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살지도 않았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옳을까 황제는 가늠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한 손만을. 촉화(燭火) 하나도 켜지 않은 방은 마치 심해(深海) 같았다. 어둡고 습하고 모든 감각이 둔했다. 당장이라도 손만 뻗으면 밀초를 밝힐 수 있었지만 곱디고운 색을 입힌 꽃초에 붉은 불을 밝히는 것은 비참한 꼴로 상처 입은 저 이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져 그럴 수가 없었다.
뻗은 손이 심해를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움직여 곧 한 곳에 가 닿았다. ‘그것’은 닿은 순간 뒷덜미의 모든 솜털이 곤두설 만큼 차가웠다. 이 방안이 심해라면 ‘그것’은 바위 같았다. 바다 깊디깊은 곳 한구석에 기괴한 모양으로 튀어나온 바위. 멀리서 보면 일순간 수괴(水怪)가 아닌가 싶어 염통이 덜컹 멈출 만치 그것의 생김새는 끔찍했다. 예전에는 희고 고왔을 피부는 온통 두드려 맞아 붉고 싯누렇고 푸르고 검은 얼룩들로 얼룩덜룩했고, 마치 난도질을 당한 것처럼 찢겨 원래의 모습을 짐작하기조차 힘들었다.
밀랍처럼 하얀 손이 예전에 얼굴이었던 자리를 쓰다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입술. 커다랗게 벌린 채 굳어 있는 입은 아직까지도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목. 사슴처럼 길고 희던 목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나 그 하얗던 목덜미는 선명한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 모습이 야만스런 병사들의 군홧발에 짓밟힌 뜰을 보는 것처럼 슬프고 끔찍하여 가슴이 미어졌다. 황제의 손이 목에 새겨진 검푸른 손자국을 더듬어 지워 주기라도 하려는 듯 찬 목둘레를 한 바퀴 쓸고는 그대로 뒷덜미에서 시작되는 등마루를 더듬어 내려갔다. 손이 직선이 아닌 활등처럼 굽어지는 호선(弧線)을 그렸다.
문득 손이 멈추고, 그 손이 조금 떨렸다. 내리깐 눈이 파르르 떨렸다. 등. 그의, ‘그것’의 등은, 잘 자란 나무처럼 늘 꼿꼿하던 등이 지금은 꼽추처럼 굳어 있었다.
아직까지도 파랗게 얼어 있는 ‘그것’에서는 쉴 새 없이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뚝, 뚝, 뚝. 온통 무거운 침묵에 감싸인 방 안에서 유일한 소리라고는 그 물소리뿐이었다. ···아니다. 아니었다. 훅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서문경이었던 ‘것’에서 떨어지고 있는 물방울에는 얼었던 상태가 해동되면서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벌건 핏물과 누런 고름이 섞여 있었다.
뚝.
또 한 방울, 핏물이 떨어졌다. 점점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는 소리였다.
내내 ‘그것’을 초점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없이 손만 움직이고 있던 황제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잘못했다.”
뚝.
“짐이, 잘못하였어···.”
하염없이 사과의 말을 읊조리며 황제가 두 손을 뻗어 ‘그것’을 품에 안았다. 복숭아처럼 새뽀얗고 보송보송하던 황제의 피부에 온통 썩은 피와 고름이 섞인 물이 처덕처덕 묻었다. 서문경이었던 ‘것’에서는 지독한 악취가 났다. 날생선이 부패한 비린내와 텁텁한 곰팡내가 섞인 듯한 냄새. 마찬가지로 악취가 나는 액체가 비웃듯이 황제의 뒷덜미를 핥고 지나갔다. 그 액체는 미지근하고 민달팽이처럼 끈적끈적한 점성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저어될 정도의 몰골에, 지독한 악취까지 나는데도 황제는 물러서기는커녕 도리어 두 팔에 힘을 주어 그것의 등을 껴안았다. 잔뜩 굽어있는 등뼈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아팠겠지. 힘들었겠지. 얼마나,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렇게 몸을 둥글게 말고서···.
황제는 천천히 ‘그것’을 자신에게서 떼어났다. 그리고 아직도 눈앞에 새겨진 듯 선명한 서문경의 얼굴을 떠올리며, 흉물스럽게 일그러진 ‘그것’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불에 한 번 녹았다가 오그라든 돼지껍데기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에는 혐오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밤하늘 같은 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잘못한 것 하나 없이 지독한 꼴을 당한 서문경에 대한 동정과 슬픔, 변색하지 않은 애정, 또 때늦은 회한, 일을 이 지경까지 끌고 온 자신에 대한 분노와 경멸···, 그리고 곧, 하나의 감정이 그 많은 감정을 순식간에 집어 삼켰다.
결의(決意).
하나의 사람을 한 세계로 보고, 눈을 그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窓)으로 본다면, 방금 전 그 창에 스쳐 지나간 것은 하나의 우주(宇宙)가 소멸하고 또 다른 우주가 태어나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 이름은 결의나 결단(決斷) 그 외에는 존재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모든 감정들이 불에 탄 듯이 사그라지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단 하나의 새로운 감정만이 남았다. 일말의 망설임과 후회가 그 뒤에 따라붙었지만 그것은 불타버린 감정들이 남기고 간 재에 불과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하등의 영향도 미치지 못한 하찮은 것들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황제가 다정한 손길로 서문경이었던 ‘것’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것’과 황제의 손 사이에 썩은 내가 나는 고름물이 고였다가, 황제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경아.”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상대의 외형이 변했음에도 조금도 변색되지 않은 색이 입혀져 있었다. 그 목소리로 황제가 그리운 듯 말했다. “그 날 네가 짐에게 그리 물었었지. 너를 버리겠느냐고.”
서문경이 ‘힘’을 되찾은 것은 안 날, 헌원제가 그의 후를 가두기 위하여 만들었던 거대한 조롱(鳥籠)에서 나눈 대화였다. 당시의 기분이 흡사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그 때처럼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리고 심장이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그대도 짐을 능멸하고 체제공에게 갈 생각인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내심 이를 악물고 태연한 척 물었지만, ···그래, 불안했다. 친형이나 다름없이 믿고 의지하던 그 치가, ···염락 조원이 ‘힘’을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태도가 돌변하고 황제가 결코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하다 결국은 자신을 내팽개치고 떠났던 그 악몽 같던 며칠간의 일은,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황제의 머릿속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독침이 질질 흐르는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청의관 수객이 자신의 마음에 흡만(洽滿)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어차피 떠날 배라면 더더욱 빨리 쳐내야 했다. 애정을 바치며 걸인처럼 구걸하여 봐야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비수요, 독이며, 배신이었다. 더구나,
“짐은 자만하고 있었다.”
그 고백 끝에 입술이 조금 떨렸다. 서문경의 눈가를 더듬던 손가락도 흔들렸다.
“짐은 인간 이하의 괴물이니, 인간처럼 쉽사리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 스스로를 과신하였다.” 지난날을 회상하듯 황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불어오는 바람 앞에서 흔들리는 가련한 촛불처럼 그가 말했다. “···그래, 짐에게는 아주, 아주 오래 전···, 맹세한 것이 있었다. 타인에 두고 한 맹세가 아니라, 짐 스스로에게 했었던···, 약조였다.”
자신의 무지(無知)와 이기심이 애중(愛重)한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새겼다. 자신이 원망(願望)을 담아 무심코 날려 보낸 종이새가 굶주린 독취(禿鷲)로 돌아와 진주 보석 같은 이들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고 절벽으로 밀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팍에서는 아직까지도 멈추지 않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속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일평생을 바쳐서라도, 그네들이 아무리 자신을 멸시하고 원망하여도. 그 또한 자신이 감수해야만 하는 짐이니. 그러니. 그리고···.
제 아무리···, 소중한 벗이, 애잔한 정인이 생기더라도, 그 누구보다도, ···그들을 우선시하겠노라고.
“···그렇게, 다짐하였다. 그 다짐이···, 영원히···,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변하지 않을 줄만 알았다. 허나, 그것이 과신이었던 모양이다.” 어리석지, 황제가 한탄했다. “기가 막힌 일이다···. 몸뚱이는 이리도 해괴한 괴물인데, 어찌 그 육체에 깃든 정신은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인간 그대로의 것이란 말이냐···.”
그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이 변했다. 결심이 흐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저.
“기꺼웠다.”
경이 네가 짐을 강가에 내놓은 아이마냥 염려하는 모습이.
“기뻤다.”
애정을 강구(强求)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내 생억지를, 곤란스럽게 여기면서도 결국은 내치지 못하고 끌어안아 주는 모습이.
