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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헌영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것은 춤과 노래를 마치고 물러가는 환악원 악사들을 통인례가 불러 세우는 것을 봤을 때부터였다. 채 전정을 나가지 못하고 붙잡힌 악사들과 환악원 섭악장이 통인례 석정의 손짓에 밀려 전정 구석으로 몰렸다. 멀리 있어 무슨 말을 하는지 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한 눈에 봐도 통인례가 당황한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다다다 쉴 새도 없이 쏟아내는 말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손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이 다음은 뭡니까?”
마침 그렇게 물으며 엄헌영을 돌아본 서문경이, 엄헌영이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편으로 눈을 돌렸다. 저건?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엄헌영이 대답했다. 통인례가 악사들을 끌고 저기 가서 처박히더군. 드넓은 전정 구석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잘 보이지가 않아서 서문경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요? 공연에서 뭔가 잘못한 게 있었나, 하지만 왜 하필 여기에서···, 아.”
서문경이 말을 멈추고 짧은 탄성을 질렀다. 엄헌영도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 그에게 서문경이 물었다.
“이 다음도 저 사람들 공연입니까?”
“아니.”
“하지만.” 서문경이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다시 돌아가는데요.”
서문경의 말에 대답하느라 무심코 악사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있던 엄헌영이, 그 말에 깜짝 놀라 원래 보고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가 시선을 황급히 돌렸다. 서문경의 말대로 환악원 악사들이 어상 앞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앙코르라도 들어왔나.’하며 무슨 뜻인지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서문경의 옆얼굴을 힐끔 보고 엄헌영이 몸을 일으켰다. 몰래 빠져 나가려고 했는데 눈치 빠른 서문경이 그 짧은 틈도 놓치지 않고 엄헌영을 붙잡았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잠시,”
“잠시 어디요.”
하고 캐묻는 말에 엄헌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사이 서문경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나 태황태후나 황친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멋대로 일어나도 되는 건가 싶었던지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서문경에게 엄헌영이 한숨을 쉬며 그의 등을 푹 눌렀다.
“당연 그리하면 안 되지.”
“···하지만 당신은,”
“나는 나고.” 하고 칼처럼 말한 엄헌영은 그러나 서문경의 등을 누르던 손을 미끄러뜨려 이번에는 그의 뒷덜미를 붙잡고 당겼다. “허나 자네에게 누가 제대로 예법을 지키기를 바라겠나.”
“뒷말 좀 들을 각오만 하면 된다는 말이군요.”
조금이 아닐 텐데, 하는 엄헌영의 엄포에 서문경이 픽 웃었다. 본인 앞에서 말할 용기도 없어서 뒤에서 수군덕거리는 말 따위는 조금이든 많이든 겁낼 것이 없었다.
차마 대놓고 쳐다볼 수는 없어서 사람들이 힐끗힐끗 던지는 시선을 받으며 두 사람은 인파(人波)의 뒤로 빠졌다. 그 사이에 환악원 악사와 무사(舞師)들이 재공연을 시작했다. 연기처럼 흰 무수(舞袖)가 인파의 머리 위로 파도처럼 치솟았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서문경은 그것이 괜히 봉화(烽火) 같이 보여서 불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몸을 조금 더 낮추고 엄헌영을 따라갔다. 시퍼러죽죽한 얼굴로 한 시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통인례 석정의 곁으로 소리 없이 다가간 엄헌영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낭중(郎中).”
헉, 하고 돌아본 통인례의 얼굴이 엄헌영을 발견하고 확 밝아졌다.
“효강, 예 있었구먼. 태본 어르신 옆에서도 뵈지 않기에 이번 내연에는 불참했나 했네.”
“무슨 말썽이라도 생겼습니까?”
통인례의 인사는 대충 받아 넘기고 엄헌영이 곧바로 물었다. 잠시 밝아졌었던 통인례의 얼굴이 곧바로 어두워졌다. 그것이, 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하려던 통인례 석정이 뒤늦게 서문경의 존재를 눈치 채고 흠칫 움직임을 멈췄다. ‘손님입니다.’하고 엄헌영이 그에게 설명했다.
“이 자는 괜찮습니다, 말을 옮길만한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으음?” 당황한 통인례 석정이 머리를 갸웃했다. 말을 옮길만한 사람이 아니란 말을 잘못 한 건가? 어찌되었든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서문경을 힐끔힐끔 보면서 눈치를 살피던 석정이 결국 털어놓았다. “효강, 자네도 좀 도와주겠나. 예인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졌네.”
“예인?”
하는 엄헌영의 시선이 저절로 환악원 악사들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 석정이 말을 고쳤다.
“화공예 예인 말일세.”
“화공예 예인이?” 엄헌영이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섭악장 숭선에게 청해 잠시 시간을 끌어 달라고는 했으나 아무리 수색하여도 사람이 나오지를 않아!”
통인례 석정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탄했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내춘대연회 통인례를 맡은 자가 예정된 의례를 어그러뜨린 것만 해도 경을 칠 만한 일인 것을!’ 태도가 유난스럽기는 했으나 석정의 걱정만큼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더 큰 문제는 예정된 순서를 어기고 환악원 악사들이 재공연을 하게 된 일 따위가 아니었다. 내춘대연회 화공예에 참여하는 예인들은 모두가 내로라하는 권력가들을 대신하여 참석한 이들이다, 만일 그런 예인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고 화공예에 불참하게 되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연회장은 혼란에 휩싸일 것이고 예인의 이름이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그 예인을 고용한 자도 큰 망신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 되면 통인례 석정은 관리를 소홀히 한 죄와 그보다 훨씬 더 큰 괘씸죄를 물어 끔찍한 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에는 유배를 가야 할지도 모르지.
정말로, 이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다른 사람의 눈이 없다면 당장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고 싶다는 얼굴로 석정이 발을 굴렀다.
걱정과 두려움으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석정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엄헌영이 물었다.
“헌데, 누가 사라진 겁니까? 혹여 운현궁 마마의···,”
“불행 중 다행으로, 그것은 아닐세.”
“그럼?”
통인례 석정이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폐하의 예인일세.”
“폐하의?”
하고 대답한 것은 엄헌영이 아니라 지금껏 잠자코 서 있던 서문경이었다. 무심코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본 통인례 석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엄헌영이 흘깃 보자, 서문경의 얼굴이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어찌나 싸늘한 표정인지, 그 등 뒤에 서릿발이 풀풀 날리는 환영이 보일 정도였다.
