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5/66)

*

일일(一日)이 거의 저물어가고 있었다. 

남아 있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반시진에서 한 시진, 아마 금일(今日) 하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진이 좋지 못했던 날이었을 것이다. 황제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비밀스러운 야심(野心)에 찬물을 뒤집어 쓴 궁부 관료들에서부터 시작하여-하고 생각하면서 그는 혼기가 찬 여식(女息)을 둔 직료(職僚) 몇몇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과연 영로당까지 찾아와 아우성을 부려대던 이들의 선두에 있었던 그 이들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천제사만은 막아 보려고 고뿔이 든 척 자리를 펴고 드러누웠다가 한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태황태후까지. 

거기까지 생각한 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픽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열이 머리꼭대기까지 오른 태황태후가 애꿎은 태감 봉승의 머리를 쑥대강이로 만들어 내친 것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 이가 정말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던 자는 십중팔구 서엽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더더욱 비슬비슬 웃음이 새어 나온다. 가끔 대가리란 놈이 달려 있기나 한 것인가 싶을 만치 멍청한 짓거리를 해서 짜증이 나게 만드는 것만 제하면, 참으로 재미있는 치였다. 

허나 금일 모든 사람들이 겪은 불행을 모두 합쳐보아도 그 이의 것에는 댈 수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현이 그 아이의 나쁜 운수는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형편이었으니 말이다. 

끼릭. 날 선 마찰음이 났다. 도자기에 난 홈을 같은 재질의 무언가로 비비는 듯한 소리였는데, 날카롭다고 표현하기에는 끝에 쑥 먹혀들거나 잦아드는 느낌이 들어 어딘가 둔탁하게 들렸고 소리의 크기도 무척 작았다. 이 장소가 이토록 고요하지만 않았다면 아마 사람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을 소리였다. 그 뒤에 탁,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누군가가 들었다면 안에 온통 내용물이 들어찬 묵직한 항아리나 유리병 따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엽이 방금 내려놓은 도자기 항아리는 안이 텅텅 비어 있었다.

콱 항아리의 입구를 봉한 서엽은 대충 그것을 옆에 치워 놓고 대신 초라한 토기에 손을 뻗었다. 그 투박한 표면을 손끝으로 매만지면서 서엽은 시선을 돌렸다.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암실 안이었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눈은 익숙하게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서엽의 입이 불현듯 열렸다.

“태황태후의 동의를 받아 냈사옵니다.” 이 암실 안에는 그 외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건만, 마치 자신 외의 다른 이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듯한 태도였다. “천제사만큼은 지내지 않으려 끝까지 어깃장을 부리려 했으나, 될 턱이 없지요. 일황자의 힘을 현아가 뚫지 못한 것을 제 눈으로 본 증인이 몇 명인데요. 결국 그 년도 어쩔 수 없었사옵니다.”

그렇게 말하는 서엽의 시선은 암실 사방에 그려진 벽화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었다. 암실 천장에 그려진 황룡 벽화에게서 시선을 돌리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의 전례로 볼 때, 가변례에 걸리는 시간은 통상 엿샛날 정도였사옵니다. 일황자가 가변례를 마친 후 귀궁(歸宮)하였을 때 곧바로 천제사를 치를 수 있도록 시일과 장소를 정하였습니다. 필시 일황자는 꺼려할 것이나, 결코 거부할 수는 없도록 손을 쓸 생각이옵니다. 다만···,”

걸리는 것이 하나, 하고 덧붙이는 서엽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신중하였다. 

“일황자는 황룡이 아닌 것 같았사옵니다.” 그렇다 한다면 그는 청룡일 가능성이 높사온데···. 서엽의 얼굴이 잠시 깊은 근심에 잠겼다가, 곧바로 씻은 듯이 개였다.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이 인위적이기 짝이 없었으나 그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허나 염려하실 것 없사옵니다. 이전의 과오를 똑같이 답습하는 멍텅구리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염려 놓으시고 조금이라도 더···.”

그 뒤의 말은 입 속에 묻혔다.

서엽은 토기를 조심스럽게 본디의 자리로 돌려놓고, 머리는 토기를 향한 채 몇 발자국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서 그는 마루나 깔 것도 깔려 있지 않은 맨 바닥에 두 무릎을 대고 앉은 후에 천천히 절을 했다. 조금 뒤 머리를 든 그가 흡사 황제나 황후의 안전(案前)에 하듯이 고하였다. 

“신 황아 서엽은 이만 물러가 보겠나이다. 다시금 찾아 뵐 때에는 좋은 소식과 함께 배후(拜候) 드릴 터이니 기다려 주시옵소서. 그 날까지 부디 무강하소서.”

*

막 처소로 돌아가던 염락 조원은 도중에 불현듯 발을 멈췄다. 찬 밤바람이 그가 있는 곳으로 막 쓸려 들어온 탓이다. 비단 차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절로 보얀 흙바람이 일어날 만치 바람이 거세어서 티끌이 들어간 눈이 쓰라려왔다. 

넓은 옷깃으로 눈을 가리고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던 조원은, 잠시 후 멀리서 들려오는 익숙한 파도 소리에 무심코 눈을 돌렸다. 흡사 바다에서 잔파도가 치는 것 같은 소리···, 등불도 들지 않고 어둠 속을 걸어오느라 미처 모르고 있었건만 어느새 창혜각 후원의 대밭까지 당도한 모양이었다.

파도 소리.

익숙한 소리로 울고 있는 대밭을 별 생각 없이 지나치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다시 멈추어 섰다. 그러나 스스로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어서, 조원은 의아한 얼굴로 머리를 모로 기웃하고, 발을 옮기려 했다. 그 때, 때마침 또 바람이 불었다. 쏴아아-, 길고 야윈 대나무들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출렁 몸을 누이며 찬 울음을 운다. 그 소리를 듣자 갑자기 뒷머리가 서늘해졌다.

“내, 참···.” 

그러다가, 대나무가 출렁이는 소리 따위를 듣고 얼어붙은 듯 굳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자 픽 헛웃음이 나왔다. 청의관 수객의 흉내라도 내려는 겐가. 반사적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무심코 떠올려 버렸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 그 이가 창혜각으로 자신을 찾아 온 적이 있었더랬다. 그 때 마침 자신과 그가 나란히 후원 대밭을 지나다가 문득 바람이 불어와서는···. 조원의 입가가 단단해졌다. 어째서일까. 당사자인 조원 자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그는 아직도 그 때 바로 이 자리에서 서문경이 지었던 표정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절망을 마주한 이의 표정이 그러할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과 슬픔과 체념으로 범벅이 된 얼굴. 

