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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여섯 날 밤.
“기가 막혀서···.”
정말로 서문경으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다 접힌 왼손과는 달리 딱 하나 엄지만 접힌 서문경의 오른손이 주먹을 쥐는 대신 자신의 무릎을 한 번 쳤다. 그 손길이 제법 세고 매섭다. 암팡진 손에 맞은 무릎이나 딱딱한 무릎 뼈를 때린 주먹이나 가릴 것 없이 찌르르 아파왔지만 정작 서문경은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다. 서문경은 자신의 두 무릎을 차례로 감싸 쥔 다음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구 소리를 질러 버릴 것 같아서였다.
“손님.”
그런 서문경을 밖에서 불렀다. 이제 목소리도 지긋지긋한 소청 재하 원혜였다. 서문경과 매한가지로 수객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릴 소청 재하 원혜가 호박방에 머리만 내밀고 서문경을 재촉했다.
“채비가 아직도 안 끝나셨습니까?”
하고 묻는 그녀의 말투는 꽃단장하는 계집아이도 아닌 것이 왜 그리 시간을 끄냐는 식이었다. 그 짐작이 옳았는지, 문설주 옆으로 삭 고개를 내민 재하 원혜의 눈이 서문경의 옷차림새를 보고 슥 가늘어졌다. 버릇대로, 빙그레 웃는 입가를 소맷자락으로 가린 재하 원혜가 빈정거렸다.
“꽤나 시간을 들이시기에 공을 많이 그리 들이시나 했는데, 어째 평소보다도 훨씬 단출하십니다?”
“차림새가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나가는 것도 아니고.”
“어마나, 그것은 아니지요.”
재하 원혜가 숫제 호박방 안에까지 들어와서 비웃어댔다.
“날이 날인만큼 보는 눈이 하나 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손님의 위치가 어떤지 생각해 보셔요. 가장 최근에 예를 찾으신 손님, 그러한데다가 누백 년 만에 방문하신 물손님···.”
그게 아니라, 하며 서문경이 재하 원혜의 말을 끊었다. 말허리를 댕강 끊기고 눈을 댕그랗게 뜬 재하 원혜를 향해 서문경은 쏘아붙였다.
“황상의 총애만 믿고 날뛰다 실총(失寵)하고만 방만한 자를 구경하며 비웃고 싶은 거겠지요.”
“어마나, 손님. 비웃다니요. 그 점에 관해서라면, 염려 놓으셔도 된답니다. 예를 찾아오신 손님을 앞두고 마구 비웃을 만치 무례한 자들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구경은 하겠다는 거군. 묘한 곳에서 솔직한 재하 원혜를 앞두고 서문경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제대로 된 일과를 시작하기도 전에 힘이 죽 빠진다. 더 이상 재하 원혜와 투닥투닥 입씨름을 할 기운조차 없어서 서문경은 바로 묻기로 했다.
“폐하는 어디 계십니까?”
“폐하요?”
하고 물으며 힐끗 곁눈질하는 재하 원혜를 보고 서문경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찌나 표정이 적나라한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겠다.
“원래 제가 좀 미련이 깊습니다. 뒤끝도 길고요. 잘 보면 미련이 기름처럼 뚝뚝뚝뚝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잘 살펴보시든가요.” 휘휘 손을 저으며 대충 지껄여댄 서문경이 그러니까, 하며 말을 이었다. “폐하는 어디 계시냐고 묻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는, 하고 중얼거리며 소청 재하 원혜가 어딘가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짓을 단박에 알아챈 서문경이 쿵쿵쿵 괜히 발소리를 내며 그 자리로 달려가 버렸다. 주인도 없는 호박방에 홀로 남겨진 재하 원혜가 서문경의 뒷모습을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끌끌 혀를 차면서 문지방 밖으로 나왔다. 사르륵 미끄러지는 소리를 내며 장지문이 닫히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나인들이 부리나케 뛰어와서 물었다.
“어찌되었어요?”
“또 황상을 찾아 가셨습니까?”
“왜들 이리 야단이야.” 잔뜩 흥분해 있는 나인 아이들을 소청 재하 원혜가 잠시 꾸짖는 척 하고는, 바로 어조를 달리하여 소곤거렸다. “그래. 수객께선 또 황상을 찾아 가셨다. 아직 걔 계시지?”
“예. 장댓돌 근방에 계시는 것을 저 멀리서 배오하였어요.”
재하 원혜가 오늘따라 유난히 풍성한 치맛단을 슬쩍 들며 중얼거렸다, ‘가보아야겠다.’ 당연히 그 뒤를 나인 아이들도 졸졸졸 따라갔다.
“폐하!”
구름 사이를 나르는 금빛 붕새가 내려다보는 보개(寶蓋) 아래를 막 지나는데, 서문경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재하 원혜가 아이쿠, 하며 근처의 평주(平柱) 뒤에 몸을 감추었다. 수객에게 들키면 쓴 소리만 몇 마디 듣고 되면 말 일이지만 황제에게 들켰다가는 크게 경을 칠 것이 뻔했다. 각각 몸을 숨긴 나인들도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쫑긋 귀를 세웠다. 서문경이 황제를 따라가는지 다다닥,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폐하, 어디 가십니까!”
하고 서문경이 황제를 붙잡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나인 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빠끔 내다보니 물손님이 간도 크게 황제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황제가 옷자락을 잡힌 채로 대꾸했다.
“경운전으로 가 보아야 할 것 아니냐.”
그렇게 대꾸하는 목소리가, 기분 탓인지 몹시 우울하게 들렸다. 허나 다시 훔쳐보니 아닌 게 아니라 황제의 낯빛이 비구름이라도 낀 듯이 우중충했다. ‘성심은 이미 돌아섰는데 수객이 끈질기게 들러붙으니 심기가 상하신 게야.’, 큰 축제를 맞아하여 특별히 은박 물린 치마로 야단스레 성장(盛裝)한 나인 곁에 붙어서 수객과 황제가 하는 양을 훔쳐보고 있던 동료 나인이 그리 수군거렸다. 그 말에 은박 치마로 차려 입은 나인이 머리를 모로 기웃했다. 그네 눈에는 황제의 표정이 그리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때 서문경이 따라붙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가시지요.”
