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제가 ‘둥지’로 틀어박힌 지 이틀이 지났다. 세 날 전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달아 황궐을 휩쓸고 지나간 후, 그 뒤 황궁은 물론 예의 수도 원경 전반(全般)에는 마치 태풍 익야(翌夜: 다음 날)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혹여라도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이 자신의 목에 떨어질까 두려워서 납작 엎드린 채 귀만 황궁 쪽을 향하고 있었고, 저자에서 떠도는 소문만을 들은 사람들은 마치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열에 들떠서 멋대로 입을 놀려댔다.
와룡임이 밝혀진 황상께서, 익애하시는 청의관 수객을 되살리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용의 ‘둥지’로 사라지셨다 한다. 그 과정에서 체제공의 ‘힘’이 황상의 ‘힘’보다 한 수 아래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타계의 평인이 곤위에 앉을까 저어한 대령상궁이 겁도 없이 폐하에게 간언을 올렸다가 바로 성노(聖怒)를 사 수급비(水汲婢)들에게도 부림을 받는 처지가 되었단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지켜 본 헌의공께서는 그날 밤 바로 운현궁으로 찾아가 동제도감의 설립을 허한다는 하답을 받아내셨단다.
그 풍문은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이 수많은 일이 폭풍처럼 휘몰아친 그 밤이 지나고 바로 그 다음날, 곧바로 동제도감이 설치된 것이 그 증거 중의 하나였다. 언제 동제도감의 설립 여부를 두고 지지부진하게 굴었었냐는 듯, 동제도감이 설치되자마자 도감을 이끌어 갈 수두격인 도제조(都提調) 2인에서부터 가장 말단 관원인 사령까지, 천 여 명에 달하는 도감관원들이 일사천리로 임명되고 천제사를 지낼 길일(吉日)이 택해졌다. 길일은 황제가 ‘둥지’로 사라진 후로부터 엿샛날이 되는 날, 그리고 제사를 올릴 길지(吉地)가 정해지고 길지로 정해진 자리에 축대와 제단 따위가 건립되었다.
그런데 그 날부터, 저자에는 괴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문제의 그 날로부터 수상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물론 소문을 믿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황제의 ‘힘’과 정면으로 맞부딪친 직후에도 그가 멀쩡히 자신의 발로 천추전을 걸어 나오는 것을 목격한 이가 하나둘이 아니었던 탓이다.
그러나.
“···그 풍문이 참말이더란 말이냐. 자네 눈으로 보았더란 말이야?”
“그래.”
현주의 떨리는 물음에 엄헌영이 침통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현주가 잠시간 침묵하는가 싶더니 곧 애써 가벼운 투로 말했다, ‘작일에 그러했다면 금일에는 기침 하셨겠지.’
“자네도 보았다시피, 작일 첫새벽에 뵈었을 때 몹시 피곤해 보이였잖느냐. 그러니,”
“금일 찾아가 뵌 것이었다.”
애련당에 오기 직전에 걸음 하였었다, 엄헌영이 무거운 투로 현주의 말허리를 끊었다. 입술을 조금 벌린 채로 멈칫해 있던 경혜현주의 얼굴이, 엄헌영의 말을 못 알아듣기라도 한 것 마냥 멍하다 싶더니 곧 그녀의 얼굴이 급속도로 흐려졌다. 더 말을 해야 할까 엄헌영은 고민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어차피 해야 할 말, 괜히 질질 끌어 좋을 것 하나 없었다.
“나 또한 작일 해가 밝는 대로 수상부로 찾아가 보려 했었으나 작일 신단에 일이 조금 있어서···.”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면서 엄헌영은 경혜 현주의 표정을 힐끗 보았다. 혹여 그녀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둘러대야 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서현에 관한 일로 머릿속이 꽉 찬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애써 변명을 생각해 낼 필요는 없어 보였다. 엄헌영이 부자연스럽게 늘어뜨렸던 말을 다시 이었다.
“그런 까닭에 내 부득이하게 오늘 수상부를 찾았는데, 수상부에 희가 없더구나. 다들 쉬쉬하고는 있으나 수상부 사람들 모두 적잖게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제 몸이 아플 때는 물론이요, 태풍이나 폭염, 눈보라 따위의 몸을 가누기 힘든 재해가 터졌을 때조차도 할 일을 거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말이다.”
엄헌영의 말을 듣던 경혜현주가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슬쩍 훔쳐보니, 한숨을 쉰 그녀 자신은 자신이 한숨을 쉬었다는 사실 자체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관성(慣性)이 된 한숨. 아마도 자신이 언제 때를 말하는 것인지 안 것이겠다.
소현태자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 마치 신벌(神罰)이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각종 재해들이 나라를 덮쳤다. 천 년 묵은 거목까지 송두리째 날려버릴 정도로 지독했던 태풍과 나라의 모든 논과 저수지의 바닥을 드러내게 만든 긴 가뭄, 그리고 무려 시월부터 시작하여 오뉴월까지 계속되었던 그 끔찍한 눈보라까지. 모르긴 몰라도, 그 때를 겪어본 이라면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경혜현주의 한숨은 그것과는 조금 종류가 달랐다.
고통보다는 오히려 슬픔, 후회보다는 그보다 스산한 회한. ···소현태자는 경혜현주의 부친이었다. 한 때 황태자의 가장 귀애받던 따님이셨던 경혜현주는 부친인 태자의 죽음과 동시에 모든 빛나던 미래를 잃었다. 정실인 황태자비의 소생이었던, 경혜현주의 두 언니 현의군주와 소명군주는 부친이라는 바람막이를 잃었어도 명벌 출신인 모친 덕을 볼 수라도 있었으나 경혜현주는 그럴 수도 없었다. 경혜현주의 모친인 취영당 재여씨는 황태자의 총애 외에는 내세울 것 하나 없는 하급 여관 출신 후궁이었고, 더구나 경혜현주를 생산한 후 두 번째로 회임한 아이를 낳다 산고로 이미 목숨을 잃은 뒤였다. 태상황제는 장자인 소현이 목숨을 잃은데 이어 줄줄이 용의 증후를 보인 아들딸이 죽어나가는 괴변에 현주를 살뜰히 보듬어 줄 여유가 없는 상태였고, 황후가 현주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서기는 했으나 그것은 세간의 이목을 의식한 의례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그렇게 경혜 현주는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진 채, 생모의 거처였었던 취영당에서 방치되어 자랐다. 그러기를 몇 년, 그런 경혜현주를 돌보아 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바로 당시의 수상이었던 헌의공 서엽이었다.
