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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군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황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누가 지껄이는 말인지 뻔한 탓이었다. 굳은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건만 놈이 제멋대로 말을 이었다, ‘정말 부럽습니다, 폐하.’ 과장된 어투가 자신을 비꼬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험악한 대꾸가 튀어나갔다.
“무어가 그리 부러우신가?”
“세상의 주인이신 지존의 앞에서 감히 이리 칭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단 하나의 종인(從人)이라도 거느린 미천한 치자(治者)의 입장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것입니다. 어찌 아니 그렇겠습니까?” 하고 매끄러운 혀로 말한 놈이, 보란 듯 일부러 어딘가를 눈짓해 보였다. 호리호리한 청년이 한 단 높이 쌓은 대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놈이 들으란 듯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범님의 세계 백성이라 들었사온데, 참으로 장한 일입니다. 귀천의 법도조차 없는 곳에서 온 자인지라 저 자도 필시 근본이 없을 것이라 여겼사온데, 이거 신이 큰 오해를 한 모양입니다. 저리도 충실한 종자라니, 제 주인에게서 떨어질 것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보상을 바라지 않고 충성하는 저런 자야말로 모든 신자(臣子)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부럽습니다. 참으로 부러워요. 거듭 감탄하는 말이 흘러 나왔다. 언뜻 들으면 서문경을 높이 추켜올리며 격절칭찬(擊節稱讚)을 아끼지 않는 것 같지만, 실상은 떨어질 콩고물도 없는 놈 밑에 붙어서 헛고생이나 하고 있다는 비웃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황제는 이맛살을 구겼다. 놈이 넌지시 물어왔다.
“마음이 흐뭇하시겠사옵니다, 폐하. 저리도 충실한 종복이 있사오니.”
“종복 따위가 아니다.”
황제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놈이 웃음기 어린 말로 능청스레 받아쳤다.
“하기는, 종복보다는 차라리 개에 비할 만큼 투철한 충성심이긴 합니다.”
“뚫린 입이라고 멋대로 놀리지 말라!”
“어이쿠.” 놈이 놀라는 척 뻔히 보이는 연기를 했다. “심기 상하셨다면 부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옵소서. 신은 그저, 저 자의 행동이 참으로 기특하여 칭찬을 한다는 것이 그만,”
“쓸데없는 짓.”
황제가 냉정하게 서엽의 말을 끊으며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충심이 아니다, 오지랖이 넓은 게지.”
그제야 방금 전 황제가 했던 말이 자신이 아닌, 천추전 예인을 자처하고 나선 청년에게 했던 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서엽이 의외라는 시선을 황제에게로 던졌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내세울만한 능력도 없는 이가 저리 나서 봐야 짐의 체면에 금만 갈 뿐이야.”
“대견하지 않으시옵니까?”
“대견?” 비로소 황제가 서엽에게 시선을 주었다. 찌푸린 눈에 짜증과 경멸이 가득했다. 황제가 서엽을 향해 반문했다. “헌의공 그대라면 퍽도 기쁘겠군. 참견하기 좋아하는 놈이 나대면서 자네 얼굴에 흙칠을 할 것이 뻔한데 말이야.”
“그래도 마음이 어여쁘지 않습니까.”
“차라리 나서지 않아주는 편이 훨씬 어여쁘겠군.”
냉소적으로 내뱉은 황제가 결심을 한 듯 근처의 나인을 불러 일렀다, ‘통인례 석정을 불러 오라.’ 명을 받은 나인이 의아해하는 기색으로 석정을 부르려 가버리자 서엽이 히죽 사람 좋은 웃음을 만면에 지으면서 말했다.
“어찌하시려고 통인례까지 부르시옵니까.”
“저 자는 내 예인이 아니다.”
“허나, 폐하.”
“짐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짐의 예인을 자처한 자이니 응당 축대에서 끌어 내리는 것이 옳다.”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단호한 황제의 말을 듣고, 서엽은 잠시 침묵했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 서엽의 손이 까슬까슬한 턱을 느릿하게 쓸어내린다. 그가 끼어들지 않는 틈을 타 황제가 머리를 돌렸다. 저 우측 끝에서 통인례 석정이 두툼한 뱃살을 흔들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 놈이 저지른 죄를 아는지 평소와는 달리 부름에 지체하지 않고 달려오는 그를 향해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서엽이 말하는 것이 그보다 먼저였다.
“폐하의 말씀이 백 번 천 번 옳사옵니다.”
자신의 말에 동의를 표하는 말인데도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 마냥 황제의 표정이 굳었다. 그것에 개의치 않고 서엽이 말을 이었다.
“저 아이의 마음이 기특하기는 하나 폐하의 말씀대로 감히 황상의 예인을 자처한 것도 사실이옵니다. 발단은 좋은 뜻이었다 할지라도 결과가 지존을 능멸한 것이나 다름이 없사오니, 이는 필히 큰 벌로 다스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말한 서엽이 바로 통인례 석정을 외쳐 불렀다. “중랑! 이리로 와 보게.”
“허, 헌의공!”
그렇지 않아도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통인례 석정이 황제의 옆에 저 능구렁이 같은 헌의공 서엽이 있는 것을 비로소 발견하고 펄쩍 뛰어올랐다. 놀란 석정이 돌처럼 굳어 벌벌 떨고 있자 서엽이 그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이 늙은이가 두 번씩이나 입을 놀리게 할 셈인가, 자네도 참 얄궂은 사람이구먼.’ 그 말에 석정이 언제 굳어 있었냐는 듯 무서운 속도로 서엽의 앞으로 당장 자신을 대령했다. 그런 석정의 얼굴을 흘깃 보고 서엽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 얼굴이 왜 죽을상인가.’
“부, 부르시었사옵니까, 헌의공.”