“···짐은 따로 할 일이 있어.”
“그 일이란 것이 대체 뭡니까? 이번 일은 폐하께오서 직접 주관하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서문경이 집요하게 캐묻자, 황제가 움직임을 멈추고 서문경 쪽을 돌아보았다. 그가 자신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있는 서문경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잡아떼며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소리에 서문경의 등이 움찔했지만 그 뿐, 서문경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런 서문경은 한 동안 우울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황제가 불현듯 물었다.
“경이 너도 짐의 용안을 보고 있는 것이 힘들지 않으냐.”
그 말에 서문경의 얼굴이 멀리서 보기에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래, 당연히 부아가 나지···, 하며 동료 나인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 치맛자락에 입힌 은박을 조몰락거리고 있던 나인은 조금 생각이 달랐다. 서문경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그녀는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사가(私家)의 세 살 배기 동생이 울기 직전에는 늘 저런 표정을 짓곤 했었더랬다.
그러나 착각이었는지, 곧바로 수객이 차게 얼굴을 굳히고 되물었다.
“왜요. 제 얼굴을 보고 계시기가 힘드십니까? 또 같잖지도 않은 트집을 잡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내뱉은 서문경이, 황제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 마치 황제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튀어나올지 듣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그래도 안 됩니다. 혼자 계시면···.”
“짐이 홀로 있는 것으로 뵈더냐.”
황제의 말대로, 황제의 지척에는 황제를 보필하기 위하여 내시감과 대령상궁 및 그 휘하의 나인들이 주루룩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수객이 매몰차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그 말에 대전 대령상궁과 내시감의 얼굴이 발에 밟힌 종잇장처럼 구깃구깃해졌다. 말로 하지 않았을 뿐, 저 치들을 데리고 있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 것이 낫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말투와 표정이었으니 그 이들이 기분이 상할 만도 하다.
하지만 대전 대령상궁 연재 화연과 내시감 봉승은 다만 낯짝만 구겨 불편한 심기를 표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대전 지밀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방만한 저 치들이 수객의 가차 없는 말에 욕을 당하고도 아모 반박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묘한 광경이었지만, 이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하기는 나래도 지금은 몸을 사릴 것이야, 하고 나인 아이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인 아이의 시선을 힐끔힐끔 황제의 발치를 훔쳐보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즈음 황상의 심기는 비유하자면 우레가 내리치기 직전의 창극과 같았다. 수객의 앞에서는 저리 야단맞은 강생이 꼴을 하고 있지만, 수객이 잠시만 눈을 돌리거나 수마(睡魔)에 정신이 팔렸다손 치면 바로 뇌성을 품고 으르렁대는 비구름 모양을 하고 있는 탓에 나인들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실수로라도 잘못 건드리면 그 우레가 자신들에게 쏟아질 것이 뻔 할 뻔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묘한 것이, 그 모습을 보면 수객과 사이가 틀어져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 분명하건만 정작 수객이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말을 걸면 또 그와 말을 섞기를 저어한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자꾸만 수객이 매달리고, 황제가 내치는 것 같은 상황이 여러 사람 눈에 목격되어 좋지 않은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다. 그 소문을 굳게 믿는 동료 나인 몇몇은 수객이 황제의 총애만 믿고 건방을 떨다 결국 실총케 된 것이라 입방아를 놀려댔지만 나인 초희(草熙)는 그리 여기지 않았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더 깊은 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것 보라지. 초희가 수객의 표정의 훔쳐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표정을 보아하면 둘 중 더 심기가 틀어진 쪽은 황상보다는 오히려 수객 쪽이다. 다만 저 수객이 속정이 깊어 황상을 가만 놓아두지 못하는 것일 뿐이지···.
“헌데, 소청 마마님.” 그 때 동료 나인이 문득 생각난 사실이 있다는 듯이 소청 재하 원혜를 불렀다. 황제와 수객이 있는 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소청이 입으로만 대꾸했다, ‘무슨 이유로 부르는 것이냐.’ 허락을 받은 동료 나인이 물었다. “저 분은 저리 한가로이 계셔도 되는 것입니까?”
저 분?하며 소청이 반문하자 동료 나인이 물손님을 가리켰다.
“저 분, 대연회에 나가시기로 되어 있지 않으셨어요? 천추전 침방에 있는 동무에게 넌지시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리했었지.”
“허면, 시방은 아니라는 말씀이셔요?”
“그리 됐다는구나.”
나인 초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어찌 일이 그리 되었어요?”
평소 태도가 음전하고 순박한 초희가 갑작스레 그런 물음을 할 줄은 몰랐던지, 소청 재하 원혜는 일순 당황한 듯 했다. 그러나 뜻밖의 사실을 듣고 왜인지 자신이 내쳐지는 듯한 기분에 가슴이 싱숭생숭하던 나인 초희는 미처 소청의 놀란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재차 여쭈었다.
“황상께오서 그리 결정하시었어요?”
“그렇다 하더구나.”
소청의 대답에 동료 나인은 ‘어마나’하고 속삭이며 악의와 호기심으로 범벅이 된 입술을 가렸고, 초희는 가만히 이맛살을 구겼다. ‘어쩌다 그리 되었어요?’ 동료 나인이 묻는 말에 재하 원혜가 대답했다.
“내가 대전 지밀도 아닌데 성심을 어찌 알리?” 처음에는 점잖게 빼는 척 했지만 그것도 잠시, 재하 원혜가 목소리를 낮추더니 주변의 궁인들에게만 들리도록 속살거렸다. “허나 사내 마음이란 것이 뻔한 것 아니더냐?”
“태황태후전에서 큰마음을 베푸시어 황상께 만고절색(萬古絶色)을 몇이나 선보여 주셨다더니, 그 일 때문일까요?”
“수선 유송연은 빙기옥골(氷肌玉骨)의 가인이요, 납매 강재희는 유미도안(柳眉桃顔)의 절색이니 세상 어느 사내가 눈이 돌아가지 않겠느냐. 더구나 그 두 미인은 얼굴과 몸매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걸음걸이조차 꽃이 피는 듯한 금련보(金蓮步)요, 마음씀씀이까지 혜심(蕙心)이라 하더구나.”
