만 내밀더니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어요, 형님.”
여인이 뒤를 휙 돌아보고 입에서 불을 뿜었다.
“어디서 형님이야, 형님이! 에라, 이 미친년아,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니? 정신 좀 차려라, 그 놈이 한 말은 다 헛소리야! 개소리라고! 내가 당장 니 년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조리돌림을 하고 싶은데 그러지 않는 건 니 년 신세가 나만큼 딱해서야!”
“헛소리라니, 그렇지 않아요!”
여인의 험악한 기세에 처녀는 조금 움츠려 든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용케 울며 달아나지 않고 버텨 서서 따박따박 말대꾸를 해댔다.
“뭘 모르고 계신 건 형님 쪽이죠! 그 이는 거짓말 같은 건 하나도 하시지 않았어요! 모두 참말이라고요!”
“어이구, 그게 참말이라고?” 여인이 빈정거렸다. “참도 참말이겠다. 장충단인지 장춘단인지 하는 신실을 어느 돌은 놈이 그런 인간에게 맡긴다던?”
엄헌영과 경혜의 눈이 동시에 크게 뜨였다. 퍼뜩 상대를 돌아본 엄헌영은, 경혜도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자신 쪽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턱을 끄덕였다.
“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예에?”
갑작스레 던져진 물음에 여인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랬다가 그녀가 다음 순간 더듬더듬 대꾸를 했다.
“그러니까, 언뜻 들어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장춘단인지 장참단인지···.”
“장충단이에요!”
처녀가 끼어들어 소리쳤다. 엄헌영이 돌아보자, 거의 반쯤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있는 처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으리들께서는 아시죠? 장충단이요, 저어기 윤재에 있는 동굴에 있는 신실이요! 역대 폐하들을 모신 그!”
물론 알다마다. 장충단(裝忠壇). 장충단은 제국에 있는 다섯 개의 신실 중, 절의와 충성으로 지극이 용님을 공경하였던 황제들의 위패를 모신 신실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귀에 익숙한 이름을 들었어도 경혜와 엄헌영의 표정은 밝다기보다는 오히려 어리둥절해 보였다.
여전히 처녀애는 신이 나서 외쳐대고 있었다.
“우리 서방님께서 그 신실을 보수하러 가셨다니까요! 참으로 대단하지 않아요? 다른 것도 아니고 신실 보수를 맡으시다니, 이건 예에서 제일가는 석공으로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 아니어요?”
“이런 미친년아, 그럴 리가 없댔잖아! 걸핏하면 일하다가 술이나 처마시고 뒤집어져서 낮잠이나 자대는 놈한테 누가 그 중요한 일을 시켜?”
그 때 잠시, 하고 엄헌영이 끼어들었다. 자신의 편을 들어 주려는 줄 알고 처녀의 얼굴에 확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엄헌영은 처녀 쪽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도리어 여인에게 물었다.
“윤재라고요?”
“윤···, 재요?”
여인이 고개를 갸웃하자 처녀가 답답하단 듯이 고함을 쳤다.
“윤재요! 서방님이 가신 곳 말이에요!”
“들으신 기억이 있습니까?”
여인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윤재, 윤재라. 그러나 결국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장충단에 보수를 하러 간다고 자랑을 늘어놓은 적은 있지만 윤재라는 곳은 들어본 적도 없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처녀애를 힐끗 곁눈질한 후에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애초에 윤재라는 곳에 있는 신실은 없지 않아요? 내가 아무리 무식한 여편네라도 그 정도는 압니다.”
엄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의 말이 맞았다. 분명 장충단이라는 이름의 신실은 있었지만 장충단은 윤재가 아닌 절신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후로도 경혜와 엄헌영은 여인에게 사라진 석공에 대한 이것저것을 물어 보았지만 그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해가 저물 무렵, 여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경혜와 엄헌영은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윤재라···.” 한참을 말없이 걷던 경혜가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중얼거렸다. “비록 쓰는 법은 다르지만 돌려짓기를 윤재라 하기도 했었지. 같은 땅에 해마다 여러 가지 농작물을 바꾸어 심고 가꾸는 것 말이다. 이 해가 콩을 심으면 다음 해에는 보리를 심고···.”
“동첩(童妾)에게 콧대를 세운답시고 헛소리를 지껄인 게지. 귀담아 들을 필요 없어.”
