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살아난 것은 오감(五感) 중 촉각(觸覺)이었다. 미끄럽고 축축한 것이 자신의 몸을 쉴 새 없이 쓰다듬고 매만졌다. 이상해. 그는 ‘생각’했다. 미끄럽고 축축한 그것이 자신을 쓰다듬는 사이사이 따끔따끔한 감촉이 느껴진 때문이었다. 저건 번드러운 것일까, 아니면 까슬까슬한 것일까.
그러던 다음 순간 그는 저절로 답을 깨달았다. 잔뜩 까끄라기가 인 가죽이 뭔가에 축축이 젖어 있는 것이었다. 젖어 있다고? 후각(嗅覺)이 살아난 코가 젖은 철 냄새와 비슷한 비린내를 맡았다. 먼저 강한 약초향이 코를 찔렀지만, 그 사이에 섞여 있는 것은 분명 비린내였다.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히 기억에 있는 냄새. 아아, 곧 그는 답을 찾아냈다.
“···피···.”
피 냄새. 피 냄새였다.
청각(聽覺)이 되살아났다. 팍. 얇은 막 같은 것이 터지는 듯한 소리를 시작으로 지금껏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마다 이상하게 귀를 차갑게 만들어서 그는 몸서리를 쳤다. 귓속에 얼음 덩어리가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때 뭔가가 그의 양 귀를 막았다. 귀에 닿은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곧 깨달았다. 조금 전 자신의 살을 쓰다듬던 그것. 손. 그는 기억 속에서 그럴 듯한 답을 끄집어냈다. 누군가의 손이 분명했다. 피 비린내를 풍기는 그 손은 무척이나 뜨거워서, 차갑던 귀는 금방 미지근해졌다. 손이 떨어져 나갔다. 일순 아쉬운 기분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고통 없이 귀를 파고들어오는 각종 소리들이 곧 그 감각을 잊게 했다.
처음에 들은 것은 살과 살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것은 누군가의 억눌린 신음소리였다. 신음을 흘리는 목소리가 몹시 귀에 익어 그는 왠지 두려워졌다. 피 냄새가 다시 코끝을 스치자 가슴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자신의 심장소리를 듣자 손끝이 지릿해졌다. 피 냄새. 신음. 마치 앓는 듯한, 괴로워 보이는. 그는 머리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야. 그리고,
“···누구.”
누구지?
그렇게 입을 오물거린 순간, 손목이 잡혔다. 놀란 나머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자 손목을 잡은 손이 천천히 손목을 당겼다. 몸이 그 편을 향해 조금 기울였다. 다시금 손이 손목을 당겼다. 그는 손의 주인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비로소 알아차렸다. 이쪽. 이쪽이야. 그는 손의 주인을 향해 물었다.
“당신, 누구?”
번쩍, 세상이 열렸다. 시각(視覺)이 살아났다.
“아.”
그는 신음성을 흘렸다. 커다랗게 열린 시야 가득 어둠이 가득했다. 마치 거대한 동굴처럼, 깊은 어둠이 축축하게 들어차 있는 공간. 그러나 그는 어째서 자신이 이런 곳에 있는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술을 떨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 있는 이에게 꽂힌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생각이 거기에서 멈췄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것’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조차 그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뚝. 뚝. 뚝. ‘그것’으로부터 계속해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물? 아니다. 그는 방금 자신의 볼에 떨어진 물방울을 손등으로 닦아 그것에 혀를 댔다. 미각(味覺)까지 살아났다. 비릿한 맛. ‘그것’이 떨어뜨리고 있는 것은 피였다.
피···.
“살아 있는 것···.”
그는 손을 뻗어 자신의 몸 위에 있는 ‘그것’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실 같은 것을 붙잡았다. ‘머리카락.’, 땀과 피로 엉켜 있는 그것을 몇 번 매만진 그가, ‘그것’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더듬어 발견한 귀 뒤에 꽂았다.
‘그것’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것’의 눈이 보였다. 눈가에 큰 창상이 나 있었지만 눈알까지는 다치지 않았는지 ‘그것’은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말없이 올려다보다 그는 불현듯 내뱉었다.
“남자···.”
하지만, 저 눈. 그와 ‘그것’의 눈이 맞부딪쳤다. 그가 눈을 깜빡이자, ‘그것’도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상처 입은 눈꺼풀이 열리며 드러난 ‘그것’의 눈은 이곳에 가득 들어차 있는 어둠보다도 검었고, 바늘처럼 수직으로 긴 동공은 그 검은 눈보다도 훨씬 더 검었다. 사람···? 그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것’의 눈은 결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것’이 젖은 손으로 그의 두 볼을 감싸고 그의 눈가에 입을 맞춰왔다. ‘그것’에게서 훅 뭐가 형용할 수 없는 비린내가 풍겨왔지만 그는 ‘그것’은 밀어내지 못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따뜻해.
‘저건’ 따뜻하다. 그래서 그는 겨우 깨달았다. 자신이 있는 이곳은 너무나 추웠다. 마치 얼음 동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덜덜덜 몸이 떨려 ‘그것’에게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그것’은 내치지 않고 기껍게 그의 몸을 안아주었다. 추위에 몸을 떨며 자신도 모르게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난 모양인지, ‘그것’이 그의 허리 아래로 팔을 밀어 넣더니 몸을 빙글 뒤집었다. 시야가 순식간에 반전되었다고 느낀 다음 순간, 그는 더 이상 바닥이 아니라 ‘그것’의 위에 누워 있었다.
‘그것’의 팔이 그의 드러난 등과 허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 손짓이 아직도 춥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든 감각이 되살아났지만 아직도 머리는 납이 가득 들어차 있는 것처럼 멍했다. 그 멍한 머리로 그는 힘겹게 생각했다. 피. 피 냄새.
“다쳤···.”
그는 ‘그것’의 가슴팍에 두 손바닥을 붙이고 허리를 당겼다. 그리고 ‘그것’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며 잘 움직이지 않아서 어눌한 투로 말했다. 다친 거지?
“괜찮은가요?”
‘이렇게나.’, 그의 손이 차례로 ‘그것’의 몸에 난 상처를 더듬었다, ‘이렇게나 다쳤는데.’
“어서,”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까지는 생각이 나지 않아도, 무엇이든,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말하던 그 때였다. 그는 불현듯 ‘그것’의 입꼬리가 귀 쪽으로 당겨 올라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치, 웃는 것처럼.
“아!”
퍽! 아래에서 뭔가 뜨겁고 딱딱한 것이 치밀고 올라오는 감각에 그는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뭐, 그는 얼떨떨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 뜨겁고 딱딱한 기둥 같은 것 대신 ‘그것’의 배가 먼저 보였다. 일순 그는 하던 생각을 잊고 시선을 빼앗겼다. ‘그것’의 배에 다른 상처들과는 달리 마냥 검게 보이는 긴 상처가 보였다, 흡사 칼에 찔린 듯한 날렵하고 크고 깊은 상처.
그러나 곧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렀다. 그것은 이미 다물린 자상(刺傷) 따위가 아니라 아직도 벌어져 그 안에 들어 있는 뼈와 내장 따위를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상처였다, 아직도 철철 피를 흘리고 있는! 지금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희한한 정도로 지독한! 아, 아아. 그는 하얗게 질린 채로 어찌할 줄 모르고 신음을 흘렸다.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어떻게?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럴 여유가 사라진 것이다. 퍽!
“아, 아, 아, 아, 앗!”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그것’이 한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자신의 아래에 깊숙이 박혀 있는 뜨겁고 단단한 것이 자신의 무게 때문에 더욱더 깊숙이 들어오는 감각에 그는 짧은 신음을 내지르며 어깨를 둥글게 움츠렸다. 그 때 무심코 힘이 들어갔는지, 안에 박혀 있는 뜨거운 것이 그의 안에서 크게 꿈틀거렸다. 등줄기를 타고 찌릿한 감각이 뒷머리를 후려쳤다. 온 몸이 파르르 떨렸다.