얼굴만 매끈한 누구와는 참으로 다르지, 하며 빈정거린 소청 재하 원혜가 다시 수객 쪽으로 눈을 돌리며 덧붙였다, ‘더구나···.’ 여전히 찌푸린 얼굴의 황제와, 그런 황제에게 무어라 끈질기게 달라붙고 있는 서문경의 모습이 보였다.
“삽시에 총(寵)을 잃어 황망하고 울연(鬱然)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저리 태도가 까끌까끌해서야···, 없던 정도 더 떨어질 뿐이지.”
“그럼 저 수객은 이제 어쩌신대요.”
“모르지.”
소청 재하 원혜가 그런 데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도 초희의 동료 나인은 순식간에 내쳐진 수객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중얼거렸다, ‘수객이 아니라 천객이라도 되었으면 앞으로 먹고 사는데 걱정은 없었을 것을.’ 그 말을, 재하 원혜가 웃으며 반박했다.
“연화야. 연화야. 저 이가 고명한 하늘손님이셨으면 저런 황상께 기댈 일은 애초에 생기지도 않았을 것을, 무슨 말이냐.”
“하기는 그렇습니다, 마마님.”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동료 나인과 소청이 입가를 가리며 꺄르르 웃었다. 뒤통수 뒤에서 소청과 동료 나인이, 저 얄미운 수객이 이번에야말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될 거라는 둥, 그러니까 평소에 곰살갑게 굴었으면 좀 좋았겠느냐는 둥 하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것이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초희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담이 약한 사람은 살살 속을 긁고, 어진 사람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뒷소리를 하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물손님이 살갑게 군다고 잘도 잘 대해 주었겠다.
그 때 재하 원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찌되었든 잘 되었다. 고 고슴도치 같은 물손님도 믿는 곳이 없어졌으니 이제는 기를 못 펴겠지.”
“그러게요.”
이제야 일할 맛이 나겠나며 동료 나인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을 보면서 초희는 몰래 생각했다. 혀끝이 몹시 뾰족하기는 해도 결코 틀린 말은 하지 않는 저 송골매 같은 수객이 이번 일로 날개가 꺾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노라고.
그런 초희의 귀에, 화제를 바꾸어 소청 재하 원혜와 다른 나인 아이가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럼 대전에서 내보내기로 한 예인은 어떻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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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고용했다고?”
팔짱을 낀 팔을 꼰 다리 위에 불량한 자세로 올려놓고 있던 서문경이 불쑥 중얼거렸다. 그것도 돈으로? 하고 덧붙였다가 곧바로 그는 자신이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을 고용한다면 당연히 돈으로 하는 거지, 지금 내가 무슨 헛소리를 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이성적으로 되뇌어보아도 부글부글 속이 끓는 것만은 어떻게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방법이 있다고 하더니, 고작···.”
서문경이 이를 갈았다. 자신이 굳이 예인으로 참가하지 않아도 방법이 있다고 그렇게 큰 소리를 떵떵 치더니, 그 방법이라는 게 고작 은돈으로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었단 말인가. 물론 다른 이들, 예컨대 태황태후나 3성 12관부의 우두머리들도 특별히 알고 지내는 예인이 없는 이상은 저자에 이름난 예인들을 수소문해서 은자를 주고 고용한 것이었겠지만 그들과 황제는 상황이 다르다. 다른 치들에게 고용된 예인들은 이번 일에 걸린 은자가 문제가 아니라 까마득히 높으신 분들을 대신하여 궁중의 큰 연회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자부심을 느끼고 대연회 경연에 임하겠지만.
‘그 인간의 경우는.’, 서문경의 미간에 저절로 물이라도 고일 법한 깊은 주름이 파였다. 허수아비 황제, 심하게는 정당한 용인을 젖혀두고 황좌를 차지하고 드러누운 해타(懈惰)한 천둥벌거숭이 취급을 받는 황제의 대리인이라면 자부심은커녕 수치심을 느끼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런 치에게 무슨 배짱으로 자존심을 걸며, 무슨 정신머리로 충실한 경연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역시 내가···.”
“자네가 무얼. 무얼 하게.”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던 서문경이 딱 입을 닫았다. 그러자 그 옆에 누군가가 털썩 주저앉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뭘 새삼···? 괜히 불안해져서 돌아보니 조금 전까지 자신의 옆에 앉아서 노골적으로 자신을 구경하고 있던 두꺼비 같은 얼굴의 사내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쫓겨나고 있었다. 서문경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그 사내를 쫓아내고 서문경의 옆자리를 차지한 남자가 기다란 몸을 더더욱 길게 펴면서 기지개 비슷한 것을 켜고 있었다.
용모도 닮았는데, 팔다리 긴 것도 닮았군. 서문경이 남자, 효강 엄헌영이 하는 꼴을 곁눈질로 훔쳐보고 생각하고 있는데 뭉친 어깨를 푸는 것을 대충 끝낸 엄헌영이 말끄러미 서문경 쪽을 쳐다보았다. 훔쳐보는 것을 들켰나 싶어 뜨끔한 서문경이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며 물었다.
“뭡니까.”
“새삼스럽게 뭘 통성명을 해.”
“그게 아니라···, 왜 여기 있냐고요.”
하고 묻는 말에 엄현영이 부루퉁하게 반문했다, ‘그런 자네는 여기 왜 오도카니 앉아 있나.’
“어차피 머릿수 채우느라 끌려 나온 것인데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이야.”
“그럼 저도 마찬가지지요.”
“자넨 다르지.” 하고 말한 엄헌영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혼자 있어도 되는 건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서문경은 어째서 엄헌영이 그리 반갑지도 않을 자신의 옆자리를 굳이 꿰차고 앉았는지를 눈치 챘다. 며칠간의 마음고생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서문경의 표정이 자신도 모르게 누그러졌다. 서문경이 한결 순순해진 어조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주위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요.”
“이 사람들 사이에 삿된 마음을 먹은 치가 있을 수도 있어.”
“그래봐야, 여기서 뭘 어쩌겠습니까.”
서문경이 새삼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드넓은 광장 중앙에 긴 포석도로가 가리마처럼 나 있고 그 주변에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경운전 광장.
