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을 본 순간 서현은 황제가 무엇을 할 심산인지 바로 깨달았다.
“일황자!”
저절로 벼락같은 고함이 터졌다.
“이 멍청한 놈!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바로 뛰쳐나가 황제의 멱살을 잡고 끌고 올 셈이었다. 그러나,
쾅!
큰 소리를 내며 서현의 몸이 튕겨 나왔다. 부딪쳤다기보다는 서로 밀어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척력(斥力),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서현이 눈을 홉떴다. 그가 손을 뻗었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활한 ‘하늘’이 껍질막 한 장도 없이 곧바로 보였다. 의심할 나위 없이, 서현과 ‘하늘’은 한 공간에 있었다. 그러나 서현이 뻗은 손은 채 펴지지도 못한 채 그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탁, 하고 손톱과 단단한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 서현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다시 보이지 않는 힘이 서현을 난폭하게 밀어냈다. 그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던 서현은 몇 발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그 힘을 피했다. 차르륵. 서현의 등과 부딪친 구슬주렴이 출렁 물결치며 차가운 마찰음을 냈다.
확실해졌다. ‘하늘’과 자신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을 격렬하게 거부하는 무언가가.
서현은 사나운 눈으로 머리를 들었다. 늘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이 번뜩하더니 북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고함을 내질렀다.
“황자!”
그의 시선이 드넓은 ‘하늘’ 어딘가에 꽂혀 있었다.
연기처럼 가벼운 흰 구름이 떠다니는 다른 곳과는 판이하게 다른 먹장구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되어 떨어질 듯 무거운 물기를 함빡 머금은 잿빛 먹장구름이 배고픈 짐승마냥 으르렁거리며 머리 위를 시커멓게 뒤덮고 있었다. 그 뒤에서 덕더글거리는 천둥이 커다란 뱀처럼 똬리를 틀고 번쩍거렸다.
그곳에 기이한 짐승이 있었다. 기이한 짐승, ‘그것’을 정의할 수 있는 말로는 그 이상의 표현이 없었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으나, 동시에 용도 아니었다. 길게 뽑아져 나온 목과 팔은 온통 흑요석 같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고, 손등에서부터 어깨까지는 일직선으로 시커먼 칼날 같은 톱니가 돋아나 있었으며 손끝에 달린 손톱은 갈고리달 같은 낫 그 자체였다. 그리고 검은 비늘이 돋친 뒷덜미와 어깻죽지에는 맞모선으로 두 개, 시커멓게 입을 벌린 상처가 나 있었다.
저건···? 기억에 없는 상처에 서현이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마치 자신이 다른 것들과 똑같이 먹장구름이라도 되는 듯이 멍하니 ‘하늘’에 떠 있기만 하던 그것이 머리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뱀처럼 세로로 긴 동공. 그 눈과 마주친 순간 쿵, 심장이 큰 소리로 한 번 뛰더니 동그랗던 서현의 동공이 ‘그것’의 것과 마찬가지로 길게 찢어졌다.
‘그것’과는 거리를 헤아리는 의미도 없을 만치 먼 곳에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서현에게는 그것이 자신과 지척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다. 무심코 손을 뻗고 만 것은.
“일황자.”
하고 부르며 다가간 순간 강한 힘이 그를 밀어냈다. 윽!, 미처 방비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나동그라진 서현이 억눌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바로 몸을 일으켜 앉으며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그것도 자신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이지(理智)도 느껴지지 않는 눈이었지만 서현은 그가 자신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현은 말했다.
“일황자,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안다. 네가 어찌하여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도 알아. 하지만 안 돼. 안 될 일이다.”
우르르 나지막한 뇌성이 울었다. 서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르는 듯 했던 그의 목소리가 변했다.
“너는 약조를 어겼다.”
하고 말하는 서현의 시선이 ‘그것’의 팔에 안겨 있는 무언가로 가 꽂혔다. 그러자 그것이 팔을 조금 움츠리며 몸을 측면으로 돌렸다. 마치 서현의 눈으로부터 자신이 안고 있는 것을 가리려는 듯이. 서현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듣지 못했나?, 서현이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조금 전 했던 말을 반복했다.
“너는 나에게 했었던 약조를 어겼다! 너 스스로 했었던 약조! 누구도 강요한 이 따위는 없었어, 오롯이 네가, 너 자신의 의지로 했었던 권약(券約)이었다! 그런데도 너는 그것을 어겼다!” 서현은 이를 악물고 ‘그것’의 팔 안에 안겨 있는 이로부터 힘들게 시선을 돌렸다. 비록 거의 점처럼 보이는 이이지만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서현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도대체 몇 번씩이나.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서현은 독하게 입술을 한 번 깨물고 곧바로 소리를 내질렀다. “너를 전적으로 위신(委信)한 것은 아니었다만, 기가 막히는구나. 이렇게 또 나를 배반할 셈이냐? 또다시 내게서 빼앗아 갈 셈이냐? 이렇게, 이렇게 또!”
그 외침에 그것이 눈에 보이도록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서현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이렇게 또 한 번 나를 나락에 처박는구나, 너라는 놈은!’ 그 말을 들은 그것의 눈이, 잿빛 막으로 싸여 있는 듯한 짐승의 눈이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한다. 종(縱)으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쿵쿵 뛰고 있다. 마치 그 안에 심장이라도 들어 있는 듯이. 그것을 보자 뱃속이 아파왔다. 무거운 둔기(鈍器)가 뱃속을 내리치고 있는 듯한 둔중한 통증.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너란 놈은.” 끽, 이와 이가 부딪쳐 소름끼치는 소리가 난다. 자신의 귀에만 들릴 것이 분명한 이 소리가, 정말로 이와 이가 부딪쳐 난 소리인지 아니면 자신의 환청인지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너란 놈은 언제까지 나를 방해할 셈이냐? 언제까지 내게서 내가 원하는 것을 빼앗고 괴롭힐 셈이냐? 그것도 언제나! 언제나 내가 원하는 것에 겨우 손을 뻗은, 손이 닿은 그 순간에!”
서현이 나직하게 경고했다.
“물러나. 지금이라면 용서해 주겠다.”
‘그것’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것과 눈을 마주한 채 침묵하고 있기를 수 분, 매초마다 입 안에서 침이 말랐다. 한열(旱熱)을 맞은 것처럼 입이 바짝 말라 서현이 더 견디지 못하고 상대의 대답을 재촉하려고 했다. 그 때였다.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지금껏 굳게 다물려 있던 그것의 입이 열렸다. 우르르, 구름 뒤의 뇌성이 다시 한 번 울었다.
“살리고 싶어.”
“뭐.”
그것의 시선과 서현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으로 꽂혔다. 제 품 안의 청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그것이 말을 이었다. 그것의 눈에 일순 광기(狂氣)와 비슷한 빛이 번들거렸다.
“살려야 해.”
“···그만둬.”
혼잣말로 중얼거린 말에 대답이 돌아온 것에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이 느릿하게 머리를 기울였다. 그러나 서현은 그 몸짓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그것이 물어왔다.
“어째서?”
“내가 힘들어져.”
“나는,” 하고 말하는 그것의 시선이 다시 서현에게서 품 안의 서문경에게로 옮겨갔다. “나는 이 아이를 살리려는 것뿐이야.”
그리고 다시 시선이 이동했다. 서현.
“···은 이 아이가 슬흰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서현이 멈칫했다.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부른 호칭 때문이었다. 잠시였지만 서현의 눈빛이 흐려졌다. 뱃속의 고통이 강해졌다. 그러하나 그런 서현의 상태를 알 리가 없는 그것이 다시금 같은 말을 물어왔다, ‘그대는 이 아이가 그토록 슬흰가.’