계속해서 뜨거운 것이 치밀고 올라왔다 빠져나갔다 더 깊숙이 박히기를 반복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뜨거워. 온 몸이 화끈거리고 저 알 수 없는 것이 치밀고 들어올 때마다 뭉툭한 끝이 닿은 곳에서부터 찌릿찌릿한 감각이 퍼졌다. 입에서 계속해서 비명처럼 들리는 소리와 앓는 듯한 신음이 튀어나갔다. 신음을 참아보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뜨거운 살덩이가 안으로 추여 올라와 오히려 더 큰 소리를 지르게 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위기감과 당혹만 앞설 뿐, 멍한 머리는 도무지 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덕에 더더욱 초조해져 어찌할 줄 모르고 있으려니, 쭉 뻗은 등뼈를 더듬고 있던 뜨거운 손이 자신의 뒷머리까지 타고 올라와 살그머니 머리를 밀었다. 단단하고 뜨거운 것에 얼굴이 감싸였다.
목? 머리가 그렇게 판단한 순간, 이미 자신은 허겁지겁 ‘그것’의 목을 물고 있었다. 피! 그러다 바로 다음 순간, ‘그것’이 크게 다쳤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가 화들짝 놀라 황급히 이를 뗐다. ‘그것’이 괜찮다는 듯 그의 등을 도닥였지만 그는 주춤거리며 물러나 ‘그것’의 목을 무는 대신 눈을 콱 감고 이를 악물었다.
들릴 리가 없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질끈 감았던 눈을 자신도 모르게 크게 떴다. 자신의 밑에 있는 ‘그것’에게서 목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그의 귀에는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자, ‘그것’이 입술을 움직였다.
‘착하다.’
착해, 하고 입술로만 속삭이며 ‘그것’이 긴 팔을 뻗었다. ‘그것’의 입술을 읽는 순간 자신도 정체를 모를 묘한 감각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무심코 ‘그것’을 향해 조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것’의 손이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것’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고, 그의 눈이 더더욱 커졌다.
‘경아.’
익숙한 울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다음 순간 귀 뒤에 톡 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 고통에 눈을 찌푸리는 동시에 생각했다. 생각이 날 것 같은데, 더, 더, 더 뭔가가. 하지만 잔뜩 먹구름이 껴 있는 머리가 맑아지기 전에 ‘그것’이 다시금 입술을 움직여 생각을 흩뜨려놓았다.
‘미안하다.’
일순 그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니, 뭐가?
그 물음을 마지막으로 생각이 끊겼다. ‘그것’이 다시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퍽! 살과 살이 부딪치는 거친 소리가 쉴 틈도 없이 울리고, 그 소리에 젖은 소리가 섞이기 시작할 즈음 생각하기조차 잊은 그가 젖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 같은 관을 타고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조차 둔한 머리로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는 그런 것조차 아무런 상관이 없어졌다. 그의 팔이 ‘그것’의 머리와 목을 껴안았다. 짙은 어둠 위로 떠오른 두 개의 그림자가 완전히 하나인 것처럼 얽혔다가, 천천히 그 자취를 감추었다.
*
끝의 끝에 쳐놓았던 관념이 무너졌다.
허수아비인 줄만 알았던 황제가 실상 와룡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지만 그 와중에도 그 모든 이들은 머릿속 한구석으로는 생각했었다. 같은 용인에게도 그 힘의 크기는 차이가 있는 법, 그렇다면 황제보다는, 황제보다는 상국 쪽이-.
그러하나 금일 이 순간, 그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다. 황제가 간택을 통해 선발된 이도 아닌 이를, 더구나 출신도 모를 청의관 수객을 자신의 정후로 삼겠다 독단으로 선언한 후 가변례를 위하여 천추천에 은둔했다는 사실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인 사건이건만, 수상 체제공 서현이 황제가 쳐놓은 결계를 깨뜨리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은 전자의 사건을 듣고 느낄 충격을 삽시에 집어 삼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수상 서현이 이화시강원 관원들이 쳐놓은 결계를 모두 파쇄하고 천추전 깊숙이 들어간 지 수 시간. 아무리 기다려도 수상 서현은 물론, 그 뒤를 좇았던 태학궁 제일박사(第一博士) 학승 중광도 천추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결국 침전 전정 앞을 지키고 있던 헌의공 서엽은 금군들과 함께 직접 천추전 안으로 걸음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수상과 태학궁 일박사가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이유에서기도 했으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헌의공 어르신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수상과 함께 동행하였던 나머지 박사들이 데려온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부른 태사의감 의정이, 부상을 당한 이화시강원 관원들을 데려간 후에도 전정을 떠나지 않고 머뭇거린다 싶더니 결국 슬그머니 헌의공 앞으로 와 아뢨다. 서엽이 무슨 일인가 묻듯이 눈썹을 치켜 올리자 의정이란 자가 한참 동안을 망설이다가 이런 말을 속삭였다, ‘헌의공께 말씀을 올려야 할지 망설였습니다만, 역시 말씀을 드려야 할 듯 하여서···. 지금은 기력이 쇠하여 거동을 하지 못하고 계시는 태사의감 영공께서 이르기를···.’
그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이대로 황제가 가변례를 강행했다가는 청의관 수객은 물론 황제까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이는 서현이 막 천추전 주변에 쳐진 결계를 부술 때 이미 서엽이 언급했었던 사항과 일치했다.
그 때 서엽은 이 일이 다른 이들에게 퍼지는 것을 꺼려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태감 봉승은 힐끗 헌의공을 곁눈질했다.
뜻밖이었다. 봉승이 이성을 잃고 날뛸 때에는 곧바로 그를 저지하고 나섰던 서엽이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의정이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듣도록 방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의정의 말만 듣고서 자신처럼 바로 소현태자를 떠올리는 이는 많지 않아 보였으나···. 그 속을 알 수가 없어 일단 봉승이 그에게 곁눈질을 했지만, 그 눈짓을 보고도 헌의공 서엽은 시선은 천추전을 향한 채로 여전히 입을 닫고 있었다. 그런 서엽에게서는 봉승의 의혹을 풀어줄 생각을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서엽의 계산된 방관 아래, 그 때부터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는 슬금슬금 불안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걔 중 계산이 빠른 이 몇몇은 이대로 황제가 절명해 주는 편이 나라의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좋은 일이라 생각하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표정을 굳히고 간절한 시선으로 천추전을 응시했다. 그 누구든 간에 용은 이 나라의 홍복(洪福)이니, 굳이 용님이 내리신 축복의 상징을 잃고 싶어 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헌의공 서엽이 결국 천추전 안으로 들어가겠다 말을 꺼냈을 때 그를 만류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침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황제의 침방 앞까지 들어간 그들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두 가지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해야 했다. 그것은 황제의 침방이 황제나 청의관 수객의 어떤 흔적도 없이 비어 있다는 사실과, 그 앞에 패전한 장수처럼 두 무릎을 꿇고 있는 서현의 모습이었다. 수상은 굳게 두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의 부친인 헌의공 서엽은 곧바로 그가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된 일이었던가 묻자, 수상은 감은 눈을 뜨지도 않은 채로 그 물음에 대꾸하였다 한다.
-황상께서는 ‘둥지’로 들어가셨습니다.
일순에 주위가 싸늘한 침묵에 잠겼다. ‘둥지’란, 용의 본래 뿌리가 되는 터전을 이르는 말로 서현의 그 말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아직 완전한 용이 되지 못한 황제가 자신의 ‘둥지’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황제가 강한 ‘힘’을 가진 용이라는 말이 되며 동시에,
-그렇다면 상국께서도 ‘둥지’로 들어가 추적을 계속 하신다면,
-불가능하다. 황상의 ‘둥지’는 ‘하늘’이 아니다.
헌의공 서엽을 따라온 시위 중 하나가 겨우 용기를 내어 꺼낸 말을 체제공의 말이 잘랐다. 그 단호한 대답은 탈력한 듯도 하고 동시에 성이 난 듯도 하여 참으로 묘한 느낌을 주었건만,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 그 세세한 어조 따위를 신경 쓸 여유가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서현의 대답이 떨어진 직후의 이 자리는 흡사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분위기였다.
황제의 ‘둥지’는 ‘하늘’이 아니다. 그 말은, 황제가 수상이나 역대 황제들과 같은 천룡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용이라는 말이었다. 그래, 마치 이전의 소현태자처럼.
소현태자.
그 사실이 사람들을 싸늘한 침묵에 휩싸이게 했다. 뒷머리가 서늘해졌다. 그것은, 지금껏 완전히 죽은 줄만 알았던 악몽이 사실은 자신들의 발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가 스르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본 듯한 종류의 섬뜩함이었다. 담이 약한 자들의 낯빛이 희게 질리고 손발이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거의 낯빛이 회반죽을 칠한 것처럼 변한 이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입을 열었다.