예 제국의 정궁(正宮)은 수도 원경에 위치한 자의성(紫衣城), 혹은 신궁(新宮)이라 불리는 궁성이었다. 위로 12m, 사방 4.5km 길이의 두터운 담으로 둘러싸인 이 성은 예의 세 번째 황제였던 태화제(太和帝) 때 완공된 이래로 죽 예의 정궁으로 쓰였다. 신궁에는 셀 수도 없는 전각과 정자 등의 건축물은 물론 석탑, 석등 등의 석조물이나 궁원이나 인공호수 등의 조경물들이 위치해 있지만 걔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은 정전(正殿)인 경운전이었다.
경운전은 평소에는 황제가 나아가 문무백관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곳으로 쓰였지만, 특별한 때에는 조정의 각종 의식이나 타국 사신의 접견 등에 쓰이기도 했다. 그런 경운전의 전면에는 행랑으로 둘러싸인 광장, 즉 전정(前庭)이 있고 그 포장된 대로 위에 품계석(品階石)이 마련되어 있어 진연(進宴), 회례연(會禮宴), 양로연(養老宴) 등 황실의 큰 행사가 있을 때 그곳에서 행사가 치러지곤 했다.
그래, 지금처럼 말이다.
서문경의 말을 듣고 새삼스럽게 주변을 돌아본 엄헌영이 잔뜩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데 인파가 몰려 있는 것이 정말 지긋지긋하게 싫은지, ‘무슨 큰 구경거리 났다고.’하고 무의식적인 투덜거림이 튀어나온다. 사람이 많은 것은 서문경 또한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 서문경에게는 인파 따위는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 자넨 전부터 계속 어딜,”
서문경이 아까부터 어느 한 점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엄헌영이 서문경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을 쳐다봤다가 윽, 하는 신음을 흘렸다.
서문경이 쳐다보고 있는 곳은 높이 쌓은 기단(基壇) 위에 자리 잡은 황실 식구들의 자리였다. 그 중 가장 상석은 물론 지존인 황제의 자리였고, 황제의 자리 양 옆에는 각각 홍색과 자줏빛 부직(浮織) 천을 씌운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홍색 부직을 입힌 자리는 황제의 정실인 황후의 자리인 관계로 공석이었으나, 자줏빛 부직을 입힌 자리에는 태황태후 엄씨가 자리하고 있었다. 황제보다 한 단 낮은 자리에 마련된 황태자의 자리나, 그 아래의 좌석 또한 모두 비어 있었다. 현재의 황제가 정궁은 물론이요 단 한 명의 후궁도 맞이하지 않아 국저(國儲: 황태자)는커녕 슬하의 황자황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빈 자리가 찬 자리보다도 많은 것을 보고 누군가가, ‘단출하군.’하고 표현했지만 그 말을 들은 엄헌영은 코웃음을 쳤다. 단출하기는, 을씨년스러운 거지.
혹시라도 태황태후와 눈이 마주칠까 봐 저어되는지 슬글슬금 아래로 고개를 내린 엄헌영이 말했다.
“어딜 보나? 황상?”
“···예.”
대충 둘러댈까 아니면 바로 대답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헌영의 말대로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황실 구성원을 보면 둘러대는 말이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인 듯, 엄헌영이 한 번 미간을 구겼다 펴고는 혼잣말인지 서문경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것 참 지극정성이시군.”
“저 말입니까?
말을 듣는 순간 멈칫했다가, 곧바로 서문경이 물었다. 불쾌해한다기보다는 당황해하는 듯한 서문경의 표정을 보고 엄헌영이 혀를 찼다.
“자네가 아니면 누구겠나. 지금 이 자리에 자네 외에 또 있나?”
“···많지만. 아무튼, 제가 어디에 지극정성이라고요?”
“지금 몰라서 묻는 건가?”
모르니까 묻는 것 아닙니까, 하는 서문경의 항의에 엄헌영은 반박하거나 핀잔을 놓는 대신 눈살만 잔뜩 찌푸렸다. 열 마디, 백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그의 표정에 따라서 구겨진 서문경의 눈길이 이 직전까지 자신이 쳐다보고 있던 자리와, 엄헌영의 얼굴을 두어 번 번갈아보고는 그 중간쯤에서 멈췄다. 비로소 엄헌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챈 서문경이 저, 하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하고 말하고 나서 서문경은 생각했다. 너무 정색을 하면 오히려 수상해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그가 뒤늦게 덧붙였다. “그런 것이···.”
“자네는 아닐지 몰라도 다른 이 눈에는 그리 보여.”
서문경이 애써 말을 고른 것이 무색하게 엄헌영이 곧바로 대꾸했다. 서문경이 눈을 찡그렸다.
“그렇게 보이나요?”
“이전 일도 그렇고.”
이전? 하고 서문경은 의아하게 생각했다가, 곧 엄헌영이 조원을 피해 송림에서 빠져나온 직후 자신이 바로 청의관으로 달려갔던 일을 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서문경이 이마를 짚었다가, 이윽고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전 일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리하면 어찌하여 황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거든요.”
문제라니? 앞뒤설명 하나 없는 불친절한 설명에 엄헌영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서문경으로서도 그 이상의 대답은 해줄 수가 없었다. 말하는 자신조차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어떤 일인지도 알 수 없는 ‘큰 일’이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대답하면 엄헌영은 어이 없어하는 것을 지나쳐 자신을 놀리는 것이냐고 역정을 낼지도 모른다.
더 말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서문경이 입을 다물어버리자 엄헌영도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게 되었다. 대화가 끊기자 이번에는 주변의 웅성거림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이번 내춘대연회에 대한 기대로 부푼 속삭임이었지만 그 사이사이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말들이 섞여 있었다. 다름 아닌, 궁 안은 물론이요 궐 밖에서도 소문이 파다한 물손님에 대한 수군거림이었다. ‘저 자가.’, 하며 서문경을 몰래 손가락질하며 소곤거리는 소리에서부터 막강한 힘을 가진 천객들과 수객을 비교하는 소리, 나아가서는 황제와의 염문(艶聞)에 대한 추한 호기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속삭임까지.
