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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시커먼 그림자 같은 것이 고치를 내리쳤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서현이, 용인이 만든 고치가 그대로 찢어져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저런 말도 안 되는!”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를 들으며 서현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무언가를 봤기 때문이 아니라, 다분히 본능적인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 다음 순간 서현은 놀라서 두 눈을 홉떴다. 위기감이라고? 이 내가? 그러나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아직도 등골이 서늘하고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서현의 발치로 후두둑 뭔가가 떨어졌다. 믿을 수 없었다. 바람. 서현이 ‘힘’으로 불러낸 바람. 실재하지도 않는 바람이, 공기의 흐름에 불과한 그것이 얼음으로 박제되어 있었다. 서현은 앞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피투성이가 된 서문경을 한 팔에 안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서문경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저기에. 서현의 시선이 황제의 비어 있는 팔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저것은!”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며, 웅성거림이 번졌다. 어느새 광풍은 멎어 있었다. 바람을 피해서 도망쳤던 이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와 주춤주춤 축대 근처로 모여들었다. 걔 중 누군가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들어 올린 팔이 벌벌 떨렸다. 마찬가지로 떨리는 목소리가 말했다. 저, 저, 저···!
“용비늘!”
황제의 오른팔이 완전히 인간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변해 있었다. 사람의 것보다 다섯 배는 족히 큰 팔이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고, 그 팔에는 금속성의 광택이 흐르는 검은 경린(硬鱗)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여든 한 개의 비늘과, 낫처럼 날카롭고 큰 손톱.
용의 증후.
“말도···.”
말도 안 돼. 누군가가 속삭이더니, 곧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 하고 앓는 신음과 함께 주저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곧 외경(畏敬)으로 물들며 흙빛이 되었다. 벌벌 떨며 사람들이 하나둘씩 바닥에 엎드렸다. 차례로 엎드려 절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일어나는 파도와 같았다.
그 선두에, 헌의공 서엽이 서 있다 천천히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해 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외쳤다.
“신, 충심으로 용을 뵙사옵니다!”
그 말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곳곳에서 외침이 터졌다.
“신, 상서랑 이숙 충심으로 용을 뵙사옵니다!”
“신, 표기장군 유공 충심으로 용을 뵙사옵니다!”
“신, 태중대부 초한 충심으로 용을 뵙사옵니다!”
“충심으로 아뢰오니, 부디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당금(當今) 황제(皇帝) 만세(萬歲), 만세(萬歲), 만만세(萬萬歲)!”
그러나 황제는 그 외침들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대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금과옥조(金科玉條)는 깨어졌다. 자신이 스스로 만든 법칙을, 자신이 깬 것이다.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서문경을 안은 황제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황제가 서문경의 목덜미에 천천히 코를 묻었다. 피 냄새. 그가 괴롭게 중얼거렸다···.
“허나 그대를···.”
그대를 잃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또한 자신을 위한 것. 계속해서 새어나오는 뜨거운 피에 입술을 박고 황제는 침묵했다. 최악.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농중조: 中-2
그 날 제국에는 묻혀 있던 망령(亡靈)이 되살아났다.
용(龍)이라는.
그러나 어쩌면 그 때 살아난 것은 사람들의 뱃속 깊은 곳에 꽁꽁 묶여 있던 망령(妄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푸른 하늘과 잿빛 땅이 뒤집히고, 부드럽던 배가 단단한 등이 되었으며 단 꿀은 쓴 독이 되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인간들이 그 더러운 속을 까뒤집어 보였다.
지난밤까지만 해도 서현의 앞에서 현신(現身)한 상천(上天)을 앞둔 것처럼 납죽 엎드려 머리조차 들지 못하던 치들이, 오늘밤에는 싹 낯빛을 바꾸어 빳빳이 턱을 치켜들었다.
똑바로 눈이 마주쳤건만 평상시처럼 몸을 던져 절을 하기는커녕 최소한의 예만을 갖추고 지나치려는 남자를 천견 최유가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섬뜩한 시선을 받고도 남자는 두려울 것이 없다는 식이었다. 막 지나치던 남자의 시선이 도리어 힐끗 서현의 뒤통수를 향했다.
“어디서 감히···!”
그 어두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단박에 눈치 채고 노성을 터뜨리는 최유를 서현이 한 손을 들어 막았다. 서현이 남자나 최유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내뱉었다.
“기다리고 계신다. 걸음을 서둘러라.”
그 말에 최유가 분노를 가까스로 삭이며 서현의 뒤를 따랐다. 서현의 말대로, 그 분께서 기다리고 계신 와중에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서현을 위해서도 좋지 못한 일이었다.