-방, 법이.
그가 덥석 서현의 팔에 매달렸다. 걔 중 아직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자들이 그의 겁을 상실한 듯한 행동에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정작 서현의 팔을 붙잡고 늘어진 자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캐물었다.
-방법! 상국, 방, 법이 없습니까?
-방법이라, 무슨?
하고 그 때 대꾸한 것은 서현이 아니라 헌의공 서엽이었다. 서현의 팔을 붙잡은 채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본 남자의 얼굴은 혼란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르신? 황상을 찾아야지요.
-그럼 황상을 찾을 방법 말이로군.
-다, 당연한 말씀을 어찌···,
-헌데, 어찌하여?
이번에는 반문하는 것조차 잊고 남자의 얼굴이 멍청하게 굳었다. 이번에 놀란 것은 그 남자 뿐만이 아니었다. 남자의 성급하고 무례한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던 사람들조차 이번만큼은 남자의 비슷한 표정으로 헌의공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직도 황제의 침방을 향하여 무릎을 꿇은 채인 서현을 부축이라도 하려는 듯, 허리를 조금 구부리고 한 팔을 뻗으며 서엽이 말했다, ‘일어날 수 있겠느냐.’
-황상께서는 ‘둥지’로 들어가셨다. 제 둥지로 들어간 용을 인간이 무슨 수로 좇으리?
-허나 어르신!
결국 참고 참았던 여인 하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황상께서 무엇을 한다 하셨는지 잊으셨습니까! 그것이 아니면 태사의감 의정이 이른 말을 잊으셨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폐하께오서 절명하실 수도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세상에 그런 무서운 일은 또 없다는 듯이 여인이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잊고 두 팔로 제 여린 몸을 콱 껴안으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소현태자. 모두가 생각하고는 있으나 차마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못하고 있던 이름을 누군가 내뱉은 것은 그 때였다. ‘만일 소현태자 때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시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방이 싸늘한 침묵에 잠겼다. 비교적 연치가 적은 자들은 어리둥절함과 막연한 두려움이 반쯤 섞인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두리번거렸고, 나이 지긋한 이들은 하나같이 홉뜬 눈으로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며 굳어 있었다. 공포. 이 순간 이 자리를, 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단 하나의 감정은 분명히 공포였다.
-소현태자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은가.
그러나 그 때, 헌의공이 쾌활한 투로 공포의 맥을 단절시켰다. 상황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투에 사람들이 일제히 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서엽이 서현을 향해 일어나라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어찌하여 소현태자의 이름이 나오는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서현은 그런 서엽의 손짓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여전히 사나운 눈으로 황제의 침방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서엽이 서현에게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소현태자께서 붕하신 후 하늘이 노하여 나라에 각종 재앙이 닥쳤던 것은 귀하신 용의 명을 인간들의 불찰로 절명시켰기 때문일세. 허나 작금의 상황은 그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가.
-다르다니요···.
-완벽한 힘을 갖추지도 못하셨으면서 주변의 만류를 떨치시고 가변례를 강행하신 것은 폐하시네.
너무 태연해서 오히려 가볍게까지 느껴지는 말투로 서엽이 덧붙였다, ‘그러니 이대로 절명하신다 하여도 이는 황상의 불찰.’
-우리 인간들의 불찰이 아니지.
-다른 이들이라면 모를까, 황상을 이편까지 몰아붙이신 당신께서는 감히 입에 담을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껏 서엽이나 다른 이들의 말에 반응하지도 않던 서현이 불현듯 입을 연 것은 그 때였다. 사람들이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입을 굳게 걸어 닫고 서현과 서엽을 차례로 훔쳐보았다. 지금껏 항상 부친에게 순종하는 태도만을 보였던 체제공이 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말. 그들 중 몇몇은 항간에 떠도는 풍문을 머릿속에 떠올린 것이 분명했다. 헌의공 서엽이 완전히 체제공에게서 등을 돌렸으며, 그 일로 체제공이 앙심을 품고 있노라는 믿을 수 없는 소문···.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서현의 도전적인 언사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말끄러미 서현의 등만 응시하고 있던 헌의공 서엽이 불쑥 맥락 없는 물음을 던졌다. 아비를 앞에 두고 예를 차리지 않는 계자를 뒤늦게 탓하는가 싶었으나, 그의 어조는 꾸짖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염려하는 것에 가깝게 들렸다.
뚜벅. 서엽이 일부러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뚜렷한 발소리를 내면서 서현에게로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서엽의 손이 차례로 서현의 어깨 위에 놓였다. 서엽의 전신에는 아직 젊은이 못지않은 힘이 넘쳤지만, 서현의 어깨에 놓여 있는 서엽의 손만은 완벽히 세월을 속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건조한 손등 전체가 털을 벗겨낸 양피(羊皮)처럼 주름투성이였다. 그렇지만 지금 그 손 따위를 주목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도무지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서엽의 행동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서엽이 말을 이었다.
-너는 황상을 ‘놓친’ 것이 아니구나, 희야.
-······.
-황상의 ‘힘’에 밀렸어.
뭐.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외마디 말을 내뱉은 이들이, 다른 이들도 자신과 비슷한 소리를 낸 것을 듣고 몹시 당혹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황망한 시선이 여기저기에서 부딪쳤다. 설마, 하는 웅성거림이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번졌다. 서엽의 입술에 걸린 웃음이 짙어졌다. 그는 말했다.
-그 탓에 몸을 일으킬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니더냐.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귀가 몹시 어두운 늙은이가 아니라면 결코 듣지 못할 수는 없는 소리였다. 사람들은 지나친 경악으로 도리어 고요해졌다. 수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침묵은, 오히려 말로 수긍하는 것보다 더한 대답이 아니던가···!
자신 쪽을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서현에게서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몸을 돌리면서 서엽이 이번에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염려할 것 없겠소. 같은 용인조차 이리 기력이 쇠하도록 만들어놓고 용의 ‘둥지’까지 비집고 들어갈 만한 ‘힘’을 가진 것을 보면 황상께서는 필히 강건하신 모습으로 돌아오실 것이오.
그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으나 헌의공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수많은 관리들과 궁인들 사이에 몸을 굽힌 채 숨어 있던 자신의 심복지인들을 용케도 찾아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바다거북의 그림자 같은 작고 뭉툭한 사내가 자신들 사이에 있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그들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묵묵히 허리를 숙이고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에게 서엽이 턱짓을 하며 말했다.
-운현궁으로 가겠네.
-운현궁!
곳곳에서 신음 비슷한 탄성이 튀어나왔다. 서현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사람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서 내내 근질거리는 입을 걸어 잠그고 있던 태감 봉승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어르신, 설마하니 운현궁 마마를 배알하실 심산이십니까!
-자네도 참으로 딱한 말을 하는구먼. 이 만시에 태황태후전까지 찾아가 놓고 마마를 뵙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헛짓이란 말인가.
-그러하나, 어르신. 어르신, 지금은, 지금은.
차마 대놓고 서엽을 막아서지는 못하고 덧없는 말만 웅얼거리고 있는 태감 봉승을 향해, 불현듯 서엽이 눈을 빛냈다. 마치 좋은 것을 발견했다는 듯, 짓궂은 눈빛이었다.
-자네가 마마께 고하게.
-어르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봉승이 펄떡 뛰어올랐다.
-소, 소인이 말입니까.
-그래, 자네 말이네. 마침 황상께서도 아니 계시니 자네가 할 만한 일이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아니, 소인은. 저어, 소인은.
말을 우물거리며 식은땀만 뻘뻘 흘리는 봉승을 짓궂은 시선으로 응시하며 서엽이 넌지시 물었다, ‘왜, 못하겠나?’ 그 말에 봉승이 ‘이런 만시에 어르신의, 아니, 아녀자의, 아아니, 황실 어른의.’하고 두서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겁먹은 콩벌레마냥 몸을 있는 대로 웅크렸다. 따지고 보면 그가 입에 담는 말은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었으나,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문장도 만들지 못하는데다 말을 더듬기까지 해서야 그 말을 귀담아 들을 이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그 두서없는 말을 들어주기도 질렸던지, 서엽이 딱 잘라 말했다.