“돌아가고 싶다고 했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인적 없는 밤길을 홀로 걸으며 자신이 내내 청의관 수객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조원은 비로소 몸을 돌려 후원 대나무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슴 속에서 아릿아릿 희미한 고통이 느껴지는 반면, 근래에 내내 뭉친 것처럼 아파왔던 뱃속이 비로소 탁 풀리는 기분이 든다. 기가 막혀서, 원. 조원은 허탈하게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것 때문이었던가. 정말로 기가 막혀서, 무어 그리 각별한 사이였었다고.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부정할 수 없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으나, 청의관 수객이 내내 신경이 쓰여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모든 ‘손님’들이 자신과 비슷한 응어리를 품고 있을 수도 있으리라.

자신들과 같은 ‘손님’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반죽음할 정도로 난도질당했다. 그것도 누명을 쓴 채로. 어찌 동요하지 않을 수 있으랴. 

청의관 물손님은 창혜각 하늘손님과는 이 세계에 오게 된 이유도, 타고 온 길도, 그 과정에서 얻고 잃은 것도 판이하게 다르지만 결국은 한 핏줄에서 난 형제 같은 존재였다. 아니, 물손님에게는 하늘손님들이 전혀 그런 존재로 여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조원 자신이 물손님이 아니니, 물손님의 속내 따위는 알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하나, 조원은 자신과 같은 하늘손님들이 물손님에게 품고 있는 이중적인 감정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물손님을 업신여기고, 누군가는 동정하며, 또 누군가는 적대적인 감정을 품을 지도 모르나,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그들 모두에게는 물손님에 대한 공통적인 감정이 존재했다.

···가지 못한 길.

물손님은 하늘손님들에게는 가지 못한 길이었다. 그리하여 언제나 손가락에 걸린 작은 가시처럼 계속해서 눈이 가고 신경이 쓰이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조원은, 참살 당하는 역의 배우처럼 축대 위에서 끔찍하게 난도질당하는 서문경을 보았을 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다른 하늘손님들처럼 청의관 수객과 말 한 번 섞어본 적이 없는 사이였더라도 그럴 터인데, 더구나 자신은 그와 몇 번이고 말을 섞고 근간(近間)의 시간을 공유했었다. 열에 들떠 냉정함을 잃은 그가 돌아가고 싶다 울부짖었던 것을, 파도소리를 닮은 바람소리를 듣고 두려움에 질려 굳어 있었던 것을 보고 들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 또한 그의 죽음에 한 몫을 한 것인지라 더더욱 그 장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로부터 한참은 기분이 가라앉아 원래대로 돌아오지를 않았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토록 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었던 아이를 죽였다. 그 감정은 슬픔이라고 부르기에도, 죄책감이라고 부르기에도 어딘가 모호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지 않은 길 위에 있는, 또 다른 세상의 자신을 살해한 듯한 기묘한 기분이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아직은 숨이 멎지는 않았다 하나···,

“곧 그리 되겠지.”

들을 사람도 없는데 그렇게 입 밖으로 내어 말하고 말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무력감으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될 것만 같았다.

고개를 한 번 강하게 가로젓고는 조원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냈다. 더 이상 청의관 수객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우울한 생각을 덮어버리기 위해 아직 색 바래지 않은 근래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러자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창혜각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다. 또인가. 이맛살을 구기며 생각했지만 이미 한 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쉽사리 다른 것에 자리를 비켜 주지 않았다. 조원의 의지와는 별개로 멋대로 생각이 진행되었다.

서엽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더랬다. 황제가 청의관 수객을 잃은 비분(悲憤)을 견디지 못해 가변례를 강행하려 든다는 이야기였다. 헌의공 그 어르신을 사욕으로 눈이 시뻘게진 고관들이 헐레벌떡 모셔 갔으니 어쩌면 그 계획은 수포(水泡)로 돌아갔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혹여, 그대로 가변례가 치러진다면.

조원은 작은 한숨을 삼켰다. 안 될 일이다. 그리 되었다가는 청의관 수객뿐만이 아니라 황제 또한 목숨을 잃게 될 터이니. 가변례를 치르지 않는다면 하나가 죽고, 가변례를 치른다면 둘이 죽는다니 후자보다는 차라리 전자가 낫지 않겠는가. 안타깝지만 청의관 수객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몸이니 황제 혼자라도···.

그렇게 생각하다가 조원은 강제로 생각을 멈추고 눈살을 구겼다. 누가 죽고 누가 다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그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만 이루면 되는 것을, 마치 이 나라 사람인 것처럼 오지랖을 떨고.

계속해서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몸이 허한 모양이다. 조원은 내심 한숨을 쉬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이 깊었으니 일단은 처소로 돌아가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때였다.

“염락? 염락이신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서 조원은 다시 걸음을 멈춰야 했다. ‘희조?’, 자신을 부른 이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린 조원의 눈이 곧 함지박만 해졌다. 돌아본 곳에 보이는 등불이 한두 개가 아니었던 탓이다. 어두운 대숲 너머로 유령불마냥 수 십 개의 등불이 넘실거렸다. 물론 대밭을 건너질러 창혜각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들이 든 불이다. 조금 더 가까워지자 등불에 비쳐 얼굴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모두가 익숙한 얼굴. 창혜각 하늘손님들이었다.

그들 중 아까 이름을 불러 조원을 불러 세운 천객이 어어이, 하고 팔을 저으며 다가와 말했다.

“어인 일이야?”

“그것은 내가 해야 할 말일세.” 조원이 한 방향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천객들을 한 번 둘러보고 대답했다. “자네들이야말로 어인 일이야? 그것도 이런 밤중에···.”

“자네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조원의 말에 희조 강운이 답답하다는 듯 반문했다. 대답 대신 조원이 눈썹만 슬쩍 치켜 올려 보이자 성질 급한 희조가 버럭 내뱉었다. 

“정녕 연통을 못 받았나? 모두 천추전으로 모이라지 않았어? 헌데 왜 자네는 끝끝내 아니 왔는가?”

“천추전에?”

조원이 눈을 크게 뜨며 그렇게 묻자, 창혜각 천객들이 일시에 잠잠해졌다. 그들이 웅성거리면서 답을 구하듯 서로의 얼굴을 두리번거리더니, 결국 다시 침묵에 잠겼다. 이번에는 조원의 얼굴에 난감해하는 듯한 시선을 꽂은 채였다. 이번에도 희조 강운이 나서서 말했다, ‘자네 참말로 전언을 듣지 못한 모양이로군.’ 조원이 얼버무렸다.

“마침 일이 있어 낮부터 내내 바깥걸음을 하였었거든. 그 탓이겠지.”

“그런가.”

“그러한데 자네들은 무슨 일로 천추전까지 다녀왔는가? 천추전이라면 황상의 침전이 아니야. 황상의 침전에 우리네들이 무슨 용무가 있어서.”

그 말에 희조 강운이 음, 하며 침중한 신음을 흘렸다. 답하기 곤란하다면 아니하여도 되고. 얼른 처소로 돌아가 쉴 심산으로 조원이 그렇게 말하자, 희조 강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른 천객들을 향하여 휘휘 손을 내저었다. 등불을 든 사람들이 의례적인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하나둘씩 흩어져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제 갈 길로 흩어지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눈빛 따위가, 둥둥 목적도 없이 물 위를 떠가는 연등처럼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 챈 조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다들 상태가 어찌 저래? 초가을 바닷가의 해월(海月)도 아니고.”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대꾸하는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 있어서 조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희조 강운이 말을 이었다.