“욕심을···, 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네게 으뜸가는 자리를 줄 마음이 없다면 애초부터···.” 그러나, 그러기에는 네가 하는 말, 네가 보내는 눈빛, 네가 하는 손짓, 그 모두가 내게는 황홀하도록 단 꿀이었다. “그런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결국 황제는 서문경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그러지 말았어야···. 계속해서 그의 입에서 탄식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아무리 다잡아도 마음의 바늘이 계속해서 서문경을 향해 움직였다. 한 번 느슨해진 족쇄는 더 이상 족쇄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됐을까. 어째서 그렇게까지, 왜 그렇게까지 마음을 다잡지 못한 걸까. 어째서 가파른 눈길에 미끄러져 떨어지는 눈덩이가 된 것처럼,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커져 버린 걸까.
그 답을 이미 황제는 알고 있었다.
-저를 버리시렵니까.
그가 자신을 향해 그렇게 물은 그 순간.
“처음이었어.”
처음이었다. 그 외의 어떤 사람도 자신에게 의견 따위를 물은 적이 없었다. 내게 호의적이었던 몇몇도, 내게 적대적이었던 대부분도 모든 이들이 나를 주체(主體)로 취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생각을, 내 의견을, 내 견해 따위를 물은 적이 없었다. 마치 나는, 스스로 결정이란 것을 내릴 수가 없는 생물인 것처럼.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칼자루를 넘겨주었다. 그 순간, ‘알’이 깨졌다. 알이 깨지고 나서야 황제는 비로소 체념이라는 이름의 두터운 알껍질 안에 자신이 들어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세계’로 이끌어 준 이였다. 그런 이를 누가 은애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세계.”
서문경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황제가 속삭였다. 나의 대양(大洋), 나의 산맥, 나의 창공(蒼空), 나의 불, 나의 숨, 나의···. 속삭이던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떨리던 그의 입꼬리가 느릿하게 치켜 올라갔다. 웃는 듯도 하고, 우는 듯도 한 묘한 얼굴이었다.
그러다 그가, 불쑥 말했다.
“네가, 너를 어찌할 것이냐 물었었지.” 그 때 자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이 미뤄둔 대답을 할 때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게 되겠구나.”
황제는 한 번, 숨을 삼켰다. 그리고 삼킨 숨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선언했다.
“짐은 너의 새장이 될 것이다.”
눈을 뜨면···.
“너는 짐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르지. 당장은 아니라 하더라도, 언젠가, 사실을 알게 되면. ···허나 부디 용서하여라. 짐은, 나는.”
그 뒷말은 휘파람소리처럼 바람소리에 녹아 사라졌다.
-나는, 네가 없으면 살 수 없단다.
*
가변례(嘉變禮).
나라에서 지내는 다섯 가지 의례인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 중 가례에 속하는 예이지만, 마찬가지로 가례에 속하는 황제의 성혼이나 황태자, 황태손의 성혼 등과는 그 궤도를 완전히 달리하는 행사였다. 오례에 속하는 대부분의 의식은 축일이 정해지면 곧바로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도감에 임시로 관직을 두어 그들에게 모든 일을 관장하고 거행하게 하지만, 가변례는 도감을 설치하는 대신 매상(每常) 이화시강원(異化侍講院)이라는 훈육기관을 두고 의식을 진행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다만 이화시강원에 속하는 관료는 품관(品官)으로는 좌사(左師)와 우사(右師) 단 두 명만을 두고, 그 아래의 이속(吏屬)으로도 기사(技士)와 녹사(錄士)를 각 넷씩 두었을 뿐이었다. 단순히 숫자만 놓고 보면 정후의 가례를 맡는 시강원 관료들의 수로는 단출하다 못해 초라한 숫자가 아닌가 싶지만, 더 의아한 것은 이화시강원이 정확히 맡는 일이 무엇인지, 가변례가 어떤 절차로 진행되는지 세간에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가변례에 대한 정확한 사항은 심지어는 이화시강원의 총책(總責)이나 다름이 없는 좌사와 우사조차도 가변례를 치르기로 공포(公布)한 황제가 그들을 일러 긴히 가변례에 대해 일러주기까지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이번 대 이화시강원의 좌사와 우사를 맡은 관보 민화와 노재 명승 또한 매한가지였다.
좌사 관보 민화와 우사 노재 명승은 선제인 가연제 시절부터 이화시강원의 좌사와 우사를 맡아 나라의 녹을 먹었으나, 지금껏 그 녹값을 제대로 치른 일은 전무하였다. 선제 가연제가 붕할 때까지 용황제가 되지 못한 탓이다. 관보 민화와 노재 명승은 내심 이번 황대 대에서도 그 때와 같은 노선을 밟을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며칠 사이 상황은 급변하였다. 황제가 와룡임이 밝혀진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듣고 두 노신(老臣)들은 조만간 가변례가 있을 지도 모른다 마음의 준비를 하였지만, 그러나 그 ‘조만간’이 조만간이 아니라 ‘당장’이 될 것이란 예상은 한 치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이런 일이···.”
좌사 관보 민화가 가슴 속을 콱 메운 한숨을 밀어내듯 중얼거리자, 당장 우사 노재 명승이 쉿, 날카로운 숨소리를 내며 탓하는 시선을 보냈다.
“용전(龍殿)이오, 입 조심하시오.”
“미안하외다, 이 방정치 못한 입이 그만···.” 노재 명승의 경고에 몹시 송구해하며 몸을 움츠린 관보 민화는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불과 일각(一刻)이 지나기도 전에 다시 슬그머니 입을 열어 말했다. “너무도 당혹스러워 그런다오. 암만 아는 것이 없다지만 천제가 지나기도 전에 가변례를 치르게 되다니, 상식 외의 상황이 아니오···.”
우사 노재 명승이 따끔하게 주의를 주려고 입을 열었다가, 관보 민화의 이어진 말에 자신도 모르게 말하려던 것을 멈추고 말았다. 관보 민화의 염려와 불안에 그 또한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던 때문이다. 노재 명승의 노색(怒色)이 슬 수그러드는 기미가 보이자 관보 민화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을 놓았다.
“노재께서는 아니 그러시오? 천제도 치르기 전에, 그것도 책봉식(冊封式)도 치르지 않은 이를 상대로 가변례라니요. 사상 초유의 일이 아닙니까. 일이 이렇다보니 이 관보는 크게 걱정이 됩니다.”
“···황상께오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허나 지금껏 천제를 치르고서 가변례를 치른 것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전례란 것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지요.”
“그도 그렇습니다마는, 저희 같은 범인이 아는 것이 무엇이 있어 간언(諫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노재 명승의 그 말에, 관보 민화도 드디어 난감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는 도무지 할 만한 대답이 없었던 탓이다. 대신 그가 잠시 들었던 상반신을 거의 엎드리는 것처럼 숙이면서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이것 참. 이전부터 이상타 여기기는 했으나 참말로 유명무실한 벼슬이었을 줄은.”
저는 그래도 가변례가 있을 때만큼은 제가 밥값을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관보 민화의 한탄에 노재 명승도 수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이리 대답하였다, ‘황실의 가례에 영광스럽게도 참례인(參禮人)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여기면 되지 않겠소이까.’
“허나 이래서야 천자께서 후궁들과 합방하실 적 침방에 입실해 있는 환관과 다를 바가 무어 있습니까.”
“환관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저 구슬주렴 같은 게지요.” 노재 명승이 자탄(咨歎)하며 눈짓하였다. “이화시강원이라는 그럴듯한 주렴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 누가 가변례가 황상 혼자 몸으로 주관하시는 의식이라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관보 민화는 바닥에 엎드린 채 슬그머니 눈만 들어 올려 노재 명승이 눈짓하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야 끝에 노재 명승의 말대로 때때로 차랑차랑 흔들리는 구슬주렴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푸른 구슬주렴이 흔들릴 때마다 마치 파도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관보 민화는 노재 명승이 그 아름다운 주렴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구슬주렴이 눈에 보인다는 것은 황상의 침방 장지문이 활짝 열어 젖혀져 있다는 뜻이지만, 구슬주렴 너머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렴 너머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현실이 아니라 마치 깊은 몽중(夢中)에 있는 것 같았다.
청옥주렴(靑玉珠簾)이 드리워진 황제의 침방 안은 평소와는 달리 장지문 앞에 나부죽 반절을 하고 앉아 있는 나인 아이들도, 그네들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태감과 대령상궁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활짝 열린 문 안쪽으로는 익숙한 침방 안의 풍경 대신 당태구름처럼 크고 자욱한 안개가 깔려 있었는데, 그 너머로 가을하늘 같은 신비한 연옥(軟玉)빛이 엿보였다. 그 너머로는 높은 산 그림자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그림자가 어른거렸지만 그 뿐이었다. 흐릿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에 놀라서 퍼뜩 들여다보면 생눈으로 본 모든 것이 환각인 듯 고작 촌보(寸步)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환각이요, 딴 세계였다.