그 때 현주의 물음이 엄헌영의 회상을 끊어놓았다.
“강아, 어찌 더 이상 말이 없느냐. 그 뒤에 어찌하였어?”
“아.”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엄헌영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희도 없는 수상부에서 내가 무엇을 더 하겠나. 수상부 관원들도 영문을 모르는 것 같고 하여 일단 수상부에서 나와서···.”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말이 역시나 평소보다 많이 빠르고 두서가 없었던지 자신을 보는 경혜현주의 표정이 조금 어리둥절해 보였다. 혹시나 그러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까봐 엄헌영은 급히 현주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영문을 모르고 있는 경혜현주의 얼굴을 보자 아릿한 죄책감이 들었다. 그나마 현주의 물음으로 거기서 상념에서 깨어난 것이 다행인지도. 조금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자신이 떠올린 때 이후의 일에 대해서도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엄헌영은 무심코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 때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렀으나 아직도 그 일에 대해 떠올리는 것은 현주에게 미안한 일일뿐더러, 엄헌영 자신도 퍽 달갑지 않았다.
기분이 가라앉자, 당황하여 횡설수설 하던 입도 저절로 말수가 적어졌다. 엄헌영이 금일 아침나절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려 노력하며 말했다.
“그래서 그의 거처로 갔었는데, 노복들에게 희를 불러 달라 하니 대신 다른 이가 나오더군.” 하고 말한 엄헌영은 뒤늦게 그 자의 이름을 떠올리고 덧붙였다. “천견, 최유던가. 창혜각 천객들 중에서도 희가 가장 믿음직하게 여기는 자인 듯 한데. 희 대신 그 이가 나오기에, 나는 그가 희의 명을 받고 나를 희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러 온 거라 여겼는데 그 이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가더니 그 소리를 하더군.”
“희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그래.”
“···언제부터라더냐? 역시 우리와 만났었던 그 때부터···.”
엄헌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와 벗으로 사귄 지가 십 수 년도 넘는 경혜현주가 그 불퉁한 표정 아래 숨겨진 그의 생각을 읽어내지 못할 리가 만무했다. 경혜현주가 손가락으로 입술 아래를 쓸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황상의 ‘힘’과 정면으로 부딪치느라···.”
“그 정도의 일로 이틀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는 놈이라면 제좌에 앉을 자격도 없지.”
불현듯 성난 것 같은 어조로 내뱉은 엄헌영에게 경혜현주가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네 어찌 그리 경솔한 말로 용인을 모욕하느냐.”
“내가 틀린 말을 했나?” 현주의 말에 더더욱 심기가 뒤틀린 엄헌영이 더더욱 사납게 대꾸했다. 머리를 비딱하게 모로 꼰 그가 현주를 똑바로 보고 물었다. “용인과 용인이 맞부딪쳐 그 중 하나가 나가 떨어졌다면 결론은 난 것이 아닌가. 헌데 용인으로서의 ‘힘’도 상대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놈이 계속 제좌에 군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데, 자네는 그것이 가당키나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현주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 가만 눈으로 말끄러미 엄헌영을 응시하였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 돌려 말할 것 없다. 체제공이 내게 하셨던 청을 들어주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게지.”
“···어찌할게냐?”
경혜현주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엄헌영의 눈이 사나워졌다.
“들어 줄 셈이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느냐.”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엄헌영이 코웃음을 쳤다. “헌의공이 숨기고자 하는 것을 네가 쉽사리 알아낼 수 있다고? 그것 참, 내 벗님께서 이리 대단한 능력을 가지신 분인 줄은 오래 사귀면서도 미처 모르고 있었군.”
“그러하나 다른 이들에 비하면, 내 쪽이 조금이라도 더 그 일을 쉽사리 해낼 수 있을 것이야. ···그래도, 네 말대로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마는. 다른 이도 아닌 그 어른께서 하시는 일이니.”
그렇게 말하는 경혜현주를, 팔짱을 끼고 앉은 엄헌영이 못마땅한 눈으로 거의 노려보다시피 했다. 그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는 경혜현주가 시선을 내리깔고 변명하듯이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아, 너도 들어서 알겠지만 큰 문제가 될 만한 일도 아니지 않느냐.”
“직접 당금 황제를 끌어내려 달라 부탁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
“이 모자란 것아.” 침묵하고 있는 경혜현주에게 엄헌영이 사정없이 쏘아붙였다. “큰 문제가 될 일도 아니라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네가 아니라, 서현이다! 너로서는 별 생각 없이 해 준 일이 어쩌면 제안을 제좌에서 끌어내리는 치명타가 될 수도 있어!”
“!”
경혜현주가 번쩍 머리를 들었다. 엄헌영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지, 머리를 든 그녀의 얼굴은 충격과 경악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조금쯤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만도 하건만, 엄헌영은 도리어 더 잔인하게 현주를 몰아붙였다.
“일전에 자네가 그랬지, 제안과 희가 서로 대립한다면 너는 어느 편을 들고 어찌 행동해야 할지도 갈피가 서지 않는다고! 그 말이 다 가식이었구나, 지금 너는 명백히 희의 편을 들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희의 편을 들다니, 아니야. 아니다. 오해야, 강아.”
“네가 희의 청을 들어 준다면 나는 네가 희의 손을 들어 주었다고 생각하겠다.”
“그것은 비약이야.”
경혜현주의 반박에 엄헌영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혜현주도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가 쏘아붙였다.
“너는 내게 협박을 하러 온 것이더냐?”
“협박?”
기가 막힌다는 듯 반문하는 엄헌영을 매섭게 노려보며 현주가 대꾸했다, ‘그래, 협박!’
“이것이 협박이 아니면 무엇이냐? 네가 지금껏 한 말은 모두 추측뿐이다, 더구나 번듯한 이유 하나도 없는! 그런 것을 가지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만 하면 내가 그렇습니까, 하고 무작정 네 말을 따를 것 같았더냐?”
“뭐,”
“말이 다 끝난 것이 아니니 내 말을 다 듣고 말하여라.” 엄헌영이 반박을 하려는지 입을 열었지만 경혜현주는 그가 그럴 틈조차 주지 않고 다다다다 몰아붙였다. “너는 내가 희에게 도움을 주려고 마음먹은 일이 최종적으로 제안을 해할 지도 모른다 했었지? 허나 냉정하게 되짚어 보아라. 희가 내게 부탁했던 일은 고작 항아리 하나를 찾는 일이다. 그 항아리로 어떻게 제안을 해할 수 있느냐? 네가 잘 하는 대로 비꼬아서 말해 보면, 그래, 희가 그 항아리로 제안의 뒷머리를 때려 그를 살해할 심산이라던? 만일 그런 심산이라면 세상 천지에 널린 항아리를 놓아두고 왜 굳이 그 항아리를 찾으려는 것일까 나는 진심 이해를 못하겠구나.”