“그래.” 하고 고개를 주억거린 서엽이 미처 황제가 저지할 틈도 없이 축대 위의 서문경을 가리키며 명했다. “저 자를 끌어내게.”
석정이 펄쩍 뛰어올랐다.
“끌어내리라고요! 저 이는 폐하의 예인이 아닙니까!”
“아닐세.”
“예? 아니라니···.”
내심 저 청년과 황제 사이에 오고 간 말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던 석정이 당황하여 황제를 곁눈질했다. 그러나 그가 황제의 표정을 채 살피기도 전에 서엽이 어서, 하고 통인례를 채근했다.
“저 이는 감히 황상의 예인을 사칭한 자다. 그러니 당장 끌어내어 지엄한 국법으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허, 허나, 헌의공. 저 이를 모르십니까? 저 이는 황상이 근래까지 총애하시었던 청의관 수객으로,”
“아네. 자네가 아는 것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 일은 그 일이고, 이 일은 또 다른 일이야. 저 자가 폐하의 윤허도 없이 예인을 자처하고 나선 것은 사실이니 어서 들은 대로 행하게. 내 감히 문무백관과 황친, 황실의 어르신들 앞에서 황상의 예인을 사칭한 죄를 물어 저 자를 크게 벌할 것이야.”
큰 벌을 내린다는 말에 석정이 헉, 숨을 삼켰다. 서엽의 말이 단순한 엄포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이다. 그 증거로, 허리에 큰 칼을 찬 금군(禁軍) 병사 몇몇이 이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척, 척, 척,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발을 맞추어 다가온 시위들이 황제의 앞, 정확히는 헌의공 서엽을 향해 한 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붉은 옷에 붉은 술을 단 대검(大劍), 단순한 금군 군사가 아니라 황실 시위(侍衛)였다.
걔 중 선두에 선 자가 말했다.
“신 청사 이도후 들었사옵니다. 하명하시옵소서.”
그 말에 황제 대신 서엽이 태연히 대답했다.
“통인례가 곧 고할 것이다, 명이 떨어지는 즉시 저 자.” 서엽의 손가락이 똑바로 서문경을 가리켰다. “저 자를 포박하여 황상의 앞에 꿇어앉힌 후 죄를 물을 것이다.”
“송구하오나 저 자의 죄가 무엇입니까.”
“백관과 황친의 앞에서 황상의 예인을 사칭하며 지존을 능멸하였다.”
“그리 하다면 저 자를 발가벗겨 어전(御前)에 꿇어앉힌 후에 그 무릎 위에 사금파리를 올리고 큰 돌을 얹도록 하겠나이다. 그 이후에 폐하께옵서 여죄를 물어 주시옵소서.”
말을 마친 시위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화공예를 위하여 마련된 축대 위로 올라갔다. 갑자기 나타난 시위들이 축대 위로 올라가기까지 하자, 놀란 사람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넓은 축대 한가운데 홀로 서 있던 서문경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시위를 응시한 채 눈을 크게 떴다.
시위들과 서문경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한 발. 서엽이 말했다.
“중랑. 내 말하지 않았나, 고하라.”
두 발. 머뭇거리던 통인례 석정이 더 이상의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황상의 앞에 엎드려 고하나이다. 이번 내춘대연회 화공예 대전 소속의 예인은-,”
“···그만.”
시위들과 서문경 사이의 거리가 손을 뻗으면 닿을 만치 가까워진 순간, 거의 신음소리에 가까운 말이 황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제를 향해 귀를 열어놓고 있던 석정이 그 작은 중얼거림을 단번에 알아듣고 반색을 했다.
“하명하시옵소서, 폐하!”
“되었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씹어 내뱉는 듯이 괴롭게 들렸다. 그것을 못 느꼈을 리도 없으면서 서엽이 태연하게 물었다.
“어찌 저어하시옵니까?”
“짐이 착각을 하였다.”
하고 말하는 황제의 일그러진 시선은 서문경을 향해 있었다. 서엽을 힐끗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예상했던 그대로 비바람에 내팽개쳐진 폐지(廢紙)처럼 처참한 얼굴. 그 표정을 보자 목구멍 끝까지 새삼스러운 감정이 솟구쳤다. 불붙은 석화(石花: 굴)를 삼킨 것 같은 느낌. 서엽의 시선이 차가워지며, 동시에 그 눈빛에 웃음기가 어리었다. 그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으면서도 황제는 결국 고개를 젓지 못했다. 그가 되풀이하여 말했다.
“짐의 불찰로, 기억해내지 못한 것이다.”
통인례 석정이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그리하시면···.”
“저 자는 짐이 칙명으로 명한 예인이 맞다. 그러니 어서 시위들을 물리도록 하라, 어서!”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지만 점점 자제력이 바닥이 났는지 끝에 가서는 거의 비명처럼 변했다. 황제의 고함에 놀란 통인례 석정이 시위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돌아오시게!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니 어서 돌아 오시게들!”
그 소리에 시위들이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서문경의 멱살을 그들이 막 잡기 직전의 일이었다.
부름을 받고 시위들이 돌아오자 통인례 석정이 급히 서문경에게로 달려가 대충 상황을 둘러대고는 공연을 시작하라 일렀다. 돌아가는 상황을 몰라 의아해하는 시위에게는 서엽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중랑의 말대로일세.’ 오해였다는 말이었다. 까마득히 높은 서엽을 상대로 항의는 할 수 없을지라도 순간적으로는 욱할만한 대답이었는데도 시위들은 별다른 불쾌한 기색 없이 자신들의 자리로 물러갔다.
시위들이 물러나자 서엽이 찻종을 들고 입술을 축이면서 느긋하게 말을 건넸다.
“역시 폐하께옵서는 저 수객을 어여삐 여기시는 듯합니다.”
“······.”
“그럴 만도 하지요.”