노재 명승이 불현듯 감탄한 듯 말했다.
“폐하께서 와룡이셨다니, 참으로 감개무량하구려.”
관보 민화가 힐끔 주렴 안을 훔쳐보았다. 사람은커녕 그 안에 제대로 보이는 것도 없거늘 감시라도 받고 있는 듯 잔뜩 긴장한 태도와 눈빛이었다.
“그렇습니다. 참말로 황상께오서 이런 ‘힘’을 품고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렇지요. 주렴 안만 보면 마치 딴 세계 같지 않습니까?”
“노재의 표현이 딱입니다.” 넙죽한 턱 끝을 주억거리며 우사의 감탄에 동조한 좌사 관보 민화가 다음 순간 갑자기 어조를 달리하며 화제를 돌렸다. “헌데,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황상께서는 와룡임을 숨기고 계셨던 것일까요? 사실을 숨겨 황상께 득이 될 일이 없지 않소이까?”
“글쎄, 뜻밖의 일로 새삼 ‘힘’을 자각하셨을 수도 있고···, 좌사의 말마따나 본디부터 힘을 자각하고 계시었다면 그것을 숨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노재 명승이 내어놓은 답에 관보 민화가 탁 무릎을 쳤다.
“그럴듯한 말씀이외다.”
만일 그리된 일이라면 청의관 수객의 이름을 공신록에 재록(載錄)하여도 무방하겠소이다. 관보 민화가 진담인지 우스갯소리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 소리를 지껄이자, 그 말을 노재 명승이 진지하게 받아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런 말씀은 하시는 것이 아니요. 만에 하나 가변례가 성공하다손 치면 청의관 수객은 더 이상 한낱 수객이 아니게 되는 것이오.” 그렇게 말하면서 노재 명승이 힐끗 주렴 안을 곁눈질하였다. 그리고 더더욱 신중한 태도로, 표정이 굳은 관보 민화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용인이 되는 거요.”
“용인···.”
좌사 관보 민화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낯빛이 핏기가 싹 가신 잿빛이었다.
황제는 용(龍), 그러므로 용황제의 배필 또한 최소한 그에 버금가는 용인일 필요가 있다. 사실 가변례란, 인간에 불과한 황제의 배필을 용인으로 변태(變態)시키는 일종의 탈피(脫皮) 의식이었다. 다른 가례와는 달리 가변례의 모든 절차가 장막에 가려져 있는 이유도 그런 까닭에서 기인한다. 가변례를 주관할 수 있는 이는 용인 황제 하나 뿐, 황제를 제한 인간의 힘은 가변례에 조금도 필요치 않다.
다만, 용황제의 힘으로 만들어낸 ‘용인’은 그 육체만 본래의 용인과 흡사할 뿐 용인으로서의 ‘힘’은 쓸 수 없다. 본래의 용인은 신(神)이신 용님의 힘이 깃들어져 만들어진 것에 반해, 만들어진 용인은 반신(半神)인 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 탓이다.
그러나 용인으로서의 힘은 쓸 수 없다 하여도 만들어진 용인 또한 인간들보다는 한 단계 위에 존재하는 종족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낱 수객이 광영을 입어 용인이 되는 것인가···.” 좌신 관보 민화가 감탄과 한탄이 반씩 섞인 소리를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거야, 참으로···, 대단한 출세가 아니오이까. 어째 기분이 묘하구려.”
“묘할 것도 없소.”
무뚝뚝한 어조로 대꾸하며 우신 노재 명승이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기령과 혜화가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소.”
“걱정이 많으면 빨리 늙는 법이라잖소, 걱정할 일도 아닌 것을 왜 그리 사서 걱정을 하시오?”
“걱정할 것도 아니라니? 기사(技士)와 녹사(錄士)들이 외결(外結)을 맺고, 좌사와 내가 내결(內結)을 맺어 황상과 군부(君婦) 되실 분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 이화시강원 관료들이 할 일이 아니오?”
“답답한 말은 마시오.” 조금 전 노재 명승에게 따끔하게 타박을 들은 것에 아직도 꽁해 있는지 관보 민화가 필요 이상으로 건짜증을 냈다. 그가 주렴 안을 감히 삿대질까지 해가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것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신 분을 우리가 무슨 수로 보호한단 말이요?”
“허나 이것은 필히 지켜야 할 의무요.”
“그저 허례의식일 뿐이요.”
“전례에 항상 있어 왔던 일이오이다. 이유가 있으니 고인(古人)들께서 그리 행하신 것이 아니겠소? 굳이 선례를 깰 필요는 없소이다.”
“선례를 깨신 쪽은 황상이 아니시오?”
그 말에는 노재 명승도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관보 민화가 에이이, 하고 달갑지 않아하는 소리를 내며 두 손바닥 중 하나를 바닥에서 떼며 허리를 펴고 앉았다. ‘관보!’, 계속 수그리고 있으려니 허리가 아프다며 툭툭 허리께를 두드리는 관보 민화의 꼴을 보고 노재 명승이 당장 일갈하였지만 그래도 관보 민화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관보 민화가 말했다.
“그러지 좀 마시오. 내가 아예 술법을 깬 것도 아니고 잠시···,”
투덜거리던 관보 민화의 말이 딱 멈췄다. 움푹 들어간 눈이 마치 튀어나올 것처럼 홉떠져 있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은 온통 시퍼런 빛깔이었다.
“무,” 관보 민화가 허둥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금 무슨 소리가,”
쾅!
아이쿠! 무심코 관보 민화가 두 팔로 제 머리 꼭대기를 감싸 안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관보! 마찬가지로 놀란 노재 명승도 목소리를 높였다. 다만, 관보 민화와는 뜻이 완전히 다른 고함소리였다.
노재 명승이 당장이라도 달려들듯 험악한 얼굴로 관보 민화를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관보, 이 사람아! 손을 떼면 어떻게 한단 말이오, 술법이···!”
그러나 노재 명승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콰앙!
다시 한 번 아까와 같은 굉음이 울리며, 전각 전체가 우르르 울렸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군 노재 명승이 다음 순간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고 당혹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것은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겐가?
허나, 그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이는 이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
땅이 다시금 우르르 떨렸다. 전각에 난 모든 문이란 문들이 모두 떨어져 나갈듯이 흔들리고 섬돌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던 꽃신이며 가죽신 따위가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땅이 한 번 울릴 때마다 거대한 전각이 통째로 흔들렸다. 그야말로 산지옥을 보고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허나 기이하게도, 흔들리고 있는 것은 황제의 침전뿐이었다. 천추전이 기둥을 박고 있는 땅만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고 그 앞에 버티듯 서 있는 체제공 서현을 경계로, 한발자국이라도 천추전에서부터 벗어난 곳은 거짓말처럼 미진(微震)조차도 없었다. 단 일보(一步) 차이로 인세(人世)와 지옥이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현상(現狀) 따위는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옛사람들이 천자의 안녕을 빌며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거대한 침전이, 두텁디두터운 벽이며 바위처럼 단단한 마루며 한 치의 틈새도 없이 꼼꼼하게 맞춰 붙인 문 따위가 초자연적인 존재의 ‘힘’ 앞에 인력 따위는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는 듯 흔들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본능적인 위기감이 사람들의 심장을 집어삼켰다. 흔들리는 것은 자신들이 발붙이고 있는 곳이 아니라 천추전 하나뿐인데도 마치 자신의 발밑이 무너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으으, 단정히 얹은 기와가 끓는 물 안에 들어앉은 달걀처럼 달각달각달각 소리를 내고 백 년 묵은 나뭇등걸만한 기둥이 우르르우르르 흔들릴 때마다 앓는 듯한 신음을 내던 사람들이 사분합문 하나가 통째로 떨어져 나오자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삼키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떨어져 나온 장지문이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똑바로 서엽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서엽의 가까이에도 오지 못하고 사분합문은 수십 조각의 종이와 나무토막으로 난도질당했다. 서엽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바다거북 같은 사내의 칼에 의해서였다. 감히 주인 되는 분의 앞에서 칼을 빼어든 무례를 사죄하는 심복에게 머리를 들라는 뜻의 손짓을 해보이면서 서엽이 말했다.
“결계가 깨어졌다.” 그리고 잠시 틈을 두고서 그가 덧붙였다. “필시 결계는 셋 이상···.”
쾅!
“꺄악!”
정수리를 두 팔로 감싸고 발발발 몸을 떨고 있던 나인 아이가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서엽의 한 쪽 입꼬리가 슬며시 치켜 놀라갔다.
“중결계(中結界)도 깨졌군.”