최유의 서슬에 기가 죽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서현과 최유가 걸음을 옮기기가 무섭게 등에 힐끔힐끔 끈질기게도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참으로 노골적이며, 즉각적인 반응들이었다. 그 굴욕을 참지 못한 듯, 최유가 억눌린 소리로 내뱉었다.
“사람이란 것이 참으로 간사합니다.”
“새삼스럽군.” 바득 잇소리까지 섞어 내뱉은 최유가 무안해질 만치, 그 말에 대꾸하는 서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 기이하리만큼 담담한 목소리에 최유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자, 앞을 응시한 채로 서현이 말을 이었다. “다만 대상이 바뀐 것 뿐, 늘 저 치들의 태도는 한결같았으니 새삼스럽게 놀랄 것도 노할 것도 없다.”
하고 말하는 목소리는 또릿했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흐릿했다. 할 말이 없어진 최유는 서현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부러질지언정 휘지는 않을 것처럼 꼿꼿한 서현의 몸이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앞으로만 걸어간다.
그가 걷고 있는 것은 어느새 긴 보랑(步廊)이었다. 너무 길어서 시야 끝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처럼 보이는 보랑은 그 때문인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기분에 불과할 뿐, 계속해서 걸어가자 검게 칠한 것만 같던 보랑의 끝이 보이고 빙글빙글 나패(螺貝: 소라)껍데기처럼 돌아가는 회랑(回廊)을 돌아 다시 나타난 보랑에 들어서자 드디어 목적한 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껏 거침이 없던 서현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체제공.”
돌체하고 천견 최유가 넌지시 이름을 부른 뒤에야, 서현은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멈추어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현은 콱 아랫입술을 깨물며, 손끝까지 가리는 긴 소맷자락 안에서 부서져라 주먹을 쥐었다. 발끝까지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해도 얼어붙은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살펴보던 최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 비로소 서현은 발을 움직였다. “들어가지.”
다음을 기약하기에는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이제 왔느냐.”
문도 닫히지 않은 방 안에 있는 것은 그 혼자였다. 그러나 그 넓은 방 안에 홀로 있는 광경이 무색하도록 남자의 존재감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거의 숨이 막힐 정도의 존재감에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늦춘 서현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그가 문득 서현 쪽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늦었구나.’
“헌데 표정이 어찌 그렇더냐.”
“어디를 가시는 것입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네가 올 생각을 하지를 않기에 말이다.”
헌데 이렇게 네가 왔으니 그럴 필요는 없겠구나, 하고 덧붙이며 남자가 자리에 앉았다. 눈짓으로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는 남자의 명령에 따라 천견 최유가 조심스럽게 방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서현은 아니었다. 돌상처럼 그 자리에 선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서현을 눈만 들어 바라본 남자, 헌의공 서엽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소희야, 무엇 때문에 그렇게,”
“어디를 가시려는 참이었습니까.”
서엽의 얼굴에서 씻은 듯 웃음이 사라졌다. 서엽을 둘러싼 공기가 삽시간에 차가워지는 것을 느낀 천견 최유가, 차마 둘 사이에 끼어들지는 못하고 다만 난감한 표정으로 서엽과 서현의 얼굴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잠시 후, 서엽이 다시 입가에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허, 참. 별 뜻 없이 해 본 말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 게냐.”
“혹, 입궐하시려던 참이었습니까.”
서엽의 한 쪽 눈썹이 꿈틀했다. 서현이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캐어물었다.
“천추전입니까, 아니면.” 서현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나직해졌다. “운현궁입니까.”
“아쉽구나.”
고가(故家)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저자에서 이름을 날리는 복자(卜者: 점쟁이)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을, 하는 서엽의 대답은 말의 내용이나 어투나 감탄하는 것인지 조롱하는 것인지 애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에 제삼자인 최유조차 멈칫했건만, 정작 서현은 매섭게 뜬 눈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대신 서현이 못을 박듯이 말했다.
“운현궁입니까.”
“그것을 어찌 확신하느냐?”
“그 편이 아버님의 입맛대로 요리하기 훨씬 편할 터이니.”
서엽의 한 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추켜 올라갔다.
“무엄하구나, 소희야. 그것이 황실의 큰 어른께 할 말한 말이더냐.”
가볍게 타박하는 말에 서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부정이 아니다. 자신의 짐작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서현의 얼굴이 더더욱 굳어지는 것을 보면서 서엽이 몸을 조금 움직였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서현이 몹시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서엽을 경계하였다. 노골적인 경계가 서린 서현의 시선이 집요하게 자신을 따라붙는 것을 느끼며 서엽은 보란 듯이 몸을 움직였다. 서엽의 주름진 손이 넓은 옷자락에 감싸인 무릎 위에 올라가자 서현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인다. 마른침을 삼킨 것이다.
