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남자는 마치 한겨울밤의 유령처럼 그의 앞에 나타났다. 늘 그렇듯 소리도 없이 스산하게 나타난 남자가, 불쑥 그의 등에 대고 물었다.
“무슨 심산이십니까?”
저는 도통 어르신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이 과연 과장이 아닌지, 그렇게 덧붙이는 말이 혼란과 경계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남자가 던진 것은 맥락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물음이었건만, 정작 질문을 받은 당사자에게서는 의아해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서엽이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건 얼굴 그대로 태연히 남자 쪽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입술에 건 웃음이 인사를 대신하기라도 하듯이 조금 짙어졌다. 자네 왔는가, 하는 말로 남자를 맞은 후에 서엽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근간에 질수(疾首)할만한 일이 많았었지. 창혜각 내의 공론(公論)은 어떠한가?”
“모두들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물음을 못 들은 것처럼 행동하는 서엽을 보고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일단 순순히 대꾸했다. “혹자는 헌의공께서 아드님이신 체제공에 대한 모든 믿음과 의리를 배반하고 돌아섰다 분해하기도 하고, 또 혹자는 헌의공께서 따로 생각이 있으실 것이라 하기도 하고, 이도 저도 아닌 이들은 숨을 죽이고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고 있지요. 허나 걔 중 어느 편도 의견을 한데 모으지 못하고 홀로 갈팡질팡하고 있는 고로, 이렇다 할 만한 행동력을 갖춘 조직은 형성되지 않고 있는 형편입니다.”
“창혜각 안에서 내 평판이 바닥을 치겠군.”
남자의 말을 듣고도 서엽이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여유롭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며,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평상시 같으면 서엽의 너스레웃음을 똑같은 너스레로 받으며 시시덕거렸을 변죽 좋은 사내가 표정이 굳은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서엽도 그만 웃음을 멈추고 남자 쪽을 빤히 응시하였다. 그러다 서엽이 툭 던지듯 물었다.
“자네는 어떤가.”
“무슨?”
“못 알아 듣나. 자네는 어떤 편인가 묻고 있지 않은가. 아비라는 작자가 계자의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성을 내는 편인가, 아니면 다른 심산이 있으려니 생각하는 축인가, 그것도 아니면 굴 안의 비서(飛鼠: 박쥐)처럼 숨어서 어느 편에 붙어야 이득일까 재단해 보고 있는 축인가?”
그 노골적인 물음에 남자는 일순 침묵했지만 그것도 잠시, 곧 닫았던 입을 열어 서엽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 하문에 대한 답은 이미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
“이미 했었다?” 서엽이 벌써 까슬까슬해지기 시작한 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묘한 말이로고. 내가 자네에게 하문한 것이 방금 전의 일이건만, 어찌 답이 물음보다 앞설 수 있단 말인가?”
“감히 어르신을 면알하고도 마땅한 예를 표하는 대신 소인이 저질렀었던 그 포만무례한 짓거리를 떠올려 보소서.”
그것이던가. 그제야 서엽이 알겠다는 듯 나직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러나 아아, 하고 혀 위로 굴리는 신음이 지금 막 해답을 찾은 이의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느긋하고도 느릿하였다.
알고 있었군, 퍼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확신에 남자의 얼굴이 저절로 구겨졌다. 늘 그렇듯 저 자가 굴리는 곡륜(?輪)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려도 결국은 그의 손바닥 안-.
“무슨 속셈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던 그 말 말인가.”
제 손바닥 안을 들여다보듯, 자신의 머릿속도 들여다보고 있는 주제에 짐짓 아리송한 척 묻는 모습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으응?’하며 답을 재촉하는 소리에, 남자는 공손히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어르신.”
“불안하신가.”
“못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만, 숨김이나 거짓 없이 털어 놓자면 뜻밖의 일로 마음이 오마조마한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천객들은 몰라도 자네 또한 그러하다니 내가 어지간히도 신뢰감을 주지 못한 모양일세.”
그 가식적인 한탄에 남자는 거의 의무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꾸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소인이 새가슴인 탓이지요.’ 그 대꾸가 마치 혓바닥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지나치게 매끄러워서 남자는 무심코 조소했다. 이래서야, 저 어르신에게 위식(僞飾)을 떤다 말할 자격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남자가 곧바로 어조를 달리하여 서엽에게 말했다.
“소인의 못난 머리로는 어르신께서 어떤 고견을 가지고 계신지 짐작도 할 수 없음입니다. 그러니 부디 어르신의 계획을 소인에게도 귀띔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스스로 들어도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 얼굴에도 비굴한 아부의 웃음이 얼룩덜룩 지저분하게 들러붙어 있을 것이 뻔했다. 부디, 어르신. 거듭해서 간구하자 서엽이 보란 듯 남자 쪽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서서히 입술을 귀께로 끌어 올렸다. 그러다 그가 불쑥 물음을 던졌다.
“내가 진실로 황상을 제좌에 올릴 셈이라 하면, 자네는 어찌할 텐가?”
흡사 기르는 개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하여, 먹음직스러운 뼈다귀를 눈앞에서 흔들면서 약 올리는 듯한 태도였다.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는 얼굴을 구기는 대신 비굴스레 느껴질 정도로 저자세를 취하면서 능숙하게 서엽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렇다 하여도 소인이 무엇을 어찌하겠습니까? 그저 어르신의 뒤를 좇을 뿐이지요.”
“참으로 기특한 말이로고.” 침에 베고 느긋하게 기대어 앉은 서엽이 팔을 받친 거북문양 팔받침을 간헐적으로 두드리며 중얼거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불현듯 빙그레 웃었다. “내 친아들이란 놈도 다짜고짜 찾아와서 협박질을 하고 갔건만 말이다.”
“체제공에게는 체제공 나름의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현이 녀석의 변호를 해 줄 일이 생기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일세. 그러하나 안 될 일이야.”