석정이 물러나고 서문경이 축대 중앙으로 가서 서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서엽이 말을 이었다. 서문경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눈을 내리깐 채, 손가락 끝으로 입가를 가볍게 가리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무대에 올라온 탓에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가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한 눈으로 보던 서엽이 문득 두 눈을 크게 휘며 웃었다. 황제의 표정에 강한 경계심이 어렸다.
“저리도 어질고 착한데, 어느 누가 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항상 의례적으로 짓곤 하는 겉웃음과는 달리 지금 서엽이 짓고 있는 웃음은 한 눈에 봐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이었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황제는 저 남자가 저런 표정을 짓곤 했을 때, 늘 했던 말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관성이 된 공포가 밀려온다.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진다.
“그래···.” 남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짧은 중얼거림을 내뱉고서 주름이 진 입술이 기분 좋게 미소 짓는다. 남자의 눈이 똑바로 자신을 향하고, 그가 익숙해진 폭언을 내뱉었다. “저런 아이라면 누구에게나 정을 두고 감싸줄 것이다 싶으셨습니까. 비록 저주 받은 족속이라도.”
언제나처럼,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서문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무엇을 할지 결정할 모양이었다.
그 때 황제가, 겨우 입을 열었다. 거의 입 속에서 웅얼거리다시피 하는 소리.
“말했다. 저 아이는, 짐에게 아무 것도 아니야.”
서엽은 웃었다.
“정말로 그러하였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야지요.”
저 아이가 주둥이가 찢어지든, 윤간을 당하든 목이 날아가든. 그 어떤 일을 당하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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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옷은 입은 사내들이 갑자기 발을 돌려 돌아가자, 서문경은 그 낯선 남자들이 불현듯 축대 위로 쳐들어왔을 때만큼이나 당황했다. 파장 직전에 자신이 난입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만큼 다른 예인들의 입장 때와는 달리 간단한 소개조차 해주지 않는 것은 하는 수 없는 일이지만, 몇 다경 씩이나 식이 지연되고 아무리 봐도 병사로밖에는 안 보이는 사람들이 난입했다가 별다른 일도 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 상황이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사람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표정이 보이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서문경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참으로 희한한 상황. 그러나 어디에 처박혀 있었는지 한 동안 보이지도 않던 통인례 석정은 드디어 헐레벌떡 뛰어 모습을 드러낸다 싶더니 이렇게만 말했다.
“시작하시게.”
···상황 설명은? 서문경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았다. 넋이 쏙 빠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석정은 실제 정신 상태도 그런지, 서문경의 그 험악한 기색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바로 소리를 높여 고하였다.
“하례, 고시(告示)-.”
“술사(術士),” 하고 말한 하례 궁인이 잠시 멈칫하고는 서문경 쪽을 쳐다보았다, 서문경이 고개를 저었다. 하는 수 없이 하례가 말했다. “호계(虎界) 수객(水客), 무명(無名)-.”
둥!
북소리가 한 번 울렸다.
서문경은 큰 숨을 삼켰다. 쿵쿵쿵 뛰어대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장내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와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서문경은 그들을 피해 황제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서문경의 낯빛이 흐려졌다. 화내고 있겠지.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노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납득하지 못하고 그에게 화를 냈었지만, ···그래도 나를 그토록 말린 데에는 이유는 있었을 텐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황제에게서 시선을 돌린 서문경이 들이쉬었던 숨을 다시 내뱉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황제가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서문경은 두 손바닥을 맞댔다. 무엇을 만들어 내야 할까. 무엇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기뻐할까. 손바닥 사이에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더운 기운이 느껴졌다.
서문경이 왼손을 그 자리에 고정한 채로 오른팔을 확 펼쳤다. 왼손바닥과 오른손바닥 사이에서 가로로 긴 비눗방울이 주욱 이어졌다가 퐁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길게 분 고무풍선 같은 모양을 하고 있던 비눗방울이 툭 터지며 수 십 개의 동그란 비눗방울로 분열했다. 분열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금방 장내가 수천, 수 만개의 비눗방울로 가득 찼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서문경이 다시 손바닥을 마주 댔다가, 양팔을 활짝 펼쳤다. 손바닥 사이의 공간에서 수 백 마리의 나비가 날아올랐다. 희고 푸르고 붉고 노란 수 십 종류의 나비들이 두 날개를 펼치고 장내를 날았다. 와아, 어린 소녀가 짤막한 탄성을 질렀다. 수 백 마리의 나비 중 하나가 자신의 손등에 앉은 탓이다. 봄이 와 돋은 새순처럼 고운 유록빛 나비였다. 나비? 아니다. 소녀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 끝을 가져다 대자, 손가락이 닿는 그 순간 나비가 오색빛깔로 반들거리는 비눗방울로 변해 톡 터져버리면서 환한 빛가루가 소녀의 몸을 감싸며 솟구쳐 올랐다.
비눗방울과 나비와 가루처럼 흩날리는 빛이 전정 안을 가득 채웠다. 나비가 날고 그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에 비눗방울이 실려 가며 그 위에 빛가루가 내려앉아 비눗방울을 제 색으로 물들였다. 한 번 바람이라도 불 양이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서문경이 이번에는 두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두 손바닥을 댔다. 쩌저저적! 철 따위가 우그러드는 소리를 내면서 축대 위가 빙판(氷板)으로 변했다. 얇게 은을 한 막 입힌 것처럼 반짝이는 은반(銀盤) 표면에 오색빛깔 나비들과 빛가루가 그대로 비추어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비친 것인지 가늠을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은반 위에 이번에는 꽃들이 떨어졌다. 휙 바람이 불자 꽃과 나비들이 소용돌이치며 날아올랐다. 그야말로 꽃과 나비와 빛의 폭풍이었다.