서엽은 다정하게 웃음 지어 보였다.
“왜 그런 표정이냐. 설마하니 네게 이 아비가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으냐.” 하고 넌지시 묻던 서엽의 웃음이, 그 말이 떨어진 직후 서현이 취한 행동을 보고 더더욱 짙어졌다. 서엽이 물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희야.”
“못 가십니다.”
서엽의 앞을 가로막은 서현이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천추전도, 운현궁도, 아무 곳에도 못 가십니다.”
“아비가 무엇을 할 줄 알고 이리 가로막는 것이냐?”
“천제(天祭)를 지내자 건언(建言)하실 참이 아닙니까.”
서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깜짝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제···! 하고 무심결에 중얼거리고 만 최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놀란 최유가 민망할 만치 서엽이 선선히 인정했다.
“그래, 옳다.” 하고 고개를 주억거린 그가 의아하다는 듯한 시선을 서현에게 보냈다. “헌데, 그것을 알고 있는 놈이 어찌 앞길을 가로막고 나서는 것이야?”
“어르신, 천제라 함은···!”
그 때, 참지 못하고 최유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내내 과묵하던 최유가 언성을 높이자, 서현과 서엽 두 사람이 반사적으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끼어들지 말라는 듯 서현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서엽은 뜻밖에도 언짢은 기색을 보이지 않고 대뜸 최유에게 물어왔다, ‘어찌 그러느냐?’
거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듯이 한 천견 최유가 무거운 목소리를 쥐어짰다.
“천한 자가 경쇄(驚殺: 몹시 놀람)하여 감히 귀인들의 대언(對言)에 쐐기질을 하고 말았습니다. 부디 크게 꾸짖어 주십시오.”
거기서 최유의 어조가 조금 변했다. 그가 목소리를 더 낮추고 머리를 조금 들어 올려 똑바로 서엽 쪽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보다 앞서 여쭐 것이 있습니다. 천제를 지낸다 함은, 그 말씀은,”
“자네는 용님의 나라로 떨어진지 꽤 시일이 흐른 것으로 아네만, 혹여 모르는 것인가.”
“소인이 아는 천제사는···.”
최유의 낯빛이 흐려졌다. 계속 말해보라는 뜻으로 서엽이 날카로운 턱 끝만 조금 까닥했다. 최유가 거의 중얼거리다시피 말을 이었다.
“용의 자질을 가진 이가 하늘에 자신이 제일(第一)의 용인(龍人)임을 알리는···.”
하늘로부터 진정한 천자(天子)임과 동시에 유일(唯一)한 지배자임을 인정받는 의식. ···그리하여 하늘로부터 허(許)가 떨어지는 그 순간, 제단에 오른 황제 이외의 인간이 가진 용의 자질은 완전히 사멸(死滅)하여 용인은 인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즉, 천제란 황제가 이 나라의 진정한 지배자로 거듭나는 의식이 되는 것이다.
서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 알고 있군. 자네가 아는 그 천제가 맞네.”
그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 극단적인 감정 표현을 필사적으로 자제하고 있던 최유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참지 못하고 노성을 내질렀다.
“헌의공 어르신! 어찌 그리하실 수 있습니까!”
“천견!”
서현이 말리려고 했지만 최유는 듣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가 서엽의 멱살을 움켜쥐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듯, 각장장판을 쥐고 있는 최유의 커다란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말씀은, 체제공을 버리시겠다는 말씀과 같지 않습니까! 어찌 헌의공 어르신께서 이리 하실 수 있습니까! 공께서 이리 하실 수는 없습니다! 공께서 어찌, 어찌 다른 이도 아닌 체제공에게, 어르신의 아드님께 이런 배신을···!”
“배신?”
지금껏 최유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내버려두고 있던 서엽이 불쑥 중얼거린 것은 그 때였다. 웬만한 성인 남자의 손보다 두 배 가까이 큰 최유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때때로 꿈틀꿈틀 튕겨 오르는 것을 못 보았을 리가 없는데도, 그렇게 반문하는 서엽의 낯은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말끔했다.
“배신이라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은 아닐 것이라 믿습니다. 어르신께서 이리 나서시는 것 자체가 체제공에 대한 도과(倒戈)가 아닙니까!”
“이것은 당연한 수순이야.”
흥분해서 거의 찢어지다시피 하는 최유의 목소리와, 너무도 평온하여 느긋하게까지 들리는 서엽의 목소리는 한 자리에 있으나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이질적으로 들렸다.