쾅! 쾅! 쾅! 굉음이 연쇄적으로 터졌다. 웬만한 장지문은 문짝채로 떨어져 나왔고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던 창문들도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해 펑펑 소리를 내며 터졌다. 굉음에 납죽납죽 자리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이들의 얼굴에 점점 난색이 강해졌다. 이래도 되는 일인가? 이리 가다가는 천추전이 통째로 엎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만일 그리 되면, 하는 생각에 사람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급류에 휩쓸린 듯 훽훽 변하는 상황에 미처 깊이 생각지 못하였으나, 이것은, 이런 짓은. 사람들은 공포가 어린 눈으로 천추전 용마루를 올려다보았다. 지엄하신 천자의 처소를, 어찌 신민되는 자들이···.
그러나 그 때,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서엽이 말했다.
“다음 결계도 곧이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태연하다 못해 서현을 독려하는 기색까지 묻어났다.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독한 불경(不經)을, 불경이라 인식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어서, 황상을 구하여 드리려무나.”
“그,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없는 용기를 짜내어 태감이 묻자, 서엽이 그 편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심상하게 대꾸했다.
“모르는가. 천제를 지내지 않고 가변례를 치르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야.”
“자, 자진(自盡)이라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변례란 인위적으로 용인을 만들어내는 일일세.” 그리 대답하는 서엽의 얼굴에 일시적으로 음영(陰影)이 짙어지는 듯했다. 마치 웃거나, 아니면 크게 찡그릴 때나 생길 법한 그림자, 그러나 태감이 있는 위치에서는 서엽의 표정을 완전히 볼 수가 없었다. 서엽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가변례를 치르려면 제관(祭官) 역할을 하시는 황상께서 완벽한 용황제로 거듭나셔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태관 봉승이 헉, 숨을 삼켰다. 현재의 황제는 아직 천제를 지내지 않았으므로 완벽한 용이 아니라 아직 용인이 불과하였다. 그가 조금 뒤 불불 떨리는 입술로, 차마 말을 꺼내는 것도 두렵다는 듯이 물었다.
“마, 만일, 용인인 채로 가변례를 치르려 하면 어찌되는 것입니까?”
“죽지.” 서엽의 대답은 냉혹했다. “온 몸이 산산조각이 나서.”
그 대답에 순간 등골에서부터 뒷머리까지 쭉 섬뜩하게 차가운 기운이 타고 올라온 탓에 태감이 항의하듯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용인이 아니십니까!”
“예외는 없네.”
“아니됩니다, 이게, 이게 무슨!” 믿을 수 없다는 듯 태감이 연신 머리를 흔들어댔다. 그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흙빛이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천자를 모욕한 죄로 삼족이 멸하여지더라도 시위들을 시켜 폐하의 양팔다리를 붙들고 늘어졌을 것입니다! 용을 한 번 잃은 것으로도 십 년이 넘는 가뭄이 들고 용의 증후가 메말랐었는데, 두 번씩이나 용을 잃게 되면 이 나라에 무슨 재앙이 내릴지···!”
주위를 의식하는 것조차 잊은 듯한 태감은 아예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실성한 사람처럼 마구 소리를 내지르는 그의 말에, 처음에는 굉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헌의공과 나직이 말 몇 마디를 나누는 듯 하던 태감 봉승이 갑자기 돌변해서 고함을 내지르자 하나둘씩 사람들의 시선이 태감 봉승에게로 꽂혔다. 강윤제 재위 당시 시강원 관원들의 부주의로 청룡 소현태자가 목숨을 잃자 마치 보복이라도 하듯이 이 나라에 닥쳤었던 그 끔찍한 재앙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만일 지금의 황제마저 이 일로 잘못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이 자리는 수습할 수도 없을 만큼 큰 혼란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이들이 태감이 지르는 소리를 제대로 알아듣기 전, 서엽이 조용한 말 한 마디로 태감 봉승의 입을 닥치게 만들었다.
“입 닥치게, 상국의 주의력이 흩뜨려지지 않는가.”
“······!”
서엽의 눈은 똑바로 서현에게 꽂혀 있었다. 쾅! 다시 한 번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졌다.
“지금은 상국을 방해하지 말게. ‘지금’은. 지금 상국께서는 완벽한 ‘힘’을 발휘하셔야 하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완벽’한 힘을.”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라니, 지금은 아니지만 마치 때가 되면 이 경악스러운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멋대로 퍼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그런 태도가 아닌가···. 그러나 봉승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자신의 착각이 분명했다. 그러자 그 부정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바로 서엽이 말을 이었다.
“시강원 강원들이 만들어낸 결계도 이제 하나 밖에 남지 않았어. 그 후에 황상께서 만드신 결계까지 깨뜨리면, 용을 잃지 않아도 되네.”
아직 잿빛인 봉승의 얼굴에 모처럼 희망의 빛이 감돌았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봉승이 서엽을 의시하여 목소리를 억누르고 여쭈었다.
“그, 그럼 화, 황상의 힘을 깨뜨릴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 되기를 빌어야지.”
벌벌 떨며 묻는 태감이 무색하도록 대꾸하는 서엽의 태도는 태연했다.
쾅!
한층 고조된 굉음이 마치 포탄이 터지는 것처럼 울렸다. 이전까지는 천추전만 흔들리고 말 뿐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한 번의 굉음으로 천추전 뿐만이 아니라 서엽이나 여타 사람들이 있는 땅까지 와르르 뒤흔들렸다. 어이쿠!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태감이 바닥을 나뒹구는 것을 옅은 웃음기 어린 눈으로 한 번 보고, 서엽이 말했다.
“내결계(內結界)까지 깨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황제의 ‘힘’ 뿐이었다.
*
폐하! 폐하! 하고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쾅쾅쾅! 무례하게도 벽을 치고 마룻바닥을 큰 발소리를 내며 내달리고 미닫이문을 거칠게 미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그 모든 소리는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마냥 아득하기만 했다.
그 미약한 소리가 멀쩡히 들리는 소리마저도 인지하지 못하는 황제의 귀에 들릴 리가 만무했다. 펑! 이전의 난동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치 큰 굉음이 울렸지만 여전히 황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황제는 깊은 어둠 속에 있었다. 네모난지 둥근지조차도 가늠할 수 없는 그 공간은 주위가 온통 검은 빛이었다. 공들여 간 먹을 들이부은 것처럼 가만 그 공간에는 때때로 야트막한 파도 같은 것이 일었다. 파도···. 그랬다. 한 번 물살 같은 것이 부드럽게 일렁일 때마다 마냥 검던 공간에 검푸른 빛깔이 일렁거렸다. 비록 물이 쓸고 지나가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으나 그것은 분명 물살이었다.
물! 그랬다. 황제는 자신의 침방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물속에 잠겨 있었다. 비록 검지만 기이하도록 맑은 물은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깊이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속에서 황제는 두 팔 안에 서문경을 안은 채로 조용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고, 황제의, 정확히는 그에게 안긴 서문경의 주위로는 수 천 수 만 개의 자그마한 기포(氣泡)가 빽빽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수를 셀 수도 없을 만치 수없이 몰려들어 있는 그 물방울 하나하나는 깨알처럼 작았다. 그 작은 기포들이 일말의 여백도 남기지 않고 빽빽하게 들러붙어 있는 모습이 몹시도 징그러웠다. 마치 서문경의 몸을 뜯어먹기 위해 몰려들어 있는 개미떼 같았다.
서문경의 맨몸에 들러붙어 있던 기포들이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부풀었다 꺼져들었다 다시 부풀기를 반복했다. 한 번 커졌다 쪼그라들 때마다 마냥 투명하기만 하던 기포의 색은 점점 더 짙어졌다. 그러다 물빛과 비슷할 정도로 색이 검어지면 기포가 퍽 소리를 내며 터지고, 그 빈자리를 다시 생겨난 투명한 기포가 메웠다. 그것이 끝도 없이 반복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흡사 탐욕스러운 개미떼가 탈진하여 쓰러진 여치를 물어뜯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반대로 서문경의 몸 안에 가득한 독기(毒氣)를 빨아내고 있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러기를 수 십 번, 더 이상 물방울이 생겨나지 않는 자리도 종종 있었다. 잘못 칠한 분가루처럼 덕지덕지 묻어 있던 성에가 사르르 곱게 녹은 그 자리는 붉고 검던 멍이 빠지고 이전 서문경의 원래 피부색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 새뽀얀 피부 위에는 칼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처참한 상처도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흡사 그 모습이 갓 내린 눈이 쌓인 순결한 제단(祭壇)이 수탉의 목을 뽑아 솟구쳐 나온 피로 모욕당한 광경을 연상케 했다.
어느 순간, 기포가 모두 사라졌다.
