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66)

*

“살았는가.”

듣던 중 다행이구나. 여인이 가느다란 숨을 삼키며 덧붙인 소리에 엄헌영이 찌푸린 이마를 펴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것을 산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엄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방 안의 사람들에게 청의관 수객의 소식을 전한 여인이 조심스럽게 엄헌영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차라리 빨리 낙명(落命)하였다면 더러운 꼴 보지 않고 깨끗하게 떠날 수 있는 것을 공연히 명줄이 붙어 있어서···,”

“구모님.”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중년 부인의 말허리를 싹둑 끊었다. 스스로도 괜한 입방정을 떨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빛이 흐려지는 중년 부인에게 젊은 여인이 나직이 타일렀다, ‘사람 목숨입니다. 그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어요.’ 중년 부인이 젊은 여인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이 년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공씨 부인께서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때 불퉁한 사내의 목소리가 두 여인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가 툭 내뱉은 말에, 젊은 여인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뽀얀 얼굴을 사내에게로 돌렸다. 사내 또한 여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친 끌로 깎아 만든 듯한 사내의 옆얼굴과 조물조물 손으로 주물러 빚은 것 마냥 섬세한 여인의 옆얼굴은 연배가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한창 피가 끓는 나이답게 치기(稚氣)와 패기(覇氣) 따위가 어지러이 어우러져 있는 사내의 얼굴과는 달리 여인의 목광(目光)이나 얼굴빛은 미혹(迷惑) 따위는 애초에 떨쳐 버렸다는 듯 차분하고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여인이 사내를 어르듯 말했다.

“그래도 그리 말하는 것이 아니야.”

“에둘러서 말한다고 사실이 달라지기라도 한답니까. 공씨 부인의 말씀이 백 번 옳습니다. 확실히 목숨줄이 끊어지는 것이 차라리 낫지 어설프게 목숨을 부지해 봐야···.” 

하고 거침  없이 말하던 사내의 미간과 눈살이 갑자기 구깃구깃해진다 싶더니 그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여인의 눈빛이 조금 더 깊어졌다. 그러자 그 눈길을 눈치 채기라도 했는지 사내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마치 귀찮은 짐을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 밀어 놓는 듯한 태도였다. 

“저자로 나가 아무나 붙잡고 물어 보십시오. 혹여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단 놈이 있으면 그 놈이 미친놈이지요. 다른 것도 아니고 용인의 힘에 당한 것이니 그 형독(刑毒)이 어지간하겠습니까. 구안괘사(口眼?斜: 입과 눈이 한 쪽으로 틀어지는 병)나 흘병(吃病: 말을 더듬는 증상) 정도면 나은 축이지, 자칫 재수가 없으면 평생 팔다리를 쓰지 못하거나 백치가 될 수도 있으니.”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남자의 냉정한 말이 끝난 후 잠시 대화가 끊겼다. 

남자는 다다다다 쉬지도 않고 긴 말을 쏟아내느라 마른 목을 축이느라 차를 한 모금 넘겼고, 여인과 사내가 하는 대화를 숨을 죽인 채 듣고 있던 중년 부인도 그를 따라 얼결에 찻잔을 들었다. 마치 그들과 행동을 맞추기라도 하려는 듯이 젊은 여인이 천천히 손을 뻗어 찻잔을 들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 그 이가 퍽 마음에 들었나 보아.”

사내의 손이 우뚝 멎었다. 입에 아직도 넘기지 않은 찻물을 머금은 채로 자신 쪽을 쳐다보는 사내를 젊은 여인이 웃음기 어린 눈으로 보고 말을 이었다. 

“성음이 울분에 차 있어.”

그 말에 영인(令人) 공씨 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사내의 얼굴을 힐끗 곁눈질했다. 공씨 부인의 귀에는 사내의 목소리도 어조도 결코 안타까워하는 것으로는 들리지 않았던 탓이다. 오히려 짜증을 내면 냈었지. 

눈동자만 굴려 훔쳐보자 역시나 사내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껏 구겨진 남자의 부리부리한 눈매가 당치도 않은 오해를 받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는 듯이 때때로 꿈틀거렸다. 

역시나, 하고 공씨 부인이 결론을 내릴 무렵 남자가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의외의 말이었다. 

“실토정(實吐情)하자면, 몹시 기분이 언짢기는 합니다.” 

“변을 당한 이와 정의상통(情意相通)한 사이였더냐.”

“어디 그럴 시간적 여유나 있었습니까.” 남자가 버릇없이 보일 만치 쇄탈한 투로 대꾸하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잠시 후 나직하게 혀를 차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허나, 결친(結親)한 사이는 아니었다고는 하나 사람 됨됨이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으니까요. 소인이 그리 세상을 오래 산 것은 아니나, 도림(刀林)이나 다름없는 황궐이나 전장을 이 십 년도 넘게 제 집처럼 드나들다보니 싫어도 온갖 군상들을 접하게 되더이다. 마마께서도 아시겠지만, 사람 낯가죽만 뒤집어썼을 뿐이지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드글드글하는 것이 이 동네 아닙니까.”

헌데, 하며 남자가 혀끝을 옅게 찼다. 

“소인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계집아이도 아니고, 평인(平人)들의 삶이야말로 귀족들 사이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정직하고 소탈한 가치가 있다느니 범님의 세계는 이 세계와는 달리 꾸밈없이 드맑은 것 같다느니 하는 꿈같은 헛소리를 지껄일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사람 사는 곳이 어디나 똑같지요.”

“서두가 길구나.” 여인이 보기 좋게 도톰한 아랫입술에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효강 너는 쑥스러운 말을 해야 할 때마다 그렇게 딴 말을 하곤 했었지.”

그 말에 사내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장승처럼 커다란 사내가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미간을 구기고 매서운 눈길로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여인은 겁을 먹는 척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사내를 대신하여 말했다. 

“비록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보지 알아도 알겠다. 착한 이였겠지. 상냥하고, 다른 이를 배려할 줄 알며···.”

“저어.” 여인이 속삭이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영인 공씨가 자신이 들은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나오자 조심스럽게 끼어들어서 정정했다. “쇤네가 들은 바와는 조금 이야기가 다른 것 같습니다. 듣자하니 그 청의관 수객은 행동이나 말이 사포(砂布) 못지않을 정도로 까다로워서 청의관 궁관들이 많이 힘들어 했다고 하던데···.”