“당연한 수순이라니, 어떻게 그리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상대는 황상이다. 진성(眞成) 황제가 되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은 둘, 혈통과 자격. 내 아드님께서는 그 중 하나를 충족하셨고, 황상께서는 이번 일로 조건을 모두 충족하셨으니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가?”
“황제가 무슨 연유로 지금껏 입을 닫고 있었는지는 소인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연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 사이에 십 수 년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 아무리 혈통이 중요하다 한들, 그 세월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황제가 허수아비를 자처하고 이리 흔들, 저리 흔들하고 있을 때 체제공 서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길렀다. 본래대로라면 대연회 이후 제국은 원론을 중시하는 소수의 황제파와 실권을 쥔 다수의 수상파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야 했다. 원론은 원론일 뿐이고, 현실적으로 모든 실권은 수상측으로 넘어와 있는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최유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불이라도 이는 듯 그의 눈에 뜨거운 것이 일렁거렸다. 저절로 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것이 모두 다,
“공께서 그리 하지만 않으셨다면!”
모든 것이 서엽의 탓이었다!
“공께서, 앞장서서 황제의 앞에 무릎 꿇지만 않으셨더라도!”
그래! 황제가 용인이라는 것이 밝혀진 그 순간에 가장 먼저 그의 앞에 엎드려 충성을 맹세한 것은 다름 아닌 서엽이었다! 서엽이 그리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렇게 외치며 무릎 꿇은 것이 서엽이 아니었더라면! 서현의 눈을 의식해서라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황제의 앞에 모조리 무릎을 꿇지는 않았으리라, 그리도 소리 높여 충성을 맹세하지는 못했으리라!
그러나 일은 벌어졌다. 최유는 아직도 기억했다. 마치 해일이 전정 안에 밀어 닥친 것 같았다. 그 많던 사람들이 하나의 생각에 조종당하는 것처럼 일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황제에게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정통성이 있음을, 그리고 그 정당한 황제에 대한 영원한 충성을!
돌이켜보면 당시 그 자리에는 전정 밖과는 차원이 다른 압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전정 밖의 것보다 훨씬 밀도가 높아 숨을 막히게 하는 공기와, 어깨를 힘껏 누르는 듯하던 무형의 힘. 그 ‘힘’이 내리는 명령을 거부할 수 있을 만한 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허나, 뒤돌아 당시 자신의 외침을 타의(他意)가 개입된 것이다, 자신의 본의가 아니었다 부정할 수 있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최유의 원망 서린 시선이 똑바로 서엽을 향했다. 저 사람! 저 헌의공 서엽이 버티고 있는 한은 그 누구도!
서엽이 태연히 대꾸했다.
“용님의 화신을 앞두고 용님의 백성이 경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더냐.”
“그 일에 대해서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이후에는. 그 이후에는 어찌 그러셨나이까.”
하고 따지는 최유의 눈에 불같은 것이 이글거렸다. 서엽은 아무 대꾸 없이 한 쪽 눈만 천천히 추켜올렸다. 내가 무얼?하고 묻는 듯한 빤빤한 표정에 최유가 콱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 서현이 목소리를 높여 끼어들었다.
“그만. 분명 그만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허나 그 침착한 만류가 오히려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무형의 둑을 무너뜨렸는지, 최유가 거의 울부짖듯이 소리쳤다. “그러나 정말로, 이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공의 친부 되시는 헌의공께서 앞장을 서서,”
“천견! 자네답지 않게 이 무슨 짓인가!”
“헌의공께서 가장 앞장을 서서 황제를 지지하시다니요!”
서현이 말린 보람도 없이 최유가 결국 그 말을 내뱉었다. 쿵! 집채만 한 돌덩이가 떨어지는 듯한 충격이 세 사람 사이에 떨어졌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서현의 하얀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졌고, 최유의 얼굴은 낭패라는 듯이 가득 일그러졌다. 그리고 서엽은. 무심결에 서엽의 얼굴을 훔쳐본 최유의 눈이 커졌다. 서엽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최유가 할 말을 잊은 가운데, 서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나?”
최유는 처음에는 그것이 물음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대답해 보게. 어찌하여 원망을 들어야 하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군.”