서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니다.”
“허나 그대는···, 내게서 이 아이를 떼어 놓으려 몇 번이나 수를 쓰지 않았던가.”
“그것은 그 아이가 못마땅하여서가 아니었다.”
“그럼?”
“일황자, 너 때문이다.” 검은 바둑돌 같은 그것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면서 서현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동시에, 그 아이를 위해서였다. 황자 네 곁에 있어 봐야 그 아이의 앞날은 뻔하니 얼른 빼내는 것이 좋다 생각하였지. 허나 도통 말을 듣지 않더구나. 지독히도 멍청하지, 한낱 동정심에 정신이 팔려 제 앞길을 망치다니.”
그러니 그 꼴이 되었지, 하고 말하는 것 같은 냉담한 시선으로 서현의 눈이 서문경을 훑었다.
“온정도 사람을 가려서 베풀어야 하는 법이다. 독사는 허물을 벗어도 독사인 법, 아무리 단약(單弱)해 보여도 결국 독사는 세모꼴 대가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내민 사람의 손가락을 무는 법이야. 내가 그리 당하였듯 그도 결국에는 그리 물린 것이지.”
“······.”
“허나 내 치부까지 드러내 보이면서 그 치를 구할 의리는 없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그 아이는 내 묵우(?祐: 말없이 도움)를 모조리 쓴 침묵으로 묻어버렸다. 그러니 이 결과는 모두가 그 자의 어리석음에서 온 업일 뿐이다.”
그러니 내려놓아. 서현은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서문경을 끌고 안고 있는 팔에 더 힘을 줬을 뿐이었다. 초조해진 서현이 경고했다.
“내려놔.”
“나는, 살리고 싶다.”
“내려놔! 그 자를 살리는 것은 또다시 나를 배반하는 짓거리다!”
“어째서?” 그것이 혼란스럽게 뜨인 눈으로 서현을 응시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이를 살리는 것이 어찌 그대를 배반하는 것이 되는지, 나는 모르겠다.”
“충격으로 대가리까지 붕어 대가리가 되었더냐!”
쾅! 서현이 칼바람을 휘둘러 황제가 처 놓은 막을 후려갈겼다. ‘하늘’을 소환한 공간 전체가 벽이 무너지듯 우르르 흔들렸다. 다시 한 번 서현이 칼바람으로 휘감긴 채찍을 휘두르며 일갈하였다.
“네가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그것조차도 잊었더냐!”
“···이 아이를 살리려는 것뿐이다.”
“가변례다! 가변례가 성공한다면 일은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없음이야! 그러하나 아직까지는,” 서현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변했다. “아직까지는 아니다. 아직까지는 돌이킬 수 있다. 그러니 그만 두어라. 더 이상 나를 배반하지 마라.”
“경이를 살리고 양위(讓位)하겠다, 그러면 되지 않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쉭! 서현의 발밑에서부터 매서운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머리카락이 솟구쳐 올랐다. 그 바람은 순간으로 그치지 않고 서현의 주위를 계속 위협하듯 맴돌았다. 지직, 서현의 머리카락 끝과 손끝, 흑혜 끝 등 옷자락, 머리카락, 피부가 끝나는 자리마다 전기가 튀었다.
서현이 손바닥을 세워 그것을 보이지 않는 막 위에 가져다대며 요구했다.
“그만두어라.”
“···그럴 수는 없다.”
“지금이라도 그만둔다면 용서해 주겠다. 그러니,”
“아니.”
그가 결국은 고개를 저을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서현의 두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그것을 씁쓸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그것이, 황제가 수긍했다, ‘그대 말이 옳아.’
“그대 말대로 나는 독뱀이다.”
“···황자?”
“또다시 그대의 뒤꿈치를 물게 되는구나.”
“···!”
서현은 황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거절. 결국은 목숨을 걸고 가변례를 강행하겠다는 말이었다. 궁지에 몰린 서현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옮기며 막무가내로 입을 열었다, ‘아-.’
“안 돼. 안 된다.”
황제가 서문경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추었다. 온통 검은 비늘에 휩싸여 있던 황제의 이마가, 딱딱한 비늘이 사르르 꿀이 흘러내리듯 녹아내리고 그 안에서 흠집 하나 없이 곱고 투명하도록 흰 살갗이 드러났다. 그것이 큰 칼에 베인 듯 흉하게 살이 벌어진 서문경의 이마에 닿자, 놀랍게도 그 큰 상처가 점점 흐릿해졌다.
“안 돼!”
아니, 상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이마로 옮겨 간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갓 내린 눈이 쌓여 있는 듯하던 황제의 이마가 날카로운 것이 닿은 것도 아닌데 쩍 종으로 길게 벌어져 주르륵 피가 흘러 내렸다.
“일황자!”
다음은 콧등과 두 눈, 그리고 양 볼, 턱과 목덜미···. 차례로 서문경의 피부와 황제의 피부가 맞닿고, 황제는 점점 피투성이가 되어갔다.
“그만! 그만 해라! 그만!”
그것을 홉뜬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서현이 결국 고함을 질렀다. 쾅! 쾅쾅! 쾅쾅쾅! 서현이 휘두르는 칼바람이 미친 듯이 결계를 때려 부쉈다. 그러나 한 번 결계를 후려갈길 때마다 결계에서 일어나는 힘이 날을 세우고 서현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이를 세운 얼음 화살들이 서현의 목과 어깨를 잡아 뜯어 살이 뜯기고 피가 튀었다. 하지만 서현은 그런 고통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마냥 황제 쪽을 쳐다보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서현이 소리를 질러도 황제는 그 편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마에서 흐른 피가 찢어진 눈가에서 솟아나온 피를 먹고 점점 아래로 흘러갔다. 고왔던 볼로 흘러내린 피가, 거칠게 난도질당한 볼에서 잠시 주춤했다가 반으로 갈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턱에 맺혔다. 턱에 맺혔던 피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툭 떨어져 내렸다. 방금 전까지 피가 맺혀 있던 자리에 하얀 뼈가 드러나 보였다. 귀에서부터 목덜미까지는 길게 벌어져 덜렁거리고, 손가락 대여섯 개는 이미 떨어져 나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손톱 발톱이 다 빠져버린 손과 발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흘렀다. 등이 찢기고 허벅지가 베이고 무릎이 날아가고.
···배가 갈라졌다. 길게. 명치에서부터 기해(氣海)까지. 무두질한 양가죽을 잘 벼린 칼로 잘라내는 것처럼 살가죽이 한 번 주춤하는 일도 없이 깨끗하게 갈라졌다. 배가 갈라지며 그 사이로 나타난 검은 구멍이 점점 더 커졌다. 점점, 점점, 점점···.
“제안!”
서현이 뛰어들었다. 결계가 포효하며 자신을 물어뜯으려 달려들었지만 서현은 피하지도 않고 손톱을 세워 그것에 손톱을 박았다. 인간의 것이던 그의 손에 순식간에 금빛 비늘이 돋아나며 손톱도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결계에 박혔다. 하지만 그의 손톱에 꿰뚫린 뒤에도 결계는 깨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더 덩치를 부풀리며 서현을 강한 힘으로 밀어붙였다. 그것에 밀리지 않도록 단단히 발에 힘을 주며 서현이 부득 이를 갈았다.
“끝까지 듣지 않겠단 말인가.”
그렇다면, 하고 중얼거리는 서현의 아랫입술이 치아에 긁혀 피가 흘렀다. 결계에 박힌 서현의 손가락이 주먹이라도 쥘 듯이 안을 향해 움츠려들었다.