그 말을 듣고 저 어른 앞에서 체제공을 감싸는 듯한 말을 한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었나 남자가 후회하는데, 그 말이 아니었다.
“현이 그 녀석에게는 명분이 없어.”
“입 밖에 내어서 제좌를 탐낼 명분···, 말입니까.”
“그래.” 그리 탐이 났으면 주둥아리는 꾹 걸어 잠그고 물밑에서 은밀히 일을 벌일 것이지 무어 자랑이라고 동네방네···. 팔짱을 낀 채로 서엽이 끌끌끌 혀를 찼다. “일황자가 와룡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판국에 제 놈에게 무슨 객관적인 명분이 있다고.”
“그 건 말입니다만···.”
조심스럽게 끼어드는 말에 서엽이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황상이 정말로 와룡이 맞습니까?”
서엽이 바로 대꾸하는 대신 빙그레 웃었다.
“보지 않았나. 같은 용인이 아니라면 용인의 힘을 깰 수는 없네.”
“물론 보았습니다. 그렇지마는···.” 그렇지마는,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가 바로 커졌다. “용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이니 그에 버금가는 괴물이 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어르신께서 직접 용에게는 시익(翅翼)이 없다 확인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이후로 미력하나마 소인 나름대로 알아보았습니다. 대대로 예의 용황제로 응신(應身)한 적이 있던 청황룡(靑黃龍)에게는 시익이 없었습니다.”
“이런, 이런.”
남자가 긴 말을 하는 내내 대꾸 하나 없이 귀만 기울이고 있던 서엽이 어느 순간 혀를 끌끌거리며 내뱉었다. 어째서 저리 못마땅한 표정을 짓나 싶어 남자가 일단 입을 다무는데, 그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서엽이 냉큼 타박을 놓았다.
“내가 언제 그리 확답했던가?”
“예?”
“또한, 내가 언제 황상의 등에 있는 압흔이 시익의 흔적이라 하였던가?”
“···어르신!”
기가 막힌 남자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서엽은 그 항의를 제 무릎을 한 번 강하게 치는 것으로 끊어놓고는 바로 못을 박았다.
“일황자는 용이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으로 확인된 사실이야. 무론(毋論), 자네의 눈을 통해서도 말일세. 부정하지 말게, 자네가 본 것이 사실이니. ···아니면, 굳이 부정해야만 할 이유라도 있는가?”
말 마지막에 따라붙은 날카로운 추궁에 남자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일황자가 용이면 안 될 심적인 이유라도 있는가?”
하지만 곧 이어진 물음에는, 남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 굳었던 표정을 풀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황상께서 더 이상 힘없는 허수아비 황제가 아니라 용황제로 굳건히 서게 되시면 제 처지가 좀 곤란해진다, 그뿐이지요.” 그 말끝에 교활한 웃음이 살며시 따라붙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어르신께서도 황상과 소인이 그리 감정이 좋지 못한 사이라는 것을요. 그 때문에 생억지를 부려 보았습니다. 언짢으셨다면 그만 두겠습니다.”
서엽은 아무런 대꾸 없이 등과 벽 사이에 괸 침에 더더욱 힘을 주어 깊숙이 몸을 기댔다. 방에 불을 밝혀 놓았어도 잔뜩 구름이 낀 날씨 때문인지 방 안은 어둑어둑했다. 유난히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붉은 불빛과 스산한 어둠 사이에 잠긴 서엽은 그대로 내버려두면 벽을 지나 완전히 지하세계로 꺼져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좋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침묵에 남자가 차라리 성을 내는 것이 낫겠노라고 생각할 무렵, 서엽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서 서엽이 남자를 향해 손을 까닥거렸다.
“조금 더 가까이 오시게.”
그 손짓을 따라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서엽이 씩 웃으면서 겨우 들릴만한 크기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리 답답하게 우답(愚答)만 해대면 무심코 역정을 낼 만도 하건만 자네도 어지간하구먼. 자네에게 내 비위를 맞춰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기는 하네만.” 자네 정말 개라도 되는가? 서엽이 심술궂게 웃으며 남자를 조롱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는 박제해 놓기라도 한 것 같은 웃는 얼굴로 남자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바로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서엽이 말했다. “개라.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아.”
“소인도 그리 생각합니다.” 남자가 조금도 마음 상한 기색 없이 서엽의 말에 동의했다. 서엽이 쳐다보자, 남자는 입꼬리를 귀 쪽으로 크게 끌어당기며 과장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개도 나쁘지 않지요.”
“기분 나쁘지 않은가?”
“아니요. 개새끼면 어떻고 또 소새끼면 어떻답니까. 어떤 식으로든,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지요.”
“묘하단 말이야.”
그 때 불쑥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와서 남자는 서엽 쪽을 곁눈질했다. 서엽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평소처럼 웃는 얼굴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살펴보자 웃기는커녕 오히려 찡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남자의 눈길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서엽이 씹어 내뱉듯 덧붙였다.
“이전에도 들은 답이지만, 들을 때마다 놀라곤 한다네.”
“···?”
서엽은 그 뒤에도 무어라고 말하는 듯 싶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하는 거지. 남자가 무심결에 미간을 구기며 상반신을 조금 내미는데, 다음 순간 서엽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싹 표정을 바꾸고 그 낯빛만큼이나 말끔한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아.’
“나 또한 자네 견해에 동감이네. 고깃덩이를 주지 않는다고 주인의 손을 무는 개만 아니라면, 차라리 개가 낫지. 더구나 자네는 참을성이 강한 개고, 나는 자네가 물고 싶어 하는 뼈다귀를 유일하게 가진 이이니 서로 걱정할 것이 무어 있겠나? 그러니 특별히 말해 줌세.”
하고 말하며 유난히 부산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서엽에게 남자는 의혹을 느꼈지만, 곧 이어진 말에 그 의혹은 바람 앞의 연기처럼 싹 사라져 버렸다.