마지막 기포가 퐁, 하는 작은 소리조차 남기지 못하고 터졌을 때, 황제와 서문경이 잠겨 있던 물은 완전히 먹빛이 되어 있었다. 물방울마저 두르지 못한 완전한 나신인 채로 서문경이 천천히 물 위로 떠올랐다. 그를 좇아 황제의 몸이 움직였다. 그는 서문경과는 달리 해월(海月)같이 희고 긴 주의를 입고 있었지만 마치 물고기처럼 날렵하고 우아스레 움직였다. 곧 황제가 서문경의 손끝을 잡았다. 일순 물소리가 들린 듯했다. 바다처럼 큰물이 밀려 나가는 듯, 쏴아아-, 하는 그런 소리···.
그리고 다음 순간, 황제와 서문경은 거짓말처럼 물속이 아닌 다른 공간에 있었다. 황제의 침방 안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방금 전 물속과는 달리 분명 지금 이곳에는 바닥이 있었지만 그 또한 황제가 전과는 달리 반좌(盤坐)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기에 추측이 가능한 것뿐이었다. 지금 황제와 서문경이 있는 자리는 자욱한 안개가 끼어 한 치 앞을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깜빡 깜빡 깜빡. 돈등화 같은 발갛고 둥근 불빛이 안개 너머에서 깜빡거리는 듯도 했으나, 그 또한 환시(幻視)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허나 그 불빛만은 진짜였던 모양이다. 끄먹끄먹 불안하게 타오르던 돈등화가 점점 밝고 선명해져온다 싶더니, 곧 둥근 불씨가 맺힌 심지가 드러나고 그 아래 맑은 기름이 담긴 등잔과 백금과 호박으로 장식을 해 넣은 등가(燈架), 그리고 음각 장식을 한 금을 입힌 등잔대 따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가 등잔의 심지를 돋우어 불을 더 밝게 하자, 붉은 불이 점점 더 밝아지고 사람의 검은 그림자도 바람을 넣은 종이공처럼 벽 위로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벽 위에 걸린 그림자는 둘의 것이 아니라 하나였다. 비치는 것은 서문경의 그림자 뿐, 황제에게는 그림자가 없었다.
황제가 서문경의 몸을 들어 보료 위에 눕혔다. 풍파에 베이고 쪼개진 가엾은 옥산(玉山)이 비단 보료 위에 스러지듯 무너졌다. 두툼하게 포갠 비단 보료가 입을 맞추듯 서문경의 나신에 달라붙으며 그 몸을 껴안았다.
미지근한 물속에 온 몸이 잠겼다가 다시 건져지고, 아직도 젖은 몸인 채로 보료 위에 눕혀지는 일련의 과정에서도 서문경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동그란 이마에서부터 왼쪽 눈 중앙을 지나 목 바로 밑까지 절단하는 얼굴의 큰 상처를 황제가 조심스럽게 더듬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박사박. 눈 위를 밟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옷가지가 떨어져 내렸다. 깎아 놓은 것 같은 어깨가 드러나고, 햇눈처럼 희디희지만 빙판처럼 단단한 가슴팍이 드러났다. 곧 서문경처럼 나신이 된 황제의 몸이, 서문경의 몸 위에 겹쳐졌다.
인간을 용인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서문경의 육신을 본디의 것에 가장 가깝게 되돌려 놓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비록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강하고 회복력이 인간에 비할 수 없는 용인이라 하여도 이 이점이 적용되는 것은 용인이 된 이후의 일, 용인이 되기 전에 만들어진 상처에 대해서 용인의 힘은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 즉, 큰 상처를 입은 그대로 가변례를 치른다면 서문경은 지금의 이 상처를 모두 가진 채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변(眞變)을 하기 이전 서문경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조금 전 황제가 물러낸 ‘물’로 서문경의 몸속에 가득하던 독기는 모두 빠졌다. 그러니 이제는···.
문득 황제의 낯빛이 조금 흐려졌다. 서문경의 머리카락을 하염없이 쓰다듬던 손도 잠시 멈췄다. 지금 황제의 표정과 목광(目光)과 얼굴빛을 한 마디로 뭉뚱그려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망설임이 될 것이다. 그는 진실로 망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망설이는 표정이 어린 얼굴에는 희미한 두려움도 그 자리에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하늘’.
황제가 ‘물’ 다음으로 불러내야 할 것은 ‘하늘’이었다. 완전히 해빙(解氷)된 서문경의 체력은 현재 바닥에 다다라 있었다. 현재는 황제가 억지로 불어넣은 ‘힘’으로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도 곧 한계일 것이다. 그러기 전에 서문경의 상처를 없애야 했다. 서문경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데운 물이 미지근하게 식을 만큼의 일찰나(一刹那). 그 짧은 시간에 서문경의 상처가 스스로 낫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황제는 ‘하늘’을, 땅 위의 어떤 법칙도 무의미해지는 공간인 ‘하늘’을 불러내어 서문경의 상처를 자신의 몸에 옮길 요량이었다.
황제의 얼굴에 어린 망설임과 두려움이 더더욱 짙어졌다. 온 몸이 난도질될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깟 고통 따위가 무엇이 무서울까, 여린 인간의 살을 가진 그 아이 또한 당했던 일인 것을. 제 것도 아닌 잘못으로, 자신이나 소희, 헌의공 사이에 얽히고 얽힌 사정 때문에 영문도 모르고 온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을 서문경을 생각하면 망설임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서문경에 대한 모독이요, 자신의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본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후 황제가 불현듯 눈을 내리깔았다. 부챗살마냥 길게 뻗은 첩모(睫毛)가 그의 눈 밑에 짙은 잿빛 그림자를 드리웠다. 꿈틀, 황제의 입술이 움직였다, ‘허나···, 허나···.’
“변변치 못한 변명이나마 해보라 네가 기회를 준다면.” 혼잣말이 아니었다. 황제는 듣지도 못하는 서문경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고통 때문이 아니다. 짐을 위하여 칼밭과 화살비가 있을지도 모를 무중(霧中)에 뛰어들었었던 너를 앞두고 짐이 어찌 그런 생각을 할까. 어찌···.”
힘겹게 털어놓던 황제의 입술이 다시 멈췄다. 한 번 말하는 것을 멈춘 황제는, 더 이상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 듯 계속해서 입술을 움칫움칫하기만 할 뿐 말다운 말을 하고 못했다.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삼키고, 다시 혀 위까지 기어오른 말을 삼키고, 결국에는 구문(口吻)까지 두드리는 말을 입을 걸어 잠가 삼키기를 수 번. 그럴 때마다 황제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희미하던 핏기마저 모두 증발하고 대신 그 얼굴 위에는 시체와 같은 푸른빛이 감돌았다.
“짐, 은···.”
말해야 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순간 지금껏 가슴 속 깊은 곳에 꽁꽁 숨겨 자신조차 잘 들여다 볼 수 없었던 진심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질 것이 확실했다. 그것이 무서웠다. 그것이 두려웠다. 자신이, 선량한 이 이의 호의를 받을 만한 가치도 없는 자라는 사실을, 이렇게 서문경과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죄스러울 만큼 저열한 괴물이라는 것을 자신의 귀와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그 순간-.
황제는, 그래서 서문경의 귀를 막았다. 손바닥으로 서문경의 양 귀를 막고, 사실을 고백하였다. 서문경이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무서웠다.
듣지 말아다오.
“네가, 기억을 찾을까 두렵다.”
혼과 마찬가지로 오롯이 신으로 존재하는 ‘새’가 지배하는 ‘하늘’에는 많은 것들이 떠돌아다닌다. 인간들을 숨 쉬게 하는 공기와 그들이 내뱉은 숨. 피부를 젖게 하는 젖은 기운과 목을 마르게 하는 티끌. 태산보다도 높은 적란운과 양털보다도 보드라워 보이지만 연기보다도 덧없는 구름들···. 그리고 주인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힘’들과 갈 곳이 없는 신성한 짐승들, 이곳저곳에서 새어 들어와 어느 세계의 것인지도 모르고 떠다니는 ‘말’과 ‘기억’과 슬프고 기쁜 각각의 ‘감정’들.
결국 ‘하늘’에는 하늘이 잇고 있는 삼계(三界)의 모든 것들이 어지럽게 얽혀 떠돌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서문경의 ‘기억’과 본디의 ‘힘’은 완전히 물에 녹아 없어졌다. 위대한 정신인 혼속에 녹아 사라진 힘은 결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은 약간 사정이 다르다. ‘힘’은 오롯이 서문경 혼자만의 것이지만 ‘기억’은 서문경과 그 기억을 공유한 이들의 사이에 얼기설기 맺혀 있는 거미줄과 같다. 서문경의 기억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상대방의 기억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만일 ‘하늘’에서 그 ‘기억’과 마주친다면 서문경은 예전의 기억을 다시 되찾을 수도 있다.