“구모(舅母: 외숙모)님. 소녀는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는 믿지 않습니다.” 하고 부드럽게 대꾸한 여인이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사내 쪽을 바라보고 못을 박듯 물었다. “그렇지 않으냐, 효강. 그런 이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황상께서 탐을 내셨을 리가 없지.”

엄헌영이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고 인정했다.

“무어, 어느 정도는 들어맞습니다. 마마 말씀대로 그리 선량하고 순순한 놈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래도,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지요.”

“같은 뜻이면 좋은 말도 널려 있는데, 굳이 그리 삐딱하게 말해야 하겠니.”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조금만 더 제 이득을 챙길 줄 알았다면 이런 변을 당할 일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 적울(積鬱)에 찬 말에 여인은 잠시 침묵했다. 여인이 입을 다문 틈을 타, 엄헌영이 지금껏 참고 있던 울분을 터뜨렸다. 저절로 목소리가 커지고 어조가 거칠어졌다.

“마마의 면전에서 할 말이 아닌 것은 압니다만, 그래도 해야겠습니다. 그 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靑天霹靂)이요, 경전하사(鯨戰蝦死)지요. 대체 헌의공이나 서현 그 놈은 무슨 생각이랍니까?”

“어, 엄장군.”

화들짝 놀라 엄헌영을 만류하는 영인 공씨를 여인이 손을 들어 말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나서 여인이 엄헌영에게 계속해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엄헌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마마께서도 전정에 계셨으니 보셨겠지요.”

“그 이가 내 다음으로 축대에 올라오는 것은 보았지···.”

“그거 원래 그 치가 나가기로 되어 있던 것도 아닙니다. 황상께서 따로 고용한 예인이 있었습니다. 헌데.” 엄헌영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갑자기 그 예인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려서.”

여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예인이 사라졌다고? 무슨 까닭으로?”

“모릅니다. 아무래도 정황으로 봐서는 납치를 당한 모양인데, 제가 뒤쫓아 갔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었구나.”

‘그런데다 흉수도 완전히 모습을 감춘 뒤였지요.’, 그렇게 대꾸하는 엄헌영의 입에서 부득, 하고 소름 끼치는 잇소리가 흘러나와서 영인 공씨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궁둥짝을 움찔하면서 여인 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러나 골똘히 회상에 잠긴 엄헌영은 그런 것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모양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발끝만 노려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나머지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그를 대신하여 젊은 여인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서.”

하고 말하는 여인을 무심코 쳐다보자, 그녀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갓 내린 눈처럼 뽀얀 손가락이 얼굴께까지 올라와 오동통한 아랫입술 아래를 닿는 듯 마는 듯 쓸었다. 그 손가락은 정결(精潔)한 생김새와 지나치지 않을 만큼 화사한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게 투박하고 거칠었다.

“내 바로 다음 차례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암만 기다려도 황상의 예인이 올라오지 않기에 묘하다 했었지. 예인이라 자처하고 나선 이가 나타난 후에도 통인례가 태고(太鼓)도 울리지 않는데다, 시위들이 축대로 난입하지를 않나···.”

“그 때 말렸어야 했는데.”

엄헌영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돌이켜 보면, 그 때 낌새를 챘어야 했다. 내춘대연회를 겨우 며칠 남겨 놓은 시점에서 고집을 부려 결국 서문경을 화공예가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황제가, 자신의 예인을 자처하고 나선 서문경을 말리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그 시점부터. ···분명 서문경을 화공예에 나가지 못하게 했던 이유가 있었을 터인데.

“협박···.” 엄헌영이 생각에 잠긴 채로 불쑥 내뱉었다. “협박을 받지 않고서야, 그 위인이.”

“협박이라니, 천자께 그런 무엄한 짓거리를 할 만한 이가 어디 있단 말이더냐.”

여인의 대답에 엄헌영의 콧잔등이가 한 번 씰룩했다. 그리고서 여인을 슬쩍 쳐다보는 눈초리가 가어(加魚: 가자미)마냥 납작한 것이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꾸짖는 말을 하려다가 뒤늦게 사내의 불같은 성정을 생각해 낸 영인 공씨가 꾹 입술에 힘을 주고 말을 참는데, 엄헌영이 툭하고 내뱉었다.

“마마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엄 장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영인 공씨가 성을 내자, 엄헌영이 들으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제가 언제 황상이라고 했었습니까?”

영인 공씨가 주춤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엄헌영이 조금 전 했던 말을 되뇄다. 그 위인. 따로 누구라 밝히지 않고 그저 그 위인이라 했었다. 세상에나. 엄헌영의 포만무례(暴慢無禮)한 언사가 새삼 혀가 내둘러진다. 황상을, 더구나 와룡임이 밝혀진 용황제를 두고 그 위인이라니! 

자신을 보던 영인 공씨의 눈이 경악으로 접시만 해진 것을 보고 그녀가 하고 있는 생각을 읽은 엄헌영이 쏘아붙였다.

“지금 그게 문젭니까. 제가 대충 뭉뚱그려 말한 것을 현주께서 곧바로 알아채신 것이 문제지요.” 하고 말한 엄헌영은 바로 젊은 여인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돌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마마의 말마따나 간도 크게 천자를 협박한 치가 누굽니까? 보셨습니까? 당시 황친석이나, 적어도 운현궁 마마의 근처에 계셨을 테니 제안이 있던 곳과 크게 멀지는 않았을 테지요.”

“······.”

“헌의공입니까, 아니면 희입니까?”

여인이 대답하지 않자 비웃기라도 하듯이 엄헌영이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희와 제안과는 제법 거리가 있었으니, 첨위(僉尉: 현주의 부군)로군요.”

“효강, 너는.” 줄곧 말이 없던 젊은 여인이 난감해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너는 정말 못 말리겠구나. 어찌 그리 언행이 무도(無道)할 수 있는지. ···하기는. 너는 예전부터 그러했었지.”

고개를 끄덕인 것이나 다름없는 그 말에 엄헌영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이게 다 그 작자의 짓이라는 말씀이군요.”