그리고,
“빌어먹을 놈!”
그렇다면 결계를 찢고 들어가 힘으로라도 끌고 오면 그만이다. 서현의 발밑에서 다시 한 번 칼바람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솟구쳐 오르더니, 훨씬 더 날카로워진 금빛 손톱이 결계를 할퀴었다. 결계에서 수 백, 수 천 개의 얼음창들이 솟구쳐 나와 일제히 서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얼었던 살이 녹았는데도 피부에 닿은 그의 이마는 아직도 소름끼치게 차가웠다. 그것이 너무도 안쓰러워 가슴이 아렸다. 맞닿아 있는 이마를 조금 비볐다. 서툴게 제혁한 가죽처럼 거칠거칠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플 만치 거친 감촉은 천천히, 끈질기게 살일 비빌 때마다 점점 사라져갔다. 황제의 살이 통증에 무뎌진 것이 아니라, 서문경의 이마가 실지 보드랍게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 살을 맞댈 때마다 서문경의 상처가 흐릿해지고, 그 상처가 황제에게 옮겨왔다. 깨끗하던 이마에 커다란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가 흉한 입을 벌리고 그 안의 시뻘건 속살을 드러냈지만 황제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살에 닿는 서문경의 살이 점점 보드라워 지는 것이 느껴져 오히려 기꺼웠다.
서문경의 이마가 완전히 말끔해지자 황제는 고개를 조금 들었다. 물기에 젖어 평소와는 달리 곱실거리며 내려온 몇 올의 머리카락을 신중한 손길로 넘겨준 후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어느 새 찬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황제의 얼굴에 안타까워하는 빛이 어리었다, ‘힘드냐.’
“잠시만 참거라. 곧 괜찮아질 것이다.”
곧. 황제가 그 뒷말을 거의 삼키듯 하며 서문경의 콧등을 한 번 쓸었다. 코끝이 살짝 부딪치고 마치 깊이 입을 맞추는 듯한 각도로 콧등과 콧등이 맞닿았다. 서문경의 콧등을 할퀴어놓은 상처가 아무는 대신 황제의 콧등에 창상이 생기고 매끈한 코끝이 베어져 나갔다. 서문경의 감은 두 눈두덩 위에 자신의 눈두덩을 맞대기 전에 황제가 그에게서 약간 몸을 떼고 서문경의 얼굴을 전체적으로 제 눈에 담았다. 눈을 감아도 지금 서문경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을 만치 바라본 뒤에 황제가 눈을 감고 서문경의 눈 위에 자신의 감은 두 눈을 맞추었다. 썩둑 눈알까지 한 번에 꿰뚫리는 고통이 일었다. 황제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대신에 서문경의 오른 볼에 자신의 볼을 비볐다. 오른 볼과 왼 볼이 차례로 난도질당했다. 친애를 표시하는 범처럼 부드럽게 목을 비볐다. 성대가 잘려 나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서문경이 입은 상처가 황제에게로 전이되었다. 뭇칼질 당한 고깃덩어리 같던 서문경의 모습이 옥을 같아 만든 옥인(玉人)처럼 변했다. 대부분의 상처가 아물고, 거짓말처럼 엉겨 붙은 피와 고름이 사라졌다. 마치 깊이 잠든 사람처럼, 얌전히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말끔하고 단정한 모습. 하지만 누군가 자극을 주지 않는 이상 결코 혼자의 힘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도 곧 해결될 것이다. 황제가 두 팔을 들어 서문경의 어깨에 손가락 끝을 걸쳤다. 손톱이 모조리 떨어져 나간 탓에 원하는 대로 서문경을 끌어당기기가 힘들었다. 몇 번이나 자신의 피에 미끄러지고 나서야 황제는 서문경을 끌어안을 수 있었다. 자신의 몸에 전이 시켜야 할 상처는 이것이 끝이었다. 서문경의 등을 힘주어 끌어당기려는데 ‘그’가 지르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더 이상 듣지 않을 셈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보고 만 것은,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가 지르는 저 고함소리가 노성이 아닌 비명처럼 들려서.
그 사이 서문경의 배를 완전히 찢어놓은 상처가 자신의 복부로 옮겨오는 것이 느껴졌다. 내장과 뼈를 감싸고 있던 살과 가죽이 순식간에 찢어지고 뼈까지 썩 잘려져 나가는 섬뜩한 감각이 온 몸에 번졌다. 상처가 벌어지는 감각이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져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제안!”
툭. 뜨뜻한 핏줄기가 배와, 다리와 무릎을 타고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아아. 황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고통 때문인 것일까. 역시 그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들린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데.
“제안! 제안! 내 말이 들리나, 제안!”
쾅쾅쾅쾅! 그가 광인처럼 소리를 지르며 막(幕)을 두드린다. 그러다 자신이 그의 말을 듣고도 일부러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리곤 손에 힘을 준다. 인간의 팔이었던 그의 팔이 자신의 팔처럼 크게 부풀어 오르며 용인의 팔이 되었다. 금빛 손톱이 막을 찢어발기려 들었다. 처음에는 겨우 막을 할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서현이 작정한 듯 이를 악물고 힘을 주자 막이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 돼.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태라 그와 눈을 맞추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그 고갯짓에 그는 더 약이 오른 듯했다. 한 팔만 용인으로 변환한 상태였던 서현이 완전한 용인으로 변했다. 인간도 용도 아닌 모습의 그는 온 몸에 날카롭고 딱딱한 바위 비늘을 두르고 두 발로 우뚝 선 거목(巨木)이나 거호(巨虎)처럼 보였다. 그가 포효하며 한 팔을 휘둘렀다. 결계가 수 천 개의 얼음창을 일제히 그를 향해 내쏘았지만 서현은 멈칫도 하지 않고 돌진해 결계를 후려갈겼다.
쿵! 단단한 막이 통째로 흔들렸다. 황제는 이를 악물고 서현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계속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그도 결국은 안색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쿵!
결계는 물론, 그 안의 공간까지 통째로 뒤흔들렸다.
쿵!
쩌적,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가 놀란 얼굴로 서현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 분명 자신이 친 결계, ‘막’에서 들린 소리였다. 아직까지는 막에 눈에 보이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지만 다시 한 번 쿵 소리가 들리자 막에 새하얀 실금이 갔다. 쿵! 쿵쿵! 쿵쿵쿵! 명주실처럼 얇던 실금이 손가락만한 굵은 금으로 변하고 그 금이 막 전체로 번졌다. 쿵쿵쿵쿵! 이제 막은 막이라기보다는 주사(蛛絲)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정도로 금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용인의 손톱이 아니라 막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의 여린 손가락으로 톡 건드려도 쏟아져 버릴 것 같았다.
서현의 입술이 귀를 향해 크게 치켜 올라갔다. 황제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서현이 손을 들어 올렸다. 과시하는 듯 유난히 느린 움직임. 온 몸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 황제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조종하는 광대가 없는 주선괴뢰(走線傀儡)처럼 두 팔다리에 힘이 빠진 서문경을 바닥에 눕혀준 후 황제는 서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절뚝거리는 그의 걸음걸음마다 피로 작은 웅덩이가 생겼다.
주사 같은 얇은 막을 경계에 두고 서현과 황제가 마주섰다. 두 사람 모두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서현 쪽이었다. 그것은 말이라기보다는 입술을 벙싯거린 것에 불과했다. 서로 꼬리를 문 금빛 비늘에 휩싸인 입가가 꿈틀하더니 단단히 아물려 있던 입가가 열렸다.
포기해.