엄헌영이 딱 잘라 대꾸했다. 경혜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럴까.’
“그렇게 따지자면 장충단도 음만 따 와서 뱀단이라고 우길 셈이냐. 뱀을 장충(長蟲)이라고도 한다니.”
“장충단이 있는 곳의 지형이 좀 묘하기는 하지. 헌데 장충단 이야기를 하니 취영당 생각이 나는구나. 그곳이라면 뱀땅이라는 말이 나와도 크게 이상치 않지. 그 분은 그것을 두고 뱀이 아니라 용 모양이라고 하시기는 했으나.”
무심코 그렇게 말한 경혜의 얼굴이, 말을 마친 직후 당혹으로 굳었다.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은 얼굴과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이 자신이 방금 한 짓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엄헌영이 모른 척 넘어가주자, 곧 경혜가 손등으로 눈가를 슥슥 비비며 중얼거렸다.
“이리 너와 둘이서 저자를 쏘다니다 보니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하고 괜히 옛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 모양이다···. 별 헛소리를 다 하곤···.”
잠시, 이런 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처럼 침묵하던 엄헌영이 아예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혹시 석공도 일할 장소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뜬금없는 말에 경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엄헌영의 서투른 배려를 느끼고 머리를 끄덕이며 그에게 장단을 맞춰 주었다.
“하지만 그리 말하면 어딘가 이상해. 제 아무리 많은 돈을 준대도 갈 장소도 모르고서 무작정 일을 하려고 할까···.”
“그만큼 많은 돈을 주면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그만큼 석공들도 수상하게 여길 것 아니냐. 그랬다가는 여기저기에 말이 퍼질 위험이 커질 테고. 나라면 그리하지 않을 것이야.”
경혜가 그렇게 말하자 엄헌영도 할 말이 없어졌다. 조금 전 들렀던 집을 제외하면 그 전까지는 사라진 석공들에 대한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석공들이 그만큼 입을 잘 걸어 잠갔다는 소리였다. 만일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가 보였다면 그들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까 그 부인의 말마따나, 장충단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모르는 이가 드물 것이다.”
“그럼 석공이 부인과 첩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굳이 그럴 필요가 어디 있을까···. 보아하니 그 부인은 제 남편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눈치이던데.”
“반대로 첩은 석공이 호박으로 밥을 만든대도 믿을 것 같았고.”
“무척 요란한 아낙이었어.”
석공의 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 처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새삼 귀에 울리는 기분이 드는지 엄헌영이 이마를 찌푸리며 귓구멍을 탁탁 쳤다. 그 모습을 보며 경혜가 작게 웃었다. 그 웃는 모양이나 웃음소리 따위가 유쾌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허탈한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허탕을 치게 되어서 힘이 빠진 모양이었다.
점점 덩치를 불리는 검보랏빛 땅거미 위를 밟고 걸어가던 경혜가 불현듯 중얼거렸다.
“이를 어찌할까···. 시간이 없는데···.”
“걱정할 것 없다.”
무뚝뚝한 엄헌영의 목소리가 경혜의 말을 잘랐다. 무심결에 그 쪽을 바라보자 엄헌영이 마치 노려보는 듯한 눈초리로 앞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여차하면 내가 희를 납치 해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숨어 버릴 테니.”
“그것이 뭐야.”
어이가 없는 말에 경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엄헌영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헛소리가 아니라니까. 희 그 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아니냐.’ 그 말에 경혜도 하는 수 없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것 참 묘안이로구나.’
하지만 분위기가 가벼워졌던 것도 잠시, 엄헌영과 경혜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다물었다. 검보라색 땅거미가 점점 색이 짙어지더니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완전한 흑빛으로 변해버렸다. 공기가 더 무거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날이 밝았다.
날이 밝자 경혜현주는 태황태후를 배알한다는 명목으로 운현궁을 찾았다.
계하의 길지(吉地)에는 천제사를 지낼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다.
사흘 동안의 치재(致齋)를 마친 제관들이 제사 전 관례인 재숙(齋宿)를 치르기 위해 재소(齋所)에 입실하였다.
동제도감에 배치된 침방궁인들이 제관들이 신을 제화(祭靴)와 머리에 쓸 제관(祭冠), 안에 받쳐 입을 백삼(白衫)과 그 위에 갖추어 입을 흑삼(黑衫) 등을 바지런히 재소로 옮겼다.