“그럼, 겉이 아니라 속이 문제라는 거겠지.”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현주의 말이, 현주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하여 끊긴 그 순간 엄헌영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속이라니? 뜻밖의 말에 현주가 무심결에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자, 엄헌영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본디 빈정거리는 일에 익숙지도 않은 놈이 어설프게 흉내를 내 봐야.’
“네 말대로 항아리란 놈은 어디에나 널린 것이니, 항아리로 머리를 쳐서 죽일 생각이라면 굳이 특정 항아리를 찾을 필요도 없지. 그러면 문제는 속이다. 항아리에 든 그 ‘무엇’ 말이다.”
“그럼···.”
“그 항아리에 든 것이 희가 진짜 찾는 것이고.”
경혜공주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엄헌영이 말을 이었다.
“나는, 그것이 어쩌면 제안을 해칠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염려하는 것이다.”
“···허나 나는 꼭 그 이가 황상을 해하기 위하여 항아리를 찾는다 생각하지는 않아. 꼭 그리 비틀어서 생각하지만 말고, 조금은 달리해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으냐.”
경혜공주가 망설이다 한 대답에, 엄헌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세상이 그리 곱고 어여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짐짓 혼잣말처럼 가장한 그 말이 실상은 자신을 비꼬는 말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데도 경혜현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엄헌영의 난폭한 태도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자네와는 생각이 달라. 그 이가 폐하를 해하기 위하여 내게 그런 일을 부탁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예상이라니?”
내내 삐딱한 태도를 보이던 엄헌영이 순간 주춤하며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경혜현주는 근래 거의 습관성이 되어 버린 듯한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네가 말했지 않니, 그 분께서 이틀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왜 그 이야기가 지금 나오지? 너는 그러니까, 희가 자신이 며칠간이나 혼절한 상태가 되리라는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네게 청을 했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 경혜현주는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엄헌영은 굳게 입을 다물고 경혜현주를 응시했다. 현주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친 채로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두 사람은 마치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엄헌영의 두 눈과 미간이 차례로 일그러진다 싶더니, 그의 단정한 입가가 비딱해졌다. 비딱하게 한 쪽 입매를 튼 채로 엄헌영이 말했다.
“어쩌면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
“허나, 세상은 언제나 최상의 결과보다는 최악의 결과를 대비하여야 하는 법이다. 만일, 네 짐작이 아니라 내 예견이 들어맞는다면?”
경혜현주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 내가 그 항아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또 무슨 궤변이냐.”
“궤변 따위가 아니다, 나는.” 경혜현주가 거기서 한 번 큰 숨을 내뱉고 나서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체제공이 찾으시는 항아리를 찾아, 그 누구보다도 먼저 그 안을 확인하고자 한다.”
“···!”
의외의 말에 놀란 엄헌영이 눈을 크게 뜨자, 경혜현주가 그런 엄헌영의 얼굴을 빤히 보다 배시시 웃었다.
“안을 아직 보지 않았으니 모르지, 그 안에 든 것이 제안을 해할 것인지 아니면 희를 살릴 것인지. 모든 것은 아직 미정(未定)이요, 미결(未決)이다. 허나 지금 단 하나 확실한 것이 있지 않으냐.”
“확실한 것이라니?”
경혜현주의 표정이 문득 싸늘해졌다.
“나는 말이다 강아, 그 도자기가 헌의공의 손아귀 안에 있다는 것이 몹시 신경이 쓰인단다.”
“그래서 일단 그 도자기를 찾고자 하는 것이냐?”
경혜현주가 고개를 한 번 주억거리고서, 딱 잘라 대답했다.
“제안과 희의 속이야 그 둘의 속을 들여다보지 않은 한은 알 수가 없으나, 내 그것만은 확실히 아느니. 그 어른은 두 사람 모두에게 해가 될 자다. 그런 까닭에 나는 하루라도 빨리 도자기를 그 어른의 손에서 빼내고자 한다.” 어떠냐? 하고 현주가 머리를 모로 까닥했다. “네 무슨 일로 오늘 그리도 심기가 뒤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정도 이유면 내게 손을 빌려 줄 터이냐?”
그 물음에 엄헌영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상태를 이미 눈치 채고도 모르는 척 해주고 있었던 겐가. ···이건 못 이기겠군. 곧 내심 한숨을 쉬면서 엄헌영은 입을 열었다.
“나더러, 대체 무엇을 하란 말이더냐?”
불현듯, 묻어두었던 옛 생각이 났다···.
*
-취영당?
거긴 폐가잖아.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아이들은 기억도 하지 못할 어느 옛날에, 어떤 귀하신 분의 애총(愛寵)을 한 몸에 받던 후궁마마께서 사셨다던 곳의 이름을 듣자마자 소년은 거침없이 그렇게 말했다. ‘무엄한 놈.’,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꾸짖는 말이 소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엄격하게 틀이 잡혀 있는 말의 내용이나 어조 따위와는 달리 아직 앳된 티가 가득했다. 꾸지람을 들은 소년이 눈을 샐쭉하게 흘겼다. 위로 흘겨보자 역시나 자신보다 한 뺨 정도 키가 큰 사내아이가 역시나 자신의 머리 위에서 쏘아보고 있었다.
-알았어, 귀신집.
됐냐? 소년이 입을 삐죽거리며 비꼬자, 사내아이가 대답했다, ‘바보냐. 귀신이 세상에 어디 있어.’ 바보 취급하는 말투에 소년은 당장 발끈해서 소리쳤다.
-바보는 형님이야!
-···맞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지.
-취영당에서 귀신을 봤단 말이야!
주먹을 들던 사내아이가 멈칫했다. 그가 물었다, ‘네가?’ 이번에는 소년 쪽이 주춤할 차례였다.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하는 소년이 한참을 우물우물하다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아니라···. 초태보 댁 윤이의 고종제(姑從弟)랑 같은 학당에 다니는···.
-네 눈으로 본 게 아니면 무효다.
사내아이가 그 또래 소년답지 않은 냉담한 말투로 내뱉고 휙 돌아섰다.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하고 있던 소년이 어, 하고 급한 김에 아무렇게나 소리쳤다.
-그, 그렇지만 형님 아버님께서도 있다고 하셨어!