서문경이 통인례 석정에게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폐하의 예인이 사라지다니.” 석정이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나자, 그가 물러난 만큼 서문경이 다가가며 말했다.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석정이 이제는 아예 대놓고 뒷걸음질을 치며 삿대질을 했다, ‘이, 이 자는 뭔가!’ 내심 다른 예인이 아니라 허수아비 황제의 예인이 실종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석정은 뜻밖의 상황에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키만 멀쭉 클 뿐이지 덩치는 그리 크지 않아 위압감이라고는 없는 청년인데도, 취설(吹雪)이 날리는 듯 냉랭한 표정으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오는 것이 기묘할 만치 무서웠다.
“이 자는 누구냔 말일세, 효강! 당최 누구이기에 이리도 무례하게,”
“손님이라고 미리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손님? 그랬지. 헌데 내가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하고 생각하고 있던 통인례 석정이 갑자기 입을 쩌억 벌렸다.
“서, 서, 서, 설마!”
“아무리 어르신이지만 초면에 삿대질이라니요.”
“청의관 수객!”
훽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원망스런 시선을 눈빛을 보내는 석정에게, 엄헌영이 지지 않고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손님이라고 밝혔는데 왜 지금 와서 원망이야.
서문경이 끼어들었다.
“지금 제가 수객인지 천객인지가 문젭니까, 더 한 문제를 앞두고.” 짜증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것이 뻔한 표정으로 서문경이 석정을 닦달했다. “폐하의 예인이 사라졌다니, 그게 무슨 말인지 자세히 말씀해 보십시오!”
‘사정을 알아야 어떻게 도움을 드릴 것이 아닙니까.’ 하며 엄헌영도 서문경의 말을 거들었다. 한 편으로는 서문경의 험악한 기세에 눌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엄헌영의 회유가 넘어간 석정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것이···, 황상의 예인이 사라진 시각은 세 식경 정도 되었네. 삼엄이 울리고 폐하께옵서 축사까지 마치셨을 때, 그러니까 환악원 악사들이 막 연주를 시작한 직후에 말일세, 내가 직접 진연도감(進宴都監)에서 마련한 의막(依幕)에 가서 확인을 해 보았었거든. 그 때까지만 해도 의막에 모든 화공예 예인들이 있었다는 말이야. 헌데 환악원 공연이 끝날 때쯤 하여 나갈 채비를 해 두라 도보(導步)를 보냈었더니···.”
“사라졌군요.”
“그러니까!” 석정이 찢어질 듯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가, 제 목소리에 스스로 놀라서 펄쩍 뛰어올랐다, ‘어이쿠야!’ 그것에 엄헌영이 한심하다는 눈길을 보내자, 석정이 험험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엄헌영과 서문경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괜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분명 인력을 오십여 명이나 동원하여 의막 앞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고, 걔 중 폐하의 예인이 나가는 것을 목격한 이는 없다 했는데!”
서문경은 통인례 석정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전정 바깥, 즉 경운문 밖에 진연도감이 대연회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임시로 지어 놓은 의막이 여럿 보였다. 화공예에 참여하는 예인들의 의막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석정의 말 그대로, 유독 한 의막 앞만 수십이나 되는 병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한하군···.”
서문경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던 엄헌영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엄헌영이 자신의 말에 동의하자 석정이 아예 입에서 불을 뿜을 기세로 열을 올렸다.
“그렇다니까! 이러니 내가 정말로 미칠 노릇 아닌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문 말고, 몰래 빠져 나갈 수 있는 입구는 따로 없습니까?”
서문경의 물음에 석정이 이런 딱한 사람이 다 있느냐는 듯이 혀를 찼다. 당연히 서문경의 눈이 세모꼴로 변했고, 석정은 헐레벌떡 태도를 바꾸어 대답했다.
“있긴 하네. 높으신 분들께서 편하게 드나드실 수 있게 낸 문인데, 허나 그 쪽에도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라서···.”
“혹시 들어가거나 나온 사람이 있는데도 호위병이 말을 안 한 것은 아닙니까?”
“의막 안으로 사람이 드나들 경우, 호위는 그 모든 보고를 꼭 내게 전하기로 되어 있어. 예외는 없네.” 하고 대답한 석정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불쾌한 얼굴을 했다. “설마 자네, 나를 의심하는 겐가.”
“아니요.”
곧바로 대꾸하며 서문경이 생각했다. 어떻게 저런 결론이 나올 수가 있지? 보통은 자기 부하들을 의심하는 거냐고 성을 낼 텐데. 한 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석정의 얼굴에 떠오른 불쾌감이 사라졌다. 그것을 빤히 보며 서문경은 결론을 내렸다, ‘저 사람에게 더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없겠군.’
그리고 그 생각은 엄헌영 또한 마찬가지인 듯 했다. 그가 말했다.
“일단 가지.”
물론 서문경에게 한 말이었다. 그 말에 기겁을 한 석정이 그 육중한 몸을 날려 엄헌영에게 매달렸다.
“아이고, 이리 가면 어쩌나, 효강! 제발 좀 도와주게!”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수색에 필요한 인력이라면,”
“그런 것이 아니라···.”
기세 좋게 엄헌영의 말을 끊은 주제에 석정이 바로 말을 잇기를 망설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서문경은 생각에 잠겼다. 인력은 충분하다라, 그럼?
“저 대신 차라리 박사들을 찾아가 우조(佑助: 도움)를 청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엄헌영도 같은 결론을 내렸는지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박사는 태학궁을 대표하는 술사들인 오경박사를 이름이었다. 괜찮은 생각이라고 서문경은 생각했지만, 석정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우물거렸다. 다른 목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호기심을 풀기 위하여 일단 접근을 했지만, 석정처럼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 치는 딱 질색인 엄헌영의 표정이 슬슬 험상궂어졌다.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행동은 굼벵이 뺨 칠 만치 굼뜬 주제에 눈치 하나만은 귀신같은 석정이 그 기색을 눈치 채고 기겁을 하여 속내를 털어놓았다.
“자, 자네 그 자들과 좋게 지내지 않는가. 그 자들 말이야, 창혜각의 천객들.”
“무슨 풍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그다지 좋은 관계는 아닙니다. 아니, 관계라는 말이 성립될 수도 없습니다.”