하고 서엽이 대답을 재촉한 뒤에야, 최유는 겨우 깨달았다. 그가 한껏 홉뜬 눈으로 서엽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을 때마다 자글자글 잡히곤 하는 눈주름과 입주름 따위가 지금도 눈에 비쳤다. 그것을 본 뒤에야 깨달았다. 웃고 있다. 그리고, 서엽의 눈과 표정, 그 어디에도 당연히 있어야 할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한 말 그대로, 그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응당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뿐이다.” 서엽이 우둔한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로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껏 용통(龍統)임을 증명치 못하고 계시던 황상께서 사실은 와룡임을 알았으니, 태황(太皇) 폐하들의 은혜를 입은 공신으로서 물심양면으로 보군(輔君)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어르신께서 그리하시면 체제공은 어찌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물론 우리 희 또한 용통이지.”
그렇게 대답하는 서엽의 목소리는 비단처럼 매끄럽고 햇솜처럼 포근했다.
“허나, 정통한 황통(皇統)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으냐.”
그리고, 솜덩이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끝을 모르고 꺼져든다.
“바른 길이 있는데 굳이 길귀로 돌아가는 것은 까막바보나 할 짓이지.”
길귀. 갓길 따위에 비유 당한 서현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그런 서현을 다정한 시선으로 돌아보며 서엽이 덧붙였다, ‘희야, 너도 그리 생각하지 않느냐?’
서현이 입을 연 것은 그 때였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아버님께서 그리 말씀하실 수는 없습니다.”
“다른 치라면 모를까, 나는 안 된다?” 서엽이 보란 듯 과장된 태도로 고개를 까닥했다. “이 아비는 네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모르겠구나. 그리 말하는 까닭이 있느냐?”
“저를 채찍질 한 것은 아버님이셨습니다.” 서현의 어조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제가 무어라 했었습니까!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싫다 했었습니다, 거부했습니다, 뿌리치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 당신께서는 저를 그리 하게 두지 않으셨습니다. 다름 아닌 당신께서,”
서엽이 그 말을 낚아챘다.
“내가 네 등을 떠밀었지.”
“···잊지는 않으셨군요. 요 며칠 사이 그 사실을 잊고 계신 줄만 알았습니다.”
“벌써 노망이 들 나이는 아니지 않으냐. 네가 어찌 여기는 줄은 모르겠다만, 이 아비가 그렇게까지 늙지는 않았단다.”
“그런 분께서, 그리 행동하시었습니까?”
그 칼 같은 추궁에, 서엽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달라졌지 않느냐.”
“상황이 달라졌다.”
“그래. 아가, 현아야. 아비가 과거에 싫다던 네 등을 떠민 것은, 당시에는 너 하나 밖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란다. 예는 용님에 의해 만들어져 용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 그러므로 용이 부재하면 이 나라는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헌데 그 당시에는 용은커녕 용의 증후를 가진 용인조차 없었지, 그러니 이 아비는 너를 대안으로 제시할 수밖에 없었단다.”
“마치 나라를 위해서 희생했었다는 투로 말씀하시는군요.”
희생이 아니라면 당시의 내 입장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 서현의 비꼬는 말에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한 서엽이 덧붙였다.
“헌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서현을 향해 두 팔을 조금 벌려 보였다. “기쁘구나. 이 아비는 어깨의 짐을 던 느낌이란다. 그 역할을 그리도 싫어하지 않았더냐, 이제 현이 너는 자유란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대화가 끊겼다. 서엽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웃음기 어린 얼굴로 서현을 응시하고만 있었고, 서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뜻 봤을 때는 서엽을 보고 있는 것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그는 서엽 뒤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서엽의 어깨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서엽의 뒤에는 벽과 벽에 걸린 장식 족자 외에는 어떤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한 곳에 못 박힌 듯 미동조차 없던 서현의 눈이 어느 순간 서서히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아주 끔찍하고, 아주 끈질기며, 세상 무엇보다도 지긋지긋한 어떤 것.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함께 있어 그것을 증오하는 것조차 잊곤 하는 그런 것을 응시하는 눈이었다···.
“자유.”
불쑥 그가 내뱉었다. 힘을 북돋아 주려는 듯이 서엽이 그 말을 받았다.
“그래, 현아. 이제 너는 자유의 몸이란다.”
“그렇습니까.”
서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똑바로 서엽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서현이 요구했다.
“그렇다면 제게 주십시오.”
“···뭐?”
“제좌를 제게 주십시오.”
서현은 손을 내밀었다.
“제 온전한 의지로 그것을 원합니다. 제게 주십시오.”
“그러나,”
“과거에는 분명히 슬희었습니다. 두렵고, 버거웠습니다. 허나 말 그대로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 서현이, 서엽이 방금 전 한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 때로부터 십 수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세차게 흐르던 강이 메마른 땅이 되고,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산이 물길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입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현이 서엽을 당해 다가갔다. 어두운 방 안에서 소리도 없이 다가오는 서현은, 앉아서 올라다 본 때문인지 원래보다 훨씬 더 크고 위압적으로 보였다. 서엽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서현이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울던 아이가 귀신이 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지요.”