-찾아뵙기에 턱 없이 늦은 시간이란 사실을 어찌 내가 모르겠나. 허나 급히 아뢰어야 할 사안이니, 어쩔 수 없음이야.
-급히 아뢰어야 할 사안이라니요?
봉승이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들고 여쭙자, 서엽의 눈이 초승달처럼 슥 휘어졌다. 그 순간, 서현이 뭔가를 눈치 챈 것처럼 홱 머리를 돌리고 고함을 질렀다.
-설마, 아버님!
안 됩니다! 하고 서현이 내지르는 소리를 뚫고, 서엽이 말하는 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또릿하게 들려왔다.
-천제사(天祭祀)를 준비하여야겠네.
-천제사···!
-황상께서 귀궁(歸宮)하시는 것을 기다리며, 폐하께서 돌아오셨을 때 곧바로 천제를 치를 수 있도록.
그렇게 말한 서엽이 서현에게로 몸을 돌리며 큰 소리로 덧붙였다.
-지금까지는 정이 깊으시고 의리가 있으신 운현궁 마마께오서 오랫동안 용인으로서 신민들을 지탱하여 준 상국을 의식하여 차마 확답을 하지 못하고 계시었네만, 이제는 어쩔 수 없으실 것이야. 많은 이들이 보았지 않는가. 상국께서 혼신의 힘을 다 하시었으나 결국 황상의 ‘힘’을 이기지는 못했네. 이로서 황상께서는 혈통과 자격 모두에서 우위를 점하셨으니 운현궁 마마께서도 이번에는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이야.
만일 마마께서 그러지 못한다 하신다면, 하고 서엽이 목소리를 낮추어 가정한 후에 빙그레 웃어 보였다.
-신하된 도리로 내가 마마께오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실 수 있도록 적극 보필하여 드려야겠지.
태황태후가 이번에도 천제를 방해하려 든다면, 헌원제 시절부터 지금까지 무려 삼대에 걸쳐 잡고 있던 손을 끊는 것도 각오하리라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 선언은 서현조차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던지, 서엽을 올려다보는 서현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서현의 입술이 꿈틀하더니 신음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안···.
-주강.
서엽이 서현의 말을 끊고 바다거북 같은 용모의 심복지인에게 앞장서라는 뜻의 눈짓을 보냈다. 주강이라 불린 작달막한 사내가 소리도 없이 다가가 봉승의 등을 밀었다. 헉,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숨만 겨우 삼킨 봉승이 반사적으로 서엽을 돌아보았다가 바로 서엽과 눈이 마주쳐 석상처럼 굳었다. 재촉이 분명한 시선을 받고 봉승은 ‘어르신’하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애원했지만 서엽은 눈 하나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래서 봉승은 결정해야만 했다. 끝까지 서엽의 명을 거역하여 그의 눈 밖에 날 것인지, 이 늦은 밤에, 그것도 태황태후께서 필시 불쾌해 하실 만한 일로 태황태후전을 찾았다 불같은 성격의 그 어른께 큰 화를 당할 것인지. 하지만 고민하는 척 해도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소인이 미리 운현궁으로 가 마마께 아뢰어 놓겠나이다.
울음을 삼키며 말한 봉승이 서엽보다 앞서 천추전을 빠져나갔다.
봉승이 헐레벌떡 뛰어 천추전을 나간 뒤, 서엽도 멈춰 있던 걸음을 재촉하였다. 천천히 서엽이 서현에게서 멀어져 긴 보랑을 걸어 나갔다. 그 유난히 느릿한 걸음이 서현의 신세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현과 서엽 두 부자(父子) 사이에 끼어 두 사람의 눈치만 보던 사람들도 주춤주춤 서엽을 좇아 걸음을 옮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천추전 안에는 잠시 후 몇몇 사람만이 남았다. 그 사람들 중의 하나인 천견 최유가 서현에게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상국···.
-영노당.
최유를 돌아보지도 않고 서현이 내뱉은 말에, 최유의 눈이 커졌다.
-무어라 하셨습니까, 상국?
-당장 영노당으로 가라. 사람들의 눈이 운현궁으로 쏠려 있는 틈을 타서.
영노당(永路堂)이란 다름 아닌 헌의공 서엽이, 서현이 영리로 거처를 옮긴 이후 본집을 처분하고 지은 집의 이름이었다.
꿀꺽. 최유가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전 서현이 한 말은 충격으로 정신이 아찔하여 마구 내뱉은 말 따위가 아니었다. 비록 기력이 쇠하였기는 하나 지금 서현의 상태는 언제 어느 때보다 냉정하였다. 최유가 서현의 뒷모습을 긴장한 눈으로 지켜보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소인이 어찌 하오리까?
-별당을 찾아, 내 말을 전하라.
서현이 입을 열었다···.
*
영노당(永路堂)은 선제가 붕어하고 새 황제가 옹립되던 시기에 지어진 서엽 개인 소유의 저택으로, 민사 영무 서엽가라는 이름 대신 대부분 몸채인 영노당의 이름을 따 영노당이라 불렀다. 본디 서가의 본집은 운니 교각의 거택으로, 마치 궁궐처럼 담 안에 사문(門)을 두고 그 안에 본채인 은신당과 안채인 영화당을 비롯하여 해화당과 이소당, 채운루 등의 건물은 물론 집안의 선조가 되는 황연공 서충과 이연대장공주를 모신 사당까지 갖춘 크고 웅장한 집이었으나 서엽은 그 집을 종매(從妹)인 서윤에게 양보하여 준 후 영노당에서 은거하다시피 살고 있었다.
영노당은 엽엽(曄曄)한 서가의 본집과는 달리 여러모로 소탈하고 정결한 멋이 있는 건물로, 마치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의 집처럼 몸채인 영노당과 안채인 애련당(哀憐堂) 단 두 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허나 말로는 몸채와 안채라고 부르지만 실상 안채인 애련당은 몸채와 완전히 분리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건물이었다. 높은 담이 영노당과 애련당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고, 거리상으로도 서로 다른 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 영노당에서 애련당으로 가는 길이 아이나 여자 하나나 겨우 갈 법한 샛길 하나뿐인데다, 두 건물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듯한 방향으로 지어져 있어서 멀찍이서 바라보면 괜히 쳐다보는 사람이 다 머쓱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런 사정이다 보니 영노당과 애련당에서 먹고 자며 일하는 비복(婢僕)들도 서로 다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데면데면 지내면서 바깥출입도 상대 집을 통하지 않고 따로 낸 출입구로 드나들곤 하였다. 걔 중 애련당 비녀(婢女)들은 자기네들끼리 녹문(鹿門)이라 부르는 쪽문을 이용하여 바깥출입을 하였다. 문틀이 마치 사슴뿔처럼 뾰족한 돌기가 튀어 나와 있다고 해서 그리 부르는 모양이었다.
건장한 사내종들마저도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들었을 심야(深夜)인지라, 계집종들이 드나드는 녹문 근처는 당연히 서늘한 침묵과 어둠으로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늘에는 달조차 저물고 이제는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사박, 하고 옷깃이 풀을 스치는 소리가 그 단단해 보이던 침묵을 깨뜨렸다. 그 소리에 자겁(自怯)을 냈는지 움직이던 소리가 뚝 멈췄다. 그러자 곧바로 칼 같은 재촉이 채찍질하듯이 날아왔다.
“거기서 풀벌레 흉내라도 낼 셈이냐?”
나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덧붙였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당장 그곳에서 나오거라.’ 그 말에 고무된 듯 다시 인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바짝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있는 손이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잠시 후 인영이 녹문 밖으로 완전히 빠져 나왔다. 그보다 앞서 바깥으로 나와 있던 이가 입은 아직 다문 채로 인영을 향해 손짓을 했다. 인영이 그를 좇아 잰걸음으로 한참 동안을 걸었다. 그렇게 몇 분, 영로당이 점으로 보일 정도로 작아지자 두 사람의 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싶더니 치맛자락을 두른 인영이 입을 열었다.
“날이 밝는 대로 영이에게 일러 풀을 베게 해야겠다. 저대로 놔두었다가는 잡풀이 사람만큼 자라겠어. ···헌데 너는 어찌 그리 뿔이 났어?”
“성이 안 나게 생겼느냐.”