아마도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서문경도 엄헌영이 조원 이외의 하늘손님과 있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다, 그나마 친밀하게 지내던 염락 조원과도 얼마 전에 틀어지고 말았으니. 그러나 석정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제발, 하며 석정이 애원했다. 엄헌영이 무어라 대답하려고 했지만 거절이 뻔할 그 말을 가로막고 그가 열심히 기억을 떠올렸다. “그, 그 사람 있지 않은가, 그 사람. 천객 중에, 앉아서 만리(萬里) 밖도 볼 수 있다던 그 사람!”
“천견?”
석정의 말을 듣고 불쑥 떠오른 이름을 중얼거리자, 그것만으로 엄헌영이 천견 최유와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미루어 생각했는지 엄헌영에게 매달린 석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발 도와주게나. 그 자에게 부탁해보면 황상의 예인이 어디로 갔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엄헌영의 눈썹 사이가 잔뜩 좁아졌다.
“천견과는 그다지 면식이 없습니다. 더구나, 제 아무리 천견이란 호가 붙은 술사라 해도 생긴 모양새도 모르는 이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제발, 제발 부탁이네, 효강.”
“천견이란 자와 저는,”
“자네의 청이라면 그도 들어주지 않겠는가!”
흥분한 나머지 석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러다 저 치가 하지 말아야 할 말도 마구 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 엄헌영이 다급히 손을 저으며 그를 말렸지만, 석정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엄헌영의 팔을 흔들며 서문경 쪽을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자네, 청의관 수객이라 하였지? 자네도 좀 돕게나, 응? 자네도 일이 잘못되면 곤란할 것 아니야, 폐하께옵서 더 심기 상하시오면 자네를 완전히 내칠지 어찌 알아? 그렇지만 또 모르지, 이번 일이 잘 풀려 어심이 흐뭇해지시면 자네를 다시 어여뻐해 주실지도. 그러니까 말일세, 자네도 어서.”
“중랑, 그만 좀 하십시오! 이 자는 손님입니다! 이 나라를 방문한 손님에게 총애니 실총이니, 이 무슨 무례한 언사란 말입니까!”
석정의 눈이 재빨리 엄헌영에게 옮겨갔다. 이제 그는 거의 울다시피 하고 있었다.
“효강, 제발. 내 이렇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지 않은가! 자네가 평소 황상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내 익히 알고 있네. 허나 일이 잘못 되었다가는 내 목이 간당간당하게 생겼어!”
“목이 간당간당한다니, 그런 과장이···,”
“오죽하면 자네에게 이렇게 사정을 하겠나! 생각해보게, 내 아래 딸린 식솔이 대체 얼만가! 자네도 몇 번이고 보았지 않아, 살려주게, 불쌍한 내 처와 자식들 얼굴을 봐서라도! 자네의 청이라면 아무리 면식이 없다 한들 들어주지 않을 까닭이 없잖은가, 천견이란 작자가 아니라 다른 천객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야!”
이만 석정의 말을 멈추게 해야 한다고 엄헌영은 직감했다. 그러나 그 직감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이미 석정은 입을 열고 있었다.
“합하와 자네는 오랜 벗이 아닌가! 주인 되는 사람의 벗이 부탁하는 것을 감히 누가 거절하겠는가, 그러니까···.”
벗, 하고 석정이 말하는 순간 엄헌영은 분명히 들었다. 서문경이 자신 쪽을 똑바로 쳐다보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여러 가지 일들로 사이가 꼬인 판국에 과거가 밝혀지는 것이 조금 껄끄럽기는 하지만 그리 문제될 것은 없는 일인데도, 이상하게 그 한숨소리를 듣는 순간 낭패감이 들었다. 아마도 한숨을 내쉬던 그 순간 서문경의 눈빛이 관찰하는 듯 차가운 빛을 띤 탓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엄헌영의 팔뚝을 붙잡은 채로 석정이 우는 소리를 했다.
“효강 이 사람아, 무슨 대답이라도 해보게.”
그 때, 음악소리가 멈췄다.
“···!”
엄헌영이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과 석정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무리해서 번 시간조차 바닥이 나버린 것이다. 병사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경운문 밖을 보아도 사라진 예인을 찾은 기색은 없었다. 머뭇거리면서도 환악원 악사들이 물러갔다. 더 이상 대연회의 핵심인 화공예를 미루는 것은 무리였다.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된 석정은 숫제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상례를 맡은 관리가 그를 소리쳐 부르자, 그가 혼이 다 빠진 것 같은 걸음걸이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이제 다 끝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석정을 급히 붙잡아 서문경이 물었다.
“폐하의 순서는 언젭니까?”
“무어?”
“폐하의 예인이 나오는 순서는 언제냐고요!”
“마, 마지막. 마지막이네.”
마지막이란 말이지. 서문경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중얼거렸다. 그런 서문경에게 무슨 심산이냐고 한 번 물어보지도 못하고, 석정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마냥 끌려가고 나서 엄헌영이 물었다.
“무슨 생각이야?”
“뻔한 것 아닙니까. 찾아보려는 겁니다.”
“어떻게?”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잖습니까.”
“대책 없군.”
엄헌영이 비난했지만 서문경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인파 속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분명히 자신의 발침 의식 때 참례했었던 오경박사가 여기 어디쯤 있을 터인데···. 그러나 오경박사 소천 경모의 모습은 문열(文列)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서문경은 머리를 돌렸다. 조원과 그녀가 잠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 보면 그녀의 부친이 제법 품계가 높은 무관(武官)인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무열(武列)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무관들의 자리는 지금 서 있는 자리와는 거리가 있어서 사람의 얼굴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는 것처럼 발걸음을 옮기는 서문경을 엄헌영이 황급히 붙잡았다. 서문경이 대답했다.
“여기서는 사람들 얼굴이 안 보여서요.”
“누구를 찾는데?”
“태학궁 오경박사 소천 경모.”
“···그 자는 어찌 알고.”
“제 발침 의식에 한 번 뵌 것이 다입니다. ···아.”
하고 대답한 서문경이 그 순간 소천 경모와 비슷한 용모의 중년 여인을 발견하고 엄헌영의 팔을 뿌리쳤다. 엄헌영이 다시 붙잡을 겨를도 없이 서문경이 뛰어나갔다.
“박사님!”
그러나 곧바로 서문경의 얼굴이 멍해졌다. 서문경의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죄송합니다···.”
