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66)

*

운현궁 상궁은 몇 걸음 걷다 뒤를 돌아보고, 또 몇 걸음 걸은 다음 다시 주위를 둘러보기를 반복했다. 뒤돌아보는 상궁의 눈에 의심과 경계의 빛이 팽팽했다. 인적이 드문 길로 들어섰어도 그녀의 경계는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런 노력이 안타깝게도, 범인(凡人)인 그녀로서는 기척을 느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정도의 간자가 지금 그녀의 뒤를 좇고 있었다. 

훌쩍 지붕 위로 올라간 엄헌영이, 또다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는 운현궁 상궁을 말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가 문득 혀를 찼다. 참으로 노력은 가상하다만 저런 행동이 오히려 뭇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그 덕분에 자신이 눈치를 챌 수 있기는 했지만···. 

잠시 생각을 멈추고 엄헌영이 엎드렸던 몸을 조금 일으켰다. 수번이나 주위를 꼼꼼히 살펴보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운현궁 상궁이, 이쯤이면 되었다 싶었던지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한 탓이다. 골목의 어둔 곳만 골라 달음박질 하고 있는 운현궁 상궁에게서 용케도 눈을 떼지 않으면서 엄헌영도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주변을 경계하느라 시간을 지체한 것이 걸리는 것인지 한 시도 쉬지 않고 달리는 운현궁 상궁에게서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헐떡이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런 운현궁 상궁과는 달리, 그녀를 따라 달리는 엄헌영에게서는 거친 숨소리는커녕 작은 발소리조차도 나지 않았다.

도로를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온 운현궁 상궁이, 이제는 골목골목을 골라 몇 번이고 모퉁이를 돌았다. 제가 음지에서만 자라는 이끼나 버섯 따위라도 되는지 아는지, 골목 중에서도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자리만 찾아다니는데 분주하다. 그러기를 십 수 분, 애꿎은 여염집 지붕을 이리 건너고 저리 건너며 그녀를 쫓고 있던 엄헌영의 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한 무더기의 버섯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던 집들이 점점 드문드문해진다 싶더니, 이제 주변은 건너 뛸 지붕도 손에 꼽을 수 있을 만치 집들이 적어져 있었다. 주위를 무심코 훑어본 엄헌영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더 이상 지붕 위에서 운현궁 상궁을 추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낭패감을 느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균?”

엄헌영은 운현궁 상궁이 지금 막 다다른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심지어는 자신도 몇 번이고 와 본 적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 대동 진균은, 바로 궁부 고관(高官)들, 특히 대장군이나 상장군 등 용호군이나 응양군 소속의 고위 무관 저택이 여러 채 들어서 있기로 유명한 장소였다. 

잽싸게 바닥으로 내려온 엄헌영은 운현궁 상궁의 사각지대로 들어가 그녀의 움직임을 살폈다. 어마어마하게 큰 저택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운현궁 상궁이 저택 주변에 ㅁ자로 쳐놓은 담을 따라 그 뒤로 돌아갔다. 엄헌영이 그 뒤를 쫓아 담 뒤로 돌아갔을 때, 운현궁 상궁은 이미 어디론가 모습을 감춘 뒤였지만 엄헌영은 당황하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그녀의 행선지가 어디인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엄헌영은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들었다. 어느새 잿빛으로 물든 하늘 끝에 남빛 처마가 맞물려 있었다. 처마 끝에 매달아 놓은 풍경이 뎅그렁뎅그렁 맑은 소리를 내면서 흔들린다. 그러나 엄헌영의 귀에는 그 소리가 퍽 곱게 들리지 않았다. 엄헌영은 눈살을 구기고 이번에는 앞을 바라보았다. 뿔돌로 높게 쌓아올린 회색 돌담을 끼고 돌아간 한편에 자그마한 출입구가 하나 나 있었다. 저 곳이 어디로 통하는 문인지 엄헌영은 알고 있었다, 비록 저곳으로 출입한 적은 없었지만 저 저택에 두어 번 가량 드나들면서 본 적이 있는 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응양군(鷹揚軍) 상장군(上將軍), 즉, 용호군과 함께 궁성을 수비하는 친위군인 응양군의 으뜸 벼슬이자 무관 전체를 대변하는 대표자나 다름이 없는 반주(班主: 근장상장군) 교혁경의 저택이었다. 

엄헌영의 표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굳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체 운현궁 상궁은 무슨 까닭으로 태황태후와 일말의 사사로운 친분도 없는 근장상장군의 자택을 찾은 것인가. 더군다나 방금 저택 안으로 들어간 상궁은 며칠 전 자신의 백부를 찾은 이와 같은 이였다. 반주와는 달리 자신의 백부는 운현궁 마마의 친정 오라버니이니 운현궁 상궁이 두 사람을 찾은 이유가 일치한다는 보장도 없지만···.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초윤에게 들은, 근래 몇몇 궁부 고관들의 행보가 너무나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초윤에게 들었던 이들 중에는 자신의 백부 엄충 또한 존재했다. 정말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높은 처마와 돌담 어귀에 난 문을 번갈아보며 망설이던 엄헌영은, 그러나 결국 돌담 뿔돌에 손을 올렸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훌쩍 날아올라 드높은 돌담을 넘었다. 

바닥에 내려선 엄헌영의 머릿속에, 작일 밤 자신을 찾아왔던 초윤이 술에 취해 떠벌리던 말이 떠올랐다.

-근래 무슨 친목회(親睦會) 같은 것이라도 생긴 모양이야. 같은 궁부 재관들이지만 이전에는 통 교류가 없었던 분들께서, 요즈음에는 이리저리 서로의 사옥(舍屋)을 드나드시는 것 같더군. 모두들 공사다망(公私多忙)하신 분들이시니 오간(午間)에는 좀처럼 걸음하시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상대를 끌어 내리기 위해서 혈안이 된 이들이 지나다 머리에 날벼락이라도 맞지 않은 이상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평소처럼 바로 핀잔을 주는 대신 잠자코 그가 하는 말만 듣고 있으려니, 뭐라 뭐라 알아들을 수도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제 잔에 술을 채운 초윤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래, 자네가 그것도 알아다 달랬지. 내 혹여 잊어버릴까 적어 왔었는데···.

초윤이 건네 준 선지에는 내로라하는 궁부 고관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또한 그 사이에는 엄헌영의 백부인 엄충의 이름도 있었고, 이 저택의 주인인 반주 교혁경의 이름 또한 있었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엄헌영이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빠르게 주위를 훑다가 별채 서재에 가 꽂혔다. 엄헌영은 민첩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운현궁 궁인을 추적할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신중한 움직임이었다.