그래, 그 사실이 일순간이나마 황제를 망설이게 했다.
“네가···, 기억을 되찾으면.”
네가 사랑하던 사람들을, 너를 지극히 아껴주던 사람들을 네가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면. 서문경의 귀를 막고 있던 황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파란 핏줄이 도드라진 마른 손등이 바들바들 잔 경련을 일으켰다.
“너는.”
같은 말을 황제가 반복했다, ‘너는.’
“경이, 너는···.” 하고 말하는 입술이 곧 서글픈 호선을 그렸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가 우는 것처럼 서글프게 들렸다. “짐이, 생각이나 날까. ···경이 너를 탓하는 것도,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짐은, 두려운 것이다.”
서문경이 나고 자랐던, 본래의 세계. 뿌리박을 곳도 없고 붙잡아 의지할 만한 넝쿨 따위도 없는 이 용님의 세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치 간절할 그 세계···. 그 세계에서 서문경과 얼굴을 맞대고 그와 시간을 공유하며 살았을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착하고 정이 깊은 아이이니 깊은 정을 주고받은 이도 많았었겠지. 애틋한 육친과 친애하는 벗들과 어쩌면 수줍은 연정을 품었을 지도 모를 여인. ···그 많고 많을 친인들을 떠올리고 나면, 너는 짐을 생각이나 할까.
“벌을 받는 게다.” 황제가 천천히 말했다. “짐은 벌을, 받는 게야.”
서문경을 그토록 마음 아프게 한 죄.
마치 깊이 잠든 것처럼 표정이 없는 서문경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황제가 서문경의 귀를 막고 있던 손을 거두고 한 손을 조금 들었다. 뱃속이 마치 커다란 노로 휘젓는 것처럼 울렁거리고 아팠지만 황제는 신음을 흘리는 대신 시선을 들어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가 속삭였다.
“시재(時在), 폐(廢).”
불빛이 사라지고 안개가 짙어졌다.
“가림, 해(解).”
쉿! 커다란 뱀이 위협하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짧게 몇 번 울렸다. 그러더니 짙은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비치던 황제의 인영이 변하기 시작했다. 탁, 탁탁탁탁탁탁탁! 크고 작은 돌이 연쇄적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매끈하던 황제의 팔이 크게 부풀고 그 부푼 팔에 단단한 비늘이 돋아났다. 변한 것은 비단 팔 뿐만이 아니었다. 두 짝의 팔이 모두 쇠기둥처럼 거대하게 변한 뒤 수사슴 같던 목도 뽑은 것처럼 길어지고 흑요암 같은 검은 비늘이 박혔다. 그리고,
“개천(開天).”
보갑(寶匣) 안에 놓아둔 옥처럼 흠집 하나 없던 황제의 뒷덜미, 정확히는 길게 뻗은 목이 끝나고 도톰한 뼈가 도드라진 그 자리가 가뭄이 난 논바닥처럼 쩌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해묵은 상처처럼 시커먼 흉터는 뒷덜미를 점령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점점 발을 넓히더니 결국 날개뼈가 있는 양 어깻죽지까지 가서야 멈추었다.
황제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런 황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멈추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손을 저었다.
“열려라.”
황제의 말에 매서운 바람이 한 번 불더니, 두텁던 안개가 순간적으로 걷혔다. 잔뜩 낀 안개 때문에 불과 한 장(丈)에 불과하던 시야가 확 밝아졌다. ‘물’을 불러냈을 때와는 달리 황제와 서문경이 있는 공간에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다만, 제 아무리 넓어봐야 결국은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 불과한 그곳은 기묘하게도 천장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천장이 사라졌다는 말도, 뭔가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었다. 아득히,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먼 곳에 천장이 있었다. 분명 그럴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는 황제의 안색은 썩 밝지 못했다. 열려, 으름장을 놓는 것처럼 험악한 투로 황제가 다시금 속삭였다. 우르릉 마치 천둥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며 다시 하얀 안개가 끼었다. 안개? 다시 보니 안개가 아니었다. 구름이었다. 그 안에 뇌편(雷鞭)을 품고 있는 듯 묵직한 구름 안에서 번쩍 빛이 일었다. 그러나 그 뿐, 더 이상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실에 노한 듯 황제가 불현듯 벼락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당장 열려라! 명령에 따라!”
‘물’과 통하는 용은 수로를 다스리는 지룡, 황제는 이미 ‘물’을 불러내었다. 그러나 ‘하늘’과 통하는 용은 새와 한 곳에서 노니는 광영을 얻은 천룡이다. 하지만 조금 전 ‘물’을 이 자리에 불러냈으면서도 황제는 또다시 ‘하늘’을 요구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짐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당장 명을 따라.” 황제가 목소리를 낮추어 나직이 위협하자, 구름 뒤에서 칼날처럼 번뜩이며 으르렁거리던 천둥이 점점 잦아들었다. 황제가, 마치 자신이 누구인지 보라는 듯 천장을 향해 빳빳이 얼굴을 들었다. 황제의 뒷덜미와 날갯죽지 사이에 검은 금처럼 나 있던 상처가 묘한 빛으로 번뜩였다. 황제가 말했다. “보고, 듣고, 깨달아라. 이 멍청한 백성아.”
말이 끝난 순간, 황제의 양 날개뼈가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찢어졌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소리와 동시에 침방 안이 눈도 뜨고 있을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빛에 휩싸였기 때문이었다.
*
천지를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천추전 깊은 곳에서 도자기가 산산조각 나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더 강해지는 흔들림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기어코 떨어진 기왓장을 한 발 옆으로 물러서는 것으로 피하면서 서현은 확신했다. 이것으로 내결계까지 완전히 깨어졌다.
팍! 용마루에서 떨어진 기왓장이 방금 전까지 서현이 서 있던 자리에 날카롭게 가서 꽂혔다. 바닥에 박힌 기왓장을 검은 가죽신 끝이 와 지그시 밀었다. 서현도 그것을 보았지만 그 편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던 탓이다. 과연, 예상 그대로의 목소리가 자신을 향해 물어왔다.
“이로서 내결계까지 깨어졌구나. 남은 것은 이제 황상뿐이다.” 어찌할 것이냐? 하고 물은 서엽이 서현의 대답을 기다릴 생각조차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천추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겠지.”
그렇게 묻는 서엽의 뒤에서 요란스런 발소리와 함께 웅성임이 번졌다. ‘어르신, 태학궁에서 박사들이 당도하였습니다!’하고 누군가 외친 소리에 잠시간 멈춰 있던 서현의 발걸음이 움직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서현의 등에 대고 서엽이 물었다. ‘어찌 그리 가느냐, 희야?’
“태학궁에서 술사들이 당도했다지 않느냐.”
“필요 없습니다.”
서현이 칼같이 대꾸했다. 자신의 말을 들은 서엽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 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돌출된 듯한 눈썹이 슬그머니 치켜 올라가고 그 아래의 움푹 들어간 눈이 일순간 반뜩거리며 그리 깨끗하지 못한 흰 자위가 묘한 빛으로 반들거렸을 것이다. 그 끔찍하도록 지긋지긋한 표정. 그리고 오목한 인중 아래의 구문이 꿈틀 꼬리를 밟힌 토룡(土龍)처럼 움직이며,
“그리 하여도 괜찮은 것이냐?”
의뭉스럽기 짝이 없는 물음. 서현이 이를 악물었다. 언뜻 들으면 자신을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자신의 등을 진창으로 떠미는.
“박사들과 함께 가도록 하여라.”
“간자를 달고 적진으로 미친놈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습니까.”
흘려들으려 부단히 노력했건만 그런 보람도 없이 일순 뼛성이 일었다. 그렇게 내뱉어 놓고서 곧바로 아차했으나 이미 넘친 물, 그것을 어찌해 볼 도리는 없다. 서현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까지 부글부글 용암 같은 노혐(怒嫌)이 들끓어서 펑하고 터져 버릴 것만 같다.
이전보다 조금 더 배가 부른 듯한 투로 서엽이 말했다.
“간자라니, 그것이 무슨 소리더냐.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되었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서현이 말하며 시선을 휙 돌렸다. 어느새 서현이 서 있는 곳으로부터 몇 발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당도해 있던 태학궁 오경박사들이 주춤 발을 멈췄다. 서현의 눈빛이 차고 무거워졌다. 걔 중 도무지 상황을 모르겠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천추전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살피고 있는 삼박사(三博士) 소천 경모에게 시선을 맞추고 서현이 말을 이었다. “저 외의 사람이 필요하였다면 굳이 태학궁의 힘을 빌리지 않았어도 창혜각 천객들로도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태학궁 박사들의 힘이 창혜각 천객들의 힘보다 낫다 자신한다면 그렇다 나서라 자극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노골적으로 창피를 주는 말에 태학궁 사람들의 얼굴이 모욕감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으나 용기 있게 나서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다른 이들처럼 귀와 볼이 붉어진 삼박사 소천 경모가 평소보다 조금 더 억눌린 투로 조용히 말했을 뿐이었다, ‘상국의 말씀이 옳습니다.’