“그 작자라니요! 마마께서 듣고 계시는데 어찌 헌의공께 그런 말씀을!”

“부인, 잠시만.” 

엄헌영이 영인 공씨 부인의 말을 막으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귀 바로 옆에서 그리 크게 말씀하시면 집중력이 흐려집니다.’ 그 예의 없는 말에 기가 막힌 나머지 공씨 부인이 숨만 헉 삼키고 있자, 이맛살을 구긴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엄현영이 곧 더더욱 무례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런 주제에 시방(時方)은 제안의 편을 들고 있다? 이거 미친 놈 아닌가. 당최 무슨 심산인 게야?”

“마마!” 공씨 부인이 거의 비명처럼 들리는 소리를 내지르며 젊은 여인에게 호소했다. “마마께서 엄장군을 좀 말려 보시옵소서! 듣자 듣자하니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하고 제멋대로 떠들어대고 있지 않사옵니까!”

그러나 엄헌영은 공씨 부인이 울듯이 매달리듯 정말로 울부짖듯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로 곧바로 여인에게 말했다. 

“혹 들으신 바가 없습니까?”

“글쎄다. 그 사람 간판짝을 뵌 것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이니 내가 어찌 들은 바가 있겠느냐?”

엄헌영의 뺨을 후려갈기기도 남을 만치 난포한 여인의 표현에, 공씨 부인이 여인의 금박 물린 홍상(紅裳) 끝을 잡은 채로 얼어붙었다. 여인의 말을 듣고 놀란 기색 하나 없이 하기는, 하며 중얼거리던 엄헌영이 다시 생각을 바꾸어 물어왔다.

“그럼, 서간의 내용을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서간?”

“얼마 전, 마마께서 희에게 전해 달라 제게 부탁하셨던 그 서간 말입니다.”

그 말에, 웬만한 말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여인의 낯빛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 그것을 본 엄헌영도 마음이 아픈 듯 눈살을 살풋 찌푸렸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으며, 또한 그에게는 엎질러진 물을 굳이 쓸어 담으려 애쓸 마음도 없었다. 일다경이 넘도록 입을 열지 않던 여인이 결국 엄헌영의 말 없는 재촉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그것을 꼭 알아야겠더냐? 전적으로 사적인 서간이었다. 이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야.”

“그것은 들어 봐야 하는 일 아닙니까.”

엄헌영이 고집을 부리자, 젊은 여인이 곤란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근래에 묘한 소리를 들었어. 그래서, 걱정이 되어서.”

“묘한 소리라니요?”

“글쎄···.” 

여인이 입 속으로 웅얼거리며 갑자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더 이상 대답하기가 곤란해서도,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다만 바닥을 보이는 개완(蓋椀)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옥주전자는 비어 있었다. 공씨 부인이 눈치 빠르게 나섰다. 

“소인이 다녀오겠사옵니다.”

“사람을 부르면 되는 일입니다. 굳이 구모님께서 걸음하실 필요는···.”

“아닙니다.”

하고 손을 내젓고는 영인 공씨가 급히 자리를 떴다. 

공씨 부인에 의해 잠시 열렸었던 장지문이 다시 닫히고, 탁탁탁탁 하며 공씨 부인이 걸음을 옮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조차 점차 잦아들고, 또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엄헌영이 툭 내뱉었다. 

“너구리같으니.”

여인의 한 쪽 눈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나도 여인이야. 웬만하면 너구리보다는 여우가 낫지 않겠니, 강아.”

“솔직하게 자리를 피해 달라 했어도 군말 없이 물러나 주었을 사람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 짓이야.”

“내 면전에서는 군말이 없겠지만 뒤에서는 아닐 것 아니냐. 구모님을 험담하지는 것이 아니야. 그저,” 

하고 잠시 말을 멈춘 여인은 적당한 말을 골랐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엄헌영이 선수를 쳐서 말했다.

“입이 가벼우시지.”

“그래.” 여인이 그 말에 동의하며 한숨을 폭 쉬었다. “정이 많고 심성이 선한 분이시지만 조심성이 없는 것이 문제야. 나는 실수로라도 나에 대한 말이 그 이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아.”

“헌의공의 관심을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희에게 서간을 보내지 말았어야지.”

“너무 매섭게 꾸짖지는 말아 주렴. 나라고 그러고 싶었겠느냐.”

“지금껏 잘해와 놓고서 무슨 까닭으로 갑자기···.” 

엄헌영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을 만치 나직해졌다. 일단 대가댁 본마나님다운 음전한 태도를 가져다 버리고 여인이 붉은 치맛자락까지 끌고서 엄헌영에게로 바짝 다가왔다. 엄헌영이 그런 그녀의 귀에 물었다. 

“그 묘한 소리라는 것이 심각한 것이더냐?”

“모르겠다.”

여인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엄헌영의 눈이 구겨졌다.

“모르겠다고?”

“내가 아는 것이 무어가 있겠어. 그러니 의심쩍은 말을 들어도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더구나.” 

여인이 한 쪽 무릎을 세우고 상반신을 조금 엄헌영에게로 붙였다. 엄헌영이 떨떠름한 얼굴로 당장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지만 여인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헌데 이번에는 못 본 척 지나칠 수가 없어서···, 그래서 서신을 띄워 보았다. 허나 희가···.” 

희, 하고 서현의 이름을 입에 담는 여인의 눈이 조금 커지고 입술의 주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울상을 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표정이 분명했지만 엄헌영은 모른 척 했다. 여인 또한 엄헌영이 자신을 배려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못 본 척 했다. 그러나 점점 가려앉아야 할 입술의 떨림은 계속해서 커졌다. 이제는 말하는 소리마저도 떨릴 정도였다. 그래서 여인은 잠시 말을 멈춰야만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여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이가 별다른 말없이 강이 너를 돌려보냈었다고 했으니, 단순히 내 걱정이 지나쳤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내게도 말 못할 일이냐?”

여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것은 아니야.’, 여인이 중얼거리며 엄헌영에게서 물러나 앉았다, ‘그런 것은 아닌데.’ 

“나 또한 시일이 지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굳이 알릴만한 일이 아니었다 싶어서.”