“황상께서 가변례를 강행하시었어.”

그것은 조원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모르는 척 입을 닫고 있는 편이 나을 듯하여 조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희조 강운은 그런 조원을 딱히 의심스럽게 여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안 될 노릇인지라 많은 이들이 천추전으로 몰려갔네. 허나 사람들이 천추전에 당도했을 때에는 이미 폐하께서 진을 치고 예에 들어가신 뒤였어.”

“그래···, 이제 알겠군.”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조원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체제공을 보필하러 다녀왔었군.”

그래서, 하며 조원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황상은 어찌 되셨는가? 태의가 침전에 들어 있겠지? 진이 파쇄 되었다면 폐하의 용체에도 전혀 타격이 없을 수는 없을 테니.”

그러나, 그렇게 묻고 아무리 기다려도 희조 강운에게서는 그렇다 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 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조원이 ‘희조?’하며 찌푸린 눈을 희조 강운에게로 돌렸다. 그러자 무섭도록 표정이 굳은 희조 강운이 제 발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희조?”

“무언가 잘못 된 것이 분명해.”

“무슨 소린가 그것이?”

희조 강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네. 나도 몰라. 나 또한 그 자리에 있었으나···,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니 믿을 수 없어. 아니, 믿지 않겠네.”

“희조!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해보게.”

“어떻게 자네를 납득시킬 수 있겠나!” 희조 강운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가 바로 다음 순간 사그라졌다. 그가 연신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나 또한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자네를 납득시킬 수 있겠어···.”

그리고 그가 한참을 침묵하다가, 어느 순간 불쑥 내뱉었다.

“체제공께서 황제의 진을 깨는데 실패하셨어.”

“···뭐라고?”

“황제는 용의 둥지에 모습을 감췄네.”

그럼. 스스로의 귀를 의심하며 조원이 말했다.

“그럼, 가변례가 중지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일부러 둥지로 숨은 까닭은 그 외에 무엇이 있겠나?” 

그렇게 내뱉어 놓고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말투가 조금 날카로웠다 싶었는지 희조 강운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그가 우물거리며 사과했다.

“미안하이. 내 머리가 좀 복잡하여서 그만···.”

“아니.” 조원이 눈을 내리깐 채로 손만 조금 저었다. “사과할 필요 없네. 자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니까.”

“염락, 괜찮다면,”

“나도 지금은 머리가 많이 복잡하군.”

눈치가 빠른 조원에게 이 일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싶었는지 희조 강운이 조심스럽게 던진 말을 자신도 모르게 끊어 놓고서 조원이 뒤늦게 아차했다. 조원은 힘주어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건가. 차라리 희조의 말을 듣고 이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옳은 판단일진데. 

그래 놓고 조원은 단박에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아니, 아니다. 체제공이 억지로 천추전에 불려 왔다면 그것은 필시 헌의공 그 어르신의 판단에 따른 것일 터. 그렇다면 희조보다는 헌의공을 찾아 자세한 설명을 듣는 것이 낫다. 허나 그 어르신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생각의 축이 팽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아니, 사실은 처음부터 신경을 기울일 이유가 없는 사안이 아닌가. 듣자하니 체제공이 얽힌 대충의 일은 모두 끝이 난 것 같고 남은 것은 황제와 청의관 수객이 얽힌 가변례 밖에 없는 것 같으니, 더 이상은 자신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아니, 아니, 하지만. 조원은 머리 한 편을 썩둑 잘라내고 싶어졌다. 제대로 정리되지도 않은 생각들이 중구난방으로 얽혀 그렇지 않아도 어지러운 머리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문득 조원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잘근거렸다. 애초에, 왜 이렇게 자신이 동요하고 있는 것인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조원이 너무도 칼같이 제 말을 끊은 것에 머쓱한 기분이 들었는지 희조 강운이 ‘그럼.’하며 물러가려는 기척을 냈다.

“기다리게.” 

그런 희조 강운을 조원이 자신도 모르게 붙잡았다. ‘머리가 복잡하다지 않았나?’, 희조 강운이 의아하다는 듯 물어온 말에 조원은 대답했다.

“그것은 그렇네만, 이대로는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으이.” 그러니, 하고 말을 이으면서 조원은 자신이 들어도 자신이 지금 지껄이고 있는 말이 몹시 변명 같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자네와 이야기라도 나누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나은 듯 싶어.”

변명. 희조 강운이 아닌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변명 말이다.

*

밤낮이 뒤집히고 시간이 상실되고 결국은 겨우 되찾은 오감마저도 빼앗겼다. 도대체 몇 번이나 밤낮이 바뀌고 며칠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어졌다. 시간의 흐름이나 일출이나 일몰 따위를 떠올릴 여유도 없이 ‘그’는 그 행위에만 탐닉했다. 되살아난 오감은 그 외, 외부의 것들에는 반응하는 힘을 잃어버렸다. 

처음에는 그 행위가 대체 무엇인지, 움직일 때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각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손을 뻗어 자신과 겹쳐져 있는 이의 목과 등을 감고,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바싹 몸을 붙이고, 허리를 움직였다. 그보다 약간 더 시간이 지나자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쾌락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더 큰 쾌락을 얻을 수 있는 방법도 알았다. 

더, 조금 더, 조금 더. 목마른 사람처럼 허덕이며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는 이를 자극했다. 양 팔 아래의 오목한 곳으로 팔을 밀어 넣고 휘어 감듯이 등을 감싼 다음 뜨거운 목덜미에 이를 세우면. 벌려진 다리 사이로 들어와 있는 그가 몸을 쳐올릴 때마다 흔들리는 다리로 그의 허리를 꽉 조이면. 가쁜 숨이 흘러나오는 입술에 깊이 입술을 겹치면. 그 때마다 자신의 몸 안에 드나들고 있는 뜨겁고 딱딱한 것이 더더욱 깊숙하게 박혀 들어오고 젖은 안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곤 했다. 

그것은 집요하고 탐욕스러웠다. 그는 그 뜨겁고 길고 딱딱한 것이 몇 번이나 자신의 안을 휘저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이 뿌리까지 안으로 박혀 들어올 때마다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터지고, 땀에 젖어 말랑말랑해진 살에 마찬가지로 젖은 살덩어리가 문질러졌다. 이제 살이 부딪치는 소리는 잔뜩 물기에 젖어 거의 찰박찰박 물을 튀기는 소리와 비슷해져 있었다. 그것이 들어올 때마다, 안에 가득 차 있는 액체가 콱 맞물린 틈 사이로 흘러내린 탓이다. 지금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허벅지를 떨었다. 허벅지 안쪽의 예민한 살갗으로 그 끈적거리는 액체가 핥듯이 흘러내린 탓이다. 그 때 자신도 모르게 잔뜩 근육을 조였는지 안에서 또 한 번 뜨거운 액체가 터졌다. 