바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이 바람이 자연스럽게 불어온 바람이 아니라 서문경이 일으킨 바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람에 실려 간 비눗방울들이 한데 모이고 쌓여 거대한 성문을 만들었다. 각도에 따라 수가지 색으로 아롱거리는 그 모습이 마치 은반 위에 뜬 무지개 같았다. 이번에는 나비들의 차례였다. 서문경이 손을 뻗자, 나비들이 줄지어 서문경의 손 안으로 날아왔다. 펼친 손바닥 위에 않은 나비를 우그러뜨리듯 서문경이 콱 주먹을 쥐었다. 작은 비명이 여기저기에서 들렸지만,
“!”
그 비명은 곧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쾅! 서문경이 팔을 한 번 휘두르자, 온갖 기기묘한 빛깔로 타오르는 불 채찍이 비눗방울로 만든 성문을 때렸다. 성문이 으르르르 흔들리며 그대로 무너졌다. 다만, 찬란하게 반짝이는 빛으로 변해서였다. 바람이 불어, 그 빛을 싣고 장내를 한 바퀴 크게 돌았다. 사람들의 손이 빛무리를 잡으려 저절로 움직였다.
채찍을 잡은 채로 서문경은 생각했다. 뭘 해야, 여기서 더 뭘 해야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할까. 채찍을 던졌다. 그 채찍이 다시 나비로 변해 커다란 원을 만들었다. 확 그 원 주변이 불길로 타올랐다. 서문경이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는 불 속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그러나 높은 곳에 있는 원 안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고 서문경의 온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서문경이 바닥을 구르자, 담이 약한 여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불이!”
“세상에나, 이를 어째!”
그러나 그 때였다.
“아니야!” 누군가가 말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
온 몸에 불이 옮겨 붙어있던 서문경이 팍 소리와 함께 수 백 마리의 나비로 변해 하늘을 날았다. 술사는?! 누군가가 외쳤다. 그러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여깁니다.”
“악!”
술사는 어디에 있느냐며 소리를 질렀던 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떨어졌다. 자신의 바로 옆에서 서문경이 대답한 탓이었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훌쩍 일어난 서문경이 다시 축대 위로 올라가 배에 한 손을 대고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와아아아! 사람들이 아낌없는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서문경이 손을 움직이자,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어느새 얼음이 사라진 바닥에 화문석처럼 깔려 있던 꽃송이들이 두둥실 날아 여인들의 손 안에 떨어졌다. 와! 손 안에 떨어진 꽃송이를 보고 앙증맞은 동녀(童女)가 탄성을 질렀다. 계집아이가 제 어미인 듯한 여인의 옷자락을 당기며 흥분된 음색으로 외쳤다, ‘어머니, 향일화(向日華: 해바라기)여요!’ 그 말에 꽃을 받은 여인들이 제 손 안의 꽃을 들여다보고 하나같이 탄성을 질렀다. 이 계절에 필 리가 없는 여름꽃, 가을꽃은 물론, 생전 처음 보는 꽃도 다수 있었다.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퍼드득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새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사람 모양으로 어른거리는 빛무리가 머리에 쓴 것을 보아하니 관(冠) 종류인 모양인데, 그 모양새가 마치 커다란 먹이를 삼킨 뱀 같은 모양새였다. 빛무리가 무릎 같은 곳을 살짝 굽히는가 싶더니 바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요상한 모양의 관이 사람들 머리 위를 뱅그르르 돌았다. 관 안에서 후두둑 자갈 같은 것이 떨어져서 주위 보니 단단하게 굳힌 설탕과자였다.
관이 훌쩍 날아 활짝 핀 꽃과 아롱거리는 구슬을 흩뿌리며 축대 앞으로 날아갔다. 황친들과 황제가 있는 자리였다. 일순 경계하는 황친들의 앞에 멈춰 선 빛무리가 빈 잔에 맑은 술을 한 잔씩 따르고는 태황태후의 앞에 가서는 넙죽 큰 절을 했다. 오오, 하며 태황태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자, 두 손을 다 비쳐 보이는 등 뒤에 삭 감춘 빛무리가 짠하고 커다란 꽃다발을 태황태후의 발치에 바쳤다. 춘하추동의 모든 꽃들을 한데 엮어다 만든 꽃다발은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 발치에 놓자 태황태후가 꽃무덤에 파묻힌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옳다, 옳다. 어찌 이리도 신통한고?’,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태황태후가 어린아이처럼 손뼉까지 치면서 기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이 날아 황제에게로 향했을 때였다···.
뱅글뱅글 돌면서 날아간 관이 곧바로 황제의 품 안으로 향했다. 어룽거리며 빛무리가 사라지고 검은 관만이 남았다. 곧바로 그 관마저도 흐릿해진다 싶더니, 사라져가는 관 안쪽에서 자그마한 새끼새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황제가 얼결에 걔 중 하나를 받아들자 새끼새가 부리로 콕 황제의 입을 쪼았다. 무방비하게 벌리고 있던 입술 안으로 단 설탕과자가 하나 또그르르 굴러갔다.
사람들은 청의관 수객이 보여주는 볼거리가 드디어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또! 하고 반가운 소리로 외치며 사람들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냐.”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서문경 또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훽 머리를 돌렸다. 그런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저건 내가 한 게 아냐!”
바람이 점점 거세어졌다. 환호하던 사람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그로부터 불과 십 여초 뒤의 일이었다. 고작 몇 초에 불과한 시간에 바람이 순식간에 변화했다. 산들바람에서 거센 바람으로, 칼바람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꺄아아아아악!”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휙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볼을 할퀴고 지나갔다. 바람이 그만큼 거세다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정말로 바람이 사람의 피부를 찢어 놓았다! 사람들이 비명과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옷이 찢어지고 채 가리지 못한 자리에서 피가 흘렀다.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무슨 변고요!”
“마마, 옥체가 상하시옵니다!”
