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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內部) 경무청(警務廳) 제칠경무관(第七警務官) 초윤은 그 날 뜻밖의 손님을 맞이해야만 했다.
순검의 안내를 받아 자신을 찾아왔다는 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내진(內陣) 뒤 원정(園庭)으로 향하자, 정작 뜰에는 사람은커녕 개미 그림자 하나도 보이지 않고 ㅁ자로 지어진 내진 모퉁이에서 장의를 뒤집어 쓴 여인 하나가 숨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의를 쓴 것을 보면 분명 여인일진데, 수줍게 뒤돌아선 뒷모습이 어찌나 크고 건장한지 일순간 놀라서 걸음을 멈출 정도였다.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순검이 자신의 뒤통수에 딱하다는 시선을 던지는 것이 느껴졌다. 빤빤한 얼굴값 한 번 단단히 한다고 동네방네 소문이 난 제칠경무관을 한 맺힌 여인들이 찾아오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런 장군 뺨 칠만한 여인네에게까지 손을 댔을 줄이야. ‘이번에야말로 크게 경을 치겠어.’, 힐끔힐끔 제칠경무관 초윤을 훔쳐보는 순검의 눈빛에는 희미하나마 분명 꼴좋다는 뜻도 담겨 있다. 집안 좋고 키 크고 얼굴도 잘 생긴 데다 이 여인 저 여인 치마만 둘렀다 하면 가리지 않는 사내야말로 모든 사내들의 공공의 적 아니겠는가.
“자넨 가 보게.”
그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는 초윤이 잔뜩 꼬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어이쿠, 하며 순검이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순검이 내진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후 제칠경무관 초윤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낭자,”
무슨 까닭으로 자신을 찾아온 것이냐 물으려던 초윤이 입을 벌린 채로 굳었다. 자신이 말을 걸자마자 휙 몸을 돌린 여인이, 갑자기 장의를 벗어던진 탓이다. 그 안에서 나타난 이를 보고 초윤의 벌어진 입이 더더욱 크게 벌어졌다. 크고 단단한 손이 그의 턱을 밑에서부터 탁 쳐올렸다.
“가만 놔뒀다간 턱 빠지겠군.”
“효강, 자네, 자네!” 초윤이 삿대질을 했다. “자네 언제부터 새로운 길에 눈을 뜨,”
엄헌영이 초윤의 머리에, 자신이 직전까지 쓰고 있던 장의를 뒤집어씌웠다. 헛소리를 지껄여대던 초윤이 말을 멈추고 허우적댔다. 그 꼴을 보며 엄헌영은 끌끌 혀를 찼다, ‘어릴 적엔 틈만 나면 귀신 타령을 하더니, 다 크고 나선 입만 열면 헛소리를 쳐대나. 저 놈은 어째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어.’
그 사이 겨우 장의를 어깨가지 끌어내리고 초윤이 물었다.
“아니, 농이 아니라, 참말로 어쩐 일이야? 이런 몰골을 하고.”
“이런 몰골이라니?”
“여장을 다 하고···.”
“장의 하나 겉에 걸쳤을 뿐이다.”
그래도 여인네 장의잖나, 하는 초윤의 대답에 엄헌영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그 때 그 놈도 이런 마음이었나.’ 물론, 창혜각에서 서문경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였다. 허나 조금 짜증스러운 말은 들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고 초윤을 만났으니 된 일이었다. 고 가벼운 입을 아직까지도 지껄떠벌리고 있는 초윤의 말을 끊고 엄헌영이 말했다.
“청이 있어.”
“청?” 초윤이 자신을 가리켰다. “나한테 말인가?”
“그래.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초윤은 안심한 기색이었다. 그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 때문에 이런 꼴로 경무청에 걸음한 것이로군. 나는 또 자네가 괴아한 취미가 생긴 줄 알고 어찌나 놀랐던지.’ 엄헌영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하던 신경 쓰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면서 말했다.
“사람을 찾고 있어.”
“사람? 어떤 사람 말이야? 굳이 경무청까지 찾아와 사람을 찾는 것을 보니, 죄인 말인가?”
“아니, 근 몇 주 사이 남편이나 아들, 혹은 부친이 집을 나갔다 신고를 해 온 사람이 있는지 살펴봐 주게.”
“실종 신고가 아니라?”
“그래.”
초윤은 왜 엄헌영이 그런 것을 묻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지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알았네. 다만 약간 시간이 걸릴 지도 몰라, 그런 잡무야 순검들이 다루는 일이니···.’ 그 말에 엄헌영이 부탁했다.
“되도록 빨리 부탁하네.”
“빨리?”
초윤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하는 생각이 다 드러나는 놈의 표정을 보아하니 엄헌영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용호군에서 하는 일에 필요한 정보인가 착각해서 괜히 저 혼자 심각해진 것이 분명했다. 오해를 풀어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엄헌영은 곧 관두기로 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필요한 정보다 사실을 밝히면 저 찰거머리 같은 놈이 얼마나 집요하게 들러붙어 질문 공세를 해댈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 탓이었다.
곧 초윤이 답지 않게 듬직한 태도로 머리를 끄덕였다.
“나만 믿게.” 그리고서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팔꿈치로 엄헌영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웬 일로 걸가(乞暇)했나 했더니, 쉬는 척 하고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었나 보군.”
“근래에 일을 쉬고 있는 것은 어찌 알았어.”
“아, 모처럼 술이나 한잔 하자고 찾아 갔었거든. 헌데 서행관에 없더구먼.”
“술? 내게 할 말 있나?”
할 말이 있으면 그냥 지금 하시게, 하고 엄헌영이 말하자 초윤이 어설프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되었어. 서서 할 만 한 이야기도 아니고.’
“? 급한 일 아닌가?”
“아닐세. 그저 조금 궁금한 것이 있어서.”