“희 그 아이든 황제든 간에 나는 아무런들 상관이 없어.”
“!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허.” 서엽이 웃으면서 핀잔하는 소리를 냈다. “자네처럼 머리가 기민한 사람이 왜 멍텅구리 노릇을 하고 그래. 다 알아 듣지 않았나.”
“···설마.”
제 아무리 간이 큰 남자라도, 다음 말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까마득히 높으신 분들을 무례한 표현으로 모욕하는데 새삼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는 아니었다. 다만, 다만 이 가정이 정말이라고 하면. 남자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서엽을 쳐다보았다.
“제좌에 오르는 것이, 아니, 용이 되는 것이 수상이든 황상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겁니까?”
그 물음이 떨어지자 서엽이 입꼬리 끝을 비틀며 웃었다. 긍정. 분명 긍정의 미소였다.
“정확히는, 용이 되는 것이 수상도 황상도 아닌 제삼자일지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남자의 시선 끝에서 누군가의 비틀어진 웃음이 일렁거렸다. 서엽. 저 사내에게는.
“도대체 왜?” 남자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지금껏 이런 일들을 하신 겁니까···!”
“중요한가?”
물음이 또 다른 물음이 되어 돌아왔다. 말문이 막혀 눈만 크게 뜨고 있는 남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서엽이 말을 이었다.
“그 까닭이 무엇이든 간에 자네에게 무어가 중요한가. 자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 뿐 아니었나.” 거기까지 말한 서엽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여전히 시선은 남자의 얼굴에 꽂힌 채였다. 그 시선이 마치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다. 서엽이 말을 이었다. “내가, 잘못 본 겐가.”
남자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기로(岐路)다. 대답에 따라 서엽의 마음이, 결과가 바뀔 것이다.
“물론입니다.”
망설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엽의 말이 옳았다. 그의 진의가 무엇이든, 그가 벌이는 짓이 무엇이든, 또 그가 하는 의미 모를 행동이 무엇을 위한 것이든 그것이 자신에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직,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콱 주먹을 움켜쥐었다. 중요한 것은, 아니, 자신에게 있어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단 하나 뿐.
“어르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소인이 분에 넘치는 것을 물었습니다.”
그 대답에 서엽은 흡족한 듯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역시나.”
그가 그렇게 내뱉은 순간, 남자는 조금 전 자신이 미처 듣지 못했던 서엽의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어찌 저리도 나와 닮았을꼬.
“······.”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였다.
*
긴 대화가 끊긴 것은 밖이 난데없이 소란스러워진 탓이었다. 과묵한 것을 지나쳐 때때로 벙어리가 아닌가 의심마저 드는 서엽의 문간채 가솔들이 쟁란(諍亂)을 떤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우르르 사람의 발소리라기보다는 오히려 말발굽 소리와 흡사한 소리를 내며 몰려온 누군가들이 무슨 까닭인지 깊숙한 안집까지 들리도록 언성을 높여댄 탓이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으로 보아하니 그 치들이 서엽의 가솔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안집까지 쳐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어르신,” 바깥의 동향에 귀를 기울이던 남자가 어느 순간 운을 뗐다. 어느새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무리 없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져 있었다. ‘헌의공 어른 계십니까!’하며 다짜고짜 외쳐 부르는 소리에서부터, ‘헌의공 어른은 어디 계시는가?’하고 아무 가솔이나 붙들고 묻는 소리, 거기에 당연한 절차로 앞을 가로막는 애꿎은 가솔에게 내가 누구인줄 알고 감히 앞을 가로 막느냐 성을 내는 소리까지. 듣자하니 참으로 가관이었다. 남자는 내심 혀를 차며 하던 말을 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소인은 이만 물러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여기 있게.”
자신과 헌의공 서엽이 함께 있는 것이 타인에게 보여서 이득이 될 만한 일은 아닌지라 남자가 자진하여 한 말에, 뜻밖에도 서엽은 고개를 저으며 남자에게 계속 자리에 앉아 있으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어르신?, 의외의 반응에 남자가 의아해하며 서엽 쪽을 보자 서엽은 마침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었다. 서엽이 닫혀 있는 사분합문에게 시선을 꽂은 채 담담한 투로 덧붙였다.
“내 금방 돌아옴세.”
그러나 그 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헌의공 어르신!”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안집 전정을 점령하고 악을 써대던 이들이 순한 면양으로 돌변하여 넙죽 엎드렸다. ‘무슨 일로 이리들 소란인 게야.’, 진땀을 빼며 그 치들을 말리고 있던 가솔들만 어리벙벙 말도 못하고 서 있는 가운데 서엽이 바닥에 엎드린 자들을 빙 한 번 둘러보고는 물었다. 엎드린 사람들의 등짝을 내려다보는 차할빛(: 다갈색) 눈에 한심스러워 하는 빛이 역력했다. 저자에서 싸움이 붙은 아낙네들처럼 목청껏 악을 써 대서 도대체 누군가 했더니 모두가 궁부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은 고관들이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 그 치들 중 선두에 엎드려 있던 이가 번쩍 고개를 쳐들더니 간곡히 외쳤다.
“헌의공 어르신, 어서 입궁하여 주십시오!”
“입궁? 퇴역한 지가 오래인 내가 무슨 까닭으로?” 하고 반사적으로 내뱉은 서엽의 시선이 서산(西山)에 가 꽂혔다. 이미 서산 오목한 곳까지 다홍빛으로 불타는 해가 뉘엿거리고 있었다. “더구나 이런 만시에.”
“허나 어르신, 지금은 한시가 급하나이다!”
“돌아들 가시게.”
서엽의 목소리가 서늘해지자 사람들의 어깨가 발작하듯이 움츠려들었다. 서엽이 계속해서 꾸짖었다.
“이 무슨 무례인가! 조정의 중신이란 작자들이 어찌 기본적인 예조차 모르는가! 자네들의 이런 행동을 내 나를 만만히 보여 저지른 일이라 보아도 좋은가?”