황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자신의 최후통첩에 대한 거부라는 것을 깨달은 서현이 팔을 들어올렸다.
그것을 황제는 눈이 부신 듯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황금을 갈아 붙인 듯한 금빛 비늘. 공들여 만든 의장(儀仗)용 검처럼 위엄 있고 화려한 금광(金光)의 손톱. 상품의 호박(琥珀)을 박은 것 같은 영롱한 눈.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제국의 용황제에 걸맞는 위용. 금이 간 막 위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마치 저 화미한 금빛 용인의 그림자와 같은, 먹 같은 검은 용···.
서현의 손톱이 약해진 막 위를 강타했다. 산산이 막이 깨어졌다.
“······?”
오기와 자신에 차 있던 서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무슨.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서현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가 퍼뜩 고개를 들어 막을 보았다. 막. 산산조각나기 직전인 결계. 손톱 끝으로 톡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조각조각으로 화해 초라히 빙소와해(氷消瓦解)될 것이 뻔해 보이는.
그러나, 그러나! 분명히 깨어졌었다! 바로 수초 전에! 내 눈앞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보았는데, 어째서 아직도 붙어 있는 거지?!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서현은 곧 놀란 가슴을 추슬렀다. 자신의 착각이었던 그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었든 간에 다시 부숴버리면 그만이다. 단단히 입매를 굳힌 서현이 고개를 들고 다시 막 위를 내려쳤다.
하지만 그 넓은 공간을 울린 것은 막이 깨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
서현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쩌저저적, 얇은 금속판이 구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뒷덜미가 선뜩해졌다. 뒷걸음친 서현의 호박색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어렸다. 쩌저저적-. 다시금, 그, 소리.
서현이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그것은 부서질 대로 부서진 막이 완전히 깨지는 소리 따위가 아니었다. 금이 갔던 막이, 무서운 속도로 붙고 있는 소리였다.
*
그것은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을 앞둔 듯한 광경이었다. 한 치의 틀림도 없이, 파손되었던 막이 파괴되었던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용인의 손톱에 꿰뚫렸던 곳이 탄력 있게 튕겨져 올랐다 흔적도 없이 붙었고, 쩌저적, 빙판 위에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나 나는 소리를 내면서 모든 금들이 단단히 붙었다.
이윽고 언제 그랬었냐고 반문이라도 하는 듯이 모든 금이 사라지고 찔리고 찢어진 자리들이 붙고 막이 다시 투명해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용인으로 변하면서까지 힘겹게 막을 깨뜨린 서현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서현이 중얼거렸다. 눈앞에서 일어난 광경을 도저히 머리로 받아들일 수 없는 듯, 절망이나 분노보다는 오히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충격을 받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서현이 막 위에 덥석 자신의 두 손을 올렸다. 서현의 존재를 격렬하게 거부하던 결계는 이상하게도 이번만큼은 서현을 밀어내지 않았다. 서현이 황급히 막 위를 더듬더듬 더듬었다. 쫓기는 듯 급박한 그 손길은 뭔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찾는 것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헤매야 했다. 서현이 내뱉었다.
“없어.”
막 위는 손가락에 걸리는 약간의 흠집이나 거친 곳조차 없이 부드럽고 반드러웠다. 유칠(油漆)이라도 한 것처럼 서현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손에서 갑자기 힘이 풀린 탓이었다. 겨우 손톱을 세워 막 위에 손을 걸친 서현이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다시금 중얼거렸다, ‘없어. 아무것도 없어.’
“불가능한 일이다!”
쾅! 다음 순간 번쩍 머리를 든 서현이 막 위를 주먹으로 때리며 고함을 질렀다.
“이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어!”
서현이 휙 몸을 돌려 황제를 노려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막의 존재가 단단히 서현을 막았다. 서현이 황제의 멱살을 잡는 대신 막 위에 열 손톱을 모두 세웠다. 까드득, 뒷덜미의 솜털들이 모두 곤두설 만치 선뜩한 소리가 귀를 찢어놓았다. 서현이 악을 썼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환각? 그래, 환각이다! 환각이 아니면 이 일을 설명할 수 없어!” 결론을 내린 서현은 미친 듯이 막 위를 잡아 뜯었다. 까득, 까드득, 까드드득! 손만 용인으로 변환시킨 서현이 막 위를 각치는 소리가 광자(狂者)가 마구잡이로 유리나 도자기 따위를 긁어대고 있는 소리 같아서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 소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을 서현으로서는 순간순간 몸서리가 쳐질 만도 한데 마치 지금 서현의 모습은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그는 계속해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어디지? 어떻게 하면 환각을 깰 수 있지? 어디를 어떻게 하면 이 고약한···!”
그러나 점점, 서현의 말이 느려지고 높았던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환각을, 어떻게,”
그와 동시에 막을 긁는 괴성(怪聲)도 잦아들었다. 서현의 눈에 다시 광기 대신 당혹스러워하는 빛이 돌았다.
“이 환각을···.”
입이, 완전히 다물렸다.
“환각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떠밀린 것처럼 서현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자신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두 눈이 깊이 베인 황제는 두 눈을 감은 채였기 때문이었다. 감은 두 눈 아래로 마치 피눈물처럼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 핏줄기가 덕지덕지 피가 말라붙어 있는 볼과 인중을 지나 입에 맺혔다. 시선을 무심코 입가로 내리고 나서야 서현은 깨달았다. 방금 전 자신이 들은 그 말은 황제가 한 말이 아니었다. 지금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환각이 아니다. ···저건, 참이다.”
자신이 한 말이었다. 자신의 이성이 무심코 내뱉고 만 항복의 말이었다. 하, 하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참이라니.”
“······.”
“황자.”
두 손바닥을 결계 위에 댄 채로 서현은 머리를 숙였다. 이마에 단단하고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마치 금속 같은 감촉이었다. 그러나 그 쇠붙이 같은 결계의 감촉보다 머릿속이 훨씬 더 싸늘했다. 뇌가 통째로 얼어붙은 듯이 머리가 차가워져 오히려 두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이유를 서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절망. 서현은 결계 위에 이마를 댄 채로 마치 속삭이듯 말했다.
“묻지 않겠다. 황자,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그대가 어떻게 이런 힘을 가지게 된 것인지 아무 것도.” 하고 탈력하여 말하는 목소리에 짙은 패배감이 묻어났다. 그러하나 그조차도 하찮게 느껴질 만치 압도적인 감정이 그에게서, 그의 목소리와, 어조와, 몸짓 하나하나에서까지 묻어나고 있었다. 서현이 속삭였다. “···하지 마.”
그저, 이것 하나만.
“하지 마라. 하지 마. 그대가 내 짐작보다 강하다는 것도, 그대가 나 따위보다 훨씬 더 그 몸 안에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러하나, 이것만은. ···하지 마라. 간절히 바라 건데, 이것만은. 잘못하면, 이 일이 잘못되면 그대는. 그대가.”
똑. 핏방울이 한 방울 황제의 눈에서 떨어졌다. 자신의 코앞에 툭하고 떨어진 피가 흙발에 짓밟긴 붉은 꽃처럼 바닥에 크게 번지는 것을 본 서현이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들었다. 황제가 보였다. 원래의 생김새를 알아보기도 힘들만치 온 몸에 상처를 입은 그는, 마치 해진 넝마처럼 보였다.
“괴로운가.”
하고 자신도 모르게 물어 놓고, 곧바로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자책했다. 아프겠지. 고통스럽겠지. 아마도 저렇게 정신을 차리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의 상처. 차라리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면 나을지도 모르지만 그조차도 할 수 없는.