남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여인이 도통 걸음을 늦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남자를 따라 다시 걸음을 빨리 하며 변명했다. 마치 물질을 하는 사람마냥 거친 손이 언뜻 보면 수수한 듯 보이나 실제로는 수 개의 보배구슬보다도 값비싼 연주비단 치마를 머쓱하게 조몰락거렸다.
“갑작스런 일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약간이라도 여유가 있었다면 내 노복(老僕)의 봉지라도 구해 입었을 터인데,”
“그것이 아니라.”
구구절절 늘어지는 여인의 변명을 남자가 썩둑 자르며 갑자기 몸을 돌렸다. 남자의 뒤를 뒤처지지 않고 좇아가려고 안간힘을 쓰며 종종걸음 치던 여인이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걸음을 멈췄다. 여인의 몸이 위태롭게 좌우로 흔들거렸다. 그런 여인을 걱정하는 기미도 없이 사내가 사납게 따지고 들었다.
“너는 밸도 없느냐? 그 놈에게 당한 수모가 얼마인데, 놈이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가는 것은 또 무어야.”
“수모는 무슨···.” 남자의 말에 여인이 애매한 웃음을 지르며 그 뒤에 한숨처럼 덧붙였다. “내가 창피고 모욕이고 당할 여지가 언제 있었느냐. 그 이의 얼굴생김도 가물가물할 지경인데.”
“허.”
“헌데, 그랬던 이가 이처럼 급박히 나를 부르는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사내가 여인의 그 말에 슬그머니 풀었던 팔짱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아니 그러냐?, 하고 확인하듯 묻는 말에 사내가 잠시간 침묵하다가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그렇다 해도 이런 야밤삼경에 여인네의 처소를 드나드는 것은 무슨 무례야. 이미 다 지나간 일을 새삼 끄집어내서 탓하는 꼴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그 사람의 흉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반야(半夜)에 여인네의 처소에 드나들어야 할 만치 큰일인 모양이지.”
“빌어먹을 놈.”
끝끝내 여인이 그 자를 싸고돌자 가자미눈이 된 사내가 여인 쪽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 이 말이냐, 말을 전한 이를 이름이냐, 그것도 아니면 나를 말하는 것이냐?’, 여인이 웃으며 묻는 말에 남자가 대답 대신 으드득 이를 갈아 붙였다. 험악한 빛이 번뜩거리는 눈에 아직도 졸음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여인의 얼굴에서 얄궂은 웃음이 사르르 사라지더니 대신 애틋해 하는 빛이 떠올랐다.
“고맙다, 강아.”
사내가 멈칫했다.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사람 같은 표정으로 사내가 여자 쪽을 곁눈질했다. 정면으로 보는 것도 두렵다는 태도였다.
“몸소름 끼치게 무슨 소리야.”
“어찌 그런 식으로 말하니. 실심 고마워서 그리 말한 것인데.” 여인은 어기대는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매서운 타박을 놓았지만, 그런 다음 순간 더운 곳에 둔 풀처럼 시무룩 돌변하여서 눈을 내리깔았다. 민천 같은 푸르른 물을 들인 여인의 가죽신이 툭, 다른 곳보다 조금 돌출되어 있는 땅을 한 번 걷어찼다. 그러던 여인이 양구(良久: 한참 있다가)에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너로서는 몹시 꺼려졌을 것이 아니냐.”
“······.”
“지난번 서찰을 전해 주었던 것만 해도 너로서는 넘칠 만큼 베풀어 준 것인데 또 이런 청을 하게 되어 너를 볼 면목이 없다. ···허나 도무지 나 혼자서는 그 이를 볼 만한 용기가 나지 않아서···.”
미안하구나, 강아. 여인이 얼굴을 가린 장옷을 조금 더 단단히 여미며 속삭였다. 장옷 고름을 여미는 손이 담대한 그녀답지 않게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런 여인을 꽤 오랫동안이나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가,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아도 ‘내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나.’하고 투덜거리는 말이 얼굴 가득 쓰여 있었다.
사내가 입을 다물자, 여인도 따라 입을 다물었다. 잠시, 멈춰 있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느려졌었던 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인적 하나 없는 좁은 길을 사내와 여인은 나란히 서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고요한 길 위로 사박사박사박, 여인과 사내의 가죽신이 돌길과 부딪쳐 나는 발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러나 그 소리조차 여인과 사내가 포장되지 않은 흙길로 접어들자 점점 잦아들었다. 밤이슬에 젖은 흙길이 오늘 유난히 포슬포슬해 작은 발소리조차도 잡아 삼키고 있는 것이었다. 좁디좁은 흙길 좌우로는 무엇인지 이름도 모를 풀들이 길쭉하게 자라 있었다. 조금 전 여인이 잠시만 놓아두면 녹문의 잡풀이 사람만치 자라겠다 우스갯소리를 했을 때에는 내심 코웃음을 쳤었건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푸른 이파리 하나마다 결로(結露)한 좌우의 잡풀들은 참말로 작은 사람처럼 키가 컸다. 이래서야 어디 앞이 보이겠나. 자꾸만 앞을 가리는 풀들을 신경질적으로 걷어내며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내가 걷어낼 때마다 툭툭 튀어 오른 이슬들이 사내의 면포 봉지 자락을 적셨다.
“이것 참···,”
자꾸만 장딴지에 감기는 주의 자락을 신경질적으로 걷어내며 투덜거리던 남자가 어느 순간 딱 멈춰 섰다. 자의는 아니었다. 다만 길이 좁아 자신의 뒤에서 걷게 했던 여인이, 그의 소맷부리를 움켜잡고 당긴 탓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혜야.’, 하며 사내가 여인의 이름을 부르며 돌아보려 하는데 여인이 먼저 말을 이었다.
“강아, 이전에 했었던 말로 네게 긴히 할 말이 있는데···.”
그러나 거기까지 말한 후 여인의 말이 뚝 자른 것처럼 끊겼다. 응? 잠시간, 여인이 마저 말을 하기를 기다리던 사내가 아무리 기다려도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여인을 살피기 위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설마···?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남자는 뒤를 돌아보다 말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마치 생각하기를 멈춘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머리와는 별개로 움직이는 기관처럼 그의 팔이 천천히 곁으로 뻗어나가 시야를 가리는 잡풀을 확 걷었다. 풀잎에 맺혀 있던 이슬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시야가 완전히 걷혔다. 흙길이 끝난 곳에 있는 것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낡은 정자가 한 채 지어져 있는 물가였다. 그리고 그 물가에는.
“희야.”
사내의 등 뒤에 몸을 숨긴 여인이 떨리는 소리로 속삭였다. 슬픔과 설렘과 원망과, 그리고 채 빛이 바래지 않은 연정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목소리. 사내는, 엄헌영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꾹 감고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
정적(靜寂)이 흘렀다. 자신의 몸 뒤에 모습을 숨긴 여인과, 자신의 앞에 말없이 서 있는 한 남자. 그 사이에 선 엄헌영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계속되는 침묵 때문이 아니라, 확연하게 느껴지는 저 두 사람의 온도 차이 때문에. 엄헌영은 겨우 뜬 눈을 잠시 자신의 발치로 내리깔았다가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옻칠이 벗겨지고 현판의 글씨조차 지워진 낡은 정자 옆에 선 남자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맑디맑았다. 너무나 맑아서 그 안에 사는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는 호수 같은 얼굴. 그 호수처럼, 사내의 표정과 눈도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엄헌영이나, 그 뒤의 여인조차도.
그러나 그런 사내와는 달리 엄헌영의 등 뒤에 숨은 여인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여인이 당황하고 있는 것이 몸을 돌린 엄헌영에게까지 느껴졌다. 무심코 발을 동동 구르던 여인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엄헌영의 옷자락을 콱 움켜쥐고 발을 구르는 것을 참았다. 하지만 엄헌영의 옷자락을 잡은 손마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이럴 줄은, 하고 여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는지 말끝이 다문 입술에 먹혀 뭉뚱그려진다. 엄헌영은 그녀의 혼란스러운 심경은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인으로서도, 아마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엄헌영 또한 그러했으니. 이리도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서로 말을 섞기는커녕 얼굴을 마주한 지도 수년의 시간이 흘렀거늘, 그랬거늘.