놀라서 고함을 지르는 태황태후를 엄유가 황급히 잡아끌었다.
“마마!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어찌!” 그러나 태황태후는 칼같이 엄유의 제안을 일축했다.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태황태후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금위군! 금군은 무얼하고 있는가! 시위는 무엇을 하고 있느냔 말이다! 어서 저 자를 잡아!”
“저 이의 짓이 아닙니다!”
하고 고함을 지른 것은 황제였다. 태황태후가 파르르 몸을 떨며 황제를 노려보았다.
“정녕 애욕에 눈이 머시었소? 저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온단 말이오?!”
“청의관 수객의 ‘힘’은 환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런 살상력 따위는 없사옵니다!”
“저기에 증거가 있지 않소!”
탕! 태황태후가 어상을 때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 자가 공연을 하던 중에 바람이 일었고, 저 대강풍(大强風)이 황상의 백성들을 해하고 있지 않소! 또, 저 바람이 해하지 않는 것은 저 수객뿐이지 않소! 이럴 진데 황상께서는 아직도 저 치를 감싸려 하시는가!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소, 이 상황 자체가 빼도 박도 못한 증거요! 시위!”
“마마.”
부름을 받은 시위 대신 서엽이 나섰다. 태황태후가 성난 얼굴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노려보았다가 자신에게 말을 건 이가 다름 아닌 헌의공 서엽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소나마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서엽이 말했다.
“저것은 술이옵니다. 그러니 어설픈 창검(槍劍)보다는 같은 술로 제압하는 것이 옳을 것이옵니다.”
“옳다.” 서엽의 의견이 옳다고 여긴 태황태후가 당장 엄유에게 물었다. “자당아, 박사들은 어디에 있느냐?”
“마마, 신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생각지도 못한 서엽의 말에 태황태후가 멈칫했다.
“헌의공이?”
“신이 미덥지 못하십니까.”
태황태후가 그럴 리가 있느냐며 급히 머리를 저으려는 순간, 황제가 끼어들어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하고 말하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폐하, 어디를 가시옵니까? 하고 누군가 묻자 황제가 대꾸했다. “저 이의 짓이 아니니 제압할 필요 없어.”
태황태후가 노하여 소리쳤다.
“아직까지도 그런 말을 하시오!”
“사실입니다!”
“황상!”
황제가 벼락같은 맞고함을 지르자, 놀란 태황태후가 가슴께를 부여잡고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며 엄유가 외쳤다, ‘이 무슨 불측불효한···!’ 그러나 엄유는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내내 침묵하고 있던, 황제의 외조부 엄충이 나섰던 탓이다.
“황상.”
하고 말하는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금방이라도 엄유의 멱살을 붙잡을 기세였던 황제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엄충이 경멸하는 듯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이 무슨 망신스러운 짓거리란 말입니까.”
“허나, 저 자는···.”
“신도 들었사옵니다. 주제도 모르고 여부인(如夫人: 애첩) 노릇을 하던 놈이라지요.” 하고서 잠시 말을 멈춘 엄충이 서문경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덧붙였다. “황상의 말씀처럼 저 치의 실책이 아니라도 어떻단 말입니까. 저대로 노대바람에 몸이 찢겨 죽은들. 어차피 살아나도 역모죄로 사지가 찢길 것을.”
“······!”
황제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그가 이를 갈며 대꾸했다.
“그런 일은 천지가 뒤집혀도 없을 것입니다.”
태황태후를 제 뒤로 숨겨 칼바람을 피하게 하면서 엄충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럴 때마다 소인은 핏줄은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드옵니다.”
“그리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서엽이 끼어들었다. “벌써 노망이 드신 것도 아닌데, 황상의 생모께서 누구신지 잊으신 것도 아닐 터이고.”
“헌의공께서도 여전하시구려.”
엄충과 서엽이 잠시간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엄충의 눈빛은 얼어붙을 듯이 차가웠고 서엽의 눈빛은 뜻 모를 웃음기가 어려 있어 생각을 읽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 또한 찰나의 일. 서엽이 태황태후를 향해 말했다.
“마마께옵서는 운현궁으로 몸을 피하시옵소서. 신이 저 바람을 가라앉혀 보겠나이다.” 그가 시위를 불러 명했다. “어서 마마를 뫼셔라!”
“···허나.”
“염려치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고서 곧바로 서엽이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다.
“희야!”
하고 부르는 말에 태황태후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오, 상국(相國)이 나서시는 게요!”
“손님의 명줄을 끊어 놓을 셈인가!”
그러나 태황태후의 탄성을, 황제의 노성이 끊어놓았다. 황제가 불같이 화를 냈다.
“저 이는 손님이다! 예를 찾은 짐의 손님이란 말이다!”
“허나 지금은 역모의 마음을 품은 역도에 불과할 뿐이옵니다.”
“아니다!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황제의 흥분한 목소리에 대비되어 더더욱 차게 느껴지는 어조로 서엽이 대답했다.
“그것은, 일이 끝난 후에 자세히 알아보면 될 일입니다.” 서엽이 바로 서현에게 명령했다. “희야, 들은 대로 행하여라.”
“소희야!”
황제가 서현의 아명을 외쳐 불렀다. 서현이 무심한 얼굴로 돌아보자 황제가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된다. 아니 돼. 절대로 아니 된다···!”
“가거라.”
서엽이 서현의 등을 밀었고, 황제가 서현의 소맷부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결국 서현은 축대를, 정확히는 서문경의 주변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칼바람을 향해 걸어갔다. 뿌리쳐진 황제의 손이 툭,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안 돼···.”
그러나 그렇게 중얼거린 보람도 없이, 어느새 축대 위로 올라간 서현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닿는 것마다 찢고 베던 칼바람도 서현의 몸에 닿자, 그 맨 피부에 닿기 직전에 사그라졌다. 서현이 거의 소용돌이치다시피 하는 칼바람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희야!”