응양군 상장군 교혁경과 용호군 상장군 진공은 군에 속한 모든 장수들에게 재장(齋場)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집합하여 재장 경비를 탄탄히 할 것을 하명했다.
그 날 용호군 중장랑 1령 장군 엄헌영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 날 헌의공 서엽은 거처인 영로당에서 단 한 번도 출외하지 않았다.
그리고 체제공 서엽은 깨어나지 않았다.
황제 또한 둥지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날이 저물고 다음 날이 밝았다.
천제사(天祭祀)일이었다.
농중조: 下
모후(母后)는 박지(薄紙)로 만든 팔랑개비 같은 사람이었다. 가느다란 바람에도 늘 진지러지며 떠셨다.
제 발로 따박따박 걷고 제 입으로 또박또박 말할 수 있을 만치 자랐을 때까지 모후를 곁에 두고 보았으나 지금 황제는 그녀를 뇌리에 떠올릴 때면 단 두 가지 모습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하나는 반쯤 어깨를 돌리고 앉은 모후가 머리를 아래로 꼬고 앉은 모습, 열두 폭 남스란치마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직금(織金) 물린 넓은 소맷자락이 구름처럼 흰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굳이 그 창백한 옥안이 눈물에 젖어 있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모로 돌아 앉아 있는 모습이 찬바람에 머리가 꺾인 소국(小菊)마냥 가련하고 서러웠다.
언제나 모후께서는, 생모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어린 계친자(繼親子)의 더운 몸을 끌어안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계시었다. 때로는 지엄하신 국모의 위엄조차도 잊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셨다.
허나 그럴 때조차도 그녀의 울음은 통곡이 아니라 억눌린 흐느낌에 불과했다. 그 한 서린 흐느낌은, 모후의 눈에서 목에서 흘러나와 그의 가슴 속 웅덩이에 맺힌 듯했다. 그 분께서 덧없이 가신 후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떠올리면 이리도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보면.
농중조 ···그러다 이따금은 그 분으로부터 흘러나와 자신에게 맺힌 것이 그 분의 한(恨)뿐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곤 했다. 그 분께서 그토록 부황을 애모하시던 마음이, 그 분의 가슴에 안겨 있던 사이에 자신에게 스며든 것이 아닐까. 습기를 머금은 천에서 그 색이 묻어 나오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 분의 마음이 자신에게도 묻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까닭으로 자신이 그토록 그 분을 은애할 수 있었을까. 자신 쪽으로는 늘 증질(憎嫉)에 찬 눈빛 밖에 던지지 않는 분을 상대로.
-아가야, 너만은.
그런 날은 흔히 있는 날은 아니었다. 늘 염탐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살피는 지밀들의 눈이 닿지 않는 유일한 때, ‘그 사람’이 어여쁜 여인을 데리고 꽃등을 밝힌 안전 안으로 사라지는 그런 날 밤이면 그 사람은 대부분 내전에 들러 자신의 손을 잡고 안전에 동행하곤 했다. 허나 열 중 한두 번쯤 그 사람이 자신을 데려가지 않는 날이 있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자신은 모후와 함께하곤 했다. 모후께서 손수 바쁜 걸음을 옮겨 자신을 내전까지 데려가곤 했기 때문이었다.
깊디깊은 구중궁궐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내전.
모후께서는 그 내전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방 안 가장 어둡고 어두운 구석을 찾아 민바퀴마냥 처박힌 모후께서는 항상 그 말로 입을 떼곤 하시었다. 아가야. 구중의 극엄한 황자와 황후가 아닌, 여염집 아이와 어머니 사이가 된 것 마냥 자신을 부르는 그 소리를 그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기꺼워하였다. 단 마음에 젖어 반사적으로 따뜻한 품속으로 파고들어 얼굴을 부비면 고운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카락과 통통한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단꿈은 늘 길지 않았다.
콱 아플 정도로 자신의 몸을 부여안은 모후께서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이리 호소하시었다.
-아가, 아가야. 너만은, 너만은 이리 되지 말거라. 너만은 꼭 그 분의 총애를 받아라. 이리 무시당하지도 말고, 이리 뒷방으로 밀려 나 홀로 흐느끼지 말고, 또 이치에 맞지 않는 대우를 받고도 항변 한 마디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지는 말고, 누구보다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돌체그리할 수 있을 것이야. 모후께서는, 그 분과 친 모자 사이가 된 듯한 꿈에 잠겨 있다 억지로 깨어난 자신의 얼떨떨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시며 그리 말씀하시곤 하시었다.