···그런데도 예전의 그 풋사과 같던 감정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볼을 붉히다니. 세월이 쌓아 놓은 재에 묻혀 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감정이란 놈은 조금도 불타지 않고 그저 고운 재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운 이를 만나 조심스럽게 재를 털어 내자 해묵은 감정은 언제 그랬었냐는 듯 진주구슬처럼 다시금 은은한 빛을 냈다.
이리 표현하니 참으로 애틋하고 곱게 들리지만 실상은,
“돌겠구먼.”
엄헌영이 험악하게 중얼거리며 벅벅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등 뒤의 여인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새것처럼 되살아난 헌것은 엄헌영에게 있어서나 여인에게 있어서나 난감한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엄헌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힐끗 눈앞의 남자를 곁눈질했다, 더구나 저 치의 반응이 저래서야. ···하기는, 저 치까지 함께 불타 주면 더 처치 곤란한 일이겠지마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엄헌영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일부러 소리를 내어 다가간 보람이 있었던지 남자가 엄헌영을 똑바로 바라봐왔다. 남자의 입이 열렸다.
“그대가 어째서 이곳에 있지?”
“그럼 이 야밤에, 더구나 이런 외진 곳에 가녀린 여인이 홀로 와야 되겠나?”
엄헌영의 반문에 남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인은 심복인 천견조차 이 자리에서 물렸습니다. 자모(慈母)께서도 동행인을 물려주시지 않겠습니까.”
남자의 요구에 엄헌영과 여인 두 사람의 얼굴이 굳었다. 여인은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말을 듣고 상심하여서, 또 엄헌영은 남자의 가당치도 않은 요구를 듣고 노여움을 느껴서였다. 엄헌영이 사납게 일갈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작작하거라! 애초에 이런 시간에 사람을 보내 머리를 올린 여인을 불러낸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이거늘 어디서···!”
주변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성을 내던 엄헌영이 그러나 어느 순간 딱 말을 멈췄다. 찌푸려진 채로 꿈틀 경련하는 눈이나, 채 다물어지지 않은 입 따위를 보니 한참 말하는 동안 전혀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았다. 과연 그 예상이 옳았는지 엄헌영이 남자에게로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너, 대체 그 꼴이 무어냐?”
남자가 천천히 한 발자국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엄헌영 쪽이 훨씬 움직임이 빨랐다. 급속도로 남자의 지척으로 다가간 엄헌영이 얼굴을 와자작 구겼다. 사위가 어두운 탓에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나, 가까이에서 보자 확실해졌다. 남자의 움직임을 훑는 엄헌영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저것은 여유를 부리고자 일부러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빨리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남자의 팔을 엄헌영이 번개처럼 낚아챘다.
엄헌영의 갑작스런 행동에 깜짝 놀란 여인이 소리쳤다.
“강아?”
“어떻게 된 거지?” 그러나 엄헌영은 여인의 말을 전혀 못 들은 사람처럼 남자만 뚫어져라 노려보며 캐물었다. “어디서 다친 게야?”
“다쳤다고?”
이번에도 여인이 대신 놀라서 대답했다. 놀란 나머지 여인이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엄헌영과 사내가 있는 편으로 달려오려고 했으나 엄헌영이 손을 저어 그녀를 막았다. 그것을 보고서야 자신이 나설만한 상황도 입장도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한 여인이 몸을 움츠렸다. 그런 여인의 낯빛이 몹시 어두웠다.
“놓아.”
묵묵히 엄헌영이 하는 꼴을 보고만 있던 남자가 불쑥 내뱉었다. 무어?, 엄헌영이 미간을 구기며 묻자, 남자가 매몰차게 엄헌영의 손을 쳐냈다.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손을 쳐냈는데도 엄헌영은 성을 내는 대신 찌푸린 눈으로 자신의 손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머리를 들어 남자의 몸을 죽 훑어보며 다짜고짜로 물었다.
“역시 다쳤나? 어디에서? 얼마나 다친 거지? 어쩌다 그렇게 됐나?”
“그대가 무슨 상관인가.”
놀라서 물은 것이 무색하도록 남자의 대꾸는 싸늘했다. 그 대꾸에 역시 마음이 상했는지 엄헌영이 도끼눈을 뜨고 남자의 얼굴을 노려다보다, 한참 뒤에 딱딱한 말투로 내뱉었다, ‘그래. 그것은 그렇지. 내가 그대 일에 새삼 무슨 상관이겠나.’ 이것으로 되었나. 엄헌영이 더럽다는 듯 씩씩대며 내뱉은 말을 듣고 남자는 엄헌영과의 일은 모두 마무리 지어졌다는 듯이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으나, 여인은 아직 엄헌영 쪽을 보고 있었다. 왜?, 하고 생각하는 순간,
“헌데 역시 들어야겠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끈질기군.”
“마마가 있는 쪽이라면 십 년도 넘게 눈길도 주지 않던 자네가 급자기 변덕을 부리니 의심이 생길 만도 하지.” 엄헌영이 툭툭거리며 남자의 몸을 한 번 훑었다. “더구나 어디서 잔뜩 얻어맞은 꼴을 해가지고 말이야.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이쯤 되면 자네가 부상을 입은 이유가 돌연히 마마께 전갈을 보낸 까닭과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한 번씩은 해볼 걸세. 자네라면 안 그러겠나?”
도발하듯이 가슴팍을 쿡쿡 찌르며 엄헌영이 재차 물었다, ‘아닌가? 꿀 먹은 벙어리도 아닌데 대답해 보시지 그래.’
“결국 자리를 피해 줄 생각은 없단 말이로군.” 엄헌영의 손을 쳐내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들었다. “그럼 입 닥치고 들어, 효강.”
돌변한 남자의 말투에 엄헌영이 주춤했다. 그러는 사이 남자는 여인을 돌아보며 다시 숙목(肅穆)한 태도로 돌아가 말했다.
“일전에, 소인에게 보내셨던 서신에 쓰셨던 말씀은 아직도 유효한지 여쭙겠습니다.”
“서신···.”
여인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말을 듣자마자 동그랗게 눈을 떴다가 곧바로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 남자가 꺼낸 말이 몹시 뜻밖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뻔했다. 그러다 여인이 다시 머리를 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항(要項)이었던가요? 저는, 서신을 보내 놓고도···, 괜한 일을 한 것이 아닌가 염려하였는데···.”
엄헌영이 자신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그것이 중요한 일이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그는, 몹시 기가 막힌다는 태도였다. “그 어른이 석공(石工)들을 수시로 호출하는 일 따위가 무어 그리 특이한 일이라고?”
“허나 근래에 영로당에 드나든 석공의 수만 해도 스물이 넘어.”
“영로당 석재가 부실한 모양이지요.”
“내 알아보니 영로당 어느 부분도 보수를 한 곳은 없었어.”
“그렇다면 어르신께서 소유하신 정자 중 하나가 이번 고우에 수해 따위를 입었을 수도 있지요.”
“들어간 이는 있어도 나온 이는 없는데도?”
여인이 하는 대답 하나하나마다 틱틱 성의 없는 반박을 내쏘던 엄헌영도 그 말에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엄헌영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여인 쪽을 훽 돌아보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전에 제가 여쭈었을 때에는 그런 말씀은 없지 않으셨습니까!’ 여인이 입 안이 쓰다는 듯 입가를 일그러뜨리고 대꾸했다.
“나도 근경에나 들은 사실이란다. 네게도 귀튀우려 했었는데···.”
하며 여인이 남자 편을 살짝 곁눈질했다. 그것을 보자 머릿속에 반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엄헌영이 아, 짧은 신음을 흘렸다. 혹시, 조금 전 하려고 했다가 하지 못한 말이 저 말이었던가. 엄헌영의 표정을 읽는데 익숙한 여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엄헌영이 턱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허나 그런 풍문은 경무청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찌 된 일인지 당최 알 수가 없군.”
“자모님.”
남자, 서현이 다시금 여인을 불렀다. 자모님, 하는 말을 듣자 여인의 커다란 눈이 다시 쏟아질 것처럼 흔들렸다. 그러하나 여인은 용케도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가장해 대꾸했다, ‘말씀하세요.’
“소인이 확답 받고자 하는 것은 자모님께서 서신 말미(末尾)에 덧붙이셨던 말씀에 대한 것입니다.”