“응···.”

저절로 응석을 부리는 듯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몸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온 몸의 힘이 턱 풀렸다. 그 사람의 등을 끌어안고 있던 손도 주르륵 미끄러졌다. 

툭, 하고 손이 떨어지는 소리에 머리를 모로 돌려 멍청히 손끝을 바라보았다. 밤중의 꽃잎처럼 위로 느슨하게 다물려 있는 손가락 끝은 정말 꽃물이 든 것처럼 빨갛게 물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붉은 물이 꽃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 끝을 꼬물거리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온 몸으로 자신의 몸을 덮으며 깊게 입을 맞춰 왔다. 

익숙하게 타인의 혀를 받아들이며 생각했다. 피 맛. 저 사람의 혀에서는 짙은 피 맛이 났다. 금방 자신의 입 안까지도 피 맛과 피비린내가 감돌아 비위가 상했지만 그는 그 사람을 밀어 내지는 못했다. 도리어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 사람의 등을 감쌌다. 그의 손바닥이 남자의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그 손길이 남자를 위로하는 것처럼 보였다.

울고 있나? 안개가 낀 듯 몽롱한 머리로 그는 생각했다. 흐릿한 시선에 들어온 남자의 얼굴은 눈물은커녕 갈라질 것처럼 잔뜩 메말라 있었지만 그는 생각을 고치지 않았다. 남자의 등을 한 번 더 토닥거리며 그는 생각했다. 울 수 있었다면, 저 이는 아마도 울었을 것이다. 틀리지 않았어, 하고 다시금 생각하면서 그는 자신의 입 안을 난폭하게 휘젓는 남자의 혀를 다정하게 쓸어 주었다. 

삿된 것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탐닉하고 있는 남자는 거칠고 집요했지만 그는 속지 않았다. 난폭하게 입 안을 휘젓는 혀에서도, 끈질기게 자신의 몸을 더듬고 주무르는 손끝에서도 짠맛이 났다. 아니, 짠맛이 난다고 느꼈다. 거친 손도, 사나운 혀도 그렇기 때문에 더 애절했다. 슬픔이나 설움 따위의 감정이 복받쳐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느낌이었다, 저 남자는. 

“아픈가요?”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충동적으로 물었다. 남자의 몸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파서 그러시는 건가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이 남자의 등을 토닥이고 있던 자신의 손끝에 가 멎었다. 정작 자신의 지척에 있는 남자의 얼굴은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에 물든 것처럼 검게 보였지만, 내내 남자의 등을 쓰다듬고 토닥였던 그의 손은 피로 온통 붉게 변해 있었다. 심지어 그 피는 굳어 있지 조차 않았고 말라붙은 검붉은 빛이 아니라 선홍색이었다. 남자의 몸에서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탓이다. 

그의 볼에 남자가 입술을 가만히 붙이는가 싶더니, 그의 입술이 속삭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볼로 남자의 입술을 읽었다.

괜찮다.

그는 얼굴을 들었다. 때마침 남자의 얼굴에서 뚝, 하고 피 한 방울이 떨어져 그의 미간에 떨어졌다.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계속해서 피가 나는데, 뭐가 괜찮은 건가요.”

말해 놓고 나니 따지는 듯한 어조라서 조금 어깨를 움츠렸다. 화를 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그가 고민하고 있는데 불현듯 남자의 입술이 빙그레 완만한 호선을 그리며 치켜 올라갔다. 어쩐지 대견해 하는 듯한 미소라서 그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피를 뚝뚝 흘리면서 뭐가 좋다고 웃는 건지. 저렇게 계속 피를 흘리다간, ···흘리다간. 그가 멈칫 생각하기를 멈추고 눈을 깜빡거렸다. 순간적인 어지럼증이 일었다. 피를 계속 흘렸다간, 어떻게 되는 거였더라? 당연한 사실이 이상하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때 남자가 입술로만 말했다.

정말로 괜찮다.

“괜찮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렇게 피를 계속 흘리면···,”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다시 말을 멈춰야만 했다. 정말 어떻게 되는 거였지? 남자가 그런 그를 말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불현듯 물었다, ‘어떻게 되지?’ 그를 시험해 보기라도 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그것에 발끈해서 내뱉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나는 대로 내뱉어 놓고서 그는 곧바로 머리를 모로 기웃했다. 죽을 수도 있다고? 그렇던가? 분명 몸은 쇠약해지겠지만 그렇다 해도 죽음에 이를 정도까지는···. 하지만 저 정도로 피를 흘리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니, ···사람? 사람이라면? 그렇지만.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누가, 사람이지?”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남자의 웃음이 짙어졌다. 어딘지 안도한 듯한 웃음, 그렇지 않아도 혼란에 빠져 있던 ‘그’의 눈이 더더욱 커졌다. 그런 그를 보며 남자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래서 짐이 말했지 않느냐. 아무런 탈도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입술을 읽어낸 다음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꺼져 가고 있잖습니까.”

‘그’는 손을 올려 남자를 가리켰다.

“빛이.”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눈에는 남자의 상처 난 육체를 안개처럼 감싸고 있는 검은 빛이 보였다. “빛이 약해지고 있어요.”

그래서 그는, 남자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닌가요.”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처음 당신을 봤을 때 그 빛은 이 장소를···,” 

거의 메우고 있을 정도였었는데, 하고 말을 이으면서 그는 새삼스럽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랬다가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째서 몰랐지? 

그와 남자가 있는 곳은 여전히 바로 앞에 있는 물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으나, 그 어둠의 색은 처음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전의 것이 경도(硬度)마저 느껴질 정도의 무거운 순흑(純黑)색이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만연한 어둠은 흑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남흑(藍黑)색에 가까웠다. 

‘그’는 남자의 주변에 퍼져 있는 그 검은빛에 손을 뻗었다. 그것이 ‘그’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흩어지거나 사그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아지랑이처럼 보였다.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어둠을 가늘어진 눈으로 보고 그가 중얼거렸다, ‘역시.’ 

“죽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뭔가 잘못되고 있잖아요.”

“······.”

“귀곡성(鬼哭聲)이 들려요.”

울고 있다. 차마 남자의 곁에는 다가오지도 못하고, 저 멀찍이 물러나 있는 것들이. 마치 암귀(暗鬼)처럼 보이는 것들이, 구슬프게 울게 있다. 남자의 강건했던 힘이 점점 쇠하여 가는 것을 진심을 다하여 슬퍼하고 있다. 