“아, 아니옵니다, 어르신!” 단박에 얼굴이 흙빛이 된 자들이 거의 울부짖는 듯한 소리로 변명했다. 그 소리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늙은 염소와 같았다. “다, 다만 소인들은,”
“다만 뭔가?”
“황상께 큰 일이 나 어르신께서 말려 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서엽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황상께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예? 예!” 내내 시큰둥하던 서엽이 관심을 보이자, 이때다 싶었던지 걔 중 하나가 번쩍 고개를 치켜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디 도움을 주시옵소서, 어르신! 이대로는 역대 열성(列聖)께오서 비분강개(悲憤慷慨)하시어 능묘를 떨치고 일어나실만한 사달이 일어나고 말 것이옵니다!”
“사달이라니?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보라.”
“황상께오서, 황상께오서,” 거기까지 말한 뒤 잠시 말이 끊긴 것은 별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말을 꺼내다 보니 새삼스레 기가 막히고 당혹감이 치밀어 올라 자신도 모르게 말을 끊어버린 것에 불과했다. 그런 이유로, 말하던 사내가 헌의공을 향해 무릎걸음으로 다가서면서 고자질이라도 하는 듯한 투로 말하였다. “폐하께옵서 청의관 수객을 정후로 맞겠다 하시었습니다!”
“무어라?”
당혹한 투로 서엽이 툭 내뱉었다. 그 어조에 한층 더 고무된 사내가 한층 더 목소리를 높여 호소하였다.
“그렇지요!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닙니까? 사계(四界)의 기틀이 마련된 고초(古初)부터 혼과 용님의 뜻을 고스란히 지켜 온 우리 예의 군부(君婦)가, 그 지극히 귀한 곤위(坤位)를 감히 뿌리도 알 수 없는 수객 따위가 언감생심 탐내려 들다니요, 아니 됩니다, 아니 될 말이지요!”
그 격앙된 호소에 그 사내를 둘러싼 이들 모두가 머리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표했다. 그것에 신이 난 사내가 결국은 두 주먹까지 불끈 쥔 자세로 서엽에게 바싹 다가서며 도움을 청했다.
“허나 황상의 결심이 너무나 굳건하시어 저희로서는 더 이상 어찌해야 할지 길을 찾을 수가 없나이다. 그러하니 헌의공 어르신, 부디 바로 입궐하시어 황상을 말려주,”
“정후라니.”
그러나 한참 이어지는 사내의 말을, 서엽의 혼잣말이 동강내놓았다. 당혹한 사내가 예에? 하고 당황스레 반문하였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예, 황상께오서 청의관 수객을 정후로 맞으시겠다···.’하며 새로이 설명을 시작하였으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당혹과 수치감으로 얼굴이 온통 얼룩진 채로 사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서엽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서엽이 턱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며 툭 중얼거렸다.
“청의관 수객을 정후로 맞다니, 망인(亡人)이나 다름없는 이를 어찌 후비로 맞는다는 말이야. 설사 신의(神醫)가 인간으로 분하여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다 해도 일평생 반병신으로 살아야 할 자를.”
“저, 어르신···.”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서엽에게 누군가가 해답을 일러 주었다. “황상께오서 말씀하시기를, 청의관 수객을 용인으로 봉(封)하시어 정후로 맞겠다 하시었나이다.”
그 말에 서엽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었다. 두 눈을 홉뜬 그가, 방금 전 말한 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추궁하였다.
“무어라 했나. 청의관 수객을 용인으로 봉하겠다 하시었다고? 그 말씀은···.”
그 다음 들린 소리에 모든 사람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어떤 상황에서든 흠 잡을 곳 없이 원숙한 태도와 여유를 잃지 않았던 헌의공 서엽에게서 북 사납게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평상시보다 낯빛이 흐리기는 하나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있는 서엽의 얼굴을 보고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역시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서엽이 중얼거렸다.
“가변례를 천제보다도 먼지 치르시겠다···.” 하고 중얼거리던 서엽이 두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그것은 안 될 말이지. 그것은 아니 될 말이야.”
혼잣말을 끝난 그가 닫혀 있는 문살 위를 손등으로 한 번 세게 두드린 다음, 머리만 돌려 전정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입궁하겠네.”
전정에서 말린 대두(大豆)마냥 엎드린 채 널려 있는 고관들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귀도 입고 없는 것처럼 조용히 전정 한 편에 서 있는 가솔들에게 하는 말인지, 그것도 아니면 방 안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소리였다. 그러나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관들은 반색을 하며 몸을 일으켰고, 마치 석상을 가장하고 서 있는 듯하던 가솔들은 제 주인이 입궁할 채비를 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서엽은 선명한 주홍빛으로 물든 석양이 어려 있는 귀갑문(龜甲文) 문살을 한 번 더 돌아보고는, 섬돌에 놓인 건혜(乾鞋)를 신고 전정으로 내려갔다. 서엽이 근처의 궁관 하나에게 수상부로 가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이르라 명령하는 것이 들렸다. 그러는 사이 귀갑문 새하얀 장지에 물려 있던 붉은 석양은 곧 종이를 모두 태운 촛불처럼 사르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그러나 헌의공 서엽이 궁관들을 날개처럼 거느리고 천추전 앞에 다다랐을 때, 이미 천추전입구는 굳게 폐쇄된 뒤였다. 천추전에서 일하는 모든 환관과 여관들을 내쫓아 버린 듯, 천추천 앞은 마루로 오르는 보석(步石)이 보이지도 않을 만치 수많은 사람들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다.
“아이고, 헌의공 어르신!”
갑작스레 인파가 몰려오는 소리에 이건 또 뭔가 싶어 찌푸린 얼굴로 돌아봤다가 태감 봉승이 바로 반색을 하고 서엽이 있는 곳으로 달려와 우는 소리를 했다.