“······.”
“슬희다? 아닙니다. 버겁다? 옛 이야기지요.”
서현이 요구했다.
“제좌를 원합니다.”
“그러나 제좌의 주인은 모든 자격을 갖추었다.”
“끌어 내리십시오.”
그 자는 안 됩니다, 하고 서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자만은 안 됩니다. 다른 이는 몰라도 절대 그 자만은-,” 격한 어조로 말하던 서현은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무슨 까닭에 그래야 하느냐 서엽이 묻기 전에, 그가 바로 입을 열어 말을 돌렸다. “소자는 아버님께서 뿌리신 씨에서 난 귀신이니, 아버님께서 책임 지셔야 합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서엽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참으로 미안하구나. 허나, 현아. 너도 알지 않느냐. 네가 바라는 일은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처리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야. 또한 이 아비는 나라의 공신이니···,”
“되었습니다.”
하며 말허리를 끊는 소리에 섞여 부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서엽을 찢어 죽일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서현이 쏘아붙였다.
“더 이상의 원조는 없어도 좋습니다. 다만 소자의 갈 길을 가로막지만 말아 주십시오.”
“···그 말을 하려고 온 게냐.”
할 말을 모두 마쳤다는 듯 막 등을 돌리는 서현을 향해 서엽이 탄식하듯 내뱉었다. 그리 말하는 아버지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서현이 대꾸했다, ‘그 외에 어떤 목적이 있겠습니까?’ 최유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서현이 갈 길을 터주었다. 막 곤외(?外)로 발을 내딛던 서현이 그러나 완전히 방을 나가기 직전, 머리만 돌려 서엽 쪽을 바라보았다. 서현이 선언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소자는 기필코 제좌(帝座)에 오르고 말 것입니다. 결코 아버님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서엽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말은, 마치 이 아비가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그 말에 서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쾅! 서현이 힘껏 장지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우르르 문틀이 흔들렸다. 그 소리와 모습이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모습과 같았다.
*
마치 거대한 동굴 깊숙이 틀어박혀 있는 기분이었다.
“하루 바삐 동제도감(東祭都監)을 두어야 하옵니다.”
“천제사를 올리는 것이 급선무이니 응당 그래야 하지요.”
“허나 운현궁에서 감결에 도통 답신을 주지 않으시니,”
“운현궁의 의사가 무슨 상관이겠소? 지원사께서는 말씀을 이상하게 하시는구려. 지원사께서 방금 하신 말씀은 마치 황상께서 천제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꼭 운현궁 마마의 윤허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려!”
“추사, 지나치게 과민하신 언사가 아니시오? 설마하니 지원사께서 그런 뜻으로,”
“아니, 지금 말이 그렇지 않소! 태황태후께서 황실의 큰 어른이시기는 하나 공은 공, 사는 사. 천제 같은 중대사까지 국부(國父)께서 태황태후전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니, 이게 어디 될 일이요!”
“어허, 눈치를 보다니! 내가 언제 그렇게 말을 했소이까!”
“진정하시오, 추사. 지원사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저 나라의 중대사인 만큼 절차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여···,”
“답답하다, 답답해! 그것을 지금 말이라고 하시오!”
귀 밖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들이 부그르르 끓어오른다 싶더니 결국 게거품을 내뿜고 넘쳐흘렀다. 그야말로 난장판. 화려한 것을 넘어서 오히려 장엄하기까지 한 보개천장(寶蓋天障) 위 용봉(龍鳳) 장식과 드넓은 내부, 그 중앙 뒤편에 자리 잡은 화려한 금빛 어좌(御座) 따위가 아니었다면 처음 보는 이가 제국의 정전(正殿)이 아니라 한창 때의 시장 바닥이라고 오해해도 할 말이 없는 노릇이었다.
중신들이 내지르는 고함소리가 정전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삽시에 낯빛을 바꾸어 황제의 오랜 충신인 척 하는 이들이나, 작일 이후 운현궁에 틀어박혀 침묵하고 있는 태황태후의 측근들이나 가릴 것 없이 왜자하기 짝이 없었다.
그 소리가 황제의 귀에는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마치, 굴속에 틀어박혀 바깥소리를 듣는 것과 같았다. 실지보다 훨씬 크게 들리지만 현실감은 없는. 그리고 스스로 만든 무형의 굴 깊디깊은 곳에서 황제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치 작일과 금일이 하나의 날인 것처럼, 아니, 아예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고 있는 것처럼, 오직 하나의 생각만을.