지금 엄헌영이 있는 곳은 교혁경의 저택 가장 외진 곳에 있는 별채였다. 그러나, 본채도 안채도 아닌 고작 별채에 불과한 이곳에는 지금 이상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작은 기척 하나도 놓치지 않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신경이나 키나 몸집에 상관없이 근육으로 가득 채워진 단단한 몸, 그리고 예리한 눈빛 등이 그들이 노복 따위의 범부(凡夫)가 아닌 정식으로 무예를 익힌 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엄헌영이 얼굴을 아는 이가 한 명도 없는 것을 보아하니 무과를 치러 임관된 무관들은 아니고 아마 누군가가 비밀리에 육성한 사병(私兵)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병들은 엄헌영이 주목한 바 있는 별채 서재 근처에 가장 많은 수가 배치되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수상한 광경, 엄헌영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욕심을 내어 무작정 서재로 가는 대신 엄헌영은 일단 별채 외곽으로 몸을 숨겼다. 높다란 돌담 근처에 용도를 모를 작은 별당이 지어져 있었다. 슬쩍 살펴보니 예전에는 거주하는 이가 있었을 법도 한 구조였지만, 지금은 그곳에서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했다. 굳이 안까지 들여다보지 않아도 기와며 단청, 현판 따위가 먼지가 한 겹 낀 듯 빛이 바래 있었던 것이다. 엄헌영은 그 별당 기둥 뒤에 잠시 숨어 기회를 엿보았다. 서재와는 꽤 거리가 있는 탓인지 이 근방에서는 사병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서재 근처에서 뭔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별당 근처에 있던 사병들까지 몇몇을 남기고는 서재로 몰려갔다.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또 별채에 손님이 든 것 같았다. 그 손님이 누구일까 생각해 볼 틈도 없이 엄헌영이 잽싸게 몸을 움직여, 홀로 담 근처를 지키고 있던 사병의 뒷목을 가격했다. 불시의 습격에 억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사내가 고꾸라졌다. 아마 그 사내는 일어난 뒤에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엄헌영은 기절한 사내를 질질 별당 뒤로 끌고 가 사내의 옷을 벗긴 후에 기둥에 대충 기대게 했다. 입을 막고 팔다리를 끈으로 결박해 놓을까 생각도 했으나 곧 그만 두기로 했다. 만일 저 사내가 제 스스로 정신을 차리기 전에 사람들이 저 치를 발견했을 때, 사내의 입이 막히고 손발이 묶여 있는 것을 본다면 침입자가 든 것이라 판단하고 급히 계획을 바꿀 수도 있으니 말이다. 

대신 사내의 옆에, 어제 술에 취해 개가 된 초윤이 자신에게 던졌던 빈 술병을 대충 내려놓고서 엄헌영은 사내에게서 벗겨낸 겉옷을 겉에 입었다. 그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만에 하나 사병들에게 모습을 들켰을 때를 대비해서였다. 그리고 엄헌영은 별채 부지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건축물과 관상목 따위에 몸을 숨기고 서재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서재는 동고(棟高: 마루높이)가 높은 유형의 건축물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엄헌영은 서재의 마루 아래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는지 위에서 쿵쿵쿵, 사람이 걷고 문을 여닫는 등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엄헌영은 천천히 기어갔다. 발소리가 향하는 곳을 그대로 따라가면 되는 일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하고 엄헌영은 생각했다. 보기보다 방음이 좋지 못한 건물이었다. 하기는, 그랬으니 이렇게 많은 사병을 서재 근처에 배치해 놓은 것이겠지. 아까 외곽의 별당을 봤을 때도 한 생각이었지만 혹여 이 별당 전체가 평소 잘 관리하지 않았던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듯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의 이목이 비껴 나간 곳일수록 비밀스러운 모임을 가지기에는 좋은 법이니.

“···소이까.”

그 때 엄헌영이 따라가던 발소리가 멈췄다. 엄헌영도 생각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마룻바닥 밑에 바싹 귀를 가져다대자 드르륵 장지문을 미는 소리 끝에 탁, 하고 나무와 나무가 맞부딪쳐 나는 소리가 들렸다. 두런두런 인사말 같은 것이 오가는 소리를 들으며 엄헌영은 온 신경을 귀에 집중시켰다. 누가 이 방 안에 있는 건지, 또 무슨 이유로 이들이 이런 곳에 모여 있는 것인지 알아내야 했다.

누군가 말했다. 목에 가래가 끓는 듯한 걸걸한 목소리의 중년 사내였는데, 엄헌영은 들은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늦으셨소, 백추.”

백추! 엄헌영의 눈이 커졌다. 

“아, 그것이, 오는 길에 소목교에서 사고가 났지 뭡니까. 해서 사람이 어찌나 바글바글 하던지. 이거 면목이 없소이다.”

“또, 또, 또.” 

방금 전 백추에게 면박을 주었던 사내가 짜증스럽다는 듯 내뱉었다. 백추라는 작자가 지각을 하는 것도, 그런 주제에 되지도 않는 변명을 주절대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닌 듯했다. 그 뒤로 백추라는 이가 뭐라 뭐라 변명 비슷한 것을 하는 듯도 했지만 제 입 속으로만 웅얼거리고 있는지 엄헌영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됐소, 하고 걸걸한 목소리가 백추의 말을 가로막고 물었다.

“헌데 상국께서는?”

“그것이···.”

“아직 깨시지 않은 게요?”

백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곳곳에서 한숨이 터졌다. 이래서야, 하며 또 다른 누군가가 혀를 차며 말했다. 서현의 이름이 나오자 바짝 몸을 긴장시키고 있던 엄헌영의 표정이 그 순간 일그러졌다. 방금 그 목소리는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이전에 태보를 지낸, 초윤의 부친 초척이었다. 초척의 말을 누군가가 받아서 말했다, ‘백추 어른, 상국의 상태를 의원에게 보이셨습니까?’ 이번에 말한 이는 초윤의 큰 형님이자, 응양군 소속 장수인 초지경의 목소리였다.

“그리하진 않았네. 의원에게 보여 호전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제대로 된 대답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우물쩍거리던 백추가 초지경의 물음에 대꾸하면서 장지문을 조금 열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질타를 당하니 몸에 열이 올라 그런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또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 물었다, ‘또 올 사람이 있소?’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잔뜩 경계심에 차 있었다. 백추가 대답했다.

“거사(巨事)가 코앞인데, 상국께서 도통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시니 대신 다른 이와 동행하였소.”

“백추!” 얇고 높은 여인의 목소리가 백추를 매섭게 질타했다. “이 무슨 짓거리요! 이것이 백추 그대 혼자만의 일이요? 줄곧 생각해 온 바지만, 혹여 백추께서는 이 사안의 심각함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시오?”

“아니, 그것은 말이 좀 심하지 않소?”

“심한 말이 나오게 하는 사람이 누군지부터 생각해 보시오! 어찌 이럴 수가 있소? 다른 일도 아니고, 멋대로 다른 이를 이 자리에 데려 오다니!”

“아니오, 아니오. 일단 좀 들어 보시오.”