소년을 내버려두고 가버릴 심산이 분명했던 사내아이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소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직 짧은 다리로 열심히 사내아이를 쫓아갔다. 그리고 사내아이의 앞에 쑥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그랬다니까?’ 사내아이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언제 들었는데.
-연회에서 뵈었을 때!
그런데 그게 무슨 연회였더라? 소년이 조그만 머리를 갸웃하며 끙끙거리자, 사내아이가 손을 휘휘 저었다. 하던 말이나 계속 해보라는 뜻이었다.
-취영당 이야기를 하셨지.
-취영당 이야기?
-나는 궁을 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으니까 심심하면 놀러 가보라고 하셨었어.
그 말에 사내아이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소년은 눈치 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초태보 댁 윤이의 외형(外兄)님이랑 같은 학당에 다니는 학우의 동생···, 어어, 이게 아니던가. 아, 초태보 댁 고종제랑 같은 학당 학우의 누이···, ···왜 노려봐. 알았어, 알았어. 아무래도 무슨 상관이람. 아무튼 들은 이야기를 상국님께 해드렸었는데 웃으셨어. 취영당에는 상국님도 많이 다녀 가셨었는데 귀신같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마음 놓고 가보라고 그러셨어.
-···말이 다르잖아?
-안 달라! 그 뒤에 그러셨단 말이야. 취영당은 몰라도 다른 곳에는 있을 지도 모른다고.
혹시라도 또 사내아이가 자신을 때리겠다고 나설까봐, 소년이 재빨리 내뱉고서 의기양양하게 등을 펴고 가슴팍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 말이 맞지?, 하고 뻐기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 소년을 찌푸린 눈으로 쳐다보던 사내아이가 곧 머리를 조금 가로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린애한테 장단을 맞춰주신 거겠지.
마치 그렇게 말하는 자신은 어린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한 투였다.
아무리 제 입 속으로 중얼거린 말이래도 지척에 있는 이상 그 말을 못 들을 리가 없는 소년이 발칵 성을 냈다.
-그럼 가!
-뭐?
-취영당으로 가보자고! 거기서 내가 귀신을 찾으면 되는 거잖아!
그럼 형님도 더 이상 날 무시하기 없기야!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지른 소년이 씩씩거리며 앞장을 섰다. 소년이 그렇게 큰 걸음으로 걸어간 지 몇 분, 뒤에서 사내아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속으로는 옳다구나 했으면서도 소년이 겉으로는 불퉁한 표정을 가장하고 대꾸했다, ‘왜?’
-아냐.
-사실 형님도 무서운, ···응?
내가 생각한 말이 아닌데? 하고 돌아보자 사내아이가 소년이 향하고 있는 쪽과 정반대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내아이가 말했다.
-그 쪽이 아냐. 이쪽이야.
-······.
-안 갈 건가?
석상처럼 쩍 얼어붙었던 소년이 이윽고 뻣뻣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기름칠 하지 않은 경첩처럼 삐꺽삐꺽 된소리라도 날 법한 움직임이었다. 사내아이는 물끄러미 소년의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표정과는 달리 제 맘대로 되지 않는 낯빛은 터질 것처럼 시뻘겠다. 그러나 소년은 계속해서 허세를 부렸다.
-갈 거야! 누가 안 간대?
-그럼 길을 모르나?
정곡을 찌른 듯, 소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사내아이는 결론을 내렸다.
-모르나보군.
-아니거든! 나는 말이야, 나는, 내가 아까 왜 그랬냐 하면,
결국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소년이 이윽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얼굴 가득 화색을 띄고 사내아이를 향해 척 삿대질을 했다. 이것 봐라?, 하고 말하듯 사내아이의 한 쪽 눈썹이 슬며시 위로 올라갔지만, 소년은 미처 그것을 보지 못하고 소리쳤다.
-형님을 시험해 본 거야! 형님이 귀신을 잡으러 갈 담력이 되는지 내가, 아야야야야야!
호기롭게 외치다가 사내아이에게 귀를 잡힌 소년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비명을 질렀다.
-왜 이래! 아파, 형님! 아프다고! 아야야야야!
그러나 사내아이는 그 귀 아픈 비명이 자신의 귀에는 안 들리기라도 한다는 듯이, 입을 꾹 닫고 묵묵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잠시 후 아픔에 못 이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소년의 귀를 놓아주고, 사내아이가 단단히 당부했다, ‘조용히 안 따라오면 이번엔 두 귀 다야.’ 반사적으로 항의하려던 소년이 사내아이의 표정을 보고 합 입을 다물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 이후에는 두 아이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걷기만 했다. 소년은 아직도 홧홧한 귀를 식히느라고 바빴고, 사내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을 후미진 길을 찾는데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와.
그러기를 한참, 아픔이 사그라지자 겨우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 소년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가 탄성을 터뜨렸다. 형님, 형님. 소년이 자신보다 몇 발 앞서서 걷고 있던 사내아이의 소맷자락을 당기면서 들뜬 말투로 말했다.
-형님, 저기 장수풍뎅이! 아, 저기 장수하늘소!
-······.
-그런데 형님, 형님. 여기는 뭔데 이렇게 풀이랑 나무가 감사납게 자랐어? 거기다가···,
평생 가지런하게 정돈된 정원 밖에는 본 적이 없는 소년이 각종 잡풀들과 귀신의 머리털 같은 나무들로 우거진 주변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져 있다가, 빙글빙글 자꾸만 돌아가도 도통 목적지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구불구불한 길에 지쳐 언제쯤 취영당이 나오냐 물으려던 그 때였다.
앞서 가던 사내아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 탓에 소년이 그의 등에 코를 쿵 부딪치고 말았다. 말을 하려고 벌린 입으로 대신 으아악!, 하는 비명을 지르고 만 소년이 버럭 성질을 냈다.
-뭐야!
-다 왔다.
-뭐?
-취영당이라고.
대답을 듣고도 소년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뭐?!’ 사내아이의 등에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는지 소년이 옆으로 튀어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가 취영당이라고?
둘레둘레 주변을 둘러본 소년이, 곧 사내아이 쪽으로 몸을 돌리고 척 팔짱을 끼고 섰다. 뭐야, 하며 사내아이가 눈살을 찌푸리자 소년은 거만하게 턱까지 들고 거들먹거렸다.
-내 말이 맞네, 뭐. 폐가잖아.
-폐가가 아니다, 무엄한 것.
-그놈의 무엄, 무엄.
형님은 똑같은 말 밖에 모르지?, 하고 투덜거리던 소년이, 말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아이를 발견하고 움찔했다. 지금쯤 뭐라고 타박이 날아왔어야 했는데. 사내아이가 잠잠한 것에 도리어 더 불안해지고 만 소년이 ‘형님, 왜 그렇게 조용해?’하고 물으려는데 사내아이가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내가 아냐.