그에 반해. 그의 시선이 조금 옆으로 옮겨갔다. 남자의 주변에 퍼져 있는 흐릿한 안개 같은 감은빛 사이에 유독 뚜렷하게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검은빛이 있었다. 바로 남자의 등에 두른 ‘그’의 손을 감싸고 있는 검은빛이었다. 남자의 것과 ‘그’의 것은 비록 같은 검은색이지만 그 두 기운은 똑같이 검은빛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있었다. 남자의 기운은 비록 거대했지만 희미했고, 또 계속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의 기운은 작지만 심지를 박아 넣은 것처럼 단단해 보였으며 그 빛이 대단히 고르고 건강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처음 눈을 뜨고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빛을 인지했을 때는, 오히려 남자의 기운 쪽이 자신의 것보다 훨씬 강하고 단단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기운이 힘을 얻으면 반대로 남자의 기운은 그만큼 힘을 잃고 있었다. 마치···. 그는 생각을 잇기를 잠시 망설였다. 이 다음 생각을 하는 것이 어딘가 조심스러웠다. 

“혹시 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당신의 힘을 빨아들이고 있는 겁니까.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을 잇기도 전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말했다.

네가 염려할 일이 아니다.

그 말에 ‘그’의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심산인지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가, 결국 입술만 달싹거리고 입을 다물고 만 그가 남자의 등에 얹혀 있던 팔을 떼어내고 나머지 팔로 남자의 가슴을 밀었다. 내리깐 그의 눈빛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남자는 자신을 탓하는 말 따위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역시 남자가 쇠약해진 원인은 자신이 분명했다. 자신의 기운이 남자의 기운을 삼키고 몸을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저 이와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때,

“무슨···?”

당황한 ‘그’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자신으로부터 물러나려는 ‘그’를 손목을 붙잡아 저지한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이 아니다.

“아니라고요···.” 그는 당혹하여 중얼거렸다. “무엇이 아니라는 겁니까?”

그러자 남자가 대답했다, ‘그대가 해야 할 일.’ 남자가 손을 움직였다. ‘그’의 눈이 커졌다. 이게 대체 무슨···. 어느새 자신의 손이 남자의 목을 조르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비어 있던 나머지 손을, 자신의 목을 쥐고 있는 ‘그’의 손등 위로 겹치며 남자가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뭐.”

‘그’가 무심코 내뱉었다. 자신이 제대로 남자의 입술을 읽은 것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실수를 한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짐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삼켜버리는 것이다. 

남자가 ‘그’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 그 손으로 대신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명백했다. 입 속에 넣어, 단 물이 모두 배어나올 때까지 씹고, 삼켜버려라. 그것이 비록 자신의 목숨일지라도. 그리고서, 남자는 ‘그’를 응시하던 눈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대에게는 그럴 만한 권리가 있어.

남자의 손가락이 ‘그’의 손바닥에서부터 매끄러운 팔뚝 안쪽까지 슥슥 글씨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짐에게는 그럴 의무가 있어.’

그런 남자를 멍청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던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럴 수는 없다 거부하려던 순간이었다.

“읍···!”

그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덤벼든 남자가 ‘그’의 팔다리를 내리누르며 깊숙이 입을 맞춰왔다. 

그 입맞춤은 이전보다도 훨씬 깊고, 집요하면서 격렬해 숨이 막혀올 정도였다. 하지만 곧 ‘그’는 숨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진짜 이유를 알아챘다. 뜨거워. 자신의 입 안으로 들어와 도망치려는 혀를 붙잡아 단번에 휘감는 그의 혀를 느끼면서 ‘그’는 생각했다.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실제로 남자의 혀가 델 것처럼 뜨거웠다. 금방 입 안에 타액이 차올랐다. 그 순간, 남자가 ‘그’의 뒷머리를 잡아당겨 ‘그’의 목을 뒤로 한껏 젖혔다. 입 안에 흥건하던 타액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꿀꺽 목구멍 아래로 내려갔다. 

식도가 타는 듯 뜨거워서 ‘그’는 깨달았다. 관을 타고 내려가는 뚜렷한 이물감. 타액 사이에 뭔가 둥글고 딱딱한 것이 섞여 있었다. 구슬? 그 느낌에 어울리는 물체를 겨우 생각해 낸 그 때 기이하게도 목구멍 아래서부터 약향이 섞인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구슬이 아니라 핏덩어리를 삼킨 것처럼! 

그 순간 또 하나 작은 구슬이 굴러와 ‘그’의 혀뿌리로 굴러갔다. 그것을 무심코 삼키면서도 ‘그’는 구슬이 굴러온 근원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찾아냈다. 자신의 혀와 얽혀 있는 남자의 혀에서, 정확히는 남자의 혀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이 딱딱한 구슬이 되어 자신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가 있지?

경악으로 눈을 홉뜬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

앞서서 일어난 이변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이변이 일어났다. 남자의 피를 몇 모금이고 삼킨 그 순간, 내내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하고 답답했던 머릿속이 찬물을 부은 것처럼 확 깨면서.

비늘.

남자의 팔에 손톱을 세웠던 ‘그’의 손등에 남청(藍靑)색 비늘이 돋기 시작했다.

*

긴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그녀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건조해지지 않도록 늘 섬세하게 관리하는 피부에 달큼한 봉밀(蜂蜜)처럼 달라붙곤 하던 비단 금침이 오늘따라 유난히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아직도 그 끈덕끈덕한 감촉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아 태황태후 엄씨는 침의 소맷자락을 걷고 맨살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그랬다가 어느새 손바닥이 한여름 논바닥처럼 메말라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게 누구 없느냐!’, 태황태후 엄씨가 지른 고성(高聲)에 놀란 나인 아이들이 펄떡 앉은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그네들을 닦달하여 손을 닦을 화장수와 손에 바를 고약(膏藥) 따위를 가져오게 시킨 태황태후는 한 쪽 무릎을 세우고 앉으며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황실의 큰 어르신 면전에서 꾸벅꾸벅 졸기나 하다니, 이래서 천한 것들에게는 조금도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게야.’

“감히···.”

그러다가 불현듯 다른 생각을 떠올렸는지 태황태후 엄씨가 으득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끓는 기름 속에 물이 들어간 듯한 험악한 소리가 목구멍 안쪽에서 으르렁거렸다. 그 험악한 목소리만큼이나 그녀의 얼굴 또한 사나웠다. 분을 지워 주름살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은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고, 그 얼굴 위에 덧입혀진 표정은 귀신처럼 일그러져서 지금 그녀의 얼굴은 본래의 생김새를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몸에 화끈 열이 오른 탓인지 급속도로 건조해지는 손등을 미친 듯이 문지르면서 태황태후가 다시금 중얼거렸다, ‘지금껏 돌보아 준 은혜도 모르고 황족의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다니, 내 그 작자를 기필코 본때를 보여 주고 말 것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녀는, 불과 몇 시진 전 이 자리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시옵소서. 마마. 마마.

당시 태황태후 엄씨는 이미 잠자리에 든 뒤였다. 근래에 일어난 낭패스러운 일로 근심이 깊어 한참 동안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에 들었던 그녀는, 그러나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마마, 하는 소리가 들려온 듯도 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침소에 든 태황태후를 흔들어 깨울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마마, 마마, 마마.