천박한 족속들. 더 구겨질 곳이 없을 정도로 얼굴을 찌푸린 엄헌영이 서문경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엄헌영의 귀에 들리는 말이 서문경의 귀라고 피해갈 리가 없건만 서문경의 낯빛은 그런 소리를 한 마디도 듣지 못한 것처럼 말끔했다. 엄헌영의 시선을 느꼈는지 서문경이 말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듣긴 들었군.”
“귀가 붙어 있으니까요.”
“···괜찮은가?”
“아뇨, 저도 사람인데 저런 소리 들으면 마음이 상하죠.”
라는 대답을 듣고 엄헌영은 눈을 몇 번 끔뻑였다. 그다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하는 그의 마음이라도 읽었는지 서문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아서요.”
“···황상이 괴는 것만 믿고 패악을 부리다 결국은 총애도 잃고 이번 경연에서도 밀려나고 말았다.” 그 말에 자신 쪽을 힐끔 쳐다보는 서문경에게 엄헌영이 눈짓을 했다. 아까부터 괜히 신이 나서 떠들어대고 있는 두꺼비 같은 용모의 사내와 맹꽁이 같은 용모의 여인이 있는 자리였다. 엄헌영이 잠시 틈을 두었다가 조금 뒤에 말을 이었다. “···라는군.”
사실인가? 하고 묻듯이 엄헌영이 머리를 약간 좌로 기울였다. 저 작자, 아까 내 옆자리에서 쫓겨났던 그 사람이잖아. 서문경이 양서류를 빼닮은 부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하나 정도는. 원래 이 경연에 제가 나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었거든요.”
“그런 말이 분명히 있었지···.” 하고 중얼거리며 잘 생긴 턱을 쓰다듬는 엄헌영은 황제가 태황태후전에 들이닥쳐 서문경을 예인으로 소개했던 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그가 잠시간 내리깔았던 시선을 제자리로 돌리며 물었다. “헌데 예정이 틀어진 이유가 뭐지?”
“저도 모릅니다.”
엄헌영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며칠 전 있었던 황제와의 언쟁을 떠올린 서문경이 무심코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이유도 없이···, 말을 바꾸셔서.”
“본디부터 변덕스러운 성미였으니 마음에 둘 것 없어.”
“그야,”
그렇지만, 하고 대답하려던 서문경이 입을 벌린 채로 말을 멈췄다. 서문경이 벌린 입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보자 엄헌영이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냐는 듯이 한 쪽 눈썹만 슥 밀어 올렸다가 내렸다. 방금 자신이 황제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눈치였다.
저, 하며 서문경이 답지 않게 망설이다가 물었다.
“폐하와는···, 친분이 있으십니까?”
그 말에 대답 대신 싸늘한 눈빛이 날아왔다. 서문경은 조금 억울해졌다. 평소 태도를 보고 그가 황제를 싫어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해의 여지가 있게 말한 사람은 자기가 아니었던가. 서문경은 내심 탄식하며 질문을 바꾸었다.
“그럼, 폐하를 사사로이 알고 계십니까?”
이번에도 바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처럼 책망하는 시선이 날아오지도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엄헌영의 표정은 분명히 뭔가를 난감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서문경은 알아차렸다.
“그렇군요.”
“약간.” 결국 엄헌영은 한숨을 쉬며 인정했다. “아주 조금.”
엄헌영은 곤란해 하며 대답했지만 서문경은 의외로 선뜻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어쩌면 당연한 사실일지도 모르지.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고는 하지만 어찌되었건 엄헌영은 사사로이는 황제의 외당숙이 되니. 더구나, 하고 생각을 이으며 서문경은 엄헌영을 곁눈질했다. 귀신처럼 눈치가 빠른 엄헌영이 당장 그 시선을 눈치 채고 눈썹을 꿈틀했다. 그 얼굴이 황제와 한 판에서 재료만 달리하여 찍은 듯이 닮은 것은 물론, 연배도 제법 비슷해 보였다. 그러니 어린 시절에는 미우나 고우나 얼굴을 마주하고 어울렸어야 했겠지.
그러다 문득 서문경은 생각했다. 폐하와 저 사람도 그렇지만 수상도 그들과 같은 연배가 아닌가.
“체제공은···, 수상은 올 해로 몇이나 되지요? 폐하나 당신과 비슷할 정도로 젊어 보이는데.”
“황상보다는 나가 좀 되지. 약관을 삼 년도 전에 치렀으니. 나보다는 연식이 조금 덜 되었고.”
서문경이 불쑥 생각났다는 듯 던진 물음에 엄헌영이 별 의심도 하지 않고 대꾸해 주었다. 그렇군요, 하고 서문경은 중얼거렸다. 별 모난 곳도 없이 예사롭게 중얼거리는 어조였지만 그의 머릿속은 그와는 달리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제국의 우두머리인 황제와 백공(百工)의 수장인 수상, 황제의 외당숙인 동시에 약령(弱齡)에 용호군 중장랑 1령 장군 자리에 오른 촉망받는 무장. 이들의 연배가 비슷한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어느 사회나 때가 되면 세대교체가 이뤄지기 마련이지만 고작 스물 초입에 불과한 청년들이 몇이나 나라의 중진(重鎭)을 차지한다? 그리고. 서문경이 생각의 방향을 잠시 돌렸다. 황제와 엄헌영, 황제와 수상과는 달리 엄헌영과 서현은 언뜻 생각하면 그 둘을 잇는 끈이 희미하거나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헌영이 그 때 물었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나?’ 그 말에 서문경이 심상한 투로 대꾸했다.
“제 성격이 생각 외로 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딱 봐도 그리 보이는구먼, 뭘 생각 외로야.”
“···과연 한 핏줄.”
얌전히 있는 사람에게 괜한 시비를 거는 것까지 닮았다니. 서문경이 중얼거린 말을 잘 듣지 못한 엄헌영이 ‘응?’하며 말끝을 올리는 것이 들렸지만 서문경은 듣지 못한 척 그를 무시했다. 정리해야 할 생각이 산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문경은 엄헌영이 말을 거는 바람에 잠시 중단했었던 생각을 다시 이었다. 맥연히 생각하면 아무런 접점도 없는 두 사람이지만,
경혜현주.