“말하기 힘든 사안이 아니라면 내게 말해다오. 내 지려로는 서엽, 그 미치광이 같은 작자의 행동이 갑자기 변한 것이 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허나 그 서간을 본 이는 희 외에 아무도 없지 않았다 하지 않았어?”

“맞아.” 엄헌영이 뒷머리를 몇 번 거칠게 긁적이고는 씹어 내뱉듯 말했다. “그 서간의 내용을 서엽이 봤다고 생각해서 묻는 것이 아니야. 내게 이전에 네게 전했던 말에는 한 치의 틀림도 없어. 그 서간을 펴 본 이는 희 하나뿐이다. 신뢰하여도 좋아. 다만 나는 네가 서간을 쓰게 된 원인이 서엽 그 자의 행동이 불시에 변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싶어 묻는 게야.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그 분이 얼굴빛을 싹 바꾸어 제안을 지지하고 나선 것 말이냐.”

그 일이라면 나 또한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전까지는 희를 제좌에 올려놓는 것만이 일생의 과업인 것처럼 행동하셔 놓고 지금 와서···. 내면의 고통을 호소하듯 여인의 고운 얼굴이 얇은 종이짝처럼 구깃구깃해졌다. ‘희와 제안이라니, 진실로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인이 괴롭게 털어 놓은 진심에 엄헌영은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자신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모르겠다는 말인지, 괴로워하는 여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인지 언뜻 봐서는 뜻을 알기 힘든 애매한 고갯짓이었다. 

여인이 조심스럽게 조언을 구했다.

“어찌해야 할까, 강아.” 그리고 여인은, 엄헌영이 그 말에 대답하기 전에 다시금 중얼거렸다. “섣불리 나서기가 나는 몹시 두렵다···.”

“충분히 이해한다.”

엄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는, 신중한 태도로 덧붙였다.

“현재로서는 너도 나도, 나설만한 상황이 아니니 좀 더 두고 보는 것이 좋겠다.”

“허나 이대로는,”

“그것보다는.”

하고 엄헌영은, 무어라 말하려고 드는 여인의 말을 가로막았다. 여인이 무심코 눈을 홉떴다. 그런 여인에게 엄헌영이 다시금 요구했다, ‘네가 희에게 보냈었던 서간의 내용에 대해 말해다오.’ 그 말에 여인이 눈을 크게 뜬 그대로 머리를 모로 조금 기울였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이 네가 왜 그렇게 캐어묻는지 모르겠다. 지금 급한 것은 그것이 아닌 것 같은데···. 허나 네가 그렇게 궁금하다면 말해 주마.” 

그 뒤에 ‘분명 아까운 시간만 허비했다 생각할 것이다.’하고 덧붙인 여인이 다시 입을 열어서 말했다. 

“그것이···.”

*

“낭보(朗報)가 있나이다.”

하는 소곤거림이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말소리가 들려온 자리가 지척인 것을 감안하면 대령상궁이나 내시감 줄 중 하나일 것이다. 친근한 척 입을 놀린 치가 둘 중 누구인지는 두 사람의 성별이 다르니 듣기만 해도 척 알 수 있을 터인데, 지금의 황제는 그것조차도 구별할 수 없었다. 낭보라. 거의 반사적으로 중얼거리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꾸가 돌아왔다. 마치 황제의 말을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태도였다. 

“헌의공이 금일 낮전 운현궁에 들었었다 합니다.”

“운현궁···.”

“그것이 모두 천제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사옵니까.”

감축 드리옵니다, 하고 방금 전의 그 목소리가 속살거렸다. 언뜻 들으면 모진 고생 뒤에 황제가 낙을 맞게 된 것을 더할 수 없이 감격해 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저리 말하는 이가 대령상궁이든 내시감이든 간에 그 치들이 지금껏 해 온 짓거리를 생각하면 참으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을 듣는 황제의 얼굴은 여전히 정면을 향한 채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황제가 입술을 움직였다.

“운현궁이라···.”

“폐하?”

맥락 없는 황제의 중얼거림에, 내시감 봉승이 당황하여 상반신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최대한 눈알을 굴리면 겨우 들여다 볼 수 있는 황제의 옆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그러나 마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이는 그 얼굴은 보는 순간 뒷머리가 차가워질 만치 섬뜩했다. 사람이 아닌 귀신이나 인형만이 지을 수 있을 법한 그런 표정이었다.

굳어 버린 내시감이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었지만, 이미 그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운 지가 오래인 황제는 개의치 않고 발걸음을 옮기면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운현궁 그 이를 여태껏 살려둔 것이 실수였던가···.”

봉승이 들었다면 무심코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를 패륜적인 말들이 연이어 황제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그 분이 그토록 집착하며 애정을 갈구하지만 않았더라도, 내 그 마귀 같은 할멈의 목숨을 이태까지 끌고 오지는 않았을 것을.”

가을날 밤처럼 흐리고 쓸쓸한 중얼거림을, 지익, 지익, 지이이익-, 무거운 짐을 끄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지운다. 

“귀신이 인간의 정을 안 것이 문제였다.” 그 탄식조차도 끈질긴 발소리에 묻혔다. “애박(愛縛)을 느낀 것이 문제였다.”

어디에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도 아득한 목적의 괴패(乖敗)에 황제가 내뱉는 말 구구마다 탄식하며 걸음을 옮겼다.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운현궁의 명줄을 끊어 놓았다면, 소희나 경혜, 강아와 봉우(逢遇)치 않았었더라면, 그 만남이 일우(一遇)로 끝났었더라면, 누구에게도 정을 품지 않고, 그 분께도 정도 집착도 주지 않았더라면, 아니, 아예 내가 이 자리에서 나지 않았었다면.

그랬었다면 지금쯤 모든 것이 제 궤도에서 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황제의 말에서 나온 것은 그것이 아닌, 전혀 다른 후회였다.

“···경아.”

끝도 없이 탄식과, 후회가 흘러나왔다. 짐이 그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네가 살아 있을 터인데. 네가 이리 큰 상처를 입고 괴로워할 일도 없었을 터인데. 그 뽀얀 얼굴과 옥 같은 몸에 가벼운 생채기 하나 없는 모습으로 즐겁게 지내고 있을 터인데. 경아. 경아. 경아. 내 깜둥새야.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린 모양이었다. 폐하! 하고 여기저기서 놀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황제는 그 소리를 아주 듣지 못한 것 마냥 계속해서 휘청휘청 걸어갔다. 어서, 어서 경이가 있는 곳으로 가야했다. 어서 그 곳으로 가 경이의 얼굴을 보아야 했다. 그의 낯빛을 살펴야 했다. 