“말미에요···.” 기억을 더듬던 여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건, 혹여 제게 도움을 청할 일이 생긴다면 부담 가지지 마시고 구구(求救)해 달라던 그 말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딱 잘라 대답한 서현이,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고 그녀를 이곳까지 불러낸 용건을 밝혔다.
“자모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염치라는 놈은 키우지 않는 모양이지?”
너무나 뜻밖의 청에 여인이 한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큰 눈만 더 크게 뜨고 있으려니, 엄헌영의 빈정거림이 뼘창처럼 날아갔다. 여인이 당혹한 시선을 엄헌영에게 던졌을 때 엄헌영은 이미 서현의 코앞에 서서 허리를 아주 조금 기울이고 기웃기웃, 그의 얼굴 여기저기를 뜯어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굽혔던 허리를 쭉 펴면서 씩 웃으며 말했다.
“염치는 물론이요 양심도 보이지가 않는구먼.”
“강아!”
여인이 당장 정색을 하고 엄헌영을 나무랐지만 엄헌영은 그대지 귀담아 듣지 않는 눈치였다, 여인의 꾸중에는 ‘예에, 예.’ 다분히 의례적인 대꾸만 중얼거리고서 곧바로 서현에게 다시 시비를 거는 꼴을 보아하니 말이다.
표정을 싹 굳힌 엄헌영이 서현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쿡 쑤시며 으르렁거렸다. 허연 이가 금방이라도 서현을 물어뜯을 것처럼 번뜩였다.
“도움? 도움 좋아하시네.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줄 알고, 어디서 그 뻔뻔한 낯짝을 들이밀고 도움을 청하는 거냐?!”
“강아! 하지 마라. 그것은 내, 내가, 내가 먼저···!”
“넌 지금은 닥치고 있어!” 자꾸만 끼어들어 자신을 말리는 여인에게 엄헌영이 귀신처럼 일그러뜨린 얼굴로 일갈했다. 그 험악한 기세에 순간적으로 압도당한 여인이 입가를 가리고 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런 여인을 본 체 만 체하고 엄헌영이 다시 서현을 윽박질렀다. “도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런 일은 두고 보지 않을 테다. 알아들었으면 당장 꺼져!”
서현이 조용히 대답했다.
“착각하고 있나보군.”
“착각?”
“나는 네게 도움을 청한 것이 아니다.” 아니면, 하며 서현의 머리가 모로 기울여졌다. “내가 모르는 사이 그대가 효강 엄헌영이 아니라 내 자모님이 되신 것인가?”
“뭐?!”
“기가 막힐 노릇이군. 만일 그대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대로 만방에 헌의공이 노망이 났다 밝히고 자리에서 몰아내도 되겠어. 내가 손을 쓸 필요도 없이 다른 치들이 알아서 아버님을 뒷방으로 쳐 밀어 넣을 터이니 손쉬워서 좋겠군.”
빈정거리는 기색도 하나 없어서 더 거슬리는 이기죽거림에 잔뜩 성이 난 엄헌영이 ‘이놈이!’ 하고 달려들어 서현의 멱살을 움켜잡았다가, 그런 뒤에야 어, 하며 한 쪽 눈살을 꿈틀했다. 방금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뭐였지? 내심 고개를 갸웃하며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침 뒤에서 그 의문을 해소시켜줄 외침이 들려왔다.
“지금 헌의공을 몰아낸다고 하셨습니까?!”
“몰아낸다고?!”
놀란 나머지 무심코 서현의 멱살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주면서, 엄헌영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강아, 이제 그만 좀 하거라!’, 기겁한 여인이 한달음에 달려와 우악스레 서현을 끌어당기고 있는 엄헌영의 손을 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얼떨떨한 얼굴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엄헌영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풀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여인이 엄헌영을 끌고 서현에게서 멀어졌다.
“그만 좀 해.”
“지금.” 엄헌영이, 여인이 꾸짖는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서현을 손가락질했다. “지금 헌의공을 몰아낸다고 했었나?”
여인이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고개만 끄덕였다. 허.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엄헌영이 허탈해하는 숨소리를 뱉으며 서현을 쳐다보았다.
“네 아비를 몰아낸다고? 어르신께서 너와 완전히 등을 지고 황제를 지지하기로 했다던 풍문이 사실이었던 게냐?”
그 말에 대꾸하지 않는 서현을 엄헌영의 매서운 시선이 집요하게 훑었다. 두터운 무표정 아래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을 그의 진짜 감정들을 파악하기 위해 끈질기게 서현의 표정을 좇던 엄헌영이 한참 후에야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머리를 들었다, ‘이런 빌어먹을 일이 있나.’
“아무리 그래도 내 설마설마 했었거늘. 그 어른이 네게 공을 들인 시간이 얼마인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엄헌영이 번쩍 고개를 들고 서현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지?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
“네가 이렇게 다친 것도 상관이 있지?”
그러나 서현은 곧바로 여인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지금 확답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서현!”
“여유를 드릴만한 시간이 없습니다.”
저벅. 서현이 여인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가자, 또 저벅. 배 위에 두 손을 콱 깍지를 낀 여인이 그만큼 물러났다. 여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설명을, 일단 설명을 들어야겠습니다.”
“자모님.”
“그런 식으로 저를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재촉하는 서현의 말에 여인이 깍지를 낀 손에 꽉 힘을 준다 싶더니, 날카로운 어조로 자르듯 말했다. 그 말에 서현이 조용해지자 여인은 눈을 내리깔고 괴롭게 덧붙였다, ‘혹여 방금의 제 말로 심기가 상하셨다면, 송구합니다···.’ 서현은 긍정의 말도 부정의 말도, 심지어는 작은 고갯짓조차 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내리깔렸다. 지금껏 여인을 보는 눈에 한 점의 사심도 스쳐 지나가지 않았던 서현의 눈빛도 일순간이지만 일렁이는 듯했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여인과 엄헌영이 다시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서현은 강철을 면상 위에 얇게 깔아 놓은 듯한 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입을 열고 있었다.
그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도움을 주실 수 없다 하시면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자,”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가버릴 기세인 서현을 여인이 당황해서 붙잡았다. “잠시만, 체제공. 저는 아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라니요···.”
“시간이 없습니다. 곧 아버님께서 귀서(歸棲)하실 시각입니다.”
여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말씀은 아직 그, ···그 어른께서 돌아오지 않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런 곳에서 뒤를 돌아보아봐야 영로당이 보일 리가 만무하건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그녀는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영로당은커녕 자신의 거처인 애련당 지붕 끝조차 보이지 않는 뒤편을 하염없이 돌아보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전혀 몰랐습니다.”
그 말을 서현 대신 엄헌영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받았다, ‘마마께서 언제는 그 어르신 오고가는 시간을 아시었다고 그러십니까.’ 그러더니 그가 서현에게 턱짓을 하며 따지고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어? 그 어른께서 이 늦은 시각까지 귀가하지 않고 계시는 것이 무슨 상관이야? 아, 그 어른의 눈을 피해 마마를 꼬드겨 보시려고 그러시는가? 그런 심산이라면 염려 말게. 마마와 매한가지로 그 어른은 마마께서 언제 드시고 나시는지 신경도 쓰지 않으시니 말이야. 그러니,”
“궁에서.”
서현의 목소리가 한창 이어지던 엄헌영의 말을 끊었다.
“궁···?” 하고 묻는 엄헌영의 시선이 저절로 북쪽을 향했다. 정궁인 자의성이 있을 북편은 지금 그들이 있는 이곳만큼이나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만시에, 아직도 궁에서 나오지 않으셨다고?”
“그대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그것은 의외로군.”
엄헌영이 보고 있는 북편을 향해 느릿하게 몸을 돌리면서 서현이 말을 이었다.
“황상께서 청의관 수객을 데리고 천추천에 은신하셨다.”
“청의관 수객? 허나 그 치는 지금···.”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엄헌영이 말끝을 흐렸다가 다시 말했다. “그 이를 데리고 무엇을 하실 수 있다고.”
“가변례.”
“가변례라고?!”
그래. 서현이 대꾸하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꾸만 눈앞이 흐릿해지고 사위가 흔들린다. 이대로 있다가는 서엽이 궁에서 나오는 것보다도 자신이 정신을 잃는 것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찌 가능하단 말이야?’, 엄헌영이 당황해서 중얼거리는 소리에 서현은 대답했다.