하지만, 그 물음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괴롭지 않다고?”
뜻밖의 답에 두 눈을 크게 뜬 서현이, 무심결에 물었다. 황제가 이번에는 고개를 한 번 종으로 끄덕였다. 서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헛소리 하지 마라! 지금 그대가 아프지 않을 리가, 괴롭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용인의 몸으로 상처를 받아냈다면 모를까, 타인의 상처를 대신 받는 것은 등가(等價)가 기본 법칙,” 그러니 황제는 지금 용인의 몸이 아닌 인간의 몸으로 청의관 수객의 상처를 받아낸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서현이 결국 노성을 내질렀다. “어떻게 고통스럽지 않다 말할 수가 있는가!”
그 말에 황제의 입이 열렸다. 그가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그 입 모양은 읽은 서현은 주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 아이는?’
그것은 자신의 죄를 묻는 소리.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돌릴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고 있던 자신의 죄를, 실수로 마주본 것 같은 기분.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 같은.
나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서현은 무심코 변명했다.
“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게 더 중요한 것을,”
‘아파했지?’
황제가 소리를 내어 묻지도 않았는데 서현은 말허리를 잘린 사람처럼 말을 멈췄다. 황제가 물었다.
‘그대는 보았잖나. 그대의 눈으로.’
그대의 앞에서 일어난 일이니. 그대의 머리로 정하고, 그대의 손으로 행한 일이니. 서현은 말을 하기 위해 벌린 채, 닫지 못하고 있던 입술을 느릿하게 닫았다. 혀와 입술과 입 안이 말랐다. 아파했지. 고통스러워했다. 놀라서 두 눈을 부릅뜨고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아픔을 호소했다. 하지만 사세(事勢)가 자신을 그리로 몰아갔다. 선택을 강요했다. 그저 자신은 선택했을 뿐이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자신은 분명히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이 멈췄다. 황제의 입술이 불현듯 이렇게 벙싯거렸던 탓이었다.
‘보이나, 지금도.’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 상처는 그대가 만든 것이다.’
피가 계속해서 떨어진다.
‘이 고통도.’ 황제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떨어지는 피를 보려는 듯이. ‘그대가 만든 것이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대답했다, 조금 전 서현이 했던 추궁에 대한 대답을 이제야.
‘고통스러워. 그러나 고통스럽지 않다, 감히 고통스럽다 할 수 없어. 이것은 내 고통이 아니니. 이것은 상처가 아니라, 내 죄를 새긴 동판에 불과하다.’
“죄라고···?”
그래, 하고 대답한 황제가 자신의 죄를 읊조렸다.
‘방관한 죄. 망설인 죄. 중립을 지킨 죄. 가장 중요한 순간에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못하고 중립을 지킴으로써 죄 없는 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
“······.”
아직도 머릿속에서 자기변명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만일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서현은 꾹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이다.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죄 없는 이를 이 일에 끌어 들인 것도, 상처 입힌 것도, 죽음으로 몰고 간 것도 사실. 절대로 눈 돌릴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
“그렇다.” 서현이 이를 갈았다. 그는 인정했다. “그것은 내 죄다.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다. 내가 그 이를 죽였다. 아무런 사정도 알지 못하고, 순수한 선의로만 나선 이를, 영문조차 알지 못하는 이를, 황망하여 공포에 질린 이를 억지로 붙잡아 살해하였다! 내가, 이 내가!”
거기까지 내뱉은 뒤, 서현의 목소리가 불시에 나직해졌다. 하지만 목소리가 낮아진 것과 반비례하여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더 커졌다. 그러나 그 위압감은 자포자기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두려움과 닮아 있었다. 서현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되었나?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내게 이것을 인정하게 하려한 것이 아니었던가?”
“······.”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대가 대답해 보라! 내가 한 말을 들었지? 그렇다면 알아들었나? 내가 하려는 말을!” 서현은 자신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용인 특유의 칼날 같은 손톱이 한 장의 목면에 불과한 옷을 찢고 여린 인간의 살을 파고들었다. “이 내가 그 이를 죽였다고 했다! 내가 죽인 것이다. 그러니 내버려 두라, 그 이가 이대로 절명하도록!”
황제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일황자!”
그대로 뒤돌아섰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황자!” 서현이 결계를 마구 두드렸다. “황자! 가지 마라! 일황자! 내 말을 들어!”
서현이 결계를 때리며 애끓는 소리로 황제를 연신 외쳐 불렀지만 황제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늘’ 안을 자유롭게 떠다니던 구름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점점 짙어졌다. 그 구름에 묻혀 황제의 모습이 흐릿해지기 시작하자 애가 탄 서현이 용인으로 변하여 마구잡이로 결계를 찍어 눌렀지만 결계에는 작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더 이상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치 구름이 짙어진 그 때, 서현은 깨달았다.
“아···.” 서현의 눈이 흔들리고, 그가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된다!”
이 공간 안에 잠시 소환 되었던 ‘하늘’이 사라지고, 황제가 아예 서현이 있는 이 공간을 자신과 분리시키려 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 누구에게서도 방해를 받지 않도록.
그 짐작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필사적으로 결계를 깨부수려 애쓰던 서현은 공간이 통째로 뒤흔들리는 진동을 느꼈다. 결계 밖까지 뜨르르 잔 가로진동이 일어난다 싶더니, 결계 위가 삽시간에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정확히는, 막을 경계로 황제가 있는 막 안쪽 전체가 얼은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더 이상 막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어 서현은 피가 마르는 초조감에 휩싸였다.
“천편(天鞭) 개(開)!”
스스로를 완전히 용인화(龍人化) 시킨 서현이 ‘하늘’에서부터 가장 매서운 바람인 천편(天鞭)을 소환하여 사정없이 휘둘렀다. 그 주위에 사람의 살 따위는 예사로 베고 가르는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파(破)하라!”
쾅! 얼어 있던 결계가 깨어져 성에가 먼지바람처럼 휘날렸다. 비바람을 부리는 천룡인(天龍人)이 불러낸 대강풍이 계속해서 막 위를 강타하자, 온갖 강력한 공격에도 요지부동이던 결계도 결국은 타격이 갈 수밖에 없었다. 천편이 계속해서 휘둘러졌다. 덕분에 귓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이 쉴 새 없이 울리고, 막 위에 가라앉았던 성에가 완전히 가실 즈음.
쾅!
기어코 결계가 허물어졌다. 그러나.
서현은 짧은 신음을 흘리며 허물어졌다. 결계가 허물어지고 구름이 갰다. 그러나 맑아진 막 안의 세계에 황제는 없었다. 사라졌다, 완전히.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흔적을 좇으려 했지만 아주 작은 흔적조차도 좇을 수가 없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현실로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서현은 인정해야 했다. 용인으로서 황제의 ‘힘’은 자신이 범접할 수도 없이 거대했다.
빌어먹을. 서현은 콱 주먹을 쥐었다. ···비참함과 절망으로 온 몸이 싸늘해졌다.
“···끝.”
이것으로 끝이다. 더 이상 자신이 어찌 손을 쓸 수도 없는 화살이라는 절망감이 숨통을 막아왔다.
*
황제는 서문경을 살며시 눕히며 그 귀에 속삭였다.
‘미안하다.’
이런 곳으로 그대를 데려와서, 하는 뒷말은 거의 삼키는 한숨소리에 묻혔다.