-어?
-내가 한 말이 아니라고.
-그럼?
저기를 보라고 하잖아, 하고 말하듯 사내아이의 손가락 끝이 조금 움직였다. 그제야 사내아이가 가리키는 곳을 본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어, 어어, 하고 소년의 입이 신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사내아이가 가리키고 있는 자리에, 기와 끝이 부서진 낡은 당 아래 자그마한 어린아이 하나가 서있었다.
몸집이 가녀린 주제에 키는 멀쑥하게 커서, 도통 사내아이인지 계집아이인지도 알 수가 없는 그 아이는 유난히도 피부가 희고 눈과 머리카락은 가맸다. 젖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애주제에 고운 뺨과 매끈한 턱, 턱에서 어린 사슴 같은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선이 그야말로 절묘했다. 그러나 그 어여쁜 아이는 무슨 일에 그리 골이 났는지 못마땅한 듯 둥근 눈을 부라리고 소년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와 눈이 마주친 소년이 한참을 굳어 있다가, 어느 순간 파드득 물 맞은 개처럼 온 몸을 털더니 사내아이의 팔을 마구 잡아당겼다.
-형님, 형님! 찾았어!
-뭘.
-귀신!
흥분한 나머지 소년이 잉어처럼 펄떡펄떡 뛰면서 아이를 가리켰다, ‘와, 정말 귀신이 있었어!’
그러자 싸늘한 목소리가 곧바로 대꾸했다.
-저 덜 떨어진 것은 또 무어야?
-윤이가 허언을 한 것이 아니었, ···뭐?
-희 형님.
소년이 독설을 내뱉은 아이를 노려보았지만 정작 아이는 소년 쪽에 눈길도 주지 않고 곧바로 사내아이에게 걸어와 그에게 따져 물었다.
-어찌 저딴 걸 취영당에 데려왔어?
-저딴 것이 아니라.
사내아이가 일단 그렇게 대꾸하고는 손짓으로 소년을 불렀다. 아, 왜! 하며 성질을 부리는 소년을, 또 귀를 잡아끌고 온 사내아이가 아이와 소년을 서로 대면시켰다. 아이는 소년과 얼굴을 맞대고 있어야 하는 이 상황이 몹시 못 마땅한 기색이었지만,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 귀를 잡혀서 연신 앓는 신음을 흘리고 있는 소년을 보자 혹여 사내아이의 심기를 거슬렀다 자신도 저 꼴이 될까 걱정이 되었던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내아이가 입을 열었다.
-마마의 외당숙이십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외당숙?
-마마?
사내아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먼저 그는 소년을 억지로 끌어다가 아이의 앞에 들이밀었다. 자신보다 두 배는 덩치가 큰 소년이 코앞에 들이밀어졌는데도, 아이는 놀라거나 겁먹은 기색 하나 없이 둥그런 눈으로 마냥 소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엄 수경궁 마마의 사촌 아우입니다.
-애잖아.
-그래도요.
두 사람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내내 딱딱하게 굳어 있던 소년이, 불현듯 외쳤다, ‘잠깐만!’
-저, 저, 저저저, 저거, 그거야?
-어디서 삿대질이냐. 손모가지가 꺾여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형님이랑 말하는 게 똑같잖아! 형님 아우 아니야?
사내아이가 싸늘하게 타박했다.
-무슨 소리냐. 마마께서는 네···,
-아, 알아들었는데!
울상이 된 소년이 소리쳤다.
-만나면 안 된단 말이야! 내가 일황자님을 만난 걸 알면 백부님께서 당장 성을 내시면서 회초리로 내 종아리를 치실걸! 형님도 그렇지, 뻔히 다 알면서 날 여기에 데려오면 어쩌냔 말이야!
회초리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얼굴이 새파래진 소년이 부랴부랴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형님, 이 일은 모른 척 해주는 거다?’, 막 뛰어가려고 발을 구르던 소년이 직전에 사내아이를 돌아보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 소년의 뒷머리를, 아이의 싸늘한 목소리가 잡아챘다.
-백부님? 오오라, 엄태보 말이로군.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은 그 분 귀에 들어가도록 손을 써주지.
-···!
놀란 소년이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아이를 돌아보았다. 새까만 눈으로 빤히 소년을 쳐다보고 있던 아이가 손끝을 까닥까닥했다. 좋게 말할 때 이리로 오라는 뜻의 손짓이었다. 소년이 망설이자 아이가 덧붙였다, ‘실은 회초리 맞는 것을 좋아하나 보지?’ 그 말에 죽상이 된 소년이 하는 수 없이 아이의 앞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못마땅한 듯 팔짱을 끼고 서서 소년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갑자기 콧방귀를 꼈다.
-어마마마의 종제(從弟)라기에 어떤가 했는데, 지척에서 보아도 별 볼 일 없잖아.
-뭐,
-가봐.
아이가 휘휘 손을 젓고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마마, 하고 사내아이가 나직이 부르며 뒤를 따라갔지만 아이는 고집스럽게 돌아보지 않았다. 소년은 멍하니 그런 아이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화났나. 백부님께 정말로 일러바치면 어떻게 하지.’ 그 사이에 사내아이는 아이의 지척까지 따라붙어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무심코 그 편을 쳐다보았다가 소년은 깜짝 놀랐다. 자신에게는 늘 무표정 아니면 찌푸린 표정만 보여주던 형님이 걱정스런 시선을 아이에게 보내고 있었던 탓이다. 그 눈빛이나 표정 따위가 퍽 다정해 보여 울컥한 소년이 ‘왜 나만,’하고 따지려는데 귀신처럼 그것을 눈치 챈 사내아이가 도끼눈을 뜨고 뒤를 노려보았다. 화들짝 놀란 소년이 합, 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사람 키만 한 잡풀이 자란 스산한 폐가에서 저 얼굴을 보니 정말로 귀신같아서 딸꾹질이 다 나왔다.
뒤에서 들리는 딸꾹, 딸꾹, 소리를 무시하고 사내아이는 아이를 얼렀다.
-마마, 그러지 마시고,
-되었다.
아이가 사내아이의 말허리를 잘랐다. 사내아이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아이가 자신의 말허리를 자른 것이 언짢아서가 아니라 아이의 목소리가 어딘가 시무룩하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마마, 하고 조용히 부르자 아이가 중얼거렸다.
-형님과 혜야만 있으면 돼. 나 싫다는 이는 제 아무리 외종숙이래두···.