까만 그늘에 잠겨 올려다 본 그 분의 얼굴이 눈물에 젖어 있었는지 그저 흐르는 물처럼 담담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타인 앞에서 스스로를 억누르고 짓밟아 군부로서 합당한 모습을 만들어 내는데 익숙해져 있던 그 분의 가슴을 덮은 무거운 개자(蓋子)가, 금방이라도 넘칠 것처럼 들썩거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감정의 딱지로 단단하게 들러붙어 있던 뚜껑은 열리지 않았으나 들썩거릴 때마다 입을 벌린 개자 사이로 그 분의 감정이 새어나와 그의 가슴과 머리에 사금파리처럼 박혔다.
그것은 갈망(渴望)이었다.
사랑받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잃고 썩어 들어가는 여인의 마음, 모후의 시간은 작고 여리던 소녀시절에 아직도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동백이 지고 노오란 망춘(望春: 개나리)이 흐드러진 신아(新芽: 새싹) 사이로 막 꽃망울을 터뜨릴 때의 이야기.
샛노란 개나리 그늘 아래에서 병아리들이 꾸벅꾸벅 졸던 그런 따스한 봄날, 모후께서는 그의 부군과 백년언약(百年言約)을 맺으셨다. 깊디깊은 구중심처로, 옥 같은 나인들과 늠름한 시위들에게 둘러싸여 꽃가마를 타고 들어오던 소녀는 어여쁜 꿈을 꾸었더랬다. 제 부군이 될 소년과 고운 손 마주잡고 맑은 눈을 마주치고 웃으며 평생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가리라. 돌이켜 보면 어렸던 나이만큼이나 치기 어린 꿈. 구중궁궐에서는 그 소박한 꿈이 천 폭 비단으로 산을 만들고 그 주위를 만 개의 진주로 만든 안개로 두르는 것보다도 더한 사치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녀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개 황자와 그 부인으로서도 그러할 진데···.
일국의 국부(國父)와 국모로서는 오죽이나 할까. 모후는 그리 말씀하시려는 것 같았으나, 그 말은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말하는 그녀 자신도 자신의 말이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탓이리라.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모후께서는 다만 품 안의 아이를 한결 더 힘주어 안으며 그 보드라운 머리카락 사이에 이마를 묻으시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머리껍질에 찬 물기와 더불어 더운 한숨이 내뱉어졌다. 한숨보다는 오히려 탄식에 가까운 그 소리에, 가느다란 속삭임이 섞이는 것을 그는 들었으나 모른 척했다. 제대로 된 말이 제대로 못하고, 한숨도 말소리도 아닌 채 스러지고 마는 그 속삭임은 분명 황제의, 모후께서 그리도 애모하시는 그 분의 이름이었다.
무엇이 저리도 안타까울까.
그리 생각하였던 기억이 생생하였다. 그래, 의아하였다. 사내를 연모하는 여인의 마음이야 그가 영영 알 수가 없는 일이었으나, 채 아물지 못한 머리로도 그는 모후의 애틋한 마음이 의심스럽고 이상하게만 여겨졌다.
하다못해 산을 향하여 큰 소리를 내질러도 산명(山鳴: 메아리)이 돌아오거늘, 부황과 모후의 관계란 그만도 못하지 않는가. 세상 사람들은 부황께서 모후를 더없이 아끼고 사랑한다 말하였으나 그는 알고 있었다. 아니다.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진실로 그러하였다면 어찌 모후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이렇게 말라가실까.
그가 생각하기로, 부황은 바위였다. 지척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모후가 이대로 말라 죽어도 그 분께서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으시리라. 그 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도 몇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후께서는 그 ‘몇몇’에 속하지 않는 이였다.
십 수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바람은 바위를 흔들기 위하여 쉴 새 없이 불었으나 바위는 여전히 굳건하였고 메말라 가는 것은 그저 바람뿐이었다.
-허나 아가야, 너는···.
하지만 바람도 어느 순간에는 깨달았을 것이다. 연모해 마지않는 이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몇몇, 자신이 그 중에 속하지 않는다는 인정하기 힘든 사실과, 그리고 그와 더불어 ‘누가’ 그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지를.