황제가 서문경을 데려온 곳은 사방이 어두웠다. 그가 침방 안에 불러냈던 ‘물’과는 다른 종류의 어둠이었다. ‘물’ 안에 잠겨 있을 때의 어둠이 가늘게 간 진주 가루를 섞어 놓은 듯이 은은했다면 지금의 어둠은 순수하고 깊었다. ‘물’ 속의 어둠이 껴안는 듯 안온하였다면 이 어둠은 끝도 없는 절벽으로 떨어지는 듯 강하고 아찔했다. 희미한 빛 한 줄기조차 섞여 있지 않고 때때로 몸을 짓누르는 무게감마저 느껴지는, 그야말로 밀도(密度) 높은 순수한 어둠.
혹여 세상에 명국(冥國)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곳은 아마 이곳과 같은 모습을 띄고 있으리라.
황제는 숨을 삼켰다. 어둠이란 것은 관념일 뿐 만져지고 느껴지는 실체가 있을 리도 없건만, 그러나 황제에게는 이 공간 안에 가득 찬 어둠이 하나같이 질척질척 자신의 몸으로 들러붙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들’은, 마치 먹이를 물고 온 어미새를 맞는 배고픈 새끼새들처럼 집요하고도 간절했다. 그 필사적인 태도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 법도 하건만, 그러나 황제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한 태도로 자신에게 달라붙는 어둠을 떨쳐냈을 뿐이었다. 황제가 불쾌한 빛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거부하자 어둠이 겁을 먹은 아이처럼 주춤주춤 황제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자신들을 거부하는 황제를 피해 대신 들붙을 이를 찾던 어둠이 곧 서문경을 찾아 그를 향해 슬금슬금 기어갔다. ‘그만.’ 눈이 보이지도 않는데 민감해진 감각으로 그것을 느낀 황제가 ‘그것들’을 위협했다. 멈칫. 풀이 꺾인 어둠이 황제와 서문경의 주변에서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물러났다.
그러나 어둠은 거기서 더 이상은 물러나지 않았다. 황제가 위협했지만 그것들은 그 자리에서 흠칫거리기만 할 뿐, 겁을 내면서도 결코 황제의 앞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지는 않았다. 황제도 결국 그것들을 으르는 것을 그만두고 대신 가지런히 누운 서문경의 곁에 앉아 서문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우울한 듯, 서문경의 머리를 쓰다듬는 황제의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이곳에만은, 그대를 데려오고 싶지 않았는데. 우울과 침통함과 약간의 참담함이 황제의 얼굴에 어리었다.
하지만 곧 황제는 마음을 달리 먹었다. 자신으로서는 이곳이 지긋지긋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이들의, 특히 서현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이 장소 이상의 곳은 없었다. 자신과, 자신이 허락한 이 외에는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아니,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장소이니. 황제는 계속해서 가라앉으려고만 하는 마음을 어르고 달래며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장소 따위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간애(干?)를 피해 무사히 가변례를 치르는 것. 그것이 자신이 가장 우선하여야 할 일이었다.
잠시간 멈춰 있던 황제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처투성이 손에 닿는 머리카락의 감촉은 잘 빗은 명주실처럼 차고 매끄러웠다. 손에 익숙한 감촉에 입술이 저절로 호선을 그렸다. 조금 움직인 것만으로도 다시 상처가 터져 입술에서 피가 흘러 내렸지만 황제는 개의치 않았다.
황제는 서문경의 몸을 차례로 더듬었다. 눈이 보인다면 서문경의 상태를 한 번에 볼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이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마와 눈, 코와 인중, 입술과 턱, 목덜미와 가슴. 배와 무릎···.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귀 뒤와 뒷덜미 따위까지 꼼꼼히 더듬은 후 황제는 겨우 만족한 듯 서문경에게서 손을 뗐다. 닫혀 있는 눈 대신 그의 얼굴에 흡족해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의 입술이 벙긋벙긋 서문경을 향해 말을 걸었다.
‘되었다.’
지금 서문경의 몸은 작은 생채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것으로 가변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비의(秘儀).
가변례(嘉變禮)는 빈례(殯禮)나 가례(嘉禮) 따위와 같이 여러 빈객(賓客)을 모시고 치르는 예식과 같은 범주에 속하지만 실상은 모든 입구를 폐하고 제사(祭司)와 의식의 대상자가 되는 객체(客體)만이 의식에 참석할 권리를 가지는 비의에 가까웠다. 가변례에 관한 사항은 칙명으로 의궤(儀軌)를 작성하지 않도록 정하였으므로 가변례에 관해 아는 이는 한 대에 황제와 그의 정후 외에는 없다 말하여도 무방하였다.
때문에 지금껏 가변례에 대한 지식은 황제의 입에서 그 후계자의 입으로 전하여졌다 여겨져 왔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황태자로서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황좌에 올라, 결국 가변례를 치르지 못하고 붕한 가연제의 핏줄인 지금의 황제는 그의 부친이 일러 주지도 않은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알려주거나 글로 읽어 알게 되는 지식이 아니라 본능의 영역이었다. ‘용’의 자질을 타고난 이만이 ‘깨닫게 되는’ 본능.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전제 아래, 어떤 대상을 단순히 겉모습이나 뇌나 염통 따위의 기관 한두 가지를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종(種) 자체를 바꾸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황제의 몸이 다시 인간에서 용인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전히 용인으로 변한 황제가 서문경의 알몸 위에 날카로운 손톱 끝을 댔다.
-답은, 세포에서부터 골과 내장, 뼈와 살, 그 살 위에 돋은 털 하나하나까지 대상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재구성하는 것.
*
발가락 끝에서부터 입을 맞춰나갔다.
갈작. 건조하고 딱딱한 것이 살을 긁는 소리가 일었다. 인간의 것과는 다른 투박하고 날카로운 주둥이에 긁혀 서문경의 발끝에 생채기가 나는 소리였다. 작은 벌레라도 든 듯이 자꾸만 뜰먹거리는 생채기 작은 틈새로 그림자 같은 검은 빛이 살그머니 스며들었다가, 생채기가 삭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자오(慈烏)나 석룡자(石龍子) 따위의 부리 같은 주둥이 끝이 닿는 자리마다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발가락 끝에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어디 하나 빠진 자리 없이 서문경의 온 몸에 정성스럽게 입을 맞춘 황제가 굽혔던 허리를 펴고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서문경의 하얀 몸에서 은연(隱然)한 담흑(淡黑)빛 광요(光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황제는 손톱 끝으로 서문경의 손등을 가로로 갈랐다. 쩍 가죽과 살이 입을 벌리고 하얀 뼈가 드러났다. 그 뼈에서조차 그 은은한 담흑빛이 배어 있었다. 뼈를 확인한 황제는 상처 난 서문경의 손등 위를 가만히 한 번 쓸었다. 그러자 흐르던 피가 멈추고 벌어져 있던 살과 가죽이 오물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상처가 났었던 자리에는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흔적만이 남았다.
황제가 자신의 손에 묻은 서문경의 피를 긴 혀를 꺼내어 핥았다. 피가 났을 때부터 사방에 퍼졌어야 할 피 비린내는 조금도 나지 않고 있었다. 혀끝에 닿은 피는 사람의 피 특유의 비린 맛 대신 약초처럼 쌉싸래한 맛이 났다.
서문경의 몸에서 흐르는 담흑이 점점 강해졌다. 황제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 변화를 좇았다. 비단의 검은빛처럼 엷고 은은한 윤기가 흐르던 검은빛이 점점 윤광(潤光)을 잃고 물기 없는 거먹빛으로 변한다 싶더니, 점점 채도가 짙어져 거먹빛에서 먹빛으로, 먹빛에서 옻과 같은 칠흑빛으로 변모했다. 색이 짙어질수록 검은빛의 부피도 커졌다. 처음에는 서문경의 몸을 살짝 감쌀 정도였던 검은빛이 지금은 폭우가 퍼붓기 직전의 먹구름처럼 크게 부풀어 있었다.