-청의관 수객은 다행히 목숨은 부지했사옵니다.

태사의감에서 나온 이의 말은 언뜻 듣기에는 낭보였다. 그러나 황제는 속지 않았다.

-목숨‘은’ 부지하였다?

그 말인즉, 명줄이 끊어지지 않은 것 외에는 반가이 알릴만한 사실이 없다는 말이었다. 황제의 서슬 퍼런 반문에 태사의감 승박사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황제가 승박사의 곁을 지나쳤다. 정전을 나가버리는 황제의 등에 대고 당황한 사람들이 외쳤다.

-황상! 

-폐하! 어디로 납시는 것이옵니까?!

-어찌 천자께오서 수행인도 없이, 낮볕이 그대로 내리쬐는 곳에서···, 내감(內監), 내감은 어디에 있는가!

한 바탕 소란이 일더니, 시위며 내시감이며 대령상궁이며 그 휘하의 나인들이 줄줄이 들러붙어 그럴듯한 행렬이 완성되었다. 수행하는 궁인들 외에도 조복을 걸친 관리들까지 아닌 척 일행에 섞여 있는데다, 도종(導從)의 선두에 있는 이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있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는 참으로 괴이한 행렬이었다.

그리고 다시 현재. 금방이라도 팩 쓰러져 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걷고 있던 황제가 불현듯 머리를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한곳을 향해 움직였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꽂혀 있는 곳은, 예에서 둔 삼의원 인 삼의감(三醫監) 중 하나인 태사의감이었다. 

미리 연락을 받았던지, 태사의감에서 붉은 관복을 입은 태의감(太醫監)과 푸른 관복을 입은 승박사와 의정(醫正) 몇몇이 맨발로 헐레벌떡 뛰쳐나와 황제를 맞이하였다. 거의 구르듯이 달려 나와 바닥에 엎드리려는 그들을 향해, 황제가 다짜고짜 물었다.

“경이는.”

“예?” 막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있던 태의감이 엉거주춤 머리를 들면서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온지···.”

“청의관 수객.”

하는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떻게든 황제의 비위를 맞추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이가 오지랖 넓게 나서서 벼락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태의 영윤은 무얼 하는가! 당장 앞장을 서지 않고!”

그 서슬에 놀란 태의감이 튕기듯이 몸을 일으켜 외쳤다. ‘서둘러라! 어서 추나과(推拿科)로 가 황상께서 납신다 이르거라!’, 거의 소를 몰듯이 손을 휘두르는 태의감들에게 쫓겨 승박사와 의정들이 우루루 태사의감 안으로 사라졌다. 그것으로 한 숨 돌렸다 싶었던지 태의감이 황제를 향해 몸을 돌리며 허리를 깊숙이 굽혔다.

“드시옵소서, 폐하.”

“무슨 까닭으로 청의관 수객이 추나과에 있는가.”

그러나 황제는 태사의감 안으로 드는 대신 흑기석(黑棋石) 같은 눈으로 태의감을 응시하며 물었다. 예?, 반사적으로 태의감이 되묻자, 황제가 천천히 입술을 들어 올렸다. 희미한 보랏빛마저 띈 창백한 윗입술이 느릿하게 올라가고 그 안으로 단단한 치아가 조금 드러났다. 겨우 말 한마디인데, 그 단어 하나하나가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무게를 갖고 있다는 듯한 기묘한 태도였다.

“그가 다친 곳은···, 목이었었다.”

“그렇사옵니다. 허나, 신풍(神風)에 막 하나 없이 그대로 휘말리면서 온 몸의 뼈가 뒤틀리고 피부 전반이 찢기어 갈라졌사옵니다.”

“온 몸의 뼈가 뒤틀리고, 피부가···,”

“예, 폐하. 그리하여 일단은 추나과로 안치하였으나, 외출혈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옵니다.”

“그러나, 살아 있다고 하였다.”

그 어린아이 같은 표현에, 태의감 영윤이 말문이 막힌 것처럼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가 잠시 후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턱 끝을 바짝 치켜든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표정이 어리어 있었다.

“지금은 살아 있사옵니다.”

“그 말은!”

“허나, 당장 명줄이 끊어져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이옵니다. 더군다나 지금 청의관 수객의 상태는 살아 있다기보다는, ‘아직’ 절명하지는 않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옵니다.”

“아직, 절명하지 않은 상태에 불과하다니, 그건.”

“청의관 수객의 육체는 얼어붙어 있사옵니다.” 

태의감 영윤이 단숨에 말했다.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황제가 눈만 커다랗게 뜬 채로 대답하지 않자, 영윤이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러운 설명을 덧붙였다. 

“황상의 신력(神力)은 만물을 얼어붙게 만드는 ‘힘’으로 추정되옵니다. 소신(小臣)이 그리 추측하는 까닭은, 청의관 수객의 몸이 상국의 신력인 신풍에 휘말려 뒤틀리는 과정에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기 때문이옵니다. 결론만 말씀 드리자면, 청의관 수객의 상태는 황상의 신력에 의해 육체가 얼어붙어 있는 까닭에, 아직 죽지는 않은 상황에 불과하옵나이다.”

그가 필사적으로 돌려 한 말을, 황제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경이가, 살아 있지 않다고?”

그러나 죽지는 않았으나, 살아 있지도 않다.

태의 영윤이 식은땀이 송송 돋아난 얼굴을 무심결에 훔치며 떨리는 음성으로 침통하게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현재로서는 죽은 상태라 할 수는 없으나, 언 몸이 녹으면···.”

“방법이.”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로 황제가 겨우 내뱉었다. “방법이, 없는가.”

“···송구하옵나이다.”

“방법을, 찾지 못하면, 그대의 목도 날아갈 것이라 하여도?”

그래도 방법이 없는가? 그렇게 캐묻는 목소리는 비열하게 상대의 목숨줄을 잡고 흔드는 협박조의 말임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이가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로 가냘팠다. 태의 영윤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공포로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에는 동시에 강한 체념이 어려 있었다.