그러나 계속해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태황태후는 벌떡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어떤 놈이냐?!

성이 나서 버럭 고함을 지르자 거의 흐느끼듯이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태황태후는 거듭해서 소리를 질렀다, ‘어떤 놈이냐고 묻지 않았더냐!’ 저 포만무도하기 짝이 없는 작자를 기필코 찾아 크게 경을 치게 할 심산이었다. 그러하나, 곧 문 밖에서 들려온 대답에 태황태후는 기세등등한 노성을 지르는 대신 당혹하여 눈을 휘둥그레 떠야만 했다. 

-마마, 소인 대전 태감 봉승이옵니다. 

-대전 태감? 자네가 어찌 운현궁까지 들었어? 그것도 이런···.

잠시 말을 멈춘 태황태후의 머릿속에 휙 섬광 같은 짐작이 스쳐 지나갔다. 저절로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황상께서 자네를 보냈나? 세상에 이런 황당무계한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제 아무리 만인지상이라 하나, 사사로이는 손자 되시는 분께서 늙은 할미에게 어찌 이럴 수가 있어? 

-그것이 아니옵니다.

-아니라?

분명히 천제사를 올리게 허하여 달라는 용건이렷다?, 그리 짐작하고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봉승을 내리려던 태황태후가 의외의 대답에 멈칫했다. 대전 태감 봉승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결코 황상께서 보내신 것이 아니옵니다, 마마.

-허나, 자네가 홀로 결단을 내리고 이 운현궁으로 걸음 했을 리도 없는 일이니···.

태감이래봐야 결국은 천것이 아닌가. 그런 천것들에게 제 스스로 생각하여 결단을 내릴 주변머리 따위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럼···. 골똘히 생각하던 태황태후가 태감 봉승을 닦달했다.

-누군가? 누의 명을 받잡고 온 게야?

-그것이, 마마.

‘그것이, 그것이.’, 말을 잇기가 몹시 힘이 드는 것처럼 태감 봉승이 몇 번이고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것에 태황태후가 결국 눈살을 찌푸리고 만 찰나였다. 문종이 너머로 비치는 봉승의 그림자가 매서운 재촉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납죽 바닥에 엎드리며, 괴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것이 태황태후는 황실의 큰 어르신인 자신의 위엄을 더 이상 욕보이기가 힘이 들어 그런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헌의공께서 소인을 보내셨나이다.

-무어라, 헌의공이···?

무슨 까닭으로?, 하며 태황태후가 묻기도 전이었다. 봉승이 더더욱 황당한 소리를 지껄였다.

-곧 운현궁에 당도하실 것이옵니다.

-헌의공이 이 만시에 어찌 운현궁을 찾는단 말인가!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비웃을 사이도 없이, 정말 주변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것이 느껴졌다. 설마 싶어, 걸어 잠근 장식창을 열고 내다보자 멀리서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하나 둘도 아니고, 십 수 개가! 그리고 곧 횃대를 들고 우르르 몰려든 사내들이 운현궁에 들이닥쳤다. 그들의 선두에 선 자는, 봉승의 말대로 헌의공 서엽이었다.

-이것이 무슨 일이요!

기함할 듯 놀라 태황태후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서엽이 마음에 없는 것이 뻔히 보이는 예를 대충 올린 후에 자리에 앉지도 않고 내뱉는 소리라는 것이,

-마마, 천제사를 지내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그 소리신가! 내 이미 대답하지 않았소? 시기상조요! 황상께서 와룡이시긴 하나 상국의 자질도 이대로 버리기는 아까운 자질이니, 근시일 내 자리를 마련하여 둘의 역능을 견주어 본 뒤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사옵니다.

-무어?

태황태후는 당황하여 내뱉은 말에 서엽이 태연히 대꾸했다. 

-황상의 ‘힘’은 제 모자란 계자에 감히 비할 수도 없음입니다.

-무, 무슨 소리요.

-이리도 증인이 많사옵니다.

증인이라니? 태황태후는 황망한 시선으로 주렴 바깥에 줄줄이 늘어서 있는 이들을 훑었다. 서엽이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한 말투로 그제야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남아 있던 잠기운이 싹 달아날 만치 기가 막힌 말이었다. 정당한 절차도 걸치지 않은 이를 데리고 가변례를 치르겠답시고 날뛰는 놈만 해도 뒷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인데, 무어라? 

“허, 그 모자란 놈이 상국을 이겼다고?”

태황태후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서엽이 증인이랍시고 끌고 온 이들과, 평상시와는 다른 서엽의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압도되어 얼결에 동제도감의 설립을 허하기는 했으나 다시금 생각해 보니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안, 그 덜떨어진 놈이 유년기부터 빼어난 자질을 자랑하던 상국을 압도하였다니, 그것이 말이 되는 말이던가!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지···.”

태황태후가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는 한 점의 의혹도 없었다. 태황태후에게 있어서 지금의 황제는 주제도 모르고 제좌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멍텅구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 지 아비처럼! 황제의 부친이자 자신의 아들인 선제를 떠올리자 다시 욱신욱신 머리가 아파왔다. 태황태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툭하고 중얼거렸다, ‘그 놈이 애초에 태자 대신 죽어 나자빠졌으면 이런 골치 아픈 일도 없었을 터인데.’

“어쩐다.”

황제가 무사히 가변례를 치를 수 있을 것이라곤 믿지 않았으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다. 헌의공···. 십 수 년 간의 익숙한 동맹 관계 덕에 자신도 모르게 서엽의 얼굴을 가장 먼저 떠올렸으나 이제는 안 될 일이었다. 참으로 포만무도하기 짝이 없는 자. 태황태후가 새삼스럽게 이를 갈며 한탄했다, ‘내, 그 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베풀었던가.’ 그래, 자신이라는 거목(巨木)에 붙어 내내 권력이라는 단 수액을 빨아 먹었으니 사람이 변할 만도 했다.

서엽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운 태황태후가 일단 자신의 친정을 손에 꼽고는, 세운 무릎을 간헐적으로 두드렸다. 어찌한다. 비록 모자란 놈이라고는 하나 일단은 용인인 황제와 그 뒷배를 자처하고 나선 서엽···. 그 둘을 동시에 쳐내기 위해서는 자신과 자신의 친정만으로는 힘이 부쳤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던 태황태후는 이윽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고민한단 말인가,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을.

태황태후가 소리를 높여 말했다.

“우상궁, 지필묵을 들여오게.”

자신이 가례를 치르면서 사가(私家)에서 데려온 심복지인에게 그리 이른 태황태후는, 우상궁이 가져 온 지필묵으로 빠르게 서신을 써 내려갔다.

“받게.” 순식간에 두 통의 서간을 완성한 태황태후가 걔 중 하나를 먼저 우상궁에게 내밀었다. “이 서찰을 내 사가의 오라버니께 은밀히 전하게.”