사람이 걷히자, 황제가 비명을 질렀다.
“놓아! 그 손을 놓거라! 제발, 희야!”
황제가 거듭 소리쳤지만 서현의 뒷모습은 잔파도 앞에 버티고 선 기암절벽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걷혔다. 그리고 사람들은, 수상 서현이 한 손에 물손님의 길고 가느다란 목줄기를 움켜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삽시간에 날카로워지며 여기저기를 난도질하기 시작했을 때 즈음부터 사실 서문경의 거의 제정신을 차리고 있지 못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여인들의 새된 비명이 들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손이 움찔거리기는 했으나 그 이상의 행동은 할 수 없었다. 언뜻 보면 중구난방으로 휘날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칼바람의 중심에 있는 서문경은 알 수 있었다. 그 바람은, 마치 서문경은 그 자리에 가두듯이 날리고 있었다. 서문경이 조금이라도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면 회초리질이라도 하듯 매운바람이 서문경의 팔다리를 긁었다.
악! 다시금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던 서문경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자 뒤에서 휙, 불어온 맞바람이 서문경의 목을 휘감았다.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서문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정말로, 으르렁거리는 공기가, 형체도 없는 주제에 무게감이 느껴지는 공기가 자신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서문경은 직감했다. 자신이 여기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 공기가 가차 없이 자신의 목을 옮아 맬 것이다!
상처투성이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서문경의 얼굴이 공포로 질렸다. 지금, 나한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근래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조원의 얼굴이 바로 떠올랐다. 하지만, 하지만! 분명 조원에 의해 정신을 잃고 일시적으로 시력까지 잃었었지만 지금 서문경이 느끼는 공포감은 그 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문경의 몸이 저절로 움츠려들었다. 윙, 위잉, 위이잉-. 세차게 바람이 불 때마다 나는 위협스런 소리가 서문경의 귓가를 울렸다. 그 소리에서 서문경은 분명한 적의를 느꼈다.
바닥을 단단히 짚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고, 혼란과 공포로 범벅이 된 눈이 하염없이 앞을 향했다. 갈피가 서지 않았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사람들이 모두 도망쳤는지 더 이상의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군중의 비명에 가려 지금껏 들리지 않았던 익숙한 목소리들이 바람을 뚫고 들려왔다. 크게 노하여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태황태후의 목소리와, 그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는 황제의 목소리. 서문경의 낯빛이 흐려졌다. 어서, 어서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
그 때 사람들이 다투는 소리가 잠시 멎었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조용한 곳에서 귀를 기울여도 들릴까 말까한 발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때를 맞추어 바람소리가 유난스럽게 커졌지만 발소리는 바람소리에 조금도 묻히지 않았다. 내 쪽으로 오고 있어. 서문경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곧 나타날 사람의 모습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담겠다는 듯 그의 눈이 커졌다.
날, 구해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소희야!”
발소리 외의 소리는 허락하지 않던 바람소리마저 뚫고, 천지를 뒤흔드는 절규가 들려왔다. 폐하?!, 기대감이 어려 있던 서문경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황제가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안 된다! 하지 마! 하지 마라!”
황제가 부르는 소희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지만 서문경은 튕기듯 일어서며 몸을 돌렸다. 그의 목을 감고 있던 바람이 어김없이 그의 목을 졸랐지만 완전히 혼이 나간 서문경은 그조차도 막을 수 없었다. 서문경이 이를 악물었다. 모르겠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조차 모르겠다. 하지만, 도망쳐야 돼!
저 사람으로부터!
그러나 축대에서 뛰쳐나가려는 서문경을 밧줄처럼 단단하게 변한 바람이 사방에서 옭아맸다. 서문경은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로 굳었다.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인 발을 필사적으로 버둥거려 보았지만, 발에 부딪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때문에 서문경은 깨달았다. 허공으로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사,”
살려줘, 하고 외치려던 목이 콱 막혔다. 그 사이에도 발소리는 계속 서문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서문경의 눈이 점점 커졌다. 저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모습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발소리가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서문경의 눈과, ‘그 남자’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서문경은 일순 남자의 이마가 조금 찌푸려진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눈을 마주친 채로 남자가 서문경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서현.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의심할 나위 없이 서문경을 향한 말이었다.
“···!”
어째서 그런 말을? 서문경이 놀라서 생각한 순간, 서현이 손을 들어 서문경의 목을 움켜쥐었다. 서문경의 손발을 묶고 있던 바람이 사라졌다.
**
몰아치던 바람이 사그라지고 드러난 충격적인 모습에 장내가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그 침묵을 가장 먼저 떨치고 일어난 것은 뜻밖에도 태황태후 엄씨였다. 탁! 그녀가 제 무릎을 강하게 치며 소리쳤다.
“역시 저 치의 짓거리였군!” 태황태후가 주위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렇지 않소? 상국이 저 치를 제압하자마자 대강풍이 멎지 않았소?”
“일리가 있는 말씀이옵니다.”
엄유가 당장 그 말에 맞장구를 치고는, 서문경을 삿대질하며 고함을 질렀다.
“반역자를 당장 악형(惡刑)에 처해야 합니다!”
“신의 생각도 태본과 같사옵니다.”
엄충도 엄유의 말에 힘을 보탰다. 서엽이 짐짓 난감한 척 가장한 얼굴로 태황태후와 황제를 번갈아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가 축대 위의 서현을 보고 입을 열었다.
“희야, 어서,”
“역모가 아니다.”
그의 말을 황제의 고집스러운 목소리가 끊었다. 서엽이 용케도 웃는 얼굴 그대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황제가 되풀이해서 말했다.
“짐은 위협 따위를 느낀 적이 없어.”