“큰일이 났사옵니다, 큰일이 났사옵니다, 어르신!”
“대충은 들었네.” 하고 대꾸한 서엽이 무심코 주변을 돌아보았다가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연재 상궁은 안에 있는가?”
그 말에 태감 봉승의 얼굴이 재라도 바른 것처럼 어두침침해졌다.
“연재 상궁은 천자를 능멸한 죄를 지어 옥에 갇혀있나이다.”
그 한 마디로 서엽은 대략의 상황을 알아차렸다. 끌끌 큰 소리로 혀를 차면서 서엽은 시선을 돌렸다. 지독히도 눈치가 없더니, 언젠가는 그리 될 줄 알았다. 눈치는 없으면서 입은 바람처럼 가벼운 연재 화연과는 달리, 주둥이가 가벼운 것은 그녀와 똑 닮았어도 적어도 눈치 하나만은 비상하게 빠른 태감 봉승이 서엽이 어디를 보는지를 곧바로 깨닫고 벽제(?除) 소리를 치는 전배기수(前陪旗手) 역을 자처하고 나섰다.
“물렀거라, 물러서. 헌의공 어르신 앞을 가로막고 있으면 어쩌자는 말이냐. 어허! 당장 물러서지 못할까!”
낭창낭창 몸매가 버들가지 같은 나인 아이들은 자기 발로 비킬 틈도 없이 훽 제 손으로 밀어 치워버리고, 제 팔 힘으로는 밀어도 밀릴 것 같지 않은 젊은 환관들은 궁둥이를 뻥 차서 길을 튼 봉승이 짐짓 엄중한 표정으로 꾸미고 서엽을 돌아보았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어르신.’
“황상께서는 이화시강원 좌사와 우사만을 거느리시고 천추전으로 행차하셨나이다.”
“그 이들까지 대동하시고 가시었단 말인가? 단단히 결심을 굳히신 것이 분명하구만.”
“그러하옵니다. 좌사와 우사 또한 이 같은 상황은 처음이었던지라 몹시 난색을 표하였습니다만 황상께오서 막무가내로···,”
이미 지나간 일은 지금 들어 어찌하겠는가. 봉승의 고자질을 썩둑 자른 서엽이 물었다.
“상국은?”
“예?”
“상국께서는 아직 아니 오셨는가. 내 분명 이리로 오라 사람을 보내 일렀거늘.”
“저, 어르신, 상국께서는,”
뜻밖으로 거론된 인물의 이름에 잠시 봉승이 말을 멈추더니 눈깔사탕마냥 부리부리한 눈알이 그의 머릿속만큼이나 팽글팽글 돌아갔다. 이윽고 근래 서엽이 대대적으로 황제를 지지하고 나선 일로 그와 서현의 사이가 퍽 편치 못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허나 마음이 상했다고 하기에는 방금 상국을 언급하시던 말투가 퍽 정중하였는데, 아니, 실은 비꼬는 투였던 것인가?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근간(近間) 저 부자의 사적인 회동에 대해 아는 바가 전무하니 비위를 맞출 말이 생각날 리가 없다. 그래서 결국 봉승은 간실간실 감언(甘言)을 하여 서엽에게 점수를 따려는 것은 포기하고 말끝을 흐렸다.
“송구한 일이나 상국께서는 아직···.”
“에잉.”
못마땅한 듯 서엽이 끌끌 혀를 찼다.
“서두르라 내 분명히 일렀거늘.”
“어르신, 한데 무슨 까닭으로 상국을 호출하시었습니까?”
통 이유를 알 수 없어 태감 봉승이 없는 용기를 짜내어 여쭙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엽이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서엽이 천추전 전정에 모인 이들을 빙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이런 딱한 사람들을 다 보았나. 애초에 이런 일이 났으면 나보다 먼저 상국을 불러 왔어야지.”
“허나 어르신, 어르신도 아시다시피 상국께서 황상의 일로 쉽사리 입궁을 하시겠나이까. 크게 경이나 치지 않으면 그만이지요···.”
“하나둘쯤 죽어 나자빠지는 한이 있어도 데려 왔었어야지.”
서엽이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였다. 봉승이 놀란 얼굴로 서엽을 올려다보았다. 사람 목숨을 종이처럼 가볍게 여기는 말 때문이 아니라, 서엽이 답지 않은 고집을 부린다 싶어서였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서현이 아닌 서엽에게 도움을 청하자던 고관들의 결정은 옳았다. 봉승이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근래 정색(政色)을 바꾸어 황제를 지지하는 서엽과, 그 일로 더더욱 황제와 사이가 불편해진 서현.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는 서엽을 부르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하지만 지금 서엽은 그런 봉승과 궁관들이 천하에 다시없는 멍텅구리나 되는 것처럼 타박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이어진 서엽의 중얼거림에 곧바로 풀렸다.
“벌써 고치가 만들어졌는가···.”
“고치요!”
“그래, 고치일세.” 하고 말한 서엽이 담갈색으로 샌 눈썹을 밀어 올렸다.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이 뻔한 얼굴이었다. “그리 놀라는 것을 보니 억지로 천추전에 밀고 들어간 놈은 없는 모양이로구먼.”
“예?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천자께서 직접 금(禁)하신 것을 어기고 침전에 침입할 놈이 있다면 그놈이야 말로 다름 아닌 역도의 무리이지요!”
황제가 와룡임이 밝혀진 판국에 그런 무엄한 짓거리를 벌일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펄쩍 뛸 듯이 놀라 대꾸했다가 봉승이 곧바로 슬금 어깨를 구부리며 생각을 갈무리했다, ‘무론 예전 같으면 그런 짓을 할 놈이 셀 손가락이 모자랄 만치 있었겠지마는···.’