“엄명 받잡겠사옵니다.”

“그리고 이 서찰은.”

나머지 서찰을 우상궁의 소맷자락 안에 찔러 넣으며 태황태후가 말을 이었다.

“상국께 전하게. 다만 다른 사람의 눈을 극도로 피하여야 하니 상국에게 곧바로 전하는 것을 피하도록 하게나.”

알겠나?, 하고 묻는 말에 우상궁이 표정을 굳히고 곧바로 대답하였다.

“그리하겠나이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상궁이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태황태후의 방에서 물러났다. 곧 남복(男服)을 입은 호리호리한 그림자 하나가 운현궁을 빠져 나갔다.

*

제 성질을 참지 못하고 결국 서현을 만나기 위해 날도 밝기 전에 나갈 채비를 하고 나왔던 엄헌영은, 그러나 대문을 나오자마자 멈칫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다음으로 사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하늘도 푸른 기 하나 없이 검고, 사위도 검은 막을 두른 듯 어두운데.

“···그런데 이 시간에 객이라니.”

방금 전 미끄러지듯 안채로 들어간 그림자를 좇듯 안채를 황망한 눈으로 응시하던 엄헌영이, 제 키만 한 비를 들고 바깥으로 나가던 노복 하나를 붙들고 물었다.

“안채에 객이 들었나?”

“아이고, 도련님, 이 어둑새벽부터 성장을 하시고 어디를 가십니까?”

“볼 일이 있어서 그러지. 멀리 가는 것이 아니니 승교는 필요 없···,” 반쯤 졸면서 걸어가던 노복이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색을 하면서 묻는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엄헌영이, 이게 아닌데 싶었는지 고개를 휘 젓고 말을 고쳤다. “아니,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지 않은가, 묻는 말에부터 대답해 보게. 안채에 손이 들었나?”

엄헌영의 말에 노복이 도리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안채 쪽을 돌아보았다.

“안채에 객이 들었습니까요? 허나 아직 날이 어두운데···.”

“그러니까 말이야!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서 몇 번이고 확인해보았으나 분명 사람이었어.”

“소인이 안채 사람들에게 물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황급히 방향을 틀려는 노복을, 잠시 생각하던 엄헌영이 막았다.

“아니, 내가 가지.”

그 말에 바쁘신 도련님을 거기까지 걸음하게 만들 수는 없다며 노복이 수선을 피웠으나 엄헌영은 그를 결국은 물리치고 안채로 옮겼다. 한 시라도 빨리 서현을 찾아 그의 진의(眞意)를 캐묻고 싶었으나, 이렇게 찜찜한 채로 나가느니 얼른 사실을 확인하여 보고 말끔한 기분으로 외출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새벽보다는 아직 한밤중에 가까운 시간에, 그것도 안채로 사람이 들다니 어쩌면 간 큰 도적놈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무론 지금 안채는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나···.

“·····.”

따위의 생각을 하며 잰걸음을 걷고 있던 엄헌영의 걸음이 어느 순간부터 점점 느려졌다. 결국은 완전히 걸음을 멈추고 만 엄헌영이 서서히 미간을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누구···.”

비록 작지만 두런두런 나누는 말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엄헌영이 벽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터벅터벅 제멋대로 걷고 있던 전과는 달리 지금 그의 발에서는 아주 작은 발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완벽한 경계 태세.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 현재 엄충과 엄유 두 형제와 그 아들들만이 살고 있는 엄씨 가문의 안채는 엄충의 정실인 한씨 부인이 작고한 이후 내내 주인 없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헌영은 곧 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 것인지를 알아냈다. 안채를 조심스럽게 지나치자 여인들이 기꺼이 여길 법한 어여쁜 꽃담과 함께 샛문이 하나 나왔다. 엄헌영은 안채 그림자에 살며시 몸을 숨기고 벽에 등을 딱 붙였다. 샛문 밖으로는 안주인이 없어도 어김없이 갖가지 꽃이 피고 지는 후원과 수련이 띄워진 넓은 연못, 그 못에 네 다리 중 두 다리를 박고 풍류를 즐길 수 있도록 지어진 정자 한 채가 나오지만 엄헌영은 그 편까지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안채와 샛문 사이에 지어진 작은 건물을 향하고 있었다. 그 건물은 엄헌영 자신의 백모(伯母)인 황아 부인이 살아생전에 개인적으로 모은 책들을 전시하던 매헌당이었다. 

소리는, 매헌당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라 하였습니다.”

“···께오서 크게···.”

“그렇사옵니다. 그러한 까닭에···.”

두런두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엄헌영이 어느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안채로 들어가는 뒷모습만 보고는 당연히 사내인 줄 알았건만, 들려오는 소리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로 추정해 보건데 어리거나, 아주 젊지는 않고 어느 정도는 나이가 든 여인인 듯 했다. 그 여인이 하는 말에 때때로 대꾸하는 이는 사내였는데, 그 또한 여인과 비슷한 연배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남복을 입은 여인과는 달리 사내 쪽에 대해서는 대략의 나이 이상의 추정은 할 수 없었다. 그가 매헌당 기와 그림자 속에 깊숙이 몸을 숨기고, 하는 말 한 마디마디마다 신중하게 목소릴 낮춰 대답하고 있었던 탓이다.

처음에는 수상한 여인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던 엄헌영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여인보다는 맞은편의 사내 쪽에 귀를 기울였다. 이상하게 들으면 들을수록 사내의 목소리가 귀에 걸렸던 탓이다. 찌푸린 눈을 더더욱 찌푸리면서 엄헌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이 목소리 분명히 어디선가···.

그 때, 우연히 바람소리나 풀이 스치는 소리 따위의 잡소리가 동시에 잦아든 탓에 사내의 목소리가 드물게 또렷하게 들려왔다. 

“분명히 받았네.”

“!”

엄헌영은 눈을 부릅뜨고 숨을 삼켰다. 이야기가 모두 끝났는지 그늘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천천히 그늘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나는 엄헌영이 뒤쫓아 온 그 남장 여인, 그리고 또 하나는.

여인이 말했다.

“어르신, 이만 소인은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첫새벽부터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크게 마음에 두지 말게.”

여인과 사내가 의례적인 인사를 몇 마디 주고받은 후, 사내에게 몇 마디 말을 귀띔들은 여인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샛문 안으로 들어갔다. 후원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작은 문이 있으니 그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는 생각이 분명했다. 후원 꽃담에 낸 쪽문은, 황아 부인이 따님이신 엄 황귀비의 서찰을 가지고 심부름 오는 나인들이 바로 자신이 있는 안채로 드나들 수 있도록 냈었던 문으로, 그 문의 존재를 아는 이는 이 집에 사는 사람 중에서도 몇 되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황아 부인을 서른 해 동안이나 모셨다던 노비(老婢)나, 엄 황귀비의 유모였었던 노파, 엄충, 그리고 황아 부인 소생인 아들 하나와 엄충의 질자인 엄헌영 정도일까. 심지어는 황아 부인이 아닌 후처 소생인 아들들과 엄유조차도 후원 쪽문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했다. 