엄헌영의 눈이 당장 도끼눈이 되었다.
“근래 황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은 자네 형님께 여쭤 보지 그러나.”
“어이쿠, 그러다 무슨 말을 들으려고.”
하고 냉큼 대답하는 꼴을 보니 자신의 짐작이 맞은 모양이었다. 초윤이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다가와서 엄헌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 근 시일 내 자네가 부탁한 것을 알아내어 찾아갈 터이니 그 때 한 번 봄세.’ 그러다 다음 순간 초윤이 다음 순간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는 듯,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헌데, 자네 명일이나 명후일(明後日: 모레)에는 서행관에 있는가?”
“왜.”
“어, 자네 집에는···,” 초윤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자네 백부님은 뵙기가 조금 껄끄러워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어허, 아니라니까.”
“헌데 자네는 백부님께 혼쭐이 난 것이 언제 일인데 아직도 내 백부님이 겁이 나나? 까마득한 옛일 아니야.”
“겁이 나는 것이 아니라···, 음?”
초윤이 말을 멈추고 머리를 모로 기웃했다.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른 말을 들었다는 태도라서 엄헌영이 새삼스런 눈으로 쳐다보자, 곧 초윤도 엄헌영을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가 물었다, ‘자넨 모르나?’
“자네 백부님께서 우리 정유동 본집에 근래 몇 번이나 찾아오셨었어. 그래, 금일만 해도···.”
“뭐? 백부님께서 자네 본가를 찾아가셨다고?”
“그래. 그 때 몇 번 마주쳤었는데 날 보시는 눈초리가 어찌나 싸늘하신지. 별 말씀도 안 하셨는데 오금이 다 저리더구먼. ···헌데 자네는 남에게 말 시켜 놓고 혼자서 무얼 그리 생각하시나?”
초윤이 타박하듯 말했지만 엄헌영은 그 타박은 대충 귓등으로 받아 넘겨버리고 급하게 말했다.
“자네에게 또 부탁할 것이 있어.”
“무어? 아니, 이 사람이···. 제 할 말만 딱 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제대로 듣지 않아 놓고는 어찌 낯짝도 두껍게 또,”
“청의관 수객.
엄헌영이 내뱉은 말에 초윤이 딱 입을 다물었다. 엄헌영이 중대한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자네 부친이나 자네 형님께서도 잘 모르실 걸.’ 당장 엄헌영이 뿌린 미끼를 문 초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자, 자네는 그 분을 사사로이 안다는 게야?’ 엄헌영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는 동시에 생각했다, ‘저 놈은 사내자식이 어찌 저리 세책점(貰冊店)에 모인 부인네들처럼 풍문에 목숨을 거는 겐지.’
초윤이 호기롭게 말했다.
“그래, 그 부탁이라는 것이 뭔가?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내 힘이 닿는 대로 도와줌세.”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야.” 하고 바로 대답한 엄헌영이 조금 생각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혹, 자네 부친이나 형님께서 요즘 출타가 잦으신가?”
응? 하고 반사적으로 되물은 초윤이 잠시 입을 다물고 기억을 더듬었다. 이윽고 그가 대답했다.
“어째 요즘 그렇군. 그러고 보니 근래에 유독 출타가 잦으셨어. 자네 본집에도 몇 번 다녀가신 것 같더구먼.”
“혹, 자네 부친과 형님께서 출타하셨던 곳이 어디인지 알아다 봐줄 수 있나?”
“그야 어렵지 않네만.” 엄헌영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초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녕 그것이면 되나?”
“그래.”
하고 엄헌영이 대답하는 순간, 멀리서 ‘경무관님.’하고 초윤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크, 하며 겁먹은 거북이마냥 목을 움츠린 초윤이 엄헌영을 본당 그늘 아래로 깊숙이 밀어 넣은 다음 제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장의를 엄헌영에게 다시 씌웠다. 장의로 얼굴을 가리며 엄헌영이 물었다, ‘가야 하나?’
“그리해야 할 듯 한데···, 혹 더 할 말이 있나?”
“아닐세.”
“그럼 조만간 자네가 부탁한 것을 알아다 서행관으로 찾아감세.”
초윤이 그 말만 남기고 부리나케 본당으로 내뛰어갔다. 뒤에 홀로 남겨진 엄헌영이 순식간에 작아지는 초윤의 등을 보고 부드득 이를 갈았다, ‘저 촉새 새끼가···.’
“난 명일도 명후일도 휴가인데.”
*
“그래서, 내내 서행관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이틀 만에 찾아온 엄헌영의 사정을 듣고 경혜현주가 실소하며 말했다. 네 동료들은 무어라 하더냐?, 하는 그녀의 웃음기 어린 물음에 엄헌영이 껍질도 벗기지 않은 홍옥을 우적우적 씹으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기껏 고가(告假)해 놓고도 서행관에 퍼질러 있을 정도로 일이 좋으면 아예 거처를 서행관으로 옮기라고 하더군. 그 말에 경혜현주가 또다시 소리를 내어 웃었다. 거듭되는 비웃음에 엄헌영의 눈매가 점점 험악해지다 못해 더 구겨질 자리도 없어졌을 무렵, 경혜현주가 겨우 웃음을 멈추고 달래듯 말했다.
“그래도 명일 바로 찾아왔다니 불행 중 다행 아니냐.”
“그랬을 테지.”
나 말고 윤이 놈에게. 엄헌영이 심만 남은 홍옥을 대충 소반 어딘가로 던져버리면서 대꾸했다, ‘금일 바로 찾아오지 않았으면 내 쪽에서 찾아가려고 했었거든.’ 그 말에 경혜현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 아이도 참, 성격하고는.
“대가도 없이 선뜻 조력해 주신 분을 그리 대접하면 안 되지, 강아.”