“그리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옵니다. 저 자는 분명 인명을 해하는 술을 썼고, 그 술이 발현된 장소는 지엄하신 황상과 운현궁 마마께서 계신 곳이었사옵니다.”
“그 술이 저 아이의 힘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없다는 증거 또한 없지 않사옵니까.”
“경이 저 아이의 힘은 고작 환술을 다루는 것이 고작이다!”
그 주장에 서엽이 온 얼굴로 웃었다.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한 웃음에 황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서엽이 말했다.
“한 번 샌 힘은 다시 차오르는 법은 없습니다만, 그 형질(形質)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음입니다. 황상께오서 미처 모르시는 사이에 저 치의 힘의 성질이 변했다 해도 기이한 일은 아니지요.” 그렇게 말한 서엽이, 곧바로 서현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덧붙였다. “또한 피해를 입으신 귀인이 비단 폐하뿐 만인 것은 아니옵니다. 비록 황상께오서는 저 치에게 선처를 베푸신다 하여도 운현궁 마마께서는 그리하지 않으실 수도 있사옵니다.”
서엽과 황제가 주고받는 말을 엿듣고 있던 태황태후는, 자신에게 돌아온 칼자루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명령했다.
“저 놈을 엄벌에 처하도록 하시오! 당장 저놈의 머리와 손발이 몸뚱이에서 떨어지는 꼴을 봐야 내 분이 풀리겠소!”
“현아.”
서엽이 부드럽게 웃으며 서현에게 명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서현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목줄기가 붙잡혀 있던 서문경의 몸이 꿈틀 경련했다. 들어 올린 서현의 손에서 휙 바람이 일었다. 그 바람이 순식간에 커져 서현의 온 몸을 감쌌다. 그의 머리카락과 옷자락 등이 펄럭펄럭 휘날렸다.
황제가 소리쳤다.
“그만!”
“황상께서는 나서지 마시오! 이 할미는 저 강악한 놈이 크게 당하는 꼴을 보아야 쓰겠소이다!”
“비록 그렇다 하여도 정당한 절차를 거치어야 하는 것을 어찌···!”
“절차? 저 놈이 이 운현궁을 해하려 했소! 그런데도 무슨 절차 따위가 필요하단 말이오!” 황제의 입바른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태황태후가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감히 상국의 손으로 가는 것이니 저 잡놈도 광영으로 알아야 할 것이오!”
말은 그랬지만 태황태후의 진짜 속셈이 무엇인지는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었다. 지위로 따지면 공식적으로는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수상이지만, 술(術)의 힘으로 따지자면 수상 서현에게 비할 자는 예에 단 한 명도 존재치 않았다. 인간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용인(龍人), 그러므로 서현이 한 번 처단코자 마음먹었다면 그를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용이 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 한은!
“상국!”
태황태후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채근했다.
“무엇을 하는 게요, 어서 끝을 내시오! 놈의 목줄을 끊어 놓으라는 말이오!”
그녀가 굳이 채근하지 않아도 서현이 일으킨 광풍은 이미 축대를 넘어 전정 전체에까지 번져 있었다. 대연회를 위하여 임시로 쌓은 축대가 덜컹거리고 갖가지 음식을 올린 상이 통째로 뒤집혀 종잇장처럼 나뒹굴었다. 사람마저도 바람에 밀려 자신도 모르고 뒷걸음질을 치고 바닥을 기었으며. 정전을 올린 이중기단과 건물을 받친 원주(圓柱)도 뿌리째 뽑힐 듯이 우르르 떨렸다.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오경박사과 큰 소리를 듣고 달려온 창혜각 천객 등이 이 거짓말 같은 광경에 놀라서 혀를 휘둘렀다. 그러나 그들도 오래 견딜 수는 없었다. 바람이 점점 거세어진 탓이었다. 술사들이 몸을 웅크리고, 금군과 시위들이 바람을 뚫고 달려와 필사적으로 태황태후와 서엽을 감쌌다. 태황태후가 소리를 질러 서현을 독려하면서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몸이 가벼운 태황태후가 혹시나 큰 변을 당할까, 엄유와 엄충 등이 그녀를 양옆 앞뒤에서 부축했다.
그러나 그런 아비규환 한가운데서 황제만이 우두커니 서서, 서현과 서문경이 있는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아무리 권력 있는 치자라 해도 한낱 신민에 불과한 이들을 금군이며 시위가 호위하여 피난시키는 와중에 정작 황제가 이 지옥 한 중앙에 오도카니 내버려져 있는 모습이 현실이 아니라 마치 연출된 극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헌의공 어르신! 이곳으로 오십시오!”
그 때 시위 중 한 사람이 고함을 질렀다. 비로소 황제는 인기척을 느끼고 옆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헌의공 서엽이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황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뭔가.”
“황자께서는 결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제 별로 시간이 없음입니다.”
“결정···?” 하고 말하는 황제의 시선이 서문경의 목줄기를 붙들고 있는 서현과, 괴롭게 도리질을 하고 있는 서문경을 향했다. 시선을 그들에게 고정한 채로 황제가 물었다. “무엇을 결정해야 한단 말인가?”
“선택이지요.”
“선택.”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투였다.
“짐은 벌써 선택을 마쳤다.”
“참으로 오래된 약조. 어린 날 벗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제좌를 때가 오면 그에게 돌려주기로 약조하시었지요.”
“···그래.”
“허나 진심이셨습니까.”
“뭐?”
황제가 놀라 반문하자, 서엽이 웃으며 조용히 대꾸했다.
“죄책감과 회한에 몸부림치다 진실조차 묻어버리기로 한 것은 아닙니까.”
“진실이라니···.”
“신은 항상 궁금했사옵니다. 어찌하여 ‘그’ 분께서···.” 서엽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황자를 괴물이라 불렀었는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황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모습을 뜯어보듯이 관찰하면서 서엽이 말을 이었다.