아이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당장 떨어져 나가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문이 덜커덩덜커덩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그 안에서 자그마한 여자아이 하나가 머리를 내밀었다. 직전까지 곤히 잠을 자고 있었는지 큰 눈 가득 졸음기를 매단 여자아이가 아이와 사내아이를 번갈아 한 번씩 본 다음 물었다.
-희도 제안도 언제 취영당에 왔어? 왔으면 날 깨우지 않구.
그 때였다. 계속 딸꾹질을 하고 있던 소년이 선 자리에서 튀어 오르며 소리를 질렀다.
-찾았다, 귀신! 진짜 귀신이야!
그 소리를 듣고 세 사람이 동시에 소년을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여섯 개의 눈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본 소년의 딸꾹질이 더 심해졌다. 딸꾹, 딸꾹, 딸꾹. 소년이 규칙적으로 딸꾹질을 하고 있는 가운데, 이맛살을 있는 대로 구긴 사내아이가 소년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맞는다! 위험을 감지한 사내아이가 두 팔을 내밀어 마구 손을 저으며 변명했다, ‘아니, 희 형님, 그러니까!’
하지만 그 순간 터진 여자아이의 웃음소리가 소년을 구했다. 놀란 소년과 사내아이가 여자아이가 있는 쪽을 돌아보자, 여자아이는 겨우 웃음을 갈무리하고 소년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내 별별 말을 다 들어 보았으나 귀신은 또 처음인데···.
들어오렴, 하며 여자아이가 손짓을 했다. 모두 들어와, 하고 재차 재촉하는 말에 아이도, 사내아이도 취영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땅바닥에 남아 있는 사람은 딸꾹질을 하고 있는 소년 하나뿐이었다. 여자아이가 다시 손짓을 했지만 여전히 그 이는 신을 벗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훔쳐보며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그래서 여자아이는 손을 들어 소년의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뒤에 귀신이,
-으악!
여자아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년에 신도 벗지 않고 취영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소년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문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아이가 문을 탁 닫으면서 하다 만 말을 끝맺었다.
-없다고 말하려고 했었는데.
소년이 멍청한 얼굴로 여자아이를 올려다보고 있자, 뒤에서 아이가 비웃었다.
-세상에 귀신 따위가 어디 있어.
그 순간 소년은 상대가 자신이 극구 피해야 할 일황자 문위 제안이라는 사실조차도 잊고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있다니까?!
*
-제안.
-안아. 안아야.
“······.”
문득, 빛을 본 듯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빛을···, 햇빛을 본 것 같았는데. 멋대로 우거져 마치 지붕처럼 하늘을 가린 풀과 나무로 새어 들어오는 황홀한 햇빛을. 그리고 그 밝은 빛 속에서 아지랑이처럼 보이던 작은 아이들을. 아니, 어쩌면 본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먼 과거에서 온 목소리를. 제안, 하며 친근하게 부르던 목소리···, 아직 한참이나 어려서 사내아이인지 계집아이인지도 가늠하기 힘든 목소리가 연달아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았다. 그 부름에 답하듯,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그러나, 벌어진 입술에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말이 없었다. 상처 난 성대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니 아마 목소리를 내려고 해도 되지 않았겠지만···. 그러나 그나마도 그는 시도하지 않았다. 제안. 제안. 하고 부르는 소리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의 가슴은 몰라도 머리는 잊지 않고 있었던 탓이다. 싸한 기운이 물결이 번지듯 가슴 안쪽에 번졌다.
과거. 냉정한 머리가 비웃듯이 되새겨 주었다. 다정히 부르던 그 목소리도, 함께 어울려 뛰놀던 그 모습도 모두 과거의 것이다. 과거, 제안은 멍청하게 되뇌었다. 과거. 예전의 것. 빛 바랜 것. 어느덧 잃어버리고 만 것. 손 안을 빠져 나간 것. 그리고···. 불현듯, 몽롱하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빛 대신 눈동자에 깊은 어둠이 스몄다. 우울하게 가라앉은 눈을 한 번 깜빡이면서 제안은 생각을 매듭지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것.
그것이 제안에게 있어서의 ‘과거’였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 제안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깜빡, 심마(心魔)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피를 너무 많이 쏟은 모양이다. 비록 짧은 시간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까무룩 혼절을 할 정도면. 허나 조금만 더 버티면 끝이다. 제안은 피로에 젖은 몸짓으로, 자신이 이미 잃어버린 것 대신 지금 자신의 품 안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있는 청년이 제안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비록 눈을 뜨고는 있었으나, 청년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잘린 나무에서 흘러나오는 수액 같은 진갈색 눈에는 상(像)은 맺혀 있었으나 지금쯤 그의 머리는 아무 것도 인식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제안은 청년의 입술을 한 번 엄지로 쓸었다. 제안의 엄지에 붉은 피가 묻어나왔다. 조금 묻어 나온 피조차 아깝다는 듯 제안은 청년의 혀에 손가락에 묻은 피를 녹여 그것을 삼키게 했다. 꿀꺽. 기계적으로 청년의 목울대가 움직인다. 목울대 바로 아래에 남청색 비늘이 하나 더 돋았다.
비늘. 지금 청년의 두 팔과 목 아래에는 남청색 비늘이 돋아 있었다. 첫새벽 하늘을 떼어다 붙여 놓은 듯한 아름다운 비늘이 잉어나 뱀에 돋은 비늘처럼 촘촘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누워 있었다. 청년을 안고 있는 제안의 팔에도 비늘이 돋아 있는 것은 매한가지였으나, 제안의 비늘은 납작한 흑요석을 붙여 놓은 것 마냥 표면이 단단하고 강한 광택이 도는 경린(硬鱗: 굳비늘)인데 반해 청년의 팔과 목덜미에 돋은 비늘은 잠자리 날개나 명주처럼 하르르 얇고 몹시도 연약해 보였다. 흡사 갓 세상에 난 새 생명의 몸을 보호하듯 감싸고 있는 점액처럼.
그 비유는 옳은 동시에 틀렸다. 지금의 청년이 갓난아기처럼 연약한 상태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저 청년은 갓난아기가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갓난아이조차도 되지 못했다. 그는 아직 ‘태어나지도’, ‘잉태되지도’ 못한 상태였다.
제안은 청년의 벌어진 입을 조금 더 벌리고, 자신의 입 안에 엄지를 집어넣었다. 곧 날카로운 이빨이 엄지를 물어뜯고, 흘러넘친 피가 주르륵 제안의 입술에 맺혔다. 제안이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청년의 입 안에 넣었다. 지금껏 도자기 인형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청년이, 젖을 먹는 아이처럼 제안의 피를 핥아먹기 시작했다.