서엽 그 자는···. 언젠가 황제가 해주었던 말이 서문경의 머릿속에서 지나갔다. ···해마다 황족에 준하는 1만석의 봉록을 받는 동시에 강윤제가 가장 귀애하던 손녀인···.
-경혜현주(瓊慧縣主)를 아내로 맞기도 했지.
서엽은 수상 서현의 아버지이며, 경혜현주는 황친이었다. 비록 경혜현주는 황제의 부계친족(父系親族)이고 엄헌영은 황제의 모계친족(母系親族)이니 경혜현주와 엄헌영 사이에는 황제라는 매개가 있어야 관계가 성립하는데다 서현의 의붓어머니인 경혜현주와 사이가 좋을지 나쁠지도 알 수 없었지만, 서문경은 아무리 가능성이 낮다 해도 그것을 그냥 지나칠 생각이 없었다. 더구나,
-짐이 황자 시절에 소현태자의 소생인 경혜현주가 자주 궐 안을 드나들었느니라. 경혜현주는 짐과 그다지 나이 차가 나지 않았는데···.
고뿔로 앓고 있을 때에는 별 생각 없이 받아 넘겼던 이야기가 다시 찬 기운을 되찾은 머리에서 팽팽 소리마저 날만큼 돌아가고 있었다. 종이풍선을 가지고 놀던 황제가 무심코 흘린 말로 미루어보면 경혜현주는 제 조부인 강윤제 제위 시는 물론 숙부인 가연제 시절에도 거리낌 없이 궐 안에 드나들 수 있었을 만치 황실 어른들에게 귀애받던 아이였다. 더불어 지금 자신의 옆자리에 긴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남자, 엄헌영도 태황태후 엄씨의 총애를 받는 질자였다.
“예전부터 황궐에 자주 드나들으셨습니까?”
“음?” 갑자기 던져진 맥락 없는 질문에 엄헌영이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황제가 사사로이 알고 지내던 사이였느냐는 화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물음이라고 이해했는지 떨떠름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래서 어쩌다 보니.”
“그렇군요.”
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서문경이 입을 다물어버리자 엄헌영이 조금 황망한 얼굴을 했다. 이게 단가?, 하고 그가 물어오기에 서문경은 다시 시선을 황제에게로 맞추면서 대답했다. 네, 그게 답니다.
“더 캐어물으시면 언짢으실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대꾸하는 엄헌영은 하던 일을 채 아물리지도 못한 찜찜함과 제 마음의 안정 중에서 한창 고민 중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이미 짐작하고 있던 서문경은 엄헌영에게서 완전히 눈을 거두었다. 일다경이 몇 번이고 지나가도 옆에서 별다른 말이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엄헌영이 불편한 진실을 헤집는 것보다는 마음의 평온을 택할 것이라는 짐작은 옳았던 모양이다.
왕실 여인과 친인척이 참석하는 내연(內宴)인 탓에 환악원(歡樂院) 소속의 관현맹(管絃盲: 맹인 악사)과 무동(舞童), 악공과 악생 외에도 여악(女樂)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네들이 섭악장(攝樂將)의 인도를 받아 장내로 입장하는 신호인 이엄(二嚴)이 울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훑으면서 서문경은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경혜현주와 엄헌영 사이에 있는 관계를, 나아가 엄헌영과 서현도 보통 이상의 안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갑자기 장내가 조용해졌다.
“시작하는군.”
하는 엄헌영의 중얼거림과 함께 둥, 하고 북소리가 한 번 울렸다. 대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초엄(初嚴)이다.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무구(武具)를 갖춘 군사들이 열을 맞추어 전정으로 들어왔다. 창칼을 손에 든 군사들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렬해 있는 모습을 본 서문경이 힐끔 엄헌영을 눈짓하자 그가 불쾌한 듯 내뱉었다, ‘저 자들은 금위군(禁衛軍)이다, 나는 용호군 소속이고. 결코 내가 놀고 있는 것이 아니야.’
둥-. 다시금 북이 울렸다. 이엄(二嚴). 이번 행사의 섭악장으로 임명받은 환악원의 관리가 앞장서서 휘하의 악사들을 데리고 입장했다. 무동들과 여악들의 차림이 마치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한 송이 꽃과 같았다.
삼엄(三嚴). 세 번째 북이 울리고, 구령을 외치는 일을 맡은 통인례(通引禮)가 삼엄을 알리자 3품 이하의 인제관(人祭官)들이 배제관(背祭官)의 뒤를 좇아 자신의 품계에 맞는 품계석으로 가 섰다. 통인례가 외쳤다.
“황상-, 듭시오.”
마련된 자리에 앉아 있던 황제가 여를 타고 전정으로 들어와 백금빛 비단을 씌우고 등받이 둘레와 팔걸이에 황금빛 구조룡을 둘러 장식한 제좌(帝座)에 앉았다. 다음은 황태자가 상례(上禮)의 인도를 받아 자리에 나아가야 하나, 국저가 없는 탓에 의식은 그 다음 의식으로 바로 이어졌다. 다음 의식은 통인례의 인도로 황친과 공신, 그리고 2품 이상의 관리가 입장하는 의식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외척인데 이런 곳에 있어도 되는 것인가 싶어 서문경이 엄헌영의 얼굴을 훔쳐보았지만 금위군이 입장할 때와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한 점 껄끄러운 빛도 없었다. 아마도 다음 의식 때 입장해야 하는 황친은 황족보에 이름이 오른 친족들뿐인 모양이었다.
먼저 황족의 인도를 맡은 상례가 나서 황친 입장을 외쳤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위엄을 갖춘 옷차림을 한 황족들이 전정으로 들어올 때마다 상례가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황제를 향해 고하였다. 이름이 불린 황족들은 먼저 황실의 웃어른인 태황태후와 지존인 황제에게 사배(四拜)를 올린 후에야 비로소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쳐 자신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수상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재 입장 중인 황친들보다는 공신과 관리가 줄지어 서 있는 자리에 관심이 가 있던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돌린 것은 상례가 막 전정으로 들어서는 여황족의 이름을 외친 그 때였다.