점점 험악해지는 여인의 기세에 풀이 꺾인 백추가 서둘러 여인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백추와 여인이 설왕설래하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인지 발소리는 그간 잠시 멈춰 있었다. 일단 들어 봅시다, 하고 사람들이 성난 여인을 진정시키자마자 백추가 말했다.

“내 상국의 제일가는 심복지인을 데려 왔소이다. 보시오, 우상궁. 자네가 한 말씀 해보시게나.”

잠시 후 나이 지긋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인이 무엇을···. 소인은 그저 이 자리의 분들게 운현궁 마마의 말씀을 전하고, 이 자리에서 오간 말들을 마마께 그대로 전하는 소임을 맡았을 뿐입니다.”

“아니, 그리만 말하지 말고. 자네, 마마의 하명을 받아 서신을 저 이에게 전하지 않았던가? 그 말을 해달라는 게야.”

“예에. 그것은 분명 사실입니다만.”

성격 급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헌데 그것이 어쨌다는 겁니까?”

“아니, 내 말은.” 백추가 설명을 변명 같이 주절거렸다. “그가 상국을 대신하여 발언을 한다든가 하는 일을 무론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상국께서 깨어나시면 제위(諸位)들의 의견을 가감 없이 전해줄 수 있는 최측근이니···.”

횡설수설하고 있는 백추를, 생각 끝에 초지경이 거들었다.

“소인은 나쁠 것은 없다고 봅니다.”

“허나, 상국께서는 당최 깨어나시기나 하시는 것이요?”

누군가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가 폭격을 맞았다. ‘그것을 지금 말이라고!’, ‘해도 되는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구분하시오!’ 하는 둥의 말이, 방금 발언한 이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걔 중에도 꼭 서현은 깨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폭격을 맞은 이가 성이 나서 투덜거렸다.

“충분히 할 수도 있는 말인 것을 왜들 이러시오. 누구 모를 줄 아오? 다들 조금씩은 불안한 것 아니요. 상국께서 깨어나지 않으시면 계획이고 거사고 간에 모두 수포(水泡)로 돌아가는 것이니.”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것은 방 안에 있는 이가 아니었다. 대답은 방 바깥에서 들려왔다. 멈췄었던 발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쿵, 하는 작은 발소리가 문지방을 넘어왔다. 방 밖에 있었던 이가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가 말했다.

“소인 천견 최유, 미천하나마 한 말씀 올리겠나이다.”

“···누가 그대 뜻대로 이곳에 들어도 좋다 했는가.”

천견 최유의 말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엄헌영이 마룻바닥 아래에 숨어 든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연 이였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엄헌영은 덜컥 큰 돌덩이가 떨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얼어붙었다. 그 목소리가 다시금 말했다, ‘물러나게.’ 엄격한 어투와는 달리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별다른 악감정이 서려 있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일을 행하고 말하는 것뿐이라는 듯, 그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흥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높낮이가 거의 없다시피 한 그 목소리는 조금 낮았지만 그다지 굵직하지는 않았다. 그 목소리에서 나이는 추정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엄헌영은 그의 연치를 잘 알고 있었다.

엄충. 그의 백부, 엄충이었다.

그의 명대로 한 발자국 다시 물러선 최유를 향해 엄충이 말했다.

“할 말이 있다면 해보게.”

“그럼 소인이 외람되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상국께서는 꼭 깨어나실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유도 없이 주장만 있어서는 그 누구도 안심 시킬 수 없네.”

“기체 미령하신 것이 아니오라 근간의 일로 잠시 힘이 쇠하신 것이니, 빈곳에 힘이 차오르면 눈을 뜨실 수 있음입니다.”

“근간의 일이라 함은,” 잠시 말이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황제와의 힘겨루기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 함은 사실이로군, 상국께서 그 자와의 힘에 패하셨다는 것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말에 최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유의 반응에는 개의치 않는 듯 엄충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말을 꺼내기 직전, 자조적인 웃음이 짧게 터져 나왔다.

“하기는 무슨 상관이던가. 어느 쪽이 강한 용인이든 우리들이 모실 용황제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엄헌영은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설마, 설마.

“때를 맞추어 현 황제를 폐하고 그 자리에 상국을 모신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엄충이 조용히 덧붙인 말에, 엄헌영은 눈앞이 새까맣게 변하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

신도비 근방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경혜는, 처음에는 엄헌영을 알아보지 못했다. 웬 키 큰 사내가 덩치 값도 하지 못하고 이리 휘청 저리 휘청, 낮술을 먹은 것 마냥 걸어오는 것을 보고 끌끌 혀를 차며 얼굴을 돌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혜, 하며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반색을 하고 돌아보았다가 경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전 자신이 혀를 차며 눈을 돌렸던 사내가 자신의 뒤에 있지 않은가. 더구나 눈을 크게 뜨고 보자, 

“강아!”

줄곧 자신이 기다렸던 얼굴이 아니던가! 경혜가 화들짝 놀라 엄헌영의 두 볼을 감쌌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낯이 붉어질 만치 면박을 주리라는 결심조차 싹 잊게 만들 만치 지금 엄헌영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이, 더 나아가서는 그를 온통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가.

“온 세상천지의 근심을 다 네 어깨에 짊어지고 있대도 믿겠구나.” 그 말에도 대꾸가 없는 엄헌영의 볼을 살살 문지른 후에 경혜는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그 말에 엄헌영이 말로 된 대꾸 대신 그녀에게 손을 한 번 밑을 향해 저었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상대의 대답도 확인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엄헌영의 뒤를 따라가자, 엄헌영은 신도비가 있는 자리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샛길에 다다라서야 겨우 걸음을 멈췄다. 경혜는 의아한 시선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이런 곳은 또 어찌 알고.’ 그러자 마치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엄헌영이 말했다.

“방금 전에 찾은 곳이다.” 그렇게만 말하고 다시 굳게 입을 다무는가 싶었는데, 잠시 후에 그가 다시 씹어 내뱉듯 덧붙였다. “미행을 하면서.”

“미행?”

누구를 말이냐? 경혜가 의아하게 내뱉어 놓고, 바로 질문을 고쳤다, ‘아니, 그것보다는, 그것 때문에 자리를 비운 것이었어?’ 엄헌영이 턱 끝을 조금 끄덕였다.

“무엇을 봤기에?”

“얼마 전에···.”

경혜가 물은 것에는 대답하지 않고 엄헌영이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런 엄헌영의 행동에 경혜는 조금 의아한 기색이었으나, 뜻밖에도 왜 딴 말을 하느냐 따지고 들지 않고 격려하듯 머리만 주억거렸다. 얼마 전에, 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독려하듯 말하는 경혜의 목소리에 고무된 것처럼 엄헌영이 말을 이었다.

“네게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있다. 희와 만났던 새벽, 날이 밝기 전에 그를 찾아가 진의를 물으려 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래···, 일이 조금 있었다 하지 않았더냐.”