“폐하, 아무쪼록 태사의감 안으로 납시어 주시옵소서.”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객의 상태를 직접 보아 주시옵소서.”

그리고는 그가,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런 다음에 받아 마땅한 벌을 받겠사옵나이다.”

서문경을 살릴 방도는 없다는 선언과 다름이 없는 말이었다. 황제는 몇 번이나 입술을 벌렸다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런 황제의 모습은 마치 언어라는 것을 통째로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태의 영윤이 안내역을 자처했다. 멈춰 있던 행렬이 느릿하게나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사의감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든 의관들이 보랑에 나와 배례(拜禮)로 용황제를 맞이하였다. 

곧 황제의 행렬은 태사의감 우편(右便) 회랑(回廊)에 위치한 너른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 입구에 걸린 검은 현판에는 중환(重患)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뼈에 문제가 있는 환자 중 손을 쓰기 힘들 정도로 병세가 중한 이를 안치하는 방이었다. 마침 방 안은 몇몇 의관을 제하면 비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태의 영윤은 추나과 중환실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하얀 와상(臥牀)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와상을 찾아 들어갔다. 

“······.”

깊숙한 곳에 놓인 와상 앞에 멈춰 선 황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노여움 때문이 아니라 당혹감 때문이었다. 그 와상 위는 다른 와상과는 달리 누군가가 누워 있었는데, 그 이가 누구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와상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의 온 몸을 새하얀 천이 뒤덮고 있었던 탓이다. 

뚝. 

갑작스런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와상 아래로 움직였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실제로도 와상은 물기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한 방울씩 흘러내린 물방울이 와상 아래에 작은 물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태의 영윤이 의정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신호를 받은 의정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을 벗겨냈다.

“저런···!”

*

“저런···!”

차마 삼키지 못한 탄식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다. 슬프고 끔찍한 최후를 맞은 이에게, 같은 인간으로서 가지는 본능적인 안타까움이었다. 

그 사체(死體)는, 아니, 시체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마저도 박탈당한 그 가엾은 고깃덩이는 그야말로 갈가리 찢긴 모양 그대로 박제(剝製)되어 있었다. 박제! 그 얼어붙어 있는 고깃덩이-예전에는 사람이라 불렸을 터였으나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무심코 탄식을 흘린 사람들이 이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침묵에 휩싸여 있는 가운데, 황제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은 박제품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박제품의 얼굴은, 아니, 정확히는 예전에는 얼굴‘이었을 것이다’라고 추정되는 그 곳은, 셀 수도 없이 많은 상처들로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그곳을 멍청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던 황제가 어느 순간 중얼거렸다.

“아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모습이 아니었어. 짐이, 이 아이를 태사의감에 맡겼을 때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태의감이 설명했다.

“폐하, 폐하께옵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신력은 다른 술과는 다릅니다. 술사들의 힘은 힘이 가해진 일시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지만, 신력은 신력이 가해졌던 그 순간은 물론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인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 이 상처는···,”

영윤은 설명을 멈췄다. 황제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쿵! 갑자기 들려온 쿵 소리에 놀라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가, 그 소리가 들려온 이유를 깨닫고는 더더욱 놀라 선 자리에서 튕겨 오를 지경이 되었다. 황제가 청의관 수객이 누운 와상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니다. 이런, 모습이 아니었었다···.”

황제가 중얼거리며 두 손을 뻗어 서문경의 두 볼을 감쌌다. 맨 피부에 닿는 감촉은 겨울밤 버려진 돌덩이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하지만 황제는 개의치 않고 계속 서문경의 볼을 문질렀다. 황제의 손이 급속도로 핏기를 잃고, 결국은 새파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 안의 어떤 이도 황제를 말리지는 못했다. 지금의 황제는, 저 얼음덩이에 손을 비비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하지 못하고 어떤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그 정도로 황제의 태도는 필사적이었다. 

“경아.” 황제가 애타게 서문경의 이름을 불렀다. “경아. 경아. 경아.”

말하는 황제의 입술이, 냉기가 온 몸으로 퍼지기 시작한 때문인지 아니면 서문경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때문인지 불불불불 떨렸다. 딱딱딱딱 이가 부딪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황제가 계속해서 애원했다. 애원! 그래, 그것은 애원이었다.

“짐이, 짐이 잘못하였어. 짐이 모두 잘못하였다. 진심이다. 조금의 거짓도 없어. 짐이 잘못하였다.”

“······.”

“잘못했다. 네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을 것을, 빌어 처먹을 대연회 따위 내팽개쳐 버리고 너만 콱 끌어안고 있을 것을, 다른 누구보다도 생각하지 말고 너만 우선할 것을. 너를, 경이 너를.”

대답이 없는 서문경을 문지르는 황제의 손은 이제 거의 검보랏빛이 감돌고 있었지만 황제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황제의 손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저 잔인한 얼음이 봄날 햇볕을 받은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리고, 저 상처도 거짓말마냥 사라지고 서문경이 다시 눈을 뜨기라도 한다는 듯이. 

이전에는 단단하게 얼어서 아주 서서히 녹고 있던 얼음이, 황제의 손길이 빨라질수록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정신줄을 놓은 듯한 황제의 행동을 마찬가지로 넋이 나가 보고 있던 의정이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신음을 삼켰다. ‘여, 영공(令公)!’, 의정이 잔뜩 억눌린 소리로 고한 말을 듣고, 태의감 영윤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인식한 순간 그는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날카롭게 일갈했다.

“아니되옵니다, 폐하!”

하지만 황제의 귀에 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만 같았다. 황제가 홀린 것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보거라, 경아. 짐이 이렇게 무릎까지 꿇고 빌지 않느냐. 이만 화를 풀거라. 제발. 제발, 경아. 짐이 잘못하였어. 다시는 이러지 않을 터이니 제발,”

“폐하, 그만 하시옵소서!”

“제발 돌아오거라.”

그 애원이, 물처럼 떨어져 내렸다.

“눈을 뜨거라.”

흥건한 물기를 머금고.

“제발.”

말(言)로 된 눈물처럼.

“제발, 경아.”