돌아본 사람은 소천 경모가 아니었다. 어째서 자신이 그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만큼, 그녀와 닮은 곳이 없는 여인이었다. 나이도 소천 경모보다는 서른 살 정도는 연하인 것 같았다. 의아한 눈빛을 보내는 여인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서문경은 생각했다. 사실은, 소천 경모를 이렇게 멀리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급해서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그새 따라온 엄헌영이 서문경을 붙잡았다.
“헛수고네, 찾을 필요 없어.”
“헛수고라니요?”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서문경을 보고 엄헌영은 짧게 혀를 찼다.
“중랑, 아까 그 치의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 없어. 술사가 아닌 이들이 흔히들 하는 오해일세.”
“그럼 술로는 사라진 예인을 찾을 수 없단 말입니까?”
그 물음에 잠시 엄헌영이 대답을 망설였다. 찰나에 불과한 침묵이었지만, 그 침묵만으로도 서문경은 엄헌영이 숨기려는 대답을 알아차렸다. 엄헌영이 둘러댈 수 없도록 서문경이 선수를 쳐서 말했다.
“천견이란 자는 가능하다는 말이군요.”
엄헌영은 결국 한숨과 함께 인정했다.
“···어쩌면.”
“알겠습니다. 숨기지 않고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문경이 엄헌영의 손에서 옷자락을 빼며 다시 뒤돌아섰다. 그 뒤에서 엄헌영이, ‘자네 천견의 얼굴은 아는가?’하며 말을 걸어왔지만 서문경은 고개만 얕게 끄덕였을 뿐이었다. 천견이란 자를 가까이에서 보거나, 말을 섞어본 적은 없지만 단 한 번 같은 자리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 자일 것이다. 내내 싱글거리던 조원과는 대비되게 석상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사내.
“기다리게.”
엄헌영이 서문경을 불러 세웠다. 그런 그의 목소리 뒤로, 통인례 석정이 화공예의 시작을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까지 아들 뻘인 엄헌영의 소맷부리에 매달려 애원하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엄숙하고 또렷한 목소리. 적어도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인가, 하고 서문경이 생각하고 있는데 엄헌영이 말했다.
“함께 가지.”
자네 혼자보다는 나을 게야, 하고 말하는 목소리에 회한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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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경은 힐끗 엄헌영 쪽을 훔쳐보았다. 평소 같으면 당장 그 시선을 눈치 채고 돌아봤을 엄헌영은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야트막하게 솟은 이마와 조금 날카로운 듯한 콧날, 그 옆얼굴이 익숙한 탓은 비단 그가 황제를 닮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황제와 닮았다는 이유로 몇 번씩이고 그의 얼굴을 훔쳐본 탓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만큼은, 서문경이 엄헌영의 얼굴을 흘깃거리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표정.
엄헌영이 짓고 있는 복잡한 표정 때문이었다. 그 표정, 뭐라 이름 붙이기에도 오묘한 그 표정이 처음 엄헌영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혼자서라도 천견 최유를 찾으러 가겠다는 서문경을 그가 붙잡았을 때였다. 경각을 다투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문경은 일순간 그 표정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 복잡한 표정에는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었다. 왜, 이 상황이 짜증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찌푸린 표정 바로 아래에 탄식과 자포자기의 심정이 서려 있는 것일까. 탐탁지는 않지만 그래도 결국은 내버려 둘 수는 없노라고, 엄헌영의 지친 듯한 표정이 말하는 듯 했다.
물론 그가 내버려 둘 수 없는 사람이란 면식을 익힌 지도 얼마 되지 않는 서문경 자신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저곳까지 동행하지는 않았군.”
생각이 끊겼다. 엄헌영이 그렇게 말한 탓이었다. 그가 보는 쪽을 따라서 보자 좌우로 늘어선 품석(品石) 우측 최상단에 수상 서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근처에는 신분이 높고 낮은 관리들이 단 과일에 꼬인 초파리들 마냥 들끓고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 천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뭘 보나. 없다고 했잖나.”
자신도 모르게 서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엄헌영이 툭 핀잔을 던졌다. 자신이 서현을 거의 노려보다시피 보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서문경이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미 다른 자리를 살펴보고 있었던 엄헌영은 서문경이 놀라는 모습을 보지 못한 듯했다. 서문경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안도감 때문이 아니라 자괴감 때문이었다.
엄헌영이 씹어 내뱉듯 중얼거렸다.
“이거 원, 전정이 좀 넓어야지···.”
그러게요. 서문경이 씁쓸한 투로 엄헌영의 말에 동의했다. 서문경의 우울한 목소리를 듣고 그가 전정의 넓이에 기가 죽었다고 오해했는지 엄헌영이 서문경의 등 한번 크게 쳤다. 철썩!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일순 놀라서 쳐다볼 만치 큰 소리만큼의 고통을 느낀 서문경이 버럭 성을 냈다.
“미쳤습니까!”
“정신 차리고 잘 보라고, 어디에 있을 것 같나?”
엄헌영이 목소리를 낮추며 던진 질문에 덩달아 침착해진 서문경이 잠시 생각해보고 대답했다.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서문경이 서현이 앉아 있는 자리를 다시금 쳐다보았다. “천견이란 사람은 그다지 번잡스러운 자리를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물손님이나 하늘손님 같은 손님들에게는 내진연에 참석해야 하는 의무도 없고, 불참한다고 해도 나무라는 사람도 없으니까···.”
잠시 서문경이 말을 멈추고 서현의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하지만 천견이라는 이는 수상의 충실한 수하인 것 같았으니 가능하다면 그가 참석하는 자리에는 동행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상의 주변에는 천견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손님인 그가 관복을 입고 있을 리가 없으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 때 엄헌영이 말했다.
“중랑 어른의 말처럼 그는 앉아서도 천리만리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니, 굳이 이 자리에 있지 않아도 체제공은 살필 수 있지 않은가.”
“그건 그렇지만···.”
“그렇지만?”
서문경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계속해서 수상의 신변을 살피는 것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이를테면 암살이나 사고 같은. 혹시라도 엿듣고 있을지도 모르는 주변의 귀를 의식하여 서문경이 두루 뭉실 돌려서 한 말을 엄헌영은 바로 알아들은 듯 했다. 표정이 한층 더 굳은 그가 ‘그런데?’하고 물어왔다.