경혜가 얼마 되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 한 대답에 엄헌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 그랬지. 맞다. 일.”

“강아···?”

“그 날, 운현궁 상궁이 백부님을 찾아 왔었다.”

운현궁···. 반사적으로 중얼거린 경혜가 다음 순간 숨을 삼켰다.

“혹 운현궁 마마의 명을 받잡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한 그녀가, 곧 아니야, 아닐 것이다,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지, 네 백부님께서는 운현궁 마마의 사가 오라버니이시니 사사로이 서찰을 주고받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그 말을 엄헌영이 딱 잘라 부정했다.

“나도 그리 생각하려 했다. 허나 백부님의 반응이 못내 마음에 걸려 알아보니 사사로운 연락 따위가 아니었다.”

“알아보다니? 혹, 미행이란 것이?”

“네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다 눈에 띄는 이가 있어 살펴보니 그 운현궁 상궁이었다. 그 치의 뒤를 쫓았더니, 그 치가 반주의 저택으로 들어가더군. 또한 반주의 별채 서재에 모여 있는 이는 비단 반주와 운현궁 상궁뿐만이 아니었다. 내 목소리를 확인한 것만 십 수 명이 넘어. 아마도 그 배는 그 자리에 있었겠지.”

덧붙여 엄헌영이 초윤을 시켜 알아본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말을 전해 듣는 경혜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런 경혜에게 엄헌영은 품 안에서 초윤이 주었던 선지를 꺼내 내밀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다 선지 끝을 조심스럽게 잡는 것을 확인하고 엄헌영은 말했다.

“그들은 역적모의를 하고 있었다.”

“역적모의···!”

경혜의 손에서 선지가 떨어졌다. 놀란 나머지 손에서 힘이 빠진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면서도, 엄헌영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일을 주도한 이는 운현궁 마마시겠지. ···어쩌면, 희도.”

“희가?!”

“그들은 제안을 제좌에서 끌어 내리고 그 자리에 희를 앉히려 작심하고 있었다.”

“허, 허나, 허나 희야는. 희, 아니, 그 분께서도 어쩌면 그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지 않으냐. 역적모의는 절반은 제좌를 노리는 이도 가담하여 계획되지만 나머지 절반은 모의를 꾸미는 자들이 멋대로,”

서둘러 변명하는 경혜가 말하는 도중 엄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혜가 창백해진 입술을 약간 벌린 채로 얼어붙었다. 엄헌영은 못을 박았다.

“희의 측근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 목민관 이재와 백추 장경, 상서 이부 재상 사백령, 그리고 창혜각 천객들의 대표격인 천견까지. 이런데 어찌 희가 모를 수도 있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하나···, 운현궁 마마께서 서찰을 보내신 때는 이미 그 분께서 혼절하여 깨어나지 못하신 뒤의 일로···.”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점점 자신의 반박이 스스로도 비루하고도 비겁하다 싶었던 것인지 경혜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바르르 떠는 경혜의 표정은 참담했다.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반, 믿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반이었다. 그것은, 엄헌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만일 네 말이 옳다 해도 그것은 중요치 않아. 역적모의에 가담한 이는 물론, 역적의 무리들에게 새 천자로 입에 오르내린 이 또한 크게 보면 역적일 뿐이다.” 그리고, 하며 엄헌영이 조용히 덧붙였다. “백부님께서 이 일에 가담하시었으니 백부님과 한 집안인 나 또한 극형을 받아 마땅한 역적의 일족에 불과하다.”

엄헌영은 입을 다물었고, 말이 없는 것은 경혜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어쩌다 이런. 그러다 경혜가 불쑥, 입 속으로 한탄하는 말을 중얼거렸으나 그 뿐, 단단해진 침묵은 결코 깨어지지 않았다. 경혜는 발도 닿지 않는 물속에 처박힌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쳐도 도무지 잡고 의지할 만한 뭍이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엄헌영은 지금 절벽 끝에 선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무언가 발버둥을 치려고 하면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기를 한참, 경혜가 입을 열었다. 

“어찌할 것이냐···.”

여전히 괴로움으로 뒤틀린 시선은 바닥을 향한 채였다. 엄헌영이 그녀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모르겠다.”

“허나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가까스로 고개를 든 경혜가 뜻밖의 충격에 무기력증에 빠진 듯한 엄헌영을 설득하려 들었다. “불행 중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있다면,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말이 아니다.”

경혜가 당황하여 내뱉었다, ‘그럼?’ 그 물음에 엄헌영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콱 이를 악물더니, 서슬 퍼런 눈을 하고 번쩍 머리를 들었다. 팍! 엄헌영이 걷어찬 바닥에서 모래가 사나운 기세로 튀었다. 엄헌영은 몹시 사납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것 어느 하나도 담고 있지 않은 눈을 하고서 내뱉었다. 그 목구멍 아래에서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나는 백부님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 아무리 제 마음에 차지 않는 서랑(壻郞: 남의 사위를 높여 이르는 말)의 핏줄이래도, 아무리 경지옥엽(瓊枝玉葉) 곱게 기른 딸을 평생 애행(愛幸)치 않은 황제의 핏줄이래도 그리한 것은 제안이 아니지 않는가!”

예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며 대대로 황제의 충신이었던 엄씨세족이 황제에게서 돌아서게 된 것은 선제인 가연제 때의 일이었다. 그 모든 일의 불씨가 된 것은 가연제와, 가연제의 유일한 후궁이었던 황귀비 엄씨의 불화였다. 정확히 말하면 가연제가 황귀비 엄씨를 대하던 태도가 문제가 되었다. 

가연제와 가연제의 정후인 명의황후는 각각 십 이 세와 십 삼 세 때 부부의 연을 맺은 뒤로 내내 사이가 좋은 부부였으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때문에 가연제가 제좌에 오른 뒤, 가연제의 모후인 황태후 엄씨는 후사를 보기 위해 직접 황제를 찾아 후궁을 들일 것을 종용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었던 가연제는 그 청을 내치지 못하고 후궁을 들였었는데, 그것이 태황태후의 사가 질녀이자 명문 엄씨세족의 고명딸인 귀비 엄씨였다. 그러나 백희궁으로 들어온 귀비 엄씨의 앞날은 순탄치 못했다. 누구 하나 부러울 것 없는 빼어난 자색(姿色)과 재기(才器)를 고루 갖춘 데다, 정후인 황후도 두렵지 않을 든든한 뒷배가 있는 그녀였지만 정작 중요한 황제의 총애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모후의 역성에 못 이겨 몇 번 귀비 엄씨의 처소에 들르기는 했으나, 그 때마다 귀비 엄씨의 침방에는 싸늘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만이 흘렀었다 한다. 