황제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서문경의 이마가 있는 곳에 황제의 이마가 맞닿았다. 하얀 이마가 금세 파랗게 질렸다. 그제야 놀란 내시감과 대령상궁이 정신을 차리고 황제를 서문경에게서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황제는 그 자리에서 굳어 바위가 되어 버린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때마침 뚝, 하고 물이 또 한 방울 떨어져 내렸지만 황제와 서문경의 몸이 하나인 것처럼 붙어 있는 이제는 그 물방울이 누구의 몸에서 흐른 것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그 때, 계속해서 황제를 말리고 있던 태의 영윤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폐하, 제발 물러나 주시옵소서!”

“태의 영감.” 내시감 봉승이 태의감 영윤의 옷자락을 뒤로 당기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지금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으시는 것 같소이다. 그러니,”

“나중을 기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오!”

봉승의 팔을 거칠게 쳐내며 영윤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을 친 태감 봉승이 뒤늦게 자신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낯을 붉히며 맞고함을 쳤다.

“이것이 무슨 무례시오, 영공! 이 봉승은 영공을 배려하여서,”

“몸이 완전히 녹으면 청의관 수객의 명줄도 완전히 끊어진단 말이요!”

다시금 영윤이 봉승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그 말에 헉, 하고 숨을 삼키며 봉승이 황제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황제는 청의관 수객이 누운 와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상태였다. 태의 영윤이 다시 황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황상. 황상의 황망하며 비통하신 어심을 신이 어찌 모르겠나이까. 허나 이리 능시(凌?: 얼음)가 녹아 버리면 청의관 수객은 이대로 명이 다하고 말 것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저대로 내얼어 있다 한들, 절명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대답이 들려와서 태의 영윤이 눈을 홉뜨는데, 다시금 황제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방도가 없다, 그대의 입으로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틀린가. 하고 무심하게 묻는 소리에, 영윤이 주춤 몸을 움츠렸다. 이유도 없이 뒷목이 서늘해졌다···. 

“아···, 니옵니다. 방도는,”

“여전히 없다.” 더듬더듬 중얼거리는 영윤의 대답을 황제가 낚아채어 이었다. “여전히 이 이를 살릴 방도는.”

“그렇사옵니다···.”

지금껏 어느 누가 외쳐 불러도 미동조차 하지 않던 황제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결빙하여 있는 몸뚱이가 녹아도, 녹지 않아도 살 수는 없다.” 몸을 일으킨 황제가 우뚝 버티어 선 채 서문경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늦든 빠르든, 결국은 죽음 뿐.”

마치 도무지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 같은, 그런 속삭임. ···그러나, 결국 황제는 그런 자신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폐하!”

다음 순간, 경악한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여, 영공, 화, 환자를,”

“환자를 내려 주시옵소서, 폐하!”

자칫 잘못하여 츳들이기라도(: 떨어뜨리다) 하면 대파(大破)될 수도 있사옵니다! 기겁한 태의감 영윤이 황제의 발치에 몸을 던지다시피 엎드려서 애원하였다. 그러나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음에 휩싸인 서문경을 안아 든 황제는 애원을 거듭하는 태의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자신의 품 안에 든 서문경을 애틋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황제가 불현듯 속삭였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경아. 짐이 꼭 눈을 뜨게 해 주겠다.”

“폐, 폐하?”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내감(內監: 내시감).”

생각지도 못한 부름을 받은 내시감 봉승이 대꾸도 없이 멍청한 눈으로 황제 쪽을 쳐다보다가, 뒤늦게 황제가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펄쩍 뛰어올랐다. 

“부, 부르시었사옵니까?”

“이화시강원(異化侍講院)으로 가 좌사(左師)와 우사(右師), 그리고 그 이속들을 천추전으로 오라 이르라.”

“이, 이화시강원 말씀이시옵니까?”

하고 여쭈며 내시감 봉승이 대령상궁 연재 화연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도대체 황제가 무슨 영문으로 저런 하명을 하는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연재 화연 또한 당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강원이라면 보통은 용의 기질이 있는 황태자의 궁사(宮事) 및 시종(侍從)과 훈육을 맡는 황태자시강원을 가리키지만, 사실 황태자시강원 외에도 시강원이라 불리는 관청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화시강원(異化侍講院). 간택(揀擇)을 통하여 선택된 정후(正后)를 진정한 의미에서 용의 배필로 거듭나게 하는 일을 맡은 관청이었다. 

그러나 간택을 통하여 선발된 정후가 없는 지금 황제 대에서 이화시강원은 이름만이 존재하는, 그야말로 유명무실(有名無實)한 기관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등장할 이름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니 황제의 말에 내시감 봉승과 대령상궁 연재 화연이 어리둥절해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의아해 하는 것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황제가 거듭해서 명령했다. 이번에는 대령상궁을 향해서였다.

“연재상궁 그대는 운현궁으로 가 짐의 말을 전하도록 하라.”

“운현궁 마마께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황제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금 뒤 바로 말을 이었다. “짐이 정식으로 후(后)를 맞이하겠노라고.”

“!”

무, 무슨 말씀을, 하고 눈을 부릅뜬 채 말하려던 연재 화연이 불현듯 행동을 멈추고 웅얼거렸다, ‘설마.’

“서, 설마하니 저 이를, 저 이를···!”

“용인으로 만들어 정후로 맞이할 것이다.”

“폐하! 그리는 안 되십니다! 어찌 간택도 거치지 않은 이를, 그것도 타계의 출신성분도 모를 위인을!”

하고 말하던 연재 화연이 불현듯 말을 멈춘 것은 자신의 행동이 도를 지나쳤다는 자각이 들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그리 말하기가 무섭게, 부득, 하고 이를 갈아붙이는 섬뜩한 소리가 황제에게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연재 화연은 두 눈을 홉뜬 채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여전히 품 안의 서문경만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에게서 무시무시한 살기(殺氣)가 감돌고 있었다. 

“태감.”

황제가 걸음을 옮기며 내시감 봉승을 불렀다. 봉승이 비명을 삼키며 황급히 대답하였다.

“하, 하명하시옵소서, 폐하!”