“대가는 충분히 치렀어.” 엄헌영이 무뚝뚝하게 반박했다. “간밤 내내 그 지루한 술자리에 붙잡혀 있어 줬으니 그것으로 되었지.”
그렇게 말하고서 엄헌영이 팍 인상을 구겼다. 숙취(宿醉)로 다시금 관자놀이가 지끈지끈 아파온 탓이다. 아직도 머리가 아프냐. 경혜현주가 웃으며 그에게 미지근한 밀수(蜜水)를 내밀었다. 벌써 세 잔째의 밀수를 꿀꺽꿀꺽 마시면서 엄헌영이 핀잔을 주었다, ‘걱정하는 척이라도 하려면 그만 좀 웃지 그래.’
그 말을 들은 경혜현주는 면구해하는 척도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헌데 일은 어찌 되었느냐?”
“···걱정하는 척도 안 하겠다 이거냐. 네가 윤이 놈이 얼마나 수다가 심한 줄 알면 그런 시큰둥한 반응은,”
“강아.”
경혜현주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엄헌영의 말을 끊었다. 무심코 그녀를 보았다가 엄헌영이 흠칫했다. 웃고 있는 현주의 얼굴 뒤에 얼른 사족은 그만 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하겠느냐는 협박이 어려 있었다. 잠시 침묵했다가 엄헌영이 제 품 안에 한 손을 집어넣었다가 뺐다. 그 손에 착착 몇 번이나 접은 옥판선지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현주를 향해 슥 밀자, 경혜현주가 그것을 집어 들며 힐끔 눈짓을 했다.
“이것은?”
“자네가 부탁한 대로, 근래 경무청에 가출 신고가 된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 직업 따위를 조사하여 나열해 놓은 자료다.”
“그런가.” 현주가 선지를 펴면서 엄헌영에게 고두사례(叩頭謝禮)를 했다. “잘 해 주었다. 네가 참으로 큰 수고를 해 주었어.”
정작 자신이 초윤에게 붙잡혀서 겪었던 고초에 대해 한탄할 때는 마냥 간간하다는 듯 웃기만 하더니, 별 것 아닌 자료를 받고는 거듭 머리까지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한다. 그것에 멋쩍은 기분이 드는 한 편, 조금 의아한 생각도 일어 엄헌영은 목을 빼고 새삼스레 현주의 손에 들린 선지 안쪽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헌데 왜 그런 것을 알아보라 하였던 것이냐?”
“이전에 자네가 근래 경무청에 석공들이 실종되었다는 신고 따위는 들어온 적이 없다하지 않았더냐.”
현주가 눈으로는 계속 선지에 쓰인 글자를 훑으며 한 말에 엄헌영이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본 후에 대꾸했다, ‘그랬지.’
“들어간 석공은 열 손가락을 넘는데, 나온 석공은 한 사람도 없는 상황인데 단 한 건도 실종 신고가 없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 아니냐? 그러다가,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럴만도 하다고?”
“그래. 강아, 생각해 보거라.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 어른께서 석공들을 데려다 하시는 일을 아는 사람 없이 은밀하게 처리하려 했다는 뜻이 아니냐. 그러니 필시 석공들에게 넉넉히 삯을 쥐어주는 대신 이 일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는 알리지 말라 밀촉(密囑)하셨겠지. 넉넉하게 주머니도 채운 데다 상대가 상대다 보니 석공들은 그 엄명을 확실하게 지켰을 것이야. 그러니 실종된 석공들 주변 사람들은 그 이가 헌의공 어르신이 맡긴 일을 맡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겠지.”
“식솔들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석공이라면 소속된 작업장도 있을 텐데, 그건 어찌 설명하려고?”
그러자 경혜현주가 대답은 하지 않고 마냥 빙그레 웃으며 엄헌영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다. 그 눈길에 담긴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엄헌영이 으응?하며 눈살을 구기자, 현주가 설명했다.
“자네도 휴일을 받아 은밀히 다른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아.”
엄헌영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그런 후, 그는 잠시 입을 닫고 눈을 내리깔았다. 경혜현주가 했었던 말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생각의 정리가 끝났는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작 엄헌영의 입에서 나온 것은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그럴듯하군. 그러하나···.” 미간을 찌푸린 엄헌영이 머리를 모로 기웃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아비나 남편이 일언반구 말도 없이 몇 날 며칠을 귀서하지 않는데 그것을 가볍게 넘길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될지.”
엄헌영의 대답을 귀담아 듣고 있던 경혜현주가, 엄헌영의 말이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이것은 내 짐작일 뿐이지만 말이다. 나는 그 석공들이 평소 행실에 약간의 문제가 있던 이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행실? 난봉꾼이었단 말이냐?”
“조사해 보기 전까지 확실히 알 수는 없는 일이지···. 허나 그렇게 생각하면 어느 정도 아귀가 들어맞지 않아.”
“하기는.”
엄헌영이 턱을 쓸면서 중얼거렸다. 평소 허랑방탕한 생활을 했던 이라면 얼마간 소식이 없다고 해도 주변 사람은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으리라. 또, 그렇게 생각하니 경혜현주가 실종 계출(屆出)이 아니라 가족이 집을 나간 것 같다 신고를 한 사람들의 기록을 알아봐 달라 부탁했던 것이 이해가 갔다.
“보아라, 강아.”
그 때 경혜현주가 엄헌영이 볼 수 있도록 바닥에 선지를 펼치며 말했다. 엄헌영이 처음 선지를 훑어보고 생각한 것은 집을 나가는 사람이 제법 많군,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말을 하자 경혜현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기보다는 원경이 많이 넓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현주의 손가락이 선지 어딘가를 짚었다.
“신자준, 46세, 자택은 국광, 양정좌리 작업장 소속 석공.” 현주가 짚은 자리를 반사적으로 소리 내어 읽던 엄헌영이 순간 목소리를 높였다. “석공!”