그러다 입궁을 한지 몇 달 후, 귀비 엄씨가 회임을 한 사실이 알려졌다. 단 한 번, 입궁을 했을 때 황제와 가졌던 꽃잠으로 얻은 씨였다. 그렇게 하여 귀비 엄씨는 아이를, 그것도 황위를 이을 황자를 생산하였지만 엄귀비가 황자를 낳은 그 날에도 가연제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 뒤, 산고 내내 심각한 아훈(兒暈)을 겪던 엄귀비는 황자를 생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꽃다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 일이 치명타였다. 지금껏 몇 백 년 동안이나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였던 엄씨가문은, 가문의 주인인 엄충을 필두로 하여 모두가 가연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비록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못하고 뒤에서 쉬쉬하기는 했으나, 대부분이 엄충을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제에 대한 엄충의 실망과 증오가, 가연제의 뒤를 이은 황제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엄헌영이 비통하게 읊조렸다.

“백부님께서 선제 폐하를 사무치게 미워하시는 까닭은 이해한다. 다 피지도 못하고 어린 딸이 그리 가버렸다면 세상 어느 아버지가 그러지 않겠나. 제안의 얼굴을 보면 선황제 폐하가 떠올라 성이 날 수도 있고, 그렇게 간 딸이 생각나 힘이 드실 수도 있지. 그래서 나도 그 뿐이라면, 사람 마음이란 정도(正度)대로만 굴러가는 것이 아니니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라 이해해 보려고 했었다. 그러하나 이것은 아니야. 이것은 아니다. 어찌 이런···.” 어느새 두 주먹을 움켜쥔 엄헌영이 고개를 한 번 힘껏 내저었다. “어떻게 제 사손(獅孫)을 제위에서 끌어 내릴 음모를 꾸밀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이 인두겁을 쓴 이가 할 수 있느냐는 말이야!”

이해할 수가 없다! 엄헌영이 이까지 갈며 사납게 내뱉었다. 그러더니 엄헌영이 다음 순간에는 다시 콱 입을 다물고 초조하게 주변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아무런 말도 없이 지켜보고만 있던 경혜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불렀다, ‘강아.’

“강아.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만, 이러고 있다고 해결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네가 들은 바가 사실이라면 시방은 고작 일각(一刻) 반각(半刻)도 아쉬운 상황이야.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

“해야지.” 엄헌영이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이윽고 엄헌영의 초조한 걸음이 거짓말처럼 딱 멈추고, 그가 경혜를 돌아보았다. 경혜를 쳐다보는 그의 눈에 혼란이 가득했다. “허나, 어떻게?”

잠시 생각한 후에 경혜가 대답했다.

“혹, 그 이들이 말한 거사일이 언제인지는 아느냐?”

엄헌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경혜는 그 정도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일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중차대한 사안을 쉽사리 입에 올릴 리가 없지. 허나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표(指標)가 있지 않으냐.”

“지표?”

“그래, 천제사 말이다.” 경혜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 상념에서 깬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엄헌영을 똑바로 보고 덧붙였다. “천제사가 끝난 후에는 무슨 짓을 해도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일은 분명 그 직전에 일어날 것이다.”

경혜의 말이 옳았다. 천제사가 끝나면 황제는 한낱 용인에서 진짜 용이 되고, 그를 제외한 모든 용인들은 용인으로서의 힘을 잃게 된다. 

경혜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짐작에 불과하다만.”

그녀가 엄헌영에게 손짓을 했다. 엄헌영이 그녀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자, 경혜가 엄헌영의 귀를 잡고 그의 얼굴을 좀 더 자신에게 가깝게 끌어 왔다.

“천제사 전에도 섣불리 일을 벌이지는 못할 것이다.”

“어째서지?”

“역모도 황상이 있고 나서야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더냐?”

엄헌영은 퍼뜩 경혜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이해했다. 

“황상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으니···.”

“그렇다.” 경혜가 착잡한 투로 대답했다. “그러니 모든 일은 황상께서 인세에 돌아오신 후에야 진행될 것이야.”

엄헌영이 대답하지 않은 탓에 대화는 거기에서 또 끊겼다. 다시 무겁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경혜와 엄헌영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모로 돌렸다. 이상하게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차마 말로 내어 하기 어려운 생각이 순간적으로나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탓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황상께서 돌아오시지 않는 편이 모두를 위해서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더구나, 그들은 자신이 한 것과 똑같은 생각을 상대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생각을 한 순간 자신은 일순 솟구쳐 오른 격렬한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낯이 붉어졌으니 상대도 분명 그럴 것이리라.

“···점점 미쳐가는 기분이군.”

양구(良久)에 엄헌영이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까지 낯이 붉어져 있는 그가 의롭지 못한 생각을 떨쳐 내려는 듯이 머리를 털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하는 수 없는 일이야.” 

경혜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엄헌영이 무심코 바라보자, 그녀의 고개가 조금 더 아래로 떨구어졌다. 차마 하늘 아래 머리를 드는 것조차 죄스럽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그 행동과는 별개로 한 번 열린 그녀의 입술은 다시 다물어지지는 않았다.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우리들 넷이 서로 어울려 친 혈육처럼 지냈던 때도 있었다고는 하나 그 또한 과거의 이야기···. 그런 나날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아니하나, 그 빛깔은 얼마든 달라질 수 있음이다···.” 

‘그 일’이 일어났던 때 이후로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너도 나도, 많은 일을 겪었고 많은 이를 만났고, 또 오랫동안 제안과 접하지 못하였으니···, 그 이를 위하는 빛도 많이 흐려졌겠지. 추억은 힘이 세다고들 하나 어디 계속해서 흐르는 세월에 비할 수 있을 손가. 흐르는 시간에 쓸려 자네나 내 마음 속 그 이의 우선순위는 계속해서 뒤로, 항상 뒤로만 밀렸을 것이다. 그러니, 삿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으냐···.”

너도 나도, 결국은 못난 인간에 불과한 것을. 그녀의 탄식이 이상할 정도로 귀에 거슬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헌영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알고 있다. 경혜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제안과 두 마리의 감장강아지처럼 어울려 지냈던 때는 이제는 기억도 까마득한 과거의 일. 문제의 ‘그 일’로 그와 멀어져 지내면서 자신은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많은 일들을 겪었다. 백부의 앞에서는 입바른 소리를 했었으나,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제안은, 황제는 더 이상 엄헌영 자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이가 아니었다. 과거에 박제되어 있는 그의 존재보다는 흐르는 시간을 자신과 함께 하며 두터운 정을 쌓아온 백부나 그의 아버지 쪽이 제안보다 훨씬 더 소중하였다. 

엄헌영은 자신도 모르게 고백했다.

“···차라리 제안이 이대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또한 그렇다.”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엄헌영의 고백에 동의를 표한 경혜가 고소(苦笑)를 흘렸다. “최악의 경우에, 저울대 양 쪽에 각기 다른 사람이 놓여서야 진심이 나오는구나. 더럽다. 어찌 이리 더러운가, 인간이란.”

“인간이 아니라 자네나 내 심성이 더러운 것이지.”