“당장 저 년의 주둥아리를 백 대의 매질로 다스리고 삭탈관직하여 급수비(汲水婢)들이 종으로 부리도록 하라. 지금 이 시각 이후로 저 년에게 공대(恭待)하거나 선의를 베푸는 이가 짐의 눈에 보일시에는 그 자 또한 황명을 거역한 것으로 여기고 큰 벌로 다스리도록 하겠다.”

연재 화연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폐하, 그, 그 말씀은.’, 시퍼레진 대령상궁의 얼굴을 곁눈질하면서 내시감 봉승이 우물거리자, 당장 황제의 칼 같은 협박이 봉승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대도 같은 신세가 되고 싶은가.”

“아, 아니옵니다, 폐하!” 

봉승이 식겁하여 소리치고는, 내금위(內禁衛)에게 영을 내리어 대령상궁 연재화연을 포박하였다. ‘태감 어른! 제게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태감의 외침을 듣고 달려운 내금위들에게 팔다리가 잡힌 연재 화연이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외쳤지만 자신의 목도 간당간당한 판국에 봉승이 그 말을 들은 척이라도 할 리가 만무했다. 곧 연재화연이 발버둥을 치며 태사의감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

“운현궁에는 그대가 알아서 고하도록 하라.”

황제가 봉승에게 던지듯 말하고는, 서문경을 안은 채 방 안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방 안에 가득한 사람들의 표정은,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것 마냥 어리벙벙하였다. 사상 초유의 사태. 

그러나, 황제를 만류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군가 ‘운현궁···.’하며 태황태후를 언급했지만 곧바로 다른 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황실의 큰 어른인 태황태후가 주재하여야 할 간택을 당당하게 무시하고 청의관 수객을 정후로 맞아들이겠노라 선언한 것을 보면 더 이상 태황태후는 황제의 안중에 없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대로 이 상황을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 방 안이 무거운 침묵 속에 감겼다.

“헌의공을···.”

그러던 어느 순간, 걔 중 어떤 이가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중얼거렸다. 헌의공! 그 중얼거림을 들은 사람들이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웅성거림이 빠른 속도로 방 안에 번져 나갔다. 그러다 결국 성질이 급한 사람 몇몇이 분연히 일어나 소리쳤다.

“그래요, 헌의공입니다! 헌의공이라면 어떻게든 사달이 나는 것을 저색(沮塞: 저지)하여 주실 것입니다!”

“한시 바삐 헌의공께 알려야 합니다!”

“어서 영노당으로 가시지요!”

“그럼요! 정후라니! 어찌 타계의 서인 따위가, 그것도 천객도 아니고 비루한 수객 따위가 제국의 국모가 될 수 있습니까!”

주거니 받거니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곧 우르르 무리를 지어 태사의감을 빠져 나갔다. 

차례로 사람들이 빠져 나가고 태의감 영윤과 몇몇 의관들만이 남은 방 안에는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영공, 일어나십시오. 여전히 바닥에 두 무릎은 꿇은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태의감을, 의정 중 하나가 부축하려 들자 태의 영윤이 그 편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만 몇 번 가로저었다.

“낯빛이 몹시 좋지 못하십니다. 안정을 취하셔야,”

하고 말하던 또 다른 의정이 입을 다물었다. 태의 영윤이 손을 저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뒤에, 불시에 이처럼 중얼거렸기 때문이었다.

“가능할 리가···.”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영공!”

“말려야 한다! 폐하를 말려야 해!” 

태의 영윤이 벌떡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려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 때문에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네 발로 기어 필사적으로 문지방을 넘으려 들었다. ‘영공! 어찌 이러십니까!’, 그런 태의감을 보다 못한 의정 둘이 외치며 달려가 태의감의 양쪽에서 그를 일으켜 세웠다. 태의를 부축한 이들의 눈이 곧 커다래졌다. 태의감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공···.”

“말려야 한다, 어서, 어서····.”

“무엇을 말입니까?”

“멍청한 놈!” 태의감 영윤이 돌변하여 귀신같은 얼굴로 일갈하였다. “늘 정후의 가변례(嘉變禮)는 천제사 후에 있어 왔다. 네놈은 그 까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가변례는 한낱 사람인 이를 용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의식이다, 그것이 웬만한 힘으로 될 법한 일이라 생각하느냐!”

“그러나 황상께서는 용인이 아니십니까?”

“용인이시지! 와룡이셨지! 허나 아직 진짜 용은 아니시지 않은가!”

태의감이 그렇게 탄식한 후에야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은 의정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태의감은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의정들의 손을 휘휘 팔을 저어 떨쳐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깡마른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떼며, 태의감이 한탄했다. 

“안 될 일이다. 안 될 일이야. 완벽하지 못한 힘으로 무리를 하셨다가는, 자칫했다가는 황상마저 실명(失命)하실 수 있음이다···!”

“!”

위태롭게 떨리던 다리가 결국은 무너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태의감이 절망감에 바닥에 머리를 박고 중얼거렸다. 다시금 용을 잃을 수는 없다, 이대로라면 이 나라가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야···! 

그러나 애끓는 소리로 태의감이 내뱉은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용인을 잃는 것은 분명 큰일이고, 태의감의 폭로는 충격적이었지만 저렇게까지 태의감이 절망하는 이유를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라에는 황제 이외에 또 한 명의 용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몇몇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 어두운 그림자 같은 것이 재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누구라도 어서.”

태의감이 삐꺼덕거리는 목을 겨우 움직여 방 안을 돌아보며 도움을 청했지만,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시선을 피했다. 진노한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직언(直言)을 할 만큼 용기 있는 이도 없는데다, 그런 위험을 무릅쓸 만큼의 황제에 대한 의리가 그들에게 있을 리도 만무했다. 

한참 뒤, 망령이라도 난 것처럼 계속해서 같은 말만 중얼거리고 있는 태의감을 힐끗거리며 서로 눈치만 보던 의관들 중 승박사 하나가 나서서 태의감을 위로하였다.

“사람들이 영노당에 헌의공을 모시러 갔사오니, 안심하십시오. 설마 그 사이에 황상께서 사달을 내시겠습니까.”

또릿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태의감이 흘리고 있는 의미 모를 신음보다 훨씬 더 가벼웠다. 태의감 영윤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흘리는 괴로운 신음소리가 허무하게 허공에서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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