현주가 말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선지 여기저기를 옮겨가며 짚었다. 엄헌영은 재빨리 눈을 굴려 현주가 가리키는 자리를 빠짐없이 읽었다. 미간에 패인 주름이 점점 더 깊어졌다. 경혜현주가 가리키는 사람들은 모두 석수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었다.
현주가 선지를 다시 접자, 엄헌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다행이군, 짐작이 들어맞아서.”
그렇게 말한 엄헌영은 머리를 들었다. 직전까지 자신의 앞에 한 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던 경혜현주가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이다. ‘뭘 하려고?’하고 묻듯이 올려다보고 있는 엄헌영에게 경혜현주는 말했다, ‘일단 자네는 나가 있거라.’
“나가라고?”
“그래. 이만 돌아가는 척 하고 나가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신도비 근방에 있도록 하여라. 나도 곧 차비하고 따라갈 터이니.”
이어진 말에 엄헌영은 더더욱 영문을 알 수가 없어졌다.
“···곧 따라온다고? 자네가?”
“금번에는 미리 수수한 평복도 준비해 두었으니 염려 말아.” 경혜현주가 부산스럽게 방 안을 돌아다니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 선지는 혹 모르니 자네가 챙기고.”
“혹 쫓아 올 셈인가?”
나비와 국화 무늬가 휘황한 자개농을 뒤지고 있던 경혜 현주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는 것이지.’ 엄헌영이 단번에 거절했다.
“관둬. 자네가 동행해 봐야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니. 연취하신 마마를 모시고 무슨 조사를 하란 말이야.”
“되지도 않는 말을 하고 있는 쪽은 자네야.” 현주가 타박했다. “무언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문초가 아니야, 그저 실종된 석공들의 평소 행실이 어쨌고 또 혹여라도 남긴 실마리가 없는지 알아보러 가는 것이지. 그러한데 강이 너처럼 목소리는 우락부락, 말투도 험상궂기 짝이 없고 덩치는 웬만한 여인 배는 큰 사내가 홀로 불쑥 찾아와서 이것저것 물어대면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 것 같으냐?”
“험상궂다고?” 대뜸 제 험담을 들어먹은 엄헌영이 본능적으로 성을 냈다. “내 비록 옥골선풍(玉骨仙風)까지는 아니더라도···,”
“쯧. 누가 황상과 한 핏줄 아니랄까봐 그 이나 할 만한 말을 하느냐.”
경혜현주가 끌끌 혀까지 차며 한 말에 엄헌영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사이를 틈타 현주가 따박따박 따지고 들었다.
“더구나 상대는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다, 그런 범인(凡人)들이 자네 같은 무부(武夫)를 대하는데 익숙할 것 같으냐? 네 거친 말투만 듣고 줄행랑이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새 미리 준비해 놓은 옷가지를 모두 바닥에 꺼내 놓은 현주가 자개농 문을 닫으며 덧붙였다.
“해서 내가 동행한다는 것 아니냐.”
“···내키는 대로 하시지요, 마마.”
더 이상 대거리를 할 힘도 없어 엄헌영이 허탈하게 내뱉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 엄헌영의 등에 대고 경혜현주가 신신당부했다, ‘신도비 근방이다. 신도비. 혹여 다른 곳에 가 있어서는 안 된다.’ 엄헌영은 입도 열지 않고 그저 고개만 대충 주억거렸다.
그러나, 엄헌영은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
“···!”
엄헌영의 눈에 이채가 스친 것은 신도비 근방에서 서성거린 지 반 각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검은 주의를 입고, 마찬가지로 검은 입자(笠子)를 머리에 쓴 사내가 신도비 앞을 지나쳤다. 주변에 오가는 사람들 중 십중팔구가 희거나 검은 옷을 입고 있으니 그리 눈에 뜨일만한 행색도 아니건만, 사내가 지나가는 순간 엄헌영의 고개가 저절로 그를 향해 꺾였다. 기시감 때문이었다. 어디에선가 본 듯도 한데, 어디에서 보았더라? 엄헌영이 빠른 속도로 작아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생각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 뒤를 몇 발자국 따라갔다.
그 순간, 엄헌영의 발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사내가 훽 뒤를 돌아보았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길이다, 그러니 특정인 하나의 발소리를 분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사내가 뒤를 돌아본 순간만큼은 그런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저 사내가 자신의 발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 것이라고.
하지만 역시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신중한 눈길로 주변을 몇 번이고 돌아본 사내가 다시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자신과는 이미 먼 곳에 떨어져 있던 엄헌영의 존재 따위는 눈치 채지도 못했다. 방금 전 뒤를 돌아본 것은 그저 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한 행동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엄헌영은 사정이 달랐다.
“저거···.” 엄헌영이 중얼거렸다. 경악한 듯 홉뜬 눈은 사내의 등에 꽂혀 있는 채였다. “그 날 새벽 매헌당에서 백부님과 밀회를 가졌던.”
비로소, 언뜻 평범한 듯 보이던 저 이가 앞을 지나치는 것을 무심코 눈으로 쫓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제 아무리 남복과 관으로 속눈임을 한다 해도 여인 특유의 선이 모두 가려질 리가 없었다. 굵직하고 단단한 선으로 이루어진 남복과 여인의 육체가 그리는 호선이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엄헌영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운현궁에서 나왔다는 상궁이 왜 백부님께 운현궁 마마의 서찰을 전달한 뒤에도, 그로부터 며칠이나 지난 지금 저자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가. 더구나 저리도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으로. 자신도 모르는 새 운현궁 상궁의 뒤를 쫓아 엄헌영의 다리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골똘히 생각에 잠긴 엄헌영은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초윤이 흘리듯 해주었던 이야기가 번뜩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건도 현주께 말씀 드리고 조언을 구하려고 했었는데.