엄헌영의 칼 같은 지적에 경혜의 고소가 더욱더 깊어졌다.

“자네 말이 옳아.” 

잠시 후, 엄헌영의 지적을 인정한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가 화제를 돌렸다. “허나, 강이 너도 알겠지만 ‘그리하고 싶다’와 ‘그리할 것이다’는 다른 말이다. 너와 네 생각은 알겠다. 허면 너는 어찌 할 것이냐?”

자신에게 던져진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엄헌영이 망설이다가, 물음을 경혜에게로 되돌렸다.

“너는?”

“나는.” 

경혜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예정대로 석공들에 대해 알아보러 그들이 살았던 마을로 가 보려고 한다.”

“······!”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상황이 변했으니 생각도 달라진 것이 당연하지···. 허나 아무리 고민해 봐도 내가 할 일은 한 가지 뿐이다. 나는 일단 그 분께서 내게 부탁하신 일을 완수해 내려 한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엄헌영에게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어찌 생각할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나는 아무리 해도 그 분께서 역모를 계획하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희가 제좌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경혜가 한숨에 섞어 말했다, ‘이런 방식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바로 대답해 달라 닦달하지는 않으마. 다만 생각이 굳어지면 내게만은 귀띔해 다오.”

힘을 불어 넣어 주려는 듯이 엄헌영의 등을 한 번 두드린 경혜가 ‘그럼.’하며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기다려.”

기다려라. 엄헌영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경혜가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머리를 저었다, ‘지금은 머리가 많이 복잡할 터이니 무리할 것 없어.’ 그러나 그 말을 듣고도 엄헌영은 계속해서 경혜의 뒤를 따라왔다.

“그렇다 해도 너를 홀로 보낼 수는 없지 않느냐.”

“허나···.”

“네 말이 옳다.”

그 뜬금없는 말에, 지금껏 무슨 말을 해도 뒤돌아보지 않고 있던 경혜가 으응?하며 엄헌영을 돌아보았다. 곧바로 경혜의 얼굴에 아차하는 표정이 어렸다. 돌아본 그녀의 얼굴 전체가 열이 올라 발그스름했고 눈가는 낯빛보다 조금 더 색이 진한 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집스럽게 앞만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엄헌영이 그 얼굴에 대해 말을 할까봐 겁이 났는지 손등을 들어 눈가를 가린 경혜가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말이라니?’ 엄헌영이 경혜의 표정이나 낯빛 같은 것은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아직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 아니냐는 그 말 말이다.”

“그래···, 그런 말을 했었더랬다.” 반사적으로 대꾸한 후 뒤늦게 번뜩인 생각에 경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강아?”

“현재로서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경혜의 추측을 엄헌영이 부정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도 경혜는 배시시 웃었다. 그러면서 ‘잘 생각하였다.’하고 말하는 모습이, 엄헌영이 결국은 무슨 결정을 내릴지 뻔히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럴 셈이면 어서 따라 오라고 눈짓하면서 경혜가 말했다.

“나는 이 일이 끝나는 대로 운현궁에 가 마마를 찾아 뵐 셈이다.”

“운현궁 마마를?”

“그래. 그렇지 않아도 근래 구모님께서 운현궁에 배알을 드리는 것이 어떠냐 재차 재촉을 하시던 참이었다. 그것이 못내 이상타 생각했었는데···.” 

아마 운현궁 상궁들에게서 귀띔을 받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야. 귀가 얇은 분이니 구모님을 깜빡 속아 넘기는 것은 일도 아니었겠지. 경혜가 혼잣말인지 엄헌영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린 다음, 다시 목소리를 원래대로 높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비록 부족한 솜씨이기는 하지만 화공예 때 마마의 예인으로 참석하여 그 분의 체면을 세워 드린 일도 있으니 올해 마마께 차릴 예의는 모두 차렸다 생각하여 치일피일 배알을 미뤄두고 있었는데, 이번에 찾아뵙도록 하여야겠다. 그 분께서는 우리들이 그 분과 그 분의 측근들이 꾸미시는 역적모의를 알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모르실 터이니, 필시 내게서 헌의공 어르신의 정보를 얻으려 하실 게야.”

“하지만 위험하지 않은가?”

그 말에 경혜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위험할지도 모르지. 허나 강아,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길은 이대로 손을 놓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길이다.”

*

괴물이 되었다···.

“···라.”

불쑥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세운 무릎 위에 턱을 비스듬히 괸 채였다. 초점이 흐릿한 눈이 맞모선을 향하고 있다. 

서문경의 발치에 거무스름한 덩어리 같은 것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사위(四圍)가 어두운 탓에 무엇인지조차 바로 알 수가 없는 그것은 잔뜩 구겨진 베자루처럼 보이기도 했고 커다란 말에게서 벗겨낸 가죽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문경이 손가락 하나를 내어 바닥을 슥 한 번 훑었다. 들어 올린 손가락에서 뚝 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물방울 따위가 아니라 피였다. 피가 묻은 손가락을 제 입가와 평행으로 들어 올린 서문경은 혀를 조금 내밀었지만 손가락을 핥지는 않았다. 그러고 있는 사이 손가락에 묻었던 피가 사르륵 소리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문경은 몸속에서 출렁이고 있던 물결 같은 감각이 조금 더 수위(水位)가 높아진 것을 느꼈다. 이유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 황제의 피를 흡수했기 때문이다.

“······.”

두 다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콱, 상아 같은 치아가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서문경은 껴안긴 다리는 물론이요, 세운 다리를 껴안은 팔까지 아려올 정도로 힘주어 다리를 안으며 시선을 더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의 청남빛 눈동자에 어려 있던 희미한 빛조차 그늘에 잠겨 자취를 감추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발밑에 쓰러져 있는 저 검은 그림자가 무엇인지 분간하기는커녕 한치 앞도 볼 수가 없어 당혹하겠지만 서문경은 아니었다. 서문경의 입술을 비집고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치 귀가 있어 그 한숨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어둠 속에서 작은 생물들이 서문경의 몸을 감싸고 빙글빙글 돌았다. 

생물? 아니다. 그것은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둠 그 자체였다. 이곳은 이상하다. 서문경은 생각했다. 이곳에 가득한 어둠은 단순한 색채 따위가 아니었다. 그 어둠에는 감촉과, 밀도와 온도가 느껴졌다. 마치 정말로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전 같으면 무언가 답답하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서문경의 오감은 지금 무서울 정도로 밝고 예민해져 있었다. 후각, 미각, 촉각, 청각. 마지막으로, 시각.

그래, 시각. 지금 서문경에게는 자신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그것은, 황제였다. 

“폐하···.”

불현듯 서문경이 내뱉으며 손을 들어 황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이 아는 그 황제라는 사실을 서문경은 아직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반쯤 용인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상처 때문에 그의 온 몸이 넝마처럼 변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억하고 있지 않느냐고.”