신새벽부터 잠에서 깨어 작일의 피로가 채 풀리지 않은 듯,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매헌당 쪽마루에 가서 앉은 사내가 말했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심산이더냐.”

이만 나오너라. 사내가 엄헌영이 숨어 있는 곳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내뱉었다. 그 소리를 들은 엄헌영은 잠시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였으나, 곧 지금껏 숨어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엄헌영이 사내를 향해 말했다.

“···백부님.”

“네가 첫새벽부터 어인 일이냐.” 지금껏 엄헌영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던 사내가 그렇게 말하면서야 비로소 엄헌영에게 흘깃 시선을 던졌다. “그리 번듯하게 차려 입고서. 아직 입궁해야 할 때는 아닐 터인데.”

“입궁하기 전에 만날 이가 있어 그리하였습니다. 헌데 저,”

“어찌된 일인지 궁금하겠지.”

엄헌영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미리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백부, 엄충이 엄헌영의 말허리를 썩둑 잘랐다. 핵심을 찔린 엄헌영이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자, 엄충이 그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해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운현궁에서 온 상궁이다.”

“운현궁···?” 여전히 우뚝 자리에 선 채로 엄헌영이 미간을 구겼다. 태황태후가 자신의 든든한 뒷배인 동시에 그녀의 오라비이기도 한 엄충에게 서신을 보내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굳이 왜 이런 신새벽에.”

그러나 엄충은 엄헌영의 의문을 해결해 줄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앉으라는 손짓을 해보여도 도통 선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엄헌영을, 엄충은 한동안 말없이 응시하기만 했다. 제 생각에 흠뻑 빠져서 한참 동안이나 그 시선을 눈치 채지도 못하고 있던 엄헌영이 불현듯 시선을 느끼고 머리를 들었다. 엄충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엄헌영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했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엄충의 눈은, 물음을 던지는 듯한 눈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엄충이 자신에게 던지고자 하는 물음을, 엄헌영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엄충이 결국 입을 열었다.

“궁금하더냐.”

“······.”

“궁금하다면 말해 줄 수도 있다. 강이 너는 네 아비와는 달리 진중(鎭重)한 아이이니. 허나 달리 생각해 보면 강이 네가 입이 가벼운 네 아비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이가 아닌가 싶기도 하구나.”

침묵하고 있는 엄헌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엄충이 물었다.

“각오가 서 있더냐?”

“각오···.”

“이 집안의 일원으로서, 집안을 위하여 행할 것은 행하고 금할 것은 금할 각오 말이다.”

그 물음에, 엄헌영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엄충은 그런 그를 재촉하지 않고, 엄헌영이 충분히 생각한 후 대답할 수 있도록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엄헌영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겨우 연 엄헌영의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은 엄충이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라 또 다른 물음이었다.

“백부님께서 말씀하시는 집안의 일원에 운현궁 마마가 속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말한 직후에 ‘아니.’, 하며 엄헌영이 좀 더 노골적으로 말을 바꿨다. “운현궁 마마를 위하여 의(義)든 불의(不義)든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느냐 그리 물으시는 것입니까?”

“운현궁 마마께서 잘되셔야 우리 집안도 무사할 수 있으니, 네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구나.”

“헌데 운현궁 마마께서 어찌 엄씨 집안의 일원이 되십니까? 한 때는 국부이셨고 지금은 황실의 가장 큰 어른 되시는 분께서 어찌 나라와 황실이 아닌 한 사가에 얽매이실 수 있습니까.”

“이 집안에서 나신 분이니 숨을 거두실 때까지 이 집안의 일원이시지.”

“그럼 제안도 이 집안의 일원이겠군요.”

엄헌영의 말에 엄충의 얼굴이 싹 굳었다. 그 표정을 보고 엄헌영은 확신을 굳혔다. 자신의 백부는, 자신에게 태황태후를 위하여 황제를 해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물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잠시 후 엄충이 말했다.

“네 말이야말로 이상하구나. 어찌 황상이 이 집안의 일원이 되실 수 있느냐.”

“이 집안에서 나고 자라신 엄 수경궁 마마께오서 탄생시킨 분이니 널리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엄헌영이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소질(小姪)의 말이 괴아하게 들리실 지도 모르나 방재에 백부님께서 하셨던 말씀과 크게 다른 말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엄헌영의 말에 반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늙고 지친 호랑이처럼 짙은 그늘이 진 쪽마루에 앉아 있었던 그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초조한 걸음으로 매헌당 앞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엄충이 딱 걸음을 멈추고 엄헌영을 노려보았다.

“그 자는 결코 이 집안의 일원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엄헌영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바로 내뱉었다. “그 자만큼은 절대로 이 집안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어.”

“···그도 수경궁 마마의 소생입니다. 백부님께서 어떠한 이유로 그 이를 저어하시는지는 소질도 익히 알고 있으나, 그것은 선제폐하의,”

“강이 너는 아무 것도 모른다.”

엄충의 매서운 말이 엄헌영의 말을 막았다. 그 답지 않은 성급한 태도에 엄헌영이 눈을 크게 뜨고 보자, 엄충은 눈앞에 몹시 증오하는 것이라도 두고 있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초점이 없었다. 엄충이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너는 물론이요, 실상을 제대로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백부님?”

엄충이 몸을 돌렸다.

“···내가 물은 것도, 마마의 서찰에 대해서도 다 잊거라. 내가 강이 네게 괜한 것을 물었구나. 어리석었어, 네 성미를 모르는 것도 아니거늘.”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몹시 씁쓸하게 들렸다. 백부님, 하고 당황한 엄헌영이 그를 붙잡았으나 엄충은 대꾸 없이 손만 한 번 휘저어 보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엄헌영은 엄충이 향하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샛문 너머, 황아 부인의 후원이 있는 곳. 그러다 막 샛문을 넘기 직전, 엄충이 불현듯이 발을 멈추더니 머리만 돌려 엄헌영을 돌아보았다. 잠깐 망설이는 듯싶다가 엄충이 말했다.

“집안에 하나쯤은, 강이 너처럼 대쪽 같은 이가 있어도 나쁘지 않겠지. 허나 강이 네게는 아무 것도 알려줄 수 없다.”

엄헌영이 급히 엄충의 뒤를 좇아가 물었다.

“어째섭니까! 소질은 결코 양심에 부끄러울 만한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도의에 어긋나는 일을 꾀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니라.” 엄충이 탄식하듯 대답했다. “그러니 너는 그저 모르는 대로 있거라.”

“백부님!”

엄충이 잠시 멈췄던 다리를 움직여 후원으로 들어가며 덧붙였다.

“사실을 알고 나면 그런 너 스스로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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