“아.”
엄헌영은 그 순간 자신이 무심코 운현궁 상궁의 뒤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당혹스런 시선으로 신도비를 돌아보는 동시에 잠시 발이 멈추었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돌아가서 현주께서 나오시기를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곧 엄헌영의 시선이 다시 돌아갔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엄헌영이 막 근처를 지나던 허름한 차림새의 어린아이 하나를 잡아다 그 손에 몇 푼의 동전을 쥐어주며 말했다.
“신도비 근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법단 봉지에 소매에 수 무늬를 그려 넣은 재색 주의를 입은 궁도련님이 보이거든 그 이에게 내 말을 전하거라. 잠시 급한 일이 있어 자리를 뜨지만 곧 돌아올 터이니 신도비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절대 혼자서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전해야 한다.”
알겠느냐? 엄헌영이 제 손바닥에 쥐여져 있는 동전을 보고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 아이에게 재차 말하고는 바로 몸을 돌려 사라진 운현궁 상궁을 뒤쫓았다. 이까지 콱 악물고 달려가는 엄헌영의 얼굴이 건드리면 쩍 갈라져 떨어질 것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불안해. 엄헌영이 미친 듯이 울렁거리는 가슴을 어떻게 가라앉힐 생각도 하지 못하고 꽉 쥔 주먹에 더 힘을 주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
후두둑. 깨어진 알껍데기가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알껍데기가 온통 어두운 공간에서 도드라진 뼈처럼 새하얗게 빛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천장이고 벽이고 바닥이고 가리지 않고 이 공간에 ‘서식’하고 있는 아귀들이 곧 탐욕스럽게 알껍데기를 집어삼켜버렸다. 스르륵 흔적도 소리도 없이 알껍데기를 아귀들이 삼키고 있는 모습에 평상시 같으면 진저리가 난다는 시선을 던졌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알껍데기나 아귀들에 시선을 나누어 줄 여유 따위가 없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마치 벼락소리처럼 들렸다. 그 소리가 어디에서 난 것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이대로라면 어느 순간 쩍 소리를 내며 혀와 입 안이 갈라져 버려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만큼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한 결 같이 한 곳에 꽂혀 있었다.
그 때, 아직 깨지지 않고 아슬아슬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알껍데기가 길게 금이 가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것이 마지막 알이었다. 황제는 새하얀 안 안을 응시했다. 큰 상처를 입어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조차 없는 눈으로 집요하게 한 곳만 응시하는 모습에서는 단순한 집착을 넘어선 기묘한 광기마저 느껴졌다.
알 안에 들어 있던 이가 천천히 머리를 들고, 눈을 떴다. 첫새벽을 떼어 박은 듯한 남청빛 눈. 색이 짙어서 언뜻 보면 검은색으로 보이는 그 눈 표면에서는 금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차가운 빛이 반들거린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이질적인데, 한 술 더 떠 그 남청빛 눈동자 안에 들어 있는 검은 동공은 사람처럼 둥글지 않고 대신 뱀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용인의 눈. 그 기운을 느낀 황제는 일단 안도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성공했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였다. ‘그’를 되살려 용인으로 만드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니 이제 문제는 자신이었다. 알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이가 천천히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두 다리를 뻗었다. 황제는 숨을 죽였다···.
심판의 시간이었다.
다리를 곧게 뻗은 채로 그 이는 잠시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세로로 동공이 긴 눈이 느릿하게 몇 번 깜빡였다. 표정이 없는 얼굴과, 초점이 흐린 눈. 마치 깊은 잠에서 막 깬 듯한 모습이었다.
갓 알을 깨고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는 갓난아기가 아닌 스무 살 가량쯤 되는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날씬하고 흰 팔다리는 보통 그 또래의 청년들보다는 반 뺨에서 한 뺨 가량은 더 길어 보였다. 그 때문인지 그는 스스로의 몸을 몹시 낯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청색 눈에 의아해하는 듯한 빛이 스쳐 지나가더니, 그가 곧 자신의 두 손바닥을 단풍잎처럼 활짝 펴고 그 안을 말끄러미 들여다본다. 그러다 그가 천천히 손을 내려 손바닥으로 무릎 위를 쓰다듬었다. 마치 일어설 수 있을지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정말로 몸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다리를 휘청했다. 하지만 용케도 넘어지지 않고 버틴 그가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똑바로 걷지 못하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며 걷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보는 사람의 간담이 절로 서늘해졌다. 계속해서 걷기가 힘이 들었는지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움직였다. 지금에서야 자신과 알 주변을 둘러보려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그를 살피느라 일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잊고 있었던 황제가, 그 순간 확 얼굴을 굳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피하려고 했으나 그런 보람도 없이, 남청빛 용안이 똑바로 자신에게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극도로 예민해진 귀에 신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거의 북소리만큼이나 커진 북소리에 귓가가 쿵쿵 울리는데도, 저 발소리만은 저리도 선명하게 들리다니. 천장에 매달린 물방울이 고이고 고여 결국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처럼 무겁고 신중한 그 발소리는 그만큼 느릿하게 들려왔지만, 이상하게도 황제는 온 몸이 돌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이상 자신에게 도망칠 곳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황제가 숨을 죽이고 있는 사이,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윽고 발소리가 멈췄다.
기이한 일이었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든 감각을 걸어 잠갔는데도 시선이 느껴졌다. 숨결이 느껴졌다. 그의 존재가 온 몸으로 느껴졌다. 동시에 온 몸이 달아올랐다. 너무나 죄스러워서 그의 앞에서 모습을 감춰버리고 싶었다. 허나 몸은 그 생각과는 반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금방이라도 저 이의 허리와 등을 끌어안고 자신의 팔 안에 가둬 버리고 싶어서 손가락 끝이 움찔거렸다. 그 지독하게 이기적인 본능에, 황제는 수치심을 느꼈다.