그는 모후의 팔에 더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몸이 옥죄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지만, 평소 같으면 그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고 듣고 놀라 바로 아이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을 모후께서는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러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녀의 더 팔이 단단해졌다. 아가야, 하고 모후께서 속삭이셨다. 망량(??)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묘한 목소리라, 듣는 순간 뒷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아가야, 너만은···.
허나, 그 목소리와 함께 귓전에 퍼부어지는 모후의 숨결은 이상하리만치 달았다. 너무 달아서, 머리가 아플 만치로.
···이상한 기분.
-아가, 너라면 할 수 있단다. 너라면.
어느새 뜨끈하게 달아오른 여인의 품속에서 그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어졌다. 감각이 멀어지고 눈앞이 흔들흔들 춤을 추듯이 흔들리며, 머릿속이 점차로 멍멍해졌다. 열탕에 잠긴 듯한 감각. 그 안에서는 손가락 끝만 까닥이고 입술만 달싹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계속 움직이던 입술과 손가락의 감각은 너무나 멀게 느껴져서 그는 도리어 더욱 더 몽롱해지고 말았다. 자신의 감각이 자신의 것 같지 않아서, 꼭 꼭두각시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달각 달각 달각 달각. 나무 관절이 서로 부딪치는 환청이 저 머얼리서 들려온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모후께서는 비원(悲願)이 담긴 속삭임을 계속해서 그의 귓가에 털어놓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속삭임이라는 온유한 표현보다는 오히려 어서 달려가라 등을 떠미는 부추김에 가까웠다.
장면이 바뀌었다.
여인이 울부짖고 있었다. 눈물에 흠뻑 젖은 그녀의 흰 얼굴은 공포와 절망으로 얼룩져 엉망이 되어 있었다. 어마마마. 작은 심장이 쿵덕쿵덕 터질 것처럼 뛰어, 그가 단풍잎 같은 두 손을 내밀며 그녀를 불렀으나 여인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여전히 앞을 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어째서!
쨍그랑, 도자기 따위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거칠게 장식장 위의 모든 것들을 쓸어버린 여인은, 그의 모후께서는 몹시 낯선 얼굴을 하고 계시었다. 그에게 익숙한 모습, 바로 숨죽인 비탄에 잠겨 있는 그 모습이 아니었다. 비명마저도 한숨과 함께 삼켜 버리곤 하시던 모후께서 노성을 지르셨다, 마치 부황처럼. ‘더군다나.’, 그는 숨을 삼키며 곁눈질을 했다. 검은 아이의 눈에 누군가의 모습이 눈물처럼 맺혔다. 공포로 파르르 상(像)이 흔들렸다. 하필이면 저 무서운 남자 앞에서.
어떻게 해. 모후가 너무도 염려가 되어 그가 어찌할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던 그 때, 놀랍게도 모후께서 다시금 고함을 지르셨다.
-어째서 내게 이러는 건가요?
그 소리가 마치 아픈 짐승이 내지르는 울음소리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나요? 나는 인내심 있는 아내였고, 현숙한 정처였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당신이 꽃 같은 계집아이들을 안전으로 들일 때에도 입술을 깨물고 감내하였고 다른 여인이 그 분의 옆자리로 걸어 들어오는 것도 미운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받아 들였어요! 더구나 나는, 나는!
모후의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모후의 비난을 면전에서 듣는 그 남자의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언뜻 보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 걸려 있는 단정한 얼굴, 하지만 그는 그 얼굴이 무서웠다.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사람의 표정을 흉내 낸 얇은 막을 한 겹 씌워 놓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저 무서운 사내를 상대로 고함을 내지를 만치 이성을 잃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까닭에선지 망설이던 모후가 이윽고 소리쳤다.
-당신의 그 말 때문에 그렇게 무서운 일까지 벌였는데!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후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석녀(石女)가 아닙니다.
아이를, 그 분의 아이를 자신의 배로 낳고 싶었노라고 털어놓으며 모후는, 아니, 여인은 흐느꼈다. 그는 모후를 부르던 것을 그만두었다. 모후에게로 뻗었었던 손도 등 뒤로 감추었다. 낯이 저절로 붉어졌다. 그것은 직감이었다. 자신의 앞에서 울고 있는 여인은 늘 자신에게 다정한 눈길을 보내던 자신의 모후가 아니었다. 분명 모후와 같은 얼굴이지만 낯설었다.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 때 그 남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했다. 남자의 얼굴에 어린 웃음이 일순 짙어지는 것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차고 단단해졌다. 하지만 그것이 보이지도 않는지 여인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어찌 나를 이리 대접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상국 당신께서. 다른 이라면 모를까 당신께서 내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마마.