“헌의공께서 보내신 전갈을 받고 급히 달려 왔습니다만 송구하게도 이 상황에서 저희들이 손을 쓸 수 있는 방도는 없습니다. 차라리 이화시강원 술사들이 만든 결계를 파하는 일이었다면 모르나···.”
그렇게 말하는 소천 경모는 무슨 까닭으로 자신들을 이 자리에 소환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투였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이화시강원 술사들이 천추전을 두고 친 결계를 파하는 것은 천객들이나 수상이 아닌, 전문적으로 술진(術陣)과 그를 구성하는 술식(術式)을 연구하는 태학궁 술사들이 하는 것이 효율적일 일이었다. 그러나 전갈을 받고 급히 도착해 보니 시강원 관원들의 결계는 모두 파훼된 뒤였다.
“이 만시에도 화급히 달려와 주었는데 미안한 일이로군.”
그 때 서엽이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그 말에 다른 오경박사들이 이미 굽어 있는 허리를 완전히 부러뜨릴 작정이라도 한 듯이 굽실거리며 ‘아닙니다, 어르신, 저희들이야말로 발이 늦어···.’ 등등의 아부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삼박사 소천 경모만은 예외였다. 늦었다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전갈을 받자마자 이 쌀쌀한 밤에 옷가지 하나 더 얹고 나올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뛰어 나왔다. 헌데 숨을 헐떡거리며 도착하자마자 일이 끝나 있다? 이것은 분명 전갈을 준 헌의공의 실수였다.
“헌의공께서 상국을 만류하셔야 했습니다.” 소천 경모가 충고하며 아직도 파훼된 술법이 넝마처럼 굴러다니는 천추전 주위를 빙 돌아보았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술법의 흔적이 만시경(萬示鏡)을 쓴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거대한 고리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던 술력이 갈가리 찢긴 꼴로 널브러져 있는 꼴을 보니, 마치 거대한 손에 찢긴 나뭇잎 따위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상국께서 힘을 쓰신 모양이지요, 창혜각 천객들은 아직 진법에 대한 강론(講論)을 듣지 않은 상황이니. ···진법사가 아닌 자가 결계를 파훼하였다면 그것은 순수한 힘으로 파하셨다는 말이 되는데, 그리하면 술식을 풀어 결계를 푸는 것보다 적게는 다섯 배에서부터 많게는 열 배 이상의 술력이 듭니다. 그야말로 힘을 낭비하는 행동입니다. 헌의공께서는 일단 소인들에게 전갈을 보내셨다면 소인들이 이곳에 도착하기를 기다리시면서 상국을 말리셨어야 했습니다.”
“사, 삼박사!”
“무슨 까닭으로 그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다른 오경박사들의 만류에도 삼박사가 캐어물었다. 그렇게 묻는 삼박사의 목소리에는 기가 막혀하는 기색이 확연했으나, 서엽에게 무언가 꿍꿍이속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저 이라면 그렇겠지. 서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돌렸다. 서엽이 자신의 힘을 빼놓고, 천추전으로 들어가는 자신에게 오경박사를 붙여 염탐질을 시키려는 속셈으로 일을 꾸민 것 정도는 손바닥 안을 들여다보듯 꿰뚫어볼 수 있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삼박사의 말이 옳네. 내가 실수하였군.”
“삼박사, 어르신께서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나. 그러니 이만 하고,”
서엽과 삼박사, 그리고 그녀를 제한 오경박사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문득 뚜벅뚜벅 하는 발소리를 들은 오경박사 중 하나가 무심코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가 천추전을 향해 걸어가는 서현을 발견하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상국!’
“상국! 어디를 가십니까!”
“내 뒤를 좇든 말든 내키는 대로들 하시오.” 서현이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하면서 천추전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터이니.”
이중으로 짠 기단(基壇) 위의 석계는 좌우의 석계가 모두 깨어져 중앙의 것 외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중앙 석계마저도 금이 가 단 한 번의 진동만으로도 산산이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석계 판석(板石)에 서로 얽힌 채 새겨져 있던 한 쌍의 봉황과 구조룡은 그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 만치 많은 실금이 가 있었다. 그것을 신도 벗지 않은 흙발로 밟고 서현은 천추전 어간(御間)으로 올라갔다. 눈에 익숙할 천추전 내부의 모습이 기묘하도록 눈에 낯설었다. 아마도 을씨년스럽다 못해 황막하기까지 한 기운 때문일 것이다.
황제의 강녕(康寧)함을 빌며 건축한 천추전 내부의 지금 모습은 지존의 침전이 아니라 인적이 드문 변지(邊地)에 버려진 폐가처럼 보였다. 팔각형의 주두(柱頭)로 고정되어 있는 고주(高柱)들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거리고, 십 수 개의 교창(交窓)과 사분합문은 아예 문짝에서 떨어져 나가 복도를 뒹굴고 있었다. 늘 천추전 안에 꽃과 나비처럼 가득하던 고운 비단옷의 여인들은 아지랑이처럼 사라져 보이지 않고,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건물 안에는 매캐한 먼지만이 가득했다.
서현은 먼지가 자욱이 쌓인 복도를 꺼리는 기색도 없이 걸었다. 한참 뒤, 자신 외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소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싶자 서현이 말했다.
“거두시오.”
발소리가 주춤했다. 서현의 시선이 척홍(剔紅)한 주두 아래 풀썩 쓰러져 있는 사내들에 한 번 꽂혔다가 바로 거두어졌다. 그네들 위에서 그들을 말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주두의 주칠보다 더 붉고 선명한 칠에 사내들은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채 다물지 못한 구문에서 천천히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피! 서현의 뒤를 좇던 이들 중 누군가가 숨을 삼키며 소리쳤다. 주두 아래 쓰러져 있는 이들은 바로 이화시강원의 이속인 녹사와 기사들이었다.
긴 보랑을 지나고 통간(通間)으로 넓게 한 방에 다다르자 또다시 쓰러져 있는 이들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이화시강원에 속한 관원들이었다. 그들의 상태는 처음에 발견한 이들보다도 더 좋지 못했다. ‘어서 의감에 보여야 하오!’, 얼른 다가가 그들의 상태를 살핀 이가 외쳤다.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닦달에 이기지 못해 뒤를 좇던 간자 중 하나가 쓰러진 사내들을 엎고 지금껏 왔던 길을 돌아갔다. 점점 간자의 수가 줄어들었다. 이 다음, 그 다음, 그리고. 계속해서 피를 토하고 쓰러진 사람들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황제의 침방이 있는 곳 복도에서 시체와 다름없는 낯빛을 하고 입에 피거품을 문 사내 둘이 발견되었다. 바닥에 처박힌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걸치고 있는 관복의 색과 반백에 가까운 머리으로 미루어보면 이화시강원 좌사와 우사가 분명하였다. 이제 남은 박사는 둘. 그 때 지금껏 아무런 말도 없이 서현의 뒤를 따르고 있던 일박사(一博士) 학승이 삼박사 소천 경모에게 말했다.
“자네가 좌사와 우사를 모시게.”
그 말에 삼박사가 아무런 의심의 기색 없이 이화시강원 좌사와 우사를 부축하고 힘겹게 천추전을 빠져나갔다. 아무리 몸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노인 둘이라고는 하나 여린 여인의 몸으로 사내 둘을 부축하는 것은 무리였었는지, 멀리서 그녀가 천추전 밖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현은 발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다. 일박사 학승도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삼박사의 무거운 발소리와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어찌 그러십니까.”
불현듯 일박사 학승이 물었다. 서현의 걸음이 멈췄다. 그러나 일박사가 그리 물은 탓은 아니었다. 어느새 황제의 침방 앞에 다다른 때문이었다. 일박사는 서현이 갑자기 멈춰 선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기색이었다. 지금 서현과 자신의 앞에 있는, 구슬주렴이 드리워진 방이 황제의 침방이란 것을 눈치 채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서현이 멈춰 선 채 아무 것도 없는 방 안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애가 달았던지 일박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헌의공께서 하시는 일은 결국은 모두 상국을 위한 것입니다. 근래 헌의공 어르신의 행보에 당장은 당혹스럽고 골이 나실 지도 모르나, 모두 범인은 이해하기 힘든 어르신의 깊은 속내에서 나온 생각이니 어르신을 거스르는 행동은 이제···,”
“제 시간에 천추전 앞에 당도하지 못하도록 다른 오경박사들을 방해하라 이르신 것도 말인가.”