저 앞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가 뒷덜미를 바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머리를 깊숙이 숙인 채로 황제는 기다렸다. 심판을.
너는 모든 것을 잃었는가.
모든 것을 얻었는가.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와는 조금 다른, 잔뜩 잠기고 쉰 목소리였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
황제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들었다. 눈을 뜰 수 있었다면 크게 눈을 뜨고 멍청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황제가 이상했는지, 그가 다시금 말했다.
“폐하.”
···폐하.
쿵. 심장에 거대한 돌덩이가 떨어졌다. 온 몸의 피가 싹 식었다.
용인으로서 새로 태어난 그는, 인간이었을 때처럼 자신을 불렀다. 기억을,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선택지는 둘, 모든 기억을 잃고 정말로 새로이 태어나거나 혹은 잃었던 모든 기억까지 모두 되찾게 되거나. 황제는 자신의 입술이 저절로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모든 것을 되찾았다. 자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
“폐하.”
곧 그는 자신을 향하여 불같이 화를 내고 원망하며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마른침을 삼켰다. 이마에 식은땀이 돋은 것을 느끼고 있었으나 그것을 훔칠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보이지도 않은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는 것을 느끼면서, 머리로는 새삼 두려울 것도 없노라고 몇 번이고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래, 사실이 그랬다. 이런 상황 정도야, 자신에게는 충분히 익숙한 상황이 아니던가. 그러니 새삼스레 겁먹을 것도 없다. 겁먹을 것 없어. 조금도. 몇 번이고 있어왔던 일이다. 몇 년 간이나. 그 분께서, 그 분께서 살아 계셨을 때에는······.
그 분이 살아 계셨을 때에는···,
“···!”
쿵쿵쿵, 시끄럽게도 울려대는 심장소리에 머리까지 아찔해진다 싶을 무렵이었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싶어서 눈살을 찌푸린 그 순간, 시야가 한 번 크게 반전했다. 그 다음 순간 겨우 정신을 차린 황제는 곧바로 두 눈을 크게 떴다.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 보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일순 잊고 그는 경악했다. 놀란 나머지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입술이 소리 없는 경악을 터뜨렸다.
어떻게?
하지만 그 경악도 어느새 잔잔하게 잦아들었다. 어째서라니.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것이 도리어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되뇌고 있던 말이 다시금 뇌리에 떠올랐다. 익숙한 일이다. 그러니-. 황제는 눈을 깜빡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잘 되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저 분께서는 자신이 겁먹은 개 마냥 발발 떨며 눈을 껌뻑거리는 것을 언짢게 여기시니 차라리 눈이 깜빡여지지 않는 것이 나았다. 아니···. 그러다 곧 황제의 낯빛이 흐려졌다. 하지만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고 있으면 그 분께서는 또 어느 안전이라고 눈을 부라리고 있느냐 성노하실 지도 모른다···.
어째야 하지. 황제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힐끗 눈앞의 사람을 훔쳐보았다. 품이 넓은 옷을 몸에 걸친 사내가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 있다. 해가 중천에 뜬 지가 오래인데도 그는 아직도 침의 차림이었다. 황제에게는 그리 낯선 광경도 아니었지만···. 침의가 큰 탓인지 아니면 사내의 몸이 지나치게 마른 탓인지 모르지만, 넓게 벌려진 옷깃 사이로 깡마른 목덜미와 움푹 팬 쇄골 따위가 드러나 있었다. 길게 뻗어 있는 목덜미가 병든 나무처럼 위태로워 보여 괜히 살이 시려왔다. 그 때 쿨럭쿨럭 마른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염려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자, 버드나무 회초리가 매섭게 자신의 손등을 때렸다. 고통보다도 오히려 훽 회초리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놀라, 두려움과 황망함이 섞인 눈으로 올려다보자 언제나처럼 그 분께서는 냉담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아니, 아니다. 그는 생각을 고쳤다. 당시에는 아는 말이 없어 그저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신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제는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보는 그 분의 시선에 어려 있던 것은 비단 노여움만이 아니었다.
혐오. 멸시. 질시. 부러움. 분노.
온갖 역설적인 감정들이 그 분의 눈 안에 한데 뭉쳐 존재하고 있었다. 그 모양이 색색 깔의 벌레들이 좁고 깊은 구멍 하나에서 서로의 등을 물어뜯으며 버글대고 있는 모습 같다. 그러다 그 때 불쑥, 의구심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당시에는 미처 몰랐으나 지금은 알 것 같다고? 그것이 무슨 소리던가. 마치 과거를 떠올리며 말하는 것처럼. 따끔. 찌르는 듯한 통증이 귓가에 일었다. 머리가 아팠다. 지금은 과거인가 현재인가 아니면 둘 중 어떤 것도 아닌 다른 어떤 것인가. 어지럽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껏 냉담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만 계시었던 그 분의 입이 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 분이 말씀하시었다.
-너는 괴물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명에 따라 그 분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했다. 자신이 말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그 분께서 당장 노하여 자신을 능멸하는 것이냐 벼루를 던지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분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고, 다음 말을 이으셨다.
-너는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자신이 말하는 소리 따위는 귀에 들리지도 않았지만 홀린 것처럼 입술을 벙싯거렸다. 나는 괴물. 나는,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할 것이다. 혹여 내가 어떤 이에게 정이 들어 그를 순하게 따른다 하더라도 그 모든 호의는 배신으로 돌아올 것이며, 나 또한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 이를 큰 상처를 입하고 말 것이며···.
그러므로.
-영원히 홀로.
영원히 홀로.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당연한 결말이다.
“···어째서?”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괴물이니까.
“괴물?”
그래.
“왜 당신이 괴물입니까?”