황제가 자신에게 했었던 물음을, 그대로 자신에게 던졌다.

“하고 있지···, 똑똑히.”

알에서 깨어나는 동시에, 알 바깥세상의 찬 공기와 동시에 소름 끼치게 차가운 것들이 자신의 머릿속을 깨부술 듯이 밀려 들어왔다. 원래 자신의 머릿속에 있었으나 완전히 새로운 몸을 구성하기 위하여 잠시 추방되어 있었던 인간으로서의 기록(記錄), 즉, 기억(記憶)이었다. 

막 태어난 머리는 그 수많은 기억을 받아들이기를 버거워했다. 그래서 머리를 감싸 안고 비명을 질렀다. 정말로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서문경은 직감했다.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하여 기억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자신은 영원히 기억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겠지만, 서문경은 싫었다. 이번에는 기억 전부를 통째로 잃게 될 테니 괴롭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싫었다. 그래서 기를 쓰고 버텨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지금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너울파도에 실려 이 세계로 건너왔던 것과, 황제를 처음 만난 순간, 그리고. 지금은 있지도 않은 상처가 욱신거리는 기분이 들어서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대연회에서 벌어진 일들과 그 때 입었던 상처. 또···. 서문경은 잠시 생각을 멈추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무슨 뜻이었을까···.”

그 때, 수상이 자신에게 했던 말은. 

그러나 물어볼 이도 없이 혼자서 고민해 봐야 대답이 나올 리가 없다. 그래서 서문경은 그 생각은 일단 접고 황제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가락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긴 손가락이 그림자에 젖어 다리가 긴 장님거미처럼 움직인다. 이마. 콧대. 콧등과 인중, 입술 아래와 턱. 두 발과 목덜미. 스친 곳마다 피가 묻어 나왔다. 스치듯 조금 묻은 피조차 자신의 피부가 탐욕스럽게 받아 마시는 것이 느껴졌다. 점점 더 몸속의 물높이가 높아진다. 뱃속에서 출렁거리고 있는 이 감각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몸속에 있는 ‘힘’의 높이였다. 아니, 자신은 하늘이 내린 진용(眞龍)들과는 달리 이 ‘힘’을 술력으로 변화시켜 사용할 수는 없으니 그들처럼 ‘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은 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만 서문경은 자신의 피부가 황제의 피를 마실 때마다, 뱃속에서 ‘힘’의 수위가 동요할 때마다 느끼고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를, 자신이 황제에게 속한 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권속(眷屬)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몸이 멋대로 움직이거나, 혹은 그의 생명이 끊기면 자신의 명 또한 다한다는 식은 결코 아니었으나 서문경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자신이 더 이상 하나의 개체로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늘 자신의 신경은 황제의 존재를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선이 자신과 황제를 연결하고 있다. 

인간일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누군가에게 속해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몹시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니···, 사실은 이상한 정도가 아니었다. 황제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은, ···사실은 너무나 역겨웠다.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헛구역질이 나왔다. 그러나 인간과는 달리 완벽에 가까운 용인의 육체는 그런 행위를 허락하지 않았다. 완벽한 육체와 겹쳐지지 못하는 모자란 정신만이 해소될 수 없는 불쾌감을 껴안고 온 몸 안을 하염없이 떠돌았다. 

괜찮아.

어느새 자신이, 인간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된 현실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아직도 꿈속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꿈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아니겠지. 만일 이것이 꿈이라면, 자신은 그 꿈에서 영원히 깨지도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그리 큰 상처를 입었으니, 필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죽는 것은 싫어. 죽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서문경은 이미 한 번 겪은 적이 있는 죽음으로부터의 공포에 새삼 떨고 있는 스스로를 달랬다. 서문경이 아까부터 주문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말을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어쨌든 살았잖아. 뭐가 됐든 간에, 살았으니까···, 그것으로 되었다. 어떤 형태로든 죽는 것보다는 산 것이 나아. 그러니 이것으로 된 거다. 

그러다 서문경은 불쑥 중얼거렸다. 황제에게 하는 말이었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면서까지 나를 살려 주었는데, 이런 배부른 소리나 지껄여 대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용인으로 만드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 정도는. 그리고, 그 힘겨운 과정을 견뎌낼 기력이 없는 자신을 위하여 자신이 입은 상처를 그가 모조리 자신의 몸으로 옮겼다는 사실도.

뚝.

물방울이 하나, 황제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알고 있다고 했잖습니까, 전 거짓말 하지 않았어요.”

용인으로서 탄생한 그 순간, 진용이 가용(假龍)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도, 그것을 위하여 어떤 희생을 치르는 지도 깨닫게 되었다. 

천제사를 지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용인들의 힘을 흡수하여 진짜 용이 된 황제들조차도 그의 배필을 용인으로 만들어내는 데에는 막대한 힘을 소비해야만 했다. 가변례의 모든 의식이 끝나는 것은 사실상 이틀에서 사흘 남짓, 그러나 가변례가 통상 엿샛날 동안이나 계속되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배필의 몸을 용인으로 뒤바꾸어 세상의 탁기(濁氣)로부터 보호하는 알 속에 둔 후에, 용황제들이 죽음과도 같은 잠에 빠지기 때문이다. 용황제들의 몸은 잠을 자는 그 사흗날 동안 세상의 모든 위험에 무방비하게 노출되게 된다. 사실, 용으로서 완벽해진 용황제를 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그 때 뿐이다. 그래서 이화시강원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용황제들조차도 힘겨워하는 가변례를 황제는 용인으로 몸으로 치러냈다. ···목숨을 건 일이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성공으로 끝났지만, 만일 일이 잘못 되었다면 서문경만이 아니라 황제 자신도 숨통이 끊어졌을 지도 모른다.

“당신은···.” 서문경의 눈에서 또 한 방울, 눈물이 넘쳐흘렀다. 

“당신은 왜 그렇게 멍청한 겁니까.”

알에서 깨어나 황제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속에서 검고 비릿한 것들이 울렁거렸다. 그 감정을 토해내기 위해서 다가갔다. 황제가 자신을 살려 주었다는 사실보다도 자신이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먼저 다가왔고, 고마움보다도 먼저 원망이 들었다. 

왜 나를 인간이 아니게 만들었어? 내 동의도 얻지 않고 멋대로? 자신을 살리려면 황제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이성이 그렇게 반박하자, 뱃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그 태산처럼 거대한 악의가 고함을 내질렀다. 그렇게 된 것도 다 저 자 때문이잖아! 저 자가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될 일도 없었어! 그러니까 모두가 저 자의 잘못이야! 모두가!

아마도, 황제의 몰골을 보지만 않았더라도 자신은 그리 외쳐서 황제를 크게 상처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민해진 시선이 그의 모습을 잡아냈다. 미쳐 날뛰던 악의조차도 그 한순간만큼은 숨을 죽였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저게, 뭐지. 