탐욕스럽게 자신의 피를 빨아먹는 청년을 쓰다듬으며, 제안은 청년의 목과 팔에 돋은 비늘의 수를 세었다. 먼저 두 팔에 돋은 비늘의 수를 모두 센 제안의 눈이 청년의 목덜미로 올라왔다. 움직임을 멈춘 팔비늘과는 달리, 목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비늘이 돋아나고 있었다. 부드러운 물결이 치듯 계속해서 돋아나는 비늘을 제안이 어느 순간 작은 소리를 내어 세기 시작했다.
“일흔 여덟, 일흔 아홉, 여든···.”
눈앞이 아찔했다. 제안은 희게 바래기 시작한 시야를 바로잡으려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눈앞은 계속해서 희뿌예지기만 할 뿐, 결코 원래의 빛깔대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이제 뿌옇지만 또릿했던 시야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을 느낀 제안이 청년의 뒷머리를 잡고 그의 머리를 뒤로 한껏 젖혔다. 턱과 목 사이의 오목한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순간, 세로로 길게 서 있던 용인의 동공이 사라지고 시야가 암전되었다. 용인의 눈을 유지할 기력조차 사라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눈 대신 제안은 손가락 끝으로 청년의 목덜미를 더듬어 보았다. 비늘을 여든 개까지 세었으니 이제 턱 밑의 ‘그것’만.
손가락 끝에 여린 비늘이 하나 걸렸다. 다른 비늘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난 역린(逆鱗)이었다. 제안은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입술을 청년의 귓가에 대고, 입술 모양으로만 속삭였다.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 경아.
그리고 제안은 청년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고 자신은 몸을 일으켰다. 제안이 청년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선 순간, 청년의 온 몸을 새하얀 줄기 같은 것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올라와 끌어안았다. 곧 청년의 몸이 하얀 줄기 안에 갇혔고, 피륙의 날실과 씨실처럼 치밀하게 짜인 하얀 줄기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윽고 청년이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알 형상의 석암(石巖)만이 남았다.
하늘이 내린 진용(眞龍)이 제 힘을 모두 쏟아 부어 만들어낸 용란(龍卵)이었다.
그 모습을, 제안은 마지막 기력까지 끌어 모아 불러낸 용안(龍眼)으로 확인했다. 용란의 모습을 제 눈으로 확인한 다음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그의 몸에서 급속도로 힘이 빠져나갔다.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 보려고 했지만 결국 제안은 힘없이 비틀거리다가 결국 암벽(暗壁)에 등을 기댔다. 울퉁불퉁한 벽에 등을 댄 채로 그대로 그가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제안이 용란이 있는 자리로 보이지도 않는 눈을 고정하고 나오지도 않는 말을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경아, 네가 잘 견뎌 주어서, 살아 있어 주어서, 그래서.
이제 할 일은, 네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것 뿐.
하지만 곧 제안의 얼굴에서 안도의 감정이 씻은 듯 사라지고 대신 짙은 피로감이 그 자리를 채웠다. 제안은 떠지지 않는 눈꺼풀처럼 입술마저 닫은 채로 뒤통수를 벽에 붙였다. 알 껍질 안에 갇힌 서문경 이상으로 지금의 제안은 무기물(無機物)적으로 보였다. 그 공간 안에 적막이 감돌았다. 두 사람이 아닌, 제안 한 사람만이 만들어 내고 있는 그 적막은 무겁고 건조한 동시에, 기묘하게도 탈력한 듯한 기색마저 흐르고 있었다. 제안이 문득 중얼거렸다, ‘이제 할 일은.’ 그가 조금 뒤 말을 고쳤다, ‘아니,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뿐.
심판을, 기다리는 것 뿐.
그가, 서문경이 껍질을 깨고 태어나, 이곳에 있는 자신을 보았을 때. 제안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불안의 그림자가 어렸다. 그래. 이제는 갈림길이었다. 서문경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알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모든 기억을 받아들이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거나, 기억을 거부하고 정신까지 완전히 새로이 태어나는 것.
만일 후자(後者)라면 자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유예(猶豫)를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너를 위해서만 세상을 살며 너를 빛에서만 키워낼 것이고,
···만일, 전자(前者)라면.
모든 것을 받아 들여야겠지.
네가 슬퍼한다면 함께 슬퍼하고, 네가 나를 원망한다면 그 앞에 영원히 머리 숙여 죄의 무게를 짊어질 것이며,
그리고, 네가 나를 저주한다 하면···.
“······.”
그럴 리가 없는데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슬펐다. 그가 자신을 저주한다 하여도 끝끝내 그의 인생으로부터 사라질 결심만큼은 서지 않는 것이.
그런 자신의 집착과 비겁함이 치가 떨리게 비참했다.
*
몸을 구성하고 있는 뼈와 살과 거죽 따위가 모조리 솜털로 변해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이대로라면 가볍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에도 훌쩍 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몸이 너무나 가벼워져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데 반해, 혈관에 피가 흐르고 심장이 쿵쿵 뛰며 피를 내뿜어대는 감각은 이전의 몇 배나 민감하게 느껴졌다. 저절로 숨이 가뼈져서 어쩔 수 없이 온 몸을 웅크렸다. 세운 두 무릎을 팔로 끌어안고, 무릎 위에 머리를 뉘였다.
둥실. 순간적으로 발이 바닥에서 뜨는 기분이 들더니, 온 몸 전체가 가볍게 떠올랐다가 천천히 제 자리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물속에 잠겨 있었다.