“그런데 만일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멀리 있어서 아무 대처를 할 수가 없다면 계속 수상을 주시하고 있는 보람이 없지요. 그러니까.” 서문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보는 눈이 많고, 혼잡한 연회장은 피하면서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에는 바로 대처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장소.”
엄헌영이 그 조건에 들어맞는 장소를 곧바로 가리켰다.
“경운문 밖이군.”
정확히는 경운문 밖의, 의막이 늘어서 있는 자리였다.
결론이 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걸음을 재촉했다. 넓은 정전 빼곡히 사람들이 들어차 있다시피 하여 달리는 것은 무리였지만, 뛰는 것과 매한가지로 빠른 걸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정전 중심부에서 멀어지지 인파도 점점 줄어들었다. 서문경은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통인례 석정의 고하는 소리가 보이지 않는 채찍으로 자신의 등을 때리고 있는 듯했다. 환호 소리가 전정을 뒤흔들었다. 또 한 사람의 공연이 끝난 모양이었다.
“벌써 중대성 차례군.”
엄헌영이 중얼거린 말에 서문경의 발이 한층 빨라졌다. 중대성이면 예의 3성 12관부 중 수상인 서현이 통솔하는 기관이었다. 그리고 중대성의 다음 순서가 황실의 큰 어른인 태황태후가 고용한 예인, 또 태황태후의 예인이 공연을 끝내고 나면 마지막으로 황제의 차례다. 그 때까지 사라진 예인을 찾지 못하면···. 서문경은 마른침을 삼켰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중대성에서 고용한 예인이 막 공연을 시작한 순간 두 사람은 경운문 근처에 도달했다. 그 때 멀리서도 확연히 볼 수 있도록, 삐이이 큰 새가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쏘아져 올라간 연기가 펑, 하고 커다란 불꽃으로 바뀌었다. 아니, 불꽃이라기보다는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앞서서 터진 검은 빛에 사방이 일순 검어졌다가 그 검은 빛의 화폭(畵幅) 위로 희고 붉고 푸른 색색의 빛깔로 자유롭게 그림이 그려졌다.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서문경은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앞이 안 보이잖아!
‘여기로.’, 엄헌영이 서문경을 이끌고 달려갔다. 사방이 다시 밝아졌을 때 이미 그들은 경운문 밖을 나오고 있었다.
경운문을 빠져 나오기가 무섭게 속도를 붙인 엄헌영이 의막들 사이사이를 뛰어다니며 목소리를 높였다, ‘천견! 천견 혹시 걔 있는가!’ 서문경 또한 이를 악물고 천견 최유를 찾아다녔다. 의막을 쓰고 있던 궁인들과 예인들이 갑자기 나타나 의막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두 사람을 놀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잠시만요.” 서문경이 걔 중 다른 이들과는 복색이 다른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천견, 혹시 천견이란 사람을,”
“최유.”
엄헌영이 끼어들어 서문경이 불러 세운 사람의 어깨를 붙잡아 자신에게로 돌렸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엄헌영의 난폭한 행동에 놀란 서문경이 항의했지만 엄헌영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낯선 남자의 얼굴을 관찰했다. 가늘어졌던 그의 눈이 잠시 후 원래대로 돌아온다 싶더니, 그가 서문경의 등을 힘을 주어 두드렸다.
“용케 알았군.”
“예? 뭘?”
“창혜각 천객이다.”
서문경의 눈이 커졌다. ‘창혜각에 드나들면서 몇 번 본 적이 있지. 말 그대로 오며가며 본 것에 불과하지만.’ 엄헌영이 덧붙여 말하며 낯선 사내에게 추궁하는 듯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내 말이 틀린가?”
“아, 아닙니다, 장군.”
하고 대답하는 창혜각 천객은 두렵다기보다는 어이가 벙벙한 기색이었다.
“헌데, 무슨 일로 저를···?”
“사람을 찾고 있네. 천견 최유도 이곳에 있는가?”
“예에···,”
하고 말끝을 흐리는 남자를 엄헌영이 닦달했다, ‘어디 있지? 당장 안내해라.’ 약간이라도 시간을 지체하면 발길질이라도 할 기세인 그에게서 물러나며 창혜각 천객이 두 손을 필사적으로 휘저었다.
“자, 잠시면 기다려 주십시오, 장군! 제 말이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천견이 한 식경 전까지는 이곳에 있는 것을 분명 보았습니다만 지금은 어디를 갔는지 도통···.”
“이곳에 없다고?”
“예.” 하며 일단 대답한 창혜각 천객이 엄헌영을 달래기 위해 진땀을 뻘뻘 흘렸다. “허나 그 이가 가 봐야 어디를 갔겠습니까, 기껏 해봐야 측실이나···.”
곧 돌아올 겁니다, 남자가 당장 코앞에 닥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되는대로 지껄여대는 말에 엄헌영의 눈빛이 점점 험악해졌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아직 오늘 분의 행운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양장!”
멀리서 제 동료가 붙잡혀 있는 것을 본 또 다른 사내가 크게 소리를 치며 뛰어왔다가, 엄헌영의 얼굴을 보고 굳었다. 그러나 이미 엄헌영은 그 사내나, 양장이라 불린 창혜각 천객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아무 죄도 없이 성 난 범 앞에 붙들려 끙끙대고 있던 창혜각 천객이 반색을 하며 외쳤다.
“천견! 오셨구려! 어딜 다녀오셨던 게요?”
“잠깐···,”
하고 대답하던 목소리가 멈췄다. 서문경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러가도 좋다, 엄헌영이 말하기가 무섭게 창혜각 천객들이 모습을 감추고 엄헌영과 서문경 앞에는 가장 늦게 도착한 남자 하나만이 남았다. 남자가 엄헌영을 향해 예를 올렸다.
“장군. 찾으시었습니까.”
하고 물은 남자, 천견 최유가 서문경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잠시 망설였다. 서문경에게는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서문경이, 최유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물어온 때문이었다.
“외람되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라니?”
그 말에는 엄헌영이 대답했다.
“사람을 찾고 있네.”
“사람이라니요?”
“실은.” 엄헌영이 질끈 아랫입술을 깨물고 주위를 살피더니, 최유를 향해 손짓을 했다. 최유가 가까이로 다가오자 엄헌영이 말을 이었다. “화공예에 나갈 예정이던 예인이 하나 사라졌네.”