황제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코앞에 있는 저것이 황제가 맞다 말해주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황제라고? 저게? 몽둥이에 맞아 죽은 뒤에 벗겨진 당나귀 가죽 같은 저것이? 그러나 사실이었다. 한 순간 머릿속을 까맣게 점령했던 악의가 가라앉자, 용인으로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얻은 지식이 떠올랐다. 그래서 알았다. 황제가 저런 꼴이 된 것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일단 가라앉기는 했으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악의가 소곤거렸다. 동정할 필요 없어. 저것은 ‘네가’ 입었던 상처야. 저 자는 용인이고 너는 인간이니 너의 고통은 저 자의 두 배, 세 배였었겠지. 그리고 네가 저렇게 된 것은 저 자가 원인이었어···.

그러나 그 악의에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에, 자신의 시선을 눈치 챈 황제가 자신에게 머리를 돌렸다. 눈도 뜨지 못하는 상처투성이 얼굴이 똑바로 자신을 향한 채로 멈췄다. 아마 그 일은 황제 자신조차도 자신이 그랬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으니.

무엇이 그리 걱정이 되는지 얼굴 가득 근심이 어려 있던 그 얼굴이, 자신과 마주치는 그 한순간 맑게 개였다. 소나기가 쏟아 붓던 검은 하늘이 순식간에 개고, 그 구름 사이로 찬란한 햇빛이 비치는 것처럼. 황제의 얼굴이 떠오른 그것은 분명히 안도감과 기쁨이었다. 

미소였다.

그 순간만큼은, ···그래. 자신이 태양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생경한 감각에 생각하는 것조차 잊고 멍해져 있으려니 황제가 자신을 향하여 머리를 숙였다. 가리마와 뒷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 곱던 머리채가 썩둑썩둑 잘려 나가고, 하얗던 가리마가 피로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다. 그 엄숙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자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 줘놓고, 무엇이 두려워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건가, 당신은. 마치 심판이라도 기다리는 죄인 같은 모습으로.

왜인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서 말을 걸었다. 폐하, 하고. 그러나 그 말을 들은 황제의 몸이 되레 더 단단하게 굳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하며 다시금 그를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때 황제는 무언가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연회 이전에 자신과 황제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고작 그 정도로 저렇게 자신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죽을 뻔 했던 것을 자신 탓이라고 여기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동의 없이 자신을 용인으로 만든 것을? 머리가 복잡해졌다. 황제가 어느 정도 얽혀 있는 건이기는 했으나 모두 황제가 전적으로 잘못했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을 그렇게···.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시는 거냐고 물었지만 그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때 이미 황제는 스스로가 불러낸 공포에 잠식되어 있었다. 그가 느끼는 공포에 어디에 기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황제가 그 순간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커다랗게 뜨인 눈이 초점도 없이 마냥 앞을 향한 채로 떨리고 있었고, 새하얗게 질린 이마에서는 쉴 새 없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푸른 기가 도는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

-···하.

-···하.

그리고는,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들이 황제의 입에서 쏟아졌다.

“······.”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서문경이 이를 갈았다.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황제가 그토록 두려워하지만 않았더라도 끝끝내 캐어물어 알아냈을 것이다, 황제에게 그 따위 생각을 심어 놓은 미친놈을.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황제가 자아를 잃고 허물어져 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반박했다.

-어째서?

그 물음에 대답이랍시고 들려온 것이,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이었다. 괴물. 모든 잘못이 자신이 괴물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니. 처음에는 단순한 비유인가 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황제는 자신을 정말로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용인이면서도 그 모든 모욕을 감수하고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고집했었는지. 

거기다 그 뒤에 겨우 제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왜 자신을 원망하지 않느냐고.

-짐은 그대를 괴물로 만들었어.

순간 말문이 막혔다. 괴물. 순간 자신의 뱃속을 울렁거리게 하고 있는 거부감을 그에게 들킨 것만 같았다. 변명하고 싶었다, 거부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를 괴물이라고 생각한 것은, 나아가 나를 그렇게 만든 당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 때 결심했다. 

-괴물이 아닙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손가락으로 보십시오. 제가 괴물입니까. 제가 끔찍합니까.

그 물음에 황제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내저었다. 그 모습이 애틋했다. 자신이 정말로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주제에, 자신이 ‘힘’을 쏟아 부어 만들어 낸 자신은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깨달았다. 자신이 눈을 감기 전과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 전에 자신은 그의 안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우선순위가 밀려 있었으나, 이제는 달랐다. 이제 그에게는 자신이 전부였다. 누군가가 그의 머리에 박아 놓은 이론대로라면 괴물인 그가 만들어낸 자신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괴물이었다. 실제로 그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하지만 자신이 진심을 캐어묻자 나온 진심은 그것이 아니었다. ‘너는 괴물이 아니다.’, 그 말은,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강박관념에 모순되는 말이었다. 그것이,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어떤 것에 맞설 수 있을 만치 자신에 대한 그의 감정이 커졌다는 증거였다.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 몰려왔다···.

아직까지도 그 감정이 무엇이라 딱 잘라 정의할 수는 없었으나,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당신도 괴물이 아닙니다.” 서문경는 황제의 볼을 쓰다듬으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황제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저도 괴물이 아닙니다.”

아직 거부감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괜찮을 것이다. 힘들겠지만,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서문경이 주문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당신도, 저도 괴물이 아닙니다. 괴물이···.”

그러니까.

“괜찮아질 겁니다.”

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황제에게 들려주듯이 서문경이 속삭였다. 서문경의 두 팔이 황제의 목을 감싸고, 천천히 상반신을 숙였다. 서문경의 얼굴이 황제의 쇄골 사이에 묻혔다. 그렇게 한참을 황제의 위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 있던 서문경이 문득 머리를 조금 돌렸다. 황제의 왼쪽 가슴에서 쿵, 쿵, 쿵, 느리고 희미하지만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사위는 고요했다.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문득 서문경은 생각했다. 이곳은 아무 것도 살지 않는 어두운 바다. 그 망망대해에 오직 자신과 황제만이 외딴섬처럼 외롭게 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불쑥 예전 생각이 났다. 황제가 용인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니 더 이상 황제는 외딴섬 신세가 아니겠지만···. 조금 외로워졌지만 서문경은 곧 생각을 달리했다. 상황이 달라진 것처럼 황제도 변했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외로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계속.” 이마를 황제의 왼쪽 가슴 위에 댄 채로 서문경이 말했다. “이대로, ···변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는.

“계속 곁에서, 당신은 괴물이 아니라 말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서문경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죽지 않았어요, 이렇게 제가 살아 왔으니까. 당신이 저를 배반하여 저를 내치기 전에는 항상 곁에 있어 드릴 터이니. 이전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서문경의 팔이 황제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니 더 이상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절로 눈물이 핑 돌 만치 다정한 말. 그러나, 그 말을 듣지 못하는 황제의 곁에는 여전히 무거운 어둠이 내리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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