이 ‘공간’이 그리 넓지 않다는 사실은 굳이 눈으로 보거나 손을 뻗어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그 공간은 계속해서 좁아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움직이는데 무리가 없을 정도의 여유는 있지만, 이 속도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에 꽉 맞춘 크기까지 작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된 까닭인지, 그는 조금도 위기감이나 불안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스스로도 의아해서, 그는 생각했다. 왤까. 답은 곧 나왔다. 그와 공간 사이에 있는 빈틈을 채우고 있는 물 때문이다. 기분이 좋을 정도로 미지근한 물은 적당한 점성이 있어서, 그 물 안에 둥실둥실 떠 있으면 햇볕 냄새가 나는 푹신한 잔디밭에 푹 안겨 따뜻하고 다정한 손길에 어루만져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 금방 머릿속에 작은 물방울 같은 것이 뽀그르르 올라와 톡 터졌다. 그 순간 ‘기억’이 났다. 이 상황이 그는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언제였더라, 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귀조(歸潮: 썰물)하는 바다처럼, 기억이 뒤로, 뒤로, 계속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다 잠시 거슬러 올라가기를 멈췄다. 이와 같은 느낌을 근래에 느껴본 적이 있었다. 깊고 따뜻한 물에 온 몸이 잠겨 있었던 기억.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어딘가 달랐다. 그 때의 물은 다정했지만 지금처럼 마냥 부드럽다기보다는 오히려 강인했고, 그 때 무엇보다도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그가 잠시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럼 누구와 함께 있었지? 하지만 금방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기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멈춘다. 파르르 몸이 떨렸다.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안은 두 팔에 더욱 더 힘을 주었는지 그 주변의 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소리 없이 몸에 감겨드는 물이 무서워할 필요 없다고 달래 주는 것만 같아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용기를 내어 그는 직전에 떠올렸던 기억을 주머니에서 끄집어냈다. 아.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신음이 흘러 나왔다. 역시 무섭다. 아니, 공포와는 조금 다른 감정이다. 그럼 뭐라고 표현해야 옳을까···.
‘감당할 수 없다’. 그래.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크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상냥하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다. 그래, 언젠가···, 자신의 온 몸을 끌어안아 주었던 그 물은 지금과 바로 이전의 ‘물’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대양(大洋)이었다.
그 안에서 자신은 한 점의 티끌에 불과했다. 그것을, 대양은 놓치지 않고 안아 온기를 베풀어 주었다. 그러나 대양과 자신은 근본부터 다른 존재였다. 대양은 세상의 어떤 무엇보다도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은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한 차원 높은 곳의 존재가 생각하는 행복과, 그보다 한참 낮은 차원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생각하는 행복이 같을 리가 없으니까. 인간의 행복과 개미의 행복이 같을 리가 없듯, 대양이 베풀어 준 온기가 자신이 바라는 것과 직결될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무서웠다. 자신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누군가는 신(神)이라고 부를지도 모를-에게서 느끼는 본능적인 경외 외에도, 그 대양이 자신에게 베풀려고 하는 호의가, 그 호의가 만들어낼 결과가 두려웠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은.
겨우 가라앉았었던 떨림이 다시 되살아났다. 무릎을 바짝 가슴으로 끌어당기고 필사적으로 몸을 끌어안았다. 가지처럼 뻗어 있는 팔다리를 아예 본 몸뚱이로 붙여 한 덩어리가 되고 싶다는 듯이. 사실이 그랬다. 그 순간만큼은 그렇게 간절히 생각했다, 차라리! 차라리 머리고 팔다리고 그딴 것 하나 없이 하나의 둥그런 덩어리가 되어 버렸으면, 그랬으면, 그랬으면! 그런 생각이 간절해졌다. 기억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던 탓이다.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되어서 틈 하나 없게 되면, 내게서 빼앗아 갈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자신은 정신을 잃은 채 둥실둥실 대양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서 소중한 것이 하나씩 하나씩 뽑혀져 나간다. 강제로 뽑혀 나온 그것이 미련이 가시지 않은 듯 자신의 머리를 몇 바퀴나 맴돌다가, 아아. 신음을 흘렸다. 점점 대양에 녹아버린다. 그저 과거의 기억에 지나지 않는 광경인데도,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머리와 배가 시렸다. 무서웠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만. 제발 그만, 그는 간절하게 생각하며 강제로 기억을 위로, 더 위로 끄집어 올렸다. 계속 대양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가는 자신이 곧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숨 가쁘게 기억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이 계속해서 위로 거슬러 올라가기만 할 뿐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되짚어 올라가도 목적한 곳에 닿지 않아, 순간적으로 착각을 했나 생각했을 정도였다. 헷갈린 것이 아닐까, 대양에서의 기억이 지금의 감각과 흡사한 마지막 기억이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저 비슷한 것이 아니라, 이와 똑같은 느낌을 그는 분명 느껴본 적이 있었다.
얼마 만큼인지 가늠도 하지 못할 시간이 흘렀다. 그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역시 착각이었었나. 그러나 그가 완전히 지쳐 기억을 더듬는 것을 포기했을 즈음. ‘그 기억’이 찾아왔다.
그는 직감했다. 최후의, 그리고 최초의 기억이다.
그가 있는 곳은, 지금 이 공간보다도 더 좁고 어두운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안온했고, 그는 아무런 불안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 안은 마치 대양 같은 느낌이 났다. 더 없이 따스하고, 더 없이 다정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무섭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자신은 한낱 티끌이 아니었다. 그 공간과 자신은 대양과 자신과의 관계처럼 거대한 바다와 티끌이 아닌, 그저 크기가 조금 차이가 날 뿐인 동등한 객체였다. 나에게는 그 공간만이 자신을 제외한 전부였고, 그 공간이 인식하는 것도 자신만이 전부였다. 그는 더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대양’처럼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미 그 공간에는 이름이 붙여져 있고 자신도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기억을 다시금 더듬어 보려 했지만 이번에는 생각보다도 먼저 몸이 움직였다. 직감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볼 필요도 없는 것은, 이것이 자신의 기억이 아닌 탓이다. 이것은,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침입한 어떤 것. 다른 사람의. 내가 아닌···,
그 때, 입술이 꿈틀 발작하듯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입술이 내뱉었다.
“엄마.”
엄마···.
그 공간이 어머니의 뱃속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동시에 그는 자신이 지금 들어 있는 곳이 그와 비슷한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아 버렸다. 그가 지금껏 알고 있던 상식이 혼란스럽게 일그러진다. 다시 태어난다고. 이런 것이 어떻게 가능하지?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쩍.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계속해서 작아진 벽이 그의 살갗에 닿았다. 그는 연속해서 깨달았다. 공간이 작아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자신이 커지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지금, 공간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지직,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그는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가 손을 뻗어 종으로 길게 금이 간 벽을 밀었다. 힘을 주어 밀자 금이 더 깊어지고 커졌다. 그는 차오르는 숨을 힘겹게 내뱉으면서 간절히 생각했다. 나가고 싶어. 여기서, 밖으로 나가고 싶어···!
그리고 결국 세계가, 알이 무너져 내렸다.
굉음과 함께 세계가 무너지며 찬 공기가 확 피부로 직접 몰려왔다. 두 눈을 부릅떴다. 찬 공기 때문이 아니었다.
“···!”
찬 공기 따위는 느낄 수도 없는 강렬한 충격이, 멍하던 머릿속을 직접 강타했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신음을 흘렸다. 흐릿하던 기억이,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에 몰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