지금껏 아무런 대답도 없던 남자가 갑자기 말했다. 계속해서 남자에게 대답을 요구했으면서도 정작 남자가 입을 열자 여인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남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여전히 눈은 여인의 뒤를 향한 채로.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남자가 심상한 어조로 덧붙였다, ‘마마께서는 이 나라를 국모십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마마께서는 그 자리에 걸맞는 위엄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 나직한 말 몇 마디에, 미친 듯 울며 날뛰던 여인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남자의 말이 실상은 위협이라는 것을 알아챈 탓이리라. 여인의 하얀 목 중앙이 한 번 꿀렁했다. 농이 아니었다, 저 남자는, 지존에 버금가는 자리인 국부조차 제 손짓 하나로 들었다 다시 놓을 수 있을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 기세 좋게 따지며 고함을 내질렀었냐는 듯 돌변한 여인이 비 맞은 새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저···, 는.
-나는.
남자가 말을 고쳤다. 여인이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남자가 말했다.
-고작 신자(臣子)에게까지 겸손의 미덕을 보이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부디 마마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 마마의 행동 하나하나가 황상의 위엄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옵소서. ···어찌 하시겠나이까.
그것은 지금껏 해온 것처럼 사람 모습을 본뜬 것에 불과한 목상이 되어 모든 생각과 감정을 뱃속으로 삭이며 황후의 자리를 지킬 것이냐, 아니면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곤좌를 잃을 것이냐는 물음이나 다름이 없었다.
대답이 없는 여인에게 남자가 여인이 했었던 말을 언급하면서 재차 재촉했다, ‘이리는 살 수 없다 하시었지요. 너무도 괴로워 속이 썩어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하시었지요.’
불현듯 남자는 웃으며 덧붙였다.
-외람되오나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은 비단 마마뿐만이 아니옵니다.
-······.
···허나, 신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손 치더라도 마마께오서 그리 심신이 고통스럽다 하시오면 신하된 도리로 마마만큼은 어떻게든 손을 써 드릴 수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니, 하고 말을 잇는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져 나중에는 거의 속삭이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 목소리를 따라가기라도 하듯이 남자의 시선도 점점 아래를 향했다. 머리를 숙인 탓에 짙어진 그림자 안에서 파랗게 빛나는 남자의 눈이 똑바로 여인을 향했다. 남자가 방금 전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그러하오니, 마마.’
-하명만 내리시옵소서.
부르르 입술을 떤 여인이 무심코 눈을 내리깔았다. 내리깐 첩모(睫毛)가 해쓱한 얼굴에 푸른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그 다음 순간 여인의 안에서 보이지 않는 문이 몇 겹이나 닫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인은, ‘여인’에서 그가 익히 알고 있던 그의 ‘모후’로 돌아왔다. 모후께서 턱 끝과 머리를 차례로 드셨다. 그와 반대로 그녀의 안에서 모든 자존심과 자존감이 더 깊은 곳으로 꺾이어 들어갔다.
모후께서 말씀하시었다.
-상국 그대의 충정은 내 절명한 뒤에까지 영구히 기억할 것이오.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상국께서는 이만 물러가도 좋소.
-하명에 따르겠나이다.
남자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한 다음, 모후의 뒤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언제나처럼, 모후께서 미리 약속된 말을 읊으셨다.
-이제 어디로 가시는가.
-신은 내전을 나가는 대로 안전으로 향할 것이옵니다.
모후께서 휘청거리는 머리를 가까스로 그를 향해 돌리셨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모후께서는 미처 모르고 계신 모양이지만 이럴 때는 모후는, 금방이라도 저 가느다란 목이 뚝 부러질 것만 같아서 그는 두려웠다. 모후의 눈이 그를 향했다. 그러나 초점이 없는 그녀의 눈은 맺힌 눈물 외의 어떤 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모후께서 말씀하셨다.
-황자.
그를 부르는 소리. 그리나 미리 정해진 말을 읊는데 불과한 그녀의 목소리 안은 텅하니 비어 있었다.