황제는 눈을 내리깔았다. 착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괴괴한 어둠 속에 온통 잠겨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황제의 먹먹한 머리에는 그 어둠만이 실상이고, 눈에 스치는 모든 화미한 풍경들과 귓전을 때리는 맑은 목소리들이 도리어 허상처럼 생각되었다.
이 물안개 같은 어둠에 휩싸인 것이 언제였더라. 분명히 시간이 얼마간의 흘렀을 터인데, 완전히 사고하기를 포기한 골로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마치 그 일이 일다경 전에 일어난 일인 것처럼도 느껴지고, 다음 순간에는 몇 년이나 지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가하면 그 직후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이 어둠 때문이었다. 그러나, 빼곡히 들어찬 어두움은 시간이 지나도 점점 짙어지고 무거워지기만 할 뿐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의 발을 잡아끄는 것을 느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숨이 차오른다. ···그러면 이것은 어둠인가, 물인가, 늪인가. 아니면 그것을 가장한 암귀(暗鬼)인가.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초점 없는 눈은 그 때문에 더더욱 검고 검었다. 그 먹물처럼 새카만 눈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푸르른 빛까지 띈 창백한 입술이 불쑥 내뱉는다.
“시각이.”
그 갑작스런 중얼거림에 앞뒤 없이 뒤엉켜 다투던 소리가 순간적으로 멎었다. 자신의 코앞에 펼쳐진 난장판과 자신은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듯한 투가, 몹시 당혹스럽게 일순간이지만 섬뜩하기까지 했던 탓이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시각이 어찌 되는가.”
그 말에 당혹한 백관들 중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지만, 황제가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이어서 중얼거렸다, ‘늦어도 사시(巳時)에는 태사의감(太司醫監)에서 기별이 온다 하였는데···.’
그 중얼거림을 들은 자들은 그제야 겨우 황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얼굴이 굳은 재관의 소맷자락을, 그 곁에 있던 자가 툭 치며 소곤거렸다, ‘혹 들으셨소? 여기까지는 잘 안 들리는구려.’ 그 말에 질문을 받은 이가 굳어진 표정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대꾸했다.
“그 자 말이오. 청의관 수객···.”
“그 자가 아직도 숨이 붙어 있소이까?”
하는 말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쉿!,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날카로운 숨소리에 화들짝 놀란 자가 쳐다보자, 그 소리를 낸 이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속삭였다.
“목숨이 아깝지 않으신 모양이구려. 이 자리에서 당장 목이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입 조심하시오.” 그 경고 뒤에 따라붙는 말은 더더욱 나직했다. “작일 대연회장에 안 계셨었소? 허나 그렇다 해도 어떤 연유로 황상께서 와룡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는지는 들었을 것 아니요?”
그 속삭임을 듣고 나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재관이 헉 숨을 삼키며 재빨리 어좌가 있는 쪽을 살폈다. 그러나 이리 멀리서, 게다가 거의 중얼거리다시피 한 말이었으니 아마도 황상께서 자신이 한 말을 듣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
하지만 다음 순간 재관이 가엾도록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어좌에 끈 떨어진 꼭두각시 인형 같은 꼴로 앉아 있는 황제가 눈만은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탓이다. 착각인가 했지만 재관은 곧바로 그 희망조차 버려야만 했다.
“사시까지다.”
황제가 그 재관을 똑바로 응시하며 내뱉었다.
“혹여 사시에 다다른 소식이 악보(惡報)라면, 그대도 살아남을 희망은 버려야 할 것이다. 만일 청의관 수객이 절명하였다는 소식이라도 들려온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다는 듯 황제의 단화(端華)한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진다 싶더니, 이윽고 그가 씹어 내뱉듯 내뱉었다. “그대는 물론이요, 네 처자식의 몸뚱이를 천만갈래를 찢어 개에게 먹이고 네 죽은 부모의 묏자리를 파헤쳐 목을 베리라. 네 놈과 한 방울이라도 같은 피가 흐르는 자는 모조리 찾아 관직을 삭탈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한 후에 평생 이 하늘 아래 떳떳이 고개를 들고 살아갈 수 없게 하겠다. 또한 죽은 후에도 땅에 묻힐 수 없도록 사체를 동강내어 산중에 뿌릴 것이다. 혹여 이 말이 농언인 것 같으면.”
황제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한 번 두고 보자꾸나.”