최유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거 큰 일 아닙니까.”
“그래. 그래서 자네의 도움을 받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최유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망설였다. 콱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던 서문경이 바짝바짝 타는 속을 견디다 못하고 입을 열었다.
“갑자기 찾아와 이런 청을 드리는 것이 실례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탁드립니다. 예인을 찾지 못하면···.”
서문경이 말을 멈췄다. 최유가 손을 저어 조금만 진정해 보라는 시늉을 해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신호를 알아들은 서문경이 조용해지자 최유가 입을 열었다.
“물론, 소인도 도와 드리고는 싶습니다. 허나 찾으려는 이의 내력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림. 초상화로는 안 되겠나.”
간단한 초상화 정도라면 통인례 석정의 멱살이라도 끌어다 토해내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엄헌영이 묻자, 절망스럽게도 최유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고? 뜻밖의 부정에 어리벙벙해진 엄헌영이 혼잣말로 중얼거린 말에 최유가 대답했다.
“천견(天見)이라고 불리기는 합니다만, 소인의 ‘힘’은 사실 ‘보다(見)’보다는 ‘맡다(嗅)’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즉, 천견은 천견(天見)이 아니라 천견(天犬)이라 써야하는 것이지요. 개가 목표물을 쫓을 때 목표물의 냄새를 맡아 쫓는 것처럼, 저는 목표물을 목표물에 대한 지식으로 쫓습니다. 그러니 찾으신다는 예인에 대한 어떤 내력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옥우당.”
서문경이 말했다. 천견이 자신 쪽을 쳐다보자, 서문경이 금방이라도 그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닦달할 것 같은 자신의 손을 꾹 말아 쥐면서 말을 이었다.
“호는 옥우당(玉雨堂), 이름은 이숙, 성은 담, 참의 퇴재의 차남이며, 도공이자 화공으로 이름 높은 용천의 제자입니다. 또한 약관을 넘지 않아 태학궁에 입교하여 오 년간 술을 연마하였습니다. 그 후에 원외랑 한관의 딸인 한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고 이 년 뒤 장녀인 술을 보았는데···.”
혓바닥에 참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술술 늘어놓던 서문경이 어느 순간 멈칫하더니 물었다, ‘그 정보라는 건 어느 정도까지 필요한 겁니까?’
“자네는 그런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멈칫해 있던 엄헌영이 묻자, 서문경의 낯빛이 흐려지면서 입매가 일그러졌다. 서문경이 씹어 내뱉듯 대답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렇게는 못 한다고 들러붙었었거든요.’ 하지만 그 고집도, 자신보다 훨씬 대연회를 잘 치러낼 것이 확실한 예인의 능력을 줄줄줄 들었을 때에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엄헌영의 말에 대충 대답한 서문경이 천견 최유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더 말해야 하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최유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하고 덧붙이는 서문경은 더 이상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내력을 다른 사람에게 읊어줘야 한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이었고, 서문경의 낯빛이 채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걱정으로 다시 어두워졌다. “그런데···.”
“추적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한 천견 최유가 서문경과 엄헌영에게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가 시선을 내리깔며 손을 움직이는 것을 서문경은 숨을 삼킨 채로 응시했다.
최유가 넓은 소맷자락에서 공지(空紙) 몇 장을 꺼냈다. 아무 글씨나 그림도 써지지 않은 그 작은 종이는 비록 미색(微色)이었지만 하나하나 모두 색이 달랐다. 최유가 걔 중 몇 장을 허공에 던지자, 빛이 번쩍하더니 종이가 가루가 되어 최유의 주위를 넘실거렸다. 서문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걸로 뭘 어떻게 하는 걸까, 술에 대해서는 무지한 서문경으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혹시 몰라 힐끗 엄헌영 쪽을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도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선은 최유의 손에 고정한 채로, 미간을 구기고 시시때때로 한 쪽 눈을 깜빡거리는 오묘한 표정.
술, 아니, ‘힘’이라···.
괜히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옮겨갔다. 시선을 손 쪽으로 옮기고 나서야 서문경은 자신이 어느새 두 손바닥을 마주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유도 없이 낯이 홧홧해져서 황급히 손바닥을 뗐지만, 눈을 내리깐 최유의 머리 주위로 빛의 원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콱 맞잡았다. 최유의 눈가가 있는 위치에서부터 서서히 회전하여 내려오는 빛의 원은 자세히 보자 알 수 없는 문자가 빽빽이 들어차 만들어져 있었다. 빛이 일렁거릴 때마다, 그 문자가 함께 일렁거린다. 다시 보자 희미한 빛을 발하는 빛무리는 방금 전 최유가 던졌던 종이가 흩어져 만든 가루였다.
가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문자. 움직인 가루가 만들어낸 것은 서문경으로서는 읽을 수가 없는 기묘한 문자였다. 엄헌영 또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 사람이 원래 있었던 세계에서 쓰던 문자겠지, 하고 생각하며 서문경은 맞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아마도 저 글자가 최유의 ‘힘’이 낸 결론일 것이다. 한 시가 급했다. 알고 싶어, 내가, 내가 저 글자를 읽을 수 있다면···!
“!”
그 순간 완벽한 형상을 이루었던 빛가루가 번쩍 빛을 내더니 모래성이 무너지듯 흐트러졌다. 최유의 얼굴에 일순 낭패감이 서렸다.
“어떻게 된 일이지?”
빛가루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엄헌영이 놀라서 물었다. 최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지만, 곧 표정을 수습하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소인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허나, 예인이 있는 곳은 찾았습니다.”
“찾았다고! 그곳이 어디지?”
“가깝습니다. 함원교와 경훈문 사이입니다.”
“함원교!” 함원교라면 바로 황궐의 정문으로 통하는 다리. 엄헌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황궐 밖으로 나가려는 건가!”
“서두르십시오, 곧 황상의 차례입니다.”
“그래.” 엄헌영이 서문경을 돌아보고 물었다. “자네도 갈 텐가? 내 생각으로는···.”
엄헌영은 말을 멈췄다. 서문경이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던 탓이었다. 무엇을 저리 정신없이 보는 건가 싶어 서문경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허공이었다. 자네, 하고 엄헌영이 부르자 서문경이 화들짝 놀라며 그 쪽을 쳐다보았다, ‘예?!’
엄헌영이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바로 함원교로 가 볼 계획이야. 자네는 어쩔 텐가.”