“이전에는 그저 황자를 저어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치 예민하고 날카로웠으니, 충분히 망상으로 그럴 수 있으리라 여겼지요. 그러나, 근래에 또다시 그 말을 들었사옵니다. 누군가가 황자를 괴물이라 칭하며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나 그 자의 공포는 과장이 아닌지라 신은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헌데 저 아이가 자꾸만 방해를 하더이다.”
거슬립니다. 서엽이 딱 잘라 말했다.
“아마도 저 아이는 앞으로도 방해가 되겠지요.”
“그래서, 없애려고 하는 건가.”
“그런 까닭도 있습니다만···.” 하고 말을 흐리며 턱을 긁던 서엽이 손을 멈추고 빙긋이 웃었다. “그 분의 신탁(申託)이셨습니다.”
황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밀랍으로 만든 것처럼 온 몸이 창백해져 굳어 있는 그를, 서엽이 재촉했다.
“어서 선택하십시오.”
“짐은, 나는.” 서엽을 향하는 황제의 눈에 혼란이 어렸다. “그대를 모르겠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이제는 모르겠다.”
“황자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조차 모르시니,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요. 허나 황자의 진심은 이제부터 알게 되실 것입니다.”
서엽이 휙 몸을 돌리더니 외쳤다.
“현아, 어서 그 자의 목을 쳐라! 제 분수도 모르고 황실의 어른들을 위협하고, 대연회를 망친 자다! 여기서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을 게야!”
“희야, 안 돼, 그것은 안 된다!”
“어서!”
황제의 애원을 짓뭉개버리듯 서엽이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현이 움직이지 않자, 서엽이 가만히 덧붙였다.
“잊지 말거라, 네 새 어미도 큰 변을 당할 뻔 했다. 만일 그 치가 살아 있으면, 이보다 더 큰 변을 당할지도 모르지.”
그 말에 서현의 등이 눈에 보일 정도로 꿈틀했다. 서엽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고, 황제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서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목줄기가 잡혀 있던 서문경이 더 이상 버둥거리지조차 못하고 축 늘어졌다. 황제의 얼굴이 숫제 새파래졌다. 안 돼, 하고 그가 중얼거리는 순간, 서현의 근처에서 휘몰아치고 있던 바람이 서문경의 목을 잡고 있는 손으로 옮겨갔다.
피가 튀었다.
비명을 지르려고 벌렸던 입에 비명 대신 하얀 거품이 물렸다. 서문경의 몸이 튀어 올랐다가 천천히 힘이 빠졌다. 황제의 눈에는 그 모습이 일부러 느리게 재생한 것처럼 생생하게 보였다. 마른 가슴이 튕기듯 내밀어졌다가 곧바로 뒤로 휘청 휘어지고, 목이 뒤로 꺾이고 손발이 축 늘어졌다. 젖혀진 목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튀었다.
“경···.”
···아. 황제가 중얼거렸다.
서문경의 목에서 계속해서 피가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뚝, 뚝, 뚝, 뚝. 이제 피를 흘리는 곳은 비단 그의 목만이 아니었다. 늘어진 팔다리가 상처투성이가 되어 동시에 벌건 피를 토해낸다. 온 몸에서 흐른 피로 축대가 젖었다.
피. 피. 피. 피. 피.
그리고 피웅덩이.
온 몸을 비틀어서 쥐어짜듯이, 계속해서 피가 흐른다.
피가···.
서문경의 눈이 감겼다.
“경아!”
그 순간, 황제가 자신도 모르게 뛰쳐나갔다. 무서운 속도로 축대 위로 달려간 그가 그대로 소용돌이치는 칼바람 안으로 뛰어들었다. 무모한! 누군가가 기겁을 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황제는 개의치 않고 서문경을 향해 팔을 뻗었다. 익숙한 몸이 손에 닿았다. 하지만 그 몸은 평소의 온기를 잃고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황제가 서문경을 당기자, 서현도 손에 힘을 주었다. 황제가 노성을 질렀다.
“놔!”
“···그럴 수는 없습니다.”
황제의 눈에 번뜩 광기가 서렸다.
“놓아라, 체제공.”
“그럴 수는 없습니다, 폐하께서도 듣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고 아무 죄도 없는 아이를 죽이겠다고? 역모? 그대도 그렇게 말할 셈인가? 하! 다른 이도 아닌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로 우스운 일이겠군.”
그 빈정거림에 서현의 얼굴에 설핏 그늘이 드리웠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다시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며 그가 대답했다.
“···필요하다면.”
황제가 이를 갈았다. 그 사이에도 피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서문경의 목을 잡은 서현의 손가락 사이를 타고 천천히 피가 흘러내린다. 그 죄의 감각을 견디지 못했는지 서현이 서문경의 목줄기를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러나 서문경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서현이 불러낸 바람이 마치 고치처럼 서문경의 온 몸을 감싸고 허공으로 솟구치게 만들었다.
“!”
순식간에 서문경을 빼앗긴 황제가 허공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자, 서현이 선고했다.
“곧 끝날 것입니다.”
“끝난다고···.”
“고통스럽지 않도록 한 순간에 보내 주겠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더 이상 서현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넋이라도 나간 것 같은 얼굴로 멍하니 고치를 올려다보며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다. ‘끝?’, 방금 전 서현이 했던 말을 도저히 실감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서현이 말했다.
“곧···, 저 이를 대체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현은 펼치고 있던 주먹을 콱 쥐었다. 고치가 한순간에 움츠려들면서 그 안에 있는 서문경을 압박했다. 그가 울컥 피를 토했다. 그 피가 고치 밖으로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미 축대 위는 그가 흘린 피로 흥건했다. 이렇게 피를 많이 흘렸으니 아마도, 더 이상은 살아 있지 못하리라.
이제, 정말로 끝.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