“잘들 생각했네.” 하고 서엽이 칭찬하며 천추천 높은 용마루 아래 처마와 서까래 따위를 죽 눈으로 훑었다. “만일 딴 마음을 품고 침범하려 든 놈이 있었다면 당장에 산 채로 능지(陵遲)를 당하였을 것이야.”
“그,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침 ‘또한 그 손가락 첫머리는 내가 차지하고 있겠지.’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태감 봉승이 서엽의 말에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말이 고함이었지 사실 비명이나 다름없는 소리였다.
“고, 고, 고치란 게 결계 같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몸이 산산조각 난다니요?”
“하기는, 자네 같은 천인이 진짜 용황제의 힘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을 턱이 없겠구먼.”
듣는 사람의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말을 사람 좋은 말투로 해치운 서엽이, 봉승이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깨닫기도 전에 잔돌을 하나 집어 천추전으로 던졌다.
비사치기라도 하듯 휙 날아간 세석(細石)은 그러나 천추전에 닿지도 못하고 보이지 않는 그물에 걸린 것처럼 허공에서 멈춰야만 했다. 그러더니 쩌저적, 겨우 손톱 두 개를 합친 것 만하던 세석이 순식간에 사람 머리통만한 크기의 얼음덩이로 분하더니, 다음 순간 요란스러운 굉음을 내며 산산조각 났다. 꺄악! 천추전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난데없는 봉변에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피했지만, 화살촉이나 다름없이 날카로운 얼음조각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고, 나 어린 나인 몇몇은 아픔을 참지 못해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서엽의 얼굴에는 별달리 후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다만, 일순 얼음조각이 덮쳤던 자리를 보기 위하여 돌렸던 시선을 다시 봉승에게로 돌리며 ‘이제 알아듣겠나.’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니 나를 데려와 봐야 별다른 수가 없다는 말을 했었던 걸세.”
“그, 그러하나 어르신께서도···, 아니, 태학궁의 박사들을···.”
“소용없네.” 허둥거리며 심부름할 나인을 찾는 봉승을 서엽이 만류했다. “농언이겠지. 설마하니 자네 진심으로 인간 술사 따위가 용인의 술을 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겐가?”
봉승은 할 말을 잃었다. 서엽은 그와는 더 이상 나눌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다른 궁관들에게 물었다.
“홍휘문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느냐?”
다시금 서현을 찾는 말이었다. 그 말에, 궁관들이 낯빛이 어두워져 시선을 내리까는데 그 때 마침 천추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화급히 뛰어오며 소리쳤다.
“체제공께서 오십니다!”
*
“서둘러 달라 이 아비가 그리 일렀거늘.”
하는 서엽의 꾸지람을 듣고도 서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막 천추문을 지나쳐 들어오던 서현이 서엽과 서로 얼굴만 알아볼 수 있는 위치에서 멈추어 섰다. 천천히 느려지는 그의 다리가 인간의 다리가 아니라 마치 고장 난 수레바퀴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추전을 살피고 있던 탓에 서엽과 서현 두 사람은 물론이요, 서엽의 심복지인(心腹之人)들과 서현이 거느리고 온 천객들은 마치 전쟁장에서 마주친 두 무리의 선봉대(先鋒隊)처럼 마주하고 있었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 의례적으로 밝힌 붉은 불이 횃대며 꽃등 여기저기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발간빛이 마주보고 있는 두 무리의 얼굴에 어려 괜스레 으스스한 분위기가 풍겼지만, 정작 그들의 표정은 심상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젊은 사내가 대부분인 천객들은 불안하거나 흥분한 기색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한 듯 볼이 조금 불그스레해보였지만, 서엽의 심복지인들로 가면 그네들은 거의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을 만치 표정이 없었고···,
“그러하여도 일단 입궁하였으니 되었다.”
한 동안 말도 없이 서현과 대치하듯 하고 있던 서엽이 불현듯 그렇게 말하면서 뒤돌아섰다. 그런 그의 얼굴은, 맙소사,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마저 띠고 있었다.
모두들 이번에야말로 서현이 성을 낼 것이라 생각했다. 손에 든 것을 거칠게 내팽개치고, 땅을 사납게 걷어차며 광대에게 모욕당한 왕처럼 벽력같은 고함을 지를 것이다,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던가! 제 아무리 냉정한 수상이라도 이번만큼은!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앉았다. 서현보다 뒤에 사열해 있는 탓에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계속하여 그의 사위는 짙은 어둠과 꼭 닮은 침묵에 묻혀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 침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 싸늘한 침묵이 이어질수록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발을 구르는 것은 오히려 서현과 서엽 부자를 둘러싸고 있는 제삼자들이었다. 그야말로 폭풍 전야. 그 때 용케도···, 하는 숨죽인 수군거림이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부주의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조심성 없는 행동에 대한 경멸과는 별개로 그렇게 내뱉고 만 심경에 대해서는 백 번 동감이었다.
내내 아무런 말이 없던 서현이 입을 연 것은 그 때였다.
“무슨.”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서 마치 쇠못으로 유리판을 긁는 것처럼 거친 쇳소리가 났다. “무슨 면목으로 소자를 이까지 부르시었습니까.”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생각하였는데 용케 왔구나.”
그 능청스런 대꾸에 서현이 잠시 입을 닫고 서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얇은 피막이라도 한 겹 씌워 놓은 듯 아무런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으나, 서엽은 흡사 그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들춰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여유롭게 웃었다. 굳게 다물려 있던 서현의 입술이 발작하듯 움직였다.
“협잡(挾雜)질이라니. 그것이 모든 이들이 경봉(敬奉)해 마지않으시는 분께서 하실만한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협잡집? 현이 네가 오해를 한 것 같구나.”
“황상이 당장 붕어(崩御)하게 생겼다니, 그것이 협잡질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제야 현재 불편한 관계에 있는 부친이 부른다는 이유 하나로 이 늦은 시간에 황궁으로 달려 올 이유가 전혀 없는 서현이 이 자리에 나타난 연유를 알게 된 사람들이 경악하여 숨을 삼켰다. 그러나 당장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는 일을 저지른 서엽의 태도는 여전히 태연하다 못해 능청스러웠다.