“저도 가겠습니다.”
“아니, 듣게.” 엄헌영이 손을 저어 서문경의 말을 멈추게 하고 일렀다. “내 생각에 자네는 다시 전정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좋을 듯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서문경에게 엄헌영은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방해돼. 그 단호한 말에 서문경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구겨졌지만 그것이 잠시, 서문경은 한숨을 쉬면서 엄헌영의 말에 수긍했다. 엄헌영의 말이 옳다. 엄헌영 혼자 움직이는 것이 자신을 데리고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빠를지도 모른다. 또, 만약의 경우가 벌어졌을 때 자신이 같이 있으면 그의 짐이 될 지도 모르니.
서문경이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는 것을 안 엄헌영이 막 경훈문과 함원교로 통하는 길로 몸을 돌리다가, 막 걸음을 떼기 직전 서문경을 돌아보고 말했다.
“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몰라.”
“···예.”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보기는 하겠네.”
하고 말하는 엄헌영의 얼굴에는 예의 그, 서문경이 보고 멈칫했었던 복잡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서문경이 무심결에 짓고 만 애매한 표정을, 걱정에 의한 것이라고 오해한 엄헌영이 고개를 한 번 까닥해 보이고는 경훈문을 향해 사라졌다.
**
하염없이 엄헌영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던 서문경이 다시 움직인 것은, 하늘을 펑펑 소리를 내며 수놓던 아찔한 산수화(山水畵)가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돌아가야 돼. 그러나 다시 정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던 서문경이 몸을 돌리다 말고 갑자기 주춤하더니, 천견 최유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천견 최유가 아무 말도 없이 목례를 했다.
“안으로는 안 들어가십니까?”
마주 목례를 한 서문경이 의례상 묻자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혼잡한 곳은 조금 힘듭니다.”
“그렇습니까. ···갑작스러운 부탁을 드렸는데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최유가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최유에게 감사 인사를 한 서문경은 더 지체하지 않고 경운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경운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막 중대성에서 내보낸 예인의 공연이 막 끝났는지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그 박수갈채가 어찌나 뜨겁고 열렬했던지, 한 순간이지만 귀가 찌릿 거려 귀를 틀어막아야 할 정도였다.
통인례 석정이 신호를 보냈다. 하례(下禮)들이 따라서 중대성 예인의 차례가 끝이 났음을 고했다.
서문경은 가슴팍을 한 손으로 짓누른 채로 주춤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조심스럽게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비교적 앞줄에 위치한 서문경의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가 서문경을 위해 특별히 마련해 놓은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이름뿐인 황제라 해도 아직 황제는 황제. 그러니 그가 특별히 명해 마련한 자리를 감히 차지하고 있을 간 큰 인간이 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비어 있는 자신의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성거리던 서문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것과는 별개로 황제가 망신을 당하게 되면 모두가 악의 어린 웃음을 삼키며 즐거워할 것이다. 서문경은 콱 주먹을 쥐었다. 그렇게는 안 돼. 누가 그렇게 놔둘 줄 알고.
“도공(陶工), 월백(月魄) 청화(淸化)-.”
하례가 외쳤다. 이제 황제의 바로 전 순서인, 태황태후전의 예인이 나올 차례였다. 서문경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또 다른 하례를 맡은 궁인의 안내를 받아 누군가가 전정 앞으로 나왔다. 태황태후전의 예인일 것이 뻔한 그 이는, 연둣빛 저고리에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끌리지 않을 정도로 긴 명주 열두 폭 남스란치마를 입은 여인이었다.
‘저것을 보게.’, 여인이 스란치마 자락의 끝에 두른 직금(織金)을 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서문경도 눈을 가늘게 떴다. 남빛 바탕에 금실로 모란 무늬를 섞어 짠 장식···, 저것이 뭐가 어쨌다는 건가. 서문경이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뒤에서 그 의문을 해소해 줄 대답이 들려왔다.
“금빛 바탕에 모란꽃이라면 현주 이상의 여황족이나 달 수 있는 문양이 아닌가.”
“거기에 위로는 유록빛, 아래는 쪽빛 성장(盛裝)이면 빼도 박도 못하게 그렇지. 헌데 머리를 올린 모양을 보면 대례(大禮)는 올리신 모양인데···.”
그러나 추측한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여인이 하이얀 얼굴 위에 금실과 은실을 섞어 얼기설기 짠 그늘막을 두 겹이나 쓴 탓이다. 그러나 만일 얼굴을 드러냈다고 하더라도 저 남자들은 여인이 정확히 어떤 품계의 황족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백성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일이 잦은 황후나 태후쯤 되면 모를까, 보통 사람들이 군주나 현주의 얼굴까지 알 리가 만무한 탓이다. 하지만 그 이들과는 정반대로, 서문경의 머리는 비로소 회전을 할 동력을 얻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설마, 하고 생각하면서도 서문경은 한 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먼 곳에서 어렴풋이 봤었던 얼굴이, 운현궁 예인의 얼굴을 가린 은빛과 금빛 그물 너머로 겹쳐지는 것 같았다. 서문경은 숨을 삼키며,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경혜현주.
여인이 통인례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번에는 하례 대신 황친들의 안내를 맡은 상례가 나와 태황태후전의 예인이 공연을 시작함을 알렸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앉을대에 앉은 여인이 물레 위에 고운 손을 얹었다. 품계 높은 여황족의 손인만큼 눈에 뜨이게 희고 고운 그 손은, 기묘하게도 사내애 손처럼 마디가 굵고 컸다. 도르륵 소리를 내면서 물레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여인의 손이 물레 위에 얹은 흙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만졌다. 그 움직임이 맑은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유연했다.
몇 번 손을 움직이고 가리새로 흙을 두어 번 긁어낸 것만으로도 오종종한 찻잔과 남자 주먹만 한 공기와 모로 누운 여인의 허리 같은 곡선을 가진 주병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직 굽지 않은 상태인 찻종을 여인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말랑말랑한 상태이던 찻종이 그대로 우그러들어 사람들이 헉하며 신음을 흘린 순간, 가볍게 쥔 여인의 주먹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술법이었다. 그 짐작대로, 여인이 다시 손을 폈을 때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유약을 발라 구운 듯 매끈매끈한 백자(白磁)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여인이 엄지와 검지를 거의 맞대다시피 하고 그 사이에 붓을 쥔 것처럼 손을 허공에 한 번 휘저었다. 허공에 흰 빛의 선이 어리었다. 여인이 만들어진 백자 위에 몇 번 선을 긋자 그 위에 이슬을 맞고 핀 듯한 국화 세 송이가 피어났다. 사람들이 일제히 손뼉과 함께 환호를 보냈다.