-상국이 폐하를 배알하러 가는 길에 동행하시겠소?
-······!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들어온 말인데도 그 말을 듣는 동시에 눈앞이 새카매졌다. 두려움으로 온 몸이 움츠려들었다. 싫어요. 가기 싫어요. 백치처럼 고개만 절레절레 젓는 것 말고 딱 부러지게 거절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남자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조금씩 남자의 모습이 커질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이윽고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남자가 올려다보며 물었다.
-신과 동행하시겠사옵니까, 마마.
싫어.
-마마.
싫어! 그는 무심코 두 손으로 콱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힘껏 옷자락을 움켜잡은 아이의 손등에서 핏기가 물밀듯 빠져나갔다. 마마, 하고 다시금 재촉하는 목소리에 저절로 어깨가 떨렸지만 그래도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남자에 대한 두려움보다 남자를 따라갔을 때 자신의 앞에 펼쳐질 그 광경이 훨씬 더 두렵고 꺼려졌다. 무어라 대꾸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건만 입술을 비집고 저절로 말이 흘러나왔다.
-···하잖아요.
-무어라 하시었습니까?
그가 하는 말을 미처 듣지 못한 것인지, 남자가 되물었다. 그러나 그 때 이미 그는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콱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부릅뜬 눈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바들바들바들 떨렸다. 가기 싫어. 가기 싫어. 싫어. 거기에 가면, 가면···. 순간 충격으로 머리가 아찔해졌다, 이럴 때 남자를 따라가면 봐야 하는 그 장면이 머릿속을 때린 탓이다.
-싫어요.
보기 싫어.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두 귀를 힘껏 틀어막았다. 그런데도 보이고 들렸다. 그 모습과, 그 소리가.
-징그러워.
징그러워···.
-그럴 때의 그 분은, 지네 같아요.
단편적인 영상이 머릿속에 점멸했다. 물에 불어터진 국숫발 같은 희묽은 나신. 그와 대비되는 딱딱한 몸. 삐쩍 말라 움직일 때마다 덜거덕 덜거덕 뼈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날 것만 같던. 신경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마르고 딱딱한 그 몸은, 알량한 옷 한 자락이 사라진 것뿐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역겹게 느껴졌다. 분명 그 몸 자체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생각이 거기에서 멈췄다. 그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난 탓이었다.
-황자!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알지 못했다. 열기가 두 귀까지 차오르고 계속해서 속이 차올랐다. 허나 이 만시까지 제대로 먹은 것이 없는 탓에 나오는 것은 건구역질뿐이었다. 왝왝 몇 번이고 건구역질을 하던 아이가 결국 탈진하여 풀썩 선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그 앞을 그림자가 막아섰다. 가늘고 흐릿한, 여인의 그림자. 무심결에 아이는 눈을 들었다. 그러나 흔들거리는 모후의 등 뒤에는 그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모후라는 인형을, 뒤에서 손가락질 한 두 번으로 능숙하게 조종하는 덜미쇠처럼.
모후가 말했다.
-그리 말씀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황상께서 하시는 일은, 나아가 결국은 사직을 위한 것. 황자께서는 장차 그 대통을 이으실 분이니 암만 슬희고 심산하시어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 눈에 담아 주세요.
그는 일순 고개를 젓는 것조차 잊고 모후의 얼굴을, 정확히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본 채 굳었다. 까만 눈. 그저 색채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참말로 모든 것이 검고 검었다. 아무 것도 ‘없다’. 의지도 희망도 없이 타인의 손짓 하나로 움직이는 인형이나 기계 따위 같았다.
그러나.
-단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보았다. 잔뜩 검은 구름이 낀 모후의 눈에서 일순간 구름이 걷히며 그 사이로 그녀의 비원이 드러났다.
-그 분께서 벌이시는 일 하나하나를 전부, 황자 당신께서.
그는 읽었다. 다시 모후가 아니라 여인의 표정이 된 그녀가, 그녀의 눈이 똑바로 자신을 향해 들리지 않는 악다구니를 써대고 있었다. 봐. 피하지 말고 봐.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네가’ 보아야만 해.
-가세요, 황자.
그 말과 동시에 다시 구름이 몇 겹의 휘장처럼 닫히고, 여인의 갸름한 눈매 안을 넘친 눈물이 한 방울, 창백한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