“나도 몰라. 전례가 없는 일이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그보다는, 황상마저 몸이 터져 절명하실 가능성이 높겠지만. 서현이 담담하게 덧붙인 말에 엄헌영과 여인의 낯빛이 새파래졌다. 놀라서 차마 입도 열지 못하고 있는 여인 대신 엄헌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떻게 되었나. 자네도, 자네도 지금껏 궁에 있었던 게지. 그러니 아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실패···?”
엄헌영이 눈을 크게 떴다. 진창을 구른 것 마냥 일그러진 서현의 옷매무새와 거의 사색이나 다름이 없는 낯빛, 그리고 날카로운 것에 벤 것 같은 상처들이 새삼 눈 안에 들어왔다. 실패라니, 설마.
서현이 고백했다.
“황상의 결계를 깨는데 실패하였다. 황상께서는 ‘둥지’로 몸을 숨기셨고, 이제 그 분의 발로 돌아오시기 전에는 그 누구도 황상을 찾을 수 없어.” 그 충격적인 발언에 누구도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서현이 담담히 덧붙였다. “그리고 아버님께서는. 헌의공께서는 다른 고관들을 이끌고 운현궁에 천제사에 대한 하답(下答)받으러 가시었다. 틀림없이 원하는 답을 들으실 수 있겠지. 제 아무리 운현궁 마마가 황상을 꺼린다 하여도 이번만큼은 머리를 저을 명분이 없을 터이니.”
“어, 어찌 그런 일이···!”
“소인이 말한 것에는 한 치의 더함도, 한 치의 뺌도 없음입니다.” 시야가 거의 부옇게 변했다. 마치 물안개가 낀 것 같다···. “그런 까닭에, 마마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확답을 주실 수 없다면 이만 돌아서서 가주십시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지만 어느 방향에서 난 소리였는지도 이제는 가늠할 수 없었다.
“당장 답을 드리기에는 어렵습니다···.”
현주에게서 난 소리였던가. 곧 떨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서현은 겨우 깨달았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 아마, 긴장으로 혈색이 오른 입술도 그만큼 떨리고 있을 것이다. 두 뺨 또한 입술만큼이나 붉게 변해 있겠지. 그리고 새하얀 이마에는 식은땀이 돋고, 흘러내린 땀으로 귀밑머리는 구슬구슬 구부러들어 있을 것이다. 물기에 젖으면 늘 그랬듯이. 시야가 거의 하얗게 변했지만 보지 않아도 그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하나, 이제와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렇습니까.”
턱 끝을 끄덕이며 몸을 돌리자 당황한 엄헌영이 ‘어이.’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서현은 머릿속에서 수를 세고 있었다. 조금. 조금 더.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바로, 지금. 서현이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 때, 여인이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서현은 이를 악물었다. 안도감과 죄책감이 어지럽게 얽혀 두통이 일기 시작한다.
“기다리십시오, 체제공. 기다리세요. 가지 마시고, 기다리세요.”
여인이 황급히 달려오는 발소리가 달려왔다. 차마 손을 내밀지는 못하고 손가락만 자꾸 쥐었다 폈다 하며 여인이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마십시오. 기다리세요. 제 앞에서 또다시 그러지는 마세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리 칼같이 돌아서시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말미를 많이 달라는 말씀이 아니어요. 허나 잠시 우뇌치도 않고 답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의, 소녀의, 일신만이 걸려 있다면 또 모르나 황상의···, 제안이···.”
“황상의 안전만은 보장하여 드리겠습니다.”
여인의 눈이 흔들렸다. ‘듣지 마십시오.’, 그것을 눈치 챈 엄헌영이 급히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경고했지만, 서현이 연달아 내뱉은 말이 이번에는 여인은 물론 엄헌영의 심장까지 한 번에 뒤흔들어 놓았다.
“제가 죽습니다.”
“죽, 는다고요.”
“혹여 마마께서 제게 도움을 주시어 일이 잘 풀린다면 적어도 황상의 목숨은 무사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저는 죽습니다.”
“협박입니다! 말도 안 되는 협잡질입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엄헌영이 여인을 억지로 서현에게서 떼어내며 소리쳤다. 협박이라. 서현이 중얼거렸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군.”
“뭐···?”
마마. 서현이 다시 여인에게 말했다.
“직접 마마께서 나서 아버님께 맞서 달라거나, 혹은 저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공표해 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 대체 무엇을···.”
“사라진 석공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석공 말씀이십니까?”
생각하지도 못한 대답에 여인은 물론 엄헌영도 적잖게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고.’, 서현이 조금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말이 느려진 것은 의도된 것 따위가 아니었다. 다만,
“그 안에서,”
점차 뿌옇게 변하던 시야가 이제는 완벽하게 빛이 바랬다.
“그 안에 항아리가, 있을 것입니다.”
“항아리···?”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세상이 어찌 생겼는지 따위는 보이지도 않건만, 머리를 끄덕이자 새하얀 세상이 함께 흔들렸다.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유약을 발라 구운, 아마도.”
“체제공?”
“그것을 제게 가져다주십시오. 그 외에, 마마께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체제공!”
여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으나 확실하지는 않았다. 점점 멀어지는 시야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소리도 멀어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자신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듯한 여인이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막상 뻗은 손으로 자신을 부축하지는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체제공,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아요.’, 결국 뻗었던 손을 움츠리며 그녀가 건넨 말에 엄헌영이 자신에게로 시선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눈치가 빠른 그라면 당장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
서현은 점점 차오르는 숨을 씹어 삼키듯 들이쉬며 마지막 힘을 쥐어짜 고함을 질렀다.
“천견! 천견, 어디에 있는가, 천견!”
그 고함을 듣고 지척에서 대기하고 있던 최유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가 있을 만한 곳으로 서현은 팔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돌아가겠다.’
“잠시만요!”
여인이 막 걸음을 옮기려는 서현을 붙잡더니, 땀이 배어나온 두 손으로 콱 치맛자락을 쥐면서 확답을 요구했다.
“그것만, 말씀하신 그 일만 이행해 드리면 되는 것입니까? 그 이상은 없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옆에서 엄헌영이 만류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여인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의 일이라면 해 드리겠습니다.”
이제 초점마저 사라진 눈으로 그녀 쪽을 보려고 애를 쓰면서 서현이 대답했다.
“마마께서 베풀어 주신 크나큰 은혜, 결코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서현, 하고 엄헌영이 할 말이 있다는 듯 급히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으나 서현은 대꾸하지 않고 최유를 재촉했다. 최유가 여인과 엄헌영에게 양해를 구하는 목례를 해보인 후에 서현을 부축하고 걸음을 옮겼다. 여인과 엄헌영에게서 꽤 멀어졌다는 확신이 들자 서현은 곧바로 눈을 감았다. 뜨거운 숨이 저절로 입에서 새어 나왔다. ‘체제공.’, 그런 서현이 걱정이 되었는지 최유가 조심스럽게 서현을 불렀으나 서현은 이미 까무룩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귀도 눈도 모두 차단당한 채, 바닥이 없는 늪으로 계속해서 잠겨드는 듯한 이 끔찍한 느낌을 서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움직였다.
“서둘러라, 천견. 아버님께서···.”
이 끔찍한 느낌이 다시금 자신을 찾아든 것을 보니 그가 궁을 나온 것이 확실했다.
재촉을 받은 최유가 발걸음을 빨리 하는 것을 느끼면서 서현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숨을 내쉬는 그 순간 차차 흐릿해져가던 청각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아니, 그것은 상실이라기보다는 ‘차단’이라는 말이 조금 더 어울렸다. 여전히 ‘존재’하기는 하나 굳게 문이 닫혀 더 이상은 ‘쓸 수 없는’ 상황. 그렇게 시야가 닫히고, 귀가 닫히고, 마지막으로 온 몸의 감각마저 멀어지면서 서현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었다. 답답하다. 온 몸이 좁디좁은 항아리 안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극심한 피로로 정신을 잃기 직전이라는 사실이 지금 그에게는 오히려 축복이었다.
···멀어진다.
아니, 나는 ‘떨어진다’.
그러나 완전히 정신을 잃기 직전, 서현은 생각했다. 다행이다. 이렇게 되기 전에 그녀를 만나, 확답을 들을 수 있어서.
이대로, 부디 늦지 않도록. 제발.
그리고 그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