“협잡질이 아니래도 그러는구나.”
그러나저러나, 며츨(: 며칠) 못 보는 사이에 입이 많이 걸어졌어. 느긋하게 덧붙이는 서엽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서현이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보이지 않느냐?”
그러나 서엽 쪽이 한 발 더 빨랐다. 말할 틈을 빼앗겨 아직도 입술을 조금 벌리고 있는 채인 서현에게, 서엽이 눈짓으로 천추전을 가리켜 보였다. 벌려져 있던 서현의 입술이 스르륵 다물리는가 싶더니, 곧 상아 같은 이가 붉은 물이 찬 비단 주머니 같은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고치.”
“그래, 용인의 ‘고치’다.” 서엽이 완전히 천추전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이 커다란 잉어의 비늘처럼 꼬리를 물고 깔린 금빛 기와에 꽂힌다. “황상께서 수객을 대동하고 침방에 드시어 가변례를 행하겠다 하시었다는구나.”
“······!”
흡사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서현의 눈이 커졌다.
“세상 물정 모르는 치들은 근본 모를 떠돌이를 데려다 어찌 곤위(坤位)에 앉힐 수 있느냐 생트집을 잡는다만,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지. 다른 이라면 모를까, 희야, 너만은 이 아비의 말을 이해하리라 믿는다.”
“천제도 치르지 않은 이가 가변례를 치른다···.” 깊은 상념에 잠겨 이제는 서엽의 말조차 거의 듣고 있지 않고 있는 듯 하던 서현이 불현듯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또한 반쪽짜리에 불과한 것이, 어찌 인간을 용인으로 변성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다음 순간, 서현의 얼굴이 귀신처럼 구겨졌다.
“미친놈.”
“!”
“뒤지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서현의 난폭한 발언에 놀란 사람들이 뭐라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눈을 홉뜬 채로 굳었다. 자신에게 매달리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이들을 곁눈으로 보고 서엽은 서현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과시하는 듯한 걸음걸이였다.
서엽이 물었다.
“어찌할 것이냐?”
“···황상께서 어찌되시든 그것은 소자가 알 바가 아닙니다.”
“허나 네가 이대로 물러나 버리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네가 황상의 ‘힘’을 이길 수 없어 천자께서 절벽으로 행보하시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붕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수군거릴 것이다.”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서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날카로워질수록 서엽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의미심장해졌다. 묘한 대비였다.
“그렇게까지 해서 제좌를 얻고 싶으냐?”
“그리하라 가르치신 것은 당신이 아니셨습니까!”
“이상하구나.” 서엽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빙그레 웃는 버릇 때문에 깊이 팬 주름이 다시금 파이며 선량한 웃음을 짓는 모습이, 자신도 아닌 사람의 명줄을 멋대로 논하고 있는 잔혹한 상황과 대비되어 몹시 선뜩하게 느껴졌다. ‘무엇이 말입니까.’, 서엽의 말에 경계하며 서현이 묻자 서엽이 곧바로 대꾸했다. “이 아비는 적어도 네게 제좌를 구걸하라 가르치지는 않았다.”
“···구걸?”
“적법한 천자께서 불의의 사고로 붕하시기만을 숨죽이고 기다렸다가, 떨어지는 황위를 납죽 주위 먹는 것이 구걸이 아니면 무엇이냐?”
명백한 도발이요, 분명한 모욕이었지만 서현은 불같은 화를 터뜨리는 대신 이를 악무는 것을 택했다.
도리어 눈에 보일 정도로 성이 난 것은 서현의 뒤를 지키듯 서 있던 천객들이었다. 이 나라에 연고가 없는 터라 근간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덩달아 서엽에 대한 재평가도 보류하고 있던 천객들이 비로소 이를 갈며 살기 어린 눈으로 서엽을 쏘아보았다. 그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는 서엽의 심복들도 마치 그림자처럼 은밀하게 이동하여 여차하면 천객들을 공격할 수 있는 대형을 만들었다. 잠시 느슨해졌던 긴장감이 다시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그러나 서엽은 피를 마르게 하는 그 긴장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듯이 싱글거리며 물었다. 태평한 것을 지나쳐 눈치가 발바닥처럼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그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날카롭다 못해 공격적이었다.
“어찌할 것이냐, 현아. 이대로 손 놓고 있다 떨어지는 당과를 주워 먹겠느냐? 아니면 황상의 고치를 깨고 네가 출신은 몰라도 용인으로서의 힘만큼은 황상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겠느냐?”
이것은 이 아비가 네게 주는 기회다. 뻔뻔하게 내뱉은 서엽이 더더욱 은근한 말투가 덧붙였다, ‘네가 힘을 보태어 달라 은밀히 찾아와 간구하지 않았더냐. 그 이후로 이 아비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단다.’
“내 딴에는 정도(正道)를 따른다 생각하고 행한 일이었다만, 네 입장에서는 충분히 마음이 상할 만한 일이라 생각되더구나. 해서 네게도 기회를 주기로 했느니라. 다행스럽게도 마침 이런 기회가 마련되기도 하였고.” 그리 말하며 서엽이 서현에게 보란 듯 보이지 않는 ‘힘’으로 꽁꽁 옭매여 있는 천추전을 가리켜 보였다. “현이 네가 그리 자신이 넘친다면 너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임을 증명해 보이려무나.”
“설마···.”
서엽이 과장되게 가리킨 곳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집요하게 서엽을 노려보고 있던 서현의 주먹이 불현듯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더니, 콱 쥔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설마 처음부터!”
“현아.” 서엽이 설득하듯 말했다.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좋지 않단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사정도 모르는 우매한 작자들의 시선 따위가···,”
“아니다.”