삽시간에 성동(盛冬)이 찾아온 것 같았다. 고요한 정전 안에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황제의 말에 문무백관들이 두려움에 질려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황제의 목소리에는 노기 대신 희미한 웃음기가 배어 있었지만 그것을 진실로 흐뭇하여 나온 것이라 믿는 멍청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황제의 목소리에 스며 있는 그것은 분명 웃음이었지만 기쁨 대신 광기(狂氣)가 서린 웃음이었다.
정전 안은 온통 침묵에 휩싸였다. 더 이상 소리 높여 자신의 생각을 외치는 사람도, 옆 사람과 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리는 사람도 없었다. 입을 다문 만조백관들은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굳은 채로 황제의 눈치를 살피거나, 제 발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것에 열중했다. 이제는 숨소리 하나, 옷깃이 스치는 소리 하나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제 정전 안은 흡사 정교하게 만든 수 십 개의 목상(木像)이 사람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한 그런 광경이었다.
“시각이···.”
그런 가운데 황제가 다시 시선을 들어, 정전 밖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눈을 뜬 채로 꿈꾸는 듯이 아련하였다. 평상시보다 훨씬 더 파리하여 연한 보랏빛마저 감돌고 있는 입술이 중얼거렸다.
“시각이 얼마나 되었는고.”
무거운 침묵이 정전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가운데, 지금껏 사람들이 말하고 걷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고 있던 작은 소리들이 들려왔다. 부드럽게 넘실거리며 불어오는 온풍(溫風)이 내는 소리며, 그 간들거리는 바람이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을 살짝 흔들어 놓고 가는 소리.
딸랑···. 마치 작디작은 동물이 자신이 있는 곳을 알리려 내는 듯한 그 소리에, 내내 몽롱하던 황제의 눈이 꿈틀했다.
가슴이 선뜩해졌다. 방금 그 소리가. 작은 짐승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 내는 듯하던 그 미약한 소리가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놀란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 아이도 저처럼 울었을까.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지를 힘마저 없어 하염없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금방이라도 꺼질 듯 가느다랗게. ···그런 소리를 냈을까.
천천히 차오르던 숨이 턱까지 찬 것이 느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했던 이틀간이었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황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굳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숨이 머리끝까지 차오를 그 순간도 직감하고 있었다.
···서문경의 죽음이 확정되는 순간.
-곧···, 저 이를 대체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희는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그 일이 있기 전, 누군가가 자신에게 서문경을 가리켜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이이냐 물었다면 자신도 고심 끝에 그것은 아니라 대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고 자신조차 들여다 볼 수 없도록 깊숙한 곳에 감춰진 진심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황제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제는 서현의 말에 결코 고개를 주억거릴 수 없었다. 그 아이를 대체할 만한 사람?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그 아이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 자신의 넋도 돌처럼 굳어, 빈 몸뚱이만 남은 채 시간의 풍파에 서서히 깎여 소멸해 버릴 터이니. 아마도 태의감에서 보내 온 전령이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한다면 제국은 다시 한 번 용을 잃게 되리라.
서현을 위해서라도 그리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확언할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의 몸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만일 이성이 본능을 지배할 수 있었다면 그 사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약간의 시간이 더 흘렸다. 어디에선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와서 황제는 직감했다.
사시(巳時)였다.
멀리서 급박하게 달려오는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굳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 순간 일제히 정전 입구로 가 꽂혔다. 낯선 남자 하나가 보인다. 소매 폭이 비교적 좁은 공색(空色) 주의를 입고 머리에는 장식이 없는 검은 관을 쓴 남자는 허리춤에 태의감 소속임을 알리는 담청색 표패(標牌)를 차고 있었다.
정전 입구를 지키고 있던 시위들이 남자의 앞을 창을 들어 막은 다음 아뢰었다, ‘용 앞에 엎드려 아뢰옵니다. 태사의감 승(丞)박사 전시 태경 들었사옵니다.’
“신 태사의감 정3품 승박사 전시 태경, 감히 용께 엎드려 청하옵니다. 용안을 뵈옵는 것을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어찌 되었나.”
승박사 전시 태경이 깜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치켜들었다. 황제의 목소리가 먼 곳이 아닌 바로 코앞에서 들려온 탓이었다. 몸은 엎드리고 고개는 치켜든 채로, 승박사 전시 태경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느새 황제가 자신의 코앞에 서 있었다. 폐하!, 하고 놀라서 부르는 소리들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황제가 물었다.
“어찌 되었는가 물었다.”
“요, 용님을 뵙,”
“그 아이가 어찌 되었는가 물었느니!”
황제가 언성을 높이자 승박사 전시 태경이 너무도 놀란 나머지 거의 고함을 지르듯이 대답했다.
“청의관 수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