쉬. 황제가 뿔난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서문경의 이마를 몇 번 쓰다듬은 다음 고집스레 다물려 있는 서문경의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신중하게 벌렸다. 조심스러운 손놀림에도 불구하고, 얇고 섬약한 입술이 용인의 손톱 끝에 찢어지고 말자 황제의 얼굴에 짙은 근심이 어렸다. 황제는 겨우 벌어진 서문경의 입술에서 손을 떼고 대신 그 안에 자신의 혀를 집어넣었다. 축축하고 긴 혀가 콩알 한 쪽도 물리기 힘들만큼 작게 벌어져 있던 입술을 부드럽고 집요하게 열었다.
입술을 떼고 상반신을 든 황제가 이번에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자신의 손등 위를 서슴없이 할퀴었다. 방패처럼 단단한 비늘과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서로 맞부딪쳐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하게 맞섰지만 결국 비늘이 쩍 갈라지고 그 안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황제는 서문경의 입술로 자신의 손등을 기울였다. 핏줄기는 서로 단단히 꼬리를 문 비늘 사이를 힘겹게 헤치고 느릿하게 흘러왔다. 한참의 시간을 들여 핏방울이 서문경의 입 안으로 떨어졌다. 훅, 강한 약향(藥香)이 풍기는 그 핏방울은 점성이 높아 액체가 아니라 붉은 구슬처럼 보였다.
몇 방울이 피가 서문경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서문경의 몸 위에서 불이 난 것처럼 덩치를 키우고 날뛰던 검은빛이 점점 사그라졌다. 정확히는, 서문경의 몸 안으로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었다. 짙어졌던 검은빛이 차츰 옅어지고 건조하던 색에 밤하늘 경하(傾河)와 같은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황제는 지루해하는 기색도 없이 묵빛이 전부 갈무리되기를 기다렸다. 차츰, 차츰, 차츰, 느리지만 확실하게 서문경의 몸에 검은빛이 흡수되었다. 완전히 빛이 사라지고 서문경의 몸을 얇은 검은 막이 감싸고 있다고 생각할 즈음, 서문경의 몸이 퍽 두드려 맞은 것처럼 튀어 올랐다.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러나 억지로 들린 눈꺼풀 아래에서 나타난 것은 총명한 빛으로 빛나는 눈이 아니라 허연 흰자위뿐이었다. 눈꺼풀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기괴스럽게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입술에서는 거품이 일었다. 온몸이 전후좌우로 심하게 흔들려 그의 몸 아래에서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쇠를 부딪치는 것 같은 심한 타격 음이 요동을 쳤다.
황제는 발발발 떨리는 서문경의 손발을 자신의 손발로 내리눌렀다. 황제의 피부가 닿자 경련이 가라앉는 듯도 했으나 그것도 잠시, 서문경의 귓구멍에서 팍 터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피가 솟구쳤다. 약초향. 인간의 피가 아닌 용인으로 변해가는 피였다. 서문경의 몸이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깡그리 멸하고 세포와 피까지 이종(異種)의 것으로 채워 넣으려는 외부의 폭력에 격렬하게 반항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껏 피 딱지로 굳어서 열리지 않던 황제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사이로 드러난 황제의 눈이 광포하게 빛났다. 세로로 길어져 있던 바늘 같은 동공이 순식간에 커졌다가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검은 비늘이 일시에 곤두섰다가 가라앉았다. 몸을 눕힌 비늘이 황제의 피부와 거의 하나처럼 보일 정도로 숨을 죽이고, 거친 가죽 끝에 달려 있던 손톱이 챙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떨어진 손톱은 녹아들듯이 바닥으로 사르륵 사라졌다. 용 비늘과 가죽, 칼날 같던 손톱 대신 사람의 피부가 나타났다.
그러나 여전히 황제의 팔에는 81개의 검은 비늘이, 또 목 아래에는 거꾸로 박힌 검은 비늘이 민물고기처럼 바짝 숨죽인 채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황제의 눈 또한 동공이 아직 수직으로 긴 짐승의 눈이었다. 즉, 황제는 용인으로 최소한의 조건만을 남기고 인간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황제는 인간의 피부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바로 상처가 벌어져 피를 흘리는 팔다리를 힘겹게 움직여 서문경의 떨리는 손발을 눌렀다. 희미한 약초 내가 나는 황제의 피가 서문경의 피부를 적시자 점점 경련이 잦아들었다. 그 경련이 완전히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황제가, 떨림이 멎자마자 자신의 피를 느릿하게 서문경의 몸 위에 발랐다. 그러자 서문경의 귀에서 계속해서 터져 나오던 핏줄기가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곧바로 멎었다.
황제가 이번에는 손을 들었다. 손톱이 빠진 그의 손가락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피가 흐르는 손가락으로 서문경의 목과 배에 기묘한 문양을 그렸다. 황제의 손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서문경의 온 몸이 어찌 보면 글씨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그림인 것 같기도 한 기괴한 문양으로 피투성이가 되었다.
서문경의 몸 전체를 밧줄처럼 감싼 그 문양은 시간이 지나도 굳지 않고 반드르르한 물기가 느껴졌지만, 황제의 피부에 스치거나 바닥에 비벼져도 조금도 흐트러지거나 지워지지 않았다.
황제가 서문경의 왼쪽 발바닥에 당초무늬를 닮은 문양을 마무리하고 손을 떼자 피로 그려진 문양이 희미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서문경의 몸을 감싸고 있던 담흑빛과 흡사한 빛깔이었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당장이라도 미쳐 날뛸 듯한 거칠고 사나운 기운이, 절로 압도되고 마는 광포한 세염(勢焰)이 그 안에 맹수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으로 서문경의 몸 안에서 일어난 거부반응은 완전히 몸이 묶였다. 현재의 서문경은 인간도, 용인도 아니었다. 그런 서문경을 완전한 용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남은 것은 점막을 통하여 직접 서문경의 몸에 용인의 ‘힘’을 퍼부어주는 것뿐이었다.
인간의 점막(粘膜)은 소화관, 코, 눈꺼풀, 기관지, 수뇨관, 요도, 방광 등 수 없이 많으나 지금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벅찬 서문경의 체력으로는 내장을 직접 가르는 고통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가 서문경을 용인으로 만들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길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이전의 열성(列聖)들이 그러했듯, 성교(性交)를 통한 변례(變禮).
“······.”
그러나 황제는 한 동안 서문경의 귓전에 손을 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동굴처럼 어두운 빛이 어려 있던 얼굴···. 그러다 문득 황제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벤 자국이 너무나 많아 오래된 그물처럼 까칠까칠한 손이 젖은 귓가를 다정하게 쓰다듬는다. 용이란 족속은 기본적으로 욕망에 충실한 동물이지만 결코 이런 식으로 그를 취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도대체 나는 몇 번이나 그대를 욕되게 하여야 하는가.
허나 더 이상은 멈출 수 없었다. 황제는 서문경의 귓가를 쓸던 손으로 그의 한 쪽 손목을 잡아 자신의 목을 붙잡게 했다. 황제가 입술로만 속삭였다. 이 손에 힘이 돌아오면, 그대의 의지로 이 손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황제의 입술이 잠시 멈추고, 그의 눈이 가늘어지고, 다시 그의 입이 열렸다.
그대의 의지로써 짐의 목을 조르라.
그러나 지금은 그를 살려야 할 때였다.