일박사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간에 내내 대꾸도 없던 서현이 불현듯 입을 열어 물었다. 뜻밖의 말에 일박사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주춤한 사이, 서현이 말을 이었다. 일말의 분에(憤?)도 찾아 볼 수 없는, 흐르는 물 같은 목소리였다.
“창혜각 수객들의 힘을 이끌어 준다는 명분으로 그대들에게 교육을 맡겨 그들이 ‘힘’을 제대로 이끌어 내지 못하도록 사주하신 것도.”
“바, 방해했다니요!” 꿀 먹은 벙어리마냥 꾹 입을 닫고 있던 일박사 학승이 속이 뜨끔할만한 사안이 나오자 주름투성이 얼굴까지 시뻘겋게 붉히면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오해십니다! 모함이십니다! 태학궁 오경박사들이 천객들의 발침 의식을 담당해야 하는 사실이나, 그 뒤까지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규칙도 없거늘 직접 찾아가 강론을 펼친 선의를 이리 곡해하시다니요!”
“그래서 하문하고 있지 않나.”
서현이 느릿하게 머리를 돌려 일박사를 응시했다. 늙고 기운 없는 몸이 무색하도록 펄펄 기운 좋게 날뛰고 있던 일박사 학승이 서현의 시선이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몸이 굳었다. 뱀처럼 동공(瞳孔)이 횡으로 길게 찢어진 눈. ···용인의 증거. 자신과 종족 자체가 다른 용인의 증거를 마주하자 새삼스레 공포감이 일었다.
“내가 태학궁에 협력을 요청한 적이 있었나, 박사.”
“···그, 것은 아니었지만 소인들로서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선의로···,”
“선의라.”
“그렇습니다. 천객들은 타계에서 이 나라를 찾은 귀한 손님이니만큼 예와 성을 다해 대접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듣자하니 청의관 수객은 태학궁에서 인도하는 이가 찾아오지 않아 제 발로 태학궁을 찾았어야 했다더군.”
서현의 지적이 잠시 일박사가 입을 닫았다가, 곧바로 대답했다.
“어찌 보면 편협하다 비난할 여지도 있으나, 실익을 위하여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든 것도 없이 짐만 되는 불청객과, 신민(神民)으로서의 ‘힘’을 자각하여 장차 이 나라에 큰 도움이 될 천객을 어찌 같은 선상에 두고 대할 수 있겠습니다. 이 모두가 나라를 위한 일이었나이다.”
“황상께서 와룡임이 밝혀졌다. 허나 천객들은 아직도 이 서현의 편에서 돌아서지 않으려 하고 있어. 그렇다면 오히려 그 천객들은 나라를 위한 득이 아니라 언제 역당(逆黨)으로 변할지 모르게 된 실이 아닌가.”
“상국.”
충고를 해 주었건만 되레 되트집을 부리는 서현을 보는 일박사 학승의 눈에 찰나지만 짜증스러워 하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전 같으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단 한순간이라도 자신이 서현을 못마땅해 했다는 사실은 일박사 자신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하나 서현은 달랐다. 일박사 학승의 태도가 대연회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것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눈빛만은 한 겹 검은 막을 입힌 것처럼 어두워졌다. 새삼스럽게 성이 나는 것도, 비참함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비단 변한 것은 저 일박사 학승뿐만이 아니었으니. 다만 다시금 후회했을 뿐이다. 얼마 전까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보내던 경외와 찬탄이 일시에 사라졌다, 이 나라에 남은 ‘유일’한 용인이라는 휘광과 서엽의 지지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림과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얄팍한 종이 호랑이였는지 알려주는 일들이었다.
그것이 잘못이었나. 거인처럼 어깨를 부풀리고, 대고(大鼓)처럼 사람들을 호령하며 그를 넘어섰어야 했던가. 하지만 어쩌랴, 이전에는 그에게 거슬리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장 순탄히 손에 넣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조력자였고, 가장 유용한 무기였으니 당장 괴롭더라도 심장도 머리도 돌처럼 굳히고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실책이었다.
“상국.”
한참 동안을 말이 없는 서현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일박사 학승이 서현을 불렀다. 서현은 그 부름에 대답하는 대신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갔다. 구슬주름의 푸른 옥들이 드높은 민천(旻天: 가을 하늘)처럼 눈에 시렸다. 상국?, 일박사가 재차 부르며 서현을 향해 다가왔다. 서현이 불쑥 물었다.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이곳에 왔는가.”
그 물음에 일박사는 순간 당황한 듯 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매끄러운 혀로 대답했다.
“소인 학승 중광, 감히 상국을 보좌하여 드리려 합니다.”
“감히라. 그대가 주제 넘는 짓을 하려 한다는 것을 알기는 아는가.”
그렇게 말하는 서현의 목소리나 어조가 평온하기 그지없어, 순간적으로 일박사 학승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다.
“돌아가라.”
“상국!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상국이라 하더라도,”
“상국이 아니다.”
비로소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를 깨달은 일박사 학승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 말조차 곧 서현의 단호한 목소리에 막혀버렸다. 상국이 아니라니?, 도통 서현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일박사가 주춤한 사이 서현이 말을 이었다.
“용인이다.” 하고 말하며 서현은 손을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킨다. 옥구슬이 손톱과 다른 구슬들에 부딪쳐 짜르륵 짜르륵 차가운 소리를 낸다. 구슬주렴 안을 가리킨 채로 불쑥 서현이 물었다. “이 안에 무엇이 보이는가.”
멈칫한 학승의 시선이 서현이 가리키고 있는 구슬주렴 너머를 향했다. 주름살로 뒤덮여 축 늘어진 눈두덩이 억지로 밀어 올려지는 것을 보고 서현이 말했다.
“이것조차 보이지 않는 주제에 누구를 보좌하러 나선단 말인가. ···하기는. 실지 하는 일은 염탐질이니 그대에게는 나만 보이면 될 일이지.”
“상국! 말씀이 심하십니다!”
그간 무슨 말을 해도 표정에 변화가 없던 서현이 그 순간 얼굴을 확 구기며 폭언을 내뱉었다.
“닥치게, 박사. 자네 같은 작자와 말다툼할 시간 따위 없어.”
“상국!” 일박사가 구슬주렴을 걷고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서현을 황급히 붙잡았다. “어디를 가십니까!”
“내가 무엇을 하러 천추전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나.”
일박사 학승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시선이 주렴 안을 훑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익숙한 황제의 침방 안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침방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황제를 배알하러 간다고? 바짝 마른 박사의 볼이 꿈틀했다. 일그러진 얼굴로 그가 결론을 내렸다. 핑계! 자신을 어떻게든 떨어뜨려내려는 구차한 핑계였다. 일박사 학승이 다시 서현의 팔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침방 안에는 황상은커녕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아무 것도 없다···?”
“그렇습니다. 변명하지 마십시오. 못 가십니다, 상,”
국, 하고 말을 끝맺기 전 일박사 학승의 가슴팍에서 팍 피가 튀었다. 학승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방금 무슨 일이···. 둔한 머리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사이 흰 주의가 붉게 물들고 크게 벌어진 상처에서 펑펑 피가 솟았다. 뚝. 비단 주의가 더 물기를 머금을 수 없을 정도로 젖자 갈 데가 없어진 피가 마룻바닥으로 떨어졌다.
“상, 국.”
쿵.
겨우 서현을 부른 뒤에, 일박사 학승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두 눈을 부릅뜬 채 고꾸라진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신을 잃었을 뿐이다. 하지만 얼마 동안이나 견딜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끊어질 듯 가냘픈 숨을 쉬는 학승을 무심한 시선으로 한 번 본 뒤 서현은 주렴을 걷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주렴 안쪽으로 들어선 서현은 천천히 큰 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술이 비틀렸다.
“아무 것도 없다?”
조금 전 일박사 학승이 했었던 말을 조용히 읊으며 서현은 머리를 들었다.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옳은 이야기다. 그러나 동시에 이곳에는 모든 것들이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실내에서는 불 리가 없는 종류의 바람이. 머리를 든 서현의 눈에 말간 쪽빛이 어리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물방울들이 서로 엉겨 만들어진 얼음 결정의 덩어리는 드넓은 도폭(圖幅) 위에 화려한 수를 놓고 있었다. 흡사 물안개와 같은 구름들은 과연 어디까지 퍼져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날카로운 바람이 불 때마다 피어오른 구름들 사이로 깨질 듯한 푸른빛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지금도, 다시 한 번. 그러나 다시 보자 방금 전 태산처럼 높은 적란운을 가른 것은 바람이 아니었다.
퍼덕.
거대한 날개가 홰를 쳤다. -새.
주렴 너머에 있는 것은 익숙한 황제의 침방이 아니라 ‘하늘’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