“추존왕(追尊王) 헌왕(憲王) 태자 소현의 말녀(末女) 삼현주 해운 문위 경혜-,”
경혜현주?! 마침 골똘히 되뇌고 있던 이의 이름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들려 무심코 돌아본 서문경은, 그러나 얼굴도 모르는 경혜현주 대신 그녀 뒤의 다른 이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헌의공이군.”
서문경이 보고 있는 쪽을 본 엄헌영이 말했다.
“헌의공?”
“수상의 부친 말이야.”
“서엽?”
하고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뭐야, 아는군, 하며 고개를 돌리는 엄헌영을 억지로 붙잡아 세우며 서문경이 물었다. 저 사람이 진짜 서엽입니까?
“수상의 아버지고, 경혜현주의 남편인 그 서엽이요?”
“···? 그래.”
허, 하고 서문경이 허탈한 탄식을 내뱉었다. ‘왜 그러지?’, 그 반응이 어딘가 이상해 엄헌영이 물었지만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서문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서문경이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저 사람이 서엽이라고?”
하고 말하는 서문경의 시선은 경혜현주로 추측되는 화문녹의(花文綠衣)를 입은 젊은 여인과 같은 단에 서 있는 어떤 중년사내에게 똑바로 꽂혀 있었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닌 이상 얼굴을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먼 곳에 있어 서문경 쪽이 보이지도 않을 텐데, 마치 서문경의 시선을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중년사내가 눈길을 돌렸다. 희끗희끗 새치가 보이는 머리카락에 비해 젊어 보이는 피부와, 자주 웃어 생긴 눈가와 입가의 주름. ···얼마 전 홀로 걷고 있던 서문경에게 접근하여 서문경의 ‘힘’을 대단히 기위하다 칭찬했었던 바로 그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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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궁(鞠躬), 배(拜), 평신(平身).”
하는 말에 따라 백관이 바닥에 엎드려 평신저두 부복을 올렸다가, 몸을 일으켰다. 진연이 있을 때면 늘 있는 절차였지만 절하는 이들의 머리가 하나같이 황제가 아닌 태황태후를 향했다가, 머리를 들 때는 수상을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던지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황친과 공신, 문무백관이 차례로 황제와 황실의 웃어른께 국궁사배를 올리는 의례가 끝이 났으니 곧 내춘대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참이었다. 황제의 짧은 축사(祝辭)가 끝을 맺자, 화공예(花工藝)에 앞서 환악원 소속 악사들의 공연이 펼쳐졌다.
악공이 우방(右方)에 서고, 악생이 좌방(左方)에 선 후에 그 중앙에 무동과 여악이 자리를 잡았다. 그들보다 조금 뒤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관현맹이 목관 취주악기를 불기 시작하자 악공이 그 뒤를 따라 북 따위의 타악기를 때리고, 그보다 반 박자 정도 늦게 나머지 관현맹이 줄악기를 튕기고 마지막으로 악생이 금관 취주악기에 숨을 불어넣으며 다른 악사들을 좇았다. 무동과 여악이 맵시 있는 손짓으로 금박은박을 입힌 화사한 옷자락을 흩날리며 춤추기 시작했다. 버드나무 가지처럼 낭창한 소년과 여인이 이리 빙글 저리 나붓하며 춤추는 모습이 마치 나비와 꽃이 한데 뭉치 노니는 듯하였다.
딱딱한 의례를 모두 마친 덕에 천관(千官)과 황친들은 한결 느긋해진 모습으로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서로 어울려 대화꽃을 피우는 손님들의 앞에 쉴 새 없이 숙설소에서 내어오는 음식이 날라지고 있었다. 차가운 요리를 먹어치우자 뜨거운 요리가 내져 오고 또 볶은 요리를 먹어 없애자 끓인 요리가 나왔다. 그 종류도 닭과 거위, 생선과 돼지, 진귀한 과일과 곁들임 채소, 계절 꽃을 띄운 차가운 화채와 따끈하게 데운 예락(醴酪)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한편 황제의 앞에 놓인 상은 음식을 마치 산처럼 높이 쌓아 올려 그 뒤에 앉은 황제의 얼굴을 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예법대로 어상(御床)을 차린 이의 잘못이 아니었다. 상이 차려진 이후로 지금까지, 어상 위의 음식들은 어육 한 점, 화채 한 모금 줄어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뱃속이 편치 못하십니까.”
하고 말을 거는 소리에 황제는 머리를 들었다. 옥병(玉甁)을 들고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본 황제의 표정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감히 황상의 어수에 잔을 올려도 될 지요.”
“되었네.”
“국저의 자리가 비어 있어 한 잔 받으시지도 못하지 않으셨사옵니까.”
“그러게 말이야. 지루한 식전의례에서 유일한 즐거움이 그것인데.” 황제가 어상에 팔꿈치를 짚고 손바닥 위에 턱 한 쪽을 비스듬 괴면서 빈정거렸다. 그러다 그가,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이 남자를 돌아보고 물었다. “차라리 체제공을 국저의 대리로 세울 것을 그랬군. 그랬다면 적어도 술 한 잔 정도는 얻어먹을 수는 있었을 것 아닌가?”
“싯누런 늙은이가 따르는 술이라 맛이 덜할지도 모르겠으나 한 잔 받아 주시옵소서.”
남자가 옥병을 기울여 황제의 은잔에 술을 따라 올렸다. 퐁퐁퐁 소리를 내며 금방 술잔 주둥이까지 채운 맑은 술을 황제가 찌푸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내키지 않으십니까? 남자가 묻는 말에 황제가 내뱉듯 대꾸했다.
“헌의공은 여전히 이부가 부실하시군.”
사람 말을 한 마디도 안 들어 처먹는 것을 보니 말이야. 황제의 꾸지람에도 남자는 당황하거나 송구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되레 남자가 사람 좋게 웃으며 대꾸했다.
“살펴보니 지존께오서 어상에 어수를 뻗으시는 기색이 없으시어서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쓸데없는 걱정이 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탓인지 신이 염려가 되어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정말로 쓸데없는 걱정이 늘었나보군.”
“속이 더부룩하신지요.”
“입이 깔끄러워서 그러네. 신경 쓰지 말아.”