뚝. 뭔가가 끊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현은 말을 멈춘 채 두 눈을 크게 떴다. 부들. 손가락 끝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마치 희열을 이기지 못한 새의 날갯짓 같은 움직임이었다. 서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두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다시 고개를 들고, 서엽에게 추궁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무슨 말이냐?”
“힘이!” 무심코 소리를 질렀다가, 서현이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고 뒤늦게 목소리를 낮췄다. “힘이···, 돌아왔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그제야 아아, 하며 알겠다는 시늉을 해 보인 서엽이 온 얼굴을 이용해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말하지 않았더냐, 증명해 보라고. 그러니 굴레를 느슨히 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현의 표정이 싹 굳었다. 증명. 그의 시선이 천추전을 향했다. 서현의 눈에는 어둠과 적막에 휩싸인 그 아름다운 전각을 꽁꽁 옭아매고 있는 ‘힘’이 보였다. 성에가 낀 듯 반짝반짝 빛나는 그 가늘고 섬세한 실은 마치 주사(蛛絲: 거미줄)처럼 천추각을 온통 구속하고 종종 위협하듯 새파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빛이 터져 나올 때마다 웅, 우웅, 하고 지하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듯한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망자들이 나락에서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저절로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증명’하라고? 저 괴물 같은 고치를 깨뜨려서 내 ‘힘’을? 깨닫지도 못한 사이 이로 아랫입술을 짓누르고 있었다. 입술이 짓이겨지고 뜨거운 피가 한 줄기 흘러 나와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서현의 눈빛이 깊어졌다. 사고와 몸이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좋지 못한 징조였다. 서현은 후회했다. 처음부터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 수많은 일들의 물꼬를 튼 것은, 그 자신조차도 깨닫지 못했었지만,
···서현, 자신이었다.
“······.”
저절로 욕설이 흘러나와 이를 가는 소리에 먹혔다.
서현은 서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시선은 자신에게 내리꽂은 채로 그는 웃고 있다. 서현이 기억하는 한, 그의 아버지는 늘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 좋고 소박한 촌부(村夫) 같은, 그러나 동시에 세계라는 바퀴가 굴러가는 궤도가 자신의 손끝에서 정해진다고 믿는 듯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일그러진 웃음.
서현은 손끝을 조금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 끝에서 칼날 같은 바람이 일었다. 지금이라면-. 순간 머릿속에 스친 생각에 서현은 무심코 독살스러운 기운이 스치는 눈으로 서엽을 노려보았다. 손가락 끝이 금방이라도 서엽의 목줄기를 움켜쥘 듯 움찔움찔 떨렸다. 하지만 서현의 시선이 일순 달라진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도 서엽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가 둔감해서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귀를 닫고 입을 닫고 뒤돌아서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가 말했다. “그리하면 네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청의관 수객을 살리려다 일황자까지 자연히 침몰하게 될 터이니, 두 사람을 죽인 값으로 너는 금관을 얻게 될 것이다.”
“금관···.”
서현이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서엽이 대꾸했다, ‘네가 그토록 갈구하던 지존의 자리.’ 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제좌. 그토록 내가 갈구하던 금빛 옥좌.
“비록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지라도, 무시하면 그만이다. 사람들은 쉽게 잊는단다.”
감수해야 할 것은 일순간의 굴욕, 얻는 것은 영원의 광영. 그리고 잃는 것은. 잃는 것은. 잃어야 할 것은.
서현은 이를 악물고, 발을 움직였다. 서엽이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상황이란 듯이 능숙하게 길을 터주었다. 서현이 그의 귀에만 들릴 만큼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황제를 지지하기로 결단을 내리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랬었지. 그것이 정도이니. 그러나 애욕에 눈이 어두워 사지(死地)로 걸어 들어간 치를, 더 이상 내가 어찌하겠느냐?”
“엎드려 충성을 맹세한 군주의 붕을 앞둔 신하치고는 참으로 낯빛이 용여(容與)하십니다.”
마치 황상이 결단코 죽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사람 같지 않습니까. 그 말에 서엽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으냐.”
“······.”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서현은 서엽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물증은커녕 실낱같은 심증마저 없는,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끈질기게 그 점을 캐어묻는 것은 바보나 할 만한 짓일 것이다.
서엽의 곁을 지나쳐 조금 더 앞으로 걸어 나가는 서현의 등에 대고 서엽이 물었다.
“결정했느냐?”
“···예전처럼.”
서현이 지긋지긋하단 투로 내뱉었다. 그 말끝에 욕설과 크게 다름이 없는 어조의 중얼거림이 덧붙었다, ‘제가 아니라 아버님이 결정하신 것 아닙니까.’ 절벽 끝에 세워 놓고는, 떨어질 것이냐 돌아설 것이냐 묻는다. 그렇게 묻는 목소리와 어조가 제 아무리 다정하다 한들 그 말의 본질은 협박이다.
처음부터 서현에게는 선택할 만한 것이 한 가지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래, 서현이 이를 갈았다. 그 대연회 때처럼.
이윽고 서현은 천추전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등 뒤에 성벽처럼 늘어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서현은 손을 들었다. 손끝에서 윙, 쇠가 바위를 가르는 듯한 날카로운 굉음이 울리며 대기(大氣)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협잡꾼.”
절벽 끝에서 겨우 뒤돌아섰으나, 서현은 방심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그를 절벽으로 밀어 떨어뜨릴 수 있는 삭풍(朔風)이 그의 주위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삭풍···. 아니, 오히려 그것은 바람이라기보다는 미친 듯이 귀곡성을 질러대는 망령 덩어리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현이 아주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서엽. 황제나 수상마저 능가하는 당대 최고의 치자.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서현은 의식적으로 다음 생각을 끊어놓았다. 그가 딱딱해진 목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앞을 돌아보는 그의 머릿속에 미처 막지 못한 다른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늘 자신의 곁을 맴돌며 울부짖고 있는 망령들의 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