어느새 운현궁 예인의 공연도 중반부. 여인이 찻종을 내려놓고 그보다 폭이 넓은 공기를 들어 올렸을 때, 서문경은 꿈에서 깨어나듯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서문경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경운문 근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엄헌영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등 뒤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운현궁 예인이 또 뭔가를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르는 환호성이 서문경의 귀에는 자신을 쫓아오는 괴한의 발소리처럼 들렸다. 심장소리가 자꾸만 커졌다. 살려줘.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애원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줘. 그러나 엄헌영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고 대신,
달각.
서문경은 뒤를 돌아보았다.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서문경이 뒤돌아보기 직전만 해도 아무 것도 그려진 것이 없던 청자에 어느새 바위 밑 몇 포기 난초가 노오란 꽃을 벌리고 있었다.
여인이 하나 남은 주병을 집어 들었다.
제발. 서문경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여인이 손을 한 번 저었다. 그저 티 없이 희기만 하던 하이얀 주병 위에 검은 선이 하나 생겼다.
바짝바짝. 서문경은 입 안의 침이 모조리 마르는 것을 느꼈다.
여인이 세 번째 무형(無形)의 붓을 휘둘렀을 때 주병 위에는 검은 나무가 생겨 있었다.
서문경의 발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떼어졌다가 다시 바닥에 붙었다가를 반복했다. 탁, 탁탁, 탁탁탁. 가죽신을 신은 발이 초조한 소리로 바닥을 두드린다.
여인이 붓을 조금 가깝게 잡았다. 톡, 하고 보이지 않는 붓끝이 청자를 한 번 두드리자 그 자리에 붉은 동백이 피어났다.
서문경이 무슨 말이라도 할 듯이 입을 벌렸다. 하지만 바싹 마를 대로 마른 목구멍에서는 아무 말도 튀어 나오지 않았다.
꽃이 계속해서 피어났다.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나중에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만치 많은 꽃송이들.
그리고-.
“개화(開花).”
처음으로 예인이 입을 열었다. 가느다랗고 조금 높은, 여인이라기보다는 아직 소녀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주병이 깨졌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주병을 가득 채우고 있던 동백꽃이 그림이 아니라 실재하는 동백꽃이 되어서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뚝, 뚝, 뚝. 선홍빛으로 만개한 소담한 동백꽃이 떨어지는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서문경은 파리해진 낯빛으로 한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송이채 떨어지는 동백꽃의 모습이 왜인지 불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기분 탓이다. 서문경은 불안감에 날뛰기 시작한 자신의 심장을 달랬다. 기분 탓이다. 기분 탓이야. 기분 탓···. 그러나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막연한 예감이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동백꽃을 보고 사람의 머리가 떨어진다는 둥의 연상을 한 탓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서문경은, 통인례 석정의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가 곧 체념의 빛을 띠는 것을 보았다.
“······!”
잠깐, 하고 말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서문경은 뒤를 돌아보았다. 곧. 곧이다, 곧 엄헌영이 폐하의 예인을 데리고 경운문 안으로 들어 올 것이다.
박수갈채가 울려 퍼졌다.
비할 바 없이 큰 환호성.
태황태후가 승리를 확신한 듯이 미소 지었다.
황제의 하얀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그 모든 소리가 서문경의 귀에는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고, 그 모든 모습이 불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 보는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통인례가 운현궁 예인의 공연이 끝났음을 알렸다. 바로 황제의 예인을 입장 시키라는 명이 떨어져야 하건만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화공예의 마지막 예인을 인도해 오려고 준비하고 있던 하례 궁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통인례를 돌아본다. 결국 결심한 듯 통인례가 태황태후와 황제가 앉아 있는 곳으로 몸을 돌리고 입을 벌렸다.
“폐하, 아뢰옵기 진시 송구하기 이를 데 없사오나.”
안 돼. 쿵쿵쿵 울리는 심장소리가 거의 북소리와 비슷하게 느껴질 만치 커졌을 때 서문경은 다시 경운문을 돌아보았다.
“아···!”
서문경의 눈이 커지며, 그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환희에 가득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엄헌영. 엄헌영이 경운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환희는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그 다음 순간, 기쁨으로 가득 차 있던 서문경의 얼굴이 기쁨 대신 의구심으로 칠해졌다. 사라졌던 예인을 찾기 위해 갔었던 엄헌영이 혼자 돌아온 때문이었다. 엄헌영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엄헌영이 콱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몇 번 가로저었다. 그래서 서문경은 자신이 본, 아니, ‘읽은’ 것이 진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통인례 석정이 말을 잇고 있었다.
“폐하의 예인인 옥우당 담이숙이-.”
이제 몇 초만 있으면, 이 드넓은 전정에 가득 찬 사람들 앞에서 황제의 위신이 흙바닥으로 떨어져 구를 것이다.
“담이숙이 모습을,”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가자, 놀란 사람들이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문경을 쳐다보았다.
“모습을 감추었,”
“여기.”
서문경이 통인례 석정의 말을 끊었다. 서문경은 전정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와 꽂히는 것을 느꼈다. 화살받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서문경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서문경이 말했다.
“여기에 있습니다.”
놀란 황제의 눈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 보였다. 경악하던 그가 서문경과 시선이 마주치자, 바로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젓는다. 화를 내고 있다. 하지만.
서문경은 천천히 사람들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 자신이 스스로도 바보 같이 느껴졌다. 눈가가 괜히 뜨거워져서 서문경은 고개를 숙였다. 멍청한 놈, 서문경은 스스로를 욕했다, 멍청한 새끼, 제 속에 있는 이야기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 저런 놈이 뭐가 미덥고 예쁘다고 이런 망신살을 자처하는 건지. 자신이 한 짓인데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문경은 다음 순간 고쳐 생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황제가 우스갯거리가 되느니, 자신이 한 번 더 져주는 것이, 그것이 차라리 나았다. 실성한 것처럼 비실비실 웃으며 걸어간 서문경이 통인례 석정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제가 황상의 예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