하고 말하는 황제는 정말로 어상에 수북이 쌓인 음식들을 어디론가 치워 버렸으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황제를, 무엄하게도 말끄러미 쳐다보던 남자가 이윽고 턱 끝을 주억거렸다. 하기는, 저런 추태를 보이는 것보다는 백 번 천 백 자존(自尊)을 바로 세우는 행동이시옵니다. 남자가 잠시 눈짓한 자리에서는 당최 누가 내는 소린지 차수과(叉手果) 씹는 소리가 쩝쩝쩝 요란스럽게도 울리고 있었다.
“태본(泰本)이로군요.”
“저 어른도 참.”
남자의 말에 잠시 시선을 돌린 황제가 요란스레 씹는 소리를 내며 음식을 흡입하고 있는 태본 엄유를 흘겨보며 끌끌 혀를 찼다. 그런 엄유의 근처에는, 태황태후 엄씨가 앉아 멧돼지 같은 말제(末弟)에게 어여뻐서 꼬집어 주고 싶다는 뜻의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언제 봐도 악취미란 말이지, 자신의 할머니에게 못할 말을 중얼거리고 있던 황제가 그러다 문득 엄유의 곁에 자리하고 있던 자와 눈이 마주쳤다. 옆에 앉은 엄유보다 스무 살 이상은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로, 기와처럼 돌출된 눈썹은 물론 수염과 머리카락까지 새하얗게 샌 노인이었다.
그 노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황제의 얼굴에서는 싹 표정이 사라지고, 노인의 얼굴은 얼어붙는 것처럼 싸늘하게 굳었다. 황제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 자신이 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던 남자와 바로 시선이 마주쳐서 황제는 정색을 하고 꾸짖었다.
“뭘 훔쳐보고 있는 건가.”
“송구합니다.” 남자가 고개를 수그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참기름을 바른 듯한 혀로 지껄여댔다. “허나 황상의 용안이 몹시 어두운 듯 하여서.”
남자가 거침없이 물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지요?”
“없다.” 황제가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굳이 짐에게 근심이 있다 하면 반갑지도 않은 얼굴을 지척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겠지.”
“신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어 어심을 흐려 놓은 모양입니다.”
남자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것에 황제는 흡족해하는 대신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꿍꿍인가?’하는 뜻을 담은 시선을 던지자, 남자가 그 시선에 담긴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가장하고 딴 말을 했다.
“신은 다만 짐작 가는 바가 있어,”
황제가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다니?”
“폐하께옵서 그리 용안이 어두우신 까닭을 짐작하고 있었사옵니다.”
밀담이라도 나누듯 한껏 목소리를 낮춘 그의 대답에 황제의 얼굴이 짜증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답지 않게 헛소리꾼 노릇이나 할 참이면 물러가게. 경(卿)이 굳이 어지럽히지 않아도 짐의 속내는 이미 엉망진창이니.”
“일부러 어심을 어지럽히려 들었다니요. 아니옵니다. 신이 만일 그런 오해를 사도록 행동했다면 지금 당장 폐하의 발밑에 몸을 던져 용서를 구해야 할,”
“짐은!” 황제의 목소리가 낮아지는 동시에 무섭도록 날카로워졌다. “아니, 나는 그대가 이리 행동하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어.”
그 속삭임에, 남자, 서엽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당최 무엇이 모자란 게야? 그대가 원하는 대로 되었지 않은가, 아니, 그리될 참이지 않은가. 그대의 애자(愛子)가 곧 정당한 천자가 될 테고, 그리되면 이 나라가 그대의 것이야. 그 모든 일은 한 치의 어그러짐도 없이 이루어질 것인데, 어찌 이리 안달하는가?”
“안달하다니요, 잘못 보셨나이다.”
“그대인가?”
갑자기 황제가 화제를 돌렸다. 서엽은 황제의 그 물음에 대꾸하는 대신 한 쪽 눈만 조금 크게 떴다. 황제는 몸을 서엽을 향해 약간 비틀었다. 몸을 비튼 탓에 옥 같은 얼굴에는 다소간의 그늘이 졌다. 저 그늘 탓인가, 생각했다가 서엽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드리운 그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 자체가 차고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마도 황제 자신조차도 자신의 시선이 그렇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서엽의 입술에 비틀린 웃음이 걸렸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그 일.”
“그리 물으신다면, 신은 황상께서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조차 모르겠다, 그리 답해야 하는 것이옵니까?”
“그 아이는 개의치 말아. 아무 연관도 없는 이가 아닌가.”
서엽이 빙그레 두 눈을 휘며 웃었다.
“일황자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신이 더 심술이 나지 않겠습니까.”
“헌의공···!”
“허나 일황자께서는 그 아이보다 먼저 신경 쓰셔야 할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서엽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전정으로 돌렸다. 막 환악원 악사들의 연주와 무동들의 춤이 막바지로 향해가고 있었다. 끝을 모르고 커져가기만 하던 북소리가 점점 잦아든다 싶더니, 끼이이이-, 작은 짐승이 구슬프게 우는 것 같은 소리가 길게 끌렸다. 빙글빙글빙글 돌며 춤추던 무동과 여악들의 움직임이 차차 느려졌다. 그네들을 응시하고 있는 서엽의 주의를 끌기 위해 ‘무슨 뜻인가.’하며 황제가 묻자, 웃음기마저 서린 서엽의 목소리가 그 답으로 떨어졌다.
“곧 본 연회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 화공예 말이옵니다.”
헌데, 하며 서엽이 비로소 황제 쪽을 돌아보았다.
“폐하의 예인은 어디에 있사옵니까?”
“무슨.” 황제의 낯빛이 달라졌다. 저절로 말이 빨라졌다. “무슨 말인가. 짐의 예인이라면 다른 예인들과 마찬가지로.”
“없었사옵니다.”
난감한 듯 가장한 얼굴로 서엽이 지껄였다. 뭐라고? 황망해진 황제가 거의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황제의 목소리와 또렷이 대비되는 침착한 목소리로 서엽이 설명을 덧붙였다.
“신이 황상께 잔을 올리기 직전에 잠시 그들을 찾았었는데, 모여 있는 예인들 모두가 허둥지둥하며 누군가를 찾고 있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황상의 예인이 사라졌었다 대답하였습니다.”
폐하께오서는 그 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하며 웃는 서엽을 황제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