이번에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뜻밖의 물음이었던 탓이다. 왜 내가 괴물이냐고? 황제는 몹시 난감해졌다. 한 번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나는···.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한 그 순간부터 계속, 계속 괴물이었다. 자신이 괴물이라는 사실은, 스스로에게는 설명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사실에 불과했다. 새는 그저 새이고, 꽃은 그저 꽃인 것처럼. 더불어 지금까지 자신의 본 모습을 아는 어떤 누구도 그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이유를 물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유를 묻고 있었다. 당혹스러웠지만 물음이 던져진 이상 자신은 답을 생각해 내야 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어서 대답하지 않으면 화를 내실 것이다. 등을 떠밀리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검어.
“검어서요?”
하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아차 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그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는 잠시간 아무런 말이 없다가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검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아니라고 대답했다. 혹여 자신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자신의 목소리를, 그도 듣지 못할까봐 고개도 가로저었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뭐가 아닌가요.’ 아주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사람.
“사람?”
머리를 주억거렸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미동도 없이 있었더니 그가 불현듯 손을 뻗어 그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팔을 건드렸다. 아주 살짝 튕기듯 건드렸을 뿐인데도 불에 덴 듯이 놀라고 말았다. 놀란 나머지 그의 손을 거칠게 쳐댔던 것도 같았지만 그는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기어코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팔을 짚었다. 그의 손톱이 어딘가에 부딪쳐 딱, 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이 비늘이요.”
···그래.
“비늘이 검으면 안 됩니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제한 모든 용인들은 금빛 비늘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는 서현의 팔과 목에 돋아 있던 그 아름답던 비늘들을 떠올렸다. 차분한 금속성 광택이 도는 그 비늘은 마치 저무는 석양처럼 아름다웠고 황제의 금관처럼 화려한 위엄이 넘쳤다.
“하지만 푸른 용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랬더랬다. 소현 태자. 하지만 그 또한 저주 받은 용인이었다.
“저주 받았다고요? 왜지요.”
본디 강인한 용인으로 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덧없이 가버린 것이 증거였다. 진짜 용인이었다면 한낱 인간에 불과한 황태자시강원 관원들의 조치 몇몇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그리 가버릴 리가 없다. 그리고 그는 죽음과 동시에 그의 백성이 될 사람들에게 각종 재해를 가져왔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잖습니까.”
그의 잘못이었다고, 모두가 그가 저주 받은 용인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대답했어야 했지만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잠깐의 침묵에서 행간을 읽어낸 그가 곧바로 물어왔다.
“당신의 생각이 아니군요.”
“······.”
“누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한 겁니까.”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속지 않았다. 그가 완고한 말투로 못을 박았다.
“그것은 당신의 생각이 아닙니다.” 팔에 돋은 비늘을 짚고 있던 손이 완전히 팔위로 올라와 그 위를 살살 쓰다듬기 시작한 것도 그 때였다. 깃털이 스치는 듯, 조심스럽게 팔을 쓰다듬던 그가, 아무런 대꾸도 없는 황제가 자신이 한 말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것인지 방금 전 했던 말을 반복했다. “당신 생각이 아니에요.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강요한 겁니다.”
다른 사람. 황제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 다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괴물이라는 말도···.”
그 후로 잠시 입술만 달싹이며 망설이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던 그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 따위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멍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황제 때문이었다. 눈꺼풀이 단단히 닫혀 있는데도, 이상하게 그 아래의 눈이 자신을 응망(凝望)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굳게 닫혀 있었던 입술이 움직였다. 그는 입술의 움직임을 읽었다.
“어째서···.”
황제의 입모양을 읽던 그가 일순 주춤했다. 그러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황제의 얼굴에 당혹이 어렸다.
“아닙니다.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그가 재빨리 말을 반복하고는 덧붙였다. “지금 저를 누구와 착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가, 그 분께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한 물음에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착각이라고? 내가, 무엇을 착각하고 있단 말인가. 다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비틀거렸었는지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앞에서 무어라 자신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지만 황제의 온 신경은 자신의 팔에 놓인 손에 쏠려 있었다.
손. 타인의 손. 황제는 불현듯 의구감(疑懼感)을 느꼈다. 줄곧 그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손은. 황제는 자신의 팔에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을 새삼 민감하게 느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조차 끔찍이 저어하시는 그 분께서 자신과 피부를 맞대고 계시다. 그것도, 그토록 그 분께서 혐오하는 그 검은 비늘이 돋아 있는 팔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황제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그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확 세상이 어두워졌다. 지금껏 자신이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들이 모두 착각이요, 환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자신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 것도, 그래, 그럴 수밖에. 지금 자신은 앞을 보지 못했다. 이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현실을 깨닫는 것과는 별개로, 황제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자신의 착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까의 그것과는 정 반대의···, 자신이 애타게 보고파서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낸···.
‘그’에게 물었다.
왜?
“왜라니요.”
대답이 돌아왔다. 머리가 더 어지러워졌다. 환청일까, 아니면···. 그 때 그가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다행입니다. 정신을 차리신 것 같아서···.”
아니야. 환청이다.
“뭐가 환청이라는 겁니까.”
네가 짐에게 이리 다정하게 말을 건네 줄 리가 없어.
“······.”
어째서 그대는 성노(盛怒)치 않는가. 어찌 원망하지 않는가. 어찌 저주하지 않는가.
“······.”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짐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대가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누구를 탓하고 원망해야 하는지도···, 다 알지 않는가. 그리고···.