서문경의 손이 가지런히 바닥에 놓였다. 황제는 넝마가 된 몸으로 서문경의 옥 같은 몸 위로 올라왔다. 동공처럼 벌려진 입술이 서문경의 귀를 삼켰다. 반 토막 난 혀가 서문경의 귀를 빨았다. 자신이 흘린 피 맛에 이미 익숙해졌을 텐데도 혀가 서문경의 피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인간의 것보다는 끈적끈적하고 용인의 것보다는 맑은 피가 황제의 혀에는 달게 느껴졌다. 두 사람의 피가 타액과 함께 섞이고 젖은 혀가 귀를 핥고 빠는 젖은 소리가 습하고 좁은 공간 안에 적나라하게 울렸다.
서문경의 귀에서 떨어진 혀가 이번에는 서문경의 날렵한 턱 끝을 슥 핥았다. 단단한 이가 피가 묻은 턱 끝을 한 번 물고 아래로 내려가 튀어나온 목젖을 깨물었다. 손톱이 없는 손이 단단한 가슴팍에 도톰하게 돌출된 돌기를 문지르고 튕겼다. 단단하게 선 돌기는 고집스럽게 머리를 세운 모습과는 달리 아찔하도록 보드라웠다.
몇 번이고 유두를 매만진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혀가 유두를 빨아 당기는 소리와 함께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왔다. 허벅지 안쪽의 부드러운 부분을 받치고 힘을 주자 부드럽게 다리 사이가 열렸다. 허벅지 안쪽을 주물렀다. 피에 젖어 촉촉해져 있는 허벅지 안쪽 살이, 마치 땀에 젖은 듯 음란하게 느껴졌다.
황제는 서문경의 한 쪽 발목을 손에 단단히 잡고 그것을 위로 밀어 올리면서 서문경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꼭두각시 인형처럼 한껏 다리를 벌린 서문경의 몸을 황제는 샅샅이 핥아 내렸다. 감은 눈 위, 다문 입술, 목젖과 유두, 날씬한 배와 샅과 열린 다리 사이에 감춰진 비부(秘部)와 그 안쪽의 살까지.
민감한 성기와 그 밑의 주머니를 빨아도 정신을 잃은 서문경은 반응하지 않았지만 황제의 몸은 점차로 달아올랐다. 느리게 뛰는 심장이 거의 인간의 심장과 같은 빠르기로 뛰고, 그 때마다 바늘 같던 동공이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황제는 입을 크게 벌렸다. 여린 살을 콱 깨물자 단단한 이에 꿰뚫린 서문경의 살에서 약간의 피가 새어나왔다. 그것을 걸신들린 듯이 핥고 빨며 손가락 끝에 마치 땀에 젖은 것처럼 느껴지는 둔부를 열고 그 안으로 욕망을 들이밀었다. 비문은 이미 녹진하게 풀려 있었지만 황제의 용물을 완전히 받아들이기는 무리였다. 그래서 황제는 건조하고 뜨거운, 마치 사막의 모래 같은 비문에 자신의 것을 묻은 채로 기다렸다가, 서문경이 자신의 것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려 단번에 허리를 추어올렸다.
퍽!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것이 뿌리까지 안으로 박혀 들어갔다. 한계까지 서문경의 안에 밀어 넣은 채로 황제는 음낭과 음모를 서문경의 살에 문질렀다. 황제는 서문경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억눌린 숨을 내뱉으며 허리를 더 단단히 밀어 올렸다. 끝의 끝까지 밀어 넣었는데도 더 안으로, 훨씬 더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싶었다. 서문경과 완전히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 욕심을 참을 수가 없어서 황제는 서문경의 허벅지를 양 옆으로 활짝 젖혀 무릎을 바닥에 닿게 했다. 허리가 들리고 둔부 사이가 조금 더 벌어지자 황제는 그 사이로 탐욕스럽게 자신의 것을 박아 넣었다. 조르듯 살주머니가 서문경의 엉덩이에 달라붙고, 서문경의 안에서 뜨거운 사내의 것이 꿈틀거렸다. 완전히 성기를 쑤셔 박은 황제가 잠시 후, 서문경의 무릎을 누른 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퍽! 퍽퍽! 퍽퍽퍽! 사내의 성기가 서문경의 안에 끝만 걸쳐질 정도로 빠져 나왔다가 곧바로 뿌리까지 박히기를 반복했다. 음낭과 서문경의 엉덩이가 부딪치는 소리에 점점 젖은 소리가 섞였다. 황제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서문경의 몸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흔들렸다. 황제가 성기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가 빼고 다시 안으로 그를 집어넣을 때는 마치 부서질 것처럼 흔들리다가, 황제가 용물을 박고 얕고 집요하게 허리를 흔들 때는 마치 바람에 수면이 흔들리듯이 흔들렸다.
지금 황제의 모습은 먹이를 온 몸으로 휘감고 있는 거대한 뱀 같았다. 실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먹고 싶어.
뿌리까지 성기를 박아 넣으며 황제는 서문경의 등을 두 팔로 콱 껴안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 황제는 필사적으로 서문경의 뒷덜미와 등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거친 숨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힘껏 자신을 서문경의 안에 박아 넣을 때마다 그 숨소리가 더 거칠고 커졌다. 숨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다. 숨이 너무 가빠져서 이제는 머리가 욱신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황제는 그 두통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좋아. 황제는 피가 줄줄 흐르는 손으로 서문경의 머리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목덜미로 처박았다. 마치 서문경이 자의로 자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것처럼 느껴져 기꺼웠다. ···정말로, 좋아.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온다. 아아. 황제의 입이 벌어졌다. 옥처럼 희고 가지런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의 것이던 이가 점점 뾰족해진다.
먹고 싶어.
가지고 싶어.
이걸, 이걸. ···이걸.
날카로운 송곳니가 서문경의 목덜미에 닿았다가, 막 여린 살을 헤집고 들어가기 직전에 멈췄다. 서문경의 살을 물어뜯는 대신 황제는 다시 성기를 끝까지 추여 올렸다. 그리고 서문경의 머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다시 치아가 인간의 것으로 돌아온 후에야 서문경의 목을 물었다. 이대로 서문경을 삼켜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쾌락으로 점점 흐릿해져가는 이성의 말미에 황제는 서문경의 이름을 주문처럼 반복해서 불렀다. 치솟아 올랐던 살의와 식욕이 점점 가라앉았다.
“······!”
아찔한 신음을 흘리며 황제의 것이 처음으로 사정(射精)했다. 뜨거운 정수(精水)가 서문경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직까지도 꽉 맞물려 있는 틈새를 타고 정액이 허벅지로 흘러내렸다.
황제는 아직도 가쁜 숨을 삼키며 서문경의 다리를 치켜 올렸다. 정액이 밖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서문경의 다리가 움직이자 덩달아 허리와 배와 둔부가 움직여 아직도 서문경의 안에 들어 있는 황제를 자극했다. 황제의 성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
황제의 동공이 커졌다. 미세하지만 자신의 남성이 서문경의 안에서 꿈틀거리며 발기한 순간 서문경의 허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퍽! 황제가 다시 성기를 귀두까지 뺏다가 다시 성기 뿌리까지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느껴졌다. 나른하게 풀려 있던 서문경의 허리 근육이 성기를 찔러 넣는 순간 분명히 팽팽하게 당겨졌다. 황제의 입술이 소리 없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퍽! 퍽! 퍽! 황제가 일부러 거칠게 서문경의 안에 자신의 것을 박아 넣었다. 한 번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 때마다 찌꺽거리며 정액이 조금씩 살과 살이 맞물린 사이에서 흘러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