차마 그 다음 말은 이을 수 없었다. 그대는 왜 울지 않는가? 삼계의 모든 기억들이 떠도는 창공에 수 시간이나 떠있었는데도, 그대가 그리워하던 모든 것들을 기억해내지 못했는가? 짐보다 훨씬 소중한 것들을, 짐 따위와는 비교하는 것도 죄스러울 만치 애중(愛重)히 여기는 사람들을. 하지만, 이 말만은. 차마 이 말만은. 너무나 두려워서 물을 수 없었다. 자신이 섣불리 말을 꺼냈다 서문경이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하면. 울음을 터뜨리기라도 하면. 자신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비통하게 흐느끼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질 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무서워서. 너무나 무서워서.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던 그가, 그 순간 조용히 물어왔다.
“무엇을 원망할까요.”
그대를 괴물로 만든 것을. 황제의 입에서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대답을 듣고 그는 잠시 침묵했다. 지나치리만큼 빠른 대답. 장막 뒤에 가려진 진심을 가리기 위한 위답(僞答)처럼 들리기도 했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가장 진심에 가까운 대답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럴 듯한 대답을 고를 시간도 없이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 즉 그것은 황제의 머릿속에 가장 강하게 박혀 있던 대답이었다.
“괴물인가요.”
대답은 없었다. 그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눈이 보이지 않으시니 모르실까요.”
황제는 얼굴을 굳혔다. ‘그’가 자신의 손을 잡아 제 얼굴을 쓰다듬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손가락으로 보십시오. 제가 괴물입니까. 제가 끔찍합니까.”
그 물음에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다. 황제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내저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러자 그가 황제의 손을 놓아주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를 괴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주제에,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
“그럼 또. 제가 당신을 원망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보십시오.”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대를.’ 그대를 힘들게 했어. 이번에는 ‘그’도 머리를 끄덕였다.
“힘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좀처럼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셔서요.”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라도 말씀해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하지만 폐하께선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대를 다치게 했어.
“무섭고 끔찍했습니다.” 그렇게 털어놓는 그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조금 더 어두워져 있었으나 그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폐하가 하신 짓이었던가요.”
황제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짐이 그대를 다치게 했어.
“저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무슨 일에나 원인과 결과가 있고, 어떤 선택에도 영향을 미친 일이 있고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선택은 선택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결과도 선택한 사람의 몫입니다. 저는 폐하를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도 당신 대신 경연에 나가기로 선택했고, 수상도 제가 범인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를 희생시키기로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제가 그에게 살해당할 뻔했지요. 원인은 어쩌면 폐하의 말씀대로 폐하일지도 모르고 다른 무언가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한 것도 행한 것도 당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당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
“솔직히 말해 폐하를 원망했었습니다, 누구에게 등을 떠밀린 것도 아니고 오롯이 제 자의로 행한 일인데도요. 폐하께서는 온 몸이 갈가리 찢길 때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아시겠지만, 그 때의 기분만큼은 모르시겠지요. 폐하나 서현 그 치 같은 용인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저는···!”
꾹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끝을 모르고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듯 일순 입을 닫았다가, 다시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다시 담담해져 있었다.
“저는 인간이었습니다. 그 때는, 인간이었습니다. 너무 아프고 괴로워서 나중에는 그에게 애원했습니다. 차라리 한 번에 죽여 줬으면, 단번에 목을 꺾어버리고, 아니면 목을 베어서 숨을 멎게 만들어 줬으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도록. 너무너무 살고 싶었는데도, 그런데도 죽고 싶었습니다. 정신과 몸이 쪼개지는 기분이었어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당시에 폐하를 뵈었었다면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성을 잃고 폐하께 저주를 퍼부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하는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난 일이라, 끝난 일이라 이리 말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제 몸이 멀쩡하지 않았더라면, ···또 모릅니다. 사람이란 동물이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대부분 이기적이 되고 마니까요.”
작은 소리가 귀에 들렸다. 인기척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싶을 무렵,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일단은···.”
그대로 팔 안에 머리를 끌어 안겼다. 늘 따뜻하던 그의 팔이 자신의 체온과 비슷할 만치 서늘해진 것이 조금 슬펐지만 그 이상으로 가슴이 벅찼다. 황제가 비로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경아.
이제야 실감이 났다. 죽지 않았다. 경이가, 내 품으로 돌아왔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서문경’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죄가 아닌 죄의 무게까지 짊어지려 하지 마십시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당신이 져야 할 무게만 지십시오. 그러시면 됩니다, 앞으로는···.”
서문경이 조금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목이 멘 듯 조금 나지막하고 살짝 거친 목소리였다.
“저를 배제하고 홀로 생각하여 판단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를 배반하지 말아 주십시오. 지금부터는···.”
그러시면 됩니다, 제가 폐하께 바라는 것은 그저 그것 하나뿐입니다, 하고 말하는 서문경의 말에 황제는 다만 서문경의 등에 한 팔을 두르고, 나머지 한 팔로 그의 뒷머리를 꽉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눈꺼풀 안쪽이 몹시 뜨거웠다. 말로 표현하는 것이 그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될 정도로 그가 지극히 사랑스럽고 애틋하며 고마웠다. 그러나, 그러나.
눈꺼풀 안쪽의 조금 더 짙은 어둠 속에서 황제는 스스로가 더 이상 끄집어 올릴 수도 없는 까마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서문경은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는 자비를 베풀었다. 아마도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모습이, 현실인지 과거인지도 모르고 공포에 질려 허우적대는 모습이 그의 마음을 약하게 했으리라. 허나 그는 심성이 대쪽 같은 이이다. 이미 자신의 입으로 황제를 탓하지 않겠노라 말을 뱉었으니 그는 때때로 분노가 치솟고 후회가 일어도 힘겹게 그것을 제 속으로만 삭힐 뿐 자신의 선언을 결코 번복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자신은,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배반했다. 그래. 그것은 배반이었다. 자신이 서문경에게 저지른 짓 중 가장 최악의 죄···. 서문경 자신은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할 테지만.
그래서 황제는 서문경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죄스러운 침묵이 어두운 공간 안을 무겁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